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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야구에 빠진 ‘정치1번지’ 워싱턴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야구에 빠진 ‘정치1번지’ 워싱턴

    |워싱턴 이도운특파원|14일(현지시간) 밤 9시40분. 미국 워싱턴 시내 남쪽의 RFK(로버트 케네디)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4만 2829명의 야구팬들은 서로 경이에 찬 눈빛을 교환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워싱턴 시내에는 세상이 뒤집어질 듯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과 비는 오후 6시가 넘도록 그치지 않아 7시로 예정됐던 워싱턴 내셔널스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는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야구팬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켰고, 새벽까지 이어진 게임이 끝날 때까지 양팀 선수들에게 뜨거운 환호와 응원을 보내며 대부분 자리를 지켰다. 내셔널스 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날 밤의 감격을 기록한 팬들의 글이 15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론이란 이름의 내셔널스 팬은 “2시간30분을 넘게 기다리며 온몸이 젖어버렸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매 분마다 기다린 보람을 느꼈다.”고 적었다. ●“야구는 가족 사랑이다” 15일 낮 가족과 함께 RFK스타디움을 찾은 톰 타이는 “야구는 가족 행사”라면서 “온 가족이 함께 나와 내셔널스를 응원하는 것은 정말 흥겨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첨단기술 업체인 마인드시프트에서 근무하는 톰은 해외 근무를 마치고 최근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올해 메이저리그 야구팀이 35년 만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것은 그에게는 너무 큰 ‘귀향 선물’이었다고 한다. 톰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내셔널스 팀의 시즌 티켓(1년 동안 모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다.6가족이 10∼12경기 정도씩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톰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야구팬이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야구장을 다니며 컸다.”라면서 “큰 아들 에단(5)이 축구와 야구를 배우고 있지만 나를 닮아 야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 리암(3)은 너무 어려 야구장에 오면 먹는 즐거움에 더 빠진다고 했다. 톰이 에단과 리암을 돌보는 사이 부인은 계속 매점을 오가며 팝콘과 핫도그, 아이스크림 등 가족이 먹을 음식을 날랐다. ●“야구는 데이트다” RFK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만난 조시 크레폰과 페이지 매컬리는 이날 야구를 보며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웹 콘텐츠 매니저인 크레폰은 지난해까지 보스턴 레드삭스 팬이었지만 올해 몬트리올 엑스포스팀이 워싱턴으로 옮겨오면서 응원팀을 바꿨다. 스스로를 ‘야구광’이라고 지칭한 크레폰은 김병현과 박찬호, 최희섭의 근황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크레폰은 역시 야구를 좋아하지만 룰에는 익숙지 않은 매컬리에게 ‘지명타자’(투수 대신 공격하는 타자)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준 뒤 “내년 3월에 미국·한국·일본·도미니카공화국·푸에르토리코 등이 참가하는 야구 월드컵이 열리게 되면 지명타자를 쓰는 아메리칸 리그 규정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까지 했다. ●“야구는 형제간의 우애다” RFK스타디움은 내셔널스의 홈 구장이지만 15일 맞붙은 시카고 컵스의 팬들도 적지 않게 몰려들었다. 내셔널스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 사이로 컵스의 파란 모자가 3분의1은 돼 보였다. 동생 크리스와 함께 3루측 상단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댄 포스나트는 “워싱턴에서 일하고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컵스 팬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컵스를 응원한다.”고 말했다. 크리스는 “컵스와 레드삭스 팬들은 팀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커서 절대 응원하는 팀을 바꾸지 않는다.”면서 “아마 두 도시의 야구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밤에도 야구장에서 비를 맞으며 끝까지 경기를 봤다는 댄은 “멋진 시간이었으며, 내셔널스의 팬들도 컵스 팬 못지않게 충성심이 대단해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야구는 동료애다” 이날 경기가 끝난 뒤에도 1층 응원석 상단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남성 1명과 여성 3명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평화군의 충원 및 배치 담당 부서에 근무하는 직장동료들. 청일점인 로버트 스컬스는 “휴일을 맞아 야구를 보며 동료간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소개했다. 야구장을 찾는 이유에 대해 미첼 기셀리는 “TV에서는 느낄 수 없는 팬들간의 상호교감이 느껴지지 않느냐.”면서 “그런 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신디 스트레브는 “TV로는 야구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일하는 페이지 존슨은 “사람들 속에 묻혀 흥분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야구장 분위기를 예찬했다. ●“야구는 직업이다” 버지니아주 헌든중학교 야구 선수인 매튜 라인은 어머니 파멜라, 친구 드루 심슨과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이 날은 헌든 지역의 리틀 리그 선수 1000명이 단체로 관람을 왔다고 한다. 포수인 매튜는 “앞으로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좋아하는 선수는 신시내티 레즈의 켄 그리피 주니어. 유격수를 맡고 있는 드루도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일주일에 6∼7일을 연습한다고 말했다. ●내셔널스, 어린이 홈베이스 돌기 서비스 오후 1시에 시작한 야구 경기는 4시쯤 끝났지만 관람객들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수들의 경기가 끝나면 팬을 위한 서비스가 이어진다. 내셔널스는 낮 경기가 끝나면 야구장을 찾은 어린이들이 1루,2루,3루를 거쳐 홈베이스까지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걷기 어려운 어린이들은 부모가 안고 돌아도 된다. 왼손으로는 큰딸 에마(4)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작은딸 올리비아를 안은 채 내야를 한 바퀴 뛴 매트 호트는 “에마의 생일을 기념해 함께 달렸다.”면서 대견스러워했다. 미국의 프로야구가 어린이들에게 서비스를 집중하는 것은 부모들이 원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어린이들이 장래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경기 중 파울이 난 공을 볼보이가 잡으면 꼭 관중석의 어린이에게 주는 것도 같은 이유다. dawn@seoul.co.kr ● 부시, 리틀리그 출신 첫 대통령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정치와 외교가 주력산업인 워싱턴에서는 야구도 정치의 도구가 되곤 한다. 워싱턴에서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대표적인 야구 마니아다. 부시 대통령은 리틀 리그 출신의 첫 대통령이며, 지금까지 250개의 ‘사인 볼’을 수집했다고 한다. 부시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영에 참여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부시 대통령은 최근에도 야구 경기를 TV로 관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들이 “야구를 보느냐.”고 묻자 “텍사스 경기를 봤다.”면서 “박찬호가 잘 던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정치 상황을 야구에 빗대 표현하곤 한다.“도널드 럼즈펠드(국방장관)식 야구가 있다. 좀 성마르지만, 뭘 하고 있는가는 정확히 안다.”라고 럼즈펠드 장관을 편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부시 대통령의 ‘야구 어록’을 소개하는 웹 사이트도 생겼다. 부시 대통령의 비유 대상이 됐던 럼즈펠드 장관 본인도 야구를 화두로 사용하곤 한다. 일리노이 출신인 럼즈펠드 장관은 시카고 컵스 팬이다. 그는 이라크전과 관련한 기자들의 날카로운 추궁이 쏟아지면 “그런 질문은 컵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느냐 여부보다도 덜 중요한 것들”이라고 받아넘기곤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야구가 아니라 미식축구 팬이다. 한때 미식축구리그(NFL) 위원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또 최근까지 미식축구 선수 출신과 데이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대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스턴 레드삭스 팬. 보스턴 출신인 힐 차관보는 최근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가 레드삭스 전에 등판하는 날 “살살 던져 달라.”고 애교있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힐 차관보는 지난 주말 LG트윈스 잠실 홈경기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힐 차관보의 바로 다음 자리인 에번스 리비어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레드삭스와 앙숙인 뉴욕 양키스 팬이다. 이 때문에 힐 차관보와 리비어 부차관보의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온다. 워싱턴에서 야구를 둘러싸고 진짜 ‘정치적 세대결’이 벌어진 것은 지난 4월15일의 내셔널스 개막전 입장권 확보전이었다. 당시 공식적인 입장권의 가격은 자리에 따라 750달러(75만원)까지 책정됐고, 암표는 1000달러가 넘게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요인들과 상·하원 의원 등 워싱턴의 실세들이 개막전 입장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dawn@seoul.co.kr
  • ‘칩거’ 안희정씨 직격 인터뷰

    ‘칩거’ 안희정씨 직격 인터뷰

    “아버지 세대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덕분에 우리는 낮은 수준이지만 이웃과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생계의 시대가 아닌 가치의 시대가 온 것이다.” 참여정부 탄생의 주역, 노무현 대통령의 386 최측근,‘좌(左)희정 우(右)광재’로 대표되던 안희정(40) 전 새천년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최근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귀띔했다.“인간적·시민사회적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경제 발전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의 숙제”라는 부연설명과 함께였다. 그는 “인간의 역사가 승자독식의 적자생존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공동체적 삶과 민주주의적 가치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싶은 심산인 듯했다. ●“공동체적 삶 속 경제발전 이뤄야” 지난 4월 최장집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에 객원연구원으로 등록한 안씨는 아직 ‘칩거’ 중이다. 하지만 참여정부 창업공신이자, 단짝이던 이광재 의원이 ‘유전게이트’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면서 안 전 부소장의 근황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 그래서 약속을 잡지도 않고 무작정 고려대로 간 지난 4일, 허탕을 치고 돌아오려는 길에 짙은 감색 점퍼에 노트북 가방을 맨 채 교정을 바쁘게 걸어가는 그와 마주쳤다. 그는 “찾아온 손님이니까 반갑게 맞겠지만, 인터뷰는 응하지 않겠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지난 9일 다시 조교실로 찾아갔을 때도 그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을 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거듭 자신에 대한 ‘무관심’을 부탁했다. ●내 앞의 도랑을 뛰어넘어야… 안씨에 대한 세인들의 주된 관심은 ‘정치권 복귀’ 문제다. 현재 그는 공무담임권이 제한돼 있다. 그러나 ‘8·15광복절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도 그에겐 부담이다. 그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상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지난해 12월13일 형기 만료로 출소했다. 그는 “궁수가 과녁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누르고 과녁을 맞힐 수 있는 것은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나도 사람인데 활시위를 들면 가슴이 떨리지 않겠나. 그 떨림을 누르고 제대로 시위를 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민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이런 알듯 모를 듯한 비유도 했다.“가수가 앨범 2∼3장 내놓은 뒤 시장에서 반응이 없으면, 그 다음엔 기획자로 얼른 돌아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정치인·경제인들이 위기를 극복할 때 국민들이 박수를 치는 것은 그의 용기와 능력이 시대정신과 맞닿아 공명하기 때문”이라면서 “내 앞에 깊고 넓은 도랑이 놓여 있고, 언젠가는 그 도랑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나 도랑을 내가 뛰어넘는다고 과연 국민들이 박수를 쳐줄까.” 하고 자문자답하기도 했다.1년의 감옥살이 이후 줄곧 그를 괴롭히는 ‘화두’인 셈이다. 89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시작해 16년간 정치권에서 활동했던 그는 학교로 돌아가 일주일에 3일 공부를 한다. ●“정책중심의 노무현식 정치 확산” 여의도 밖으로 나온 그에게 정치권은 어떻게 보일까. 그는 여의도의 정치를 “‘관계의 정치’‘조선시대식 정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한 뒤 “한국은행권이 유통돼야 하는 21세기에 조선의 상평통보가 유통돼서야 되겠느냐.”며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즉 “정치인들이 관계 속에서 안주한 과거의 방식에서 정책과 이슈를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전화를 할 것인가, 책을 읽을 것인가 사이에서 갈등”에 비유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소개했다.90년대 당시 노무현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할 때 ‘현실이냐, 정책이냐.’에 대한 갈등이 많았단다. 후원회가 끝나고 나면 보좌관들은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시라.”라면서 두툼한 후원인 명단을 전달했다. 노 대통령은 “나는 여러분이 써준 보고서나 책을 읽을까 생각했다.”며 “꼭 전화를 해야 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는 노 대통령의 집권 이후로 정책·이슈 중심으로 점차 전환되는 ‘노무현식 정치’가 확산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 정책과 이슈는 또한 민심(民心)을 살피는 가운데 나올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안씨는 “2005년 ‘한국호’는 돛대가 부러질 만큼 거세게 부는 개혁의 바람을 받으면서 전환기를 건너가려 하고 있다.”면서 “거친 물살을 돌파하려면 노젓는 힘에 달려 있는데, 그 힘은 정책과 이슈를 중심으로 정치권과 국민들이 똘똘 뭉친 ‘세력’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정책·이슈 중심으로 정치 행위가 이뤄질 때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인간적인 결함·실수에 대해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고도 했다. 무대 위에서 가창력 뛰어난 가수가 무대 밖에서 성격 좋은 가수보다는 더 사랑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빌딩’을 세울 것인가 참여정부에 대해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한 최초의 정부”라고 주장하면서 “기초공사가 거의 끝났지만, 그 위에 어떤 빌딩을 세우냐는 것은 다음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 빌딩이 어떤 크기,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정치권은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려고 했는가, 민주화된 한국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답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권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60년대 일본 학생운동권인 전공투(전학공투회의)가 72년 지방선거에서 ‘환경과 복지’를 내세워 의석의 40%를 장악하는 등 전면에 나섰지만, 중앙정치의 세력으로 떠오르지 못해 70년대 말 기성 정당에 모두 흡수돼 버렸던 역사를 환기시켰다. 한국의 개혁세력은 ‘다행히’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자신들의 뜻을 정책을 통해 축적해온 만큼 새로운 방향,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그 전제가 맞다면)그래서 차기 정권도 개혁세력의 정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 출범에 큰 기여를 한 그의 이같은 주장이 적중할지, 아니면 희망사항에 불과한지는 현재로선 누구도 예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무엇을 위한 효율성인가가 무시된 채 오로지 효율성·경제성만 강조되는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은 현시점에서도 분명하게 읽혀졌다. 그는 “가치있는 분야라고 해도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분야는 없애 버리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꼭 옳은 방향이냐.”고 반문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마니아] 그들은 ‘늙음’을 불사른다

    [마니아] 그들은 ‘늙음’을 불사른다

    “나이가 들면 키가 오히려 줄어들어요. 공 던지고 나면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가기도 하고…. 하지만 야구에 미쳐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버이날인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할아버지 투수’ 장기원(75)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야구 사랑을 노래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슬로건 아래 50세 이상으로 똘똘 뭉친 노노(No老·늙지 않는다는 뜻) 야구단의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다. 노인 야구단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야구단에서는 막내가 56세인 주광수(2루수)씨로, 평균 연령이 60세를 훌쩍 넘겼다. 선수들은 저마다 의욕이 넘친다. 40대만 돼도 ‘할아버지 선수’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놀랄 만하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하기야 팀을 소개하는 노노 야구단 타이틀부터가 이를 잘 말해준다.“늙은이들이 주책이라는 소리도 듣지요.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칩니다.” ●운동 버릇만은 ‘청년’ 장씨는 “야구가 좋아 일제 때부터 유니폼을 입었는데, 인연을 끊은 뒤 40여년이 지나 다시 뛰게 돼 젊음을 되찾은 기분”이라면서 “아들 둘 가운데 한 명은 직업군인, 또 한 명은 목회자여서 야구를 할 기회는 없다.”고 웃는다. 얼핏 자녀들이 동참하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마저 느껴지는 그의 얼굴에 야구 사랑이 묻어나는 듯했다. “어르신, 연세에 비해 아주 건강해 보이십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장씨는 손끝으로 안경을 밀어올리며 “지금도 군데군데 아파 병원 신세를 진다.”면서도 “그러나 100세든,90세든 (볼을)던질 수 있을 때까지는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부인(72)도 “우리 할아버지는 잘 하는 편”이라고 거들었다.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놓인 아령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평소 어떤 운동을 하시는지요.”라는 물음에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기에 나설 꿈도 꾸지 못한다.”고 맞받았다. 매일 한 시간 이상 스트레칭을 한단다. 틈만 나면 아령 5㎏짜리 2개로 근육을 다지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무엇보다 달리기는 기본이라고 덧붙였다. 집에서 가까운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돌아오는 5㎞코스를 매일 아침 뛰다가 최근 잠시 중단했다는 말로 얼마나 체력관리를 해오고 있는지를 그대로 내보였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최근 열린 프로야구 경기장면을 녹화해뒀던 비디오테이프에 눈길이 가고는 했다. 아마 손님을 두고 미안했던지 손녀를 돌보던 부인이 “텔레비전 끄고 얘기를 나눠야지, 나중에 봐도 되잖아요.”라고 핀잔(?)을 주자 실핏줄 굵은 손으로 리모컨을 눌렀다. 장씨는 1997년 3월 노노 야구단이 출범할 당시 엄연히 입단 테스트에 합격한 ‘원조 멤버’다. 광주시 광산동국민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광주공고를 졸업하던 1952년 한국전쟁에 징집돼 야구를 그만둔 지 45년만의 일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50세 이상 노인들만을 위한 야구단을 창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갔지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58년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은 장씨는 야구단이 있는 직장을 수소문했으나 접하기 힘들어 뜻을 접어야만 했다. 대신 조기축구로 몸을 다지다가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여기에다 박규채(67·김천대 방송연극영화과 초빙교수)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단장으로, 윤동균(56) 전 OB 베어스 감독과 최동원(47) 해설위원 등 내로라하는 스타 2명이 감독을 맡아 뛸 듯이 기뻤다. 초창기 동료 37명 가운데에는 장씨에게 인생선배인 선수도 2명이나 있었다. 그 무렵 장씨는 67세였는데 좌익수를 맡은 배용해(2003년 작고), 우익수 홍재룡(이상 당시 73세) 회원이 형뻘이었다. 지난해 들어서는 홍씨도 노노 야구단을 떠나 장씨는 이제 최고령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노노 야구단은 젊은이들에 뒤지지 않는 노익장을 뽐낸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때 회원이 45명으로 불어났다가 지금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20명에 지나지 않아 정비작업 중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요 장씨는 어린이 날인 지난 5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지하철 지축기지 쪽에 있는 구장에서 ‘피플’을 맞아 6회를 마무리짓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원진리그 AAA리그 소속인 팀은 1대5로 쓴맛을 봤다. 올 시즌 승리는 없고 4연속 패배의 성적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인 야구라고는 해도 갈수록 기량이 쑥쑥 성장하는 20∼30대와 붙어 어쩔 수 없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하기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해마다 반타작, 최소한 5∼6승씩은 건졌는데….”라면서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는데, 아마추어는 실수 몇 차례로 죽을 쑤는 법”이라고 입맛을 다셨다.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뒷받침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번엔 “그럴 때면 후배들이 야속하겠습니다.”라고 되물었다. 장씨는 “솔직히 져서 좋은 사람은 없지만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라고 거듭 말했다. 타자 10명 가운데 1∼2명쯤은 삼진으로 돌려세운다는 그는 즐겨 사용하는 무기로 홈플레이트 앞에서 구부러져 들어가는 슬라이드를 들었다. 장씨는 “팀이 승리할 때의 기쁨은 더할 나위도 없지만 투수 입장에서 개인적으로는, 삼진을 낚았을 때의 기분을 마운드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라며 활짝 웃어보였다. ●즐기는 야구, 재미 백배 고교시절 키가 162㎝로 장신 축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보통은 넘었다는 장씨는 얼마 전 160㎝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팀에서 뛰다가 5년 전 회원으로 가입한 고인환(57) 감독은 “선배님은 전체 경기의 40∼50%를 책임진다.”면서 “팀은 내리막길을 걷더라도 ‘오기 때문인지 갈수록 힘이 생긴다.’고 얘기하는 데 후배들이 깜짝 놀라고 있다.”고 알려줬다.”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덧붙였다. 일화도 들려줬다. 한창 이기고 있는데, 교체한 선수 때문에 무릎을 꿇는 일이 이따금 나온단다. 어차피 회비를 거둬 팀을 운영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회원 모두에게 뛸 기회를 줘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료들이 거세게 항의해왔다. 그런 경우가 생길 때마다 “운동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인데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운동하자.”며 설득했으며, 노노 야구단 최고의 보람도 바로 이런 점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고 감독은 이어 “장 선배님 역시 아직도 기량이 녹슬기는 고사하고, 날로 힘이 솟아난다고 한 데에는 워낙 야구를 즐기기 때문 아니겠느냐.”면서 “선수들이 비가 쏟아져도 웬만하면 경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등 잘 따라줘 고맙다.”고 말했다. ●일본도 무섭지 않은데… 장씨는 98년 6월19일 노노 야구단이 제주시 연동 신제주초등학교에서 열린 일본 실버팀과 친선경기 때로 옛날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양국 친선을 넓힌다는 취지에서 일본 아오모리(靑森) 히로카(弘前) ‘UFO 야구단’과 맞붙었다.77년 창단돼 노노 야구단으로서는 20년 선배인 UFO는 60세 이상 60여명으로 이뤄져 일본에서는 꽤 관록이 있는 팀이었다. 비록 친선경기이지만 노노는 10대 22로 매운맛을 봤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일본 UFO의 2루수 오무라 시로(大村耐郞·68)씨와 아직도 근황이 담긴 편지를 주고받게 됐다고 장씨는 말했다. 노노 야구단에서 선·후배로 운동을 통해 화목을 다졌던 고 배용해 회원과의 잊지 못할 인연도 있다. 일본 와세다대 출신이었던 배씨의 선배로 역시 야구를 통해 사귀었던 실버팀 지바(千葉) 마린스(Marines)의 곤도 에이지(近藤榮治·83)씨도 영원한 ‘야구 친구’로 남았다. 외국관광 등으로 만나 회포를 푼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엔 장씨가 초청을 받아 일본 지바를 방문했다. 마린스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체 청백전에서 3회를 던졌는데, 자못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기자 양반, 내 얘기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노노 야구단에 대해 잘 홍보해 나이 많다고 주저앉은 이들이 팀에 들어오도록 해주면 좋겠습니다.”장씨는 이웃나라인 일본만 해도 실버팀이 150개나 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인 야구단 더 나와야 ‘50세 이상으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쌍수를 들어 환영’이라는 말도 되풀이했다. 그것도 50세 이상,60세 이상,70세 이상으로 나누어 리그를 벌이는 정도라고 귀띔했다. 우리나라 입장으로는 일본과 비교가 되지 않는 저변이라는 설명이다. “그나마 국내에서는 유일한 팀마저 사그라지는 현실”이라고 안타까운 나머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고인환 감독은 “2003년 7월 강원도 속초에서 지바 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뒤 올해 세번째로 한·일전을 가지려 했으나 독도 영유권 문제가 터지는 통에 무산된 것은 또 한가지 아쉬운 대목”이라고 한수 거들었다. 장씨는 실버팀 창단이 이른 시일 안에 성사되기는 쉽지 않다는 현실 때문에 다른 대안도 내놓았다. “여성으로만 이뤄진 비밀리에(감독 안향미), 피치스(감독 정혜림) 등 이색 팀과의 경기는 하나의 이벤트로도 썩 괜찮은 작품이 될 것입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발언대] 60년 경찰에 맞는 옷을…/김동자 경찰청윤리계장

    라일락 향기가 향수보다도 좋게 내 코를 스치는 아침이다. 엊그제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다 왔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야 짭새 나타났다.’하며 반가워들 한다. 사실 초등 동창모임은 30년이 지난 중년이 되어서야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엔 여간 어색하지가 않았다. 자기 소개들을 하는데 불현듯 나는 ‘짭새’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나 짭새야.’ 라고 소개하는 순간 얼마나 키득거리는지…. 쉬쉬하며 쓰던 ‘대명사’를 당사자가 직접 인용을 하니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두가 거리낌없이 나를 짭새라고 부른다. 비하의 뜻이 전혀 담기지 않은 애칭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한참 오고간 뒤에 짭새 근황은 어떠냐고 누가 물어온다. 이때다 싶어 침을 튀겨가며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 이야기를 시작했다. 힘들게 설명했더니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그래도 수사에 있어서는 검찰이 형이고 경찰은 동생 아니니? 형만한 아우 없다고 아무래도 형이 낫지 않겠니?” 하는 거였다. 집에서 살림하는 동창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애 키우는 이야기를 했다.6살 짜리한테 7살이 할 수 있는 일,8살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시켜보자. 처음엔 어려워 할지 몰라도 점차 7∼8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게 된다. 마냥 못 미덥다고 맡기지 못한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손해다. 처음엔 좀 크다 싶은 옷을 입혀야 자라면서 알맞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들한테 설명하려다 보니 궁박한 설명이 됐다. 혹여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임상실험’ 운운한다면 그 또한 속좁은 사람일 것이다. 순경으로 들어와서 올해로 23년째가 된다.15∼16년전 내가 수사과 서무업무를 담당할 때만도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나올 때면 수사과장 이하 전직원이 현관 앞에 도열했었다. 이제 그런 모습은 옛날 이야기가 됐다. 모든 게 변하고 있다. 광복과 더불어 창설된 우리 경찰이 올해로 60주년을 맞는다. 성숙한 국민에게 성숙한 치안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맞는 옷을 입혀주기를 간절히 기대해 보는 아침이다. 김동자 경찰청윤리계장
  • [어떻게 지내세요] 로터리클럽·대학서 민주주의 강의 김동길 명예교수

    [어떻게 지내세요] 로터리클럽·대학서 민주주의 강의 김동길 명예교수

    “이게 뭡네까. 다들 꿈이 없어요. 한국은 21세기 태평양시대를 주도하는 역사의 주인이 돼야 해요.” 김동길(78) 연세대 명예교수.‘이게 뭡네까.’라는 유행어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최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논란과 관련, 자신의 홈페이지에 “출세할 욕심 때문에 자기 딸의 어머니를 구박에 구박을 거듭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노벨 평화상 받을 자격이 없다.”는 글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책이 가득찬 서재였다.“58년 동안 이 집에 살면서 책밖에 남은 것이 없다. 국회 도서관에도 기증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2만권쯤 남아 있다.”고 했다. 근황을 묻자 “각 지역 로터리클럽이나 전국의 특수대학에서 역사에 관한 것,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의 요청이 쇄도한다.”고 했다. 이어 10여년째 이끌어오는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이사장)에 대해 언급했다.“민주주의의 수준을 높이는 역할”이라고 전제한 뒤,“앞으로 태평양시대는 민족적 기질로 봤을 때 결코 일본과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의 도덕적 수준을 현재보다 한차원 높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거짓말을 안하고 남을 생각하는 자비와 사랑의 운동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는 것. 또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의 생산성이 높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유태인의 킬러는 한국인”이라고 비유한 뒤 “그러나 한국인은 잘못된 환경에서 자랐다. 역사적으로 볼 때 훌륭한 사람들은 온갖 중상모략으로 실력발휘를 못했다.”고 지적했다.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도 무수한 중상모략으로 백의종군했고, 젊은 나이에 과거급제한 고산 윤선도 역시 중상모략을 견디다 못해 은둔생활로 아까운 재능이 묻혔다고 했다. 윤선도의 ‘오우가’ 중 한 구절을 즉석에서 읊었다.‘꽃은 무슨 까닭에 피면서 쉬 지고/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 빛을 띠는가/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한국인은 개인적으로 보면 세계 제일의 훌륭한 오케스트라 단원이에요. 그런데 지휘자가 돼먹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좋은 교향곡이 안 나오지요. 일본은 미국이라는 ‘백’이 있어 설칩니다. 한국은 뭡네까. 코드가 맞는 사람만 찾으면 그게 민주주의입니까. 그래서 유능한 사람이 못나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전통처럼 돼 버렸어요.” 종교심이 없는 일본이나 뿌리깊은 권위주의로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중국은 결코 민주주의가 이룩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은 문화적 전통이 우수하기 때문에 21세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는 곧 한국인의 희망이란다. 따라서 오늘날의 리더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건강유지에 대해 “안타깝게도 치매에 걸린 친구도 몇명 있지만 정신이 말짱하기 때문에 쓴소리도 자주 하고 있다.”면서 부양가족도 없고 이렇게 홀몸이니 무엇이 두려워 비판을 못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중근 의사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을 인용했다. 눈앞에 이익이 보일 때 의리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쳐라. 또 수영과 아침산책을 자주 하지만 아직도 사명감이 있어 건강하게 지낸단다. “살면서 남기긴 뭘 남겨요. 올바르게 살다가 그냥 가면 되는 거지. 한 노인(자신을 뜻함)이 일제때 태어나 광복의 감격을 맛보았고 분단이란 고생속에 월남-6·25전쟁-군사정권을 겪으면서 오늘까지 살았어요. 길거리에 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석양의 시간에 홀로 서서 보니 인생 아까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노자는 ‘도덕경’ 하나를 남겼지만 (자신이 쓴)80여권의 책이 무슨 소용이 있습네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 두 가지, 즉 ‘나는 꿈이 있다.’‘인생은 괴로우나 아름다운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훈장 변신 ‘배추머리’ 개그맨 김병조씨

    누군가 그랬다.‘어느날 눈을 떠보니 세상에 내던져졌고, 살아가는 매뉴얼은 보이지 않았다.’고 투정을 부렸다. 인생의 매뉴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무미건조? 허망? 수많은 오류와 잘못을 과연 피해나갈 수 있을까. 문득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명심보감,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다. 중국의 경전 사서 문집류 등에서 좌우명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처세훈을 추려 놓았다.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음의 수양서로 여전히 으뜸이다. 한 코미디언이 있었다.‘지구를 떠나거라∼’‘나가 놀아라∼’로 전국민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밑빠진 항아리는 막을 수 있어도 코밑의 입은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거침이 없었다. 뱉어내는 얘기마다 배꼽을 겨냥하면서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주변에서는 ‘배추머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떠나거라’를 실천하듯 코미디계를 훌쩍 떠나버렸다. 왜그랬을까. 알고 보니 어엿한 훈장이 됐다.‘명심보감’이라는 간단치 않은 등짐을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주 탐라대서 강원 한림대까지 서울 마포에 위치한 불교방송국 건물 17층에서 그를 만났다. 순간 ‘앗’하는 놀라움을 느꼈다. 왕년의 ‘배추머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말쑥한 머리모양에 전통한복 차림이 왠지 낯설어보였다. 하지만 특유의 큰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근황부터 들었다. 우선 매주 수요일이면 광주에 내려간다. 조선대학 초빙교수 자격이다. 오전에는 평생교육원(3시간)에서, 오후에는 학부(4시간)에서 강의를 한다. 학생수만 6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월·금요일에는 불교방송(BBS) 라디오 프로그램 ‘다시 듣고 싶은 노래’의 진행을 맡고 있다. 화·목요일에는 중앙부처 기업체 대학 등에서 명심보감을 강의한다. 이날도 서울 구로구청 관내 통·반장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했단다. 강연을 들은 구민들은 감동을 받아서인지 관내 고등학교에서도 강의를 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자랑했다. “제주 탐라대에서 강원도 한림대까지 정신없이 다닙니다. 코미디언으로 방송했을 때보다 더 살맛이 나요. 어려움을 통해 얻은 지혜도 있지만 옛 어른들의 밥상머리 교육을 생각해 보세요. 전통이 단절됐습니다. 이어야 하지요.” 김씨의 목소리는 높아진다.“부모가 자식에게 교육을 시키려면 부모 자신이 엄한 자세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밤 9시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밤 12시에 귀가한 아들·딸을 혼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엄격해야 집안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심보감의 참뜻은 ‘니나 잘해.’라며 껄껄 웃는다. ●한학자 선친 뒤이은게 큰보람 또 “부모는 자식을 잠자리에 재워놓고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서 이불을 덮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한다. 김씨는 결혼 후 10년 동안 아버지의 빚을 갚아드렸다고 말꼬리를 흐린다. 논 네마지기로 입에 풀칠하며 여기저기 빚을 얻어가며 자식 5남매를 키워낸 아버지, 그러면서도 자식들한테는 매우 엄하게 대했던 아버지의 진심을 돌아가신 다음에야 알았다며 창밖을 응시한다. “코미디언인 제가 명심보감을 강의한다고 하자 처음에는 ‘웃기고 있네.’하면서 놀리더군요. 그러나 강의를 듣고 나서는 ‘울리고 있네.’라고 합디다. 저는 그래요. 중간고사같은 거 안봐요. 대신 학생들에게 아버지한테 양말 사다드리라고 숙제를 줍니다. 효도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지요.” 김씨가 명심보감 전도사로 나선 것은 방송활동을 중단한 1998년부터. 그는 어릴 때부터 두가지의 꿈이 있었다. 첫번째는 세상만사 영원이란 없다는 말을 늘 떠올리면서 인기가 쇠약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특히 방송계는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라 더욱 절실했다. 그래서 한학자였던 선친의 뒤를 이어 훈장이 되고자 했다. 두번째는 고향(전남 장성)에서 방송활동을 해보는 것. 다행히 지인을 통해 지난 97년 지역방송인 광주방송(KBC)에서 ‘열창무대’라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이때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연극과 영화, 한국 코디미사 등에 대해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처용가도 코미디요 판소리도 코미디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선뜻 승낙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황금 만냥이 있다한들 자식 하나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났다. 대학측과 논의 끝에 ‘명심보감’으로 주제를 바꿨다. 김씨는 75년 MBC-TV ‘뽀뽀뽀’로 데뷔했지만 ‘일요일밤에 대행진’ 등을 맡으면서 평소 갈고 닦은 ‘명심보감’을 자주 인용했다. 유행어 ‘지구를 떠나거라∼’‘나가 놀아라∼’도 여기에서 얻은 아이디어라고 고백했다. 코미디계를 떠난 그의 강의솜씨는 어느 정도일까. 한 예가 있다. 하루는 조선대에서 강의하던 중 이공대 김모 교수가 수강을 했다는 것. 그래서 ‘교수님 왜 그러십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김 교수는 ‘(김씨의)강의평가가 최고로 나왔는데 한 수 배우려고요.’라고 대답했다. ●명심보감 1인자 되고 싶어 “마음의 부자가 진짜 행복입니다. 옛날 ‘뽀뽀뽀’를 보던 학생들이 오늘날 제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들 하더군요. 다시 부자가 됐습니다.” 그는 스스로 짠돌이라고 한다. 저축 잘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한문공부를 많이 한다는 세가지 연유로 명심보감을 강의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학자인 아버지와 행상을 하는 어머니 슬하에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히 7대장손이어서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별명은 ‘움직이는 옥편’일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덕분에 김씨는 초등학교때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접했다. 붓글씨도 함께 연마했다. 족보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기억력이 뛰어나 집안에서는 천재소리를 들으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집이 가난해 광주고에 진학하면서 육군사관학교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성균관대 유학과를 생각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웃기는 일을 워낙 잘해 담임선생 등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연극영화과를 권했다. 결국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방향을 바꿔 코미디언으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부인 얘기가 나오자 “목포교대를 나왔다.”면서 “빚도 많고 형제도 많은 장손 집안의 장남을 선뜻 택해준 아내가 늘 고맙다.”고 했다. 부인은 여러번 중매를 봤지만 김씨의 솔직한 자세에 반려자로 택했단다.1978년 70만원 월셋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200만원 지하 전셋방을 거쳐 결혼 5년 만에 세를 떠안고 2300만원짜리 집을 장만했다. 이후 부모가 진 빚을 다 갚은 뒤 84년 고향에 스물네마지기 논을 사서 부모한테 효도선물로 드렸다. 부친은 88년 작고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논두렁을 걸어다닐 정도로 무척 좋아했다. 또한 서울로 떠난 아들에게 ‘자가용을 타고 오기 전까지는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는 약속도 지켰다. 모친은 현재 82세로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함께 살고 있다. “명심보감의 1인자가 되고 싶습니다. 옛것들이 다 버려지고 있습니다. 전통의 아름다움을 누군가는 반드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김병조의 명심보감’이라는 책을 펴내기 위해 5년전부터 틈틈이 원고정리를 해왔다.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술과 담배를 전혀 안하는 그는 요즘 걷기와 등산으로 건강을 다진다. 명심보감 한 구절을 들려준다.‘글을 읽는 것은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요, 도리를 따르는 것은 집안을 보존하는 근본이다. 근검은 집안을 다스리고, 온화는 집안을 정제하는 근본이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0년 4월 전남 장성 출생 ▲67년 광주고 졸업 ▲72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72∼75년 육군복무 ▲75년 MBC‘뽀뽀뽀’ 진행 ▲76∼96년 MBC‘일요일 일요일밤의 대행진’ ‘사랑의 공개홀’‘우리가락 한마당’‘세월따라 노래따라’‘김병조의 생활한자’ 진행 ▲96년 4월 SBS 코미디 전망대 진행.11월 MBC‘우정의 무대’ 진행. ▲98년∼현재 조선대 초빙교수 ▲상훈 전국대학생화술경연대회 최우수상(70년), 우리들의 스타상(코미디부문), 국무총리표창(저축유공·84년),MBC연기대상(코미디 개그부문,85·88년) ▲주요 작품 수필집 ‘종가집 배추’ 영화 ‘자기 난 이렇게 산다우’ 등
  • [어떻게 지내세요] 새음반·콘서트 준비하는 ‘빨간구두 아가씨’ 남일해

    “요즘 가요계는 과거와는 달리 매스컴이 여러 채널로 분산돼 있어 히트치기가 더 힘든 것 같아요.” 추억의 가수 남일해(본명 정태호)씨. 지난 1959년 데뷔해 ‘빨간구두 아가씨’‘이정표’‘첫사랑 마도로스’‘맨발로 뛰어라’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60년대 서태지’라고 할 만큼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남일해·박재란 쇼쇼쇼’라는 간판이 붙으면 항상 대박이 터질 정도였다. 신곡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들려 서울 송파구 삼전동의 사무실(남씨의 형이 운영하는 주식회사 춘산산업개발)에서 남씨를 만났다. 올해 나이를 묻는 질문에 그는 한사코 ‘60대중반’이라고만 해달라고 거듭 말했다. 근황을 물었더니 역시 신곡 준비에 전념하고 있단다.26번째 앨범이자 6년 만에 내놓는 신곡이라고 부연했다.3년 전에 ‘못다한 사랑’이라는 러시아풍의 곡을 잠시 내놓았으나 분위기가 안 맞아 일찍 접었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는 “제2의 가수생활을 하겠다는 각오로 이번에 신곡을 발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곡은 다음달 선보일 예정으로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녹음까지 마쳤다고 귀띔했다. 제목은 ‘외출가방’이며 탱고를 현대식으로 편곡했다고 덧붙였다. 신곡의 가사 한토막을 들려달라고 하자 얼른 노래를 불러준다.‘내 나이쯤 되뵈는 이름모를 사내가/통성명을 대신한 술잔을 넌지시 건네곤/첫사랑 이야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객쩍은 사설로 풀었다, 추억을 풀었다/사연 사연 그 사연 눈물이 나더라∼’(김병걸 작사·이동훈 작곡) 남씨는 신곡 발표 후 올 가을에는 콘서트까지 열 계획이라고 의욕적이다. 이를 위해 요즘 헬스클럽과 주말 등산을 통해 건강을 새롭게 다지고 있다. 술과 담배를 전혀 안 해서인지 50대의 나이로 보일 정도. 그의 부인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20년째 ‘산봉냉면’을 운영하고 했다. 남씨의 둘째아들 정지원(32)씨는 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아 현재 미국 시카고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 데뷔할 예정이다. 장윤정의 ‘어머나’와 같은 세미트로트 형식이 될 것이란다. 남씨는 최근 장윤정을 만난 자리에서 “트로트를 새삼 일깨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내년에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더욱 열심히 노래를 불러달라고 당부했단다. 그는 “프랭크 시내트라도 70세에 음반을 냈다.”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올드팬들을 위해 열심히 가요생활을 하겠다.”고 포부를 다졌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은퇴뒤 대학서 후배양성 힘쓰는 방송인 추성춘

    [어떻게 지내세요] 은퇴뒤 대학서 후배양성 힘쓰는 방송인 추성춘

    “정보화 시대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달인이 되고 있지요. 또한 언론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특히 대학교육과 언론현장의 괴리가 많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추성춘(60)씨. 딱딱한 뉴스와 해설을 정감있는 목소리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지난 1969년 서울MBC에 입사한 뒤 주일특파원과 외신부장 보도국장 해설위원 등을 거쳤고,2003년 7월 제주MBC사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요즘 그는 대학강의와 지방 초청강연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최근에는 전남대 문화예술대학에서 ‘언론과 문화예술의 비전’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이달에는 광주 주민자치대학 등 두세군데 강의가 예정돼 있다. 지난해에는 탐라대학 등 지방강연도 자주 다녔다. 근황을 묻자 “비상근 시간강사 신세”라며 웃었다.“강의 주제는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에 관한 것”이라면서 “정보화시대를 맞아 어떻게 하면 좋은 정보를 얻고 또 분석능력을 키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 다녀 보니 신문방송학과의 경우 여전히 언론현장과 동떨어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어 안타깝다.”면서 “미디어에 종사하려는 후배들을 보면서 반성도 하고 또 많은 도움을 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동시에 느낀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과거에는 언론이 정보전달의 독점적 도구가 됐으나 지금은 누구나 정보를 전달할 만큼 언론환경이 확 달라졌다.”면서 “국민의 시선에 맞추는 진정한 언론개혁이 필요한 때”라고 역설했다. 그는 강의활동 외에도 자신이 이사로 몸담고 있는 외교통상부 산하 아시아·태평양정책연구원에 틈틈이 나가 외교정책 싱크탱크 역할도 한다. 건강관리를 위해 북한산을 자주 찾는다. 가끔 지리산과 백운산 등 풍광이 좋은 지방으로 떠난다. 동행하는 지인에 대해 “하루에 직업이 다른 30명을 만나야 좋다는 미국의 한 심리학자 말처럼 여러사람이 어울려 다닌다.”면서 “최근에는 골프에도 재미가 붙었다.”고 했다. 여생을 새로운 시대의 저널리스트 양성을 위해 힘쓰겠다는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살려 미디어 관련 서적도 곧 발간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아울러 1년전 중앙대 객원교수로 발령받았지만 개인사정으로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나 오는 2학기부터는 열심히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목회자로 제2의 인생 ‘장미빛 스카프’ 윤항기

    [어떻게 지내세요] 목회자로 제2의 인생 ‘장미빛 스카프’ 윤항기

    “올 10월쯤이면 팬들과 잠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우이웃돕기 자선 음악회 형식의 콘서트를 준비 중입니다.” 목사가 된 가수 윤항기(63)씨. 그가 불렀거나 작사·작곡한 ‘장미빛 스카프’‘친구야 친구’‘여러분’‘나는 어떡하라구’‘별이 빛나는 밤에’ 등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동생 복희씨와 함께 다정한 오누이 듀엣으로 활동해 팬들에게 훈훈한 인상을 심어줬다. 윤씨는 지난 1986년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신앙인(목사)으로 돌아섰다. 요즘에는 전국을 누비며 전도활동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3년전 ‘예음신학교’(대학원 위주)를 설립, 현재 총장직을 맡아 더욱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3년전 예음신학교 세우고 음악으로 설교 지난 23일 오후 서울 오금동에 위치한 신학교 총장실에서 윤씨를 만났다. 검정색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 절제되고 깨끗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음악이나 신학은 끼가 있으면 되지만 인격은 훈련으로 이루어진다.”면서 “교파를 초월해 음악으로 설교하고 인성을 심어주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학생 수는 120명으로 교회에 안 다니는 학생도 더러 있다고 귀띔했다. “86년 아시안게임 때 ‘웰컴투 코리아’를 부른 직후 미국의 신학교로 훌쩍 떠났습니다. 팬들과는 20년 동안 멀어진 셈이지요. 지방으로 목회활동을 가면 지금도 ‘오빠’소리를 하면서 ‘장미빛 스카프’‘별이 빛나는 밤에’ 등을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팬들이 많습니다. 고맙지요 뭐.” 약간 술에 취한 듯한 노래하는 모습과 무관하지 않게 윤씨는 연예활동 때 대단한 술꾼이었다. 방탕한 기질까지 있었다. 결국 부인과 동생의 끈질긴 권유로 신앙인이 된 그는 “지금이야 모든 것이 안정이 돼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며 웃는다. 이어 가족의 근황을 들려준다.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단다. 딸은 모두 결혼했고 미혼인 아들 준호(28)군은 신학공부를 하면서 남성4중창단 ‘큐브’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아버지의 음악성을 물려받은 준호군은 오는 5월에 뮤직비디오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동생 윤복희 골반다쳐 집에서 요양중” 동생의 근황을 물었다. 윤씨는 “음악적 천재성이 참으로 안타깝다.”며 걱정스런 표정이 먼저 앞선다. 동생은 3년전 겨울 출연차 집을 나서던 중 얼음바닥에 넘어져 골반주위를 크게 다쳤다고 했다. 현재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동생은 행동이 불편해 바깥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연말 뮤지컬 ‘마리아’에 잠깐 출연했을 뿐이다. 연예계 데뷔는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 윤씨는 “고민을 하다가 (행사를)안하고 넘어가면 섭섭할 것 같아 오는 10월 불우이웃을 돕기를 겸해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때 어떤 식으로든 동생을 꼭 출연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아들도 찬조출연할 것이라고 덧붙인다.‘여러분’과 같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형태의 신곡도 발표할 예정이란다. 현재 저작권료를 얼마 받는지 물었다. 그는 “부부가 노후를 지낼 정도”라며 웃어넘긴다. 한 때는 성공한 대중음악인었지만 이제는 성공한 목사로 제2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자서전 준비중인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어떻게 지내세요] 자서전 준비중인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내년이면 벌써 고희가 돼. 집에 쌓아둔 TV 녹화테이프, 신문스크랩 등 자료를 정리하느라 바빠.” 전 (꼬마)민주당 총재 이기택(69)씨. 부산상고와 고려대 상대를 나와 1967년 7대 국회의원(전국구·신민당)으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6선(7·8·10·12·13·14대)을 지내면서 나름대로 세를 거느린 ‘거물정치인’으로 군림했다.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지난 17일 서울시 세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요즘 세대간 대화가 단절돼 있어 걱정이야.”하면서 노소간 통합이 잘 돼야 국력이 강해진다고 몇차례 강조했다. 아울러 “남북 분단상황에서 이념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속도조절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30년 정치인생 동안 야당생활만 해왔다.”면서 “야당은 사명이 있어야 하며 첫번째가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는 “북한산도 가고 청계산도 가고, 태백산도 가지. 등산멤버는 많아. 한달에 한번씩 만나는 ‘통일산하회’도 있고, 평상시 자주 가는 후배들 10여명이 있어.”라고 답했다. 등산할 때마다 지나온 자신의 삶을 자연과 비교해보는 즐거움 또한 새록새록 생겨난다고 했다. 또 하산 후 막걸리를 마시고 ‘만세삼창’을 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단다. 산행동료들과 해외여행에 나서는 경우도 가끔 있다. 골프는 회원대우를 해주는 태광CC에서 주로 라운드하며, 스킨스나 라스베이거스 등의 게임을 즐긴다고 귀띔했다. 그는 “오라는 데는 많지만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자제한다.”고 했다. 한달에 한번씩 꼭 나가는 모임은 예외다. 교수, 변호사, 사업가 등 50여명으로 구성된 ‘밝은 세상 모임’이다. 가끔 한민족연구소(이사장 이윤기) 행사에도 참석한다. “현직 의원들이 가끔 차 마시러 집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어. 며칠 전에는 모 의원이 찾아왔기에 한달에 한번씩 만나는 모임을 만들어보라고 했지. 박관용·신상우 전 의원 등 친했던 전·현직 정치인 20명 정도 만나 세상돌아가는 얘기나 해보자는 거지 뭐. 떠나면 외롭잖아.” 요즘들어 서재에 잔뜩 쌓인 자료들을 챙기고 있다. 자신의 정치역정이 담긴 TV 녹화테이프를 보면서 직접 DVD작업을 진행 중이란다. 이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신문스크랩을 정리할 예정이다.“내년이면 칠순이야. 자서전 비슷한 거라도 내놔야 할 것 같아.”라고 했다.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부인과 단둘이 지낸다는 그는 “3년 전에 아들이 결혼했거든. 허락받으러 왔기에 따로 살되 대신 주말만큼은 우리집에 와서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조건을 내세웠지. 안 그러면 멀어져. 우리집 가풍으로 만들 생각이야.”라며 웃는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Doctor & Disease]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홍승봉 박사

    [Doctor & Disease]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홍승봉 박사

    “간단하게 말해 인생의 절반은 잠이며,‘낮=일’‘밤=잠’의 등식은 인위적 패턴이 아니라 섭리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수면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새삼스럽죠.” 뇌파와 간질, 수면장애 분야에서 국내 굴지의 전문가로 꼽히는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홍승봉(46) 박사. 그는 잠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잠(밤)이 없으면 일(낮)도 없다.”고 단언했다.‘불량한 잠은 곧 불량한 일’이라는 그를 만나 수면건강에 대해 들었다. ●“잠이 없으면 일도 없다” 의학적으로 수면을 어떻게 정의하나. -주변의 일을 감지, 반응하지 못하는 가역적인 상태를 뜻한다. 가역적이라는 것은 주기성에 따라 각성 상태, 즉 깨어난다는 의미이며, 불가역적 상태는 혼수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건강한 수면이란 어떤 잠을 말하는가. -수면은 크게 난렘(non-REM)수면 4단계와 렘(REM)수면으로 나뉜다. 난렘수면 1단계는 선잠 상태,2∼4단계는 깊은 잠에 든 상태이고, 렘수면은 뇌 활동이 각성상태와 비슷한 단계로 꿈은 이 때 꾸게 된다. 잠이란 이 난렘과 렘을 정상적으로 반복하는 사이클로,1사이클에 약 90∼100분 정도가 소요돼 하룻밤에 4∼5사이클을 되풀이한다. 이 순환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면 양질의 수면이다. 그렇다면 이 범주에서 벗어난 수면은 문제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개인차는 있지만 성인은 7시간30분, 중·고생은 8시간, 초등생은 9시간을 자야 하는데, 수면시간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등 수면 위상이 바뀐 경우, 시간은 충분하지만 질이 나쁜 수면 등이 문제가 있는 수면이다. 예컨대 심하게 코를 골아 수면무호흡증이 있는 사람은 수면 중 잠깐씩 잠을 깨는 각성상태가 정상인의 5회를 훨씬 초과해 하룻밤에 30회를 넘기도 한다. 이런 잠은 심신의 병을 부른다. ●성인 7시30분·초등생 9시간 자야 홍 박사는 수면의 기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잠은 난렘수면이 75∼80%, 렘수면이 20∼25%를 차지하는데, 난렘수면 때는 신체 피로가 회복되고 활동에너지가 재충전됩니다. 또 렘수면 때는 기억 정리, 정신적 피로 회복, 꿈을 통한 욕구불만 해소 등이 이뤄집니다. 평소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면 꿈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수면의 욕구불만 해소 기능입니다.” 수면 관련 질환도 소개해 달라. -대표적인 질환이 불면증이다. 또 비만 등으로 기도가 막혀 나타나는 폐쇄성 수면무호흡증, 기면증 등 수면과다증, 수면위상이 바뀌거나 시차로 잠을 못자는 1주기리듬수면장애, 몽유병 등 사건수면, 주기적 사지운동 등도 있다. ●불면증·수면무호흡증 등 수면장애 증가 각 질환의 병증과 특성은 어떤가. -잠들기 어렵거나 잠을 유지하기 어려운 불면증은 지속 기간에 따라 급성(4주 이하), 아급성(4주∼6개월), 만성(6개월 이상)으로 나누는데, 급성은 대부분 스트레스성이어서 자연히 개선되나 만성은 전문 치료가 필요하다. 수면무호흡증은 비만하거나 턱이 작고 목이 굵은 사람에게 흔한 질환으로, 수면 중 숨이 막혀 컥컥거리다가 ‘푸’하고 숨을 몰아쉬는 것이 특징이다.10초 이상 숨을 쉬지 않는 횟수가 시간당 5회 이상이면 여기에 해당된다. 낮에 수시로 졸리고 잠에 빠져드는 기면증 등 수면과다증은 한 순간 잠이 쏟아지는 수면발작과, 갑자기 전신의 힘이 빠지면서 주저앉는 탈력발작이 특징이다. 또 1주기리듬수면장애는 심야 인터넷 등으로 수면위상이 바뀐 청소년에게 흔하고, 수면 중 다리를 떠는 주기적 사지운동은 65세 이상 노인의 40%가 갖고 있다. 각 질환의 발병 추세는 어떤가. -스트레스와 식생활 서구화에 따른 비만인구 증가, 게임과 인터넷의 보급 등으로 불면증과 수면무호흡증,1주기리듬수면장애 환자는 느는 추세다. 또 노령화로 주기적 사지운동 환자도 늘고 있다. 기면증은 우리나라에 7만∼8만명의 환자가 있다고 보나 치료받는 사람은 1000명도 안된다. 홍 박사는 수면건강에 대한 일반의 관심 부족이 심각한 상태라고 지적했다.“우리나라의 수면장애 유병률이 20∼30%나 되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의대에 수면의학 강의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런 정도니, 일반인들이 병인 줄을 몰라 치료를 못받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지요. 그러는 사이에 병은 커지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챌린저호 폭발사고가 잠 때문에 빚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결코 잠을 소홀히 할 수 없겠지요.” 수면과 다른 질환의 상관성은 어떤가. -의외로 심각하다. 수면부족에 따른 집중력 저하로 발생하는 교통사고 등 각종 안전사고는 논외로 치더라도 근골격계 질환을 비롯, 고혈압, 뇌졸중, 심근경색, 우울증, 당뇨병 등이 모두 수면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진단은 어떻게 하나. 또 치료에 대해서도 설명해 달라. -환자의 수면력과 배우자 등 베드파트너를 통해 수면패턴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신경학적 검사 외에 수면다원검사를 통해 구체적인 수면장애의 종류와 정도가 모두 파악된다. 수면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중요하다. 진단이 되면 각 질환과 개인별 특성을 고려해 적절한 치료를 하게 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수면질환 하면 수면제를 떠올리나 행동치료가 우선이며, 수면제는 보조적 약물일 뿐이다. ●‘아침형 인간’은 주먹구구식 발상 잠과 꿈의 구체적인 연계성을 한창 연구 중이라고 근황을 소개한 홍 박사는 최근의 ‘아침형 인간’ 붐을 ‘문제 있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수면위상을 유지하려면 취침시간이 거의 일정해야 하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것은 수면시간을 줄이라는 뜻이고, 이는 불가피하게 낮 동안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집니다. 결국 ‘아침형 인간’이라는 건 수면의 중요성을 간과한 주먹구구식 발상일 뿐입니다.” 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 홍승봉 박사 ▲서울대의대 및 대학원(박사)▲미국 존스홉킨스병원 간질센터 임상전임의▲미국 클리블랜드병원 클리닉 임상전임의▲서울대의대 신경과 외래교수▲대한신경과학회 학술위원▲미국 수면장애학회·신경과학회·간질학회·임상신경생리학회 정회원▲대한간질학회 이사▲세계 최초로 Radial surface rendering기법을 개발해 간질병소 진단율 제고 및 기면증의 뇌활동 지도를 세계 최초로 PET를 이용해 제작▲현,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 [어떻게 지내세요] 영화배우 이대근

    [어떻게 지내세요] 영화배우 이대근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이 지낼 친구·후배들과 자주 만납니다. 같이 운동하고 저녁식사 하는 즐거움이 그만이지요.” 영화배우 이대근(64)씨. 그는 ‘LA용팔이’‘시라소니’‘거지왕 김춘삼’ 등으로 1970∼80년대를 주름잡은 액션스타였다. 그가 주인공을 맡으면 제작자와 배급자들이 너도나도 투자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는 1964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 무려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정도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쏟았다. 근래에는 영화 ‘해적 디스코왕되다’(2002년) KBS드라마 ‘그녀는 짱’(2003년) 출연 이후 활동이 뜸한 상태. 지난 10일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 힘있는 목소리로 “이 나이에 매스컴에 나서 옛날일을 자랑하고, 떠들고 그러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가족얘기를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근황만이라도 알려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는 지난 82년 딸 셋을 미국에 보냈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미국식품의약국(FDA)에 근무하는 등 열심히 활동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다들 생활을 잘하고 있고, 큰딸은 결혼해 손자까지 안겨 주었다.”고 했다. 동료(영화배우)들과 만나느냐는 질문에 “요즘에는 연예계통이 아닌 친구·후배들과 자주 지내는 편”이라고 했다. 이어 “사명감 하나로 30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강조했다. 영화 ‘변강쇠’로 자신의 이미지가 잘못 전달된 부분에 대해서는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변강쇠’라는 영화는 유교문화적 인권의 사각지대를 해학적으로 다룬 향토예술”이라면서 “서자(변강쇠)와 과부(옹녀)에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지 않으냐.”고 역설했다. 검도얘기가 나오자 그는 “요즘 일제청산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데 정작 일본식 검도는 계속 득세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의 지원까지 받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의 전통검술을 계승·보급하기 위해 2001년 설립된 ‘한국검도연맹’에서 5년째 고문을 맡고 있다. 또 “우리의 전통검도는 일제에 의해 맥이 끊겼다.”면서 국제적인 조직을 통해 한국검도를 확산시키기 위해 얼마전 세계검도연맹을 창설했다고 설명했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태권도 초단이며, 한때 복싱과 레슬링에도 심취했다. 현재 서울 남산의 모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세종로 네거리 부근의 한국검도연맹에 자주 들러 ‘토종검도’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가족이 보고 싶을 때면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고 귀띔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기생 신세를 면하게 되자 이듬해 봄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퇴계가 70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두향은 이곳 적성산 초당에서 22년간을 수절하였다. 두향이가 이퇴계를 만난 것이 몇 살 때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퇴계가 숨을 거뒀을 때에는 아마도 초로의 아낙네였을 것이다. 22년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재회한 적이 없고 서신도 교환한 적은 없다. 다만 이퇴계가 말년에 지은 시 한 수가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연애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 보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해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이 시의 처음 두 행은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이퇴계의 근황을 알리는 것이지만 뒤의 두 행은 비록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매화를 보고 거문고를 타면서 지냈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랑 노래가 아닐 것인가. 나는 술을 받쳐 올리고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배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술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원래 흠향(歆饗)한 술은 음복(飮福)하는 법. 나는 빈 컵에 다시 술을 따라 나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고마운 선원에게 잔을 내밀며 말하였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곁에 서서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선뜻 술잔을 받았다. “5월 초에 오셨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요.” 사내는 술을 마시며 대답하였다. “해마다 5월 초면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제가 올려집니다. 그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지요. 축문도 읽고 분향도 올리지요.” 무덤 앞까지 밀려든 강물은 소용돌이를 치면서 굽이치고 있었다. 선조 3년 경오년(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밤 유시(酉時). 이퇴계는 마침내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퇴계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전해 듣자 목욕재계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소복까지 준비하고 단신으로 안동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단양에서 안동까지 200리 험난한 태산준령을 여자의 몸으로 나흘 만에 무사히 안동고을을 거쳐 도산서당이 있는 토계리까지 도착한 두향은 집집마다 걸려진 만장(輓章)을 보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해가 안치된 한서암(寒棲庵)을 보며 밤을 새워 망곡을 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서거하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이퇴계에게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였다. 그런 관계로 장례는 의정예법(議政禮法)에 따라 이듬해 3월에야 거행한다는 말을 듣고 두향은 그대로 단양으로 돌아와 초당에 궤연(筵)을 꾸미고 신주를 모셔 놓은 후에 아침저녁 상식을 올리며 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내가 죽으면 그 시신을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선대 위에 묻어 주옵소서.”
  • [23일 TV 하이라이트]

    ●바람꽃(KBS1 오전 8시5분) 경리실에 앉아 있던 정님이는 인표를 배웅하기 위해 같은 차를 타고 가는 영실과 형주를 시기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 순간 정님이는 영실과의 좋았던 추억과 자신의 현실을 번갈아 떠올리며 깊은 갈등에 휩싸인다. 형주와 영실이 미래를 설계하며 행복해 할 때, 정님은 계략을 꾸민다. ●생방송 TV연예(SBS 오후 8시55분) 오는 28일 군 입대를 앞둔 멋진 남자 소지섭, 그의 근황과 입대를 앞둔 그의 심경을 들어본다.2년여의 유학생활을 끝낸 ‘네모 공주’ 박경림이 드디어 돌아왔다. 다시 한번 한국 연예계를 흔들어 놓을 요절복통 박경림의 한국생활 적응기. 그녀의 유쾌한 웃음을 만나본다. ●사이언스+(YTN 오전 8시30분) 디지털 아카이브란 시간의 경과로 질이 떨어지거나 흩어져 일부가 없어질 우려가 있는 정보들을 디지털화함으로써 항구적인 기록과 보존, 이용이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미래형 기록보관소인 디지털 아카이브의 필요성을 짚어보고, 우리나라의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현황을 알아본다. ●생방송 60분 부모(EBS 오전 10시) 일상생활에서 유아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은 무엇일까. ‘유아 스트레스 척도’를 통해 알아본다. 그 중에서도 스트레스를 주는 직접적인 요인은 과다한 TV나 비디오 시청. 조기교육 열풍과 맞물려 영·유아에게도 비디오 시청은 일상이 돼버렸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 증상을 알아본다. ●와!e-멋진 세상(MBC 오후 7시20분) 머리가 붙은 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는 샴쌍둥이 로리와 리바는 여지껏 분리수술을 받지 못하고 47년간을 따로, 또 같이 생활하고 있다. 비록 최악의 신체조건을 가졌지만 마음만은 일심동체라는 로리와 리바. 그녀들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연을 들어 본다. ●해신(KBS2 오후 9시55분) 정화를 보기 위해, 그리고 염장을 잡기 위해 장보고는 유산포로 달려가고, 이미 무령군과의 대립에서 부상을 입은 염장은 정화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먼저 보낸다. 숲속에 숨어 있던 염장이 장보고에게 날린 단검을 정년이 몸으로 막고, 장보고와 염장간에 또 한차례 대결이 벌어진다.
  • [주말화제] 증시 5년만의 활황…여의도 ‘들썩’

    [주말화제] 증시 5년만의 활황…여의도 ‘들썩’

    “지금 사도 늦지 않나요.”“대세상승 놓치지 마세요.”“물반 고기반이네.” 요즘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5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는 ‘주가지수 1000대’의 호황증시의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증시가 살아나면서 풍속도도 바뀌고 있다. 증권사를 떠났던 증권맨들이 속속 돌아오는가 하면, 여의도 식당가에선 증권사 직원들의 회식 자리가 잦아지고 있다. ●지금 사도 늦지 않나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D증권 본점의 1층 영업장. 신규 계좌를 만드는 사람들이 30대 직장인부터 퇴직한 듯한 50대 장년층까지 다양했다. 서류를 꾸미는 여직원들은 연신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다. 하루 고객은 지난해보다 두배 이상 늘어난 100여명. 한 여직원은 “방문객들은 ‘주가가 이미 많이 올랐는데 지금 주식을 사도 늦지 않으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객장을 찾은 ‘개미(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 “은행에 1년을 꼬박 저축해 봐야 이자는 4%도 안되는데, 주식투자로 며칠 만에 10%의 수익을 챙겼다.”는 소리도 들렸다. 영업점의 전광판에 주가상승을 나타내는 적색숫자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날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이른바 ‘꼭지(하락장세의 시작을 뜻하는 증시 속어)’의 증거라는 ‘아기 업은 아줌마’는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 우량주는 유통물량이 적어 사고 싶어도 못사는 예가 잦다. 고객들이 맡겨둔 10조원대의 예탁금이 좀처럼 줄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G증권사 영업부장은 “전 분기보다 주문이 20∼30% 증가했으나 물량이 넉넉하지 않아 매입 가능한 종목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대세상승 놓치지 마세요 동원증권은 지난달 13∼14일 서울대 벤처기업으로 관심을 끈 ‘에스엔유(SNU)프리시전’의 공모주 청약을 받았다.631.18대 1의 유례없는 경쟁률을 기록하며 이틀 만에 1조 1929억원의 청약대금을 거두었다. 탈락자에게 청약대금을 돌려주기 전까지 1주일동안 은행이자 등으로 4억원의 쏠쏠한 수입을 챙겼다. 뜻밖의 돈벌이에 회사측도 놀랐고, 직원들은 특별상여금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회사측은 서울대에 대한 보답으로 2억원을 공학연구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M증권 지점장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7월 명예퇴직한 뒤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던 김모씨(49)는 최근 회사측의 요청으로 다시 지점 상담역으로 일하게 됐다.S증권도 올해 10여명 정도의 임직원을 구조조정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유보하고 명퇴자들의 근황을 파악 중이다. 증권사들의 고객확보 경쟁도 다시 불붙었다. 그러나 매입을 권유하지 않아도 먼저 전화가 오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약정’을 할당하는 풍속도는 사라졌다. 대신 투자설명회가 늘었다. 설명회의 구호는 ‘대세상승을 놓치지 마세요’다. 대한투자증권은 18일부터 다음달 9일까지 전국 5곳을 돌며 ‘주가 1000시대의 재테크’라는 주제로 순회설명회를 갖는다.‘큰손’ 고객을 끌기 위해 프라이빗뱅킹(PB)지점에 여성지점장을 파격적으로 배치하는 곳도 늘었다. 삼성증권이 지난 17일 강남구 청담점에 첫 여성지점장을 임명함에 따라 증권가의 여성지점장은 10여명으로 늘었다. 영업직원들의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임금체계를 고치는 증권사도 있다. 동양증권은 기본급을 100만원으로 최소화하고 나머지 급여는 능력별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대신증권의 성과급은 0∼2000%다. 증권가의 한 고급중식당 매니저는 “확실히 지난해보다 증권사 손님들이 늘었고 증권사 직원들의 회식이 늘어난 탓인지 심야에 빈 택시를 잡기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이사람] 작곡가겸 대금연주자 김영동 씨

    [이사람] 작곡가겸 대금연주자 김영동 씨

    “풍각쟁이로구먼!” 1973년 어느 날 선술집에서 시인 김지하는 연극 음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대금연주자 김영동을 소개받자 대뜸 이렇게 일갈했다. 김영동은 선배인 김지하가 조심스러워 속으로만 대꾸했다고 한다.“글쟁이로구먼!” 선술집에는 우리 식의 마당극을 염두에 두고 판소리에 빠져 있던 임진택과 탈춤운동에 한창이던 채희완도 앉아 있었다. 글쟁이와 탈놀이패, 광대가 한데 어울린 자리에서 풍각쟁이란 당시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든 ‘먹물’ 예술인들에게는 자부심이자 존칭인 셈이었다. ●70년대 김지하·임진택과 문화운동 하지만 김지하를 중심으로 한 동아리에서 김영동의 존재는 조금 특별했을 것이다. 축제 기획가로 활동하는 임진택이나 부산대 교수 채희완 등이 책에서 읽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을 정립해가며 기능을 익혀나갔다면, 김영동은 처음부터 전문연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여년, 인사동의 밥집에서 만난 김영동(54)씨는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명함에는 ‘세계생명문화포럼 경기 2005 조직위원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다. 그는 9월에 열리는 포럼의 취지를 “문화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 환경파괴와 전쟁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세계에 발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지나간 몇년 동안 “우리 음악정신의 원류를 찾고, 음악과 음악이론을 연결하는 구체적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근황을 전했다. 생명문화포럼도 민족 정통사상을 구체적으로 공부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띨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내자는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음악감독 맡아 그는 성공한 음악가다. 그가 작곡가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울대 국악과 2학년 시절인 1971년. 오태석이 연출한 전무송의 모노 드라마 ‘이식수술’의 음악을 맡았다. 이듬해부터 ‘초분’,‘태’로 잇따라 무대음악가로 존재를 부각시켜 나갔다. 1974년 허규 연출의 ‘한네의 승천’은 출세작이라고 할 만하다.‘한네의 이별’처럼 귀에 잘 들어오는 노래들이 이때부터 쏟아져 나왔다.1978년에는 ‘개구리 소리’와 ‘누나의 얼굴’ 같은 국악동요를 발표했는데, 대중적이면서도 의미있는 작업을 하는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땡볕’ ‘태’ ‘어둠의 자식들’ ‘씨받이’ ‘아다다’ 같은 영화음악으로 이름을 날린다.‘어둠의 자식들’에 나오는 ‘어디로 갈거나’와 TV드라마의 주제음악으로 만든 대금연주곡 ‘삼포가는 길’은 지금도 음반시장의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히트곡’들이다. ●음악계 질시 비웃듯 대한민국 작곡상 수상 대중적 성공은 ‘작곡을 제대로 공부하기는 했느냐.’는 음악계의 질시를 낳기도 했다. 그는 대편성 국악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출발점은 다름아닌 ‘오기’였다고 한다. 황석영의 ‘장산곶 매’를 소재로 한 표제음악 ‘매굿’은 그에게 1981년 대한민국 작곡상을 안겨주었다. 김씨가 처음부터 음악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피란지였던 충남 홍성 광천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용산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 입시에서 낙방한 그에게 당숙은 재동주유소 자리에 있던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를 소개했다. 그는 실기시험이 없는 국악사양성소에 필기시험만으로 합격했다.2학년에 올라가면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고,3학년이 되자 전공으로 대금을 선택했다. 인간문화재 김범수 선생의 대금 정악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김병호 선생으로부터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대금 산조의 명인 한범수 선생의 아현동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김씨는 “산조를 배운 적이 없으니 흉내만 좀 냈더니 선생이 쌍골죽 대금을 내놓더라.”면서 웃었다.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정악과 민속악의 중간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83년 독일 유학 “정말 재미없었다” 국립국악원에서 일하던 그는 1983년 독일로 건너간다.“음악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죄다 독일로 가는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팅겐대학에 머무는 4년 동안 공부한 비교음악학은 “내 공부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동양음악을 대신 연구해주는 것이었다.”면서 “정말 재미없었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김씨는 ‘귀소’ ‘산행’ ‘화(和)’ 등을 펴내면서 명상음악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한 ‘화’에는 특별한 애착이 있다. 그는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지휘자로 재직하며 많은 곡을 쓰고, 또 연주했다. 그러다 보니 서양악보인 오선보로 작곡하고 연주하는 데 짜증이 났다고 한다.‘화’는 오선보에 대한 반동인 셈이다. 연장선상에서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예술가의 자기중심 찾기’다. 그는 동양음악은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수(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동안 취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필생의 작업은 주역(周易)을 음악화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음악이 동양철학과 협력하여 우리 식의 작곡법을 체계화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당장은 ‘쉬운 음악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고 본다. 국악가요나 동요, 명상음악 등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구상이 있는 듯 “결과는 빨리 나올 수도,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올 가을 관현악·명상음악·동요 섞어 음악제 올 가을에는 3∼4일에 걸쳐 ‘김영동 음악제’를 열 생각이다. 그동안 만든 작품이 소품까지 100여곡. 관현악·명상음악·대중음악·동요 등을 하루씩, 혹은 묶어서 연주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할 일 많은 그에게 음악가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지 물었다. 김씨는 대답 대신 “그동안 서양음악에 손님대접을 잘 해주었으니 이제 우리 것 좀 대접해 주었으면 좋겠다.”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에 우리가 찍소리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그렇지만 세상이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 예술가가 흔들리겠느냐.”면서 “앞으로도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나의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91세 최고령가구 신카나리아

    [어떻게 지내세요] 91세 최고령가구 신카나리아

    “난 아직도 열일곱 살이에요.” 일제시대 때부터 가수 고 현인 등과 함께 노래했던 원로 가수 신카나리아(본명 신경녀). 그는 ‘꾀꼬리 가수’의 원조라는 별명과 함께 국내 가요계에서 예명을 처음으로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등 특유의 꾀꼬리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40대 이상 추억의 팬들이 아직도 많다. 또한 고 이난영·황금심 등과 함께 우리나라 1세대 여가수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요계 발전에 큰 견인역할을 해왔다. 올해 91세로 현역 최고령 가수로 꼽힌다.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21일 오후 자택인 경기도 안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난 17일에 이어 두번째였다. 어떻게든 직접 통화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인근에 산다는 조카 신(57)씨가 전화를 받았다. 조카는 “지병인 심장병 병환이 좋지 않으니 통화는 어렵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조카는 또 “하루에도 몇번씩 들러 병원에서 약을 타오는 등 병수발을 해주고 있다.”면서 “(신카나리아는)외부 나들이는 물론이고 외부인과 통화조차 잘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고령에다 지병이 겹쳐서인지 요즘 누워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부드러운 음식으로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 있으며 혈육으로는 함께 사는 외동딸이 있다고 했다. 주말에는 친척들이 찾아온단다. 조카에 따르면 신카나리아는 간혹 TV를 시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가요무대’나 ‘열린음악회’를 즐겨본다는 것. 이럴 때면 ‘나는 열일곱살이에요’‘삼천리강산 애라 좋구나’‘노들강변’(변주곡) 등 자신이 불러 히트쳤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신카나리아는 2002년 10월 가요무대 800회 특집 때 잠시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다.2002년 4월 가수 현인씨 장례식에 참석한 바 있다. 함남 원산 출생인 신카나리아는 1928년 ‘뻐국새’로 데뷔했으며 ‘강남따라’‘베니스의 노래’‘애수의 부르스’‘동백꽃’‘꽃이 피면’‘그리운 내고향’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김문기자 km@seoul.co.kr ●‘어떻게 지내세요’ 는 독자와 함께합니다. 각계 명사는 물론 한때 스타였던 인물, 화제를 뿌렸던 사건 속 주인공들의 근황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들의 얘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추스르고 삶을 돌아보는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추천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연락처 : km@seoul.co.kr)
  • [사회플러스] 문수석·지율스님 대화 밝혀져

    천성산 터널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지율스님의 단식이 84일째를 맞은 가운데,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남영주 국무총리실 민정수석비서관이 스님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 수석은 지난 17일 저녁 7시쯤 스님을 방문해 10시까지 3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남 비서관이 방문했으나 스님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지율 스님의 근황을 살피고 있는 한 측근은 “문 수석이 지율 스님을 독대하고 건강과 천성산 공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지만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등에서는 스님을 살리고자 하는 시민 수십여명이 모여 촛불시위를 벌였다.
  • [어떻게 지내세요] ‘비내리는 호남선’ 작곡가 박춘석

    [어떻게 지내세요] ‘비내리는 호남선’ 작곡가 박춘석

    “와병 중이지요. 틈틈이 치료를 받고 있지만 썩 차도가 있는 편이 아닙니다.” 가요계의 거목 박춘석(본명 박의병·75)씨는 11년째 병마와 외롭게 싸우고 있다.20대 젊은이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가수 이미자를 키워낸 작곡가로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같다. 현재 박씨가 사는 곳은 서울 송파구 잠실동 20평짜리 주공아파트.24시간 간병인에 의지한 채 지낸다. 같은 작곡가이자 박씨의 동생인 박금석(73)씨가 바로 옆집에 살면서 주변을 관리하고 있다. 박금석씨는 전화통화에서 “친한 지인의 얼굴조차 못알아볼 정도이기 때문에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면서 “형님은 일주일에 두번씩 현대아산병원 재활의학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다리에 보조기계를 끼고 1시간30분 동안 걷기 운동을 한다는 것. 4년전에는 폐렴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다행스럽게 극복했다. 하지만 뇌졸중의 후유증은 여전하다. 또한 투병생활이 힘들고 안타깝다고 부연했다. 박금석씨는 “(형님의)저작권료로 병원비 내고 한달 생활비를 겨우 쓰고 있다.”면서 “요새는 병문안차 찾아오는 동료 작곡가나 가수들이 거의 없다.”고 쓸쓸한 처지를 대신 말했다. 박춘석씨가 평소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박금석씨는 “이미자의 ‘노래는 나의 인생’을 작곡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쓰러졌다.”면서 “다 아끼는 곡들이지만 ‘가을을 남기고 산 사랑’이나 ‘가시나무 새’도 평소 애착이 많았다.”고 전했다. 박춘석은 ‘살아있는 트로트의 전설’로 평가받는다. 특유의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2700곡을 발표, 고 길옥윤씨와 더불어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어릴 적 고무 공장을 하는 아버지 덕에 피아노와 오르간 앞에 앉아 자유자재로 화음을 생산해내기도 했다. 경기중학 5학년(고교 2년)인 1948년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길옥윤씨와 만나 음악활동을 함께 했다. 데뷔곡은 최양숙이 부른 ‘황혼의 엘레지’이다. ‘비내리는 호남선’은 손인호가 부른 공전의 히트곡.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 ‘기러기 아빠’ ,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패티김의 ‘초우’ 등 다양한 노래풍을 만들어낸 작곡 천재이다. 김문기자 km@seoul.co.kr ‘어떻게 지내세요’ 는 독자와 함께합니다. 각계 명사는 물론 한때 스타였던 인물, 화제를 뿌렸던 사건 속 주인공들의 근황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추천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연락처 : km@seoul.co.kr)
  •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한국 노동운동에서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양동생(52)’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부의 폭압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987년 대우조선 초대 노조위원장에 선출돼 3년간 강성 노조를 이끌었다. 연이은 분신 등 투쟁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대우조선사태를 보려고 9시뉴스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을 정도다. 대우조선 투쟁을 보도하기 위해 국내 취재진은 물론 외신기자들까지 거제 바닷가에 다 몰렸다. 노동계의 동투(冬鬪)가 급피치를 올릴 무렵 많은 이들이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투쟁강도가 세면 셀수록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투사’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접고 개척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그의 소재지를 알아냈다. 통화가 되기 무섭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대로 서울 양천구 신월2동 한양중앙교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는 이 교회 담임목사였다. ●운명과도 같았던 노동운동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어서일까.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국내외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킨 강성 노조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없었다. 첫인상이 그처럼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양 목사는 그저 옛날 일이라며 이내 인터뷰에 응했다.“아마 그때가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시기일 겁니다. 경제 중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특혜를 줘서라도 기업인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상대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거셌습니다.” 양 목사는 당시 시대상황을 기업인에게는 특혜, 노동자에게는 탄압이라는 식으로 이분화했다. 그는 노동법을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지만 탄압국면을 맞닥뜨리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고 했다. 임시 노조위원장에 이어 87년 8월 대우조선 초대 직선 노조위원장에 선출된 그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노조설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를 상대로 두달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싸웠습니다. 결국 거제군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신고필증을 받아냈지요. 대기업 가운데 최초로 대우조선 노조가 설립된 것입니다.”이를 계기로 현대 등 대기업 중심의 노조설립 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투쟁원칙에 충실했다. 노조 설립은 회사를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양 목사는 “졸다가 걸리면 바로 징계를 받고 뼈 빠지게 일해도 분배가 안되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할 투쟁대상이었다.”며 인권보호와 작업환경 개선, 임금 인상 등을 주요 교섭안건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가가 있어야 회사가 있고 회사가 있어야 조합이 있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우조선 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대정부 투쟁으로 투쟁의 본질이 급격히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이를 주사파의 개입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자신의 원칙이 대중에 의해 휘둘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감옥에서 쉬고 싶을 정도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우중 회장과의 일화도 공개했다.“88년 봄으로 기억합니다만 김 회장이 ‘게스트하우스’(영빈관)에서 독대를 요구했어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대우조선 때문에 다른 대기업 노조들이 대정부 투쟁에 나서고 있다면서 정부가 시범 케이스로 대우조선을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합디다. 피가 거꾸로 솟았지요.” 양 목사는 이런 김 회장을 새벽 4시까지 설득했다고 말했다.“당신이 좌절하면 안된다. 존경받는 기업가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이후 그는 3만여 조합원을 모아놓고 건전한 노조, 합리적인 노조로 가겠다고 선언한 뒤 75%의 조합원으로부터 찬성 서명을 받아냈다. 이어 DJ(김대중)·YS(김영삼)·JP(김종필) 등 야당지도자를 차례로 만나 건전한 노조로의 탈바꿈을 약속하고 회사를 없애려는 기도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중앙일간지 편집국장들도 다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임기1년 남기고 목회자의 길로 89년 12월 양 목사는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집사였던 양 목사는 노조위원장 임기가 1년여 남았지만 떠날 것을 결심한다. 노동운동이 어느정도 정착된 만큼 목회자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양 목사는 당시 ‘서울로 올라가라.’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고 밝혔다. 이 때부터는 노동운동과도 절연했다.TV도 없애버리는 등 세상일과 등을 졌다. 언론과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물리쳤다. 본지와의 인터뷰가 노조위원장을 그만둔 뒤 처음이라고 밝혔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구로구 궁동에 있는 연세중앙교회에 둥지를 틀었다.10년간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안수집사, 전도사, 목사고시를 거쳐 99년 11월 양천구 신월2동에 한양중앙교회를 개척했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에서 태어난 그는 YS와 같은 고향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고등학교를 못갔다. 나중에 방송통신고를 졸업했다.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시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군에 다녀온 뒤 77년 대우조선의 전신인 조선공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지나 한국의 노동판을 완전히 뒤바꾸는 중심 인물이 된다. 양 목사는 노동운동은 ‘공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독불장군식으로 해서는 다 깨진다는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조차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고 비판한 대목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노동계에 충고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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