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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상납 거부 부친 숙청에 환멸”/망명 이창수씨

    ◎한국선수 만나 북 거짓선전 실감/“귀국→은퇴→탄광노역 뻔해/체육인 형제도 팀서 축출… 온갖 고초” 4일 상오 김포공항에 도착,대한민국의 따뜻한 품에 안긴 북한의 유도 대표선수 이창수씨(24)는 『아버지가 상부의 뇌물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온가족들이 엄청난 불이익을 받은데다 그동안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실상을 알고 북한이야말로 허위에 가득찬 사회라는 것을 깨닫고 망명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4일 공항에서 8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견을 갖고 『이번 바르셀로나대회를 끝으로 귀국하면 은퇴를 강요 당하고 탄광에 보내져 사상교육을 받을것이 뻔해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교포총국의 지도원으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최근 상부로부터 텔레비전 수상기를 선물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절했다가 직장을 빼앗기고 「혁명화사업」이라는 이름아래 화물자동차 사업소에서 무임으로 강제노역을 해왔으며 유도 및 축구선수로 활약하던 형과 동생도 팀에서 축출됐다고가족들이 북한에서 겪고 있는 고초를 설명했다. 이씨는 87년 서독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이후 여러차례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북한이 궁핍하고 허위에 가득찬 사회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해외파견선수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철저히 탄압하는 통치제제에 염증을 느껴왔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특히 「북조선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는 교육을 받아왔으나 남한의 유도선수들이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남북한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체육인들은 비교적 해외에 자주 나가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북한의 현 체제에 대해 서로 은연중에 불만을 내비치기도 한다』고 전하고 『이번 망명으로 지금쯤 부모형제가 평양에서 행방도 모른채 없어졌을 것』이라고 가슴아파 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에서 타고온 대한항공기내에선 상당히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김포공항에 내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세례를 받자 비로소 자유의 품에 안긴 안도감과 기쁨을 실감하는듯 오른손을 번쩍들어 흔들어 보였다.하늘색 상의와 검은색 바지차림의 이씨는 곧 국제선 신청사 3층 귀빈실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으로 안내되자 밝은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또박또박 답변하는 여유를 보였다. 이씨가 타고온 대한항공 승무원 심모양(22)에 따르면 그는 10여시간의 탑승시간중 잠시도 눈을 부치지 못하고 긴장감을 가라앉히려는듯 잇따라 캔맥주를 주문해 마셨다. 이씨가 탄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안착할 때까지 승객들은 물론 기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승무원들도 그가 망명자인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당국의 안내는 보안을 위해 극비속에 진행됐다. 그가 앉았던 비즈니스클래스 10­A석에 기내식과 음료수를 날라준 여승무원들은 『그의 행동이 다른 승객들과 조금 달라 보이긴 했지만 망명선수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다소 놀라는 모습이었다.
  • 등소평차남 극비 방한/등질방 12일간 체류… 정·재계 인사 만나

    중국 최고실력자 등소평의 차남 등질방(40)이 박태준 민자당최고위원 초청으로 지난 19일 비밀리에 방한,우리 정·재계인사들과 두루 접촉한 뒤 30일 상오 홍콩으로 떠났다. 등은 지난 26일에 박최고위원과,29일에는 유종하외무차관·이수휴재무차관·장상현교통차관 등과 각각 만났으며 포항·광양제철소 등의 산업시설과 중소기업을 방문,한중양국간 경제협력방안을 협의했다. 등은 지난3월에도 극비리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바 있다.
  • 미군유해 인수때 미 의원 극비 방북/강석주와 회담

    【도쿄 연합】 지난달 24일 판문점에서 북한측으로부터 한국전 때 사망한 미군 유골을 인수했던 로버트 스미스 미상원 의원이 당일 극비리에 개성을 방문,강석주 북한 제1외교부부장과 회담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25일 보도했다. 스미스 의원은 그날 유골 인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부부장과는 북한측의 통일각에서 만났으며 회담 내용은 일체 말할 수 없다고 해 개성방문 사실을 숨겼다고 이 신문은 밝히면서 미국 의원이 군사 경계선을 넘어 북한에 「잠입」한 사실은 이례적인 일로,대미 관계개선을 위한 평양측의 강한 의욕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중동 새 불씨” 북한 스커드미사일/미지가 밝힌 충격의 수출실태

    ◎걸프전 끝난뒤도 공급… 재무장 부축/시리아에 1백50기 5억불어치 판매계약/80년이후 이란 30억불,리비아 10억불 수입 걸프전 종전이 5개월여 지난 시점에서 중동국가들이 신형 스커드미사일 등으로 대규모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특히 이들 나라들에 도맡아 무기를 대주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더해준다. 미월스트리트저널지는 10일 북한이 걸프전 이후 대량의 개량 스커드미사일을 아랍국가들에 판매해온 사실이 미정보기관과 첩보위성 등을 통해 확인됐으며 이것이 중동평화정착에 큰 위협요인으로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지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공급하고 있는 미사일은 걸프전때 사용된 스커드미사일보다 성능이 훨씬 우수한 스커드C미사일.종전직후인 지난 3월부터 북한은 시리아와 1백50기의 스커드C미사일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공급가액은 모두 5억달러.시리아는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아랍평화군 창설지원금으로 받은 20억달러중 일부를 여기에 썼다. 이란·리비아는 시리아보다 먼저 북한 스커드미사일을 구입했다.북한의 미사일 판매는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다.북한이 대서방 이미지를 고려해 미사일 판매사실을 숨기려 하고 사우디·시리아 등도 재무장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서방정보기관에서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사우디를 「온건국가」로 분류할수 없다는 판단까지 내려놓고 있다.사우디는 자신들이 지급한 지원금이 북한미사일 구입에 쓰여도 좋다는 사전승인을 시리아측에 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스커드C는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사용한 「알 후세인」스커드B미사일보다 성능면에서 훨씬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리아는 이밖에도 두차례 더 북한미사일을 들여와 현재 총1백기의 북한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50기 추가구입계약을 이미 마친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미국은 아랍국중 화학무기전력이 최강인 시리아가 스커드C미사일을 대량 확보한 사실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이스라엘 전역이 시리아 화학무기 사정권안에 들기 때문이다. 북한은 1980년대초부터 스커드B미사일 생산을 시작했다.북한스커드B의 최대고객은 이란.이란은 지난 88년초 스커드B 40기를 북한에서 구입,그해 2월부터 4월까지의 이라크 공격때 사용했다.지난해초 이란은 북한스커드B 20기를 추가구입하고 탱크·지대공미사일·대포 등을 잇달아 구입해 북한과의 군사유대를 더 강화했다.지난1월부터 북한스커드C미사일 부품이 이란으로 반입되고 있다는 사실이 미첩보위성을 통해 확인됐다.이란은 이 부품들을 조립해 미사일발사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북한이 이란에 판 무기거래액은 총30억 달러에 이르는데 대금결재는 석유로 하기로 합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무기의 가장 오랜 고객은 리비아이다.지난5년간 스커드B·C를 비롯,10억달러에 달하는 북한무기가 리비아로 넘어갔다. 반면 리비아는 북한의 미사일개발에 최대 비용지원국 역할을 맡고 있다. 북한이 사정거리 6백마일의 최신 중거리 탄두미사일을 개발하는데도 리비아가 비용부담을 맡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스커드D로 불리는 이 미사일은 앞으로 1년이내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특히 이 미사일은 리비아에서도 생산키로 두나라가 합의했음이 확인됐다. 이집트가 스커드C를 생산하는데도 북한이 도와주고 있다고 최근 영국의 BBC방송이 미정보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이집트가 지난해 카이로교외에 스커드C미사일생산시설을 건설하는데 북한기술자들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이 시설은 이집트·사우디·아부다비·영국이 컨소시엄으로 만든 「아랍­브리티시 다이나믹스」사가 건설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 8주내지 12주 뒤면 미사일생산에 들어갈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같이 북한의 미사일판매가 중동평화에 심각한 위협요소를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행정부는 아직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유일한 반응은 지난 6월4일 국무성대변인이 낸 짤막한 성명서 하나이다.이 성명은 『우리는 미사일확산에 관계된 북한의 활동을 오랫동안 주시해왔다.우리는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통해 우리의 이같은 우려를 분명히 밝히겠다』라고 말했다.하지만 이문제를 다루기 위한 미하원청문회는 2개월 전부터 계획됐음에도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걸프전은 따지고 보면 서방이 이라크의 무장을 방치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고 할수 있다.이같은 전철이 다시 되풀이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예를들어 시리아는 북한스커드C 구입외에 소련과도 20억달러의 무기구매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미정보기관들이 내린 결론은 걸프전의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서방은 지금부터라도 중동의 무기거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극비 출국한 전대협 2명/범민족 베를린회의 참석

    【베를린 연합】 「전대협」의 입북지시에 따라 지난 24일 한국을 떠난 성용승군(22·건국대학추위원장)과 박성희양(경희대 작곡4)은 29일 베를린의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사무국(사무국장 임민식)에서 열린 「91범민족대회 준비회의」에 참석했다. 30일까지 2일간 계속되는 이번 회의에는 북한에서 전금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범민족대회 북측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등 2명과 범민련의 유럽·미주·호주 등 지역대표가 참석했으며 한국측의 대표로 돼 있는 강희남 목사(범민련 공동의장)와 한철수군(전대협 조국통일위원장·경희대 총학생회장) 등은 참석치 못했다. 사무국측은 성군 등 전대협 간부 2명이 이번 회의에 공식대표가 아니라 참관인으로서 자리를 함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성군과 박양은 각각 회색 양복과 넥타이,녹색 투피스의 정장 차림으로 다소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출국경위 및 목적,향후 계획 등에 관한 면담요청에 대해 현재로서는 응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 밀입북 위해 베를린 잠입한 전대협간부 집 표정

    ◎사전계획 치밀… 부모도 눈치 못채/부모엔 “유럽어학연수 간다” 속여 출국/89년 임양 밀입북 때 경로 그대로 택해/두 학생 모두 가정부유… 대학진학 때부터 운동권에 성용승군과 박성희양의 출국은 「전대협」 지도부와 「범민련」의 일부 간부들만 알고 있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되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의 출국경로가 지난 89년 6월 외국어대학생 임수경양이 평양에 간 것과 거의 비슷한 경로를 택했고 베를린에서 장기체류를 계획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임양과 같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성군과 임양은 부모들에게도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고 속이는 등 철저하게 숨겼던 것으로 확인됐다. 성군의 아버지 춘경씨(50·약국경영)와 어머니 김순환씨(51)는 『유럽으로 어학연수를 간다며 떠난 아들이 「전대협」의 지시에 따라 평양으로 가게 된다고 하니 도대체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 성씨는 『여름방학을 맞아 어학연수를 한다고 해 1백50만원을 주었으나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면서 『아들이 평소 온순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학생운동을 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성씨는 『밤 TV뉴스를 보고 아들이 평양에 가기 위해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서 『아직까지 아들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성군은 외아들로 아버지가 약국을 경영해 비교적 넉넉하게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시 유성구 장배동 성군의 집에는 가족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는 친지들로부터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군은 87년 서대전고를 졸업하고 건국대에 입학하자마자 운동권에 들어갔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 1월에는 중국에 해외연수를 다녀온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임양의 집에는 아버지 박명남씨(69)와 어머니 계명신씨(60)가 딸의 소식을 듣고서는 충격을 받아서인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에 따르면 계씨는 『우리 딸이 여름방학을 이용,유럽에 음악연수 겸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말하는 등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지난 24일 하오 9시30분 라우디항공 편으로 빈으로 간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양은 아버지가 한삼 모시 오퍼상을 하는 등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 외동딸로 귀엽게 커왔으며 덕성여고를 졸업했다. 성군 등은 「전대협」의 극소수 간부들과 치밀하게 모의된 계획에 따라 24일 하오 9시30분 대학생 배낭족으로 위장해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 나고야로 건너갔다. 이들은 나고야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울을 떠난 지 이틀 뒤인 26일 베를린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소재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 「6·25비화」 소 외교연 학자 본지 특별기고

    ◎“북침으로 꾸며라”… 스탈린,6개항 지침 시달/미 개입에 당황… “정면대결 피하라”/중국 파병따라 공군력 지원약속/「중국공산화」 미서 방관하자 남침 결심/종국엔 북한정권 지키기에 급급… 소,휴전 뒤 재도발 우려해 김일성 감시 서울신문은 6·25 41주년을 맞아 소련 외무부 산하 외교아카데미의 B 발레노프 박사(역사학·필명)가 특별기고한 「6·25는 스탈린의 작품」을 게재한다. 발레노프 박사는 외교아카데미의 최고급 간부 중의 한사람으로 중국문제와 한반도문제에 대한 소련내 최고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밀문서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활용,지금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는 외무부 보관자료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장 극비문서 등을 토대로 한국전 발발 배경과 책임소재 등을 규명했다. 발레노프 박사는 자신이 남북한 관계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은 현역 외무부 관리신분임을 감안,필명으로 게재할 것을 요청해 왔다. 정확히 41년 전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세계는 엄청나게 변했다. 소련은 그동안 이념적,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고 강대국들이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한국전쟁의 진짜 비극의 역사는 여전히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소련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N 아닌이 밝혀낸 새로운 자료를 비롯,최근 필자가 어렵게 입수한 극비문서들은 비록 단편적이나마 어떻게 해서 그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됐는지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45년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뒤 스탈린은 한국에서 얄타협정과 포츠담협정의 조항들을 위반할 의사가 없었다. 1948년 주은래를 만났을 때도 스탈린은 『중국과 북조선 동지들은 절대 해방전쟁을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혁명세력의 무력이 결코 우위에 있지 않으며 미국이 개입하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게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였다. 스탈린은 이렇게 모택동의 손발을 묶고 북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38도선에서 무력도발을 삼가도록 단단히 지시를 내렸다. 『동유럽에서 제국주의세력과 싸우기에도 벅차다. 소련의 제1관심 지역은 유럽이다』는 게 당시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생각은 그러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차지하자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모택동과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동안 아시아에서 공산혁명세력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소. 저개발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내 생각이 틀렸소』 중국공산당의 승리,동유럽의 공산위성정권 수립과 함께 소련 경제가 꾸준히 성장추세를 보이자 스탈린은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소련대사관과 정보기관들은 한반도에서 혁명에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정보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붕괴 직전에 와 있고 경제는 침체됐으며 사회불안은 통제불능에 빠져 남한인민들은 한결같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정보보고들이었다. 남한 인민들은 북조선에서 전개되는 변화들에 「자석처럼」 이끌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비민주적인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을 증오하는 반면 소련에 대해서는 최고의 기대감을 품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소련 정보장교들도 한결같이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군사·이념적인 상황은 모스크바에서 지시만 내리면 권력을 탈취할 수 있다는 보고들을 울렸다. ○애치슨 성명에 안심 스탈린은 크게 고무돼 조만간 세계,특히 아시아국가들이 소련의 혁명모델을 뒤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은 소련의 당연한 의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가지 우려되는 문제는 미국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에서 공산혁명을 수행할 때 미국이 적극 개입치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했다. 모택동을 만나서도 그는 이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1950년 6월12일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성명은 스탈린으로서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당시 소련 외무부에서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이 성명을 『미국이 한국의 군사분쟁에 무력개입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분석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대한 의사와 군사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탐색토록 지시했다. 소련의 외교·군사·정보보고들은 남한내 미 군사력이 전혀 우려할 수준이 아니며 그나마 계속 감축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각국에 파견된 첩보원들로부터도 유사한 정보들이 올라왔고 그 가운데는 미 백악관에서 빼낸 정보들도 있었다. 이 정보들은 영국내 첩보원들에 의해 다시 「더블체크」됐다. 당시 영국 외무부와 정보기관의 고위직책에는 소련첩보 조직이 침투해 있었다. 영국정부가 미국정부에게 새로 수립된 중국 공산당정부에 대한 반대입장을 완화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는 정보도 런던으로부터 보고됐다. 트루먼 행정부내에는 극동지역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태에도 미국이 무력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정보보고들은 한국에서 미국이 어떤 행동,특히 대응 행동을 취할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제로」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이밖에 소군 지도부는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지켜줄 수 있을 만한 병력을 한국주변에 배치해 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받았다. 스탈린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감지한 북한 주둔 소군장성들은 김일성과 함께 한국에서 군사도발을 하는 문제에 대해 크렘린이 관심을 갖도록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군사령관들과 김일성은 어느 주석에서 남한 괴뢰정부를 쳐부수자는 데 의기를 투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계획은 여러 경로를 통해 스탈린의 귀에 들어갔다. 한국을 중국처럼 무력으로 통일시키자는 계획은 1949년말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때 이미 구체적으로 검토됐고 스탈린은 이듬해 봄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최종결정을 발표하기 전 스탈린은 모택동의 의견을 물었다. 이웃 형제국의 「사회주의 해방운동을 종결짓는 일」에 모택동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전쟁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주요지침들을 시달했다. 1,전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확보돼야한다. 2,소련이 전쟁에 개입됐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소군사 고문단은 전선으로부터 철수시킨다. 3,북조선 당국은 적과 세계 여론의 주의를 돌려놓기 위해 전쟁 개시 전 평화공세를 강화한다. 동시에 남한당국과의 그들의 앞잡이인 미국이 전면전쟁을 벌일 목적으로 북조선에 무력도발을 일으켰다는 각종 선전을 강화한다. 4,대남 전면공격을 시작하기 전 국지침투를 감행하고 적의 대응공격을 유보하기 위해 전 전선에서 부분공격을 감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외부세계에 전쟁이 남측에 의해 도발된 것으로 믿게 하는 효과도 얻는다. 5,전면공격은 불시 기습적이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수행돼야 한다. 6,군대가 38도선을 넘는 즉시 남조선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난다. 남조선내 「혁명진보세력」들은 북조선에서 군대가 당도하기 전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전전 평화공세 강화 전쟁 개시일인 6월25일 스탈린은 측근 참모들과 함께 자신의 별장(다차)에 앉아 전선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속 낭보가 날아들자 스탈린은 희색이 만면해 이렇게 말했다.『세계혁명에 관한 레닌 동지의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업의 큰 공훈자들로 기억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각 한국의 마을과 도시들에서는 수많은 남녀,어린이들이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있었다. 한 늙은 독재자의 탐욕과 광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초기 작전은 극히 순조롭게 진행됐고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은 한달내에 한반도 전체가 해방될 것이라고 보고해 왔다. 스탈린은 측근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신 지도자의 위대한 천재성에 새삼 경외심을 가졌다. 스탈린은 한국전에서의 조기승리를 이미 예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엄청난 사태반전이 일어났다. 그렘린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미의 반격은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평양의 소련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전문들은 급전직하 비관적인 내용들로 바뀌었고 외교관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외부의 도움없이 김일성 군대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들이 내려졌다. 스탈린의 측근 참모들은 김일성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을 투입시키자는 주장을 계속 내놓았다. 흐루시초프 몰로토프,베리야도 소련군 투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군이 미군과 맞서 싸울 만한 힘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끝까지 소련투입에 반대했다. 한국전에서의 완전한 패배를 사실상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다. 바로 이때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중공군이 개입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나서지 않으면 미군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군대를 투입시키기 전 모택동은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소군과 중공군을 한국전에 보내자고 스탈린을 설득시키려 했다. 스탈린은 남부 휴양지에 있는 자신의 시골별장에서 주은래를 만났다.그는 주은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잘들으시오,동지. 미군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 만약 우리가 끼어들면 미국은 사회주의 세계 전체를 모두 파괴시키려 들 것이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결정을 내려야 하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것이지 아니면 소를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 세계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인지』 주은래도 스탈린의 말에 수긍하고 북경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모택동이 보낸 전문 한통이 소련 주재 중국대사관에 입전됐다. 중공군을 한국전에 투입키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문은 스탈린에게 전달됐고 스탈린도 결국 이에 동의했다. 스탈린과 주은래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중공군이 지상병력을 파견하고 소련군은 북한의 공중방위를 책임진다는 데 합의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과 모는 두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키는 것이고,또 하나는 미국과의 전면대결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두 가지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민들이 치른 인명과 물질적인 피해는 너무 끔찍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새 소련지도부는 현상고착을 정책목표로 결정했다(스탈린은 그해 봄 사망했다). 이듬해 흐루시초프는 『한국문제도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돼야 한다』고동료들에게 역설했다. 「두 개의 독일 두 개의 한국」 정책이었다. 흐루시초프는 이제 소련이 북한에 해줄 일은 북한동지들을 도와 북한을 근대화시켜 그 나라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진열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제국주의 앞잡이 남조선과 무력전쟁이 아니라 경제전쟁에서 이기도록 하자』고 역설했다. 흐루시초프는 실제로 북한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원조를 쏟아부었다. 이러한 원조를 바탕으로 북한은 점차 강성해져 갔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 들어 소­북한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동기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통치를 비난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일을 계기로 소련이 이끄는 「사회주의 형제국」의 대열에서 이탈,외부세계에 빗장을 걸고 소위 「주체사상」을 펴나갔다. ○모,주은래 보내 설득 소련이 북한정권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감은 점차 옅어졌고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는 김일성의 평화의지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 브레즈네프와 그의 이념담당 보좌관인 수슬로프는 수시로 외무부에 『북한의 무력도발 움직임을 체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련지도자들은 북한대표단과 만날 때마다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련은 이와 함께 북한에 대규모 첨단공격무기르 공급하는 데도 신중을 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소련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식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캄보디아 등지에서 전통적인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이렇듯 신중한 정책을 고수하려 한 것은 바로 미국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부터 한국은 물론 기타 모든 문제에서 소련의 입장은 급격하게 변했다. 소련은 이제,첫째 모든 문제에 있어 군사적인 해결방식에 반대하고 있고,둘째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식 모델을 이제 더이상 지지하지 않게 됐다.
  • “김일성,소와 한달간 6·25남침 계획”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증언/대독 전쟁경험 풍부한 소 장성들 고문단에 참여/“서울 전격 점령하면 상황 끝”… 예비병력 안갖춰 북한의 김일성은 지난 50년 3월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 후 약 한달간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작성에 들어갔으며 이 작업에 전쟁경험이 풍부한 소련 장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쟁 전후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는 지난 5일까지 재소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한 자신의 회상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김일성의 소련 방문 직후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전계획이 작성됐으며 소련군의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전쟁 발발 직전까지 모두 3천여 명의 공작대를 남파시킨 전 강동학원 원장 박병률씨(86)는 16일 유씨의 6·25증언이 가장 정확한 진실이라고 확인했다. 다음은 6·25전쟁에 관한 유씨 회상록의 요약이다. 『6·25 전쟁 작전계획은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에걸쳐 극비밀리에 진행됐다. 이 작전계획에는 총참모장 강건,포병사령관 김봉률,포병참모장 정학준,공병국장 박길남,동신국장 이용인,공군사령관 한일무,해군 참모장 김원무,병기국장 서용선,후방국장 정목,정찰국장 최원,작전국장 유성철(필자),작전부국장 유상렬 등이 참여했다. 소련 고문단에서는 바실리예프 중장,포스트니코프 소장 및 기타 장군들과 영관급이 작전계획 작성에 주동 역할을 했다. 이 작전계획 작성을 위해 독소전쟁 등 경험이 풍부한 소련 고문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실리예프 중장 등이 구 고문단과 신속히 교체된 것이다. 작전계획의 실천을 앞두고 비밀을 보장할 목적으로 훈련형식을 취하면서 병력을 38선에 집결시켰다. 집결이 완료된 후 기동연습에 관한 명령서를 무전으로 공개적으로 전파했는데 국방군 참모본부는 아마도 이 같은 북의 기만에 떨어졌으리라고 믿어진다. 이 작전계획의 기본 약점은 미국이 손쓸 사이없이 불의의 공격으로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예비 병력을 준비하지 않은 데 있다. 또한 서울함락 후 박헌영의 지도하에 있는 남로당원 10만명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지리산 후격대들이 후방에서 세찬 공격작전을 펼 것을 기초로 해 작성된 것이다. 서울은 전쟁개시 3일 만에 함락됐으나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리산 유격대의 활동도 없었다. 인민군은 한 달 동안에 남한의 90%를 점령하고 남한인구의 92%를 장악했으나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됐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김일성의 지시로 박헌영과 함께 북경을 방문,원조를 요청하게 됐다. 우리 일행을 접견한 모택동은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키로 결정했음을 알리고 팽덕희 장군이 전선을 지휘하고 후방은 중국 동북정부 주석 고강이 책임지게 됐다는 것과 이들 두 동지가 손을 잡으면 조선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모는 최종발언에서 전쟁은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다섯 손가락을 앞으로 펼쳐 보이면서 미군과 괴뢰군(국군을 지칭)을 각각 분리하여 격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는 이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한 다리를미군이라고 가정하고 다른 다리를 괴뢰군이라고 하자. 먼저 괴뢰군을 포위 섬멸하고 다음에 미군을 포위 섬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미군이 맥을 추지 못할 것』이라면서 한 다리를 들고 다른 다리로 툭툭 뛰면서 설명했다. 모의 이러한 말에는 김일성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모가 김을 비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50년 10월19일 저녁 8시쯤 중국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여러 지점을 통과,조선 전쟁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피아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어느 쪽에서도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이 전쟁은 끝이 나 1953년 7월27일 비로소 남북 인민들이 그처럼 고대하던 휴전을 맞게 됐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악명높은 소위 「사상검토」를 통해 민간인을 휩쓸고 뒤어어 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일성에게는 세 가지 「흑색」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첫 명단에 든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부류였고 제2명단에는 무기징역을 받을 사람들이 들어 있었으며 제3 명단에는 소련으로 가기를 원하면 보내도 좋다는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필자는 제3명단에 들어 있어서 소련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일성은 6·25전쟁에 참가한 장군들 중 남일·이권무·김창봉·김광협 대장,무정 중장 등 모두 44명을 처형하거나 숙청했으며 이 가운데 필자를 비롯한 이상조·강상호 중장 등 16명의 장군이 탄압을 받고 소련을 위시한 외국으로 망명했다』
  • 대책회의 “내일 명동성당 철수”/김양 장례식에 맞춰

    ◎농성 시민외면에 후퇴 범국민대책회의는 10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라는 상설기구로 전환하기로 하고 조직개편 및 김귀정양의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명동성당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대책회의」의 관계자는 『철수날짜를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김양 장례식이 있는 12일 이전에 명동성당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환 서울시경국장은 지난 8일 하오 경갑실 명동성당 수석보좌신부를 극비리에 만나 『최루탄을 쏘지 않고 무술경관들만을 성당 안의 문화관에 한해 투입해 구속영장이 미리 나와 있는 수배자들을 검거하겠다』고 공권력 투입을 묵인해 주도록 요청했으나 『성당 안으로 피신해 들어온 사람들을 연행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답변을 듣고 되돌아갔다.
  • 일본 소련/「북방섬·경협」 극비흥정 가능성

    ◎「국경선협상」 통한 해결책 제시할듯/소/「양보안」 걸맞는 경협규모 관심거리/일/고르비­가이후 대좌의 뒤안 일·소간 최대 현안인 북방영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3차 정상회담은 배석범위를 통역 등 7명에만 국한,사실상 고르바초프­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양자의 대좌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쌍방은 이미 16일의 제1차 정상회담때부터 이 문제에 관한한 협의내용을 공표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3차회담의 내용도 알길은 없다. ○소,「영토문제」 첫 거론 그러나 이 회담에서는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4차회담에서 상당한 「흥정」이 이루어질 것이며 지금 당장 북방 4개섬 전부가 반환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예상보다 빨리 잡힐 것이 아닌가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것은 소련이 최후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으며 정석대로의 수순을 밟아 정치 레벨에서 결정할 의도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같은 조짐은 1차회담 때부터 나타났다. 3시간에 걸쳐 행해진 제1차 정상회담은 그 절반을 영토문제에 할애,이 문제에 협의의중점이 두어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 자리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영토문제」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했다. 소련은 지금까지 『일·소간에는 영토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공식입장에서 「영토」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피해왔다. 따라서 이날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영토」라고 분명히 밝힌 것은 처음이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1차 정상회담의 내용은 다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영토문제의 협의내용 비공표,둘째 일·소관계의 근본적 개선,셋째 일본 병사의 시베리아 억류사죄,넷째 경제협력 등이다. 이들 내용은 그 어느 것이나 영토문제와 직결된다. 이렇게 볼 때 제1차 일소 정상회담은 쌍방이 극히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논의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리에서는 그 어떤 양보나 제안은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개진,접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1차 회담에서 이러한 궤적을 밟았다는 것 자체가 소련측도 일소간에 영토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이며 해결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7일 상오 사회당의 도이 다카코 위원장과의 조찬석상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 응수했다. 도이 위원장은 『북방 4개섬의 주권확인이 일본 국민의 여론』이라며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 ○일,협상발판은 마련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일본의 여론도 있으나 소련의 여론은 반대하고 있다』며 국민여론을 토대로 검토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 같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일련의 발언과 그의 행동의 「의외성」에 비춰볼 때 4차 정상회담에서는 소련측으로부터 그 어떤 「양보안」이 제시될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동행한 소련의 한 소식통은 17일 북방영사문제에 관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몇가지 제안중에는 어떤 섬을 반환하겠다고 직접 제안하는 대신 「국경획정의 대상지역」을 명시함으로써 섬을 돌려주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대상지역」에는 어떤 섬이 포함되는가를 명확히 하고 이 지역에서의 국경획정은 쌍방이 계속 협의해나가는 가운데 합의점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안은 영토문제에서 대폭 진전을 기대하고 있는 일본측과 국내사정 때문에 이번 방일에서 명확한 선을 제시할 수 없는 소련측과의 타협안으로서 마련된 고육지책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같은 여러가지 상황에 비춰볼 때 18일 하오 발표예정인 일소 공동성명에는 일본측 희망대로 「영토문제」라는 표현을 삽입,앞으로의 대소 교섭에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초 일본측은 영토문제 해결은 비관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정상회담에서부터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예상 이상의 효과를 올렸다. 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소련의 경제사정이다. 현재의 국내 정치상황에 비추어 외국방문이 곤란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 시기에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이를 계기로 태평양지역 진출의 발판을 삼아 미국의 극동전략에 쐐기를 박겠다는 정치적 노림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역시 「경제협력」에 주안점이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세계에서 소련에 경제협력을 할만한여력을 가진 나라는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 이들 국가에서 경제·기술협력을 받아 소련경제를 부흥시킴으로써 위기에 처한 고르바초프 자신의 국내 정치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에 대해 영토문제에 관한 어떤 「언질」이 필요하다. 과연 짐작대로 소련측의 양보안이 제시됐을 경우 앞으로는 일본측이 얼만큼의 경제협력을 해야하는 가라는 정치결단을 내려야 할 차례라고 도쿄의 외교가는 보고 있다.
  • 김정일 오늘 방중/일지 보도/“「후계자」로 외교역할 과시 목적”

    【도쿄=강수웅 특파원】 북한의 제2인자인 김정일 노동당 비서가 3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일본 마이니치(매일)신문이 2일 북경의 동구권 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김의 방중목적은 지금까지 북한내부에서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서 내정을 보필해온 그가 외교 면에서도 후계자로 정식 데뷔했음을 중국측에 통고,지지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이 소식통은 밝혔다. 이에 따라 김정일 당비서의 세습체제를 내정·외교 양면에서 본격화했으며 일­북한 국교정상화 교섭진전과 한반도통일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그의 중국방문 일정은 3일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 지난 83년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이때에도 그의 방문사실은 수개월 동안 공표되지 않았었다. 한편 마이니치신문은 서울의 소식통을 인용,한소국교수립,한중접근,북한·일 수교교섭 등 급변하는 동아시아아 정세 속에서 북한이 김 당비서를 무대에 등장시켜 새로운 외교적 전개를 노리려 하고 있다면서 이달 29일부터 평양에서 국제의회연맹(IPU)총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적 고립 탈피에 안간힘을 쓰는 북한은 이번 김 당비서의 중국방문을 통해 국제사회복귀를 위한 지침을 구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고화질 첨단VTR 개발/삼성,슈퍼 VHS방식 새 달부터 시판

    안방극장시대를 앞당길 슈퍼 VHS방식의 VTR가 국내에서 개발됐다. 슈퍼 VHS방식은 기존의 VHS보다 화면의 선명도가 60%이상 개선되고 음질도 오디오 음질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첨단기술로 일본이 최초로 개발,그동안 극비기술로 분류해온 것이다. 2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최근 가장 좋은 화질로 공인되고 있는 슈퍼 VHS방식의 VTR를 개발했다. 이 방식의 VTR는 화면 선명도의 기준인 수평해상도가 4백본 이상으로 기존 VTR의 2백40본보다 66% 개선되고 음질도 오디오 음질을 그대로 살리는 하이파이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삼성측은 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지난 89년 8월 15명의 전담연구팀을 구성,1년8개월여 동안 45억원의 개발비를 썼다. 슈퍼 VHS방식은 일본이 세계 최초로 개발,극비 기술로 분류해 다른나라에 대한 이전을 허용치 않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부머랭효과를 우려해 철저히 장벽을 쌓아온 첨단기술. 이 기술의 세계적 상표권자인 일본JV사는 삼성이 짧은 기간에 같은 기술을 개발한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이 방식에 대한 선호도가 급상승,지난해 판매된 6백여만대의 VTR중 이 방식의 VTR가 36%를 차지했다. 이 방식의 VTR는 인공지능기능도 갖추고 있다. 삼성은 이 방식의 VTR를 4월초부터 월 1천대 규모로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관선이사 관리학교/전 이사가 몰래 매각/광주 광이고

    【광주 연합】 부정입학생 모집과 교비 변태유용 등 학내비리로 지난 88년부터 관선이사진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학교법인 유성학교 재단의 광주 광이고 전 이사가 이 학교를 27억5천만원에 불법매각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4일 광주시교위 관계자에 따르면 관선이사진의 선임으로 지난 88년 12월3일자로 학사와 재정 등 법인운영에 대한 모든 자격이 정지된 학교법인 유성학원의 전 이사 유성배씨(광주시 북구 임동 344)가 광이고를 감독관청인 광주시교위의 기본재산 매도허가도 없이 지난해 4월17일자로 광주시 서구 봉선동소재 사회복지법인 인애동산 이사장인 김모씨에게 『인수인계 절차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극비로 한다』는 단서아래 27억5천만원에 불법 매각처분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유씨가 최근 광이고의 현 관선이사진을 해지하고 다시 학교를 인수하기 위해 시교위 관계자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 “방일 대표단 상당수가 공작원”/일 「주간문춘」지 폭로

    【도쿄연합】 20일 방일한 북한 노동당 대표단 가운데는 정치 공작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김용순서기는 표면상의 최고 책임자일 뿐 막후교섭의 책임자는 이들 공작원 가운데 한사람인 송일호라고 일본의 유력 주간지 「주간문춘」이 21일 폭로했다. 일본의 문예춘추사가 발행하는 주간문춘 28일자호는 일본인 유학생 실종사건을 추적 보도한 「인터폴 극비 수사자료 독점 공개」 기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주간문춘에 따르면 20일 방일한 북한 대표단 35명 가운데는 정치공작원들이 비밀리에 포함되어 있으며 표면상의 대표단 뒤에는 「막후 교섭부대」가 존재하고 있다. 수행원으로 등록된 명단 가운데에 특히 순위는 아래지만 송일호(일조우호촉진 친선협회 상무위원)와 김동철(일조우호촉진 친선협회 부서기장) 등 2명은 북한에서 으뜸가는 「정치공작 전문가」로 이들의 방일횟수는 10여차례에 이르고 있다.
  • 검찰,「수서의혹」 수사 이모저모

    ◎정 회장,처음엔 로비부인… 수사팀 진땀/전·현직 시장은 극비소환… 신문 끝내/“오늘밤이 고비”… 수사간부 전원 밤샘 ○…한보그룹 정태수회장을 소환,철야조사를 벌인 검찰은 정회장에 대한 조사가 이 사건 수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임을 느낀듯 모든 수사간부들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전력을 경주. 그러나 당초 예상대로 정회장이 혐의사실을 끈질기게 부인하자 검찰은 진땀을 뺐으나 14일 0시30분쯤 갑자기 정회장이 혐의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수사는 활기. 이날 중수부 수사팀이 뇌물수수 여부에 대해 직접 정회장을 심문하고 있는 동안 다른과 검사 및 직원들은 조합장·한보직원·서울시·건설부 관계자들의 진술내용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등 정회장을 철야조사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료를 보강하는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특히 검찰은 정회장에 대한 수사와는 별도로 이미 혐의사실이 드러난 국토이용관리법 위반 부분에 대해 지난번 소환됐던 조합장들 이외에 새로 조합원들을 추가로 소환하는 등 조사범위를 확대해 수사가 「총론」에서「각론」으로 접어든듯한 느낌. ○…한편 이날 하오10시30분쯤 대검청사를 나서던 정구영 검찰총장은 『무슨 일이 있다고 늦게까지 남아있느냐』며 기자들에게 농담을 거는 등 여유. 정총장은 『수사가 잘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결자해지 아닙니까』라고 말한 뒤 『「결」은 누가 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언론이 한것 아닙니까』면서 뼈있는 한마디.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한보그룹의 정태수회장은 이날 하오1시25분쯤 검은색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덕수궁 앞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려 70m 가량 떨어진 대검찰청으로 걸어서 들어갔다. 검은색 줄무늬 양복에 흰목도리를 두르고 검은색 코트를 입은 정회장은 최근 악화된 지병탓인지 꽤 피곤한 표정이었으나 비교적 침착하게 취재기자들의 주문에 포즈를 취해주는 여유도 보였다. 정회장은 수서지역 분양과 관련,로비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합에서 로비를 했는지는 몰라도 한보는 한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 또 『지난해 노태우대통령과 만난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대통령을만난 사실도 없으며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들에게도 로비를 하지 않았으며 할 이유도 없다』고 극구 부인했다. ○보안유지에 만전 ○…12일 박세직 서울시장 등 3명을 소환조사한 서울지검은 이들이 조사받는동안 11층 특수부조사실 비상구마다 경비원을 배치,취재진의 출입을 완전히 봉쇄. 이 때문에 취재진은 1층과 지하차고 등 곳곳에 2∼3명씩 모여 이들이 조사를 마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보안유지에 극도의 신경을 쓰는 검찰과 신경전. 그러나 조사를 마친 박시장은 이날 하오4시10분쯤 VIP용 엘리베이터 대신 피의자호송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마약반사무실을 거쳐 청사뒤쪽 구치감 뒷문으로 빠져나가려다 취재진들과 마주치자 검찰차량으로 지하주차장 통로로 황급히 빠져나갔다. ○…최명부 대검중앙수사부장은 이날 상오10시30분쯤 기자들에게 박세직시장과 고건전시장의 소환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나 30분도 안된 이날 상오11시쯤 한부환 중수부2과장과 김인호·김성준검사 등 3명이 서초동 서울지검청사로 전현직 서울시장과 김대영 건설부차관등 3명을 극비소환해 참고인조사를 벌였다. 이날 박시장 등에 대한 검찰의 소환은 11일 밤 한부장검사가 이들에게 직접 전화로 연락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부장검사는 검찰이 조사장소를 대검에서 서초동 서울지검청사로 갑자기 바꾼 이유에 대해 『같은 검찰청사인데 어디나 조사장소로 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변명. 그러나 검찰의 한 관계자는 『서소문 대검청사와 삼청동 「안가」에는 이미 보도진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 전현직시장 및 차관에 대한 예우를 갖춰가며 조사하기에는 마땅치 않았던게 아니겠느냐』고 해석. ○“예우상 장소변경” ○…박세직 서울시장 등은 이날 상오11시 검찰관계자들과 서초동 서울지검청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사무실과 집에서 약속시간보다 30∼40분씩 늦게 청사에 도착,11층 특별조사실로 직행한 뒤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3시간반 남짓동안 조사를 받았다. 박시장은 한부환 대검중수부 2과장이,고건 전 시장은 김인호검사가,김대영 건설부차관은 김성준검사가 참고인조사를 했으며 변진우 서울지검 3차장은 철제셔터를 복도를 막고 수사관들을 동원,뒤늦게 도착한 보도진을 밖으로 밀어내며 접근을 막았다. ○…수서지구 택지특별공급 결정이 전·현직 시장 가운데 누구때 이루어진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한부장검사는 『아직은 「흰색」도 「검정색」도 아닌 「회색」 상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고 연막. 박시장 등 3명을 다시 소환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답변. ○…지난 10일 소환됐던 한보그룹 관련자 13명 가운데 검찰이 계속 철야조사를 했던 강병수사장 등 9명은 12일 정회장이 소환된다는 말에 조사를 마친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다려 「회장」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도. 검찰의 한 수사관은 『검찰로서는 48시간동안 소환이 가능하지만 이후에도 자청해 남을 경우 몰아낼 수도 없는 입장』이라면서 『아마도 정회장이 남을 끌어 들이는데에는 타고난 실력이 있는 것 같다』고 한마디.
  • “인책범위에 촉각”…일손놓고 어수선/「수서의혹」 한보·관련부처표정

    ◎한보,갑작스레 내부수리… 의혹 증폭/원소유자 연락안돼 추징자료 수집 애로/건설부 주택국장 타박상… 원인에 궁금증 ▷한보◁ ○…검찰이 한보그룹 임원들을 소환,수서지구 택지 특별공급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보측이 정태수 회장실,강병수 사장실 등 주요 사무실 3곳의 내부수리를 끝낸 사실이 드러나 회사측이 수사를 앞두고 사전에 주요 비밀서류를 빼돌린 것 같다는 짙은 의혹을 사고 있다. 이같은 의혹은 노태우 대통령이 수서지구 택지 특별공급 사건을 한점 의혹없이 철저히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316 은마아파트 상가 3층을 쓰고 있는 이 회사가 갑자기 사장실 및 회장실의 집기를 모두 복도에 꺼내 놓은 채 카펫을 다시 깔고 천장 수리를 한 데에서 비롯됐다. ○“천장수리 한것 뿐이다” 한보측은 이에 대해 『지난달 28일부터 10여일간의 일정으로 정회장이 말레이시아로 출국한 사이 비가 새던 회장실 천장을 수리하려 했던 것 뿐』이라고 해명했으나 수서사건의 당사자인 한보측이그간 여론의 질타로 정상업무가 마비되는 등 극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내부수리 공사를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한 수사관계자는 『회사측이 기밀비장부 등 각종 기밀서류를 천장에 숨겨오다 발각될 것을 우려,이를 딴 곳으로 빼돌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이같은 오비이락격의 수상쩍은 행동에 대해서도 검찰의 추궁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업무처리에 손도 못대 ▷건설부◁ ○…이동성 주택국장에 이어 12일 김대영 차관이 검찰에 잇따라 소환된 가운데 여권 수뇌부에서 이상희 장관에 대한 인책을 건의했다는 보도까지 나오자 시간이 갈수록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 이 때문에 이번 수서사건을 계기로 손질이 시급한 것으로 드러난 주택조합 제도의 개선·택지개발촉진법 시행령의 개정안 마련 등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건설부 직원들은 이번 사건으로 형사처벌과는 별도로 관계자들에 대한 인책이 뒤따를 것으로 보고 사태 추이를 조심스럽게관망하고 있다. ○…수서특혜와 관련,지난 11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이동성 건설부 주택국장이 12일 낮12시쯤 서울 종로구 종로6가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입원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10여시간만에 부랴부랴 퇴원해 주목. 505호실에 입원했던 이국장은 타박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머리부분 4곳·왼손 2곳·가슴 1곳·목 2곳 등의 X­레이를 찍었으나 병원측은 결과에 대해 일체 밝히지 않았다. 담당의사인 최용만 외과과장은 『이국장이 얼굴 가슴 목 등의 통증을 호소해 왔으며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피하출혈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고문 등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국장은 병원문을 나서면서 기자들에게 짐짓 몸을 내보이며 조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는 애써 부인했으나 오른쪽 귀 뒷부분에 핏자국이 있었으며 두 손 등에도 각각 무언가에 찍힌듯한 피멍이 나있어 궁금증을 더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이국장의 몸이 불편했다는 것은 조사전부터 알았지만 구타한 사실도 없고 조사를 받고 돌아갈 때도 아무런이상이 없었다』고 해명. 그러나 한 관계자는 이국장이 조사를 받고 돌아간 다음날인 12일 상오 『이국장을 조사했던 모검사가 조사과정에서 「꾸지람」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해 약간의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시사. ○행방 질문에 모두 함구 ▷서울시◁ ○…수서택지 특별공급과 관련,서울시에 대한 특별감사를 진행해온 감사원 감사반은 12일 하오5시쯤 전원철수,지난 6일이래 계속해온 감사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시 직원들은 감사종료에도 불구,박세직 시장·윤백영 부시장 등 최고책임자들이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음으로써 앞으로 몰아닥칠 문책인사 등을 크게 우려하는 술렁이는 분위기. ○…전날 하오 윤부시장에 대한 검찰의 극비소환에 이어 12일 상오 박시장의 소환사실을 확인하려는 보도진의 문의에 비서실 관계자들은 부인으로 일관. 비서실 관계자는 박시장의 동정을 묻자 『사랑의 쌀나누기 관계자와 점심약속이 있다』면서도 『약속장소는 모른다』며 소환사실을 부인. ▷국세청◁ ○…국세청은 수서지구 특혜분양 사건과 관련,한보측에 특별부가세(법인의 양도소득세) 및 증여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천명한 뒤 정확한 세액산출 등을 위한 마무리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국세청은 일단 한보와 관련한 과세문제는 설날 연휴가 시작되는 14일 이전에 끝맺고 조사내용을 공식 발표함으로써 하루빨리 「한보수렁」에서 벗어날 계획이나 당초 한보측에 땅을 판 원소유자 가운데 일부가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차질을 빚고 있다.
  • 난민들이 털어놓은 이라크의 참상

    ◎“생지옥 바그다드… 거리엔 시체 즐비”/물·전기 끊기고 식량도 바닥/공공건물 거의 파괴… 외부연락 끊겨/병원엔 부상자 가득… 「유령도시」 방불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폐사한 조개같다. 활기 넘치던 시가지는 이제 텅텅 비어있고 전기나 전화·상수도는 거의 끊긴 상태이다』 걸프전쟁 발발이후 현지에서 탈출해온 이집트 피란민들이 전하는 최근의 바그다드 표정이다. 『그곳은 마치 버려진 사막같아요』 ­홍해연안 이집트의 누웨이바항구에 피란민을 가득싣고 지난 24일 도착한 한 여객선에서 겨우 몸을 빠져 나온 납델 마우구드씨의 말이다. 『거리에는 몇몇 군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나다니는 사람이 없다』 마우구드씨를 비롯한 피란민들이 바그다드에서 겪었던 개전이후의 처참한 경험담을 이집트 주요 신문들의 지면을 꽉 메우고 있다. 그들은 시체들이 거리 곳곳에 나뒹굴고 있으며 병원들은 부상자들로 가득차 이들에게 치료순서를 정해주는 대기자명부까지 작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주 개전이래 약 6천명의 이집트 근로자들이 이라크국경을 넘어 요르단으로 피신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부 근로자들은 바그다드가 2차 세계대전때 폐허로 변한 베를린과 흡사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모하마드 다우구드 엘머시씨는 『그곳은 더이상 사람 살곳이 못됩니다. 음식이 있나요,마실 물이 있나요. 모든 시장은 문을 닫았어요』라고 말했다. 이들 이집트인들은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바그다드시내 대부분의 주요 군용건물과 정부청사들이 쑥밭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한 노동자는 『시내 어디를 가도 파괴된 건물과 불로 뒤범벅이 돼있다』고 한다. 한 부인은 그녀가 한밤중 폭격소리에 깨어나 창문사이로 국방부·TV방송 건물과 스튜디오,바그다드 라디오방송사들이 불에 타 주저앉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샤미르 도소우키씨는 이라크 최강의 공화국 수비대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잠을 자다가 폭격으로 벙커가 파괴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후세인대통령 친척들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바그다드에서 8㎞ 떨어진 엘 지하드 마을에 극비로 위장해둔 활주로가 만들어져 있으며 이 활주로는 패전할 경우 후세인과 그의 주요 참모들이 해외로 도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이라크의 공습사이렌은 공습이 시작된 후에야 울렸다고 말해 미군 전투기들이 맨 처음공격때 이라크 레이다망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라크는 다국적군 배치에 맞서 대규모의 동원령을 발동했었다. 이 때문에 바그다드에는 노인과 어린이들만 남아 있어서 마치 「유령의 도시」 같았다고 지난 23일 카이로에 귀환한 한 노동자가 말했다. 그는 시내에서 볼 수 있는 젊은 남자는 이집트와 수단 사람뿐이었다고 전했다. 샤미르 압둘라하라는 노동자는 개전직후 바그다드시내의 거의 모든 외국인들이 시내를 빠져나왔으며 이 때문에 택시요금은 바그다드에서 요르단국경까지 평소 6달러에서 6백달러로 1백배나 뛰었다고 설명했다. 택시를 잡지못하면 이보다 훨씬 비싼 요금을 내야했는데 한 노동자는 트럭을 얻어 타는데 4천8백달러나 주어야 했다고 말했다. 국경검문소에서도 이라크 세관관리들이 여권과 귀중품을모두 포기하라고 명령,압수해 갔다고 난민들은 말했다. 한 노동자는 『그들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호소했다.
  • 펜타곤 필승전략/4단계 작전

    ◎대공기지 공습→도로 파괴→지상군 폭격→지상공격/시차 극비… 철군유도 겨냥,공격 일시중단 계획도 미국이 16일밤 감행한 대이라크 공중공격은 펜타곤이 수립해 놓고 있는 4단계 전쟁계획 가운데 제1단계이다. 이 단계별 작전의 시차는 군사 비밀이나,향후 공중공격의 성공도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수주전 미 군사계획 입안자들은 폭격이 1주일간 계속된 후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지상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러나 최근 펜타곤의 일부 관리들은 공중폭격이 1개월간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짧아질 가능성도 크다. 현재 페르시아만에 집결한 연합군의 항공기는 2천대가 넘으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 공군기다. 이들은 하루 2천회를 출격,5천t의 폭탄을 이라크에 퍼부을 것으로 예상된다. 월남전중 미국이 기록한 최고의 출격횟수는 1주일에 3천5백회였으며 최다 폭탄 투하는 11일간 2만t이었다. 공중폭격의 파괴력은 거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컨대 2천파운드짜리 폭탄이 지상에서 터지면 깊이 36ft,직경 50ft의 큰 구덩이를 남긴다. 이 폭탄을 탑재한 B­52 폭격기 3대가 융단폭격을 하면 길이 1.5마일 폭 1마일이 쑥밭이 된다. 미국의 4단계 공격계획 가운데 제3단계까지가 이같은 공중공격에 의존하고 있다. 제1단계는 이라크의 대공방위체제,프로그 및 스커드 미사일기지,그리고 군지휘사령부에 대한 폭격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다국적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군 사령관들이 명령을 내리는 벙커 및 이라크 공군력을 전면 파괴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제공권을 장악해 연합군 공군기들이 안전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제1단계 폭격대상엔 이라크의 핵시설 및 생화학 무기공장에 대한 파괴도 포함돼 있다. 이는 페르시아만의 안정을 위협하는 이라크의 잠재적 및 현실적 위협 요소를 이번 기회에 뿌리 뽑는데 있는 것이다. 제2단계는 철도·도로·탄약 및 연료저장소,기타 병참 목표물을 공격해 쿠웨이트내 이라크군을 고립시키고 이들에 대한 재보급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제3단계는 이라크의 지상군에 대한 집중 폭격이다. 미 지상군에 대한 대항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 제3단계의 목표다. 제4단계는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미국주도 다국적군의 대규모 지상공격이다. 미국은 이라크군의 방어진지에 대한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가급적 피하기 위해 「공격 일시중단 전략」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략은 개전초기의 집중 공습후에 사담 후세인에게 쿠웨이트 철수의 마지막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이 경우 이라크군을 손상시키지 않은채 사담 후세인에게 철군을 허용할지에 관해 미 관리들은 아직 아무런 암시를 하지 않고 있다. 지난주 미 의회의 역사적인 전쟁 승인결의안 토의 당시 처음 알려진 이 「공격+일시중단계획」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고 미­이라크 양측의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미 정부보고서 및 의회보고서를 인용,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쟁이 1개월에 끝날 경우 미군 피해는 인명 3천명,탱크 2백대,비행기 1백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쟁이 1개월이상 끌 경우 피해는크게 늘어나 사상자 4만5천명,탱크 손실 9백대,비행기 손실 6백대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군사지도자들은 이라크 폭격 후 쿠웨이트에 대한 즉각 진공으로 수천명의 미군을 희생시키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개전초 대규모 공습을 감행한 후 이라크의 대응을 지켜보기 위해 공격을 일시 중단할 것이라고 의회 소식통들은 전했다. 펜타곤의 고위 소식통들은 미국이 제1단계 공격후 「일시중단」에 들어가는 것은 지상전 돌입전에 외교적 해결의 마지막 기회를 마련하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일시중단」 전략의 개념은 미 정책입안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문제,즉 이라크의 군사력을 철저히 때려 부술 것인가,아니면 전후 중동에서 시리아와 이란의 군사력과 균형을 이루는 적절한 방위력을 바그다드가 보지하도록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의 해답 모색과도 무관치 않다. 폭격중단 계획은 또 사담 후세인이 다국적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사기가 떨어지고 겁게 질린 이라크군이 투항할 수 있는 기회를제공할 것이다. 미 관리들은 지난 수개월간 이라크군의 도망자가 1천2백명에 달한다고 밝히면서 이라크군이 2천대의 다국적군 비행기로부터 수일간 맹폭을 당한 후 전투의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 외언내언

    『제가 쑨 캬샤는 제가 먹으라』. 러시아의 속담이다. 캬샤란 거칠게 빻은 보리(종류)로 쑨 러시아 특유의 나물죽. 자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단은 제가 나서서 마무리 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할린 근해 상공에서 소련 공군에 의해 KAL 여객기가 격추된지 어언 햇수로는 9년째. 내외국인 2백69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동서의 화해 무드가 무르익기 전의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차고 치가 떨린 만행. 유족들의 슬픔과 분노는 지금껏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것은 진실이 가려져 옴으로 해서 더욱 그러한 것. 그런터에 소련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가 그 베일을 벗기고 나섰다. ◆그동안 가장 억울했던 누명이 「간첩 활동」이라는 죄명.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그런데 「항로 이탈」로 판명되었음을 보도한다. 그러나 한번 더 우리 모두를 분노케 하는 것은 찾아낸 희생자의 시신들을 극비리에 소각해 버렸다는 사실. 그렇건만 정부쪽의 공식적인 언급은 『전혀 아는 바 없다』로 나타난다. 『제가 쑨 카샤는 제가 먹으라』고 하는속담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것인가.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우리와 소련은 국교를 맺었다. 그리고 지금 그 나라의 외무부 차관이 우리나라에 와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역사의 흐름이다. 그러나 짚어봐야 할 것은 새로운 선린관계의 기초가 무엇이냐 하는 점. 그것은 왕사의 잘잘못에 대한 앙금 청산과 관용의 자세이다. 찜찜한 구석을 남기면 그것이 항상 걸림돌로 되어 새 관계 정립의 장애요소로 됨은 개인이나 국가나 다를 바 없는 것. 『결점을 감추기 위해 취하는 사람의 수단만큼 용서 못할 결점도 없다』는 라로슈 푸코의 「잠언」(411)을 대국 소련은 곱씹어 봐야한다. ◆『저택을 사지 말라,이웃을 사라』. 또 하나의 러시아 속담이다. 지금 소련은 그 「이웃」을 사려하고 있지 않은가. 이웃을 사는 참다운 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소는 「KAL기 격추」 진상 밝히라”/희생자 유족·인권옹호련등

    ◎「유해소각」 보도에 경악/“희생자 다시 한번 죽인 만행”… 사죄 요구 「대한항공 007편여객기 피격희생자 유족회」(회장 홍현모·53)는 7일 소련당국이 사고여객기를 사할린 근해에서 격추시킨 뒤 유해를 극비리에 수거,소각했다는 외신보도에 대한 성명을 내고 『소련당국의 행위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소련은 진상을 모두 밝히고 유족들에게 진실로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유족회는 『최근 정부의 북방정책 등으로 소련과 수교하는 등 외교관계가 활발히 진전되고 있는 마당에 이같은 사실이 밝혀져 통분을 금할 수 없다』면서 『예상됐던 보도이기는 하지만 유해를 몰래 소각해 묻었다는 것은 희생자들을 다시한번 죽인 만행』이라고 말했다. 유족회는 유족회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한소양국 합동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진상이 밝혀지는 대로 소련당국은 사과·사죄와 함께 보상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또 방한중인 로가초프 소련 외무차관이 이같은 보도에 대해 공식해명하고 정부도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사고당시 부모를 잃은 박애란씨(39·주부)는 『하루빨리 진상이 밝혀져 부모님의 유골이라도 찾아 우리땅에 묻고 싶다』면서 『우리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국민감정을 고려해 주체성을 갖고 소련으로부터 진실한 사과를 받아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제인권옹호한국연맹도 이날 성명을 발표,『소련당국이 소련전투기에 격추당해 희생된 2백69명의 탑승객 유해를 발견하고도 신원을 확인하여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고 유해를 모두 소각했다는 사실에 온 국민과 함께 분노와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연맹측은 또 『한·소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된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정부는 소련정부에 정확한 진상규명은 물론 정식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야하며 소련정부도 과거의 잘못을 시인,진실을 밝혀 희생자의 원혼과 유족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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