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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문기남 前 北축구팀감독 귀순

    지난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의 북한측 코치를 맡았던 문기남(56)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이 북한을 탈출한 뒤 국내에 입국,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정부 관계자는 “문씨는 현재 당국으로부터 탈북 경위 등을 조사받고 있으며,조사가 끝나는 20일쯤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을 위한 교육기관인 하나원에 입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는 지난해 8월 부인을 비롯,네 자녀와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올해 베이징(北京) 소재 한국 공관에 진입,지난 1월 30일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문씨는 1998년 북한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본선 진출을 이끌었으며,1999∼2000년엔 북한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다. 북한 축구 지도자가 탈북,국내에 정착하는 사례는 1999년 4월 두 자녀와 함께 입국한 윤명찬(56)씨에 이어 두번째다.그는 윤씨로부터 북한 청소년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잇따라 이어받은 지도자로 한국 축구계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징글징글 소주송·솔로 플래시그림·커플족 타도 행사…‘솔로’를 위한 X-마스

    솔로 2년차인 직장인 김정민(25·여)씨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착잡하다.서울 강남의 광고회사에 다니는 김씨는 가로수에 걸린 전등 불빛을 봐도,신나는 캐럴송을 들어도 감흥이 없다고 했다.그나마 올해 크리스마스는 지난해보다 나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같은 솔로 네티즌들의 애환을 담은 ‘징글징글 소주송’이나 인터넷 카페 등에 솔로들이 모인 ‘솔로부대’의 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처량한 크리스마스 솔로 크리스마스를 앞둔 솔로의 유형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학형.최근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징글징글 소주송’이 이같은 자학형 솔로의 애환을 대변하고 있다.귀에 익은 ‘징글벨’ 캐럴 멜로디에 맞춰 “성탄전날에 ‘방콕’에 박혀 낮술 깡소주 처량도 하다….”로 시작한다. 겨울철 솔로의 모습을 담은 ‘솔로 플래시그림’도 인기다.솔로는 외로움에 휩싸인 채 눈물을 흘리며 “누가 날 좀…꼬셔줘!”라는 절규와 함께 눈길에 쓰러진다. 솔로의 한이 커플들에 대한 ‘저주’로 나타나기도 한다.‘솔로들의 간절한 기도문’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얼어 죽을 만큼 춥게 해 모든 닭살 커플들이 밖에 다니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읊고 있다. ●커플 제국을 무너뜨리자 외로움에 지치다 보면 자학이나 저주에서 끝날 수 없는 법.커플들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는 ‘전투형’ 솔로들도 출현했다. 디지털사진 전문 사이트인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의 ‘밀리터리 내무반’이나 포털 사이트 다음의 ‘무적의 솔로 부대’(cafe.daum.net/ylifearmy)카페를 본거지로 하는 이들은 이번 크리스마스를 커플들과의 대격돌의 날로 잡았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패러디한 ‘만국의 솔로레탈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 아래 모인 전투형 솔로들은 최근 인터넷에서 ‘솔로 부대’를 만들었다.제2차 세계대전이나 러시아 혁명 당시 포스터를 합성,온라인을 통해 대대적으로 유포하고 있다.이들은 “데이트만 하면 일은 언제 할 것인가.우리는 경제를 생각하는 솔로부대다.”라는 구호도 담았다.‘솔로당(黨)’까지 결성했을 정도다. 이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커플 타도’라는 이벤트도 계획하고 있다.25일 0시 서울 명동에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을 손전등을 켠 채 갈라놓는다.이어 ‘난 솔로부대이다.커플제국의 멸망을 위해’라고 외치면서 미리 준비한 10원짜리를 허공에 던진다는 것이다. ●커플 제국으로 귀순하세요. 솔로들의 공세에 밀리는 듯했던 커플족들도 최근에는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디씨인사이드 사이트에서 ‘커플제국 만세’라는 합성 그림을 올리면서 솔로들의 ‘귀순’을 촉구하고 있다.이들은 호전적인 솔로들과는 달리 외로움과 쓸쓸함을 부각,솔로들을 부드럽게 선전·선동하고 있다. 사이버문화연구소 김양은 소장은 “전투형 솔로들이 인터넷을 도구 삼아 ‘젊은 남녀는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경쾌하게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라면서 “다양성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
  • 대입 특집 / 방송통신대학교

    졸업장이나 학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배움에 열의를 지닌 신입생을 뽑는다.1972년 국내 처음으로 원격교육을 통해 대학교육을 실현한 방송대는 2001년 9월 국립 사이버대학원을 개원했다.모집인원은 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교육과학부 등 모두 4개 학부에서 8만 6400명.올해는 관광학과와 문화교양학과가 신설됐다.특별전형에서는 국가유공자와 특수교육대상자,북한귀순동포를 각 학과 모집 인원의 1% 이내에서 선발한다. 방송대 전형은 무시험 전형이다.고교 졸업자나 고졸 검정고시 학력자라면 누구나 신입생이 될 수 있다.고교 성적이나 수능 성적으로만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이다.학비 부담도 거의 없다.등록금은 한 학기에 25만원 안팎으로 일반 대학의 15분의 1,사이버대학의 5분의 1에 불과하다.내년 1학기부터는 ‘등록금 차등납부제’를 도입,일부 과목만 수강하는 학생들이 등록금 전액을 내야 했던 부담을 줄이기로 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캠퍼스는 전국에 걸쳐 14개 지역대학에 35개 시·군 학습관을 갖추고 있으며,서울에만 4개의 캠퍼스가있다. 첨단 원격교육 매체도 돋보인다.학생들은 출석하지 않고도 어디에서나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다.방송대 위성TV인 OUN을 비롯,라디오 방송강의,방송강의 LOD(Learning On Demand)시스템,쌍방향 원격영상강의시스템,e-북(book) 등은 국내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방송대가 주목받는 이유는 학벌이 아닌, 평생교육을 위한 대학이라는 점이다.2000년 3월 평생교육법이 시행된 이후 입학생들의 분포는 점차 나이,성별,직장의 벽을 뛰어넘는 추세다.특히 주부의 비율이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면서 최근에는 ‘공주(공부하는 주부)’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했다. 질높은 원격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은 최근 학사졸업자와 이른바 명문대 졸업생들의 편입학으로 입증되고 있다.지원자 가운데 학사 편입자가 이미 2만명을 넘어섰으며,학사 학위 소지자의 입학도 증가추세다. 이같은 인기는 대학원 경쟁률에서도 나타난다.올해 1학기 대학원 평균 경쟁률은 5.4대 1을 기록했다.지난 6월 중앙인사위원회가 발표한 우리나라 공직 인사실태 결과에서도 54개 중앙행정기관 4급 이상 공무원 7766명 가운데 방송대 출신자가 964명으로 공무원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는 평생교육기관으로 조사됐다.
  • ‘南北 오락가락’ 끝은 법정행

    ‘조선인민군 전사-탄광 광부-사로청 책임지도원-온성군 수출지도원-우산공장 지배인-탈북-숯불갈비집 사장-입북-노동당 입당-재탈북’ 탈북했다가 입북,재탈북했다가 2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남수(45)씨의 기구한 인생역정이다.1996년 탈북한 남씨는 당시 국내 정착금 864만원 및 주택지원금 840만원과 생계보조금으로 매월 108만원을 받으며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1999년 결혼,자녀까지 둔 남씨는 대출받은 1억원으로 연 갈비집이 망하면서 극심한 생활고와 가정불화를 겪었다.남씨는 자신의 불행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으로 인식,2000년 8월 중국 베이징을 통해 북한에 입국했다.전처와 재결합한 남씨는 북한에서 잘나가는 탈북방지 강사로 활동했다. ‘공화국이 그리워 다시 돌아온 모범주민’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동당에도 입당했다.남씨는 “남조선으로 도주했지만 영웅 대접은커녕 전기고문을 받으며 상갓집 개처럼 살았다.자본주의는 세금도 수없이 많고 귀순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강연하며 탈북을 막았다. 그런 그가 동생,아들 2명과 함께 재탈북해 지난달 중국 베이징 한국 공관을 통해 국내로 돌아왔다.검찰 관계자는 “자본주의를 경험한 남씨가 사회주의 체제에도 결국 적응을 하지 못한 것 같다.”면서 “반성은 없고 억울하다는 심경만 보인다.”고 전했다.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吳世憲)는 이날 국내 정보기관의 활동과 탈북자 근황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알려준 남씨를 자진지원·잠입·탈출·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전방 10곳에 탈북자수용소/ 軍부대에 2000명 수용규모

    군 당국이 북한의 정정불안 등으로 인한 대규모 주민 탈북사태에 대비해 휴전선 인접 군 부대 안팎에 임시 수용소 10곳을 마련한 것으로 드러났다. 28일 국방부에 따르면 육군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남하하는 대량 탈북자를 한시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동·서·중부 전선을 담당하는 6개 군단 인근에 각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련시설 1곳씩을 임시 수용소로 지정했다.해군도 강원 동해 소재 1함대사령부와 경기 평택의 2함대사령부 영내에 수용시설 2곳씩을 갖춰놓고 있으며 필요시엔 관련시설을 늘려나갈 방침이다. 북한 주민의 대량 탈북을 포함한 유사시 대응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수립돼 운용중인 사실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정부는 그동안 북한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이를 비밀에 부쳐왔다. 군은 또 장병들이 탈북 주민과 접촉할 경우 우선 안전하게 귀순을 유도,임시수용소로 보내,관계당국의 합동신문을 거쳐 1주일간 수용했다가 정부 수용소로 옮기는 내용의 탈북주민 호송절차도 이미 마련한 상태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대량탈북 대비계획은 지난 93년 합참에서 최초로 수립된 이래 수 차례 개정을 통해 구체화되고 실제 상황에 맞게 보완됐으며,각급 부대에서는 실전 대응훈련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송두율 X파일’ 메가톤급/해외정보·황장엽씨 증언등 담겨

    국정원이 검찰에 송두율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사건을 송치하면서 미국·독일 등 해외정보기관 등으로부터 입수한 이른바 ‘송 교수 X-파일’을 건넨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국정원과 국회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확인된 내용만 하더라도 굵직한 사항들이 적지 않다. 우선 한 우방 국가의 조사자료가 관심이다.이 기관은 1999년 미국으로 망명한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김경필 서기관이 넘겨준 송 교수 관련 자료를 국정원측에 알려온 것으로 전해졌다.김 서기관은 북한 노동당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소속으로 베를린에 파견돼 있었고 송 교수도 북한과의 접촉창구로 북한 이익대표부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북한의 대남공작 관련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국회 정보위의 한 위원은 5일 “지난 1일 국정원 국정감사에서 99년 미국으로 망명한 북한의 고위인사가 이 기관 조사 때 송 교수 얘기를 자세하게 했고 이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전했다.이 인사가 김 서기관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송 교수가 당초 혐의를 적극부인하다 국정원이 이 자료를 들이대자 하나씩 인정하기 시작했다.”면서 “이 자료는 이미 검찰에 증거로 전달됐고,증거자료 중에는 컴퓨터 디스켓도 포함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그는 “국정원은 98년 귀순한 황장엽씨의 진술로 송 교수 혐의를 확신했으며 이 기관을 통해 구체적인 혐의내용을 확보했다.”면서 “하지만 언제 이 자료를 넘겨 받았는지는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국정원은 지난 92년 이한영씨 제보를 토대로 송 교수를 내사해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1982년 귀순했다가 97년 피살된 이씨가 “김정일로부터 서독 조선노동당 구주위원장이 김철수라는 말을 들었다.”고 제보했다는 것이다. 김상연기자 carlos@
  • 송두율교수 처리 논란 /정형근의원이 전한 ‘국정원 브리핑’

    국정원은 1일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송두율 교수에 대한 조사 결과를 비교적 자세하게 밝혔다.다음은 국회 정보위원인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기자들에게 브리핑한 국정원의 조사 내용. 송 교수는 73년 9월 독일 거점 북한 공작책인 이재원(현재 71세)에게 포섭된 뒤 모스크바를 경유 입북,2주간 초대소에서 주체사상 학습 및 공작원 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했다. 이후 91년 5월 입북해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과 면담했을 당시 북측의 예우가 이전보다 좋아져 자신의 위상에 큰 변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 94년 7월8일 김 주석 사망 당시 독일의 북한공작원으로부터 자신이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노동당 정치국 서열 23위(후보위원에 해당)로 선임됐으며,김 주석 장의위원임을 통보받았다. 94년 7월9일 노동신문에 게재된 북한 노동당 정치국위원 서열에 따르면 김철수는 1위 김정일과 2위 오진우,7위 김영남,21위 연형묵,22위 이선실에 이어 23위로 돼 있다. 김철수는 또 당 중앙위원으로서 당의 중요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행사해왔다. 국정원은 송 교수가 김 주석 장례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진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 교수는 96년 이후 매년 북한의 정권창건일과 김 국방위원장 생일날 같은 때에 친필 충성맹세문을 작성해 북한에 10여차례 전달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특히 73년 9월부터 2003년 3월8일까지 총 18회에 걸쳐 입북할 때마다 “독일 유학생 포섭 및 조국통일사업을 위한 지식인 중심의 조직을 결성하라.”는 지시와 함께 미국돈 1000∼2000달러씩을 받았으며,91년 김일성 면담이후 95년까지는 별도로 독일 공작원을 통해 매년 2만∼3만달러를 받아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합치면 15만달러정도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역을 보면,73년 9월 입북해 북한 공작책으로부터 활동비 2000달러 수수,79년 10월 입북해 1000달러 수수,88년 9월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으로부터 1000달러를 수수했다. 송 교수는 또 96년 8월 자신의 부친이 별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1500마르크를 조의금으로 받기도 했다. 송 교수는 92년 5월 자수한 재독일 유학생 오길남씨가 86년 11월 유럽으로 침투한 뒤 망명신청을 했을 당시 오씨에게 “내가 오형(兄)이라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겠다.”며 재입북을 권유한 사실을 오씨와의 대질신문 결과 시인했다. 송 교수는 앞서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독일에서 ‘한국은 올림픽을 할 수 없는 나라’라는 책을 썼으며,황장엽이 귀순했을 때는 다른 공작원에게 “나의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정형근 의원은 “송 교수는 교수로서 한번도 재직한 일 없으며 올해에는 뮌스터 대학에서 특강형태로 5차례 걸쳐 강의한 데 불과하고 뮌스터대학으로부터 560㎞나 떨어진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만큼,송 교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수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 “송 교수는 자신의 시간당 강사료로 교통비를 할까 말까하고 부인이 도서관 사서를 해서 생계를 꾸린다고 진술했다.”며 “그의 직업이 북한 공작원이고 공작금으로 생활한다는 데 국정원도 동감했다.”고 말했다. 이어 “송 교수의 뮌스터대학 강의제목은 ‘반미’(反美)였다.”고 밝혔다. 김상연기자 carlos@ ●송두율교수 약력 재독 철학자 송두율(宋斗律·59) 뮌스터대 교수는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세계적인 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 아래 ‘헤겔,마르크스 그리고 막스 베버에 있어서 동양세계의 의미’로 72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82년부터 뮌스터대 교수로 일했다.저서로는 ‘역사는 끝났는가’,‘21세기와의 대화’,‘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등이 있다.
  • 송두율교수 향후 수사전망/‘김철수냐 아니냐’ 최대 쟁점

    체포영장이 발부된 송두율 교수는 23일 자진출두 형식으로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는다.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라는 의혹이 어떻게 결론날 것인지에 따라 사법처리 방향이 결정될 전망이다.최종 결론이 어떤 식으로 나든 송 교수의 사례가 해결되면 해외 민주화인사를 둘러싼 간첩 혐의 논란도 일단락될 전망이다. ●국정원 “공소보류등 여러방안 검토” 송 교수는 ‘김철수와 동일인물설’,‘오길남씨 입북권유 의혹’,‘여러차례의 방북활동’ 등에 대해 구체적인 진술을 할 것으로 보인다.국정원에 직접 출두할지,시내 모처에서 조사받을지 정해지지 않았다고 동행한 김형태 변호사는 말했다.국정원 관계자는 송 교수가 조사에 적극 협조하면 체포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이 관계자는 “조사를 마친 뒤 공소보류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검찰과의 협의를 거쳐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최대 쟁점은 지난 97년 망명한 황장엽씨가 주장한 대로 송 교수와 ‘김철수’가 동일 인물이냐는 것이다.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송씨는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며,‘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서독에서 암약한 대남공작원”이라며 사법처리를 요구했다.정 의원은 2001년 당시 국정원의 국정감사 답변자료,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신건 전 국정원장의 국회 답변 등을 근거로 내놓았다. 정 의원은 “당시 임 장관과 신 원장도 송씨가 김철수라고 믿는다고 말했다.”면서 “송씨가 황씨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소송에서 황씨의 주장이 인정되지 않은 것은 ‘법원에 보안관련을 제외하고 제출한 증거자료만으로 입증하기 부족하다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국정원이 답변했다.”고 밝혔다. ●해외인사 간첩혐의 논란 일단락될듯 당시 국정원은 재판부에 낸 사실확인서에서 “82년 귀순한 이한영이 ‘김정일로부터 서독 조선노동당 구주위원장이 김철수라고 득문했다.’고 진술,집중 내사하기 시작했다.”면서 “독일 헌법보호청(BFV)의 동향자료,귀순자 증언,황씨 진술 등을 토대로 확인했다.”고 밝혔다고 정 의원은 주장했다.그러나 송 교수측은 이런 주장들에 대해 김철수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밝혀진 사실이라고 맞서왔다. 구혜영 박정경기자 koohy@
  • ‘부림사건’ 22년만에 재심/81년 ‘이적표현물’ 용공 조작 부산 민주인사 22명 유죄판결

    1980년대 초 부산지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결정을 내렸다. 부산지법 제1형사부(재판장 권오봉 부장판사)는 18일 부림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정귀순(42·여·외국인노동자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씨와 설경혜(44·여)씨 등이 지난 99년 제기한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에 대한 재심청구 소송에서 재심개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부림사건이란 ‘부산의 학림사건’으로 불리며 전두환 군사정권 초기인 81년 9월 이적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씨와 설씨 등 부산지역 민주인사 22명이 국가보안법 등 위반죄로 구속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청구인들이 재심을 청구한 사건은 지난 95년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공소시효 등에 상관없이 재심을 청구하도록 규정된 사건에 해당돼 당시 판결 가운데 유죄부분에 대한 재심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이 재판부의 결정에 불복,대법원에 항고함에 따라 재심 여부는 대법원의 최종 결정에 맡겨졌다. 부림사건은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
  • 국내최장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 수립/공군 10전투단 201 비행대대

    국내에서 최장 무사고 비행기록이 수립됐다.공군 10전투비행단 201비행대대는 8일 오후 3시18분 대대 소속 F-5전투기가 초계비행을 마치고 활주로에 착륙함으로써 10만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을 수립했다고 이날 밝혔다.201 비행대대의 무사고 비행기록은 단일 전투비행대대가 세운 기록으로는 국내 최장이며,26년6개월 만에 수립된 것이다.지금까지의 최장 무사고 비행기록은 1988년 8전투비행단 103대대가 수립한 8만시간이었다. 201대대가 10만시간 비행한 거리는 8100만㎞로 지구를 2025바퀴를 돌고 지구와 달을 210여차례나 왕복한 거리에 해당된다.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201대대는 1976년 율곡사업으로 도입된 F-5기를 주기종으로 창설,그동안 초계비행 및 야간비행 임무를 수행해 왔다. 특히 1980년 6월엔 격렬비열도 근해에서 북한 간첩선을 격침시키고 1983년 2월에는 북한 이웅평 소령의 귀순 유도작전을 이끌기도 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인터넷 스코프] 정보화 시대의 불행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지방에 다녀왔다.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가 산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볼 요량이었다.그러나 이 소박한 계획은 도착도 하기 전에 무참히 깨어지기 시작했다.휴대전화가 문제였다.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휴대전화는 주변이 조용할수록 더욱더 맹렬하게 휴식과 사색을 가로막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휴대전화를 꺼 두었더니 이번엔 왜 꺼 두었느냐고 성화다.문자메시지,음성메시지까지 동원해 ‘귀순’을 독촉한다.이동통신 서비스에 가입해 번호를 부여받은 사람은 그걸 마음대로 꺼 둘 수 있는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자칫했다간 신용상태가 불량한 사람으로 오인당하기 십상이다. 이쯤 되면 숨을 곳도 마땅하지 않다.아무리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도 숙박시설이 있는 곳 주변엔 친절하게도 기지국의 육중한 철탑이 솟아 있다.호텔 역시 웬만한 곳에선 이제 방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연결돼 있고 컴퓨터까지 구비돼 있다. 인터넷이 연결돼 있는 방안에서 그것으로 향하는 습관적 관심을 애써 무시한 채 책이라도좀 들여다보려 하면 이번엔 아이들이 문제다.요즘엔 서너 살만 돼도 인터넷으로 동화나 게임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이다.휴대전화 자꾸만 울어대고 방안에선 컴퓨터 게임의 효과음이 쿵쾅거린다.IT 강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란 참으로 고달픈 일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주말여행을 망치고 돌아와 출근을 해서 보니 메일박스에 백여 통의 메일이 쌓여 있다.고작 이틀 동안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용건이 있었던가 싶어 서둘러 열어보자 대부분이 상업적 스팸메일이다.게다가 이번 주엔 유난히도 바이러스 메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요즘 유포되는 바이러스는 본인이 감염되면 자신이 관리하던 메일 어드레스에 강제적으로 전파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할 일도 되지 못한다.가뜩이나 바쁜 월요일 아침부터 그걸 일일이 확인하고 삭제하느라 땀을 뺀다. 사는 게 문득 ‘좀비’ 같다는 자괴감이 든다.자신의 정체성은 쏙 빠져 버린 채 순전히 타인의 의지에 의해 조종받는 좀비 같은 존재.이게 IT 강국의 최전선에서 디지털 정보를 생산해내고 있는 회사의 경영자가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말인가. 갑자기 중부지방에 쏟아진 폭우처럼 요즘은 숫제 정보의 폭격이라 생각될 만큼 과잉의 ‘비트’ 시대를 살고 있다.사생활도,개인의 기호마저도 정보의 폭격 앞에서 속수무책이다.동일한 사안과 현상에 대해서도 저마다 해석이 다르고 정보의 품질이 다르다. 오로지 상업성과 정치적 의도만이 상이한 형태로 공유되고 있을 뿐이다.정보의 자유로운 생산과 유통이 대중의 천민화를 부추기고 시대의 분열을 야기시키고 있다.괴로운 일이다.세상의 모든 가치가 비트로 쪼개지고,그것이 다시 합체되었을 땐 에누리 없이 대가를 요구한다. 문득 ‘격암유록’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말세에 나를 살리는 길이 무엇인가.그것은 곧 스스로를 닦는(修) 일이다.” 정보가 삶의 본질적 가치 향상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오직 소비와 쾌락으로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시대는 분명 불온한 시대다.정보를 생산해 내는 사람도,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도 이제는 한번쯤 인터넷을 끄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볼 일이다.우리는 지금너무나 불필요한 문명의 폐기물들을 정보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류 근 (주)야호커뮤티케이션 부사장
  •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北 올 줄 알아… 퍼뜩 오이소”北선수단 참가에 들뜬 대구

    “더 준비할 것도 없습니더.퍼뜩 오기만 하이소.”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21∼31일) 개막을 이틀 앞둔 19일 오후 북한이 대회 참가를 최종 결정하자 그동안 노심초사한 대구 시민들의 얼굴에 단숨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기대했던 ‘북한 특수’가 물거품이 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한 관계자들도 “이제야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미녀 응원단’ 303명을 맞기 위해 개원 5년 만에 대대적으로 내부 시설을 고친 대구은행 연수원은 단숨에 활기를 되찾았다.유창섭(49) 연수원장은 “북한의 불참 시사로 속을 끓였지만 이젠 엔도르핀이 막 솟는다.”며 반가워했다. 연수원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4인용 침실을 5인용으로 바꾸고,각 방마다 기초화장품과 드라이기,헤어 스프레이,브러시,스타킹,손톱손질 기구,반짇고리,다리미 등 젊은 여성들의 몸단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비치했다.각 층에 마련된 휴게실에는 텔레비전을 비치했고,냉장고에는 8·15콜라와 생수 오미자 및 홍삼 음료 등을 채워 넣었다.간식으로 컵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온수기도 설치했다.또 ‘북측 응원단이 남기는 글’이라는 대형 메모판을 5층과 6층에 마련했다. 응원단 숙소에 음식을 제공할 삼성에버랜드 유통사업부 역시 체증이 풀린 것 같다는 분위기다.조리 담당자는 “애써 개발한 메뉴를 북녀들에게 선보이지도 못할까봐 걱정했다.”면서 “담백한 음식을 선호하는 북측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귀순자들의 조언까지 받았으니 이제 북녀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 보면 된다.”고 전했다. 메뉴는 개인별로 한끼당 1만원 상당의 한식과 쇠고기,장어 등 특별식과 함께 북한산 신덕샘물을 제공한다. 한편 ‘금남의 집’ 침입을 막기 위해 숙소 공중전화를 없앴고,연수원 둘레에 2m 높이의 철책을 치고 5m 간격으로 외등을 설치했다. 대구 박지연기자 anne02@
  • 귀순배우 김혜영 동국대 졸업

    귀순배우 김혜영(31)씨가 20일 오전 11시 동국대 중강당에서 열릴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다.김씨는 청진여명대 예능학부와 평양연극영화대 배우연극과를 마친 학력을 인정받아 2001년 초 동국대 3학년에 편입했었다.이에 따라 김씨는 최초로 남북한 대학의 연기 관련학과 졸업장을 갖게 됐다.
  • [씨줄날줄] 한 탈북여성과의 대화

    탈북자,귀순자로부터 듣는 북한 생활 체험담은 북쪽 체제의 문제점을 생생히 알려주기도 하지만 남쪽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냉정히 반성해 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최근 관훈클럽 주최 모임에서 만난 평양 출생 탈북 여성 L(39)씨의 얘기도 폐부를 찌르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6·25때 서울에서 월북해 북한에서 의사가 된 인텔리 여성의 딸로 약사 직업을 갖고 있었다.정치적 성분 불량자로 낙인 찍혀 온 가족이 함흥으로 추방당한 후 약사가 되기까지 과정은 남북 교육체제를 선명하게 대비시켜 준다.그는 중학교 6학년(고3) 때까지 학교에서 이름을 날린 우등생이었으나 성분 문제로 대학 진학이 좌절돼 노동자의 길을 간다.교사들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우수 학생 특별 지도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그는 6학년 때 이 대열에서 갑자기 제외됐다.그러나 워낙 뛰어났던 그는 노동 현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3년 이상 실적 우수자에게 주는 진학 추천 케이스로 약대에 진학했다고 한다.비록 좌절이 있었으나 평등한 교육 기회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노모와초등학생 두 딸을 이끌고 탈북한 그는 장차 아이들의 학원비가 큰 걱정이라고 했다.아직은 과외를 받지 않고도 선두 그룹에 들어 있으나 중학 진학을 하면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학원 교육은 북한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는 것이다.그는 약대와 의대의 좁은 문에도 놀랐다고 했다.그는 목숨을 건 탈출에 자격증이나 다른 증빙 서류를 갖고 오지 못해 이쪽에서 약사로서 활동하자면 다시 약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현행 대입 제도는 탈북자를 뽑는 특별 전형이 있지만 약대와 의대만은 거의 문호를 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꼭 약사직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남한에 와서 사람들이 얼마나 정년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그러나 약사는 정년이 없지 않습니까.” 자녀 교육,정년에 대한 불안은 하루 아침에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다.그러나 10년 이상 약사로 일해 온 탈북 여성이 약대 재입학을 원할 때 우리 교육 제도는 정말 이를 수용해 줄 방법이 없는 것일까.탈북여성을 통해 우리 교육의 허점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신연숙 논설위원
  • “남쪽 친구들과 휴전선 밟아요”탈북대학생 탁은혁·조철진씨

    “남쪽의 젊은이들이 통일과 분단된 조국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탁은혁(22)씨와 조철진(사진·22)씨 등 탈북 대학생 2명이 오는 8일 ‘평화 한마음,통일 한마음,철마를 달리게 하자’라는 주제로 한국스카우트연맹이 주최하는 ‘2003 휴전선 155마일 횡단체험’ 행사에 참석한다.9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에서 이들은 국내 중·고·대학생 133명,일본 고교생 20명과 함께 5박6일 동안 임진각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415㎞의 거리를 휴전선을 따라 도보로 횡단하게 된다. 지난해와 99년 각각 탈북,함께 연세대에 재학중인 탁씨와 조씨에게 이번 행사의 의미는 남다르다.특히 탁씨는 16세 때 입대한 뒤 탈북 직전까지 도라산역 부근 비무장지대(DMZ) 북한군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2월 귀순했기 때문이다.탈북 청년단체 백두한라회 부회장인 탁씨는 “휴전선은 조국을 지키는 것이 아닌 통일을 가로막는 원흉”이라면서 “분단과 통일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남쪽 젊은이들에게 이번 ‘고난의 행군’을 통해 통일의 절실함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조씨는 “북한 출신인데도 분단 상황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고향을 생각하며 휴전선을 따라 걷고 싶다.”고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
  • 사회 플러스 / 北주민1명 동해안 걸어 귀순

    합참은 18일 오전 3시49분쯤 강원도 원산에 거주하는 박모(37)씨가 고성 통일전망대 부근 아군초소에 귀순해 왔다고 밝혔다. 아군 초병들은 이날 바다를 헤엄쳐 군사분계선(MDL)을 넘은 박씨가 뭍으로 올라와 포복으로 초소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발견,1발의 경고사격을 했다가 박씨가 귀순 의사를 밝힘에 따라 안전하게 초소로 유도했다.박씨는 “북한생활이 너무 힘들었다.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귀순했다.”고 말했다고 합참은 밝혔다. 합참은 박씨가 비무장지대(DMZ) 내 북한 초소를 지나 남측지역으로 들어올 때까지 북한군의 특이동향은 포착되지 않았으며 현재 자세한 귀순 경위와 경로 등을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 사회 플러스 / 北주민 2명 무동력 목선타고 귀순

    합동참모본부는 4일 황해남도 해주시에 거주하는 최모(45)씨와 박모(43)씨 등 북한 주민 2명이 무동력 목선(일명 전마선)을 타고 서해상으로 남하,연평도 관할 군부대에 귀순했다고 밝혔다. 군 부대는 오전 1시30분쯤부터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북쪽에서 이상물체가 내려오는 것을 목격,야간 감시장비로 계속 추적하다 가시거리권 안에서 귀순선박임을 확인했다.이들은 한국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고 남한의 생활상을 동경해 오다 갈수록 악화되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 책 / 민통선 평화기행

    이시우 글·사진 창작과비평사 펴냄 “한 여울의 철교를 얼른 건느니/전곡리의 정거장도 등에 버렸고/연천대광(連川大光) 두 정거장 잠간 거치니/철원색(色)의 번화함이 눈을 흐리네” 용산에서 원산까지의 여정을 15절로 그린 ‘경원철도가’만 보아도 철원이 얼마큼 번화한 도시였는가 금방 알 수 있다.오죽하면 ‘철원색’이라 했을까.노동당사가 있는 관전리에 서던 철원장은 인근 최대의 시장이었다. 1930년대에는 거래액이 130만원을 넘었다.일제가 미국인 제임스 모스로부터 경인선을 사들인 가격이 180만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그만큼 철원장의 명성은 전국적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풍요는 식민지배가 계속됨에 따라 심각한 빈부의 분열로 이어졌다.철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사진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36).‘민통선 평화기행’(창작과비평사 )을 펴낸 저자는 철원을 ‘통일기행의 일번지’라고 부른다.지난 10년 동안 민통선이라 불리는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을 누빈 그가 유달리 철원에 집착하는것은 그곳이야말로 고달픈 한국현대사와 곧바로 대면할 수 있는 장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10년간 철원·강화·백령도등 누벼 저자는 철원의 민통선 여행코스에서 철원역을 빼놓지 말라고 당부한다.철원역은 월정리역에서 노동당사로 가다가 구철원시가지로 꺾어질 즈음의 지뢰밭 뒤에 있다.월정리역에 비해 이렇다할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하지만 철원역의 폐허는 전쟁의 상처를 가장 아프게 전해준다.저자는 “월정리기행이 보이는 것과의 만남이라면,철원역기행은 보이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한다.그의 여행의 지향점이 어디 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한국전쟁 이후 시간이 정지해버린 박물관 같은 구철원시가지,얼음창고터,철원제사공장터,철원제일감리교회,노동당사,백마고지를 도는 행로 곳곳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이 짙게 묻어난다. 어느날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수백명이 몰살됐다는 신탄리 폐터널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그의 연천기행은 이렇게 시작됐다.신탄리 폐터널이 미국과 인민군의 격전장이었음을 확인한 저자는 이어 연천군 청산면 열화우라늄탄 사고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국현대 고달픈 역사의 현장을 찾아 이라크전쟁 때 미국이 사용해 지탄을 받은 그 열화우라늄탄이 1997년 한반도에서 그것도 ‘사고’로 터졌다는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1999년 유고전쟁 이후 이탈리아 병사들에게 나타난 집단 백혈병증세도 열화우라늄탄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저자는 ‘연천 제1의 볼거리’ 태풍전망대의 선전판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본다.6·15선언 이후 선전판 글귀가 ‘귀순자 대환영’에서 ‘우리는 한 형제’로 바뀐 것.6·15선언의 영향이 가장 빨리 나타난 곳이 바로 비무장지대다. 경원선의 분단풍경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그중 하나가 동두천 미군기지다.저자는 동두천에 이르러 불현듯 소요산의 전설을 떠올린다.원효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대와 요석이 머물렀다는 별궁터,그리고 원효가 사랑하는 요석을 두고 이름을 붙였다는 공주봉이 자리잡은 소요산.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고 소요하면서도 면벽수도를 할 수 있었다니 원효는진정 고승인가.저자의 이런 낭만적인 상념은 동두천 미군기지의 담벽을 따라 뻗어 있는 경원선에 시선이 미치면서 분노로 바뀐다.의정부에서 신탄리까지 달리는 경원선은 사실 출발부터 미군기지와 함께 있다.의정부역사 양쪽에는 ‘캠프 폴링 워터’라는 미군부대가 있다.저자는 “미군의 군홧발에 채이면서도 능청맞게 달려온” 경원선을 “분단의 상처가 가장 아물지 않은 곳”으로 지목한다. 저자가 민통선 기행 길목에서 유난히 강조하는 게 유실지뢰 문제다.비무장지대 남쪽에 1만개,후방지역에는 7만개 이상의 대인지뢰가 매설돼 있다.파주·연천·양구·고성 등 곳곳에 피해자들이 널려 있다. 저자는 해마다 홍수가 나면 대인지뢰 유실사고 공포에 떠는 신탄리 차탄천을 찾았다.그리고 지뢰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고발하는 산문시 같은 감상적인 글을 남겼다.“아침부터 이장댁 스피커에서 ‘회심곡’이 구슬피 흘러나왔다.지뢰피해자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단다.상주는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당신의 상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 그래도 행복하다며 내 손을 잡았다.돌아오는 기차에서 보니 지뢰밭이 멀지 않은 동산에서 상여꾼들이 달구질을 하고 있었다.지뢰를 밟고 나서는 인생이 지뢰밭이라고 하더니 그는 죽어서도 지뢰밭에 묻히고 말았다.” 저자는 실제로 199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조디 윌리엄스와 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ICBL)과 함께 한국의 대인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미군기지·유실지뢰 문제 진지한 접근 민통선 기행은 그 자체가 분단극복을 위한 하나의 작은 실천이다.분단현실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분노는 때로 폭주기관차처럼 불을 뿜는다.양구 평화의 댐에서는 정권의 ‘한판쇼’에 놀아난 씁쓸한 기억을 곱씹으며,동해 북부선 현장과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한 북의 잠수함 승무원들이 사망한 칠성산 억새밭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절규하듯 갈망한다. 이 책은 민통선에 관한 본격적인 기행서로는 국내 처음이다.최초라는 상징성보다는 물론 글에 배어 있는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냉전시대 분단의식을 부추기는 ‘안보관광’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평화운동가로서의 역사인식이 담겨 있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음악으로 아파트 ‘벽’ 허물어요

    아파트 주민들이 뜻을 모아 음악회를 개최,이웃간의 벽을 허물고 있다. 12일 노원구에 따르면 공릉3동 풍림아파트 입주자대표회와 부녀회의 공동주최로 14일 오후 7시 아파트내 문화광장에서 ‘풍림아이원아파트 음악회’가 열린다. 이날 음악회는 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문화행사를 통해 주민들의 친목을 도모하자.”고 의견을 모아 마련됐다.출연진 섭외,무대 설치 등도 주민들이 맡았다. 하계중학교 음악교사 조종인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음악회에는 구립청소년교향악단,소프라노 오은영,테너 조효종이 출연하고 인근 혜성여고 록밴드 ‘에로스’와 성서대학 어린이집 바이올린 합주반이 흥을 돋운다.북한에서 귀순한 조순영,강정희씨의 아코디언 연주도 색다른 볼거리다. 류길상기자 uke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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