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그날의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염화칼슘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반인륜적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옵트아웃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산책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59
  • ‘4·19 그날의 아픔’ 아직도…

    ‘4·19 그날의 아픔’ 아직도…

    반세기가 지났다고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무뎌질까. 4·19혁명 53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한 유가족이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조사 100번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그날의 증언, 내가 살아 있는 이유”

    “조사 100번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그날의 증언, 내가 살아 있는 이유”

    “이런 발표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바빠지겠다’고 툭 던져요. 하지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8일 오전 충남 당진시의 한 시골 마을. 새소리만 이따금 들리는 조용한 마을에서 한 촌로(村老)가 목소리를 높였다. 의문사한 장준하(1918~1975) 선생 ‘마지막 산행의 동행자’인 김용환(78)씨다. 그는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시 약사봉에서 장 선생이 실족사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고 주장하며 검찰 등에 진술해온 인물이다. 하지만 최근 장 선생의 유골 정밀 감식 결과 등 타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잇달아 나오면서 김씨의 목격담에 의문을 품는 여론이 높아졌다. 김씨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 밝혀질 게 없다. 어떤 증거가 나와도 사실은 그대로다”라면서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는 증언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자 살아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교사였던 그는 1999년 퇴직 후 농사를 지으며 이곳에서 살고 있다. “보지 못하는 순간 누군가 장 선생을 돌 등으로 가격했을 가능성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 말도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또 자신을 ‘피의자’로 지목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떤 빌어 먹을 놈이 같이 모시고 투쟁하던 분을 시해하나. 장 선생과는 어려울 때 함께한 끈끈한 관계였는데 내가 시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사람은 나에게 ‘장 선생을 위해 선생님에게 유리한 편으로 얘기하라’고 했지만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그건 선생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고 얘기했다. 장 선생의 사인을 놓고 의혹이 계속 제기되는 것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제기하는 것이며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시민단체와 야권에서 장 선생 사인을 재조사할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해 “벌써 다섯 번의 조사(사건 당시, 1988년 경찰 재조사, 1993년 민주당 조사, 2002년과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받았는데 또 받을 의무는 없다. 또 조사를 100번 해도 다른 게 나올 리 없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장 선생 사후에 자신의 인생이 기구해졌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언성이 높아질 때면 옆에 있던 아내가 혈압 높아지니 ‘말하지 말라’며 진정시켰다. “억울하다면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인권위를 어떻게 믿나. 더 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다. 초연하게 살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회고록을 내려고 원고도 써 봤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나를 괴롭힌 사람을 못 박아 써야 하는데 또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싶어 포기했다”고 말했다. 38년간 실족사를 주장해 온 그가 이번 유골 감식 결과로 자신의 입장을 번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당진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당진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바람 냄새 맡고 예쁜 꽃 만지며 ‘숲’에서 놀다

    바람 냄새 맡고 예쁜 꽃 만지며 ‘숲’에서 놀다

    ‘숲의 인문학’(김담 지음, 글항아리 펴냄)은 2007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5년간 강원도 고성 부근 숲에서 약초 캐며 살아간 이의 일기장이다. 제목에 인문학이 들어갔다 해서 뭔가 특별한 부분에 힘을 줬다든가, 대단한 지혜가 들어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소설가라 해서 뭔가 대단히 현학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이런저런 자연 풍경 사진이 끼어 있는데 그것도 뭔가 화려하고 거창하다기보다 이름 모를 들풀이나 꽃, 겨울의 을씨년스런 풍경, 여름의 들판처럼 일상적이고 늘 그대로 어딘가에 있음직한 광경들일 뿐이다. 본문도 딱 그렇다. 어떤 거창한 철학보다는 가벼운 푸념 정도다. 어찌 보면 용건만 간단히 전하듯, 매일매일의 기록을 3~4쪽 분량으로 담았다. 들꽃 꺾어다 꽃다발 만들 듯, 그날의 평범한 일들을 하나씩 쑥쑥 뽑아 이래저래 뭉쳐 다발을 만들어뒀다. 저자 표현대로 숲에 들어가 이런저런 꽃과 약초를 캐고선 “숲 잎새를 벗어나 논두렁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지는 해를 등에 지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노량으로 걸”어다닌 기록들이다. 어찌 보면 심심하기만 할 수 있는 기록인데, 그럼에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을 떼기 어려운 것은 풍부한 어휘를 맛나게 갈아 넣은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책의 최대 장점, 글을 눈으로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게 하는, 그 어떤 최첨단 매체도 해내지 못하는 책의 장점을 고스란히 살려준다.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차마 애처로워 잠들지 못하는 사이 미친 바람은 무엇도 꺼리지 않고 감때사납게 태질했다.” “시멘트 포장을 한 농로는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신작로처럼 하얗게 빛났다. 바람을 등에 업고 멀리멀리 걸어가도 좋을 듯 먼 데 숲들이 술렁술렁 춤을 췄다.” “각시취, 수리취 연달아 꽃대를 밀어올렸다. 노란 배암차즈기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떼판으로 핀 쑥부쟁이는 가을 물처럼 맑고 환했다. 길섶 한 곳에서 벌 떼가 윙윙거리고 있었고, 익살스럽게 생긴 두꺼비 한 마리 엉금엉금 그곳을 향해 가다 멈췄다.” “묵은 하수오 한 뿌리 캐었으니 다래끼가 비어도 그만이었다. 손끝에 닿은 느낌이 살가운 산국이 떼판으로 핀 자리에는 벌 떼로 어지러웠으며 가을볕은 들판 가득 빛살쳤다.” 그냥 툭툭 던져 놓은 것만 같은데 입속에서 혀를 굴리며 문장을 따라가면 풍경이 따라 그려지는 리듬감이 좋다. 때마침 꽃피는 춘삼월. 노량으로 걸어다닐 때 끼고나가면 행복해질 책이다. 1만 8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종로구 ‘그날의 만세 함성’ 거리 축제로

    종로구 ‘그날의 만세 함성’ 거리 축제로

    종로구는 다음 달 1일 제94주년 3·1절을 맞아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3·1 만세의 날 거리축제’를 개최한다. 종로문화원이 주관하고 서울시와 서울북부보훈지청이 후원하는 행사는 남인사마당 야외무대에서 오전 10시 시작하는 태극기 퍼포먼스와 역사노래 음악회로 막을 올린다. 천도교 원로로 독립선언에 참여한 이종훈(1856~1931) 선생의 자손인 이흥철옹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영종 구청장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을 하는 행사도 열린다. 기념식이 끝나면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한 민족대표 33명과 3·1만세 운동 당시 의상을 입은 청소년 자원봉사자 500여명, 지역 주민,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재현한다. 행렬은 남인사마당에서 출발해 종로2가 금강제화, YMCA 앞을 지나 보신각까지 약 600m를 행진한다. 정오에는 보신각 앞 광장에서 보신각 33회 타종 행사를 갖는다. 행렬이 떠난 남인사마당 야외무대에서는 태평무, 경기민요 등 전통무용 공연이 펼쳐지며 야외무대 주변 인사동 거리에서는 태극기 그리기 행사가 오후 3시까지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행사에 참여하는 시민에게는 소품인 태극기를 무료로 제공한다.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오전 9시부터 인사네거리~남인사마당 구간 차량을 통제한다. 김 구청장은 “이번 행사가 들불같이 일어났던 선조들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느끼고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면서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애국선열의 정신을 추모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구글 글라스’ 162만원에 시제품 판매

    ‘구글 글라스’ 162만원에 시제품 판매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업체 구글의 차세대 모바일 기기인 ‘구글 글라스’가 20일(현지시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BBC 등 외신들에 따르면 2분 분량의 동영상에는 구글 글라스를 착용한 뒤 열기구, 패러글라이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안경 모양의 기기를 착용하면 눈앞에 작은 스크린이 펼쳐지며, 사용자는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거나 음성 명령으로 프로그램을 조작할 수 있다. 증강 현실(현실에 3차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을 통해 눈 앞에 보이는 장면을 촬영하거나 길을 걸으면 지도가 나타나고, 하늘을 쳐다보면 그날의 날씨 정보가 떠오르는 식이다. 구글은 일반인과 컴퓨터 개발자들에게 이번 시제품을 1500달러(약 162만원)에 판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단 ‘구글 글라스로 하고 싶은 것’을 50단어로 적어낸 신청자들 가운데 당첨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제품 판매 대수와 정식 판매 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 구글은 “우리는 구글 글라스의 미래를 만들어갈 ‘대담하고 창조적인 지원자’들을 찾고 있다”면서 “지금은 초기 단계여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엄청나게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3. 한국 경제의 산증인,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상)

    [명사가 걸어온 길] 3. 한국 경제의 산증인,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상)

    한국은행 총재, 건설부 장관 등을 지낸 박승 중앙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여전히 젊다. 공정 사회에 대한 갈망이 그 누구보다 강하다. 이메일·전자파일 등 정보기술기기를 다루는 데도 능숙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여전히 많아 천문학과 사진을 배우고 싶어한다. 그의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는 이 같은 소망을 담은 책 제목이다. 1936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박 교수의 집은 가난했다. 소작농이었지만 아버지는 한글 초서 개발에 매진한 학자였다. 아버지가 농촌에서 농사에 전념하지 않는 “반거충이”다 보니 어머니가 농사일을 전담했다. 아버지는 박 교수의 모교인 백석초등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아버지의 한글 초서연구 결과인 ‘한글씨’는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소년… 수업료 못 내 시험도 못 봐 하루에 14㎞를 걷고, 기차를 타고 이리공업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수업료를 제때 내지는 못했다. 중간·기말고사 때는 교문 앞에서 수업료 납부 여부를 체크해 수업료를 낸 사람만 시험을 볼 수 있게 했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성적이 나쁜 것은 내 잘못이지만 수업료를 못내 시험을 못 봐서 성적이 나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고민했지요. 이때의 고민이 나를 성숙시켰습니다.” 지난달 초 태국으로 출국하기 전 서울신문기자와 만난 박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 간 유동성을 보장하는 것이 교육이기 때문에 교육은 빈부와 관계없이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기차 통학을 같이한 사람들은 10여명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박 교수보다 나이가 1∼2살 많았던 6명은 공산군 점령하에 청년대로 차출됐다. 수복이 되고 난 뒤에 그들은 빨치산이 돼 경찰서 습격사건을 벌이다 죽었다. 2명은 국군, 1명은 인민의용군으로 나가 전사했다. 박 교수는 “나는 나이가 어려서 살아 남았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면서도 “한국전쟁은 동족끼리 서로 죽인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장은 갈색 종이를 사서 직접 만들어 썼다. 그중 일부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일기가 내 일생의 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일기에는 그날그날 일어난 일도 썼지만 느끼고 반성해야 할 일도 담았다. 그래서 일기는 매일매일 뉘우치고 기도하는 장소였다. “어려울 때 용기를 주고 잘나갈 때는 겸손을 줬다”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내가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데는 일기의 힘이 컸다”고 회고했다. 박 교수는 지금도 간략하게 그날의 일과를 기록한다. 어머니… 베틀북, 개똥 옆에 떨어진 감 박 교수가 어렸을 때 그의 집안에 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인지라 그는 일어나면 감나무 밑으로 뛰어가 떨어진 감을 주워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맛있게 생긴 감이 개똥 바로 옆에 떨어졌다. ‘맛있게 보이기는 한데 먹자니 찜찜하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깝고….’ 이런 고민 끝에 그는 감을 어머니에게 줬다. “이렇게 좋은 감은 너가 먹어라”는 어머니 말씀에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어머니는 파안대소하더란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내가 부모를 나처럼 모신 것이 아니고 개똥 옆에 떨어진 감처럼 대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더욱 그 느낌이 강했다. 지금도 그의 서재에는 어머니가 쓰던 유품을 모아놓은 궤짝이 있다. 서재 곳곳에는 작은 유품들도 놓여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각종 기념품이 있는 서가에서 물건을 하나 들어달라는 사진기자의 부탁에 그는 망설임 없이 베틀북을 들었다. 어머니가 길쌈할 때 쓰던 도구다. 어머니가 짠 베를 염색한 뒤 그걸 교복으로 만들어 입고 다녔단다. 박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학을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가난하기에 공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해사를 고른 이유는 학비가 없어도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병약한 부모와 나이 어린 여동생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결국 가족회의를 거쳐 1년간 농사를 짓고 공부하면서 서울대 상대 진학시험을 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대학생… 한 손엔 책, 한 손엔 농기구 1년 뒤인 1955년 서울 상대로 시험보러 가던 길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서울 역전과 남대문 일대는 전쟁으로 여전히 폐허 상태였다. 종로 네거리를 지날 때 눈에 띈 간판은 곰탕집, 복덕방 등이었다. “곰탕집은 곰고기를 파는 곳, 복덕방은 무슨 떡집”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의 점심은 어머니가 싸준 찐 고구마 다섯 개였다. 합격은 했지만 공부만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결국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시험 볼 때만 학교에 나타나는 학생이 되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은 고모집 신세를 졌다. 농사를 지으러 내려갈 때는 도서관에서 10여권의 책을 빌려가고, 학교에 있을 때는 친구의 공책을 보면서 경제학을 배웠다. 그래도 대학 4학년 때 동아일보에 매주 실렸던 대학생 논단에 환율, 농촌 개발 등 경제 현안에 대해 3차례나 칼럼을 썼다. 주경야독이었지만 실력은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은 집에 내려갈 차비가 없었다. 김제까지 걸어갈 수도 없고. 이런저런 궁리 끝에 서울역에서 개찰을 담당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다. 개찰 담당 직원인 김진성씨는 그를 여객 전무한테 데려가서 설명을 하고 인계했다. 그 뒤로 여객 전무의 도움을 받아 몇 번 기차를 타고 왔다. 박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그분을 찾으러 서울역에 갔으나 행방을 찾지 못해 아직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한국은행… 새 인생을 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학을 배웠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려면 교수가 돼야 하고 유학이 필요했다. 가정 형편상 유학을 갈 수 없었던 박 교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곳으로 한국은행을 선택했다. 1961년 한국은행 입행으로 박 교수는 안정과 도약의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한은에 들어오면서 직장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됐지요.” 한은에 합격한 기쁨에 일기장에 ‘쾌재!’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썼다. 한은에서 국민소득추계의 정확성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1968년 박 교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당시 서봉균 재무부 장관을 초청해 환율을 크게 올려야 한다는 정책 건의를 했는데 이것이 다음 날 아침 동아일보 1면에 환율이 큰 폭으로 오르는 것처럼 보도가 됐다. 발설자를 찾기 위해 한은 부총재를 포함해 10여명이 끌려들어가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발설자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자료를 만들고 보고한 박 교수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발설한 셈이 된다고 해서 그가 징계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나중에 발설자가 드러나면서 한은 내부에서는 그에게 뭔가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던 1970년 한은에 해외 학술연수제도가 생기면서 박 교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36세였다. 2년 동안 석사를 취득하는 조건이었으나 그는 박사까지 따기로 마음먹었다. “내 인생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한 박 교수는 “전쟁하듯이” 공부를 했다. 보통 박사학위 취득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은 논문 작성이다. 박 교수는 한은 조사부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노동력 과잉 경제에 있어서 외국자본의 경제개발 효과’라는 논문을 썼다. 논문 작성에 걸린 시간은 6개월. 하지만 이 같은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는 권하지는 않는다. 박 교수는 “그건 나처럼 시간이 한정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라며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학 교수… 나의 꿈, 나의 길 경제학 박사가 돼 한국은행에 복귀하니 두 군데에서 일자리 요청이 왔다. 대통령 경제수석실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과 경제기획원이 제안한 사우디아라비아 경제개발자문단이었다. 우리나라와 반대 조건인 나라가 궁금했던 박 교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선택했다. 한국에 어머니와 세 자녀가 남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아내와 두 자녀가 동행하는 이산가족 신세가 1년간 계속됐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온 뒤 한은에 잠시 머물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가 됐다. 평생의 꿈을 이룬 것이다. “꿈을 실현했으니 굿판의 무당처럼” 신나게 가르쳤다. 대학 교수로 일한 시간은 총 26년.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의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보편화돼 있지만 30여년 전에는 낯선 시도를 한 것이다. 시험 채점도 조교에게 맡기지 않고 두번씩 직접 점검해서 점수를 매겼다. 신문에 글을 쓰고 방송에 나가 강연하는 활동도 열심히 했다. 서울신문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1977년부터 3년간 경제 관련 사설을 쓰기도 했다. 당시는 유신 말기라 정치나 사회 쪽 사설은 쓰기가 어려웠다. 경제로 관심이 쏠리면서 매주 4∼5회 사설을 썼다. 박 교수는 ‘서울신문 100년사’에 “신문 사설을 쓰기 전에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지 못했다”며 “내가 쓴 사설에 정부, 기업, 경제단체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 중요성을 점차 깨달았고 이 때문에 큰 보람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고 적었다. 1986년에는 한은 금융통화위원으로 임명돼 활동했다. 당시 금통위원은 비상임이라 매주 목요일에만 한은으로 출근했다. <하편에 계속>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박승 前 한은 총재는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1942~1948년 김제 백석초등학교 1948~1954년 이리공업중고등학교 1955~61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1961~1976년 한국은행 조사부 근무 1972~1974년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석사 및 박사 1974~1975년 사우디아라비아 경제개발자문단장 1976년 9월~2001년 2월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77~1979년 서울신문 논설위원 1986년 1월~1988년 2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1988년 2~12월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 1988년 12월~1989년 7월 건설부 장관 1993~1996년 주택공사 이사장 1997~1998년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2001년 2월~2002년 3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1년 3월~ 중앙대 명예교수 2002년 4월~2006년 3월 한국은행 총재
  • [시론] 아버지의 밥그릇과 국가/손택수 실천문학 대표

    [시론] 아버지의 밥그릇과 국가/손택수 실천문학 대표

    눈이 지붕을 덮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던 겨울밤 장판이 까맣게 눌어붙은 아랫목에 배를 대고 나는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따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를 간식으로 내오셨는데, 그 좋아하는 찐 고구마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열중하고 있던 숙제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매사에 틈만 나면 덜렁거리길 좋아하던 나의 모든 신경을 초점화한 것은 태극기였다. 그랬다. 저녁 무렵 옆집 아이가 ‘오징어달구지’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였지만 나는 그 강력한 유혹마저도 태극기를 앞세워 물리쳤다. 옆집 친구를 따라온 강아지가 갸우뚱할 만한 노릇이었다. 태극기 숙제에 그리 열중이었다고 하면 반공웅변대회 같은 데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하고 부르짖던 애국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아이에게 놀이 이상 가는 지고지선의 애국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숙제는 개학을 며칠 앞두고 몰아서 하던 버릇을 갖고 있던 내가 유독 태극기 그리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미술과목을 좋아하시는 담임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다. 한 해 내내 말썽을 부렸던 나도 새 학년이 되기 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고 싶었던 것이다. 조숙했던 나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의 연인이 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태극기 그리기는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한 건곤이감 4괘의 위치가 시종일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그뿐인가. 태극문양을 위해 그려 넣어야 할 원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학교에서 본 태극기의 원은 대보름달처럼 탱탱하고 꽉 찬 충만감을 자랑하고 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그리는 원은 번번이 한쪽이 찌그러지거나 일그러져 있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컴퍼스 같은 제도용 도구 없이 완벽한 원을 그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만 일그러지는 원이 암만해도 속이 차질 않아 끙끙대고 있는 아들놈이 보기 딱했던 모양이다. 막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쉬고 계시던 아버지가 직접 나선 것이 그때였다. 아버지는 대뜸 어머니에게 밥그릇을 들고 오게 했다. 태극기 그리는 데 웬 밥그릇? 영문을 몰라 뚱하게 바라보는 아들의 조막손을 잡고 아버지는 사뭇 진지하게 도화지 한가운데에 엎어놓은 밥그릇 둘레를 따라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내 눈이 어느새 동그래졌다. 도화지 위에 순식간에 떠오른 대보름달! 세상에나, 이렇게 완벽한 원이 어디 있을까. 밥그릇이 국기가 되다니, 그려지지 않는 국기를 밥그릇으로 그릴 수 있다니!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경이였다. 방학이 끝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그린 태극기를 품고 의기양양하게 교문을 들어서던 소년이 가끔씩 생각난다. 그때 선생님은 송아지를 핥는 어미소처럼 다정하게 몇 번씩이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태극의 원을 그렸다는 말을 듣고 살짝 미소를 머금어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상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그날의 충만감만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평생을 노동자로 살다 떠나신 아버지의 밥그릇은 지금 내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노동자의 밥그릇과 국가의 관계가 그것이다. 노동자의 밥그릇이 바로 자랑스러운 국기가 되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체감 온도 20도를 오르내린다는 혹한 속에서 15만V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올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겨울은 우리들의 방학숙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그러진 밥그릇으로 제대로 된 태극기를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일그러진 밥그릇으로 그리는 태극기 또한 일그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득 아버지와 함께 뿌듯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그리던 그해 겨울밤이 그립다.
  • [김문이 만난사람] 새해맞이 타종행사 준비에 바쁜 5대 종지기 신철민씨

    [김문이 만난사람] 새해맞이 타종행사 준비에 바쁜 5대 종지기 신철민씨

    매년 이맘 때면 기다려진다. ‘제야의 종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다. 우선 제야의 뜻이나 한번 알아보자. 제(除)는 섣달 그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夜)는 밤이다. 그러니까 섣달 그믐날 밤이다. 매년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다. 보신각 타종은 조선 시대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을 열고 닫기 위해 종을 쳐 온 데서 유래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는 1953년부터 시작해 세계적으로 독특한 새해맞이 행사로 정착했다. 평소 갖는 인간의 온갖 번뇌를 씻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내일의 새로운 태양에 기대려는 경건한 행사로 여겨지고 있다. 자, 종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 왔던 또 한 해가 저문다. 뒤돌아볼 일도 많지만 그러하면 무엇하리. 더 새로운 앞날이 있는 것을. 인간은 어제에 대한 후회와 분노, 그리고 오늘의 질투에 사로잡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그냥 시원하게 종을 치자. 그리고 비워버리자. 종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둥~, 둥~. 온 천지에 퍼져 나간다. 굳이 33번일 필요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의 종을 소중하게 쳐서 올 한해 동안 소홀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보신각종(보물2호)은 조선 세조 14년 (1468년)에 주조돼 정릉사에 걸려 있다가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으나 임진왜란 때 절이 불에 타 종루로 옮겨졌다. 이후 고종 때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걸면서 보신각이라 불리고 있다. 1985년까지 원래의 종으로 타종 행사를 했으나 종의 보호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오늘날 새해맞이 타종을 위해 걸어둔 종은 1986년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복제품으로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보신각종은 조선 시대에는 서울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는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타종행사로 새해를 맞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에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정오 일반 시민들에게 보신각종을 타종하는 체험의 시간을 마련해 놓고 있어 미리 신청을 하면 누구나 종을 칠 수 있다. 보신각 종지기를 인생의 업으로 살아 가는 신철민(39)씨. 제야의 타종행사 준비로 바쁜 지난 21일 보신각에서 그를 만났다. 시민들을 상대로 종치기 해설을 하는 것도 바쁜 일이지만 제야의 타종행사가 그에게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행사이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보신각 바로 뒤 컨테이너 막사 안에 있다. 자리에 앉으면서 날씨도 추운데 힘들지 않으냐고 했더니 “종은 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냐.”며 활짝 웃는다. 제야의 타종행사는 4명씩 4개조로 16명이 서서 종망치(당목)의 손잡이를 잡고 치는 것이지만 사실은 종지기인 신씨가 종망치 맨 뒤에서 ‘5, 4, 3, 2, 1’하면서 힘껏 밀어쳐야 ‘둥~’하는 종소리가 비로소 울려퍼진다. 타종행사에 참석하는 인사는 종을 치는 당목에 손을 올려 약간의 힘만 주고 있을 뿐 실제로 당목을 움직이는 사람은 바로 신씨다. 시간과 속도, 그리고 힘을 정확하게 조절하고 맞추어야 제대로 된 종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종이 얼어붙지 않도록 마사지를 적절하게 해줘야 한다. 종을 약하게 진동시켜 추위에 얼어 있는 종을 깨우는 일이다. 종의 안전을 위해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다. 신씨는 5대 종지기로 7년차이지만 165년째 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어떻게 해서 보신각종과 인연을 맺었을까. “원래부터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2006년 중반쯤 보신각 상설 타종행사에 자원봉사 형식으로 참여하게 됐지요. 당시 보신각 관리소장은 돌아가신 조진호 선생님이었는데 4대에 걸쳐 보신각을 지켜온 분이었습니다. 그 선생님한테 타종과 관리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해 12월 제야의 타종행사 며칠을 앞두고 지병으로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저한테 ‘보신각종을 꼭 지켜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서울시에 추천서를 써주었지요. 저도 선생님한테 ‘평생 종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신씨는 5개월 가까이 종치는 법 등을 배운 뒤 스승의 유언대로 5대째 종지기로 대를 이어가게 됐다. 신씨는 스승과의 인연을 떠올리면서 “일을 배울 때 많이 혼났지만,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쳐주었다.”고 회고한다. 스승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다시 설명이 이어진다. “선생님은 1962년부터 보신각을 관리해온 종로 토박이입니다. 구한말 궁궐 관리였던 조부님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가 고의로 보신각 앞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하자 곡괭이를 들고 나가 허물었고 또 영친왕 근위대 출신인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6·25당시 매우 급한 상황임에도 ‘종님을 떠날 수 없다.’며 피란을 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역시 부친의 유언을 따라 종지기 가업을 이었지요. 사실은 선생님이 한 번 정도는 주인공으로 종을 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그는 스승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친아들처럼 항상 곁에 있었으며 장례식 때에도 위패들고 보신각까지 와서 생전의 정신을 되새겼다. 또 보신각 주변에 있는 모과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 4그루 나무에 스승의 혼을 뿌리기도 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신씨는 스승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이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해마다 명절 때면 과일 사들고 차례상에 올리는 일도 거르지 않는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은 혼자 결정해야 했다. 함께 지낼 때 배운 것을 토대로 ‘종치는 힘’ ‘관리요령’ ‘타종방법’을 터득해나갔다. 2007년에는 종소리가 이상하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있자 전국에 산재한 범종을 조사하며 보신각종에 잘 어울리는 종망치 나무를 찾아내기도 했다. 가장 보람으로 여기는 것은 상설 타종행사를 진행하면서 시민들이 종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소원을 말해봐 코너’를 만들었던 것이다. 종에 손을 대고 울림을 느끼며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했더니 호응도가 예상보다 아주 높았다. 실의와 좌절감에 빠진 시민들이 종을 치고 나서 소원을 얻었다는 편지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중등 임용고시에 낙방한 대학 졸업생이 종을 치고 나서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연,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하고 결혼 승낙을 받은 남자의 사연 등이다. 외국인들한테는 ‘원더풀’이라는 찬사를 많이 받았다. 신씨도 힘들 때에는 종을 안고 하소연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종소리를 몸으로 느끼는 것, 즉 종과 한 몸이 돼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웃는다. 종을 치는 비법이 별도로 있을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종을 치는 방법을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그날의 기온, 습도, 기압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을 치는 의미를 마음에 담아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처음 보신각종 타종을 했을 때 궁합이 맞는다는 숙명 같은 느낌을 받았다. 종도 영혼이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인다. 그는 종을 칠 때마다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보신각 주변에 야간 취객들은 없을까. 있으면 어떻게 대응할까. “(취객들이)많이 있습니다. 매뉴얼 대로 행동을 하지요. 먼저 호루라기를 붑니다. 그래도 안 나갈 경우 ‘여기는 문화재 보호구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그러면서 ‘종에 관심이 있으면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11시 40분까지 오세요. 그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소망을 물었더니 “영원히 ‘종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스승님의 손자에게 종지기를 물려주는 것”이라며 활짝 웃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신철민 종지기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경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문화재와 범종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문화재 공부를 했다. 그러던 2006년 중반 무렵 보신각 타종행사 자원봉사로 보신각종과 인연을 맺었다. 그해 보신각에서 4대째 종지기로 가업을 이어온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유언대로 그 뒤를 이어 평생 종과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 또 스승의 유언으로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 역사문화재과 공무원 신분으로 종 관리를 맡아오고 있다. 2006년 12월 31일부터 제야의 타종행사를 맡았다. 이후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정오 상설 타종행사를 주관하고, 그의 제야의 타종은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한다.
  • [첫 여성대통령 시대] 친박계 전·현의원 주축…정책라인이 ‘싱크탱크’

    [첫 여성대통령 시대] 친박계 전·현의원 주축…정책라인이 ‘싱크탱크’

    이번 대선에서는 ‘주연’인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못지 않게 ‘조연’ 역할을 한 측근 인사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선거 기구에서 위원장과 본부장, 단장, 위원 등의 공식 직함을 받은 인사만 줄잡아 5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박 당선자와 다양한 연결고리를 맺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였다. 성공 신화를 쓴 ‘박근혜 사람들’을 들여다봤다. 김무성 본부장 등 ‘10인 회의’멤버 주목 ●‘액션 탱크’, 전·현직 의원들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과 서병수 당무조정본부장, 유정복 직능본부장, 홍문종 조직본부장, 변추석 홍보본부장, 안종범 정책메시지단장, 이정현 공보단장, 권영세 종합상황실장, 이학재 비서실장, 이상일 대변인 등 10명은 선거기간 내내 매일 아침 머리를 맞댔다. 비공개로 진행된 ‘10인 회의’에서 그날 그날의 선거 전략이 나왔다. 대선 승리를 이끈 ‘기관차’ 역할을 한 셈이다. 특히 김 본부장은 지난 10월 당내에서 불거진 ‘친박(친박근혜)계 퇴진’ 논란에 대한 박 당선자의 돌파구였다. 김 본부장은 선거 사령탑을 맡은 뒤 안형환·조해진·박선규·정옥임 대변인과 권영진·백성운 전 의원 등 비박(비박근혜)계 인사들을 대거 캠프에 합류시켰다. 지난 18대 국회에서 박 당선자와 관계가 소원해졌던 김 본부장의 복귀에는 박 당선자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최경환 전 비서실장이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본부장과 비슷한 길을 걸은 ‘친박 구주류’로는 진영 국민행복추진위 부위원장을 꼽을 수 있다. 친박계 내부 갈등으로 한때 ‘탈박(탈박근혜)’을 선언했던 진 부위원장은 컴백 후 캠프에서 ‘정책 조율사’ 역할을 했다. 이렇듯 박 당선자를 도운 주축 세력은 친박계 전·현직 의원들이다. 상당수는 2007년 대선 경선 때 멤버들로, 사람을 쉽게 바꾸지 않는 박 당선자의 용인술이 반영돼 있다. 이주영 특보단장과 김학송 유세단장, 윤상현 수행단장, 박대출 수행부단장, 조윤선 대변인 등은 박 당선자를 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김태환·서상기·유기준·한선교·김재원·이진복·조원진·서용교 의원 등도 친박계 핵심으로 분류된다. 당의 간판인 황우여 대표와 ‘원내 사령탑’인 이한구 원내대표, 이혜훈·정우택 최고위원 등도 박 당선자를 측면 지원했다. 다만 경선 캠프에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홍사덕 전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되면서 2선으로 후퇴했다. 강석훈·안종범·이종훈 의원 ‘3인방’ ●‘싱크 탱크’, 정책 브레인 박 당선자가 공약을 중시한 만큼 정책 라인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강석훈·안종범 의원은 박 당선자의 핵심 정책통이다. 이들은 진 부위원장과 함께 박 당선자가 공약을 발표하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 응했다. 강·안 의원은 이종훈 의원과 더불어 원내에서 ‘경제 브레인 3인방’으로도 꼽힌다. 이들은 모두 교수 출신으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안 의원은 또 2007년 대선 경선 당시부터 박 당선자를 도와온 ‘5인 공부모임’ 출신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김광두 서강대 명예교수와 최외출 영남대 교수,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김영세 연세대 교수가 포함됐다. 박 당선자의 기획조정특보인 최 교수는 ‘조용한 조력자’로 통한다. 겉으로 드러난 행보는 없었지만, 박 당선자의 의중을 캠프에 전달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부 인사들과 박 당선자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도 했다. 실제 박 당선자가 지난 9월 소설가 이외수를 만났을 때 이를 사전 조율한 인물이 최 교수였다. 김 명예교수는 박 당선자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온 국가미래연구원도 이끌었고, 연구원 소속 250여명의 학자들과 함께 박 후보의 대선 공약 밑그림을 짠 것으로 전해졌다. 현명관 전 전경련 부회장도 연구원 소속이다. 이 밖에 윤병세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은 외교·안보, 최성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복지, 박명성 명지대 교수는 문화, 곽병선 전 한국교육개발연구원장은 교육, 옥동석 인천대 교수는 정부개혁 등의 분야에서 각각 핵심 참모로 꼽힌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박 후보의 역사 인식 등과 관련해 조언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선자 이미지 변신에 기폭제 역할 ●‘새로운 피’, 영입 인사 최근 들어 가장 주목받는 그룹은 외부 영입 인사들이다. 박 당선자의 이미지 변신을 이끌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인재 영입은 지난해 12월 박 당선자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이후 가속도를 냈다. 특히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등은 당내 인사와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당선자는 1987년 개헌 때 헌법 제119조 경제민주화 조항을 입안한 김 위원장을 끌어들여 경제민주화 논의를 주도했고, 2003년 한나라당의 ‘차떼기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한 안 위원장을 영입해 쇄신 의지를 보여줬다. 대표적 여성 기업인인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김용준 공동선대위원장, 민주당 출신의 한광옥 국민대통합위 수석부위원장, 이상돈 정치쇄신특위 위원 등도 비중 있는 영입 인사들이다. 이 중 김성주 위원장은 적극적인 유세와 언론 접촉 등으로 대선에서 적잖은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변추석 홍보본부장과 조동원 홍보부본부장도 박 후보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다. 카피라이터 출신인 조 부본부장은 올해 초 당명 개정 등을 주도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공식 포스터를 제작했던 변 본부장은 ‘박근혜가 바꾸네’ 등의 선거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신뢰 높아… 신동철 부소장 ‘맏형’ ●‘궂은일 전담’, 보좌·지원 그룹 실무 보좌진 그룹도 빼놓을 수 없다. 보안을 중시하는 박 당선자는 입이 무겁고 성실한 보좌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이재만·정호성·안봉근 전 보좌관은 박 당선자가 정치권에 입문한 1998년 이후 줄곧 근거리에서 보좌해 왔다. 박 당선자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만큼 이들에 대한 박 당선자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신동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실무 그룹의 맏형 격이다. 여연에서 여론조사를 총괄했다. 백기승 공보위원도 2007년 대선 경선 패배 이후 이른바 ‘마포팀’을 이끌며 박 후보에 대한 홍보 업무를 전담해 왔다. 조인근 메시지팀장, 장경상 전략기획팀장, 이창근 일정기획팀장, 장성철 공보상황팀장, 음종환 공보기획팀장 등 박 당선자의 선거 운동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보좌 인력들은 역할에 비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름 없는 조력자들’이다. 박 당선자 주변에는 외곽 지원 부대도 있다. 박 당선자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바탕으로 의원들 못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KBS 보도본부장 출신의 김병호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병기 여연 고문, 이성헌·김호연·김선동·손범규·허원제 전 의원, 전광삼 공보위원 등도 박 당선자를 물밑 지원했다. 공개활동 자제… 정치적 무게감 커 ●‘캠프의 중심추’, 원로 그룹 원로 인사들의 경우 공개적인 활동은 자제한 편이나, 정치적 무게감은 상당했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을 계기로 박 후보를 돕는 ‘7인회’도 이러한 원로 그룹에 속한다. 강창희 국회의장과 김기춘·김용갑·김용환·최병렬 당 상임고문,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현경대 전 의원 등이다. 이번 대선이 보수와 진보의 진영 대결로 흐르면서 캠프 외곽에서 박 후보를 지원하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김진홍 전 뉴라이트 상임의장, 김창준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 등이 지원 사격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리뷰]영화 ‘26년’을 더 재밌게 보는 방법

    [리뷰]영화 ‘26년’을 더 재밌게 보는 방법

    1980년 5월, 잔혹한 ‘그날’을 다룬 영화 ‘26년’(감독 조근현, 원작 강풀)이 각계각층의 노력 끝에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이 작품은 광주항쟁의 비극적 기억을 안고 사는 조직폭력배(진구 분)와 국가대표 사격선수(한혜진 분), 현직 경찰(임슬옹 분), 대기업 총수(이경영 분), 사설 경호업체 실장(배수빈 분)이 그날 26년 후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을 단죄하기 위해 펼치는 복수극으로, 씻을 수 없는 역사이자 동시에 현재이기도 한 우리 사회를 그렸다는 점에서 제작단계부터 주목을 받았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공통점vs차이점 ‘26년’과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2007)는 여러모로 닮은 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을 내포한다. 때문에 두 편의 영화를 비교해 본다면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80년 그날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배우를 전면에 내세워 비슷한 또래 또는 연령층이 낮은 팬덤의 관심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화려한 휴가’는 당시 입대 전이었던 배우 이준기와 이요원 등을 앞세워 홍보에 주력했다. 제작사는 이준기의 ‘어린 팬’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함과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환기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실제로 이준기의 ‘화려한 휴가’ 출연은 그날에 대해 개념이 모호한 당시 중고등학생들에게 역사적 지식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6년’ 역시 한혜진, 진구 등 젊은 배우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화려한 휴가’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 유명작가 강풀의 원작이라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타깃 관객층의 범위가 ‘화려한 휴가’보다 훨씬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두 작품 모두 ‘그날’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피하고 있다는 것 역시 공통점이다. ‘화려한 휴가’와 ‘26년’은 80년 5월 광주항쟁의 자세한 배경 대신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갈등을 그리는데 주목하면서 몰입도를 높였지만, 애초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라는 공동의 목적에는 다소 소홀했다. 반면 차이점은 ‘화려한 휴가’가 80년 광주를, ‘26년’은 80년 광주에 상처를 입은 인물들의 현재를 그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같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스토리와 전개방식이 눈길을 끈다. 특히 ‘26년’은 도입부에 애니메이션을 삽입해 생생한 ‘그날’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에서 ‘화려한 휴가’에 비해 훨씬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작품이 됐다. ●한국 영화 최초, 제작두레 방식 도입의 의의 ‘26년’은 첫 제작을 시도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제작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무산됐다. 하지만 웹툰을 먼저 접한 사람들과 ‘26년’을 지지하는 유명 인사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제작두레’를 도입, 결국 관객에게 선보이는데 성공했다. 제작두레는 회원가입을 통해 제작비를 약정하는 새로운 제작방식으로, 관객들이 직접 참여해 십시일반으로 제작비를 모아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다. 2012년 6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 총 4개월간 1만 5000여 명이 7억여 원의 제작두레 회비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이 같은 방식은 한국 장편상업영화로서 최초의 방식이며, 소셜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러한 프로젝트가 진행됐다는 점은 한국 영화 제작환경에 새로운 물결로 기록됐다. 허구와 사실을 교묘하게 오가는 이 영화는 잊어서는 안되는 그날의 역사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한다. 또 “요즘 대학생들이 8.15와 5.18을 헷갈리는 것에 충격을 받아 ‘26년’을 만들게 됐다.”는 원작가 강풀의 말은 미래를 짊어지고 갈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과거에 무지한지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朴 “준비된 여성 대통령” vs 文 “보통사람·서민 후보” 60초 CF 전쟁

    朴 “준비된 여성 대통령” vs 文 “보통사람·서민 후보” 60초 CF 전쟁

    18대 대선을 앞두고 27일 여야 주요 후보의 ‘60초’ TV 광고 전쟁의 막이 올랐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이날 일제히 후보별 TV 광고 첫 편을 공개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측 광고는 저녁 9시 KBS 뉴스 전,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측 광고는 저녁 8시 SBS 뉴스 직후 각각 첫 전파를 탔다. ●朴 피습사건 소재로 스토리 구성 박 후보의 첫 광고 제목은 ‘국민을 향한 다짐과 선언’이다. 일명 ‘박근혜의 상처’ 편이다. “크든 작든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는 여성 내레이션과 함께 2006년 신촌 피습 사건 장면, 상처 부위에 길게 테이프를 붙인 박 후보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흑백 영상으로 이어진다. 이어 박 후보의 쾌유를 기원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 장면으로 바뀌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가야 했던 그날의 상처는 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살려주었습니다.”라고 전개된다. 마지막은 박 후보의 옆 얼굴을 컬러 영상으로 비추며 “그때부터 남은 인생 국민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저를 바칠 차례입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 기호 1번 박근혜.”로 마무리된다. 변추석 홍보본부장은 브리핑에서 “국민을 위해 헌신할 준비된 여성 대통령의 이미지를 피습 사건을 소재로 사용, 강력한 스토리를 통해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文 딸과 살고있는 주택 풍경 담아내 문 후보는 ‘출정식’을 제목으로 잡았다. 전략 포인트는 ‘특권층·귀족 후보인 박근혜 대 보통 사람·서민 후보 문재인’의 대결 구도다.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문 후보가 딸 다혜씨와 함께 머물고 있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 집의 실제 풍경을 광고에 담았다. 대선 후보의 집 안이 TV 광고를 통해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캠프 측은 전했다. 배경음악으로 배우 문소리가 부르는 가수 안치환의 노래 ‘내가 만일’이 깔리는 가운데 “세 마디만 기억해 달라”는 문 후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마지막은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토대로 ‘사람이 먼저다 민주통합당 문재인2’라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문 후보 측은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국민의 바람을 실현하겠다’는 후보의 의지를 담으려 했다고 밝혔다. 캠프는 앞으로 4개 이상의 TV 광고를 추가로 내보낼 계획이다. 다음 광고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콘셉트로 안철수 전 대선 후보와 단일한 후보라는 점을 부각시킬 예정이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송수연기자 songsy@seoul.co.kr
  • “北도발 다시 못하게…생생한 안보 교육”

    “北도발 다시 못하게…생생한 안보 교육”

    연평도가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다크 투어리즘은 전장이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며 예방과 의미를 새기는 관광코스다. 다크 투어리즘의 중심지는 새롭게 준공된 안보교육장이다. 행정안전부와 인천시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2주년을 맞은 23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의 민간인 거주지에서 안보교육장 준공식을 가졌다. 준공식은 연평도 포격 도발 2주년 추모식에 이어 열렸다. 행사에는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과 송영길 인천시장 등 관계자 50여명이 참석해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실제 피폭을 당한 민간인 주거지 옆에 준공된 안보교육장은 총면적 735㎡ 규모로 지하 1층·지상 2층으로 만들어졌다. 지하 1층에는 전쟁 등 비상시 행동요령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소가 마련됐고, 1층과 2층에는 희생 장병을 위한 추모실과 연평도 포격 상황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 북방한계선 관련 자료실 등이 조성됐다. 또 포격을 당한 주민들의 주택에서 발견된 생활용품 등도 전시돼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특히 안보교육장 바로 옆에는 연평리 174~176번지인 피폭 주택 3개 동이 2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연평도를 찾는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포격을 당한 민간인 주거지는 연평리 171~177번지 일원과 연평리 346번지 등 5개 권역이다. 안보교육장 2층에는 피폭 주택의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전망실도 조성됐다. 안보교육장은 지난해 4월 건립 계획이 마련된 뒤 43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1년 6개월여만에 완공됐다. 맹 장관은 이날 고(故) 서정우 하사와 고 문광욱 일병을 기리는 추모식에서 “서해 5도 종합발전계획의 차질 없는 추진을 통해 서해 5도가 대한민국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주민이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포격 이후 올해까지 연평도 등 서해 5도에 투입된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은 1299억여원으로, 정부는 이들 주민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위해 385억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해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해까지 연평도 내 피해 주택을 모두 복구한 정부는 올해부터는 30년이 넘는 주택 160여채에 대한 공사비를 주택당 최대 4000만원씩 지원하는 등 추가적인 대책 마련에 나선다. 연평도 안석기자 ccto@seoul.co.kr
  • [연평도 포격 2년] 섬 곳곳 주택개량 한창… 연습 포성에도 당시 공포에 몸서리

    [연평도 포격 2년] 섬 곳곳 주택개량 한창… 연습 포성에도 당시 공포에 몸서리

    “그래도 대대로 살아온 이곳이 좋지요. 북한이 또다시 도발할까 두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의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이곳 주민들은 김장을 하고 굴을 캐는 등 생업에 열중하면서 겨울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포격 이후 육지로 피란 나와 “다시는 연평도에 들어가기 싫다.”며 인천시에 정주할 곳을 요구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포탄에 집이 날라가 연평초등학교에 임시로 마련된 조립식 목조주택에서 머물다 지난해 말 새로 지어진 자택으로 돌아온 김모(57·여)씨는 “‘예전처럼 섬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십년 넘게 삶의 터전이었던 섬을 떠날 순 없었다.”면서 “시간이 약인지 새집에 들어온 뒤 예전 생활을 되찾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연평도의 주민등록 인구는 포격 당시보다 오히려 늘어났다. 22일 현재 2065명으로 2010년 1756명보다 300여명 증가했다. 장흥화 연평면 부면장은 “순수한 거주민이 늘어났다기보다는 군부대 증원으로 군 간부 가족들이 연평도로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을은 한눈에 보기에도 산뜻해져 있었다. 포격으로 파손돼 새로 지어진 32채 외에도 180채의 노후주택이 리모델링되었기 때문이다. 50채는 주택개량이 아직 진행 중이다. 30년 이상된 노후주택은 정부지원금과 자부담 8대2 비율로 개량할 수 있다. 이 밖에 통합 초·중·고교, 상가, 숙박업소의 신축이 한창이어서 마치 마을이 공사현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중장비의 굉음이 들린다. 외지서 500여명의 공사인력이 몰려드는 바람에 여관·민박집의 방도 동이 났다.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신축되는 통합학교 건설현장에서 만난 최모(42)씨는 “우리도 공사장 인부 수를 잘 모를 정도로 공사인력이 많다.”면서 “숙박업소가 꽉 차 가정집 방을 빌려 잠을 자고 있다.”고 밝혔다. 포격 2주년을 맞아 23일 준공되는 안보교육장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안보교육장은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734㎡ 규모의 안보교육관과 피폭가옥 3채로 구성된다. 피폭가옥은 포탄을 맞아 철저히 부서진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는데 앞에는 ‘포격 1∼2분 전까지 사람이 있던 집입니다’라는 팻말을 붙여 놓아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주택 지붕은 포격에 날아갔는지 앙상한 철골 뼈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고 그을린 가스통, 종잇장처럼 구겨져 나뒹구는 가재도구는 그날의 참상을 말해주는 듯했다. 연평도를 상징하는 꽃게잡이는 지난달 중순 이후 조업이 사실상 중단됐다. 꽃게 수가 갑자기 줄어들면서 이달 말까지 예정된 가을철 조업이 중단되고 지금은 바다에 나가도 어구 수거작업을 하는 정도라고 한다. 선주인 유모(50)씨는 “봄에는 꽃게가 많이 잡혔어도 크기가 작아 제 값을 못 받았는데 가을에는 그나마도 나오지 않아 올해 꽃게농사는 엉망”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부둣가에 나가 5만원의 일당을 받고 그물에서 꽃게를 떼내는 작업을 하던 주민들도 덩달아 돈벌이를 못하고 있다. 가을조업이 시작된 9월 이후 두 달간 연평도 꽃게 어획량은 87만 820kg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 가량 감소했다. 어획고도 56억원에서 30억원으로 줄었다. 마을 여성들은 연평도 인근 갯벌에 나가 굴을 캐 그런대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조금’ 때라 오후에 나가 서너 시간 굴을 캐면 하루 7만~8만원을 벌 수 있으니 제법 짭짤한 돈벌이인 셈이다. ‘거문여’로 불리는 곳에서 만난 김모(73) 할머니는 “하루 6㎏ 정도의 굴을 캐는데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안정적이지는 못하다.”면서 “그래도 하루 3만 7000원 받는 취로사업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마을에 복귀한 뒤 대체로 일상적인 삶을 찾아가고 있지만 잠재된 불안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 연평도에 주둔하는 군이 사격연습을 하면 2년 전의 악몽이 떠올라 놀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민모(50·여)씨는 “며칠에 한 번씩 포소리가 들릴 때마다 군부대 연습이려니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밖에 나가보곤 한다.”면서 “면사무소에서 사전에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하지만 못 들을 때가 많다.”말했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이 불시에 연평도를 방문했을 때는 갑자기 헬기들이 섬에 들이닥쳐 놀란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강박증과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옹진군은 정신건강 전문의 등 의사들을 주기적으로 연평도에 보내 우울증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들에게 상담과 심리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김병문 연평초등학교 교장은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밝아졌지만 상처가 완치된 것은 아니다.”라며 “학생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유관 부처와 많은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자가 연평도에 2박 3일 머물면서 느낀 것은 섬 사람들의 마음이 삭막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웃끼리 왕래나 대화가 포격 전보다 줄어들었고 대화를 하더라도 깊은 얘기는 되도록 삼가는 분위기다. 외지 사람들이 말을 붙이기는 더욱 힘들다. 지난 10여년간 6차례나 연평도를 찾았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박모(53·여)씨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포격사건 이후 이웃끼리 덜 친하게 된 것 같다.”면서 “어쩌다 이웃과 얘기를 나눠도 깊이 있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왔지만 이곳에서는 정치나 대선 후보들에 대해 얘기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모(56)씨는 “지난번 대선 때만 해도 누가 낫느니 하면서 말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정말 하기 어려운 얘기”라고 전제한 뒤 포격으로 부서진 집 신축이 주민 간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고 귀띔했다. 전에 허름했던 집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끔한 양옥으로 단장되자 이웃들이 시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민들 간에는 ‘로또를 맞았다’는 빈정거림도 나왔다. 실제 집과 창고가 신축된 주민은 “이웃의 눈총으로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밝혔다. 인심이 흉흉해진 데에는 당국에 대한 불만도 작용하는 것 같다. 성조차 밝히기를 거부한 주민은 “포격사건 이후 정부가 각종 지원책을 발표해 섬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폭격 맞은 집이 새집으로 된 것 말고는 좋아진 것이 없다.”고 비꼬았다. 주민들은 가정용 보일러에 쓰는 기름에 대해 면세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반 등유가 드럼당 39만원인 것에 비해 면세유는 21만원에 불과해 면세유를 공급받을 경우 생활비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최모(54)씨는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정부가 주민들에게 정주환경을 보장한다며 섬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으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주민 1인당 월 5만원의 정주생활지원금이 지급되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주민들은 나아가 의료시설과 생활편의시설 부족을 하소연한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300명이 넘어 보건소 만으로는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국이 섬에 작은 병원이라도 하나 세워주거나 주민이 군부대 의무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모(51)씨는 “목욕탕 하나 없어 목욕을 하려면 인천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에서 주민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섬에 살라고 하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안정돼 보이지만 내재된 불안과 불만, 포격 2주년을 맞은 연평도의 현주소다. 연평도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주말 외출 준비, 3일 전부터하는 여성들

    여성의 몸치장에 들이는 시간에 불평불만을 보이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은 ‘왜 단지 밖에 나갈 뿐인데 옷을 고르고 화장과 머리 모양에 긴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세상의 여성들은 실제로는 수십 분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 단위로 주말 외출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일(현지시각)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 온라인 쇼핑 사이트 ‘뉴룩’(New Look)이 20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 조사에서 여성은 토요일 밤 외출을 위한 준비를 수요일 오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3일 전부터 외출 준비를 한다고 답한 여성들은 주로 입고 나갈 옷과 신발에 관한 내용의 메일(문자메시지)을 친구나 남자 친구에게 10번, 전화를 5번, 페이스북 게시물로 8회, 그리고 트윗을 3번 이상 날리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완벽한 의상 선택을 위한 정보 수집과 그날의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서핑으로 평균 2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덧붙여서 외출 준비만 3일 걸린다는 여성들은 이 시간을 조금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들 여성 3명 중 2명은 “외출 자체보다 지금까지의 준비가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번 설문을 통해 외출 당일 몸치장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2시간, 결정하지 못하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횟수는 3회 이상인 것도 밝혀졌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김병일 사람과 향기] 우러나는 효도가 건강 장수의 비결이다

    [김병일 사람과 향기] 우러나는 효도가 건강 장수의 비결이다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 잠시 소개했던 애일당 건립 50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18일 안동 낙동강변 농암 종택에서 열렸다. 아침에는 안개가 짙었으나 행사가 시작될 즈음엔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열려 행사장을 가득 메운 인근 각처 어르신들의 무채색 한복 차림들과 한 폭의 화사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투명한 가을 햇빛 아래서 500년 전 자신의 ‘할배’가 그랬듯이, 60에 가까운 농암 종택 17대 종손이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부리며 어르신들을 모셨다. 또한 농암 선생이 안동부사 시절 고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양로연을 베풀면서도 때때옷 춤을 추었다는 일화에 맞추어 안동시장도 함께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500년 전에 뿌려진 효행 씨앗 하나가 아직도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그날의 행사는 우리의 전통 효문화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옛 선현들은 왜 효를 그리 중시했을까? 단순히 유교문화에 훈습된 결과일까? 애일당(愛日堂)은 조선 중기의 문인인 농암(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 선생이 지금으로부터 딱 500년 전인 1512년 자신의 집 근처에 지은 정자이다. ‘애일’(愛日)은 말 그대로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연로한 부모님이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날을 아껴 효도를 하겠다는 농암 선생 자신의 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희구지정’(喜懼之情)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喜) 한편으로는 두렵다(懼).”고 한 ‘논어’의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버이가 오래 건강하게 살면 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렵다는 것이다. 오래 사셨다는 것은 곧 그만큼 살아 계실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히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효심이 아닐 수 없다.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정자에 ‘애일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농암 선생의 마음이 딱 그러했을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 행하는 효도, 옛 선현들의 삶에서 효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떤 행동의 본질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라면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고통스럽다.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촉발되는 행동은 삶에 포만감을 준다. 농암 선생의 가족이 유명한 장수 집안이라는 사실은 이 점에서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농암 선생의 부모는 부친이 98세, 모친이 85세를 살았고, 숙부 역시 99세를 살았다. 농암 또한 89세로 장수하였고 동생도 91세를 살았으며, 자식들 역시 많게는 86세부터 적게는 65세까지 그 옛날치고는 적지 않은 수들을 누렸다. 효는 단순히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일방향적인 헌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봉양을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최고의 웰빙 덕목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장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우리 시대 장수자들의 삶이 과연 행복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섭생과 의술의 도움에만 힘입은 장수문화의 뒷모습은 너무 황량하다. 노인 학대와 빈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노인층의 자살률 증가 등,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요즈음의 장수시대가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들이다. 예로부터 장수는 오복(五福)의 첫째로 꼽혔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가 이어진다면 장수는 오히려 저주일 수 있다. 모두가 맞이하는 장수시대. 이 시대를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만드는 열쇠는 우리들 자신이 쥐고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심으로 부모를 모시고, 자기 부모를 모시는 바로 그 마음으로 다시 이웃사람의 부모를 대하는 일, 우리 시대를 축복받는 장수시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작지만 힘 있는 실천들이다. 그리고 그런 실천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다음세대의 노인인 우리들 자신이다. 애일당 건립 500주년 기념행사를 지켜보면서,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100·끝) 의령 백곡리 감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100·끝) 의령 백곡리 감나무

    감나무는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우리 곁에 흔하게 심어 키우는 친근한 나무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의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여느 시골 집 뒤란이든지 감나무 없는 집이 없다. 물론 감나무는 감을 얻기 위해서 키운다. 그러나 감나무 곁에는 뱀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도 감나무를 심는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아녀자들의 발길이 잦은 뒤란 장독대 곁에 키우면 이래저래 요긴할 수밖에 없다. 집 마당에 키우기에 이보다 좋은 나무도 없을 게다. 흔한 나무이지만, 만일 바람에 쓰러진다든가 병충해로 죽어 없어진다면, 그 상실감은 다른 나무에 비할 수 없이 크다. 흔하디흔한 나무가 우리 집에만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른바 뒤늦은 존재감이다. ●열매를 못 맺어 베어낼 위기에 처하기도 꼭 10년 전인 2002년 이른 봄. 경남 의령 정곡면 백곡리 감나무를 처음 만나던 날, 나무 앞을 산책하던 마을 노인이 처음 던진 말은 “저깟 나무를 뭐하러 찾아왔우!”였다. 당시 여러 자료를 톺아보며 알게 된 의령 백곡리 감나무의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중 노인의 반응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백곡리 감나무는 시골 집 뒤란에서만 보던 감나무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그 규모가 무척 컸다. 첫눈에도 우리나라의 감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큰 나무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훌륭한 나무를 ‘저깟 나무’로 부르다니. 노인이 나무를 무시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무는 크고 잘생겼지만, 감을 맺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 ‘감이 열리지 않는 감나무가 무슨 쓸모냐.’는 게 그 노인을 비롯한 그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머지않아 베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백곡리를 다녀와 곧바로 출간한 졸저 ‘이 땅의 큰 나무’에는 그날의 안타까움을 담아 이 감나무야말로 오래 보존해야 할 우리의 자연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그 책에 소개한 백곡리 감나무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 중에 독립 PD 박봉남씨가 있었다. 그는 이만큼 큰 감나무라면 세계적으로도 기록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며 일년 동안 나무의 변화를 촬영하겠다고 했다. 감이 안 열린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감나무는 사람이 정성을 들이면 감을 맺는다.”며 그건 결코 흠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는 결국 2005년 한 해 동안 촬영을 강행했고, 2006년 1월에는 ‘감나무, 자서전을 쓰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KBS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450년 고목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무 주변은 깨끗이 정돈됐고, 나무 옆으로 이어지던 길 끝에 놓였던 우사(牛舍)는 들녘 맞은편으로 옮겨 갔다. 물론 마을 사람들의 나무에 대한 생각도 현저하게 달라졌다. 나무는 그 사이에 천연기념물 제492호로 지정돼 나무로서는 최상의 대우를 받는 상태가 됐다. “참 부지런히도 찾아왔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잊어 가던 감나무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옛날처럼 나뭇가지에 그네를 걸고 아이들을 데려다 태우기도 했지. 그해에 감이 꽤 많이 열렸어. 그래 봐야 고작 열댓 개 됐으려나.” 가을바람 깊어지고 다시 찾아간 백곡리 마을에서 만난 전병환(80) 노인은 10년 전의 상황을 천천히 돌아보며 이야기를 짚어 냈다. 전 노인도 한 해 내내 나무를 찾아와 수굿하게 촬영하던 박봉남 감독을 또렷이 기억했다. 촬영이 한창이던 그해 가을에 감이 얼마나 열리는지를 조바심 내며 기다리던 상황까지 돌아보았다. “아예 안 열리는 건 아니었어. 안 열리는 때도 있긴 했지만, 어떤 때는 가지 끝에 서너 알쯤 열리기도 했지. 지난해에는 열댓 개쯤 열렸는데, 올해는 하나도 안 열렸더구먼.” 공중파에 방영되면서부터 백곡리 감나무의 위상은 달라졌다. 인근 도로 곳곳에 세워진 ‘백곡리 감나무 찾아가는 길’이라는 큼지막한 안내판만 봐도 크게 달라진 상황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백곡리를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무 주위는 몰라보게 단정해졌다. 나무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마침내 2008년 3월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졸저를 통해 나무의 존재를 알린 지 5년, 다큐 방영 후 2년 만의 일이다. 하마터면 베어질 뻔한 위기에 처했던 나무가 당당히 우리나라 최고의 자연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백곡리 감나무의 나이를 450년쯤으로 추정했다. 대개의 감나무가 200년 혹은 250년 정도 사는 것에 비하면 무척 오래된 셈이다. 게다가 줄기 둘레는 5m 가까이 될 정도로 굵으며, 키는 무려 28m까지 솟아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감나무임이 틀림없다. ●소똥이나 그네 뛰는 아이들이 있어야 “감나무는 사람이 곁에 자주 다가가야 잘 크는 나무야. 소도 붙들어 매고, 두런두런 사람이 모여서 그네도 뛰어야 하지. 소똥이나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죄다 좋은 거름이지. 그래야 감에 단맛이 드는 법이야.” 나무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레 사람과 어울리며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이야기다. 똑같이 자연의 한 부분인 사람과 나무는 결국 서로 부대끼며 살아야 서로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자연주의적 삶의 깨달음이다. 4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람의 입맛에 충실한 열매를 맺느라 온힘을 바친 한 그루의 늙은 감나무는 이제 생식 능력이 고갈돼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나무로 남았다. 무릇 이 땅의 모든 감나무들이 가지마다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이 계절, 백곡리 감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나뭇가지 사이에 지은 허공에 사람살이의 흔적을 음전하게 담았다. 감이 안 열려도 열매보다 풍성한 사람살이의 열매를 담고 서 있는 이 땅에서 가장 풍요로운 감나무의 가을 풍경이다. 감나무의 뒤늦은 존재감처럼 남기를 100회에 걸쳐 ‘사람과 나무 이야기’를 애독하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감나무의 뒤늦은 존재감처럼 이 칼럼을 통해 보여 드린 여러 나무에 대한 느낌이 지금보다 더 오래 마음 깊숙이 머무르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글 사진 의령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남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576. 남해고속국도의 함안나들목으로 나가면 곧바로 나오는 돈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넓게 펼쳐진 들녘을 따라 3.6㎞ 가면 악양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다시 좌회전해 마을로 접어든 뒤 유곡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법정로라고 부르는 지방도로 1011호선을 타고 4.3㎞쯤 가면 오른쪽으로 백곡리 입구가 나온다. 갈림길에 ‘백곡리 감나무’ 찾아가는 길 안내판이 두어 번 나온다. 백곡리 마을 어귀의 길 왼편에 나무가 있다.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대중음악] ●이승기 희망 콘서트 12월 1~2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만능 엔터테이너 이승기가 배우나 MC가 아닌 가수로 돌아와 펼치는 콘서트. 4년째를 맞는 이번 콘서트에서 이승기는 한층 더 새롭고 향상된 음악과 공연으로 화려한 무대를 꾸민다. 5만 5000~13만 2000원. 1544-1555. [국악·무용] ●무용 ‘공간, 그 무한의 가능성Ⅶ’ 11월 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002년부터 진행한 김명숙 늘휘무용단의 ‘공간’ 시리즈의 일곱 번째 무대. 무용단의 젊은 안무가들이 다른 영역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실험적인 무대를 꾸미며 무용 공연의 가능성을 넓힌다. 2만~3만원. (02)3277-2590. ●국악 ‘예인의 만남’ 11월 8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젊은 국악인 4인이 농익은 연주를 들려준다. 이건용 서울시오페라단장의 ‘풀’, 박경훈의 ‘여명’을 초연하고 김성경 추계예대 교수의 ‘소리로 오는 비’, 최재륜 전남대 교수의 ‘최옥산류 가야금 산조’도 들려준다. 2만~3만원. (02)399-1114~6. [연극·뮤지컬] ●애니 뮤지컬 ‘로보카 폴리’ 11월 3~4일 경기 고양 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어린이들에게 ‘폴총리’로 불리며 인기를 끄는 ‘로보카 폴리’가 애니뮤지컬로 태어났다. 뽐내기 대회에서 1등을 하려다가 에너지를 낭비해 마을 전기가 바닥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생활 속 부주의와 무관심이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교훈을 담았다. 만화를 그대로 재현한 무대, 캐릭터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장면이 생동감을 더한다. 3만~5만원. 1544-5974. [미술·전시] ●최재은 ‘오래된 시’전 11월 22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해 질 녘부터 동틀 때까지 8시간 동안 별이 반짝이는 장면을 찍은 영상을 보여주는 암실, 그날의 느낌을 담은 짧은 문구를 낡은 책 표지에다 목탄으로 일일이 새겨 놓은 작품 등이 눈에 띈다. 조금 더 개념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 일본에서 독일로 활동 무대를 바꾼 작가의 고민이 묻어 나온다. (02)735-8449. ●포케르트 더 용 ‘더 불스 아이’(The Bull´s Eye)전 12월 9일까지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삼청. 화학회사들이 제작한 원색 그대로의 스티로폼, 폴리우레탄과 같은 소재를 활용해 식민주의와 자본주의가 창출해낸 인물 군상들을 풍자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02)723-6190.
  • [저자와 차 한 잔] ‘당신, 연암’ 펴낸 문학박사 간호윤

    [저자와 차 한 잔] ‘당신, 연암’ 펴낸 문학박사 간호윤

    나직이 읊조려 본다. “당신, 연암” 열한 개 목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온다. 말본새가 다 다르다. 청문회에 불려나온 증인이나 참고인이 각자의 처지에서 한 인간을 그려보는 것 같다. 쌍따옴표만 홀따옴표로 갈음한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평전 ‘당신, 연암’(푸른역사 펴냄, 1만 5000원)을 쓴 간호윤(51)씨를 하늘색 맑았던 지난 11일 만났다. 오후 6시 만나 그날의 어스름을 배경으로 한참 차를 나눴다. ●저서엔 손자·청지기·부인 등 다양한 인물 등장 그의 책은 똑 청문회장을 옮긴 르포르타주다. 먼저 연암을 향해 수굿하지 않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다. 묫자리를 다투며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 일조한 유한준, 소설을 끔찍히 경계해 많은 소설을 낸 그에게 자송문을 권할까 고민한 정조, ‘연암집’을 펴내 할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없다는 손자 박규수가 등장한다. 다음으로 연암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이들이다. 마님이 눈을 감은 다음 날 이승을 떴다는 기록이 전하는 청지기 김오복, “문 앞엔 빚쟁이가 기러기처럼 줄 섰고”란 남편의 글을 인용하면서도 애틋한 부부애를 전한 부인 이씨, 미물에도 다사로웠던 부친이 뜻밖에 ‘개를 키우지 마라’고 했던 이유를 되새기는 장남 박종채가 그들이다. 다음은 평생 우의를 나눈 벗들. 처남이자 ‘열하일기’를 국제정치적으로 접근할 정도로 깊이가 있었던 이재성, TV 드라마로 소개돼 낯익은 제자인 무사 백동수, 끼니를 거르는 게 일이었던 연암의 살림을 부축한 유언호 등이다. 마지막으로 ‘연암집’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고 다소 뜨악한 주장을 남긴 연암과 저자다. 연암은 “나는 냄새나는 똥주머니로 이 땅에서 예순아홉 해를 산 조선의 삼류선비”라고 되뇌고, 저자는 “백지에 조선의 달빛 같은 글이 떨어진다.”며 평생의 사표로 삼은 옛 스승을 흠모한다. 책을 읽는 내내 연암의 불면증과 우울이 산마루에 걸린 달빛마냥 아프게 여겨졌는데 그러고 보니 저자가 연암을 빼닮았다. 노론 벽파로서 보장된 출셋길을 마다하고 과거 시험지에 시화만 그려 놓던 일이나 가난을 가학(家學)으로 삼은 점, 글 쓰는 것을 전쟁처럼 여겼던 것이 그렇다. ●이번 책이 벌써 열아홉 번째 순천향대 국문학과를 졸업해 고교 교사로 10년 일하다 뒤늦게 한국외국어대에서 석사를, 인하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시간강사로 여러 대학을 나가는 틈틈이 경기 부천의 서재 ‘휴휴헌’에서 책을 쓰는데 이번이 열아홉 번째다. “학력이 변변찮아서인지 교수 임용에 낸 이력서만 100여통이 넘고, 어느 날은 부친 빈소의 병풍 뒤에서 이력서를 꾸민 아픔도 겪었어요. 한때 극단적인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 ‘논어’의 한 대목 ‘힘이 부족하다고? 예서 그만 두려는구나. 지금 네 스스로 선을 긋는구나’를 읽고 정신을 차렸지요.” 자신의 서가(書架) 대여섯 칸을 채울 만큼 연암을 다룬 저작들은 세상에 널렸다. “2005년에 ‘개를 키우지 마라’를 내면서 전공인 고소설만으로, 내 얘기만으로 연암을 얘기해선 안 되겠다, 그의 인물됨을 대중에게 쉽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곰삭여 책을 내게 됐습니다.” 지금은 178㎝에 80㎏ 나가지만 한창 공부할 때는 50㎏ 정도 나갔다고 한다. “어느 날 딸의 몸이 제 팔에 스치게 됐는데 소스라치게 놀라더군요. 그만큼 아비 노릇을 못했습니다.” 신선한 필체만으로 책의 가치를 가둘 순 없다. 쪽마다 오롯이 새겨야 할 우리말이 그득하다.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묻자 “책에 글항아리란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퍼뜩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둡니다.”라고 답한다. 몇년 전 학회에서 “당신 논문은 학문 발전에 0.001%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험구를 들었다며 허허로이 웃은 그는 “평생 책을 낼 겁니다. 권세가들로부터 문둥이란 비난을 듣고도 ‘그래 난 문둥이다’라고 당당했던 그분처럼 뭇 사람들에 연암의 인간다움이 역병(疫病)처럼 돌게 만들었으면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글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야구 인기에 게임도 특수… 올 야구게임 승자는?

    야구 인기에 게임도 특수… 올 야구게임 승자는?

    #자칭 ‘부산갈매기’ 박모(39)씨는 출퇴근 시간에 모바일 야구 게임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는 ‘마구마구’의 스마트폰 버전인 ‘마구마구 2012’를 즐긴다. 야구를 좋아해서 여러 가지 야구 게임을 해보지만, 평소 경기 방식 등이 익숙한 게임을 스마트폰에서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구 마니아 장모(32)씨는 회사에서도 야구경기 정보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는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그날의 경기 일정을 확인하고 경기 상황을 체크한다. 장씨는 회의 중에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점수가 났다는 알람 메시지가 뜨면 마치 야구장에 있는 것처럼 즐겁다. 야구 팬들의 피를 뜨겁게 하는 가을잔치가 한창이다. 13경기째 연속 매진 행진을 기록할 정도로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의 열기는 뜨겁다. 프로야구 인기에 게임의 주가도 동반 상승세다.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특수에 동참하기 위해 게임 업체들은 앞다퉈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하고 있다. 야구 팬들을 사로잡기 위한 이벤트 마련에도 분주하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국내 야구게임 시장 규모는 지난해보다 5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1000억원에서 올해는 모바일 야구 게임까지 더해 1500억원은 거뜬히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업체 관계자는 “7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이 온라인과 모바일로 이어지고 있다.”며 “사실적인 그래픽, 색다른 경기 방식을 도입하는 등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온라인 게임업체들 ‘더욱 리얼하게’ 온라인 야구 게임의 승부는 이용자들에게 얼마나 더 ‘리얼하게’ 느끼게 해주느냐에 달렸다. 따라서 선수들의 동작, 그래픽 등을 실물처럼 구현하는 실사 경쟁이 치열하다. 이를 위해 CJ E&M 넷마블은 KBO 소속 선수 350여명의 고유 얼굴과 40여명의 특이 투구·타격폼까지 사실적으로 구현한 온라인 신작 야구게임 ‘마구더리얼’의 첫 비공개 테스트를 진행해 시장의 반응을 가늠해 보기로 했다. 마구더리얼은 실제 응원 소리도 적용해 현장감을 살렸다. 넷마블 측은 “타격 순간 타구가 시원하게 쭉 뻗는 느낌 등 진짜 경기를 하는 것처럼 만들어 야구의 역동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넥슨은 2K 스포츠와 공동 개발 중인 야구 온라인게임의 타이틀을 ‘프로야구 2K’로 확정 짓고 맛보기 영상을 최근 공개했다. 프로야구 2K는 ‘2K 시리즈’의 최신 엔진을 기반으로 사실적인 그래픽을 구현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극대화했다. 네오위즈게임즈는 자체 개발한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 ‘야구의 신’ 비공개 테스트를 끝내고 온라인 야구게임 ‘슬러거’에서 이벤트를 개최한다. ‘포스트시즌 명승부 시리즈’ 이벤트는 슬러거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다음 달 20일까지 진행한다. NHN 한게임은 인기 게임 ‘야구9단’에서 사용자 편의성을 개선하는 다양한 업데이트를 단행한다. ●LG유플러스·SKT·KT도 참여 이통 3사 가운데 LG유플러스는 실시간 네트워크 야구배틀 게임인 ‘워너뱃’(Wannabat)을 안드로이드 버전으로 출시했다. 워너뱃은 스마트폰 게임 개발업체 비투소프트가 개발해 지난 7월 애플 앱스토어에서 공개한 게임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 게임 순위 1위를 차지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SK텔레콤과 KT는 야구 중계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SK텔레콤의 롱텀에볼루션(LTE) 전용 고화질 야구 중계 서비스인 ‘T베이스볼’은 출시 두 달여 만에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58만회를 기록했다. T베이스볼 이용자는 홈런, 득점·역전 찬스, 투수 교체 등 꼭 보고 싶은 장면을 미리 설정해 두면 알림 메시지로 통보를 받을 수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준플레이오프 첫 경기가 열린 이후 다운로드가 급증, 포스트시즌에 누적 다운로드 수가 100만회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KT는 원하는 팀의 화면이나 해설을 직접 선택해 시청하는 ‘2012 프로야구 편파중계 및 멀티앵글’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모바일 야구 게임 ‘내가 제일 잘나가’ 스마트폰 이용자가 3000만명을 넘어서면서 스마트폰 야구 게임 출시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온라인 게임업체 넥슨은 스마트폰 야구 시뮬레이션 게임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2013’을 이달 중 내놓으며, 넷마블은 스마트폰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인 ‘마구매니저’를 이통 3사 오픈마켓을 통해 선보였다. 모바일 게임업체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컴투스의 ‘홈런 배틀’ 시리즈는 전세계 2000만 다운로드를 돌파했다. 또 포스트시즌 개막을 기념해 리얼 모바일 야구게임 ‘컴투스 프로야구2012’에서 승리팀 예측 이벤트를 실시한다. 21일까지 이벤트에 참여한 이용자 가운데 결과를 맞힌 300명에게 다양한 선물을 제공한다. 홍혜정기자 jukebox@seoul.co.kr
  • 잘 겹쳐입은 당신, 가을속으로 GO!

    잘 겹쳐입은 당신, 가을속으로 GO!

    유난히 청명한 하늘이 울긋불긋 물든 가을 산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설레는 마음으로 단풍처럼 곱게 차려입고 서둘러 산행에 나서고 싶은 계절. ‘산에도 눈이 있다’는 예전 광고 카피처럼 멋스럽게 차려입는 것도 좋지만 가장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은 예년보다 더 크게 체감되는 일교차다.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체온 유지가 관건이다. 본격적인 등산철을 맞아 아웃도어업체들이 제안하는 옷입기 공식은 ‘겹쳐입기’다. 얇은 옷을 여러 개 껴입어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것이 즐거운 산행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노스페이스는 이번 시즌 ‘세븐인원(7-in-1) 시스템’을 적용한 겹쳐입기를 제안한다. 재킷 한 벌과 3종류의 고기능성 내피를 그날의 날씨와 용도에 따라 7가지로 바꿔 입을 수 있도록 했다. 방수·방풍·투습 기능이 뛰어난 하이벤트 2L 재킷에 다운 라이너, 가볍고 따듯한 플리스 라이너, 패딩 베스트 등 4종을 한 세트로 묶어 55만원에 내놨다. 노스페이스 관계자는 “일교차가 심하고 비·눈·바람 등 변화무쌍한 가을과 겨울에는 한 가지 제품으로 야외활동에 나서는 것보다는 겉옷과 내피를 ‘따로 또 같이’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밀레에서도 겹쳐입기의 장점을 부각시킨 ‘매킨토시 GTX 쓰리인원 재킷’을 야심차게 밀고 있다. 특수 원단을 사용한 내피를 자랑으로 내세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복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한 ‘아웃라스트’ 원단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원단은 극한 환경에서도 적정 체온을 유지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재킷 원단은 고어텍스 퍼포먼스 셸 2레이어 소재를 사용해 기본적인 방풍·방수·투습 기능을 갖췄다. 재킷 원단 표면을 헤링본 느낌의 격자무늬로 표현해 패션 감각도 놓치지 않았다. ‘도심에서 입는 등산복’은 유행의 한 코드다. 특히 멋부리기 좋아하는 젊은 층들의 선호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코오롱스포츠가 지난해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을 고려해 내놓은 트래블라인은 한층 더 과감해졌다. 시즌 호피 무늬의 레오파드, 군복 패턴인 카모플라주 등의 도발적인 문양을 적용해 시선을 확 끈다. 신제품 가운데 ‘트래블 피코트’는 카모플라주 문양의 다운 내피를 별도로 부착, 멋스러움은 물론 보온성도 높여 멋을 아는 남성 소비자들을 유혹할 만하다. 야외활동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예측할 수 없는 날씨다. 그러다 보니 아웃도어 의류의 기능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와 욕심은 끝이 없다. 레드페이스가 전문가를 위한 기능성 트레킹 라인에 집중한 이유다. 레드페이스 관계자는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쾌적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콘트라텍스’ 소재의 다운재킷과 팬츠로 전문성을 더욱 높였다.”고 말했다. 콘트라텍스는 방수·방풍·투습은 기본에 열을 저장하는 기능까지 갖춘 소재라는 설명이다. 레드페이스 쉘 히트 구스 재킷은 축열 기능의 멤브레인이 적용되어 보온성이 극대화된, 최첨단 콘트라텍스 소재의 프리미엄 구스다운 제품이다. 가을철에 맞춰 와인과 오렌지, 브라운, 카키 등을 사용해 따뜻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강조했다. 요즘 등산 팬츠를 보면 부쩍 예뻐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활동성만을 강조하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절개선과 색의 조합을 사용해 패션 감각을 높였다. 르까프가 새롭게 선보인 팬츠 라인 쓰리핏(3FIT)도 그중 하나다. 베이직핏, 트레킹핏, 익스트림핏 등 세 가지로 나와 야외활동 유형 및 체형에 맞게 선택해서 입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축성이 뛰어나고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를 강조한 디자인으로 뒤태가 예뻐 보이는 것도 장점이다. 베이직핏은 가장 기본적인 제품으로 밑위가 길고 허벅지와 엉덩이 부위에 여유감을 줘 편안한 느낌을 준다. 트레킹핏은 밑위가 짧고 허벅지와 엉덩이 둘레를 줄여 ‘롱다리’를 만들어준다. 익스트림핏은 이들 중 가장 몸에 딱 붙게 디자인되었고 밑위가 짧고 밑단을 줄여 활동성을 극대화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