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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m지하 대형 유리관에 보존/김일성 시신처리 어떻게 할까

    ◎작년부터 부패방지 보존실공사 착수/일반공개땐 승강장치이용 지상으로/모택동기념관 본떠 시신 영구보존 김일성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될까. 북한당국은 아직 김주석의 시신처리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지 않았으나 미라상태로 영구 보존된 레닌·스탈린이나 모택동등 사회주의지도자들의 사례를 뒤따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판단은 북한이 「민족의 태양」으로 추앙한 김일성의 사망에 대비해 이미 지난해부터 대형유리관과 지하보존실및 김일성기념관 건립에 필요한 유리와 목재·특수강판등 각종 자재를 준비하고 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는 사실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 북한소식통은 이와관련,『북한이 김일성사후 특수유리관을 일본에 주문했다는 정보가 있다』면서 『북한은 김일성시신을 유리관에 담아 북한인민들로 하여금 추모토록 하려는 것같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김주석의 시신은 가로·세로가 각각 10m나 되는 대형유리관에 안치돼 지하30m의 깊이에 보존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하 보존실의 경우대형유리관을 사방벽면과 각각 5∼6m가량 떼어놓아 특수시설을 설치하는등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대형유리관은 평상시에는 지하보존실에 안치했다가 일반에 공개될 때만 자동승강장치 등을 이용,지상으로 끌어올린뒤 조문이 끝나면 원위치로 내려가게 될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지난2월 중국 북경의 소식통들은 북한이 지난해10월 지하보존실을 만들기 위해 건설전문가와 호위총국요원등 8명을 극비리에 북경에 파견,모택동중국주석의 유리관제작에 직접 참여했던 중국기술자 5명으로부터 기술자문을 받았다고 전한 바있다. 이들 소식통들은 북한이 홍콩의 건설건자재회사와 시설공사에 필요한 자재구매협상을 벌여 1차로 30만달러어치를 사기로 계약했으며 이미 지난해 신용장을 개설한 상태라고 전했으나 건축자재가 실제 북한으로 반입됐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91년부터 김일성이 사망할 경우에 대비,시신을 방부처리한뒤 밀폐된 유리관에 담아 지하 깊은 곳에 안치했다가 필요할 경우 일반에 공개할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를 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방송들은 『8일부터 17일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설정하고 11일부터 16일까지 조문객을 맞이 한다』고 보도하고 있으므로 김주석의 시신공개 여부는 일반 조문객을 받는 11일쯤 판가름날 것으로 보이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김일성주석의 업적을 후대에까지 기리기 위해 김의 시신을 영구보존할 기념관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의 모택동기념관을 본떠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기념관건립과 관련,이 기념관에 안치될 김의 대형유리관의 방수·방부처리등 영구보존책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 1976년 9월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중국공산당 정치국원들이 모의 시신처리를 놓고 레닌처럼 모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하자는 의견과 모의 생전 희망대로 화장을 하자는 의견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이들 정치국원들의 의견이 타협될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끈 탓에 모의 시신을 보존하는데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던 것과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기념관건립부지는 평양 만경대인근의 김일성생가나 평양 주체사상탑등 김의 사상과 업적을 알리는 데에 어울리는 장소이면서도 북한인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유력할 것이라는 게 북한관련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일성기념관의 건립규모는 모택동이나 레닌등의 묘역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가 될지 짐작이 가능하다. 북경시내 천안문 남쪽끝에 위치한 모택동 영묘는 가로·세로 각각 1백5m에 대리석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높이 33m의 건물로 마치 그리스신전을 방불켸 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이들 보다도 재임기간이 긴 지난 49년동안 북한지역의 절대통치자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때 기념관의 규모가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교류근무」/월말께 4백명선 인사 단행

    ◎신청자 「기초분류」결과 심사대상 2천2백여명 확정/환경·특허청 희망­지방전출 지원자 많아/인기부서에 몰려 교류폭 계획보다 작아질듯 정부 각 부처사이 또 중앙·지방사이의 대규모 인사교류의 단행시기가 다가오면서 인사의 폭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총무처를 중심으로 극비분류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달 말에는 4백여명의 공무원에 대한 인사가 단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5월15일까지 총무처에 접수된 부처사이의 교류희망자 숫자는 무려 2천5백여명.지난 82년 부처사이의 교류를 공식화한 이래 최고를 기록했으며 매년 평균 5백∼6백명의 신청이 있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증가한 것. 때문에 당초에는 5월말까지 기초분류를 끝내고 6월안에 교류대상자를 확정지으려 했던 일정이 상당히 순연.총무처 인사과의 담당 직원에 10여개의 박스를 가득 채운 신청서류를 정리,정부전산소에 입력시키는데에만 한달가까이 걸려 6월10일 쯤에서야 기초분류가 완료. 기초분류 결과 교류대상이 안되는 무자격자를 추려내고 2천2백22명이 교류의 심사대상으로 확정되었다. ○…교류희망자들의 신청내용을 분석하면 특허및 환경등 전문분야에 근무하기를 원하는 공무원이 많아 전문화시대의 특징을 반영.중앙부처 가운데는 총리실·총무처등 승진속도가 빠르고 근무여건이 좋은 부처가 선호대상. 또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전출을 희망하는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두드러진 추세의 하나.내년 자치단체장선거로 지방자치단체의 위상이 높아지리라는 기대감도 작용했으리라는 분석이며 수도권집중완화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는 평가. ○…총무처는 지난달 중순부터 관련 직원들을 합숙시키면서 교류대상자들 가운데 1대1 교류가 가능한 것들을 우선 추려내고 있으나 워낙 희망부처가 다양해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는게 관계자의 전언. 인사교류업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이성렬총무처인사과장은 『이번 교류희망자들의 경우 나오려고 하는 부서와 가기를 희망하는 부서가 대체로 몰려 있기 때문에 교류작업에 최선을 다했으나 교류달성률이 예년 수준을 크게 웃돌기는 어려울 것같다』고 전망. 예년의 교류달성률은 20% 정도에 머물렀는데 그것과 비슷하다면 올해는 4백명선의 교류가 이루어지리라는 전망.이는 당초 총무처가 목표로 했던 1천여명에 못미치지만 총규모에 있어서 예년 평균 2백명의 2배에 해당하는 것. 실무작업팀들은 5∼6급에서 2백명 안팎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7급에서 그것과 비슷한 규모의 인사가 성사될 것같다고 간부들에게 보고.4급 이상 고위직은 희망자가 적고 1대1교류가 어려워 이번 인사에서는 대상이 없을 전망. ○…총무처는 실무진에 의한 교류분류가 끝나면 이달중순 중앙인사교류위원회를 열고 인사대상자를 최종 확정한다는 계획.
  • 「7·4성명」 막후실무 정홍진씨(인터뷰)

    ◎“평양대좌는 공존→통일의 시발점”/대결종식의 뜻 22년만에 열매맺은 셈/회담초기에 우리입장 분명히 제시를 『7·4남북공동성명이 남북의 대결상태를 평화공존의 상태로 끌고가자는 의도에서 이뤄진 것이었는데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이제서야 그 열매가 맺어지는 것 같아 뒤늦게라도 그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부터 22년전 우리측 밀사로 네차례나 휴전선을 넘나들며 남북공동성명이 탄생하기 까지 중요한 막후역할을 수행했던 정홍진씨(60·현 송원장학회이사장)는 4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요즈음 남다른 감회에 젖어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 72년 밀사로 평양을 오갔던 정씨는 그때 대한적십자사 회담사무국 회담운영실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의 명령에 따라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키는 일을 맡았었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어떻게 보는지. ▲북측은 7·4남북공동성명 발표당시부터 지금까지 「여건이 성숙되면」이라는 이유를 달아 정상끼리의 만남을 계속 미뤄왔었기 때문에 이번에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정상회담의 전망은. ▲7·4공동성명 당시와 지금을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국력이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북한의 대남기본노선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회담결과를 속단하기는 어렵고,다만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로 가는 시발점으로 인식하면 될 것입니다. ­경험자로서 정부측에 조언이 있다면. ▲그들(북)과의 시각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번에 정상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 대통령께서 김일성주석에게 우리의 통일정책을 명백하고 단호하게 밝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와관련,『7·4공동성명 발표 다음해인 73년 발표된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이 북측에서 볼 때 2개의 한국을 고착시키는 것으로 오인돼 남북대화 자체가 무산됐던 경험에 비춰볼 때 우리의 입장을 회담초기에 확고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당시 첫돌이 갓 지났던 막내가 벌써 대학원생으로 성장했다는 정씨는 『이번 정상회담의 열매는 정상이 만나 합의한 내용을 각료들간의 회담을 통해 구체화되어 나오겠지만 국민들은 너무 조급해 하지말고 회담결과를 냉정히 시켜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는 말을 잊지않았다. 정씨는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그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대표,남북조절위간사위원,중정 차장보를 거치면서 대북전문가로 활약하다 지난 80년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송원장학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꺼질듯 말듯 이어온 「통일 불씨」/민족단결 등 3원칙 「기본합의서」 연결/정상회담 성사로 오랜불신 허물 계기/「7·4」 22돌 맞은 남북대화의 역정 4일은 「7·4 남북공동성명」 22주년되는 날이었다.7·4공동성명의 3원칙은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 ▲조국통일이었다.남북사이에 어렵게 합의된 이 3원칙이 22년의 세월동안 실천이 못되고 있었던 것이다.때문에 이번 「7·25 남북정상회담」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후락전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전북한부수상이 평양과 서울을 극비리에 각각 교차방문한뒤 지난 72년7월4일 상오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을 발표했을때 모두들 놀라고 흥분했었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획기적인 물꼬로 평가되던 공동성명은 같은 해 10월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조절위 1차회의부터 사문화의 조짐을 보였다.북한측위원장인 김영주노동당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참석한 박성철은 「조국통일 3원칙」을 들먹이며 ▲반공정책의 포기와 공산주의의 허용 ▲주한미군철수 ▲국군의 전략증강 및 군사훈련 중지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남북한은 그뒤 3차례의 본회의와 10차례의 부위원장 접촉,그리고 3차례의 간사회의를 더 가졌지만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남북조절위는 75년 5월29일 북한측이 제11차 부위원장회의의 무기한 연기를 통보하면서 해체됐다. 이어 남북한 사이에는 우리의 수재물자지원 혹은 적십자사 주관의 상징적 이산가족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7·4공동성명의 근본 정신을 실현시키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공동성명은 지난 91년12월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간의 화해 교류 및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의 채택으로 역사적 의미를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양측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을 계속했고 그 결과 남북대화는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그뒤 8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과 수없이 많은 접촉과 연락이 있었지만 모두 결렬로 끝났다.지난해 3월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뒤로는 남북대화의 재개는 요원한 것처럼 여겨졌다.결국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이라 볼수 있다.
  • 미,아이티·쿠바난민 비상/「원안작전」 계획 수립

    ◎대량유입 위기 대응 【워싱턴·포르토프랭스 AP AFP DPA 연합】 클린턴 미대통령은 1일 아이티 탈출 선상난민의 급증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보좌관들과 긴급협의를 가졌다고 디디 마이어스 백악관대변인이 말했다. 국무부는 지난달 30일 하루동안 1천명이 바다에서 구조된 것을 포함,지난 2주간 구조된 아이티인들의 수가 5천명을 넘는다고 말했는데 이날 백악관대책회의는 최소한 30명의 아이티인들이 아이티를 탈출하려다 경찰의 경고사격에 놀라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보도에 자극받아 열린 것이다. 한편 미행정부는 쿠바,아이티를 비롯한 외국난민들의 대량유입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극비계획안의 마무리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지등 미국언론들이 최근 보도했다. 「원안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안은 13년전 12만5천명의 쿠바난민들이 플로리다주에 도착한 이래 계속 작성중에 있었으나 지난해 플로리다주 관리들이 또다시 쿠바난민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될 경우를 우려하고 공식 입안을 요구함으로써 가속화됐다. 일부에서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정권의 붕괴나 내전이 있을 경우 최고 30만명의 난민이 쿠바를 탈출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증권가 「작전설」로 “술렁”/주가 부풀려 차익 남기기

    ◎큰손등이 주도… 개인투자자만 피해/40종목 올들어 평균 80%이상 올라 증권가가 「작전설」로 술렁거린다.작전설이 나돈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나,최근 더욱 기승을 부리는 느낌이다. 『작전이란 게 분명히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기껏 1만원의 가치 밖에 없는 주식이 3만5천원대를 오르내립니까』라며 D증권 C부장은 지적한다.연초만 해도 1만원을 밑돌던 저가주가 최근 4만원 대 가까이 치솟는 것은 작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작전은 「큰 손」이나 기관투자가들이 특정 종목에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실제 가치 이상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을 말한다.솔깃해진 개인 투자자들이 뒤늦게 몰려들어 사들이기 시작하면 잽싸게 팔아 차익을 챙기고 사라진다. 증권가에서는 일부 기관투자가,투자클럽,큰 손을 대표적인 작전세력으로 꼽는다.작전 개시에서 종료까지의 기간은 보통 3개월이며,5백억원 안팎의 자금이 동원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작전 대상으로 의심되는 종목은 40여개로,이들 종목은 올 들어 평균 80% 이상 올랐다.태양금속·삼도물산·삼부토건·동성철강·한신기계공업·한국폴리우레탄·일성종합건설·크라운제과 등은 90% 이상 치솟았다.오리엔트시계·대한방직·아시아제지·새한종합금융·동성화학 등도 80% 이상 뛰었다. 투신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실체를 알 수 없어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30∼40개 종목을 작전 대상으로 볼 수 있다』고 이를 뒷받침했다. 작전세력들은 「손님」을 끌어 들이기 위해 그럴 듯한 재료를 개발한다.이들은 기업의 내부 사정에도 밝지만,해당 기업의 간부와 선이 닿은 경우도 있다. 보통 기업의 경영내용에 경제 현안이나 정치기류 등과 관련된 풍문을 그럴 싸하게 갖다 붙인다.기업 내부의 극비 정보인 양 실적호전·증자·해외시장 진출 등을 덧붙이기도 한다.우량 자산주·기업의 매수 및 합병(M&A) 대상주 등 어느 정도 사실이 뒷받침하는 재료를 동원하기도 한다. 대상 종목의 선정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다.자본금 규모가 1백억원 정도이고 하루 거래량도 1만5천∼3만주 선인 종목이 적당하다.시선도 별로 끌지 않으면서 경계매물이 쏟아지는 것을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또 작은 자본으로 치고 빠지려면 이 정도 규모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태양금속·동양철관·한국폴리우레탄·한신기계공업·동양기전·만호제강·대한방직·크라운제과·삼화왕관·서흥캅셀 등이 이 부류로 꼽힌다. 미래에 대한 화사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는 종목일 수록 작전을 펴기 쉽다.자칫하면 작전이 노출되기 때문이다.이를테면 만호제강·신성·삼부토건·대한방직 등은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어 재료를 가공하기 쉽다. 시세조작이나 내부자 거래를 찾아내는 증권감독원의 검사4국과 5국은 현재 작전 대상이라고 의심이 가는 종목을 중심으로 특별조사를 하고 있다.증권거래소도 기관의 주식운용역(펀드매니저) 등을 대상으로 계도활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작전세력이 펼치는 불공정 거래의 증거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이른바 심증은 가도 물증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이같은 암적인 존재 때문에 증시는 「투기장」이라는 불신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 스탈린,인구발표 조작/조사문서 발견… 3백여만명 누락

    ◎공포정치로 인한 희생자로 추정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난 39년 실시한 인구조사 자료가 최근 단행본으로 출판됐다고 러시아 일간지인 로시스키예 베스티가 25일 보도했다. 이 자료는 엄청난 인명피해 등을 감춘 소련 초기역사의 공백을 밝혀주고 스탈린이 행한 숱한 거짓말을 폭로해줄 것으로 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소련은 지난 26년 총인구가 1천4백70만명이라는 통계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59년까지 완전한 인구통계를 발표치 않아 학자들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 인구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20여권에 이르는 39년도의 인구 조사 통계 보고서는 정부 문서 보관소에 있었으며 겉표지에는 「극비,공개불허」라는 스탬프가 찍혀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시스키에 베스티는 러시아의 나우카 프레스가 문제의 보고서에서 통계수치를 발췌,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역사연구소 전문가들의 주석을 붙여 책으로 펴냈다고 밝혔다. 26년도 인구조사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39년 사이에 많은주민들이 피의 숙청과 폭압적인 집단화·산업화 정책으로 희생됐다.희생자 추정치는 최저 6백만명에서 최대는 6천만명으로 들쭉날쭉하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37년에 인구조사가 있었지만 발표를 금지시키다 39년도에 2차 인구조사를 실시했다.그러나 그는 이것도 마음에 안들었는지 극히 단편적인 자료만을 발표토록 했다. 스탈린은 39년 총인구가 1억7천50만명이라고 공언했으나 이번 자료에는 당시의 실제 총인구가 1억6천7백60만명인 것으로 돼 있다. 기사를 쓴 알렉산드르 구바노프는 『3백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살아있는 것으로 발표된 셈』이라고 말했다. 또한가지 밝혀진 사실은 스탈린이 30년대 소련국민들의 문자해독률을 과장했다는 것.당시 관리들마저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이 드러났다.판검사들 41%가 중학교 수준의 학력에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 “나는 한국전에 이렇게 참전했다”/구소군의 증언

    ◎구소군 장교 2인의 회고담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지원 아래 준비되고 감행되었다.한국전쟁 개전후에는 지상전투부대를 보내지는 않았으나 공군력과 정보장교등을 비밀리에 참전시켰다. 오늘날 러시아가 관련 극비 문서까지 한국에 넘겨줄 정도로 양국간의 관계는 크게 변했다.이렇듯 상황이 달라졌고 또 당시 한국 전투병력과의 직접접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지 참전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들은 체험담에서 당시 소련군이 참전 사실 자체를 숨기려 중공군으로 위장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올로프/“특수임무” 받고 단동서 중국군에 합류/수풍발전소 방어지원… 미 포로 심문도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나는 정보장교로 모스크바에서 근무하고 있었다.계급은 육군대위였다.2월말 어느날 총참모부에서 나를 포함,우리부대 장교 몇명을 호출했다.해당자 모두 영어를 할줄 알고 전자정보분야에 근무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한밤중에 우리를 면담한 게르만 말란딘 참모차장은 우리에게 특수임무를맡기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며칠 뒤 우리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모스크바­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7일만에 만주역에 도착했고 거기서 이틀만에 북경에 도달했다. 우리가 탄 열차에는 모두 민간인 복장을 한 공군장교와 군사고문단등이 가득 타고 있었다.북경에 도착하자 주중 소련군사고문단장이 우리 목적지가 중국의 안동(단동)이라고 알려주었다.그로부터 며칠 뒤 안동으로 갔다.안동은 전선을 방불케했다.한국전선으로 가기 위해 중공군들이 곳곳에 집결하고 있었고 병력·군장비들은 모두 위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배속된 안동주둔 소련군 제64비행단의 임무는 압록강 철교들과 수풍화력발전소에 대한 공중지원,국경으로부터 반경 75㎞내 북한영토에 대한 공중지원이었다.소련군 조종사들은 북위 39도선 이남과 서해상공에는 출격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받았다.소련군의 한국전 참전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안동에는 야간에는 등화관제가 실시됐고 미군 폭격기 B­29기,B­26기들의 밤낮으로 압록강철교 상공에 출현했다.안동에 도착한 이튿날 우리는 견장·표식이 전혀없는 중공군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64비행단 소속 모든 전투기들은 중공군이나 북한군 표식으로 바꿔 달았다.전투중 소련조종사들은 모두 중국어로 교신토록 명령을 받았다.그러나 실제전투에서 우리 조종사들은 대부분 중국어를 잊어먹어 러시아어로 교신했다.소련당국의 은폐기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참전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미군 조종사들은 공중전 중 육안으로 우리를 식별할 수 있었고 우리가 러시아어로 교신하는 것을 모두 들었다.그럼에도 미군측은 우리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다. 우리 정보팀은 미공군의 조직·배치·전투능력등을 사령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미공군이 사용하는 암호를 판독해 미군기들의 정확한 이륙시기등도 즉시 사령부에 보고했다.우리 사령부는 세이버기를 미그­15의 가장 무서운 적으로 생각했다.우리는 포로로 잡힌 미군들도 심문했다.나를 포함해 영어를 할 줄 아는 장교 몇사람이 북한내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미군과의 직접접촉은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면으로 심문했다.그러는 중에 나는 몇차례 그들을 직접심문할 기회가 있었다.그중 51년 5월에 격추된 B­29기 조종사 블랙 중령이란 사람의 이름이 기억난다.3개월간 미군포로 심문 임무를 마치고 나는 다시 안동으로 돌아왔고 그해 10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9개월여의 참전기간중 중공군측은 우리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음식·잠자리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다.소련·중공·북한군들간의 사이도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발렌틴 골루베프/중국공군 위장… M15로 미군기와 교전/51년 안산 이동,북한조종사 기술교육 1950년6월 나는 모스크바방공군 소속 공군중위로 모스크바 북서쪽 칼리닌시(현트베르시)부근 비행대에 근무하고 있었다.나는 항공기 기술장교였다.우리는 49년말부터 새 전투기인 미그­15기의 관련기술을 습득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어느날 모스칼렝코 방공군대령이 우리 부대를 방문했다.모스칼렝코대령은 우리 부대가 특수임무를 부여받았다고 말했다. 일체의 휴가가 중지됐고 휴가중인 군인들은 조속히 귀대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로부터 우리는 매일 24시간 주야로 근무하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투기들을 해체해 기차에 싣는 작업을 했다.해체된 비행기는 특수컨테이너에 넣어 열차에 실려졌다.모든 부대원들에게 무기가 지급됐고 대신 당원증,콤소몰 회원증,신분증은 모두 사령부에 반납했다.그때부터 부대원간에 절대 계급을 부르지 말고 이름,그것도 가능한 한 성만 부르도록 엄명이 내려졌다. 그해 8월초 우리는 해체된 비행기를 실은 열차에 함께 타고 출발했다.열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려 중국국경쪽을 향해 갔다.마침내 국경을 지나 만주역에 도착했다.만주역에서는 중공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최종목적지는 목단이었다.50년8월말부터 우리는 목단의 한 행대에서 첫 임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소련군은 3개의 비행연대를 운영했다.부식조달,막사등은 전부 중공군이 맡아서 했다.우리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신문·잡지등이 본국으로부터 배달됐고 시내 나들이도 간혹 했다.시내 나들이를 할 때 우리는 민간인복장을 했는데 국민당 잔당들이테러를 자주 저지른다고 신변보호를 위해 중공군 2∼3명이 반드시 우리 뒤를 따라다녔다.10월말 우리는 중국인민해방군복장을 지급받아 겉으로는 중공군이 됐다.중국말 교습도 받았다.우리 공군기들의 표지도 중공군으로 바뀌었다. 12월 우리는 전투기들과 함께 안동(현 단동)으로 이동했다.그곳에서 우리는 압록강철교와 수력발전소 보호를 위한 공중지원을 맡았다.안동에 도착한 바로 이튿날 우리 부대는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조종사들은 매일 2∼3회,일요일이면 3회이상씩 출격해야 했다. 한번 출격하면 쌍방 모두 합쳐 60∼80대가 맞붙었는데 항상 미군기의 수가 더 많았다.서해 상공에서도 자주 공중전이 벌어졌다.당시 미군 세이버기는 우리 미그­15기에 비해 다소 성능이 앞섰다. 51년4월 우리 부대는 안산시 비행대로 옮겨가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조종사·기술자들을 교육하는 새 임무를 맡았다.당시 젊은 북한 여군들이 통역으로 따라온 기억이 난다. 우리는 51년10월 한국전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우리 연대에서 모두4명의 조종사가 전사했고 전투기 6대를 잃었다.본국에서 우리는 모두 무공훈장을 받고 일계급 특진됐다.중공정부로부터도 친선훈장을 받았다.
  • 인 국방부 「한국전포로 감시」 비록 입수 공개

    ◎“중공군 포로 송환 막아라”/대만공작팀 극비리 침투/반공교육후 “말 안들으면 처형” 위협/포로들 난동 잦아… 인 사령관 납치도 한국전쟁은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조인으로 막을 내렸다.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송환을 거부한 2만3천명 포로의 처리문제를 놓고 이른바 「총성없는 전쟁」으로 6개월간 처절하게 계속됐다.판문점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유엔군진영과 북부군(북한인민군·중공의용군)진영의 치열한 설득전과 이들의 심판을 맡은 인도의 철저한 중간입장고수는 2차대전후 네루중립주의 첫실험의 성공이라는 현대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서울신문은 한국전쟁발발 44주년을 맞아 당시 송환거부포로 설득작전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인 「주한인도관리군활동사」(History of the Custodian Force of Indiain Korea:1953∼54)를 최근 인도현지에서 입수,발췌소개한다. ▷인도군첫해외파병◁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53년5월8일 미국이 인도측에 송환거부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군 파병가능성을 타진해왔다.이미 인도는 이들을 지휘감독할 5개 중립국송환위(NNRC)의 의장국을 맡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네루총리는 파병을 수락했다.8월5일 R K 네루외무차관,관리군사령관 토라트소장,사르다르 싱 인도적십자사무총장등 3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도쿄의 유엔군사령부와 개성의 북부군사령부를 거쳐 구체적인 임무와 병력규모등을 협의했다. 인도군의 총규모는 6개 보병대대와 각종 부속대로 6천명.9월28일 제5진의 인천항 도착으로 이동을 모두 끝냈다.그러나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인도군의 한반도상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유엔군측은 인천에서 판문점까지 헬기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동아시아의 모든 미군헬기를 동원,5명씩 수송했는데 모두 1천3백회의 출격을 기록한 사상최대의 헬기작전에서 다행히 사고는 단 한건도 없었다. ○통정리에 텐트촌 ▷새 포로수용소◁ 통정리일대에 유엔군이 건설한 막사는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캠프 7∼10개씩을 1개구역으로 하는 7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중공군 3개,북한군 2개,송환희망자격리수용소 1개,병원용 1개소씩으로 할당됐다.캠프는 17개의 막사와 식당·목욕탕·화장실텐트등 모두 20개의 텐트로 구성됐다.냉난방은 물론 전깃불과 온수공급이 완벽했다. 미군측은 이곳에 3만명의 식수및 생활용수공급을 위해 50만갤런상당의 물탱크를 설치했고 임진강으로부터 모두 31㎞의 대형송수관을 매설했다.전기공급을 위해 발전소 12개를 건설했으며 전체 생필품공급을 위한 대형보급창고도 세웠다.또한 설득장및 설득자대기소,송환표명포로수용을 위한 막사등 설득관련막사 10여동이 별도로 건설되었다.이들 전체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수에의 의문◁ 포로의 숫자는 포로교환협정에 따른 것으로 인도군의 입장에서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그러나 양측의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된 51년7월26일당시까지 유엔군측은 12만1천명의 북한군과 중공군포로를 억류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4만1천명이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북부군측은 6만5천명의 유엔군 생포를 주장했으며 그 가운데 5만명이 자발적으로 북한인민군과 중공의용군에 합류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주장은 유엔군측이나 공산군측모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에 손상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었다. 휴전협정조인후 33일간 양측은 포로교환을 실시,유엔군측은 7만5천8백명을,북부군측은 1만2천7백60명을 상대방측에 넘겨주었다.그리고 9월25일까지 인도군이 넘겨받은 포로는 유엔군으로부터 북한군 7천9백명과 중공군 1만4천7백4명,북부군으로부터 한국군 3백35명(여군5명 포함),미군 23명,영국군 1명등 모두 2만2천9백63명이었다. 유엔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남한정부의 6·18 반공포로석방으로 1만7천여명이 도망간 상태여서 어느정도 타당성 있는 숫자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북부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는 5만명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1만5천명중 유엔군측으로 송환되지 않은 수가 2천3백여명에 달하는데도 아무 설명이나 명단제시조차 없이 3백여명만 인계했던 것이다. ○총격사건 두차례 ▷포로들의 저항◁ 양측 사령부로부터 포로의 인계는 9월10일 시작돼 25일에 모두 끝났다.그들은 막사마다 리더를 선출,자치적으로 움직였으며 자체 취사를 했다.일과는 상오6시 기상하여 하오9시30분 취침에 들 때까지 대부분 운동과 오락으로 진행됐다. 첫날 중공군포로 가운데 7명이 대열을 이탈하여 송환을 요청해온 것을 비롯하여 밤에 철조망을 뚫고 번의를 요청해오는 포로들이 많았다.이같은 자발적 이탈자들의 증가로 포로측과 인도군측은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설득작전은 포로 인계인수가 끝난 뒤 26일부터 시작될 계획이었다.그러나 문제는 마지막날인 25일 발생했다. 날이 밝자 각 캠프의 포로들은 인도군에게 「납치」해간 원추를 즉각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다.그들은 반인플래카드를 내걸고 돌을 집어던지며 강력히 저항했다.이 와중에서 토라트사령관이 포로들에게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먼저 억류된 그류왈소령의 구출협상을 벌이기 위해 캠프를 찾은 토라트사령관과 브두와르중령·싱소령등 12명이 순식간에 5백명에게 포위된 것이다. 부사령관 싱준장은 즉시 무장병력을 출동시켜 캠프전체를 에워싸고 사령관일행의 즉각석방을 요구했다.그리고 유엔군사령부에 협조를 요청하는등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았다.그 사이 페인탈여단장은 특공대를 동원,극비의 구출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고 대화의 진전이 없는 가운데 마침내 토라트사령관의 기지로 포로대표를 설득,상황은 끝나게 되었다.그러나 그후에도 10월1일과 2일 두차례 총격사건이 발생,수십명의 사상자발생등 긴장상태지속으로 첫설득회는 10월15일에 가서야 가능했다.반면에 북부군측에 억류돼 있던 포로들은 규율이 잡혀 있었으며 공산주의에 몰입해 있는 듯했다. ▷대만의 선전전◁ 탈출해온 원추는 대만정부가 단 한명의 중공군포로도 대륙으로 송환시킬 수 없다는 장개석총통의 신념에 따라 조직적으로 포로설득에 개입했음을 폭로했다. 휴전협상이 진행중인 동안 중공군포로들이 수용돼 있던 제주도수용소로 대만정부는 포로들의 교육을 위한 두개의 공작팀을 침투시켰다.각각 12명과 6명으로 조직된 공작팀은 대만의 외교부·정보부·국민당등 각처에서 엄선된 심리전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포로막사로침투해 반공강연을 했고 누구든지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공산당이 그를 죽여 사지를 절단한 뒤 반공에 대한 본보기로 삼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그들은 어떻게 공산당의 설득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쳤다.한사람의 이탈도 막기 위해 8∼9명으로 소그룹을 조직,송환의사를 나타내는 포로들을 목졸라 처치해버리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송환위대표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는 오직 『대만으로 가고 싶다』는 말만 할 것을 강조했고 포로개개인들에게 「TAIWAN」이라는 영문글자도 가르쳤다. ○88명 제3국 선택 ▷설득완료◁ 12월23일까지 90일간 주어진 설득기간중 실제설득이 이뤄진 날은 10일에 불과했다.설득받은 포로는 전체의 15%에 불과한 3천4백69명이었으며 설득후 송환을 요청한 자는 모두 1백37명,그나마 공산군측 억류포로중에는 한명도 없었다.여기에 설득을 기다리지 않고 막사탈출등으로 송환을 희망한 2백38명(공산군측 포로 8명 포함)을 더해 최종적인 송환희망자는 모두 3백75명.결국 설득작전은 양측사령부와 송환위·인도군등이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투입한 작전치고는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0일간의 설득기간이 끝난 후에도 양측은 포로들의 추가설득을 위해 설득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송환위측은 협정에 규정된대로 이 포로들은 30일간의 정리기간을 가진 뒤 54년1월22일자로 포로의 신분이 아닌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감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마침내 1월20일 상오8시부터 인도군은 포로들의 인계를 시작했다.다음날 새벽3시까지 모두 19시간 2만1천8백39명이 유엔군측으로,3백47명이 북부군측으로 인계됐다.이 가운데 북한군 74명,중공군 12명,남한군 2명등 88명은 제3국을 택했다.
  • 러,6·25남침 첫 인정/다큐멘터리 SBS 방영

    ◎스탈린 비밀전문 공개 러시아가 북한의 남침을 최초로 인정한 러시아 렌TV 프로덕션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 내막」이 2일밤 11시부터 90분간 SBS­TV를 통해 방송됐다. 특히 이날 방송에서는 한국전쟁발발을 전후해 스탈린과 모택동·김일성 사이에 오간 비밀전문 등 극비문서들이 처음으로 공개됐으며 그밖에도 새로운 기록필름들을 토대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소련·중공간의 긴밀한 협력관계와 남침자료들을 생생히 증명,관심을 모았다. 유자효해설위원이 진행한 이날 방송에서는 러시아TV 「오스탄키노」가 지난 21일 방송한 「한국전쟁」 1부이외에 28일 방송예정이었다가 북한측의 강력한 항의로 불방된 2부 내용까지 전체를 방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옐친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며 한국전쟁 권위자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퇴역장군(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준회원)이 해설자로 등장,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신빙도를 더했다. 지난 49년 3월5일 스탈린의 응접실에서 있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비밀회동,이듬해 10월6일 스탈린이 「필리포프」라는 가명으로 모택동에게 보낸 극비 전문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요청한 일 등이 1부에서 소개됐다. 2부에서는 6·25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조종사들이 참전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선어를 배웠지만 실제 전투시에는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중,홍콩언론통제법 은밀 추진/당기관지 창간… 일부언론사 폐간 포함

    ◎홍콩월간지 보도 【홍콩 연합】 중국 공산당은 홍콩언론에 철저히 재갈을 물리기 위해 전문그룹을 구성했으며 이 그룹은 현재 극비리에 홍콩언론 통제법과 규정들을 마련중이라고 홍콩의 중국전문 월간지 개방 최신호가 2일 보도했다. 개방 6월호는 중국공산당 선전부문의 믿을만한 소식통을 인용,당이 홍콩언론 통제법과 규정들을 마련키로 한 것은 홍콩의 언론자유를 대폭 축소하고 일부 언론사를 폐간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이들 법과 규정이 북경당국에 의해 극비리에 제정되고 있으며 지금과는 달리 앞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뉴스들은 이들 법과 규정의 「철저한 통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또 중국공산당이 97년 홍콩특별행정구에 당기관지로 향항특구보도 창간키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중앙당은 이에따라 북경시 당위원회 기관지 북경일보 등 여러 관영매체의 간부들을 이미 창간 준비위원들로 선임했다고 전했다.
  • 벼랑끝 북핵/달래기 “무위” 결국 「채찍」인가

    ◎미의 대북제재 준비착수 안팎/안보리 거쳐 곧 「경제제재」 돌입 예상 클린턴 미행정부가 사실상 대북제재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간 것은 「당근」은 더 이상 약효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달 31일하오(한국시간 1일 상오)크리스토퍼국무,페리국방장관등 관련장관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북핵문제에 대한 관계부처별 견해를 청취,협상을 통해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외교적 방법을 통한 해결에 비교적 낙관적이었던 국무부측도 유엔을 통한 경제제재에 착수할수 밖에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백악관이 제재방침을 공식 발표한것은 아니나 워싱턴 포스트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등 미언론은 이날 백악관회의가 사실상 제재준비에 들어가기로 방향을 결정,북핵문제가 끝내 벼랑에 도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 클린턴 미대통령은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차 자신이 유럽으로 떠나는 1일밤(한국시간 2일상오)까지 미국이 취할 다음 단계의 대응책을 검토·제시하라고 명함으로써 제재라는 방향이 굳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끝내 제재라는 강수를 택하기로 한데는 몇가지 결정적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북한이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추출하는데 과거 미국의 정보전문가들이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속도가 빠른 신장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고지점령을 위해 연료봉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핵무기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둘째,현재 녕변기지에 머물고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요원 2명이 1일 빈의 본부에 보고해온 바에 따르면 IAEA가 추후계측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거나 분리 보관토록 요구한 3백개의 연료봉을 일부 제거하는 것은 물론 이를 다른 연료봉과 뒤섞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북한이 IAEA와 협상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행동으로 표시한 것으로 볼수 있다. 이밖에도 북한은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는등 외교적방법을 통한 해결에 별로 뜻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IAEA가 1일 저녁 북한에 최종적으로 연료봉추출을 중단하거나 추후계측을 할수 있는 방법으로 분리 보관할 것을 촉구하는 텔렉스를 평양에 보냈기때문에 제재를 위한 유엔안보리의 공개적인 움직임은 2일쯤 공식화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제재가 어떤 수순을 밟아 이뤄질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워싱턴의 관계소식통은 우선 경제제재를 위한 결의안이 상임이사국을 중심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고있다.이에 앞서 1일중 한스 블릭스IAEA사무총장의 핵연료봉사찰에 관한 비공식 보고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미측의 『대화의 토대가 붕괴된 이상 3단계 고위회담개최방침을 취소한다』는 입장천명도 예상된다.따라서 북한측의 새로운 대화여건 조성이 없을 경우 오는 6일의 IAEA이사회를 계기로 안보리의 경제제재등 모든 사안들이 분명해질 전망이다. ◎북제재 채비 서두르는 일본/한·미와 연대,대북송금 차단 등 모색 일본의 북핵문제 대응책은 한·미 양국과의 공동보조를 바탕으로 외교적 해결과 경제제재를 동시에 대비하는 양면전략이라 할수 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며 미국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북한과의 협상을 지켜봐 왔다.일본은 북핵문제를 중대한 안보위협요인으로 인식하면서도 미국의 대응을 주시하는 소극적 자세를 견지해왔다. 그러나 북한이 연료봉 교환을 강행하고 유엔안보리가 이의 중지를 요구하는 의장성명을 발표하는등 위기감이 고조되자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경제제재등을 포함한 대책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측은 1일 도쿄에서 열린 일·중외교협의에서 북한이 연료봉교환을 중지하지 않으면 사태가 경제제재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을 나타내며 중국측의 보다 적극적인 대북한 설득을 요청했다.일본은 외교루트를 통해서도 중국의 협력을 요청하고 유엔대표부등을 통해 한국·미국등과 긴밀한 협의를 하고 있다. 일본은 아울러 핵문제해결을 전제로 북한에 대한 다국간 경제지원방안이란 당근도 준비하고 있다.하타 쓰토무(우전자)총리는 『북한이 핵사찰을 완전히받으면 일본은 한국·미국·중국등과 함께 북한의 국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야당인 자민당의 다니 요이치의원등도 14일부터 북한을 방문,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할 예정이다. 그러나 일본은 기본적으로 경제제재의 가능성이 높아지는등 북핵문제가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이에따라 일본정부는 31일 북한핵문제를 안보회의에 상정,대응책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유엔이 경제제재를 결의할 경우 헌법의 범위내에서 적극 참여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하타총리는 『유엔결의가 없더라도 한·미양국과 연대,대처하겠다』고 밝힌바 있다.경제제재가 취해질 경우 일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일본으로부터의 대북송금(연6억∼10억달러) 차단문제가 중국의 협력과 함께 경제제재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경제제재와 한반도의 긴급사태등을 대비한 「유사시립법」등 극비대책 마련과 함께 유엔이 경제제재를 결의할 경우 늦어도 2∼3일내에 「대책본부」를 설치,대응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제재가 결의될 경우 일본이 할수 있는 조치는 ▲대북송금 금지 ▲북한자산동결 ▲금수조치 ▲중개무역규제 ▲자본거래규제 ▲선박·항공기의 입출항 금지 ▲출입국제한 등이다. 한편 현행 법률로는 해안봉쇄에 참여하는 미군이나 다국적군의 함대및 항공기에 대한 연료보급,물자공급,장비수리등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일본은 이때문에 해안봉쇄작전의 지원을 위해 물품관리법등 관계법의 개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아울러 「림팩94」(환태평양합동훈련)에 한·미·일 3국이 처음으로 같은 그룹으로 편성되어 훈련하는 것도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의미있는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베트남사절단 극비 방북/이타르통신 보도/무기구매·군사협력 논의

    【모스크바 교도 연합】 베트남정부및 군사사절단이 경무기 수입과 기타 군사협력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달초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다고 이타르 타스통신이 30일 보도했다. 이타르 타스통신은 평양발 기사에서 베트남대표단이 또 베트남국방장관 도안 큐 중장이 오는 16일 북한을 방문하도록 주선한다는데 북한측과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타르 타스통신은 평양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베트남국방장관의 비밀방문일자가 당초 5월27일로 정해졌었으나 연기됐다고 말했다. 한편 베트남의 보 반 키에트총리는 베트남과 러시아간의 군사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달 중순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 중국 대학들/“한국유학생 안왔으면”/시험거부·농성에 패싸움까지

    ◎나쁜영향 우려 입학제한 검토 중국대학들에서 학업중인 한국유학생들이 교내에서 갖가지 항의·농성·패싸움등을 벌이자 한국학생들의 입학제한을 검토하는등 중국당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북경의 한 교육계 소식통에 따르면 북경시교육공작위원회는 근래에 한국 학생들을 각 대학 정원의 3%이내에서 받아들이는 방안을 검토했으며 지난 4월 상해에서는 중국의학공부를 위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는 한국유학생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국 중의약대학 관계자회의가 극비리에 개최되기도 했다. 중국당국을 당혹케한 최근의 사례로는 북경의 B대학에서 총1백30여명의 한국유학생중 약40명이 6시간이나 시험을 거부하며 연좌농성을 벌인사건을 들 수 있다.학생들은 당초 약속과는 달리 담당교수가 시험문제를 출제하지 않은채 배우지 않은 문제가 나오는 문제은행식 통일고시를 보게함으로써 많은 학생들에게 졸업기회를 박탈하려한다며 집단으로 수험을 거부하다 밤늦게야 응시했는데,한국학생들은 이 학교에서 지난해 겨울에도 전기장판등 가전제품을 소홀히 다뤄 두차례나 화재사건을 일으켰었다. 그런가하면 남경의 모대학에서는 학교의 잘못된 점을 시정토록 사법당국에 고발하는등 중국학생사회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벌여 학교당국을 난처하게 했으며 천진에서는 한국학생들끼리 패싸움을 벌여 4명의 학생이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었다고 교육계 소식통들이 전했다. 북경대학에서는 지난 4월부터 기숙사내에서 컬렉트 콜(수신자부담 통화)을 할 수 없게 하는 대신 일부 사무실에서만 10원씩 받고 사용토록 하자 다른나라 유학생들은 조용히 순응하는데도 한국유학생들은 『학교당국이 외국 학생들의 편의는 생각지도 않고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며 집단항의할 움직임을 보이자 바짝 긴장하기도 했었다고 북경대에 다니는 한국학생들이 전했다. 이에따라 학교당국은 중국학생들보다 10배이상 비싼 연간 1천5백∼3천달러의 수업료를 받는 한국유학생들을 놓치기도 아깝지만 당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그래서 북경대학은 말썽이 별로 없는 석·박사과정 학생을 많이 받되 학부생이나 어학 연수생들은 최소한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며 북경중의약대학에서는 한국학생을 50명이내에서 받아들이기로 하는등 일부대학에서 한국학생 입학에 신중히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한비 입찰/삼성은 왜 포기 했을까/궁금증 증폭… 내막을 알아보면

    ◎“「동신」 들러리 의혹 불식위해 불참/삼성/“승용차진출 위한 사석… 고도전술”/동부/동신,“어부지리로 한비 인수… 캐스팅보트 쥐려 했다” 삼성은 한비 응찰을 왜 포기했나.동신주택은 과연 들러리인가.한비의 민영화는 다음 번 재입찰에서 가시화될 것인가.한비를 인수하려는 삼성의 의지는 어느 정도인가. 한비 주식의 매각을 위한 경쟁입찰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삼성은 25일 『이번 입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삼성측이 밝힌 이유는 동신을 들러리로 내세웠다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또 개연성이 진실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오해를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인 동부를 비롯,재계에서는 삼성의 포기가 고도의 전략이라고 분석한다.즉 승용차 사업 진출을 위해 한비를 사석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에 대한 판단은 힘들지만 적어도 두가지 사실은 분명하다.동신주택이 들러리가 아니라는 것과 삼성의 목표는 한비가 아니라는 점이다.삼성이 들러리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경로에서 확인된다.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한비를 포기할 수도 있다』며 『지난 21일 출국한 이건희 회장이 한비와 관련해 특별한 지시를 내린 바 없다』고 말했다. ○…삼성은 당초부터 한비에 강력한 집착이 없었다.이번 전략도 유찰을 끌어내는 것이었다.24일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하오 4시45분까지 자신들 외에 신청자가 없자 비서실 임원들은 모두 유찰을 확신하고 5시 쯤 퇴근했다.그러나 5시15분 동신주택이 전격적으로 등록함으로써 삼성의 단독 응찰로 인한 유찰이 불가능해졌음이 확인됐다.이어 「들러리」라는 소문이 퍼지자 비상이 걸렸다. 비서실은 동신주택 관계자와 접촉,30만평에 이르는 한비의 부지 가운데 7만평에 7천여 가구의 아파트를 짓고,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겠다는 동신의 계획을 확인했다.동신은 과거 영남화학 매각에도 관여했었다.삼성의 설득과 호소에도 동신의 의지가 워낙 강해,포기하도록 하는 데는 실패했다. 때문에 삼성은 유찰시키려면 자신들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오 8시40분 쯤 현명관 비서실장이 응찰포기 방침을 정하고,다음 날 기자회견을 통해 공표키로 했다. 그러나 25일 아침 신문부터 삼성의 포기가 기정 사실로 보도됐고,그 이유가 「들러리 파문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장단 회의와 비서실 회의에선 『이렇게 된 마당엔 밀어붙이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감정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포기를 확정했다. ○…삼성은 왜 유찰을 원했을까.한 관계자는 『이번에 유찰되면 앞으로 한비의 매각방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유찰되면 정부가 매각방식을 바꿔,삼성의 참여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는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불참하기도 어려웠지만,정부가 정하는 조건을 맞추지 못해 선대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게 됨으로써 여론의 동정을 살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당사자인 동부는 『삼성의 불참 선언은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고도의 전술』이라며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입찰 방식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한 관계자는 『삼성은 일단 한비인수에 매달리는 것처럼행동하다 나중에 포기,대신 정부로부터 다른 보장을 받는 「성동격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동부그룹의 계열사 사장이 지난 주말 싱가포르에서 극비리에 만난 것으로 알려짐으로써,또 다른 추측을 낳고 있다.동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21일 이건희 회장이 싱가포르로 출국할 때 계열사 사장이 같은 비행기에 탄 것은 사실이지만,한비 문제를 논의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튿날 귀국했는데,일각에서는 일상적인 사업목적으로 출국했다면 하루 만에 귀국할 리가 없다며 『한비 문제 때문에 급파한 「밀사」』로 추정한다. ○…동신주택은 『입찰에 참여키로 한 것은 지난 해 공기업 민영화안이 발표될 때 결정했다』고 설명.이균보 사장은 『한비가 보유한 택지에 집도 짓고 사업다각화도 할 겸 입찰에 참여하려 했다』며 『솔직히 어부지리로 한비를 인수,캐스팅 보드를 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 6·25남침 러시아의 증언(사설)

    러시아 최대 국영TV방송인 오스탄키노방송이 최근 한국전쟁의 내막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극비자료와 기록필름을 공개하고 북한의 남침 내막을 소상히 보도했다고 한다.이 자료들은 러시아에선 처음 공개된 것으로 극비리에 추진된 남침전쟁 준비과정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자간의 구체적 협의 내용과 소련군의 역할및 중국군의 참전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날 방송 진행자로 나온 옐친대통령의 전군사보좌관이며 한국전쟁연구 권위자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장군은 스탈린 개인문서고등에 보관된 극비전쟁자료를 직접 들고나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무력통일을 희망하는 김일성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필요한 모든 군사장비를 제공키로 약속하는 한편 모택동과도 긴밀히 협의한 뒤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6·25는 그들 3인이 합작해서 일으킨 범죄적 도발행위였음이 명확해진 것이다.「6·25는 북의 남침」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와 소련 인사들의 증언등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증명됐었다.그럼에도 북한은 시종일관 「남한의 북침전쟁」이라며 허위선전에 열을 올려왔다.뿐만아니라 구공산권 국가들은 물론 상당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조차 북한의 날조된 「북침설」에 동조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그들의 교과서나 백과사전에 아직도「북침설」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국내 일부 학자와 대학생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이다.「진보」라는 미명아래 북한의 날조된 「북침설」에 동조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분단전후의 냉전과 열전의 책임이 북에는 없고 남에만 있으며 그 책임이 중·소에는 없고 미국에만 있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매달리고 있기도 하다.북한의 종주국이었으며 전쟁을 허락하고 지원한 러시아 역사기록의 진실을 보고도 북침운운의 그런 논리에 매달릴 것인지 묻고싶다. 북한도 이제는 더이상 날조된 「북침설」을 주장하는 억지는 쓰지말아야 할 것이다.그런 생떼는 이제 더 이상통하지 않게되었다.북침설로 민족과 세계를 우롱해온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비밀자료들은 옐친대통령이 새달 러시아를 방문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그동안 가려져 있던 역사적 진실들이 한층 더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스스로 가해자측인 러시아 대통령이면서 세계사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비밀자료들을 넘겨주려는 옐친대통령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 6·25남침 모택동이 최종승인/러 비밀문서 공개

    ◎“미군개입땐 중공군 즉각투입” 약속/김일성,개전 한달전 모만나 작접계획 보고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북한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기 불과 1개월전인 1950년5월13일부터 나흘간 북경을 극비리에 방문,모택동에게 3단계로 된 작전계획을 상세히 보고해 최종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 러시아외무부 비밀외교문서를 통해 처음 밝혀졌다.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특히 모택동은 김일성과의 비밀회담에서 『미군개입시 중공군을 한국전에 즉각 투입시키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드러나 그동안 정설로 여겨져온 『스탈린이 모택동을 설득,중공군의 한국전개입을 유도했다』는 설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모택동의 요구로 극비리에 진행된 이 회담에서 모는 김일성에게 『소련은 미군과 38도선 분계선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직접개입은 어리석은 짓이다.그러나 중국은 그런 협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지원할수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모택동은 『중국이 대만을 완전히 점령한 뒤에 전쟁을 시작하면 보다 충분한 지원을 할수 있을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당장 전쟁을 시작하더라도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전쟁개시를 적극 부추긴 것으로 드러났다.이와함께 모택동은 무기·탄약 지원과 중국·북한 국경지역으로 중공군을 추가파견할 것을 김일성에게 제의한 것으로 이 문서는 밝히고 있다. 러시아외무부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이 비밀문서는 당시 모스크바의 소련외무성과 평양의 소련대사관 사이에 숨가쁘게 오간 전문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전후 40여년만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이 전문들은 49년1월부터 전쟁초기인 50년10월 사이 스탈린,김일성,모택동 3인간의 직접대화 및 협의내용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그동안 논란이 돼온 한국전쟁발발 책임소재의 규명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평양 우라늄공장 출신 탈출자 김대호씨 증언

    북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 연합기업소 폐수처리반장으로 일하다 생활고와 차별대우를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중국을 거쳐 귀순한 김대호씨(35)는 12일 서울신문에 구술한 탈출기에서 북한이 체제수호를 위해 우라늄 증산을 독려하는 등 핵무기 개발에 혈안이 돼 있다고 증언했다. ◎“북 핵개발비 김일성 특별회계서 지출”/“통일은 핵으로 시작… 핵으로 마무리” 교시/“영변사업 성과에 만족” 김부자 TV 선물/“공해상 섬 날아갔다”… 핵무기 실험소문 여러차레 나돌아 지난 2월 2일 새벽 2시쯤.중국 땅의 따사로운 불빛이 두만강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이제 저 강만 건너면 지긋지긋한 북한을 탈출하게 된다.가슴이 뛰었다.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순찰도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강변의 갈대숲을 헤치고 나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약간 전진했다가 5분동안 주위를 살피고 또 앞으로 나아갔다.회색 코트를 입어 눈에 잘 띄지않을 것이라는 점이 조금 위안이 됐다. 강을 건너며 31년전 길림성에서 살다 어머니의등에 업혀 북한으로 오던 생각이 문득 났다.일제때 만주땅으로 건너간 부모님은 탁아소에서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있던 나를 내내 못마땅해 했다.부모님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런 나를 조국에서 떳떳이 키워보리라는 뜻에서였다.그러나 북한에서 살아온 지난 30년은 결코 떳떳하지 못했다.저주스러울 뿐이었다. ○생일날 “남행” 첫발 한편으로 저 강을 건너더라도 앞으로의 내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연길에 사는 친척의 전화번호는 갖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한다면….북한 관원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1시간만에 일단 중국 땅에 발을 딛는데 성공했다.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주위는 아직도 어두웠다.정신을 차리고 수첩을 꺼내 들었다.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때 심정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내 진정 사랑했어요 충성을 다했어요 하지만 그대는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 북녘의 하늘아래 이내 짝사랑 원한으로 묻혔어요… 내 이젠 깨달았어요 늦게야 알았어요 나는야 이제라도 찾겠어요 진정한 사랑을」 85년 8월 제대한 나는 북한 원자력 공업부 산하 남천화학연합기업소의 건설을 맡았던 1248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이유로 우라늄 정광 생산공장인 평북 운전군 4월기업소에서 우라늄 폐수처리작업 노동자로 일하게 됐다.북한은 김정일의 지시로 1248부대의 제대자들을 4월기업소와 영변지구에 배치했던 것이다.이때부터 내 뜻과는 관계없이 핵원료 제조공장에 몸담게 되었다. 87년 9월에는 건설중이던 남천화학으로 옮겨 조업준비업무를 맡았다가 그후 남천화학의 폐수처리작업반장을 담당하게 됐다. 북한의 핵문제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북한이 진정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나의 직책이 우라늄 정련공장의 폐수처리작업반장으로 핵무기 개발과정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북한이 옆 공장의 공정조차도 다른 부서 사람들이 알 수 없게 할 만큼 핵개발과정을 극비에 붙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나는 4월기업소와 남천화학에서 9년동안 일하면서 북한이 우라늄증산을 독려하는등 핵무기 개발에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됐다. 북한은 평남 순천과 황북 평산 1월기업광산,황북 금천 월암광산등 3곳의 우라늄광산에서 우라늄을 캐내고 있고 다른 지역에도 탐사대를 두고 대대적인 탐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평산과 금천광산에서 생산된 우라늄 원광은 남천화학으로 보내져 정련하게되고 순천광산의 광석은 4월기업소로 보내진다.4월기업소는 또 남천화학에서 정련하다 남은 찌꺼기를 다시 모아 재정련하는 일도 한다. ○안도의 심정 수첩에 두곳에서 정련된 우라늄은 다시 핵개발 시설이 집중돼 있는 평북 영변의 8월기업소와 12월기업소에 보내져 재정련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8월기업소는 핵발전 동력원으로 쓰이는 순수한 우라늄 연료봉을 생산하고 12월기업소는 연료봉을 연소시켜 핵발전물질을 추출하는 일을 한다. 남천화학은 1천5백여명의 노동자가 있는 우라늄정광 생상공장과 501연구소,월암광산,1월광산,보조기업소인 67건설사업소,6월20일 농장등으로 구성돼 있고 총 노동자는 8천명이 넘는다. 남천화학은 파쇄,침출,추출,바나듐추출,폐수처리등 공정별로 나눈 11개 공장으로 편성돼 있고 우라늄뿐만 아니라 바나듐,라외듐,니켈,몰리브덴등도 생산한다.501연구소는 준박사(박사 아래를 지칭)인 소장아래 핵물리학을 전공한 1∼2급연구사 2백여명이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67건설사업소는 직원들의 주택이나 공공건물을 짓는 일을 담당하고 6월20일 농장은 기업소의 부업농장이다. ○우라듐 증산 독려 남천화학의 설계상 우라늄 생산능력은 40만t이었으나 91년 6월 조업을 시작할 당시의 생산능력은 20만t이었다.그러나 설비는 갖춰 놓았어도 현재는 많이 생산할 때가 한달에 8∼10t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채광하는 데도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캐낸 원광을 원반할 차량의 기름이 없고 갈아 끼울 타이어가 없어 생산량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여기에다 생산설비들이 우라늄추출 첨가제인 유산으로 인해 산화돼 정상가동을 못하는데다 노동자들의 직업병으로 생산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4월기업소 또한 많이 생산할 때가 한달에 1t정도로 두공장을 합쳐 1년 생산량이 1백여t 정도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상이 내가 알고 있는 북한의 핵원료 생산과정이다.앞서 밝혔듯이 핵무기 보유여부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극히 위험한 단계에 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4월기업소에 근무할 때 언젠가 극비문건으로 취급되는 김일성부자의 지시문을 본 일이 있다.거기에는 「원자력 공업을 자체의 기술과 설비 자재로 주체화해야 한다.원자력에서 조국통일을 시작해 원자력에서 조국통일을 총화(마무리)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원자력개발을 위한 자금은 「주석자금」으로 불리는,말하자면 김일성의 특별회계에서 지출된다. 3공병국이라는 원자력 건설담당부대는 김정일이 친위대라고 부른다.그만큼 김부자는 원자력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이 부대는 88년 10월 평북 대관군에 핵저장고를 건설했고 90년 10월에는 함북 화성군에 핵시험소를 건설하는등 핵시설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핵물리학자 수백 88년에는 김부자가 영변지구를 시찰한뒤 핵개발에 성과가 있었다고 매우 만족했다고 하며 핵기술자와 과학자들에게 「색테레비」를 선물로 주었다는 얘기도 들었다.그뒤에 핵무기 생산원료로 쓰이는 플루토늄도 생산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것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다. 핵무기와 관련해서 이런 소문도 있다.「일본 도쿄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공해상의 섬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없어졌다」는 것이다.이것말고도 북한이 어디어디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북한의 핵개발 상황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이고 다시 내가 북한을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91년 어느날 남천화학의 초급당 비서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너한테는 현재 그자리도 과분하다』는 말이었다.나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나는 중국에서 태어난데다가 장인이 6·25때 치안대에 가담해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관계로 나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껴왔던 것이다. 나의 장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남포 수산기지의 책임자로 자원하기로 했다.거기가서 당에 충성하면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이 수산기지는 남천화학이 자체 외화벌이를 위해 전복이나 해삼,대합조개등을 따 수출하는 사업체였다. 이곳으로 간 것이 결국은 나의 운명을 바꾸었다.한 무역회사의 간부에게서 미화 5천달러의 이자를 주기로 하고 일화 3백10만엔을 기지 운영자금으로 빌렸다가 종업원의 동생인 골동품 장수와 태권도 국장의 아들에게 그만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이 일로 해서 나는 체포령을 받아 쫓기던 끝에 두차례 감옥생활도 하고 강제노동도 했다.그후 교화소에 보내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병원에서 나는 「여기서 일생을 망칠바에야 탈출하자」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뇌물주고 증명떼 인민위원회 2부의 관리에게 뇌물로 양복지를 주고 여행증명서를 얻어 친척집이 있는 두만강 하류 새별시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은 1월 7일 새벽1시.그곳 친척집에 머물다 첫머리에 쓴대로 두만강을 넘어가 중국 연길시의 친척집에서 두달동안 지냈다.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북한 밀정들이 탈북자를 손에 쇠줄을 꿰어 끌고 갔다」는둥 하는 별의별 흉흉한 소문을 다 들었다. 하루는 북한이 한 군관이 남방으로 가 남한에 귀순,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소식을 듣고 나는 결심했다.나도 남한으로 가자.친척을 통해 귀순 경로에 대한 도움을 받고 중국돈 3천원을 품속에 넣은채 남행을 출발한 것은 4월 9일 새벽 5시.그날은 마침 나의 생일이었다. 남방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길림성 역전에 앉아 생일을 자축하는 소주잔을 들이키며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그리고 서른다섯번째 생일인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 미,일에 핵반입 허용/69년 극비문서 교환

    【도쿄 연합】 일본은 미국과 오키나와 반환협상을 벌이면서 극비합의문서를 통해 유사시에 미국이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통과하도록 허용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일본의 교도통신이 10일 보도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지난 72년 오키나와가 정식으로 일본으로 반환되기 2년반전인 69년11월 당시 리처드 닉슨 미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좌등영작) 일총리는 이같은 내용의 극비 합의의사록을 교환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사토총리의 특사로서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협상을 벌였던 와카이즈미 게이(약천경) 전교토산업대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극비문서를 공개함으로써 밝혀졌다.
  • 사회당 연정탈퇴 이후(정치개혁 일본/하타정권의 진로:중)

    ◎「소수내각」 불가피… 불안한 “첫발”/6월 예산 통과뒤 총선 가능성/「제2의 정계개편」 가속화 예고 「일본의 에이스 카드 하타총리」.새로운 일본을 만들고 있는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신생당대표간사가 말하는 「하타총리론」이다.그는 에이스 카드를 내는한 하타정권을 안정된 장기정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오자와의 이러한 구상에 따라 25일 하타 쓰토무(우전자)총리가 탄생한 직후 연립여당의 최대 원내교섭단체 「개신」이 전격적으로 만들어졌다.하타정권의 안정과 정계개편 제2막의 주도권을 잡기위한 구상이었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완전 배제된 사회당이 배신행위라며 예상보다 강력하게 반발,연립정부로부터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하타총리는 출범초부터 대혼란과 위기를 맞고 있다. 개신은 신생·민사·자유·일본신당과 「개혁의 회」등 5개 당·파로 구성됐다.전체 중의원수는 무소속 1명을 포함해 1백30명.공명당(52명),신당미래(5명)도 참가할 것으로 보여 개신은 1백87명 이상의 거대 세력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신은 25일 오우치 게이고(대내계오)민사당위원장의 제의로 결성됐다.그러나 그 뒤에는 일본정계의 최대 실력자이며 전략가인 오자와가 있다.오자와와 오우치위원장은 지난주말 극비회담을 갖고 개신결성을 추진했다.그러나 사회당에는 일체 알리지 않았다. 오자와는 연정내 최대 세력을 만들어 사회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자와의 전략은 일단 「큰 오산」이었다.사회당의 연정 이탈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오자와는 용의주도하지만 이번에는 사회당의 대응을 지나치게 안이하게 예상하고 너무 서둘렀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당의 탈퇴로 연립정부는 그 구성원이 바뀌고 소수내각으로 출범할 가능성이 높아 정권기반이 매우 불안정할 것으로 보인다.「하타정권」은 중의원이 2백여명 정도로 자민당의 2백6명보다도 적을 뿐 아니라 사회당(74)이 자민당과 손을 잡을 경우 아무것도 할수없게 된다.사회당은 예산편성까지는 책임있게 대응하겠다고 밝혀 예산안은 통과시켜 줄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대 과제인 소비세 인상등 세제개혁·북한핵문제대응등과 관련,하타정권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6월 예산안이 통과된후 국회를 해산,총선을 실시할 가능성도 있다.사회당과 자민당내에서도 국회를 해산하여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타정권」은 이같이 출범부터 대파란을 겪고 있다.이러한 파란은 일본이 냉전후 국제환경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국가관을 둘러싼 갈등의 한단면이며 제2차 정계개편 움직임을 가속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 탈북벌목공/「합법적 서울행」 통로 만든다

    ◎한·러 실무회담 뭘 논의하나/귀순희망자 증가 대비,장기적 안목 접근/러 보안부서 미온적… 부작용예방에 비중 21일의 한·러 양국 실무회담을 시작으로 탈출 북한 벌목공문제는 이제 두나라간의 피할 수 없는 현안으로 굳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뜬소문처럼 떠돌던 문제를 놓고 양국이 실무회담까지 갖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로서는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실무회담 시작과 함께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부각될 것이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모스크바 적극적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탈출노동자들의 한국행을 돕겠다는 러시아정부의 입장은 확고한 듯하다.실무회담 개최에 앞서 지난 18일 주러 한국대사관을 통해 가진 예비접촉에서도 러정부의 이같은 원칙은 확인됐다. 그러나 귀순희망자들의 신원확인,본인의사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범법자여부를 가리는 방법등 구체적인 절차문제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주권국가인 러시아의 영토에서 이들을 데리고 나오자는 게 우리 희망대로 간단하게 진행될 수는 없는 일이다. ○절차제도화역점 실무회담에 임하는 우리측의 기본목표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들을 합법적으로 데려올 수 있는 「제도화된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과거 한두명의 망명자를 극비리에 한국으로 데려오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현재 러시아땅에 머물고 있는 탈출자의 수가 90명선을 넘어섰고 앞으로 얼마가 더 늘지 모르는 상황이다.장기적인 안목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회담전망과 관련해 주시해야 할 것은 역시 내무부,군,대외정보부,방첩부 등 소위 보안부서들의 입장이다.예를 들어 벌목공처리와 관련된 대북한관계는 방첩부,대외정보부가 맡고 있다.이들과 관련된 치안문제는 내무부 소관이다.이들을 국경밖으로 데려나가는 일은 국경수비대의 협조사항이다.이들의 협조없이 벌목공들을 한국행 비행기에 태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측은 이번 실무회담 시작전 이들 보안관련 기관들과도 1차접촉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결과는 이들이 「생각이상으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우리측 실무회담 대표인 최동진 외무부 제1차관보는 공식회담 외에 내무부를 비롯한 보안부서의 관련인사들과도 비공식 접촉을 갖고 협조를 부탁할 예정이다. ○시간 다소 걸릴듯 이와 관련해 우리측의 한 관계자는 『오래전에 탈출,귀순의사를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벌목공 김호씨의 신병처리가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김씨의 경우는 이미 러시아 거주권을 갖고 있어 러시아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행허가를 내주어 한국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김씨의 합법적인 한국행이 이루어지면 이는 다른 벌목공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한두명을 빨리 데려오려고 무리하다가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부를 수가 있다.시간이 걸리더라도 실무회담을 통해 구체적인 절차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게 이곳 실무자들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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