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귀화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공소청법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효과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동해안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백혈병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416
  • 사쿠라의 나라에서 이룬 ‘조센징’ 신화 - 백만장자 김대영

    사쿠라의 나라에서 이룬 ‘조센징’ 신화 - 백만장자 김대영

    글 최준 시인 · 사진 한찬호 사진작가 신화의 주인공 누군가의 표현대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가까이 있어 부대낌도 많았고 그 부대낌의 와중에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주로 당해준 쪽이 우리였고 먼저 성가시게 군 쪽은 저쪽이었다. 이런 입장도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두 나라는 과거사와 현재를 두고 말들도 많다. 물과 기름 사이가 이럴까. 그 티격태격 와중에도 우리 교포들은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일본 사회의 일부를 형성해 왔다. 이들 중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현실파도 있고, 끝끝내 한국 국적을 고집하고 있는 민족파도 있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처절한(?) 민족파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50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끝끝내 일본인이 되지 않았다. 김대영. 재일교포 사회에서 ‘김대영’이라는 이름은 신화다. 신화의 시작은 일본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의 주인공은 열다섯 살 나이에 친구의 이름을 빌려 일본으로 밀입국한다. 일본에 가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중도 포기한 친구의 학생증을 위조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학생증을 빌려주었던 친구는 오랜 뒤에 집을 한 채 선물로 받았다. 신화의 시작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에 대한 답례였다. 신화의 주인공은 의지 못지않게 그를 뒷받침하는 재능도 있었던 모양이다. 천재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이니 함부로 지칭하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수재는 족히 되었던 모양이다. 독학과 고학으로 요코스카 중학과 요코하마 전문학교,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주인공의 말을 빌면, 이 모든 것이 운이 따라주어 가능한 일이었단다. 일본에서 살았던 50년 동안 실패를 몰랐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운이라는 게 기껏해야 한두 번이지 장장 50년 세월을 운으로 버텼다는 주인공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신화’를 ‘민담’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노릇이다. 운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준비하는 자’ 혹은 ‘준비된 자’ 의 특권일 터이다. 천부적 감각의 사업가 수박 장사, 물비누 장사, 나무 장사와 커피숍 운영. 신화의 주인공이 일본에서 했던 장사다. 물론 그를 백만장자로 만든 파칭코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일들이다. 수박 장사, 물비누 장사, 나무 장사는 중앙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에 했던 장사였다. 학생 장사꾼이었으니 생계유지와 학업을 위한 고학생의 고육책이었던 셈이다. 수박 노점상을 할 때 벌인 야쿠자들과의 담판과 문외한이었던 비누 제조 과정에서의 무수한 실패와 같은 여러 경험들은 사업 성공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중에는 장사 와중에 가지게 된 자신감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특히 중요한 게 자신감이다. 자신감을 가진다면 그 일은 이미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자신감을 가장 중요한 성공 요소로 꼽는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했다.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일본에서 해방을 맞았다. 절망과 침잠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는 법관에의 꿈을 접는다. 귀화가 문제였다. 상황이 변했다. 해방을 계기로 일본에서 사법고시를 치르려면 일본 국적을 가져야만 했다. 그는 민족 차별을 하지 않았던 존경하는 대학 은사의 간절한 귀화 권유를 거부했다. 일본 생활에서 받은 차별과 설움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자존심과 오기가 귀화를 막았다. 법관을 포기한 그가 택한 길은 사업에서의 성공이었다. 성공한 한국인으로 오만하고 불손한 일본 사회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한 본격적인 사업이 커피숍이었다. 스물다섯 살 젊은 사장은 커피 리필 제도를 도쿄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 커피숍은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문을 연 지 4년 정도 되어 커피숍을 정리했다. 큰 돈이 손에 쥐어졌다. 남들은 대단한 성공이라며 부러워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일본인들이 관상용으로 즐겨 기르는 이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센티미터에서 8센티미터 정도밖에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15센티미터에서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 이 물고기를 강물에 방류하면 90센티미터에서 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에 실려 있는 글이다. 꿈의 크기와 성공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 이 물고기를 예로 들었다. 이 같은 자신의 지론대로 그는 큰 꿈을 실천에 옮긴다. 파칭코 사업이었다. 이 사업으로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얼마 전에 사행성 성인오락 게임인 ‘바다이야기’ 파문이 우리 사회를 술렁였지만 그의 사업은 합법적인 사업이었다.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등 일본의 중요 언론들이 “새로운 신화의 탄생”이니 “파칭코 업계의 돌풍”이니 하며 그의 성공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주인공이 일본인이 아닌 ‘조센징 김대영’이라는 사실은 어느 매체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성공은 그렇듯 주인공 없는 신화였다. 그 주인공이 ‘조센징’이었기에 일본은 신화만 남기고 주인공을 지웠다. 영원한 한국인 조센징 신화를 이룬 김대영 회장은 1989년에 영주 귀국한다.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준 일본은 그러나 조국이 아니었다.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지닌 채 50년 동안 일본에서 걸어 온 길이 어떠했을까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의 영주 귀국은 망망대해를 헤쳐 다니다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연어의 회귀와 다르지 않다. 10%의 믿음만 주어도 속이지 않고 배신하지 않던 일본인들. 그러나 100% 믿었던 동족의 배신으로 평생 없었던 실패를 고국에서 경험했던 아픈 과거를 그가 이야기한다. 일본 생활을 정리한 그가 한국에서의 마지막 사업으로 계획했던 게 골프장 경영이었다. 그러나 정직 우선의 사업 습관이 몸에 밴 그는 사술과 거짓이 난무하는 국내 사업의 실상을 깨닫는 데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가장 믿었던 측근들에게 사기당하고 배신당했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커피숍에서 듣는 사람이 오히려 화나는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5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여든 인생은 거저 지나온 시간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아우르는 넉넉함이 있었고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을 내면의 여유가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가던 내 가방에는 《지금도 내 가슴엔 무궁화꽃이 핀다》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지난 삶을 손수 정리해 발간했다. 유언과 같은 한마디라고 스스로 밝힌, 만나기 직전에야 다 읽은 그의 책 서문에 씌어 있는 한마디 말로 신화를 마무리하자.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대는 자신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는 말라.”       월간 <삶과꿈> 2006.11 구독문의:02-319-3791
  • [NPB] 한국계 ‘O-L’포 日야구 평정한다

    한국계 ‘O-L 타선’이 뜬다. 일본프로야구 자유계약선수(FA) 최대어인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사진 오른쪽·33·전 니혼햄)의 요미우리행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일본의 ‘스포츠호치’는 15일 요미우리 구단과 오가사와라와의 첫 교섭 소식을 전하면서 오는 22일쯤 입단이 성사될 것이라고 보도했다.이에 따라 요미우리는 3번타자 오가사와라,4번 타자 이승엽(왼쪽·30)으로 이어지는 최강의 ‘O(오가사와라)-L(이승엽)’ 타선을 구축하게 됐다. 특히 오가사와라는 현재 일본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계여서 더욱 관심을 끈다.2003년 아테네올림픽 예선 직전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일본대표팀 유니폼을 입었고,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도 일본대표로 참가했다.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지난 14일 첫 만남에서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며 영입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하라 감독은 오가사와라를 직접 만나기 위해 팀 훈련캠프에서 비행기를 이용, 도쿄로 돌아와 교섭에 참가하는 열성을 보였다.기요타케 히데토시 구단 대표도 입단 희망을 담은 편지를 오가사와라와 그의 가족에서 전달하는 등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가사와라는 명쾌한 답을 하지 않고 있지만 마음은 요미우리 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요미우리와 함께 영입경쟁을 벌였던 주니치가 발을 빼면서 큰 걸림돌이 사라졌다. 향후 접촉에서 구체적인 계약조건이 나올 것으로 보이지만 요미우리는 3년간 18억∼20억엔(159억원)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니혼햄 한국계 두선수 ‘극과 극’

    |도쿄 박준석 특파원|아시아시리즈 일본대표로 참가한 니혼햄의 3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33)와 1번타자 모리모토 히초리(25)는 ‘한국계’로 빼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성격과 행동은 영 딴판이다.2003년 아테네올림픽 일본대표로 나가기 위해 귀화한 오가사와라는 길게 기른 수염에서 풍기듯, 거의 말이 없다. 자기 할 일만 한다. 지난 9일 삼성전을 앞둔 연습시간에도 조용하게 나타나 선수단 후미에서 묵묵하게 몸을 풀었다. 동료들과 가벼운 인사만 나눴을 뿐 1시간 동안 침묵했다.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리모토는 달랐다. 신세대답게 일단 연습 복장부터 눈에 띄었다. 다른 선수들이 모두 회색 유니폼을 입고 나왔지만 모리모토만 짙은 초록색 상의였다. 또 빡빡 깎은 머리도 돔 불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연습시간에도 주위 동료들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경기장 밖에서도 똑같다. 이날 삼성전에서 2루타만 3개를 폭발시킨 오가사와라와 6회 대량 득점의 포문을 여는 2루타를 날린 모리모토는 경기 직후 일본 기자들을 몰고 다녔다.그러나 오가사와라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모리모토는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즐겼다. 버스에 오르기 전 기자들이 몰려오자 “고생한다.”면서 먼저 말을 건넨 뒤 거의 모든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했다.pjs@seoul.co.kr
  • [코나미컵] 오늘 저녁 일본은 없다

    ‘오늘 일본은 없다.’한국이 9일 밤 영원한 맞수 일본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잇달아 벌인다. 프로야구 삼성이 오후 6시 도쿄돔서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니혼햄전에 나서고, 청소년축구대표팀은 7시30분 인도에서 일본과 아시아선수권 결승 진출을 다툰다. |도쿄 박준석특파원|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하지만 역시 점수를 내야 이기는 경기다.‘해결사’로 통하는 클러치 히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시아 프로야구 왕중왕을 가리는 제2회 코나미컵 우승후보로 꼽히는 삼성(한국)과 니혼햄(일본)에는 각각 양준혁(37)과 오가사와라 미치히로(33)라는 걸출한 거포가 있다. 상대의 막강 투수진을 단숨에 허물 주인공들이다. 특히 오가사와라가 한국계라는 점에서 둘의 방망이 대결이 더욱 흥미롭다. 삼성 선동열 감독은 양준혁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도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선 감독은 “양준혁이 베테랑인 데다 유일한 3할타자로, 타선에서 좋은 활약을 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특히 진갑용, 김한수 등이 정규시즌 후반 당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점을 감안하면 양준혁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올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67의 타율과 3타점으로 부진했지만 최근 컨디션을 상당히 끌어올렸다는 후문이다. 올 정규리그에서도 타율 .303,81타점, 그리고 홈런도 13개나 때려냈다. 특히 제1회 코나미컵에서 4경기에 출전해 타율 .357로 맹활약했고 선 감독도 이를 또렷이 기억하는 것. 양준혁도 “9일 선발 투수인 야기 도모야는 전반적으로 위력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에 맞서는 오가사와라도 일본내 최고 타자로 꼽힌다. 프로 입단 이후에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가 지난 2003년 아테네올림픽 예선 직전 일본으로 귀화했다. 일본대표팀에 합류한 이후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도 참가했다. 선동열 감독도 “오가사와라는 약점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삼성 투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그의 불방망이는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타격왕과 최다안타왕에 각 2차례 올랐고, 통산 타율도 .321로 무섭다. 올시즌에는 32홈런으로 퍼시픽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올시즌 연봉이 3억 8000만엔으로 이승엽(요미우리·1억6000만엔)보다 2배 이상이 많았다. 최근 자유계약선수(FA)를 선언한 그는 3년간 20억엔(160억원)을 받을 수 있는 거물이다. pjs@seoul.co.kr
  • [AFC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소나기골, 막을테면 막아봐”

    [AFC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소나기골, 막을테면 막아봐”

    ‘일본 밟아 주마.’ 한국 청소년축구대표팀이 9일 인도 콜카타 솔트레이크스타디움에서 숙적 일본과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청소년(U-19)축구선수권대회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다. 한국은 35회째를 맞은 이 대회에서 11번이나 우승컵을 품은 최다 우승국이다. 또 2002·2004년에 이어 3연패에 도전하고 있다. 조동현 감독이 이끄는 한국청소년대표팀은 8강까지 치른 4경기에서 15골을 몰아치며 출전국 가운데 최다 득점을 올렸다. 수비에서는 짠물 수비로 최소 실점(1골)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어린 공격수들이 잇단 소나기골로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재를 해결한 재목으로 성장하고 있다. 게다가 특정 선수에 치우치지 않고 득점포가 고르게 폭발했다는 점이 더욱 고무적이다. 신영록(4골), 이상호, 심영성, 송진형(3골), 박현범(1골)이 골폭죽을 쏘아올렸다. 박주영 백지훈 김진규 등의 2004년 멤버보다 이름값은 떨어지지만 이번 선수들이 더욱 알토란 같다는 평가다. 일본은 4경기서 9득점(3실점)을 기록,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역대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도 13승4무1패로 단연 한국이 우위다.U-19,U-20 전적도 23승6무4패. 그러나 방심은 절대 금물.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라이벌전의 특성 탓에 ‘양날의 검’인 셈이다.2005년 세계청소년선수권 직후 새로 꾸려진 한국과 일본 청소년팀은 이번 대회에 앞서 무려 4차례나 승부를 겨뤘고, 한국이 열세였다. 첫 대면이던 지난해 7월 일본 니가타국제청소년대회 결승전에서 0-1로 졌다.10월 안방 친선전에서는 이상호가 2골을 터뜨리는 등 5-2로 시원하게 설욕했다. 올해 2월 카타르친선대회 결승에선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4로 졌고, 지난 8월 일본SBS컵에서는 0-3으로 완패했다. 각 2골을 기록한 포워드 모리시마 야스히토와 가와하라 가즈히사를 특히 주의해야 한다. 주로 조커로 투입되는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장신(196㎝) 공격수 마이크 헤르나르도 경계 대상이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국에 일단 와보면 모두 좋아해요”

    “한국에 일단 와보면 모두 좋아해요”

    |파리 이종수특파원|“제가 원래 불어로도 글을 좀 썼어요.” ‘울랄라’ 등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자랑하며 방송인·리빙 디자이너 등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귀화 한국인 이다 도시(37)가 한국 체험 14년의 애환을 담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이다’(JC 라테스 출판사 펴냄)를 출간했다. 출판기념 행사차 친정인 프랑스에 들른 그는 17일(현지 시간) 주불 한국특파원과 간담회를 갖고 출간 동기와 결혼, 출산 및 육아, 방송인 등으로 동분서주하면서 보고 느낀 한국 사회의 명암을 들려줬다. 그는 “진작 프랑스 시각으로 한국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애 둘 키우랴, 방송활동하랴 정신이 없어 늦었다.”며 “출판사의 권유와 올해가 한·불 수교 120주년인 것이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친구들과 찜질방·온천에 가서 수다 떨고 된장찌개 만드는 등 행복한 경험을 설명하면서 인간 냄새가 나는 얘기를 담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 혹은 한국인에 대해 ‘7전8기’와 끈기와 역동성, 정과 솔직함 등 밝게 색칠했다. 무엇보다 한국이 역동적인 발전상, 맛있는 음식 등 다양한 문화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덜 알려졌다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아직도 프랑스인들은 한국 하면 ‘회색’을 떠올리고 전쟁·핵무기 등 금속을 연상하면서 가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일단 한국에 와보면 모두 좋아하더라.”고 말했다.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IMF이후 금모으기 운동을 보면서 지극한 나라 사랑을 느꼈다.”면서도 “때론 심한 민족주의 경향을 보이는데 다른 문화에 대해 무관심한 게 그 사례”라고 지적했다. 한편 두 나라의 문화를 접한 입장에서 최근 파문을 일으킨 ‘영아 유기’사건에 대해서도 생각을 들려줬다.“베로니크 쿠르조와는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서래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알고 지냈다.”며 “착하고 부끄럼 많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솔직히 임신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일간지 르 피가로에 ‘해외에서 성공한 프랑스인’으로 크게 보도되면서 유명해진 그의 출판 소식은 프랑스에서도 화제다. 텔레비전 등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 정도다. 고향인 서부 노르망디의 페캉에서 사인회도 가졌고, 모교인 르 아브르 대학에서 강연도 할 예정이다. 그의 신간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될 계획이다. vielee@seoul.co.kr
  • 350년 세월, 명품 간장을 빚다

    350년 세월, 명품 간장을 빚다

    종갓집에서 350년간 명맥을 이어온 간장 1ℓ가 500만원에 팔렸다.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 보성선씨 영흥공파 종부 김정옥(54)씨는 16일 “최근 모대기업 회장댁에서 350년여간 명맥이 이어져온 우리집 덧간장 1ℓ를 500만원에 사갔다.”고 말했다. 덧간장은 햇간장을 만들 때 넣는 묵은 간장을 일컫는다. 이 간장은 지난 4월 현대백화점 본점에서 열린 ‘한국 명품로하스 식품전’에서 처음 소개됐다. 값은 1ℓ에 500만원으로 그때도 1병이 판매됐다. 전시회가 끝나고 소문을 전해들은 회장집에서 비서를 보내 현장에서 현금을 내고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보성선씨는 고려말 중국 명나라에서 귀화한 조선조 명문가. 참의공파 종손인 김씨 남편은 시조로부터 21대다. 이 종가는 대대로 종부에게 간장담그는 법을 전수, 매년 20ℓ 가량을 새로 만들어 차례와 제사용으로 쓴다. 350년 전부터 햇간장을 담글 때 지난해 쓰다 남은 간장을 섞어 담근다. 재료도 엄선해 무공해 콩으로 쑨 메주에다 1년 이상된 천일염 간수를 섞어 햇간장을 담그고 아미노산·핵산 등이 풍부한 덧간장에 섞는 전통 비법을 350년간 끊이지 않고 이어왔다. 이 간장은 ‘선병국(시아버지)가옥’으로 불리는 99칸 한옥(중요민속자료 134호) 안채 장독대에 보관된다. 김씨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볕이 잘드는 장독대에 담을 치고 문까지 설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 통제하고 있다. 볕 좋은 늦가을 메주를 쑤어 말렸다가 이듬해 정월 장을 담근다. 솔가지와 고추·숯 등을 매단 새끼줄을 독에 쳐 액막이 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때문인지 최근 두차례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됐을 때도 간장독은 깨지거나 엎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물에 떠다니다 발견돼 350년 종가의 전통과 맛을 고스란히 이을 수 있었다. 이 간장은 맛이 진하면서도 맑고 깨끗한데다 감칠맛이 나는 게 특징이다. 명맥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김씨는 몇년 전부터 장 담그는 날 시집간 딸을 불러 비법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농어업예술위원회 김진흥 박사는 “오래된 간장이 골다공증과 암 등에 특효가 있어 병을 앓는 부잣집에서 사간 것 같다.”며 “350년 전의 종균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조선조 명문가의 전통과 고집이 담겨 식품학적 가치도 높고 워낙 귀해 따로 값을 매기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보은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독립운동가 허위 장군 손녀 허로자씨 내한

    독립운동가 허위 장군 손녀 허로자씨 내한

    독립운동가 허위(許蔿·1854∼1908) 장군의 장손녀 허로자(80)씨가 4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이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허씨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꿈에서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살아 생전에 찾게 되다니 정말로 반갑습니다. 모두가 힘써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또박또박 한국말로 소회를 밝혔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 사형수 1호 왕산(旺山) 허위 장군은 구한말 일본 통감부를 습격한 ‘서울진공작전’을 폈다가 잡혀 이듬해인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1호 사형수가 된 인물이다. 이후 왕산의 자손들은 일본의 추적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허씨도 옛 소련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까지 옮겨갔다. 허씨는 허위 장군의 장남인 허학의 둘째 딸로, 왕산의 직계 후손 중 최고령 생존자다. 허씨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었다.“할아버지가 한두달만에 한번씩 집에 오시면 버선을 가마솥 위에 말렸다가 아침에 신고 또 나가시곤 하셨다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지요.” 허씨는 평소에도 동생이나 조카들에게 “우리는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임을 가슴에 새겨주기 위해서였다.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미혼인 채로 평생을 살아왔다. 이날 공항에는 허씨의 사촌과 손자, 조카며느리 등 국내에 살고 있는 일가 친척 10여명이 모두 나와 허씨를 맞았다. 40여년전 우즈베키스탄에서 허씨와 함께 살았다는 허게오르기(62)씨는 “당시 누님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바느질을 잘 하셨고 회계일을 하시면서 집안을 꾸려가셨다.”라고 말했다. 허블라디슬라브(55)씨도 “누나, 누나”하면서 허씨의 뺨을 어루만졌다. ●“한국에서 동생들과 여생 보내고 싶어” 허게오르기씨 등 왕산의 후손 3명은 최근 특별 귀화했지만 허로자씨의 존재는 그동안 묻혀져 있었다. 이번 입국은 지난달 한명숙 총리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현지 대사관에서조차 두번이나 입국을 거절 당한 허씨의 사연을 접하고 추석을 맞아 특별히 초청한 것이다. “어렵게 찾은 조국인 만큼 이제 한국에서 살고 있는 동생들과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허씨 일행은 5일 왕산이 숨을 거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고,6일에는 경북 구미에 있는 왕산의 묘소를 찾아 차례를 지낸다.“그동안 기일을 정확히 몰라 제대로 제사 한 번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허씨는 10일 한 총리를 만난 뒤 17일 돌아간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책꽂이]

    ●새로운 한국식물도감(이영노 지음, 교학사 펴냄) 전세계에서 나는 식물은 대략 20여만종. 그 중 한반도에서 나는 관속식물은 4000여종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종자식물과 귀화식물, 양치식물, 원예식물 등 한반도에 야생하는 식물들이 망라됐다. 식물용어는 되도록 쉽게 풀어 썼으며 사진은 식물의 특징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 식물이름이 흉한 느낌을 주는 개불알꽃은 복주머니란으로, 풀솜대와 석산은 각각 지장보살(전남 구례의 지방명), 꽃무릇(전남 백양산 근처의 지방명)등 정다운 지방 특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등 새로운 감각을 살렸다. 전2권. 한 세트 30만원.●현대 고고학의 이해(콜린 렌프류·폴 반 지음, 이희준 옮김, 사회평론 펴냄) ‘삽의 증언’이라 불리는 고고학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다룬 현대고고학 개설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열형광연대측정법,GIS와 DNA연구기법 등 과학적 기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과정주의고고학이라 불리는 ‘신고고학’, 인지고고학, 공공고고학 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고고학에 관한 최신 논의들이 실렸다.4만원.●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한스 할터 지음, 한윤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성인들의 유언은 감동스러운 데가 있다. 공자는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 구나.”라고 끝맺었다. 폭군 네로는 “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칭기즈칸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라고 말한 뒤 저세상으로 갔고, 대영제국의 초석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며 자신을 뒤돌아봤다.“다시 볼게요. 다시 보자구요.”라는 한없이 슬픈 유언은 마릴린 먼로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의 유언 백과사전.1만 8500원.●도산 안창호 평전(이태복 지음, 동녘 펴냄)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삶을 조명. 도산은 1898년 평양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18개 쾌재와 18개 불쾌로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규탄하고 외세의 침탈에 대응할 것을 호소하면서 이름을 알렸다.1907년에 신민회를,1913년에 흥사단을 조직했으며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았다. 일부에선 도산을 단순한 인격수양파, 무장투쟁론에 반대한 준비론자, 조선혁명이 아닌 개량주의자로 규정하지만 도산이야말로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구체화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주장이 담겼다.1만 5000원. ●로맹가리(도미니크 보나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다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자 외교관, 전쟁영웅이었던 로맹가리. 참전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명성을 얻은 그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공쿠르 상을 수상,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로 기록됐다. 이 전기에는 24살 연하 진 시버그와의 운명적 사랑 등 일화도 실렸다.1만 8000원.
  • 허위선생 장손녀 추석때 한국초청

    “다음달 초엿새가 추석이라는데….” 구한말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왕산 허위(1854∼1908)선생의 장손녀로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허로자(80)할머니가 한명숙 국무총리로 부터 ‘추석 선물’을 받았다. 24일 저녁(현지시간) 조카 손녀 최 알료나(22)씨와 사마르칸트에서 4시간동안이나 기차를 타고 타슈켄트로 달려온 허 할머니에게 한 총리는 한국 방문을 초청했다. 허 할머니는 “한국에 간 사촌 동생들을 만나게 됐다.”면서 “(조국에 가겠다는 희망을) 이젠 다 잊고 더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도 없었는데 그저 꿈만 같다. 조선에서 우리를 찾을 줄 몰랐다.”고 감격해 했다. 허 할머니는 “구미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꼭 가보고 싶다.”면서 “TV에서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봤지만 가서 제대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조선에서는 내 또래 노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물고기랑 미역이 먹고 싶다.”고 소녀처럼 마냥 설레여 했다. 정부 당국자는 “일단 허 할머니가 원하는 날짜와 동행인 등을 파악해 곧바로 초청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면서 “특별귀화 여부는 당사자 의사 등 고려 사항이 많아 아직 논의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허위 선생의 자손으로 최고령인 허 할머니는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왕산의 맏아들 허학(1887∼1940)씨의 딸이다. 앞서 키르기스스탄에서 살던 허위 선생의 손자 게오르기(62)와 블라디슬라브(55)씨는 지난 7월 한국에 특별귀화했다.타슈켄트 연합뉴스
  • 왕산 허위선생 장손녀 만난다

    중앙아시아를 순방하고 있는 한명숙 국무총리가 구한말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왕산 허위(1854∼1908)선생의 장손녀인 허로자(80) 할머니를 만난다. 한 총리를 수행하고 있는 정부 당국자는 22일 “한 총리가 마지막 방문국인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하는 24일 저녁(현지시간) 타슈켄트에서 동포·교민·기업인 대표 만찬간담회에 허 할머니를 초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허 할머니는 당초 초청 대상이 아니었으나 최근 그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간담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 서울신문은 지난 8월 14·15,17일 세차례에 걸쳐 ‘왕산가의 독립운동사’란 특집기사를 연재하면서 구소련과 중국에서 100여년 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후손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서대문 형무소의 1호 사형수였던 허위 선생의 네 아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허 할머니는 허위 선생의 맏아들인 허학(1887∼1940)씨의 딸이다. 허 할머니는 연해주에서 태어난 11살 때인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때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해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 한 총리는 허 할머니가 특별초청 형식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키르기스스탄에서 살던 허위 선생의 두 손자이자 허 할머니의 사촌동생인 허 게오르기(62), 허 블라디슬라브(55)씨도 지난 7월 특별귀화한 바 있어 허 할머니도 같은 조치가 내려질지 주목된다. 한 총리는 2007년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앞두고 이뤄진 이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방문에서 고려인 초청 간담회를 잇따라 갖는 등 동포 챙기기에 적극 나선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 등 재외동포의 국내 방문 및 취업 기회 확대를 골자로 한 방문취업제 도입 계획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양로원 건립 방침을 밝히는 등 법적·제도적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는 각각 10만명,20만명 남짓한 고려인이 살고 있다.아스타나(카자흐스탄) 연합뉴스
  • 한국을 사랑한 곽방방 태극마크 꿈 이뤘다

    지난 1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홍콩출신 귀화선수 곽방방(26·KRA·세계랭킹 58위)이 간절하게 꿈꾸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특히 맹장수술을 받아 7월 내내 운동을 쉰 탓에 체력이 부쳤지만 정신력으로 극복, 주위를 놀라게 했다. 곽방방은 4일 태릉선수촌 개선관에서 풀리그로 열린 최종선발전에서 13전 전승으로 1위를 차지, 탁구 국가대표에 뽑혔다. 곽방방은 자동출전하는 김경아(대한항공·10위)와 선발전을 통과한 이은희(단양군청·49위), 문현정(28위), 박미영(23위·이상 삼성생명)과 함께 도하아시안게임에 출전,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 홍콩 국가대표였던 곽방방은 지난 2000년 베트남오픈에서 김승환(27·부천시청)을 만나 운명이 소용돌이쳤다. 이후 둘의 만남이 급물살을 타면서 안재형(대한항공 감독)-자오즈민 커플에 이은 ‘제2의 한·중 핑퐁커플’로 관심을 모았고 2003년초 혼인신고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각자의 소속팀에서 숙소생활을 하다 주말에만 시댁에서 만나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던 이들은 지난해 4월 미뤄왔던 결혼식을 올린 뒤 한층 안정을 찾았다. 곽방방은 그동안 KRA에서 현정화 여자대표팀 감독의 조련을 받으면서 단점으로 지적되던 ‘조급증’과 수비 및 연타능력을 보완했다. 최근 열린 KAL컵 여자단식 4강에 오른 것을 비롯, 꾸준하게 4강권의 성적을 내는 등 기복없는 플레이가 장점이어서 아시안게임에서도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이젠 한국말이 익숙해진 곽방방은 “귀화한 첫 해, 첫 선발전에서 대표에 뽑혀 너무 행복하다. 아시안게임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며 활짝 웃었다. 경기장을 찾아 응원에 나선 김승환은 “맹장수술 뒤 정상컨디션이 아닌데 너무 대견하다. 아침엔 무조건 전승을 거두라고 응원해 줬다.”고 말했다. 남자선발전에선 윤재영(74위)과 주세혁(15위·이상 삼성생명), 이정우(농심삼다수·29위)가 자동선발된 유승민(삼성생명·8위), 오상은(KT&G·7위)과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박기철의 플레이볼] 외국인 선수 영입 적정선은

    모든 정책은 비록 결과는 나쁠지라도 시작할 때는 좋은 목적을 갖고 시작한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오락실 상품권도 처음 정책을 수립한 사람은 좋은 목적으로 했으리라 믿는다. 상품권이 오락기로 다시 들어가지 않기만 했다면 바다이야기나 황금성은 건전한 오락기로 남을 수 있었고 게임 산업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좋은 정책이란 목적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 목적에 맞도록 실행이 되어야 한다. 또 아무리 좋은 정책도 좋은 효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한국의 주요 스포츠에서 외국인 선수가 고용되기 시작한 순서는 축구-농구-야구다. 외국인 선수를 고용하는 목적은 부족한 선수 자원을 보완하고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팬에게 보여주며 그들과 국내 선수와의 경쟁을 통해 국내 선수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국내 선수의 설자리를 없애서 선수 저변 확대에 불리하다는 단점도 있다. 축구의 경우 외국인 골키퍼와 국내 선수의 기량 차이가 너무 커 국내 구단이 외국인 골키퍼만 찾자 국내 골키퍼의 설자리가 없어지는 부작용이 일어났었다. 결국 골키퍼는 외국인 금지 포지션이 되었고 신의손이란 귀화선수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농구는 외국인 선수의 비중이 가장 크다.5명이 뛰는 농구에서 외국인 선수가 2명이 되면 산술적인 비율만으로도 40%이고 실력 차이를 감안하면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절대적인 비중만을 보면 1명이 적당하지만 그럴 경우 경기 수준이 급격히 떨어질 우려가 있어 쿼터별로 외국인 선수의 출전시간을 제한하는 고육책을 동원하고 있다. 야구는 3개 종목 가운데 가장 늦은 1998년에 외국인에게 문을 열었다. 야구의 경우는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을 계량화시킬 수가 있는데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타자가 14%, 투수가 5%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다. 팀당 3명으로 인원수가 늘었던 2001년부터는 2년간은 타자가 11%, 투수가 17%를 기록했다. 결국 팀당 3명일 경우 외국인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4%정도다. 이후 2명으로 줄어든 현재 2006년은 타자가 7%, 투수가 14%를 차지하며 대체로 외국인이 국내 프로야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0%정도다. 적정한 외국인 선수 비중이 몇%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20%를 넘어서면 위험하지만 그 이하는 별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tycobb@sports2i.com
  • [청계천 복원 1년] 人工 청계천에 自然이 이사오다

    [청계천 복원 1년] 人工 청계천에 自然이 이사오다

    물억새 사이로 흰뺨검둥오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다리 그늘 밑에는 피라미 치어떼가 가득하다. 조심스레 물에 손을 담그니 금세 달아나 버린다. 큰 돌을 들추니 놀란 가재가 줄행랑을 친다. 잠자리채를 들고 풀숲에 들어가 메뚜기를 잡느라 여념이 없는 아이들 머리 위로 왜가리가 큰 원을 그리며 날아간다. 빌딩숲 사이로 고즈넉한 시골 마을 풍경이 연출되는 초가을의 청계천 모습이다. 고가도로가 깊게 뿌리내렸던 복개하천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철새의 보금자리로, 산란을 앞둔 물고기들의 안식처로 자리잡았다. 청계천이 인공적으로 조성된 하천이라 생태적 기능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당초 우려를 뒤집은 것은 제발로 찾아와 준 새 식구들 덕분이었다. 청계천 복원 1년을 한달 가량 앞두고 사람의 도움 없이 작은 생태계를 일군 청계천 친구들을 소개한다. ●한강에서, 지천에서…제발로 찾아든 가족들 8월말 현재 청계천에 서식하는 생물은 작은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종류는 식물이 229종(애기똥풀·황새냉이 등) ▲어류 16종(메기·돌고기·납지리 등) ▲조류 26종(병아리·중대백로·왜가리 등) ▲육상곤충 26종(썩덩나무노린재·칠성무당벌레 등) ▲저서성대형무척추동물 39종(각다귀류·곳체다슬기 등) ▲포유류 3종(대륙족제비·고양이·집쥐) ▲양서·파충류 7종(아무르산개구리, 참개구리 등)이다. 이 가운데 청계천의 3대 생물로 일컬어질 정도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식생은 물억새와 피라미, 왜가리이다. 이중 한강에서 온 피라미는 전체 어종의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피라미는 청계천에서 유일하게 3대를 일군 ‘명문가’이기도 하다. 피라미의 산란기는 5∼8월로 청계천에서 시험방류를 했던 지난해 8월말 청계천에 자리잡아 산란을 시작, 올 여름 두번째 산란기를 맞았다. 청계천에 있는 대부분의 어종은 피라미처럼 한강에서 거슬러 올라온 것들이다. 한강에서 살던 어류가 중랑천과 청계천의 합류부인 살곶이공원 쪽을 통해 청계천에 이사를 온 것이다. 붕어, 미꾸리, 누치 등이 대표적이다. 이 민물고기들은 수질이 좋은 쪽의 하천으로 이동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버들치와 가재는 이와 반대로 발원천을 타고 청계천까지 내려온 것으로 분석된다. ●하류에는 갈매기, 청계천변에는 참외도 주렁주렁 청계천과 중랑천의 합류지점인 성동구 성수1가 살곶이공원 하류 구간에는 괭이갈매기와 재갈매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바다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하천에서 갈매기가 발견되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지만, 청계천에서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갈매기가 먹이인 물고기의 이동 경로를 따라 청계천까지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서해안∼한강∼중랑천 경로를 따라 청계천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청계천변에서는 참외와 수박 등의 열매채소도 볼 수 있다. 식물은 대부분 바람과 물,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조류 등에 의해 이동된다. 열매채소의 경우에는 새의 배설물 속에 섞여 있던 소화되지 않은 씨앗이 싹을 틔웠을 가능성이 크다. 청계천관리센터 강수학 생태관리부장은 “자연스럽게 이동해온 동·식물들이 이미 인위적으로 이식한 식생의 수를 넘어섰다.”면서 “청계천의 생태서식환경이 그만큼 빠른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조성됐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니들은 반갑지 않아! 새로운 생태복원지로 거듭나고 있는 청계천의 생물 중에는 달갑지 않은 불청객들도 있다. 대표적인 생물은 배스, 블루길, 잉붕어, 붉은귀거북 등 외래어종들이다. 배스와 블루길은 한강에서 거슬러 올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는 개체수가 많지 않지만 배스의 경우 보라매공원에서 단 몇마리가 연못 전체의 어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생태 파괴자이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잉붕어’의 경우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교잡잉어로 대부분 중국에서 낚시용으로 들여온다. 아직 잉어와 붕어의 잡종으로서 생식능력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토종 생태계 교란의 우려가 큰 상황이다. 애완용으로 기르다 함부로 놓아주기 일쑤인 붉은귀거북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청계천센터측은 “먹이사슬 상 붉은귀거북의 상위에 있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벌써 30여마리를 포획했으나 아직도 눈에 많이 띈다.”고 밝혔다. 유해생물은 동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유해식물로는 주변식물을 다 죽이고 혼자 번식을 하는 서양등골나물, 꽃가루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돼지풀, 주변 식물을 타고 올라가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는 삼환덩굴 등이 대표적이다. 유해식물은 번식력이 강해 아무리 제거를 해도 좀처럼 뿌리뽑기가 힘들다. 청계천 식물계에서 토착화된 외래식물인 ‘귀화식물’의 이입률은 18.5%에 이른다. 서울시 평균인 21∼23%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귀화식물 중에 유해식물이 많아 우려를 낳고 있다. 청계천센터 관계자는 “좋은 의미에서 하는 방생이라고 해도 생태계 교란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청계천의 생태적 기능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의 생태적 기능은 크게 서식지와 산란지 기능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청계천을 영구적인 서식지로 삼는 대표적인 조류는 흰뺨검둥오리이다. 흰뺨검둥오리는 강우 정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지천과 달리 청계천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청계천을 일시적인 서식지로 삼는 대표적 생물은 여름 철새인 백로과 조류들이다. 이들은 여름철이 되면 하류에 나타났다가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이동한다. 특이하게도 철새이면서도 청계천을 반영구적 서식지로 삼고 있는 왜가리도 있다. 본래 여름철새인데도 늦봄이면 나타나 초겨울까지도 청계천 하류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아 사실상 ‘반 텃새화’된 것으로 보인다. 청계천은 도심에서 멸종되어 가는 양서류의 새로운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청계천 부근에 사는 양서·파충류는 복원전 2종에 불과했다. 그나마 아무르개구리는 죽은 채로 발견됐었다. 하지만 현재 청계천에 살고 있는 양서·파충류는 9종이나 된다. 맑은 하천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자라까지 있다. 1급수에 가까운 2급수 수질을 유지하는 청계천은 어류들이 산란을 위해 찾는 ‘산부인과’로도 각광받는다. 대표적인 어종이 잉어로 산란기인 4∼5월 한강과 중랑천에서 거슬러 올라와 청계천에 알을 낳는다. 크기가 작은 잉어는 그대로 머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잉어는 산란을 하고 다시 중랑천으로 돌아간다. 가물치 역시 산란기인 지난 5∼8월에 맞춰 청계천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결혼이민자 도우미제’ 도입

    국제결혼을 통해 국내에 들어오는 이민자 등의 민원안내를 돕기 위한 ‘결혼 이민자 도우미제’가 운영된다. 부산출입국관리사무소는 30일 부산지역에 거주하는 일본 중국 베트남 필리핀 태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7개국 출신 가운데 결혼 이민자 20명을 선발, 사무소를 찾는 이민자들을 위한 도우미로 활동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30일 밝혔다. 결혼이민자 도우미들은 빠르면 다음달초부터 외국인등록, 재입국, 체류지변경, 귀화, 영주자격 변경 등을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는 외국인 이민자들을 현장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최근 외국인 이민자들이 늘면서 매일 70명 안팎의 외국인이 민원실에서 행정절차를 밟기 위해 대기를 해야 하고, 언어나 국내 행정절차를 몰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리사무소는 도우미들이 한국 남성과 결혼한 주부인 점을 감안, 일주일에 2∼3차례 편안한 시간대에 민원인실에서 자원봉사 역할을 하도록 할 계획이다. 원형규 소장은 “결혼 이민자들에게 국가행정에 대한 참여기회를 제공해 내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 주고 민원인들도 낯선 외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사설]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보호책 세워라

    서울신문은 광복절 기획기사로 ‘항일 허위(許蔿) 가문 후손들’을 3차례에 걸쳐 탐사보도했다. 이를 보면 대한민국과 국민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왕산 허위(1854∼1908) 선생은 구한말 정미의병 때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의병장이다. 형제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였던 선생이 일제의 탄압으로 순국한 이후 가족들은 만주로,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져 그곳에서 정착했다고 한다. 선생의 일부 후손은 90년대 중반 산업연수생으로 고국에 돌아왔다가 귀화하는 과정에서 10년 동안 불법체류자 신세였고, 대한민국 국적을 최근에야 다른 가족과 함께 취득했다는 것이다. 행정절차가 까다롭고 지지부진했던 탓이다. 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아직도 해외의 독립운동가 후손은 집계조차 어렵고 귀화도 쉽지 않다. 세월이 흘러 ‘인증’의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지금 누리고 있는 번영이 순국선열의 얼과 피의 대가임을 생각한다면, 그 후손을 위한 특단의 보호·지원대책을 세우는 게 도리일 것이다. 부족하나마 정부는 올해도 광복절에 즈음해서 러시아·카자흐스탄·중국 등지의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 17명을 초청해 고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잔학한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직계가족과 그 2∼4세대 후손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국가적·국민적 책무이다.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일부 후손들 “고국에 영구 귀국 않겠다”

    광복절을 맞아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프로코피씨 등 17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이 이제서야 이들을 반겼지만, 이들은 고국에 영구귀국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한세기 가까이 일가가 이국생활을 하며 그 곳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70이 넘은 고령에 말과 사람이 낯선 조국에서 새로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입국했을 때 받는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다. 형제가 한명도 없을 때 후손이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정착지원금이 7000만원이다. 형제가 많으면 가구별로 받는 지원금이 줄어든다. 해외에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얼마나 되는지 어림 통계치도 없다. 지난해까지 국가보훈처는 해외에 있는 유공자 후손 381명을 찾아 고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17명의 후손들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찾아왔다. 후손 가운데 에피모바 류드밀라(70)씨는 고종의 밀령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갔던 이위종의 손녀다. 일제의 방해공작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위종은 만국기자협회 회견을 통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알렸다. 황빅토르(58)씨는 192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 500여명의 시위를 주도했던 황경섭의 손자다. 황경섭은 같은 해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던 4월참변 때 최재형·김이직·엄주필 등과 함께 사살됐다. 황경섭과 함께 사살됐던 최재형은 9살이던 1867년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에 귀화해 관리로 성공했다. 그는 연봉을 은행에 예치해 교포 장학금을 만들었고,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근거지로 무장투쟁 준비를 했다. 이번 고국 방문단에는 최재형의 손자인 최 세르게이(29)씨도 포함됐다. 1919년 간도 무관학교에서 신식군대를 양성하고 1922년 고려혁명군 사령관을 지낸 김경천의 손녀 필란스카야 갈리나(43)씨도 이번에 고국에 왔다.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던 독립운동가 김화영의 자녀 신순향(70)씨 부부도 고국을 방문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한국 발레단 스승 로이 토비아스 별세

    국내 직업 발레단의 토대를 닦은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Roy Tobias·한국명 이용재)가 16일 오전 11시20분 서울의료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인 고인은 1981년 국립발레단 객원 안무가를 거쳐 1988∼1995년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한 뒤 1995∼2003년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 및 상임 안무가로 일하는 등 국내 3대 발레단의 발전과 창단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1990년대 말 한국으로 귀화한 고인은 한국 이름 ‘이용재’를 써 왔으며, 그동안 근육질환 등으로 치료를 받아왔다. 1944년 17세에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한 고인은 제롬 로빈스 안무의 뮤지컬 ‘하이 버튼 슈즈’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으며 1950년 뉴욕시티발레단의 창단 멤버로 들어가 수석 무용수로 발탁되기도 했다.1960년부터는 일본, 프랑스, 미국 등 해외 발레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81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했다. 주요 안무 작품은 ‘즐거운 행진’,‘풀치넬라’,‘영광’,‘누군가 내게 사랑을’(이상 유니버설발레단),‘뉴와인’,‘수평선’,‘폴로네이즈’,‘파리의 선택’(이상 서울발레시어터) 등 20여 편에 이른다. 발인은 18일 오전 9시, 한양대병원 영안실 12호.(02)2290-9462.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하) 어려운 국적 회복·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하) 어려운 국적 회복·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100여년 전 만주와 연해주로 쫓겨 갔던 왕산가 후손 가운데 아직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키르기스스탄·중국·미국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 중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3,4세대 중에는 그곳을 제2의 고국으로 생각하고 귀국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진 왕산의 후손들 허게오르기씨의 형이며 허국의 2남인 허프로코피(72)씨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농업기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화를 원하지 않는다. 고령인데다 러시아에 정착한 자녀들과의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프로코피씨는 이번 광복절에 보훈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모스크바에는 왕산 허위의 3남인 허준의 딸이며 화가인 허미이라(45)씨 등 다른 후손들도 있다. 귀화한 허금숙씨는 여동생 허옥숙(51)씨와 허성숙(47)씨, 남편 최치도(65)씨를 중국에 두고 왔다. 최씨는 교사로 일하다 5년 전 정년퇴직했다. 허금숙씨는 10여년간 떨어져 있던 남편과 자녀들에게 한국 국적을 회복시키려고 준비 중이다. 왕산의 2남인 허영의 아들인 허도성(73)씨는 미국 휴스턴에 살고 있다. 귀화는 곧 이산을 의미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허게오르기씨 형제도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다. 남은 가족들을 귀화시키는데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타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4세대에게는 그 곳이 더 살기 편할 수도 있다. ●독립운동 했어도 입증받기까지 절차 복잡해 허금숙씨는 특별귀화를 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이유는 허금숙씨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허겸의 손녀가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이다.1995년에 홀홀단신 서울에 들어온 허금숙씨가 할아버지 성산 허겸과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서류를 챙겨왔을 리 만무했다. 허씨는 “1992년에 보훈처 직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할아버지 시신을 한국으로 모셔왔고, 인적관계를 파악해 갔는데도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해서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성산이 “왜놈의 호구조사를 따르지 않겠다.”며 본인뿐 아니라 허금숙씨의 아버지인 허선의 이름도 나라에 등록을 하지 않아 일이 더 어려웠다. 허금숙씨는 “중국동포 사회에서 독립운동가 자손이라고 존경받고 살던 집 자손도 독립운동을 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고 했다. 후손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증명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게오르기씨는 “이런 면에서 왕산의 자손들은 그나마 혜택을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왕산의 독립운동 기록이 일본군 재판기록 등에 온전히 남아 있었고,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여러 사가들이 왕산가의 독립운동을 연구해 놓았기 때문이다. 허게오르기·블라디슬라브 형제는 6개월 만에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특별귀화증을 받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있었고 몇 차례 언론에 공개돼 큰 도움이 됐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중) 이국 망명생활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중) 이국 망명생활

    의병장 왕산 허위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뒤 더 이상 집성촌인 구미에 모여살 수 없었던 왕산의 일가와 후손들은 짐을 싸서 만주로 야반도주를 했다. 만주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왕산의 후손의 목에는 신고보상금이 걸려 있었다. 일본 순사가 눈치챘다는 말이 들리면 자다가도 일어나 국경을 넘어야 했다. 고향을 떠난 뒤부터 그들의 삶은 격동의 시대만큼 흔들렸다. ●술마시면 독립운동 얘기하던 허금숙씨 아버지 왕산의 바로 위 형인 성산 허겸은 만주에 정착했다. 쫓기는 와중에도 허겸은 만주에 조선어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성산의 아들이며 이번에 귀화한 허금숙씨의 아버지인 허선(1987년 사망)씨도 배웠지만, 상급학교에 다닐 수는 없었다. 허선씨는 배운 게 없으니 헤이룽장성에서 평생 소작농으로 일했다.14살 때 허선씨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어렸을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만주 등지에서 생활해서인지 솜씨가 야물었다. 허금숙씨는 어머니가 장아찌와 김치를 담가 일년내 가족들의 반찬을 댔다고 회상했다. 지금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더 짜고 덜 매운 음식이었다. 아버지 허선씨는 말이 없으셨지만, 힘이 장사였다. 친구들과 술이라도 마시면 아버지인 성산보다는 삼촌인 왕산 얘기를 꺼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왜군들에게 호통치며 취조에 응했던 이야기, 의병활동을 하면서 썼던 격문…. 술자리에서 나오던 집안 얘기가 뚝 끊긴 것은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 바람이 분 뒤부터다. 아버지가 어딘가 끌려갔다 온 뒤부터 큰 소리로 집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 때만 해도 남조선이라고 부르던 고국은 중국의 최대 적국이고, 독립운동 얘기는 금기가 됐다. 할아버지 허겸은 일본 국적의 호적을 만들 수 없다며 아버지 허선씨를 낳은 뒤 이름을 관청에 등록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것처럼 장녀인 허금숙씨도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인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3남3녀 중 다른 동생들은 덕분에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게 됐지만, 아버지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바로 전 해에 사망했다. 허금숙씨의 어머니도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1997년에 숨을 거뒀다. 경상도 출신인 어머니는 “집앞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지금도 그대로일지….”라며 궁금해했었다. 허금숙씨의 한국말은 철저하게 부모의 말투 그대로다.“‘나라말’을 잊어버리면 정신을 잃게 된다.”는 아버지의 경상도 말씨를 집안에서는 꼭 써야 했기 때문이다. ●광복되자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스탈린에게 편지썼던 아버지 허국 허위의 직계 후손들은 주로 구 소련 땅으로 도주했다. 허위의 4남 허국의 아들로 이번에 귀화한 허게오르기씨와 블라디슬라브씨는 한국말을 쓸 수 없었다. 쫓는 일제의 눈길이 무서워 부러 집안에서도 러시아말을 쓰게 했다. 허국(1971년 사망)씨는 만주 군경을 피해 연해주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가족들과 함께 떠나야 했다. 기개가 대단했던 허국씨는 고국에 돌려 보내달라고 직접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나갈 수 있다는 예상 밖의 답장이 왔다. 하지만 나가고 싶다고 한 의도가 뭔지, 당국이 캐고 있다는 말을 지인에게 전해듣고 그날로 허국씨는 가족들과 함께 고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방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정착한 곳이 키르기스스탄이다. 험한 일을 해보지 않았던 허국씨는 여기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며 육체노동을 했다. 하지만 곧 십장으로·반장으로 직위가 올랐고, 감독일을 맡게 됐다.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던 허국씨는 자녀들에게 엄했다. 게오르기씨를 비롯한 자녀들을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허게오르기씨가 20대 중반이 되던 1971년까지 허국씨가 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머리가 큰 뒤부터 기숙학교에 다녔고, 여름에만 잠시 집에 돌아와 생활했던 탓이다. 허게오르기씨는 고려인과, 허블라디슬라브씨는 연구소 동료이던 러시아 여성과 결혼을 했다. 이들도 동·서 화해무드가 조성되던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 대해 자유롭게 알아보지 못했다. 김일성대학을 나와 모스크바대 교수를 하는 아저씨뻘 되는 친척과는 연락을 했지만, 남한과는 소통하지 못했다.1988년 텔레비전을 통해 서울을 처음 봤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소수민족의 비애는 구소련이 해체된 뒤 찾아왔다. 자국민 우선정책을 쓴다며 둘다 직장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일제를 피해다니던 아버지가 이주정책 때문에 다시 쫓겨가 소작농부터 시작한 것처럼 형제도 소작농과 트럭운전사로 일해야 했다. ●만주서 귀국한 허벽씨가 귀화에 도움 줘 왕산의 친척 허벽씨는 이들과는 다르게 광복 직전 만주에서 귀국했다. 허벽씨가 갖고 있던 허씨 일가 사진이 이번에 허게오르기씨 등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40년 전에 찍은 사진을 필름까지 갖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도망을 다니느라 사진을 한장도 찍지 않았다.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 한장 없는 게 한이 맺혀서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배웠다.”고 말했다. 허벽씨는 “한국에 살면서 내가 가장 힘든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국에서 온 친척들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시대에 희생당하며 살았다.”면서 “낯선 고국에 돌아온 이들이 어떻게 다시 정착하고 살아갈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