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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절 81돌 행사 다채

    3·1절 81돌인 1일 서울 탑골공원을 비롯,전국에서 그날의 함성과 뜻을 되새기는 각종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열려 순국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새천년민족 화해와 통일을 기원했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광복회원,용감한 시민상 및 효자효부상 수상자,벤처 기업인 등 4,000여명이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이 열렸다.기념식에서는 3·1절 노래 합창과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참석자 전원의 만세삼창이울려 퍼졌다. 3·1운동기념사업회는 이에 앞서 오전 8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순국 선열들의 위업을 기렸다. 서울 종로 1∼3가에서는 오전 11시부터 4시간 동안 교통을 통제한 가운데‘3·1절 종로 만세의 날’이 선포됐으며 흙 밟기와 만세 부르기,굴렁쇠 굴리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다. 낮 12시에는 광복군 출신으로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전리호(全履鎬·78)옹 등이 참여한 가운데 보신각 타종 행사가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은 낮 12시 서울 장충단공원 ‘3·1운동 독립기념탑’ 주변에서 기념 집회를 갖고 선열들을 추모했다.광복회 회원들도 오후 2시탑골공원에서 모여 ‘3·1운동 선열 추념식’을 갖고 새 천년 민족정기 확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국내 7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오후 2시 서울 경복궁 앞에서 각계 종교지도자와 시민 등 3,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화합의 의지를 천명하는 ‘화해와 평화를 향한 온겨레 손잡기 운동’ 행사를가졌다.불교,기독교,천주교,원불교,유교 등 종교지도자 333명이 서명한 ‘화해와 평화선언문’을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이 낭독했으며 참가자들의 인간띠잇기 행사가 이어졌다. 부산,대구,전주 등 전국 시·도 50여곳에서도 유관순열사 추모,통일염원 타종식 등 90여건의 기념 행사가 잇따랐다. 조현석 장택동기자 hyun68@
  • [오늘의 눈] ‘3·1절’을 ‘독립절’로 바꾸자

    어제는 새 천년 들어 처음 맞는 ‘3·1절’이었다.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대통령 내외와 3부 요인,그리고 독립유공자·시민·학생 등이 ‘3·1운동’ 81주년 기념식을 갖고 그날의 독립·자주정신을 기렸다. ‘3·1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지 9년째인 1919년 3월1일 거족적으로 전개한 항일 만세시위의거이다.위로는 민족대표에서부터 아래로는 초동급부,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지역적으로도 국내는 물론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이에 동참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말까지 만 두달 동안 전국 212개 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약 110만명이참가했으며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피검자는 46,948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우리는 이날의 ‘만세시위의거’를 ‘3·1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러나과연 ‘운동’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3·1만세의거는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일제의 폭압 통치에 항거해 비폭력적 방법으로전개한 항일 투쟁임이 분명하다.그런데도 이를 마치 ‘새마을운동’ ‘ 의식개혁운동’과 같이 ‘운동’이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마땅히 ‘3·1만세의거’ 또는 의거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3·1만세시위의거’로 고쳐 불러야 한다.1926년의 ‘6·10만세운동’ 역시 같은차원에서 ‘6·10만세의거’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만세시위의거’를 ‘운동’으로 불러온 것은 해방 후 학계의 식민사관과 독립운동가 진영의 몰역사적인 역사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지금까지 나온 역사 서적은 전문서나 대중서 할 것 없이 거의 ‘운동’으로표기돼 있다.심지어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3·1운동’ 일명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3·1절’ 역시 명칭 개정을 재고해야 한다.현 ‘3·1절’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생겨난 것인데 다른 국경일,즉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은 모두 그날의 의미를 명칭에 담고 있는 반면 유독 ‘3·1절’만 날짜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3·1만세의거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만세시위를 벌인 날이니 ‘독립절’ 또는 ‘만세절’로 고쳐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가락시장 홈페이지, 농수산물 정보‘줄줄’

    서울시 농수산물공사(가락시장)가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www.garak.co. kr)가 유통정보 교환의 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모두 19만1,606명이 방문,하루 평균 590명 정도가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김장철인 이달 들어서는하루 평균 900여명이 농수산물 유통정보를 얻기 위해 홈페이지를 찾았다. 방문객 뿐아니라 게시판에 오르는 글도 크게 늘었다.10월 말까지 오른 381건의 글 가운데는 농수산물 판매 홍보가 111건으로 가장 많았고 농산물 가격이나 물량흐름을 묻는 글도 96건에 달했다.이밖에 개인적인 주장이나 의견(30건),구직문의(11건)등도 적지 않았다. 공사는 앞으로 유통정보를 다양화하고 게시판을 통한 문의에 대한 즉각답변을 늘리는 등 운영체계를 강화할 방침이다. 또 다음달 18일까지 매일 그날의 시세와 연계한 추정 김장비용을 제공할 예정이다. 김재순기자 fidelis@
  • “올 김장값 컴퓨터에 물어봐”새달 18일까지 서비스

    ‘올해 우리집 김장값은 얼마나 들까.’ 서울시 농수산물공사는 16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와 자동응답 팩시밀리를 통해 시민들에게 각종 김장정보를 제공한다. 시민들이 가정에서 손쉽게 그날의 시세에 따른 김장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4인가족 기준으로 당일의 무와 배추 고추 마늘 등 주재료,파 생강 굴 젓갈 등 부재료의 소요량과 금액이 일괄 제공된다.또 최근 7일간의 재료별 가격 흐름과 전년도 가격을 기준으로 산출한 향후 7일간의 추정가격을 제시해소비자들이 언제 김장용품을 가장 경제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인터넷 가락시장 홈페이지(www.garak.co.kr) 초기화면에서 알림마당 ‘오늘의 김장비용’ 사이트를 열거나 팩시밀리 전화기를 이용해 02­402­7001을 접속한 뒤 안내음성에 따라 자신의 전화번호 등을입력시키면 전송자료를 받아볼 수 있다. [심재억기자]
  • 목포경찰서 홈페이지 운전자에 큰 인기

    전남 목포경찰서(서장 鄭光燮)가 음주 단속 날짜 등 각종 정보를 인터넷에올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11일 목포서에 따르면 지난 1일 개설한 인터넷 홈 페이지(www.mokpo112.or. kr) ‘오늘의 소식’을 조회한 건수는 불과 열흘만에 380여건이나 된다. 이곳에는 음주 단속일이 단속 전날이나 당일 아침에 띄워지고,무인속도 측정 단속구간과 각종 교통정보,그날 그날의 시내행사 등도 게시돼 운전자들이 즐겨 찾는다.또 전날 발생한 사건사고중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줄만한 내용을 올려 의외로 많은 네티즌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경찰서장과 대화의 방’으로 들어가면 경찰서에서 당한 억울한 일을 호소하거나 친절한 경찰관을 추천하고 건의사항도 올릴 수 있다.현재는 경찰의격무를 격려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서울청 캐릭터인 ‘포돌이’ 한마당에는 좋은 말과 새소식,최근 법령 등이있어 경찰서 직원들에게도 인기다. 정서장은 “홈 페이지 개설을 계기로 새로운 경찰,준비하는 경찰로 이미지를 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면서 “주민들도 아낌없는조언으로 경찰을 격려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목포 남기창기자 kcnam@
  • 일선 동사무소 첫 팀制 도입 ‘눈길’

    서울 구로구(구청장 朴元喆) 구로3동사무소가 말단 지방행정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직제를 서무·환경·사회·민원·분소 등 5개 팀으로 자체 개편,운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해 10월 구조조정에 따라 6급 주사가 2명에서 1명으로 줄어들어 서무담당 주사 혼자 직원 20여명을 관리해야 하는 등 조직관리상의 어려움과 관리소홀에 따른 민원행정의 차질 우려를 극복하기 위해서다.휴가 등으로 업무공백이 생겨도 다른 직원이 업무를 대체하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지난 5일부터 바뀐 직제에 따르면 각 팀은 12∼16년 경력의 7급 주사보를팀장으로 해 3∼6명으로 구성돼 있다. 서무팀은 예산회계·감사·기획·민방위·보건·위생·재무·일반서무,환경팀은 건축·주택·교통·도시개발·건설관리·청소·환경·토목·치수,사회팀은 사회복지·취로·가정복지·공공근로,민원팀은 제증명·세무·지적,분소팀은 분소의 민원처리를 각각 맡았다. 운영방식도 체계화했다.매일 아침 9시에 동장 주관으로 팀장회의를 열어 그날의 주요 업무를 결정한 뒤각 팀장이 팀원에게 전달한다. 또 각 팀은 팀장을 중심으로 매주 1차례 이상 모여 팀업무 숙지,업무계획 토의,대민봉사 아이디어 회의 등을 가지며,전체 팀원들이 모인 가운데 각 팀의 주간활동사례 발표회도 매주 열고 있다. 한편 구는 구로3동사무소의 새로운 직제운영이 효과가 크면 전체 동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윤병구(尹炳求) 구로3동장은 “팀제 운영으로 업무공백 등 관리체계상의 허점이 많이 줄어들었다”면서 “직원들간에 단합도 잘 돼 사기가 높아지고 다양한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등 시너지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순기자 fidelis@
  • [리뷰] MBC 특별다큐 ‘이제는 말할수 있다’

    역사에는 자랑할 부분도 많지만 감추고 싶은 내용도 많기 마련이다.더욱이한 핏줄을 나눈 민족끼리,그것도 양민을 무장군경이 학살한 비극을 드러낸다는 것은 용기에 속한다. MBC-TV가 12일 밤 11시30분 방영한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편 ‘제주 4·3’(김윤영 기획,이채훈PD)은 이같은 용기를 보여주었다. ANCARUM이란 통신명을 사용하는 김모씨는 “(MBC의)용기에 감사드리며 단지방송시간이 너무 늦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고 시청소감을 보내왔다. 제작진은 1948년 ‘5·10’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좌익 무장대가 관공서들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이 비극의 발단과 전개과정,미국의 역할 등을 6개월의 치밀한 준비 끝에 밝혀냈다. 미군정은 당시 그날그날의 사태전개를 문서로 보고 받았고 전투기의 위력시위,구축함의 해상봉쇄,통신부대의 항공촬영 등으로 이승만 진영과 친일경찰,우익청년단의 ‘빨갱이 사냥(Red Hunt)’으로 불린 초토화작전을 거들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승만정권 수립후에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초토화작전에 도움을주었다.결국 1년2개월여만에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인 3만여명이 희생됐다. 당시 좌익세력의 무장이 허술한 상황이었고 조직 자체가 궤멸직전이었다는점을 일본에 건너간 전 남로당 간부 등의 증언을 통해 확보한 것은 돋보였다.특히 ‘꿩 잡는 게 매’라며 친일경찰을 끌어들여 학살을 주도하게 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행적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더욱이 전두환정권 때까지 유가족들이 경찰의 검속을 받아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것은 이 참극의 현재적 의미에 귀기울이게 한다. 그러나 제작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 문제에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지난 6월 방영예정이던 이 기획이 경영진의 압력으로 연기되다가 이제야 방송을 탄 사정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4·3과 겹쳐보이는 광주항쟁을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다음주에는 동백림간첩단 조작사건의 진실이,10월3일에는 여순반란사건이 오른다. 임병선기자 bsnim@
  • [저자와의 대화] ‘영국노동당사’ 펴낸 고세훈 고려대교수

    ‘물적 요소(자본)가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영국노동당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한 노동운동가 리처드 토니의 말이다.이 한마디는 영국노동당,나아가 진보정당의 성격을 압축한 명언으로 꼽힌다. 이같은 영국 노동당의 지난 100년 가시밭길을 다룬 책이 국내학자 손으로는 처음으로 발간됐다.고세훈 고려대 교수의 ‘영국노동당사-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20여년 동안 노동당의 성장과정 등에 관심을 쏟아오다 지난 97년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방문교수로 체류중 본격적으로 저술에 나섰다.많은 현역 노동당 의원들과 노동조합 관계자를 직접 인터뷰했고 도서관 등을뒤져 관련자료를 수집했다.고 교수로부터 저술배경 등을 들어본다. ■왜 노동당사인가 국내적 함축을 담지 못한 외국의 얘기는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나라 전체의 복지수준을 높이려면 노동자의 정치참여가 절실하기 때문에 영국 노동당에 관심을 갖게 됐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따로 필요한 이유는 실질적인 복지국가로 가려면 진보정당이 꼭있어야 한다.인터넷시대라도 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항상있을 것이고 그들을 보호할 국회의원이 있어야 한다.일례로 우리나라의 복지수준은 5년전 조사할 때 전세계 132위였다.IMF로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쇠퇴하지 않았나 영국노동당은 출범 18년이 지나서야 사회주의를 정식수용했고 지난 95년에는 제1원칙인 ‘생산수단의 국유화’를버렸다.그만큼 사회주의의 내용은 크게 변하고 있다.이는 과격한 체제변혁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따라서 옛 이론에 매달릴 필요가없다.자본에 대해 취약한 노동이 성장해야 복지국가로 갈 수 있기에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 진보정당 결성 움직임에 대해 진보정당은 아래로부터 ‘동원’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또한 영국노동당에서 보듯 엘리트의 자기희생과 양보가있어야 한다.아울러 교조적인 주장은 진보정당의 출범에 큰 장애가 된다.영국노동당은 초기에 사회주의란 말 조차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한다. 그는 이어 “영국정치인은 하루종일 격무에 시달리다밤이면 홀로 책상에앉아 그날의 정치를 기록한다”면서 “기록이 없는 한국정치와 비교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모두 590쪽에 14장으로 1900년 노동당의 태동기부터 토니 블레어 수상 집권까지 100여년을 다룬다.나남출판 1만8,000원. 박재범기자 jaebum@
  • [이어령의 새 천년읽기]정보가치의 변화

    중국의 돈황(敦惶)유적지에서 1만개가 넘는 고대의 목간(木簡)이 발견됐을때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운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그것은 이 지방을 관장하던 관리가 매일같이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놓은 근무일지였다.한(漢)나라 때는 흉노들의 침입이 없어 변방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그래서 수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관리는 200년동안 5,6대에 걸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상 없음”이라는 말을 계속 기록해 갔던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그 광대한 중국을 떠받쳐온 힘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기록할 것이 없는 것까지도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 관료주의의 고지식함이다.오늘날의 관직에도 서기(書記)라는 말이 있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최고의 권력자를 서기장(書記長)이라고 부른다.한 국가는 문자를 적는 관료에 의해서,그리고 문자를 통해 축적된 그 정보에 의해서 통치된다. 이른바 중화(中華)의 빛이 변방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한자’라는문자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전설에 의하면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창힐(蒼힐)이었다.그가처음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창안했을 때 밖에서는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문자는 빛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깁슨의 주장대로 모든 정보는 빛속에 존재한다.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사는 귀신은 발붙일 곳을 잃게 된다.그래서 옛날사람들은 창힐의 눈이 네 개나 되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변방의 관리들이 “이상 없음”이라는 말 대신에 그날 그날의 기상변화에 대해서 적었더라면,혹은 계절의 변화와 자신의 심정을 적었더라면 그 산더미처럼 쌓인 200년동안의 목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 되었겠는가.그 문자들이야말로 과거를,그리고 미래를 밝히는 창힐의 네 눈이 되었을것이다. 그러나 근무일지에 사사로운 기록을 쓴다는 것은 직무유기와 같은 행위이다. 변방의 관료가 맡은 일은 오직 흉노들의 침범 유무만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이외의 정보는 모두가 노이즈로 처리된다. 그것이 바로 관료의 언어이며 관료주의에 의해 처리된 정보시스템이다.그러고보면 ‘이상 없음’이라는 똑같은 문자를 적으면서 200년 동안이나 먹고 살아간 관료주의의 그 ‘이상 있음’에 우리는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산더미처럼 쌓인 돈황의 목간은 오늘날 중국의 관료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지산회해(紙山會海:서류종이가 산처럼 쌓이고 회의가 바다를 이룬다)란 말속에 그대로 살아 숨쉰다. 돈황의 유적지에서 현대의 사이버 스페이스로 눈을 돌리면 어떠한 일들이벌어지고 있는가.거기에서도 우리는 한나라때 변방 관리가 근무일지를 쓰듯이 매일 매일 무엇인가를 기록해가고 있는 이상한 홈페이지 하나를 발견하고놀랄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고 관리가 아니라 대학생이며 “이상 없음”이 아니라 매일 매일 자신이 먹는 음식 메뉴를소상히 기록해 놓은 것이다.대학생 역시 수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정보적 자료를 창출해 낸 것이다. 왜냐하면 식료품회사,영양학관계자,의학자와 경제학자,그리고 미국의 식(食)문화와 청년문화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에게 있어서 그 홈페이지는 일찍이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정보자료를 제공해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관료들이 기록하는 공공의 문자는 오로지 큰 이야기에만 매달려왔다.어느 통계국도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을 끼니마다 그렇게 집요하게 추적해 간 적은 없었다.또 그렇게 추적할 수도 없는 일이다.오히려 국가 통계국의 관료적인 시스템에서 보면 그 대학생의 홈페이지는 무의미한 노이즈의 쓰레기더미에 불과할 것이다.실제로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쓰레기 바다라고 비웃는 사람들일수록 관료적인 문자정보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종래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점으로 검색해 보면 그 쓰레기더미들이 예상치 않던 금맥과 장미꽃이 되는 수가 많다.옛날에는 정부의국세조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수 천만원의 자료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들을통해서 돈 한푼 안들이고 간단히 얻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도 헛된 말은 아니다. 심지어 자기 집 빗물을 받아 산성도를 분석한 초등학교 학생들의 숙제라해도 인터넷으로 연결하면 연방정부도 못해내는 미국전역의 정확하고 정밀한산성비의 최신 분포지도를 얻을 수가 있다.인쇄물이든 전파든 종래의 매스미디어는 공공적인 한 발신처에서 그 정보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었다.그래서‘출판’을 뜻하는 영어의‘퍼블릭캐이션’은 공표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방송’을 뜻하는 ‘브로드캐스트’는 널리 살포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의 네트워크나 웹 속의 개인은 이미 정보의 살포대상이나 수신자가 아니라 스스로 정보를 구하고 발신하는 정보의 생산자인 것이다.개인개인이 만들어 내는 홈페이지를 합치면 그것이 바로 사회나 나라 전체의 방대한 정보자료를 축적해놓은 매머드 도서관이 되는 셈이다. 인터넷 정보시대가 아니라도 우리는 가끔 묻는다.만약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가 없었더라면,백범이나 안네 프랭크가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그리고 우리의 아녀자들이 규방에서 혜경궁 홍씨처럼 ‘한중록’을 쓰지 않았더라면어떤 세상이 되었을까하는 상상이다.이러한 개인의 기록들이 관가나 공식문서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정보와 다양한 삶의 자료가 되어준다는 것을누구나 한번쯤은 체험했을 것이다.거기에서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야기나일제와 나치의 폭정이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정치적 정보를 얻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큰 이야기와 상관없는 사소한 작은 이야기들, 이를테면 정보의 노이즈라고 할만한 군더더기 말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정보를 발견할수 있다. 백범일지에는 인천 형무소에서 사형직전 전화 통보에 의해 간발의차이로 풀려나게 되는 삽화가 기록되어 있다.전화가 없었더라면 백범도 백범일지도 태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백범일지의 이 대목은 독립운동의 사료만이 아니라 한국 통신사에 있어서도 빼놓은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결국 지난 천년을 관료들의 문자기록에 의한 정보축적 시대라고 한다면 앞으로 오는 새 천년은 개인의 디지털 기록에 의한 정보발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관료가 개인으로,아날로그가 디지털로,그리고 정보축적이 이제는 정보검색의 데이터 베이스로 변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30만이나 넘는 동 활자를 만들었으면서도 그것으로 찍은 조선왕조의 실록은 고작4부에서 5부를 넘지 않았다. 역사의 기록은 관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 기록은 세상사람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네 개의 사고(史庫)속에 숨겨진다.왕조차 볼 수가 없는 이 기록들은 읽히기 보다는 단지 역사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해 간다는데 가치를 둔 것이다.불교의 경전 역시 사경공양(寫經供養)이라 하여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탑신 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 도서관 서고 안에 소장되어 있는 그 많은 서적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불탑이나 사고 안에 들어있던 다라니경이나 왕조실록과 다를 바 없다. 새 천년의 디지틀 사회란 지난 천년동안의 기록 방법과 그 보존의 의미가근본적으로 달라진 세상을 뜻한다.2000년이 되면 지금 우리가 컴퓨터에서 쓰고 있는 개인기록 저장장치인 플로피 디스켓은 그 크기와 두께가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든 스마트 미디어로 바뀌게 될 것이다.그러면서도 그 저장량은 2메가를 넘는 것으로 300페이지 짜리 책 열권을 웬만한 우표 한 장 정도의 크기에 담는다.그러면 개인이 워드 프로세서로쓴 글이 출판사나 인쇄소의 과정을 거칠 것 없이 그대로 전자 책을 배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무한정으로 저장된 기록물들은 공적인 것이던 사적인 것이던아무 구별없이, 네트워크에 의해 연결되고 하이퍼 텍스트와 검색 프로그램에의해서 자유자재로 검색된다.모든 기록물들은 문서나 책이 아니라 하나의 데이터 베이스로서 수시로 검색 조합되어 가면서 새로운 정보자료로 변신해 간다.저장이 곧 생성인 것이다.그러고 보면 새 천년을 ‘기록의 원년’이라고하는 말은 단순한 연대기 상의 문제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다. 아무리 기록장치와 저장 기기의 변화가 일어나도 기록 자체에 대한 마인드가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중세의 낡은 성을 허물어뜨린 ‘26명의 납 병정’이되게 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성서를 읽을 수있게 개혁한 마틴 루터요,그 큰 책들을 오늘날과 같은 사이즈로 만들어 들고 다닐 수 있게 고안한 마누티우스였다.그것처럼 디지틀 기술이 세상을 바꿀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2000년을 기록의 새 창세기로 만들어 가는 정책과 마인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2000년이 새로운 기록문화의 창세기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간단한 지표가 있다.만약 새천년을 맞는 여성지 신년호 부록이 옛날과마찬가지로 책자로 된 가계부라면 그것은 2000년 1월호가 아니라 1999년 13월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부록이 CD로 바뀌어지고 컴퓨터에 인스톨할수 있는 가계부 소프트웨어라면 문자 그대로 2000년은 기록의 원년이 되는셈이다. 가계부의 문자가 디지털로 바뀌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인가는 장황한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미국 대학생의 음식메뉴를 적은 일지가 그러했듯이만약 10만명의 한국 주부들이 적은 가계부는 나라나 사회 각 분야에서 다시없는 데이터 베이스로 정보의 보고가 되어 줄 것이다.항목별로 분류된 자료와 통계숫자는 개인에게는 가족사요,민족에게 있어서는 민족사,그리고 세계에 있어서는 세계사로 변하게 될 것이다. 포도주처럼 묵을수록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자료들은 더욱 값진 것이 되어갈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지속성과 호환성이다. 개인자료가 공공의 자료 구실을 하려면 산재해 있는 개인자료들이 호환성을 갖고 취합되어야 하며 꾸준히 그 자료들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공기관에서 할 일이다. 가계부의 소프트웨어를 검색할 수 있는 항목으로 데이터 베이스화하고 주부들이 일년동안 쓴 가계부들을 한데 모으는 제도적 장치들이 강구돼야 한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개개인의 참여에 의해 국가의 보존기록과 대등한 무게로보존되기 위한 안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경제지표 문화지표 생활지표 등으로 활용될수 있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도 정보강국, 정보부국으로떠오르게 될 것이다. 가계부에 적힌 사소한 기록들과 그 통계는 국가의 어떤공공기록이나 국세조사의 통계자료보다도 값진 것이 되어 미래의 비전과 그방향을 알려주는 역사의 레이더암이 될 것이다. 어찌 가계부만의 일이겠는가.아날로그로 된 문자자료를 디지털자료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국가의 자산, 이른바 디지털 자원이 된다. 이제는 한 나라의부를 땅의 크기나 지하에 묻힌 자원으로 평가하던 시절이 아니다.싱가포르와같은 작은 나라, 홍콩과 같은 섬의 도시가 디지털 사이버 세계에서는 광활한중국 대륙과 맞먹는다. 쓰레기라고 내버렸던 그 많은 개인기록들을 어떻게 공공의 사회적 역사적자료로 활용하느냐로 21세기의 새로운 부(富)인 ‘디지털 어세트’의 새 자원이 마련된다.왕이나 위인전에 나오는 개인 전기가 이끌어갔던 큰 이야기의역사가 아니라 새 천년은 무명의 개인들이 엮어내는 작은 이야기들이 역사를지배하게 되는 시대이다. 가계부처럼 한국인들이 기록하는 민족이 되어 모든사람들이 컴퓨터 상에서 일기를 쓴다면, 그리고 아날로그로 된 먹물의 문자들을 빛(비트)으로 바꿔간다면 우리는 정말 창힐처럼 네 개의 눈을 가진 신화의 인간들이 될 것이다. “이상 없음”이라고 빈 칸으로 남겨졌던 변방의 그 200년이,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수백 수천 개의 목간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사막의 모래알하나 하나가 푸른 잎이 되어 초원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 새 천년은 사상 최고의 폭죽을 쏘는 축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천문학적 돈을 들여 거창한 돔을 만드는 데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아주 평범한하나의 기획-10만의 주부가 종이로 된 가계부를 컴퓨터의 디지털로 바꾸는기록의 개혁-그 작은 이야기에서 새 천년의 꿈은 현실이 된다.(새천년 준비위원회에서는 현재 10만 주부의 디지털 가계부 쓰기와 그 자료를 ‘평화의대문’에 보존,활용하는 안을 준비하고 있다)
  • [굄돌]동북아문화권과 종이책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프랑스·태국·중국·일본의 출판관계자들이라운드 테이블에 모여 출판산업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다.그 자리에 참석했던 일본의 한 책관련 잡지 편집장의 전언에 의하면 그날의 주제는 주로 전세계 인구(7월19일 6억명 돌파)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가 급속하게근대화될 경우에 크게 늘어날 종이소비량과 미래의 종이책 운명이었다. 개별 국가의 종이소비량은 그 나라의 GNP의 증가와 정비례해 늘어났다.따라서 두 나라가 급속하게 발전을 이뤄내면 종이의 사용량은 급속하게 늘어날것이고,따라서 세계 전체의 종이수급과 종이가격 인상,그로 인한 환경파괴의 문제가 분명히 제기될 것이며 불과 20∼30년 안에 전세계 출판인은 종이 이외의 새로운 인쇄 매체를 찾아야 할 운명에 처할 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동북아문화권의 한·중·일 세 나라는 종이책의 미래가 상대적으로 밝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했는데 참석자 대부분이공감했다고 한다.한자는 알파벳과 달리 액정화면에서 읽는 것과 종이에 인쇄된 것으로 읽는 것은 그 맛이 크게 차이가 난다.이 점은 한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세 나라의 문화가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에 따라 세계문화의 판도는 달라질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이 세 나라가 정보화사회의 문화적 성패를 근원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지라도 크게 변질시킬 것만은분명하다. 최근 한 출판인은 문화와 관련된 100여 권에 이르는 대형기획을 하면서 아예 세 나라의 판권 자체를 모두 확보한 다음 세 나라 독자 모두를 노리는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할 뜻을 밝혔다.앞으로 문자와 영상 이미지가 상극(相剋)이 아닌 상보(相補)적인 책들이 미래를 주도할 것이 분명해진 지금,또 세 나라가 이미지와 활자의 공통적인 요소가 많은 것으로 볼 때 이 출판인의 기개는 높이 살 만하다.교과서 하나만 인쇄하려해도 몇 달이 걸릴 만큼 큰 중국시장에 뜻을 두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출판인의 뜻은 도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감동을 준다.
  • [발언대] 언더우드 移葬예배 일반인 참여 왜 막나

    지난 19일 오후 3시,모처럼 서울에 오신 아버지를 모시고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묘지를 찾았다.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탄생 140주년 기념이장예배에 동참하고 그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입구에서 검은색 양복차림의 경호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이희호 여사를 비롯,소위 ‘높으신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평범한시민들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몸도 불편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가 그렇게 헛걸음했다는 사실이 몹시 실망스러웠다.더욱이 그 행사를 보러 인천의 모 교회에서 온 30여명의 초등학생들까지 입장을 못하게 된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언더우드가 100여년전 한국에 첫발을 디딜 때 누구를 위해 왔던 것이었을까.이 땅의 높으신 분들과 잘해보려고 왔던 것이었을까.내가 알기로도 그분은이 땅의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중들을 위해 왔었다.그분은 자신의 인생을 그들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이장예배는 그분이 함께 부대끼며 살았던 그런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아주 ‘고상하고 품격높은’ 예배가 돼버렸다.우리는 철창문밖에서 자못 경건하게 드려지는 기도소리만 들어야 했다. 할 수 없이 문 안으로 비치는 예배장면과 문을 지키는 경찰,그리고 그 문앞에서 비를 맞고 서있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겹쳐진,쓴웃음밖에 나올 수 없는 슬픈 사진의 셔터를 누르고 돌아왔다. 하얀 관속의 언더우드가 과연 그 행사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아마도 비를 맞고 떨던 어린아이들의 기억속에 언더우드라는 인물은 친근하고 존경스러운 분이라기보다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쯤으로 기억될 것이다.그곳에 참석했던 그런 사람들처럼…. 홍승표[감리교 신학대 신학과] 홍이표[연세대 신학과]
  • [굄돌] 단지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볼 수는 없을까

    파리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영화들을 접할 수 있는 도시일 것이다.그 곳에서는 새로 개봉되는 영화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전문 서적에서 봤거나 귀동냥을 통해서 한번쯤은 들어본적이 있을 전설적인 영화들도 시내 극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영화 발명초기의 작품들에서부터 현재의 개봉 작품들까지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파리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영화 전공자들에게는거의 꿈의 도시라 할만 하다.게다가 영화 전문 채널도 아닌 일반 텔레비전채널에서까지 거의 매일 저녁 두 편 정도의 영화를 삭제 없이 방영하고 있으니…. 그래서 파리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매일 극장에서 두,세 편씩의 영화를 보면서 몇 년을 지내고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영화들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들을 수백 개씩 보유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그렇지만 고작 한 달에 두어 번 극장을 찾는 나와 같은 게으른 ‘영화 애호가’의 눈에는 이런 일이 놀랍게 비친다. 사실 내 눈에는 상영되는 영화들이 수록된 정보지를 매일 뒤적이며 그날의영화 관람 스케줄을 짜고 결국은 다 보지도 못할 영화들을 열심히 녹화해 보관하는 영화학도들의 모습이 조금 애처롭게 보인다.그들의 속사정은 알 수없지만 그들이 일반 관객들이 갖는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할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그들은 자신의 기호와는 관계없이 상영되는 영화들은 꼭 봐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봐야하는 것은 바로 영화학도로서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작업일 수 있다.그들에게 영화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원천이 아니라 공부해야 할 텍스트일 것이기 때문이다.반면에 나와 같은 무지한 관객은 그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뿐이며 주머니 사정이좋지 않다면 몇 달 동안 극장 왕래를 끊으면 그만이고 생소한 감독이나 배우 이름을 굳이 외우지 않아도 좋다.누가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이니 꼭보라”해도 내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따분하고 내용이 한심한 글들을 내 전공과 관련된다는 이유로 억지로 읽고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보기 위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영화학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나도 언론의 지원 사격을받으며 한국을 휩쓸고 있는 영화 마니아 되기 열풍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기때문인가? [주형일 서울대 강사]
  • 제2공화국과 張勉(28)-金대통령 특별회고(상)

    대한매일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의 일환으로 지난 2월부터 ‘제2공화국과 張勉’시리즈를 주 2회 1개 면씩 연재해 왔다.지난번 27회의 ‘장면의 정치 역정과 생애(하)’로 연재는 사실상 일단락되었다.이번 28회는 당시 민주당정부의 당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를 상·하로나눠 그 전반부를 싣고 29회는 후반부를 싣게 된다.마지막 30회는 이번 연재물을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제2공화국을 평가하는 대담으로 엮어진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구술하여 녹취한 답변은 ▲장면(張勉)전총리와의인연 ▲그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장면정부의 경제제일주의 평가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서의 자부심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에 대한평가 ▲제2공화국 및 장면정부 평가 등 여섯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다음은김 대통령이 ‘장면 전총리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하여 술회한 내용이다. ?藜圄? 박사와의 인연 1956년 장면 박사가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이던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장 박사가 그 사실을 알고 고맙게 생각하면서 저와 장면 박사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본격적인 인연은 다음해 제가 가톨릭 영세를 받을 때 장 박사가 대부가 되어주면서 부터입니다. ?嵐适獵? 입당 저는 민주당에 입당해 중앙상무위원으로 일했습니다.민주당중앙상무위는 33명의 국회의원과 50명의 원외 당원으로 구성된 지금의 당무위원회 같은 것입니다.저는 젊은 나이에 발탁되었고 정책심의 등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의견을 제시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 하나 당시 민주당 내에는 신·구파의 큰 대립이 있었는데 저는 신파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많은 발언을 했고,그런 저에 대한 장 박사의 신임이 매우두터웠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역사에 ‘3·15부정선거’라고 기록된 60년 3월15일 정·부통령선거때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박사가 돌아가시고 부통령 후보인 장 박사만 남아 선거를 치렀는데 주로 장 박사 계열의 신파가중심이 되어서 선거를 했습니다.저는 강원도 당무위원장으로서 강원도의 험준한 지역을 돌면서 일선에서 선거운동에 임했습니다. 전국적으로 행해진 ‘3·15부정선거’에 대해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저는 인사동 중앙당사 앞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걸고부정선거를 규탄했습니다.그리고 4월6일 민주당이 중심이 된 시위가 있었습니다.시청 앞에 모여 을지로4가와 종로,그리고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과 광화문을 거쳐 다시 시청 앞으로 돌아오는 시위였습니다.그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시위는 거의 없었습니다.고등학생 일부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대학생들은 아직 나서지 않던 때였습니다.그 시위에서 저는 앞장서 휴대용 마이크로 구호를 선창하는 입장이었고,정부에서는 내무장관 포고령으로 발포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했습니다.지금 생각해도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던 비장한 심정이었습니다. 시위가 시작되자 정부는 방침을 바꾸어 진압보다는 시위대가 군중과 합세하지 않도록 격리하는 데만 주력했고,파고다공원 앞에 오자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오자 학생들은 경무대(지금의청와대)쪽으로 가려고 해 시위를 주도하는 우리와 약간의 실랑이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이렇게 전개된 그날의 시위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襤逅? 민주당 대변인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을 때 당 대변인인 조재천(曺在千)선생이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었습니다.저는 부대변인을 했는데 조재천 선생이 “비록 김대중씨가 원외(院外)지만 그 이상 대변인을 해낼 사람이 없다”며 강력히 추천하고 장 박사도 그 말이 옳다고 동의함으로써 제가 여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저는 대변인으로서도 여당 입장을 잘 방어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그때는 매일같이 여야 대표들이 학교나 명동에있던 시공관 등지에서 연설을 했는데 저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연설로 시민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았고,이로 인해 총리인 장 박사로부터 칭찬을 받은일이 몇번 있습니다. ?藍? 박사의 민주정신 저는 대변인으로서 매일 장 박사를 찾아가 몇가지 지시를 받고 제 의견도 말씀드리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하루는장 박사가 제게 “이 자리에 오래있는 것보다는 여야간 정권교체가 한번 되어야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온다”는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했습니다.그 말씀에 저는 ‘참,이 어른에 대해 사람들이 약하다고 그러는데 또 약한 말씀을 한다’는 그런 생각밖에 못했습니다.그러나 박정희(朴正熙)정권의 장기 집권을 겪고나서야 저는 그 말씀이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였다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닫게 되었고 정말 그 훌륭한 민주정신에 대해서 새삼스레 감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장 박사는 정국을 끌어나가는 데 아주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구파가 정권을 차지하는 것에 실패하자 그냥 당을 깨고 나가 야당을 만들었습니다.그것은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이렇게 해서 정국을 불안하게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만일 조병옥 박사님이 아직 생존해 계셨다면 적어도 정부를 1∼2년은 안정시켜 놓고 분당을 해도 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있는데 그것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襤ㅁ? 흔든 당내 소장파 장 박사가 제일 크게 고생한 것은 당내 소장파들이 조직을 따로 만들어 정부가 하는 일을 일일이 비판한 것이었습니다.‘중석불사건’이라고, 6·25 부산 피란 시절에 중석불 부정불하사건이 있었는데 장 박사가 또다시 중석불 부정을 저질렀다고 소장 의원들이 들고나선 적도있습니다.5.16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정당성으로 중석불사건 등 부정부패를 지적했는데 군사정권에서 조사하고 재판한 결과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장 박사는 제게 당내 소장파들의 움직임을 걱정하고 개탄하고 염려한 일이여러번 있었습니다.저는 장 박사에게 소장파 대표를 중요한 각료직에 등용해 정부에서 같이 일하도록 하면 그런 문제가 수습될 것이라고 건의를 드렸는데 이 방안은 당내 노장 중진들의 반대로 잘 안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fi?襤ㅁ? 타도 외친 혁신계 그리고 혁신계가 당시 참으로 사려깊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과거 이승만(李承晩)시대에 완전히 용공으로 몰려 숨도 크게 못 쉬고,감옥에 가고,심지어 조봉암(曺奉岩)씨의 경우는 사형까지 당하고 하던 혁신계는 4·19 이후 민주당정권 아래서 완전히 해방이 되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었습니다.그런 혁신계가 장면정권 타도를 내세우고 공세를 취했습니다.신문에도 보도된 것이지만 그때 저는 “지금 혁신계가 장면정권을 이렇게 괴롭히지만 만일 장면정권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혁신계다.‘입술이 있으면 이가 답답하게 생각하지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5·16 후제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혁신계는 그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압과 고초를 겪었습니다.저는 민심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세력들한테 불씨를 주는 행동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藍躍溶ㅁ? 망친 3신(新) 사실 당시 신문도 문제가 있었습니다.모두가 나서서 정부를 매일같이 공격했습니다.심지어 정부기관지라는 신문까지 나섰습니다.결국 정부를 국민 앞에 완전히 불신의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5·16 후‘3신(新)’이 장면정권을 망쳤다는 말이 유행을 했는데 ‘3신’이란 신문(新聞),혁신계(革新系) 그리고 당내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新風會)가 그것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는 본질적으로 독재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였는데 그런 분이 당내와 언론과 혁신계로부터의 협격으로 힘도 제대로 못쓰게 되었습니다.그런 불안정한 상황이 일부군인들에게 마치 나라가 공산화되어 가고,나라가 붕괴 직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정리 이용원기자 - 金대통령 회고 이모저모 현직 대통령이 일간지의 현대사 연재물에 증언을 해준 것은 대한매일이 연재하고 있는 ‘제2공화국과 張勉’이 처음이다.제2공화국 당시 민주당정부의 집권당 대변인을 맡았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본보의 증언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이 연재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고 장면 박사와 돈독한 관계에 있었던 김 대통령의 얘기가 왜 없느냐”는 등의 성화가 잇달았다. 독자들의 재촉에 못이겨 지난달 하순 서면으로라도 증언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이 오리라고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당시 개각에 이어차관급 인사가 있었고 곧바로 러시아·몽골 순방이 예정된 대통령의 일정상‘한가롭게’ 40년 전 기억을 더듬을 틈이 없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러시아 방문길에 오르기 전날인 지난달 26일 밤 대한매일이 서면으로 회고를 요청한 6가지 질문에 대해 소상히 구술했다.청와대 관계 비서관이 이를 녹취하여 다음날 서면으로 옮긴 결과 A4용지 10장 분량이었다.200자 원고지로 34장에 해당하는 상세한 내용이었다. 해외 순방을 앞둔 노(老)대통령은 늦은 밤 질의서를 한장한장 넘겨가며 옛날 일을 되새겼다.대통령의 회고에는 이 땅에 최초의 민주주의 꽃을 피운 제2공화국의 역사가 우리 현대사에 정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는 진지함으로 가득했다.또한 그후 역대 군사정권에 의해 폄하된 장면정부가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하며 동시에 제2공화국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의 진로를 모색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간곡한 메시지도 회고의 행간에 읽을 수 있었다.이밖에 내각책임제에 대한 진솔한 평가와 집권자로서 정치권에 갖는 바람(29회 게재 예정) 등 김 대통령의 정치관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이용원기자ywyi@
  • 김구선생 장례 기록필름 첫공개

    오는 6월24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되는 ‘백범김구전집’ 출간기념식 행사장에서 ‘뜻깊은’ 기록필름 하나가 첫 공개된다.바로백범 김구선생의 장례식 전장면을 담은 필름으로 이날 행사장에서 5분 정도선보일 예정이다.이 필름은 행사 주최측인 본사가 필름 소장자인 백범기념사업회(회장 李壽成)와 이 필름의 첫 방영권을 획득한 중앙방송(대표 崔喆周)의 협조를 얻어 상영하는 것이다. 백범기념사업회측에 따르면,이 기록필름은 백범 장례식 당시 주한 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것으로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백범과 인연이 있는 정문영(鄭文永·당시 건국실천원양성소 동창회장)씨에게 양도한 것으로 알려졌다.93년 정씨가 작고한 후 이 필름은 정씨의 아들 정준(鄭俊·40·하시스 상무)씨가 보관해오다가 최근 백범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이 필름의 전체 촬영시간은 13분 정도이며 유성(有聲)·흑백필름이다.당시로선 특수계층에서나 사용하던 35㎜필름을 사용했으며 촬영·보존상태도 극히 양호하다. 이 필름은 백범이 서거한 지 10일만인 1949년 7월5일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전 장면을 담고 있는 유일한 기록필름이다.이 필름에는 또 장례식에참석한 내외인사,장의행렬을 따르는 조문인파들은 물론 엄항섭(嚴恒燮·전임시정부 선전부장)선생의 애끓는 조사낭독 장면 등이 담겨져 있어 그날의 비통함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백범기념사업회 선우진(鮮于鎭·78) 상임이사는 “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해오던 16㎜필름은 상태도 좋지 않은 데다 장례식 일부 장면만을 담고 있어서 늘 아쉬웠다”며 “이번에 공개된 필름은 양질에다 장례식 전 장면을 담고 있어 귀중한 백범 관련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한편 중앙방송은 내달 26일 백범 서거 50주기 특집다큐물 ‘영상발굴 백범 국민장’(연출 박광원)을통해 이 필름을 첫 공개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정치권 5·18반응

    - 與 “고귀한 희생정신 계승 지역갈등 극복” 野 “화해·용서 할지라도 비극은 잊지말자” 5·18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을 맞은 18일 여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여권은 광주항쟁 정신의 계승을 위해 지역갈등 타파와 개혁작업 추진을 강조하고 나섰다.반면 한나라당은 광주 항쟁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며 정치공세를폈다. 국민회의 김영배(金令培)총재대행,장영철(張永喆)정책위의장 등 당지도부는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 대거 참석하는 등 뜨거운 관심을보였다.박광태(朴光泰)의원등 광주·전남지역 의원들 대부분도 참석,당시를회상하며 5·18 정신을 기렸다. 국민회의는 특히 5·18 정신을 현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작업과 연결,그 뜻을 되새기는데 초점을 뒀다.정동영(鄭東泳)대변인은 성명에서 “광주 항쟁이없었다면 민주주의의 빛과 혜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광주의 희망이군부독재와 문민독재를 극복,정권교체를 이루게 했다”고 밝혔다.이어 “지역갈등과 분단,개혁 과제들은 광주의 역사적 사명이 완결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며 5·18정신의 계승을 강조했다. 자민련 이미영(李美瑛)부대변인도 논평에서 “민주화를 위해 산화해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며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참뜻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또 “그들의 고결한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 망국적 지역갈등을 깨끗이 없애고 국민통합과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은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의 최근 움직임을 꼬집으면서 광주 항쟁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며 여당을 공격했다.장광근(張光根)부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전씨등은 아직도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면서 “화해와 용서는 할지언정 그날의 비극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특히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정부는 5·18의거는 국민적 자랑이라고 구호만 외치지 말고 실천을 통해 항쟁의 의미를 현재에 살리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망월동 기념식에 이부영(李富榮)총무를 보내 영령들의 넋을 위로했다.
  • 추모행사 이모저모

    5·18민주화운동 19주년을 하루앞둔 17일 광주에는 여느 해와는 달리 용서와 화해를 바라는 갖가지 추모행사가 잇따라 열려 분위기가 한껏 달아 올랐다. 이날 오전 광주 전남대병원에서는 ‘영·호남인간의 장기이식’이라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대구·경북지역본부와 광주·전남본부를 통해 마련된이번 행사는 경북 안동에 사는 박모(58·농업)씨가 자신의 신장을 광주에 사는 임모(42·여)씨에게 이식하겠다고 자청해 이루어졌다. 생면부지의 영·호남인 사이에 이뤄진 장기기증 행사는 80년 5·18이후 오랫동안 반목으로 대립해온 두 지역간의 벽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18기념기간인 18일부터는 전국 대학생 순례단 1,000여명 등 전국 각지에서 온 1만여명이 망월동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5.18기념재단의 이성길 사무차장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온 것은 5·18이 국민화합의 장으로 자리매김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계엄군이었던 군인들이 묘역을 참배하고 헌혈을 한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5·18묘역에는 일부 외국인 추모객도 눈에 띄었으며,특히 일본인 29명이 단체로 희생자들을 참배해 눈길을 끌었다. 일본인 미야자와 미에코(41·여)씨는 “진도 영등제 관광에 앞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5·18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에 들렀다”며 “역사의현장에 와보니 그날의 참뜻을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피력. 이날 추모제가 열리는 동안 유가족 200여명은 80년 당시의 고통과 아픔을상기하는듯 연신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이 항쟁 마지막날인 27일 도청을 사수하다 총상을 입고 5년간 투병생활 끝에 삶을 마감했다는 이미희(44·여)씨는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잊혀졌던 그날의 아픔도 5월 이맘때만 되면 되살아나 유가족들의 가슴을 짓누른다”며 “이제는 많은 세월이 흘러 누구를 원망하고 분노하진 않지만 국가유공자 지정 등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완전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80년 당시 광주시장을 지낸 고(故) 구용상(具龍相)씨의 유족들이 최근 5·18 당시 구시장의 메모,시청 상황일지 등을 한데 묶어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광주시민들에게 남기고 떠나며’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는 5월 18일 이후 광주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참상의 현장을 누비면서 27일 계엄군 진입 이후 수습과정에서 자신이 겪었던 소회가 담겨 있다.당시 시위대를 폭도로 간주한 당국과 계엄군의 과잉진압 등에 대한 시민들의심한 반발로 극한 대립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기관장들의 대책회의모임과 이후 대책수립 상황 등이 날짜별로 기록돼 있다. 광주 임송학기자 shlim@
  • 5·18 민주화운동 추모행사 다채

    - 전남도청앞에 시민 3,000여명 운집 성지순례 통해 그날의 정신 되새겨 5·18민주화운동 19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역사의 현장인 전남도청 앞과 5·18묘지 등에서 민주영령을 추모하고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이날 오전 시민걷기대회에 참가한 1,000여명은 5·18의 시발점이 된 전남대를 출발,광주역∼광주일고∼광주천∼광주공원에 이르는 4㎞를 걸으며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오후 2시 도청 앞에서는 3,000여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5·18 정신계승 국민대회’가 열려 민중항쟁을 주제로 다룬 문화공연과 거리행진이이어졌다. 특히 전국의 실업자 300여명과 대학생 150여명은 도청 앞에서 성지순례단출정식을 갖고 역사의 현장을 찾는 거리행진에 동참했다. 운정동 5·18묘지에서는 영령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5·18 민주영령천도제’와 마당극 ‘일어서는 사람들’이 참배객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한편 이날 5·18행사위원회 초청으로 광주에 온 스리랑카,동티모르,태국 등 동아시아권 국가폭력 피해자단체 관계자 7명이 묘역과 도청앞 등 역사의 현장을 둘러봤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
  • 농촌서도 주식투자 신드롬

    주식투자 열기로 전국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증권사 객장마다 주식을 사거나 투자상담을 하려는 아낙네,퇴직자,농민 고객들로 크게 붐비고 있다. 특히 일부 지방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20·30대 젊은 주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객장을 찾아 최근의 증시 열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그러나 과거처럼 아무 종목이나 사겠다는 ‘묻지마 투자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10일 전북 전주시 D증권사의 경우 10여명의 젊은 주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객장을 찾았다.이 증권사 김모차장은 “과거엔 주식투자를 하는 주부들은대부분 의사나 변호사 부인 등 비교적 부유층이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엔 평범한 회사원 부인 등도 어린아이를 안고와 객장을 기웃거리곤 한다”고 귀띔했다. 전남 나주시 중앙동 D증권은 최근 종합주가지수 800선을 전후해 고객예탁금 계좌가 2,000여개에서 2,500개로 늘면서 예탁금이 17억원대에서 4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뭉칫돈이 몰려든 것이다. 오전장 개시시각인 9시를 1시간 앞두고 벌써 주부와 50대 중반의 농민,퇴직자 등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주식투자 3년째인 김모씨(47·전남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는 짭짤한 수입으로 요즘 세상 살맛이 난다고 흥분하고 있다.IMF 직전의 투자손실을 만회하고도 돈이 남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간척지 논농사(300마지기)와 배나무 과수원에서 나온 4,000여만원을 밑천삼아 주식에 다시 뛰어들어 원금을 빼고도 현재 예탁금 4,000만원을 유지하고 있다.사자 주문을 내기 전에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나오는 각종 투자정보를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임모씨(60·전남 나주시)도 농삿일을 하고 있지만 주식투자 10여년째인 베테랑급이다.최근 5개월 만에 3,000만∼4,000만원을 투자해 1,000만원을 벌었다. 경남도 내 증권사 객장에도 몰려드는 투자자들로 연일 북새통이다.창원시상남동 G증권 창원지점에는 매일 300∼400여명의 투자자들이 380여평에 달하는 객장을 꽉 메우고 있다.지난달부터 주가가 급등하자 요즘 들어 신규 투자자도 하루 10∼20명씩 늘고 있으며,투자금액도 1인당 평균 1,000만원에 달한다. 충북 청주시 북문로 1가 D증권 청주지점 180평 규모의 객장에는 하루 수백명의 고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전광판 앞에 마련된 50여개의 좌석은 일찌감치‘아줌마부대’가 차지하며 그날의 시세를 알아보는 컴퓨터 단말기마다5∼6명씩 줄을 서 있다. 강원도 내 농촌지역도 예외는 아니다.농민 최모씨(46·강릉시 초당동)는 “도회지 친척들로부터 주식투자로 재미를 봤다는 얘기를 듣고 지난달 초 농협으로부터 영농자금 2,000만원을 빌려 증시에 뛰어들었다가 500만원 정도 손해를 보고 있어 발뺌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울상이다. 춘천시 동산면 김동우(金東佑·72·농업)씨는 “바쁜 농번기 철인데도 마을 청년들 사이에는 목돈을 벌겠다며 주식투기에 빠져 농삿일은 거들떠보지도않고 있어 걱정”이라며 “빚에 쪼들린 농촌 젊은이들의 돈에 대한 답답한심정은 이해하지만 자칫 본분을 잃고 한탕주의에 물들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전국 종합
  • 환경박람회 관람객 참여행사 ‘풍성’

    “폐품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환경박람회 기간 중에는 눈요기용 각종 전시품 뿐 아니라 관람객들이 함께숨쉬며 직접 참여해 즐길만한 행사들이 많다. 이 가운데 행사장 동편 소공연장에서 매일 오전,오후 2차례 열리는 ‘폐품의 소리 공연’은 수명이 다한 폐품들이 새로운 생명의 소리로 다시 태어나는,재활용의 의미을 담은 공연예술이다. 지난해부터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은 퍼모먼스 ‘난타’의 형식을 본딴 작품이다.출연진들은 빈병과 폐엔진,페트병,폐 파이프 등을 들고 나와 연속적으로 두드리며 잊혀져 가는 자연의 소리를 창조해 낸다. 관람객들도 나름대로 준비한 폐품으로 함께 동참해 신명나게 공연을 즐길수 있다. 공연이 끝나면 곧바로 ‘나도 환경 파수꾼’이라는 행사의 일환으로 환경체험발표가 이어진다. 실생활에서 겪은 환경관련 일상생활 체험 가운데 알리고 싶거나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를 수기형식으로 발표하고 그날의 최고상을 선정해 푸짐한 상품도준다. 함께 열리는 환경신문고는 주민들이 학교나 사회생활에서 환경을 해치는 행위나 현상을 고발하는 즉석 연극으로 주민들이 주체가 된다.형식에는 제한이 없고 가족단위나 친구들끼리 집단을 이뤄 당일 시나리오를 만들고 연습한뒤 참여한다. 환경의식 개선을 목적으로 한 환경아이디어 발표회에서는 논리성 여부에 관계없이 주민 모두가 평소 간직하던 폐품 재활용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환경파수꾼이란 신분증을 발급해 준다. 하남 윤상돈기자
  • 「오늘 ‘4·19’ 39돌」시위 주역 모임 ‘사랑방회’

    “독재와 부정에 항거하다 쓰러진 학생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4월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그날의 외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태평로국회의사당과 경무대 앞은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는학생들의 물결이 이어졌다. ‘4·19 사랑방회’는 이들이 혁명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회장은 김금석(金金石·60)씨.당시 고려대 3학년이던 김씨는 혁명의 불씨가 됐던 4·18 고려대생 시위를 이끈 주인공이다. 60년 4월13일 대학생 대표들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의논하려고 광화문 ‘수향다방’에 모였다.그러나 정보가 새면서 대표 학생들은 그뒤 학교 안에 갇히는 처지가 됐다. 신입생 환영회가 열린 4월18일 고려대 운동장에는 2,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하지만 단과대 학생회장이던 한나라당 이기택(李基澤)고문과 이세기(李世基)의원 등 4학년 학생들은 학생처장실에 붙들려 있어 시위를 이끌 수 없었다. 김씨 등은 어쩔 수 없이 선배들을 대신해 시위대를 이끌고 태평로 국회의사당으로 갔다.맨 앞에 서서 구호를 외쳤던 그는 곧 경찰에 붙잡혔으나 유진오(兪鎭午) 당시 총장의 중재로 풀려났다. 19일에는 학생들과 경무대로 몰려갔다.경찰은 시위학생들을 향해 붉은 물감을 탄 물을 소방호스로 뿌려댔다.그래도 해산하지 않자 공포탄과 실탄을 발사했다.눈 앞에서 동국대 법학과 3학년 노희두 학생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첫 희생자였다. 김씨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데도 여학생과 중학생·초등학생까지 거리로 몰려나왔다”면서 “부상자를 위해 시민들이 앞다퉈 헌혈을 했다”고 회고했다. ‘4·19 사랑방’은 혁명 10주년인 70년 시위를 주도했던 고려대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 출신 300여명이 만들었다.하지만 2년 뒤 10월유신으로 강제 해산됐다. 그러나 95년 4·19가 ‘혁명’으로 위상이 정립되면서 부활했다.회원들은대학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거나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이다.이기택 고문과이세기·김중위(金重緯)의원을 비롯,박찬세(朴贊世)전통일원연수원장,김대운(金大運)동국대 교수,김칠봉(金七峰)전성남중고동창회장,탁연복(卓然復)천아건설 부회장,최인환(崔仁煥)전교통방송본부장,김병일(金炳鎰)전서울신문 광고국장 등이 회원이다. 김회장은 “자유·민주·정의의 4월혁명 정신이 잊혀져 가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면서 “혁명정신을 되살려 경제난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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