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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육의 정/연변은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장소”(두만강 7백리:6)

    ◎거의 조선족이 알선… 70년대부터 재회 급증/한달간 머물며 “못다한 정”나누고 여행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난 고국 어느쪽의 혈육이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남북의 혈육들이 이념적 갈등 때문에 고국땅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고나 할까.조선족들의 이런 처지는 남북으로 갈라진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에 조선족들이 끼어들게 마련인 것이다. ○문혁이전엔 엄두 못내 그러나 남북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문화혁명 이전에는 상봉을 주선하기는 커녕 조선족 자신들조차도 남한에 혈연,특히 이름깨나 난 혈연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문화혁명 당시에는 이런 꼬투리만 잡혀도 호된 투쟁을 받았다.남한에 혈연을 둔 것도 죄가되어 실제 곤욕을 치른 조선족들도 많다. 용정시 백금향에 들렀을 때 백금발전소 최몽필 문화잠장으로부터 생소한 이야기를 들었다.지금은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의 6촌 계수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발전소에 살면서 좀 떨어진 향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밥을 지어준다는 그 여인의 이름은 윤순옥(64).막상 만났더니 오랜 고생 탓인지는 몰라도 노쇠한 그늘이 역역했다. 그녀는 24살이 되던 해에 12살이나 더 먹은 박용태(함북 길주군 태생으로 72년 작고)의 후실로 들어왔다.후취 장가를 들 무렵 3살난 아들이 있었다.박용태의 부친은 박관일,박관세,박관선 3형제였는데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5촌이 되는 사람들이다.보학도 배우지 않았거니와 족보도 확인하지도 못한 나로서 그렇다 아니다를 논할 처지는 못 되지만,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방송국에 편지 부탁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박용태는 박정희 대통령과 군관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다.신사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형제분이 찍은 사진이었다.밤이면 이불 속에서 사진을 보이면서 박정희라고 이야기 할 때 그녀는 모골이 송연했다.그때만 해도 적국의 대통령과 인척관계가 된다는 사실만이라도 감옥 밥을 무던히 먹을 죄였던 것이다.벽에 걸어둔사진틀 뒤에 몰래 보관하고 집식구들끼리만 돌려 보곤 했다. 그러다가 문화혁명 시기에 우연히 사진이 치보주임 최홍운씨의 눈에 띄었다.최 주임은 박정희라는 것은 몰랐지만 해방전 박용태의 신사복차림을 보고는 소각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귀띔해 주었다.그러나 박씨는 사진을 농속에 깊숙히 감추어 두었다.만약 당시 최주임이 고자질을 했더라면 박정희와의 관계는 뒤로 제쳐놓고도 투쟁을 받았을 것이다.1972년 박씨가 세상을 뜨자 사진을 불살라버렸다. 한중수교가 이루어 진 후 일가 친척 없이 고독하게 살아온 그녀는 한국 KBS사회교육방송국에 친척을 찾아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냈다.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과 친척이라고 선을 달아 줄 것을 요구한 편지가 꽤나 된다면서 그녀의 혈육을 찾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했다.사회교육방송국에서 종종 보내온 책자와 편지를 지금도 보배처럼 보관중인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 『령감은 고생만 하다 너무 일찍 가셨디요.기런 북새통을 살다보니 박대통령 사진도 못 남겼수다.다가저의 불찰이디요.저는 박씨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라 남이라면 남일테지만….자식들한테 혈육도 모르고 지내게 하는 거이 가슴 아픕네다』 그러나 두만강을 사이 두고 한동안 친선을 유지해온 중국과 북한은 사정이 달라 혈육간의 왕래가 비교적 잦았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의 방승섭(68)은 여기서 김일성주석으로 호칭하는 그의 처형 아들이었다.다시 말하면 김일성주석의 본처 김정숙의 언니가 바로 방승섭의 모친이다.70년대 초 두 나라 정부에서 교섭하여 방승섭부부,어머니,두 아들과 딸하나를 데려갔다.1986년 대소과수농장의 관치성농장장은 조선을 방문하는 기회에 청진시 칠세대에 사는 방씨 댁을 찾아갔다.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후한 접대를 해주었다.방씨 부인은 3년 전에 대소과수농장을 찾아온 적도 있다. 용정시 지신(일제시기 화룡현 다라즈)의 출신이고 항일투쟁에 차가했다가 현재 조선인민군에서 장군이 된 김광협의 친척들은 50년대와 60년대에 북한으로 이주했다.김광협의 7촌 조카 김상호는 1946년 참군하여 조선으로 나간 후 소련 유학을 하고돌아와 조선인민군 공군 부사령이 되었다고 한다.김상호는 어머니와 일가친척을 모두 모셔갔다. 연변에 살던 김광협의 친척들은 소작농으로 가정 살림이 째지게 가난했다.세발의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살림인지라 김광협의 동생은 한쪽 눈이 먼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동생 일가가 평양에 도착하던 날 김광협은 처 유명옥과 함께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제수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참 딱했을 것이다.그런만큼 그는 제수를 끔찍히도 아꼈다고 한다.순 농군으로부터 국가 간부가 된 동생은 처하고 불화했는데 그 일 때문에 형님한테서 모진 꾸지람을 들은 다음부터 가정화목을 지켰다는 것이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노인들의 이야기다. 김광협의 6촌 형님 김병협은 북흥촌 이기희씨의 고모부이다.그 이씨가 회령 사탕공장에 있을때 들었다는 이야기는 김광협 일가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그러네까 64년도 일입네다.김광협 6촌형의 딸,내게는 고종사촌 되는 누이가 두만강을 건너 평양 갔다 오는 걸음에 우리집에 들렸댔습네다.그 고종4촌 말이 김광협 집 앞대문엔 보초가 다섯이나 서 있더라고 기래요.삼촌을 집에 모신 김광협은 아침 문안을 꼭 드리고 식사도 독상을 대접하더랍데다.김광협은 식구들과 식당칸에서 밥을 먹으면서 요리가 나오면 모처럼 온 조카딸에게 연신 넘겨주었다는 거디요.조카딸도 화룡영화관 해설질을 하던 남편과 함께 나중에 평양으로 불러들였디요』 ○남북 오누이 극적 상봉 그러한 북한과의 일변도 왕래가 변화를 일으켜 딴판을 맞고있다.중국의 조선족은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남쪽의 혈육과도 정을 통하게 되었다.두만강을 훌쩍 건너는 것보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우회하는 먼거리에 남한이 있을지라도 무척 가까워졌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의 일이다.중국 조선족 한 분은 북과 남에 사촌형제들이 있다.그해 북에 건너가 4촌 여동생한테 남에 사는 형한테서 온 편지를 전했다.편지를 받아쥔 여동생은 흐느껴 울었다.얼마나 그립던 오빠였던가!여동생의 남편은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되어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분은 얼마있다가 남한의 사촌형님 집으로 갔다.형을 만난 그는 깜짝 놀랐다.형님이 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6·25전쟁 당시 국군에 있었던 형은 어느 한 전투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소경이 되었다는 것이다.어찌 보면 매부의 총에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타의에 의해 혈육간에 살생을 해온 우리 민족처럼 뼈에 사무치는 한을 가진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분은 여동생과 형님이 중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그러자 형님은 『소경인 내가 볼수도 없는 신세이고 만나면 여동생한테 서러움만 더 줄것이니 친척 동생더러 대신 가서 만나라』고 했다.결국 친 오누이의 만남은 무산되었지만 다른 혈육이 중국에서 뜻깊은 눈물의 상봉을 가졌다.그들은 만 한달간 한 집에 머물면서 한 많은 회포를 풀었다.그래서 두만강가는 이래저래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모양이다.
  • 서울신문 오늘부터 지면 대혁신

    ◎국책·국론 올바르게 이끄는 정론지로 세계화 뒷받침 서울신문이 2월15일자부터 지면을 대혁신,최고의 정론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오해로 광복 50주년과 함께 창간 50돌을 맞는 서울신문은 21세기를 앞두고 무한경쟁에 돌입한 변혁과 창조의 국제질서속에서 일류국가건설에 도전하는 우리사회의 노력을 뒷받침하고 각분야의 경쟁력강화를 위한 창조적 언론의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정부와 국민사이 교량역/「국정 어떻게 돼 갑니까」「정책 이렇게 바뀌었다」「물어보세요」「한국의 신관료」 새봄 연재 「국정 어떻게 돼갑니까」=정부 각부처를 순방취재,주요시책의 입안과정·내용 및 추진상황을 알리며 1주 1·2회 게재. 연중기획으로 나라살림을 이해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정책 이렇게 바뀌었다」=국민생활과 관련된 정부정책·규칙 등이 바뀔 경우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사설」=사설을 1일 3건 원칙으로 확대,세계 중심국가건설의 새역사창조와 민주주의 토대위에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적 소명에 맞춰 서울신문의 주장과 의사를 펼칠 것입니다. 새 연재 「한국의 신관료」=개혁과 세계화로 크게 변모하는 관료상을 집중조명, ▲달라진 의식 ▲근무형태 ▲꿈과 애환 등을 그립니다. 새봄에 연재할 계획입니다. ◎초일류 고급지로 재탄생/사설 1일 3건 체제로/「오피니언 페이지」 신설·해외논단 확대/「사람·일·사람」 2개면으로/「뉴스라인」 신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독자페이지」에 세무·법률·교육·병무 등 일상생활속의 민원행정에 관련된 의문사항을 게재,각부처 관계자를 통해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피니언 페이지」 신설=유력 일간지 및 전문지에 게재된 해외석학의 논평·기고·평론을 「해외논단」에 싣고 주요 사회 현안 및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소개하고 찬반논평은 「쟁점」으로 다룹니다. 「사람·일·사람」 2개면으로=국내외의 주요인사의 행보는 물론 외교가 소식,각 부처 장관등의 일정을 소개하며 「한국에 산다」(월1회)「향토에 산다」(월3회)를 게재 합니다. 「뉴스라인」 신설=정치·경제·국제뉴스면에 「뉴스라인」란을 고정배치,그날그날의 빠뜨릴 수 없는 정보를 메모형식으로 보도 합니다. ◎세계화 적극적 뒷받침/「아태뉴스」 「중기페이지」 신설/해외특파원망 확충/세계 일류 중기·일류상품 소개 「아태뉴스페이지」 신설=역도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경제성장과 정책변화·화제의 인물을 소개, 교역과 민간교류에 기여코자 합니다. 「중소기업페이지」 신설=모범중소기업을 찾아 경영비결·활동상황을 소개하며 저우와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고충을 전하는 「중소기업인의 발언대」를 마련합니다. 「세계 일류중소기업·일류상품」 신설=세계 일류중소기업의 경영비결과 그들이 만들고 있는 일류상품을 소개, 우리 중소기업의 세계화와 나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해외특파원망 확충」=워싱턴과 북경에 특파원 1명씩 보강하고 방콕에도 1명을 새로 내보내 국제정치의 추이, 새로운 문화 흐름은 물론 무역분쟁문제, 첨단과학기술 개발현황을 심층보도할 것입니다.
  • 국내 최초로 디자이너 로열티 받는/한일합섬 디자인 총책 홍미화씨

    ◎“국적있는 우리의 옷 만들기 주력” 『패션 디자이너는 독립적인 디자이너로서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창작에 쏟는 열정과 작품성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봅니다.업체브랜드와의 협력체제가 바로 그 방법이라는 생각이에요』 지난해 7월 프랑스 파리의 벵센숲에서의 개인컬렉션과 12월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의 컬렉션등을 통해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성으로 주목의 대상이된 디자이너 홍미화씨(39).최근 국내최초로 디자이너 로열티를 받고 업체브랜드의 디자인 총책을 맡게 돼 다시한번 패션가의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주)한일합섬과 계약을 체결,여성기성복 「레주메」의 디자인 기획을 도맡고 내년 봄·여름 부터 「레주메 위드 미화 홍」이라는 상표로 생산 판매하게 됐다.홍씨는 3년 단위의 계약료와 연간 기획추진료를 받고 매출 이익에 따른 로열티를 받게 된다. 지난 87∼93년까지 7년간 (주)데코의 「텔레그래프」브랜드를 성공적으로 키워내 패션계의 화젯거리를 제공한 장본인인 그는『준 월급제였기 때문에 성격이 다르다』고 밝힌다. 홍씨는 또 외국에는 자국 디자이너의 재능을 대기업의 자본력으로 지원,대중들에게 디자이너의 창작 이미지를 전달시키고 국제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조인트 비즈니스」방식이 보편화돼 있다고 설명한다.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 모두「바다냄새」만 나는 옷들로 가득해 「도대체 한국의 옷은 어디에 있나」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외국브랜드가 홍수처럼 밀려오고 한국브랜드마저 외국브랜드를 그대로 흉내내는 현실에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국적있는 우리의 옷을 입게 하고 싶은 것이 제 바람입니다』 「레주메…」기획준비와 이달 중순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95 봄·여름 컬렉션 준비가 겹쳐 이틀에 한번은 밤을 샐 정도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 홍씨는 이번 파리컬렉션 주제를 「정보중심의 사회에서 찾아내는 인간의 따뜻하고 그립고 반가운 마음」으로 정했다.
  • 간행물윤리위,청소년에 권하는 책 선정

    ◎「도도새…」·「강화도」·「생각연습」 등 30종 발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이원홍)는 9월「독서의 달」을 맞아 청소년에게 권하는 책 30종을 뽑아 최근 발표했다. 각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은 선정도서들은 문학·역사·교양·어린이등 9개 부문에 걸쳐 고루 들어 있으며 번역서가 9종 포함됐다. 또 청소년들이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도록 초·중·고·대학생및 공통으로 독자층을 구분했다. 뽑힌 책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실험 관찰 이야기(김기명 지음·산하 간)▲사각형의 세계(플로라 니카씨오·서광사)▲자전거 여행(박혜강·대교)▲아빠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1∼2(이종훈·현암사)▲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손춘익·웅진출판) ◆중·고생▲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들(정채봉등·동쪽나라)▲북한산성(조면구·대원사)▲강화도(이형구·〃)▲교실 밖 생물여행(윤소영·사계절)▲화석·지질학 이야기(장순근·대원사)▲역사로 읽는 우리과학(과학사랑·아침)▲세상에 홀로 서는 너희들에게(마리언 에델만·김영사)▲열한살 알피니스트가 준 선물(김태웅등·새길) ◆중·고·대학생▲민들레 꽃(서정주·정우사)▲재미있는 국악 길라잡이(이성재·서울미디어)▲여섯 색깔 생각의 모자(드보노·한울)▲생각연습(◎)▲유쾌한 구두쇠들(공병우등·석필) ◆고·대학생▲훈훈한 사랑이 그립다(문길상·마음)▲절로 가는 마음(신영훈·책만드는집)·논리 경험주의:그 시작과 발전과정(요르겐센·서광사)▲중국을 넘어야 한국이 산다(최필규·한국경제신문사)▲경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레스터 서로등·까치)▲오타벵가(필립스 브래드포드등·고려원)▲100년후,그리고 인간의 선택(조너선 위너·김영사)▲절망이란 없다(셸번 콥·고려원미디어) ◆공통(학생및 일반인)▲하늘의 문(이윤기·열린책들)▲회사가 뛴다(이승호·비전)▲미래를 조각하는 아이들(문화일보 국제부·김영사)▲한국인과 일본인 1∼4(김용운·한길사)
  • 자유의 여신상(세계의 명소 걸작 건축감상:1)

    ◎명지대 4교수가 펼치는 공간미학의 새장/“여기가 신세계” 아메리카의 상징/횃불·독립선언서 든 높이 93.5m 청동상/3백개의 구리판 조립… 내부엔 계단 만들어 「왕관」까지 올라갈수 있어 한달이 넘도록 걸린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에 사람들은 몹시 지쳐있었다.9월의 어느날 새벽,일찍 일어나 뱃전에 나섰던 사람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에 익숙해졌던 이들의 눈에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가을 새벽의 찬 기운을 피해 아직껏 선실 침대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뛰어나와 소리를 친다.『미국 땅이 보인다! 이제 다 왔다!』『오 하나님,감사합니다!』 지금주터 1백년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을 실은 배는 느린 속도로,그러나 확실한 방향을 잡고 뉴욕만에 들어서기 시작한다.안개속으로 희미하게 녹색의 육지가 보인다.저 곳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자유와 번영의 미국땅이다. 뱃머리에 서 있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저 앞에 환한 불이 보여요』 수평선 너머로 가물거리며 불빛 하나가 떠오른다.사람들은 고개를 빼들고 그 불빛을 바라본다.이탈리아 시실리섬 언덕 위 등대에도 저런 불이 있었다.밤새 고기를 잡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으레 보던 불빛이었다.새삼 영원히 떠나온 고향이 눈이 시리도록 그립다. ○불서 만들어 선물 멀리 보이던 불빛이 점점 커지더니 모양이 뚜렷해진다.바로 횃불 모양이다.그리고 횃불을 추켜 든 손과 팔뚝이 보이기 시작한다.조금 더 시간이 지나며 사방은 점차 밝아지는데,수평선 위로는 고전적으로 잘 생긴 거대한 여신의 머리가 떠오르고,이윽고 전체 모습이 보인다.오른 손에는 횃불을 추켜들고 왼 손에는 석판을 들고 우뚝 서 있는 청동색의 여인 조각상.바로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다.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들고 시내산을 내려오는 모세의 경건한 모습과 인류에게 불을 선사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결연한 모습으로,긴 항해에 지친 유럽의 이민자들에게 신세계 미국의 자유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뱃전 난간을 잡은 이탈리안(혹은 폴란드인·아일랜드인·스웨덴인일 수도 있다)이민자들의 손에 새삼 힘이 주어진다.뿌리뽑아 나선 삶에 대한 불안을 누르고 새롭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이들의 가슴 속에서 손끝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이렇듯 지난 1백년간 1천7백만명의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신세계 미국의 첫 인상은 자유를 상징하는 청동빛의 거대한 여신상과의 극적인 해후였던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이토록 미국적인 것이지만,사실은 이것이 프랑스가 미국 독립 1백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 여신상을 미국에 선사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실제로 이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복권과 디너파티를 통해 모금된 자금으로 파리에서 제작된 후 뉴욕으로 옮겨진 것이다.그러나 이것의 받침대는 미국내의 자금으로 뉴욕에서 만들어졌다.요즈음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국제협력,국제분업의 고전적 모델이라 할까. 자유의 여신상의 제작자는 바르톨디라는 프랑스의 젊은 조각가였다.그는 1871년 뉴욕을 방문,뉴욕만 한가운데 위치한 조그만 섬을 발견하는데,그 위에서 횃불을 추켜든 채 우뚝 서있는 자유의 여신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파리로 돌아온 그는 1875년에 거대한 여신상을 디자인하기 시작한다(높이 93.5m 당시 세계 최고).그 재료와 구성방법으로는 철골구조 위에 두드려 얇게 편 구리판을 씌우는 방법을 채택했다.당시 널리 쓰이던 청동이나 석재를 사용한다면 비용도 비싸거니와 나중에 미국으로 가져가기에 너무 무겁기 때문이었다. ○석고로 먼저 제작 여신상 내부에서 구리판을 붙잡아 줄 철골구조의 설계는 당시 파리 에펠탑의 제작자로 잘 알려진 철골구조 설계 전문가인 에펠에게 부탁했다.에펠은 우선 받침대에 견고하게 고정될 철제 중심탑을 세우고 여기에 여신상의 대체적 윤곽을 이루는 철제 트러스를 연결한 후,마지막으로 탄력성 있는 쇠막대기를 써서 트러스와 구리판을 잇게 된다. 여신상은 모두 3백조각의 얇은 구리판으로 이루어져 있다(두께 2.4㎜).이 구리판의 제작과정이 무척 재미있다.우선 석고로 여신상의 모양을 실제 크기로 제작한다.다음으로 이 석고상 표면을 따라 석고상의 모양을 정확하게 복제하는 목재 틀을 만들어야 한다.그런 후 이 목재 틀을 떼어내서,틀 안쪽에 구리판을 대고 두드리면 원래 석고상의 표면 곡선을 그대로 지닌 구리판 조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이 3백개의 구리판 조각들은 서로 조금씩 겹치게끔 되어 있었는데 이 겹치는 부분을 리벳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였다. 여신상은 1885년에 제작이 완료되어 철골구조 따로 구리판 따로 모두 2백10개의 컨테이너 상자 속에 넣어진 채로 뉴욕에 도착한다.이것들의 조립에만도 1년이 걸려 마침내 1886년 제작을 시작한지 11년 만에,미국 독립 1백주년에서 10년이 늦게,자유의 여신상은 뉴욕만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백여년이 흐른 오늘도 자유의 여신상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여신상 내부에는 중심기둥을 돌아올라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 사람들이 여신상의 왕관까지 올라갈 수 있다.7개의 대륙과 대양(아시아·아메리카·유럽·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태평양·대서양)을 상징하는 대못이 있는 왕관은 25개의 창문이 있어 한번에 30명이 들어갈수 있는 전망대로 쓰이고 있다. ○왕관에 25개 창문 물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1백년 전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천지를 찾아 온 유럽의 이민자들이 느꼈던 감동을 느낄 수는 없다.이들에게 있어서 자유의 여신상은 그저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에 가 봤다』라는 이야깃거리 구실을 줄 뿐이다.그렇지만 이들의 할아버지·할머니 중에는 이 자유의 여신상을 처음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그 눈물로 말미암아 오늘의 젊은 관광객은 고급 카메라를 목에 건 채,선글라스에 울긋불긋한 남방셔츠에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자유의 여신상 계단을 한가로이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영국에서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을 실은 메이플라워호 이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위대한 국가의 상징으로 남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들고 서 있다.한국의 심장부 서울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자유를 그린다.궁핍으로부터의 자유,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공해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삶에지쳐 낙심될 때 눈을 들어 쳐다보며 다시금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서울의 자유의 여신상」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 어린이·성인대상 교양프로 강화/EBS 29일 가을개편

    교육방송이 오는 29일부터 TV와 라디오의 가을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한다. 이번 프로그램 개편은 기존의 어린이 프로그램과 청소년과 성인대상 프로그램을 신설·강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TV의 어린이 프로그램은 「만화영화­플란다스의 개」가 신설됐고 기존의 「꼬마 요리사」와 「언제나 푸른 마음」은 방송시간을 확대했다. 독서 프로그램인 「마음의 양서」,「TV 원예」,「그림을 그립시다」는 청소년과 성인들의 여가선용과 취미활동을 돕기위해 신설됐다. 또 「경제이야기」,「잠깐 환경정보」,「한국의 악기」도 성인들을 위한 교양 프로그램으로 새로 마련된다. 이와함께 「우리 가정 행복하게」와 「만나고 싶은 선생님」등 가족용 프로그램은 방송시간이 확대됐다. 한편 라디오 프로그램은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교육정보를 제공하는 「EBS 교육소식」이 하루 2번씩 방송되고 일요일 아침시간에 학생과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은 「TOEIC 강좌」가 신설된다. 한 주간의 문화계소식을 전달하는 「문화정보」를 비롯,「음악의 세계」·「국악 한마당」등문화 프로그램은 일요일에 집중편성됐다.
  • 김정일 「호칭」/「당중앙」→지도자동지→위대한 수령 격상

    ◎64년이래 총30여개… 「화려한 수사」 일색 「우리 당과 인민의 영명한 수령이시며 우리 모두의 운명이시고 자애로운 스승이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자주시대의 위대한 태양」「인류가 낳은 걸출한 영웅」….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에 이어 북한 정권 두번째 수장이 될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그에게 그동안 주어진 숨가쁠 정도의 길고 화려한 수사로 다듬어진 숭배의 호칭들이다. 세습후계자 김정일을 떠받쳐온 호칭은 30여개.김일성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붙인 그것을 시차를 두고 물려받거나 재가공해 덧입힌 호칭의 변화과정은 64년 김정일이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된 후계작업 30년 역사 그자체로,권력이양의 독도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2∼3년간 등장하기 시작한 「아버지」「수령」등의 호칭은 김정일에 대한 권력승계가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고 특히 김일성 사망 이틀째인 10일 북한 중앙방송에서 나온 「위대한 수령」이란 칭호는 현재까지 「별 무리없이」 북한 정권의 정점에 김정일이안착하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김일성대 졸업후 비공식적으로 후계자수업을 받은 김의 첫 직책은 당 조직사업부 지도원.이후 과장 부부장 부장을 거쳐 당 비서직을 맡게되며 이 직책에 맞게 73년까지 불리게 된다.별다른 수식어가 붙었다는 보고는 없다.62년 김일성이 어느덧 남한에서도 익숙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개인 우상화차원의 호칭을 처음 붙인 것에 비추어 볼때 당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권력정지 작업이 한창이었던 70년대의 대표적 호칭은 「당중앙」.김정일이 노동당의 양대 기둥인 조직및 선전선동 비서국을 장악한 73년 9월 당중앙위 제5기 전원회의 직후 처음 사용됐고 이후 80년대까지 가장 흔히 쓰인 호칭이다.그의 생일 2월16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75년에는 「유일한 지도자」가,77년에는 「당중앙」이 우세한 속에 「영명하신 지도자」「경애하는 지도자」등이 등장했다. 김정일에 대한 호칭이 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다.80년의 10월 제6차 당대회서 당정치국 상무위원과 당군사위 위원에 오른 3년뒤인 83년 2월 41회 생일을 계기로 「당중앙」대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자리잡았다.현재까지 보편적으로 쓰이는 이 호칭은 북한 주민들사이에 「친지동」이란 비꼬는 말로 쓰인다. 실제 김정일은 91년 12월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했음에도 8년전인 83년 5월 「최고사령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군의 영향력 강화를 의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호칭을 통한 미화는 「언어창작」을 넘어서 항일빨치산이 백두산의 나무에 새겨놓았다는 「구호나무」의 역사날조에 까지 이어진다.북한은 87년 「백두산에 광명성이 떴다.광명성(김정일 지칭)미래로 민족 존엄 떨치자」라고 새겨져 있다며 「위대한 영도자」라는 호칭을 썼다. 90년대에는 김일성에 버금가는 호칭이 등장한다.90년 12월 「인민의 운명을 책임진 혁명의 지도자」(노동신문)에 이어 91년 김일성과 동격임을 드러내는 「수령」호칭이 등장하나 미래의 수령이란 의미로 사용됐다.93년조선기자동맹 제7차 대회서 현재를 나타내는 「영명한 수령」으로 표현됐고 올해 3월에는 조선대남방송에서 「주석」으로,5월에는 평양방송에서 「두분의 수령」「탁월한 수령」으로 나와 곧 명실상부한 권력이양이 이루어지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었다. 「수령」과 같은 카리스마조작 비중을 갖는 「어버이」도 최근 2∼3년전부터 두드러진 호칭. 「오늘은 오실까 우리어버이/내일은 오실까 김정일 동지/우리를 키워준 어버이모습/한해가 다르게 그립습니다」 92년 북한이 보급한 「기다렸습니다」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그토록 기다려 왔다는 올해 52세 「어버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북한 인민에게 다가갈 것인지 궁금하다.
  • “개살구나무 구합니다”/백한이시인,묘목 애타게 수소문(식목일화제)

    ◎벚꽃에 밀려 현재 멸종위기/살구꽃 만발한 세상 만들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 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백한이씨(55)가 식목의 달 4월을 맞아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개살구나무」를 애타게 구하고 있다. 『동요에 나오는 「살구꽃」은 바로 이 「개살구나무」에서 피는 꽃입니다』 경남 의령군 대의면이 고향인 백씨는 『몇해전 고향마을의 국민학교를 찾았을때 활짝 꽃을 피웠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개살구나무 대신 벚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묘목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면 꼭 좋은 값을 쳐주겠다』고 개살구나무를 구하는 이유를 말했다. 『6·25나던 언저리에 고향을 떠났으니 그럴만도 하지요.예전에는 살구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는데…』 백씨는 『백방으로 알아봐도 그처럼 흔했던 개살구나무가 이제는 계룡산이나 지리산 중턱에서나 찾아 볼수 있다는 얘기만 들었다』면서 『당장 묘목이 없다면 내년 이후에라도 구할수 있도록 꼭 연락을 해줄것』을 당부했다. 그는 『해마다 봄이면 온나라가 온통 벚꽃으로 둘러싸이는 판국에 또 서울 어디엔가에 새로 벚꽃길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벚꽃은 왜놈꽃이고 살구꽃은 순수한 우리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멸종위기에 놓인 살구꽃을 살리는 일에 국민 모두가 앞장서 줄것을 당부했다.(02)644­4970
  • 내 욕심만을 위해 산 날들/지명관(시론)

    ◎이땅서 서로 아끼고 돕는 심성 키울때 요즘 나는 10대나 20대에 읽었던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때때로 펼치곤 한다.우리 선인들의 심성이나 사상을 찾아보고 싶어서이다.얼마전에는 이광수의 「유정」을 다시 읽었다. 조금 읽어나가다 주인공인 최석이 하얼빈에서 망명 조선인 R라는 소비에트장교와 만나는 대목에 부딪쳤다.R는 고국이 그립지 않느냐는 최석의 물음에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한다.「그 빈대 끓는 오막살이가 그립단 말인가,나무 한개 없는 산이 그립단 말인가,그 무기력하고 가난한 시기 많고 싸우고 하는 그 백성을 그리워한단 말인가…」하고 R는 흥분까지 했다는 것이다.최석은 이에 대해서 「나는 R를 괘씸하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버린다는 조국을 위해서 가슴이 아팠소」라고 편지에 적고있다.우리는 이러한 글속에서 「유정」을 쓰던 1930년대 초에 이광수가 우리나라 우리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지배하의 조국에 대해서 그가 그처럼 어둡게 느낀데 우리도 공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여기서 나는 「유정」을조국탈출기 또는 유민문학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나라 우리땅에 대한 이처럼 어두운,말하자면 부정적인 이미지란 물론 이광수 개인에게만 한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어떤 의미에서는 일제하의 거의 모든 지식인의 심성에 깃들어 있던 「조선」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후 우연히도 조선실학의 한 선구자 이중환(1690∼1752(?))의「택리지」를 읽게 되었다.이 「택리지」는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뛰어난 인문지리서로서 조선조말까지 양반계층 사이에서 아주 높이 평가되고 널리 애독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오늘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있는 것은 이 「택리지」의 결론이다.한번 사대부가 되면 이땅에서는「거의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다」(태무소용기신)는 것이다.몸담고 살아갈만한 고장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이나라 이땅에 대해 대단한 부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거야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조가 크게 피폐해져 몰락했으며 이중환도 유배를 당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중환이 「사군자가 뜻을 가지고 거처할 땅」을 찾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말하자면 그는 유교적인 의미에서 이상향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향을 찾는 맑고 아름다운 이상주의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그런 이상향을 가졌기 때문에 보다 나은 것을 찾아서 전진하고 진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또한편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긍정하고 만족하기 보다는 불만을 품게되는 것이 아닐까.자족할줄 모르는 사회에 안정이란 없다. 그러한 이상이 실현된 땅으로 우리는 흔히 우리보다 앞섰다는 나라들을 주목해온 것같다.그것이 옛날에는 중국이었고 근대에는 지배를 받으면서 저항한 일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이었다.그러니까 특히 지식인들은 앞서있는 다른나라와 비교해 우리의 현실을 비판해온 것이라고 보인다.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신라시대의 도당 유학생이래의 전통일는지 모른다.그 나라들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가치가 결여돼 있다고 여겨온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들의 가정을 그려본다.우리는 여기에서도 남의 가정은 이런데 우리집은 왜 이러냐고 떼를 쓸 것인가.남은 큰 집에서 여유있게 사는데 우리는 오막살이에서 된장찌개만 먹는다고 투정을 할 것인가.사실은 모두가 오순도순 주어진 능력과 환경과 기회속에서 서로 아끼고 나름대로 힘을 다하면서 가족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거기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것이 마을살림이나 나라살림의 이상이 아닐까 하고 나자신도 되돌아다보고 싶어진다. 새날 새아침에 나는 지난해말 어느 소극장 콘서트에서 들은 젊은이들의 노래를 되새기고 있다.『지난날에는 나만 자유스러워지려고 했다.내 욕심으로 살아왔다.그러나 그것은 슬픈 날들이었지 않는가.이제는 그것들은 뒤로 돌리고 앞으로 찾아오는 날들에 있어서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리』라고 열창하는 것이었다.어떤 뜨거운 감격같은 것이 조그만 극장에 물결치고 있었다.
  • 선열 돌아오다(외언내언)

    1945년 상해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중 한 분이 비행장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엎드려 고국의 흙에 입맞춘다.얼마나 그립고 잊지못했던 고국의 땅인가.「흙 다시 만져보자」의 그 감격·감동은 해외망명생활을 끝내고 환국하던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공통된 심정이었으리라.그러나 수십년간 망명지에서 풍찬노숙(풍손노숙)의 신고끝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못한채 눈을 감은 선열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1920년대 독립단체의 통합을 주도했던 석주 이상용선생은 32년 74세로 운명하면서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옮겨가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비록 이국땅에서 순국을 했지만 광복된 조국땅에 한 줌의 흙으로라도 돌아오기를 독립선열들은 한결같이 바랐을 것이다.그 비원이 이루어져 지난 8월에는 박은식선생등 임정요인 다섯분의 유해가 상해에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독립유공자 묘소확인작업을 추진중인 보훈처는 최근 중국 길림성에서 무장독립단체인 국민회군 부사령관을 지낸 안무선생등 10위의 묘소를 확인했다고 한다.이들 묘소는 한결같이 억새풀이 무성한 초라한 무덤이었다.이들 독립선열의 유해도 유족과의 협의를 거쳐 곧 고국에 봉환할 예정이다.또 미국에서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러시아에서 김공집선생의 유해를 연내에 봉환키로 했다.서박사의 유해는 필라델피아의 한 납골당에 안치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해방후 올해까지 해외에서 봉환해온 선열의 유해는 모두 28위.현재까지 해외에서 묘소의 소재가 확인된 것은 32위에 불과하다.더많은 묘소를 찾기위해 노력해야 할것이다.그동안 우리는 해외 독립선열들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던게 사실이다.묘역을 파악하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제 내후년이면 광복 반세기를 맞는다.더이상 이역땅에 우리 독립선열들의 유해가 외롭게 묻혀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 창을 위한 기도/박정자 연극배우(굄돌)

    나는 소원이 그다지 많지 않다.보석반지·좋은 집·좋은 옷·좋은 차….그런 종류의 소유욕은 나와 철저히,구체적으로 무관하다.내가 가지고 싶은 게 정말 있다면 그건 창이다.나무로 된 작은 창. 나는 자라면서 내 방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그러니 「창」이란 건 언감생심이었다.그 창을 나는 시집 가서 처음 가져봤다.우리 부부의 방은 별채 윗층에 있었는데 여름엔 해를 머리에 인 것처럼 뜨겁고,겨울에는 석빙고보다 더 추웠다.그러나 방안으로 감나무 가지가 쳐들어올 듯하고,하늘과 청정한 공기의 냄새가 밀려오는 그 창 때문에 그 여름과 겨울을 나는 견딜 수 있었다.나는 가지를 자를 생각도 못하고 내 창으로 들어온 나뭇가지를 그립게 맞이하곤 했다. 1년이 지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베란다가 달린 내 문간방에서는 더이상 해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꼭 커다란 창을 원하진 않았다.그러나 아무리 작아도 해가 지는지,비가 오는지,눈이 오는지만을 알기 원했을 뿐이다.「웬일이세요 당신」을 할 때도 그랬다.충분히,실컷 가져보지 못한 창을 무대에서라도 가져보고 싶었던 나는 무대미술 하는 이에게 부탁해 창 하나를 얻었다.연극 속에서 독백을 하는동안 괴로운 상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창 때문이었다.창은 나의 기도였다. 그리고 다시 논현동의 한 단독주택으로 이사왔다.시부모님이 안방을 쓰시고,아이들은 방 하나씩 써야 하니까 우리 내외는 반지하로 밀려났다.남향으로 반듯하게 나 있는 창을 가지고 싶은 것 뿐인데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아직도 나는 내 창 하나 없구나,인생 참 헛살았다.실망이 지나쳐 거의 비관적이었다.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자 내 안의 파쇼가 폭발했다.고3때나 저희들 위해 방을 내줬지.얼마전 집수리를 하면서 나는 남편과 아들을 한 방으로 몰고,딸 아이를 조금 환한 방으로 옮겼다.그리고 나자 딸이 쓰던 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나는 감격했다.북향이었지만 그 창으로 보일 건 다 보였다.가끔 조그만 외등이 달려 있는 대추나무엔 새도 와서 울었다. 나는 나의 창밖에 제라늄 화분도 줄줄이 늘어놓고 싶다.그건 내 마음의 창이다.창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위로받을 길 없었던 나는 이제서야 바람이 통하는 내 마음의 통로를 얻었다.나혼자 좋자고 남편과 아들을 지하실 속에 처박았다는 가해자 의식과 함께.
  • “추억을 생생히” 비디오카메라 인기/초보자 수칙

    ◎안정된 자세로 순광촬영을/한커트에 6∼7초 적당 본격적인 나들이철이다.예전에는 가족·친구들과의 즐거운 한때를 카메라로 담았으나 요즘은 생생한 목소리와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재생,살아 움직이는 추억을 만들수있는 비디오 카메라가 큰 인기다. 그러나 70·80만원이상하는 비싼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해 놓고도 다룰줄 몰라 즐기기 위한 기계가 아니라 부담만 되는 기계가 되기 쉽다. 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비디오카메라는 크게 나누어 3가지 형태.가정용비디오 테이프가 들어갈 수 있는 VHS형과 이를 컴팩트형으로 처리한 VHS­C형,그리고 가볍고 소형인 8㎜형등인데 고유모델에 따른 종류만도 60여종에 이른다.비디오카메라는 촬영기능이 뛰어난 것과 편집기능을 강화한 것이 있다.후지를 선택하는 것이 초보자에는 유리하다.또 구입후 어느정도 실력이 쌓였을 때 자신의 의도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수동·자동 겸용을 택하고 VHS방식보다는 이동하기에 편리하고 다루기 쉬운 8㎜형이 좋다. 촬영할때 초보자가 유의해야 할점은 바로 촬영계획을 세우는 것과 화면에 안정성을 주는것.대부분의 초보자들은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마구 찍어대 화면이 흔들릴 뿐 아니라 아까운 필름도 버리기 십상이다. 한국영상작가협의회 조성율회장이 일러주는 초보자의 촬영요령은 다음과 같다. ▲화면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한 장소에서 고정촬영을 해야한다.또 피사체를 렌즈에 맞춘다음 한 커트(레코딩 버튼을 눌렀다가 놓을때 까지의 동작)씩 끊어서 찍어야 하는데 커트당 6∼7초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이때 안정된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뒤 오른쪽손은 카메라그립부분을,왼손바닥은 카메라의 밑바닥에 대고 받침대 역할을 해준다.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포커스링을 돌려주면서 초점을 맞춘다.카메라가 가볍다고 한손으로 촬영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양쪽 팔꿈치를 몸통에 딱 붙여 카메라를 보듬켜 안듯이 잡는것도 잊어서는 안될 사항.비디오카메라 전용 삼각대를 사용하는 것도 초보자에게는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의 카메라에는 망원렌즈(줌)가 장착돼 있으나 되도록 표준렌즈만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망원렌즈를 사용하면 화면이 4배이상 흔들리기 때문.화면구도와 크기에 변화를 주고자 할때는 한 커트 찍을 때마다 카메라와 피사체 거리를 조절해 찍도록 한다. ▲자동초점장치도 대부분의 비디오 카메라 기능에 들어있지만 정확하지가 못하다.초점맞추기는 되도록 사용설명서를 잘읽고 수동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광은 피해야 한다.피사체 뒤쪽에서 강한 빛을 비추는 것은 화면이 딱딱해 보이고 피사체가 어둡게 나올 수가 있으므로 피사체가 햇빛을 바라보는 위치(순광)에서 촬영해야 한다. ▲편집은 가정용 VTR과 비디오 카메라를 연결,촬영한 장면중 필요한 부분만 의도한 시나리오에 따라 테이프에 담는데 편집은 어느정도 고수준의 기술을 요하므로 기본적인 강습을 받은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 각 백화점과 언론기관의 문화센터에서 비디오촬영강습 프로그램을 마련,인기가 높다.대부분 주1회 3개월 과정으로 5만∼6만원의 부담없는 수강료를 내고 배울 수있다.또 강습을 같이 받은 수강생등이 모여 동호회를 구성,야외촬영행사와 작품전 개최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무료 강좌를 실시하기도 한다.비디오촬영강습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는 문화센터및 동호단체를 소개한다. 현대문화센터 547­2233(본점),552­2233(무역센터점).신세계문화센터 984­1234(미아점),224­1500(천호점).진로문화센터 587­3108.새마을 연수원 (0342)701­6901∼7.수원하이웨이문화센터 (0331)39­5000.노원문화센터 933­9090.한신코아문화센터 978­1919. 한국비디오영상작가협의회 565­1418.한국비디오영상연구회 569­2621.세종비디오작가회 558­0430.신세계훼미리클럽 434­6983.한국비디오영상학회 564­0428.
  • 참스승의 길/김장호 수필가(굄돌)

    아지랑이에 실려오는 꽃소식이 화사한 햇살과 더불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문턱에서 지난날의 회상에 잠기게 한다.개구장이 골목대장들이 사회생활의 첫관문인 공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 교문을 노크하며 기쁨과 두려움 속에 꿈의 날개를 펴는 생기발랄한 교정이 그립다. 지난 학년말은 정부이양을 앞두고 터져나온 대입부정이라는 총체적 교육비리의 와중에서 현재의 교육제도를 재점검하라는 여론이 높았다.왜정말기부터 해방을 거쳐 지난 91년까지 평생을 초등교육에 헌신하고 정년퇴직한 필자로서도 충격이 아닐수 없다. 국가 백년대계인 교육을 뿌리째 흔든 교육비리는 교육의 양적 변화와 일부 학부모들의 그릇된 교육열,이에 편승한 왜곡된 교사들의 망국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수있다.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물고 교사가 되기는 쉬워도 참된 교육자가 되기는 어렵다.교사는 돈을 모르는 청렴결백한 선비여야 하고 도덕적으로 고매한 인격자여야 한다.또 사회에 규범적 사표라야 한다는 성직관을 가져야 한다.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정성과심혈을 기울이는데서 보람과 사명감을 느끼며 언행심사가 학생의 본이 되고자 정진하고 노력하는 자세야말로 참스승의 자세가 아니겠는가.교육은 내일을 위해 필요한 지식의 응용과 인생의 설계를 위한 사고와 논리를 키우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시켜 미래를 위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인물양성에 힘쓰는 것이다.인간은 교육의 산물이요 국가발전의 요체이므로 결국 교육은 정열을 가지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인생의 가장 근본적 사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한국창조를 목표로 새정부는 부정부패척결·기강확립·도덕성회복을 통한 생활정치구현을 당면과제로 제시했다.교육계도 전인교육·생활교육실천으로 유능한 인재양성이 시급하다.교육자들은 심기일전하여 철저한 생활교육,원칙을 지키는 질서교육,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공중도덕교육,깨끗한 청결교육으로 일상생활에서 합리성·근면성·인내성·친절성을 습관화시키는 민주시민의 자질함양 교육에 힘쓸 때다. 정부는 마지막 깃발인 사회적 존경마저 상실한 교육자들에게 빼앗긴 위광을 되돌려 주어 전문성에 투철한 스승으로 교육에 전념할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 콩심은데 콩나고…/이이자(여성칼럼)

    60을 바라보는 지금 3명의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고보니 나의 할머니·어머니가 유독 생각나는 것은 나이 탓인가? 올 새해에도 내가 지어준 한복을 입고 한껏 멋내는 손자 손녀의 모습에서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서 나의 어린시절을 기억해낸다. 4남1녀의 형제중 맏며느리이셨던 어머님은 5대봉사를 하는 종가집 종부로서 위로는 시종조부,증조모,시조모,시조부,시부모님과 아래로는 시동생들과 동서들이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의 살림을 맡아하셨다.하루 일과가 끝난후 작은 어머님들과 설빔이나 추석빔을 만드시느라 늦은밤까지 바느질하셨던 기억이 난다.옷만드는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되려고 그랬는지 어린 나이에도 내옷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졸음 가득찬 눈을 비볐던 것과,예쁘게 염색된 명주 두루마기에 아양까지 써서 동네 제일의 멋쟁이였던 일들이 떠오른다. 언제나 명절이 되면 나를 자랑스럽고 으쓱하게 해주었던 한복이 사실은 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가져오셨다는 혼수가 내게 대물려졌던 것임을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더욱 그립게 해주었던 유품이 되었다.한복 만드는 일에 전념하느라고 주부로서의 역할이 미흡했던 때에 어머니께서는 여름철마다 모시옷을 손질하셔서 사위에게 주셨고 그 옷을 애용했던 남편도 이제는 고인이 되신 장모님의 옷 손질을 그리워하곤 한다. 콩심은데 콩이 난다고 하던가? 한복을 아끼고 가까이 하는 마음이 어릴적 가족과의 추억속에서 생겨나고 내 아이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며 즐거웠던 기쁨이 이제는 손자 손녀들에게 옮겨가면서 옷짓는 일이 직업이 되도록 길러주신 분들이 생각되는 새해 아침이다.이미 출가하여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딸아이가 한복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어 의논의 상대가 되어주고 며느리 또한 곁에서 일하는 우리 가족이다.먼 훗날 내가 그랬듯이 내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한복을 사랑하고 보존시키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아이들의 맑은 눈빛속에 담아본다.
  • 정신력 나약한 아이들/김은희 성남 중앙국교 교사(교창)

    아이들이 나약해졌다고 한다. 몸은 비대해지고,정신력이 한없이 약해져만 가는 우리 아이들.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은 한 사람으로서 걱정이 앞서면서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그 옛날의 아이들이 그립다. 10여년이 훨씬 지난 78년,그해 봄부터 가물기 시작한 날이 7월 중순이 되도록 하늘은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다. 그때 내가 근무하던 경기도 강화는 전국에서 가뭄이 제일 심해 농사짓는 사람들의 가슴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모를 심을 수 없는 갈라진 논바닥을 보면서 내 마음도 무척 아팠다. 제헌절 휴일을 맞아 서울에 나와 있다가 그날 늦은밤에 빗소리를 들었다.너무 반가워 잠이 오지않아 다음날 새벽 첫차를 타고 강화로 달려갔다.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 그동안 모를 내지 못했던 논에 모심는 일이 급했던 실정이었다. 저학년은 가정 봉사를 하고,교사들과 4학년 이상 학생들은 들로 나갔다.동네분들이 선생님도 논에 들어가 모를 심으라 하신다. 어릴때부터 줄곧 도시문화권에서 자란 나에게 논에 들어가 모를 심으라니,당혹스럽고 겁이 났다.나이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 선생님과 4학년짜리 아이들도 논에 들어가 허리를 구부리고 열심히 모를 꽂는데 부끄럽기도 했다. 모를 심을 줄 모르면 못줄을 잡으란다.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선뜻 하겠노라 한 일이 거의 한주일동안 학구내 모내기를 다 할때까지 못줄 잡는 일은 내몫이었다. 그날 새참 먹을 때 부르튼 손이 아파 마음이 많이 상하였고,이런 일도 해야하나 하는 생각에 밥도 안먹고 돌아앉아 울었다. 그러다,재잘거리며 웃는 아이들을 보았다.흙탕물 논 속을 맨발로 뛰어들어 자신있게 모를 심는 아이들을 보면서 눌물이 쑥 들어갔다. 흙을 밟으며 싱싱하고 당당하게 자라는 저 아이들,내 작은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손이 부르트고,팔목이 무척 아프고,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린 그해 첫여름은 믿음직한 아이들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강화를 떠난 이후,거의 대도시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만나는 아이들은 너무도 약해보였다. 요즈음 아이들은 어려움도 모르고,참을성이 부족하며 겁도 참 많다.연필하나 깎을 줄 모르고,제일도 제손으로 잘 못하는 요즈음 아이들한테 어떻게 해야 어린이 다운 싱싱함과 당당함을 갖게해 줄 수 있을까….
  • 중기부도 “위험수위”/산업훈장 받은 MAI사 도산

    올해 수출의 날에 석탑산업훈장을 받은 유명 완구업체와 국내 굴지의 양식기 제조업체마저 잇따라 무너지는등 중소기업의 부도사태가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 29일 금융계 및 관련업계에 따르면 「그립볼」이란 아이디어 상품으로 올해 3천7백만달러 어치나 수출해 석탑산업훈장을 받은 MAI사(대표 이종식)는 최근 2억5천4백만원 상당의 어음을 막지못하고 부도를 냈다.
  • 외제품 밀물… 완구업계 “허덕”(업계는 지금…)

    ◎작년수입 4천2백만불… 중국산이 주종/전자작동 등 하이테크로 승부 걸어야 요즘 완구만큼 불황에 빠진 업종도 없다.봉제완구의 경우는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완구백화점에 가면 다섯개 중 하나가 수입품이다.웬만한 어린이 장난감은 「Made In china」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품이 많이 들어 임금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완구는 중국등 후발개도국에 밀려 경쟁력이 약화된지 오래이다.부가가치가 높은 금속이나 플라스틱완구는 업계의 영세성 때문에 기술투자를 못해 한계를 맞고 있다. 한국을 찾던 바이어들의 발길도 값이 싼 개도국으로 속속 돌아서고 있다.게다가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생산한 제품이 대거 역수입되는 양상마저 빚어지고 있다.지금부터라도 전자작동 완구등 고부가가치의 하이테크 완구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게 중론이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완구업계는 호황을 누렸다.미국서 인기를 끌었던 배추머리 인형이나,껴안으면 인형의 심장이 뛰는 「하트 투 하트 베어」가 우리 제품이었고 ET인형의 상당수도 OEM으로 수출한 한국산이었다. ○봉제 77개사 도산 이에 힘입어 국내 완구산업은 한때 세계 2위까지 올랐고 제조업체 수는 85년 5백1개에서 87년 7백23개로 늘었다.그러나 후발개도국의 추격이 본격화되자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90년에는 5백94개로 줄었다.봉제업체의 경우 87년 1백48개 가운데 절반이 넘는 77개가 문을 닫아 지금은 71개만 남았다. 국내 생산량도 87년 12억2천만달러에서 지난해에는 36%가 줄어든 7억8천만달러에 그쳤다.전체 생산의 80%를 차지하던 수출도 87년에는 10억7천만달러에 달했으나 올들어 11월까지의 실적은 3억8천8백만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국내의 완구수입은 88년 1천2백만달러에서 91년 4천2백만달러로 늘어났으며 올들어 11월까지도 4천7백만달러가 수입됐다.세계를 주름잡던 한국의 완구산업이 사면초가에 빠진 셈이다. 국산 완구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80년 18.8%에서 90년 8.1%로 떨어졌다.반면 중국완구의 점유율은 0.6%에서 45.3%로 높아졌다. 중국산 완구가 미국 시장을 휩쓰는 것은 외국기업들이 합작투자 형태로 중국에 진출,중·저가품 중심의 생산에 나선데다 중국정부가 완구산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적극 육성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완구업체는 대만기업 50개,일본 23개,한국기업 15개를 비롯해 모두 1천7백개나 된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워진 영업환경 속에서도 고유상표의 수출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성장을 거듭하는 업체들도 없는게 아니다. 대표적인 업체가 MAI.이 회사는 서구인들이 야구놀이를 좋아하는 데 착안,「벨크로」(일명 찍찍이)라는 접착성 섬유를 이용해 날아오는 공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그립 볼」을 개발,올해 3천7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성장업체도 많아 단일품목으로는 획기적인 수출기록을 세운 이 「그립 볼」은 현재 20여개국에 특허등록을 내놓고 있는데 국제적으로 유사품이 나돌 정도의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지난 「무역의 날」행사에서 올해의 최고 히트완구로 선정돼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항공기 탱크 로봇등 4백여가지의 정교한 모형완구를 생산하는 「아카데미 과학교재사」도 플라스틱 완구의 고급화를 통해 수출을 늘리고 있다.같은 품목을 생산하는 업체 가운데 세계적으로 5위 안에 들어 외국의 바이어들이 끈질기게 OEM수출을 요청하고 있지만 지금껏 1백% 자기상표 수출을 고집,올해 4백만달러 이상을 수출했다. 지난해 72억원의 매출을 올린데 이어 올해에도 80억원의 매출을 기록할 전망이다. 축소 모형기관차를 만들어 전량 수출하는 삼홍사도 독보적인 존재로 꼽힌다.취미수집용 모형자동차나 영화촬영에 쓰이는 정밀 모형기관차를 미국 일본 호주등에 수출,호평을 받고 있다.제품의 값이 비싸 개당 3천∼5천달러씩 팔리는데 비싼 것은 무려 1만달러에 달한다. 지난해 2천만달러어치를 수출한데 이어 올해 수출목표 2천2백만달러도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
  • 교통·주택공약으로 부동표잡기(대선 유세현장 1일)

    ◎매년 60만호 건설… 셋방 없앨터/김영삼/수도권 교통정비에 10조 투입/김대중/아파트 반값 약속 반드시 실현/정주영/“초중학교 완전급식”/이종찬/“한글세대 뽑아달라”/박찬종 ○미화원들 애로 청취 ▷김영삼후보◁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특별회견을 준비하느라 공식 유세를 하루 쉬었으나 틈틈이 새마을지도자·건물청소미화원 등을 만나 격려하는등 바쁜 하루. 김후보는 이날 새벽조깅을 마치고 곧바로 상도1동 사무소앞에서 조기청소를 하고 있던 동작구 새마을지도자 및 부녀회원 1백여명과 만나 『한국병을 고치고 신한국을 건설해 나가는데 새마을지도자 여러분이 적극 동참하길 바란다』며 지지를 호소. 김후보는 이어 여의도 대영빌딩으로 건물청소미화원들을 찾아 『여러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요 신한국인』이라고 격려한뒤 애로사항을 청취. 황정순씨(68)등 이들 미화원들이 『무엇보다도 희망을 갖고 살려면 우리도 내집마련의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자 김후보는 『집권하게 되면 매년 50만∼60만가구의 집을 지어 셋방을 없애고 집없는 설움이 사라지도록 하겠다』고 약속. 한편 민자당 김종필대표는 전남 광양·승주·곡성·영광등 취약지역인 호남지역을 돌며 당원단합대회및 간담회를 갖고 「고정표지키기」에 주력하는등 김영삼후보를 측면 지원. 김대표는 영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당원단합대회에서 『나의 외가인 호남이 어렸을 때는 항상 그립고 가보고 싶은 대상이었다』고 친밀감을 표시한뒤 『우리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지역을 내세우기 보다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한다』며 YS지지를 당부. ○“3당합당 배신행위” ▷김대중후보◁ 상오8시30분 서울 마포 당사에서 미국 민주당의 톰 포글리에타하원의원 일행의 방문을 받고 환담한뒤 상오11시 광명시민운동장에서의 연설회를 시작으로 안양·군포·의왕·과천·성남을 잇따라 돌며 이번 대선의 최대승부처가 될 수도권지역에서의 지지표 확산에 주력. 김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강한 톤으로 정부와 민자당의 실정을 공격하고 국민당이 제시하는 공약의 허구성을 비난한뒤 민주당의 개혁의지를 부각. 김후보는 광명유세에서 『3당합당은 국민을 배신한 반민주적 행위』라면서 『국민을 깔보는 부도덕한 사람은 반드시 낙선시켜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 김후보는 이어 안양시 비산동 운곡파출소에 들러 경찰관들의 민생치안노력을 위로한뒤 비산3동 사무소를 방문,일선 공무원들의 공명선거 노력을 당부. 김후보는 안양공설운동장 유세에서 최근 국민당 정주영후보의 「아파트 반값」공약이 서민층에 어느 정도 기대를 주고 있다고 판단한듯 『국민당의 주장에 솔깃한 여러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채권입찰제를 폐지하면 국민주택을 지을 수 있는 재원이 없어져 서민은 오히려 피해』라고 지적하면서도 『우리당은 땅값을 내리고 물량 공급을 확대해 아파트값을 내리겠다』고 비슷한 약속. 김후보는 또 의왕·과천·군포연설회에서 『수도권 주민의 최대 민원사항은 교통문제』라며 『집권하면 경부고속전철의 건설계획을 미루고 그 건설비 10조원을 수도권교통정비에 투입하겠다』고 지역공약. ○양김씨 싸잡아 공격 ▷정주영후보◁ 대선후보중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유세를 갖고 최근의 금권선거공방을 의식한 듯 민자당의 김영삼후보를 집중 공격. 정후보는 『민자당은 이번 대선을 공작정치로 몰아가고 있다』면서 민자당의 3대공작 내용으로 ▲국민당에 금권선거라는 낙인을 찍을 것 ▲정후보를 찍으면 결국 김대중후보가 당선된다 ▲아파트 반값공급등 국민당의 공약은 엉터리라고 매도하는 것이라고 주장. 정후보는 이어 『땀흘려 돈을 번 사람은 돈의 중요성을 알아 선거비용도 법정한도내에서 쓴다』면서 『그러나 양금후보는 30억∼40억원의 재산이 있다고 공개했는데 무엇을 해서 그것을 벌었겠느냐』고 공격. 정후보는 또 아파트 반값공급문제에 대해 『나는 절대 허튼 소리를 하지 않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국가나 국민이 필요로 하면 반드시 실천해 왔다』고 강변. ○권위주의 타파 역설 ▷이종찬후보◁ 하남·성남·과천·안양등 수도권지역을 차례로 돌며 깨끗한 정치풍토 조성과 권위주의 타파를 역설. 이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권위주의적인 풍토를 일소하기위해 「민관합동행정개혁협의회」를 설치하고 사법부의 독립과 공정한 검찰권행사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강조. 이후보는 교육문제와 관련,『아직도 도시락을 못싸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고 국교생이 14㎏이나 되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라고 지적하고 『집권하면 초·중학교의 완전급식제 실시와 6­3­3­4의 현행학제를 완전 개편할 것』이라고 공약. ○경북지역 공략나서 ▷박찬종후보◁ 유세시작이후 처음으로 대구·구미등 경북지역공략에 나서 서문시장을 방문한데 이어 대구시내 번화가와 구미역광장에서 노상연설회를 갖고 세대교체를 역설하며 지지를 호소. 박후보는 『양금과 재벌출신 정주영후보의 시대는 6공과 함께 막을 내려야한다』고 강조한 뒤 『한글세대 1기생인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깨끗한 시대를 열어가자』고 당부. 박후보는 이어 『지역감정이나 돈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국민을 모독하는 처사』라며 양금후보와 정후보를 싸잡아 공격.
  • 아이는 어른의 스승/김희수 청주대교수 문학평론가(굄돌)

    여러해 전에 졸업한 제자로부터 안부 편지를 받았다.캠퍼스가 그립고 1학년때 받은 첫작문 제목도 생각난다고 했다.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지내온 이야기며 오늘의 생활 형편들이 소개되고 있다.중학교 교사로서의 자신의 못난 구석도 하소연겸 털어놓았다. 요즈음은 더욱 선생으로서는 부족한 듯한 자신의 일상 생활을 반성하면서 아이들의 눈동자며 순박한 모습에서 교사의 자질을 발견해 가고 있다고 했다.평범한 이야기인듯 하면서도 섬광같은 한줄기 희열이 느껴진다. 편지를 읽는동안 텔레비전에서는 아이들 세계를 진단하는 좌담이 진행되고 있다.아동심리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진단하는 방법으로 몇 폭의 아이들 그림을 펼쳐놓고 설명하고 있다.어항속에 그려넣은 그림들이 특이하다.한가운데 상어 한마리가 있고 옆에는 그 상어에게 살점을 다 빼앗기고 뼈만 앙상한 고기들이 여러마리 그려져 있었다.그 상어는 그림 그린 아이의 심술난 상황이라고 어린이 자신이 직접 설명하였다.또 하나는 제목이 「벼락맞은 동생」이란다.형제를 그려놓고 크게 그려진 형은 웃고 있는데 그 옆에 작게 그린 아우모습은 새까만 칠로 뒤덮여 있다.형이 아우가 미워서(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벼락을 맞게 하고는 자신은 웃고 있다.또 하나의 예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그렸는데 아빠는 화난 얼굴이고 엄마는 웃는 얼굴이다.또는 엄마 아빠 둘 다 화난 그림도 보인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의 세계를 보면 아이들이 두려워지기까지 한다.아이들은 마음에 복선을 가지지 않는다.솔직담백하고 투명하고 미우면 미운대로 두려우면 두려운대로 표출한다.그러나 어른들의 세상은 겹겹이 연막을 치고 무장해 있다.이러한 사실은 충격적으로 터져나오는 사건을 보면 알게된다.겉은 얼마나 정상이고 평온한가.그러나 디져 본 속은 평온하고 깨끗하고 밝은 결과와는 정반대의 세계였다. 선생이 자기 가르침을 받는 그 학생들의 순수한 모습에서 진실한 참인생을 배우고 그들로부터 배운 것을 다시 그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역설같은 진실한 고백이다. 어른들끼리의 세계란 서로 친구간이라 해도 얼마나 답답한 구석이있는가.서로 싸우는 아이들의 사이보다 다정한 어른들끼리의 세계가 어느 점으로는 훨씬 적대적이다.
  • 정신대 원혼풀이 한마당/탑골공원서 진혼제 열려

    ◎정신대아리랑 가락에 눈물바다/“일,도덕적 차원 해결을” 한목소리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꽃다운 나이에 처참히 희생당한 20만명의 강제종군위안부들.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문화제 「정신대아리랑」이 17일 하오3시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 앞에서 열렸다. 『아버지!막내딸 순덕이가 돌아왔어요.집 나간지 55년만에 몸은 죽고 넋만 살아 돌아왔어요.때에 전 이불에 누워 황군에 짓이겨지면서도 아버지,아버지 울며 부르던 간절한 소리 들리지 않으셨나요.일장기 펄럭이는 위안소의 조센삐되어 성병에 폐결핵에 말라리아에도 끊어지지 않은 목숨이 서러워 어머니,어머니 부르던 그소리 들리지 않으셨나요…』 판을 정갈하게 하는 바라춤이 시작되면서 웅성거리고 소란스럽던 분위기는 엄숙해지기 시작했다.제문낭독과 춤·노래로 추모제가 진행되는 동안 제단 앞쪽에서 소복을 입고 앉아 애써 감정을 다스리던 김학순씨등 정신대할머니들은 아버지·어머니·친구들에게 보내는 시가 낭송되는 순간 이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그들은 타국에서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다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고 도망가다 붙잡혀 난도질 당해 죽은 친구들을 생각했을 것이다.그리고 모진 목숨덕에 살아 남았지만 살붙이 하나없이,방한칸 없이 떠돌며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이 더욱 한스러웠을 것이다.추모제가 진행되는 동안 이 행사에 참석한 7백여명의 시민들은 모두 숙연히 무대를 바라보았으며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들도 많았다.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천이 타오르고 정신대 희생자들의 저승길을 터주는 베갈이로 이날 행사는 끝났다.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피와 오욕의 역사속에 사라져간 그들의 혼백이 조금이라도 위로받기를 바라며 참가자들은 「정신대 아리랑」을 소리높여 불렀다.『가네 가네,나는 가네.어린시절 뛰어놀던 그 시절이 그리워.그립구나 어린시절,검정치마 입고 놀던 그 시절이 그리워.왜놈땅에 버려진 열아홉살 이 내몸,우리 어매 이를 알면 땅을 치고 우시리…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참가자들은 모두 이 행사가 20만 원혼의 넉을 위로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됐으리라 위안을 느끼면서도 일본정부가 이 문제를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정치도의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그보다 나은 진혼제가 없을 것이라고 얘기하며 행사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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