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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대표와 제주도서 비공개 결혼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대표와 제주도서 비공개 결혼

    1일 종합반도체 전문기업 바른전자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김혜영과 김태섭 대표가 6월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김혜영과 김태섭 대표는 이달 중 제주에서 비공개로 결혼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김혜영의 예비 신랑 김태섭 대표는 30여년간 정보통신기술 업계에 종사했다. 한편 1988년 귀순한 김혜영은 2002년 10월 군의관과 결혼했으나 2005년 이혼했다. 이후 2009년 동료 배우 김성태와 재혼했지만 2012년 다시 이혼한 바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과 3번째 웨딩 ‘김혜영 누군가 보니..’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과 3번째 웨딩 ‘김혜영 누군가 보니..’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과 3번째 웨딩 ‘대체 누구?’ 알고보니 귀순 가수 김혜영이 이달 말 결혼한다. 상대는 IT 업계예 종사하는 김태섭 바른전자 대표다. 1일 김혜영 측은 “김혜영이 이달 말 결혼한다”며 “상대는 30여년간 정보통신기술 엽계에 종사한 김태섭 바른전자 대표다”고 밝혔다. 김혜영 측은 “본인이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구체적인 날짜나 만남의 과정 등 결혼 스토리에 대한 내용은 사생활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김혜영은 1998년 8월 가족과 함께 귀순했으며, SBS 드라마 ‘덕이’, KBS2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등에 출연했고 가수로도 활동했다. 현재는 뮤지컬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김혜영은 2002년 10월 군의관과 결혼했으나 2005년 이혼했다. 이후 2009년 동료 배우 김성태와 재혼했지만 2012년 파경을 맞았다.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 사진 = 서울신문DB (귀순가수 김혜영 결혼, 바른전자 김태섭 회장)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남북 오가며 마약제조… 황장엽 암살 공작까지

    남북 오가며 마약제조… 황장엽 암살 공작까지

    북한에 들어가 대량으로 마약을 제조하고 북한 공작원의 지령으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암살하려 했던 3인조 마약 조직의 존재가 뒤늦게 드러났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필로폰은 전량 중국 공안에 빼앗기고 황 전 비서 암살 역시 시간을 끌다 미수에 그치는 등 이들의 뜻대로 된 일은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김모(62)씨, 방모(68)씨, 황모(56)씨가 북한 공작 조직과 처음 접촉한 것은 1996년이었다. 필로폰으로 ‘외화벌이’를 하려는 북한 측 부탁을 받은 브로커 이모씨(2004년 사망)가 마약사범 전과가 있는 이들을 북한 공작원 A씨에게 연결해 줬다. 세 사람은 필로폰 제조에 필요한 시설과 기술을, 북한은 장소를 제공해 필로폰 1t을 만든 뒤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이들은 1997년 11월 반응로, 감속기, 비닐포장 기계 등 필로폰 제조 장비를 중국에서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다. 부산~나진 간 화물선 항로를 활용해 필요한 물품을 직접 조달하기도 했다. 2000년 4월에는 필로폰 주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을 100㎏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밀입북한 이들은 7월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필로폰 70㎏을 만들어냈다. 이는 230만여명이 한번에 투약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이다. 당초 북측과의 약속대로 필로폰 완제품 절반을 챙긴 이들은 북한군의 호위까지 받으며 고무보트를 타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나왔다. 하지만 운반을 의뢰한 전달책이 중국 공안에 잡혀 필로폰을 팔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잦은 방북으로 북한 당국의 신뢰를 쌓은 이들은 대남공작에까지 투입됐다. 김씨는 2009년 9월 황 전 비서 암살 지령을 받고는 1년간 10차례에 걸쳐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협의했다. 김씨는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충성 맹세문도 작성했다. 북한 공작원 A씨는 “황장엽은 나라도 가족도 버린 놈이다. 꼭 죽이지 않더라도 병신을 만들어 걸어 다니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활동비 4만 달러를 받은 김씨는 황 전 비서의 동선을 파악하는 한편 암살을 의뢰할 특수부대 출신 용병, 외국 폭력배 등과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충성도 테스트’를 위해 국내의 한 북한 관련 단체 대표에 대한 암살 지령이 추가로 내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암살 청부업자들은 착수금으로 50만~100만 달러를 요구했고 북한 측은 이를 깎으려 했다. 김씨가 중간에서 착수금을 조율하던 중 2010년 10월 황 전 비서가 심장마비로 사망해 암살 지령은 없던 일이 됐다. 황씨도 2004년 4월 반북 활동을 해 온 독일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58)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들이 ‘성공한 공작’이라곤 누구나 살 수 있는 ‘한국군 무기연감’이나 국내 지도책, 또 체지방측정기와 공기주입식 안마기 등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에게 건네질 선물을 보낸 것뿐이었다. 이들의 범행은 A씨의 윗선이 최근 남측에 귀순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그동안 김씨 등은 택배기사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백재명)는 국가정보원, 경찰청과의 공조 수사를 통해 김씨 등 3명을 마약류관리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고 17일 밝혔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北 김정은 공포정치] 공포정치 쇼크… 고위직 3명 한국행 등 탈북 러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집권 이후 공포정치가 확산되면서 올해에만 노동당 부부장급을 포함한 고위직 3명이 탈북해 입국하는 등 고위급 탈북자들의 탈북 행렬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13일 알려졌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 김 제1위원장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고, 신변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한국행을 고민하는 특권층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1997년 탈북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이후로 대표적인 고위층으로 분류되는 탈북자가 최근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 소식통은 “최근 우리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당 부부장급 고위 탈북자가 한국에 입국했다”면서 “김 제1위원장이 올해만 고위직 8명을 포함해 15명을 총살했다는 국가정보원의 지난달 주장도 이 탈북자가 제공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들어 3명의 고위직이 귀순했다”며 “모두 중국 등지에 출장 핑계로 나왔다가 우리 측에 먼저 탈출 의사를 전한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전시성 건설 사업이 늘어나며 외화벌이를 통한 자금 충당을 위해 고위직 간부가 직접 중국으로 나오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에 탈북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은 자금 확보 후 돌아가지만, 일부는 그곳에서 우리 측 인사와 접촉하거나 이미 탈북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우리 당국은 중국의 협조를 얻어 제3국을 통해 안전한 한국행을 마련해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김 제1위원장의 공포정치가 지속되는 한 고위직의 탈출 행렬은 줄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권력 엘리트가 김정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결속 이완 현상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김 제1위원장의 ‘숙청 칼날’이 일반 주민이나 중간 간부가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국정을 보좌하는 핵심 측근들을 겨냥하고 있어 권력 엘리트들의 이탈이 가속화될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아날로그&디지털 리포트] 디지털 단식 2주차

    [아날로그&디지털 리포트] 디지털 단식 2주차

    ■ 불통남 SNS 끊은 유대근 기자 퇴근길 만원 버스 안. 나는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의 일상을 훔쳐보고 있었다. 버스 천장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 앞에 앉은 승객의 스마트폰 카카오톡(카톡) 대화창을 내려다본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없이 살기 체험을 시작한 지 꼭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어디서 만날까’ 따위의 흔한 일상을 기웃거리는 걸 보면 금단현상이 심각한 게 분명했다. 체험 전 ‘SNS를 끊으면 내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예상했었다. 2주가 흐른 지금 예측은 얼마나 적중하고 있을까. 중간 점검 결과를 O(맞음), △(일부 맞음), X(틀림)로 표시해 봤다. ▲SNS를 안 하면 여유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O) : 매일 약 1시간 10분씩 들여다보던 SNS를 볼 수 없으니 그만큼 여유 시간이 생겼다. ▲‘SNS 잡담’이 사라져 업무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 잡담은 확실히 줄었지만 업무 효율성이 꼭 비례해 높아지지는 않았다. 더이상 카톡 알림음에 방해받지 않아 몰입도는 높아졌지만 SNS가 가져다준 편리성은 포기해야 했다. 간단한 회의 등 2명 이상이 함께 대화해야 할 때는 ‘카톡방’이 요긴한데 대신 전화, 문자를 이용하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졌다. ▲스마트폰 쓰는 시간이 줄어 만성적 목·어깨 통증이 줄 것이다(X) : 입사 후 만 7년간 꾸준히 혹사해 온 몸 상태가 불과 2주 동안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줄여서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 건 애초 무리였다. 현실과 가장 차이가 난 예측이 있었다. ‘SNS를 쓰지 않으면 지인들과 실제 만나 얘기하는 시간이 늘어 소통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SNS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2주 동안 가족·친구와 직접 만난 시간은 전혀 늘지 않았고 대화한 시간은 오히려 줄었다. 카톡 등 모바일 메신저를 끊은 뒤 비로소 깨달았다. 이 장치가 촌각을 다투며 사는 직장인의 생활 패턴에 딱 맞춰진 소통 도구였음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건 긴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약속을 잡고 만날 장소로 이동해 조금 이야기하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직장에서 허덕이다 퇴근해 1~2시간 TV 등을 보다 잠드는 일상은 이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2주간 나는 아내에게 애정 표현을 덜했고 부모님의 안부도 덜 물었으며 친구들과 수다도 거의 떨지 못했다. 카톡을 쓸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일이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민폐녀 SNS·스마트폰 끊은 송수연 기자 ‘스마트폰 좀 그만 보고 내 얼굴 좀 볼래?’ 스마트폰과 SNS 끊기에 들어간 지 9일째.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친구에게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말을 꾹꾹 눌렀다. 친구의 눈은 밀린 카카오톡과 메시지 등을 확인하는 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괜히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친구만 탓할 것도 아니었다. 옆 테이블로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 손님 세 명이 둘러앉아 아무 대화 없이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저들처럼 ‘스마트폰 타임’을 가졌겠지…. 친구들을 단체로 만날 때는 더 괴로웠다. 친구들이 최근 화제가 된 연예인 동영상을 스마트폰으로 볼 때는 궁금증에 애가 타는 것을 넘어 외딴섬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소외감이 들었다. “네 스마트폰을 보는 게 아니고 남이 하는 걸 곁눈질로 보는 건데 뭐 어때?”라는 친구들의 잔꾀에 마음이 동요하기도 했으나 간신히 유혹을 뿌리쳤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대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더 많이 바라보라’고 했지만, 100% 동의할 수가 없다. 막상 스마트폰과 ‘절교’하고 나니 함께하는 ‘재미’와 ‘공감’을 선사하는 스마트폰의 역할이 더 크게 체감됐기 때문이다. ‘공유’의 즐거움도 누릴 수가 없다. 유명 화가의 미술전을 관람하고 감상평과 사진을 SNS에서 나누고 싶었는데 오로지 나만의 경험으로만 간직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요새 “미안하다”는 말을 쓰는 일이 많아졌다. 며칠 전에는 약속 장소를 찾지 못해 몇 번씩 전화를 걸자 기다리다 못한 취재원이 나를 데리러 나왔다. 예전 같으면 내 위치와 도착할 곳 검색을 통해 도보로 가는 길까지 친절히 안내받았을 터였다.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하는 공지사항도 알 수가 없으니 상대방이 나에게만 일일이 전화나 문자로 따로 내용을 알려주는 ‘특별대접’을 했다. 이러다가 ‘아날로그 민폐녀’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한 친구는 “스마트폰 쓰는 시간이 줄어드니 그만큼 하루의 시간을 번 셈이 아니냐”고 위로했다. 맞는 말이었다. 전화 통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2시간50분씩 스마트폰을 쓰던 시간이 덤으로 생긴 셈이다. 하루가 한결 느슨해진 기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나의 스마트폰 안 쓰기 체험 시간도 느리게 가고 있다는 의미다. 남은 체험 기간 2주가 두 달처럼 느껴진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소외남 SNS·스마트폰·노트북 끊은 이두걸 기자 집에서 우리 가족의 주된 생활공간은 거실이었다. 그런데 2주 전 ‘디지털 단식’을 시작한 이후로 집안 풍경이 변모했다. 내가 거실 기피증 환자가 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가족에게는 “일 때문에”라고 얼버무리지만 이유는 따로 있다. ‘탁탁’ 하는 아내의 노트북 자판 치는 소리가 유발하는 유혹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검색은 둘째치고 이메일이라도 한번 확인했으면 하는 욕구가 몸속 깊은 곳에서 불쑥불쑥 올라온다. 토굴에서 면벽수행하는 수도승이 차라리 부러웠다. 파계의 유혹으로부터는 격리돼 있으니 말이다. 체험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디지털 세상’으로 귀순할까 하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자리가 줄었는데도 몸은 무거웠다. 난생처음 접하는 ‘절대적 박탈감’ 앞에서 몸과 마음은 한없이 무력해졌다. ‘중요한 일이면 이메일 대신 전화로 연락하겠지.’ 디지털 단식 체험을 시작할 때는 이렇게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며칠 전 한 출판사 편집자에게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이메일을 여러 번 보냈는데 왜 확인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처음 연락하는 쪽에서는 전화 대신 이메일을 활용하기 쉽다는 걸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전화를 끊었지만 맥이 풀린 뒤였다. 그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생활의 많은 부분이 ‘도전’으로 변모했다. 평소 금융거래는 주로 인터넷뱅킹을 이용했다. 이젠 단돈 100원을 송금하려 해도 꼼짝없이 은행을 찾아야 했다. 최근 1년 동안 현금자동입출금기(ATM)로 이체를 한 적이 없어 이체 한도도 70만원으로 줄여 놓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체 금액이 한도를 넘어갈라치면 ATM 대신 창구를 이용해야 했다. 운전할 때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쓰지 못하는 것도 큰 불편이었다. 운전하는 내내 전화로 받아 적은 경로와 표지판 등 주변을 응시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사라졌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안내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당초엔 2주 정도 지나면 아날로그적 삶에 익숙해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인내심이 임계치에 도달해 있다. 체험은 ‘2주밖에’가 아닌 ‘2주나’ 남아 있다. 기사를 원고지에 볼펜으로 쓰는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날로그 생활을) 체념할 것인가, 탈출할 것인가.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 귀순 북한군 장교, 아내 살인미수 혐의 재판 앞둬

    귀순 북한군 장교, 아내 살인미수 혐의 재판 앞둬

    이른바 ‘노크귀순’으로 유명한 전 북한군 장교가 아내를 살해하려 한 혐의로 기소돼 충격을 주고 있다. 19일 수원지법 등에 따르면 2008년 4월 귀순한 북한군 보위부 중위 출신 이철호(35)씨가 살인미수 혐의로 다음 달 7일 국민참여재판을 받는다. 이씨는 2012년 같은 탈북자인 A씨와 결혼하고 방송에서 북한의 실상 등을 전하며 얼굴이 알려졌지만 한국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벨기에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벨기에에서 사기를 당해 정착금을 포함한 전 재산을 날리고 귀국한 뒤부터 A씨를 흉기로 협박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 못한 A씨가 이혼을 요구해 소송 절차를 밟던 지난해 11월 27일 오후 9시 40분쯤 이씨는 경기도 평택의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같이 죽자”며 A씨를 목 졸라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기소된 이씨는 현재 살해 의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보위사령부 장교 출신 최초의 귀순자인 이씨는 탈북 당시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고 권총을 7발을 쏜 뒤 전방초소(GP)로 걸어와 노크를 해서 ‘호출귀순’, ‘노크귀순’ 등 유명세를 탔다. 특히 그가 꾸준히 방송에 출연해 북한 공작원의 실태와 귀순 군인에 대한 북한 당국의 태도를 알려왔다는 점에서 이번 살인미수 기소는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인사]서울시교육청

    ◇유치원 교원 및 교육전문직원 <원감에서 원장 승진> △노일유 백해옥 <교육전문직원(관급·사급)에서 원장 전직> △경인유 김기경△탑동유 김애순△마곡유 최봉옥 <단설유치원 원장 전보> △청계숲유 여명선△은곡유 이경희△길음유 한혜일 <교사에서 원감 승진> △서부교육지원청 김명나 김영일△성동광진교육지원청 류미숙△강남교육지원청 신현광 이향희△동부교육지원청 윤수지△성북교육지원청 이지현 <원감 청간 전보> △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광미△강서교육지원청 박신정 윤향금△북부교육지원청 이혜정 <교육전문직원(관급) 승진> △유아교육과 유아생활교육장학관 고문영 <원감에서 교육전문직원(사급) 전직> △강서교육지원청 박선자△유아교육과 박현주△북부교육지원청 위효실 <교육전문직원(사급) 전보> △남부교육지원청 김정숙△유아교육과 김태희△서부교육지원청 맹진아△동작관악교육지원청 황보영△동부교육지원청 황지현 ◇초등학교 교장·교감 <교감에서 교장 승진> △초당초 강인혜△장월초 강혜숙△홍제초 구자청△방학초 김동하△대영초 김명애△상현초 김복근△후암초 김연옥△공릉초 김영임△길음초 김인숙△개화초 김정규△구의초 김태순△대조초 나성대△용암초 박영주△미성초 박인숙△숭례초 배혜경△강신초 백경희△화일초 서성숙△신화초 서숙년△한산초 성희숙△염동초 양귀순△언남초 여문옥△개명초 오연주△덕암초 우종희△대신초 원용진△금천초 유철상△창도초 유춘만△전농초 윤경희△서이초 이경재△양동초 이경희△동원초 이만영△종암초 이명숙△신상계초 이봉애△영림초 이선기△문정초 이순애△고산초 이윤복△동의초 이주원△소의초 이해순△세륜초 임혜영△태릉초 임희수△은명초 장명희△사당초 장정애△세곡초 장태진△양재초 전애실△영서초 정경화△계남초 제양순△대치초 조근희△잠전초 주미자△송파초 주정희△공덕초 주천봉△언북초 채광수△원광초 최광옥△월계초 최동렬△반포초 최영주△홍파초 탁현주△증산초 한민희△천왕초 홍진용 <공모교장 임용> △동작초 강신택△불광초 김화△서빙고초 라민호△등명초 문진철△갈산초 박지원△수리초 윤성한△노원초 윤영진△고일초 이동섭△신용산초 이동재△월천초 이종탁△신암초 임현주△금산초 전동일△가동초 조병래△강명초 최영욱△하늘초 허선화 <공모교장에서 교장 임용> △영중초 고광덕△경동초 고옥순△돈암초 박종석△동자초 박진숙△역촌초 배영복△정목초 서진숙△양원초 송지석△삼각산초 심영면△두산초 유지영△상곡초 이홍흠△잠원초 홍춘성 <교장 중임·전보> △화곡초 고근식△중대초 김영동△은진초 김옥희△당현초 김월규△잠신초 김의경△오륜초 이종숙△이수초 조선영△염리초 지청환△난향초 채종길△금화초 강성현△창원초 김상호△조원초 안주형 <교육전문직(관급·사급)에서 교장 전직> △대도초 강학구△휘봉초 강세창△옥수초 고영규△개포초 박금은△보라매초 오장길△영도초 임동찬△안암초 송영미△중곡초 홍주희 <교사에서 교감 승진> △강남교육지원청 강명자△동부교육지원청 공희천△강남교육지원청 김경희△북부교육지원청 김관억△강서교육지원청 김광숙△성동광진교육지원청 김기연△중부교육지원청 김기인△서부교육지원청 김명순△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미영△중부교육지원청 김성섭△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송연△강남교육지원청 김순자△중부교육지원청 김영택△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용숙△남부교육지원청 김윤옥△성북교육지원청 김은숙△강서교육지원청 김은주△북부교육지원청 김정란△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정주△동작관악교육지원청 김종우△강남교육지원청 김찬영△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태인△동부교육지원청 김향미△남부교육지원청 김현숙△중부교육지원청 김혜숙△강남교육지원청 남순영△강서교육지원청 류록희△강서교육지원청 문헌주△강동송파교육지원청 박금란△서부교육지원청 박남숙△중부교육지원청 박명희△서부교육지원청 박우자△북부교육지원청 박은숙△강동송파교육지원청 박지성△강서교육지원청 박향연△강동송파교육지원청 배숙희△서부교육지원청 배영기△서부교육지원청 서은주△남부교육지원청 손만철△강동송파교육지원청 송성심△강동송파교육지원청 신미희△성북교육지원청 심향순△남부교육지원청 안금덕△서부교육지원청 안말례△동부교육지원청 엄길미△동작관악교육지원청 엄수경△강남교육지원청 오문환△성동광진교육지원청 오숙경△성북교육지원청 오연평△강동송파교육지원청 이경숙△강서교육지원청 이경애△강동송파교육지원청 이미란△동작관악교육지원청 이복임△강남교육지원청 이선옥△강서교육지원청 이수연△강남교육지원청 이승순△북부교육지원청 이승찬△북부교육지원청 이애숙△동작관악교육지원청 이영희△강동송파교육지원청 이옥영△동부교육지원청 이정래△남부교육지원청 이정식△성동광진교육지원청 이종윤△서부교육지원청 이행국△동부교육지원청 임규식△강서교육지원청 임채길△남부교육지원청 장선희△강동송파교육지원청 장은녕△성동광진교육지원청 장진혜△성동광진교육지원청 장현숙△강남교육지원청 전은미△동작관악교육지원청 정경미△강서교육지원청 정순복△강남교육지원청 정정남△동작관악교육지원청 정태성△동작관악교육지원청 정화희△북부교육지원청 조복주△강동송파교육지원청 조성숙△중부교육지원청 조인제△강동송파교육지원청 차승규△성북교육지원청 채정현△중부교육지원청 최병혜△강남교육지원청 최인숙△성동광진교육지원청 최천심△동작관악교육지원청 한미자△강서교육지원청 한숙경△동부교육지원청 허남희△강동송파교육지원청 허윤호△동작관악교육지원청 허혜련△강서교육지원청 현연옥△동작관악교육지원청 홍승란△북부교육지원청 황기봉△강서교육지원청 황위숙△남부교육지원청 황의정 <교육전문직원(사급)에서 교감 전직> △강서교육지원청 강민경△동부교육지원청 곽윤철△동작관악교육지원청 김희정△남부교육지원청 류인철△서부교육지원청 박현숙△북부교육지원청 안은주 이영관△성북교육지원청 주윤숙 <교감 청간 전보> △남부교육지원청 김종배△강동송파교육지원청 남영주△중부교육지원청 이정숙 ◇초등 교육전문직원 <교장에서 교육전문직원(관급) 전직> △성북교육지원청교육장 류제천△동작관악교육지원청 초등교육지원과장 김홍식△강동송파교육지원청 교육협력복지과장 양희두△초등교육과 기초학력·방과후학교장학관 유선주△학생생활교육과 상담·대안교육장학관 이상래 <교감·교사에서 교육전문직원(사급) 전직> △남부교육지원청 김장균 김영진△성북교육지원청 박현주 손윤득△강동송파교육지원청 배창빈△대변인 이병재△초등교육과 전용재△성동광진교육지원청 임정미△북부교육지원청 정천연△동작관악교육지원청 조미연△서부교육지원청 조영숙△강남교육지원청 한선혜 <교육전문직원(사급) 전보·전직> △강서교육지원청 강복란△동부교육지원청 고연숙△교육연구정보원 김혜정△교육혁신과 라향숙△남부교육지원청 문성현△감사관 박상준△교육연수원 배현정△중부교육지원청 송남규△강남교육지원청 이경수△정책·안전기획관 이경아△초등교육과 이정훈△동부교육지원청 임태상△성북교육지원청 조순래△초등교육과 최선철△성동광진교육지원청 허진△교육연수원 현선희 ◇교육부 교류(전출)△교육부 이은정 ◇특수학교(초등) 교원 및 교육전문직원 <교감에서 교육전문직원(관급) 전직> △학생생활교육과 특수교육장학관 염유민 <교감 전보> △정민학교 함미애 ◇중등 교장·교감 <교감(공모교장)에서 교장으로 승진> △경복고 이원휘△신목고 정상윤△인헌고 박인규△중화고 장정찬△효문고 김진호△불광중 박춘구△풍납중 김병오△문창중 모상기△광남중 이명호△서초문화예술정보학교 강희철△종로산업정보학교 조중기△장안중 황병근△전일중 조풍호△대림중 최진흥△대영중 김기숙△문래중 김정희△영림중 김희자△신창중 민성기△중원중 심상문△덕수중 신미현△가락중 박동근△명일중 김명숙△문정중 박연숙△송파중 고화영△천일중 정연수△공진중 박용수△마곡중 김영훈△염경중 고화순△화원중 이재춘△대왕중 윤영단△대치중 김명옥△방배중 박미정△언북중 김정근△당곡중 박영창△광장중 곽수근△광진중 김출배△양진중 장기동△수송중 김승수△수유중 박상근△월곡중 오병웅△인수중 김순채 <공모교장> △남성중 장학순△숭곡중 유신모△경동고 이광진△경일고 오승모△대영고 우종선△원묵고 유대환 <교장중임> △가재울고 선영규△경인고 김철환△구로고 김성수△구일고 윤용수△노원고 이경석△서울방송고 양한석△선린인터넷고 김정일△송파공업고 이교식△신림고 이덕기△동대문중 김인화△상신중 오정호△노곡중 김영문△신방학중 박한구△을지중 전인호△중평중 고래억△잠실중 허성일△청담중 윤영준△봉림중 김미혜△자양중 김신△행당중 백남교 <교육전문직원(관급)에서 교장으로 전직> △경기고 박건호△반포고 김동식△명일여고 임영호△압구정고 김영윤△연서중 오희석△용강중 한봉희 <교장 전보(전보유예 포함)> △성동공업고 문수남△상도중 김인회△개포고 김응갑△광남고 김재홍△서울금융고 박상철△아현산업정보학교 방승호△잠신고 허재환△한강미디어고 박진관△홍은중 류명호△천호중 김영숙△신화중 이영숙 <교사에서 교감으로 승진> △삼각산고 신정록△선사고 김춘자△언남고 강은숙△동부교육지원청 박성재△동부교육지원청 유정근△서부교육지원청 양진국△남부교육지원청 김용미△남부교육지원청 박세란△남부교육지원청 이우열△남부교육지원청 이한구△북부교육지원청 김기옥△북부교육지원청 안재학△북부교육지원청 유강우△북부교육지원청 이해도△강동송파교육지원청 고원철△강동송파교육지원청 김현숙△강동송파교육지원청 류정구△강동송파교육지원청 민경익△강서교육지원청 김인서△강서교육지원청 오성근△강서교육지원청 정옥환△강서교육지원청 최용제△강서교육지원청 최희경△강남교육지원청 심미경△강남교육지원청 이동석△동작관악교육지원청 김상규△동작관악교육지원청 김용완△동작관악교육지원청 박명숙△성동광진교육지원청 박선자△성동광진교육지원청 조정기△성북교육지원청 강경림△성북교육지원청 윤형택△성북교육지원청 이성열 <교육전문직원에서 교감으로 전직> △가락고 안재민△강일고 이표상△경기고 주소연△경동고 백운진△도봉고 송현섭△둔춘고 박정란△서울산업정보학교 조민희△성동공업고 신상열△월계고 김영산△한성과학고 김규상△서부교육지원청 양승욱 조상주△강동송파교육지원청 박숙희△강서교육지원청 이수만△강남교육지원청 최정례△성북교육지원청 류민석 <교감전보·전보유예> △가재울고 문혜영△강서공업고 이주암△경기고 이재억△노원고 채현구△누원고 편무섭△서울방송고 양승진△서울전자고 임성빈△선유고 하태진△수락고 이경희△신도고 복영숙△신림고 오석종△영신고 박정희△중경고 이점순△창덕여자고 류상국△태릉고 이세연△동부교육지원청 이인구△동부교육지원청 이재경△서부교육지원청 김성신△서부교육지원청 이규명△서부교육지원청 이신미△남부교육지원청 권성근△남부교육지원청 김두섭△남부교육지원청 박경실△남부교육지원청 박노용△남부교육지원청 오애영△남부교육지원청 유양옥△남부교육지원청 이준용△남부교육지원청 조규태△남부교육지원청 한재근△북부교육지원청 박진석△중부교육지원청 박래숙△중부교육지원청 박종근△강동송파교육지원청 백남이△강동송파교육지원청 이경률△강동송파교육지원청 이상일△강서교육지원청 강희정△강서교육지원청 기규서△강서교육지원청 박영란△강서교육지원청 박혜은△동작관악교육지원청 오창석△성동광진교육지원청 노영자△성동광진교육지원청 손원석△성동광진교육지원청 전찬호△성동광진교육지원청 황용련△성북교육지원청 박의동△성북교육지원청 송선화△성북교육지원청 안정찬 ◇중등 교육전문직원 <교육전문직(관급) 전보> △동부교육지원청 중등교육지원과장 정대영 <교장에서 교육전문직(관급)으로 전직> △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 박문수△강동송파교육지원청 교육장 정정옥△학생생활교육과장 나징기△강서교육지원청 교육지원국장 정정혜△중부교육지원청 중등교육지원과장 박수찬 <교감에서 교육전문직(관급)으로 전직> △교육혁신과 학교혁신기획·운영담당 장학관 조호규△교육혁신과 과학·영재·정보화교육담당 장학관 김윤경△강서교육지원청 중등교육지원과장 송형세 <교사에서 교육전문직원(사급)으로 전직> △교육연구정보원 김창영△교육연구정보원 박윤정△교육혁신과 최정윤△민주시민교육과 홍승균△동부교육지원청 정종호△서부교육지원청 안성은△서부교육지원청 홍정림△북부교육지원청 조기식△중부교육지원청 장인혜△중부교육지원청 허현정△강동송파교육지원청 안명심△강서교육지원청 김선호△강남교육지원청 한미정△동작관악교육지원청 김종현△성동광진교육지원청 박창래△성동광진교육지원청 김선옥 <교육전문직원(사급) 전보·전직> △교육연구정보원 김향숙△교육연구정보원 박경신△교육연구정보원 윤금숙△교육연수원 김양수△교육연수원 정나미△학생교육원 변영수△감사관 김성준△정책·안전기획관 김종미△교육혁신과 박미숙△교육혁신과 홍경희△초등교육과 서근주△중등교육과 김부용△중등교육과 선미향△중등교육과 양정순△중등교육과 홍숙정△학생생활교육과 양한재△진로직업교육과 김용국△진로직업교육과 이화영△체육건강과 강순원△체육건강과 김석균△동부교육지원청 권미숙△동부교육지원청 이지수△남부교육지원청 정인숙△북부교육지원청 박정숙△북부교육지원청 정동회△강동송파교육지원청 전국△강서교육지원청 박병용△강남교육지원청 최성희△성동광진교육지원청 조흠관△성북교육지원청 정영순 <교육부·국립학교 및 기관 전출입> △교육부 김대원△국제교육원 한덕주△은평고 교장 이동환△덕산중 김진태△중부교육지원청 임길선△강서교육지원청 박재철△동작관악교육지원청 윤유숙 ◇중등 특수 교장·교감 <교육전문직원(관급)에서 교장으로 전직> △서울정인학교 김형근 <교육전문직원(사급)에서 교감으로 전직> △서울경운학교 이윤동 <교감 전보> △서울정진학교 김현진
  • [인사]

    ■미래창조과학부 우정사업본부 ◇지방우정청장△서울 김영수△경인 백기훈△부산 김기덕△충청 이승재△경북 이병철 ■방위사업청 △기획조정관 강은호 ■서울시교육청 ◇초등학교 교장·교감 <교감에서 교장 승진>△초당초 강인혜△장월초 강혜숙△홍제초 구자청△방학초 김동하△대영초 김명애△상현초 김복근△후암초 김연옥△공릉초 김영임△길음초 김인숙△개화초 김정규△구의초 김태순△대조초 나성대△용암초 박영주△미성초 박인숙△숭례초 배혜경△강신초 백경희△화일초 서성숙△신화초 서숙년△한산초 성희숙△염동초 양귀순△언남초 여문옥△개명초 오연주△덕암초 우종희△대신초 원용진△금천초 유철상△창도초 유춘만△전농초 윤경희△서이초 이경재△양동초 이경희△동원초 이만영△종암초 이명숙△신상계초 이봉애△영림초 이선기△문정초 이순애△고산초 이윤복△동의초 이주원△소의초 이해순△세륜초 임혜영△태릉초 임희수△은명초 장명희△사당초 장정애△세곡초 장태진△양재초 전애실△영서초 정경화△계남초 제양순△대치초 조근희△잠전초 주미자△송파초 주정희△공덕초 주천봉△언북초 채광수△원광초 최광옥△월계초 최동렬△반포초 최영주△홍파초 탁현주△증산초 한민희△천왕초 홍진용<공모교장 임용>△동작초 강신택△불광초 김화△서빙고초 라민호△등명초 문진철△갈산초 박지원△수리초 윤성한△노원초 윤영진△고일초 이동섭△신용산초 이동재△월천초 이종탁△신암초 임현주△금산초 전동일△가동초 조병래△강명초 최영욱△하늘초 허선화<공모교장에서 교장 임용>△영중초 고광덕△경동초 고옥순△돈암초 박종석△동자초 박진숙△역촌초 배영복△정목초 서진숙△양원초 송지석△삼각산초 심영면△두산초 유지영△상곡초 이홍흠△잠원초 홍춘성<교장 중임·전보>△화곡초 고근식△중대초 김영동△은진초 김옥희△당현초 김월규△잠신초 김의경△오륜초 이종숙△이수초 조선영△염리초 지청환△난향초 채종길△금화초 강성현△창원초 김상호△조원초 안주형<교육전문직(관급·사급)에서 교장 전직>△대도초 강학구△휘봉초 강세창△옥수초 고영규△개포초 박금은△보라매초 오장길△영도초 임동찬△안암초 송영미△중곡초 홍주희◇중등 교장·교감 <교감(공모교장)에서 교장으로 승진>△경복고 이원휘△신목고 정상윤△인헌고 박인규△중화고 장정찬△효문고 김진호△불광중 박춘구△풍납중 김병오△문창중 모상기△광남중 이명호△서초문화예술정보학교 강희철△종로산업정보학교 조중기△장안중 황병근△전일중 조풍호△대림중 최진흥△대영중 김기숙△문래중 김정희△영림중 김희자△신창중 민성기△중원중 심상문△덕수중 신미현△가락중 박동근△명일중 김명숙△문정중 박연숙△송파중 고화영△천일중 정연수△공진중 박용수△마곡중 김영훈△염경중 고화순△화원중 이재춘△대왕중 윤영단△대치중 김명옥△방배중 박미정△언북중 김정근△당곡중 박영창△광장중 곽수근△광진중 김출배△양진중 장기동△수송중 김승수△수유중 박상근△월곡중 오병웅△인수중 김순채<공모교장 임용>△남성중 장학순△숭곡중 유신모△경동고 이광진△경일고 오승모△대영고 우종선△원묵고 유대환<교장 중임>△가재울고 선영규△경인고 김철환△구로고 김성수△구일고 윤용수△노원고 이경석△서울방송고 양한석△선린인터넷고 김정일△송파공업고 이교식△신림고 이덕기△동대문중 김인화△상신중 오정호△노곡중 김영문△신방학중 박한구△을지중 전인호△중평중 고래억△잠실중 허성일△청담중 윤영준△봉림중 김미혜△자양중 김신△행당중 백남교<교육전문직원(관급)에서 교장으로 전직>△경기고 박건호△반포고 김동식△명일여고 임영호△압구정고 김영윤△연서중 오희석△용강중 한봉희<교장 전보(전보유예 포함)>△성동공업고 문수남△상도중 김인회△개포고 김응갑△광남고 김재홍△서울금융고 박상철△아현산업정보학교 방승호△잠신고 허재환△한강미디어고 박진관△홍은중 류명호△천호중 김영숙△신화중 이영숙◇중등 특수 교장·교감 <교육전문직원(관급)에서 교장으로 전직>△서울정인학교 김형근
  • 세월도 쉬어가던 섬… 지는 해 배웅하는 너

    세월도 쉬어가던 섬… 지는 해 배웅하는 너

    교동도는 은둔의 섬이었다. 인천 강화도를 거미줄처럼 잇던 도로들도 바다 너머 교동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 데도 그랬다. 요즘엔 달라졌다.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에 교동대교가 놓였다. 그 덕에 여행 목적지도 북녘땅 가까운 곳까지 한껏 확장됐다. 다리가 놓이기 전, 외부 세계와 단절되다시피 했던 교동도엔 그 간극만큼이나 남아 있는 보물들이 많다. 낡고 수수한 풍경을 따라 겨울 볕 즐기기 딱 좋다. ●도로가 닿지 못하던 곳… 대교 생기며 뭍에 편입 강화도 서쪽 끝. 걸어서는 갈 수 없었던 곳으로 다리가 놓였다. 길이 3.44㎞에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대교다. 이 다리 덕에 바다 너머 교동도가 자연스레 뭍으로 편입됐다. 예전엔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교동도로 들어와야 했다. 그나마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는 서너 시간씩 배 운항이 정지됐고, 물이 덜 찼을 땐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까지 15분이면 닿을 뱃길을 1시간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섬이 교동도였다. 교동대교 앞에 서면 강 양쪽으로 철조망이 펼쳐져 있다. 북녘땅이 그리 멀지 않다는 걸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다. 교동도 서단의 말탄포에서 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까지는 직선거리로 2㎞ 정도에 불과하다. 바다 폭이 좁으니 북한 주민이 헤엄쳐 넘어와 귀순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지난여름에도 북한 주민 2명이 그랬다. 이처럼 북한과 가깝다 보니 교동도 전체가 민통선 지역이다. 당연히 출입절차도 마련돼 있는데,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출입신청서와 신분증만 제출하면 된다. 다만 출입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기준이다. 검문소 초병은 “오후 6시 30분 이전에 나와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익일(다음날) 오전 6시 30분 이후에나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말은 그렇다지만, 설마 늦었다고 섬에서 나오는 걸 막으랴. 한데 초병의 다부진 자세로 미뤄보건대,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생각했다간 꼼짝없이 하룻밤을 묵는 낭패를 당하지 싶다. ●‘철새 놀이터’ 고구저수지·교동읍성 등 명소 교동대교를 건너면 길은 곧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고구리, 왼쪽은 읍내리 방면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지만, 고구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섬을 한 바퀴 도는 게 일반적이다. 다리 건너 만나는 첫 번째 명소는 고구저수지다. 수도권 낚시인들 사이에서 ‘대물터’로 입소문 난 곳이다. 겨울이면 수많은 겨울철새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 도시 사람들은 흔히 섬사람들이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갈 것처럼 생각한다. 한데 교동도는 넓다.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특히 삼선리 일대 개시미벌을 보면 생각이 싹 바뀐다. 들녘이 어찌나 너른지, 꼭 전북 김제의 만경평야를 보는 듯하다. 지금은 강화군에 딸린 면소재지로 전락했지만 옛 교동도는 독립된 군현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교동현(喬桐縣)이었다가 인조 7년(1629)엔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했다. 강화군에 완전히 병합된 건 일제강점기인 1914년이다. 교동도 남쪽의 남산포엔 삼도수군통어영도 있었다. 경기, 황해, 충청도의 해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한반도가 두 동강 나지 않았다면, 사실 수군의 중심지가 되기에 적합한 위치가 교동도다. ●근대사 풍경, 밀려든 관광객에 얼마나 지켜질지 교동도에 들면 시간이 묻혀 있다는 걸 단박에 느끼게 된다. 가까운 근대사와 옛 고대사가 뒤섞여 있는 느낌이다. 교동대교가 세워진 이후 주말에만 4000여대의 차량이 쏟아져 들어 온다는데, 이런 낡고 투박한 풍경이 얼마나 더 지켜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오래된 역사를 되짚자면 교동읍성을 먼저 찾는 게 순서다. 도읍인 한양을 지키는 성이 도성이고, 지방 고을 읍에 세워진 게 읍성(邑城)이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쌓은 석성이다. 동·남·북 세 개의 문 가운데 현재 남문(유량루)의 홍예문만 남았다. 아치형 돌문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그 자태가 아름다우면서도 견고하다. 한데 폐허 위에 서면 깊은 한숨만 나온다. 주변 성벽은 허물어졌고 돌들은 사라졌다. 출처와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사금파리 조각들도 홍예문 위쪽에 널려 있다. 하지만 홍예문 주변엔 사람의 접근을 막는 펜스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들고나기 쉽지 않은 섬이었을 테니 성벽을 이루던 돌들도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리고 돌들이 여전히 민가의 담장을 이루며 남아 있다는 거다. 교동읍성 주변에 황색 대룡이 나타났다는 황룡우물, 경기수영 터, 연산군 유배지(추정) 등 볼거리가 많다. 시간 너머의 흔적을 따라 찬찬히 둘러보길 권한다. 교동읍성에서 바다로 향하다 보면 길이 끊겼을 법한 곳에서 난데없이 작은 포구가 나온다. 동진포다. 고려시대부터 뭍과 교동도를 이어주던 나루였다는 곳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나루터는 교동읍성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 한양과 인천, 해주 등을 오가는 관문 노릇도 담당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먼저 교동도로 와서 바닷길의 일기 등을 살핀 후 출항했다고 한다. 사신들의 임시 숙소인 ‘동진원’이라는 객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이 제법 장관이었다는데, 이 장면이 바로 교동팔경의 하나인 동진송객(東津送客)이다. 조선시대엔 각종 조운선과 화물선 등이 오갔고, 한국전쟁 때도 수많은 배들이 들락날락했다던 동진포지만 지금은 배 한 척 없는 썰렁한 나루터로 남았다. 시멘트 포장 아래 조선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11명 ‘왕족의 유배지’… 한국전쟁 피란민 집결지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신하들과 달리 왕족은 가까운 곳에 격리시켰다. 늘 그들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한양과 가까우면서 조류가 급해 유배지로서 최적지였다. 고려 21대왕 희종, 조선시대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 가운데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읍내리에 연산군 적거지가 조성돼 있다. 대룡시장은 근대의 시간들이 갇혀 있는 공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로 날아간 듯한 낡은 풍경과 만날 수 있다. 후줄근한 간판과 낡은 유리문, 옛 포스터 등을 보자니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향수가 현재로 소환되는 듯하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계란 푼 쌍화차 얻어 마실 수 있는 다방도 여태 남아 있다. 대룡시장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의 집결지였다. 전쟁 끝나면 얼른 돌아가려고 고향과 가까운 대룡리 일대에 진을 쳤다. 하지만 닫힌 문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열리지 않았고, 고향 그리던 이들은 대부분 생을 마감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리를 떴다. 골목은 짧다. 채 500m도 못 된다. 하지만 더께로 쌓인 시간은 도무지 방문객의 발걸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여행수첩 <지역번호 032>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48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교동대교가 나온다. 교동도 출입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교동도에서 숙박하지 않을 경우 교동대교 앞 군 검문소에서 나오는 시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교동면사무소 932-5001.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교동도까지 운행하는 18번 버스가 신설됐다. 선진버스 933-6801. → 맛집 대룡시장 쪽에 먹거리가 풍성하다. 해성식당(932-4111)과 대풍식당(932-4030)이 그중 알려졌다. 오래된 ‘다방’도 두 곳 영업하고 있다. → 잘 곳 대룡시장에 교동파크(932-4164)라는 작은 모텔이 있다. 강화여인숙(932-4067) 등 오래된 숙박업소도 있다. 고구저수지 인근 고구촌펜션민박(933-8668), 난정저수지 주변 수정민박(934-8929) 등 민박집도 운영 중이다. 글 사진 강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김희정 장관, 포럼 본서 “가족친화경영을 트렌드로”

    김희정 장관, 포럼 본서 “가족친화경영을 트렌드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19일 서울 종로 그랑서울 나인트리컨벤션에서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을 초청, ‘국가의 미래는 일·가정 양립과 양성평등 사회로부터’를 주제로 제32회 포럼 본(forum BORN)을 개최했다. 김 장관은 이날 특강에서 인터넷과 로봇 등이 생겨나고 백과사전 책자 등이 사라진 가운데 우리나라의 출산율과 경제성장률 등이 낮아지고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현실에서 국가의 미래는 여성인력 활용에 달렸고 이를 위해 일·가정 양립과 양성평등 사회 구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채용(Recruit), 경력 유지(Retain), 재취업(Re-start), 여성대표성 제고(Representation) 가운데 채용은 여성이 남성을 따라잡아 여성천하가 이미 이뤄진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키지만 나머지는 많이 뒤쳐져 있기 때문에 경력 유지와 재취업에 더 신경을 써서 대표성을 높일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 국민소득의 상관관계가 높아서 우리도 여성고용률을 높여야 하고, 가족친화기업의 이직률과 매출액 입사지원율 등이 비친화기업과 차이가 커서 가족친화경영이 기업의 트렌드가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내년부터는 비정상의 정상화 과제로 동화 같은 작은 결혼식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고, 사회 저명인사들의 주례 재능기부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아빠를 찾을 때는 엄마가 없을 때라며 아빠의 역할 회복을 촉구하고, 1개월 동안 통상임금의 100%를 받으며 휴직할 수 있는 ‘아빠의 달’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으면 파파 쿼터제, 자동육아휴직제 등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한국 최초로 공개 입양된 어린이들로 구성된 한국입양어린이합창단이 오프닝 이벤트를 장식했다. 입양의 중요성과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 부정적인 입양하는 부모들과 사회에 감동과 희망의 사다리 역할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메조소프라노 김수정씨가 8명의 입양어린이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2006년 출범한 합창단이다. 김행 양평원장은 “내년부터는 8인의 포럼 본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양평원은 지원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서 “많은 여성리더들이 포럼본 네트워킹을 통해 대한민국의 희망의 새 시대를 여는 리더가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포럼 본 운영위원으로는 김귀순 한국여성세무사회장, 김성옥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김성형 한국협상아카데미 대표, 오세임 OCBC뱅크 본부장, 이은주 한국여성관세사협회장, 최대원 한올테크놀로지 상무, 황상섭 한국 페링 대표 등이 위촉됐다. 이날 포럼에는 이명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 조희진 서울고검 차장검사, 최정숙 포커스컴퍼니 대표, 김덕자 하나은행 전무, 이금형 전 부산지방경찰청장, 이윤자 광주여성재단 대표이사 등 여성리더들과, 여성리더 서포터즈 역할을 약속한 남성리더 김교식 전 여가부 차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포럼 본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미래성장 동력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제시하기 위해 2010년 출범해 우리사회 최고위 여성들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주혁 선임기자 happyhome@seoul.co.kr
  • [서울&평양 리포트] 北·러 新밀월시대 계기로 본 ‘백두혈통’과 러시아

    [서울&평양 리포트] 北·러 新밀월시대 계기로 본 ‘백두혈통’과 러시아

    1991년의 어느 날. 김일성 북한 주석은 아들 김정일 노동당 조직비서부터 문건 하나를 받아 보고 경악했다. 이는 당시 붕괴 수순을 밟고 있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 결탁된 세력이 군부 내에서 반정부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내용이다. 김정일은 같은 해 12월 24일 김 주석으로부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위를 넘겨받았다. 김정일은 소련이 붕괴한 이듬해인 1992년 ‘프룬제 사건’으로 알려진 소련 유학파 출신 군 간부 숙청을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북한은 1985년부터 프룬제 아카데미아 등 20개가 넘는 소련 군사대학에 700명 가까운 군 간부들을 유학 보냈다. 북한 내부에 친소련파가 득세하길 원하는 소련으로서도 이들을 포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실제 포섭된 인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를 부풀려 군권을 장악하는 계기로 활용한다. 소련의 몰락을 지켜본 국가와 군의 동요를 막기 위해 유학파 출신들을 제물로 ‘충격요법’을 쓴 셈이다. 이는 냉전 종식 당시 중국밖에 우방이 남지 않은 북한 ‘백두혈통’ 김씨 일가와 러시아의 애증관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프룬제 사건’으로 소련 유학파 대대적 숙청한 김정일 “정치는 입이 아닌 발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2014년 11월 18일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러시아를 방문했고 러시아는 20일 푸틴 대통령이 김 제1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양국 간 군사교류 확대와 공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지난 2월 러시아가 100억 달러 상당의 채무를 탕감해 주며 시작된 양국 간 우호 분위기는 경제, 사회, 군사 분야 등에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경제협력으로 지난해 러시아와 북한의 교역량은 전년 대비 37.3%% 늘어난 1억 400만 달러로 나타났다. 양국은 2020년까지 교역량을 10억 달러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최근 핵과 인권 문제로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는 북한이 ‘혈맹’인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인 점과 대조적이다. 전통적인 자원부국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사태이후 국제사회로부터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옛 우방 북한과 손을 잡는 모양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생존’에 기반을 둔 대러 접근을 한다고 보면 러시아는 안보 재편과 세계경제 불황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서 “러시아는 극동 시베리아 지역에서 대규모 국책사업이 필요한 상황이고 북한은 이를 수행하기에 매우 중요한 대상”이라고 분석했다. 북·러 밀착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오랜 인연을 돌아보면 이해가 빠르다. 북한 정권의 중국,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는 각각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에서 비롯된다. 1930년대 만주 일대의 항일 빨치산 조직들은 중국 공산당에 합류해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돼 중국 공산당과 공동 항일전선을 펼쳤다. 김일성도 그 일원으로 만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1940년 일제의 빨치산 토벌이 가혹해지자 김일성과 최현(최룡해의 아버지)은 소련의 하바롭스크로 이동해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소련 극동군 88국제여단에 배속돼 5년 동안 복무한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최용건·김책 등 다른 항일유격대 지도자과 우의를 다졌고 이들 항일 빨치산 1세대는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소련군 등에 업고 출발한 北… 中·러 사이 ‘줄타기 외교’ 1945년 9월 소련군 대위 군복을 입고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당시 38도선 이북을 통치한 소련 군정의 도움으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이는 권력 장악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1948년 소련을 등에 업고 출발한 북한 정권은 같은 해 10월 12일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하지만 북한의 외교는 북·중 관계와 중·소 관계의 직접적 영향을 받으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사상 논쟁이 격화되고 1969년 양국 간 국경 충돌이 발생하자 북한은 자구책으로 ‘자주 외교’를 선언하며 양 대국(大國)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내세운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실각한 1964년까지는 소련 지도부의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을 전개한 중국이 북한 지도부를 ‘기회주의’로 몰아붙이자 북한도 중국 공산당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다시 소련에 밀착해 군사원조와 경제지원을 받는 데 주력한다. 이후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이 종료됨에 따라 북·중 관계가 풀리면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을 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됨과 함께 이를 계승한 러시아는 1995년 9월 ‘조·러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더는 연장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북·러 관계는 과거의 군사동맹 관계에서 일반적인 국가관계로 전환됐다. 이때부터 북한과 러시아는 경제협력 파트너로서의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러 양국은 결국 1999년 3월 평양에서 ‘조·러 우호선린 협조조약’에 가서명하고 2000년 2월 정식 서명한다. 이로써 소련 붕괴 이후 한동안 냉각됐던 관계는 2000년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다음해 7∼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정상적인 관계로 복원됐다는 평가다. 북·러 관계에서 북한이 전통적으로 가장 관심을 둔 분야는 군사협력이다.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집권 시기까지 중국의 국력이 러시아를 앞섰음에도 북한군 내에는 기술 수준이 떨어진다고 무시해 왔던 중국보다 러시아의 전차와 항공기 등 무기체계에 대한 경이로움이 남아 있다. 북한 공군 조종사 출신의 귀순자 이웅평 대령은 생전 “김일성은 1970년 소련으로 갈 때 공군 조종사들을 데려가 미그기 등 전투기들을 몰고 왔다”고 증언했다. ●“북·러 밀월은 中 자극하려는 의도” 회의적 반응도 북한은 1991년 소련 해체 때 러시아 ‘극동군관구’에서 탱크와 비행기 등 전술무기들을 싼값에 구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군 산하 ‘새별’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 1998년 탈북한 한 인사는 “소련 붕괴 직전 부패한 소련군 장성들을 설득해 탱크와 비행기 등을 폐기 처리하는 방식으로 원산항과 흥남항을 통해 들여왔다”면서 “구입 대금은 대부분 위조 화폐인 ‘슈퍼 달러’와 위조 양주 및 위조 담배 등으로 처리했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은 음성적인 거래에서 대부분 ‘슈퍼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또한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 가지 중요한 교훈도 얻게된다. 혁명의 전위군이자 최후 보루인 군이 당의 지시에 반기를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다. 이는 1993년 국방위원장으로 취임한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강화하고 ‘프룬제 사건’을 급조한 이유로 평가된다. 일각에서는 최근 북·러 밀월에 대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줄타기 외교’를 본받아 중국을 자극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김정은식 줄타기 외교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1960∼1970년대와 달리 최근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 분야에서 적극 협력하고 있으며 반(反)서방 정서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만큼 북한이 양측 모두로부터 이득을 얻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반기문 꿈꾸는 붉은 대륙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반기문 꿈꾸는 붉은 대륙

    지난달 23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전권회의 본회의장.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최고 의결기구인 ITU의 수장을 뽑는 자리인 만큼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무총장 후보로 단독 출마한 자오허우린(趙厚麟) 사무차장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됐다. 자오는 158표 중 152표의 찬성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그는 내년 1월부터 4년간 ITU 운영과 의사결정 과정을 총괄하게 된다. 과거 서구 선진국들이 주도한 ITU의 통신정책 결정 과정에 중국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전망이다. 중국이 국제기구 최고위직을 속속 접수하고 있다.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나서서 측면 지원을 하고 있는 덕분이다. 지난해 6월 리융(李勇) 재정부 부부장이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 사무총장에 오른 데 이어 그해 8월 이샤오준(易小準) 상무부 부부장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 9월 장샤오강(張曉剛) 안강(鞍鋼)그룹 총경리(사장)가 국제표준화기구(ISO) 의장, 11월에 하오핑(?平) 교육부 부부장이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총회 의장에 각각 선출돼 1년반 만에 5명이 국제기구 최고위직에 올랐다. 수창허(蘇長和) 상하이 푸단(復旦)대 국제관계·공공사무학원 교수는 “중국인들이 국제기구 최고위직에 진출하는 것은 국제 문제가 중국의 참여 없이는 원만하게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면서 “앞으로 더 많은 중국인들이 국제기구의 요직에서 활약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산둥(山東)성 지닝(濟寧) 출신인 리융 UNIDO 사무총장은 회계 전문가이다. 톈진(天津)시 난카이(南開)대 영어과를 졸업한 뒤 재정부 재정과학연구소에서 회계학 석사를 받았다. 1984년 재정부 재정과학연구소 외국재정연구실 부주임을 거쳐 유엔 주재 중국대표부에서 1등서기관 등을 지냈다. 세계은행 고문 등을 지낸 뒤 재정부로 복귀해 세계은행사(司·국)장 등을 역임했다. 재정부 부부장 때 정부의 지원 사격을 받아 개발도상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하는 UNIDO 수장에 올랐다. 이샤오준 WTO 사무차장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출신으로 통상 분야 전문가이다. 1977년 베이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베이징시 경제연구소를 거쳐 1987년 주미 중국대사관 등에서 통상 및 대외무역 업무를 주로 맡았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은 “상무부 부부장을 지내는 등 이 사무차장이 통상 분야에 경험이 풍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장샤오강 ISO 의장은 야금기술 전문가이다. 1977년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대 금속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베이징강철연구총원에서 금속재료 및 열처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안강강철연구소 소장조리(보), 안강기술개발부 부장 등을 거쳐 안강그룹 총경리를 지내 이론과 현장에 두루 밝다. 그는 “중국인이 ISO 의장에 당선된 것은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해 세계 2대 경제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라면서 “과거 선진국들이 표준을 제정하면 개발도상국이 그저 따라가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개도국도 표준화 작업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은 2015년부터 의장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산둥성 칭다오(靑島) 출신인 하오핑 유네스코총회 의장은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부터 베이징대 외사처, 총장조리 등을 거치며 1999년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도 받은 교육행정 전문가이다. 베이징대 부총장과 베이징외국어대 총장, 교육부 부부장을 역임했다. 중국인이 국제기구의 최고위직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한 직후부터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며 영향력이 커지자 국제 사회에서 점점 더 중국인의 참여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라는 게 베이징 외교가의 분석이다. 2003년 2월 스주융(史九鏞)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 부소장이 재판소장에 선출되면서 중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기구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해 12월 우젠민(吳建民) 전 중국외교학원장이 세계박람회기구(BIE) 의장에 당선됐고 2005년 10월에는 장신성(章新勝) 교육부 부부장이 유네스코 이사회 의장에 선출됐다. 2006년 11월에는 홍콩의 마거릿찬(陳馮富珍) 보건부 장관이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고(故) 이종욱 총장의 뒤를 이은 그녀는 장관 재직 당시 세계 최초로 발생했던 H5N1 조류 인플루엔자에 대처하기 위해 홍콩 내 가금류 전체 150만 마리에 대한 살처분 결정을 내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2007년 2월 사쭈캉(沙祖康) 스위스 주재 중국대사가 유엔 사무차장에 임명됐다. 직업외교관 출신인 그는 2010년 9월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술주정을 한 사실이 확인돼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장웨자오(張月?) 변호사는 2007년 5월 어렵사리 WTO 대법관에 올랐다. 그녀는 특히 WTO 대법관으로 선출될 당시 타이완의 거부권 행사로 어려움을 겪었다. 타이완은 중국인이 선출되면 타이완과 관련된 문제에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한 탓이다. 2008년 8월에는 린이푸(林毅夫) 베이징대 교수가 세계은행 부총재에 임명됐다. 타이완 귀순 용사 출신인 그는 대표적인 개혁파 경제학자이다. 타이완의 최전방인 진먼다오(門島)에서 군복무 중 1979년 타이완 군사기밀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귀순했다. 미국으로 유학,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베이징대 교수를 지냈다. 현재 그가 맡은 국무원 참사는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경제자문역이다. 2009년 11월에는 허창추이(何昌垂)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아시아·태평양지구 대표가 FAO 사무차장에 임명됐다.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대를 졸업한 허는 유엔기구 전문관료 출신이다. 2011년 7월에는 주민(朱民)이 IMF 부총재로 임명됐다. 주는 푸단대를 졸업한 뒤 미 존스홉킨스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와 인민은행 부행장을 지냈다. khkim@seoul.co.kr
  • [커버스토리] “월북하면 100억” 달콤한 유혹… ‘USB에 한국 가요’ 문화적 충격

    [커버스토리] “월북하면 100억” 달콤한 유혹… ‘USB에 한국 가요’ 문화적 충격

    남북한이 살포해 온 전단의 내용물은 시대적 상황 변화와 궤를 같이해 왔다. 전단 살포의 목적은 물리적인 전투를 직접 벌이지 않고 상대 집단의 가치체계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단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 왔다. ●남북 가치체계 혼란 야기 ‘조용한 전쟁’ 전쟁 중에는 항공기로 적지에 살포하는 전단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미 8군사령부와 극동사령부가 뿌린 대북 전단은 24억 6000만장이 넘는다. 우리 군이 뿌린 대북 전단까지 합하면 40억장이 넘는다는 추산도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에는 한 달간 1억 5000만장의 전단이 살포되기도 했다. 북한 측도 3억장을 살포하며 대응했다. 양측 모두 귀순을 유도하며 추위와 배고픔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 주를 이뤘다. 국군이 전쟁 당시 북한군을 상대로 살포한 삐라에는 “중공군이 좋은 무기는 자기네가 차지하고 못쓸 무기만 북한군에 넘겨 주고 있다”며 북·중 혈맹 관계를 이간질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시 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으로 연결되는 북·중 관계는 항일투쟁의 동지로 혈맹 이상으로 여겨졌다. 유엔군 총사령관 명의로 북한군에 살포한 삐라도 귀순을 유도하는 ‘안전보장증명서’가 대표적이다.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로 된 이 증서는 이 종이를 가지고 항복하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무고한 주민들을 살해하는 미군의 모습을 그린 삐라를 제작해 대응했다. 사기를 떨어뜨리고 미군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사랑하는 어머니께’(Dear Mom)로 시작하는 편지의 내용을 어머니가 읽고 있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 군 장병 가운데 북한에 투항한 병사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내용도 많았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남북한의 삐라전쟁은 경제발전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특히 북한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1950~1960년대는 대남 공세가 거셌고 혼란한 시대상을 틈타 실제 월북한 인사도 많을 정도로 남한 정부는 수세에 몰렸다. 북한은 1960년대와 1970년대 김일성 주석의 우상화 작업을 본격화하면서 ‘우리 장군님 제일이야’, ‘민중 위주의 나라’, ‘치료비·공해 없는 민중이 살기 좋은 세상’ 등의 내용이 적힌 삐라를 살포했다. 특히 1960년대까지 평양의 빌딩과 가정집을 전단에 담아 월북하면 아파트까지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남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12달러로 북한(194달러)을 앞지른 1969년 이후 상황이 바뀌게 된다. 1970~1980년대 체제 경쟁에서 점차 밀리게 된 북한에서 넘어온 삐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 등을 거론하며 모욕하는 내용이 많았다. 1980~1990년대에 와서는 의거월북하는 국군 장병들에게 대학 교육까지 무료로 시켜 주는 동시에 생활보장금으로 최고 3억원, 상금으로 100억원이 넘는 돈을 준다는 과장된 내용도 나왔다. 남한은 1970년대 서울에서 가장 높던 삼일빌딩(31층)을 내세웠다. 1980년대에 와서는 국산 자동차의 세계 수출이나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등 경제 발전상을 과시했다. ●1970년대 말부터 ‘풍선 대북전단’ 요즘처럼 풍선에 싣고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모습은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심리전을 기획하면서 타이완 국민당 정부가 풍선에 식료품을 실어 중국 본토에 보내는 사례를 본뜬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제 ‘천리마 라디오’와 같은 모양의 라디오를 만들어 대북 전단 풍선에 실어 보냈다. 대북 전단 풍선에 다는 타이머 역시 타이완 정부가 가르쳐 준 것으로 전한다. 정부는 당시 이에 대한 보답으로 타이완이 계절풍을 이용해 중국 둥성 쪽에 전단을 보낼 수 있도록 전북 부안에 임시 기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남한은 1980년대부터는 유명 연예인 사진을 전단에 넣고 월남을 유도하기도 했다. 또 선정적인 여자 모델 사진과 함께 귀순을 유도하고 월남할 때의 보상금과 혜택의 범위를 기재했다. 1990년대 중반 탈북한 정모씨에 따르면 당시 남한 정부는 삐라와 함께 옷 양말, 통조림, 1㎏짜리 봉지쌀, 여자 속옷, 시계 등을 비닐로 포장해 살포하기도 했다. ●北, 배용준·이승연 사진 넣어 대남전단 북한도 1990년대 이후부터 남측 유명 연예인들이 등장한 삐라로 관심을 끌고자 했다. 당시 유명세를 탄 배용준이나 이승연의 사진에 ‘민족의 제일 자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문구를 넣어 이들이 북한을 찬양하는 것처럼 디자인한 것이다. 북한의 대남 전단 공세는 김대중 정부가 대북 포용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을 실시하던 2000년대 초에도 지속됐지만 남북한이 2004년 심리전을 중단하기로 함에 따라 주춤해졌다. 북한은 대신 인터넷을 통한 선전 선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우리 민족끼리’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2010년 천안함 사건에 따른 5·24 대북 제재 조치로 심리전이 재개됐고, 북한은 지난해 연평도와 백령도 등 접경 지역에 한국군의 전투의지를 꺾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정부 대신 탈북자 출신 민간단체들이 대북 전단 살포에 나섰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치부를 겨냥한 삐라 살포는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됐다. 이들은 김씨 정권이 수입하는 프랑스 코냑, 종마, 명품 가방, 시계와 유아용품 등 사치품을 부각시켰다. 특히 김정일의 여성편력 등 문란한 사생활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북한이 ‘상호비방’ 중지를 요구하고 나선 계기로 평가된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등의 대북 민간단체들이 지난 10일 경기 파주시 통일전망대 주차장에서 풍선에 매달아 띄운 전단에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영결식 사진과 함께 “우리 탈북자들은 북조선 인민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김정은 3대 세습을 끝내기 위한 자유민주통일의 전선으로 달려간다”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김정은 일가 가계도 실린 대북전단도 특히 최근 대북 민간단체들은 전단에 보통 1달러짜리 지폐나 USB 등도 같이 넣어 보낸다. USB에 담긴 한국 드라마나 영화, 가요 등을 통해 문화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최근 북한이 전단 살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일가의 가계도가 실렸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 제1위원장의 생모 고영희의 부친은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로 조총련의 동포 귀국 사업에 따라 북한에 들어간 인물이다. 북한에서 재일교포들은 항일혁명과 6·25전쟁 후 재건을 이룩한 주류 사회와 달리 기회주의자로 평가된다. 북한 당국이 순수혈통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백두혈통’이 알고 보니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 후손이라는 내용은 김 제1위원장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협상장 앉아있던 표정보니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협상장 앉아있던 표정보니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앉아있던 표정이…” 2년전 계급 강등은 도대체 왜?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리선권은 2010년 5월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나와 남측이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했다며 제시한 증거가 모두 조작됐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당시 리선권은 우리 측이 ‘폭침’의 증거로 제시한 어뢰에 쓰인 ‘1번’ 글자에 대해 “우리는 ‘번’이라는 표현은 무장장비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12년 2월에는 북한 국방위원회가 정부에 천안함 사건 거론 중단 등 9개의 요구사항을 담은 공개질문장을 보낸 직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 재개와 관계 개선은 전적으로 남측에 달렸다”며 남측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 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고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이런 사람이 어떻게 협상을 하러 왔나”,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정말 천안함 사건 배후 맞아?”, “천안함 배후 김영철, 표정이 능글능글하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앉아있던 표정이…” 2년전 계급 강등은 왜?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앉아있던 표정이…” 2년전 계급 강등은 왜?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앉아있던 표정이…” 2년전 계급 강등은 도대체 왜?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리선권은 2010년 5월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나와 남측이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했다며 제시한 증거가 모두 조작됐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당시 리선권은 우리 측이 ‘폭침’의 증거로 제시한 어뢰에 쓰인 ‘1번’ 글자에 대해 “우리는 ‘번’이라는 표현은 무장장비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12년 2월에는 북한 국방위원회가 정부에 천안함 사건 거론 중단 등 9개의 요구사항을 담은 공개질문장을 보낸 직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 재개와 관계 개선은 전적으로 남측에 달렸다”며 남측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 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고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이런 사람이 어떻게 협상을 하러 왔나”,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정말 천안함 사건 배후 맞아?”, “천안함 배후 김영철, 표정이 능글능글하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북측 소행” 지적하자 김영철 대답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북측 소행” 지적하자 김영철 대답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북측 소행” 지적하자 김영철 대답은?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우리 측은 이번 회담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이 북한의 책임이라는 점을 상기시켰지만 김영철이 이를 인정했을 가능성은 낮다. 회담은 비공개로 열려 천안함 피격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북측의 발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리선권은 2010년 5월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나와 남측이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했다며 제시한 증거가 모두 조작됐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당시 리선권은 우리 측이 ‘폭침’의 증거로 제시한 어뢰에 쓰인 ‘1번’ 글자에 대해 “우리는 ‘번’이라는 표현은 무장장비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12년 2월에는 북한 국방위원회가 정부에 천안함 사건 거론 중단 등 9개의 요구사항을 담은 공개질문장을 보낸 직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 재개와 관계 개선은 전적으로 남측에 달렸다”며 남측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 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고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에 일부러 앉혔다는 느낌인데?”,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요구만 있고 인정은 하지 않으니 그게 문제지”, “천안함 배후 김영철, 협상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겠나. 말싸움만 날 뿐이지”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7년만에 드러낸 모습 3개월만에 대장 계급 달고…남북입장차로 구체적 합의없이 끝나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7년만에 드러낸 모습 3개월만에 대장 계급 달고…남북입장차로 구체적 합의없이 끝나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은 뒤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남북은 15일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3년8개월 만에 군사당국자 접촉을 비공개로 갖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북전단 문제 등 현안을 논의했으나 양측간 입장 차이로 구체적 합의없이 접촉을 끝냈다.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소식에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사과받아야 하는데 수석대표가 배후라니”,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논의가 가능한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북한의 대화 의지가 있는지 의문”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7년만에 드러낸 모습 3개월만에 대장 계급 달고…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7년만에 드러낸 모습 3개월만에 대장 계급 달고…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은 뒤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남북은 15일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3년8개월 만에 군사당국자 접촉을 비공개로 갖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북전단 문제 등 현안을 논의했으나 양측간 입장 차이로 구체적 합의없이 접촉을 끝냈다.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소식에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사과받아야 하는데 수석대표가 배후라니”,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논의가 가능한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북한의 대화 의지가 있는지 의문”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7년만에 판문점에 나타난 후 표정보니…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7년만에 판문점에 나타난 후 표정보니…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은 뒤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남북은 15일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3년8개월 만에 군사당국자 접촉을 비공개로 갖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북전단 문제 등 현안을 논의했으나 양측간 입장 차이로 구체적 합의없이 접촉을 끝냈다.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소식에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사과받아야 하는데 수석대표가 배후라니”,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사건 논의가 가능한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북한의 대화 의지가 있는지 의문”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자신만만한 표정 자세히 보니…” 깜짝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자신만만한 표정 자세히 보니…” 깜짝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협상장 자신만만한 표정 자세히 보니…” 깜짝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온 북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15일 남북 군사당국자접촉에 수석대표로 7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 사실을 전하며 남측은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겸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영철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김영철은 2012년 말 대장에서 중장으로 2계급이나 강등됐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5월까지 군사학교 사격경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기술 경기 등 군 관련 행사뿐만 아니라 모란봉악단 공연, 축구경기 등 다양한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여러 차례 수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영철이 수석 대표로 남북 간 접촉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7차 군사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중장이었던 김영철은 수석대표로 남측 대표단과 만나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통행·통신·통관 분야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 김영철은 앞서 2006년∼2007년 열린 3∼6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도 수석 대표를 맡았다. 특히 2006년 열린 3∼4차 회담에서는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이었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수석대표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이번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도 2007년 5∼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해 남측 대표단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리선권은 2010년 5월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나와 남측이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했다며 제시한 증거가 모두 조작됐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당시 리선권은 우리 측이 ‘폭침’의 증거로 제시한 어뢰에 쓰인 ‘1번’ 글자에 대해 “우리는 ‘번’이라는 표현은 무장장비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12년 2월에는 북한 국방위원회가 정부에 천안함 사건 거론 중단 등 9개의 요구사항을 담은 공개질문장을 보낸 직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 재개와 관계 개선은 전적으로 남측에 달렸다”며 남측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남측 수석대표로 나선 류제승(예비역 중장·육사 35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2010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있을 때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군사 당국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를 맡은 김영철과는 군사회담에서 첫 번째 대면이다. 류 실장은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에 보임됐으나 2012년 일명 북한군 ‘노크 귀순’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는 GOP(일반전초) 경계작전 지도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국방장관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고 육군교육사령관으로 이동했다가 국방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전역했다. 네티즌들은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배후라고 우리 쪽에서 지목을 했는데 버젓이 내려왔네?”, “천안함 배후 김영철 등장, 천안함 배후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내려와서 협상장에 앉아있나”, “천안함 배후 김영철, 저런 인물하고 대화를 하는데 진전이 있겠어?”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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