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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기탁선생/대한매일신보 창간… 항일의식 고취(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결성… 만주서 독립군 양성 주도/의용군 국내에 파견,일제기관 등 습격 양기탁선생은 국운이 꺼져가던 대한제국말기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고취한 언론인이자 신민회등 비밀결사를 통해 무장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1871년 4월2일 출생한 선생은 1938년 4월19일에 운명,이달로서 서거 56주기와 탄신 123주년을 맞게 됐다. 평양 출신인 선생은 소년 시절 영어를 배워 1895년 미국인 게일박사의 한영자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사전인쇄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길에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명받은 선생은 귀국후 개화파들이 모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친러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는 과정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고 나온 선생은 게일박사의 도움으로 도미,3년뒤인 1901년 귀국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 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 일을 했다. 선생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신문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고종으로부터 황실판공비인 내탕금을 지원받아 신문사 시설을 마련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헌병대의 출판물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당시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이던 영국인 배설(Earnest Bethell·1872∼1909)을 사장으로 1904년 창간됐다. 이 신문에는 박은식선생을 비롯,신채호·최익·장도빈등이 제작진으로 참여했다.외국인 명의로 발행돼던 이 신문은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피하면서 「일인입불가」를 출입문에 써붙였을 정도로 강한 반일감정을 나타냈다. 국한문혼용인 국내용 신문과 별도로 영문판을 발행한 이 신문은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다른 신문들이 얽매여 의병활동을 폭도라고 표현할 당시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역할을 수행,1만3천여부의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이 신문을 폐간하기 위해 우선 사장인 배설을 영국영사재판소에 치안방해죄로 고소,중국 상해로 추방했다.배설은 형을 마친뒤 서울로 돌아와 옥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신민회본부는 대한매일신문안에 두었으며 지방지국은 연락망으로 활용됐다. 전국 8백여명의 애국세력이 집결한 신민회는 1909년 독립군 창건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선생의 집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는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선생은 이 계획에 따라 군관학교를 세울 적당한 장소물색을 위해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이동령등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처럼 신민회의 활동이 뚜렷해지자 일제는 1911년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꾸며 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투옥시켰다. 이어 일제총독 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8백명을 전원 체포,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4년만에 석방된 선생은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에 유배됐다. 선생은 다음해인 1906년 유배지를 탈출해 만주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중 다시 일제에 체포,국내로 압송돼 전남 거금도에서 2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동양을 순방중인 미국의원단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또 투옥됐다. 모친 사망으로 일시 방면된 틈을 타 만주로 도피한 선생은 무장항일단체인 의성단을 결성,봉천의 만철병원 습격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4년에는 이청천·김동삼등과 함께 대한군정서·통의부등 만주내 무장항일단체를 통합,정의부를 결성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해 일제기관을 공격하게 했다. 선생은 또 중국내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도 추진,김규식선생등과 함께 1932년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을 구성했다. 1934년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국무회의가 자신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한뒤 한국독립당·대한독립단·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등 여럿으로 갈라진 독립세력을 규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등 독립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미국과 중국내 독립세력의 재규합을 추진,남경에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1938년 68세를 일기로 숨졌다. 정부는 선생에게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통신:중/1885년 서울∼인천 전신 개통(서울 6백년만상:22)

    ◎고종이 전화로 백범사면령 내려/한통화 요금 주사봉급의 2.5%/해방 무렵엔 1만여명이 가입 『대군주폐하께서 김창수(김구)사형은 정지하랍신 친칙을 내리셨소』­국모를 살해한 일본군인을 죽인혐의로 인천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백범에게 형리는 고종황제의 특사소식을 전했다.그때가 병신년(1886년)윤팔월 스무엿새,백범의 사형집행일로 결정된 날 저녁무렵이었다. 사형수 백범에 대한 고종의 사면령인 「친칙」은 바로 장거리전화로 이루어 졌다.서울∼인천간 장거리 전화가 가설된지 사흘뒤의 일이었다. 백범은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되었던들 은명이 오기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일지에 적고 있다.이 전화가 서울∼인천간 첫 통화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전화의 도입으로 가장먼저 혜택을 본 사람이 곧 김구선생인 것이다. 1876년 벨이 발명한 전기통신의 총아 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82년으로 영선사일행으로 청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상운에 의해서다.최초의 전기통신기술자로 알려진상운이 국내에 돌아와 시험통화를 하자 이를 지켜본 고종과 중신들이 그 경이로움에 감탄했다고 전해지고있다. 그리고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중심으로 궁내부전화가 개통 되고 서울과 인천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놓이게 됨으로써 전화시대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당시 서울의 전화가입자수는 50명으로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전화기를 영어 텔리폰의 음을 한역한 「다리풍」또는「덕진풍」「전어통」「어화통」등으로 불렀으며 수구세력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위의 물을 말린다』는 노랫말을 퍼뜨려 민심을 어지럽히기도했다. 당시 전화선은 요즘의 광케이블 또는 동선과 거리가 먼 철선으로 이뤄져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전화감이 나빴으며 최초의 전화기는 송수화기가 분리돼 있고 송화기에는 신호음을 내는 손잡이와 딸딸이가 붙어있었다. 전화 한통화(5분)의 요금은 50전.당시의 주사봉급이 20원이었으니 전화 한통화요금은 봉급의 2.5%나 되어 서민들이 전화를 이용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전화윤리도 엄격해 전화를 통해서는 상대방에게 욕설을 하거나 도의에 어긋난 언쟁을 못하게했다.이에따라 전화국 공중전화기 옆에는 전화국관리가 입회,전화 내용을 엿들어 외국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전화보다 한발앞서 도입된 전기통신은 1885년 8월 서울과 인천,같은해 10월 서울과 의주를 잇는 서로전선이 개통됨으로써 청나라까지 통신이 가능하게 됐다.그러나 당시에는 한문 영문 불문전보만 취급하고 국문전보를 취급하지 않은데다 요금까지 비싸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일반인들은 전보로 접하는 소식은 불경스럽고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으며 전보는 전기바람으로 전달돼 가뭄을 몰고 온다고 생각했다. 해방무렵에는 전화가 상당히 보급돼 서울의 전화가입자는 1만여명으로 크게 늘었으나 일본인소유가 전체의 77%를 차지했다.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패한뒤 전화를 팔아먹고가는 기민함을 보였다.결국은 적산처리됨으로써 전화를 산사람들은 많은 손해를 보기도했다. 6·25사변은 미진하기 짝이없던 통신시설의 80%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수복후 서울에 남아있는 전화는 겨우 4천여대.휴전후 유엔군이 사용하던 전화를 인수해 겨우 2만여대로 증가했다. 보잘것없던 전화시설은 62년 국산자동전화기가 개발돼 서울중앙전화국에 가설됨으로써 본격적인 전화의 대중화시대를 열었다.이 때부터 자금조성을 위해 전화채권이 도입되고 전화사용료도 그동안의 정액제에서 통화량에 따라 계산하는 현재의 도수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정액제는 많이쓰나 적게쓰나 전화요금이 같아 쓸데없는 전화사용이 많아 통화적체의 주요 원인이 됐기때문이다.
  • 일제 관여 이유로 「왕조실록」서 누락/고·순종대 「승정원일기」번역

    ◎민족문화추진회,올해 15집까지 간행/완간된 「실록」 미진한 부분 보완/근대사 연구에 필수… 2002년까지 완역 「조선왕조실록」국역사업을 사실상 마무리 할 고종·순종대의 「승정원일기」가 번역된다. 민족문화추진회(회장 이원순)는 「조선왕조실록」이 완간됨에 따라 「승정원일기」국역에 들어가 올해안에 15집까지 간행키로 했다.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원년)3월부터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의 출납과 제반 행정사무,의례적 사항등을 매일 꼼꼼히 담은 기록이다.모두 3천2백45권에 이르는 이 방대한 분량의 「승정원일기」가운데 고종과 순종 부분 2백20권만을 추려 먼저 번역키로 한 것은 국역된 「조선왕조실록」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지난 1968년 조선왕조 태조 원년(1392년)에서 부터 철종 말년(1863년)까지 4백71년동안의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하는 작업에 들어가 26년만인 지난해 말 완간했다.그러나 모두 4백13책에 이르는 번역본에는 고종과 순종 부분이 빠져있다.조선왕조를 말살한 일제의 식민지 관료가 주도해 위작임이 분명한 「고종태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은 사료로 가치를 인정할수 없기 때문이다. 실록은 국왕이 죽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 즉시 실록청을 설치해 죽은 국왕 재위기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기본적인 관찬사서이다.실록편찬의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는 사관의 사초였다.사관은 그들이 듣고 본 그대로를 적어야 했다.또 사관의 사초에 대해서는 시비를 가릴수 없었고 수정을 가하지도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실록은 한마디로 공정성과 정확성이 생명이었다.그러나 이른바 고·순종실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순종실록은 1926년 순종이 죽자 다음해 4월 조선왕조의 궁내부를 축소·격하시킨 이왕직 산하에 준비실이 설치된뒤 1930년 4월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1934년6월에 끝났다.편찬의 총책임자인 편찬위원장은 물론 33명의 편찬위원가운데 11명이 일본인이었다.여기에 조선총독부 경시를 편찬보조위원으로 모든부서에 참여시켜 한국인들을 감시케 했다고 한다.이처럼 역사서술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처음부터 기대할수 없는 형편이니 「조선왕조실록」국역작업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만큼 개항 이후 다소 소략해지기는 했으나 광범위한 국가적 공사와 의례를 담은 「승정원일기」는 왕조실록 못지않은 귀중한 기본사료로 한국 근대사의 혼란기인 고·순종 시대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는 고종·순종 시대의 「승정원일기」를 일단 오는 2002년까지 완역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올해 국역해 간행할 「승정원일기」는 고종 원년1월부터 3년3월까지를 담게 된다.
  • 한·일 합방 일 정부문서 공개/데라우치 초대총독 작성…본국에 보고

    ◎일군 7월하순부터 경성서 무장 대기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다사케(사내정의)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 전후의 상황을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보고한 공문서 내용이 국내에서 공개됐다. 서지학자 이종학씨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데라우치가 합병 3개월쯤 뒤인 11월21일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계태낭)에게 정식보고한 문서인「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을 지난 2월 일본의 모정부기관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데라우치는 합병에 따른 한국인의 저항을 우려,그해 6∼7월에 걸쳐 경성및 의병활동 지역에 일본군을 배치했으며 특히 경성과 용산에 주둔중이던 병력은 7월 하순부터 무장대기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군대에 대해서는 친위부장관겸 시종무장관 이병무를 통해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일본군에 예속시켜 준다고 설득했다. 데라우치는 이어 8월16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인 이완용을 자신의 관저로 불러 『내각대신으로서 시국을 원만하게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작위를 내릴 뿐더러 모두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대해 이완용이 학부대신 이용식이 완강하게 반대한다고 보고하자 이용식을「수해위문」명목으로 일본에 보낼 것을 획책하기도 했다. 이밖에 ▲일본측이 당초 순종황제에게 태공이라는 칭호를 주고 나라이름도 사용치 못하게 하려다 반발에 부딪히자 이왕 칭호와 조선을 인정한 사실 ▲이완용이 합병에 반대하는 고종황제의 동태를 감시한 사실 ▲순종 설득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시종원경 윤덕영을 데라우치가 직접 만나 회유한 사실등이 담겨 있다. 「조선총독보고한국합병시말」은 일왕에게도 보고된 정식문서로서 72쪽 분량에 1만2천여자가 수록돼 있다. 서지학자 이씨는『이 문서는 일본측이 공개하지 않는 것을 몰래 사진촬영해 왔다』고 밝혔다.
  • 한국전기통신 108년사 한눈에

    ◎「용산전화국내 사료전시관」 7월 개관준비 한창/목제전화기·케이블 등 1,298점 수집/1902년 전화과주사 임명장이 최고/통신발달사 배우고 미래 정보망의 교육장으로 1902년 전화과 주사 임명장·40년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함께 찍은 전송사진등… 한국전기통신 1백8년사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한국통신 사료전시관」이 7월 개관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서울 용산전화국내 4백30평 규모로 설치되는 이 사료전시관은 지난 1885년 9월28일 서울∼인천간 전신개통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전기통신역사를 재조명하고 흩어져있던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보존함으로써 21세기 고도정보사회로 가는 토대를 마련하는 장이다. 개관을 앞두고 한국통신은 대대적인 사료수집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수집된 사료는 모두 4백76종 1천2백98점으로 50년이상된 희귀사료가 24종 25점,사료가치가 크면서도 30년이상된 중요사료가 1백53종에 1백99점,30년미만이지만 보존가치가 있는 일반사료가 2백99종 1천74점등이 모였다. 가장 특이한 것은 1940년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만나는 장면및 중국사변 모습을 담은 전송사진과 1902년 궁내부 전화과 주사의 임명장(발령통지서)등이 옛역사를 전해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만나는 사진과 중국사변사진은 전화선으로 보내온 전송사진으로,당시 동경동맹통신사에 전송기사로 근무했던 박구병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 또 임명장은 1902년 궁내부(현 청와대)통신사 전화과 정환덕씨의 것으로 이번에 수집된 사료중 가장 오래된것이다. 조선통신법규개요는 23년 발행된 일본어로 된 한국 최초의 전기통신법이며 전화교환수 견습교과서는 25년 만들어진 전화교환수의 교육지침서이다. 빨갛게 녹슬어 있는 해저케이블은 1904년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러시아,일본∼중국을 연결,매설한 것으로 울릉도와 거문도해저에서 발굴된 것이다 또 23년 델빌사의 자석식,30년의 목제전화기인 공전식전화기가 오늘날의 날렵한 전화기와 대조를 이룬다.이외에 1909년 캐나다에서 기증받은 자석식교환대와 국내기술로 개발된 86년 TDX­1A상용시험용 국산전자교환기 등이 옛과 오늘을 비교케 한다. 한국통신 홍보실 김수항사료관리부장은 『이 사료전시관이 개관되면 전기통신의 발자취뿐 아니라 현대통신발달사를 배우고 미래를 상상해볼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될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수집된 사료를 바탕으로 전기통신박물관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힌다.
  • 새 기획원장관­보훈처장/한집안서 자란 당숙­숙질(조약돌)

    ○…오지산골의 한 집안에서 새정부내각에 2명의 장관이 포함돼 화제가 되고있다. 26일 발표된 새 내각에 오른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이경식씨(60)와 보훈처장인 이병태씨(56)는 오지산골인 경북 의성군 가음면 전호리 술모산밑 한지붕밑에서 태어나 함께 살았던 당질사이. 당숙인 이부총리와 조카인 이처장은 어린시절 함께 한지붕에서 자라 나란히 새 정부의 장관자리에 올라 고향마을에서는 친척들이 모여 가문자랑으로 지난밤을 지새웠다. 이부총리의 조부 장화씨(1868∼1923)는 조선조말때 궁내부주사를 지내 마을에서 「주사댁」으로 불리어왔으며 이 지방에서 천석꾼으로 더 잘 알려져온 부자. 이부총리는 장화씨의 네아들중 막내 원씨(1903∼1979)의 4남5녀중 장남이며 이처장은 부총리와 4촌인 완식씨(79)의 외동아들.
  • 시아누크 경호요원/북한서 프놈펜 급파

    【프놈펜 연합】 오는 14일 귀국할 예정인 캄보디아 최고민족회의(SNC)시아누크 의장의 거처인 캐마린왕궁 내부 경호를 담당할 북한의 경호요원 25명이 지난 8일 프놈펜에 도착,왕궁내부에 캠프를 차리고 경호업무를 수행중인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 외언내언

    미하일 고르바초프,그는 베를린 장벽을 헐고,동구의 문을 열고,냉전을 해소시킨 역사적인 인물이다.그는 대세에 순응,따라가는 지도자가 아니라 역사를 앞장서,그리고 만들어 나가는 창조적인 정치인이었다.때문에 그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그러나 「선지자는 고향에서 외롭다」고 소련내에서의 그의 인기는 내리막길에 있어 그간 고군분투하는 터였다.◆그는 결국 크렘린궁내부의 암울한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쿠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는 비운을 맞았다.그의 정치적 몰락에 모든 문명세계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걱정하고 아쉬워하는 것과는 달리 이라크의 후세인,리비아의 카다피,평양의 당국자들은 크렘린의 쿠데타 소식을 크게 반기고 있다.알만한 사람들의 알만한 반응이다.◆쿠데타란 후진국에서나 있는 정변의 한 형태.새로운 크렘린지도자들이 이끌 소련이 장래가 그리 밝을수 없음은 그들이 권좌를 차지하는 방법을 봐도 알만하다.그러나 소련군 탱크가 붉은광장을 메워도 전세계가 전율하고 군사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만큼세계는 변했다.이 또한 고르비의 공이라 할수 있다.◆그러면 고르비 없는 소련은 어떻게 되는걸까.고르비가 없어도 그가 그간 다져놓은 개혁과 개방은 시차와 정도,그 완급에 차이는 있어도 그 자체를 제쳐 놓을 수는 없다.역사의 흐름을 역류해서 소련을 끌고가기에는 이미 소련도 너무 많이 변했다.◆오늘의 소련은 64년 흐루시초프가 개혁을 시도하다 당권과 기득권에 매달린 노멘클라투라들에게 축출될 당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백성들은 당장의 물질적인 고통에 불만은 있어도 총칼이 무서워 침묵하고 시베리아 유형이 두려워 눈을 감고 귀를 막던 세대와는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그들 루스키들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나설까 두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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