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극비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스몰딜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가정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국화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안과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249
  • 아이오와 결전 코앞인데… 클린턴 ‘이메일 망령’ 재부상

    아이오와 결전 코앞인데… 클린턴 ‘이메일 망령’ 재부상

    미국 대선의 본격적인 경선이 시작되는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가 1주일 앞으로 다가온 25일(현지시간) 누가 첫 경선의 승자가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어 뉴햄프셔,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초기 경선주의 결과가 전체 경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후보들이 막판 표심 잡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특히 초기 주(州)들의 여론조사 결과 후보들 간의 지지율이 박빙인 가운데 변수도 적지 않아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날 발표된 CNN의 전국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은 힐러리 클린턴이 52%를 얻어 38%를 얻은 버니 샌더스를 14% 포인트 차로 누르고 1위를 지켰다. 그러나 클린턴이 일주일 전 25% 포인트나 앞섰다는 점에서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아이오와 여론조사에서는 클린턴과 샌더스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고, 뉴햄프셔에서는 샌더스가 이달 들어 실시된 모든 여론조사에서 많게는 27% 포인트 앞서고 있다.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테드 크루즈를 전국 및 지역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형국이다. 특히 아이오와에서 여전히 박빙인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트럼프가 지난 23일 아이오와 유세에서 “내가 총으로 사람을 쏴 죽여도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막말을 한 것에 대한 후폭풍이 거세다. 이에 트럼프는 이날 CNN 인터뷰에서 “농담이었다. 그만큼 내 지지층이 견고하다는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불안한 선두 속 클린턴은 ‘개인 이메일 스캔들’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그의 이메일에서 극비 정보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며 기소 가능성까지 제기된 상황에서 국무부는 아직 공개하지 않은 이메일 5만여 페이지의 공개 시점을 오는 29일에서 한 달 늦춰 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다. 한 달 뒤인 2월 29일은 초기 4개 주 경선이 끝난 시점으로, 정치 쟁점화를 우려한 조치이지만 공화당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와 관련, 클린턴은 이날 아이오와의 한 대학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한 대학생이 “젊은 유권자들은 당신이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자 “선두 주자라서 공격을 당해 왔지만 이에 견뎌 왔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일축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클린턴 밀어주기’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그동안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클린턴에 대해 “매우 영리하고 정책의 내면과 외면을 잘 알고 있다”고 언급, 클린턴에게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보스턴글로브의 클린턴·존 케이식 공개 지지와 디모인레지스터의 클린턴·마코 루비오 공개 지지 등 미 언론의 지지 선언도 관심사다. 최근 무소속 출마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등판 여부와 클린턴의 러닝메이트로 거론되는 ‘히스패닉계 오바마’ 훌리안 카스트로 주택도시개발 장관의 지원 여부 등도 지지율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美 ‘소련 KAL기 격추’ 진상 알고 있었다

    美 ‘소련 KAL기 격추’ 진상 알고 있었다

    1983년 9월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격추한 사건의 진상을 미국이 2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미국은 그동안 “소련이 민간기인 줄 알면서도 공격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사건 발생 2개월여 뒤 미국 정부 고위 관리가 일본 정부 당국자를 만나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미국 정찰기로 오인해 소련 영공에서 공해상으로 막 나가려던 참에 격추했다’고 말한 기록이 공개됐다고 24일 일제히 보도했다. 이 같은 기록은 이날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외교 문서에서 확인됐다. 1983년 11월 14일자로 작성된 이 ‘극비’ 메모에선 ‘소련 측이 미국 정찰기 항적에 약 15분 후에 들어온 대한항공기를 미군기로 오인했다’는 미 정부 고위 관료의 발언이 담겨 있다. 이 관료는 ‘소련의 레이더 3대 중 1대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소련 측이 오인한 이유를 설명했다. 또 ‘미사일이 2발 발사됐고 대한항공기가 11분간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급하강하다가 추락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문서에 기재돼 있다. 공개된 외교 문서와 관련해 다수의 일본 언론은 미국이 조기에 일본과 상세한 정보를 공유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달리 아사히신문은 당시 미국이 이런 오인 격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도 ‘민간기인 것을 알고도 공격했다’며 소련을 비난했다고 전했다. 이는 미·소가 대립하던 냉전 시기에 미국이 대외적으로 정보 조작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덧붙였다. 메모가 작성될 당시 일본 외무성 인사과장이었으며 나중에 최고재판소(대법원) 판사를 지낸 후쿠다 히로시(80)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확실히 내가 남긴 기록”이라고 확인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상당한 고위 관료에게서 들은 내용이지만 상대가 누군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 정부도 소련이 민간기를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견해를 취했으나 이에 관해 후쿠다는 “민간기라는 사실을 알고서 격추할 정도로 소련이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대한항공기는 항법 실수를 인식하지 못한 채 정찰기로 오인됐다’는 재조사 결과를 사고 발생 10년 뒤인 1993년에야 공표했다.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 여객기는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사할린 서쪽 해상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무원 29명과 승객 240명 등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1983년 KAL 피격은 소련의 오인 격추”

    1983년 9월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격추한 사건의 대략적인 진상을 미국이 2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아사히 신문 등 일본 언론은 사건 발생 2개월여 뒤 미국 정부 고관이 일본 정부 당국자를 만나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미국 정찰기로 오인해 소련 영공에서 공해상으로 막 나가려던 참에 격추했다’고 말한 기록이 공개됐다고 24일 일제히 보도했다. 이런 기록은 이날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외교 문서에서 확인됐다. 보도에 따르면 1983년 11월 14일자로 작성돼 ‘극비’로 분류된 메모는 ‘소련 측은 미국 정찰기 항적에 약 15분 후에 들어온 대한항공기를 미국기로 오인했다’는 미 정부 고위 관료의 발언을 담고 있다. 이 관료는 ‘소련의 레이더 3대 중 1대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소련 측이 오인한 이유를 설명했으며 ‘미사일이 2발 발사됐고 대한항공기가 11분간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급하강하다가 추락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문서에 기재돼 있다. 공개된 외교 문서와 관련해 다수의 일본 언론은 미국이 조기에 일본에 상세한 정보를 공유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달리 아사히 신문은 당시 미국이 이런 오인 격추 사실을 파악하고도 ‘민간기인 것을 알고도 공격했다’며 소련을 비난했다고 전했다. 이는 미·소가 대립하던 냉전시기에 미국이 대외적으로 정보 조작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메모가 작성될 당시 일본 외무성 인사과장이었으며 나중에 최고재판소(대법원) 판사를 지낸 후쿠다 히로시80)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확실히 나의 기록이다. 미국 정부의 상당한 고관에게서 들은 내용이지만 상대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 정부도 소련이 민간기를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견해를 취했으나 이에 관해 후쿠다는 “민간기라고 알고서 격추할 정도로 소련이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회고했다.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 여객기는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사할린 서쪽 해상에 추락해 승무원 29명과 승객 240명 등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1983년 KAL 피격 미국, 일본에 “소련 오인 격추” 알려

    1983년 9월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격추한 사건의 대략적인 진상을 미국이 2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아사히 신문 등 일본 언론은 사건 발생 2개월여 뒤 미국 정부 고관이 일본 정부 당국자를 만나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미국 정찰기로 오인해 소련 영공에서 공해상으로 막 나가려던 참에 격추했다’고 말한 기록이 공개됐다고 24일 일제히 보도했다. 이런 기록은 이날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외교 문서에서 확인됐다. 보도에 따르면 1983년 11월 14일자로 작성돼 ‘극비’로 분류된 메모는 ‘소련 측은 미국 정찰기 항적에 약 15분 후에 들어온 대한항공기를 미국기로 오인했다’는 미 정부 고위 관료의 발언을 담고 있다. 이 관료는 ‘소련의 레이더 3대 중 1대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소련 측이 오인한 이유를 설명했으며 ‘미사일이 2발 발사됐고 대한항공기가 11분간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급하강하다가 추락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문서에 기재돼 있다. 공개된 외교 문서와 관련해 다수의 일본 언론은 미국이 조기에 일본에 상세한 정보를 공유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달리 아사히 신문은 당시 미국이 이런 오인 격추 사실을 파악하고도 ‘민간기인 것을 알고도 공격했다’며 소련을 비난했다고 전했다. 이는 미·소가 대립하던 냉전시기에 미국이 대외적으로 정보 조작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메모가 작성될 당시 일본 외무성 인사과장이었으며 나중에 최고재판소(대법원) 판사를 지낸 후쿠다 히로시80)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확실히 나의 기록이다. 미국 정부의 상당한 고관에게서 들은 내용이지만 상대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 정부도 소련이 민간기를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견해를 취했으나 이에 관해 후쿠다는 “민간기라고 알고서 격추할 정도로 소련이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회고했다.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 여객기는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사할린 서쪽 해상에 추락해 승무원 29명과 승객 240명 등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19금’ 죄 고백하고 신부님 반응 비밀녹음한 남녀 결국…

    ‘19금’ 죄 고백하고 신부님 반응 비밀녹음한 남녀 결국…

    가톨릭 총본산이 자리 잡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지금 ‘성당의 섹스’ 논쟁이 한창이다. 두 남녀 저널리스트가 고해소에서 가공(架空)의 섹스 참회를 하여 이에 대답한 점잖은 신부들의 반응을 녹음,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영혼의 스파이’로 심판한 후 파문을 선언. ●남녀가 섹스참회 각본 짜 다채로운 신부 반응 들어가톨릭교의 신자와 신부 단 두 사람이 은밀한 교회의 고해소에서 행하는 죄의 참회인 고해성사는 가장 엄숙한 교회의 의식이다.신자는 하느님과 그 권위를 대리한 고해신부에게 자신이 범한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 신부는 그 죄에 대한 조언과 사면을 해준다. 로마 가톨릭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비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이 고해의 비밀은 죄를 고백한 신자와 그것을 들은 신부 두 사람만이 간직할 뿐 결코 밖으로 누설되어서는 안된다.고해의 비밀보안이 가톨릭교의 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 이 가톨릭탄생 이후 부터의 극비가 놀베르트 파렌치니와 클라라 디 메리오라는 두 젊은 남녀 저널리스트에 의해 깨지고 만 것이다.그렇다고 남의 고해를 엿듣고 공개한 것은 아니다. 이 두 남녀는 스스로 꾸민 섹스 행각의 각본을 성스러운 고해소에서 고해신부에게 털어놓고 신부의 반응을 일일이 녹음한 후 ‘성당의 섹스’라는 단행본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들이 꾸민 고해의 내용이 섹스에 관한 것이고 이에 대한 신부의 반응이 다채로워 이 단행본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게 된 것이다.이들의 섹스죄 고해행각은 이탈리아 전역의 교회에 걸쳐 행해졌다. 각본인 줄은 꿈에도 모를밖에 없는 신부와의 진지한 대화를 낱낱이 비밀 녹음했는데 무려 632편에 이른다니 그 양도 놀랍다. 이 가운데 흥미 있는 것으로 112편을 재편집, 지난 3월 23일 이탈리아 북부도시인 파드파라는 곳의 말시리오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는데 초판 3000부는 그야말로 날개가 돋친 듯 몇 시간만에 매진되는 성황을 이루었던 것. ●단행본 엮은 ‘성당의 섹스’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단행본이 되어 나오기 전에 ‘에스 플레스’라는 주간지가 14페이지에 걸쳐 특집을 했기 때문에 구미가 바짝 당긴 독자들이 출판사 앞에 모여들어 앞을 다투어 사간 것이었다.‘성당의 섹스’에 실린 대화 내용의 한 예를 보면….밀라노의 생주세페 교회의 고해소에 파렌치니가 나타난다. 그는 연인과 혼전육체 관계를 가졌다고 고해신부에게 고백을 한다. “혼전교섭은 두 사람의 성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했다”고 신부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신부가 그러다가 어린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녀가 임신하지 않는 시기를 택했다고 고백.“언제나 당신들은 완전한 성행위를 하는가.”“물론이지요.”“다시 말해서 당신의 섹스를 여성의 그 속에 완전히 넣는다는 건가?”“물론 그래야지요.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여기에서 신부와 신자 사이에는 욕망은 눌러야 한다느니 누르기가 어렵다느니 섹스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마침내 신부가 “욕망을 누르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그렇다면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이렇게 진전되자 당황한 신부는 자기는 그런 것을 모른다고 잘라 말한 뒤 거리의 여자도 있지 않느냐고 얼떨결에 말한다. 꼬투리를 잡은 그가 신부께서 창녀와의 섹스를 권하는 것이냐고 따지니까 궁지에 몰려 마침내 “만약 당신이 혼전교섭을 정당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념 어린 투로 결론짓고는 기도문을 다섯번 외라고 지시하는 것이다.대부분이 섹스에 대해 어둡고 경건한 신부들이라 이들의 대담한 고백에 당황하기가 일쑤였는데 더러는 상당히 호기심을 갖고 묻는 신부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모데나의 텐피오 모뉴멘타레 교회에서의 일이다.피렌치니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 자처하고 아내와의 피임에 대해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임신을 하지 않게 기술적으로 성교를 하면 어떤가라고 물은 것이다. 신부의 말은 단호히 ‘노’. 도대체 그런 성교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정자가 여체 속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그렇다면 정자를 어디다 배출한다는 것인가?” ●고해실의 비밀 모독했다고 파문 선언“섹스행위의 클라이맥스 때 아내로부터 그것을 빼내는 것이지요.”이런 대답에 대해 신부는 그런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분노한다. 피임약을 써도 안된다고 한다.“임신을 피할 수 있는 날을 택해서 하면 좋지 않은가? 여성의 임신 기간은 한 달 동안 4일있을 터인데”이런 신부의 말에 반드시 그날 임신을 꼭 안 한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따지면서 역시 안전한 방법은 행위 도중에 빼내는 것이 제일이라고 우긴다. 사려에 잠긴 신부가 마침내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만약 당신 아내가 그것을 요구하면 그래도 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죄는 아내에게 있기 때문이다.”신부는 가정의 평화를 중요시하는 가톨릭의 교시를 적용했다.똑같은 경우의 고해를 이번에는 다른 교회에서 여자인 메리오양이 했다. 자기와 남편은 임신을 피하기 위해 불완전한 성교를 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남편은 어떻게 요구하든 당신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당신까지 죄를 짓게 되고 파문된다. ‘빨리 빼세요’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잠자코 남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그래도 혹시나 임신을 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남편에게 그렇게 말해야 하거든요.”대답하는 신부도 요령이 좋아서 제각기 고해하는 측에 유리하게 대답해 주고 있다.‘성당의 섹스’라는 이 단행본의 서문은 페이르 돈데노라는 저널리스트가 썼는데 그는 이 기록을 높이 평가하면서 “참회자와 신부가 마음속을 털어놓고 한 이런 대화야말로 사회문학적 텍스트로서 가치가 있다”고 극찬.그러나 바티칸의 노여움은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 바티칸의 신문은 ‘성당의 섹스’가 거짓투성이의 악서이며 이것을 만든 두 남녀 리포터는 ‘영혼의 스파이’라고 지탄했다. 교황 바오로6세는 테이프 레코드로 고백실의 비밀을 모독한 그들은 자동적으로 교회에서 파문된다고 언명했다. 이 밖에 기독교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도 일제히 비난을 쏟고 ‘성당의 섹스’의 판매 금지를 외치고 있다.기자회견을 통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현대의 고백실에서 신부와 신자사이의 대화의 어려움을 우리들은 생생히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스캔들로 취급해서는 곤란하지 않는가. 신자들의 토론 재료로 했으면 좋겠다”고.어쨌든 지금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전역이 떠들썩하다.정리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서울신문은 1960~70년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다양한 기사들을 새로운 형태로 묶고 가공해 연재합니다. 일부는 원문 그대로, 일부는 원문을 가공해 게재합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당시의 우리 사회 모습을 현재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원문의 표현과 문체를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부는 오늘날에 맞게 수정합니다. 서울신문이 발간했던 ‘선데이서울’은 1968년 창간돼 1991년 종간되기까지 23년 동안 시대를 대표했던 대중오락 주간지입니다. <편집자註>
  • 조희팔 사망 미스터리 밝혀지나

    조희팔 사망 미스터리 밝혀지나

    희대의 금융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조씨의 아들에 이어 내연녀를 검거하는 등 사건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대구지검 형사4부(부장 황종근)는 8일 조씨의 내연녀 김모(55)씨에 대해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씨는 조씨가 중국으로 달아난 이듬해인 2009년 국내에서 조씨 측근에게 양도성예금증서(CD) 형태로 10억원을 받아 숨긴 것으로 드러났다. 또 김씨는 2011년 12월 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의 한 가라오케에서 조씨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졌을 당시 현장에 있던 두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검찰은 김씨를 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은닉재산 추적뿐 아니라 조씨를 둘러싼 세간의 의혹을 풀어 줄 핵심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검찰은 지난 7일 조씨의 아들(30)을 구속했다. 조씨의 아들은 2011년 중국에서 도피 생활 중이던 아버지에게 중국 위안화로 12억원을 받아 숨긴 혐의다. 지난해 7월 조씨 사건 재수사가 시작된 이후 조씨의 직계가족과 최측근이 처벌된 것은 처음이다. 이로써 4조원대 다단계 사기극의 실체가 밝혀질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은 지난달 10일 조씨의 ‘오른팔’ 강태용(54)이 중국에서 검거된 뒤 주변 인물의 거주지와 사무실 등 20여곳을 최근 극비리에 압수수색하고 광범위한 계좌추적 과정에서 이들의 혐의를 확인했다. 검찰은 조씨와 다단계 사기 조직 2인자인 강씨가 2008년 중국으로 도주한 뒤 그들과 접촉한 인물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또 범죄수익은닉 등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주변 인물 등 10여명을 출국 금지하고, 대검 계좌추적팀 지원으로 조씨 사건과 관련한 인물의 차명계좌 등에 대해 전방위 추적을 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내연녀 김씨에게 CD를 전달한 인물 등도 수사하고 있다”며 “조씨 아들, 내연녀 등을 상대로 은닉재산 행방, 조씨 위장 사망 의혹, 정·관계 로비 등을 조사한다”고 밝혔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문화 플러스]

    문화창조아카데미 내일부터 입학설명회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년 6학기제로 운영하는 ‘문화창조아카데미’가 입학 설명회 등을 가지며 첫걸음을 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3일 포항공과대를 시작으로 4일 한국예술종합학교, 5일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등에서 순회 설명회를 연다. 문화·예술·기술·인문 등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아우르는 프로젝트 중심의 융합 교육과정이 특징인 문화창조아카데미는 1년차에는 융·복합을 위한 기초 역량과 단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2년차에는 크리에이터(학생)와 교수가 협업해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고 사업화가 가능한 성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 기획, 연구·개발(R&D), 제작, 사업화가 일체화된 혁신적 교육모델을 지향한다. 관련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 홈페이지(http://www.kocca.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회 오사카 한국 영화제 13일 개막 제1회 오사카 한국 영화제가 오는 13일부터 사흘간 일본 오사카시 놀리지시어터에서 열린다. 오사카한국문화원이 주최한다. ‘극비수사’, ‘우아한 거짓말’, ‘아빠를 빌려 드립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화장’, ‘톱스타’가 영화제를 통해 일본에 선보인다. ‘극비수사’ 주연 김윤석과 ‘톱스타’ 감독 박중훈이 각각 13일과 14일에 관객과의 대화를 갖는다.
  • [데스크 시각] 역사를 ‘창조적’으로 배우는 방법/박상숙 국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역사를 ‘창조적’으로 배우는 방법/박상숙 국제부 차장

    “1100명이 바다로 떨어졌지만, 316명만 떠올랐어. 상어가 다 먹어 치웠거든.” 1975년 나온 영화 ‘죠스’에서 퀸트 선장은 식인 상어를 증오하게 된 사연을 괴롭게 회상한다. 영화에서 퀸트는 2차 대전 때 자신이 승선했던 미국 해군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침몰로 상어밥이 된 동료의 복수를 위해 상어 사냥에 나선 것으로 묘사됐다. 허구의 인물이 내뱉은 한마디에는 사실 숨겨진 역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1945년 7월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원자폭탄 수송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두 발을 맞고 12분 만에 가라앉았다. 당시 해군은 극비리에 진행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 계획이 드러날까 우려해 구조 신호를 묵살했고, 망망대해에서 5일을 버티던 장병들은 상어떼의 습격에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영화 개봉 20년이 지난 1996년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 살던 11살 소년 헌터 스콧에게 TV 속 퀸트 선장의 대사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역사 발표회를 앞두고 주제를 찾던 소년은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와 함께 도서관으로 달려간 헌터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관련 자료가 거의 없었다는 것과 당시 함장이었던 찰스 버틀러 맥베이 대령이 사건 은폐를 위한 희생양이 됐다는 점이다. 해군 당국은 침몰을 함장의 부주의 탓으로 몰고 가 그를 군사재판에 넘겨 50년형을 받게 했다. 나중에 무죄 선고를 받긴 했으나 희생자 유가족의 비난과 항의에 괴로워하던 맥베이 대령은 1968년 권총 자살했다. 헌터는 부모와 교사의 격려 속에 남은 생존자 150여명에게 연락을 취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반세기 동안 품고 있던 자료를 기꺼이 내주고, 일부는 소년을 만나 당시 상황을 들려주기도 했다. 인디애나폴리스호 침몰 사건의 진실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헌터는 플로리다주 하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1998년 맥베이 함장의 명예회복을 위한 결의안을 미 의회에 제출했다. 2년 뒤 의회를 통과한 결의안에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맥베이는 사후 32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초등학생의 왕성한 호기심과 집념, 이를 지나치지 않고 조력자 역할을 다한 어른들의 성숙함이 역사를 다시 썼다. 국정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헌터의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교과서 무용론이 나올 만큼 급변하는 교육 환경과 국정 교과서로 돌아가겠다는 복고적 정책의 동거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19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로 무장한 국사책을 열공한 학생들이 이후 가장 반국가적(!) 세대가 된 것만 봐도 ‘올바른 역사’의 앞날은 대충 짐작할 만하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교육으로는 헌터와 같은 아이들을 길러 낼 수 없다. 애국심은 주입식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한 편의 영화를 계기로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면서 참전 용사들의 조국애를 배운 헌터는 현재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다. 헌터의 스토리에 감동한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이 사연을 영화로 만들어 세계에 내다팔 계획이다. 국정이든 검인정이든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고 자유롭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더 시급하다. 그래야만 진실도 밝히고, 애국심도 기르고, 덤으로 부가가치도 창출하게 되면 이 정부가 염불처럼 되뇌는 창조경제도 실현되지 않을까. alex@seoul.co.kr
  • 석유 부자 사우디 국내 유가 올린다

    석유 부자 사우디 국내 유가 올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타다울 증시가 27일 3% 가까이 하락했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사우디 정부가 재정 위기 타개책으로 유류 보조금을 삭감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는 보도가 증시 하락의 기폭제가 됐다. ●국민 생활비 줄여 민심 수습하던 왕정 이미지 타격… 저항 클 듯 이날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은 “휘발유와 전기 등 에너지 가격 인상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AFP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부가 연료 가격의 90%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까닭에 사우디의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6센트(약 180원)에 불과하다. 워낙 가격이 낮아 휘발유 가격을 올리는 게 당장 가계에 큰 부담을 줄 요인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충격은 크다. 산유국인 데다 왕정 국가인 사우디에선 국민의 생활비를 줄여 민심을 수습한다는 이유로 에너지와 생활필수품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펴 왔다. 이런 이유로 1971년 이후 사우디에서는 에너지 가격 인상을 시도한 게 불과 9차례다. 사우디 정부가 유류 보조금 삭감을 검토한다면 그동안 민심 악화를 우려해 다각도로 모색한 자구책들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이 된다. 올해 들어 사우디는 보유 중이던 미국 채권을 팔아 40억 달러(약 4조원)를 조달하는가 하면 최근 6개월 동안 700억 달러(약 79조원) 규모 채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지난달 사우디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비용 삭감 명령을 극비리에 내리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이 입수한 사우디 정부 문서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는 공무용 자동차와 가구를 사기 위한 비용 지출을 금지했고 공무원 승진과 임명도 중단시켰다. ●정부 비용 절감 효과 못 봐… 43달러인 유가 106달러는 돼야 재정 균형 그러나 정부의 비용 절감 노력만으로 사우디의 재정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경고음이 여러 곳에서 울렸다. 2년 가까이 지속되는 저유가로 인해 올해 사우디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1.6%까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에너지 관련 수출로 전체 GDP의 43%를 충당하고 원유에 관련된 수입을 올려 국가 재정의 90%를 감당하는 사우디의 재정이 저유가의 늪에 빠진 결과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선에 머무르면 사우디, 오만, 바레인 등 산유국들이 보유한 현금이 5년 안에 고갈될 것”이라면서 “저유가 지속 전망에 따라 산유국들이 재정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IMF는 사우디가 현 상태의 재정 지출을 감당하려면 유가가 배럴당 106달러가 돼야 한다고 추정했지만 이날 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45.7달러에 불과했다. 저유가 기조가 지속되는 한 사우디 정부가 유류 보조금 삭감을 실행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가운데 보조금 삭감이 실현된다면 사회 불안이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10~2011년 ‘아랍의 봄’ 대열에서 한 발 비켜서 있던 사우디였지만 생활비 부담이 커지면 민심이 동요할 수 있어서다. 사우디의 공식 실업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청년층 실업률이 높아 사회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北김양건, 2007년 청와대 극비 방문”

    ‘8·25’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의 주역인 김양건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직전 청와대를 극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전 통일부 장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정책실장과 함께 쓴 회고록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이같이 밝혔다. 1일 공개된 회고록에서 김 전 원장은 “김양건 부장은 최승철 부부장과 원동연 실장을 대동하고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을 극비리에 방문했다”며 “(2007년) 9월 26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여민1관에서 북측 대표단을 접견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평화 체제 문제와 경제협력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합의서 안에 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북측은 6·15남북공동선언과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선언을 하자는 입장을 보였다고 책은 전했다. 김 전 원장은 “노 대통령은 김 부장 일행에게 직접 남북이 합의해 놓고 이행하지 않는 문제 등을 거론한 뒤 이번 정상회담은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한편 회고록에는 그해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고받은 발언들도 담겼다. 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대해 “쌍방이 힘들게 완성을 시켜서 난 6·15공동선언이 아주 훌륭한 문건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6·15공동선언 5년 동안의 역사 시간을 보면 그저 상징화된 빈 구호가 되고 빈 종이, 빈 선전곽(북한용어로 ‘빈 껍데기’라는 뜻)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北김양건, 2007년 청와대 극비 방문”

    ‘8·25’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의 주역인 김양건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직전 청와대를 극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전 통일부 장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정책실장과 함께 쓴 회고록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이같이 밝혔다. 1일 공개된 회고록에서 김 전 원장은 “김양건 부장은 최승철 부부장과 원동연 실장을 대동하고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을 극비리에 방문했다”며 “(2007년) 9월 26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여민1관에서 북측 대표단을 접견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평화 체제 문제와 경제협력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합의서 안에 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북측은 6·15남북공동선언과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선언을 하자는 입장을 보였다고 책은 전했다. 김 전 원장은 “노 대통령은 김 부장 일행에게 직접 남북이 합의해 놓고 이행하지 않는 문제 등을 거론한 뒤 이번 정상회담은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한편 회고록에는 그해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고받은 발언들도 담겼다. 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대해 “쌍방이 힘들게 완성을 시켜서 난 6·15공동선언이 아주 훌륭한 문건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6·15공동선언 5년 동안의 역사 시간을 보면 그저 상징화된 빈 구호가 되고 빈 종이, 빈 선전곽(북한용어로 ‘빈 껍데기’라는 뜻)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휴대폰 벨소리 화나”...유명 연극배우 전격 은퇴

    “휴대폰 벨소리 화나”...유명 연극배우 전격 은퇴

    휴대전화 벨소리가 반평생 넘게 무대를 지킨 연극배우를 은퇴시켰다. 우루과이의 유명 연극배우 로베르토 존스가 휴대전화와의 싸움(?)에서 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 그는 최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격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이유는 휴대전화였다. 공연 중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지켜워 은퇴를 결정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존스는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포기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관람석에서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하거나 끄지 않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으니 내가 무대를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은퇴 결정에는 최근의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인터뷰 1주 전 '보르헤스의 기억'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했다. 세계적인 문학가 호르헤 보르헤스의 생을 그린 작품이다. 존스는 최선을 다해 작품을 준비했지만 공연은 악몽으로 남았다. 공연 중 2번이나 울린 휴대전화 벨소리 때문이다. 그는 "연기에 집중했지만 한순간에 집중력이 허물어졌다. 그 일이 있은 후 너무 화가 나 건강까지 나빠졌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존스는 휴대전화 벨소리 사건 후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눈밑으로 출혈이 있었다. 다음 번엔 뇌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공연 중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존스는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그는 "공연을 할 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는 무대에 선 배우의 뺨을 때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면서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의 감성적 소통은 생명과 같은 것"이라면서 "휴대전화로 공연을 방해하는 관객과는 절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한편 존스가 공연 중 휴대전화 벨소리를 이유로 53년 연기 인생을 접기로 하자 우루과이 연극비평가협회는 당국에 관련법 제정을 요구하기로 했다. 협회 관계자는 "공연 시작 전 휴대전화 전원을 끄라는 안내를 하고 있지만 의무규정이 아니라 효과가 없다"면서 "관련법을 제정해 위반하는 관객은 강제 퇴장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엘옵세르바도르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유명 연극배우 “휴대전화 벨소리 짜증나!” 은퇴

    유명 연극배우 “휴대전화 벨소리 짜증나!” 은퇴

    휴대전화 벨소리가 반평생 넘게 무대를 지킨 연극배우를 은퇴시켰다. 우루과이의 유명 연극배우 로베르토 존스가 휴대전화와의 싸움(?)에서 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 그는 최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격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이유는 휴대전화였다. 공연 중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지켜워 은퇴를 결정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존스는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포기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관람석에서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하거나 끄지 않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으니 내가 무대를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은퇴 결정에는 최근의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인터뷰 1주 전 '보르헤스의 기억'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했다. 세계적인 문학가 호르헤 보르헤스의 생을 그린 작품이다. 존스는 최선을 다해 작품을 준비했지만 공연은 악몽으로 남았다. 공연 중 2번이나 울린 휴대전화 벨소리 때문이다. 그는 "연기에 집중했지만 한순간에 집중력이 허물어졌다. 그 일이 있은 후 너무 화가 나 건강까지 나빠졌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존스는 휴대전화 벨소리 사건 후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눈밑으로 출혈이 있었다. 다음 번엔 뇌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공연 중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존스는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그는 "공연을 할 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는 무대에 선 배우의 뺨을 때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면서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의 감성적 소통은 생명과 같은 것"이라면서 "휴대전화로 공연을 방해하는 관객과는 절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한편 존스가 공연 중 휴대전화 벨소리를 이유로 53년 연기 인생을 접기로 하자 우루과이 연극비평가협회는 당국에 관련법 제정을 요구하기로 했다. 협회 관계자는 "공연 시작 전 휴대전화 전원을 끄라는 안내를 하고 있지만 의무규정이 아니라 효과가 없다"면서 "관련법을 제정해 위반하는 관객은 강제 퇴장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엘옵세르바도르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김혜선 열애, 일반인 사업가와 열애 “결혼 계획은 없다” [공식 입장]

    김혜선 열애, 일반인 사업가와 열애 “결혼 계획은 없다” [공식 입장]

    ’김혜선 열애’ 배우 김혜선이 일반인 사업가와 열애중이다. 14일 김혜선 소속사 런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김혜선 본인에게 확인 결과, 김혜선은 현재 일반인 사업가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다. 교제 기간은 약 1년여 정도 됐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이날 열애를 인정하면서 “나이가 있는 만큼 진지하게 교제중인 것은 맞지만, 아직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김혜선의 연인에 대해서는 “성실한 일반인 사업가다. 호남형이고, 돈이 많은 분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다. 김혜선이 힘들 때 옆에서 많이 보듬어주고, 일하는 것도 응원해준 자상한 사람이다”고 설명했다. 김혜선이 현재 출연 중인 SBS ‘불타는 청춘’ 출연과 관련해 서는 “프로그램이 짝짓기 연결 콘셉트가 아니지 않나. 물론 출연자 중 자연스럽게 러브라인이 있는가 하면 없는 사람도 있다. 하차와 관련해서는 제작사의 결정을 따를 것이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김혜선은 일반인 사업가와 결혼을 전제로 열애 중이라고 보도되며 결혼설에 휩싸였다. 김혜선은 지난 1995년 결혼한 김혜선은 8년 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2003년 이혼했다. 이후 2004년 네 살 연상의 사업가와 극비리에 재혼을 했으나 2007년 또 다시 이혼하며 두 번의 큰 아픔을 겪었다. 김혜선 열애, 김혜선 열애, 김혜선 열애, 김혜선 열애, 김혜선 열애, 김혜선 열애, 김혜선 열애 사진 = 서울신문DB (김혜선 열애)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울광장] 가보지 않은 길에 나선 한국외교/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가보지 않은 길에 나선 한국외교/오일만 논설위원

    톈안먼 성루는 중국 외교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톈안먼 성루에서 투영되는 모습은 중국의 국가전략을 읽을 수 있는 풍향계가 되기도 한다. 45년 전인 1970년 10월 1일, 톈안먼 성루로 가 보자. 중국 건국 21주년 기념식을 주관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마오는 한국전쟁에서의 무력충돌 이후 중국의 주적이었던 미국과 관계 개선을 내심 원했고 의도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미국인 기자를 초청한 것이다. 불행히도 미국은 마오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 달 후 마오는 다시 스노를 초청해 장시간 환담을 하면서 “닉슨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얘기를 하다가 뭔가 성사가 돼도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는 비밀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오의 의중은 미국에 전달됐고 이듬해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의 극비리 베이징 방문으로 이어진다. 1972년 마오·닉슨 정상회담에 이어 1979년 역사적인 미·중 수교로 매듭이 된다. 45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전승절 70주년 행사를 치르면서 톈안먼 성루에 박근혜 대통령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지근 거리’에 세웠다. 미국 동맹국 가운데 유일하게 참석한 박 대통령이 톈안먼 성루에 서서 중국군 열병식을 지켜보는 장면이 동아시아의 획기적 정세 변화를 알리는 상징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 언론들은 ‘한·중 신(新)밀월 시대’의 도래라고 흥분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우선 우리가 처한 사실을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접점이 됐고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은 강대국들은 늘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이용해 왔다. 1940년대 최강국인 미국과 소련은 38도를 경계로 한반도 분할에 합의했고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통해 미국과 중국은 다시 이 분할 구도를 고착화했다. 21세기 글로벌 파워가 된 미국과 중국 역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그들의 국익을 관철하는 무대로 이용하고 있다. 2005년 신설된 미·중 경제전략 대화에서 당시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이 “중국에도 좋고 미국에도 좋은 한반도 시나리오를 강구할 때가 됐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중의 한반도 정책은 남북 분단과 대치 상태를 지속시키는 ‘현상 유지’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 주요 2개국(G2)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란 말로 그들의 정책을 포장하지만 냉정하게 짚어 보면 전쟁을 막고 통일도 막는 ‘현상 유지’ 전략이다. 미국과 중국이 추구하는 국익은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외교노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엄혹한 국제정세다. 군사 굴기를 선언한 중국의 중화부흥 야심과 아시아 회귀를 주창하는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충돌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G2가 주요 파트너가 된 우리에게 더 창의적인 신사고(新思考)가 필요하다. MB(이명박 전 대통령)식의 한·미 동맹 최우선 정책은 중국의 반발에 직면해 최악의 한·중 관계로 귀결됐고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구체적인 성과 없이 최악의 한·미 관계를 빚어냈다. 이런 시행착오 때문에 기계적인 중립·균형 외교에 나선다면 주변국 모두에 경원시당할 위험이 크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소극적 줄타기 외교는 국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패배주의 외교나 다름없다. 반대로 미국과 일본이 희망하는 한·미·일 안보 협력 구도는 역으로 북·중·러 연대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는 주변국들과 다양한 경제협력으로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리의 외교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중국이 적대국 미국과의 수교로 국제적인 위상과 실익을 취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동북아에서의 화해 협력을 추구하는 대의명분을 틀어쥐고 주변국의 국익을 일치시키는 ‘가교 외교’는 우리에게 중진국 외교의 길을 제시한다. 이번 박 대통령의 중재로 성사된 한·중·일 정상회담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강대국이 짜 놓은 외교 안보 프레임에 우리 스스로 갇히는 것은 그야말로 하수(下手)의 외교다. oilman@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인천상륙작전 D-1 ‘장사상륙작전’ 아시나요

    [밀리터리 인사이드] 인천상륙작전 D-1 ‘장사상륙작전’ 아시나요

    9월 15일. 디데이(D-day)라는 암호명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상륙작전으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날입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스스로도 ‘5000대 1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만큼 성패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었죠. 북한 인민군은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우리 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 밖에 걸리지 않았을 만큼 전세는 급변하게 됩니다. 허리가 잘린 인민군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급격히 세력이 약화됐고 곧 패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기 전 난관이 많았습니다. 당시 인천의 항만은 대규모 함정이 입항하기에는 수로가 매우 좁았고, 조수간만의 차가 7~10m나 돼 안정적인 상륙작전을 벌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작전 당일 인천항의 만조시간은 2시간 밖에 되지 않아 위험부담이 컸습니다. 인민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강력하게 저항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죠. 그래서 유엔군사령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 수뇌부와 마찬가지로 기만전술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양동작전 준비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개월 전부터 스웨덴, 노르웨이가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프랑스 칼레에서 상륙작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꾸준히 흘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1944년 전세를 뒤집기 위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전쟁 초기 유엔군사령부도 7만명이 넘는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이 참여하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두 가지 묘안을 짜냈습니다. 우선 유엔군이 남쪽인 전북 군산으로 상륙한다는 거짓 소문을 내는 한편 실제로 군산을 포격해 인민군의 주의를 돌렸습니다. 또 상륙이 한반도 동쪽에서도 동시에 이뤄질 것으로 오인하도록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경북에서 상륙작전도 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사상륙작전’입니다. 경북 영덕에서 남쪽으로 15km, 포항 북쪽 26km에 위치한 동해안의 작은 어촌 장사동(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인천상륙작전 불과 한 달 전인 8월 16일 국군 3사단이 북한군 12사단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하자 해상으로 철수했던 독석동과 인접한 지역입니다. 3사단 지휘부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이 분전한 덕분에 인민군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투는 330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재연돼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장사상륙작전도 포항여중 전투와 마찬가지로 학도병들의 희생에 모든 것을 맡긴 슬픈 역사였지만 인천상륙작전에 가려 지난 65년 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극비로 수립된 작전명 174호. 9월 13일 오후 부산항 제4부두에는 2700t급 상륙함(LST) ‘문산호’에 탑승할 학도병들이 모였습니다. 육군본부는 상륙작전을 위해 이명흠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독립유격대 1개 대대를 차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보름 훈련받은 10대 학도병, 비밀 작전을 맡다 이름만 ‘유격대’였을 뿐 편성된 이들의 대부분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동안의 훈련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습니다. 실탄을 채 10발도 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습니다. 낙동강 전선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는 작전에 투입된다는 설명이 곁들여졌습니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습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학도병 772명은 전란의 회오리 속에서 오로지 애국심 만으로 군에 자진입대한 이들이었습니다. 수개월째 이어진 전쟁으로 마음마저 피폐해진 그들이었지만 사기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14일 새벽 상륙함은 드디어 장사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상륙작전은 시작부터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거센 파도가 일면서 문산호는 해변에서 30m 가량 떨어진 지역에 좌초되고 말았죠. 바다에 뛰어든 학도병의 60여명이 제대로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무사히 헤엄쳐 해변에 도달한 이들이 밧줄을 소나무에 연결해 다른 많은 대원이 해안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이날 오전 문산호는 심한 파도에 떠밀려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고난은 이어졌습니다. 상륙 직후부터 1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이 해안 앞 200m 고지에서 공격해왔습니다. 오후 2시 30분 미 해군 구축함 함포지원을 받아 간신히 적을 물리친 학도병들은 빠르게 동해안의 7번 국도를 차단하고 다수의 적 진지를 파괴했습니다. 상륙, 전투 과정에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민간인 황재중 선장 등 2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다음날 오전 6시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인민군 5사단 등 적 정예병력을 만나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인민군은 대규모 상륙부대가 들이닥친 것으로 판단해 전차 4대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학도병들이 사용해야 할 탄약 대부분은 배와 함께 물에 가라앉았고, 배낭에 든 보급품은 불과 3일치였지만 전투는 계속됐습니다. ●악착같이 7번 국도를 끊고 임무를 수행한 그들 해군본부는 인천상륙작전 뒤인 16일 해난구조선을 보냈지만 문산호가 너무 깊이 침몰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대로 철수했습니다. 우리 해군의 304정도 출동했다가 극심한 풍랑으로 포항 구룡포로 귀항하고 말았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구출하려면 증원부대를 보내거나 철수하는 수 밖에 없다”고 육군본부에 연락한 뒤 상륙함 조치원호를 현장에 다시 급파하게 됩니다. 또 상륙 5일째인 18일 수송기를 보내 약간의 탄약과 의료품을 투하했습니다. 상륙 6일째인 19일 드디어 조치원호가 장사해안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민간인 선장은 인민군의 공격이 두려워 침몰한 문산호와 멀리 떨어진 곳에 배를 대려고 했습니다. 미군 고문관으로 참가한 프랭크 스피어 소령이 다그쳐 겨우 문산호 동북쪽 약 400m, 육지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 닻을 내리고 구조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학도병 39명은 적의 공격과 구명대가 유실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복귀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맞았습니다. 일부는 우리 군이 북진하는 과정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배에 타지 못한 인원 외에도 작전 중 전사한 인원이 총 139명이나 됐고, 90여명이 부상했습니다. 나머지 인원들은 다행히 7시간에 걸친 결사적인 구조작업으로 조치원호를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상륙작전은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작전 상황이 제대로 명시된 공식문서조차 없었습니다. 생존 대원들의 입을 통해서만 일부 내용이 알려졌죠. 하지만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평양방송은 아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죠. 특히 우리 1군단은 인천상륙작전 뒤 교착상태였던 낭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상할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란작전 때문에 인민군 5사단과 2군단이 주력부대를 전선에서 이탈시켜 동해안에 집중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도 경의를 표한 학도병들의 활약 1997년 3월 해병대원들이 갯벌에 묻힌 문산호를 발견하면서 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역사 재조명 필요성을 느낀 영덕군은 지난해부터 1년 4개월 동안 부산의 한 조선소에서 문산호 복원 작업을 진행해 길이 90m, 폭 30m, 높이 26m의 배를 건조했습니다. 원래 배보다는 길이 10m, 너비 5m 가량을 줄인 축소 모형입니다. 지난 5월 복원된 문산호는 바지선으로 옮겨져 장사해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상륙작전 65년 만의 일입니다. 내달 문산호는 스토리 전시관으로 개관할 예정입니다. 문산호 1, 2층에는 장사상륙작전의 역사적 배경과 200고지를 점령한 학도병 영웅 이야기를 영상물과 디오라마로 만들어 설치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채워집니다. 4층에는 PX와 군번줄 걸기 등 군 체험코너, 5층엔 조타실과 전망대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인천상륙작전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도 잊지 않은 역사, 우리가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래는 맥아더 장군이 사망하기 4년 전 772 유격동지회에 전한 서한입니다. 이종훈 회장 귀하. 최근에 보내주신 귀하의 편지를 통해 772 유격동지회가 결성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772 유격대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귀하의 동지들에게 제 진심어린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1960. 10. 31 더글라스 맥아더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밀리터리 인사이드는 핫한 아이템을 가지고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아래 리스트를 보세요. (17)국산 ‘명품 복합소총’ 왜 애물단지가 됐나 (18)“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19)“남침 땅굴, 있다니까요!” 끝나지 않는 전쟁 (20)北 목함지뢰 도발,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21)당황하셨어요? ‘서울 불바다’ 통하지 않는 이유
  • 오바마도 잡고싶은 신종 ‘스노든 가재’ 발견 (獨 연구)

    오바마도 잡고싶은 신종 ‘스노든 가재’ 발견 (獨 연구)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보면 매우 잡아먹고 싶은 가재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 연구팀이 '크레이피시'(Crayfish)라 불리는 신종 민물 가재를 발견해 관심을 끌고있다. 특히 이 신종 가재가 미국 주요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미국 정부의 '악몽'이 된 전 중앙정보국(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30)의 이름을 따 지었기 때문이다. 녹색과 주황색으로 도색한 듯 컬러풀한 외모를 뽐내는 이 신종 가재의 정식이름은 '체렉스 스노든'(Cherax snowden). 몸길이는 수컷이 7.6∼10㎝, 암컷은 7.6㎝ 가량으로, 집게발 끝이 오렌지색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인도네시아에 주로 서식하는 스노든 가재는 지금까지 외모가 비슷한 동족과 같은 종으로 취급받다가 이제서야 신종 임이 확인됐다. 독일 연구팀이 이 가재를 스노든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재미있다. 먼저 이 가재는 다른 이름으로 위장(?)한 채 독일로 건너왔다. 또한 이 가재종은 화려한 외모 덕에 주로 북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데 박해를 피해 현재 러시아에 망명 중인 스노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해석. 연구를 이끈 크리스티안 루크하우프는 "신종이 발견된 경우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들이 인류에 공헌한 바가 별로 없다" 면서 "이에비해 스노든은 매우 특별한 일을 해냈고 그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몇 년 사이 스노든 가재가 수집가들에 인기를 끌어 개체수가 점점 줄고있으며 이에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고 덧붙였다.     한편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고있는 스노든은 지난 2013년 국가안보국(NSA)의 도·감청 프로그램이 담긴 극비 문서를 폭로해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으며 현재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 중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힐러리 대항마’ 바이든·워런 손 잡나

    ‘힐러리 대항마’ 바이든·워런 손 잡나

    내년 미국 대선 출마설이 제기된 조 바이든 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항마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극비 회동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대선 출마가 임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CNN은 이날 2명의 소식통의 말을 인용, 바이든 부통령이 워싱턴DC 해군성 천문대에서 워런 의원과 비밀리에 만나 자신들의 정치적 거취를 논의했다고 전했다. 애초 바이든 부통령은 지난 17일부터 델라웨어주 월밍턴 자택에 머물러 왔으며, 23일까지 별다른 일정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CNN은 “클린턴 전 장관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두 사람의 회동은 바이든 부통령이 대선 출마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해석했다. 바이든 부통령의 출마설은 지난 5월 암으로 사망한 아들이 아버지의 출마를 권유한 데다, 클린턴 전 장관의 지지율이 주춤하면서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민주당 ‘사회주의 후보’ 버니 샌더스의 높은 인기를 감안할 때 진보당원들의 높은 지지를 받는 ‘진보의 아이콘’ 워런 의원의 출마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당 내에서 대안 후보가 꾸준히 거론되는 것은 공화당 후보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초반 돌풍이 거센 탓이기도 하다. 공화당 후보 중 지지율 1위인 트럼프는 21일 앨라배마주 모빌시에서 가진 연설에서 이번 대선 유세 중 가장 많은 규모인 3만여명을 동원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또한 이날 보수 성향 여론조사기관 라스무센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전체 유권자의 49%와 공화당 유권자 57%가 트럼프가 당 대선 후보로 지명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해 그의 인기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 줬다. 이는 2개월 전보다 두 배가량 올라간 것이다. 이에 클린턴 전 장관은 이번 주부터 2주간 예정된 휴가마저 일시 중단하고 오는 27일 대선 경선 격전지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를 방문하기로 하는 등 유세를 이어가기로 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이어 28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를 찾아 정책 연설을 할 계획이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제니퍼 애니스톤, 저스틴 서룩스와 극비 결혼식 올려

    제니퍼 애니스톤, 저스틴 서룩스와 극비 결혼식 올려

    배우 제니퍼 애니스톤과 저스틴 서룩스 커플이 마침내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고 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연예매체 피플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5일 미국 캘리포니아 벨에어에 위치한 저택에서 70여명의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으며, 결혼식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저스틴의 생일 파티로 알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결혼이 극비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22일 캘리포니아 비버리 힐스에서 열린 2015 베니티 페어 오스카 파티에서의 모습.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사진 ⓒ AFPBBNews=News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