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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성 잃은 도시인의 뒤틀린 삶 정조준

    소설가에게 분방한 상상은 탓할 일이 아니다. 그 상상이 현실을, 특히 우리가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살아 온 암울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한 삶을 기반으로 할 때에 특히 그렇다. 현실 세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이를 통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하게 만든다면 오히려 상을 받을 일이다. 박석근(49)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남자를 빌려드립니다’(민음사 펴냄)를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들 법하다. 작가는 199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후 장편소설 ‘외로운 사람들은 바다로 간다’, ‘숨비소리’ 등을 선보이며 유토피아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열정과 방황, 고뇌와 좌절을 그려 왔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도시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과 자존감을 버린 도시인을 조준했다. 표제작 ‘남자를 빌려드립니다’에서 인간성의 상실 혹은 소외에 대한 탐구라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직과 이혼, 감옥살이로 자주적인 삶을 거세당한 주인공은 인력소개사이트에 가입해 하나의 물건처럼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달되어 소비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까다로운 고객의 대역 남편 일을 맡게 된다. 갓 이사 온 집의 벽에 못을 박고, 기울어진 장롱의 수평을 맞추고, 무거운 침대를 옮기는 등 집안에서 남자가 해야할 일을 해준다. 그러다가 어느덧 저녁식사 후 와인 잔을 부딪치는 사이가 된다. 진짜 남편처럼. 심지어 아이의 학교에 가서는 아빠 역할까지 훌륭하게 한다. 감정이 깊어진 그가 여자에게 진짜 남편이 되고 싶다고 고백을 한다. 그러자 여자는 태도가 돌변해 ‘주제도 모르고’라며 독설을 내뱉는다. 잠시 잊고 있었던 비참한 현실이 되살아나고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그의 자아는 하이에나처럼 그녀를 공격한다. 일곱 편의 단편은 뒤틀린 현실 세계의 목격담 같다. 부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번듯하고 전망 좋은 집으로 이사하지만 오히려 불안함을 느끼고 몇 개월이 되지 않아 집을 떠난다(‘전망좋은 집’). 실력 있는 경제 연구원이 사이버공간에서 만난 아바타 연인을 진짜처럼 여기며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혼동한다(‘아바타를 사랑한 남자’). 옛 가구를 아끼며 상실한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장삿속을 채우는 사람이 결국 자기 꾀에 넘어간다(‘장군의자’). ‘그림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림자는 실재의 허상이며 하나의 이미지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이제 내 카메라 앵글은 그 그림자를 정조준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성찰과 실험의 기록이 바로 그의 소설이다. 1만 1500원. 함혜리 문화에디터 lotus@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3) 경북 상주시 상현리 반송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3) 경북 상주시 상현리 반송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1904~1987)은 신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짚어보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도덕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고 일관된 우주 질서를 회복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신화는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당장에 실현해야 할 사람살이의 가치를 담고 인구에 회자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신화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철학이라고 하는 근거다. 오래된 나무들에 어김없이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도 결국은 지금 우리가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담은 이야기라는 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크고 오래된 나무의 줄기 안에 신화 속의 동물인 이무기가 산다는 식의 흔하디흔한 이야기는 더 이상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큰 나무의 가지를 꺾는다거나 베어내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 역시 성장과 발전 위주의 산업사회에서는 우스개조차 되지 않는다. 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반송에 얽혀 전해오는 전설은 이 같은 전설들과 조금 다르다. 물론 500살 된 이 나무에도 어김없이 이무기는 산다. 뿐만 아니라 나무 줄기 속의 이무기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사전에 큰 소리로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흉사에 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고마운 이무기다. 짚어보면 이 역시 흔한 전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호들갑스러워질 까닭은 없다. ●줄기속엔 전설 속 짐승 이무기가 그러나 또 하나의 별난 전설이 있다. 이 나무에서 잎을 따는 것은 둘째 치고, 저절로 땅에 떨어진 솔잎을 주워 가기만 해도 천벌을 받는다는 전설이다. 그것도 당대에 그치지 않고,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끔찍한 벌이라고 한다. 물론 천벌의 구체적 내용은 없다. 그저 공포심을 일으키는 엄포 정도이지만 이야기를 알고 나서는 나무 곁에서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떨어진 솔잎이 거름 되는 자연의 이치 물론 소나무의 한 종류인 반송은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상록수다. 하지만 한번 난 잎이 평생 달려 있는 건 아니다. 낙엽성 나무처럼 한꺼번에 잎을 떨구지는 않아도 오래된 잎은 하나 둘 떨어지고 새잎이 난다. 수명 없는 생명체는 없는 게 자연의 이치이고, 솔잎도 그 이치에서 예외일 수 없다. 땅에 떨어진 솔잎은 나무 뿌리 근처에 모여 잘 썩은 뒤에 나무의 거름이 된다. 쉬 썩지 않는 특징 때문에 솔잎이 썩으려면 시간이야 걸리지만, 나무에게는 더없이 좋은 거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름이 되기 전에 일쑤 솔잎을 주워 가곤 한다. 불쏘시개뿐 아니라 송편을 찔 때도 요긴해서다. 사람에게 솔잎이 쓰이면 쓰일수록 나무는 스스로 지어낸 양분을 잃는 셈이다. 요즘이야 다른 종류의 질 좋은 거름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지만, 자연 상태에서 나무가 스스로 자라야 했던 옛 시절에라면 언감생심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안타까워한 지혜로운 한 어른이 나무를 오랫동안 지켜내기 위해 솔잎을 보존하자고 생각했을 게다. 따로 거름을 주지는 못할망정 솔잎이 온전히 썩어 거름이 되는 것만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돌아보면 이는 자연의 순환 원리를 잘 반영한 매우 슬기로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사나운 짐승인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도 솔잎을 주워 가면 천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모두 한 그루의 나무를 오래 지켜내기 위한 지극한 노력의 결과이지 싶다. “그냥 보기에 좋잖아. 마을 사람들이 애지중지 지키는 좋은 나무이기는 한데,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겠는걸. 언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저이는 알려나?” 상현리 반송 바로 아래 첫 집에 사는 팔순의 동관댁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수십년을 살았지만 나무의 전설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거듭되는 질문이 성가셔진 할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에 접어드는 다른 노인에게 대답의 순서를 넘기고 만다. “나도 모르겠는데, 그게 어디서 나온 이야기지? 옛날에야 그런 전설이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 잊혀진 거지.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솔잎을 주워 가지 말라는 전설은 가물가물하네.” 느릿느릿 몰고 오던 자전거를 세우고, 동관댁 할머니 곁에 주저앉은 신인재(71) 노인 역시 전설의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나무를 지키기 위한 옛 사람들의 지혜로운 이야기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솔잎을 주워 가면 삼대에 이어 천벌을 받는다는 별난 전설은 상현리 반송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슬기로운 이야기다. 그러나 곁에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조차 이제는 잊힌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불과 30년 전 이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1982년 당시의 기록에만 화석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전설은 잊혀져도 지혜는 솎아내 지켜야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단오 때에 그네를 매고 놀던 것도 꽤 오래된 일이야. 한 20년 전까지 하고 요즘은 안 하지. 좋은 나무이니, 그냥 바라볼 뿐이지. 굳이 전설을 이야기할 겨를이 있나?”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옛 사람들의 지혜로운 이야기가 사라진다는 건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전설은 사라진다 해도 전설과 함께 나무를 지키려 한 옛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지혜만큼은 오래오래 지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첫걸음임에 틀림없다. 캠벨의 일갈처럼 ‘신화는 지금 우리가 실현해야 할 삶의 가치’인 까닭이다. 글 사진 상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50-1. 당진상주고속국도의 화서나들목에서 좌회전하여 화서면사무소 방면으로 간다. 곧바로 나오는 화령초등학교 앞 사거리에서 학교 울타리를 끼고 우회전하여 250m 간 뒤에 우회전하면 하현마을이다. 여기에서 300m 남짓 더 들어가면 상현1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다시 400m쯤 더 들어가면 길 끝의 나지막한 언덕 위로 나무가 보인다. 나무가 서 있는 언덕 앞에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 MB “혁신파 요구? 답변 안 한게 내 답변”

    MB “혁신파 요구? 답변 안 한게 내 답변”

    “우리 25명(한나라당) 의원도 젊은 의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요구를 생각하지만, 답변을 안 하는 것으로 답변을 보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9일 한나라당 내 혁신파 의원 25명이 보낸 ‘쇄신 서한’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오전 미국 공영라디오 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혁신파는) 젊은 의원들이니까 그렇기도 한데…. 내가 그것을 깊이 생각 안 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혁신파의 요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오던 이 대통령이 국내 언론이 아닌 외신을 통해 처음으로 심정을 밝힌 셈이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은 현재 시점을 ‘말보다는 많은 생각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래서 침묵 속에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나라당 내 혁신파의 주장과 (당내) 이런저런 요구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보다는 생각을 더 해야 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 “FTA는 대다수(majority)가 찬성하고 있고 한국의 기업인들,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모두가 다 환영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통과될 것”이라면서 “여야 간에 FTA 문제를 놓고 논쟁을 하는 것은 FTA 자체보다도 정치적 논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다소간 진통은 있지만 FTA가 내년 1월 발효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확실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0·26 재·보궐 선거 결과와 관련, 이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근원적인(fundamental) 방법으로 여러 현안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인터뷰를 한 NPR의 루이자 림 기자가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한편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이 대통령을 만나 여권의 쇄신방안을 협의키로 했다. 홍 대표는 오전 최고중진회의에서 “정부와 청와대가 변할 일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만나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동 시점은 결정되지 않았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유럽 통합 깨지면 파시즘 부활”

    “유럽 통합 깨지면 파시즘 부활”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미국 문명학을 가르치는 프랑수아 퀴세(42) 교수는 최근 그리스 등 유로권 위기에 대해 ‘남유럽은 원래 문제가 많았다.’는 식으로 희생자를 비난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수십년간 지속된 자유시장경제와 유럽연합 집행부의 정책 실패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문했다. 프랑스 해외문화진흥원(인스티튜트 프랑세즈)이 올해 처음 마련한 ‘프랑스 지성의 새 지평-아시아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따라 베이징, 타이베이, 서울, 도쿄 순회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 중인 퀴세 교수를 8일 주한프랑스문화원에서 만났다. 퀴세 교수는 생클루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와 파리정치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최근 그리스 등의 위기국면에서 유로존의 미래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많은 유럽인들처럼 나 역시 지금 상황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 유럽 통합 정신은 단순한 정치·경제 통합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 모델은 공공성을 강화하고 국민의 복지를 실현하는 게 기본 정신이다. 그런데 지금 유럽은 공공성은 위축되고 경쟁만 중시하며 개인·국가 채무자를 범죄자처럼 취급한다. 지난 수십년간 금융시장에서 대출을 받아 소비하고 지출하도록 권하던 자들이 이제는 자기들 말을 잘 들었던 시민·국가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일부에선 그리스 등이 위기를 겪는 원인으로 포퓰리즘이니 복지병을 든다. -그런 주장은 ‘남유럽은 원래 부패가 심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과시욕 강하고, 게으르다’는 문화적 선입견과 우월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독일 등 유럽 지도자들도 그런 태도를 보인다. 그리스를 비난하며 속죄양으로 삼으려는 ‘희생자 비난하기’를 넘어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위기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나. -유럽연합 집행부는 자유시장경제 모델을 각국이 채택하도록 했다. 규제를 완화하고 감세정책을 장려하고 모자란 재원은 빚을 내서 지출하도록 했다. 거기다 개방경제로 원자재 가격은 불안정해졌다. 극도로 부패하고 막대한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던 부유층과 특권층이 아니라 민중들이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는 유럽 각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긴축재정을 통해 희생자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시민들이 없다면 유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일통화도 유지하고 유럽연합도 유지하길 희망한다. 그게 아니라면 굉장히 위험하다. 20세기 초반처럼 극우 파시즘 망령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처럼 우리도 문제의 근원인 유럽연합 집행부를 겨냥하는 ‘브뤼셀을 점령하라’ 시위가 필요하다. →미국의 쇠퇴를 예상하는 사람이 많은데. -미국은 확실히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상당 기간 헤게모니를 유지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문화적 요인 때문이다. 유럽이나 중국 어느 곳도 미국식 문화를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지만 중국이 꿈꾸는 미래 역시 ‘제2의 미국’에 불과하다. →G2 자리에 올라섰다는 중국이 향후 미국에 이어 세계적 헤게모니를 얻게 될 것이라고 보나. -G2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유럽 당국자들이 G2라는 말이 유포되지 않도록 검열하는 게 아닐까(웃음).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공공요금·공산품값 줄인상 예고… 11월 물가 심상찮다

    공공요금·공산품값 줄인상 예고… 11월 물가 심상찮다

    5.3%(8월)까지 치솟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월 3%대로 떨어지면서 물가 상승세가 한풀 꺾일지 주목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여전히 높다. 환율 변동의 여파로 수입물가가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고 공공요금 인상이 줄지어 있다는 점에서 물가 불안감은 떨치기 어렵다. 일단 11월 물가상승률은 10월보다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획재정부는 11월 소비자물가는 기저효과와 수입물가 불안, 시내버스 등 일부 지방공공요금 인상 등의 영향으로 10월보다 높은 수준을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고속도로 통행료와 철도 운임 인상을 시작으로 공공요금 인상이 예고돼 있다. 인천·경기 지역 시내버스 요금도 이달 중 11.1% 인상될 예정이고, 각종 분유, 제빵·제과류 등의 재료로 사용되는 우유 가격이 올랐다. 도시가스(LNG, 액화천연가스) 요금은 지난달 10일 평균 5.3% 인상됐으며, 지난 9월 평균 6.9% 인상된 지역난방 요금은 다음 달 인상 여부가 결정된다. 9·15 정전대란의 원인으로 ‘값싼 전기요금’이 지적되면서 전기요금 현실화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전력 관계자는 “지난 8월 전기요금을 올려 생산원가 대비 90%가 됐다.”며 “한전의 경영 구조뿐 아니라 전기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서도 전기요금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진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현재 상승률도 낮지 않은 수준인데 공공요금 등이 올라가면서 물가는 다시 4%대를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SK증권은 11월 물가는 전년 같은 달 대비 4.5%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올 한해 평균 물가는 4.4%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물가조사 품목에서 금반지를 빼고 장신구를 넣는 등의 개편 작업은 물가상승률 하락 요인으로 꼽힌다. 금반지 제외로 물가상승률 0.2% 하락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은은 4분기부터는 근원물가 상승률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앞지를 것이라고 진단한다. 농산물과 석유류 외에 공산품 가격, 공공요금, 개인서비스요금 등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리라는 것이다. 향후 1년 동안의 물가상승률 전망치인 기대인플레이션은 4개월 연속 4%대를 유지하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현상은 올 들어 커지고 있다. 지난 1분기 물가상승률은 4.5%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4.2%를 추월했다. 이런 탓에 정부는 물가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물가가 내년 상반기까지 높은 수준을 이어 가는 가운데 내년 성장률이 3% 중반까지 하락하고 실업률이 오히려 올라가면 서민들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길회·김승훈기자 kkirina@seoul.co.kr
  • “감염 문제 극복해야 사람에게 이식 가능”

    학계 전문가들은 서울대 박성회 교수팀의 이종 간 췌도 이식에 대해 당뇨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사람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면역 문제뿐 아니라 감염 문제 등 여전히 극복해야 할 산이 많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윤건호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지금까지 사람 간의 이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공여 장기의 부족 때문”이라면서 “따라서 이종간 췌도 이식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긍정적인 성과”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미국에서도 이종 간 췌장 이식 연구가 진행됐지만 너무 강한 면역억제제를 사용하는 바람에 인체 위해를 우려한 식품의약국(FDA)이 결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면서 “이번 연구에서 면역 문제를 극복할 가능성을 찾은 것은 의미 있는 성과”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많다. 김광원 삼성서울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면역문제를 극복해도 사람에게 이식할 때는 감염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면서 “돼지를 통해 감염된 인·수 공통 질병이 발병할 수 있어 안전성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사람에게 이식하는 문제는 아직 가이드라인이 없어 논란이 생길 수 있다.”면서 “법규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도 이어 “앞으로는 인체 임상 대상자를 선별해 안전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면서 “정부가 지원을 확대하고 지속적으로 안전성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OECD “내년 G20 성장률 3.8% 전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1일 주요 20개국(G20)이 내년에 3.8%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OECD는 G20 정상회담을 사흘 앞둔 이날 해당 국가들의 경제 전망 및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올해 G20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9%를 기록할 것이며 내년에는 이보다 조금 낮을 것으로 내다봤다. 2013년에는 4.6% 성장을 기록, 3%대 성장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게 OECD의 예상이다. G20 가운데 선진국의 경우 향후 2년간 저성장을 면하기 어려우며 신흥국은 금융위기 이전보다 낮은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고 OECD는 밝혔다. 특히 미국의 올해 성장률은 지난 5월 전망치(2.8%)보다 0.9% 포인트 낮은 1.7%로 관측됐다. 지난 3분기에 예상 밖으로 높은 2.5%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고개를 들고 있는 낙관론을 경계해야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내년 전망치 역시 3.1%에서 1.3% 포인트 하향조정된 1.8%로 예측됐다. 2013년에는 2.5%로 1%대 성장에서 벗어날 것으로 OECD는 내다봤다. 경착륙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중국의 경우 올해의 경우 지난 5월보다 오히려 0.3% 포인트 높은 9.3% 성장을 하지만 내년에는 8.6% 성장에 그쳤다가 2013년에 9.5%로 회복할 것이라고 OECD는 설명했다. 심각한 상황에 빠진 곳은 유로존이다. 글로벌 재정위기의 근원지인 이 지역은 올해는 1.6% 성장을 하지만 내년에는 0.3%로 저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는 “과감한 행동 없이는 경제 전망은 우울하다.”면서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의 즉각적이고 강제적인 이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서울광장] 부의 양극화와 부자증세/주병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부의 양극화와 부자증세/주병철 논설위원

    유럽발 재정위기로 글로벌 경제가 연일 멀미를 한다. ‘롤러코스트 경기’다. 미국·유럽은 재정위기와 단일통화체제 문제로, 중국은 긴축정책 지속에 따른 성장세 둔화로, 일본은 경기침체 장기화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왜 이렇게 깊은 늪에 빠져들고 있을까. 최근 경제학자와 전·현직 경제 관료들은 미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UC버클리대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저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단초라고 한다. 라이시 교수는 지금의 경제위기는 근원적으로 부와 소득의 양극화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양극화의 주범은 세계화와 정보통신(IT)이라고 지적한다. 그동안 주택가격의 상승과 막대한 국가재정 투입으로 경제(소비시장)가 지탱돼 왔는데, 2000년대 들어 각국마다 재정이 거들나기 시작하고 부동산가격의 거품이 붕괴되는 가운데 심각한 부의 쏠림현상으로 소비시장이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 경제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2007년 기준 미국의 총소득 가운데 상위 1%에게 돌아간 몫이 23%를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상위 0.1%가 전체의 11%, 상위 10%가 50%를 차지했다. 부가 편중되면 소비시장은 죽게 돼 있다. 부자가 하루 세 끼 이상을 먹을 수 없는 논리에 비유된다. 따라서 중산층 이하의 자산이 감소되고 나라의 곳간이 비게 되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둬 이를 메우는 방법이 현실적이라는 게 라이시 교수의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위기도 미국과 사정이 비슷하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종합소득세 신고자 중 상위 20%의 1인당 소득액은 1999년 5800만원에서 2009년 9000만원으로 10년 새 55%가량 늘었다. 하위 20%는 306만원에서 199만원으로 54%가 급감했다.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보다 45배나 많다. 계층별 소득비율에서는 양극화 정도가 더 심하다. 2009년 종소세 신고자의 총소득 금액은 90조 2257억원인데, 상위 20%가 가져간 소득금액은 64조 4203억원으로 71.4%에 이른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의 과실이 고소득자에만 집중되는 구조적인 문제 탓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미국·유럽의 재정위기와 비교하면 양호하다. 국가채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98%)과 비교했을 때 33% 수준으로 재정건전성이 건실하다. 거시정책수단인 재정,환율, 통화정책 운영 여건도 다른 나라에 비해 낫다. 문제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중산층과 서민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득을 늘려 소비여력을 키워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부의 양극화 해소가 급선무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그래서 이참에 부의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부자 증세를 논의해 봤으면 한다. 경제 전문가와 전직 경제 관료들은 부자 증세가 양극화 해소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자 증세 문제를 ‘진보진영은 증세, 보수진영은 감세’라는 이분법적이고 이념적인 잣대로 들이댈 사안은 아니다. 지금은 누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과세표준 8800만원 이상의 경우 최고세율 35%만 적용받는다. 그래서 8800만원에서 2억원, 2억~5억원, 5억원 이상 등 과세표준 구간을 넓히고 그에 따른 세율도 40%, 50% 등으로 높이면 누진세율이 제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비과세 공제 등을 없애 실효세율과 명목세율을 비슷하게 하는 방안도 거론한다. 조세 공정성과 세수 확보 차원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2010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조 143억 달러로 세계 15위다. 하지만 고령화사회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복지예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소득과 부의 양극화도 쉽게 줄어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국가 재정이 어려우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둘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세금을 더 낼 사람이 수긍하고, 세금 많이 내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면 못할 것도 없을 듯싶다. 부자 증세를 공론화해 볼 때가 됐다. bcjoo@seoul.co.kr
  • ‘안철수 열풍’ 차갑게 읽기

    요즘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안철수’다. 정치판에서 시작된 ‘안철수 현상’은 사회 전 부문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이재훈 외 3명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는 이 같은 ‘안철수 현상’의 의미를 짚은 책이다. 책은 안철수를 키워드 삼아 우리 사회와 정치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목적을 뒀다. ‘안철수 현상’의 바닥에 깔려 있는 대중심리, 그가 던진 메시지의 해석, 보수 언론과 프레임의 정치에 대한 해설, 안철수가 정치판에 나설 경우의 가상 시나리오 등을 각각 4개의 파트에 담았다. 첫 번째 저자로 나선 한윤형은 “얼마 전까지 정치인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을 불과 얼마 만에 유력한 대선 주자로 변태시키는 강력한 에너지의 근원을 곰곰 분석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의 정치를 논할 자격도 없는 것 아닐까.”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김민하는 20대에 주목한다. 그간 한국의 선거는 보수적인 50대 이상 연령층과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30~40대가 허리 역할을 하며 사실상 결과를 결정해왔다고 진단한다. 안철수가 청춘콘서트에서 보여준 것 같은 소통력으로 20대를 대거 투표장으로 불러들인다면 지금까지의 선거판 상식은 뒤집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안철수를 통해 이 땅에 선거제도가 도입된 이후 최초이자 최대의 정치실험이 예고된다고 그는 진단한다. 안철수의 메시지 분석을 맡은 이재훈은 안철수를 ‘반칙 사회가 낳은 원칙의 아이콘’이라 본다. 그는 안철수가 가진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그를 ‘재수 없어’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은 반듯한 도덕 선생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상대에게는 자신과 함께 반듯해야 한다는 강박을 안겨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완은 안철수의 등장으로 선거가 ‘박근혜 대세론’에서 ‘반MB’ 또는 정권 심판론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석한다. 아울러 안철수가 본격적으로 선거에 뛰어들면 주류 언론이 색깔 공세를 펼칠 것을 과거 사례를 들어 전망하고 있다. 저자들이 안철수를 좋게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좀 더 자세한 정책 각론을 내놓아야 할 때라는 지적과 함께, 안철수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에게 ‘안철수식 성공 모델’에 환각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아울러 안철수가 윤여준을 ‘자른’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 호남 민중에 대한 이해 부족의 가능성 등도 현실 정치인으로서 결격 사유로 꼽는다. 1만 4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Weekend inside] 불출마 선언에도… 美 대선 ‘힐러리 바람’ 왜?

    앞으로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의 인기가 식을줄 모르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힐러리가 내년 대선 1대1 가상대결에서 민주당 후보로서 공화당의 선두권 대선 주자들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힐러리는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에게 지지율이 55% 대 38%로 17% 포인트 앞섰다. 반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롬니에게 불과 3% 포인트 앞서는 데 그쳤다. 힐러리는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와의 가상대결에서도 58% 대 32%로 26% 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반면 오바마는 페리에게 12% 포인트 우위를 보였다. 오바마의 지지율이 급락한 지난 8월부터 내년 대선을 겨낭한 ‘힐러리 대안론’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자, 지난 17일 힐러리는 “나는 구식인물”이라며 내년뿐 아니라 2016년 대선에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이쯤 되면 지지율이 수그러들만도 한데 오히려 더 올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타임은 “올해 64세인 힐러리는 2016년엔 69세가 된다.”며 “인기의 근원을 추측하지는 않겠다.”는 말로 ‘기현상’이라는 시각을 내비쳤다. 사실 ‘힐러리 바람’은 정치권의 통념상 특이한 경우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이 라이벌 밑으로 들어가 부하 역할을 하면 종속 변수가 되면서 왜소화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실제 힐러리는 장관으로서 오바마에게 한번도 반기를 든 적이 없고 대통령을 깍듯이 예우하는 처신을 보였다. 힐러리 바람의 근저에는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와 접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데 따른 아쉬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미국 정치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오바마 정부 아래서 경기침체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차라리 그때 힐러리를 뽑았더라면….”이라는 심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례없는 경제호황을 이끌었던 빌 클린턴 정부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져 있을 수 있다. 경선 패배 후 힐러리가 보여준 처신이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는 평가도 있다. 힐러리는 대선 본선에서 오바마의 승리를 도왔고, 오바마 취임 후에는 국무장관으로서 권력투쟁에 발을 담그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이런 모습들이 그의 카리스마를 더욱 키웠다는 것이다. 물론 공화당 대선 주자들 가운데 딱히 마음을 끄는 인물이 없다는 점도 힐러리 바람을 키우는 요인일 수 있다. 타임은 그러면서 “힐러리는 T S 엘리엇의 시 ‘이스트 코커’(East Coker)의 ‘저항에 맞서 거듭거듭 시도한다.’는 내용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에 대해 생각해 왔는지를 시사한다.”며 대권을 향한 힐러리의 꿈이 계속될 것이란 시각을 넌지시 내비쳤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사설] ‘분당 패배’뒤 놓친 국정쇄신 마지막 기회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다음 날인 어제 아침 일찍부터 모였다. “책임을 통감한다.” “통렬하게 반성한다.” “쇄신해야 한다.”는 등 자성과 각오가 쏟아졌다. 지난 4·27 경기 분당 보궐선거 참패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발언들이다. 10·26 재·보궐선거 뒤에도 똑같은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6개월 동안 허송세월만 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6개월 전에는 이번 재·보선이라는 기회가 있었다. 이젠 내년 4월 총선, 12월 대선밖에는 없다. 앞으로 남은 6개월이 여권에는 마지막 기회다. 돌아선 민심을 다시 되돌리려면 전면 쇄신하는 길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당에는 원인 진단부터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기조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이 패배의 근원이다. 한나라당은 이를 바로잡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력감만 드러냈다. 그런 터에 내곡동 사저 논란과 측근 비리 의혹은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이런 패배의 출발점을 비켜 나간 채 반성을 외쳐봐야 공허할 뿐이다. 기초단체장 8곳을 석권했다고 해서 서울의 패배를 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졌다고 할 수 없다는 안이한 발언으로 뭇매를 맞는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책임 회피성 자세로는 위기 극복의 단초를 찾을 수 없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7·4 전당대회를 통해 출범한 이후 3개월 반을 허비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휘말리고, 재·보선에 매달리느라 민생을 외면했다. 이제는 그들의 고통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대학생,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 일용직, 저소득층에게는 좌·우 논쟁도, 정치꾼들의 공방도 의미가 없다. 오로지 뛰는 물가를 잡고, 전·월세난을 덜고, 일자리를 만들고, 등록금을 낮추고, 복지 혜택을 받는 생활경제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를 쇄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한나라당이 인적 쇄신 방안을 놓고 내홍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도부 총사퇴, 청와대 참모진 개편, 공천 개혁, 인재 영입 등이 방법론으로 제기된다. 인적 쇄신만으로는 변화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사람 바꾸기란 겉치레에 치중하지 말고 질적·제도적으로 확실히 쇄신해야 한다. 여권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사즉생’의 각오로 살려주기 바란다. 지리멸렬한 여권은 국민의 삶을 더욱 힘들고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열린세상] 존재감과 행복한 노후/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존재감과 행복한 노후/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어머니는 연세가 여든 여섯이다. 몇 년 전에 심장수술을 하셨고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동년배 친구분들에 비하면 건강한 편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으며, 보청기 없이 대화가 가능하고, 갈비도 1인분 정도는 너끈히 소화하시며, 기억 등의 인지능력 역시 정상이다. 어머니의 노후생활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지난 이십년간 끊임없이 불평을 해 오셨다. “우두커니 앉아 있기 싫다.”는 것이다. 그것은 “삭신이 쑤신다.”거나 “외롭다.”거나 아니면 “용돈이 모자란다.”는 상식적인 불평보다 훨씬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언제나 무슨 일인가를 하셨다. 고령의 나이에도 손주를 돌보고 옛날 옷을 꺼내 고치고 하다못해 가구의 위치를 바꾸기라도 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도 요리를 하실 때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러시나 의아했다. 어머니 성격 탓이려니 했다.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매일매일 일을 하고 싶어하시는 어머니가 야속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의 불평이 존재감 상실의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안다. “우두커니 앉아 있기 싫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다. “나 아직 죽지 않았다.”라는 전언의 다른 표현이다. 존재감이란 말은 요즘 우리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이다. 국어사전은 존재감을 사람이나 사물이 실재로 있다는 느낌이라고 정의하지만 통상 그것은 자아감이나 자존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존재감이란 것은 사실상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그 근원은 플라톤의 ‘국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그리스어의 티모스(thymos)를 언급한다. 혈기, 생명력, 원기, 기개, 등으로 번역되는 티모스를 사회심리학자들은 타인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근원이라 간주한다. 인간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동일한 정도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노인들이야말로 존재감에 가장 민감한 연령층이라 할 수 있다. 건강도, 경제적 여유도 예전만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존재감에 신경을 쓴다. 흔히 노인들을 괴롭히는 세 가지 요인으로 질병, 빈곤, 고독을 손꼽는다. 그동안 고령화사회와 관련하여 쏟아져 나온 무수한 연구와 정책들 대부분이 노인 질병관리와 경제적 자립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도 이 점을 반영한다. 그러나 건강과 돈은 행복의 수동적인 조건이다. 수동적인 조건들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조건, 즉 존재감 확보가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한 노후는 완성되기 어렵다. 노년층이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일자리다. 할 일이 있는 노인은 행복하다. 자신이 무언가에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노인들의 행복감은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사실 노인 고용은 그동안 끊임없이 논의되어온 문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인 고용 증진과 고령자친화형 일자리 창출, 노인 창업기회 확대 등이 논의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노인 고용이 소외계층에 대한 선심성 일자리 제공처럼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동기 부여와 목표 설정, 적절한 보상과 성취감 같은 것들이 노인일자리의 수와 종류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어야 한다. 노인들의 재취업은 평생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기회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래야 존재감과 행복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2010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자는 542만 5000명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1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55세부터 79세까지의 노인 중 일하고 싶다고 응답한 사람은 거의 60%에 육박한다. 이 수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제 각계의 지혜를 모아 고령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도 하고 존재감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고령자 취업문화에 관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10월은 경로의 달이다. 노인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방법 중 가장 으뜸인 것은 아마도 그의 존재감을 인정해주는 것이리라.
  • [데스크 시각] 페어플레이/김영중 체육부장

    [데스크 시각] 페어플레이/김영중 체육부장

    지난 9월 17일 미국 뉴욕 맨해튼 증권거래소 근처의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된 ‘1%에 대한 99%의 분노’ 시위가 전 세계로 번졌다. 미국에서 폭발한 분노는 이제 유럽을 휩쓸고 아시아를 들끓게 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전 세계에서 이에 동조하는 집회가 열렸다. 분노의 근원은 월가로 상징되는 미국 금융계의 행태였다. 사상 유례없는 금융위기를 촉발해 세계 경제를 불황의 수렁에 빠뜨리고 서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책임은 지지 않는 이들의 행태에 사람들의 쌓였던 화가 폭발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공적자금을 받고도 천문학적인 급여에 보너스 잔치까지 벌이며 흥청망청한다는 소식에 할 말을 잃게 한다. 이들은 손실을 공익화하면서 이익은 사유화한 것 아닌가. 모럴 해저드란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마련됐을 터다. 스포츠의 영역으로 옮긴다면 정정당당한 대결로 해석하는 ‘페어플레이’(Fair Play)의 실종이라 할 수 있겠다. 스포츠에서는 선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페어플레이다. 페어플레이가 실종된 스포츠는 경기가 아니다. 단지 진흙탕에서 싸움을 벌이는 꼴이다. 월가의 시위는 1%의 금융계가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직도 경제위기의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99%’ 시민들이 반발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고개를 안으로 돌려보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현 정부가 내건 공정사회 구호가 무색하게 사회 곳곳에선 페어플레이가 실종된 모습을 수없이 목도할 수 있다. 대기업이 자신들의 우월한 자금과 지위를 내세워 중소기업 영역까지 진출하고, 골목상권에까지 침범하고 있지 않은가. 서민들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떡볶이마저 대기업의 체인 사업이 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축구 경기에서 발생한 집단 난투극이 오버랩됐다. 지난 19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수원과 알사드(카타르) 간의 경기에서였다. 상대 선수를 배려하지 않은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경기 중반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알사드가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축구에서는 선수가 부상으로 쓰러지면 공을 가진 팀이 공을 아웃시켜 경기를 중단시킨다. 선수를 치료하고 나서 경기가 재개되면 상대방이 다시 공을 라인 밖으로 차내 공격권을 상대방에 넘겨주는 게 경기 관례인 신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알사드는 이를 무시하고 갑자기 공격을 개시했고, 당황한 수원은 골을 허용했다. 결국 수원은 0-2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법치 운운하면서 사회의 모든 것을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념과 소득 등이 다원화되고 자유화된 요즘 사회에선 법이나 제도만으론 모든 것을 통제하기는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규제가 많을수록 사회적인 낭비가 더욱더 커진다는 것은 흔히들 지적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인간의 본성을 믿는 수밖에 없다.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다. 월가 금융계의 탐욕은 경제위기를 일으키고, 배려가 없어져 버린 스포츠는 난투극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그래서 페어플레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이다. 공생하자는 의미에서 더 그렇다. 기업은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고 개인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이다. 하지만 페어플레이를 밑바탕으로 깔고 이뤄져야 한다. 무한 경쟁의 현대 사회에서 배려는 감동을 주고 정정당당한 승부가 이뤄진다면 패자의 사회에 대한 불만도 상당부분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월가 시위대가 행사 마지막에 부르는, 우디 거스리가 가사를 붙인 미국의 유명한 포크송인 ‘이 땅은 너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을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이 땅은 너의 땅, 이 땅은 나의 땅이다.…이 땅은 너와 내가 만들었다.” jeunesse@seoul.co.kr
  • 연극 ‘가자! 장미여관으로’ 예술과 쾌락의 줄타기

    연극 ‘가자! 장미여관으로’ 예술과 쾌락의 줄타기

    농도 짙은 베드신을 볼 때 반응은 두 가지다. 두 육체가 빚어낸 아름다움에 가슴이 저릿하거나 아니면 머리가 텅 빈 채 침만 꼴깍 넘어가거나. 우리는 쉽게 전자를 예술이라고 하고 후자를 외설이라고 한다. 그렇게만 따진다면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영화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한 연극 ‘가자! 장미여관으로’은 외설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18일 서울 대학로 비너스홀에서 열린 ‘가자! 장미여관으로’ (예술집단 참) 제작보고회는 예상대로 자극적인 성행위 묘사와 출연배우들의 상당한 노출 등을 엿볼 수 있었다. 본 공연에서는 파격적인 전라연기가 등장할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예고됐다. 주연배우인 이파니는 “이미 헤어누드 화보를 공개했기 때문에 전라연기에 특별히 부담은 없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장미여관이란 장소가 풍기는 이미지대로 연극은 도덕적 잣대나 사회윤리 등과는 동 떨진 곳이다. 쾌락으로 시작해 쾌락으로 끝이 난다. 연극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가수 지망생 ‘사라’가 장미여관에서 죽어가는 걸 본 ‘마광수’가 살해 용의자를 불러 모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연출가 강철웅은 “장미여관은 세속적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그런 장미여관으로 불려오는 세 남녀커플은 하나같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인물들을 패러디한다. ‘장자연사건’의 배우와 성접대를 강요하는 기획사 사장, 남제자 여교사 불륜사건의 주인공들, ‘신정아 스캔들’의 신정아와 변양균을 각색한 남녀들도 등장한다. 극에서 신정아를 패러디한 인물의 이름은 ‘정아’다. 사회적 파장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출연인물들은 모두 쾌락을 쫓는 장미여관 투숙객들이다. 연극은 장미여관에서 벌어지는 세 커플의 노골적인 정사신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관객들이라면 적잖이 놀랄 수 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20년 전 원작 시나리오를 현대적으로 각색해 ‘세미뮤지컬’ 표방한다. 10여 곡의 노래를 가미했으며 코믹요소를 삽입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강철웅 연출자는 ‘가자! 장미여관으로’을 두고 “은퇴가 아쉽지 않다.”고 말했다. 남김없이 다 보여줬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제작보고회에서 보여준 4개 주요장면은 아쉬움이 남는다. “어설프게 연기하면 야하게만 보일 수 있다. 제대로 된 모습으로 관객이 노출보다 연기에 집중케 만들겠다.”고 한 이파니의 결심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의 아쉬움의 이유였다.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능가할 완성도가 다소 아쉬웠다. 이 연극은 마광수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고 섹시배우 이파니가 주연을 맡는다는 점에서 초기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가자! 장미여관으로’은 제작보고회에 연극으로는 이례적으로 100명 가까운 취재진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인간의 근원적 쾌락을 그린 성인연극도 예술로 재평가 받을 수 있도록 본공연에는 보다 세밀한 연출과 배우들의 프로다운 표현력이 필요하다. 한편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이파니, 이채은이 사라 역에 더블 캐스팅 됐으며 오성근, 윤시원, 최재웅, 최진우 등이 출연한다. 오는 22일부터 서울 대학로 비너스홀에서 처음으로 관객을 만난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사설] 대통령사저 논란 임기말 처신 교훈 삼아라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 후 사저 신축 논란이 백지화로 교통정리됐다. 이 대통령은 내곡동 사저 대신에 논현동 자택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김인종 청와대 경호처장도 신축 논의를 주도해 온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는 등 일단 수습 수순에 들어갔다. 청와대 측이 계획한 대로 사저 신축을 강행하기에는 무리한 대목이 적지 않은 만큼 지금이라도 포기한 것은 다행이다. 구체적인 후속 방안을 마련해서 깔끔하게 매듭짓기를 기대하지만 그에 앞서 이번 논란을 근원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 때문에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았는지를 직시하고 현 정부의 임기 말 처신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이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신축문제는 처음부터 엎질러서는 안 될 물이었다. 그리고 이왕 엎질렀다면 제대로 주워 담아서 최대한 원상태로 복원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사저 구입 경위와 방식 등을 보면 일반 국민의 눈높이와 너무 동떨어졌다. 호화판 시비를 낳을 수밖에 없던 터에 의혹까지 겹치게 한 데 대해서는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 험한 민심을 미리 예상하고 강행했든, 처음부터 예상치 못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경우가 되든 간에 권력에 취해 오만해졌거나, 안이해진 결과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종착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초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둘째, 사저 신축을 백지화한 것만으로는 미흡하다. 내곡동 부지를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도, 아예 팔아버리는 방안도 적지 않은 문제가 따른다. 그러더라도 논란의 소지를 최소화하려면 전용보다는 매각이 한결 나을 것 같다. 설령 매각이 여의치 않더라도 사익 추구 의혹을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이 대통령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대로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습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외형상 책임을 지는 이는 김 경호처장 1인에 불과하다. 퇴임 후 사저문제인 만큼 이 대통령은 물론이고 일부 참모들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최소한 인지했을 개연성이 높다.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고, 참모들이 과감히 직언하지 못한 것에 실망감도 든다. 남은 기간을 잘 마무리하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더욱 각별한 처신이 요구된다.
  • [글로벌 시대]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다/장홍 프랑스 알자스주정부개발청 자문위원

    [글로벌 시대]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다/장홍 프랑스 알자스주정부개발청 자문위원

    흔히 평등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핵심 사상으로 간주한다. 무한경쟁이 허용되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평등은 어딘가 어색하고 진부한 개념, 심지어 터부의 대상이기조차 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평등은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는 핵심적 가치의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운동도 이런 가치를 근간으로 삼았고, 그러했기에 가능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가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으면서, 불평등 혹은 양극화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고속철처럼 질주해 왔다.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는 그 어느 시기보다 미약했다. 이런 역설적 상황 하에서 위기의식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고, 급기야 올 것이 왔다. 즉, ‘1%에 맞서는 99%’의 월가 시위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의 한 유형으로 정의한다. 국민주권을 근원으로 삼는 제도인데, 국민주권은 선거와 그 밖의 형태로 표현된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가 보편화되었지만, 선거만으로 국민의 일반 의지를 모두 반영할 수 없는 다원적 현대사회 내에서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 등 새로운 유형의 체제 출현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또한 민주주의는 사회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이러한 측면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그에게 민주사회는 ‘조건의 평등’이란 보편적 원칙 위에 구축된 사회였다. 평등이란 본질적으로 사회를 형성하고, 생산하고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살아가게 하는 방식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불평등에 대한 전반적인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와 이를 옹호하고 전파하는 다수 언론은 물론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이 같은 불평등을 집단적으로 수긍하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연봉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대해, 부당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감정이 여론의 대다수를 이루는 것은 여러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이 같은 불평등을 생산하는 요인인, 왜곡된 기회 균등을 주창하는 일부 철학과 지나친 능력 찬양주의 혹은 경쟁의 메커니즘 등에 대해 여론의 수긍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같은 이유로 불평등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생산하고 확대시키는 현 사회제도를 혁신적으로 수정하려는 일반 대중의 저항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지극히 수동적인 형태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작금의 상황은 단지 불평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사회철학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하며, 이를 통해 돌출된 평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사회 속으로 투영하고 실현해야 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경제적인 만큼 지적 궁핍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모두가 함께 사람답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평등에 대한 적극적이면서도 양성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이 탄생해야 한다. 커져가는 불평등 사회와 더불어 사람들은 사회 계층에 따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속한 사회경제적 카테고리 속에 격리되어 살고 있다. 사회적 연대감을 되찾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된 사회를 비상품화 사회로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비상품화는 평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시장의 규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 체제 전반에 대한 재고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보다는 존재에 더욱 비중을 두는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다. 셰익스피어가 이 시대를 본다면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 기준금리 3.25%… 넉달째 동결

    기준금리 3.25%… 넉달째 동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13일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3.25%로 4개월 연속 동결했다. 유럽 및 미국 등 세계경기 침체 우려가 커진 데다 국내 실물지표가 나빠지고 있는 것을 고려한 결과다. 김중수 한은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국제경제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금리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김 총재는 “미국 신용등급 강등 후 미국, 유럽 등의 금융시장 불안을 면밀히 살펴봤으나, 최근에는 금융불안이 실물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금리동결은 위원 모두가 찬성한 만장일치 결과라고 말했다. 금리는 동결됐지만 문제는 역시 물가다. 지난달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월에 비해 1% 포인트 떨어진 4.3%에 그쳤지만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9월 근원물가 상승률은 3.9%로 여전히 높다.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이 ‘4% 물가관리’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 총재는 “금리정상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인도 등이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경기침체를 대비해 금리인하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도 “금통위에서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의견은 없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은이 올해는 아니더라도 내년에 금리 인하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온다. 김 총재는 최근 외환보유액을 금융기관 지원에 써야 한다는 논란에 대해 적절치 않다고 선을 그었다. 국민 모두가 동의하는 위기라는 인식 없이 외환보유액을 쓰긴 어렵다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통화스와프가 필요하다는 데는 중국과 통화스와프는 맺어져 있고, 일본과는 약간의 스와프가 남아 있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기준금리 넉달째 동결...물가 보다 경기침체 우려에 방점

    기준금리 넉달째 동결...물가 보다 경기침체 우려에 방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13일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3.25%로 4개월 연속 동결했다. 유럽 및 미국 등 세계경기 침체 우려가 커진데에다 국내 실물지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결과다.  김중수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제경제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금리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김 총재는 “미국 신용등급 강등 후 미국, 유럽 등의 금융시장 불안을 면밀히 살펴봤으나, 최근에는 금융불안이 실물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금리동결은 위원 모두가 찬성한 만장일치 결과라고 설명했다.  금리동결의 문제는 역시 물가다. 지난달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월에 비해 1%포인트 떨어진 4.3%에 그쳤지만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9월 근원물가 상승률은 3.9%로 여전히 높다.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이 ‘4% 물가관리’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 총재는 “금리정상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인도 등이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경기침체를 대비해 금리인하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도 “금통위에서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의견은 없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은이 올해는 아니더라도 내년에 금리 인하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온다.  김 총재는 최근 외환보유액을 금융기관 지원에 써야 한다는 논란에 대해 적절치 않다고 선을 그었다. 국민 모두가 동의하는 위기라는 인식없이 외환보유액을 쓰긴 어렵다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통화스와프가 필요하다는 데는 중국과 통화스와프는 맺어져 있고, 일본과는 약간의 스와프가 남아 있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7) ‘동의보감’ 허준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7) ‘동의보감’ 허준

    허준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모르면 간첩이라는 농담도 안 통한다. 그만큼 범국민적 인물이라는 뜻이다. 물론 친근한 것 이상으로 신비화되어 있기도 하다. 고난에 찬 삶의 역정, 라이벌들의 비방과 음모, 예진 아씨와의 지순한 사랑 등등. 물론 하나같이 소설과 드라마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이 이미지들로 인해 허준은 400여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명의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 화려하고 강렬한 이미지들로 인해 그의 진면목은 봉쇄되어 버렸다. ●허준이 ‘허준’이 된 까닭은? 먼저, 허준의 라이벌 역할을 담당한 양예수는 실제로 허준의 스승뻘이자 당대 최고의 명의였다. 동의보감 편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지만 정유재란 이후 빠졌다. 다음, 많은 이들이 지적했다시피 허준의 스승으로 나오는 유의태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허구적 인물의 등장 자체야 문제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소설과 드라마의 절정에 해당하는,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은 참으로 문제적이다. 이것은 마치 한의학이 미망의 어둠을 거쳐 해부학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학적 편견을 조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예진 아씨와의 러브스토리? 택도 없는 소리다. 사랑이 이렇게 특화된 건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다. 그 이전에는 우정과 의리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다. 20세기 이후 우정이 사라진 자리를 사랑과 연애가 채웠고, 그 결과 허준을 비롯하여 모든 사극의 주인공들은 본의 아니게(?) 사랑의 화신이 되어야 했다. 아무튼 좋다. 허준의 ‘만들어진’ 이미지 가운데 더 결정적인 결락이 하나 있다. 허준이 ‘의성’ 허준이 된 건 명의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슨 소리? 허준이 전통의학의 아이콘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건 의사로서가 아니다. 양예수를 비롯하여, 당대 허준을 능가하는 명의들은 많았다. 하지만 허준처럼 ‘동의보감’이라는 대저서를 남긴 사람은 없었다. 아니, 조선은 물론이고 동양의학사를 다 통틀어서도 동의보감처럼 방대하고 체계적인 의서는 없다. 고로 허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허준’이 된 건 어디까지나 동의보감이라는 저서 때문이다. 허준의 생애는 의외로 드라마틱하지 않다. 양반집 서자로 태어났지만 그것 자체가 특별한 사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원이 되는 과정도 비교적 순탄했다. 사대부 유희춘의 추천을 통해 내의원에 들어갔으며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면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대부 관료들조차 앞다퉈 도망을 갔지만 허준은 선조의 피란길을 동행함으로써 그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서자 출신임에도 종1품 승록대부에까지 올랐다. 이 정도야 뭐,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 밋밋하지 않은가. 이런 허준을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선조다. 더 구체적으론 선조가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맡기면서부터다. 그때 이후, 허준의 이 평범한 ‘성공스토리’는 비범한 삶의 여정으로 변주된다.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렀다. 사람을 살린 것이 부지기수다.”(‘의림촬요’) 허준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자료다. 보다시피 그의 삶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의사 이전에 학문이다. 당대 명망 높은 사대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 또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많은 의서들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 등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학문적 열정과 집념이었다. ●동의보감의 탄생-전란에서 유배까지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어의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명한다. 허준의 나이 58세. 허준의 생애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전란의 와중이었다. 전란 중에 잉태된 의서! -극적이라면 이런 장면이 극적이다. 허준은 그 즉시 유의 정작과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프로젝트팀을 꾸렸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과정은 실로 험난했다. 바로 그 다음해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면서 초기 작업은 중단되었다. 난이 수습되긴 했지만, 프로젝트팀은 해체되었다. 결국 의서의 편찬은 허준 개인의 몫이 되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작업의 속도는 한없이 더뎠다. 그렇게 해서 무려 10여년이 지났다. 1608년 2월 1일. 허준의 생애에, 아니 동의보감 편찬의 여정에 결정적인 변곡점이 찾아왔다. 선조가 승하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선조의 위상은 이중적이다. 선조의 등극과 더불어 조선은 훈구파의 집권이 끝나고 마침내 ‘사림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림 내부의 분화와 갈등이 점화되면서 ‘당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는 특히 북인 안에서 대북파와 소북파의 분화가 심각하게 재연되는 때였다. 대북이란 선조의 후계자인 광해군을 미는 쪽이고, 소북이란 선조가 말년에 낳은 영창대군을 미는 쪽이다. 한데, 하필 선조가 승하할 당시 내의원 전체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도제조가 유영경이었는데, 이 유영경이 바로 소북파의 리더였다. 대북파에서 이 사건을 간과할 리 없다. 어의 허준에게 책임을 묻고 그 책임은 허준의 상관인 유영경에게까지 미쳤다. 허준도 이 숙청의 피바람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지만 광해군한테 허준은 특별한 존재였다. 왕자 시절 두창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할 적에 다른 어의들은 약을 썼다가 허물을 뒤집어쓸까봐 망설였지만 허준은 과감하게 약을 써서 목숨을 구해주었다.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허준을 적극 방어해 주었다. 이를테면, 허준을 위기에 빠뜨린 것도 의술이었고, 허준을 구해준 것도 의술이었던 것이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래도 유배만은 피할 수 없었다. 69세의 나이로 머나먼 의주땅으로 유배를 가야 했으니, 참으로 고단한 말년이었다. 하지만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두었다던가. 유배기간은 1년 8개월.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이때 한 작업은 전체 분량의 반에 해당한다. 유배지는 그에게 집필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마련해준 셈이다. 대반전! 만약 이 작업이 없었다면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얼마나 억울하고 쓸쓸했으랴. 허준으로 인해 동의보감이라는 비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동의보감은 무엇보다 그 편찬자인 허준의 생을 구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다. 흔히 생각하듯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있었기에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허준과 동의보감이 바로 그런 관계였던 것. 71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돌아오자마자 허준은 후반부 작업에 박차를 가해 마침내 동의보감을 완성해서 조정에 바친다. 시작한 해로부터 따지면 무려 14년의 기나긴 여정이다. 조선으로서도 전란과 정권교체, 당쟁 등으로 이어진 초유의 시간이었고, 허준으로서도 영광과 오욕을 한꺼번에 누린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이후 내의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역병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등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선조는 허준에게 의서편찬을 명하면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기존 의학사의 난만한 흐름을 정리하라는 것, 둘째, 질병이 아니라 수양을 중심으로 한 양생서를 쓰라는 것, 마지막으로 조선의 약재를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 허준은 선조의 세 가지 당부를 훌륭하게 구현해냈다. 먼저, 동의보감에는 의학사의 양대 지존인 ‘황제내경’과 ‘상한론’을 비롯하여 손진인의 ‘천금방’, 이천의 ‘의학입문’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의학사의 최고봉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 바탕 위에서 허준은 오랜 기간 서로 갈라져 온 양생과 의술을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하였다. 즉, 그는 병과 처방이 아니라, 몸과 생명을 전면에 내세웠다. 질병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해서 구성된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로 이어지는 목차는 어떤 의서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분류학의 결정판이다. 아울러 처방과 약재들의 방대한 목록은 자연사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말하자면, 최고의 지적 성취와 가장 대중적인 용법을 두루 갖춘 의서가 탄생한 셈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핵심 키워드는 단연 양생이다. 양생은 단지 임상을 넘어 존재의 우주적 ‘탈영토화’를 꿈꾸는 ‘삶의 기술’이다. 요컨대, 양생이라는 비전 위에서 몸과 우주, 질병과 자연, 생명과 존재의 근원적 일치를 기획했던 자연철학자, 그것이 허준의 진면목이다. 고미숙 감이당 연구원
  •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23)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23)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

    사슴처럼 스트레스에 약한 동물이 또 있을까. 사슴은 정말 소심하고 겁 많은 동물의 대명사다. 그렇게 조심성이 많기 때문에 험난한 산림과 평원에서도 잘 살아 가는 것인지 모른다. 오랜 수의사 생활 동안 이 녀석들이 저녁에 편안히 누워서 잠자는 것을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번에 동물원에 새 식구가 들어왔다. ‘히말라야 타알’이란 녀석 두 마리다. 히말라야 고원 등에서 추위를 이기며 사는 강인한 산양과 동물이다. 그동안 암컷만 있어서 새로 수컷 배필을 마련해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녀석을 건네주는 동물원에서 “무상 분양을 하는 대신에 수컷 두 마리를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한 마리를 더 데려오게 됐다. 문제는 그로 인해 터져 나왔다. 경쟁이 치열한 산양의 특성상 비슷한 또래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을 사이에 두고 평화로울 수 없었다. 결국 수컷 둘을 분리해야 했다. 한 마리를 어디에 둘까 한참을 고민하다 사슴사 옆 칸에 놓아두기로 했다. 낙천적인 히말라야 타알은 혼자 있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사슴사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한참 발정기를 맞은 대장 사슴이 넘버 2인 다른 수사슴을 쫓기 시작한 것이다. 날카로운 뿔로 서로 받아버리면 둘 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결국 넘버 2를 히말라야 타알이 있는 칸으로 피신시키기로 했다. 사단은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히말라야 타알보다 덩치가 큰 넘버 2의 반응은 의외였다. 대장에게 쫓길 때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면서 철창 밖으로 도망치려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로 싸우지는 않으니 저러다 말겠지 하고 퇴근했는데, 다음 날 아침 동물원에선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수사슴이 죽어 있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했기에 부검을 해 보니 위와 장에 작은 출혈반들이 가득했다. 속이 바짝 타는 정도의 긴장감이나 슬픈 일 등이 벌어지면 보통 ‘애간장이 녹는다.’고 한다. 여기서 ‘애’는 우리말로 ‘창자’를 뜻하는데 죽은 사슴이 그런 꼴이었다. 죽음의 원인은 다름 아닌 극도의 공포에 따른 스트레스였다. 얼마 전 TV에서 동물원에서 하얀 사슴이 죽었다는 뉴스를 봤다. 길조(吉兆)를 뜻하는 흰 사슴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탓에 스트레스로 죽었다고 한다. 동물들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자살까지 한다. 물론 동물에게 스트레스가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는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와 긴장이 동물 자신을 보호해 주는 방어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무서운 살인자로 돌변할 수 있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최종욱 광주우치동물원 수의사 lovna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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