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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LCD ‘깜짝실적 두 효자’

    반도체·LCD ‘깜짝실적 두 효자’

    올해 2·4분기 삼성전자의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를 이끈 분야는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다. 반도체는 컴퓨터 부품시장의 호황에 따라 지난해 3분기 이후 ‘효자 품목’으로 귀환했다. LCD 역시 3차원(3D) 입체영상 TV 패널 등 고가 품목의 비중 확대와 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영업이익이 지난해 동기보다 3배 이상 뛰어올랐다. 하반기에는 반도체·3D TV 부문의 호조세가 이어지면서 고공행진을 계속할 것이라는 예측과 유럽발 재정위기에 따른 세계 경제 침체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함께 나오고 있다. ●5조원 이익 웬만한 대기업 한해 매출 7일 삼성전자와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2분기에 기록한 영업이익 ‘5조원’은 웬만한 대기업의 연매출에 해당한다. 재계 33위 웅진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4조 7458억원이었다. 5조원을 달러(1220원 기준)로 환산하면 41억달러 정도. 이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기업 HP의 지난 1~3월 영업이익인 31억달러보다 30% 이상 많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애플(40억달러)은 물론 인텔(24억달러)의 실적도 훌쩍 뛰어넘는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와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을 극복하고 세계 최대 전자기업으로 등극한 삼성전자가 시장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셈이다. ●“반도체 승자의 독식 즐기고 있는 것” 증권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반도체에서 2조 7000억원, LCD에서 8000억원 정도의 영업이익을 거둔 것으로 보고 있다. 둘을 합치면 전체 이익 5조원의 70%인 3조 5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반도체의 호조는 윈도7의 출시 등으로 기업들의 PC 교체 수요가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 또 스마트폰시장의 활성화로 D램 및 낸드플래시 등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램 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1.72달러에 머물렀던 DDR3 제품의 단가는 6월 말 현재 2.63달러까지 치솟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2008년 반도체 경기침체 속에서도 삼성전자는 시설 투자 등을 지속하면서 후발 주자와의 기술과 공급능력 격차를 크게 벌렸다.”면서 “최근 반도체 호황기에 ‘승자의 독식’을 즐기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발광다이오드(L ED) TV와 3D TV 등 고가 패널의 공급 능력이 지난해보다 크게 늘어난 데다 월드컵 열풍을 타고 비수기인 2분기에도 LCD 부문 이익률이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등의 호조가 지속되고 완제품 부문도 비수기를 벗어나면서 삼성전자는 3분기에 더 좋은 실적을 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다만 남은 걸림돌은 남유럽발 재정위기. 삼성전자의 전체 매출 중 유럽지역 비중은 20~30% 정도인 만큼, 재정위기에 따른 유럽지역의 수요 감소라는 위협에 노출돼 있다.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이 이날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에서 열린 수요 삼성사장단협의회에서 올 하반기 성장률 하락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최지성 사장이 올 하반기 경영 화두로 ‘불확실성’을 제시한 만큼 미국과 중국, 남미 등 전략시장의 비즈니스를 강화하고 프리미엄 제품의 판매 비중을 높이면서 리스크에 대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스티비 원더, 15년 만에 내한공연 ‘왕의 귀환’

    스티비 원더, 15년 만에 내한공연 ‘왕의 귀환’

    ‘살아있는 전설’ 스티비 원더가 한국을 찾는다. 스티비 원더의 내한 공연을 주체하는 현대카드측은 8일 “스티비 원더가 다음달 10일(화) 오후 8시,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펼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번 공연은 1995년 이후 15년 만에 성사된 쾌거. 과거 1995년에 이뤄졌던 내한 공연은 주제측의 홍보 부족, 음향 시설 부족 등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만회를 위한 내한공연이 몇 차례 추진됐지만 때마다 공연 일정이 번복되는 어려움을 겼었다. 아쉬움을 안고 있던 국내 팬들은 ‘팝의 거장’의 반가운 방문소식에 기쁨을 드러내며 초대형 이벤트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는 스티비 원더가 팝 음악계의 대부로 군림하면서 많은 국내외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과 관계가 깊다. 최근 SBS 월화드라마 ‘나쁜남자’의 OST 참여로 화제를 모은 브라운 아이즈 소울의 정엽은 이미 많은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스티비 원더를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손꼽아왔다. 특히 정엽은 자신의 1집 앨범에 스티비 원더의 ‘투 샤이 투 세이’(Too Shy Too Say)를 리메이크 해 트리뷰트 송으로 수록, 그 애정을 내비친바 있다. 또 과거 펑키밴드 활동시절에는 스티비 원더의 이름을 딴 ‘스티비 안’이라는 닉네임을 썼을 정도. 세계적인 뮤지션들에게 존경 받은 스티비 원더는 출생 직후 불의의 사고로 시각장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천부적인 음악성으로 10세 이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터득해 연주했다. 11세에 어린나이에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리틀 스티비 원더’라는 이름으로 첫 싱글 앨범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이후 50년간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해온 그가 남긴 히트곡만 수십여곡에 달한다. 한편 이번 공연의 티켓은 오는 9일 낮 12시부터 현대카드 홈페이지와 티켓링크,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되며 가격은 플로어 R석이 19만6000원, R석이 17만6000원이며, S석 11만원, A석 9만9000원, B석은 7만7000원이다. 사진 = 스티비 원터 공식 홈페이지 캡처 서울신문NTN 전설 인턴기자 legend@seoulntn.com
  • 지자체 “아토피 치료 사업 선점하라”

    지자체 “아토피 치료 사업 선점하라”

    자방자치단체들이 아토피 관련 사업을 앞다퉈 추진하고 있다. 아토피 사업은 지역의 자연환경을 활용하는 친환경시책이고 장기 치료환자들을 유치할 경우 인구유입 등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아토피 사업은 3년 전 전북 진안군이 처음 시작한 이후 전남 장흥·보성군, 충남 금산군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전남 장성 등 다른 자치단체들도 적극 검토 중이다. 환경부, 산림청 등으로부터 국비지원도 받을 수 있어 지역개발에 도움이 되고 관광과도 연계돼 전국 자치단체로 확대될 전망이다. ●국내 최초 아토피클러스터 추진 진안군은 2007년부터 아토피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군 조직에 아토피계를 만들고 국내 최초로 아토피클러스터를 조성 중이다. 백운면 노촌리 일대 109만㎡에 조성되는 아토피클러스터는 2015년까지 1700억원을 투입해 힐링센터, 전문연구소, 식이요법치유센터 등을 건립한다. 청천면 봉학리에는 환경친화학교인 에코에듀센터를 건립해 아토피로 고생하는 환자와 학부모들을 유치했다. 현재 36명의 학생과 보호자 등 72명이 생활하고 있다. 나무와 황토 등 친환경자재로 교실을 꾸몄고 집도 모두 친환경건축자재만 사용했다. 주민들은 친환경주택 19동을 건립해 아토피 환자 학생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임대사업을 벌여 소득도 짭짤하게 올리고 있다. 에듀센터에서는 아토피치료 전문인력도 양성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170명을 배출했다. ●편백숲과 녹차 이용한 아토피 치료 전남 장흥군은 장흥 우산리 편백숲에서 아토피 치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목재문화체험장을 조성해 아토피환자들이 이곳에서 머물며 자연치유 효과를 얻도록 했다. 아토피재활치료휴양복합단지에는 1500㎡ 규모의 지하벙커에 거대한 소금동굴을 만들어 환자들을 유치하고 있다. 장흥군은 2012년까지 45억원을 투자해 아토피 환자들이 편백숲에서 풍욕을 하고 적절한 운동을 즐길 수 있는 백두대간 테라피 밸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전남 보성군은 지역 특산품인 녹차를 이용한 아토피 치료법을 내놓았다. 전남대에 용역을 맡겨 환경성질환치료체험센터 건립 적지를 물색하고 있다. 숲이 좋은 웅치·회천면 등이 후보지로 거론된다. ●아토피 초등학교도 설립 충남 금산군도 ‘아토피 치료메카’로 키우기 위한 각종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군북면 상곡리 상곡초등학교를 아토피 치유 전문 학교로 육성하기 위해 충남도교육청과 협의 중이다. 도교육청은 지난해 3월 폐교 위기에 몰린 이 학교를 아토피 안심학교로 지정했다. 정길호 군 건강도시계장은 “한달 전부터 마을의 황토펜션 4채를 빌려 서울 등 외지에서 4가구의 엄마와 아이가 내려와 아토피 치료를 받고 있고, 2가구가 추가로 내려온다고 해 황토펜션 2채를 더 빌려놓았다.”면서 “아토피 가족이 내려오면서 전교생이 16명이던 상곡초가 21명으로 늘어 폐교위기도 벗어나고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고 말했다. 금산군은 2014년까지 상곡리를 ‘아토피빌리지타운’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남이면 건천리 남이자연휴양림에 환경성 질환예방관리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산림청에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곳은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발생해 환경성 질환에 특효인 3㏊의 편백나무 숲이 있다. 강원 양구군도 2012년까지 양구 동수리 파로호일대에 아토피치유관을 중심으로 한 ‘농촌테마공원’을 조성한다. 친환경의 장점을 살려 아토피를 치료할 수 있는 공간과 자연친화적인 휴식·레저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참살이로의 귀환’이란 주제로 조성되는 ‘농촌테마공원’은 참살이와 산채를 테마로 한 체험문화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26만 4337㎡에 조성된다. 전국종합·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스매싱 펌킨스 10년만의 귀환

    스매싱 펌킨스 10년만의 귀환

    “이제서야 한국에 오다니 난 정말 바보다.” 2000년 7월4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첫 내한공연을 하던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 빌리 코건 이 내뱉은 말이다. 아마도 열광적인 관객들이 인상적이었을 게다. 미국으로 돌아간 스매싱 펌킨스는 그런데 음악성에 대한 고민, 내부 불화 등으로 그만 해체를 선언한다. 코건을 중심으로 새롭게 깃발을 올릴 때까지 6년이 걸렸다. 스매싱 펌킨스는 2007년 대망의 7집 앨범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귀환을 알렸다. 코건이 한국 팬을 다시 만난다면 과연 무슨 말을 던질까. 스매싱 펌킨스가 10년 만에 두 번째 내한공연을 갖는다. 8월14일 오후 7시 잠실실내체육관에서다. 시카고 출신으로 1988년 결성된 스매싱 펌킨스는 1990년대 너바나, 펄 잼 등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밴드다. 얼터너티브의 전설 커트 코베인(너바나)이 자살한 이듬해인 1995년 걸작 ‘멜랑콜리 앤드 디 인피니트 새드니스’를 발표했다. 강렬하고 묵직한 기타 사운드에 감성을 구슬프게 자극하는 음악을 들려줬던 스매싱 펌킨스는 800만장이 팔린 이 앨범을 비롯해 300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자본 논리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독자적으로 앨범을 발표하는 등 예술가적인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밴드의 중추 신경인 코건(보컬, 기타)은 건재하지만 손발은 모두 달라졌다. 제프 슈뢰더(기타), 니콜 피오렌티노(베이스), 마이크 번(드럼)이 새 멤버로 함께한다. 내한공연에서는 지난 5월 발표한 미니앨범 ‘티어가든 바이 컬라이디스코프’에 담긴 네 곡을 비롯해 ‘자이트가이스트’에 담긴 곡, 그리고 ‘1979’, ‘투데이’, ‘불릿 위드 버터플라이 윙스’ 등 기념비적인 명곡들을 연주할 예정이다. 서태지컴퍼니가 후원사로 참여해 눈길을 끈다. 공연기획사 엑세스엔터테인먼트는 서태지가 오래 전부터 스매싱 펌킨스의 음악을 좋아했으며 서태지컴퍼니는 이번 공연의 홍보와 무대 준비 등을 돕는다고 설명했다. 8만 8000~9만 9000원. (02)3141-3488.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컴백 손담비, 펜싱 칼 든 귀족 변신에 “여신의 귀환”

    컴백 손담비, 펜싱 칼 든 귀족 변신에 “여신의 귀환”

    7월 컴백을 앞둔 가수 손담비가 새 앨범 재킷 사진을 깜짝 공개하자 팬들은 “여신의 귀환”이라며 반겼다. 29일 손담비의 공식홈페이지에는 푸른 빛깔의 화려한 옷을 입고 펜싱 칼을 든 귀족 사진 한 장이 게시됐다. 사진 속에서 손담비는 섹시하고 패셔너블한 느낌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속사 측은 “이번 앨범을 통해 다양한 손담비의 모습을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며 “지금 공개된 사진은 손담비의 일부에 불과하다. 발랄한 모습에서부터 고독하고 우아한 모습까지 많은 매력이 담긴 이번 앨범을 기대해 달라.”고 전했다. 이에 사진을 접한 팬들은 “사진만 봐도 카리스마가 철철 넘친다.”, “여신의 귀환이다.”, “앨범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등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손담비는 공식홈페이지에 사진과 티저 영상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며 본격적인 컴백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사진 = 손담비 공식홈페이지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손담비, ‘펜싱 칼 든 귀족’으로 깜짝 변신

    손담비, ‘펜싱 칼 든 귀족’으로 깜짝 변신

    가수 손담비가 7월 컴백을 앞두고 앨범 재킷 사진을 깜짝 공개했다. 29일 손담비의 공식홈페이지에는 섹시하고 패셔너블한 느낌의 사진 한 장이 게시됐다. 사진 속에서 손담비는 푸른 빛깔의 화려한 옷을 입고 펜싱 칼을 든 귀족으로 분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속사 측은 “이번 앨범을 통해 다양한 손담비의 모습을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며 “지금 공개된 사진은 손담비의 일부에 불과하다. 발랄한 모습에서부터 고독하고 우아한 모습까지 많은 매력이 담긴 이번 앨범을 기대해 달라.”고 전했다. 이에 사진을 접한 팬들은 “사진만 봐도 카리스마가 철철 넘친다.”, “여신의 귀환이다.”, “앨범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등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손담비는 공식홈페이지에 사진과 티저 영상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며 본격적인 컴백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사진 = 손담비 공식홈페이지 서울신문NTN 서은혜 인턴기자 eune@seoulntn.com
  • [이사람] 권용현 여가부 권익증진국장

    [이사람] 권용현 여가부 권익증진국장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신상정보 공개가 8월 중에는 이뤄질 겁니다.” 권용현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은 27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와 관련해 “6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됐던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간단한 문구 수정 절차를 거쳐 국회를 통과하면 후속 절차를 최대한 서둘러 8월에는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신상정보는 인터넷 ‘성범죄자 알림e(www.sexoffender.go.kr)’에 공개된다. 공개대상은 2006년 6월30일부터 지난해 말까지 해당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로 지금까지는 경찰서에서만 열람이 가능했다. 그동안 이 정보의 열람권자는 거주지 아동의 부모나 법정대리인, 교육기관장 등으로 국한하고 복사도 불가능했다. 결국 제한된 시간에 경찰서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열람이 가능해 접근성과 실효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나이·실거주지 등 수록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을 개정, 올해 1월1일 이후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출소자는 출소 이후, 집행유예자는 바로 공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경찰서에서 열람 가능한 성범죄자도 인터넷 공개대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올해 다시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소급 논란이 불거졌지만 공개 방식의 변화는 불소급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국회 내 합의가 이뤄지면서 국회통과 절차만 남겨 둔 상태다. 공개되는 신상정보는 성명, 나이, 읍·면·동까지 포함된 주소와 실제 거주지, 신체정보, 사진, 성범죄 요지 등이다. 사진은 1년마다 바뀐다. 공개양식(그래픽)은 한창 마무리작업 중이나 큰 변화는 없을 전망이다. 권 국장은 “올해 1월 이후 발생해 형이 확정된 아동·청소년 성범죄자 중 집행유예의 경우 법원 공개명령이 있으면 서류작업만 거쳐 바로 공개할 수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공개도 조만간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성범죄를 예방하려면 사회·문화적 (범죄 유발) 요인을 없애고 약해지는 가족의 돌봄기능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가 발간하는 대중과학잡지 ‘포커스’ 2월호가 우리나라를 정욕의 나라 1위에 선정했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사회·문화적 범죄 유발요인이 많다. ●“가족 돌봄기능 지원 강화해야” 권 국장은 “한부모 가족, 맞벌이 가족 등 가족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면서 “하지만 선진국은 (가족 내) 돌봄 기능의 약화를 국가가 어떤 형식으로든 메우려고 노력하면서 성범죄 예방에 나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여가부가 각 지역에 두고 있는 건강가족지원센터, 청소년상담지원센터 등을 통합해 가족의 돌봄기능을 지원하는 시너지 효과를 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권 국장은 공무원 생활을 1989년 여가부의 전신인 정무장관실에서 시작했다. 줄곧 여성부에 근무하다 가정·보육 업무가 보건복지부로 넘어가던 2008년 3월 함께 옮겼다가 최근 조직개편으로 귀환했다. 여성 관련 부서 근무 기간이 20년으로 여가부에서 최장 기록 보유자이다. 보건복지부에서도 보건산업정책국장, 가족정책관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글 사진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약력 << ▲1960년 충북 충주 ▲연세대 경제학과 ▲행정고시 32회 ▲여성가족부 대외협력관, 보건복지부 보건산업정책국장
  •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수용인민군들, 반대파 토막살해뒤 바다 버려”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수용인민군들, 반대파 토막살해뒤 바다 버려”

    “분뇨통을 들고 나오는 포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규(가명)야.’라고 외쳤죠.” 국군 헌병단으로 1949년에 입대, 1954년에 전역한 강옥(80) 일등중사는 휴전이 다가오던 1953년의 어느 날 한양공고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인 성규씨를 자신이 감시하고 있던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만났다. 그는 성규씨와 고교 시절 축구부로 함께 생활했다. 강 중사는 “함께 공을 차며 지냈죠. 참 보고 싶었었는데 안타까운 만남이었죠.” ●축구 시합 준비 중에 전쟁 소식 고교 졸업 후 연락이 닿지 않던 성규씨는 전쟁이 나자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으로 끌려오게 됐다. 친한 친구를 만난 반가움과 함께 포로로 잡혀온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이 끓어올랐다. 강 중사는 성규씨를 도와줄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도와주고 싶었지만… 당시엔 국군이 포로와 친하게 지내면 엄청난 의심을 받거나 고초를 겪게 되니까… 쉽지 않았죠.”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성규씨는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나 국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우정은 고교시절로 돌아가지 못했다. 1950년 6월25일. 강 중사는 경기도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7사단 헌병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던 전쟁 발발 당일에 그는 부대원들과 축구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북한군은 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겨를도 없이 밀고 내려왔다. ●반공포로 석방 헌병도 당일 아침에 알아 전세는 유엔군의 지원으로 역전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넘어 북으로 올라갔다. 1951년 중공군이 가세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1·4 후퇴 길에 올랐다. 강 중사는 당시 평양 포로수용소 경비를 담당했다.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중공군을 피해 포로들을 데리고 진남포 항구에서 수송선에 올랐다. 그와 포로들은 거제포로수용소로 이동했다. 1950년 11월 만들어진 거제포로수용소에는 10만명 이상의 전쟁포로가 수용됐다. 유엔군이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를 관리하고 국군 헌병단은 그 외곽 경계를 담당하게 됐다. “유엔군이 제네바협정에 따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했죠. 국군들보다 포로들의 차림새가 더 좋았어요. 배가 부르니까 폭동도 일으키고….” 당시 포로수용소 안은 제네바협정을 준수한 유엔군 덕에 포로들만의 규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부는 나무로 모형 총과 칼을 만들어 제식훈련을 하고, 일부는 국기게양대를 만들어 경례를 하고 군가를 불렀다 특히 인민군들은 포로들 가운데 사상이 불순하다고 판단되면 재판을 거쳐 살해하고 토막내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포로들은 매일 아침 수용소를 나와 거제 앞바다에 분뇨통을 비웠는데 거기에 살해한 포로의 시체를 토막내 함께 버렸어요. 한동안 그렇게 해오다 수상히 여긴 헌병의 검열에 비인간적인 행위가 들통났죠.” 1952년 5월7일 수용소장 F T 도드 준장이 76포로수용소 시찰 중 납치 감금됐다. “포로들이 분뇨통을 비우기 위한 시간에 도드 준장이 시찰을 나왔다가 당했죠.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죠.” 도드 준장이 납치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거제수용소를 탱크로 에워싸고 구출을 시도했다. 도드 준장의 납치 배경에는 유엔군 측이 송환원칙을 어기고 포로들에게 본국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 중사는 유엔군이 제네바 협정을 잘 지켜줬다면서 협박과 고문이 있었다는 말에 의문을 달았다. 당시 도드 준장 납치 사건은 4일 후 미국이 협박 등의 행위를 인정하면서 해결됐다. 1953년 6월18일 갑작스럽게 이뤄진 반공포로 석방은 당일 아침에야 알 수 있었단다. 비밀리에 진행된 반공포로 석방은 외곽을 경계하는 헌병단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갑자기 새벽에 포로들이 도주하더라고요. 외곽을 경계하던 우리에겐 전혀 연락 온 바가 없었죠.” 당시 국군은 이들의 석방을 도주로 오해해 사격하기도 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쟁은 중단됐다. 강 중사는 이듬해 4월까지 근무하고 전역했다. 강 중사의 아들은 현재 공군 중령으로, 며느리는 육군 중령으로 군문(軍門)의 대를 잇고 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이운재 카드’ 꺼낼까 말까

    ‘이운재 카드’ 꺼낼까 말까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끈 허정무 감독이 이번엔 ‘이운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8강을 정조준하고 있다. 24일 새벽 베이스캠프인 루스텐버그로 귀환한 대표팀의 훈련에서는 꽤 의미 있는 장면이 연출됐다. 1시간 남짓 진행된 회복훈련의 마지막 부분에서 허 감독은 박주영(AS모나코)과 염기훈(수원), 이영표(알 힐랄), 이정수(가시마), 차두리(프라이부르크), 김정우(광주상무), 기성용(셀틱), 조용형(제주) 등을 페널티지역에 불러세우고 승부차기 훈련을 했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남아공에 도착하기까지 승부차기 훈련에 나선 것은 처음. 그런데 허 감독은 반대편에서 골키퍼 훈련을 하던 이운재(수원)를 느닷없이 골대 앞에 세웠다. 우루과이와 8강 진출의 운명을 건 한 판 대결을 펼쳐야 하는 허 감독으로선 승부차기까지 내다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 더욱이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선발로 나섰던 정성룡(성남) 대신 이운재를 세웠다는 점은 그가 ‘녹아웃 방식’으로 진행되는 8강전에 대한 복안을 이미 오래전에 세워 놓았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이운재는 자타가 공인하는 ‘승부차기 방어의 달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8강전에서 스페인과 벌인 승부차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대표팀은 물론 K-리그에서도 승부차기만큼은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발휘해 왔다. 최고 선방 장면은 2004년 포항과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다. 선배이자 라이벌인 ‘꽁지 머리’ 김병지와 거미손 맞대결을 펼친 이운재는 포항의 마지막 키커로 나선 김병지의 공을 막아내 수원에 우승컵을 안겼다. 지난해 FA컵 결승에서도 이운재는 성남과의 승부차기에서 두 차례나 선방, 수원의 우승을 이끌면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허 감독이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경기력 논란이 불거진 이운재를 끝까지 끌어안은 건 결국 승부차기에 대비한 ‘필승카드’였음을 증명한 것이다. 허 감독은 “경기를 치르다 보면 승부차기도 나올 수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 우루과이전이 무승부로 끝나 승부차기에 들어갈 경우 이운재를 ‘비밀병기’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포트엘리자베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공군전투기 석달만에 또 추락… 2명 사망

    공군전투기 석달만에 또 추락… 2명 사망

    훈련을 끝내고 복귀하던 공군 F-5F 전투기 1대가 18일 오전 10시33분쯤 강원도 강릉 제18전투비행단 인근 동해상에 추락했다. 지난 3월2일 기동훈련을 위해 강릉기지에서 출격한 F-5 전투기 2대가 조종사의 ‘비행착각(vertigo)’으로 추락한 지 3개월여만에 또다시 사고가 발생, 충격을 주고 있다. 공군에 따르면 박정우 중령과 정성웅 중위가 조종한 F-5F 전투기는 오전 9시43분쯤 강릉기지를 이륙해 태백 필승사격장에서 공대지 사격 임무를 수행한 뒤 기지로 귀환하다 기지에서 1.8㎞ 떨어진 동해상에 추락했다. 전방석 조종사 정 중위와 후방석 조종사 박 중령은 오전 11시43분과 낮 12시24분쯤 해군과 해경의 해상 수색 중 사망한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정 중위는 낙하산 줄에 얽힌 채 물에 떠 있었고, 박 중령은 헬멧을 쓴 채 낙하산을 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은 정 중위의 낙하산이 일부 펼쳐져 있던 점을 근거로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탈출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군은 전투기가 실종된 지점이 강릉기지 활주로와 1.8㎞ 떨어진 곳인 점을 근거로 조종사들이 탈출을 위한 안전고도(2000피트·약 600m)보다 낮은 500피트에서 사출 장치를 당겨 낙하산이 미처 펼쳐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박 중령은 18전투비행단의 105대대 대대장으로 3월 발생한 추락사고로 순직한 고(故) 오충현 대령(당시 중령)의 후임이었으며, 정 중위도 오 대령과 함께 탑승했다 순직한 최보람 대위(당시 중위)의 빈자리에 4월부터 배치 받아 근무했던 터라 공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군은 사고 원인에 대해 조종사의 ‘비행착각’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배제하고 있다. 사고 당시 강릉기지 일대 날씨가 맑았던 데다 기지에서 거리가 1.8㎞에 불과해 착륙 직전의 사고였기 때문이다. 군은 현재 기체결함이나 전투기 엔진의 조류 충돌 가능성, 조종사의 실수 등의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특히 사고기는 1983년 국내에서 조립됐으며 약 30년 정도 운항했다. 9000여시간 비행으로 노후기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최근 퇴역한 F-4D 팬텀의 경우 41년간 운항됐으며 비행시간은 1만시간 정도다. 공군은 김용홍 참모차장을 위원장으로 한 사고대책위원회를 현장으로 급파했다. 공군 관계자는 “사고원인을 밝히기 위해 교신내용을 파악하고 잔해와 음성기록장치를 수거하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월드컵 中 결방됐던 SBS 드라마 귀환

    월드컵 中 결방됐던 SBS 드라마 귀환

    2010 남아공 월드컵 기간 동안 잠시 결방 됐던 SBS의 주요 드라마들이 연이어 전파를 탄다. 22일 저녁 7시20분 일일드라마 ‘세자매’를 시작으로 밤 9시20분, SBS창사20주년 대하드라마 ‘자이언트’, 23일 밤 9시20분 수목드라마 ‘나쁜 남자’가 시청자들을 다시 찾아간다. SBS 관계자에 따르면 월드컵기간 동안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며 결방에 대한 아쉬움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던 ‘자이언트’의 이범수, 박진희, 황정음과 ‘나쁜 남자’의 한가인 등은 월드컵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녹화에 열중해 왔다. 이 관계자는 “SBS드라마는 국민들이 태극전사들의 원정 첫 16강을 기원하는 동안 스토리라인을 보강하고 시청자들이 지적해 주신 드라마의 결점을 보완하는데 주력했다”며 다시 시청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진 = SBS 서울신문NTN 김경미 기자 84rornfl@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씨줄날줄] 하야부사 vs 나로호/함혜리 논설위원

    일본 열도가 ‘하야부사의 귀환’ 뉴스로 떠들썩하다. 일본어로 송골매를 뜻하는 하야부사는 일본 최초의 소행성 탐사선으로, 정식명칭은 MUSES-C 이다. 하야부사는 지난 13일 오후 7시51분 소행성 이토카와의 표본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캡슐을 분리시킨 후 본체는 약 3시간 뒤 대기권에 충돌해 마찰열로 산화했다. 캡슐은 같은 날 밤 10시51분 지구 대기권으로 진입해 낙하산을 편 뒤 호주 남부 우메라 사막에 안착해 회수됐다. 지난 2003년 5월 우치노우라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지 7년만이다. 여행 거리는 왕복 60억㎞에 이른다. 당초 귀환예정보다 3년이나 늦어진 하야부사의 여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전기의 힘으로 크세논을 이온화해 분사하는 이온엔진 4기를 장착했으나 출발 직후 1개가 고장나고, 2개는 자세제어장치가 망가져 균형을 잡기 어려워졌다. 추진체 분출로 화학엔진이 모두 망가지고 진행 방향마저 뒤틀려 궤도를 이탈하면서 한때 우주미아 신세가 되기도 했다. 모든 역경을 극복한 하야부사는 가장 멀리 여행하고 돌아온 탐사선이며 달 이외의 천체에 착륙했다가 돌아온 최초의 우주선으로 기록됐다. 캡슐에 실제로 소행성 표본이 담겨 있을 경우, 탐사선을 통해 달 이외의 물질을 가져온 것도 세계 최초가 된다. 과학적 성과도 중요하지만 일본 국민들이 하야부사에 열광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임무를 완수한 하야부사에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분석한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는 홈페이지에 하야부사를 의인화시켜 ‘하야부사군의 모험 일기’라는 제목으로 주간 단위의 일지를 소개했고,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귀환 상황을 전달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하야부사의 성공적 귀환은 바로 며칠 전 있었던 나로호의 2차 발사 실패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하지만 크게 낙담할 일도 아니다. 일본의 우주개발 역사는 50년이 넘었고 우리는 그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 단계다. 오늘의 일본 우주기술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독자적 기술확보다. 일본은 수차례의 실패를 바탕으로 액체수소 로켓을 개발했고, 이번 하야부사의 귀환으로 장시간 우주비행할 수 있는 이온엔진 개발에도 성공했다. 독자적 우주기술 개발이 거둔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첨단 과학도 돈 주고 사 오면 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joo@seoul.co.kr
  • 김윤아, 7월 단독 콘서트서 ‘여자’를 말한다

    김윤아, 7월 단독 콘서트서 ‘여자’를 말한다

    최근 세 번째 솔로 프로젝트 앨범 ‘315360’을 발표한 그룹 자우림의 여성 보컬 김윤아가 단독콘서트를 연다. 김윤아는 오는 7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결혼과 출산 후의 삶과 철학을 담은 단독 콘서트 ‘공작부인의 비밀화원’을 개최한다. 이번 콘서트는 그녀와 함께 오랫동안 음악적 호흡을 같이 해 온 여덟 명의 연주자들과 최고의 라이브 사운드로 한국 최고의 여성 보컬 김윤아의 차분하면서도 강력한 음색을 감상할 수 있다. 또 김윤아만의 브랜드 콘서트인 만큼 무대 후면의 초대형 영상이 만들어 내는 미디어아트와 새롭게 선보일 무대 세트를 통해 기존 콘서트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판타지를 제공할 예정이다. 특히 김윤아는 결혼과 출산 후 ‘여자’로서의 삶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번 앨범 ‘315360’의 이야기를 콘서트에서 스스럼없이 풀어놓을 예정이다. 한편 자우림 시절부터 작사, 작곡 실력을 보여준 김윤아는 이번 앨범 ‘315360’에서 작사와 작곡은 물론 편곡과 프로듀싱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하여 ‘완벽한 싱어송라이터의 귀환’ 이라고 불릴 만한 음악적인 성장을 보여줬다. 사진 = 사운드홀릭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엘니뇨’ 귀환… 스페인 첫 우승 꿈꾼다

    소년 같은 앳된 외모에 섬세한 손가락, 조각칼로 새겨놓은 듯 아름다운 근육에 팬들은 흥분한다. 공식별명은 ‘엘니뇨(소년)’이지만, 일부 누리꾼들은 ‘말 근육’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물론 외모만으론 이 정도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터. A매치 통산 72경기에서 23골.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82골(214경기·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통산 56골(79경기)을 터뜨린 골 사냥꾼 페르난도 토레스(26·리버풀)의 얘기다. 국제축구연맹(FIFA) 순위 2위인 ‘무적함대’ 스페인의 공격수 토레스가 두 달여 만에 실전에 복귀했다. 9일 스페인 무르시아에서 열린 폴란드와의 평가전에서 4-0으로 앞선 후반 31분 페드로(바르셀로나)의 땅볼 패스를 가볍게 밀어 넣은 것. 스페인의 6-0 완승으로 끝났다. 토레스는 지난 4월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 오른쪽 무릎 연골이 찢어져 수술대에 올랐다. 월드컵에 맞춰 복귀가 불투명했지만 비센터 델 보스케 스페인 감독은 토레스와 미드필더 세스크 파브레가스(아스널)를 23명의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켰다. 이들을 빼놓고 첫 월드컵 우승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리그를 가진 스페인은 언제나 우승후보로 꼽혔지만, 월드컵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1950년 브라질에서 기록한 4위가 고작이다. 하지만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에서 44년 만에 정상을 탈환한 무적함대는 이제 월드컵 정상을 꿈꾸고 있다. 스페인에는 토레스 말고도 현역 최고의 센터포워드로 꼽히는 다비드 비야(바르셀로나)가 있다. 비야를 원톱으로 내세워 4-2-3-1 시스템으로 나서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다. 하지만 토레스가 건재하다면 4-4-2 포진을 쓸 수도 있다. 상대에 따라 다양한 옵션이 생기는 셈이다. 토레스는 경기가 끝난 뒤 “두어 달 만에 출장해 골을 넣어 무척 기쁘다.”면서 “팀 전체적으로도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다.”며 기뻐했다. 보스케 감독 역시 한껏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준비는 끝났다.”면서 “뛰어난 정신력을 앞세워 남아공으로 진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반지의 제왕 ‘귀환’..네티즌 “프로도 죽었잖아?”

    반지의 제왕 ‘귀환’..네티즌 “프로도 죽었잖아?”

    ‘반지의 제왕’의 전편격 J.J.R 톨킨의 원작 소설 ‘호빗’이 영화화된다.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시리즈의 프리퀼격 ‘호빗’(The Hobbit)이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독을 맡은 ‘반지의 제왕’시리즈의 피터잭슨 감독은 현재 막바지 각본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관객 6백만 신화에 빛나는 ‘반지의 제왕’의 귀환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반가움을 표하며 “또 한번의 신화가 완성 되겠다.”, “다시 돌아오는 ‘반지의 제왕’ 이라니 정말 ‘왕의 귀환’이다.” 등의 소감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반지의 제왕’ 마지막 시리즈에서 엇갈려 해석됐던 간달프와 프로도의 ‘죽음’이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프로도, 간달프, 빌보는 서쪽 불멸의 땅인 ‘발리노르’로 떠난다. 이를 두고 네티즌들은 “프로도와 간달프는 이미 죽었는데 다시 나오나?”, “아니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불명의 땅으로 떠난 것”, “어쨌든 프로도와 간달프가 다시 돌아오는 거냐?” 등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졌다. ‘호빗’은 ‘반지의 제왕’시리즈에서 중간계를 지켜낸 프로도가 아닌, 삼촌 ‘빌보의 모험담’을 담은 이야기다. 빌보는 마법사 간달프 등과 여행을 떠나고 여행길에서 골룸이 품고 있던 ‘절대반지’를 손에 넣는다. 한편 현재 ‘호빗’은 ‘반지의 제왕’에 출연했던 모든 배우들을 대상으로 캐스팅 중이며 캐스팅 확정된 배우는 간달프 역의 맥켄런, 골룸 역의 앤디 서키스 등이 있다. 사진 = ‘호빗’ 포스터 서울신문NTN 전설 인턴기자 legend@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NTN포토] 성시경, 감미로운 ‘발라드 왕자’의 귀환

    [NTN포토] 성시경, 감미로운 ‘발라드 왕자’의 귀환

    [서울신문NTN 한윤종 기자] 5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아람누리 극장에서 진행된 ‘故 김광석 추모 콘서트’에 참석한 가수 성시경이 멋진 공연을 하고있다. 지난 1월 김광석의 고향인 대구를 시작으로 대전 전주 부산 등에서 열린 ‘김광석 추모 콘서트’에는 동물원, 유리상자, 나무자전거, 한동준, 박학기, 바비킴, 서인국이 참여 했으며 지난 17일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성시경이 제대 후 첫 무대를 가졌다. 한윤종 기자 고양(경기) han0709@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다시 불거지는 친이·친박 갈등

    6.2 지방선거 패배 이후 한나라당내 계파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친이·친박 모두 당·정·청 쇄신을 요구하고 있지만 친이는 ‘박근혜 불가론’에, 친박은 ‘박근혜 대안론’에 방점을 찍는 모양새다. 친이계 한 초선의원은 4일 “친박계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잡겠다는 계산이었다면 지방선거를 적극 지원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권택기 의원은 “선거에서 힘을 보여준 세대는 30~40대인 반면, 한나라당의 지지자들은 60대 이상의 산업화 세대”라면서 “한나라당에는 우리 사회 허리 세대와 소통할 수 있고,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지도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여전하다. 이런 차원에서 안상수·홍준표 전 대표 등 친이계 중진들이 새 지도부 후보에 자천타천으로 거명된다. 정몽준 전 대표도 “선거 패배와 전당대회 도전은 별개다.”며 당권 재도전 의사를 시사했다. ‘7월 재·보선 결과를 지켜 본 뒤 지도부를 선출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재·보선을 통해 귀환을 노리는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론된다. 친박계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주’에 대한 당내 견제가 작동하지 못한 게 선거 패배의 원인이라고 규정했다. 당내에서 권력 견제 역할을 하기 위해 친박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곁들인다. 친박 중진인 이경재 의원은 “그래도 앞으로 기댈 곳은 박근혜 전 대표 밖에 없는 것으로 (선거 결과가)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선거 패배로 한나라당의 구심점이 없어진 만큼 이번 전당대회를 계기로 친박이 적극적으로 나서 당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기환 의원은 “전당대회는 청와대의 뜻이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이번 선거 패배를 통해 정신을 차렸는지 여부는 지도부 선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다른 친박 의원은 “선거에 패배한 정몽준 전 대표, 선거전 세종시 수정안 밀어붙이기 발언으로 재를 뿌렸던 친이 중진 같은 분들로 이 국면이 수습되겠느냐. 이재오 전 대표는 더욱 불가하다.”고 비토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화성에서 520일’ 스타트

    ‘화성에서 520일’ 스타트

    “만약 당신이 18개월 동안 세상과 격리돼 창문 하나 없는 컨테이너 박스에 갇혀 바깥 세상과는 이메일로만 연락할 수 있다면?” TV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소재가 아니다. ‘화성 여행’이라는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6명의 우주인이 실제로 겪게 될 일들이다. 러시아 의학생물학문제연구소(IMBP)는 화성 유인탐사를 위해 모형 우주선안에서 우주인들이 520일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생활하는 ‘마르스-500’ 실험을 모스크바 IMBP 연구동에서 시작했다고 BBC, AP통신 등 외신들이 3일(현지시간) 전했다. 러시아,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자원한 우주비행사, 의사, 공학자 출신의 우주인들은 이날 준비작업에 들어가 오는 24일부터 550㎥ 크기의 모형 우주선에서 520일 동안을 지내야 한다. 520일은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는 250일과 화성 표면에서의 탐사 30일, 지구로 귀환하는 데 걸리는 240일을 합친 일수다. 모형 우주선은 주거실험동, 화성 표면 및 우주복 착용 실험동, 의학실험동, 다목적실험동 등 4개 실험동과 착륙실험동으로 구성돼 있다. 화성 표면 및 우주복 착용 실험동에는 화성과 비슷한 암석과 흙을 깔았고, 착륙실험동에는 구명장치도 달았다. 실험은 우주선이 화성을 향해 발사된 뒤 우주인들이 날짜에 따라 겪게 될 임무를 수행하고 생활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6명 가운데 3명은 250일 뒤 화성표면 모듈로 옮겨타 표면연구작업도 수행한다. 우주인들은 오직 이메일로만 바깥 세상과 연락할 수 있고, 변화무쌍한 우주환경을 가정해 이 이메일 연락마저 원활하지 않도록 상황을 설정했다. 식사는 국제우주정거장(ISS)의 우주인들처럼 특수제작된 튜브식만 가능하다. IMBP 측은 “실험은 장기간의 격리기간 동안 우주인이 겪게 될 심리적, 신체적 변화를 관찰해 진짜 여행에서 생길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했다.”면서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밀폐공간의 우주인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독특한 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IMBP는 전에도 비슷한 실험을 짧은 기간에 걸쳐 시행했다. 지난 1999년 실험은 캐나다 여성 우주인이 러시아 우주인에게 추행을 당하는 등 갖가지 사고가 발생, 중지되기도 했다. 실험에 참가한 이탈리아인 디에고 우르비나는 “언젠가 인류가 화성에 첫발을 디뎠을 때 ‘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현재 장기간의 우주여행에 따른 우주인의 심리 및 건강변화는 우주방사선을 막는 소재개발과 함께 화성여행의 가장 큰 장애물로 꼽혀 왔다. 앞서 미항공우주국(NASA)은 오는 2030년대 중반까지 우주인을 화성 궤도에 진입시키고 화성 착륙을 시도하는 ‘화성 탐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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