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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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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박길상(한국산업안전공단 이사장)천호(서울영상포럼 회장)귀순(미국 거주)희순(영서초등학교 교사)씨 부친상 조경철(미국 거주)신현두(보건복지가족부 아동청소년역량개발과장)이원준(롯데백화점 상품본부장)씨 빙부상 송정희(우물가마음치료 상담소장)씨 시부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4일 오전 8시 (02)3010-2230 정재헌(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성용(미국 산호세AMD 연구원)씨 부친상 박진호(효성 부장)홍기수(삼일회계법인 이사)씨 빙부상 11일 마산삼성병원, 발인 14일 오전 7시 (055)290-5651 유경수(엔지비 부장)씨 모친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4일 오전 8시 (02)3010-2295 윤혜경(한나라당 중앙위 지도위원)씨 모친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4일 오전 9시 (02)3010-2263 이부호(신한은행 차장)씨 부친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4일 오전 10시 (02)3010-2232 이기창(전 제일은행 역삼역지점장)기문(삼중시스템 대표)씨 부친상 백남흥(전 기아자동차 전무)씨 빙부상 12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4일 오전 9시 (02)3410-6901 정규재(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씨 모친상 남헌모(예미종합건설 대표)씨 빙모상 12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4일 오전 5시 (02)590-2352 변민우(미국 거주)원우(크라운 사장)영훈(명지대 교수)씨 모친상 변정호(삼성전자 네덜란드지사 차장)씨 조모상 김동희(목사)피세영(캐나다 거주)씨 빙모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4일 오전 7시30분 (02)3010-2293 이병철(현대건설 자산관리팀장)혜영(캐나다 외환은행 영업부 차장)씨 부친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4일 낮 12시 (02)3010-2265 오재석(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미숙(학원강사) 규석(C&M 대표이사)씨 부친상 1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5일 오전 8시 (02)3010-2000
  • [총선 D-27] 한나라 비례대표 1번 누구

    4·9 총선에 나설 한나라당 비례대표에 650여명의 신청자가 몰린 가운데 당의 간판이나 다름없는 비례대표 1·2번을 누가 꿰찰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선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지낸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 “대학교로 돌아가겠다.”던 의사를 번복해 공천을 신청함에 따라 가장 유력한 1번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이 총장은 인수위원장을 맡으면서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이명박 대통령과는 오랜 기간 막역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장이 후순번으로 물러날 경우, 지난해 대선 기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배은희 리젠바이오텍 대표가 1번 후보가 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배 대표는 바이오벤처 업계의 선두주자로 한국바이오벤처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이외에도 상징성이 큰 자리인 만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언론사 대표를 지낸 장명수 전 한국일보 사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 영입설도 나돈다. ‘남자 간판’인 비례대표 2번으로는 이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과 송정호 전 법무장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와 함께 이 대통령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천 회장은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의 ‘친위부대’나 다름없는 고려대 인맥을 관리해 왔다. 이밖에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박찬모 전 포항공대 총장 영입설도 있고,8년 전 북한을 탈출해 귀순한 윤승길씨를 ‘깜짝 공천’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2번은 천신일·송정호씨 등 물망 비례대표의 절반을 채워야 하는 여성몫으로는 신혜수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부의장, 강경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부판무관 등을 영입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당 공천심사위원 중에서는 이은재 건국대 행정대학원장이 신청서를 냈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는 과학비즈니스벨트 태스크포스(TF)팀장을 지낸 민동필 서울대 교수와 이 대통령의 측근인 이춘식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신청했다. 박근혜 전 대표 측에선 경선 선대위 사람경제기획위원장을 지낸 차동세 전 KDI 원장과 경선 선대위 부위원장을 지낸 이병기 전 여의도연구소 고문, 곽영훈 전 정책특보 등이 공천 서류를 냈다. 박 전 대표 재직 당시 보좌역을 지낸 하윤희 부국장과 이정현 전 공보특보도 신청을 마쳤다. 직능단체에서는 신중목 관광협회중앙회장, 박영순 온누리약국체인 회장, 윤명선 전 서울시 여성약사회장 등도 신청서를 접수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공경의 귀순으로 불안하게 유지되어 왔던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후금은 기존의 철기(鐵騎)가 지닌 막강한 위력에 더하여 수군까지 확보함으로써 군사력이 배가되었다. ●후금, 공경의 식량을 조선에 요구하다 1633년 4월, 공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선단은 장자도를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갈 때 후금군의 인도를 받았다. 진강(鎭江)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저지를 뿌리치는 데 성공한 뒤부터 후금은 전함들을 간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압록강 연안을 파서 물길을 낸 다음 전함들을 진강 근처의 마이산(馬耳山) 부근으로 예인했다. 전함 주변에는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혹시라도 명군이 몰래 들어와 배들을 태워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4월28일,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녹지( 只)가 서울로 들어왔다. 용골대 일행은 공경이 귀순한 전말을 설명한 뒤, 그 일행들에게 먹일 식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용골대가 내민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명군 신분으로 가도에 머물 때는 식량을 주다가 후금으로 귀순했다는 이유로 주지 않는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급량(給糧)을 강하게 요구했다. 공경 일당이 상륙한 지역이 심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들이 식량을 운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도 조선에 손을 내미는 명분으로 제시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 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후금 사신 접대를 맡고 있던 구관소(句管所) 신료들은 용골대에게 ‘공경은 중국의 반장(叛將)이자 유흥치(劉興治)와 함께 조선을 도모하려 했던 원수’임을 내세워 식량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용골대 등은 다시 ‘형제의 도리’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명에 붙으면 식량을 주고, 후금에 붙으면 주지 않는 것은 형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000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어머니 구씨(具氏)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매불망 추진해 온 인조의 ‘숙원 사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번지면서 후금의 급량 요구는 거부되었다. ●홍타이지, 공경을 극진히 예우하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귀순해 오자 홍타이지는 고무되었다.1633년 5월6일,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줄 양마(良馬)를 마련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서 말 100마리를 차출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내구마(內廐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을 각별히 대우했다. 그들을 바로 심양으로 부르지 않고, 일단 휘하 무리들을 거느리고 요양(遼陽) 근처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공경이 자신의 부하들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재량권도 주었다. 이윽고 6월3일, 공경이 귀순한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으로 들어왔다. 홍타이지는 백관을 이끌고 궁궐 밖 10리까지 나아가 공경을 맞았다. 홍타이지는 공경과 포견례(抱見禮)를 행했다. 서로 얼싸안는 것이었다. 만주의 신료들은 누구든지 칸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이었다. 후금의 신료들은 ‘투항자와 포견례를 행하는 것은 참월하다.’며 홍타이지를 만류했다. 홍타이지는 ‘공경은 등주(登州)를 장악했던 세력가로서 수많은 무리와 전함을 이끌고 귀순했으니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료들의 반대를 뿌리쳤다. 공경은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과도 포견례를 행했다.6월5일에도 홍타이지는 공경을 다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과거 조대수(祖大壽)가 투항했을 때보다 더 극진한 대접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을 도원수(都元帥), 경중명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하고 칙인(勅印)을 하사했다. 이윽고 두 사람에게 내린 유시문(諭示文)에서, 공경이 군민(軍民)과 무기, 전함을 갖추고 귀순한 것을 ‘위적풍공(偉績豊功)’이라고 찬양했다. 두 사람에게 ‘부귀(富貴)를 영원히 보장하고 죄를 지어도 전부 사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격적인 환대였다. 이 같은 환대가 뒷날 이른바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함선과 수군을 얻게 된 홍타이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후금, 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되다 공경이 후금으로 귀순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1633년 6월, 후금은 악탁(岳託) 등에게 병력 1만을 주어 명의 여순구(旅順口)를 공략하도록 했다. 공유덕과 경중명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 원정에 동행했다. 공경의 안내를 받은 후금군에 의해 여순은 힘없이 함락되었고, 후금군은 5302명의 포로와 2만냥 이상의 은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순의 함락 소식은 당장 가도와 조선에 파장을 미쳤다. 가도를 지키던 부총병(副總兵) 심세괴(沈世魁) 등은 후금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가도를 포기하고 본토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8월16일,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가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들도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했다. 이어 ‘우리가 배를 띄우면 가도를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조선이 놀랄까 삼가고 있다.’며 ‘향후 가도를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가도를 비롯하여 명 본토가 후금 수군의 위협 앞에 노출되자 명 조정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혹시라도 조선이 후금에 굴복하여 양자가 연합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조선을 견제하려 했다.10월에는 가도의 부총병 정룡(程龍)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여순이 함락되었다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조선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가도의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라.’고 채근했다. 공경의 귀순 이후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후금의 ‘협박’과 명의 ‘호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함과 수군을 보유하게 된 후금의 ‘변신’에 대처하지 못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1637년 1월 조선의 왕실과 중신들이 피란해 있던 강화도는 공유덕이 이끄는 후금군의 상륙작전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던 조선군 지휘부는 ‘후금이 수군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공경의 귀순은 ‘명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금으로 도주하려 하자 명에는 비상이 걸렸다. 명 조정은 주문욱(周文郁)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경(孔耿) 일당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주문욱은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반란군의 도주를 차단하지 못했다. 급기야 공유덕 일당이 계속 달아나 압록강 쪽으로 갈 기미를 보이자 명은 조선을 끌어들이려 했다. 병력을 동원하여 공경의 도주로를 막고, 군량을 마련하여 추격하는 명 수군에게 공급하라는 요구가 날아들었다. 주문욱은 1633년(인조 11년) 1월부터 수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추격했다. 그는 수차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유덕 일당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가도 등지에 있는 다른 명군 부대와의 협력 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요동반도 연안에 흩어진 섬 지역에, 명에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도 걸림돌이었다. 상가희(尙嘉喜)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었다. 상가희는 본래 모문룡의 부하였다가 모문룡이 죽은 뒤 요동반도 연해의 도서 지역을 전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주문욱으로부터 공경 일당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사태를 관망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상가희는 오히려 공경 일당이 후금으로 귀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주문욱, 끝내 조선을 끌어들이다 3월30일, 주문욱이 이끄는 명군은 공경 일당을 추격하여 장자도(獐子島)까지 이르렀다. 장자도는 동쪽으로 가도( 島)를 거쳐 조선의 평안도와 압록강으로 연결되고, 서남쪽으로는 녹도(鹿島), 석성도(石城島), 장산도(長山島)를 거쳐 여순(旅順)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공유덕 등은 장자도에서 여순으로 가는 길이 명군에 의해 차단되자, 압록강을 통해 후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을 굳힌다. 주문욱은 조선에 글을 보내 병력을 동원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평안도의 지방관들이 공유덕 일당에게 양곡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주문욱은 장자도 부근에서 공경 일당을 차단하려고 분전했지만,4월4일 공경의 반란군은 주문욱의 저지를 뚫고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공경 일당이 명군의 추격권에서 벗어난 4월5일에야 오안방(吳安邦)과 도증령(陶曾齡)이 수군을 이끌고 각각 등주(登州)와 천진(天津)으로부터 합류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뒷북치기’이자 당시 명군이 처해 있던 총체적인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공경 일당이 압록강으로 진입하자 주문욱 등은 조선을 들볶아대기 시작했다. 공유덕 일당이 후금군과 연결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조선에 강요했다. ●후금과의 절교(絶交) 가까스로 막아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공유덕의 반란’ 사건이 일어날 무렵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 후금으로부터 ‘명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대접해 달라.’고 요구받았을 때, 조선은 ‘내키지 않는 형제관계’를 당장 파기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주문욱 등으로부터 참전을 요구받기 직전인 1633년 1월에도 조선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건이 있었다.1월25일, 심양에서 돌아온 회답사 신득연(申得淵)은 홍타이지의 국서를 내놓았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은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명에는 공손히 예물을 바치면서 후금에는 약속한 수량도 채워주지 않는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이어 자신이 곧 가도를 정벌할 것이라며 큰배 300척을 빌려주고 의주에 있는 포구(浦口)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거부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배를 빌려달라고 다시 요구한 것은 사실 조선으로부터 더 많은 세폐를 받아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인조와 조정은 격앙되었다. 후금과의 화호(和好) 유지를 강조했던 비변사조차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인조는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선전포고할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정은, 세폐를 더 내놓으라는 후금의 요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내용으로 답서를 썼다. 배를 빌려줄 수도, 세폐를 늘려줄 수도 없다는 답서의 내용은 사실상 ‘절교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2월2일 회답사 김대건(金大乾)이 답서를 가지고 심양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김대건은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도강 직전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 김시양(金時讓)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김대건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김대건을 의주에 대기시켜 놓고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1년 동안 군사를 동원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수년 동안 오랑캐에게 세폐를 보내는 비용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김시양 등은 이어 ‘세상일을 통쾌하게 하려고만 하면 후회가 따르는 법’이라며 후금과의 절교 방침을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격노했다. 그는 두 사람을 붙잡아다가 하옥시키라고 지시하면서 ‘무신들은 춥지도 않은데 떨고, 문신들은 천장만 바라보며 날을 보낸다.’고 통탄했다. 사실 당시 비변사도 처음에는 격앙되었지만 속으로는 김시양 등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면전에서는 인조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회답사를 즉시 출발시켜야 한다.’고 동조했지만, 속으로는 후금과의 절교가 몰고 올 파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유독 최명길(崔鳴吉)만이 ‘후금의 원한을 사서 화를 재촉해서는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김시양 등이 김대건의 도강을 저지하자 비변사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일선에 있으면서 우리의 방어태세가 형편없는 것을 알고 있는 김시양 등의 조처를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비변사는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국서를 부드러운 내용으로 수정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김시양 등에게 ‘무장은 화의(和議)를 말하지 않는다.’는 대의를 어긴 죄만 묻자고 했다. 사실상 처벌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다. 인조는 불만을 터뜨렸지만 결국 비변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인조 또한 후금과의 전쟁까지 감내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의 관계가 또다시 한 고비를 넘는 순간이었다. ●유보된 척화론(斥和論)에 불을 붙이다 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비변사가 인조를 다독여 후금과의 파국을 가까스로 막았던 직후 명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었다.3월13일, 가도의 심세괴(沈世魁)가 ‘공유덕 등이 등주의 반군을 이끌고 여순 쪽으로 도주하고 있으니 조선 해안으로 숨어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으로 표문(票文)을 보내왔다. 4월6일에는 공경의 반군이 장자도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조선도 병력과 군량을 보내 협공하라는 내용을 담은 주문욱의 자문(咨文)이 도착했다. 주문욱은 ‘수군과 전선(戰船)이 후금의 수중에 들어가면 조선도 위험해 진다.’는 경고를 곁들였다. 실제로 4월9일에는 후금 기마병 50명이 중강(中江)에 나타났다. 공유덕 등을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한편, 조선의 동향을 탐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문욱의 자문은, 어렵사리 유보되었던 후금에 대한 조선의 적개심에 다시 불을 붙였다. 조선은 임경업(林慶業) 등이 이끄는 화기수를 압록강 연안으로 보냈다. 당시 후금군은 압록강에 닿아 있는 구련성(九連城,鎭江)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공유덕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4월10일, 압록강 부근의 탁산(卓山)이라는 곳에서 주문욱 휘하의 명군과 공유덕의 반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주문욱 군이 밀어붙이자 공유덕 등은 천가장(千家庄)을 거쳐 마타자( ) 쪽으로 물러났다. 천가장은 압록강에서 후금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후금군은 두 곳에 홍이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배치하여 주문욱의 공격에 대비했다. 4월13일 주문욱이 마타자를 공격할 때 조선군도 동참했다.300여명의 조선군 화기수들은 공유덕의 반군을 향해 진격하면서 조총을 쏘았다. 후금군 진영으로부터 홍이포의 포탄이 날아 왔다. 조선군은 어느 순간 명과 후금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김대건의 도강을 멈춰 ‘절교’를 유보시킨 지 불과 두 달 남짓이었다.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귀순 여배우 김혜영 대학 강단에

    귀순 여배우 김혜영 대학 강단에

    귀순 여배우 김혜영이 대학 강단에 선다. 김혜영의 소속사 정원수엔터테인먼트는 2일 “김혜영이 3일부터 전북 김제 벽성대 미용예술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대학교수 활동도 겸하게 됐다.”고 밝혔다.1998년 귀순한 김혜영은 연기자와 가수로 활동해 왔으며 최근 6집 음반 ‘두손싹싹’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후금이 명을 압박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1633년 무렵, 세 나라의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등주(登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후금으로 귀순해 버린 것이다. 공유덕 등은 후금으로 가면서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했다. 뿐만 아니라 배 위에는 홍이포(紅夷砲)까지 싣고 있었다. 후금은 그토록 열망했던 함선과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후금은 이제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후금은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 잡아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으로 귀순하게 된 사연은 모문룡의 가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란을 주도했던 공유덕과 경중명, 이구성(李九成) 등은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요동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게 되자 가도로 들어가 모문룡에게 몸을 맡겼다. 모문룡은 이들을 우대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이들은 성을 모씨(毛氏)로 바꾸고 이름도 고쳤다. 공유덕은 모영시(毛永詩)로, 경중명은 모유걸(毛有傑)로, 이구성은 모유공(毛有功)이 되었다. 공유덕과 이구성은 활 쏘고 말 타는 데는 뛰어났지만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인물들이었다. 경중명은 자신의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모문룡은 공유덕과 이구성에게는 군사들을 관리하게 하고, 경중명에게는 재물과 군기(軍器)를 관리하도록 했다. 모문룡 휘하에서 그런 대로 안온한 시절을 보내던 이들의 처지는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죽음을 당한 이후 크게 바뀌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제거한 뒤, 자신의 측근들을 가도로 보내 동강진(東江鎭)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모문룡 측근들에 대한 숙청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모문룡과 부자관계를 맺은 데다 안팎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입지는 당장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이들을 받아들여 준 사람은 등래순무 손원화(孫元化)였다. 평소 요동 출신 장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손원화는 공유덕과 경중명을 데려다가 유격(遊擊)으로 임명했다.1631년 8월, 후금군이 대릉하성(大凌河城)을 포위하자 조대수(祖大壽) 등은 손원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등래(登萊) 지역의 수군을 이끌고 후금군의 배후를 견제해 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손원화는 공유덕 등에게 병력 1000여명을 주어 해로를 이용하여 대릉하 쪽으로 달려가게 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은 손원화를 기만했다. 그들은 역풍이 분다는 핑계로 배를 띄우지 않고 육로로 영원(寧遠)까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1631년 11월 공유덕 일행은 오랜 행군 끝에 직예(直隸)의 오교현(吳橋縣)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먹을 것을 찾았지만 오교현의 시장은 이미 철시한 상태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자연히 병사들 가운데서 민폐를 끼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공유덕은 민원(民怨)을 야기한 병사들을 처벌했지만 병사들의 불만도 덩달아 높아졌다. 급기야 지역의 식량 창고를 약탈하고 현지의 관원을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구성은 병사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졌음을 핑계로 반란을 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공유덕에게도 자신과 행동을 함께하라고 협박했다. 공유덕이 동참하면서 영원을 향해 가던 ‘구원군’은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공유덕과 이구성 그리고 진계공(陳繼功) 등은 병력을 돌려 산동(山東) 주변의 여러 고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공유덕 등을 따르는 병력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산동의 임읍(臨邑)·능상(陵商)·하청(河靑) 등 여러 고을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후금군이 대릉하를 공격했던 것의 여파가 엉뚱한 곳으로 미쳤던 것이다.1632년 1월 승승장구하던 공유덕의 반란군은 등주성 공략에 나섰다. 당시 경중명은 이미 성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성안에서 요동 출신의 두승공(杜承功) 등과 함께 사람들을 불러모아 공유덕 등의 공격에 내응했다. 안팎이 호응하는 상황에서 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이윽고 1월13일 등주성이 함락되었다. 성안에 있던 요동 출신 병사 3000명은 고스란히 공유덕 등의 수중에 떨어졌다. ●홍이포 등 엄청난 수량의 무기도 넘어가 등주성이 반란군에게 떨어진 여파는 심각했다. 등주는 전략 요충이었다. 육로로는 북경, 산해관 등지와 연결되고 수로를 통해 천진(天津)과 요동, 가도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미 산해관 동쪽이 후금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 있는 현실에서 등주는 수군을 이용하여 후금의 배후를 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했다. 공유덕이 등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여순구(旅順口) 참장 진유시(陳有時)와 광록도(廣鹿島) 부장 모승록(毛承祿) 등이 병력을 이끌고 등주로 와서 반란군에 합류했다. 모승록 또한 원래 가도에 있다가 모문룡이 죽은 뒤 광록도로 탈출했던 인물이었다. 등주 함락은 다른 측면에서도 명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등주성 관할의 육군과 수군이 공유덕에게 넘어간 것은 물론 명이 자랑하는 다양한 화기(火器)도 반란군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등주성의 무기고에는 엄청난 수량의 화기들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홍이포(紅夷砲)도 있었다. 일찍이 등래순무를 지냈던 도낭선(陶朗先), 손원화 등이 애써 제작하여 비축해 놓은 것이었다. 등주 함락 직후 내주(萊州)도 떨어졌다. 산동의 거진(巨鎭) 두 곳이 모두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에 놀란 명 조정은 토벌군을 동원하려 하는 한편, 공유덕 등에게 면사패(免死牌)를 보내 귀순을 종용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은 ‘이미 내주를 함락시킨 이상 북경까지 진군하겠다.’고 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한편에서는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할 입장에서 내란까지 진압해야 했던 명 조정의 처지에서는 대규모의 진압군을 동원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 같은 배경에서 공유덕 등의 등주 장악은 8개월 이상 이어졌다. 반란군의 군세(軍勢)가 커지면서 등주성의 제장(諸將)들은 공유덕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공유덕은 고사하다가 결국 스스로 도원수(都元帥)를 칭했다. 이구성이 부원수가 되어 병력을 지휘했다. 북경의 지척에 있는 산동이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명 조정은 고기잠(高起潛), 조대필(祖大弼) 등에게 대군을 주어 진압에 나섰다. 공유덕 등은 힘써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당시 명 조정이 동원한 진압군은 7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성 전체가 포위된 상황에서 공유덕과 이구성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여러 차례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구성은 돌격전 과정에서 죽고 말았다. 1632년 9월 수차례의 실패 끝에 공유덕은 포위를 뚫고 바다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공유덕 등은 여순(旅順)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여순구에서 명 총병(總兵) 황룡(黃龍)에게 차단 당한 데다, 영원 등지에서도 명군이 추격해 오자 공유덕 등은 광록도, 장산도(長山島) 등지의 연해 지역을 전전했다. ●조선 또다시 고래싸움에 휘말릴 위기에 당시 후금은 공유덕 등이 일으킨 반란의 경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해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책사 범문정(范文程)을 그에게 보냈다. 범문정은 홍타이지가 조대수에게 투항을 종용할 당시에도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공유덕 등은 범문정을 만난 뒤 후금으로 귀순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명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오랑캐’에게 수군과 홍이포가 통째로 넘어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수군을 동원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려 하는 한편 조선에도 ‘급전(急電)’을 날렸다. 홍타이지는 홍타이지대로 병력을 진강(鎭江) 지역으로 보내 공유덕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바야흐로 조선은 또다시 ‘고래 싸움’에 휘말릴 위기 속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1630년 무렵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후금이 요구했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과의 교역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도( 島)의 한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는 후금이 조선을 ‘평가’하는 핵심 관건으로 사실상 명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인조정권은 곤혹스러웠다. 정묘호란 당시 조야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루어졌던 화친은 ‘명과 조선의 부자(父子) 관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후금과의 형제 관계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끊긴 상황에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가도와의 왕래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조선의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도는 모문룡 시절이래 내내 조선를 들볶았고, 조선 또한 ‘부자 관계의 상징’인 가도를 외면하지 못했다. ●영원한 애물단지, 가도 후금도 한동안은 양측의 관계를 묵인하는 듯이 보였다. 조선을 거쳐 가도에서 들어오는 명나라 물자가 필요했던 데다,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가도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금이 1629년 기사전역(己巳戰役),1631년 대릉하 전투 등을 통해 명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으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본토 방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명은 가도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다시피했고, 그 때문에 가도의 고립과 곤궁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럴수록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 더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가도를 이미 ‘손안에 들어온 물건(掌中之物)’이라고 여겼던 후금이 조선에 대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의 지원만 없다면 가도의 한인들은 대거 후금으로 투항할 것이고, 가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가도가 무너진다면 후금은 얼마나 홀가분할 것인가. ‘뒤를 돌아보아야 할 걱정(後顧之憂)’ 없이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산해관으로 나아가 명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수 있었다.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대한 공격을 구상하면서 후금은 명이 자신들의 배후를 역습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하지만 산해관 바깥이 후금군에 의해 봉쇄된 상황에서 명의 육군이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명이 조선을 지원하려 할 경우 천진(天津)이나 등래(登萊)에서 수군을 동원할 것이고, 명 수군은 분명 가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아 조선을 지원하거나 요동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 후금의 판단이었다. ‘가도를 내버려 두라.‘는 후금의 압박 속에서도 조선은 끝내 가도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멈추지 못했다. 명과의 ‘부자관계’를 차마 끊지 못한 데다, 유사시 명의 지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거점’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정에 정통한 후금 조선은 가도에 대한 지원을 은밀하게 한다고 했지만 후금은 그 전말을 거의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조선 사람 가운데 후금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632년 12월, 철산(鐵山)의 아전 이계립(李繼立)은 조선이 가도의 한인들에게 물자를 대주고 있다는 사실을 용골대에게 밀고했다. 후금 자체가 본래 첩보 활동에 뛰어난데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같은 사정은 함경도 쪽에서도 비슷했다. 조선의 북변 거주자들과 호인들 사이의 교통을 통해서도 조선 정보가 새 나가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두만강 부근에서는 번호(蕃胡)라 불리는 호인들과 조선인들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번호들이 국경을 넘어와 조선인들을 납치해 가기도 했고, 그들 자신이 조선으로 귀순하기도 했다. 물론 강을 건너 여진 지역으로 도망가는 조선 사람들도 있었다.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모두 평정한 뒤에도 양자의 접촉은 끊이지 않았다. 실제 1629년 11월의 ‘양경홍(梁景鴻) 역모’는 이 같은 접촉 배경에서 빚어진 사건이었다. 양경홍은 북인의 잔당으로 인조반정을 맞아 한옥(韓玉), 신상연(申尙淵), 이극규(李克揆), 정운백(鄭雲白) 등과 함께 경원(慶源)으로 귀양갔다. 양경홍 등은 현지에 살던 양사복(梁嗣福) 양계현(梁繼賢) 부자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끌어들여 모반을 시도했다고 한다. 양계현은 젊었을 때 포로가 되어 여진 지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인물이었다. 공초(供招) 과정에서는 ‘정운백이 한윤(韓潤)에게 서신을 보내, 만약 오랑캐를 이끌고 오면 마땅히 앞장서 인도하고 투항하겠다.’고 했다는 진술이 나와 수사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윤은 이괄(李适)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로 당시 후금에 망명 중이었다. 우습구나 삼각산아 (笑矣三角山) 옛 임금은 지금 어디 있나 (舊主今安在) 지난번에 강도 만나 (頃者遇强盜) 강화도에 가 있다네 (往在江華島) 수사 과정에서 공개된, 양경홍이 지었다는 시의 내용이다. 반정으로 쫓겨난 지 6년 이상이 지났지만 인조정권을 ‘강도’로 표현할 만큼 적개심이 여전히 높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지만, 조선 조정은 이 사건 이후 후금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함경도 주민들의 동향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후금은 실제로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에 살던 불평 불만자들을 끌어들여 조선어 역관으로 활용했다. 양계현은 부친 양사복이 처형된 뒤에 후금으로 귀화하여 조선을 왕래하는 역관이 되었다. 양계현을 통해 조선의 민감한 내부 사정이 후금에 알려졌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1630년대 조선을 드나들면서 악명이 높았던 중남(仲男), 정명수(鄭命壽) 등도 비슷한 계기로 역관이 되었다. 후금은 이래저래 조선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후금, 명을 흉내내기 시작하다 명을 능멸할 정도로 힘이 커진데다 조선 사정까지 훤하게 알고 있었던 후금의 요구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1632년 9월, 용골대는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을 만났을 때 홍타이지의 ‘불만’ 사항을 전달했다.‘조선은 명의 사신이 오면 모든 관원이 말에서 내려 영접하면서 왜 후금 사신에게는 말 위에서 읍(揖)만 하느냐?’는 힐문이었다. 이제 후금 사신도 명 사신과 동동한 수준으로 영접하라는 요구였다. 1632년 10월에 왔던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평양에 이르러, 조선이 후금에 보내는 예단(禮單)의 수량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뒤 다시 명을 거론했다.‘명에는 봄가을의 사신말고도 성절사(聖節使)까지 보내면서 우리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는 더 나아가 ‘명 사신들을 접대할 때는 금은으로 된 그릇을 쓰면서 후금 사신들에게는 사기 그릇을 쓴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곧 이어 서울로 향하던 후금 사신 소도리(所道里) 일행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명사 수준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비변사는 ‘부자관계와 형제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고 설득하는 한편, 만월개 일행에게 푸짐한 선물을 안겼다. 어떻게든 명과 후금 사이에서 현상을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1632년 무렵, 조선이 취한 대외정책은 일견 절묘했다.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은 삼국 관계에서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이나 후금 어느 한쪽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조선은 곧바로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다.1632년 명에서 일어난 공유덕(孔有德)의 반란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공유덕의 반란’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위기를 향해 치닫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서해 표류 北주민 22명 북송

    지난 8일 서해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남측 해안으로 표류했던 북한 주민 22명이 모두 본인들의 뜻에 따라 북으로 귀환 조치됐다고 정부 당국이 17일 밝혔다. 그러나 이들이 북한에 돌아가 곧바로 처형됐다는 설이 제기돼 정부 당국이 진위 파악에 나섰다. 특히 20명이 넘는 북한 주민을 표류 당일 저녁 조사한 뒤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북송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관련당국이 회의 한번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17일 이들에 대한 관계기관 합동신문 결과 귀순 의사가 없는 것으로 확인,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만일 처형설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북한 인권문제가 부각될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22명 모두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그동안 동·서해상에서 표류 중 구조된 후 귀순 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모두 수용해 온 만큼 이번에도 본인 의사에 반하는 북송은 없었다.”고 말했다. 합동신문에 참석했던 경찰 관계자는 “조사 당시 보트에 노와 조개잡는 기구만 있었을 뿐 귀순시 준비물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이런 경우 북으로 돌아가 처형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들은 처형설과 관련,“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황해남도 보위부가 귀환한 주민 22명을 지난주 초 곧바로 비공개 처형했다는 소문이 황해남도 주민들 사이에 퍼졌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설 연휴에 있었던 사건이라 쉬쉬하면서 전국적으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상황”이라며 “황해남도 주민들은 처형당한 사람들이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힌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국정원과 통일부의 당국자들은 “북송된 22명의 처형 여부는 확인된 바 없으며,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국정원 관계자는 “그들 모두 귀순 의사가 없어 돌려보낸 만큼 처형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그들이 북한 해상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굴 채취에 나섰다고 밝혔기 때문에 관련 조사나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어로작업 승인을 받지 않고 대규모로 승선, 탈북 기도 혐의를 받아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연평도 해상에서 목선을 타고 표류하다 구조된 북한 주민 4명이 귀순 의사를 밝힘에 따라 남쪽에 정착토록 했으며,2006년 3월에도 소형 선박을 타고 표류 중 동해상에서 구조된 북한 주민 5명을 본인 의사에 따라 귀순토록 했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세계은행 선임 부총재로

    타이완 출신 ‘귀순용사’인 린이푸(林毅夫·56) 베이징대 교수가 세계은행 선임 부총재 겸 수석 경제학자로 발탁됐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4일(현지시간) “농촌과 개발도상국 경제에 경험이 풍부한 린이푸 교수를 프랑수아 부르기뇽의 후임으로 수석 경제학자에 임명했다.”면서 “세계은행과 중국간의 관계가 강화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수석 경제학자는 통상 선임 부총재를 겸임한다. 린 교수는 이로써 앤 크루거, 스탠리 피셔, 로런스 서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서방 학자들이 주름잡던 국제 경제학계에 개도국 학자로는 1호 석학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타이완 장교 출신의 중국 귀순용사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79년 5월 타이완 최전방 진먼(金門)도 주둔군 연대장 신분으로 적국인 중국에 투항하면서 배신자가 됐다. 이후 린정이(林正誼)에서 린이푸로 이름을 바꾼 뒤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당시 교환교수였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시어도어 슐츠 교수의 지원을 받아 미 시카고대와 예일대로 유학,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재연기자·베이징 연합뉴스osc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분투했지만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집요한 포위 끝에 대릉하성을 무너뜨린 후금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명의 수세(守勢)와 낙조(落照)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 祖大壽, 투항을 결심하다 1631년 10월 7일, 홍타이지는 한인 출신 장수 강계(姜桂)를 대릉하성으로 보냈다. 그는 홍타이지에게 투항한 23명의 한인 장관(將官)들이 직접 작성한 투항 권유서를 들고 있었다. 조대수에게 투항하라고 설득할 참이었다. 조대수는 그를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강계는 할 수없이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투항 권유서를 쓴 사람들이 누구누구며, 원군을 이끌고 왔던 장춘(張春)도 이미 후금군에 참패하여 투항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대수는 완강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자신의 옛 부하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성에서 죽을 것이니 다시는 오지 말라.”고 외쳤다. 병사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어도 조대수는 좀처럼 투항하려 들지 않았다. 조대수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10월 20일, 편지가 묶인 화살을 성안으로 날렸다. 그는 편지에서, 명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부하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명 병졸들에게 ‘너희는 죽어봤자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데 왜 다른 사람의 고기가 되느냐.’며 ‘상관을 죽이고 귀순하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명군 진영을 흔들기 위해 심리전을 폈던 것이다. 심리전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10월 25일 조대수로부터 회답이 왔다. 조대수는 홍타이지에게 한인 출신 장수인 석정주(石廷柱)를 보내달라고 했다. 조대수는 석정주를 성안으로 들이면서 자신의 아들 조가법(祖家法)을 후금 진영에 인질로 보냈다. 조대수는 석정주에게 항복을 결심했다고 말한 뒤, 깜짝 제안을 했다.‘나는 이미 나라에 충성하기는 틀린 몸인데 목숨을 비록 구하더라도 처자를 볼 수 없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면 먼저 금주성을 함락시켜 내 처자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앞장서서 금주성을 함락시킬 복안이 있으니 홍타이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조대수의 가족들 대부분은 금주성에 있었고 둘째아들은 북경에 있었다. 어차피 상황에 떠밀려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피붙이라도 챙겨야겠다는 결심이 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대수의 변신과 홍타이지의 배포 10월 28일 조대수는 마침내 성문을 열었다. 조대수는 투항하기로 결심했지만 부하 하가강(何可綱)은 그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하가강은 사실상 부사령관으로 성을 쌓는 공사를 감독했던 주역이었다. 그는 조대수에게 “공과 저는 모두 요동 사람입니다. 공이 나가지 않으면 요동 사람의 마음을 묶어둘 수 없고, 제가 죽지 않으면 요동 사람의 의리(義理)를 밝힐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제문을 지은 뒤 주변 사람들에게 “죽게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성을 나가서 영원히 비웃음을 사겠는가?”라고 했다. 조대수는 사람들을 시켜 그를 성밖으로 몰아냈다. 성밖에는 이미 후금군 장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가강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후금군에 의해 그의 숨이 끊어지자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굶주린 명군 병졸들이 달려들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조대수는 후금군 지휘관들과 하늘에 맹서하는 의식을 치렀다. 조대수는 ‘홍타이지에게 몸을 맡겨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후금군 지휘관들은 ‘귀순한 한인들을 온전히 보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조대수는 홍타이지의 장막으로 인도되었다. 홍타이지는 관원들을 1리(里) 밖까지 보내 그를 환영했다. 조대수가 장막 앞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겠다고 하자 홍타이지는 극력 만류했다.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홍타이지가 포견례(抱見禮)를 행한 것은 그동안 귀순해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거물이었던 조대수에 대한 배려의 표시였다. 조대수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면 직접 금주성으로 들어가 명군을 무장해제시켜 투항하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마치 후금군의 포위를 뚫고 대릉하성을 탈출한 것처럼 가장하여 금주성의 명군을 속인 다음 ‘거사’를 이루겠다는 복안이었다. 대릉하성을 포위하느라 지쳐버린 홍타이지는 조대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조대수의 ‘변신’도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홍타이지의 ‘배포’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11월 1일 조대수는 출발하면서 ‘금주성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면 입성한 다음날 포 한 발을 쏘고, 성을 접수하는데 성공하면 11월 4일까지 역시 포를 쏘아 신호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홍타이지에게 ‘성공’했다는 포성을 들으면 병력을 이끌고 즉시 금주성으로 오라고 했다. 11월 2일, 금주성에서 포성이 울렸다. 하지만 약속된 날짜가 되었지만 더 이상의 포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대수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여겼다. 그는 대릉하성에서 새로 얻은 명군 장졸들과 노획한 화기들을 챙겨 철수 길에 올랐다. 대릉하성에서 새로 얻은 명군 병력은 1만 1000이나 되는 많은 수였다. 노획한 대소 화기는 3500문이 넘었다. 병력과 무기는 고스란히 후금군의 새로운 전력(戰力)으로 보강되었다. 홍타이지는 끝까지 치밀했다. 그는 철수에 앞서 대릉하성의 성첩과 시설물들을 모두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홍타이지, 자신감이 더욱 커지다 대릉하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홍타이지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11월 10일,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 일행에게 대릉하 승리의 전과(戰果)를 설명하고, 자신들이 조대수에게 보냈던 초항장(招降狀, 항복 권유서)을 보여 주었다. 당시 대릉하의 후금 진중에는 오신남(吳信男)을 비롯한 조선 사신 두 명이 심양으로부터 와 있는 상태였다. 홍타이지는 명군을 굴복시킨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사신들에게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상국’으로 섬겼던 명의 장졸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조대수가 항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면서 오신남 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착잡했을 것이다. 또 어렵사리, 근근이 유지되고 있던 조선과 후금 관계의 장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상상을 했을 것이다.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어디에 먼저 성을 쌓고, 어디를 먼저 방어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결국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갑론을박하다가 공사 착수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察哈爾)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 대릉하성에서 새로 합류한 명군 장졸들도 원정에 동참했다. 원정이 거듭될수록 후금의 힘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젠가는 조선을 향해 다가올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합쳐 모두 4만명 가까운 병력이었다. 누르하치 시절 이래 후금군은 요동 지역의 명군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수적 우세를 유지해 왔다. 명군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대릉하 원정에서도 어김없이 그 원칙을 지켰다. ●홍타이지,4만 병력으로 1만5000 대릉하성 포위 휘하 병력의 수가 명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음에도 홍타이지는 신중했다. 그는 과거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병사들을 성을 향해 돌격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경우, 후금군의 인명 손실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명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위력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한 뒤, 성 주위에 두 겹으로 참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참호의 바깥에는 담을 쌓았다. 성과 후금군의 참호 사이의 거리는 약 3리(里) 정도였다.3리 정도면 명군 화포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대릉하성에서 금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만주와 몽골군 분견대(分遣隊)와 한인 포병대를 배치하여 바깥 지역으로부터 명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도록 했다. 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상태로 장기전을 펼침으로써 명군을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8월8일과 9일, 포위망을 뚫어 보려고 명군 기마병 600여 명이 성 바깥으로 나왔다가 모두 패하여 도주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출격에 대비하여 곳곳에 복병을 배치했다. 이후에도 명군은 간헐적으로 병력을 내보냈지만 그 때마다 후금군에 격퇴되었다. 홍타이지는 물 샐 틈 없는 포위 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대릉하성 바깥에 위치한 명군의 독립 성보(城堡)들을 각개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대(臺)라고도 불리는 개별 성보들을 향해 홍이포를 비롯한 화포들을 쏘아 타격을 가한 뒤,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작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각 대에 머물던 많은 명군 장졸들과 백성들이 포격을 받고 전사하거나, 투항해 왔다.10월12일에는 대릉하성 주변의 성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우자장대(于子章臺)가 함락되었다. 후금군은 홍이포 6문, 대장군포 54문을 이용하여 3일 동안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성첩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남녀 587명이 투항해 왔다. 우자장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주변의 각 대들에도 연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겁을 집어먹은 장졸과 백성들의 도주와 투항이 이어졌다.10월14일에는 대릉하성 외곽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흥보대(陳興堡臺)마저 무너졌다. ●명 대규모 지원군마저 참패 포위를 통해 명군의 목줄을 조여들어 가는 한편, 홍타이지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8월13일부터 수 차례에 걸쳐 조대수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과 투항을 촉구했다. 때로는 투항한 한군(漢軍) 장수들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처음 홍타이지로부터 화친과 투항을 요구받았을 때 조대수는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은 조대수의 편이 아니었다. 8월15일, 포위된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송산(松山) 방면에서 명군 지원군 2000명이 달려 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후금군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25일에도 금주성으로부터 6000명의 원군이 출격했지만 역시 후금군에 차단되어 도주했다.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 번번이 패퇴하자 9월24일 명군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산해관으로부터 대규모의 구원군을 다시 보낸 것이다. 감군도(監軍道) 장춘(張春), 총병 조대락(祖大樂) 등이 병력 4만명을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명군은 소릉하(小凌河)를 지나 주둔지에 참호를 파고 화기 등을 정렬 배치하는 등 후금군과 전면전을 벌일 태세였다. 하지만 3일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패하고 말았다. 전투 도중 후금군 진영 쪽으로 불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었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명군은 결국 사령관 장춘을 비롯한 33명의 지휘관이 포로가 되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전투를 감독하던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은 산해관으로 패주했다. 구원군이 오는 족족 패주했던 데다 외곽에서 전초 기지 역할을 하던 각 대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자 대릉하성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땔감, 마초(馬草)가 고갈되고 있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성밖으로 몰래 나오는 명군 병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후금군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8월24일, 포로로 잡힌 명군 병사로부터 ‘성을 쌓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가운데 이미 30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는 진술이 나왔다.9월19일에는 ‘성안에 남은 곡식이 불과 100석뿐이고, 탈 수 있는 말은 70마리밖에 없다. 인부들의 절반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병사들은 말고기로 버티고 있으며 말 안장을 쪼개 불을 피우고 있다.’는 형편이었다. 장춘이 이끄는 구원군이 패하고 우자장대마저 무너진 10월 이후의 상황은 절망과 처참 그 자체였다.10월10일, 성을 탈출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투항한 왕세룡(王世龍)의 진술은 충격적이었다.‘성안의 양식은 다 떨어졌고, 인부와 상인들은 모두 죽었으며, 남아 있는 병사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릉하성은 마침내 ‘서로를 잡아 먹는(人相食)’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고립된 명군과는 달리 후금군은 금주를 거쳐 심양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양으로부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시로 실어올 수 있었다. 조대수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부메랑’된 홍이포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명군의 홍이포(紅夷砲)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절명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大將軍砲)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佛狼機砲)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 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홍이포를 주조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이었다는 점이다. 홍이포 주조의 총감독이자 나중에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이끌었던 동양성은 원래 무순(撫順)에서 한족 상인들과 오랫동안 거래했던 인물이다. 절반은 한족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이후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홍이포 주조의 실무를 감독했던 정계명(丁啓明)은 원래 명군 부장(副將)이었다가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에 투항했던 인물이다. 주조를 직접 담당했던 장인(匠人) 왕천상(王天相)과 두수위(竇守位) 등도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이 획득했던 한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화포 주조의 공을 인정하여 이들 장인을 노비 신분에서 모두 해방시키고 많은 상을 내렸다. 귀순한 한인들의 협조 덕분에 대릉하 공격 당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더 많은 수의 대형 화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명 출신 장인들이 만든 홍이포에서, 명 출신 포병들에 의해 발사된 포탄은 견고한 대릉하의 성보들을 파괴하고 용장(勇將) 조대수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무너져 가고 있던 명으로부터 유출된 인력과 최신 기술들이 ‘부메랑’이 되어 명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계속 강경책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은 다시 기미책(羈策:오랑캐를 다독이는 정책)으로 돌아갔다.1631년(인조 9) 7월, 조선의 ‘태도’와 ‘능력’을 확인한 후금은 서쪽으로 명 원정길에 올랐다. ●때 아닌 斥和·主和 논쟁 1631년 6월13일, 배를 빌려줄 수 없다는 통고에 불만을 품고 호차 중남 등이 뛰쳐나간 직후 입직 포수(砲手) 이덕탁(李德卓)이 승정원에 나타났다. 그는 ‘오랑캐 사신들은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해 왔으니 그냥 돌려보내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며 빨리 그들을 억류하고 싸울 준비를 하라고 강조했다. 18일에는 후금군의 침략 소식에 놀라 이원익이 조정으로 달려왔다. 이원익은 당시 이미 은퇴한 데다 여든다섯의 고령이었다. 그는 인조에게, 하삼도의 군병을 동원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지 말고 어영군(御營軍)을 비롯한 서울에 있는 정병을 평안도로 내려보내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선제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금군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이덕탁의 건의를 계기로 때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지평 심연(沈演)은 식량을 주지도, 회답사(回答使)를 보내지도 말고 후금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라고 촉구했다. 사헌부의 다른 신료들도 심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들은 ‘정묘호란 이후 오랑캐와 서로 왕래한 것은 화호(和好)를 굳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그들이 이유 없이 쳐들어와 맹약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더 이상 미봉책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홍문관 신료들은 한 발 더 나갔다. 그들은 ‘오랑캐가 부모의 나라를 짓밟고 가도를 공격하려 한다면 갓을 쓰고서라도 달려가 구원해야 한다.’며 강약과 승패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일부 신료들은 ‘조정이 아예 안주 이북의 방어를 포기했다.’고 통탄하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싸우자고 주장했다. 삼사(三司) 신료들은 이참에 후금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척화(斥和)의 길로 나아가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비변사(備邊司)의 입장은 달랐다. 비변사는 ‘후금과의 화의(和議)를 언제까지나 믿을 수는 없지만, 싸우려 해도 병마가 모이지 않고 군량도 제대로 댈 수 없는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후금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의견에 동조하여 박로와 오신남(吳信男)을 회답사로 임명하여 심양으로 보냈다. 화친을 계속 유지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삼사 관원들은 굴욕적인 사신 파견을 당장 중지하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조, 훗날 대비 강화도 정비 ‘올인´ 조선이 기존의 화친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당시 후금군은 조선군이 쉽게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1629년과 1630년 이른바 기사전역(己巳戰役) 당시 만리장성의 외곽을 넘어 북경을 비롯한 명의 심장부를 유린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력이 많은 것은 물론, 실전 경험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6월28일, 후금군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보고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철수 소식을 들은 인조는 신료들에게 강화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 인조는 후금군이 쳐들어 왔던 직후 강화도로 피란할 계획을 세웠었다. 또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삼남에 독운어사(督運御史)를 파견했다. 혹시라도 강화도의 군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양곡 운반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후금군이 물러가자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재정비하려는 깜냥이었다. 인조는 강화도에 10만 군사가 먹을 수 있는 양곡을 비축하라고 지시했다. 강화 읍성(邑城)과 갑곶성(甲串城)을 개축하고, 화기와 각종 장비들을 미리 옮겨 놓으라고 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방물(方物)을 목면으로 바꿔 강화로 수송한 뒤, 나중에 군량 마련을 위한 자금으로 쓰려는 계획도 세웠다. 또 강화도 연안의 병력 주둔지에 큰 창고들을 지을 것을 주문했다. 측근들을 강화도로 보내 방어 상태와 시설 등을 수시로 점검했다. 인조가 강화도 정비에 ‘올인’ 하는 자세를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선 조정에서 방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청북(淸北)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높았다.1631년 7월, 영유현령(永柔縣令) 정기수(鄭麒壽)가 상소했다. 그는 ‘청북은 포기할 수 없는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조정에서는 청북을 지키려 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지역에서 빼내려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청북 사람들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모두 싸우다가 죽으려는 결의가 넘친다.’며 조정의 지원을 촉구했다. 우의정 이정구는 다른 측면에서 인조의 ‘강화도 정비론’에 반대했다. 그는 서울이 팔도의 근원이며, 근원이 흔들리면 민심이 무너져 변경이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하고, 먼저 서울 서쪽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라고 촉구했다. 이정구는 또한 강화도는 들어가려고 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요새로 정비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고, 섣불리 강화도 정비에만 몰두하면 원망이 일어나 민심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강화도 주변의 연도(沿島) 방어에도 신경 쓸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정구 등의 경고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뿐 아니라 당시 많은 관인들이 ‘후금군은 수전(水戰)에 약하기 때문에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안전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후금 수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집착할 때,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후금군, 대릉하성 공략 나서 조선 조정이 위기의식 속에서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錦州)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단순히 ‘인간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당시 후금의 정탐(偵探) 능력은 탁월했다. 이미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 관인들은 누르하치의 간첩 활동과 정보 수집 능력에 경계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명 관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건주여진인은 간첩 활동에 가장 뛰어나다. 내응하는 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아서 무너지고 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홍타이지는 ‘인간 사냥’을 통해 명의 총병(總兵) 조대수(祖大壽) 등이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산해관 바깥에 대릉하성을 비롯한 여덟 개의 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후금군이 공격해 오기 전에 공사를 마치려고 밤낮으로 독려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결심하고, 후금에 귀순한 몽골의 여러 패륵(貝勒)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명령했다. 마침내 8월5일, 홍타이지의 대군은 대릉하 부근까지 전진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내세워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타이완 출신 귀순용사서 세계 최고 석학으로

    타이완 출신 귀순용사서 세계 최고 석학으로

    린이푸(林毅夫·56) 베이징대 교수가 개발도상국 학자로는 처음으로 세계은행 선임 부총재로 발탁될 것이 유력시되면서 그의 인생유전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CCER) 주임인 린 교수는 수십년간 중국의 개혁·개방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경제학의 새 이론을 발표하거나 중국 경제를 이해하는 학술 논문을 발표,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꼽힌다. 린 교수의 본명은 린정이(林正誼)이며 타이완군 출신의 ‘귀순용사’다. 린 교수는 지금껏 타이완에서 수배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타이완 이란(宜蘭)현에서 출생한 린 교수는 어머니가 행상을 나가는 가난한 집안 형편속에서도 명문 타이완대 농업공정과를 입학했다. 학생 군사훈련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인 그는 군당국으로부터 군에 남을 것을 요청받고 엘리트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국방부장과 행정원장을 지낸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79년 5월 진먼(金門)군 연대장으로 있으면서 적국인 중국에 투항하면서 배신자가 됐다. 타이완군 병력배치도 등 기밀문서를 갖고 야음을 틈타 농구공 하나에 의존,2㎞ 떨어진 중국 대륙으로 헤엄쳐 넘어갔다. 린 교수는 지금도 중국 망명 동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당시 타이완 정국의 억압적 분위기도 한 요인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린이푸로 이름을 바꾼 그는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교환교수로 와있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시어도어 슐츠 교수의 지원으로 미 시카고대에 유학,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예일대 박사후 과정까지 마친 그에게 미국 대학들의 교수직 제의가 쏟아졌지만 그는 중국경제 연구를 위해 귀국의 길을 택했다.1994년 베이징대학에 중국경제연구소를 설립, 줄곧 소장으로 일해온 그는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브레인으로 여러차례 중국의 5개년 개발계획을 입안하면서 중국 경제학계의 거두로 자리잡았다. 김균미기자 홍콩 연합뉴스 km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조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명과 가도라는 바깥 변수 때문이었다. 유흥치가 피살된 뒤, 가도를 탈출하여 후금으로 귀순한 자들 가운데는 홍타이지에게 가도를 빼앗을 기회가 왔다고 부추기는 자들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그럴듯하게 여겼고 그 파장은 곧바로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1631년(인조 9) 6월8일,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보낸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호차(胡差) 중남(仲男)과 아지호(阿之好) 등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와 가산(嘉山)의 서쪽 지역을 차단했다는 소식이었다. 같은 날 도착한 장계에서 평안감사 민성휘(閔聖徽)는 ‘호인들이 조선에서 배를 빌려 가도를 습격하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변 고을의 수령들과 장수들을 불러모아 방어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소식을 접한 비변사는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을 평안도로 보내고 금군(禁軍)과 포수(砲手)를 평양으로 파견하고 황해도의 병력도 동원하라.’고 건의했다. 정묘호란 이후, 이렇게 많은 수의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온 적은 없었다. 그것은 사실상 침략이었다. 다만 그들은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배를 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인조는 황급히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은, 후금군이 배를 빌려 가도를 습격하려는 목적에서 침략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명에 대한 의리를 고려할 때 배를 빌려줄 수는 없다며 속히 황해도를 비롯한 각도의 군사들을 동원하라고 촉구했다. 최명길의 분석은 좀 달랐다. 그는 후금군이 쳐들어 온 것은 조정을 협박하여 식량을 구하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최명길은 후금군이 깊숙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군사 징발 때문에 민심을 소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6월10일 호차 중남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갖고 서울로 올라왔다.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는 조선에 대한 불만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이 양곡을 주는 바람에 가도가 존속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어 조선이 용천, 철산 지역의 땅을 가도 주민들에게 경작지로 제공하고 있는 것을 비난했다. 그는 정묘호란 당시 서울 이북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반환했음을 상기시킨 뒤 조선은 그럼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홍타이지는 ‘잘못을 사과하는 차원에서 배를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배를 빌려주기 않으면 의주와 철산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중남이 입경한 그날, 명에서 온 사절도 서울로 들어왔다. 등래순무 손원화(孫元化)가 보낸 도사(都司) 왕순신(王舜臣)과 이매(李梅)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인조를 만났을 때 조총, 구리 냄비와 배 100척을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공교롭게도 명 사절들도 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당시 손원화는 바람 잘날 없는 가도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배가 필요했다. 그는 조선에서 배를 구입하여 섬 안에 있는 인원과 전마(戰馬), 군수 물자 등을 등래(登萊) 지역으로 수송하려고 했던 것이다. 손원화의 요구는 조선에게 무척 버거운 것이었다.100척이나 되는 배를 새로 건조하기도 어렵고, 각 지역의 화물선들을 갑자기 차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섣불리 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후금이 알게 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결국 배를 제공하라는 요구는 완곡히 거부했다. 대신 조총 500자루와 구리 냄비 100개를 보내겠다고 확약했다. 명에 대해서는 참으로 충성스런 조선이었다. 청북 지역에 후금군 1만명이 주둔해 있고, 호차가 서울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명 사절들에게 조총 500자루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분명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조정은 실제로 왕순신 등이 중남과 조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다. 중남 또한 배를 빌려줄지 여부를 빨리 밝히라고 닦달했다. 조정은 중남에게 ‘명은 우리의 부모 나라이므로 너희에게 배를 빌려주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것이다. 부자(父子) 사이에 차마 못할 짓을 할 경우 형제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잔인하게 명을 저버리면 뒷날 너의 나라로부터도 의심을 받을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의리와 천륜을 강조하여 중남의 ‘심금을 울려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면서 후금군의 침략을 비난하고,‘형제 사이의 의리를 생각해서 며칠분의 군량을 제공할 것이니 빨리 철수하라.’고 촉구했다. 배를 빌려줄 수 없다고 하자 중남 일행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조정은 접대하는 신료를 보내 그들을 달래서 다시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회유했지만 중남 등은 배를 빌려 달라는 요구를 접지 않았다. 조선 측이 다시 거부하자 중남 일행은 다시 일어나 귀국하겠다고 나가버렸다. 조정은 다시 사람을 보내 이미 녹번동까지 가 있던 중남 일행을 달래야만 했다. 후금은 왜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했을까? 당시까지 후금은 바다에서 작전할 수 있는 수군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하(遼河)와 같은 내륙 지역의 강에서 운항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배들은 있었지만 그것을 갖고 바다로 나가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바다에서 배를 조종하고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수군 병력이 없었다. 후금에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들의 육군은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막강했지만 바다나 수군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철산의 바로 코앞에 있는 가도에서 모문룡이 ‘발호’를 해도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모문룡은 바로 그 같은 후금의 약점을 파고들어 8년 가까이 ‘해외 천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금은 조선의 수군과 항해술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심지어 ‘조선 수군이 명 수군보다 강하다.’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조선에서 배와 수군을 빌리면 자신들의 전력은 배가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수군만 있으면 코앞에 있는 가도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금의 서쪽을 철옹성처럼 막아 버티고 있는 산해관도 해로로 공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군이 강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왜란 초반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했지만 수군은 달랐다.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아 그들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좌절시킴으로써 궁극에는 명의 안보까지도 지켜낸 것이 조선 수군이었다. 이순신(李舜臣)의 탁월한 영도와 거북선 등 조선 전함들의 활약상은 명 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626년 조선에 왔던 명사 강왈광(姜曰廣)은 ‘조선 사람들이 배를 조종하는 것은 빠르기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다. 만일 그들이 오랑캐에게 넘어가 오랑캐들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면 산동이나 강남 지방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명청 교체기 명 관인들이 조선의 향배와 관련하여 가장 크게 우려했던 대목이 바로 수군이었다. 조선 또한 명과 후금의 대결 상황에서 ‘수군 문제’가 갖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후금의 강요대로 배나 수군을 제공할 경우, 가도가 곧바로 위험에 처하고 산해관을 비롯한 명의 내지까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후금에 배를 넘겨주는 것은 ‘부모의 나라’에 비수를 꽂는 것이었다.1631년 6월, 배 때문에 명과 후금 모두로부터 ‘코너에 몰려야 했던’ 조선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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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부 ◇전보 △정보분석본부 분석총괄팀장 李康佑■ 공정거래위원회 ◇서기관 승진 △홍보관리관실 정책홍보팀 羅良柱△시장감시본부 시장구조정책팀 宣重圭△기업협력단 협력정책팀徐南敎△심판관리관실 심결지원1팀 吳幸錄■ 국세청 ◇과장급 전보 △서울지방국세청 감사관 張南弘△ 〃 조사4국 4과장 李光雨△특별감찰팀 팀장 安東范 ◇초임 세무서장△경주세무서장 金鍾局 ◇복수직 서기관 및 행정사무관 전보△대전지방국세청 총무과장 孫南洙△대구지방국세청 〃 宋雲永△부산지방국세청 〃 鄭貞龍△특별감찰팀 全昌澈■ 서울소방재난본부 ◇지방소방령 승진 △서울종합방재센터 문정명△종로소방서 소방행정과장 김상철△중부〃 대응관리〃 조기봉△중부〃 예방〃 장재철△동대문〃 대응관리〃 김현△성북 예방〃 박치학△노원〃 소방행정〃 이영우 △노원〃 대응관리〃 임정현△은평〃 소방행정〃 박용정△서대문〃 대응관리〃 고숭△서대문〃 예방〃 이재옥△마포〃 소방행정〃 이재호△강남〃 예방〃 박정수△강서〃 대응관리〃 김병로△강동〃 소방행정〃 한찬석△관악〃 대응관리〃 한정희△양천〃 대응관리〃 이종환 ◇지방소방령 전보 △소방재난본부 소방행정과 남문현△〃 재난대응과 김성수△〃 재난대응과 심재강△〃 예방과 박세식△〃 소방감사반 박희순△〃 소방감사반 현진수△〃 소방감사반 김학태△서울소방학교 권혁민△〃 김조일△종로소방서 예방과장 제홍근△용산〃 예방〃 김규태△중랑〃 대응관리〃 유동렬△성북〃 소방행정〃 임재열△도봉〃 소방행정〃 장인수△노원〃 예방장 엄영화△서대문〃 소방행정〃 최종형△마포〃 대응관리〃 강선행△관악〃 예방〃 강기훈△송파〃 대응관리〃 손병섭■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전보 △R&D사업진흥본부장 안용호△산업지원〃 이신호△전략개발본부 전략기획단장 정명섭△〃 정책개발〃 염용권△R&D사업진흥본부 R&D기획〃 서창진△산업지원본부 의료산업〃 안인환△HACCP지원사업〃 임기섭△전략개발본부 정책개발단 통계정보센터장 김기성△R&D사업진흥본부 R&D기획단 기술사업화〃 유화춘△산업지원본부 의료산업단 의료기관평가지원〃 유선주△〃 품질평가인증〃 최성희△〃 해외사업〃 장경원△〃 인력양성〃 이철수△고령친화산업〃 장현숙△영양정책지원〃 김초일△전략개발본부 전략기획단 경영전략팀장 명희봉△혁신기획〃 윤지영△인력개발〃 이종환△전략개발본부 정책개발단 산업분석〃 정명진△제약산업〃 정윤택△화장품산업〃 황순욱△의료기기산업〃 강태건△식품산업〃 이중근△전략개발본부 정책개발단 통계정보센터 정보화지원〃 공재근△R&D사업진흥본부 R&D기획단 총괄조정〃 한동우△연구기획〃 이상원△성과관리〃 김동석△R&D사업진흥본부 질병연구단 질병연구지원〃 김기태△〃 신기술개발단 신기술개발지원〃 이철행△산업지원본부 산업지원팀 산업지원〃 권영호△〃 의료산업단 의료산업〃 이윤태△병원경영지원〃 좌용권△산업지원본부 해외사업센터 통상협력〃 김수웅△해외마케팅지원〃 이영호△HACCP지원사업단 평가지원실장 김성조△기술지원팀장 박경진△고령친화산업센터 요양서비스산업PL 유재성△영양정책지원센터 조사운영PL 장영애△감사담당 양형근■ 한국산업안전공단 ◇전보 △대구지역본부장 김재호△경인지역〃 박영규◇국장급 승진△건설안전실장 정성훈△산업안전보건연구원 안전검인증센터 소장 정재종△〃 화학물질안전보건센터 〃 양정선△〃 화학물질정보운영팀장 신현화△산업안전교육원 강신준△부산지역본부 최형철 고재철△경남동부 산업안전보건센터 소장 박수덕△울산 중대산업사고예방센터 기술지원팀장 임대식△대구지역본부 정완순△광주지역본부 교육정보센터 소장 임태영◇국장급 전보△경영기획실장 백낙문△운영지원국장 경창수△감사실장 김동섭△서울북부산업안전기술지도원장 홍경표△경남〃 김건남△경기서부〃 이충호△전남동부〃 김기영△충북〃 이광길△산업안전교육원 교육지원실장 강영모△〃 교수실장 주종대△서울지역본부 김석환△부산지역본부 교육정보센터소장 박덕곤△〃 전문기술위원실장 안병준△부산지역본부 윤상용△대구지역본부 교육정보센터소장 성수원△광주지역본부 나종일△전남동부 중대산업사고예방센터기술지원팀장 황순용△대전지역본부 교육정보센터소장 황의춘△충남 중대산업사고예방센터 기술지원팀장 전풍림■ 한국청소년상담원 ◇전보 △경영기획실장 황순길△경영기획실 기획팀장 이호준△〃 고객경영혁신〃 전상현△〃 행정지원〃 이희춘△〃 지식정보〃 유주형△연구개발실장 지승희△연구개발실 기초연구팀장 권해수△〃 프로그램개발〃 송미경△상담연수실장 주영아△상담연수실 연수1팀장 이영선△〃 연수2〃 이소엽△통합지원상담실장 이창호△통합지원상담실 통합지원관리1팀 노성덕△〃 통합지원관리2팀 조규필△〃 상담팀 이한종■ 시티신문 △회장 서민수■ 아시아경제신문 △독자서비스국장 정우진△기획조정실장 김태형△경영지원팀장 조병무■ 르노삼성자동차 ◇상무 승진 △李基寅 金炯男 趙炳帝 羅基晟 ◇이사 승진△琴仁喆 金守鉉 李相範 朴雨 姜勇根■ 비씨카드 ◇상무 △가맹점사업본부 고규영△회원서비스본부 이문재△IT〃 윤병한△마케팅본부 조중화△경영관리〃 오경섭 ◇이사 승진△영업점본부 박귀순△전략사업〃 정수현 ◇부장. 지점장 승진△교육개발팀 정명철△상품〃 장홍식△업무지원팀 김의찬△마케팅〃 김준△카드발급팀 이현호△회원청구팀 송선진△가맹점운영팀 임종욱△준법감시팀 최기언△강릉지점 김동원 ◇부장. 지점장 전보△경영혁신팀 김경주△경영지원팀 양태헌△IT기술〃 김진호△개발〃 박희운△영업점〃 이희민△홍보팀 박상진△마케팅기획팀 강기성△회원〃 김상술△정보〃 양현모△제휴마케팅팀 권기동△우수고객팀 김진철△법인영업팀 이영석△CRM팀 이혁구△고객서비스팀 김미수△사이버〃 김상겸△가맹점개발팀 차두화△카드〃 안상호△서비스〃 허진△신용관리팀 윤삼용△국제업무팀 마천경△보험사업팀 김흥수△여행〃 최성욱△e-commerce팀 김규형△감사팀 이경훈△비서팀 김태진영△전산운영팀 이덕수△표준화팀 이정규△영업부 안광오△중앙지점 오현택△서울남부〃 서재흥△서울동부〃 황성배△대구〃 김성환△부산〃 김상기△대전〃 김재정△서울서부〃 최동훈△서울북부〃 홍명표△전주〃 천성우△청주〃 이중규△제주〃 김종도△분당지점 개설준비위원장 송병식△일산 〃 이병묵■ 한국IBM △클라이언트 밸류 이니셔티브 총괄 이경조 부사장△글로벌 테크놀로지 서비스 대표 김원종 전무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1630년(인조 8) 8월, 비변사는 총융사 휘하의 경포수와 어영군을 평안병사 유림(柳琳)에게 배속시키고 도내의 정예병을 안주, 정주, 구성 등지에 배치하여 유흥치 일당의 노략질에 대비할 것을 청했다. ●가도 정벌 시도의 후유증 1630년 8월 유흥치는 차관 이매(李梅)를 서울로 보내, 조선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까닭을 힐문하려 했다. 인조는 처음에는 그와의 면담을 회피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 토벌 시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유흥치는 9월에도 차관 이현(李見)을 보내왔다. 그는 먼저 ‘정충신이 가도 사람들이 배 만들고 숯 굽는 것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정충신이 토벌에 나섰을 때 유흥치의 정탐꾼들을 체포하고 한인들을 살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유흥치는 이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양곡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인조는 이현에게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인조는 문안관 정유성(鄭維城)을 가도로 보냈다. 유흥치는 ‘기공대첩(奇功大捷)’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워놓고 정유성을 만났다. 그는 정유성에게 자신이 섬 안의 훼방꾼들을 제거했는데 조선이 자신을 왜 공격하느냐고 힐문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천조(天朝)를 범하는 오랑캐는 토벌하지 않으면서 명나라 장수를 향해 군사를 들이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정유성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정유성에게 유흥치는 본색을 드러냈다. 섬 안에 군량이 부족하니 조선이 그것을 공급하라고 다시 요구했다.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힘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유흥치에게 약점을 잡혀 코가 꿰인 셈이었다. 유흥치는 정유성을 만난 직후, 평안도 일대에 부하들을 보내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했다. 그들은 조선 관민들에게 수천 석의 군량을 빨리 운반하라고 독촉했다. 유흥치는, 압록강이 얼기 전에 군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군사들을 평안도에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유흥치가 가도로 돌아온 뒤 조선에 보낸 게첩(揭帖)에는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김상헌이 회답서를 썼는데, 유흥치의 무례함을 질책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노여워할까 우려하여 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은 인조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인조는 김상헌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김상헌은 홍문관 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맞섰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인조의 태도도 유흥치의 작폐를 조장하고 있었다. ●유흥치의 수탈이 격화되다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킨 뒤 명 조정은 가도에 대한 군량 공급을 중단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서 토색질을 벌였다. 조선의 관민들 가운데는 한인들의 작폐에 시달리다 못해 그들을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1630년 12월, 중화의 대장(代將) 양덕위(梁德渭)는 노략질을 일삼는 한인들을 공격하여 17명을 살상했다. 조정 일각에서는 유흥치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양덕위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평안감사 민성휘의 의견은 달랐다. 양덕위를 살인죄로 처벌한다면 한인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난동을 피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 관민들의 ‘자구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같은 해 12월에는 황주의 백성들이, 배를 수리하기 위해 왔던 한인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화가 난 한인들은 황주 관아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작폐에 대한 조선 관인들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진 것을 절감한 유흥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서울 등지에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정탐꾼들은 사대부가와 여염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정을 파악하려고 골몰했다. 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과 후금의 왕래 상황이었다. 정탐꾼들을 통해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유흥치는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1630년 11월, 전국해(錢國海)라는 자가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의 차관이라 칭하며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선에서 군량 2만석과 전마 3000필을 얻어 유흥치에게 공급한다.’고 떠벌렸다. 가도에서 그를 만났던 조선 접반사 이경헌(李景憲)은 ‘조선에서는 전마를 키우지 않고 평안도는 이미 황폐화되어 군량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다.’고 조선행을 만류했다. 전국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국해는 본래 유흥치의 부하였다. 유흥치는 그에게 위조한 자문(咨文)을 주었다. 자문의 내용은 가관이었다.‘명 조정은 이제 유흥치를 용서했다. 감격한 유흥치는 공을 세우고 싶지만 식량과 전마가 부족하여 이웃에 의지해야만 한다. 듣건대 조선이 후금을 돕고 한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이 있다. 부득이하게 후금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조선이 명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곡식과 전마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시 전마 2000필을 가도로 보내고 한인들을 핍박하지 말라’. 조선이 후금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빌미로 군량과 전마를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조선 조정은 전국해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과거부터 등래 군문(軍門)이 바다 건너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군량과 전마를 청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해는 인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손원화가 보내서 온 차관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인조는 양곡과 전마를 보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비변사는 서울에 있는 한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가도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상인과 역관들이 가도에 들어가 무역하는 것을 엄격히 제재하자고 했다. 그들을 통해 조선 사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바야흐로 조선과 유흥치 사이의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도의 변란 1631년(인조 9) 1월, 가도로 들어간 조선 문안관을 만났을 때 유흥치는 다시 길길이 뛰었다. 그는 한인들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여 자신에게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력을 풀어 자신이 직접 살인자를 찾아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유흥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 본토로부터 군량 공급이 여의치 않은 데다 조선 또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흥치는 결국 1631년 3월, 부하 장도(張濤)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피살되었다. 유흥치는 가도를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심세괴 등의 반발을 사서 죽은 것이다. 모문룡과 원숭환이 죽은 뒤,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가도의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가도에서 다시 일어난 변란의 불똥은 조선으로 튀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가도 정벌’을 다시 운운했다. 그런데 당시는 ‘가도 정벌’을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다.1631년 5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조선이 보낸 방물(方物)의 양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굶주린 유흥치가 자신에게 귀순하려고 했는데 조선이 식량을 공급해 주는 바람에 귀순을 거부했다.’고 따졌다. 그는 조선이 이후에도 가도에 식량을 대주면 병력을 의주로 보내 차단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의 원조가 없으면 가도는 쉽사리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협박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이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한, 후금과의 관계는 안정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락가락했던 인조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의 가도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결국 후금과의 원한을 쌓아 가는 과정이었다. 파국이 다가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것, 바로 거기에 조선의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생각나눔 NEWS] 사형수 → 무기형 감형의 두얼굴

    “선원은 물론 병으로 귀국하기 위해 승선한 사람까지 범행은닉 목적으로 살해하는 등 인간의 행동으로 보기 어려운 범행을 저지른 만큼 원심의 형량은 결코 무겁지 않다.” 대법원은 지난 1997년 7월26일 해상강도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중국동포 전재천(49)씨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전씨는 199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의 주범. 남태평양 사모아섬 부근 해상에서 열악한 작업조건과 선상 폭력에 앙심을 품고 다른 중국동포 선원 5명과 함께 한국인 선원 7명 등 모두 11명의 선원을 살해한 뒤 사체를 바다에 버렸다. ●교화위원들 “사형은 법이 허가한 살인”우리나라가 국제 앰네스티(국제 사면위원회)가 분류하는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선포된 지 하루 만인 지난 31일 단행된 특별사면에서 부산구치소에서 11년째 복역중인 전씨를 비롯한 6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다. 참여정부 들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뤄진 사형수 감형조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교체 직전인 97년 12월30일 23명을 형장의 이슬로 보내 사형제에 쐐기를 박은 지 꼭 10년 만에 참여정부는 사형수 6명에게 ‘새생명’을 줌으로써 사형제 폐지에 한걸음 다가간 셈이다. 이로써 차기 이명박 정부 역시 사형 집행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됐다. 수십년 동안 사형수들을 만나온 교화위원들은 사형 역시 법에 의해 허가된 것일 뿐 ‘살인’임에는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또 함무라비 복수법식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보다 교화를 통해 뉘우치는 법을 깨닫게 하는 것이 진정한 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늦은 감이 있지만, 참여정부의 이번 사면을 사형제 폐지로 가는 중대한 단계로 높이 평가했다. 전씨 역시 처음에는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선상생활에 대해 “한국인은 우리를 개라고 부른다. 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가 났다.”면서 “고기 한마리 값보다 못했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인권단체에 편지를 보내 “내가 죽는 것만이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길임을 스스로 느끼며 혼자 마음정리를 해왔다.”고도 했다. ●피해자·유족 배려 뒤따라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영우 신부는 “사형수들이 수감될 때는 재판과정에서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고 불안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독설을 퍼붓지만, 또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한다.”면서 “피해자 유족과의 만남을 주선해 줬던 한 사형수는 ‘이렇게 용서를 빌기 위해 이날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다’고 참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사형제 폐지와 별도로 피해자 가족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씨와 오랫동안 연락해온 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정귀순 대표는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사형수 입장에서는 의미있는 일이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유족의 마음을 생각하면 의미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고 말을 아꼈다. 한 교화위원 역시 최근 페스카마호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려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겠죠. 어쩌면 영원히 그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니까 노력해야죠.”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숭정제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원숭환의 생사는 바야흐로 동림당과 엄당 대결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그 배경 1630년 9월22일, 원숭환은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임금을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책형(刑)이라 불리는 가장 잔혹한 형을 받았다. 기둥에 묶어 놓고 형리들이 달려들어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중에는 두개골까지 부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형벌이었다. 후금이 파놓은 반간계에 휘말려 원숭환을 처형했던 사람은 숭정제였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원숭환을 죽이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이었다. 이들은 숭정제 즉위 후 약화된 자신들의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당의 잔당들을 규합하려 했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숭환을 제거하려 했던 것과 ‘모문룡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모문룡은 가도에 위충현의 소상(塑像)을 세웠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었다. 모문룡은 해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막대한 요향(遼餉·명 조정이 요동으로 보내던 군량) 가운데 상당한 양을 횡령했고, 그렇게 착복한 자금을 바탕으로 위충현 등 엄당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조선과 후금 상인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인삼, 모피, 진주 등의 보화도 철철이 엄당 신료들에게 보내졌다. 엄당은 뇌물을 챙기는 대신 모문룡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죽었다. 때마다 쏠쏠하게 들어오던 뇌물도 뚝 끊어졌다. 당연히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그와 연결된 동림당에 대한 적의(敵意)는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타 조정 신료들 중에도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북경 주변의 경기 지역에 원림(園林)이나 정사(亭舍)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장성을 넘어와 경기 지역을 유린하자 그들이 소유한 원림이나 정사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원숭환을 원망하게 되고, 궁극에는 그가 후금군을 고의로 끌어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원숭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 원숭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확연히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환을 죽이고 전용석 등 동림당 관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온체인 등은 숭정제를 주무르며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상황 파악이 어두운 황제와 그에게 달라붙은 간신들의 발호 속에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리 없었다. 한 예로 원숭환을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祖大壽)는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명에 대한 후금의 도전이 본격화되었던 만력 연간부터 숭정 연간까지 원숭환은 명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죽자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겼다. 원숭환은 자연스럽게 과거 송(宋) 시절 금(金)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주화파 진회(秦檜) 등에 의해 제거되었던 명장 악비(岳飛)에 비견되었다. 청나라 말엽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열기가 높아갈 무렵 ‘한족의 영웅’으로서 원숭환을 추모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변법자강 운동에 가담했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기려 ‘원독수전(袁督師傳)’이라는 글을 썼다. 광서(光緖) 연간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였다. 원숭환과 같은 광동(廣東) 출신이었던 그는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의 발문에서 그는 ‘원숭환이 죽음으로써 명이 드디어 망했고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장백정은 원숭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궁극적으로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을 죽게 만든 것은 청’이라고 하여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냈다.‘반청흥한’의 분위기 속에서 원숭환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1952년 북경시 정부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북경의 지식인들은 모택동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시장 팽진(彭眞)에게 원숭환 묘를 원위치에 보전하도록 지시했는데, 모택동 또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애국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신(貳臣)들 홍타이지 명령받아 반간계 실행 원숭환이 투옥되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은 명이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이었다. 명이 이렇게 자멸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담당했던 부류가 이신(貳臣)들이다. 이신이란 ‘두 조정을 섬긴 신하’, 즉 명에서 벼슬하다가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신료들을 가리킨다. 명이나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배신자’였지만 후금이나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중용(重用)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후금의 국가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실제 당시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를 제시했던 사람도,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반간계를 실행으로 옮겼던 사람도 모두 이신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아, 사로잡은 명의 환관들이 있던 옆방에 머물면서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말하며 반간계를 실행했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에게 원숭환을 제거할 반간계를 기획하여 제공한 사람은 한족 출신 범문정(范文程)이었다. 그는 심양의 명문 출신으로 증조 범총(范총)은 명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부 범심(范瀋)은 심양위지휘동지(瀋陽衛指揮同知)를 역임했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策士)로 중용했다. 범문정은 1629년 홍타이지의 관내(關內) 원정에 수행했는데,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를 제거할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뒤 시기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施政)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이신들이 청으로 귀순했던 이유는 제각기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북경까지 달려와 사투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숭정제를 보면서 조대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 앞에서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가도 정벌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자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병조판서 이귀가 나섰다. 그는 ‘주장(主將) 진계성을 함부로 살해한 유흥치를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바다 건너 정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중국 조정과 상의하지 않을 경우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며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자리는 반역자 토벌을 논의하는 자리지 군대 해산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귀의 주장을 일축했다. 유흥치의 반란을 응징하겠다는 인조의 결의는 확고해 보였다. ●인조의 토벌 강박증 이귀는 다시 ‘훈련도 안 된 병력을 하루아침에 멀리 보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인조는 ‘병조판서가 그렇게 말하면 병사들의 맥이 풀린다.’며 계속 반대할 경우 처벌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군법으로 처벌하려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며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의 충고를 받아달라고 촉구했다. 이귀가 ‘죽음’ 운운하자 인조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회의를 파해버렸다. 1630년 4월27일에도 인조와 신료들 사이의 갑론을박은 지속되었다. 이정구(李廷龜)는 먼저 황제에게 주문(奏聞)한 뒤 성지(聖旨)를 받들어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배반한 적은 누구나 토벌할 수 있는 것이라며 명 조정에서 회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인조가 워낙 강하게 나오자 신료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끼리 비변사(備邊司)에 모여 회의할 때는 출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이었던 신료들도 인조 면전에서는 태도가 달라졌다. 최명길은 ‘비변사에 있을 때는 반대하다가 주상 앞에서는 순종하기에만 급급하니 신하의 도리가 어디로 갔냐.’며 이서와 정충신의 태도를 비판했다. 인조는 토벌에 관한 한 강박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맹세코 이 적을 섬멸하여 황은에 보답하고 싶다. 무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험한 것인데 나라고 좋아서 하겠는가?”라며 신료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김류는, 출정 날짜가 다가오는데 논의가 계속 분분하면 장수들이 동요할 것이라며 성사를 기약하려면 군법을 엄격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류가 자신에게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자 인조 또한 “의심을 품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4월28일, 이귀는 인조에게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혹시라도 불리할 경우 원한을 사서 화를 재촉할 것이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이어 홍문관과 양사(兩司)의 신료들이 나서 출정 명령을 거두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향후 망령되이 반대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처단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곧 이어 출정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갑주(甲胄)와 궁시(弓矢)를 하사했다. 그럼에도 병조판서 이귀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인조는 그를 파직시켰다. ●토벌군의 출정과 상황의 변화 비변사는 병선 열 다섯 척을 징발하여 격졸(格卒)과 군량 등을 싣고 5월15일 이전까지 강화도 교동(喬桐) 앞 바다에 대기하도록 조처했다.4월29일에는 정벌에 즈음하여 가도의 중국인들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이 만들어졌다. “지금 역신(逆臣) 유흥치는 스스로 사사로운 불화를 조성하여 가슴에 음모를 품고 승냥이나 이리 같은 흉악한 세력을 끼고 벌이나 전갈처럼 독기를 뿜어대었다. 붙잡혀 온 달족( 族-후금 투항자)들을 불러모아 감히 반란을 일으켜 주장을 멋대로 해쳤는가 하면 통판(通判) 등과 각부(各部)에서 파견한 관리도 아울러 죽여 반역의 기운이 하늘에 닿았다.(중략) 이에 우리 전하가 한 번 크게 성내시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본관이 나라의 명을 삼가 받들어 삼군을 이끌고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서에서 동시에 포위하려 하는데, 의기에 격동되어 사기가 저절로 배나 치솟고 있으니, 탄환(彈丸)만 한 너희 일개 섬이 어떻게 빠져 달아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반역의 변고가 호로(胡虜)보다 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유흥치를 묶어 군문 앞으로 끌고 오라.” 반란을 일으킨 유흥치 일당에 대한 토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선군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월 4일 인조는 도승지를 서쪽 교외로 보내, 가도를 향해 출정하는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의 장도(壯途)를 축원하는 송별식을 열어 주도록 했다. 이서는 어영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감사 이여황(李如璜), 병사(兵使) 신경인(申景)과 함께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나아가 주둔했다. 부원수 정충신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수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은율(殷栗)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이렇게 가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유흥치가 전함 49척을 이끌고 가도를 떠나 등주(登州)를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평안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은 당황했다. 토벌의 1차 대상인 유흥치가 섬을 비웠기 때문이다. 김시양은, 유흥치가 없는 이상 가도로 진격하여 그의 심복들을 사로잡고 창고를 봉한 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자고 했다. 총융사 이서는, 소굴이 비었으니 가도 공격이 무익해졌다며 아군의 대선(大船)을 숨기고 선봉을 접근시켜 유흥치를 유인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했다. 유흥치가 섬을 비우는 바람에 조선의 정벌은 자칫하면 ‘싸움을 위한 싸움’,‘공격을 위한 공격’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비변사 신료들은 인조에게 먼저 가도 사정을 철저히 정탐하라고 촉구했다. 유흥치가 병력을 이끌고 섬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명 본토를 공격할 것인지, 후금에 투항할 것인지, 요동 반도 연안의 여러 섬들을 노략질할 것인지, 명의 아문으로 가서 귀순할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류 또한 공격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토벌 분위기가 바뀔 조짐을 보이자 인조가 다시 선을 그었다. 그는 ‘유흥치가 우리의 공격 기미를 눈치채고 일단 섬들 사이로 피했다가 우리의 자세가 해이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가도로 들어가 그 심복들을 죽인 뒤 병력을 선천과 철산 사이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또 이서에게도 밀서를 보내 섬을 반드시 토벌하고 항복한 달족들을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가도에 대한 공격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던 6월, 후금 사신 일행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선이 여전히 가도에 쌀을 공급하고 있다고 힐책하고, 과거 자신들이 무역했던 청포(靑布)를 유흥치에게 빼앗겼다며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실제 의주의 압록강 건너편에서는 후금군 3000명이 청포를 내놓으라고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가도 정벌에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가도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벌을 그만두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졌다. 토벌군 병력들은 한창 더운 여름철에 무작정 해상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사망자가 속출하고 원성이 터져나왔다. 1630년 6월28일, 부원수 정충신은 조정에 보낸 장계에서 군사를 파하라고 촉구했다. 일선 지휘관으로부터 파병(罷兵) 의견이 제시되자 비변사 신료들은 속히 정벌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오직 김류만이 토벌을 중지하는 데 반대했다. 인조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을 때 최명길이 나섰다. 그는 ‘해상에서 노숙하느라 지쳐 쓰러진 병사들이 많은데 장수들은 그들이 도망갈까 염려하여 상륙을 금지하고 있다.’며 현지 상황을 전했다. 놀란 인조는 결국 수군만 남기고 육군은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가도 정벌 시도가 결국 유야무야 되는 순간이었다. 나라 안팎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전후의 맥락을 제대로 헤아려 보지 않고 내렸던 인조의 ‘결단’이 해프닝으로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 대입 정시모집 요강] 인문계열 180곳 수능 50%이상 반영

    [2008 대입 정시모집 요강] 인문계열 180곳 수능 50%이상 반영

    2008학년도 대입 정시모집에서 대학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을 가장 중요한 전형 요소로 반영한다. 학교생활기록부 실질반영비율은 전년도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 논술 고사는 인문계는 물론 자연계 모집단위에서도 시행하는 대학들이 크게 늘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27일 ‘2008학년도 정시모집 대학입학 모집요강 주요 사항’을 발표했다. 정시모집의 전형 요소는 대학이나 모집군(가·나·다군 등), 모집단위별로 다르지만 대부분 수능과 학생부, 논술, 면접·구술고사, 실기고사 등을 활용한다. 전체적으로 가장 비중이 높은 전형 요소는 수능 성적이다. 인문계열 일반전형을 기준으로 수능을 50% 이상 반영하는 대학은 180곳이다. 고려대(서울)와 성균관대, 연세대(서울·원주), 이화여대, 중앙대(안성), 한양대(서울·안산) 등 11곳은 수능을 100% 반영한다. 100% 미만∼80% 이상 2곳, 80% 미만∼60% 이상 132곳, 60% 미만∼50% 이상 35곳, 50% 미만∼40% 이상 23곳, 40% 미만 18곳 등이다. 수능 등급제의 첫 시행으로 주요 대학들은 수능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등급간 점수 차를 차등 부여하고 있다. 학생부 실질반영률은 30% 이상 반영하는 대학이 191곳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30%대가 128곳으로 가장 많았고, 50% 이상 30곳, 50% 미만∼40% 이상은 33곳, 30% 미만∼25% 이상 6곳 등이다. 대부분 대학들은 학생부에서도 등급간 점수 차를 두고 있다. 상위권대는 상위 등급간 격차는 줄이고, 하위 등급간 격차는 늘렸다. 반면 중·하위권 대학들은 전체적으로 등급간 점수 차를 높여 등급이 낮아질수록 학생부의 영향력이 커지도록 했다. 논술고사의 실질반영률은 서울대와 부산가톨릭대 등 2곳이 20% 이상을 반영한다. 부산대와 가톨릭대, 건국대, 서울교대 등 12곳은 20% 미만∼10% 이상, 숙명여대, 한국외국어대(서울) 등 15곳은 10% 미만∼5% 이상 반영한다. 특히 자연계열 모집단위에서 논술을 실시하는 대학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는 숙명여대 한 곳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서울대 등 3곳이 20% 이상 반영하는 것을 비롯해 건국대(서울), 서울시립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한양대, 국민대, 경북대, 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숭실대,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대(서울), 인하대 등 38곳에 이른다. 면접·구술고사의 실질반영률은 20% 이상이 29곳, 20% 미만∼10% 이상 11곳, 10% 미만∼5% 이상 16곳, 5% 미만 15곳 등으로 집계됐다. 모집 인원은 199개대에서 모두 18만 1014명으로 전년도 18만 7325명에 비해 6311명 줄었다. 올 전체 모집 인원의 47.9%에 해당한다. 대학들은 ‘가·나·다’ 등 군(群)별 또는 캠퍼스별 분할모집 방식으로 학생을 뽑는다. 전형별로는 일반전형 199개대 16만 4853명(91.1%), 특별전형 151개대 1만 6161명(8.9%)이다. 정원 내 특별전형 모집인원은 특기자 전형 27개대 306명, 대학 독자적 기준 전형 78개대 4138명 등이다. 정원외 특별전형으로는 농어촌학생 전형 132개대 4859명, 전문계고 출신자 전형 99개대 4095명, 특수교육대상자 전형 45개대 540명, 재외국민·외국인 전형 51개대 785명 등이다.2008학년도 정시모집 요강 주요 내용은 대학진학정보센터 입학정보 홈페이지(univ.kcue.or.kr)에서 볼 수 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수험생 주의사항 정시모집에 지원할 때는 주의 사항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자칫 합격이 취소될 수도 있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규정에 따르면 수시 1학기 또는 수시 2학기 모집에 지원해 단 한 곳(산업대·교육대·전문대 포함)이라도 합격하면 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정시 또는 추가모집에 지원해서는 안 된다. 또 정시 모집에서 모집 기간 군(群)이 같은 대학(교육대 포함)에 복수 지원을 할 수 없고, 한 대학에서 모집기간 군이 같은 전형에 복수 지원하는 것도 금지된다. 일반전형과 특별전형에 복수 지원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그러나 정시 모집 대학(교육대 포함)에서 모집 기간 군이 다른 대학간 또는 동일 대학내 모집기간 군이 다른 모집 단위간에는 복수 지원할 수 있다. 또 산업대와 전문대는 모집기간 군의 제한이 없다. 일단 정시 모집에 합격하고 등록을 하면 다른 곳에 추가 지원하면 안 된다. 최초 등록뿐 아니라 미등록 충원 과정 중에 추가 등록한 경우도 포함된다. 단, 추가 모집 기간(2008.2.20∼29) 전에 정시 모집 등록을 포기한 학생은 추가 모집 지원이 가능하다. 모든 전형 일정이 끝난 뒤라도 입학 학기가 같은 2개 이상 대학에 이중 등록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중등록과 복수지원금지 규정을 위반하면 전산 자료 검색을 통해 합격이 취소된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특기자 전형 각 대학들은 올 정시모집에서 농어촌학생이나 국가유공자, 특수교육대상자 등을 특별전형을 통해 따로 뽑는다. 또 만학도나 주부, 취업자 등을 우대해 뽑는 전형도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느 전형이 유리한지 살펴봐야 한다. 27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발표한 2008학년도 대입 정시모집 요강에 따르면 특별전형으로 전체 정시 모집인원의 8.9%인 1만 6161명(151개대)을 뽑는다. 정원 내에서는 특기자 전형으로 문학, 어학, 체육, 연극영화 전형 등이 있다. 대학별 독자적기준에 따른 특별전형에는 국가유공자 및 자손, 사회적배려대상자 및 자녀, 종교인과 자녀, 사회봉사자 및 자녀, 기능 우수자, 경기실적 우수자 및 지도자, 각종 대회 입상자 등의 전형이 마련돼 있다. 서울시립대는 청백봉사상 수상 공무원 자녀를 위한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진주산업대는 재외국민 특별전형 지원대상에 귀순 북한동포를 포함시켰다. 산업체 근무 경력이 있으면 충주대, 한경대, 한밭대, 경운대 등 산업대 우선선발전형을 노려볼 만하다. 서울기독대는 고령자를 우대하는 고령자 전형을 실시한다. 만학도, 주부 등을 위한 전형도 빼놓을 수 없다. 가톨릭대, 경북외대, 광주대, 남서울대, 세명대, 울산대, 한동대 등 여러 대학에서 선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만학도, 주부 등을 위한 특별전형을 마련해 놓고 있다. 가톨릭대, 강남대, 건양대, 용인대 등은 취업자를 우대하는 취업자 전형, 경인교육대와 공주교육대 등 일부 대학은 소년소녀 가장을 특별전형으로 뽑는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유리한 ‘영역별 점수 조합’ 골라야 수능등급제가 첫 시행되는 올 대입 정시모집에서는 누가 얼마나 지원전략을 꼼꼼히 짜느냐에 따라 당락이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대학들이 수능과 학생부의 등급제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는 등 지난해보다 모집요강이 훨씬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등급이라도 모집단위나 전형유형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지원 모집단위 6∼7개로 압축해야 현재 가장 먼저 할 일은 지원 희망 모집단위를 정하는 것이다. 수능 가채점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등급을 추정, 이를 바탕으로 지원 모집단위를 6∼7개로 압축해야 한다. 안정·소신·적정 등 세 수준으로 나눠 2개 정도씩 정해, 복수지원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 최종 결정은 다음달 12일 수능 성적이 나온 뒤 하면 된다. 지원 대학을 정했다면 공책 한 권을 마련해 지원 모집단위의 전형 요강을 한데 모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중하위권 대학은 학생부 등급 중요 희망 모집단위를 정할 때는 자신의 진로를 감안하되, 수능과 학생부, 논술·면접 등 전형요소별로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을 골라야 한다. 이 때 4가지는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 우선 수능 영역별 성적 조합 방법이다. 언어·수리·외국어·탐구 영역 가운데 ‘3+1’ 또는 ‘2+1’ 방식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을 골라야 한다. 예를 들어 언어 영역 성적이 좋지 않다면 수리와 외국어에 탐구 영역을 반영하는 ‘2+1’ 방식으로 전형하는 곳을 고른다. 탐구 영역에서도 몇 개 과목을 반영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두번째는 수능 영역별 가중치와 가산점이다. 적지 않은 대학이 수리 ‘가’형과 과학탐구 영역에 가중치를 두거나 가산점을 주고 있다. 상위권대의 경우 수리 ‘가’형의 가중치와 가산점이 당락을 가를 가능성이 높다. 세번째는 수능 등급간 점수 차이다. 많은 대학들이 수능 등급간 점수 차이를 따로 두는 방식으로 변별력을 확보하고 있다. 같은 등급이라도 모집단위나 전형유형에 따라 점수가 달라질 수 있다. 네번째는 학생부 등급간 점수 차이다. 대부분 대학들은 수능처럼 학생부에도 등급간 점수를 차등 부여하고 있다. 상위권대의 경우 상위등급간 격차가 미미하지만 중하위권대의 경우 등급간 격차가 커 학생부가 당락의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범·교육대 인·적성검사 기본점수 無 지원 모집단위를 정할 때는 전형요강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 자신에게 유리한 요소가 많은 전형을 골라야 한다. 복잡해서 혼란스럽지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틈새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사범대와 교육대의 인·적성고사는 논술과는 달리 기본 점수가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비교내신 적용 대상자와 적용 방식도 알아둬야 한다. 한림대 등 일부 대학은 재수생의 수능 성적을 그대로 학생부 성적으로 환산해 반영하기 때문에 재수생에게 유리하다. 만일에 대비해 동점자 처리 규정이 자신에게 유리한 곳을 골라야 한다. 수능 우선선발 전형의 경우 탈락하면 곧바로 일반전형으로 넘어간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나´군 일부대학 경쟁률 올라 갈 듯 올해 입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참고해야 한다. 올해에는 모집 시기를 ‘나’군으로 일부 옮긴 대학들이 있다. 서강대와 한양대, 성균관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경우 해당 대학의 ‘나’군 모집전형의 경쟁률과 합격선이 크게 올라갈 수 있다. 최상위권 대학에 합격선이 걸린 학생들이 ‘나’군에서 이 대학에 대거 지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의대나 치대 가운데 ‘2+1’방식으로 뽑는 곳도 있다. 단국대와 인제대, 고신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 대학들에는 언어 영역 성적에 자신 없는 학생들의 지원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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