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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저우6호 궤도전환기술은 美 MD 무력화할 비밀무기”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국의 두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에 미국의 세계 군사안보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중대한 군사기밀이 숨어 있다고 홍콩 시사 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 최신호가 24일 보도했다. 선저우 6호의 발사와 우주체류, 착륙 과정에서 중국은 세계첨단 수준의 정확성을 과시했는데 이는 정밀 제어 및 유도 기술의 확보로 가능했다. 특히 대기 저항력과 지구 인력의 영향으로 우주선의 비행궤도는 점차 하강하게 되는데 선저우 6호는 궤도를 30차례씩 돌 때마다 궤도를 미세 조정, 우주에서도 자유자재로 궤도를 전환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 궤도 전환 기술은 미사일을 방어하거나 요격 미사일을 피하는데 필수 조건이다. 우주에서 궤도 전환이 가능할 경우 미국이 국가미사일체제(NMD)와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를 통해 준비 중인 모든 미사일 요격 장비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또 궤도전환 장비를 핵탄두에 장착할 경우 가공할 전략무기가 될 수 있다. 중국 군사전문가 쑹이창(宋宜昌)은 “현재 미국의 TMD 및 NMD의 로켓과 러시아의 SS-27 장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소형 우주로켓 기술을 이용해 우주에서 신속하게 궤도를 전환, 요격을 실행하거나 요격을 피할 수 있다.”고 밝혔다. 궤도전환 기술 확보를 통해 중국은 첩보위성을 통한 지상 감시 및 정찰 능력을 대폭 향상시키고 조기 군사 경보 및 관제 시스템의 속도를 배가시킬 수 있다는 관측이다.oilman@seoul.co.kr
  • ‘단 1석의 승부’

    재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당의 움직이 더욱 분주해졌다. 한나라당은 전승을 목표로 막판 총력전에 돌입했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막판 역전을 위해 가능성 있는 지역에 대한 집중지원에 나섰다. 특히 선거 결과에 따라 각 당의 내부상황이 바뀔 공산이 크고, 나아가 대선 구도까지 흔들릴 가능성이 있어 각 당 지도부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열린우리당은 종반으로 가면서 경기 부천원미갑과 대구 동을의 분위기가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자체 분석하고 있다. 부천에선 이상수 후보가 다소 앞서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하는 등 최소한 ‘1석 건지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나라당은 여전히 4곳 모두 승리에 기대감을 보였다. 부천원미갑과 울산 북에서는 두 자릿수로 앞서고 있고, 경기 광주와 대구 동을도 우세한 것으로 자체 판단하고 있다. 막판까지 재선거를 통해 노무현 정권 심판론을 강조하고 있다. 민노당은 종반으로 가면서 나아질 것으로 예상했던 정갑득 후보의 지지율이 제자리에 머물자 잔뜩 긴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전승으로 끝날 경우 열린우리당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4·30 재보선에 이어 연속 전패를 당해 내년 지방선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문희상 의장 체제가 흔들리면서 조기 전대를 비롯해 대선주자 복귀론 등이 또다시 고개를 들 전망이다. 반면 한나라당으로서는 박근혜 대표의 친정체제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면서 대권 경쟁에서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1석이라도 승리하면 분위기는 바뀐다. 특히 대구 동을에서 승리할 경우 영남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문 의장 체제는 완전하게 안전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반면 한나라당 박 대표의 입지가 흔들릴 공산이 크다. 특히 ‘노무현-박근혜’의 대리전에서 패한 만큼 당내 대선 후보 경쟁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으로서는 경기 광주에서 무소속 홍사덕 후보가 당선될 경우도 난감해진다.박준석 구혜영기자 pj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재계 랭킹 몇 위 어쩌구 하는 언어의 마술에 홀려 방만한 기업경영을 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도리어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그런 기업은 되지 않았다.”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에 나오는 글이다. 김 명예회장의 심정은 삼양그룹 경영의 핵심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올해로 81년째를 맞는 삼양그룹은 흔히 ‘돌다리도 수없이 두드려 본 뒤 건너가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우보(牛步)경영’ ‘내실경영’ ‘보수경영’ ‘정도경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세계적으로 기업 평균 수명이 3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저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수식어의 이면에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못해 성장동력을 놓쳐 재계 50위권으로 처져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담겨져 있다.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 성장경영 꿈도 못 꿔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은 강연때마다 삼양사의 사례를 들곤 한다. 허 사장은 “삼양사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국내 최고의 기업 중에 하나였지만 적극적인 경영을 하지 못해 중견기업으로 뒤처졌다.”며 삼양식의 경영방식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그러나 삼양그룹의 시각은 이와는 다르다.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갈등 관계를 유지하느라 회사를 크게 키울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삼양사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시 창업주 김연수 회장의 형인 ‘인촌’ 김성수씨가 부통령까지 지내며 이 대통령의 라이벌로 활동해 집중 견제를 받았다. 김 창업주는 1951년 제당공장을 짓기 위해 울산에 부지를 확보했지만 정부가 공장 공사대금으로 활용할 외화 사용 승인을 3년이나 늦게 내줘 고초를 겪기도 했다.3공화국때도 인촌이 창간한 ‘야당지’ 동아일보를 지원하느라 정부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정부의 금융지원 같은 특혜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게 삼양그룹측의 주장이다. 삼양사 문성환 부사장은 “60∼70년대 급성장한 기업들의 성장동력은 정치권과 야합해 무차별적인 차입경영에 있었다.”며 “그러나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를 유지해 정경유착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통기업을 묵묵히 지켜온 2세 기업인 이런 안정 지향적인 기업 경영은 외환위기(IMF)때 빛을 발했다. 부채비율이 높았던 대부분의 기업은 무너졌지만 삼양그룹은 그때나 지금이나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다.2004년 12월 현재 삼양그룹의 매출액은 2조 7180억원에 머물러 있지만 부채는 8537억원으로 부채비율 60%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양사는 매출 8902억원, 부채 2799억원, 부채비율 40%다. 이런 이유로 삼양그룹은 지난 9월 재정경제부와 신산업경영원이 주최하는 재무경영종합대상을 수상했다. 삼양그룹이 튼실한 경영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김상홍(83) 명예회장의 공이 크다. 김 명예회장은 1956년 34세에 삼양사 사장에 취임했다. 부친 김연수 회장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것이지만 80년이나 넘게 기업을 온전히 지켜온 ‘수성’(守城)이 그의 최대 업적이다. 김 명예회장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지켜온 데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철저하게 받은 경영수업 덕이 컸다. 창업주는 1944년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김 명예회장을 만주로 불러 삼양사가 운영하던 매하구 농장에서 일을 시켰다. 사장 아들이라고 특혜를 베풀지 않고 농장 직원들과 똑같이 숙식하고 생활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호텔 경영인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이때 창업주는 “무슨 일이든 성공해 맨 윗사람이 되려면 우선 그 분야의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면서 기초를 익혀야 된다.”며 조선호텔에서 접시닦기와 객실담당(벨보이)부터 맡도록 권했다. 이후 1947년 제헌의원이던 나용균씨의 추천으로 수도경찰청(내무부 치안국) 경위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했다. 그는 4년간 경찰관으로 복무하다 1952년 큰아버지인 김성수씨가 부통령직에서 사임하자 총경직에서 퇴직했다. 이때부터 김 명예회장은 경영인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창업주는 장남 상준씨를 비롯해 둘째 상엽, 넷째 상돈씨에게는 해리염전을 포함한 ‘삼양염업사’를 맡겼다. 김 창업주가 직접 경영하는 삼양사는 셋째인 김 명예회장과 다섯째 상하씨가 일을 하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밑바닥부터 배워라 김 명예회장은 부친에게 받았던 경영수업이 혹독하리만큼 철저했다고 회고한다. 회사의 맨 밑바닥 일부터 배우라고 지시했는데 주산, 부기, 기장은 물론 고용노무작업, 구매자금조달 등 실무 업무부터 맡아야 했다. 김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대, 상하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상업고교 출신처럼 주산을 열심해 배워야 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삼양그룹은 사무직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우선 공장에서 현장 연수를 하는 것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다. 김 명예회장은 50세가 넘어서도 창업주 앞에서는 의자에 마주 앉는 일조차 삼갔다고 한다. 부친을 지근 거리에서 모셨지만 “아버지 그림자도 안 밟겠다.”며 어려워했다. 지금도 사무실에 부친의 흉상을 두고 ‘무언의 조언’을 듣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혹독한 ‘문하생’ 생활을 보낸 김 명예회장은 1950년대 제당사업을 전개할 때는 부친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설탕 영업의 골간을 만들었다.70년대 제당업이 정상에 오르자 경영 다각화의 일환으로 금융업에 진출, 삼양종합금융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는 삼양종합금융은 물론 1대 주주였던 전북은행에도 삼양사 직원을 단 한명도 파견하지 않는 등 자율과 원칙을 지킨 경영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삼양그룹의 장수비결에 대해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잘하는 것만, 그것도 능력이 닿는 범위내에서만 사업을 해왔다.”며 “정말 힘든 일이긴 했지만 우리가 잘하는 제조업체에만 집중하면서 넘치지도 않고 부족함도 없는 중용정신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경영철학은 ‘제조업을 통해 건전하게 돈을 벌어야 하고, 수익성이 좋다고 아무 사업이나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부회장을 함께 맡았던 김 명예회장에 대해 “과묵 침착하며 절제를 아는 선비, 중용의 참뜻을 실천해온 외유내강형의 단아한 신사”라고 평가했다. 김 명예회장은 1996년 동생인 상하씨에게 그룹회장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 났다. ●삼양의 제2탄생을 마무리 김상하(80) 그룹회장은 상홍 명예회장과 함께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성장 궤도에 정착시킨 주역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 그룹회장은 1949년 삼양사에 몸 담은 뒤 줄곧 부친과 상홍 회장을 도왔다.1952년 일본 도쿄사무소 첫 주재원으로 파견돼 삼양사 공장설계와 전문가 채용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회장은 형제간이긴 해도 서로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상홍 회장이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하는 반면 상하 회장은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상홍 회장이 사람을 가려서 만난다면 상하 회장은 이런저런 사람을 폭넓게 사귀는 성격이다. 취미도 상홍 회장은 단조로움을 즐겼던 반면 상하 회장은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했다. 때문에 그룹 경영에 있어서는 꼼꼼한 상홍 명예회장이 관리를 맡고, 활동적인 상하 그룹회장이 영업전선에 나서는 등 형제간 역할분담을 이뤘다. 실제로 상하 회장은 유창한 일어 실력과 깨끗한 인품으로 재계에서는 국제 감각이 뛰어난 대표적인 일본통으로 꼽혔다. 특히 1988년부터 12년간 최장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많게는 100여개의 대외 직함을 수행할 정도로 전방위 활동을 벌였다. 상하 회장은 이런 왕성한 대외활동을 바탕으로 제조업 중심으로 삼양의 성장을 진두지휘했다. 폴리에스테르 사업의 경우 10년에 걸친 증설을 이끌어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업체로 위상을 높였다.1980년대에 집중된 화학, 의약 등의 사업 다변화에도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폭넓은 대외 교분을 토대로 미쓰이, 미쓰비시화학과의 각종 기술제휴 및 합작이 추진돼 삼양화성, 삼남석유화학을 설립했다. ●외유내강의 기업인 상하 그룹회장은 소탈하면서 모가 없는 성품이지만 그룹경영에 있어서는 진퇴를 명확히 제시하는 ‘외유내강형’의 기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 국내 폴리에스테르 업체들이 신·증설을 활발하게 진행했지만 그는 화학섬유 사업의 한계를 감안해 대규모 증설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또한 섬유본부에서 신사업으로 오랫동안 검토해 샘플 제작까지 끝낸 폴리에스테르 필름 사업도 사업의 구조적인 경쟁력과 취약성을 들어 사업을 중단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상홍 명예회장을 모시는 데도 깍듯했다. 상홍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수시로 의견을 구했다. 상하 회장은 서울 성북동에 형집과 담장 하나 사이를 두고 함께 살고 있다. 담장 중간에 쪽문을 해놓고 수시로 오갈 수 있는 ‘핫라인’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상홍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동생과 집을 나란히 짓고 살게 된 것은 동생이 스스로 땅을 함께 사고 집도 순서대로 나란히 짓고 살아온 덕”이라며 “아우는 본래 2층집을 짓고 싶었는데 순전히 나 때문에 일조권을 염두에 두고 단층집을 짓고 산다.”며 돈독한 형제애를 소개했다. 상하 회장은 2004년 3월 상홍 회장의 장남이자 조카인 김윤 삼양그룹 부회장에게 ‘대권’을 물려줬다. 아들인 원씨는 삼양사 사장에 나란히 취임했다. 이로써 1975년부터 30년간 지속된 2세 형제경영에 이어 3세 사촌 형제간 공동경영 시대의 막이 올랐다. ●숨은 주역들 김 명예회장과 그룹회장은 삼양그룹이 81년의 전통을 이어온 데는 동생들과 매제의 역할히 컸다고 회고한다. 김 명예회장은 “나는 아우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신중을 거듭했다. 아우들과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선친께서 잡아놓은 틀을 잡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회사 발전에 공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지난 2002년 작고한 김상응 막내 동생을 손꼽는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미국 유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상응씨는 96년부터 삼양사 회장으로 재직하며 외환위기 등 창업 이래 최고의 시련기를 뚝심으로 돌파하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고 떠올린다. 부인 권명자(53)씨와 4남 1녀인 자식들은 남편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또 막내 여동생 희경(66)씨의 남편 김성완(66)씨의 공헌도 높이 평가했다. 김씨는 미국 유타대 교수로 생체고분자 및 약물전달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김 교수는 김 명예회장에게 “기업이 발전하려면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래성이 좋은 분야는 의약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결국 김 명예회장은 김 교수의 의견에 따라 1993년 충남 대덕 연구단지에 ‘삼양그룹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삼양그룹이 중점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화학, 식품, 의약부문의 성장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공격경영 김윤(53) 회장은 부친 상홍 명예회장, 상하 그룹회장과 같이 바닥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LG그룹 계열인 반도상사에 취직했다.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기에 앞서 다른 회사 직원으로 영업전선을 두루 체험해 보라는 부친의 의도였다. 이를 두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김상홍 회장님의 큰자제가 2년간 반도상사에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런 사실을 전혀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며 “나는 훗날에야 그 사실을 알고 한쪽으로는 좀 서운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상홍 회장님의 인품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MIIS(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MBA 석사를 취득한 뒤 곡물회사인 루이스 드레푸스에서 2년간 근무하며 국제적인 경영감각을 익혔다. 또 삼촌인 상하 그룹회장처럼 도쿄지점에서 2년간 주재하며 삼양그룹의 해외진출 사업을 손수 챙기며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다져 나갔다. 고국에 귀국한 뒤에는 울산공장 기술수출팀을 시작으로 이사(90년)-상무(91년)-대표이사 전무(93년), 대표이사 사장(96년)-대표이사 부회장(2000년) 등을 거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쌓았다. 2004년 삼양사 회장에 취임한 김 회장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경영 스타일로 삼양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보수적인 관행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삼양그룹은 보수적이고 안정 위주의 경영전략을 구사해 성장이 정체돼 있었다.”며 “앞으론 사고방식을 진취적으로 전환해 그룹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포부를 밝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2010년까지 2조원을 투자해 매출액 6조원을 달성하고 자본수익률 2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화학, 식품, 의약, 신사업 등 4대 부문을 핵심 성장 사업군으로 설정했다. ●다시 세계로 진출 2004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전기전자, 부품소재 등을 생산하는 삼양공정소료 유한공사를 설립,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만주에 진출한 데 이어 68년 만에 중국에 현지법인 형태로 재진출했다. 향후 중국을 기점으로 인도, 중남미 등 생산기지를 다각화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 세계적인 전문 화학회사로 육성한다는 복안이다. 또한 식품부문을 총괄하는 통합 브랜드로 ‘큐원’(Qulity No.1)을 출범시켰다.47년간 사용해 오던 대표 브랜드 ‘삼양설탕’을 과감히 버리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식품소재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김윤 회장의 이런 자신감은 1996년부터 삼양사 사장과 부회장을 거치며 길러졌다. 과감한 추진력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발휘됐다. 사장 시절이던 1998년 사업실적이 저조한 금융업과 무선통신사업을 포기하고 계열사를 섬유·식품·화학 등을 핵심 사업군으로 재편했다. 특히 삼양사의 주축이었던 폴리에스테르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2000년 SK케미칼과 통합법인 휴비스를 설립했다. 이후 삼양그룹 직원들은 단 한명의 구조조정과 한 푼의 임금삭감 없이 경영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이런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19일 서울대 산학협력재단이 주최한 ‘제1회 한국을 빛낸 CEO’에 이명박 서울시장, 정운찬 서울대 총장,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 등과 함께 뽑혔다. 또 2001년 전경련 부회장에 선임됐고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3세에도 공동경영 상하 그룹회장의 장남인 김원(48) 사장은 선대 회장들처럼 사촌 형인 김윤 회장을 도와 삼양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3대 경영의 주역들은 선대 회장들과는 달리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윤 회장은 부친인 상홍 명예회장이 내성적인데 반해 활발한 활동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면 원 사장은 전방위 대외활동을 펼친 부친 상하 그룹 회장과는 달리 묵묵히 사촌형을 챙기고 있다. 원 사장은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유타대에서 재료공학과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윤 회장처럼 도쿄지점 부장을 거쳐 삼양이 의약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1993년 개발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의약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연구개발 부문을 관장하면서 이사, 상무로 승진한 뒤 1997년 연구개발본부장(전무)에 오르는 등 ‘테크노 경영인’으로 각인되고 있다.1999년 부사장 승진에 이어,2000년 8월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 이공계 출신으로 매사에 치밀하며 경영분석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외 영업에 치중했던 부친과 달리 관리쪽에 무게가 실리는 경영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결혼도 자식 뜻대로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그룹회장은 창업주처럼 자식들의 결혼과 관련해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본인들의 의사를 최대한 들어주는 스타일을 지켰다. 상홍 명예회장의 장남 김윤 회장은 친구들 모임에서 부인 김유희(46)씨를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김씨가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데다 집안 대대로 친척들이 이대 출신이 많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고 고백한다. 김 회장은 부인을 웬만한 행사에는 동행할 정도로 ‘부인사랑’이 남다르다. 지금도 사석에서 김 회장의 18번인 ‘만남’을 두 부부가 함께 부른다고 한다. 김원 사장도 친구들끼리의 모임에서 부인 배주연(41)씨를 만나 열애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반면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과 김정(46) 삼남석유화학부사장은 중매로 배필을 만났다. 김량 사장은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의 중매로 부인 장영은(46)씨와 혼인했다. 상홍 명예회장과 김 전 장관의 집안이 오래전부터 친해 자연스레 연결됐다. 김 전 장관은 영은씨의 부친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과 막역한 사이어서 혼인을 주선했다. 김정 부사장은 어머니 박상례(75)씨가 자영업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안혜원(39)씨를 만났다. 안씨 부친이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어서 흔쾌히 혼담이 오갔다. jrlee@seoul.co.kr ■ 막강한 손녀사위들 김연수 삼양사 창업주는 부인 박하진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는 2세들보다 3세들의 혼사를 통해 혼맥을 이뤘다. 재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손녀사위들은 대학교수, 의사, 경영인 등의 전문 직업군을 이루며 삼양가(家)의 명망을 잇고 있다. 둘째아들인 김상협 전 국무총리는 1남3녀를 두었는데 3명의 사위가 모두 교수인 것이 이채롭다. 김 전 총리는 형제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고 한다.5년제였던 경복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당시는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올 정도의 수재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 전 총리는 학자 사위들을 좋아했다. 김 전 총리의 장녀 명신(58)씨 남편 송상현(65)씨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씨는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의 손자다. 둘째딸 영신(56)씨는 정성진(58) 서울대 공대 교수와 결혼했다. 정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이다. 막내딸 양순(52)씨의 부군 이양팔(59)씨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다. 또 상홍(83) 명예회장의 장녀 유주(56)씨도 윤영섭(59)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와 혼인했다. 창업주의 넷째딸인 정유(73)씨는 외동딸인 원경(43)씨를 한정수(48) 전 충남대 교수와 결혼시켰다. 손녀사위들의 ‘의사 파워’도 만만치 않다. 김 창업주의 둘째딸 상민(78)씨는 둘째딸인 이정현(41)씨를 백완기(47) 인하대병원 흉부외과 의사와 인연을 맺어 줬다. 김 창업주의 셋째딸 정애(75)씨 장녀 조경미(47)씨의 부군 주춘희(47)씨도 캐나다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삼양가가 전문 경영인 집안이어서인지 손녀사위들도 전문 경영인이 많다. 김 창업주의 장남 상준씨의 장녀 정원(62)씨의 남편 김선휘(68)씨는 삼양염업사 부회장으로 재직하며 처가의 가업을 잇고 있다. 둘째딸 정희(58)씨는 김준기(62) 동부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또 셋째딸 정림(57)씨도 윤대근(59)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이자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과 결혼해 유달리 ‘동부그룹’과 인연이 많다. 창업주의 둘째 김상협 전 총리가 교육자 집안으로 꾸렸던 것에 비해 장남 상준씨는 전형적인 경영인 가족을 형성한 셈이다. 넷째 상돈(81) 삼양염업사회장은 외동딸 희진(45)씨를 오광희(49) 전 나이스 정보통신 전무와 결혼시켰다. 다섯째 상하(80) 그룹회장도 외동딸 영난(44)씨를 송하철(45) ㈜ 항소 사장과 혼인시켰다. 송씨는 송삼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다. jrlee@seoul.co.kr ■ 계열사 사장들 ‘전문적 경험’ 풍부 삼양그룹의 현 계열사 사장들은 경영전면에 나선 창업주의 3세들을 지원하는 것에 역할이 주로 맞춰져 있다. 분야별로 전문적 경험이 풍부해 경영 승계가 무리없이 이뤄지도록 돕고 있다. 박종헌(66) 삼양사 사장은 40년동안 영업, 해외업무, 인사, 재무, 기획분야를 두루 거쳤다.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박 사장은 법학도답게 매사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영훈 대법원장과 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은 김상홍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경방유통에서 16년간 재직하며 사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유통부문의 핵심 역량을 쌓아왔다.2002년 삼양제넥스에 입사해 제조업 유통부문의 경영 노하우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김 사장은 창업주의 손자이지만 직원들과 자주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즐기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경원(62) 삼남석유화학 사장은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 설립때부터 중앙연구소 소장, 화성본부장, 삼양화성 사장 등 화학, 섬유, 폴리카보네이트 등을 두루 지낸 전문 경영인이다. 폴리에스테르 부문의 대가로 ‘폴리머 김’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김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연구통’이다. 송창기(63) 삼양중기 사장은 인사관리분야에서 15년간 일해온 ‘인사통’이다. 총무부장, 인사부장, 관리본부장을 지냈다. 송 사장은 삼양중기에서 기계부문 4개사로의 분사와 주물사업부문 합작사 설립을 성공리에 추진했다. 박호진(59) 삼양화성 대표는 도쿄지점을 거쳐 전주공장에서 20년 동안 현장 경험을 쌓았다. 지난 3월 대표로 선임돼 사원간에 가족적인 유대감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규한(58) ㈜삼양밀맥스 대표는 판매와 현장을 두루 거친 식품부문 전문가다. 경영과 마케팅 감각을 두루 갖췄고 비전팀을 만들어 내부 혁신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변수식(55) 삼양데이타시스템 대표는 전사적자원관리(ERP)팀장,IT전략팀장, 경영혁신(PI)팀장 등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업무를 주로 맡았다. 변 대표는 IT부문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IT통’이다. 김상익(59) 삼양웰푸드 대표는 경리부, 삼양제넥스 경영지원팀장을 거치는 등 25년 동안 경리와 관리를 맡았다.2004년 대표로 선임돼 원칙과 현장을 중시하는 현장 밀착형 경영을 중시한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고침 서울신문 17일자 15면에 게재된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편에서‘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 서울대 법대교수’는 ‘송 전 사장의 손자’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롤러코스터 ‘뒷자리’ 타야 스릴 만끽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롤러코스터 ‘뒷자리’ 타야 스릴 만끽

    나들이가 부쩍 잦아지는 요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곳 가운데 놀이동산을 빼놓을 수 없다. 놀이공원을 찾는 이유로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느끼는 공포와 스릴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레일, 수십m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360도 회전 구간 등 잠시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롤러코스터는 가장 인기있는 놀이기구들 중 하나다. 그렇다면 롤러코스터의 어떤 자리에 타야 제대로 된 스릴을 경험할 수 있을까. 뒷자리에 앉아야 같은 돈을 내고 타더라도 ‘본전’을 뽑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탈 때 스릴을 느끼는 이유는 물리적인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급강하할 때의 빠른 속도감을 들 수 있다. 속도만을 고려하면 시속 300㎞ 이상으로 달리는 KTX가 롤러코스터보다 더 스릴이 있어야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속도감을 어느 위치에서 느끼느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는 출발 직후 가장 높은 곳까지 천천히 올라간 뒤 점차 내려오면서 속력이 빨라지는데, 속력이 가장 빠른 순간은 롤러코스터의 중간 부분이 꼭대기를 지날 때부터 제일 아래쪽을 지날 때까지다. 이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꼭대기를 지나도 속력이 빨라지지 않다가 제일 아래쪽을 지나 다시 올라가는 구간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느끼게 되는데, 올라가면서 느끼는 속도감은 큰 스릴을 주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내려오면서 빨라지는 구간이 짧아 스릴도 그만큼 짧아진다. 반면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꼭대기에 도달하기 전부터 빨라지기 시작해 제일 아래쪽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긴 구간에서 가장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꼭대기를 지나는 순간의 가속도도 스릴을 더해 준다. 가속도란 속도의 변화 정도를 의미하며 방향이 같을 때보다 반대일 때 더욱 커진다. 앞자리보다 뒷자리에 앉으면 꼭대기를 지날 때 속력이 커지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가속도를 더 크게 느낀다. 이 때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은 위쪽으로 관성력을 느끼는데,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힘을 받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지고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할 때 몸이 위로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특히 관성력이 중력과 크기가 같으면 우리는 몸무게가 ‘0’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으며, 이를 무중력 상태라고 말한다. 따라서 가속도가 클수록(꼭대기에서 속력이 빠를수록) 더 큰 관성력을 받게 돼 공중에 떠 있는 것과 같은 스릴을 더욱 크게 맛볼 수 있다. 이밖에 심리적인 요인도 작용한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앞 사람이 지르는 소리 때문에 더 큰 공포감이 생길 수 있다. 추락하듯이 떨어질 것이라는 긴장감에 비명소리가 더해지면 스릴과 공포감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하다. 롤러코스터가 모두 똑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다. 궤도 설계나 낙하 구간의 길이 등에 의해 스릴의 정도가 달라진다. 외국의 어떤 롤러코스터는 136m 상공에서 최대경사각 90도를 시속 206㎞로 내려온다고 한다. 이런 롤러코스터는 어느 자리에 앉든 큰 차이가 없겠지만, 국내 롤러코스터를 탄 뒤 더 큰 스릴을 느끼려면 뒷자리가 낫다. 이세연 서울 명덕고 교사
  • 생활속으로 파고든 로봇 ‘못하는게 없네’

    생활속으로 파고든 로봇 ‘못하는게 없네’

    로봇의 대중화 시대가 우리 곁에 다가서고 있다. 사람의 단순 보조수단으로 ‘인간화’의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정부의 신성장동력 정책에 힙입어 청소용, 교육용, 국방용, 의료용, 오락용 등 다양한 제품이 속속 개발되고 출시된다. 정부가 내놓은 100만원대 ‘국민로봇’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2020년이면 ‘1가구 1로봇 시대’가 올 것이란 정부의 호언도 잿빛만은 아닐 전망이다. 최근 국내 업체들이 개발하거나 시판에 들어간 제품을 중심으로 그 기능과 활용 분야, 가격 등을 알아본다. ●국내 로봇 약력은 지능형 로봇의 시초는 199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개발한 ‘센토’다.200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주인과 대화할 수 있는 ‘아미’를 개발했다. 이어 KAIST는 지난해 말에 걷는 인간형 로봇(Humanoid)인 ‘휴보’를 개발했고, 최근에는 네트워크 방식으로 얼굴 등을 인식하는 ‘NBH-1’을 공개했다. 올해 초엔 KIST에서 정보통신부가 주관으로 ‘마루(남자)’와 ‘아라(여자)’를 내놓았다. ●로봇 과외시대가 다가왔다 한국지능로봇산업협회는 최근 단순 영어단어 따라하기와 발음 교정을 도우는 교육용 로봇을 보급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가격은 100만∼120만원대. 초기 단계이지만 내년에는 수학 등 다른 과목으로 확대될 예정이어서 ‘만능 과외교사’의 날도 멀지 않았다. 유진로보틱스가 출시한 ‘아이로비’는 단순 영어 학습과 동화 구연 등 유아에게 맞는 교육기능은 물론 음성인식과 자율충전 기능이 있다. 혼자 다닐 수 있고,2∼3시간 사용이 가능하다. 판매가는 390만원. 로보티즈는 교육용 로봇인 ‘바이올로이드’를 시판 중이다.4족 보행로봇, 인간형 로봇, 여러 가지 곤충로봇 등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만능로봇 키트다. 조립과 분해가 가능하다. 가격은 77만원. ●청소로봇은 혼수 필수품 청소로봇 시장은 지난해 6000대 수준에서 올 해에는 2만여대로 증가했으며, 내년에는 4만대가 넘을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지난 6월 정통부 조사에서는 40%가 넘는 응답자가 청소로봇 구입을 원해 대중화가 이미 시작됐다. 국내시장은 미국 등 외국산이 많지만 국내업계는 50만∼100만원대 중급모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로보킹’은 LG전자가 지난 7월 내놓은 149만원대 중급 제품이다. 지난해 3월 출시한 제품을 성능은 높이고, 가격은 100만원을 내렸다. 위치감지센서인 ‘자이로’를 장착해 주행 정확도를 높였다. 흡입력도 일반 제품(10∼30W)보다 강한 140W다. 청소로봇 맏형격인 유진로보틱스의 ‘아이클레보’와 고급모델 ‘아이클레보Q’는 각각 39만 9000원,54만 8000원으로 중저가형이다. 적외선센서가 부착, 벽과의 충돌을 방지해 현관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진행 상태를 음성으로 알려준다. 세균 억제와 공기정화 기능도 있다. 한울로보틱스는 200만원대의 ‘오토로’를 개발했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충전기가 있는 곳을 찾는 등 인공지능을 가졌다. 흡입력은 200W. 한울은 청소기능과 정보콘텐츠를 제공하는 ‘네트로’도 개발했다. 또 마이크로로보트는 다음 달에 ‘유봇(U-bot)´을 선보인다. 바닥재에 투명잉크로 새겨진 바코드를 자동인식해 혼자 옮겨 다닌다. 삼성전자는 최근 열렸던 국제로봇기술전에서 크루즈미사일의 원리로 청소경로를 결정하는 ‘크루보’를 내놓았다. ●숨어 있는 저격수도 인지 국방부와 정통부는 2011년까지 ‘견마(犬馬)형 로봇’을 개발하기로 했다. 원격제어로 험한 지형에서 달릴 수 있고, 지뢰 탐지·수색, 실제 전투에 투입된다. 숨어 있는 저격수를 인지해 사살할 수 있는 성능을 지향한다. 도담시스템즈는 경계로봇인 ‘aEgis’을 최근 개발했다. 정밀 사격이 가능하다. 낮에는 2㎞, 밤에는 1㎞까지 사물 식별이 가능한 고성능이다. 가격은 1억원대. 소방관 로봇도 1∼2년 안에 나온다. 원자력연구소와 동일파텍 등 기업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화재진압 및 인명구조 로봇 개발에 착수했다. 불이 난 지점을 탐지하고 진화하며, 화재현장에서의 사람 존재 유무도 확인, 소방관에게 전달한다. 동일파텍은 또 국내 최초로 무한궤도(트랙) 형태인 ‘아키봇’을 개발, 시제품을 내놓았다. 유무선으로 조종 가능하며, 내년 하반기에 출시한다. 소형인 M형은 소방관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 화재진압, 인명구조 작업과 군사·보안용 등 용도가 다양하다.S형은 11인승 엘리베이터에도 탑승이 가능해 지하철 사고 등에 활용된다. ●농사일 로봇 2010년 상용화될듯 논밭을 오가며 농사를 대신하는 로봇도 등장할 전망이다. 전남도는 대동기계와 LS전선, 전남대 등과 내년에 농사용 로봇 개발에 나선다. 잡초 제거와 트랙터를 몰고, 농약 살포, 벼 수확 등 4개 종류다.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2010년에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밖에 다진시스템은 아파트 안을 원격으로 모니터링하는 ‘로보엔(네스팟 루)’을 개발했다. 문턱을 넘을 수 있고, 밖에서 양방향 음성 대화가 가능하다. 관계자는 “KT 네스팟과 연계해 인터넷,PDA 등 이동전화를 이용, 가스누출 등을 제어할 수 있고 각종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로봇”이라고 설명했다. 가격은 70만원 정도로 예상된다. 정기홍기자 hong@seoul.co.kr ■ 공룡·새·애완견…취미·오락 로봇 잇단 출시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의 생활들…. 로봇이 인간의 고민들을 떨쳐줄 날이 멀지 않았다. 웃음보따리를 들고 ‘인간’을 기다리는 오락·애완용 로봇은 어떤 게 있을까. 애완동물 기능의 로봇이 곧 나온다. 다사테크는 ‘DATO’라는 애완용 로봇을 내년 초에 출시한다. 지능성장 가능하다. 가격은 미정. 취미·오락 로봇도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뉴로스는 초소형 로봇새인 ‘사이버드’ 2개 종류를 개발했다.P1제품이 8∼12분,P2는 12∼18분 날 수 있다. 판매 중인 P1은 날갯짓, 방향조절 기능이,P2는 여기에다 수직다이빙,360도 회전 기능이 더 있다.P1 가격은 15만원. 로보쓰리의 ‘R3-M’ 제품은 댄스를 추고 주행도 하는 익살스러운 로봇이다. 내레이션 기능도 있다.3개 종류의 춤 동작을 할 수 있고,8시간 운전이 가능하다. 가격은 5000만원. 디노코리아도 생동감 있게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룡로봇을 내놓았다. 특수 피부에 과학적 고증도 마쳤다. 화가 로봇도 몇개 출시돼 있다. 사람의 얼굴을 인식한 뒤 초상화를 그려낸다. 다진시스템은 6축 관절인 ‘Paint Robot1’이란 화가로봇을 개발했다. 가격은 58만 8900원. 대요메디의 ‘3-D맥상기’는 지능형 진맥 로봇이다. 사상 체질을 분석해 준다.3000만원 시판 예정. 정기홍기자 hong@seoul.co.kr
  • 선저우 6호 민족주의 폭풍 몰고 귀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의 두 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가 5일간의 우주 비행을 마치고 17일 귀환했다. 지난 12일 주취안(酒泉)위성 발사센터에서 발사된 선저우 6호는 지구를 77바퀴 비행하며 각종 과학 실험을 실시한 뒤 발사 115시간30여분 만인 이날 새벽 4시32분 네이멍구(內蒙古) 쓰쯔왕치(四子王旗)의 아무구랑(阿木古郞) 초원 주착륙장에 안착했다. 선저우 6호는 우주 환경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실험과 함께 우주선의 궤도 모듈을 사용한 식품 가열, 대소변 수집, 대기환경, 온도 및 습도 통제 등의 기능을 충분히 검증했다고 신화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이번 성공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더욱 높아지게 됐으며 국내적으로 민족주의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중화민족의 자긍심 고취 중국의 두 번째 우주인 페이쥔룽과 녜하이성은 착륙 직후 전용기편으로 베이징 시자오(西郊)공항으로 날아와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공항에는 차오강촨(曺剛川) 국방부장이 나와 이들의 귀환을 축하했고 공항에서 우주 통제센터로 향하는 거리는 환영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이날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중국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자랑스러운 성과”라고 평가했다. 신경보(新京報) 등 일부 신문은 이날 호외를 발행, 가두에서 시민들에게 뿌리기도 했다.●중국 달 탐사 계획 가속화 중국은 2007년에 우주 유영을 실행하고 2010년 달에 무인우주선을 착륙시킨다는 야심찬 우주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창어프로젝트(嫦娥工程)’로 명명된 달 탐사계획은 ▲인공위성 발사를 통한 달 표면 입체분석 ▲탐사선 달 착륙 ▲우주인 달 착륙 후 귀환의 3단계로 이뤄져 있다. 중국은 달 탐사 이후 우주인이 우주에 단기 체류할 수 있는 캡슐을 발사하고 우주선과 다른 비행체가 도킹하는 기술을 개발, 우주 정거장 건설로 이어간다는 계획이다.oilman@seoul.co.kr
  • ‘우이~신설동 경전철’ 확정

    ‘우이~신설동 경전철’ 확정

    2011년까지 서울의 우이동∼신설동과 전주시에 경전철을 도입하는 계획이 확정됐다. 17일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도시철도기본계획’에 따르면 서울 ‘우이∼신설 경전철’은 서울시 우이동에서 미아동ㆍ정릉을 거쳐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을 연결하는 10.7㎞ 노선으로 13개 정거장이 들어선다. 이 노선에는 무인 자동운전이 가능한 첨단 시스템 차량이 도입되며 전 구간이 지하로 건설된다. 총 사업비 7300여억원으로 완공시기는 2011년이다. 윤왕로 건교부 도시철도팀장은 “우이∼신설 경전철 사업이 완공되면 서울의 미아ㆍ삼양·정릉 지역의 교통난 해소는 물론 길음·미아 뉴타운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전주 경전철은 사업비 4700억원이 투입돼 전주시내 간선도로를 따라 총 24.3㎞ 2개 노선으로 건설된다. 전주 경량전철은 지상에 궤도를 놓아 건설하는 국내 최초 노면 경전철로 이용객들은 유럽이나 일본처럼 별도의 역사 없이 노면에서 바로 승하차할 수 있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中칭하이-티베트 ‘하늘위 철로’ 완공

    중국 서부 칭하이(靑海)성과 티베트(西藏)를 잇는 세계 최고도 철로인 칭짱(靑藏)선이 완공됐다. 중국은 15일 티베트자치구 라싸(拉薩)에서 칭하이성 거얼무(格爾木)로 이어지는 칭짱선 마지막 궤도 노선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중국 언론이 16일 보도했다. 총길이 1142㎞인 이 철로의 최고 높이는 5072m로 페루가 지난 1세기 동안 보유하고 있던 세계 최고보다 200m 높다. 지난 1979년 개통된 1기 칭하이성 시닝(西寧)∼거얼무 814㎞ 노선에 이은 2기 공정으로 최고도 역사는 해발 4500m 높이의 티베트 고원 목초지에 위치한 나취(那曲)역이다. 내년 7월쯤 전 노선이 개통될 것으로 중국 당국은 예상하고 있다. 공식 개통될 경우 라싸에서 시닝을 거쳐 베이징까지 가는 데 48시간이 걸린다. 베이징 당국은 지난 50년대부터 철로부설을 계획해 왔으나 높은 건설비용과 기술적 장애로 공사를 미뤄 오다 2001년부터 서부대개발 공정의 일환으로 330억위안(약 4조 2000억원)을 투입, 공사를 벌여 왔다. 노선의 대부분이 고원 동토 지대를 지나는 난공사로 건설노동자들은 산소 부족으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공사를 해왔다. 열차는 승객들의 고산병 증세를 방지하기 위해 항공기처럼 밀폐된 채 운행되며 디지털 시스템으로 관제된다. 일각에선 중국이 이번 티베트 철로를 통해 내륙개발 외에도 한족을 티베트로 대거 이주시켜 티베트 독립 움직임을 봉쇄하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려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홍콩 연합뉴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형의 호인 인촌은 바로 두 형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 5000석 지기의 호남 최대 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친은 일제하에서 나라가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당시 저명한 사학자들을 몰래 불러 ‘조선사’를 17권이나 엮을 정도로 민족애가 투철했다는 게 삼양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창업주는 어린 시절 외롭게 지냈다. 김 창업주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일찍 잃었다. 여기에다 한 명뿐인 형인 인촌이 큰아버지인 김기중씨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김 창업주는 몸이 허약했다. 폐가 약했으며 위도 튼튼하지 못해 일찍이 폐와 소화기 계통의 질병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애를 끓게 했다. 이런 이유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활발했던 인촌과는 달리 김 창업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당업으로 재기에 나서 해방공간을 겪으면서 반민특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 창업주는 한국 전쟁 이후 해체상태에 놓였던 삼양사 재건에 나섰다. 그는 재기의 발판으로 제당업과 한천제조업을 선택했다. 당시 설탕은 수입에 의존해온 대표적인 외화소비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바닷가를 메워 그곳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1956년 삼양을 제당으로 키우면서 주식회사 삼양사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고, 사장에 3남인 상홍(83), 상무에 5남 상하(80)를 앉혔다.3남과 5남이 삼양사를 맡는 전통은 3세에도 그대로 이어져 삼양그룹은 현재 상홍씨의 장남 윤(53)씨와 상하씨의 장남 원(48)씨가 삼양사 회장과 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아들들인 량(51)씨와 정(46)씨도 각각 삼양제넥스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삼양사보다 수익률이 높았던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라는 별개의 회사로 독립시키고 맏아들 상준(작고)을 사장에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3공화국때 문교부장관과 5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차남 상협(작고)에게도 삼양염전의 지분 25%를 떼어주어 형제간 경영권을 일찌감치 교통정리했다. ●재계의 거목으로 김 창업주는 1962년 설립한 삼양수산을 통해 다양한 어종을 가공, 수출하는 등 한때 냉동선만 21척을 보유할 정도로 수산업에도 주력했다. 이처럼 제당과 수산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한국 재계의 얼굴이 되었다.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김 창업주는 전주방직을 인수, 삼양모방(주)을 설립했다. 이어 1969년 전주에 대단위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70년대 들어 삼양은 국내 초창기 산업의 중심이었던 제당으로 확고한 제조업체로의 변신을 이룩했다. 이 당시 삼양은 매출액에서나 기업선호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국내 정상급 기업으로 우뚝 섰다. 김 창업주는 사업에 투신한 지 만 53년이 되던 1975년 회장을 상홍에게, 사장에 상하를 임명하는 등 ‘2세경영’을 출범시키고 은퇴했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그는 은퇴 후 농촌으로 돌아가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1979년 84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교육사업도 아낌없는 지원 그는 기업경영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운영기금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양영회와 수당장학회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문성환 삼양사 부사장은 “창업주는 두 재단을 통해 대학생 2만여명에게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하숙비, 책값, 소정의 용돈까지 장학금으로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김 창업주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경제부총리, 오세철 연세대 교수 등이 꼽힌다. 경성방직의 회계를 맡아 김 창업주를 도왔던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는 “수당(秀堂·김 창업주의 호)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기업경영에는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用錢)철학을 전했다. 김 창업주는 경쟁회사에도 관대했던 묵묵한 성격의 경영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1966년 삼양의 경쟁회사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곤혹을 치렀다. 임원들이 ‘사카린 없는 삼양설탕’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이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그의 성품을 읽는 일화로 경영인들에게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방대한 혼맥…사회 각 분야와 사통팔달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작고), 차남 상협(작고),3남 상홍(83),4남 상돈(81),5남 상하(80),6남 상철(70),7남 상응(작고) 등 7남과 장녀 상경(79), 차녀 상민(78),3녀 정애(75),4녀 정유(73),5녀 영숙(72), 막내 희경(66) 등 6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의 성격이 소탈해 자식들에게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결혼을 시켰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김재억 감사는 “창업주의 생활철학이 권세를 배격하는 것이어서 자식들이나 3세들의 결혼에도 사돈 될 집안의 내력과 상대방의 성실성을 먼저 봤다.”고 회고했다.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웠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 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으로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반면 창업주의 형인 인촌 성수씨도 9남4녀를 두어 대가를 이뤘는데 장남인 상만(작고)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대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전 회장인 장손 병관씨는 장남 재호(41·동아일보 대표이사 전무)씨를 이한동 전 총리의 차녀인 정원(38)씨와 결혼시켰고,2남 재열(37·제일모직 상무)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현(32·제일모직 상무보)씨와 결혼했다. 김연수 창업주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19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85)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62)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68·삼양염업사부회장)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맺어졌다. 차녀 정희(58)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내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64)씨를 사위로 맞았다.3녀 정림(57)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9)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장남 병휘(60)씨는 한양대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범(52)씨는 독신으로 지내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 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82)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녀 명신(58)씨를 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65) 서울대 법대교수와 혼인시켰다.2녀 영신(56)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 성진(58)씨와 결혼했다. 외아들 한(52)씨는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있다. 3남 상홍(83)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7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상홍씨는 2남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46)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는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영은(46)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이다. 장녀인 유주(56)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2남 영섭(59·고려대 상대교수)씨에게 시집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연결되고 있다. 영섭씨의 남동생인 영식씨가 박 전 위원의 장녀 진아(48)씨와 결혼했다. 4남 상돈씨는 6·25 직후 김유황 전 광장㈜ 부사장의 딸 용옥(73)씨와 결혼했다.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52)씨를 축구협회 부회장과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흥기씨의 딸인 혜승(45)씨와 맺어줬다. 차남 영로(50)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씨의 딸 은미(46)씨와 혼인했다. 외동딸 희진(45)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9)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75)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외동딸인 영난(44)씨를 송하철(45·주식회사 항소 사장)씨와 결혼시켜 송남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장남 원씨를 배영화 경희어망 회장 딸인 주연(45)씨와 맺어 줬다. 차남 정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혜원(39)씨와 결혼했다. 6남 상철(70)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63)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7남 상응(작고)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5녀중 셋째딸 명자(53)씨와 결혼했다. 장녀 상경(79)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 후 이혼해 조서봉(필립), 조서만(조지)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차녀 상민(78)씨의 남편은 이두종(작고)씨로 활발하게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했다. 온양 지주의 아들로 자란 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1984년 회사를 떠난 뒤에도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와 수당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3녀 정애(75)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결혼 후인 57년 삼양사에 사원으로 입사, 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73)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작고)씨다.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었다. 이들은 김 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다. 영국씨는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을 지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인 셈이다. 5녀 영숙(72)씨는 미국인 스테푸친과 결혼, 딸 페기, 아들 프랭크를 두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희경(66)씨도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성완(68·삼양사 의약사업 고문)씨와 결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석좌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jrlee@seoul.co.kr ■ 창업주의 친일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jrlee@seoul.co.kr ■ 형 김성수와 동생 김연수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인촌(仁村) 김성수와 수당(秀堂) 김연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인촌과 수당은 호남갑부 김경중씨의 두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수당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형 인촌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여기에 형제는 다섯살이나 터울이 져 어린 시절엔 서로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평생을 친한 형제로 지냈다. 인촌은 수당이 근대적 교육을 받도록 인도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일본으로 가게 해 중·고등학교와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도록 도왔다. 수당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찍이 ‘기업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오사카의 공장지대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결단의 계기였다. 이처럼 수당의 행적은 형 인촌의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수당이 기업가로서 길을 걷는 데는 인촌이 설립하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맡음으로써 시작됐다. 수당이 경영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도 1922년 형이 운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인을 맡고부터다. 이후 수당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하자 인촌을 적극 도왔다. 생전에 인촌은 수당이 없었으면 교육사업을 비롯한 자신의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곧잘 술회했다. 수당은 언제나 인촌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뜻을 펼치라고 말했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중앙학원이나 고려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등 모두 동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수당은 1940년대까지 고려중앙학원과 고려대에 기부한 재산이 연 평균 25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를 현 시가로 어림잡아 환산하면 1000억원(쌀값 기준)을 훨씬 넘는 액수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형이 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돕기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형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재정적인 지원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형을 만날 때마다 “형님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리다.”라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고향소식] 광주 충장로축제

    [고향소식] 광주 충장로축제

    ‘그때 그 시절 추억에 푹 빠져 보세요’ ‘7080 세대’를 테마로한 광주 충장로 축제(11∼16일)가 충장로와 인근 금남로 등 광주 도심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축제는 전남 도청의 이전이 최근 시작된 가운데 광주 최고 번화가의 옛 명성을 되찾고, 도심상권 활성화를 위해 기획됐다. 이 축제를 추진중인 광주시 동구는 “7080세대 등 중장년층과 신세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짰다.”며 “퍼레이드,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시연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올 처음으로 거리 퍼레이드 행사도 열린다.11일 오후 수창초등학교∼전남 도청 1.5㎞구간에서 학생·시민 등 2000 여명이 참가 했다. 고경명·김덕령·정충신 장군과 호위 무사들의 복장을 한 120여명이 출연, 임진왜란 당시 의병 출정 장면을 재연했다. 조선대 해외민속공연팀과 중국 무예팀 등이 동물 캐릭터 등의 복장으로 거리 행진을 벌였다. 행사 기간동안 옛 조흥은행 지점과 광주 우체국 앞에 추억과 향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9개의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추억의 전시관’에는 양은 도시락·책·걸상 등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셋트, 기성 세대들이 갖고 놀던 소품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동구 궁동 예술의 거리 일대에서는 추억의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다. 1970∼1980년대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에서 만남의 장소로 각광받았던 ‘음악 다방’과 ‘뽐뿌집’,‘남양 통닭’ 등도 마련했다.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시연과 추억의 포크송 경연대회, 충장병아리 축제, 청소년 댄스 경연대회, 락 페스티벌,7080끼짱 선발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70년대 복고 버스·무궤도열차가 행사장 일대에서 운행되고, 해외 풍물 시장과 충장로 상품 경매 코너도 있다. 또 추억의 거리조성·길거리 초상화·충장로 패션퍼포먼스(충장로1∼3가), 통과의례복 전시·추억의 사진 찍기·추억의 DJ박스·추억의 약장수(4∼5가), 추억의 동창회·추억의 고고장(옛 한국은행 광주지점),7080콘서트·청소년 열린음악회(금남로), 애완견 미용경연·어린이 인형극·도예체험(예술의 거리) 등이 이어진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中 ‘우주대국 야망’ 본궤도

    中 ‘우주대국 야망’ 본궤도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의 두번째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가 12일 오전 9시(현지시간) 성공적으로 발사됐다.2명의 우주인이 탑승한 선저우 6호는 이날 간쑤(甘肅)성 주취안(酒泉) 위성 발사기지에서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우주를 향해 날아갔다. 운반로켓과 분리된 선저우 6호는 오전 9시12분쯤 지상 200㎞ 고도의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유인우주선 프로젝트 총지휘자인 천빙더(陳炳德) 박사는 발사 39분 만에 선저우 6호의 발사 성공을 공식 선언했고 관제본부는 오전 9시33분쯤 탑승 우주인들과 첫 교신을 통해 비행 상태가 정상이라는 응답을 받았다. 선저우 6호는 매초 7.9㎞의 속도로 궤도를 비행, 지구를 한바퀴 도는 데 90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고도 200∼350㎞의 타원형 지구궤도를 약 119시간 비행한 뒤 오는 17일 오전 8시쯤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쓰즈왕치(四子王旗) 착륙장으로 귀환할 예정이다. 탑승 우주인은 2년여의 훈련과정을 거친 3개조 6명 가운데 선발된 페이쥔룽(費俊龍·40)과 녜하이성( 海勝·41)이다. 주취안 기지에서 발사장면을 지켜 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우주선의 성공적인 발사 및 궤도진입을 축하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이날 베이징(北京)의 우주통제센터에서 전송화면을 통해 발사과정을 시청했다. 이날 선저우 6호 발사 과정은 중국 국영 CCTV를 통해 생중계됐으며 5억명 이상의 중국인이 시청한 것으로 보인다. 선저우 6호의 주요 임무는 다양한 과학 실험이다. 우주에서 각종 실험을 통해 과학기술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다. 실험 항목으로는 우주에서의 육종과 인간세포 성장, 의약품 제조분야 등이다. 특히 벼·밀·보리·콩 등의 씨앗을 무중력 상태에서 싹 틔워 성장이 빠르고 수확량이 많은 새로운 유전자 변이 종자를 얻을 계획이다. 이밖에 ▲에이즈 치료제 조제 ▲반도체 관련 실험 ▲인체동력 측정 실험 ▲군사무기 실험 등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우주선 개발은 올해로 49년째를 맞는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1957년 발사된 직후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지시로 우주선 연구에 착수했다. 60,70년대 문화대혁명 등을 겪으면서도 우주개발을 포기하지 않았고 90년대 초 장쩌민(江澤民) 당시 공산당 총서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우주개발 계획을 본격화했다.2003년 10월15일 유인 우주선 1호(선저우 5호)를 성공적으로 발사, 세번째로 우주클럽에 가입했다. 선저우 6호 발사와 함께 미국이 전방위 정보 수집에 착수했다. 홍콩 언론들은 미국이 첩보위성, 정찰기, 전자도청 등을 통해 선저우 6호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선저우 발사 수일전부터 국가정찰실(NRO), 국가안보국 (NSA), 육군 정보부 미사일정보국, 공군 정보부 목표정찰처 등 4개 정보기구가 동원돼 주취안 위성 발사기지를 정밀 감시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첩보위성, 정찰기, 이지스함, 도청망 등을 통해 우주선 발사 및 미사일 연구개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중국 당국은 미국·타이완 등의 스파이들이 기지 상황을 염탐, 국가기밀이 누출될 것으로 보고 기지 외곽에 10m 간격으로 무장한 군인과 경찰을 배치해 차량과 사람의 접근을 통제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oilman@seoul.co.kr
  • 210억원 소유스 우주관광 네번째 고객 日 에노모토

    |도쿄 이춘규특파원|러시아 우주청은 10일 국제우주정거장에 체류하는 우주여행에 나설 네번째 고객은 일본인이 유력 후보라고 웹사이트를 통해 밝혔다. 이 우주여행 상품은 러시아 정부와 제휴한 미 스페이스어드벤처스사가 취급하고 있다. 지구궤도를 선회하는 국제우주정거장을 소유스 우주선으로 방문,1주일간 체류한다. 훈련비용을 포함해 2000만달러(약 210억원)의 여행비용이 든다. 일본 언론들은 11일 지금까지 웹사이트에 자신의 우주여행 준비사실을 공개했던 투자가 에노모토(34·전 라이브도어 이사)가 우주관광 유력 후보로 보인다고 전했다. 2001년 미국인,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인에 이어 세번째 우주여행자인 또다른 미국인 그레고리 올슨은 11일 여행을 마치고 소유스 우주선을 통해 귀환했다. 에노모토가 최종 우주여행자로 결정되면 일본인으로는 처음이다.taein@seoul.co.kr
  • 새방송 자본금 규모 얼마될까

    새방송 자본금 규모 얼마될까

    지난해 방송이 중단된 경인방송(iTV) 후속대책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이번 주부터 본 궤도에 오른다. 방송위원회는 iTV를 이을 새방송 사업사 선정 과정에 필요한 세부적인 선정 기준을 마련,11일 의결하는 데 이어 이 의결안을 가지고 14일 공청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방송위는 최준근 연구센터장을 중심으로 경인방송 후속대책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팀도 구성해둔 상태다. 일단 관심은 방송위가 제시한 세부적인 선정 기준에 쏠리고 있다. 선정 기준이나 배점 기준은 방송위가 그리고 있는 새 방송사업자에 대한 그림의 일단을 내비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11일 의결 뒤 공개할 것으로 보이는 새 사업자의 자본금 규모가 초미의 관심사다.iTV 실패의 주된 원인이 경영난이었기 때문이다. ●방송권역 확대, 약일까 독일까? 방송위가 지난달 7일 새 방송사업자 선정 일정을 공개했을 때 ‘약’과 ‘독’이 함께 들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특히 경기 북부지역까지 방송권역을 확대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약’으로 보는 쪽은 iTV 당시부터 숙원이 해결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쨌든 방송권역 확대는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독’이라 보는 쪽은 덩치가 커질수록 ‘힘의 논리’가 관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든다. 이미 방송위가 새 방송사업자의 선정 기준으로 ‘초기 자본금 2000억원 이상’을 제시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기본 비용 1000억원대에다 2∼3년간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비용까지 계산해 보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 비용을 생각했기에 권역확대가 결정됐고, 그 결정의 커튼 뒤에서는 누군가 웃고 있다는 ‘음모론’도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제2의 SBS 창사는 안된다” 이 음모론이 현실화될 경우 방송계는 또 한번 회오리에 휘말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SBS 창사 때처럼 시청률 경쟁이 격화되고 방송의 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언론노조,KBS·MBC·SBS·EBS노조,PD연합회·아나운서협회·방송기술인협회 등 거의 모든 방송 관련 단체들이 iTV노조를 이어받은 새방송창사준비위원회에 대한 지지선언을 낸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준비위측은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사업 참여를 준비해 왔지만, 거액의 자본 유치는 쉽지 않은 실정. 따라서 자본금 덩치가 지나치게 커지지 말아야 준비위쪽은 ‘불리한 자본력’이란 핸디캡에서 벗어나고, 다른 방송사들은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측면이 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제2의 SBS화 ▲외주 중심 채널화 ▲재벌과 족벌신문 우회 참가 등 3가지 반대사항을 내걸었다. 준비위 노중일 언론홍보국장은 “SBS가 개국할 때 자본금 800억원으로 시작한 것에서 보듯 자본금이 1000억∼1500억원이면 탄탄한 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 있다.2000억원 이상으로 넘어가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로는 ‘SBS창사 때와 같은 무분별한 시청률 경쟁’을 들었다. ●물밑 작업의 결론은 대타협? 방송위는 구체적 액수는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자본금이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iTV의 실패 원인이 만성적인 적자구조였던 만큼 “어쨌든 또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본금의 규모와 주요 배점 기준이 공개되면 각 사업자들간 물밑 작업은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CBS는 이미 ‘공익적 민영방송’을 컨셉트로 내걸고, 종교방송이라는 색채를 벗기 위해 법인명도 ‘기독교방송’에서 ‘시비에스’로 바꿨다. 지난 5일 이사회를 통해 사업 참여를 공식선언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역시 구체적인 사업계획서 작성에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탐색전도 한창이다.‘방송철학이 없이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거나 거꾸로 ‘돈 없이 철 지난 방송철학만 내밀고 있다.’는 식의 상호비방전도 있지만 ‘막판 대타결’ 가능성 때문에 공개적인 언급은 없다. 여기서 방송위가 생각 외로 ‘큰 액수’를 흘리고 있다는 점을 유심히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관계자는 “큰 자본금을 명분으로 다양한 사업자들을 끌어들일 경우 방송위로서도 특혜시비를 피할 수 있어 좋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은행PB영업 ‘궤도수정’

    은행PB영업 ‘궤도수정’

    시중은행들이 잇따라 ‘프라이빗 뱅킹(PB) 대중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수억원대 이상의 예금을 가진 고객에게 특별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해 오던 은행들이 서비스 대상을 수천만원의 예금 고객까지 확대하고 있다. 은행들이 PB 영업전략을 수정하는 것은 그동안 극소수 고객을 상대로 벌여온 ‘귀족 마케팅’이 투자에 비해 수익성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아직은 금융자산이 크지 않지만 조만간 ‘갑부’로 등장할 잠재적 부유층을 미리 포섭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소수에게만 온갖 특혜를 주고, 일반 고객들은 자동화기기로 내몬다는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3000만원 이상도 PB 고객으로 모십니다” ‘PB 대중화’에 가장 신경쓰는 곳은 우리은행이다. 황영기 행장은 지난달 ‘모든 고객을 PB 고객화하자.’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은행측은 PB 고객을 예치금 기준으로 30억원 이상,10억원 이상,3000만원 이상 등으로 세분화하기 시작했다.PB 고객 담당 직원들도 ‘마스터 PB’ ‘전문 PB’ ‘예비 PB’로 등급을 매겨 체계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우리은행은 특히 예비 PB에 해당하는 자산관리전문가 500명을 키워 각 지점으로 투입, 자산설계에 관심이 높고 적극적인 투자성향을 보이는 중산층 및 젊은 고객을 유치할 생각이다. PB 전문센터인 ‘골드 앤 와이즈’를 통해 예금액 3억원 이상의 고객을 집중관리했던 국민은행도 전략 수정에 나섰다. 그동안 공격적으로 늘려왔던 전문센터 확장을 16개에서 중단하고,1억∼3억원의 고객까지 아우르는 소형특화 점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은행 관계자는 “극소수 투자자를 위한 비밀주의 영업전략이 아닌 좀더 대중적인 자산관리 시스템을 갖춘 새로운 PB 브랜드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계 은행들도 한국의 PB 시장을 좀더 광범위하게 공략하고 있다.SC제일은행은 고객 기준을 5000만원까지 낮춰 1대1 평생 자산관리를 해주는 ‘프라이어러티 뱅킹’ 서비스를 지난달부터 시작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1억원 이상의 자산가를 대상으로 ‘프리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한국씨티은행도 고객층을 세분화한 ‘씨티골드’ 서비스를 내세우고 있다. ●“부유층 세분화일 뿐 서민금융 서비스 확대는 아니다” 은행들이 PB 대중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기존의 마케팅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백억원을 들여 PB전문센터를 개설하고, 고객 한 명에게 온갖 서비스를 제공해 왔지만 직접적인 수익은 크지 않았다는 게 PB 담당자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 PB 담당자는 “PB 영업은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다.”면서 “부동산종합대책 발표 이후 부자 고객을 상대로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해 각종 설명회를 열고, 고객의 취미 생활을 위해 호화스러운 미술전시회 등을 잇달아 개최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씨티은행 관계자는 “외국의 자산가들은 PB 직원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만 한국의 부자들은 여러 은행을 거래하면서 1%의 수익률에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면서 “유동성이 강한 한국 고객을 상대로 정통 PB 영업을 고집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PB 대중화를 서민금융 서비스 강화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극소수 고객에게 최고의 혜택을 주는 기존의 영업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바로 아래 단계의 우량 고객에게도 PB 서비스의 일부를 나눠주는 세분화 전략이 대중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서도 나타났듯이 은행에 100억원 이상을 예치한 194명 중 51명을 고객으로 확보하는 등 PB 영업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하나은행은 오히려 PB 고객 기준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결국 초기 PB 시장 쟁탈전에서 밀린 은행들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대중화로 나선 셈이다. 한국금융연구원 관계자는 “부유층이 될 가능성이 있는 젊은 중산층에게까지 PB 서비스를 확대하다 보면 이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서민들에 대한 서비스는 더욱 열악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2)-2세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2)-2세경영

    효성가(家)의 2세 경영이 닻을 올린 지 30여년. 선친인 만우 조홍제 회장의 ‘유훈 경영’ 방침대로 효성은 내실과 외양을 조화시키며 튼튼한 중견 그룹으로 커왔다. 대신 2세들의 분가와 맞물리면서 상대적으로 축소된 사세(社勢)는 아직 옛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3세들이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효성도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다. 안정 지향의 경영 색깔에서 도전과 진취가 ‘경영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것. 효성은 올해를 ‘뉴스타트의 해’로 삼고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그 선두주자에 효성의 3세 경영인들이 포진해 있으며, 이들의 성공적인 착근이 ‘신(新) 효성’의 성공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2세 분가 효성가(家)의 2세 분가는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만우 회장이 3형제(조석래-양래-욱래)에게 일찍이 효성의 주력 기업을 하나씩 떠맡기면서 독립 경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만우 회장은 “3형제가 장성했고, 기업의 경영책임자로서 제몫을 다하는 만큼 앞으로 지켜볼 따름”이라며 1978년 사실상 기업경영에서 손을 뗐다. 장남인 조석래(70) 회장은 70년대부터 주력 기업인 효성물산과 동양나이론, 동양폴리에스터, 효성중공업(4개사 모두 ㈜효성으로 통합) 등을 맡았다. 차남인 조양래(68) 회장은 자동차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한국타이어를 물려받았다. 성격이 활달한 3남 조욱래(56) 회장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대전피혁 사장에 올랐다.3형제는 이후 분리 경영을 해오다가 1980년부터 주거래 은행까지 달리할 정도로 철저한 독립경영을 하고 있다. 조석래 효성 회장은 83년 그룹을 대대적으로 손질해 ‘제2의 창업’을 선언, 화섬과 중전기, 화학, 건설, 정보통신 등으로 효성을 키워오고 있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은 한국타이어와 한국전지, 한타M&B 등을 통해 타이어사업의 수직 계열화에 성공했다. 반면 3남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은 외환위기 시절 효성기계 부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권토중래를 모색 중이다. ●만우 회장과 4자성어 2세 경영의 특징은 선친의 ‘유훈 경영’과 밀접하다. 만우 회장이 197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다. 그는 세 아들에게 ‘항상 가까이 두고 뜻을 새기라.’는 차원에서 각각 휘호를 하나씩 줬다. 장남인 효성 조 회장에겐 ‘덕을 숭상하면 사업이 번창한다’라는 뜻에서 ‘숭덕광업(崇德廣業)’이란 글귀를 남겼다. 차남 한국타이어 조 회장은 ‘쉬지 말고 힘을 길러라’라는 뜻에서 ‘자강불식(自强不息)’이란 글귀를 받았다. 막내인 동성개발 조 회장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4자성어를 받았다. 자식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우 회장의 일종의 ‘자식 사랑’인 셈이었다. 2세들도 선친의 뜻에 따라 지금껏 경영을 해오고 있다. 효성 조 회장은 화학과 정보통신 등으로 사업 범위를 넓혀갔고, 특히 타이어코드와 스판덱스 등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타이어 조 회장은 문어발식 기업 확장 대신에 타이어 ‘한우물 경영’에 충실했다. ●학자풍의 조석래 회장 조 회장은 학구적이며 논리적이다. 유행에 편승하거나 의욕만을 앞세운 경영보다 윤리적이고, 원칙적인 경영을 선호한다. 이 때문에 가끔은 융통성이 없다거나 보수적이라는 평도 나온다. 조 회장은 조씨가(家)의 학자풍 스타일 면에서 선친을 가장 많이 닮았다. 만우 회장과 조 회장 모두 젊은 시절엔 기업인보다 대학 교수에 관심이 더 많았다. 조 회장의 이런 학자적 소양은 경영에 발을 내디딘 초기부터 많은 빛을 봤다.74년 초 오일쇼크의 여파로 나일론 원자재가 품귀 현상을 빚었을 때 슬기롭게 넘긴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 회장은 나일론의 원자재인 ‘카프로락탐’ 구입난에 직면하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완성품인 카프로락탐의 직접 구입보다 매입이 더 쉬운 기초 원자재를 구입해 카프로락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조 회장의 광범위한 정보 획득과 주도 면밀한 연구가 없었다면 기대할 수 없었던 착상이었다. 조 회장은 일본 와세다대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화공학을 전공했다.56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해 홀로 고군분투를 하던 선친의 부름을 받고,1966년 효성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후 나일론 원사사업을 세계 4위까지 육성시켰으며,1975년엔 폴리에스터 공장을 준공해 효성을 명실상부한 화섬업계의 리더로 이끌었다. 또 한·미 재계회의와 한·일 경제인 회의, 태평양 경제협의회(PBEC) 등의 리더로서 국제 협력 증진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길경영’과 ‘권토중래’ 조양래(67) 한국타이어 회장은 나서기를 꺼려하고, 검소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조 회장은 5년 전에 산 국산 브랜드의 구두를 여태껏 신고 다닌다. 아직 쓸 만하다는 것이다. 조 회장이 하루는 직원들과 식당에 밥먹으러 갔는데 너무 구두가 낡아서, 직원들이 회장 구두를 찾지 못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언론에 얼굴 내밀기를 싫어하는 조 회장은 한국타이어 사장 시절에 딱 한 번 인터뷰에 응했다. 당시 사진 기자가 인터뷰용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것을 본 조 회장은 “무슨 전문가가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는가. 전문가이면 사진을 한 번만 찍으면 되는 것을. 필름만 그저 아깝게….”했다고 한다. 조 회장은 해외 출장에 수행원을 두지 않고 다닌다. 또 숙소도 일반 출장자들이 주로 머무르는 2급호텔에 투숙한다. 그의 이런 검소함과 치밀함은 한국타이어 경영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친에게 물려받은 이후 조 회장은 줄곧 타이어사업 하나만 매진해 세계 9대 타이어 메이커로 성장시켰다. 조 회장은 1988년 “경영은 전문가가 해야 한다.”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조 회장은 현재 한국타이어 복지재단 회장직을 맡아 ‘미신고 복지시설’ 지원 등에 앞장서고 있다. 3남인 조욱래 회장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대전피혁 사장에 취임,10년만에 대성과 효성알미늄, 효성금속, 효성기계, 동성, 동성개발 등 총 8개 계열사로 늘리는 경영 수완을 보였다. 특히 일본 스즈키사와 제휴해 오토바이 생산업체인 효성기계를 설립, 한때 대림산업과 함께 국내 오토바이시장을 양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 회장의 책임·내실 경영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한파는 효성기계를 어렵게 했다. ●효성가 3세 효성가 3세(조현준-현문-현상)들은 경영수업의 첫발을 모두 외국 회사에서 내디뎠다. 장남인 조 부사장은 모건스탠리를 거쳐 97년 부친인 조 회장의 부름을 받고,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효성에 입사했다. 차남 조 전무는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99년 효성 경영전략 2팀장으로 합류했다. 막내 조 상무는 세계적 경영컨설팅사인 베인&컴퍼니와 일본의 세계적인 통신사인 NTT도코모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효성에 입사했다. 장남인 조 부사장은 미국의 명문고인 세인트 폴 고교를 나와 예일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땄다. 그는 영어와 일어뿐 아니라 이탈리아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형제 가운데 가장 먼저 ‘효성맨’이 된 조 부사장은 효성의 독특한 사업구조인 퍼포먼스유닛(PU) 경영시스템을 도입했다. 또 섬유·산업자재·무역·정보통신 등 주요 사업군을 ㈜효성의 우산 아래로 모으면서 효성T&C(옛 동양나이론)·효성물산·효성생활산업·효성중공업을 합병시키는 등 굵직한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차남인 조 전무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했다. 고교 시절 조 전무의 별명은 ‘바야바’. 큰 키에 모범생인 그를 친구들은 이렇게 불렀다. 그는 98년 하버드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99년 효성으로 출근하기 전까지 미국 뉴욕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조 전무는 국제 변호사로서 큰 역할을 해냈다. 효성 도메인(www.hyosung.com)을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되찾아온 것.99년 닷컴 도메인을 선점한 사이버 ‘스쿼터(도메인 매점매석 행위자)’가 수억원을 요구해 왔지만, 미국 도메인등록협회와 미 법원에 제소,‘효성닷컴’을 찾아왔다. 미국 브라운대 출신인 3남인 조현상 상무는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오랜 직장 경험을 쌓았다. 그는 사내에서 손꼽히는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다. 조 상무는 현재 그룹의 핵심 현안인 성장엔진 발굴을 위한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으며, 그룹 장기전략 수립과 기업이미지 개선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3세들의 역할이 날로 확대되고 있지만 3세들의 경영 승계 시기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조 회장이 아직 정정한 데다 3세들이 배울 것이 많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국타이어의 3세 경영도 관심이 쏠린다. 조양래 회장의 장남인 조현식 한국타이어 부사장은 업무 권한을 팀장들에게 대폭 위임,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덕장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차남인 조현범 상무는 치밀한 분석력과 폭넓은 사고를 바탕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스타일.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이다. ●3세 혼맥 조씨가(家)의 3세 혼맥도 국내 명망가와 혈연으로 잘 엮여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전두환 전 대통령가(家)와 ‘사돈의 사돈’이라는 것과 이명박 서울시장과 사돈이라는 점이다. 또 권노갑 전 의원과도 ‘사돈의 사돈’이다.2세 혼맥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家)와 통혼으로 이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조씨가는 국내 내로라하는 정치 가문과 적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만우 회장이 일부러 정치권을 기피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이는 매우 뜻밖의 사실이다. 조석래 회장과 송광자(61) 여사는 슬하에 3남을 뒀다. 장남인 조현준(37) 효성 부사장은 2001년 11월 한국제분 이희상 회장의 3녀인 미경(29)씨와 결혼했다. 양가가 서로 안면이 있는 데다 미경씨의 형부가 적극 나서면서 서로 인연을 맺게 됐다. 두 사람은 연애 시절 테니스와 연주회 등을 관람하면서 사랑을 키웠다고 한다. 결혼식은 조 부사장의 모교인 세인트 폴 고교에서 했다. 현재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조 부사장의 처가인 이희상가(家)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간이다. 한국제분 이 회장(60)은 부인 정영화(59)씨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장녀인 윤혜(34)씨가 전 전 대통령의 3남인 재만씨와 혼례를 치렀다. 조 부사장과 재만씨는 동서간이다. 차남 조현문(36) 효성 전무는 이부식 전 해운항만청장의 장녀 여진(31)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여진씨는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거쳐 뉴욕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한 재원. 노무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다가 지금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서 일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조 회장과 송 여사가 이어줬다. 시부모와 며느리간 첫 만남은 2001년 6월 한·미 재계회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진씨는 당시 미국 로펌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로, 한·미 재계회의엔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했다. 연례회의에서 조 회장 부부와 여진씨는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안면을 트는 사이가 됐다. 인연은 다음해에 또 이어졌다.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재계회의에 세 사람은 같은 일정을 보내게 됐다. 당시 장남인 조 부사장이 막 결혼을 한 시기여서 주변으로부터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던 송 여사는 이렇게 화답했다고 한다.“아직 두명을 더 보내야 한다.”고. 이후 조 회장은 조 전무에게 여진씨를 소개해줬고, 두 사람은 3개월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조 회장과 여진씨의 부친인 이 전 청장과는 서로 알고 지내던 지인이었으며, 조 전무의 동생인 조현상 상무와 여진씨의 오빠는 미국 브라운대의 선후배 사이일 정도로 양가는 사돈으로 맺어지기 전부터 가까웠다.3남 조 상무(34)는 아직 미혼이다. 효성가의 방계 3세들의 혼맥도 화려함에서는 빠지지 않는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과 홍문자(64) 여사는 2남2녀를 뒀다. 미국 뉴욕의 FDU대 수학과 교수인 맏딸 희경(39)씨는 연세대 법대 교수인 노정호(43)씨와 혼례를 치렀다. 차녀 희원(38)씨는 재미교포와 결혼했다. 장남 조현식(35) 한국타이어 부사장은 차동완 카이스트 교수의 딸인 진영(28)씨와 인연을 맺었다. 진영씨의 모친은 고 설경동 대한전선 창업주의 차녀인 설영자씨다. 차남 조현범(33) 상무는 2001년 9월 이명박 서울시장의 3녀인 수연(30)씨와 결혼했다. 최근에 보기 드문 정치인과 재벌의 혼사였다. 조욱래(56) 동성개발 회장의 자제는 모두 2남 1녀. 장남인 현강(30)씨는 삼정KPMG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으며, 차남 현우(22)씨는 미국 TUFTS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장녀인 윤경(27)씨는 홍준기 삼공개발 회장의 아들인 석융씨와 혼인했다. 홍 회장의 딸인 지연씨가 권노갑 전 의원의 아들인 정민(35)씨와 결혼해 조씨가는 권 전 의원 가문과 한다리 건너 사돈간이다. ●효성호를 이끄는 전문경영인 이상운(53) ㈜효성 사장은 그룹 경영을 총괄하는 전문경영인. 경기고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76년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중동 등에서 ‘섬유수출의 귀재’라는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효성물산 기획실과 시장개척실, 사업개발실 등을 거치며 업무경험을 쌓아왔다. 특히 외환위기 때에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효성그룹의 주력 4개사를 통합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송형진(62) ㈜효성 건설PG장은 건설 경력 35년이 넘는 전문 경영인이다.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며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가장 강조한다. 특히 사람을 관리하는 팀워크를 중요시해 건설PU장 시절, 사업이 진행중인 현장을 한 번 이상은 방문해 현장 직원들과 어울리곤 했다. 경기고와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나왔다. 김재학(57) ㈜효성 중공업 PG장 겸 전력PU장 사장은 기계공학 전공자답게 정확함과 세밀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다.‘경영은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구성원의 조직력 결속을 중시한다. 경기고와 서울대 기계공학과 출신이다. 최병인(44) ㈜효성 정보통신PG장 겸 노틸러스효성㈜ 사장은 효성의 전문경영인(CEO)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다. 매킨지 컨설턴트 출신이며,2000년 효성에 합류했다.2002년 그룹 정보통신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업체인 효성데이타시스템과 효성컴퓨터를 합병해 노틸러스효성㈜을 출범시켰다. 우신고와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나왔다. 유효식(58) ㈜효성 지원본부장 부사장은 1974년 동양나이론에 입사한 이후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외환위기 때에는 ‘책임 경영’ 체제 구축을 위해 경영 시스템을 ‘PU체제’로 전환시켰다. 인천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정윤택(50) ㈜효성 재무본부장 전무는 종합조정실과 재무본부 등에서 근무한 베테랑급 재무 전문가다. 추진력이 탁월하고, 금융 및 산업계의 인적 네트워크가 뛰어나다. 서울 사대부고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류필구(60)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 겸 노틸러스효성㈜ 사장은 95년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의 최고경영자(CEO)에 올라 10년째 경영하는 국내 IT업계 최장수 CEO다. 사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고객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현장 경영을 강조한다. 안동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조충환(63) 한국타이어 사장은 샐러리맨 출신으로 말단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전형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조 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64년 삼성물산에 입사, 도쿄 지사장 등을 거친 ‘상사 수출맨’이다.83년 한국타이어에 입사한 이후 기획과 재무 등을 거친 뒤 97년 12월 한국타이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golders@seoul.co.kr ■ 바깥활동 활발한 며느리들 효성가(家) 며느리들은 세련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커리어 우먼’쪽에 가깝다. 경영수업을 쌓고 있지는 않지만 바깥 활동엔 꽤 적극적이다. 흔히 며느리들은 안으로 돌리고, 딸들은 출가외인으로 치부하는 국내 재벌가(家) 문화와 거리가 있다. 딸이 귀한 가문이어서 시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의 여성 후원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조석래 회장의 부인으로 경기여고와 서울대 미대를 나온 송광자(61) 여사는 시어머니로서 며느리들의 사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여성도 일을 할 수 있을 때 실컷 해야 후회가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심지어 며느리들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보약을 다려줄 정도다. 아들만 있는 송 여사는 며느리가 모두 딸 같다고 한다. 장남인 조현준 부사장의 얘기다.“지난달 제수씨가 북핵 6자회담 때문에 중국 베이징에 출장을 가게 됐는데 어머니께서 열심히 하고, 꼭 좋은 결과를 갖고 오라고 북돋워주더라고요.” 송 여사가 그렇다고 며느리 뒷바라지나 집안 살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적십자사와 종교 활동을 통해 이웃돕기에 나서고 있다. 주한 외국대사 부인들의 모임인 서울 가든클럽에서 봉사 활동도 한다. 또 미대 출신으로 국내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미술관 지원사업이나 일반인에 대한 현대미술 교육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3세 며느리들은 이구동성으로 “시어머니께서 무척 배려를 해주신다.”면서 “일이나 공부 때문에 늦게 귀가하면 어깨도 주물러주고, 저녁도 대신해 때로는 당황스럽고, 몸둘 바를 모를 때가 적지 않다.”고 했다. 송 여사의 이런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인 고 만우 조홍제 회장의 영향이 크다. 당시 재계에서 엘리트였던 만우 회장은 며느리들에게 평생 교육을 강조했다. 예컨대 며느리들에게 앞으로 자가용 시대가 온다며 면허증을 따도록 했으며, 연료로 연탄을 주로 쓰던 시절 차세대 연료인 LPG(액화석유가스)에 관한 공부를 주문하기도 했다. 또 미술을 전공한 맏며느리인 송 여사에겐 신혼 초에 살림만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전시회를 열어 줄 정도로 미술 공부를 독려하곤 했다. 며느리 건강을 위해 보약을 챙겨주기도 했으며, 훗날 맏며느리가 그림 공부를 그만두자 만우 회장이 이를 가장 애석해했다. 조석래(70) 회장의 맏며느리인 이미경(29·조현준 부사장 부인)씨는 서울대 음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식품영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조 부사장은 “대학에서 음악(피아노)을 전공했지만 다른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 같다.”면서 “이번엔 한국 전통음식을 본격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다.”고 했다. 둘째 며느리 이여진(31·조현문 전무 부인)씨는 1997년 외무고시,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을 거쳐 현재 국가안전보장회(NSC) 사무처에서 일하고 있다. 조 전무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면서 “자기 절제가 뛰어난 것이 와이프의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golders@seoul.co.kr ■ 재주꾼인 3세들 효성가(家)의 3세들은 재주가 다양하다. 취미와 스포츠, 외국어 모두 수준급이다.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딴따라’ 기질도 있어 보인다. 장남 조현준(37) 부사장의 설명은 이렇다.“부친과 조부는 뭐든 하려면 제대로, 일정 수준 이상까지 요구했었습니다. 덕분에 운동도 종목을 바꿔가며 취미 이상으로 실력을 키웠고, 다른 분야도 비슷했었습니다. 특히 외국어는 영어, 일본어는 기본이었고, 제3외국어도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조 부사장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그는 미국의 세인트 폴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야구부 주장을 맡았다. 미식 축구 대표선수로도 활약했다. 지금은 경영수업 틈틈이 사내 야구팀과 직장인 리그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스키와 스쿼시, 테니스는 선수급 기량이다. 그는 한때 건축학과 교수가 꿈이어서 건축과 미술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탈리아의 바티칸박물관 복구 작업에 참가한 특이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지금은 한옥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화재 보호단체인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운영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는 소믈리에(와인감별사) 자격증을 따로 취득할 정도로 와인 전문가이다. 차남 조현문(36) 전무는 음악적 재능이 대단하다. 대학 시절엔 가수 신해철 등을 비롯한 중·고교 동창들과 어울려 보컬그룹 ‘무한궤도’를 결성,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피아노 뿐 아니라 작곡과 가창력도 수준급이다. 그의 곡들은 ‘무한궤도’ 1집에 수록돼 있다. 조 전무는 또 축구 마니아다. 미국 유학 시절에 축구클럽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스키와 테니스 실력은 형인 조 부사장에 못지 않다. 3남 조현상(34) 상무도 스포츠와 음악에 관심이 많다. 그는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축구팀 선수로 활동했으며, 브라운대 아카펠라 그룹에 가입해 밴드 리더로 활동했다. 아카펠라 해외 공연을 추진하기도 했다. 조 상무도 형들과 마찬가지로 ‘공 운동’은 모두 좋아한다. 축구와 스키, 스케이트 등은 한때 교내 대표선수로 활약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국립전문대 학장 봉급 올려줘야” 총대 멘 교육부?

    교육인적자원부가 국립 전문대학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의 보수를 올려 줄 것을 중앙인사위원회에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신입생 충원을 하지 못하는 등 경영난에 허덕이는 사립 전문대학들이 많아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태에서 이같은 국립 전문대 학장 등의 보수 인상안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총장과 월 110만원 차이 나 공무원 보수업무를 맡고 있는 중앙인사위원회 관계자는 7일 “교육부로부터 전문대학 학장 등의 보수와 여비를 올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현재 자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립 전문대학은 국립의료간호대, 원주대학, 한국재활복지대학, 익산대, 철도대 등 5곳이 있다. 전문대학 학장은 공무원 보수규정상 특3호봉 지급대상자로 한 달에 299만 4000원을 받는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 4년제 종합대학교 총장들은 특1호봉인 426만 5000원을 받는다. 하지만 규모가 다소 작은 여수대, 금오공대, 한국체육대, 방송통신대, 교육대학, 산업대 총장들은 특2호봉인 403만 4000원을 받는다. 교육부는 이를 감안해 전문대학 학장들의 봉급을 특2호봉으로 올려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이승근 부장은 “4년제 대학총장은 장관급이나 전문대 학장은 일반직 1급 정도의 보수를 받고 있다.”면서 “방치하고 소외시킨 전문대학에 대한 이미지 제고로 직업교육을 제 궤도에 올려야 하지 않느냐.”고 인상 필요성을 역설했다. 교육부는 보수 이외에 출장비도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문대 학장 출장비를 4년제 대학의 부총장이나 금오공대, 여수대, 한국체대, 목포해양대, 한국방송통신대, 교육대학 및 산업대학 총장처럼 대우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출장때 실비로 숙박비를 지급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는 하루 4만 6000원을 정액지급받는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전문대 교육발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라며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인상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대학 학장의 경우 3000명에서 8000명의 대학생을 관할하는 등 업무에 있어서도 4년제 대학 총장과 차별할 합리적 사유가 없다고 밝힌다. 교육부는 또 전문대학과 4년제 대학 교원의 호봉도 단일화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문대학과 4년제 대학 교수의 자격기준이 통일된 만큼 호봉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호봉은 최저 8만원에서 최고 20만원 정도 차이 난다. ●교육부의 무사안일 비판 이에 대해 중앙인사위원회는 신중한 입장이다. 강기창 성과후생국장은 “해외사례를 수집하는 등 종합적으로 실태를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관계자들은 “4년제 대학총장과 전문대 학장의 업무 난이도를 비교해 봐야 한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 관계자는 “교육공무원들은 지금도 보수가 높은 수준인데 교육부가 관련 단체 주장의 타당성을 충분히 따지지 않고 그 주장을 그대로 중앙인사위로 떠넘기고 있다.”며 교육부의 무사안일함을 비판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론스타 외환銀인수 또 논란

    국세청이 6일 외환은행 대주주인 론스타 자회사를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데 이어 정치권 일각에서는 2년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가 ‘원천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5일 국정감사 답변에서 금융감독위원회 등과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혀 11월부터 본 궤도에 오를 외환은행 매각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커졌다.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측은 “재경부와 금감위가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팔기 위해 2003년 8월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BIS)이 건전했던 외환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했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측은 론스타가 외국계 펀드이기 때문에 국내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안 되자 BIS 비율이 8.2%이었던 외환은행을 ‘잠재적인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했다고 지적했다. 부실금융기관에 지정되면 펀드가 은행을 인수할 수 있다. 금감위는 당시 외환은행의 증자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BIS 비율을 8.2%가 아닌 6.2%로 산정한 뒤 론스타에 팔았다는 것. 특히 재경부가 금감위에 압력을 행사,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예외로 인정토록 도왔다는 지적이다. 2003년 9월3일 재경부가 금감위에 보낸 공문에는 “외환은행의 조속한 경영정상화가 이뤄지고 한국수출입은행의 외환은행에 대한 출자자금이 회수될 수 있도록 동일인(론스타)의 주식보유한도 초과승인을 적극 검토해 주기를 바란다.”고 명시됐다. 최 의원측은 금감위가 론스타에 도쿄스타 등 외국금융기관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라고 요구했으나 론스타가 반발, 외환은행의 외자유치가 어렵게 되자 재경부와 금감위가 잠재 부실금융기관이라는 편법으로 론스타에 특혜를 줬다고 밝혔다. 최 의원측은 오는 10일 재경부 국정감사에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관련된 모든 문제점과 자료를 공개하고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금감위 관계자는 “은행법 시행령에는 ‘부실금융기관 등 특별한 사유’가 인정될 때에는 금융기관이 아니더라도 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면서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말했다. 재경부 관계자도 “당시 외환은행은 증자가 안돼 경영상 큰 어려움을 겪었고 론스타 자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외환은행의 BIS 비율은 2003년 말 외환카드 사태까지 겹쳐 5% 이하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가격은 구주 5400원, 신주 3000원 등 1주당 평균 4250원으로 회계법인이 외환은행을 실사한 가격보다도 2.4배나 비싼 돈을 내게 한 것이 특혜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론스타 자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외환은행은 당장 쓰러질 상황이었고 당시 대주주였던 코메르츠 뱅크는 증자를 거부해 예외조항 적용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측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해 국정감사에서 다시 쟁점으로 불거질 것으로 예상된다.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지구선 더 갈 곳이 없다”

    미국의 백만장자 과학자 그레고리 올슨(60)이 1일(현지시간) 사상 세번째 개인 우주관광에 나섰다. 2000만달러(약 200억원)를 내고 우주 관광에 나선 올슨은 물리학자 출신으로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본사를 둔 적외선 카메라 제조사를 공동 창업한 인물이다. 올슨과 러시아 우주비행사 발레리 토라레프, 미국인 비행사 윌리엄 맥아더가 탑승한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 TMA-7은 이날 오전 7시55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된 뒤 9분 만에 지구 궤도에 정상 진입했다고 우주센터측이 밝혔다. 이 우주선은 3일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착할 예정이며 올슨은 이곳에서 8일간 머문 뒤 11일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로 귀환한다.ISS에서 장기 체류해온 러시아 우주비행사 세르게이 크리칼리오프와 미국인 비행사 존 필립스가 동행, 귀환한다. 올슨은 우주선 탑승에 앞서 “로켓이 발사된 뒤 아주 편안하고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문화마당] 카트리나와 인류 삶의 지향점/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 교수

    카트리나가 가더니 리타가 또 미국을 강타했다. 이게 모두 인간이 초래한 환경 재앙이라고 한다. 나는 강의 시간에 이런 질문들을 학생들에게 간혹 던진다.‘은하수를 본 적이 있는가?’, 혹은 ‘물이 깨끗해 밑이 다 보이는 그런 깨끗한 냇물을 본 적이 있는가.’하는 질문 말이다. 우선 밤하늘을 보자. 서울 밤하늘은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별이 너댓 개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저 금성이나 목성, 북극성 등등 손가락으로 다 셀 정도이다. 사실 밤하늘의 별이 다 보이면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찬다. 그렇게 별이 많다. 그런데도 별이 안 보이는 건 공기가 더러워진 탓이고 공연히 불이 환해진 탓이다. 우주 얘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겠다. 우리 은하계의 지름이 10만 광년이라니 참 엄청난 거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그 지름이 한 140억 광년쯤 된다나. 이건 도대체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이 안 되는 거리이다. 그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이 지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지구에서 매일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을 바라보면 항상 이런 상념에 젖을 수 있어 좋다.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명상의 소재를 밤하늘은 항상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강도가 아주 강한 여행 체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 우주 비행사가 그들이다. 여행이란 자기가 사는 터전을 떠나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자기 터전을 완전하게 떠나 실제로 그 터전을 온전하게 직접 볼 수 있는 방법은 지구 위로 올라가 보는 수밖에 없다. 이걸 우주 비행사들이 한 것이다. 창연한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아름답기 짝이 없단다. 게다가 동행자도 몇 사람밖에 없다. 또 너무 조용하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지구 위의 궤도에서 우주선 밖으로 혼자 나와 우주선을 고치거나 다른 작업을 할 때 느끼는 그 심정을. 발밑에는 찬연(燦然)한 지구가 펼쳐져 있고 사방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포진해 있는데 이 큰 우주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을 때 느끼는 그 고독 혹은 경외감. 달에까지 갔던 우주인들은 더 강한 체험을 했다. 달에 가면 지구 위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런데 저기서 바글바글거리면서 세계 최고이니 동양 최초이니 하거나, 나 잘났다 너 못났다 하면서 사는 인간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어떨까? 저 작은 별 위에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했던 게 다 부질없어 보이지 않을까? 아마 그저 아이들 장난처럼 보일 게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게 우리에게 소중한 하늘과 별, 다시 말해 우주를 다 잃고 뭐가 남는다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청명한 하늘,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사랑스러운 이웃인 동물들 등 이런 소중한 것 다 버리고 인생에서 무엇을 찾겠다고 나다니고 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상황에서 벤처 사업을 하고 무역을 해서 돈을 번다거나 국회의원이 되어 권력을 조금 잡아본다거나 하는 일이 뭐 그리 대수로울까. 다 한바탕 꿈이고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 하찮은 것들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불나방처럼 몸을 불사르고 있다. 앞으로 우리 인류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은 어떻게 보면 뻔하다. 굳이 서양사람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앞으로 우리 인류는 헬렌과 그의 남편인 스코트 니어링이 살았던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의 삶은 비정상적이거나 드문 삶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다. 인류가 공멸을 피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 길밖에는 없을 게다.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 교수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예언서 ‘정감록’을 한 채의 기와집에 비유하면, 정면 기둥은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아닐까 한다. 얼핏 눈에 잘 띄진 않으나 집의 뒷면에도 기둥은 있는 법이다. 천문과 역법이 그에 해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풍수와 미륵에 대해선 그동안 제법 자주 이야기를 해온 셈이다. 하지만 천문과 역법에 관해선 따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자니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천문사상이 ‘정감록’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보았으면 한다.‘정감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혜성이 진성(軫星) 머리에서 나타나 은하수로 들어간 뒤 다시 자미(紫微)를 범하고 두미(斗尾)로 옮았다가, 두성(斗星)을 거쳐 남두(南斗)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면 대중화(大中華)와 소중화(小中華)가 일시에 멸망하리라.”(감결) 이것은 정감의 예언이다. 그는 여러 별자리에 괴변이 일어나면 중국(대중화)과 한국(소중화)이 동시에 망한다고 했다. 요모조모 ‘정감록’을 잘 뒤져보면 비슷한 내용이 자꾸 눈에 띈다.“진성(軫星) 머리에서 혜성이 나와 몇 달 동안 없어지지 않네. 그 뒤 별들이 남극(南極)에서 싸우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네. 하늘 길이 한번 트이니 하늘 북이 두 번 울리네.”(삼도봉시) 조선건국의 주역 정도전이 지었다는 예언시의 일절이다. 실제로는 위작이 분명한데 이 시에 등장하는 천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더 새겨봐야겠다. 비록 그렇다 해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자미(紫微)에 저녁 무지개가 떴네. 다시 들러서 동쪽으로 나뉘니, 나라에 변괴가 있고, 상사가 참혹하네.”(경주이선생가장결) 역시 천문을 살펴 자미성에 이상한 징후가 일어날 경우 나라에 변괴가 있다고 예언하였다.‘정감록’에서 이와 엇비슷한 예언을 찾아내 일일이 언급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과 혜성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사람들은 28수(宿)를 중시했다. 이것은 황도(皇道)에 가까운 별자리들이었다. 황도란 지구에서 태양의 운행괘도를 일년간 연속적으로 관찰할 때 하늘에 그려지는 하나의 원이다.28수는 황도의 동서남북에 각기 7개씩 배치돼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관심을 표했던 별자리는 기성(箕星·궁수좌), 벽성(壁星·페가수스좌), 익성(翼星·바다뱀좌) 그리고 진성(軫星·까마귀좌)의 4개였다. 특히 진성에 대한 관심은 아주 유별났다. 이 별자리를 이른바 “청구칠성”이라 하여 청구 또는 한반도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정감록’에서도 진성의 머리에서 혜성이 나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예언한 것은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뿌리를 캐 보면 진성은 신라의 국운을 담당하는 별자리였다. 헌덕왕 7년(815)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단초를 발견한다. 그 해 서쪽 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러자 도적 떼가 연달아 일어나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해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변고를 예언케 하는 천문 현상이 있었고 문제의 별이 등장한다.“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나타나 서쪽을 향해 뻗어 갔다. 그 빛의 길이가 여섯 자쯤 되고 너비가 두 치나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큰 별은 혜성이다. 만일 아니라면 별의 길이와 너비가 그처럼 컸을 턱이 없다. 혜성이 서쪽으로 움직여 가자 천문을 담당하는 신라의 관리들은 반란의 진원지가 서쪽임을 알게 되었다. 하필 혜성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시작된 것은 두 별자리가 28수 가운데 서로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익성과 진성은 이른바 남방주작(南方朱雀)에 해당한다. 황도의 남쪽에 있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방금 말한 두 개의 별자리 말고도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의 다섯 별자리가 더 있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진성에 달린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엔 사정이 달랐다. 고구려의 운명은 서쪽 하늘의 별들이 맡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측의 역사기록에 나와 있다.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4월, 필(畢)과 묘(昴) 사이에서 혜성이 관측되었다. 그러자 허경종(許敬宗)이 보고하기를,“혜성이 거기 나타난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입니다.”(‘삼국사기’, 권 22)라고 하여 당 태종을 기쁘게 하였다. 허경종은 천문에 능한 당나라 관리였다. 그 역시 ‘정감록’이나 ‘삼국사기’와 똑같은 방식을 써서 고구려의 비참한 종말을 예언했다. 필성과 묘성은 모두 황도 서쪽의 별자리들이다. 묘성(황소자리)은 누(婁) 및 위(胃)와 더불어 호랑이 새끼 3마리로 여겨졌고, 필성(오리온자리)은 호랑이의 입으로 이해되었다.‘정감록’을 전파한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되도록이면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그런 그들도 고구려의 별인 백호를 저버리고 주작(진성)을 국운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통일신라 이후 천년 동안 내리 지속돼 온 전통의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미, 남북두성, 그리고 남극성에 숨은 뜻 변란을 알리는 혜성은 ‘정감록’에 객성(客星) 또는 요성(妖星)으로 나온다. 혜성은 때로 자미를 침범하거나 북두칠성, 남두육성도 쳐들어간다. 심지어 남극성을 유린하기까지도 한다. 이들 별자리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자미는 이른바 북쪽 하늘을 셋으로 쪼갰을 때 그 가운데 하나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태미(太微), 천시(賤視) 및 자미를 삼원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자미는 북두칠성의 북쪽에 위치한 별로 천자 또는 임금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일찌감치 백제 기루왕 9년(85) 4월에 이미 객성이 자미를 침범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시도가 있으리라는 예언이었다.‘정감록’은 18세기에야 등장했다고 할 때, 최소한 그보다 1600년이나 앞서 반역에 관한 천문예언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밤하늘을 수놓은 숱한 별자리 가운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아는 것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그 반대편인 남쪽 하늘엔 남두육성(南斗六星·궁수좌)이 있다. 이 별들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7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로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섬겨왔다. 그에 비해 6성은 삶의 세계를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6성은 서양식 명칭으로는 궁수좌인데,28수의 하나인 기성과 중복되기도 한다. 그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별자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들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그랬다. 지금까지 모두 22개나 되는 고분에서 다양한 별자리 그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19개의 고분에 등장하고 있으며, 남두육성 역시 최소한 10군데서 확인되었다.6성이 발견된 고분벽화에는 7성이 어김없이 짝을 이뤄 나타난다. 고구려인들은 두 별자리를 함께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요컨대, 생과 사를 주관하는 별자리가 6성과 7성이었다. 그런데 혜성이 그 별들을 모두 침입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전란,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조짐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정감록’은 한국 고대의 천문 전통에서 이런 예언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기성(箕星)이 희어질 무렵 피가 흘러 절구공이가 떠내려가고, 천리가 한 책상이 되니 갑옷에 두 뿔이 나는구나.”(정북창비결)라는 구절이 있다. 남두육성으로 볼 수도 있는 기성은 태풍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이 별자리가 풍해를 막아준다며 받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남부지방을 강타한 허리케인도 기성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가 강물을 이뤄 민가의 절구공이가 떠내려갈 지경이라면 단순히 자연재해로 간주하기 어렵다. 전란의 피해로 봐야 옳을 것도 같다. 인용문의 뒷부분에 갑옷이 등장한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흉조라는 점에선 남극성(노인성이라고도 함)을 당해낼 별이 없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한 것도 남극성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경순왕 8년(934) 9월 그 별이 나타나자 왕은 고심했고, 이듬해 10월 마침내 항복문서를 바쳤다.(‘삼국사기’ 권 12) 때로 남극성은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풀이된다. 남극성이 빛을 발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감록’에서 보듯 혜성이 남극성을 침범하는 경우라면 기성 왕조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는 예언으로 풀이된다. 혜성뿐만 아니라 무지개가 별을 꿰뚫을 경우도 흉조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백홍(白虹·흰 무지개)이 해를 꿰뚫고 지나간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국왕이 바뀔 징조로 여겨졌다. 예컨대 고려 현종 5년(1013)에도 “흰 무지개가 관일(貫日)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데,‘정감록’에도 유사한 표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오성의 변괴 이밖에도 ‘정감록’엔 오성 즉,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및 토성의 변화에 대한 언급이 제법 많다. 물론 국가의 운명이 그와 직결된다는 전제 아래 끔찍한 예언이 도처에 숨겨져 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보면 오성은 사실 고대로부터 큰 관심거리였다. 고구려 차대왕 4년(149) 5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오성이 동쪽하늘에 모였다. 목성(세성 歲星), 화성(형혹 熒惑), 금성(태백 太白), 수성(진성 辰星) 및 토성(진성 鎭星)이 한자리에 늘어선다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실상 흉조였다. 그러나 담당관리인 일자(日者)는 왕이 화낼까 걱정돼 거짓말로 둘러댔다.“이는 임금님의 덕이요, 나라의 복을 뜻합니다.” 왕은 그 말에 만족하였다.(‘삼국사기’ 권 15) 고구려는 일찍부터 천문이 발달한 나라였다. 고분벽화마다 별자리를 그려놓을 정도였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국초부터 조정에 천문을 담당하는 특수 직책이 설치돼, 별을 보고 국운을 점치는 관리가 존재했다. 오성에 관한 예화에서 보듯 가끔은 담당관리가 국왕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예언이라면 고려나 조선시대처럼 풍수가 아니라 천문이 근간을 이뤘다. 그런데 오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길조로 해석될 때도 있었다. 고려 인종 10년(1132) 11월 동짓날, 오성은 물론 해와 달까지, 그러니까 칠요(七曜)가 정북방향에 모여들었다. 인종은 이 같은 길조가 예언서에 이미 예고돼 있다며, 국정을 일신할 중요한 계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려사’ 권 16) 칠요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신라 때부터도 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은 칠요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을 뜻하는 점이 있었다 한다. 영웅이 될 기상을 가진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삼국유사’) 본래 칠요란 개념은 서양 고대에 있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의 신들이 인간세상을 관장한다고 보았다. 성신(星辰) 신앙이라고 할 만하다. 별의 신들은 전쟁, 흉년, 지진, 가뭄과 홍수를 마음대로 하며, 모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어졌다. 특히 행성인 오성과 해와 달을 합한 칠요는 더욱 중요시 됐다. 칠요의 신들은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사를 맡아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칠요신앙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에도 전파된 것 같다. 김유신이 태어난 7세기에는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한국 고대에 칠요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오성의 신들이 열렬한 신앙대상이 돼 있었다는 점은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봉의 발풍사란 사찰에는 석가여래상 앞쪽에 토성(塡星 또는 鎭星)의 신을 새긴 조각이 봉안돼 있었다 한다.(‘고려사’ 권 1) 궁예 왕은 토성의 신을 예언서 ‘고경참’의 저자로 믿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오성과 칠요의 신은 한국 민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영은 ‘정감록’에 여전히 남아 있다.“계축년에 세성(歲星·목성)이 바다에 잠기니 왕자가 섬으로 도망친다.”(오백론사)라고 했다. 목성은 천문학상 매우 중요한 별이다. 그 공전궤도를 12등분해 목성이 처한 위치에 따라 한 해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을 정도다. 이를 세성기년법(歲星紀年法)이라 하는데, 목성에 일어난 자그만 변화도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징조로 이해됐다. 화성의 변화도 중요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 때 달이 형혹성(熒惑星·화성)을 침범하자 일관(日官)은 “귀인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풀이하였다. 최근 발견된 ‘송하비결’에도 화성에 관한 예언이 실려 있다.“형혹성이 기성을 범하리니 북쪽 문에서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런 용이 여의주를 얻으리라.” 혹자는 화성이 목성을 침범했으므로 한반도엔 전쟁에 버금갈 만한 큰 변고가 일어난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화성은 화란 또는 전쟁의 징후를 알려주는 별이고, 목성은 가득차거나 이지러지거나 또는 변화가 멈춘 현상을 보여주는 별이라서 그렇다 한다. 목성은 나라의 명운을 예고하기에 적합한 별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성을 화성이 쳐들어갔다는 것은 나라에 병란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정감록’엔 금성과 수성에 관계되는 흉한 예언도 많은 편이다.‘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역사에는 오성의 길조가 꽤 많이 언급됐다는 사실이다. ●복성이란 존재 ‘정감록’에도 천문에 관한 예언이 길조로 나타난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산의 동쪽과 삼남(三南)에 복성(福星)이 두루 비친다.”(서계이선생가장결)라고 한 대목이다. 복성은 녹성(祿星) 및 수성(壽星)과 더불어 삼성이라 일컬어진다. 보통은 북두칠성의 왕별인 무곡성을 복성으로 믿고 있다. 조선후기의 유명한 고소설인 ‘토끼전’에선 복덕성(福德星)으로 간주해 목성으로 본다. 복성에 관해 한 가지 재밌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변도탄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천문에 밝았다.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원으로 일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천기를 보았더니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역력했다. 그는 국난에 대비해야 된다고 상소했으나, 인심을 흉하게 만든다며 도리어 관직만 빼앗겼다. 변 선비는 낙향을 결심했는데 어느 날 밤 복성(福星)이 남쪽으로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소 저장했던 양식을 소달구지에 싣고 복성의 빛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한 골짜기에 도착했다. 복성의 인도를 따른 것이다. 과연 얼마 안 되어 왜적이 침입해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변 선비가 터를 잡은 곳은 아무 일도 없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미리 앞을 내다 본 변 선비의 뛰어난 지혜와 충성심에 감탄해 상을 내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복성(福星)마을을 이루게 됐다 한다. 복성을 따라 피난처를 구했다는 전설이나 복성을 보고 길지를 찾을 수 있다 한 ‘정감록’ 예언은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들 역시 별빛의 인도로 먼 길을 걸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할 수 있었다 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의 하늘에선 더 이상 별빛을 보기 어렵다. 별을 봤댔자 어느 별이 어느 별인지 구별도 못할 만큼 현대인들은 천문에서 멀어졌다. 별은 더 이상 우리의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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