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극동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연기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장주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시급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화제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643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 위스키 천국(외언내언)

    옛날부터 술은 약으로 통했다.중국 예기에 『술은 노인을 봉양하는 것이요,병을 낫게 한다』고 했고 한서에도 『술은 모든 약중에서 으뜸이요,즐거운 모임에 꼭 있어야 할 음식』이라고 예찬했다.물론 적절히 마셨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서양의 대표적인 술 위스키는 12세기 이전 영국에 전해졌으며 16세기에 상품화한다.오늘날의 스카치 위스키는 17세기 스코틀랜드 산악지대에서 생산되었고 지금은 전세계에 4천종 이상의 상표가 나돌고 있다. 그 많은 양주 중에서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건 시바스 리갈이나 로얄 살루트등 값비싼 명주들.35만원 하는 「발렌타인30」은 한국과 일본인을 위해서 제조된다고 한다.92년에 등장한 고가품 「조니워커 블루」는 극동지역 판매용으로 특별생산된 품목으로 최고급 양주를 선호하는 한국인·일인의 취향을 꿰뚫는 판매전략이라고 하겠다. 그동안 외국에서 위스키 원액을 수입,제조해오던 국산 양주들이 수입양주들의 저가공세로 하나씩 백기를 들고 시장을 넘겨주고 있는 상태다.지난해 출고가를 40%나 내린뒤 올들어 또 9%를 인하한 수입양주도 있다.그런 가운데 국산양주 임페리얼이 5천억원 시장에서 수입양주들과 한판 승부를 겨루고 있는 중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판매된 프리미엄급 고급위스키는 2백만병(7백㎖).그러나 올해는 6백만∼7백만병으로 예상하고 있다.이러한 소비폭발은 술꾼들의 「입맛 고급화」와 가격인하 때문으로 풀이된다. 독주에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탄주」(맥주에 위스키를 탄 것)를 즐겨 마시는 것도 원인이 되었을 법하다. 최근 영국 위스키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한국은 세계 6위의 위스키소비국」으로 부상했다는 것.또 2003년에는 소비가 44% 늘어나 5위권에 들것이라고 전망했다.귀한 외화 들여 비싼 양주만 사다 마실 것인지,술꾼들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같다.
  • 1·4후퇴뒤 혼란정국(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4)

    ◎거창학살­국민방위군 사건 잇달아 발생/이 대통령,국회와 마찰… 대통령 직선 추진 한국전쟁은 1951년 새해가 밝으면서 개전 2년째를 맞았다.미 공군은 설날에도 전폭기 편대들을 전선과 북한지역 깊숙이 발진시켰다.그리고 8백12회의 출격을 설날에 기록했다.전선은 남쪽으로 크게 밀려나 38도선 부근에 와 있었다.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전선이 압록강 한·만국경에 고착될 것으로 기대한 한국민의 희망을 깡그리 앗아갔던 것이다. 정부는 1월3일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결정하고 다음날 서울을 비웠다.전해 9·28수복으로 환도했던 정부의 공식 서울 철수를 역사는 1·4후퇴로 기록하고 있다.서울시민 30만명이 피란길에 오른 가운데 5일에는 중공군 선발대가 한강을 건너 영등포까지 진출했다.주문진,홍천,양평,수원을 잇는 제2방어선도 곧 무너졌다.유엔군은 7일 오산을 포기해 버렸다. ○양민희생자 6백명 그 2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남 거창에서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공비토벌에 나섰던 육군 제11사단 9연대 제3대대가 2월11·12일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저지른 이 사건의 희생자는 6백명이나 되었다.이유는 공비와 내통했다는 것이었는 데 일일전과 보고는 주민 희생자수를 1백87명으로 기록했다.국회가 이를 문제시하고 4월7일 현지조사에 나섰다가 공비로 가장한 군의 공격을 받고 철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주동자들은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받았다.그러나 모두 1년안에 풀려났다.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5월7일 해임되었다.그의 해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거창 사건말고 새로 불거져나온 국민방위군 사건이 더 크게 작용했다.이 사건은 51년1월 국민방위군 집단후송과 수용과정에서 고개를 들었다.국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17∼40살의 장정들을 방위군에 편입시켜 경북지역 각 교육대에 수용했다.이를 계기로 방위군 고위 간부들이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렸다.그 부정규모는 당시 화폐 24억원,양곡 5만2천섬에 달했다. 국회는 4월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했다.이에따라 5월12일 방위군이 공식 해산되었으나 장정들의 귀향조치는 3월중순부터 이루어졌다.사건이 확대되고 희생자가 날로 늘어나자 정부는 진상조사에 나서 김윤근 사령관을 구속했다.다른 간부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이 선고된 5명의 방위군 간부들에 대해서는 8월13일 대구 근교에서 총살이 집행되었다.숱한 청장년을 헐벗게 하고 굶긴 건국이래 최대의 비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방위군 간부 5명 총살 1951년의 이 두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임기 내내 따라붙은 불명예였을 뿐 아니라 정적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특히 거창사건 주동자 가운데 김종원의 경우 뒷날 경찰총수인 치안국장으로 기용했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도덕성을 문제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이 사건들은 이기붕을 권력의 주변으로 끌어들인 결과를 가져왔다.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신성모 후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이를 단초로 이승만 대통령을 핵으로 한 권력의 인맥이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는 장래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기용에 앞서 거창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병옥 내무장관,김준연 법무장관의 권고사직을 4월24일과 25일에 전격 수리했다.대통령은 조병옥을 오랫동안 못마땅하게 여겼다.당시 대통령의 업무일지에는 1951년1월 서울에서 내려온 이후 조병옥은 내무부가 있는 대구보다는 부산에 더 많이 머물러 있다고 기록했다.그 이유는 정치적 책략을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그리고 대통령을 찾아오는 일이 없고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게 고작이라는 불만도 곁들였다. 조병옥은 사퇴서를 보내놓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그래서 4월24일자 대통령 업무일지는 「조병옥은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굳혔고 대통령에 반대해서 싸울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주한 미국대사 무치오는 조병옥의 사표수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했다.이를놓고 이승만 대통령 쪽에서는 미국이 다음 대통령 선거를 좌지우지 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하고 무치오가 새로운 내무장관을 장면과 같은 온건한 인물로 꼽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장면에게는 이미 국무총리직이 수임되어 있었다.장면은 사실상 주미대사로 워싱턴에 더 머물기를 희망했다.그럼에도 이승만은 새해들어 그의 소환을 결심하고 1월5일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시영 부통령이 5월9일 「시위」에 앉아 소찬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기 때문에 물러난다」는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했다.이와 더불어 부통령직 사임서를 피란국회에 보냈다.사임서가 국회에서 반려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본인의 고사로 3일후 국회 본회의가 이를 수리했다.국회는 두 차례의 보궐선거끝에 5월16일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뽑았다.그 역시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1952년 정치파동의 와중에 전격 사임해 버렸다. ○개헌 결심…자유당 창당 한반도를 아비규환의 전쟁으로 몰아붙인 그 6월이 또 다가왔다.4월11일 전격해임된 맥아더장군에 이어 리지웨이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은 6월19일 철원,김화,평강으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중공군은 금성지구 한국군 2군단 전면에서 춘계공세 이래 최대의 공격을 개시했다.공산군은 4월22일 제1차 춘계공세 이후 6월17일까지 21만5천9백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그럼에도 유엔군사령부는 아직 대공세 능력을 상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승만은 계속 국회와 부딪쳤다.일반적 여론은 국회가 대통령을 간선으로 선출할 경우 그가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헌법개정을 결심했다.8월15일 그의 신당구상은 11월19일 자유당 창당으로 실현되었다.자유당 창당 이전인 10월17일 국무회의는 대통령 직선과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의결하고 11월20일 이를 국회에 제출했다. ◎미 「알렉시스 존슨 파일」/미,한국전중 “기독교도 구출” 논의/전쟁 확산→한반도 포기상황 전제/북한측 박해 밝혀져 인권차원 거론 미국은 한국전쟁이 확산되어 한반도를 포기할 경우 한국민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구출하는 문제를 토의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입수한 「알렉시스 존슨(Alexis Johnson)파일」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인 구출문제에 대한 논의는 1951년 11월2일에 작성한 미 국무성 회의비망록에 들어있다.회의에는 미 국무성 극동국의 러스크,동북 아시아과의 맥 크러킨이 참석했다.이는 미국 장로교인 트류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당시 미국은 다른 종교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특히 한국전쟁 이전에 북한 공산권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큰 박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유엔군 북진에서 드러나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 북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철저하게 말살되었다.가톨릭의 경우 함경남도 덕원 면속구의 피해는 컸다.1945년 민족해방 이후 1949년 5월9일 이후 수도원은 몰수 당했다.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부와 수사,수녀들이 고난속에서 순교했음이 밝혀졌다.개신교에서도 많은 순교자를 냈다는 사실이 서방에 전해짐으로써 기독교인들의 구출은 인권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민 기독교인 구출은 한국에 살고있는 미국 민간인 철수작전과 더불어 제기되었다.한국전쟁 발발 당시인 1950년 서울은 물론 대전이 예상이외에 빨리 북한군에 점령되어 미국의 민간인들이 포로로 취급받은 데 따른 대비책으로 미 민간인 철수는 심도있게 논의됐다.그러니까 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가 불투명했다는 추론이 나올 수 있다. 알렉시스 존슨은 1930년대 후반 한국에도 살았던 외교관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망명해 있던 시절 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다.한때 미 국무성 극동아시아과에서 영향력을 가진 관리로 활약했다.
  • 「동북아개발 전망과 한국 역할」/가나모리 히사오

    ◎러 자원·중 노동력·한일 기술력 상환 보완/연변의 80만 한인도 경제발전의 활력소 가나모리 히사오(금삼구웅)일본경제연구센터 이사장이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공동초청으로 1일 롯데호텔에서 「동북아 개발전망과 한국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세계경제의 부침」「안정적인 일본경제」등 20여권의 저서를 낸 가나모리 이사장은 UNDP(유엔개발계획)가 주관하는 「두만강 개발」프로젝트에 초창기부터 참여하는등 동북아 개발협력문제에 많이 기여해온 국제적 권위자이다. 동북아경제권에 대한 자금조성과 관련,한국측이 제안한 「동북아개발은행」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어 구상단계에서 실행단계로 접어든 느낌이다.미국도 석유,천연가스개발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호주도 진출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도 현재 포화상태인 동남아지역에서 「동북아경제권」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이는 최근들어 동북아지역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됨으로써 경제권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동북아경제권은 동해연안을 중심으로 한 6개국,즉 러시아의 극동지역,중국의 동북지방(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몽고,북한,한국,일본등 6개국에 의해 형성되는 경제권을 말한다.이 경제권은 지리상 가까운 이질적 국가들간에 서로 부족한 것을 교환해 발전하자는 자연발생적 성격이 강하다.이들 지역의 경제규모는 5조달러 정도로 EU(유럽연합),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NAFTA(북대서양자유무역협정)등과 대등하거나 우월한 위치에 있다. 일본에서는 특히 동해연안의 지방자치단체가 동북아경제권에 대한 관심이 높다.이는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가 태평양연안을 위주로 발전이 이뤄져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치가와,니가타등 동해연안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제적 번영을 꾀하기 위해서이다.역사적으로도 동해연안지역은 한국,중국,러시아등 주변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동북아경제권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러시아의 천연자원,중국의 노동력,한국과 일본의 기술과 자본력등 강점이 서로 달라 경제적으로 상호보완성이 강하기 때문에 협력이 구체화되면 커다란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북아경제권 구상이 발표된지 7년이 지남에 따라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중국인과 러시아인간의 비자없는 국경무역이다.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과열조짐을 보이자 양국이 제재를 가해 최근들어 주춤한 상태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이와함께 합작기업의 설립도 사회간접자본의 미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잘 진행되고 있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두만강 지역 개발계획으로 이것도 지난 90년에 발족된 이후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다.현재 중국의 방천에 항구(두만강변의 항구)를 조성하는 방법,두만강 하구에 홍콩과 유사한 국제도시를 만드는 방안 등이 나오고 있다.이것 역시 인프라의 미비,자금부족,시장경제에 대한 경험부족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두만강지역 개발에 대한 UNDP의 추계에 의하면 앞으로 20년간 3백억달러,중국측은 50년간 1천억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동북아경제권의 형성은 경제 뿐만아니라 문화와 안보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므로 각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막대한 경제력을 갖고있는 일본은 동북아경제권 형성을 위해 자금,기술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할 것이다. 한편 한국에 대한 기대도 크다.이 지역 두만강 북쪽에 위치한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는 80여만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과거 화교들이 동남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처럼,동북아 경제권형성에 조선족들이 적극 참여토록 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 예술의 전당 지반침하/서울시 안전점검서 D급 판정

    서울시는 28일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 건물이 지반침하 현상을 보임에 따라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키로 했다. 시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다중이용 시설물의 안전점검을 실시한 결과 예술의 전당 연못쪽 지반이 약간 내려 앉는 등 D급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안점점검 D급은 원인 분석을 위한 정밀 안전진단을 실시,결과에 따라 보완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밖에 ▲서초구 극동아파트 상가 ▲노원구 공릉동 태릉 성심병원도 D급판정을 받았다.극동아파트 상가는 노후 건축물로 재건축을 추진중이며 태릉성심병원은 지하철공사장의 발파 충격으로 건물 균열 및 지반침하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동작구 노량진동 한국냉장(주) 건물은 E급 판정을 받아 구청장이 건축주에 사용금지를 명하고 보수·보강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또 서울시립대 건물에 대한 대학측의 자체 안전점검 결과 이공관 대학회관 도서관 건설공학관 사회관 등 5개동의 지하실과 옥상에 미세한 균열이 발견돼 정밀안전진단을 의뢰하기로 했다.
  • 한강 인도교 폭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3)

    ◎「임진강교 폭파 실패」뒤 서둘러 준비 지시/미 참전으로 예정보다 하루 늦춰 결행 19 50년 6월25일 일요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다음날 26일 월요일에 벌써 수도 서울을 혼란에 몰아넣었다.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26일 밤 각각 긴급 국무회의와 긴급국회를 열어 27일 새벽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정할 만큼 전선은 긴박하게 돌아갔다.그리고나서 28일 상오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버렸다.한강다리를 폭파한 시간에 T33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은 아직 수도 서울의 중심부 밖에 있었다. ○개전 다음날 검토 착수 한강 다리 폭파계획은 전쟁 다음날 26일 상오부터 이미 검토되었다.전황이 매우 불리해지면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들여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졌다.이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임진강 다리 폭파를 시도했다 실패한 과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공병감은 공병학교 폭파교관 황원회 이창복 중위에게 폭파준비를 서둘러 지시했다.당초 폭파시각은 27일 하오4시로 결정되었다. 이같은 결정은 육군본부가 시흥으로의 철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날 하오2시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미군개입 가능성과 극동미군의 전방지휘소(ADCOM)가 한국에 설치될 것이라는 전문이 날아들었다.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이 소식을 미군사고문단(KAMAG)단장대리 W H 라이트로부터 전해들었다.그래서 시흥으로 나앉았던 육군본부를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켰다.이에따라 한강다리는 결국 하루늦게 폭파되었다.이시영 부통령 일행은 폭파직전 한강을 마지막으로 건넜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상오2시 특별열차편으로 한강를 건너 대전으로 내려갔다.그런데 이날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30분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이 전파를 탔다.그 내용은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원조가 있을 것이니 국민은 총궐기해 반란분자들을 퇴치하자』는 것이었는데,사실은 사전에 준비한 녹음방송이었다.한강다리의 폭파는 결국 수도 서울을 사수하던 국군장병 4만4천명을 낙오병으로 만들었다. ○국군 4만4천명 낙오 북한 공산군이 서울시내 중심부에 들어온 시각이 28일 하오3시쯤이었으니까 다리 폭파를 6∼8시간 정도 늦추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뒷날 나왔다.이런 이유로 해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그러나 폭파를 명령한 육국 참모총장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전선의 180고지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한강 다리가 끊겨나간 이후 육군 5개 혼성사단이 노량진 본동을 중심으로 모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서울에서 퇴각한 이들 부대는 명목상 사단편제였지 사실은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개전한 시각에 한국의 우방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은 미조리주 인디펜던스 자기 사저에 머물고 있었다.그는 당장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국무장관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음날 백악관에 도착했다.미국은 국제연합(UN)이 「평화에 대한 침략적 행위」로 규정지어 주기를 바라면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않는 전략을 취했다.그리고 미국무성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즉각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무렵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공)대신대만의 자유중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회원국으로 총회 안보이사회 의석을 차지하도록 결정한데 항의하여 유엔을 보이콧하고 있는 중이었다.소련이 불참한 안보이사회는 즉각적인 전투중지와 38선 이북 원위치로의 철수를 요구하는데 결의했다.이와 더불어 유엔 회원국은 이 결의의 집행을 위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고 북한에 대한 원조 자제를 요청하는 안도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미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 공산군이 서울 근교에 접근하던 6월27일(워싱턴 시간) 미공군과 해군에 한국정부를 엄호지원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날 유엔 안보이사회는 소련이 여전히 불참한 가운데 「무력침략을 격퇴시키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다음날 28일 서울은 침략자의 손에 들어갔다.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경찰행위를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전 5일째가 되고 서울이 공산권 수중에 완전히 넘어간 다음날인 6월29일에는 맥아더장군이 자신의 전용기 바타안호를타고 동경에서 수원으로 비행해왔다.바타안호가 착륙하는동안 간이 활주로 한쪽 끝을 북한의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했다.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다.한편 임시수도 대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적의 항공기로부터 요격을 피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저공비행으로 수원에 와 닿았다.이들이 서울대 농과대학 캠퍼스에서 만나는 동안에 적의 전투기는 계속 기총소사를 해댔다. ○“미 해군 해안선 봉쇄” 맥아더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는대로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트루먼은 6월30일 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이 북한의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이와함께 한반도의 전 해안선을 해군이 봉쇄하도록 명령하고 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상당한 지상군 지원부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따라 찰스 스미드 중령이 이끄는 미 지상군 선발대가 일본 사세보를 떠나 부산을 거쳐 7월5일 평택에 도착했다.그러나 이 미군부대는 한국군의 한강 방위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앞에 속수무책이었다.이런 상황속에 UN안보이사회는 7월7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회원국은 그 군대를 미국이 지명하는 사령관 휘하에 둘 것을 권고했다. 그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개전후 뼈아픈 11일간이 지나가는 동안 유엔과 미국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그리고 16개국에 이르는 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하기로 한 결의를 행동으로 옮겼다.특히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지상전에 주동적 참전국이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전선 주변에 위험한 그림자를 깔기 시작했다.그 위험은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공산군 점령지역의 허리인 인천을 상륙한데 이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한 깊숙이 들어갔을 때 현실로 다가왔다.1950년 가을이 저문 10월19일 저녁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전쟁양상을 또 한번 바꾸어 놓았다. ◎미 「국가정보평가서」/“소,「한국전 중 개입땐 대전 확산」 예측”/“유엔군 내분 조장… 전력약화 기대/필요땐 중에 소 의용군 지원 태세” 1950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했을때 소련은 한국전쟁의 세계대전 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와같은 사태발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당시 미국은 평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국가정보평가서­11」(NIE­11)에 따르면 소련의 통치자들이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지시 혹은 재가하면서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성을 인지했다고 미국은 평가하고 있었다.NIE­11은 그러나 소련이 중공군 개입과 동시에 세계대전에 돌입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NIE­11은 또 소련이 세계대전 발발여부와 상관없이 미국과 중공간의 전면전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적고 있다.▲우선 미국과 연합군대를 다른 전장으로 유인해 병력을 소멸시킬 수 있고 ▲미국과 그 동맹국간 알력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의 침공으로 유엔의 단결력을 좌절시킬 수 있다는 것이 소련의 판단으로 추정했다. 이에따라 소련은 중공에 대해 적절한 물자와 기술인력,심지어는 의용군까지 제공해 한국에서의 중공군 작전을 지원할 것으로 판단했다.특히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중국내 거점 방위가 필요하다면 비행기와 대공포를 훈련된 요원도 함께 제공할 것으로 내다보았다.또 중국영토에 대한 미군(유엔)의 대규모 작전이 있을 경우 중·소조약에 근거해 중공에 대한 소련의 공개적 군사지원이 따를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NIE­11은 이어 사태추이를 볼때 중국 공산당의 개입목적은 유엔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데 있다고 덧붙였다.NIE­11은 미 중앙정보부가 1950년 12월5일 국무성 및 육·해·공군의 정보관계자들을 참여시켜 작성한 1급 비밀문서다.
  • 연해주­동해안 신석기 문화 “일치”

    ◎한·러 학계,시베리아 보이스만 유적 공동 발굴조사/“두만강 중심 동일선상의 문화” 결론/납작밑 토기·홑 낚시바늘 오산리와 같은 형태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의 신석기문화가 우리나라 동해안 신석기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동일선상의 문화로 밝혀졌다.이는 지난 7월20∼8월25일 연해주지역 보이스만(Boisman)유적을 대상으로 한·러학계가 처음으로 실시한 공동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이 발굴조사는 고려학술문화재단 후원으로 러시아에서 극동대학,한국에서는 서울대,교원대,이화여대,충남대가 공동 참여했다. 보이스만유적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국경 두만강하구를 잇는 해안선 중간쯤에 자리했다.조갯더미(패총)를 비롯,집자리무덤으로 이루어진 이 유적에서 사람뼈(인골),뼈 연모(골기),토기와 석기,고기잡이 용구(어구)등이 출토되었다.특히 토기는 5백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이와 더불어 신석기시대 주거문화와 무덤형태(묘제)를 규명할 수 있는 집자리와 무덤을 각각 5기씩 발굴했다. 토기의 경우 납작밑을 한 바리모양토기(평저발형토기)는 연해주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토기 주둥이 부분에 삼각형 무늬 몇 줄을 돌리고 그 아래에 물결무늬를 찍은데 이어 맨 아래에다 다시 삼각형 무늬를 돌렸다.이 토기가 연해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나와 극동대학은 「새로 발견한 유물」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그러나 함북 나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똑 같은 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보이스만유적에서는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신석기 유적에서 나온 것과 같은 납작밑토기도 이번에 출토되었다.주둥이 부분에만 점줄무늬(점열문)를 돌리고 그 아래는 민무늬로 비워둔 이같은 토기는 함북 서포항에서도 나왔다.이밖에 골기로는 홑 낚시바늘(단식조침)3개가 연해주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는데,함북 서포항유적 등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흔히 나오는 유물이다.또 보이스만유적에서 수습한 뼈로 만든 작살과 조개팔찌 역시 서포항유적 출토품과 흡사했다. 이렇듯 보이스만유적의 베일이 뒤늦게 벗겨진 까닭은 이 지역이 옛 소련의 중요 군사기지였기 때문이다.러시아의 개방정책에 따라 이번에 발굴조사단의 발길이 미친 보이스만유적은 한·러학계가 앞으로 계속 발굴키로 합의했다.보이스만 신석기유적 발굴조사의 실무책임을 한국측에서는 임효재교수(서울대·고고학),러시아측에서는 샤프코노무교수(극동대·〃)가 맡았다.그리고 북한에서는 서국태교수(사회과학원·〃)가 옵서버로 참여했다. 이 보이스만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에 따른 연대측정에서 6천5백년전(BC4500년)쯤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그러니까 우리나라 동해안의 오산리와 서포항 이른 시기에 비해 약 5백년이 늦은 시기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다만 서포항 중간시기 내지 늦은 시기와 맞먹는 유적이 보이스만유적인 것이다.이에 따라 한·러학계는 두만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신석기시대의 선사문화가 남으로 오산리,북으로 보이스만까지 연결된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연해주지역 보이스만 발굴현장에서 귀국한 임효재교수는 『우리나라 동해안과 연해주는 자연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적을단계에서 선사인들이 공통문화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이번에 발굴한 인골을 통해 고아시아인에 대한 체질인류학적 규명히 기대된다』고 말했다.
  • 금품주며 선거운동/창원시장부인 구속

    【창원=이정규 기자】 창원경찰서는 24일 지난 6·27 지방선거 당시 유권자에게 금품을 건네주고 음식물을 제공한 공민배(공민배·42)창원시장의 부인 김순영씨(42)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5월 하순 창원시 용호동에 있던 선거사무실에서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며 이모씨(26)에게 1백만원을 건네주고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26만5천원상당의 음식물을 제공한 혐의다. 김씨는 또 지난 4월 마산여고 강당에서 열린 총동창회에 참석해 공후보의 지지를 부탁하고 창원시 팔용동 극동아파트 최모씨(34·여)집을 방문하는 등 모두 2백여가구를 호별방문한 혐의도 받고 있다.
  • 러시아주지사 접견

    김영삼 대통령은 22일 상오 청와대에서 러시아의 빅토르 이사예프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의 예방을 받고 우리나라와 러시아 극동지역간 협력증진방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사예프 주지사는 경상현 정보통신부장관의 초청으로 16일부터 23일까지 우리나라를 방문중이다.
  • 「한국전쟁 기원」 논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2)

    ◎「이데올로기 잣대」 따라 남침­북침설 대립/본지연재 「모스크바 새증언」이 남침 입증 한국전쟁의 진행 상황은 본지 연재물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했습니다.따라서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시리즈에서는 전황을 직접 다루지 않는 대신 한국전쟁 기간중 있었던 주요 사건·사고와 정치·경제·사회적 흐름을 주로 소개하겠습니다.독자 여러분께 배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 상오 4시 38선 일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일요일을 맞아 새벽 단잠에 빠진 한국군부대 막사 위로 한순간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더니 이어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었다.이에 앞서 상오 3시30분쯤에는 북한 게릴라 3천1백여명이 해군 상륙선단편으로 동해안 옥계·삼척·임원 등 3곳에 상륙했다.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터진 것이다. ○북 군사력 한국 압도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경상도·제주도를 제외한 국토 전역을 수중에 넣는 등 파죽지세로 대한민국을 유린했다.북한군이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공세를 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북한은 일찌감치 전쟁준비에 나서 개전 당시 군사력에서 한국을 압도했다. 개전 초기 양쪽의 전력을 볼 때 북한이 침략의도를 갖고 대한민국을 먼저 공격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 어디냐는,곧 「한국전쟁의 기원」을 따지는 논쟁이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이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한민족간에 벌어진 내전이나 국지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세계가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블록으로 갈라져 냉전체제로 돌입한 다음 벌어진 첫 대결의 장이었다.따라서 한국전쟁 기원에 관한 학설에는 전쟁 자체의 성격 분석을 전제한 이데올로기적 잣대가 작용하게 마련이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은 냉전 발생의 책임을 미·소 중 어느쪽에 두느냐에 따라 두갈래로 나뉜다.하나는 「소련의 공격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전통주의 학파다.거꾸로 「미국이 월등한 군사·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므로 소련이 불가피하게 대응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쪽은 수정주의 학파라고 부른다.기본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남침설」을,수정주의자들은 「북침설」을 지지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자 수상인 스탈린을 대개 지목하며 그 동기는 다음 몇가지로 분석한다.첫째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유럽에서 압박을 가하자 이를 분산시키려고 극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압력분산설」이 있다.또 ▲세계 적화를 노리는 스탈린이 미국의 대응 의지를 떠보려고 도발했다는 「저항력 실험설」 ▲주한미군 철수,애치슨라인 설정으로 미국이 한국방위를 허술히 한데다 한국에서도 「5·30선거」에서 우익세력이 패하자 그 틈을 노렸다는 「허점공격설」 등이 있다. ○냉전발생책임에 무게 반면 수정주의 학설은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설에서 출발했다.미국의 좌파 언론인 스톤이 제기한 이 주장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위기를해소하려고,맥아더는 미 정부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전쟁을 획책했다는 논지로 구성됐다.정확한 근거없이 단순한 추측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점차 미국·일본 등 서방국가 좌파 지식인사이에 널리 퍼져 수정주의라는 한 갈래를 이뤘다. 「6·25」를 겪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처구니없어 할 「북침설」이 나름대로 세력을 이룬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전통주의자건,수정주의자건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냉전논리로만 파악했다는 점이다.이들은 당시 남북한의 정세나 군사력 비교 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소련 또는 미국이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했다.또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북한·소련측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점도 학자들의 연구를 제약한 큰 요인이었다.예컨대 북한군의 남침을 밝히는 한글 문헌은 1986년까지 한건밖에 공표되지 않았다. 이같은 학계 분위기는 80년대 후반 들어 반전한다.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북한 노획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6·25」를 철저히 준비했고,치밀한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음이 속속 밝혀졌다.「북한 노획문서」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에 나선 미군이 평양 등 북한 각지에서 압수한 각종 문서를 총칭하며 그 분량이 1백60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이 북한측 자료는,인민군 5개 사단이 6월23일부터 24일 밤사이 38선이북 수㎞ 안에 집결해 25일 새벽 선제공격을 가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가령 6사단 문화부가 6월13일 예하부대에 내려보낸 「전시 정치·문화사업」명령서를 보면 38선으로의 이동­공격 개시­점령지에서의 정치선전 활동에 이르기까지를 5단계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북한 노획문서」의 공개와 이에 근거한 연구성과 발표는 어느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전쟁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이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자료가 서울신문이 올해 발굴해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러시아 소장 비밀문서 9백50여건이다.러시아 외무부·대통령궁·옛소련공산당 중앙위·국방부에서 각각 입수,이번에 처음 공개한 이 자료더미는 한국전쟁 준비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풀리지 않던 많은 의혹들을 해명해 주었다. ○“3인 공동정범” 밝혀 이에 따르면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있어 각각 주요 역할을 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을 만나 먼저 전쟁을 제의한다.이를 거부하던 스탈린은 50년 3∼4월 회담에서 남침을 허락했고,이후 5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전쟁을 주도한다.전쟁 계획을 확정하고,중공군을 끌어들였으며,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에도 휴전을 거부하는 등 주요 결정은 모두 스탈린이 내렸다.한편 모택동은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긴 했지만 막상 중공군을 투입하고 부터는 전쟁터를 책임진다. 러시아 비밀문서 발굴로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해묵은 논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한민족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긴 「6·25」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공동정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로 증명됐다. ◎「당 7∼8월 사업계획서」/북,108군·1168면에 「인민위」 설치/도·시·군·면 행정단위 남노당위 “재건”/「평화옹호 서울위」,지지 서명 받아내 전쟁 개시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점령지에서 당·정 기관의 건립,토지개혁,군지원을 보장하는 활동에 즉시 돌입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비밀문건을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국내 처음으로 공개한다.「당 중앙본부 7월∼8월 사업계획서」라고 이름붙은 이 문서는 「절대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등사본으로 50부만 찍은 귀한 자료다.이 문건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북한이 세운 전략을 알려준다. 사업계획서는 점령지 행정 중심방향으로 ▲옛 남로당조직 복구등 당세 강화 ▲군수품 생산 증대 ▲군·면·이 단위 인민위원선거 및 토지개혁 실시 ▲사회단체 활동 강화 ▲농촌에서의 증산 장려와 현물세 징수 등 5개항을 제시했다.또 10일마다 회의를 열어 이같은 지시사항을 점검하도록 했다. 이 문서에서 나타나듯 북한은 행정구역에 따라 중앙(서울)·도·시·군·면 단위로 각급 당 위원회를 재건하는 동시에 임시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들을 복구했다.당 위원회 재건작업은 북로당원으로서 파견된 공작대원,남로당 출신 월북자,형무소에서 출감한 남로당 간부 출신,빨치산 간부들이 맡았다.이어 두단계에 걸쳐 「인민정권기관」을 지체없이 세웠다.먼저 점령지에 지역 정권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곧바로 선거를 거쳐 인민위원회를 정식 설치했다.남한에서 인민위원회가 들어선 곳은 1백8개 군,1천1백68개 면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북한에서 실시한 예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했다.「무상 몰수,무상 배분」을 원칙삼아 일제와 한국 정부,지주 소유 토지는 모두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자작농은 5∼20정보만 인정했다. 북한은 정치 선전·선동에도 힘을 기울여 7월14일 「평화옹호 서울시위원회」를 조직,북한을 지지하는 서명을 억지로 받아냈다.그 내용은 ▲유엔에 미국의 참전 중지를 요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등 대한민국 요인을 반역자로 지목,처형을촉구한 것이었다.
  • 민자 새조직책/참신한 30∼40대를 찾아라

    ◎30개사고·신설지구당 인선 전망/형식적 절차 배제 직접 인물 추천 지시/정·재·법조·언론계 망라 1백50명 압축 16일 민자당에는 의미있는 지시가 떨어졌다.민자당의 사고·신설지구당의 조직책후보감을 있는대로 추천하라는 내용이었다.민자당은 물론 범여권을 총동원,최상의 인물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빈 자리는 이치호 전의원의 탈당으로 한개가 더 늘어난 30개.민자당은 빈 자리의 새 주인을 찾는 작업을 그전과는 달리 할 생각이다.형식적인 공모절차 없이 직접 인물을 찾아나서겠다는 것이다.물론 실무진에서 반대하고 있어 원래 예정대로 공모를 거칠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변화에서 나타나듯 여권은 「베스트 멤버」 구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내년 총선을 앞둔 1차 공천격인 새 조직책의 인선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할 생각이다.참신한 신진인사로 「세대교체」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중량급 인사로 국정의 안정감을 채우겠다는 이중포석이다.아울러 어정쩡한 「전문정치꾼」은 가능한 한 배제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민자당은 후보감을 1백50명가량으로 압축해놓고 있다.현재로서는 「인명록」을 작성해놓은 단계에 불과하지만 면면을 보면 역시 참신성이 눈에 띈다. 30대와 4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경제인·언론인·학자·변호사·판검사·연예인 등 전문인도 많다. 경제인은 원종섭 제일제당부사장(부천 원미갑),김세중 극동건설부회장(시흥),서군석전 반도스포츠사장(군포),이민 삼성중공업부사장(〃),김영환 (주)대우부회장(고양),최종인 두산상사사장(〃),주진오 사조산업회장(경북 성주고령),신선호 율산명예회장(서울 강북을)등이 포함돼 있다. 변호사로는 안상수(서울 송파 또는 강북),박용일·홍성우(서울 송파병),김용원(부산 사상을),이사철(부천 원미갑),한경수씨(경기 고양)등이 거명되고 있다.N모(법무연수원·경기 분당)·J모(수원지법·안양)·P모씨(대구지검·안산)등 현직 판·검사도 대상에 들어 있다. 학자도 상당수 있다.김학준 단국대이사장,김광웅(서울대·인천 연수)·이필우(건국대·경기 시흥)·최명(서울대·〃)·정경훈(경원대·경기 분당)·문광식(수원전문대·안양 동안)교수와 오덕균 전충남대총장(대전 서을)등이다. 정·관계 출신인사로는 서석재 전총무처장관(부산 사하갑),박관용 청와대정치특보(부산 동래을),김무성 내무부차관(부산 남갑)등의 입성은 확실시된다. 홍재형 경제부총리(청주),강용식 의원과 최병렬 전서울시장(서울 송파병),최양부 청와대농림수산수석(서울),양경자 전의원(서울 강북을),임정규 민자당부대변인(〃),이상연 전안기부장(경북 성주·고령),이상희 전내무부장관(〃),이헌기전 노동부장관(인천 남동을),김광일 국민고충처리위원장(부산 북),김도현 문체부차관(서울 광진을),이수심 민자당조직국장(경북 칠곡)등도 검토대상이다. 이밖에 정기환전미국 록히드사 책임연구원,이병택 안양경실련대표등이 안양조직책후보에 포함돼 있다.언론계 출신도 10여명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예인으로는 유인촌·이덕화·이상용씨 등이 대상에 들어 있다.
  • 서울신문 주최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순례」 단장 박성수

    ◎“항일투쟁 현장서 조국 소중함 실감”/독립선언문 낭독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상적 서울신문과 스포츠서울, LG전자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지난 2∼12일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인 대학생 20명과 함께 애국선열들의 숨결이 배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를 순례하는 행사를 가졌다. 순례단의 단장이었던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의 답사기를 싣는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20명이 중국과 러시아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본 것은 다른 어느 행사보다도 뜻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날의 전승국이요 열강이었던 중·소 두나라가 체제선택의 잘못으로 인하여 반세기도 못가서 빈민대국이 되거나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조락해버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된 것은 여간 큰 성과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상해의 임정청사와 홍구공원 연변의 청산리·봉오동 전투현장,그리고 하얼빈의 안중근의거 현장 등 책에서만 보던 항일투쟁의 생생한 자리를 보고 학생들은 다시는 나라가 망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 땅을 밟았을 때 학생들은 엄청난 주검의 도시들을 목격하고 놀랐다.우리가 처음 도착한 하바로프스크 공항에는 날지 못하고 버려진 러시아제 여객기 10여대가 눈에 띄었고 우수리스크로 가는 유명한 시베리아 전도열차는 6·25때 피란열차를 연상케 하는 빈민들의 고철 객차였다. 위도 48선에 자리한 하바로프스크는 왕년의 발해 12부의 하나로서 알고 보니 옛날 우리 땅이었다.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는 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북상하였다고 생각하니 새삼 우리들 후손이 낯뜨거웠다. 시베리아 철도는 우수리강을 따라 남하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닿게 되는데 우수리강의 어원이 오수리요 한강 상류의 소양강이 바로 우수리강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지금도 우수리강에 살던 예맥의 후예가 춘천시 우수촌에 살고 있다.그러고 보니 시베리아는 우리들에게 낯선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차창 밖에 펼쳐지는 끝없는 시베리아 벌판이 잡초로 우거져 있으니 이 땅을 차지한 러시아인들의 대욕과 태만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다못해 콩이나 옥수수라도 심어 놓는다면 가축에라도 먹일 양식이 생길텐데 그들은 지금 보드카에 취해 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도시는 극동의 홍콩 블라디보스토크였다.19세기말 우리의 조상들이 가서 피와 땀으로 건설한 금강만 항구에는 녹슨 군함과 상선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데 움직일줄을 모른다.기름도 없고 갈곳도 없는 배들의 행렬위에 어둠이 깔리면 전등불 하나 없는 암흑의 항구가 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 자리한 개척리(개탁리)거리와 쫓겨난 달동네 신한촌에는 그 옛날 우리 고려인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건물 하나가 외롭게 남아 있다.1937년 냉혈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수용 화차에 실려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추방되던 비극의 정거장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도 지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온통 빈민굴로 화한 이 도시의 낡은 건물과 잡초로 우거진 거리가 역사의 교훈으로 더 인상 깊었던 것이다.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게 하는도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울을 향해 날아 가는 정든 우리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 한국전쟁 전야(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1)

    ◎비전투요원 472명 남고 미군 전원철수/6월17일 내한 덜레스 국무 “38선 이상무” 우리 민족이 가장 불행하게 맞은 20세기가 꼭 절반이 저문 19 50년 1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한국은 미태평양방위선밖에 있다는 애치슨의 발언이었다.그토록 머물러 주길 희망했던 미군마저 철수한 위기상황 속에 날아든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민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미 방위선 바깥” 한국에 남아있던 당시 미군의 병력은 4백72명에 지나지 않았다.전투병력이 아닌 미군사고문단(KMAG)자격의 비전투 요원들이었다.미군은 성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뒤인 19 48년 9월15일부터 한국을 빠져나갔다.미안전보장회의가 대통령 H S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부터 미군들이 극비에 철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48년 12월말까지 완전 철수할 계획이었으나,중대한 모험이라는 여론에 따라 몇개월 연장되었다.미군은 결국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를 끝냈던 것이다. 미국은처음부터 남한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데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이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이었는데,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주둔 미군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상작전보다 쉽고 돈이 덜드는 미 공군의 활동에 더 기대를 걸었다.또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미국은 남한에 유지하고 있는 병력 2개사단 약 4만5천명의 병력을 다른 지역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3월2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는 그 전해에 만든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철군 건의안을 대통령 트루먼에게 제출했다.미군의 철수에 뒤따를지도 모를 공산주의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한국정부를 실행 가능한 한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이는 한국에서 미국이 병력과 비용부담 의무를 줄일 수 있다는 국익과 맞물려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떨어졌다. 어떻든 트루먼의 미 행정부는 철군 보상으로 한국에 미군 장비와 6개월분의 비축물자를 이양키로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 경제협조처(ECA)로 하여금 19 50년 회계연도에 1억9천2백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주는 방안이 고려되었다.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려는 하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결국 한국정부는 50년 2월15일 이전에 사용할 수 있는 6천만달러의 원조금을 겨우 받아냈다. 한국군의 군비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미국인 친지 R T 올리버(당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한국 육군의 탄약 비축량은 5일분에 불과했다.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5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분량이라고 예측한 미국의 여론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을 품었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에 북한의 공격이 1천1백84회나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육지와 연결된 통로가 없는 옹진반도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공격을 받은만큼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명목상 한국군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임무는 한국군을 통제하는 일이었다.항공기는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있는 6대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다.탱크나 장갑차 보유는 엄두도 못냈다.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시켰다. 그렇다고 영토보전을 위한 어떤 보장도,외부공격에 대한 지원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탄약 비축량 5일분 불과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한국이 미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렸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이 전파를 탔던 것이다.정부수립 만 3년이 안되는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놀라움이었다.한국은 참으로 고독했다.이승만 대통령이 19 49년부터 힘을 기울인 태평양 반공방위조약이 실현되었더라면 한국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자유중국·필리핀·인도·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구상한 이 조약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정권의 1950년은 의기양양했다.김일성은 1월1일 신년사에서 강력한 민주기지의 축성과 신속한 국토완정을 외쳤다.여기 나오는 국토완정은 얼핏 애매모호한 용어로 들리지만,실로 가공스러운 의미를 함축했다.국토의완전한 정리,다시 말하면 무력통일을 선언했던 것이다.그러면서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는 능숙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남한의 유격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발언을 덧붙인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그해 3월에도 훈련된 빨치산 요원 1천50명을 남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특히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에 고무되었다.북한은 한국과 대만을 미태평양방위선 밖에 둘 것이라는 애치슨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이 있기 그 이전에 이미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놓은 상태였다.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전력을 증강한 것은 1949년 여름 이후였다.먼저 5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출신 한인의용군을 중국으로부터 불러들였다.이로써 북한 정규군의 약 3분의 1이 실전경험을 갖추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95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제 중화기와 T34형 탱크가 청진항으로 속속 입항했다. 미군의 철수와 소련에 의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정책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북한군 능력의과소평가와 동아시아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의 활동반경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은 한국군 무장의 불필요성과 한국포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이 시기에 미국은 직전의 적국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심도있게 들고나왔다.국제정치는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다. ○“5년 이내에 전쟁 없다” 한국의 위치는 계속 흔들렸다.1950년 5월5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T 코널리는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다.그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지만,국내에서는 제2대국회를 뽑는 5·30선거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코널리 발언에 앞서 5월4일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한국의 판단은 사뭇 달라 5월12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그 6월의 첫날 트루먼은 또 『5년 이내에 전쟁이 없다』는 말로 5월4일의 발언을 더 구체적으로 확신했다.이어 6월17일에는 신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서울로 날아들었다.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국회연설에서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19일 서울을 떠났다. 세계전사를 통해 가장 지루하고 긴 대규모의 국지전으로 치러야 했던 며칠후의 한국전쟁을 예측하지 못한채 극동의 화약고를 멀리했던 것이다 ◎미 CIA 정보평가 보고서/미 “북한은 전면전 펼 능력 없다”/“중·소의 적극지원 전제돼야 가능/대남투쟁 선동·유격전에 그칠것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 50년 북한이 전쟁 수행능력 어느 정도 지녔던 것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전면 남침이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발굴한 미 CIA 정보평가보고서(NIE)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CIA가 1950년 6월19일에 작성한 「NIE리포트­3」등으로 되어있다.이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탱크와 야포 등의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그 능력이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은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군사적 우위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판단한 NIE문서는 소련과 중공이 적극 지원하면 한국에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원조가 대폭 삭감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면 남한 전체의 공산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다만 이 문서의 한계성이 있다면 미구에 닥칠 전면전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북한정권이 남한을 겨냥한 목표를 단순한 선동선전및 침투·사보타지·파괴공작·유격투쟁 등으로 예견했다.또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탱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태롭게 할 내부의 위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밖에 1950년 북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조선노동당 문서도 NARA에서 입수했다.6·25가 일어난 19 50년 5∼6월까지의 사업계획을 명시한 이 문서는 군사적 측면을 가장 밀도있게 강조했다.10부만을 등사물로 간행,극비문서로 분류한 조선노동당 문건은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노획문서.이 문서 역시 서울신문이 국내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 세계 금 수요 증가/2분기 15% 늘어

    【런던 로이터 연합】 금년도 2·4분기의 세계 금 수요는 뚜렷한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전년도 동기 수준과 대비해 15% 늘어나 6백63t에 이르렀다고 세계금협회 (WGC)가 9일 밝혔다. WGC는 일본지역에서 금에 대한 투자와 극동지역에서 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이같이 전반적으로 금 수요가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 휴정협정 서명(6·25 내막/모스크바 새 증언:30)

    ◎중국,휴전 앞두고 “마지막 진격” 주장/소선 “미군 상륙작전 감행 두렵다” 반대/해리슨 중장­남일,7월27일 역사적 조인 중국당국은 스탈린앞으로 휴전협상 진행에 관한 상세한 현황보고를 하면서 그에 덧붙여 협상대책까지 건의했다.즉 협상속도를 싸고 미국과 이승만정부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앞으로 미국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승만에게 더 큰 압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에 휴전성사 가능성은 높다는 게 중국당국의 기본 시각이었다.53년 7월3일자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이 모스크바에 보고한 전문에 나타난 중국의 협상대책은 다음과 같다.(N17286) ○“미­이승만 불화 조장을” 『이같은 상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는 바임.이는 휴전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미·이승만간의 불화를 더 조장하고,미국의 내외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정권에 더 많은 압력을 행사토록 하기 위함임. (1)7월5일자로 클라크앞으로 김일성·팽덕회동지의 답신을 보낼 것.협상재개에 앞서 미국의 입장을 비난하고 앞으로 미국의 유화정책이다시 바뀔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것. (2)휴전협정 서명 전 작전을 전개해 이승만 괴뢰군에게 일격을 가할 것.이는 전선을 조금이라도 더 남쪽으로 내려보내기 위함임.그뒤 휴전협상이 재개되면 이승만정권의 잘못으로 협정체결이 지연됐다고 비난할 것.그리고 상황이 바뀌었으니 휴전개시점을 재조정하자고 요구할 것.미국도 이 요구에 응할 것임.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이정권과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임.반대로 상대가 양보 대신 새로운 선전차원의 술책을 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음.그럴 경우에는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택해 양보하고 현전선에서 휴전하는 데 동의할 것. ○“최후가지 투쟁은 엄포” …중략…휴전협정체결은 7월15일에 해야한다고 생각함.중국대표단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추가로 밝힐 것.즉,중국정부는 최근 이승만정권의 잦은 도발이 한편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용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함.이런 이유로 이승만은 미국과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고집하고 있음.이는 만약 미국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전병력이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말하나 우리는 이것이 엄포라고 생각함. 중국정부는 미국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함.미국은 이에게 대규모 지원을 할 경우 그가 심각한 모험을 전개해 미국을 끌어들이려할 것을 우려함.미국은 극동지역에서 더이상 대규모 모험에 끌려들려 하지 않고있음. 앞으로 개최될 정치협상 대책에서도 미·이승만간 이견이 있음.이는 이 정치협상 대신 북한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중·조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하려고 함.위 상황을 종합할 때 중국정부는 휴전협정 조인이 평화에 유익하다고 판단함. 당시 중국외무차관은 이 말을 듣고 농담조로 「중국과 미국이 이승만에 반대해 공동전선을 펴고있다」고 말했음.그는 또한 중국정부는 이가 소규모 발악적인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심각한 도발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음』 한편 소련측은 휴전협정 서명을 눈앞에 두고 공산군측 서명당사자의 인선에까지 일일이 간섭했다.유엔군 대표단의 김일성직접서명 요구에 절대 응하지 말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남한정부가 김일성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53년 7월2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는 김일성의 서명식 참석여부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해 직접 김일성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의안 NP19/9) 『김일성을 위시한 조선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함.소련공산당 중앙위는 판문점 휴전협정서명에 북조선대표로 부수상 1명이,중국대표로는 팽덕회동지가 참석할 것을 권고함.누가 참석할지 여부의 결정은 전적으로 중·조 정부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절대 미국의 압력에 이끌려가서는 안됨. 현상황에서 김일성의 판문점 여행은 위험부담이 큼.이승만 진영이 김일성에게 어떤 종류의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미국의 김일성 참석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휴전협정일정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임.팽덕회장군이 참석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임.만약 미국이 김의 불참을 이유로 협정서명을 거부한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임』 ○김일성 위해 우려 이유 북한측 대표는 이렇게 해서 부수상 남일로 결정됐다.53년 7월27일 남일은 유엔군 대표인 해리슨중장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되기 불과 하루 전인 53년 7월26일 북경주재 소련대사는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이 휴전협상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모스크바에서 7월3일자로 보낸 중국정부의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답신이었다.(N8019) 『본인은 모택동에게 소련정부가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중국정부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이제 한국에서 적대행위를 끝낼 시기가 됐다는데 상호동의한다고 말했음.적도 군사적 이유로 전쟁을 계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말했음.모택동은 이와 관련,깊은 사의를 소련정부에 보낸다고 말했음.그러면서 모는 적이 군사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도 휴전협정체결에 동의했다고 말했음. 군사적으로 볼때 적은 지난해동안 지상에서 진격은 물론 전선사수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모는 말했음.반면 중국군은 현위치 사수는 물론 진격작전 수행에도 자신을 가졌다고 했음.정치적인 면에서는 적들이 제국주의 진영내 내분을 겪고있고 전세계 여론이 전쟁에 반대하고있기 때문에 휴전에 동의한 것으로 모택동은 설명했음.경제적으로도 제국주의진영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모는 말했음.즉 전쟁초기 2년간 미국의 독점 군수업체들이 엄청난 수입을 올렸지만 이후 휴전협상이 시작되고 반전여론이 강화되면서 이들의 수익이 격감했다는 것임』 이 보고서 내용중 흥미있는 것은 모택동이 순수 군사적인 면에서 볼때 적이 수세에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을 1년 정도 더 계속해 한강주변에 보다 많은 전략거점을 확보하는게 협상에 유리하다고 주장한 점이다.반면 이 보고서를 보낸 중국 주재 소련대사는 남쪽으로의 추가진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덧붙였다.추가 진격을 감행할 경우 동서 해안에까지 전력을 배치해야하는데,그러면 중·조군 후방에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후복구 소도움 요청 이렇게 해서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됐다.휴전이 성사되자 김일성은 즉각 전후복구작업에 들어갔다.김일성은 전후복구 역시 소련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협정조인 며칠 뒤인 8월5일 김일성은 소련지도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친서전문을 보냈다.(N2060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후 복구·건설계획과 관련 소련 전문가 여단을 초빙키로 결정했음.이들이 조선의 기간 산업체들의 복구,건설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주기를 원함』 이틀 뒤인 8월7일 평양주재 소련대사는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했다.(N20779) 『우리는 소련 전문가들에게 조선의 복구계획을 짜면서 가장 긴급한 문제부터 시작하되 가능한한 조선국내의 자원을 활용토록 지시했음.…중략…그러나 이미 입안된 계획을 보니 조선내부 자원활용에 큰 역점이 주어져있지 않고 대신 소련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주의국가들로부터의 원조를 극대화하는 데 주관심을 두고있음. ○김일성 다시 모스크바로 또한 경제복구계획의 주안점이 경공업·농업부문 대신 중공업 분야에 주어져있음.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북조선 정부는 정부부처에서 우리 전문가들을 활용치 않고 대신 산업체에다 이들의 파견수자를 늘리고있음.이런 제문제를 협의키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이같은 소련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53년 9월초 전후복구문제를 협의키 위해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다. ◎연재를 마치면서/관련문서 계속 발굴… 속편 준비 이번 30회를 끝으로 「모스크바 새증언」 연재를 일단 마무리합니다.이번 시리즈는 주로 6·25를 둘러싼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인의 행적,협조관계등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밖에도 전쟁기간중 중·소·북한 정권 내부의 주요정책 결정과정등 밝혀져야할 「연결고리」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게 사실입니다.앞으로 관련문서를 더 찾아내 추가집필의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해외 건설공사 말련서 호조/대우­77층빌딩 수주

    ◎삼성·극동­92층 「쌍둥이」 연결 국내 건설업체들이 최근 삼풍백화점 참사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최대시장인 말레이시아에서 대형 프로젝트 수주와 고난도 공사의 진행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해외건설 시장 진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삼성건설과 극동건설 컨소시엄은 7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92층에 높이 4백46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시티센터 쌍둥이빌딩의 41층과 42층을 연결하는 「스카이브리지」 연결공사에 들어갔다. 지상 1백77m 높이까지 길이 58m,폭 5m,무게 5백40ⓣ의 철골다리를 끌어올려 잇는 최고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난도 공사다.쌍둥이빌딩의 다른 한동을 짓고 있는 일본의 하자마건설을 제치고 우리업체들이 따냈다. 또 (주)대우 건설부문은 역시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국영통신공사와 2억4천만달러의 공사사옥 신축공사에 대한 본계약을 체결키로 지난 3일 최종 합의했다.오는 98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콸라룸푸르시 잘란 판타이바루 인근 1만평 부지에 연건평 2만5천7백평,지하4층,지상 77층의 인텔리전트 빌딩과 대형공연장,레크리에이션센터 등을 짓는 공사이다.
  • 「히로시마 원폭」 50돌… 2저서의 엇갈린 시각(쟁점)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지 6일로 만 50년이 된 가운데 원폭투하를 당시 상황아래 최선의 대안이었다는 입장인 「암호명 낙하」(Code Name Downfall,노먼 폴마르·토마스 앨런 공저)와 아시아에서 소련 공산주의의 예봉을 꺾기 위한 미국의 무모한 선수치기였다는 수정주의적 반대 견해의 「원폭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The Decision To Use Bomb,가르 앨퍼로비츠 저) 등 두권의 책이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이들의 요점을 소개한다. ◎긍정론/「암호명 낙하」/폴마르­앨런 공저/“미군희생 막기위한 최선의 대안”/트루먼 “소련군 가세해도 일에 쇼크 못줘” 판단 트루먼 대통령은 19 45년6월17일 일기에다 『대일 전략을 결정해야만 한다.일본 본토를 공격할 것인가,폭탄을 떨어뜨리고 봉쇄할 것인가』라고 썼다.여기서 폭탄은 당시 일본 도시들을 황폐화한 중단없는 미군기 공습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트루먼은 암호명 S1의 원자탄에 대해 곧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이 결정에 대한 도움을 얻고자 그는 최고위 군사정책 관계자들을 불러 45년11월1일로 임시 날짜가 잡혀진 일본 직접공략 계획안을 들었다.트루먼 대통령이 무엇보다 알고 싶었던 항목중의 하나는 공격감행시 예상되는 미군 전사자와 부상자 규모였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태평양전쟁을 마무리할 이 상륙공격은 예정대로 11월에 감행하지 않으면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서 피를 흘리지 않고 전쟁을 이길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12일 전인 그해 4월1일 개시된 오키나와전투는 3개월 사이에 미군 전사자 7천6백명을 기록했으며 3만2천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생겨 10만명의 투입전력중 사상률이 39%를 넘었다. 일본상륙의 첫 공략에는 총 34만명의 육군·해병대 병력이 동원될 계획이었다.트루먼은 합참에게 상륙 공격의 구체적 작전안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달 후 7월중순에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미국은 일본 암호전문의 체계를 해독한 덕분에 일본지도층중 일부가 협상은 원하고 있으나 항복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됐다.원폭투하냐 상륙 공략이냐의 선택을 미루고 단순봉쇄와 도시공습만으로 항복을 이끌어 낸다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하루에도 몇십명씩 죽어가는 이 전쟁을 트루먼 대통령은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트루먼은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일본도 소련이 지난 3개월간 극동군을 정비·증강했음을 파악하고 있어 쇼크효과는 별로 크지 않으리라 생각됐다.원자탄을 실제 사용하기 전에 이 폭탄의 위력을 일본에게 보여줘 항복을 유도하자는 몇몇 미국 과학자들의 제안은 일본에게 이용당할 많은 약점을 안고 있었다. 원폭투하 없이도 미국은 이겼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만∼수십만명의 미군과 수백만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을 것이다.트루먼 대통령의 원폭사용 결정은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이들 미군과 일본인들의 목숨을 건졌다. ◎부정론/「원폭 사용 결정」/가르 앨퍼로비츠 저/“소련 견제하려 무리한 선수치기”/45년 여름 일본은 이미 궁지에 몰린 상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헨리 스팀슨 당시 전쟁장관으로부터 원자탄이 곧 일본에 사용될 것이란 말을 듣고 의기소침해짐을 느꼈다고 뒷날 회고했다.아이젠하워는 이 계획에 대해 『일본은 이미 패배했으며 인명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견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는데 그말로는 성이 안차 퉁명스럽게 『이 무시무시한 것으로 그들을 칠 필요는 없다』고 내뱉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현재 아이젠하워와 같은 생각이다.19 45년 여름에는 궁지에 몰린 일본 형편이 뚜렷해졌다.미해군이 일본해상을 통제했으며 식량,원자재,석유 공급이 끊겼다.미공군은 일본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도시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해가고 있었다. 독일이 5월8일 항복해 미국과 영국은 히틀러를 쳐부쉈던 힘을 독일에 비해 뒤처지는 타켓에다 집중할 수 있었다.게다가 소련의 대군이 일본 끝내기에 가세할 예정이었다.분명 시간 문제였다.일본 암호를 해독한 미국은 7월13일 일본천황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직접 개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종전 조건은 미국이 완전 무조건 항복만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일왕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서 스팀슨 전쟁장관과 조셉 그루 국무장관대행은 천황이 영국왕과 같은 실권없는 지위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라고 트루먼에게 조언했다. 소련군 8월 공격의 쇼크에다 천황 지위 보장이 얹어지면 항복은 거의 기정사실이라는 조언도 있었다.또 미국엔 시간이 많았다.일본본토에 대한 전면침입은 46년 봄에나 시작될 것이고 규슈 상륙일도 11월이었다.러시아의 8월 공격이 종전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때 원폭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많은 비밀문건이 공개되면서 바이어니스 장관은 원폭이 소련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를,또 아시아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초래함 없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났다.여러 과학자들에게 원폭이 있으면 소련을 좀더 쉽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오래전부터 소련은 8월8일 부로 대일전에 나설 계획이었다.히로시마는 8월6일,나가사키는 8월9일 폭격당했다. 최근 공개된 당시의 1급비밀 문서는 하나같이 「소련군이 공격에 나서면 일본은 거의 틀림없이 항복할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 과학기술의 산실/아카뎀 고로독(시베리아 대탐방:27)

    ◎물리·수학 영재학교는 “세계적 명문”/흐루시초프때 설립…연구원에 특권 부여/정부지원 줄자 우수인력 기업체 등으로/역앞 매점엔 한국산 「도시락 라면」이… 아카뎀 고로독은 지난 57년 흐루시초프 때 시베리아의 학문진흥과 자원탐구를 주목적으로 설립됐다.이곳에 연구단지가 건설되면서 시베리아 일대의 학문연구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 노보시비르스크 외에도 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톰스크·울란우데·야쿠츠크 등 시베리아 6개 도시에 과학아카데미 지부가 설립됐고 바르나울·케메로보·키실·옴스크·튜멘·치타 등 여타 대도시들에도 연구지부가 세워졌다. ○기초과학 집중 육성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뒤 이곳 경제연구소에 와서 줄곧 35년을 연구생활에 전념해온 알렉세예비치 박사(63)는 전형적인 아카뎀 고로독 맨.단지내 5층짜리 아늑한 연구원아파트에 살고있는 그는 이곳의 제일 큰 자랑거리로 물리·수학 영재학교를 꼽았다.시베리아 전역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11∼12세 우수 아동들을 선발해 물리·수학 등 기초과학을 집중교육시키는데 현재 전체학생수는 3백여명에 9개반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이 영재학교의 졸업생들은 대부분 노보시비르스크대학으로 진학해 정책적으로 시베리아의 각종 연구소·기업체에 진출시킨다. 아카뎀 고로독 1세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이들은 대부분 모스크바에서 파견돼온 우수 학자들이었는데 연구단지 한쪽에는 이들의 공동묘역이 있다.알렉세예비치박사는 그 뒤를 이은 2세대다.대부분 시베리아 출신들로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재들이다.그 3세대가 이제 대학을 갓 마쳤다. 아카뎀 고로독에서만 35년을 살아온 알렉세예비치 박사의 아파트는 한때 이들이 누린 특권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넓고 아늑했다.노모와 부인·두 아들과 함께 사는 그는 두 아들이 태어나며 지급받은 방4칸짜리 아파트에서 살고있다.궁핍하기 그지없는 모스크바 학자들의 사는 모습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모스크바보다 “여유”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3세대 이후 이곳의 전망은 매우 어두운 것이었다.단적인 예로 대학을 졸업하는 우수인재들의 90%가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외국기업체나,아니면 월급을 많이 주는 정부 출연기구에 취직한다고 했다.각연구소에 국가재정지원이 대폭 줄어들어 대우가 너무 형편없기 때문이다. 알렉세예비치 박사도 자기 월급이 30만루블(우리돈 5만원)인데 부인과 생활하기에 너무 힘겨워 단지내 빈병들을 모아팔아서 생계에 보태쓴다고 했다.그러니 젊은이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말릴 수도 없다고 했다.모스크바법대를 나온 그의 큰아들은 박봉이지만 법관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그러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둘째아들은 봉급을 많이 받기 위해 이곳에 진출한 외국 건설회사에 취직해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걷고 있다. 단지내를 함께 걷다가 그의 제자를 만났는데 바딤(27)이라는 이 청년은 대학졸업 뒤 시베리아전역에 연료를 공급하는 정부출연기관에 취직해 월8백달러의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알렉세예비치 박사는 『학문의 앞날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새 환경에 잘 적응하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대견스럽다』고 말했다. 학생들 뿐 아니라 교수들 가운데서도 젊은 사람들은 새 직장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아카데미 고로독의 연구원 숙소 아파트들은 전형적인 흐루시초프시대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흥미롭다. 흐루시초프는 당시 집권하자 곧바로 주택보급을 최우선 사업으로 정하고 꼭 성냥갑같이 생긴 5층짜리 서민용 아파트를 대량으로 지었다. 러시아전역에 제일 많이 보급돼 있는 이들 5층짜리 서민아파트는 지금은 나쁜 아파트의 대명사처럼 돼있다.그래서 사람들은 형편없는 아파트를 보면 흐루시초프의 이름에서 따온 「흐루쇼바」로 부른다. 같은 5층짜리면서도 규모가 작고 고딕으로 멋을 약간 부린 건물은 스탈린 때 지어진 것들이다. 「흐루쇼바」만큼이나 멋이 없으면서도 8층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50년대말∼60년대초에 지어진 브레즈네프식이다. 러시아에서도 우리같이 5∼8층짜리 아파트의 로열층은 2∼3층으로 꼽는다. 그래서 새 아파트를 배급받아 입주하는 주민들 중 이 로열층 입주자들은 1백%가 당 간부이거나 고위층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1층과 제일 위층 입주자는 하나같이 힘없고 끈없는 사람들이다. 오나가나 괄시받으며 살아온 이곳의 우리 한인들도 하나같이 1층 아니면 꼭대기층을 배정받았다.그래서 한인들은 이를 「카레이스키 에타쥐(한국인 층)」라고 자조한다. 아카뎀 고로독 외에 노보시비르스크가 자랑하는 것으로 국립오페라·발레극장이 있다. 시베리아 최고의 발레극단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극장은 19 41년 10월부터 2차대전 종전 때까지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 소장품들을 몽땅 피란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점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있다. 단순한 극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구조 나빠 불편 아카뎀 고로독을 다녀온 이튿날 3천5백루블(우리돈 6백원)을 주고 표를 사서 「제일 값싼」 발레를 구경했다. 마침 이곳의 국립발레학교 학생들의 졸업발표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앞으로 시베리아 발레를 이끌 젊은 배우들의 기량을 가늠해볼 기회를 가졌다. 모스크바나·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의 수준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시베리아 한가운데서 그 정도 수준의 발레를 보는 사실 자체가 기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특히 장둥이라는 중국인 남자 유학생의 기량은 압권이었다. 떠나는 날 역앞 매점에 가보니 한국산 즉석 「도시락」라면이 진열돼 있는 것이 처음으로 눈에 띄었다. 마침내 극동지방에서부터 거슬러오는 한국 무역상들의 영향권안에 들어온 것이다.이후 동으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라면은 물론이고 초코파이·새우깡·가짜 나이키상표를 붙인 운동화 등 한국산 물건들이 엄청나게 많이 진출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 뿐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서 역사는 승객들에게 보통 불편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다. 역사에 들어가서 기차까지 가기 위해선 보통 2∼3번씩 지하도를 오르락내리락 해야하는데 전부 가파른 계단으로 돼있다. 따라서 짐 가진 승객들은 이렇게 한번 기차를 타고 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 신공항 고속도/14개 건설사 컨소시엄 구성/사업계획서 제출

    ◎총 사업비 1조8천3백억 산정/삼성·한진·동부 58% 지분 민자유치 사업으로 추진될 수도권 신공항 고속도로 건설에 14개 대형건설업체들로 구성된 컨소시엄 1개사가 정부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건설교통부는 지난 24일 신공항 고속도로 건설사업 사업계획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국내 14개 대형건설업체들로 구성된 「신공항 고속도로 주식회사」(가칭)가 사업계획서를 접수시켰다고 25일 발표했다. 14개사는 삼성건설 한진건설 동부건설 극동건설,금호건설,대림산업,동아건설,두산건설,롯데건설,선경건설,쌍용건설,LG건설,코오롱건설,포스코개발 등이다. 출자지분은 삼성건설이 26.56%로 최대출자자이고 한진건설 20%,동부건설 11.5%로 상위 3개 업체의 지분율이 58.06%였다. 이들은 사업계획서에서 총 사업비를 1조8천3백11억원으로 산정하고 이중 25.12%인 4천6백억원은 자기자본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나머지 1조3천7백11억원은 한국산업은행 등 13개 국내금융기관으로부터 차입할 계획이다. 통행료는 95년 가격기준으로 승용차의 경우 서울∼신공항간 편도요금을 7천4백원으로 제시했고 고속도로 상·하행선에 1개소씩의 휴게소를 설치키로 했다. 국내 최초로 건설되는 도로·철도병용 2층 현수교 구조인 연륙교는 기술적 난이도를 감안해 덴마크 코비사,일본의 가와다공업,도큐와엔지니어링 등 3개 외국업체로부터 기술협력을 받겠다고 밝혔다. 건교부는 사업계획서를 먼저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평가단을 통해 검토한뒤 민자유치 사업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내달 말쯤 사업시행자를 지정하고 9월30일쯤 실시계획 승인과 함께 사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 서방기업/북한진출 물밑 추진

    ◎최근 GM·로열 더치 셸사 등 극비 평양방문/인프라 열악·정권 신뢰못해 투자까진 “먼길” 세계의 거대기업 중 일부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속에 북한에 대한 진출을 꾸준히 타진하고 있다. 로열 더치 셸사와 제너럴 모터스(GM)사 등 서방의 거대기업들은 지난 수개월 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자동차부품과 극동아시아산 원유정제시설의 최적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북한을 은밀히 방문했다. 북한을 두차례나 방문했던 GM사의 찰스 랜돌프는 『북한이 경제를 대외에 개방할때 우리를 선구자로 기억할 것이며 자동차산업과 관련,GM을 먼저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서방기업들의 이같은 장밋빛 희망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북한은 그리 안전하고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식되지는 않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정부가 지난 1월 미­북간 핵협정 타결 이후 40여년간 지속돼온 대북한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하자 AT&T사가 미­북간 장거리통화 서비스를 즉각 개시하고 미네랄스 테크놀로지사가 북한산 마그네사이트 수입협상에 나서기도 했으나 북한의 전반적인 투자조건은 아직 미흡한 상태이다.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북한이 외국자본의 유입을 허용하려면 열악한 도로와 식량부족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으며 미네랄 테크놀로지사의 북한산 마그네사이트 수입을 중재했던 짐 영 전주한미대사관 무관은 『북한은 입장을 자주 바꾸는 매우 힘든 상대』라고 협상과정의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또 정치적인 면에서 북한이 한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과 미국기업들이 한국기업보다 앞서 북한에 진출한다면 한­미관계에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북한에 대한 외국기업의 진출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