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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병옥 박사 동상 철거…“그는 아우내만세운동 때 없었다”

    조병옥 박사 동상 철거…“그는 아우내만세운동 때 없었다”

    “조병옥(1894~1960) 박사는 1919년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 때 미국 유학 중이었다” 충남 천안시는 지난달 8일 병천면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 ‘그날의 함성’ 조형물 중 조병옥 박사 동상(청동)을 철거했다고 26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 박사는 아우내 만세와 무관하다”며 철거를 요구한 때문이다. 대신 시는 5000만원을 들여 그 자리에 인물을 특정할 수 없는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그날의 함성 조형물은 2009년 10월 ‘3·1 운동 90주년’을 맞아 모 작가가 횃불을 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1919년 4월 1일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당시 시위군중 10명을 동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 박사를 닮은 조형물은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작가가 유관순 열사 뒤에 만세운동을 한 일반 주민의 동상을 만들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조 박사 부친의 조형물을 넣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몰라 조 박사 사진을 보고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동상에 조병옥 박사라고 표기하지 않았지만 관람객들이 조 박사로 알아 시민단체에서 줄기차게 철거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조 박사는 1918년 미국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25년 귀국했다.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는 2년 전부터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빨갱이란 이념의 잣대를 씌워 제주도를 피로 억압한 조병옥을 독립만세 기념공원에 동상으로 건립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천안시에 철거를 요구했다. 제주 4.3 사건 때 조 박사는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있었다. 이들은 이날 천안시청에서 조 박사 동상 철거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조병옥은 ‘공’이 있지만 ‘과’도 분명하기 때문에 동상 교체 과정을 기록한 표지판을 설치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추가로 요구했다. 이에대해 시 관계자는 “동상 교체 과정을 담은 표지판을 세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2년 만의 대면 수업/번역가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2년 만의 대면 수업/번역가

    지난주 화요일 거의 2년 만에 대학에서 대면 수업을 시작했다. 그날의 첫 수업에 들어가 보니 여러 명이 빠져 있었다. 집안 사정으로 지방에 가 있어서 못 온다고 한 학생도 있었고, 아무 설명 없이 결석한 학생도 있었다. PCR 검사까지 받아 가며 힘들게 수업에 온 학생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래도 그들은 다 3, 4학년이어서 최소한 1년은 캠퍼스 생활을 맛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엄습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벌써 졸업이 코앞인 셈이어서 이제야 겨우 대학 강의실에 들어올 수 있게 된 1, 2학년 못지않게 어이가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대면 수업이 좋나요, 비대면 수업이 좋나요?” 나는 대뜸 이 질문부터 던졌다.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들 쭈뼛대기만 했고, 그들의 표정을 읽으려고 해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여의치 않았다. 아마 한편으로는 좋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싫고 귀찮을 것이다. 선생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오랜만에 1시간 반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는데, 앞으로 다시 일주일에 사나흘씩 그렇게 출퇴근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하지만 그날 두 번째 수업에서 만난 두 대학원생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20대 중국인 여학생인 그들은 한국 유학 후 내리 두 학기를 동영상 수업만 들었기 때문에 대면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에 감격했다. 그 중 구이저우성 출신 A가 소리쳤다. “학부 강의도 청강할 거예요. 한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요!” 산지인 구이저우성은 중국에서도 깡시골에 속한다. 기껏 한국의 대도시에 유학을 왔는데, 매일 좁은 셋방에 처박혀 밤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산둥성 출신 B는 대도시 지난에서 왔지만, 한국어를 잘 못하고 성격도 소극적이어서 코로나 시국의 한국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너희, 못 먹어 본 한국 음식 있으면 다 말해!” 수업을 마치고 젊은이는 절대 안 갈 듯한 오래된 고깃집에 함께 갔다. 둘 다 양념 돼지갈비를 못 먹어 봤다고 해서였다. 아침을 늦게 먹어 입맛이 없던 내가 가위를 들었다. 고기가 금세 익길래 서둘러 고기를 썰어 나눠 주며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선생님, 완전 감동이에요. 꼭 아빠 같으세요.” 아니,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었기로서니 이제 학생한테 오빠도 아니고, 삼촌도 아니고, 아빠 같다는 소리를 듣게 됐나. 서글픈 생각이 확 들려는데 문득 A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B가 또 말했다. “저희는 이번 추석에도, 지난 설에도 집에 못 갔어요. 우리 중국인은 설 연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잖아요. 하지만 중국에 가면 자가격리 3주, 한국에 돌아오면 자가격리 2주여서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도 오지 말라 하시고….” 내가 무슨 위로를 해줄 수 있었겠나. 잠자코 고기만 굽고 있다가 불쑥 부모님과 통화는 자주 하느냐고 물었다. 역시 한국이나 중국이나 딸은 달랐다. 아침저녁으로 영상통화를 한다고 했다. “따님하고 매일 영상통화하지 않나요? 얼마 전에 영국 갔다면서요.” 맞다. 내 딸도 지금 해외살이 중이다. 난생처음 집을 떠나서 그런지 역시 매일 한두 시간씩 엄마와 열렬히 영상통화를 한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전에 이미 완성됐지만, 보편화되지 못한 기술과 미리 예견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한 사회상이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생활 속에 성큼 들어왔다. 이 감염증은 조만간 인류에 의해 통제되겠지만 우리의 바뀐 삶 중 상당 부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를 구성할 것이다. 방금 친한 중국 작가에게 메시지가 왔다. 내일 중국 문단에서 온라인 작가 간담회가 열리는데, 한국의 중국 문학 번역가 자격으로 참가해 몇 마디 해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정중히 사양하며 말했다. “2년 동안 중국에 갈 기회도, 중국인을 만날 기회도 없어 중국어를 다 까먹었어요.”
  • ‘102일’ 역사의 남자

    ‘102일’ 역사의 남자

    6월 27일 롯데 3-2 리드 때 폭우 탓 중단역대 10번째·10구단 체제 첫 서스펜디드 안치홍, 2타점 적시타 두 방… 7-6 진땀승‘최단·최연소 2000안타’ 손아섭 기록 단축102일 전 멈췄던 시간을 향해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프로야구가 마침내 시간여행을 마쳤다. 갑자기 쏟아졌던 그날의 폭우처럼 예측할 수 없던 1점차 치열한 승부에서 웃은 팀은 롯데 자이언츠였다. 롯데가 프로야구 역대 최장 기간에 걸친 1경기의 승자가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롯데는 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서스펜디드 게임에서 안치홍의 4타점 맹활약에 힘입어 7-6으로 승리했다. 6월 27일 당시 4.5경기가 차이 났던 두 팀의 승차는 경기 종료 후 4경기 차이로 줄었다. 이날 경기는 프로야구 역대 10번째 서스펜디드 게임이었다. 지난 6월 27일 두 팀의 경기가 7회초 갑작스러운 폭우로 중단되면서 3개월도 더 지나 열렸다. 지난해 코로나19로 특별 서스펜디드 규칙(5회 이전 우천시 노게임이 아닌 서스펜디드로 진행)이 적용된 2경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서스펜디드로는 2014년 8월 5~6일 부산에서 열린 롯데와 NC 다이노스의 경기 이후 7년 2개월 만이다. 10개 구단 체제에서는 최초다. 같은 경기이기 때문에 먼저 출전했다가 교체된 선수는 출전할 수 없었다. 지금은 불펜으로 전환했지만 이 경기에서는 선발로 출전했던 이영하가 대표적이다. 당시와 1, 2군 선수 명단이 다르다 보니 그때 2군에 있었던 두산의 박건우, 김재환도 이날 경기에 투입될 수 있었다. 후반기 상승세를 탄 두 팀의 대결인 만큼 경기는 치열했다. 롯데는 7회초 1사 2, 3루를 이어간 정훈이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안치홍의 타구가 유격수와 좌익수, 중견수 사이에 떨어지면서 2점을 달아났다. 안치홍은 9회초 무사 2, 3루에에서 2타점 2루타로 쐐기를 박았다. 두산은 7회말, 8회말 1점씩 추가한 후 9회말 박계범의 2타점 적시타로 롯데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2사 2, 3루에서 양석환이 삼진으로 물러나며 역전에 실패했다. 래리 서튼 감독은 “이 정도까지 재미있지 않아도 될 경기였는데 지나치게 재미있게 흘러간 것 같다”며 치열했던 경기를 돌아봤다. 안치홍은 “당시에는 3타수 무안타여서 마음을 비우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타석에 임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과가 좋게 나와 매우 기쁘다”고 했다. 이날 경기로 손아섭의 2000안타 기록도 바뀌었다. 손아섭은 지난 8월 14일 LG 트윈스전에서 역대 최소인 1636경기, 최연소인 33세 4개월 27일의 나이로 2000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안타 1개를 쳤던 이 경기가 끝나면서 손아섭의 2000안타는 기존에 1999안타가 나온 7월 10일 대구 삼성라이온즈전으로 앞당겨졌다. 최종 기록은 1631경기, 34세 3개월 22일이다.
  • [유정훈의 간 맞추기] 날씨가 아니라 기후를 보자/변호사

    [유정훈의 간 맞추기] 날씨가 아니라 기후를 보자/변호사

    미래 세대의 부담을 이유로 국가부채 걱정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후손들이 겪을 환경 문제는 지금의 경제 상황을 들어 외면하는 이유를 묻고 싶기는 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미래 세대로 넘기는 정책을 위헌으로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우리 헌법재판소는 청소년기후행동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어떻게 판단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다음 세대의 문제에 가깝다는 인식에 꽤나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대해 알아볼수록 나에게 닥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죽기 전에 기후 재앙을 겪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 길어진 여름을 견디며 사라져 가는 가을과 봄을 아쉬워하는 수준을 넘어, 마치 코로나19가 일상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기후변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삶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겠다 싶은 것이다. 기후변화의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빠르고, 오늘의 환경 파괴는 내일의 기후변화를 증폭시킨다. 예컨대 빙하가 녹으면 햇빛을 반사하는 빙하가 줄어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햇빛을 흡수하는 바다 면적이 그만큼 늘어나며 기온 상승이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을 지났다는 예측도 과장이 아닌 듯하다. 일상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으나, 환경 문제는 애초부터 일회용품을 덜 쓴다거나 하는 개인적 실천의 영역이 아니다.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산업이 존재하고 거기 투자해서 이익을 얻는 투자자가 있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이 행동을 바꾸도록 돈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유효하고 적절한 해결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정치 공동체의 결단,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다. 올해 9월 노르웨이 총선에서 화석연료 문제가 주된 쟁점이었다. 노르웨이가 국부의 상당 부분을 북해 유전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도 기후변화 이슈는 전면에 드러났고 녹색당은 14.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약진했다. 심지어 환경과 기후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이는 미국도 지난해 대선에서 기후변화가 주요 이슈였고 기후변화 대응은 바이든 정부의 핵심 의제가 됐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현과 검증을 할 수 있는 기후변화 관련 공약은 없다고 하는 편이 맞다. 한국이 ‘기후 악당’으로 지목된 적도 있고 세계적 흐름에 역행해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및 가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올해 가을 하늘은 유달리 맑고 높다. 기후변화에 회의적인 사람들로부터 ‘대체 뭐가 문제냐’는 얘기를 듣기 딱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을 즐기느라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접어 두면 안 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언제나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이기 때문이다.
  • 함께 아팠던 항쟁… 가장 아팠단 여수… 아직 아프다, 여순

    함께 아팠던 항쟁… 가장 아팠단 여수… 아직 아프다, 여순

    2018년 여수 시작으로 지역 순회 합의올해 광양 차례인데 여수 유족회 반발“가장 큰 피해 지역”… 결국 여수로 변경“특정 지역 공격적 요구 끌려가선 안 돼”여순항쟁의 합동위령제 개최 지역을 놓고 전남 순천과 여수, 광양, 구례 등 동부권 지자체들이 매년 갈등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일부 유족회의 독선으로 여순항쟁의 정신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5일 여순10·19범국민연대에 따르면 2018년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순천과 여수, 광양, 구례, 고흥, 보성 등 동부권 시민단체와 유족회가 매년 10월 19일 여수를 시작으로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일부 유족회가 자신의 지역을 고집하면서 두 군데서 동시에 위령제가 열리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2018년에는 여수 이순신광장, 2019년은 순천 장대공원에서 열렸지만, 지난해에는 여수와 구례 등 두 군데에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특히 지난해 여순항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 사이렌 시간이 지역별로 차이가 나 도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여수는 오전 10시, 당초 개최 지역이었던 구례군과 인근 순천시는 오전 11시에 따로 따로 1분씩 울렸다. 사이렌 시간이 각각 달라 중앙경보통제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어려움이 많았고, 유족들조차 “그날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기억을 상기한다는 차원에서 준비한 추모 의미가 반감돼 아쉬움이 크다”고 비판했다. 여순사건 73주년을 맞는 올해도 또 위령제 개최 장소를 두고 지역 갈등이 커지고 있다. 당초 예정지는 광양이었다. 백운산을 중심으로 좌·우익 대립과 보복살상이 6·25 전쟁까지 이어지는 등 그 어느 지역보다 합동위령제로 화해와 상생의 분위기를 이끌어내야 할 지역이어서다. 그러나 여수유족회가 “여순사건 발발지이자 마지막 진압군의 탈환이 있기까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 여수”라면서 올해 위령제를 여수시에서 개최해 줄 것을 전남도 등에 건의하면서 갈등의 불씨를 키웠다. 우여곡절 끝에 광양유족회의 양보로, 올 위령제는 오는 19일 오전 10시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행사가 열린다. 광양은 다시 내년으로 미뤄졌다. 이마저 유족연합회 간 내부 문제와 특별법 제정 이후 관련 시·군이 서로 추념행사를 개최할 의사를 밝히면서 변동 가능성도 높다. 매년 유치 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여순10·19범국민연대는 “특정지역의 공격적 요구에 계속 끌려가서는 안된다”면서 “합동위령제를 두고 더 이상 전남동부지역이 감정 싸움을 하지 않는 화합의 장이 되도록 각 지자체와 유족회가 대의적으로 협력해주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며 발생한 일로 진압과정에서 전남 동부권 민간인 등 1만 1000여명이 희생됐다.
  • 김연아를 곡으로 만들면?…유튜브 무대 위의 작곡가 오땡큐

    김연아를 곡으로 만들면?…유튜브 무대 위의 작곡가 오땡큐

    작곡 크리에이터 ‘오땡큐’(OTHANKQ)로 유튜브에서 활동 중인 현병욱(39)씨가 유튜브에 뛰어든 건 지난 2015년. 음악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작곡을 전공하고 한때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활약했지만 평범한 회사원의 길을 걷던 그였다.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직업 특성상 며칠 밤낮을 지새우곤 했는데, 결국 시신경이 손상되는 녹내장 판정을 받게 됐다. 안정을 취하고자 뮤지컬 음악감독을 그만두고 가수 춘자의 프로듀서 생활도 해봤지만, 밤낮이 바뀐 생활은 여전했다. 그가 좋아했던 음악을 그만두고 일반 회사에 취직하게 된 이유다.“직장생활을 하면서 문득 든 생각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라는 거였어요. 제작자가 원하는 음악, 작품이 원하는 음악, 가수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주는 게 저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한 갈망 같은 게 많이 생겼어요.”그 무렵, 유튜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현씨는 ‘유튜브라면 하고 싶은 음악을 어떠한 제약 없이 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첫 콘텐츠로 ‘재창조 콘텐츠’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말 그대로 기존 유명 곡의 코드만 카피하고서 그 위에 새로운 악기와 멜로디를 넣어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 콘텐츠다.하지만 그가 더욱 주목을 받게 된 건 유명인이나 영화 캐릭터를 주제로 한 창작곡을 내놓으면서부터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시작해 폴 포크마, 네이마르, 손흥민, 김연아, 조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을 곡으로 만들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구독자는 어느새 20만 명이 훌쩍 넘어섰다. 유튜브에 업로드 된 음악만 수십 곡이 됐고 그러면서 그의 삶도 많이 변했다.“저는 철저하게 무대 뒤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 무대 앞으로 나오게 됐죠. 그만큼 기회도, 좋은 일들도 굉장히 많이 생겼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요.”현씨는 영감을 어디서 얻을까. 바로 작업실이다. 그가 지은 곡들은 대부분 화려하고 역동적이지만 사실 곡이 나오는 과정은 매우 정적이다. 작업실에 조용히 앉아 유튜브 등을 보다가 순간 영감이 떠오르면 그때그때 손이 가는 대로 그날의 느낌대로 노래를 만들어나간다.현씨의 인생관은 ‘즐거움’이다. 모든 순간, 모든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녹내장에 걸리면서부터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어요. ‘높은 산에 올라가지 말자, 굳이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아랫 공기도 신선한데’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오늘 하루 즐겁게 만족하며 사는 것이 저에겐 중요합니다.”그런 그의 인생관은 음악을 바라보는 가치관에도 그대로 반영된다.“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 좋은 곡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클래식이든 재즈든, 트로트든 상관 없죠. 음악적인 깊이보다도 그걸 듣는 사람이 즐기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생각대로 음악을 만들고 구독자들의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엄청 만족하고 즐겁습니다. 저는 그냥 음악이 좋아요. 그게 다죠. 음악을 만드는 게 재미있고 음악 듣는 게 좋아요. 음악에는 모든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죠.”유튜버 오땡큐로서, 그리고 음악인 현병욱으로서 그의 꿈은 무엇일까.“새로운 사운드 디자인을 만들어보는 게 꿈이에요. 음악도 패션과 마찬가지여서 세계 유수의 사운드 디자이너들이 사운드를 만들어 놔요. 그럼 이제 저 같은 작곡가들이 소스라 불리는 그런 사운드 디자인을 이용해 음악을 만들죠. 저의 최종 목표는 그런 사운드 디자인을 하는 겁니다. 그 사운드 디자인으로 나만의 색깔 있는 음악을 만들어서 스페인 이비자 섬에서 공연을 하고 싶습니다.”
  • “집에서 쫓겨나는 심정”… 홈플러스 노동자, 고용불안에 떤다

    “집에서 쫓겨나는 심정”… 홈플러스 노동자, 고용불안에 떤다

    “전 여기 마트가 제 집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집에서 가족들과 보낸 시간보다 여기에서 일한 시간이 더 많거든요. 그만큼 애착이 가요.” 경기 안산에 있는 홈플러스 안산점에서 ‘피커’(Picker) 업무를 하는 윤인숙(54)씨. 피커는 마트에서 고객 대신 장을 보는 사람을 말한다. 고객들이 온라인으로 주문한 상품을 매장 내 각 진열대에서 찾아 바구니에 담고 이 바구니들을 운반차에 실어서 배송기사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윤씨는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매장에서 일하는 동안 20㎏짜리 쌀 포대, 2ℓ짜리 물통 6개 등 무거운 짐을 옮기며 2만보를 걷는다. 그러다 보니 발바닥이 성할 날이 없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냉찜질하며 일하는 윤씨가 이곳에서 근무한 기간은 올해로 15년째다. 윤씨는 26일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면서 “여기가 영업이 잘돼야지 내게도, 내 가족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매출 5위권 안산점도 21년 만에 폐점 하지만 윤씨가 안산점에서 일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안산점은 오는 11월 12일까지만 영업하고 문을 닫는다. 전국에 있는 홈플러스 매장 130여곳 중 매출 규모 면에서 상위 5위권에 달하는 영업점이지만 21년 만에 폐점하는 것이다. 윤씨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과 상실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면서 “마치 집에서 쫓겨나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홈플러스가 실적 악화를 이유로 일부 매장을 폐점하기로 했다. 이미 2018년 경남 김해점과 경기 부천중동점이 폐점했고, 대전탄방점과 대구스타디움점이 각각 올해 2월과 6월 영업을 종료했다. 2017년 142개였던 홈플러스 점포 수는 이달 기준으로 138개로 줄었다. 그 밖에 안산점과 대구점, 부산 가야점, 동대전점이 각각 올해와 내년에 폐점을 앞두고 있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지난해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전반적인 불황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역대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위해 (점포 매각을 통한) 자산유동화를 추진 중”이라면서 “자산유동화를 통해 마련된 자금으로 재무구조를 개선한다는 방침”이라고 밝혔다. 자산유동화란 부동산과 같은 비유동성자산을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증권으로 변환해 이를 매각함으로써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을 뜻한다. 장미영(52)씨가 일하는 대전둔산점도 올해까지만 영업한다. 장씨는 2003년 5월 입사한 이래로 줄곧 대전둔산점에서만 근무했다. 그는 “입사해 연수를 마친 한 달 뒤에 계산대에서 첫 손님을 맞으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계산했던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지난해 회사가 대전둔산점을 폐점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오랫동안 계산대에서 계산 업무를 했다. 지금은 매장 안을 돌며 상품을 정해진 위치에 진열하는 일을 병행한다. 하지만 운반하는 물건의 무게가 만만찮다. 1000㎖짜리 샴푸가 8개만 모여도 8㎏이다. 120㎖짜리 피로해소제 20개가 든 상자 5개의 무게도 12㎏에 달한다. 무거운 짐을 반복적으로 옮기다 보니 장씨의 허리와 무릎에도 이상이 생겼다. 홈플러스 직원 수는 2013년 2만 6424명에서 지난해 2만 1045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사측이 매장 신규 인력을 충원하지 않아 기존 인력의 노동 강도가 높아진 것이다.●“회사 20년 다녔는데 여전히 최저임금” 임금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장씨는 “입사해서 1년 일한 사람이나 10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180만원 안팎의 급여가 지급되고 있다”면서 “회사를 20년 가까이 다니면서도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최근 들어 노동 강도는 견디기 힘들 만큼 높아졌지만 그래도 직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 왔는데 회사가 노동력만 착취하고 폐점 결정을 강행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점포 폐점이 잇따르면서 홈플러스 매장에서 근무하는 마트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서비스연맹 마트산업노동조합 홈플러스지부는 홈플러스 점포 폐점 중단을 촉구하며 지난 18~20일 전국 80여개 매장에서 파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에 홈플러스 측은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이미 폐점된 매장의 직원들은 인근 점포에 배치돼 근무 중”이라면서 “앞으로 폐점되는 점포의 직원들도 각자 희망하는 점포지(1~3지망) 중 한 곳으로 전환배치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회사는 100% 고용 보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산유동화 점포 직원들에게 1인당 위로금 30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전환 배치로 직원들 간 갈등 커질 것” 그러나 폐점 매장의 직원들은 전환 배치된다고 해도 고용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폐점이 예정된 부산 가야점에서 일하는 홈플러스지부 가야지회장 김은희(54)씨는 “전환 배치를 하겠다는 가야점은 전국 홈플러스 매장 중 매출 상위 5위 안에 드는 매장으로 다른 점포 직원들을 가야점으로 전환 배치했을 정도”라면서 “회사가 그런 곳까지 문을 닫는 상황이라면 인접 점포도 나중에 실적 악화를 이유로 폐점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연쇄적인 폐점이 발생하면 회사가 말하는 100% 고용 보장이 계속 지켜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홈플러스지부 안산지회장인 윤씨도 “폐점된 매장에서 일한 직원들이 인접한 매장에 가면 원래 그 매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다른 매장으로 전환 배치될 것”이라면서 “이런 식의 밀어내기 현상이 발생하면 직원들 간의 갈등과 불신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동조합은 폐점 사태를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이 국내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가 과거에 홈플러스를 인수할 때 차입매수(LBO) 방식으로 인수한 점에 있다고 보고 있다. 차입매수란 인수되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기업 인수를 위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조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MBK파트너스는 2015년 7조 2000억원을 투자해 홈플러스를 인수했다. 그런데 7조 2000억원 중 자기자본은 블라인드 펀드(투자자금을 미리 모집하고 그 이후에 투자대상을 정하는 방식)를 통해 조성한 2조 2000억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5조원은 홈플러스 자산을 담보로 차입한 금액이다. 홈플러스지부는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를 인수한 이후 대부분 수익을 차입금 상환에 소진했다”면서 “MBK파트너스가 투자금 회수를 위해 홈플러스 자산을 매각하거나 매장 문을 닫으면서 홈플러스에 고용된 직원 2만여명의 고용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노조는 사모펀드 운용사를 비롯한 기업이 지나친 차입금 사용으로 피인수기업의 자산가치를 훼손하고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주재현 홈플러스지부 위원장은 “MBK파트너스는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홈플러스를 어떤 방식으로든 되팔고 나가면 그만이지만 그 피해는 묵묵히 일해 온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면서 “투기자본의 기업 약탈행위를 금지하는 투기자본 규제입법을 당장 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 42살 차…61세 할아버지뻘과 결혼해 오빠뻘 아들 생긴 美 19세

    42살 차…61세 할아버지뻘과 결혼해 오빠뻘 아들 생긴 美 19세

    42살 나이 차와 가족 반대를 극복하고 할아버지뻘 남성과 결혼한 미국 10대의 사연이 전해졌다. 18일 메트로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오드리 샤이엔-스마일리 문(19)은 최근 온라인에서 만난 60대 남성과 결혼에 골인했다. 남편 케빈(61)은 지난해 1월 유명 데이팅 앱에서 처음 만났다. 온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다 같은 해 7월 처음으로 직접 얼굴을 확인하고 마음을 빼앗겼다.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고 19년 결혼생활에서 얻은 23살, 16살짜리 두 자녀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드리는 “남편을 보자마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남편 역시 아직도 그날의 열정적이었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 둘 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헌병인 오드리는 케빈 역시 헌병대 출신이라는 점에 끌렸다. 첫 대화부터 군대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설명이다.하지만 오드리의 부모는 두 사람의 만남을 극구 반대했다. 딸이 43세, 38세인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오드리는 “가족은 처음에 남편을 만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남편과 함께 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 밖에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님 등 가족은 사흘 동안 남편이 나를 보러 집으로 올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그가 나를 사랑한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남편은 가족의 반대를 이해했고, 나를 얼마나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 가족에게 증명해 보였다”고 전했다.케빈은 “처음 데이팅 앱에서 아내의 프로필을 봤을 때 그저 귀여운 소녀라고 생각했다. 난 내 주변 30~50세 사이 말동무가 될만한 친구를 찾고 있었다. 아내의 프로필이 뜨면 안 됐다. 그런데 우연히 내게 아내의 프로필이 떴고 우린 곧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인이 됐다”고 고백했다. 나이 차를 뛰어넘은 둘의 사랑과 진심이 전해진 걸까. 오드리의 부모는 결국 케빈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지난 8월 1일 네바다주의 작은 예배당에서 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오드리는 “우리 가족은 이제 남편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케빈의 두 자녀 역시 자신들의 관계를 지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이제 두 사람은 케빈이 은퇴한 후의 삶을 설계하고 있다. 오는 2022년 남편 케빈이 완전히 은퇴하면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도맡기로 했다. 지금은 비록 아내 오드리는 중동에, 남편 케빈은 캘리포니아에 서로 몸은 떨어져 있지만 적당한 때 자녀를 낳을 계획도 세우는 중이다. 그녀는 “내 또래 남자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이기적이다. 남편은 정반대다. 매우 이해심이 많고 전적으로 나를 위한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요즘 사람들은 팔로워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나와 케빈은 절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편은 내 영혼의 친구다. ‘슈거 대디’(일종의 스폰서) 아니냔 의심의 눈초리는 부디 거두어달라. 사심 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주변을 도우며 살고 싶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 [열린세상] 날갯짓을 위한 보금자리/김하늘 라이스앤컴퍼니 대표

    [열린세상] 날갯짓을 위한 보금자리/김하늘 라이스앤컴퍼니 대표

    이사 온 지 74일째. 새집에서 쓰는 첫 원고다. 눈앞에는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등 뒤에는 황홀한 가을 음률이 흐른다. 바람은 얼굴에 스미고 음악은 날갯죽지를 간지른다. 쾌적하고 낭만적이다. 하지만 세 달 전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거실인지, 세탁실인지, 창고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작은 공간에서 만 장의 음반과 수천 권의 책 더미에 끼인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아서 밥을 먹고 빨래도 널고 타자질을 했다. 하지만 이젠 알파벳 순으로 차곡차곡 정리된 책과 음반 사이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계절이 지나가는 풍경을 벽에 걸고 온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 이사가 처음은 아니다. 교복을 입기 전까진 이사와 전학이 잦았다. 20대의 반은 외국에 머물렀다. 기숙사, 유스호스텔, 렌털 스튜디오, 홈스테이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머물렀다. 싱글 침대와 공유 주방과 욕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밥벌이를 시작하고 독립한 이후엔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가듯 보증금과 월세에 맞춰 집을 얻었다. 먹고 씻고 자기 위한 물건만 마련했다. 욕망의 수도꼭지를 잠그고 어디에 두어도 변하지 않는 음식과 체온 유지를 위한 옷가지 등 기호 없는 기능뿐인 것들만 들였다. 물건을, 집을, 몸을, 나를, 시간을, 삶을 매만지고 가꿀 줄 몰랐다. 어쩌다 결혼하고 남편 집으로 살림을 합쳤다. 홍대 와우산 자락 열댓 평쯤 되는 오래된 빌라였다. 음반 수집가이자 음악평론가인 남편에게는 더는 버릴 물건이 없었다. 작은 집에 비하면 그의 물건은 그의 업보였지만 엄연한 그의 업이었다. 최소한의 가구와 가전으로 신혼살림을 꾸렸다. 그가 살아온 동네에 집에 가득 채워진 그의 물건과 함께 사는 탓에 마치 남편의 삶에 편입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작은 화장대나 요가매트 한 장도 놓을 공간이 없었으니까. 동네에는 사는 사람보다 머물다 떠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데이트를 하러 온 사람, 쇼핑을 하러 온 사람, 관광을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골목의 가게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손님들의 비위에 맞춰 간판을 갈아치우다 간판 대신 임대 플래카드가 걸리기 시작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마다 술에 취한 고성과 배달 대행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적막한 귀깃길, 황량한 산책길을 걸을 때마다 떠날 때가 됐다고 읊조렸다. 오랫동안 홍대 거리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남편도 빈 거리를 걸을 때마다 안타까움에 무기력한 탄식만을 반복했다.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부동산에 살던 집을 내놓았다. 곧바로 감당할 만한 대출 이자를 감안해 예산을 정하고, 살고 싶은 동네를 추려 발품을 팔았다. ‘산과 가깝고 볕이 잘 들고, 시장이 가까운 주택가에, 방은 세 개 화장실은 두 개, 주방과 거실 크기는 타협 가능’한 조건을 내걸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이 집에 꼭 살고 싶었다. 더 잘 살고 싶어졌다. 나답게 우리답게 건강하게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성미산 자락에 있는 6층짜리 빌라 꼭대기 집이다. 거실 통창 너머로 성미산이 보인다. 아침마다 햇살이 가득 쏟아져 집을 환하게 비춘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도 알람 없이 잘 일어난다. 구름의 움직임, 하늘의 색, 나무의 흔들림으로 그날의 날씨를 점치며 아침을 먹는다. 새소리를 듣고 풀내음을 맡으며 성미산 언덕을 넘어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 원두와 빵을 사고 망원시장에 들러 반찬거리와 식탁에 놓을 꽃 한 다발을 사 온다.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 나만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다. 명상이 필요한 날엔 작업실 한켠에 요가매트를 깔고 가만한 시간을 갖는다. 음악이 곧 공기인 남편은 이어폰이나 헤드폰 대신에 오디오 시스템을 설치하고, 음악을 들으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글을 쓴다. 스무 번이 넘는 이사를 다녔다. 하지만 이사를 오기 전까지 벽에 액자를 걸어 본 적도, 화병에 꽃을 꽂아 본 적도 없다. 딱 되는 대로 되는 만큼만 살았다. 장식은 사치였고 남의 일이었다. 몸을 누인 곳은 분명 집이었는데 임시 숙소였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더 잘 버는 일밖에 몰랐다. 그게 그저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라도 악착같이 일상을 보듬고 살피고 가꾸리라 다짐해 본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향유를 위한 날갯짓을 해 본다.
  • 9·11테러 당시 뉴욕 상공 지나던 우주정거장 美우주인의 회고

    9·11테러 당시 뉴욕 상공 지나던 우주정거장 美우주인의 회고

    20년 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프랭크 컬버트슨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당시 임무 30일째였던 그는 한달 주기로 받는 신체검사를 하고 데이터를 지상으로 전송한 뒤 담당 의사와 통화를 했다. 컬버트슨의 담당 의사는 “지구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라면서 방금 뉴욕시와 미 국방부(펜타곤)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줬다. 그날은 9월 11일, 즉 9·11 테러가 벌어진 날이었다. 우주재단(Space Foundation)은 지난 8월에 열린 제36회 우주 심포지엄에서 컬버트슨이 그날의 기억을 회고한 내용을 팟캐스트를 통해 9일(현지시간) 공개했다. 당시 담당 의사와의 통화 중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발생한 또다른 비행기 추락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백악관 또는 국회의사당을 노린 테러범에 납치된 비행기가 승객들의 저항으로 테러 목표에 닿기 전 지상으로 추락한 것이었다. 지상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던 중 컬버트슨은 ISS가 캐나다를 거쳐 곧 뉴욕 상공을 지날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촬영을 준비했다. ISS 창문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니 뉴욕 쪽에서 커다란 연기가 피어올라 대서양까지 뻗어 있었다. 몇 분 만에 ISS는 미국 동부 상공을 지나쳤고, 다시 뉴욕 상공으로 돌아오기까지 90분을 기다려야 했다. 여러 대의 사진 및 영상 카메라를 설치한 승무원들은 다시 뉴욕 상공을 지나갔다. 이때 컬버트슨은 “뉴욕 맨해튼 남쪽에 커다란 회색 연기덩어리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의) 두 번째 타워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이후 ISS가 미국 상공을 몇 차례 더 지나가는 동안 승무원들은 미국 상공에서 비행운이 점차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테러 발생 후 미 당국이 미국 영공의 모든 민간 운항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NASA 역시 컬버트슨의 9·11 테러 당시 회고를 전하면서 그날 ISS에서 촬영한 뉴욕 맨해튼의 사진을 공개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수십㎞ 떨어진 대서양까지 뻗어 있는 모습이 ISS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컬버트슨은 다음날 해군사관학교 동급생이 미 펜타곤에 추락한 비행기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날 당시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유일한 미국인으로서 압도적인 고립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 드레스 입는 56세 공주? 실상은 직접 꿴 장애인 전용구두 만드는 中숨은 고수

    드레스 입는 56세 공주? 실상은 직접 꿴 장애인 전용구두 만드는 中숨은 고수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는 드레스 입는 56세 여성에게 이목이 쏠렸다. 365일 유럽풍 의상을 착용하는 여성 시에 씨는 올해 56세로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공주 드레스 애호가’로 불린다. 사시사철 계절에 맞는 드레스를 직접 제작해 착용한다는 시에 씨는 드레스풍의 의상을 착용할 때면 어김없이 직접 제작한 수제화를 신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얀색, 파란색, 붉은색 등 다양한 색상의 드레스를 착용하는 시에 씨는 의상에 가장 어울리는 색상의 구두를 착용하는 것으로 그날의 기분을 표현하는 셈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시에 씨의 이 같은 의상 컨셉은 무려 8년 전부터 계속돼 오고 있다. 총 50~60개의 공주풍 드레스를 소지하고 있다는 시에 씨는 아들과 단둘이 생활하는 집 안의 가장이다. 단순히 공주 분위기의 드레스를 일상복으로 즐기는 독특한 취향의 중년 여성인 줄만 알았던 시에 씨가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그는 평소 자녀 교육과 양육비 마련을 위해 수제화를 직접 제작해 판매해오고 있다. 가내 수공업 형식으로 손으로 한 땀 한 땀 직접 꿰어 만들었던 시에 씨의 주요 고객은 각종 질병 탓에 장애를 갖게 된 장애인들이다. 지난 2013년 시에 씨의 손재주를 소문으로 듣고 찾아온 고객을 통해 시에 씨의 수제화 사업은 본격화됐다. 당시 시에 씨가 거주하는 주택으로 먼 거리 열차를 타고 찾아왔다는 한 고객 역시 사고로 두 다리의 길이가 다른 장애자였다. 당시 시에 씨의 고객이었던 그는 시에 씨가 직접 제작한 수제화를 착용,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했다는 소문이다. 시에 씨는 당시 경험에 대해 “8년 동안 무려 2000켤레의 수제화를 제작해서 온·오프라인을 통해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그 시절 만났던 고객이 보여줬던 감동의 눈물 덕분이었다”면서 “지난 8년 동안 가장 먼 곳에서 찾아온 고객은 러시아에 살고 있다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객은 한 번에 주문할 때마다 12켤레의 다양한 수제화를 주문해오고 있다”면서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장애를 앓고 있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을 위해서 굽 높이가 다른 수제화를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에 씨의 이 같은 사연은 현지 언론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그는 “최근 들어서 수제화를 찾는 고객들의 수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라면서 “단 한 명의 고객이 있다면 죽기 전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장애자를 위한 특수 수제화를 만들고 싶다. 세상 어딘 가에 분명히 도움이 필요한 분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 [9·11테러 20년]“부인 이름 새긴 결혼반지로 남동생 죽음 확인했다“

    [9·11테러 20년]“부인 이름 새긴 결혼반지로 남동생 죽음 확인했다“

    남동생 잃은 바바라, 5년마다 미주리서 뉴욕행“미국은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 도와야 한다”“9·11는 미국이 공격받을 수 있는 걸 안 때지만 함께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이기도 해”“내 남동생 이름을 찾을 수가 없네요. 어디 있니 넬슨.”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메모리얼 풀’에서 만난 바바라 넬슨 골드만(74)은 작은 성조기와 꽃을 들고 연못 주변을 둘러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놓은 청동 난간에서 동생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살기 때문에 5년마다 한번씩 이곳을 찾는다며 “내 동생 이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잠들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주변 시민들이 함께 그의 남동생인 데이비드 윌리엄 넬슨의 이름을 찾았고, 그는 “여기 있었네”라며 꽃과 성조기를 이름에 꽂은 뒤 한참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시 50세였던 넬슨은 금융사인 카 퓨처스의 부사장으로 세계무역센터(WTC) 북측 타워의 92층에 근무하고 있었다. 골드만은 “다른 곳에서 있었던 회의가 취소돼 사무실에 있었던 게 마지막이었다”며 “월스트리트에 온 게 나였다면”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어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WTC 붕괴 2~3주 후에 치아를 통해 사망한 게 확인됐고 이후 현장에서 누군가가 넬슨의 부인 이름인 엘리자베스가 새겨진 결혼반지를 찾았다”고 설명했다. 골드만은 당시 자신이 세인트루이스의 한 공립학교 카운슬러였는데 넬슨의 부인이 세 아이를 맡아달라고 전화해 상황을 알게 됐다고 했다. 또 가족들과 상의해 적어도 아이들은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이들이 그날의 비극을 역사적 사실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골드만은 “우리는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을 공감하고 도와야 한다”며 “학교에서도 희생자의 아이들에게 더 신경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넬슨의 부인인 엘리자베스는 국가에서 준 보상금을 보스톤 지역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했다고 설명했다. 골드만은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 누군가는 분명 넬슨이 평소에 즐겼던 프렌치 호른을 불고 있을 것”이라며 “9·11은 미국이 취약하다는 것을 안 역사적 전환점이지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 [9·11테러 20년]뉴욕 소방관에 가게 째 내줬던 한국계 주인 ‘20년만에 꺼낸 사진집’

    [9·11테러 20년]뉴욕 소방관에 가게 째 내줬던 한국계 주인 ‘20년만에 꺼낸 사진집’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에서 불과 800m 거리 점포 운영쾅 소리에 나가니 건물엔 구멍, 곧 2번째 비행기 충돌거리는 온톤 새하얀색, 먼지 쓴 소방관 보고 도움 시작가게 물건들 편하게 먹고 쓰도록 하고 화장실 등 제공“올해도 폐암이라며 확인서류 들고 온 업자들 2명”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아…“다시는 이런 비극 없어야”“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죠.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9·11 테러 20주년 추모일인 11일(현지시간) 자신이 운영하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식료품점에서 만난 윤건수(60)씨는 20년전 그날의 사진을 담은 앨범을 내놓은 뒤 이렇게 말했다.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그의 가게는 비극이 일어났던 2001년 9월 11일부터 소방관들의 소중한 ‘무료’ 쉼터, 식당, 화장실이었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고 지인이 WTC에 큰 구멍이 났다고 해서 밖으로 나왔죠. 정말 (쌍둥이 빌딩의) 북쪽 건물에 거대한 구멍이 있었어요. 그리고 비행기 한 대가 남쪽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1시간도 안 돼 건물이 무너졌어요.”실제 오전 8시 46분 북쪽 타워에 여객기가 날아와 부딪혔고, 오전 9시 3분에 다른 여객기가 남쪽 타워에 충돌했다. 이후 불과 2시간여만에 두 건물이 모두 무너졌고 2752명이 희생됐다. 1988년부터 이 가게를 운영했던 윤씨에게는 공포의 순간이었다. “경찰이 모두 대피하라고 했죠. 24시간 운영하는 가게여서 셧터도 없고 해서, 한국인 직원 4명만 남기로 하고 다른 직원들은 돌려보냈습니다. 우선 지하에 피했다가 나왔는데 하얀 서리가 내린 것처럼 거리가 온통 새하얀 색이었습니다.” 그는 당시를 보여주겠다며 사진스튜디오를 운영하던 파키스탄계 지인이 당일 찍어서 줬다는 앨범의 페이지를 넘겼다. 약 90여장의 사진이 인화돼 앨범에 들어 있었는데, 빌딩의 붕괴순간 부터 먼지를 뒤짚어쓴 소방관, 처참하게 구겨진 비행기 엔진 등이 그대로 기록돼 있었다.“석면같은 것이 날리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매콤하고 이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그 때 소방관 한 명이 WTC 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거에요. 물을 가져다주고 타올로 닦으라고 했죠. 그게 소방관들을 도와준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가게 앞은 통제선을 벗어난 첫 골목이었고, 앞 빌딩으로 인해 그늘도 져서 소방관들은 자연스레 그의 가게 앞 도로에서 널브러져 쉬었다. 그는 지친 소방관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4시간 현장에 들어가고 우리 가게 앞에서 2시간 쉬고 다시 4시간 근무하는 체제였습니다. 맥주나 담배 같은 것들을 우선 가져다 줬어요. 아니 그냥 꺼내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대피시켰던 우리 가게 멕시코 직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통제선을 뚫고 가게로 돌아와 함께 돕겠다고 하더군요.”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도왔다고 한다. 경찰들은 소방관의 아침을 해줄 계란, 우유 등을 배달하는 이들을 안전하게 가게까지 오도록 했고, 정전인 것을 안 발전기 업체는 무상으로 대여해줬다. 자신도 돕겠다며 3500달러(약 410만원)의 수표를 감사 편지와 보낸 사람도 있었고, 윤씨는 이를 지역사회에서 노숙인을 돕는 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가게에서 숙식을 하며 소방관들을 돕던 그가 집에 돌아간 건 1주일만이었다. “WTC 밑쪽으로 문을 연 식료품점은 단 2곳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3만 달러(약 3500만원) 정도의 물건을 지원한 거였는데, 미국 방송에 몇번 나서 그런지 화재보험을 들었던 회사에서 테러 관련 보험이 없었는데도 보상해줬죠. 당시에 고마웠다고 이후에도 일부러 들르는 소방관들도 있었습니다.”그는 누구든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일을 한건데 동네 이웃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고, 사업 여건도 더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2003년 미 동부지역 대정전 때는 ‘9·11 테러 때도 문을 열었던 집’이라며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 이틀만에 물건이 모두 동난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상처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 식료품점에 물건을 배달하던 2명이 올해 3월과 6월에 폐암이라며, 자신들이 실제 이곳과 연관돼 일했다는 서류에 서명을 해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당시의 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색인종의 경우 테러 이후에 보이게 안 보이게 차별도 있었죠. 무엇보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 문대통령 “9·11 테러 20주년 깊은 위로…테러척결 적극 동참”

    문대통령 “9·11 테러 20주년 깊은 위로…테러척결 적극 동참”

    문재인 대통령은 9·11 테러참사 20주년을 맞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향해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미국의 굳건한 동맹으로서 국제사회의 테러 척결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1일 소셜미디어(SNS) 메시지를 통해 “테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목적도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보다 값지지 않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우리는 어떠한 폭력도 평화와 포용을 넘어설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비극은 두 번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충격과 기억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며 “바이든 대통령님과 미국 국민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덧붙였다.한편 앞서 2001년 9월11일, 테러단체 알카에다는 여객기 3대를 납치해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충돌시켰다.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하면서 2763명이 사망했고, 국방부 청사 충돌로 184명이 숨졌다. 이중 125명은 여객기 탑승객들이었다. 테러범들이 납치를 시도한 또 다른 항공기 1대에서 승객들과 테러범들이 사투를 벌였으며 항공기는 펜실베이니아주 생크스빌 벌판에 추락했다.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승객과 승무원 40명이 숨졌다.
  • [오늘마음읽기]“코로나 블루로 멈춘 삶, 시선이 두려워요”

    [오늘마음읽기]“코로나 블루로 멈춘 삶, 시선이 두려워요”

    <9회>내 마음 들여다보기 코로나가 삼킨 일상, 우울감 호소하는 사람들다른 이와 비교하고 자책…자존감 사라져작은 것부터 해내며 성취감 느끼는 연습타인과 비교 말고, 작은 성취하면 칭찬하기#편집자 주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오늘하루 마음읽기’에서는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 마음속 이야기를 젊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4명이 친절하게 읽어드립니다. 아홉 번째 회에서는 코로나19 탓에 우울감에 빠진 건우씨 이야기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신재현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이 들려드립니다. 건우(가명)씨는 진료 전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답답하다며 이야기 도중 가슴을 치기도 했죠. 그를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에는 절박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습니다. 건우씨는 해외 명문대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에서 인정받는 학생이었던 그는 오랜 타지 생활에서 느낀 외로움 탓에 국내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2020년 초, 졸업 후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기부터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됐죠. 바이러스가 만들어내는 파급력, 공포와 함께 코로나 사태는 그의 삶을 뒤바꿔 놓았어요. 요즘 우리의 삶처럼 말이지요. 그에게 코로나 사태는 단순히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만남을 줄여야 하는 불편함 그 이상이었습니다. 삶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지요. 성공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오랜 타지 생활에서의 힘듦을 고국에서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매일 TV에 나오는 확진자 수에 따라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처음에는 ‘금세 끝날 거다’, ‘그러고 나면 기회가 올 거다’ 하고 스스로 다독였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긍정적인 마음은 줄어들었습니다. 건우씨는 점차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언젠가부터는 집 밖에 나서는 것이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속으로만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돼 버렸습니다. 건우씨는 또다시 무기력에 빠져들어 자신을 자책할 뿐이었습니다. 자기 비난을 시작할 때면 내가 왜 살아야 하나,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나,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도돌이표처럼 그의 머리에서 끊임없이 떠올랐고, 불안한 감정은 그를 종일 괴롭혔지요. 페이스북에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친구의 타임라인을 발견한 순간, 건우씨는 그때의 절망스러운 감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진 속의 친구는 직장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말쑥하게 차려입고 샴페인 잔을 들며 활짝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차마 ‘좋아요’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직장은 건우씨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다른 사람들은 삶을 속도를 내어 살아가는데, 내 삶은 왜 멈춰있는 걸까?’이 모든 변화가 고작 반년 만에 일어났습니다.●코로나 블루가 뭔가요?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입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인한 우울, 무기력,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변화를 뜻합니다.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된 질병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일상적인 우울감, 혹은 우울증과는 그 궤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병 자체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만성적으로 우리 삶에 스미는 무기력이 코로나 블루의 특징이라 할 수가 있겠네요. 나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공동체, 국가, 그리고 전 세계가 이러한 무기력감과 두려움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인류에게 공포를 주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밝혀지고 규명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아직도 명확한 해결책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상황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언제 끝날지 모르니 두렵고, 항상 피부에 와닿는 모든 상황을 경계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한 시점의 사건을 뜻하는 코로나 ‘사태’라 표현하기보다 새로운 시절의 시작, 코로나 ‘시대’로 부르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실적인 부분도 흔들립니다. 바이러스로 잔뜩 위축된 삶은 대인관계와 직업적 영역 전부를 쪼그라들게 합니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연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줄어들기만 하는 여러 경제적 숫자들, 반대로 늘어나기만 하는 확진자 수를 이야기합니다. 정부의 대응 단계가 높아질수록 우리의 두려움은 커지고, 또 반대로 우리의 삶은 더욱 좁아지기만 하지요. 참 팍팍하고도 힘든 시절입니다. 건우씨는 코로나 블루에 빠졌습니다. 그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거나,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더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이 무너진 삶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지는 것도 그런 탓이겠지요. ●자존감이 무너지는 시대, 우리 마음의 형태 기대했던 것, 자신 있던 것들이 모두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그의 마음에는 절대적인 절망만 가득합니다. 잔인하게도,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능이 이 상황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다른 이들과의 비교, 그리고 자책이 반복되는 거지요. 반복의 끝엔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것 밖에 안되는 존재구나” 하는 식의 회한만 남게 됩니다. 이렇듯 코로나 블루 상태의 마음 안, 우리의 자존감은 풍화돼 갑니다. 우리의 뇌는 상황을 일반화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 상황이 길어질수록, 뇌는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잘못된 ‘가설’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생존이 최우선인 뇌의 기능 탓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재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하고, 미래를 생각하려 합니다. 미래는 항상 미지의 영역에 속하지만, 우리 뇌는 어떻게든 이를 추론하려 하고, 또 대비하려 분주합니다. 고대의 원시인이든, 현대인이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아주 미묘한 단서만으로도 미래를 그리려 하고, 또 그에 맞추어 생존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뇌는 항상 ‘정답’만을 내어 놓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정확하고 이성적인 추론에 근거하기보다 감정에 휘둘립니다. 코로나 블루로 인한 두려움, 무기력감 탓에 뇌는 그릇된 판단을 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이 상황이, 이 마음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요. 절망의 늪으로 점점 빠져드는 과정인 것이지요. ●코로나 블루, 마음의 중심을 잡으려면 참 어려운 시절이고, 힘든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마음의 중심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로나 사태에 대한 마음의 대비책은 이 상황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먼저, 코로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상한 비유로 들리지만 코로나는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오는 장마, 날이 추워지면 이따금 찾아오는 폭설과 같은 것으로, 즉 삶에서 가끔 맞이해야 하는 불청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니 인류가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물러가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 삶의 출발점을 코로나 시대에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상황을 인정하고, 좀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마음의 바닥을 다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언제 끝나나, 대체 언제 끝나나’ 기우제를 지내는 마음보다 ‘어쩔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자’는 생각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건 당연하겠지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반발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마음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껴안아야 하겠지요. 우리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이전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작은 것일지라도요.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껴 나가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해 좀 더 많은 긍정의 점수를 매겨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건우씨의 경우처럼 모든 계획이 다 어그러진 상황일지라도,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에 시선을 돌려 작은 성취를 마음 안에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지요. 무기력이 온몸을 감싸는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를 하기’와 ‘아무것도 하지 않기’와 같은 양자택일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고요. 그렇다면 그 둘 중 ‘무엇인가를 하기’를 좀 더 자주 선택하는 거지요. 당장 사람들을 만나거나, 거창한 일을 계획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방에 온종일 머무르기보다 집 근처를 짧게나마 산책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처음에는 세수도 하지 않고 나가보세요.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는 필수니까 아무도 모를 겁니다.그냥 편한 옷 그대로, 부담 갖지 말고 시작하는 거예요. 땅을 보고 걷지 말고, 변하는 나뭇잎의 색을 살피고, 피부에 와 닿는 계절의 온도를 느끼고, 하늘에 걸린 구름의 크기를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서는 잘했노라고, 오늘 집에만 있고 싶었는데 참 대견하다며 자신을 다독여주어야 합니다. 칭찬은 굉장히 대단한 것에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티끌만큼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오늘 한 선택은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날의 보람과 작은 성취는 다음 날의 또 다른 ‘무언인가를 하는’ 선택으로 이끌게 될 테고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SNS), 카카오톡 프사(프로필 사진)에 걸린 누군가의 자랑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세요. 어느 시점의 언젠가 우리 또한 분명 그런 모습일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작은 것들을 쌓아 올리면서 코로나 시대를 견디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필자인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현재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대표원장을 맡고 있다. 현직 의사들이 운영하는 정신의학신문 운영진으로 활동하며 중증 질환은 물론 평범한 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 쉽게 설명해준다. 저서로는 ‘나를 살피는 기술’이 있다.
  • [금요칼럼] 유학자 세조를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유학자 세조를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세조는 탁월한 유학자였다. “무사들은 훈련이 웬만큼 잘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문신의 강습에도 힘써야겠다.”(실록, 세조 5년 6월 12일) 국방력이 튼튼해지자 세조는 젊고 총명한 문신들을 불러 ‘중용’을 가르쳤다. 세조 5년 7월 12일, 성균관 직강 이영은 등 6명의 전도유망한 문신들이 왕에게서 ‘중용’ 강의를 들었다. 실록에는 세조가 문신의 학습을 지도한 사실이 몇 차례 더 기록돼 있다(세조 5년 7월 22일과 세조 6년 7월 7일 등). 왕이 책략가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세조는 ‘중용’을 이용해 대신을 숙청하기도 했다. 세조 4년(1458) 2월 13일, 세조는 술자리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영의정 정인지에게 ‘중용’에 관한 생각을 기탄 없이 말하라고 부탁했다. 술에 취한 정인지는 불경인 ‘능엄경’을 칭찬하고 ‘중용’을 깎아내렸다. 술자리가 파하자 세조는 정인지의 대답을 크게 문제삼고, 선비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서 정인지를 궁지로 몰아 벼슬을 빼앗았다. 공신 정인지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졌다고 판단해, 왕은 그를 숙청한 거였다. 다시 6년 뒤에는 영의정 정창손이 또 세조의 책략에 걸려들었다(실록, 세조 8년 5월 9일과 5월 10일자). 마침 세자(훗날의 예종)가 ‘중용’을 배우고 있었는데, 부왕은 세자를 칭찬하며 장차 세자의 학문이 더욱 높아지면 왕위를 넘겨줄 생각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꺼내며 세조는 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슬며시 떠보았다. 그런데 정창손은 세조의 본의를 헤아리지 못했던지 왕권교체에 찬성했다. 평소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었던 세조는, 정창손을 불충으로 몰아서 정승자리를 박탈했다. 참 무서운 왕이었다. 어쨌거나 왕은 ‘중용’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왕은 여러 신하를 불러서 학술토론회를 열기도 했는데, 가령 세조 10년 1월 22일에는 이맹현에게 책의 요점을 강의하게 하고 이어서 장시간 난상 토론회를 열었다. 문신들은 교대로 어려운 질문을 상대에게 퍼부었다. 세조도 논의에 직접 끼어들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으니, 예컨대 ‘주례’라는 책은 과연 주공의 저술이 틀림없는가를 묻기도 했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자 왕은 신하들에게 답변을 채근했다. 여러 선비가 의견을 말했으나 주장이 제각각이었다. 그러자 세조는 선비들과 더불어 즐겁게 술을 마신 다음에 참고서를 총동원해 가며 누구의 주장이 맞고 틀린지를 점검했다. 그날의 백미는 영순군 이부와 정현조의 심층토론이었는데, 과연 누가 더 옳은지를 아무도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깊이가 있었다. 세조는 왜, 그토록 ‘중용’을 애호했을까. 그 책에는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심성론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왕은 철학적 논쟁을 좋아해서 이른바 이기설(理氣說)이라든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의를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왕이 ‘중용’을 사랑한 진짜 이유는 유교적 이상통치에 관한 설명이 이 책에 기록돼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조는 불교 신자였으나, 국가를 통치하는 데는 성리학이 제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점에서 왕은 세종의 든든한 후계자였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세조는 고령군 신숙주와 함께 정사를 폭넓게 의논했는데 왕은 세자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이 사람(신숙주)이 너의 스승이니 너는 공경할지어다!” 세조는 자신이 아끼는 고전, ‘중용’에도 대신을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쓰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실록, 세조 13년 8월 3일). 세조라면 단종과 충성스러운 사육신을 함부로 처단한 패륜아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알고 보면 그에게도 남달리 깊은 학식과 경륜이 있었다. 누구나 다양한 면모가 있기 마련인데, 한 면만 보고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면 놓치는 것이 적지 않다.
  • 인구 1만명 캐나다 작은 도시, 9·11 때 ‘인류의 119’ 된 사연

    인구 1만명 캐나다 작은 도시, 9·11 때 ‘인류의 119’ 된 사연

    비행기 35대, 뉴펀들랜드 비상 착륙주민들이 승객·승무원 6595명 보호옛날부터 항공 사고 때 친척처럼 대접“공격받은 서구 사회, 강인한 면모 증명”캐나다 북부의 뉴펀들랜드주를 인류 최후의 도피처 정도로 묘사한 영화들을 본 기억이 있다. ‘월드워Z’(2013)는 그중 하나다. 감염된 좀비와의 전쟁에서 절멸의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안전지대가 돼 준 곳이 뉴펀들랜드의 항구도시 노바스코샤였다. 궁금했다. 왜 뉴펀들랜드였을까.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을 읽다 보면 서구인들이 갖고 있을 정서의 일단이 엿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구인들은 뉴펀들랜드를 인간의 선한 본성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이해하는 듯하다. 발단이 된 건 꼬박 20년 전 터진 ‘9·11 테러’다.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 등에서 비행기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 영공이 폐쇄됐다. 미 정부는 자국으로 향하던 모든 비행기의 즉시 착륙을 명령했다. 당시 미국 상공에 떠 있던 비행기는 4546대. 이들은 미국 내 아무 공항에나 착륙할 수 있었다. 문제는 대서양 상공을 운항 중이던 약 400대의 비행기였다. 이들 대부분은 캐나다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테러범이 탔을 수도 있지만, 캐나다는 주저하지 않고 갈 곳 잃은 비행기를 받아들였다. 그중 한 곳이 뉴펀들랜드의 소도시 갠더였다. 책은 ‘9·11 테러’ 직후에 갠더에서 벌어진 일들을 담고 있다. 겨우 1만명 정도가 사는 소도시에 착륙한 비행기는 모두 35대. 승객과 승무원은 6595명이었다. 주민 전체와 맞먹는 숫자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갠더와 주변의 작은 마을에 사는 남녀노소 모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생업을 멈추고 낯선 ‘비행기 사람들’을 조건 없이 껴안았다. 세상에 ‘인간애’라는 달달한 단어가 남아 있으리라 믿기 어려운 시대에 이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뚜렷이 보여 줬다.뉴펀들랜드에 사는 사람들을 ‘뉴피’라고 부른다. 이 지역에 정착한 영국과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말끝에 ‘자기’(my dear), ‘내 사랑’(my darling) 등의 단어 붙이길 즐긴다고 한다. 저자는 뉴피들을 “셰익스피어 소설체의 말을 쓰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들로 그리고 있다. 사람에 대한 환대도 극진하다. 원래 특질이 그렇다기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DNA가 아닐까 싶다. 뉴피들이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베푼 선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은 다소 덜하지만, 비행기 연료 적재량이 지금보다 적던 시절에 갠더는 대서양 횡단 비행의 ‘주유소’였다. 그 와중에 추락 등 불행한 사고가 빚어지기도 했다. 뉴피들은 그때마다 집의 문을 열고, 낯선 타인들을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대접했다. 책엔 수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관제사, 보안관 등 갠더 주민은 물론 비행기에 오른 승객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모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저자가 코로나19 팬데믹에 다시 만난 ‘그날의 사람들’ 이야기도 담겼다. 저마다 삶의 행로는 달라졌어도 2001년 9월의 그 시간이 타인을 보는 관점을 바꿔 놓았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저자는 “재난이 상수인 시대에도 인간은 언제나 환대와 신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며 “테러범이 서구 사회의 허약함을 드러내려 공격을 감행했다면, 갠더에서 일어난 일은 반대로 (인간의) 강인한 면모를 증명해 냈다”고 했다.
  • 9·11테러 극적 생존자와 그를 구한 소방관이 20년만에 전한 이야기

    9·11테러 극적 생존자와 그를 구한 소방관이 20년만에 전한 이야기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미국 뉴욕 맨해튼 상공으로 진입한 여객기 한 대가 세계무역센터 노스타워 93~99층을 들이받았다. 충돌과 동시에 건물에 있던 수백 명과 비행기에 타고 있던 87명이 사망했으며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 17분 후인 9시 3분, 이번엔 또 다른 여객기가 사우스타워와 77~85층에 충돌했다. 역시 건물에 있던 수백 명과 비행기 탑승자 60명이 사망했다. 단순 사고가 아닌 의도된 연쇄 테러임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 시각, 뉴욕뉴저지항만관리청(세계무역센터 소유주) 직원 파스콸레 부젤리는 노스타워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64층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부젤리는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임신 7개월째인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꼭 살아남고자 했던 부젤리는 4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탈출해 죽기 살기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22층까지 내려왔을 때, 머리 위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 사우스타워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사우스타워는 사고 56분 만인 오전 9시 59분 노스타워보다 먼저 붕괴했다. 탈출에 실패한 부젤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태아 자세로 누워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계단 구석으로 몸을 던졌다. 콘크리트 더미에 갇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엄청난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얼마 후, 부젤리가 있는 노스타워도 완전히 무너졌다. 사우스타워가 무너진 뒤에도 홀로 서 있던 건물은 서서히 남쪽으로 기울었고 사고 102분 만인 오전 10시 28분 붕괴했다.부젤리도 건물 잔해와 함께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 전화를 받고 TV를 켜보니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남편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저 많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기도했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부젤리는 뼈만 남은 건물 속 탑처럼 솟은 작은 콘크리트판 위에서 극적으로 구조됐다. 사고 당일 오후 3시쯤이었다. 오후 12시 30분 노스타워에서 생존자 14명이 구조된 후 이어진 또 다른 기적이었다.부젤리를 발견한 마이클 모라비토 소방관은 “사방이 뚫린 노스타워 18층 의자만 한 콘크리트 더미에 고립돼 있었다. 그의 발은 벼랑 끝에 위태롭게 나와 있었다”고 밝혔다. 소방관은 “믿을 수가 없었다. 공중에 떠 있다시피 앉아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기적적으로 구조된 부젤리는 가벼운 화상과 찰과상, 발목 골절 외에 큰 부상도 없었다. 소방관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신이 그를 도왔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다는 소방관은 “삶의 끈을 꼭 붙잡고 매달려라. 인생은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고 부젤리가 완벽한 본보기”라고 힘주어 말했다.물론 부젤리는 9.11테러 이후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10년 이상을 씨름해야 했다. 2996명이 사망하고 최대 2만5000명이 다친 테러에서 자신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부젤리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곧 행복해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부젤리는 “행복해야만 한다. 여러 분도 딸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을 다른 아빠들을 생각하며 행복하라”고 강조했다. 관련 내용은 5일 미국 CBS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분’에서 다루었다.
  • [영상] ‘콸콸’ 뉴욕 지하철 빗물 폭포…사상 첫 홍수경보 발령

    [영상] ‘콸콸’ 뉴욕 지하철 빗물 폭포…사상 첫 홍수경보 발령

    며칠 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를 휩쓴 허리케인 ‘아이다’가 이번엔 미국 북동부 뉴욕 일대를 강타했다. 2일 뉴욕타임스는 허리케인 ‘아이다’가 뿌린 많은 비로 뉴욕시 일부 지역에 역사상 첫 홍수경보가 발령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국립기상국(NWS)은 1일 퀸스, 브루클린 등 뉴욕시 일부 지역에 역사상 처음으로 홍수경보를 발령했다. 2일 현재 홍수경보는 코람, 센트럴 아이슬립, 센테리치 등 롱아일랜드로 지역으로 확대됐다. 미 기상국은 홍수경보를 ‘엄청난 폭우로 심각한 인명 피해와 치명적 손실이 초래될 수 있는 극히 드문 상황’으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생명을 위협할 만큼 물이 넘쳐 대피 및 구조가 필요한 때’ 홍수경보를 발령한다고 기상국은 밝히고 있다.실제로 허리케인 아이다가 뿌린 비로 현재 뉴욕시내 대부분의 지하철 운행이 중단된 상태다. 도로 곳곳이 침수돼 차량 통행도 차질을 빚고 있다. 뉴욕 맨해튼 첼시 23번가역에서는 지하철 승강장까지 밀려든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넘쳐난 물이 선로까지 들어차면서 열차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됐다. 뉴욕과 인접한 뉴저지에서는 벌써 인명 피해도 보고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저지 퍼세이크(퍼세이익)에서는 차량에 탑승한 70대 남성이 불어난 물에 갇혀 익사했다.뉴욕타임스는 이번에 내린 비가 뉴욕시 하루 강수량 기록을 깼다고 전했다. 지난달 22일 뉴욕시 맨해튼 센트럴파크에는 허리케인 ‘헨리’ 영향으로 113㎜의 폭우가 내린 바 있다. 1888년 106㎜ 기록을 넘어선 뉴욕시 하루 강수량 신기록이었다. 하지만 최근 24시간 동안 내린 비가 그날의 최고 기록을 이미 뛰어넘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설명했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더블라지오 시장은 1일 밤 11시 30분쯤 트위터를 통해 “뉴욕시에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기록적 폭우로 도시 전역이 사상 유례 없는 재난과 맞닥뜨렸다”고 밝혔다. 이어 “구급대원과 긴급사태 대응 인력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오늘밤은 부디 도로로 나오지 말아달라. 이런 폭우 속에서 운전하지 말고 집 안에 머무르라”고 당부했다.
  • “잿더미 속 구하지 못한 시민들 모습 생생” 현장 소방관에게 제천 참사는 현재진행형

    “잿더미 속 구하지 못한 시민들 모습 생생” 현장 소방관에게 제천 참사는 현재진행형

    현장투입 소방관 절반 이상 PTSD죄책감·불안감에 폭음·불면증 많아트라우마에 ‘분노조절장애’ 겪기도그럼에도 업무상 공상 신청자는 ‘0’과정 복잡, 인과관계 입증도 어려워참사의 기억이 할퀸 흉터는 오래간다. 2017년 12월 사망자 29명, 부상자 37명의 대형 참사로 번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도 마찬가지다. 공식 피해 기록 뒤에는 지금까지도 당시의 참혹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방관들이 있다.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참담한 결과는 소방관들에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마음 재난으로 남았다. 제천소방서 소속 A소방관은 1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날의 상황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구조대원으로 출동했던 그는 스포츠센터 건물 2층 여자목욕탕으로 진입했다. A소방관은 “불길이 거세 유리창을 깨면서 들어간 2층 바닥에 쓰러진 희생자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며 “재먼지가 5㎜씩 바닥에 쌓일 정도로 분진이 심했는데 모두 그을음으로 얼굴이 까맣게 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제천 지역의 소방관들은 이 참사 이후 알코올중독 수준으로 폭음하거나 불면증을 겪는 현상이 크게 늘었다. A소방관은 “시민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죄책감이 됐고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는 동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제천 참사 현장에 있던 소방관의 절반 이상이 이후 PTSD 증상을 보였다. 충북소방본부가 대한적십자사와 공동으로 2018년 2월 제천 화재참사를 겪은 소방관 205명에 대해 실시한 심리조사에서 전체의 58%인 119명이 PTSD와 우울증 증상을 드러냈다. 지난 3년간 제천·단양 소방관 심리 상담을 전담해 온 김영옥 상담사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구조 과정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참혹한 현장들을 목격하는 빈도가 잦다 보니 제천 참사라는 단일 기억과 그 전후의 충격이 누적되면서 트라우마가 촉발된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 상담사는 “당시 출동했던 소방관 다수가 지금도 PTSD 치료나 약물 치료를 받는다”며 “제천 화재 때 시신들을 수습했던 소방관은 트라우마에 따른 분노조절장애로 일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진행형의 마음 재난에도 제천 지역의 업무상 공상 신청자는 ‘0명’이다. 김 상담사는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청 과정이 복잡하고 인과 관계를 입증하기 쉽지 않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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