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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정 차승원, 이연희 구하고 왕좌에서 내려와… ‘광해군 가고 인조 온다’ 시청률은?

    화정 차승원, 이연희 구하고 왕좌에서 내려와… ‘광해군 가고 인조 온다’ 시청률은?

    화정 차승원, 이연희 구하고 왕좌에서 내려와… ‘광해군 가고 인조 온다’ 시청률은? ‘화정 이연희 차승원’ ‘화정’ 차승원이 이연희를 구하고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왔다. 지난 20일 밤 10시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서는 광해(차승원 분)의 하야와 능양군(김재원 분)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광해(차승원 분)는 역모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직감해 궁을 떠났다. 그 시각 능양군은 ‘관형향배’(형세를 보아 유리하게 행동하라)의 밀서를 손에 쥔 후 “이제 경들의 선택은 무엇이오. 이런 명백한 주상의 허물을 앞에 두고 자신의 안위만 찾을 것이오? 아니면 나와 함께 이 나라 조선을 바로 세울 것이오?”라며 인조반정의 시작을 알렸다. 김자점은 인목(신은정 분)에게 정명 공주의 목숨을 빌미로 능양군이 반정에 성공하면 바로 왕으로 제가하라고 협박하는 한편 능양군에게는 광해뿐만 아니라 그 싹까지 다 잘라내라고 충고했다. 이에 능양군은 “아무렴 공주를 다 써먹고 나면 그 계집을 필두로 다 잘라내야지요”라며 향후 끔찍한 피의 시대가 열릴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광해는 능양군으로부터 자신의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 광해는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한 바를 이겨내는 왕이었지. 이 나라와 이 나라를 위한 내 사람을 지켜낼 거야. 나는 왕이니까”라며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광해는 강인우(한주완 분)에게 정명(이연희 분)이 납치된 위치를 찾아낸 후 정명과 홍주원(서강준 분)을 지키라고 말했다. 결국 광해는 정명공주와 주원 그리고 화기도감 사람들까지 구해냈고, 능양군은 광해의 반격이 없는 텅 빈 궁궐에 사병들을 이끌고 입성하여 피로 얼룩진 왕좌에 안착했다. 그러나 광해는 정명공주에게 “공주, 잊지 말거라 바로 이곳에 나의 사람들은 남을 것이니 바로 그들이 불의한 자들에 맞서 끝내는 이길 것이니 이것이 내가 마지막 할 일이로구나”라며 “승리하거라, 정명아. 반드시 너는 그들과 함께”라며 향후 인조의 시대를 투쟁해 나갈 것을 부탁해 인조의 시대에 정명의 투쟁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한편 21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20일 방송된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시청률은 9.9%(전국기준)를 기록했다. 이는 앞선 방송분(9.8%) 보다 0.1% 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또한 ‘화정’과 동시간대 방송된 KBS2 ‘너를 기억해’는 4.9%를, SBS ‘상류사회’는 9.5%를 기록해 ‘화정’이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사진=MBC 화정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문화 유랑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시 한 편에 목숨을 잃다

    [문화 유랑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시 한 편에 목숨을 잃다

    -왕의 부자에게 희생된 조선 최고의 시인 사제 온 나라가 임진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송강 정철이 강화도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은거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요, 정치 권력자의 최후 치고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 무렵 송강을 가끔씩 찾아온 강화도 시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송강의 제자 권필(權韠)이었다. 권필(1569~1612)은 누구인가? 선조대의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호는 석주(石洲). 당시 문단에서 동악(東岳)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호방한 기풍으로 당대에 이미 시의 대가를 넘어선 정종(正宗)이라는 평을 들었다.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권필은 야인이면서도 그를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에는 세상에 뜻을 접고는 강화도 고려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런데 스승 송강 정철이 정적을 제거하는 선조의 칼잡이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 이어, 그 제자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니, 유사 이래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광해군에게 직접 맞아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왕의 친국에서 혹독한 곤장을 맞은 후, 유뱃길에 올라 동대문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폭음하고는 그 밤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광해군에게 맞아죽었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권필에게 화를 불러온 시는 그가 지은 ‘궁류시(宮柳詩)’로서,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 (宮柳青青花亂飛 滿冠蓋媚城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遺危言出布衣) 세간에서는 다들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씨가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광해가 발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권필은 워낙 벼슬에는 뜻이 없어 술과 시로 살아가는 풍류인이었다. 허균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나, 권신 이이첨이 친교를 청하는 것은 끝끝내 거절한 강직한 성품이었다. 시류를 비판한 궁류시가 광해군에게 들어가자 왕은 불같이 노해 시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일찌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는 그 시인이었다.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왕을 만류하고 나섰다.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버티었다.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군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의 불행한 종말을 예고한 불통과 협량이었다고나 할까. 마치 역적을 대하듯 한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밤,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문장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분명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항복의 낙담은 더욱 컸다.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고 자탄했다.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유허비와 함께 아직도 강화에 남아 있다. 그가 초당을 세웠던 곳인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는 권필의 후손이 세운 ‘석주권선생유허비(石州權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고려산 기슭의 하도 저수지 옆이다. 시인이 원래 세상에 별 뜻이 없어 강화에 은둔해 있을 때, 그의 문명을 듣고 찾아온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초당 터이다.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조선 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로 아까운 선비, 인걸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는 권필뿐이었다. 그는 시의 순교자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땅에 있다. 고양땅에 있는 정철의 첫 유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권필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사흘 전 그는 평생 쓴 시를 보자기에 싸서 지인에게 건네고는 주고 마지막 시를 남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 즐겨 지어떠들썩 온갖 입에 오르내렸네시 주머니 닫고 세상 마치리공자님도 말 없고자 하셨거늘.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그의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광해는 유배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지막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로 글을 접도록 하자.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곤륜산 상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군산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화정 차승원, 이연희 살리고 왕좌 떠났다 ‘인조반정 성공..’

    화정 차승원, 이연희 살리고 왕좌 떠났다 ‘인조반정 성공..’

    지난 20일 밤 10시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서는 광해(차승원 분)의 하야와 능양군(김재원 분)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광해(차승원 분)는 역모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직감해 궁을 떠났다. 광해는 능양군으로부터 자신의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 광해는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한 바를 이겨내는 왕이었지. 이 나라와 이 나라를 위한 내 사람을 지켜낼 거야. 나는 왕이니까”라며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광해는 강인우(한주완 분)에게 정명(이연희 분)이 납치된 위치를 찾아낸 후 정명과 홍주원(서강준 분)을 지키라고 말했다. 결국 광해는 정명공주와 주원 그리고 화기도감 사람들까지 구해냈고, 능양군은 광해의 반격이 없는 텅 빈 궁궐에 사병들을 이끌고 입성하여 피로 얼룩진 왕좌에 안착했다. 그러나 광해는 정명공주에게 “공주, 잊지 말거라 바로 이곳에 나의 사람들은 남을 것이니 바로 그들이 불의한 자들에 맞서 끝내는 이길 것이니 이것이 내가 마지막 할 일이로구나”라며 “승리하거라, 정명아. 반드시 너는 그들과 함께”라며 향후 인조의 시대를 투쟁해 나갈 것을 부탁해 인조의 시대에 정명의 투쟁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문화 유랑기]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

    [문화 유랑기]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

    -왕의 부자에게 희생된 조선 최고의 시인 사제 온 나라가 임진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송강 정철이 강화도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은거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요, 정치 권력자의 최후 치고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 무렵 송강을 가끔씩 찾아온 강화도 시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송강의 제자 권필(權韠)이었다. 권필(1569~1612)은 누구인가? 선조대의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호는 석주(石洲). 당시 문단에서 동악(東岳)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호방한 기풍으로 당대에 이미 시의 대가를 넘어선 정종(正宗)이라는 평을 들었다.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권필은 야인이면서도 그를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에는 세상에 뜻을 접고는 강화도 고려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런데 스승 송강 정철이 정적을 제거하는 선조의 칼잡이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 이어, 그 제자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니, 유사 이래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광해군에게 직접 맞아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왕의 친국에서 혹독한 곤장을 맞은 후, 유뱃길에 올라 동대문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폭음하고는 그 밤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광해군에게 맞아죽었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권필에게 화를 불러온 시는 그가 지은 ‘궁류시(宮柳詩)’로서,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 (宮柳青青花亂飛 滿冠蓋媚城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遺危言出布衣) 세간에서는 다들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씨가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광해가 발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권필은 워낙 벼슬에는 뜻이 없어 술과 시로 살아가는 풍류인이었다. 허균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나, 권신 이이첨이 친교를 청하는 것은 끝끝내 거절한 강직한 성품이었다. 시류를 비판한 궁류시가 광해군에게 들어가자 왕은 불같이 노해 시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일찌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는 그 시인이었다.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왕을 만류하고 나섰다.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버티었다.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군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의 불행한 종말을 예고한 불통과 협량이었다고나 할까. 마치 역적을 대하듯 한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밤,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문장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분명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항복의 낙담은 더욱 컸다.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고 자탄했다.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유허비와 함께 아직도 강화에 남아 있다. 그가 초당을 세웠던 곳인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는 권필의 후손이 세운 ‘석주권선생유허비(石州權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고려산 기슭의 하도 저수지 옆이다. 시인이 원래 세상에 별 뜻이 없어 강화에 은둔해 있을 때, 그의 문명을 듣고 찾아온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초당 터이다.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조선 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로 아까운 선비, 인걸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는 권필뿐이었다. 그는 시의 순교자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땅에 있다. 고양땅에 있는 정철의 첫 유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권필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사흘 전 그는 평생 쓴 시를 보자기에 싸서 지인에게 건네고는 주고 마지막 시를 남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 즐겨 지어떠들썩 온갖 입에 오르내렸네시 주머니 닫고 세상 마치리공자님도 말 없고자 하셨거늘.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그의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광해는 유배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지막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로 글을 접도록 하자.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곤륜산 상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군산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예로 지은 경복궁(임석재 글, 인물과 사상사 펴냄) 조선의 법궁(法宮·왕이 늘 기거하면서 나랏일을 돌보는 정궁)이자 다른 궁궐들의 기준과 모범이 돼 온 경복궁의 탄생 과정을 동양 미학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경복궁의 설계자는 성리학자인 정도전이다. 건축가가 아닌 사상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경복궁의 탄생 배경에 엄청난 사상적 배경이 있으며, 이를 정밀하게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책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반도의 사상은 성리학으로 통일·집중되었으며 이것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경복궁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경복궁에는 ‘플러스알파’가 있다. 품격이 있으면서도 검소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한데 저자는 이 같은 경복궁의 위엄과 기품이 ‘예(禮) 정신’과 ‘예 미학’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건축과 인문학을 융합하는 저술 활동을 펼쳐온 저자의 50번째 저서다. 888쪽. 5만원. 제자리로 돌아가라(조윤제 지음, 한울 펴냄)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하고,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경제보좌관과 주영국 대사를 지낸 저자(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200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꾸준히 써 온 칼럼 85편을 묶었다. ‘혼돈의 대한민국 7년의 기록, 그리고 지금’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보수와 진보의 갈등, 지배구조와 개헌, 대북정책, 경제민주화, 공적연금개혁 등 정치·사회 이슈부터 경제 문제까지 한국 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과제들을 종횡무진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실패를 반복하는 정치, 책임을 벗어던진 사회, 위기를 거듭하는 경제’로 요약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향한 저자의 메시지는 단순 명쾌하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권력기관과 언론이, 학계와 시민사회가 절제를 익히고 각자 제자리를 굳건히 지켜주는 것이 비극의 재연을 막는 길이다.” 448쪽. 2만 8000원.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김홍민 지음, 어크로스 펴냄) 스스로를 근본 없는 ‘야매’ 출판인이라고 자처하는 저자가 지적이고 고상한 출판계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무기로 버텨온 지난 10년간의 유쾌발랄한 생존기.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인 북스피어를 운영하는 저자는 신간 마케팅 비용을 위해 독자들에게 돈을 모아달라고 하고, 본문 교정과 책 박스 포장까지 시킨다. 물론 읍소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참여다. 재미를 일의 우선순위로 삼아 출판사의 모든 활동을 놀이로 바꿔놓는 그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기에 가능했다. 자본도, 인력도 부족한 소규모 출판사가 유일하게 기댈 언덕인 독자를 적극적으로 우군으로 끌어들여 ‘운명 공동체’적 모델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마치 한편의 소설을 읽듯 흥미진진하지만 한편으론 열악한 출판계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씁쓸함도 있다. 328쪽. 1만 4000원.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엮음, 이한음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20세기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 ‘현대의 코페르니쿠스’‘신다윈주의의 저격수’ ‘과학의 이단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다양한 수식어가 말해 주듯 2011년 생을 마감한 린 마굴리스는 논란의 여성 과학자였다. 지질학, 유전학, 생물학, 화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섭렵을 통해 그는 “진화는 경쟁이 아닌 공생과 가이아를 통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린 마굴리스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도리언 세이건이 서문을 쓰고 엮은 이 책은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제임스 러브록, 고생물학자 나일즈 엘드리지, 옥스퍼드대 석학 데니스 노블 등 과학계 거장들의 회고를 통해 린 마굴리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린다. 세포 생물학 및 미생물진화와 함께 가이아 이론을 확장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한 린 마굴리스는 1999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과학훈장을 받았다. 320쪽. 1만 6000원.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동·서양의 사자는 ‘용’의 형상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동·서양의 사자는 ‘용’의 형상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지금까지 동양 용의 갖가지 모습과 조형적 본질을 추구해 왔는데, 사람들은 서양에 그런 용이 있는지 의심할 것이다. 아무도 동양 용의 모습과 성격을 가진 용을 보지도 못했고 따라서 언급한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로 서양 미술품 모두 찾아보아도 없다. 그런데 ‘세계의 조형예술품, 용으로 읽다’라고 서두에 감히 말했는데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고려청자 가운데 뚜껑에 사자를 조각한 걸작품 향로가 있다. ① 두 앞무릎을 세우고 앉은 사자가 오른손으로 오른발 위에 큰 보주를 짚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곧 그 사자가 현실에서 보는 사자가 아님을 직감한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은 명나라 때 호승지(胡承之)가 지은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용의 아홉 아들은 각각 나온 순서에 따라 그 이름을 비희(贔屓), 이문(螭吻), 포뢰(浦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하(蚣蝦),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고 한다. 산예는 그 모습이 사자를 닮았다. 이름부터가 ‘사자 산(狻)’에 ‘사자 예(猊)’다. 앉는 것을 좋아하고 등에 태우는 것도 좋아하여 그런 도상의 산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 예가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사자가 바로 이 산예이며, 불화에서 여래의 대좌에서 흔히 나오기도 한다. 이름은 산예이나 바로 용이다. 이 ‘용생구자설’은 후대에 지은 기록치고는 우리에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바가 많은, 뜻밖으로 유용한 보기 드문 기록이다. ‘용은 길어서 앉거나 여래나 보살을 등에 태울 수 없어서 용을 변용시킨 모습이 바로 영화(靈化)시킨 사자 모양이다.’ 용에서처럼 모든 갈기는 부처님 머리처럼 모두 제1영기싹이다. 따라서 고려청자 사자향로는 용 향로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이래 모두가 사자라고 부르는 것이 용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바로 꼬리다. 우리는 흔히 동물의 꼬리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형들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꼬리가 시작이고, 영기문으로 된 꼬리에서 영수와 영조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고려청자 향로의 영화된 사자의 꼬리를 보면 만물 생성의 근원인 제1영기싹들이 전개한 모양이다. ② 큰 보주를 자세히 보면 음각으로 무량보주를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수없이 봐 왔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알아보았다. 특히 무량보주는 용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용 향로가 틀림없다. ③ 하나의 보주도 ‘무량한 보주’이지만 이렇게 보주를 무량하게 음각선(陰刻線)으로 겹치면서 표현한 ‘절대적 보주’를 필자가 ‘무량보주’로 이름 지은 것이다. 보주는 용, 봉황, 기린, 선학, 해태, 여래, 관음보살 등 즉 영수(靈獸)나 영조(靈鳥), 그리고 신적(神的) 존재, 즉 영기화생된 특별한 존재만이 보주를 지닐 수 있다. 현실의 사자는 보주를 지닐 자격이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용성(龍性)을 지닌 다양한 영화된 동물 혹은 식물모양들이 있듯이 서양에도 같은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 신전 폐허에서 사자를 보았을 때 처음부터 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용성(龍性)과 불성(佛性)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충분히 이 문제는 논의할 수 없는 큰 주제다. 필자는 그리스 코린트의 아폴로 신전에서 영화된 사자의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보고 놀랐다. 동서양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영기문을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처음 보았던 그 순간은, 필자에게 ‘세계미술사’를 가능케 하리라는 확신을 준 순간이었다. 용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신전의 홈통으로 만든 영화된 사자의 입을 통해 지붕에서 내려오는 물이 쏟아져 나오니 용성을 지녔다 할 것이다. 서양 학자들은 현실의 사자를 이용해 홈통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니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이 보일 리가 없다. 동서양 미술사학계가 마찬가지 상태였다. 옛 예술가들은 기능과 함께 고도의 상징을 부여해 왔다는 것을 필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기능만 보이므로 상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용의 갈기를 보고 갈기라고 부르며, 마찬가지로 사자의 갈기도 갈기로 알고 있다. 비록 현실의 사물과 똑같다고 해도 조형예술의 세계에서는 일체가 영화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필자가 지적한 그 수많은 용어의 오류의 근원은, 영화시킨 세계를 현실적 기능의 면에서 바라보거나 비슷한 현실의 사물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데 있다. 기원전 338년에 세워진 코린트의 아폴로신전의 지붕 코니스(cornice)의 사자와 그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채색 분석해 보면우리나라 통일신라의 사찰이나 궁궐터에서 출토하는 기와의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④ 둥근 수막새의 용이나 연꽃의 양쪽으로 긴 암막새의 영기문이 발산하는 광경과 같다. 무릇 모든 넝쿨모양 영기문은 일체가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라는 것을 앞 회에서 보았다. 바로 똑같은 영기문을 그리스 첫 여행에서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너무 커서 거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갈래 사이에서 무엇인가 나오고 있는데 만물을 상징한다. 그 영기문을 더 전개시켜 보았더니 동서양이 더욱 같음을 절감한다. ⑤ 넝쿨모양 영기문은 물론 보주는 가장 강력한 용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아래 부분에 직선으로 교차하는 연이은 태극의 순환무늬가 있고 그 밑에 크고 작은 타원체 혹은 구형의 보주가 줄 서 있지 않은가! 영화된 사자와 보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⑥ 대지의 옴팔로스(배꼽)가 있는 델피의 아폴로 신전, 그 유명한 신탁이 이루어졌던 ‘신전 가운데 대표적 신전’, ‘너 자신을 알라’가 새겨진 신전에서도 지붕 끝에 같은 코니스의 조형을 보았다. 영화된 사자로부터 양쪽으로 제1영기싹 영기문이 전개되어 가다가 중앙에서 아크로테리온을 이룬다. ⑦, ⑧ 그리스·로마 등의 건축에서, 지붕 맨 위를 장식하는 여러 가지 조각상들이 있는데 팔메트라고 부르는 것도 그 하나다. 그러나 이렇게 영기문 절반이 만나 영기문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이 지붕에서 처음 보면서 팔메트란 용어가 틀린 것을 알았다. 즉 두 영화된 사자로부터 발산하는 영기문이 만나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영기문의 발산이 아름다운 곡선들로 매듭을 짓는다. 아폴로신전은 기원전 330년에 재건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기문이다. 그런데 영기문은 용으로부터만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봉황이나 해치, 그리고 연꽃이나 아칸서스에서도 발산한다. 그러한 영수, 영조, 영수(靈樹) 등 영성(靈性)을 지닌 것에서는 영기가 발산한다. 영성은 곧 용성이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 수많은 사자는 현실의 사자가 아니라 동물모양으로 만든 강력한 영기문이기 때문에 갖가지 넝쿨모양 영기문을 발산하는 것이다. 주체들이 중요하지만 세계의 조형을 풀어내는 열쇠는 용성을 지닌 존재로부터 발산하는 갖가지 영기문이다. 그 영기문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광경을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영적인 존재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존재들이 있지만 그 대표적 가시화가 바로 동양의 용임을 깨달았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왕이 거닐던 古宮 달밤 동물 통해 표현한 王心”

    “왕이 거닐던 古宮 달밤 동물 통해 표현한 王心”

    “궁은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닌 곳입니다. 수백년 전 달빛 아래 그곳을 거닐었던 왕들의 자취를 밟으며 그들이 느꼈을 인간적 고뇌와 감정들을 상상했어요. 동물을 통해 그들을 표현해 봤습니다.” 옛 궁, 달, 왕과 동물…. 강렬한 색채와 활달한 붓질로 동양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온 화가 사석원(56)이 12일부터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옛 궁궐에 담긴 이야기들을 다양한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한 신작 40여점을 선보인다. 2012년 폭포를 소재로 한 ‘산중미인’(山中美人)전 이후 3년 3개월 만에 선보이는 전시회의 제목은 ‘고궁보월’(古宮步月),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옛 궁에서 달의 그림자를 밟다’이다. “하늘의 달은 오랜 세월 모든 것을 지켜봤을 겁니다. 곳곳에 설치된 고화질 폐쇄회로(CC)TV처럼 말이죠. 궁을 비추는 달처럼 궁 안 풍경을 은근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싶었습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서울 토박이로 자란 까닭에 창경원과 경복궁, 덕수궁을 구경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면서 “지금도 눈이 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 창덕궁이고, 장맛비가 내리고 난 뒤 고궁의 아취(雅趣)를 느끼고 싶을 때는 향원정을 찾곤 한다”고 말했다. 빌딩 숲을 조금만 벗어나면 닿을 수 있는 고궁, 이제는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그곳에서 화가는 아주 오래전 그 고즈넉한 공간의 주인이었던 왕들의 심정을 헤아렸다고 했다. ●부엉이·사자 등으로 각 왕실의 이야기 담아 이번에도 그의 그림에서 동물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올빼미가 가득하게 그려진 재킷을 입고 나왔을 정도로 좋아한다고 한다. 올빼미와 부엉이를 비롯해 호랑이, 사자, 토끼, 사슴, 공작 등 다양한 동물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이전에 보였던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그런 동물은 아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동물들은 무언가 감춰진 것이 있는 것처럼 신비롭기도 하고 엄숙하다. 그 눈빛에서는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그는 “옛 궁궐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각자 왕실의 인물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에 얽힌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전과 달리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서 “특히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와 선왕의 포부를 본떠 근대화를 꿈꾸었던 고종에 주목했다”고 덧붙였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자에 홍매화 가지에 앉은 두 마리 부엉이를 그린 ‘1776년 3월 창덕궁 후원’에서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찾아올 조선의 부흥을 예고한다. ‘창덕궁 규장각 수사슴’은 정조, ‘1895년 향원정 호랑이’는 고종을 각각 상징한다. ●동물들의 눈 통해 보는 번영·좌절·슬픔 사석원의 그림에서 색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이유는 튜브의 물감을 미리 섞지 않고 바닥에 뉘어 놓은 캔버스 위에 직접 물감을 짜고 혼합한 결과다. 이번 작품들에서는 물감의 마티에르가 전보다 훨씬 두꺼워졌고 색은 더욱 화려해졌다. 그는 “달빛이 주는 따뜻함, 왕실의 위엄과 번영, 좌절과 슬픔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더욱 두껍게 발랐다”고 설명했다. 가장 마지막에 그렸다는 흰색 물감으로만 이뤄진 매화그림 두 점은 마티에르의 역동적이며 표현주의적인 느낌이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는 흑백의 톤으로 그려진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눈 쌓인 궁을 배경으로 사슴이 등장하는 동양화적인 느낌의 작품들이다. 두꺼운 마티에르에서 벗어나 스산한 붓질과 고즈넉한 색채로 그려진 궁궐의 풍경은 왕실의 위엄뿐 아니라 쇠락하는 왕조의 운명, 한 나라의 군주이면서 한 인간으로서 갖는 외로움 등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곡절 많은 역사 속에 밴 고요와 슬픔의 아름다움, 적조미(寂照美)라는 단어가 제격이겠다. 동양화에서 출발했고, 동양화가로 불리기를 원한다는 그는 유화물감을 사용하지만 붓은 동양화붓을 사용한다. 그는 “한번 쓰고 나면 붓이 딱딱해져서 버려야 하지만 동양화 붓을 사용하는 게 익숙하고 동양화 붓이어야 획에 입체감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용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용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용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물론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고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기와 연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관련된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여서 미술사학 연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술사학은 주로 역사적 접근만 했지 조형 원리나 사상사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필자가 조형언어를 처음으로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사와 종교학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사와 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조형예술을 잘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관심 갖는 분은 거의 없었다. 사상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종교란 무엇인가 생각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들을 관찰-기록-스케치-촬영-논문 작성 등의 과정을 열심히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조형예술이 오히려 사상사와 종교학을 도울 수 있거나 보완하거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미술사학은 기록의 오류에 일그러진 사상사와 종교학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으므로 이 연재는 미술사학은 물론 문화사와 사상사와 종교학을 함께 다루고 있는 셈이다. 기와에 조각된 용의 입에서 영기문이 나온다고 앞의 글에서 밝혔고, 영기문이란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조형’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학문에서 여러 가지 주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즉 이 연재에서 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다루고 있다는 말과 같다. 물은 만물생성의 근원이고 철학의 시작이다. 물은 문명은 물론 사상도 낳는다. 탈레스처럼 물이 모든 물질의 본질이라는 데 기초한 우주론과 노자(子)처럼 물의 속성이 도(道)이고 만물생성의 근원이라는 우주관은 서양의 그리스와 동양의 중국에서 기원전 5~6세기에 이미 제기됐다. 바로 그 우주생성론의 중심에 용이 있다. 그러면 용의 입에서 나오는 영기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물’이다. 물을 간단히 가시화한 것이 제1영기싹이고 물이 흐르는(전개하는) 모양이 연이은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이다. 둥근 수막새에는 본질이 같은 연꽃과 용이 새겨질 수 있고, 곡선을 지은 긴 암막새에는 갖가지 긴 영기문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연화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따로 다루기로 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의 입에서 물이 나온다는 조형을 좀 더 다루어 보기로 한다. 제1영기싹이 물을 상징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필자다. 끝이 도르르 말린 조형은 식물에도 있고 동물에도 있지만, 그 조형에 ‘제1영기싹’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은 형이상학적인 조형이기 때문이다. ‘대생명의 싹’이라는 차원 높은 상태에서 말한 것이다. 즉 물을 조형화한 것이 제1영기싹이며, 용은 다양한 보주와 제1영기싹으로 구성돼 있다는 진리는 이미 증명했지만 깨닫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린다. 공주 주미사 출토 암막새 영기문을 다시 확대해 보기로 한다 ①. 용의 입에서 이렇게 제1영기싹들이 연이어 다발로 나온다는 것은 용의 입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상징한다. 귀면이라든가 당초문이라 알고 있으면 엄청난 진리를 보지 못하니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허상이라 부른다. 잘못 보면 허상이 되고 올바로 보면 실상이 된다. 우리는 교육을 평생 받으며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만을 보고 성장해 왔다. 아직도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다른 예를 보여 드린다. 항상 주미사 기와에 보이는 조형을 조각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 생각해 왔다. 10년 전 매일 궁궐 건축을 열심히 조사하던 중 사진기로 경복궁 근정전 천장을 찍는데, 아득히 높은 중층(重層) 궁전의 높은 천장이어서 두 용이 회전하는 조형, 즉 우주에 대생명력이 순환하는 조형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②. 곧 망원렌즈를 사서 다시 찍어 보니 여전히 입에서 하얀 것이 나오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③. 그래서 얼굴 부분을 잘라 크게 확대해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옥으로 만든 것인데 끝이 제1영기싹 세 가닥 다발이 아닌가. 용의 입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④⑤. 그날은 너무 기쁘고 흥분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금강도 식후경… 공주밥상 납시오

    금강도 식후경… 공주밥상 납시오

    맛의 시대다. 과장 좀 보태 맛집 따라 여행지가 선택되는 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남긴 선조들의 혜안이 놀랍다. ‘백제의 고도’ 충남 공주를 맛으로 살폈다. 1500년 전의 역사유적 등 관광 명소들이 밀집한 곳을 네 구역으로 나눠 각각의 맛집들을 담았다. 이르면 6~7월 중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부러 공주로 발걸음할 명분은 충분한 셈이다. [시내권] 공주에는 먹거리가 많다. ‘전국구’ 맛집으로 입소문난 집도 몇 곳 된다. 한때 왕도였던 까닭일까. 삼남의 물산이 몰려들었을 테니 지금의 전주처럼 먹거리 문화도 융성했을 터다. 따지고 보면 ‘식재전주’(食在全州)란 표현도 생산보다 집산에 초점을 맞춘 표현 아니던가. 그러니 전주에 견줘 백제 때의 ‘식재공주’(食在公州)였다 해도 그리 틀릴 건 없겠다. 다만 시간이 농밀하게 축적된 음식보다는 비교적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식재료를 사용한 음식들이 많다는 게 전주와는 다른 점이다. 맛집 홍보 측면에서 공주시는 여느 지방자치단체보다 발빠르게 나서는 모양새다. 그 결과물이 ‘으뜸공주맛집’이다. 2008년 시작된 ‘공주맛집 100선’이 전신으로, 3단계에 걸친 엄격한 심사를 통해 공주를 대표하는 향토맛집을 선정해 오고 있다. 프랜차이즈 업소와 1년 이내 행정 처분을 받은 음식점 등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최소한 위생이나 지역농산물 사용 등에 대해서는 걱정을 덜어도 좋다는 뜻이다. 해를 더할수록 선정 맛집 수를 엄밀하게 줄이다 보니 지금은 70여개 정도가 남았다. 공주에 들면 공산성부터 들르게 마련이다.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년(475)부터 성왕 16년(538)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지였던 공주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공산성은 조선시대 이름이고 백제 때는 웅진성이라 불렸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2.2㎞쯤.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폭이 좁은 형태다.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머물다 평정 소식을 듣고 나무 두 그루에 벼슬을 내렸다는 쌍수정, 백제 때의 궁궐 터로 추정되는 진남루 앞 터 등 볼거리가 많다. 현지 관계자들은 오는 6월 말이나 7월 초쯤 송산리 고분군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이웃한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년) 내외가 합장된 벽돌무덤이다. 송산리 고분군 내에 있다. 1971년 송산리 제5·6호 고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됐다. 원형 보존을 위해 영구 폐쇄되고 대신 모형관을 통해 왕릉의 전체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무령왕릉 너머는 황새바위 성지다. ‘박해시대 교회의 심장’이라 불리는 기독교 성지다. 무덤경당, 순교자의 탑 등을 돌다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공주 시내에선 소학장수촌(853-0555·이하 지역번호 041)을 먼저 찾아야 한다. 공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누룽지닭백숙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진 집이다. 상호에서 보듯 누룽지백숙이 주메뉴다. 백숙의 느끼함은 싱싱한 겉절이와 무절임이 잡아준다. 새큰한 맛이 백숙과 잘 어울리지만 다소 짜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새이학가든(855-7080)은 ‘60년 전통’의 국밥으로 이름난 집이다. 소고기와 대파로 우려낸 국물이 시원하다. 동해원(852-3624)은 짬뽕 메뉴 하나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집이다. 호사가들이 전국의 짬뽕집을 대상으로 순위를 매길 때마다 늘 상위권에 오를 만큼 유명하다. 동해원 짬뽕은 국물맛이 아주 강하다. 하지만 ‘끝내 주는’ 국물에 견줘 면발은 다소 평범한 편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공주 사람들은 칼국수도 즐겨 먹는다.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맛깔스런 칼국수를 내는 집이 많은 건 분명하다. 유가네칼국수(856-1053)는 특이하게 복어를 이용해 육수를 낸다. 여기에 바지락 등 싱싱한 해물이 곁들여진다. 산성시장은 공주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주전부리 음식도 많다. 잡채를 넣은 만두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잡채만두, 밤빵 등이 이름났다. [동학사권] 공주를 떠받치고 있는 계룡산국립공원의 여러 탐방코스 가운데 가장 탐방객이 많은 곳은 반포면의 동학사다. 대도시 대전과 가깝기 때문에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 계룡산 북쪽의 동학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이름난 절집이다. 단아하고 깔끔한 풍경이 퍽 인상적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단종 폐위 소식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는 숙모전이 경내에 있다. 상·하신계곡은 계룡산이 안배한 마지막 비경으로 알려진 곳이다. 계룡산 북쪽 자락 깊숙이 자리한 골짜기 마을로, 산행 인파가 몰리는 동학사나 갑사 등에 견줘 찾는 이가 매우 적다. 그 덕에 골 깊고, 물 맑고, 숲 울창해 호젓하게 쉬다 올 수 있다. 이안숲속은 마암면에 있는 자연테마공원이다. 로맨티스트 남편이 정성껏 공원을 조성해 아내에게 선물했다는 달달한 러브 스토리도 깃들어 있다. 반포면 쪽엔 맛집들이 여럿 몰려 있다. 그 가운데 어씨네 본가(852-7372)와 갑사 가는 길(853-1300)은 장어구이와 참게 매운탕으로 쌍벽을 이루는 집이다. 식객에 따라 견해가 엇갈리지만, 어씨네 본가는 두툼한 장어구이가, 갑사 가는 길은 살이 꽉 찬 참게 매운탕의 맛이 다소 앞선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엄마의 식탁(881-8212)은 상호처럼 정성 깃든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내는 집이다. 여러 메뉴 가운데 우엉밥정식과 연잎밥정식의 인기가 높은 편이다. 연잎밥은 현미, 찹쌀 등을 연잎에 싸 쪄낸다. 특유의 향이 찰밥에 은은하게 배어 있다. 우엉밥은 고슬고슬한 쌀밥에 고소한 우엉을 얹어 낸다. 무엇보다 밑반찬이 인상적이다. 텃밭에서 방금 캐 아삭한 열무 샐러드, ‘우윳빛깔’ 으깬 감자 등이 상을 한결 풍성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공주의 밥상’이다. 쉬어 가기 맞춤한 찻집도 있다. 마당 너른 집, 담꽃(855-7899)이다. 진한 대추차가 맛있다. 상신계곡 아래 하신마을에 있다. [마곡사/갑사권]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 했다. 봄엔 신록이 아름다운 마곡사가, 가을엔 단풍이 고운 갑사가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두 절집에서 맞는 풍경의 우열을 가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곡사는 주차장 입구에서 경내까지 1㎞ 정도 이어진 진입로가 아름답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를 찬찬히 엿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오층석탑, 시간이 빚은 위엄이 깃든 대웅보전, 백범 김구 선생이 기거했던 백범당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마곡사 초입에 식당들이 밀집해 있다. 그 가운데 알밤파전, 산채정식 등을 내는 바람처럼 구름처럼(841-9994), 시래기청국장정식을 내는 늘푸른솔가든(841-3438), 더덕 정식이 맛있는 태화식당(841-8020) 등이 알려졌다. 갑사는 계룡산 서쪽에 기댄 절집이다. 마곡사처럼 절집 초입에 펼쳐진 ‘오리숲길’이 일품이다. 참나무, 단풍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그야말로 다채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경내엔 갑사 삼신불괘불탱화(국보 제298호)와 보물 다섯 점, 도 유형문화재 일곱 점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철당간과 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갑사가 있는 계룡면 쪽에선 장순루(857-3498)를 들러볼 만하다. 화교 출신의 주인이 주방장을 겸하고 있는 중국집으로, 같은 자리에서 무려 40년 동안 영업을 해 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몰리는 주말과 공휴일엔 일찍 재료가 떨어져 오후 6~7시면 문을 닫는다. 식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건 고추짬뽕이다. 국산 홍초로 맛을 내는데,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맵다. 탕수육도 맛있다. 맑은 소스에 찐 배추와 튀긴 순살 돼지고기를 얹은 ‘올드 버전’의 탕수육이다. 옥수수 전분보다 10배 이상 비싼 감자 전분으로 소스를 만든 덕에 달큰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글 사진 공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가는 길:KTX 호남선 개통 이후 공주 가는 길이 한결 가까워졌다. 서울에서 1시간 남짓이면 공주역에 도착한다. 승용차는 천안논산고속도로 공주 나들목으로 나가 공주·공주보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백제큰길을 따라 금강철교를 지나면 공주 시내다. 마곡사는 당진영덕고속도로 마곡사 나들목, 반포면 쪽은 남세종 나들목이 좀 더 가깝다. →잘 곳:공주한옥마을(840-8900)은 여럿이 묵기 좋다. 2∼6인실, 단체실 등 방 종류도 다양하다. 홈페이지에서 공주사이버시민으로 가입하면 약 30% 할인받을 수 있다.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백제 제석사 암막새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백제 제석사 암막새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지금까지도 동양 3국의 미술사학자는 용의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의 실체에 조금도 다가갈 수 없었으며 용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었다. 필자의 체험으로는 사람들이 용의 실체를 모르므로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반복해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았다. 그러니 그 ‘무엇’이 무엇인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용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영기문, 즉 ‘만물을 생성시키는 영기문’이라고 앞서 말했다. 영기문이란 덩굴무늬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적인 조형’임을 발견했다. 따라서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형이상학적 조형이다. 우주에 충만한 보이지 않는 영기를 시각화한 것인데 무슨 식물과 동물이 있겠는가. 원래 여러 단계지만 이 글에서는 마지막 단계만 보여드릴 수밖에 없다. 단계적 전개과정을 보고 싶으신 분은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홈페이지(www.kangwoobang.or.kr)로 들어가시면 여러 가지 영기문의 채색분석 과정을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추녀마루기와와 망와를 창안했으며 힘찬 조형의 와당이 많고, 백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격조 높은 와당을 만들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백제는 가장 위대한 기와를 창안했다. 바로 암막새기와의 창조다.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하는 조형이다. 그 중앙의 정면용이 통일신라시대에 수막새에 자리 잡으며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한다. 따라서 제석사 암막새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새로이 암막새와 수막새의 결합에서 가장 쉽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법당이나 궁궐터에서 많이 보이는 수막새와 암막새는 고대 조형예술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동경(銅鏡)처럼 작은 원 안에 우주의 기운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와를 가장 많이 만든 동양 삼국은 연구자들이 아직도 형식의 분류와 제작기법에만 치중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르러 암막새·수막새 결합 익산 제석사(帝釋寺)에서는 백제시대 후기의 영기문 암막새와 연화문 수막새가 짝으로 출토되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의 전공자들은 수막새는 백제 것으로, 암막새는 통일신라 것으로 다루고 있다. 용과 영기문이 뚜렷한 암막새가 바로 백제의 위대한 창작품이다 ①. 암막새 중앙에 용의 정면상을 돋을새김하고 양쪽으로 제1, 제2, 제3영기싹 영기문이 뻗쳐나가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모두 그릇된 용어들, 귀면과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영기문은 매우 복잡한 듯하지만, 간략화하면 결국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다 ②-1. 최초로 창안한 암막새인데 극히 추상화시킨 정면용의 얼굴은 좌우 영기문의 전개가 완벽하고 절묘하다. 연꽃도 물을 상징하므로 영기문이 발산할 수 있는데, 후에 다루겠지만 귀면처럼 연꽃도 현실의 연꽃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조형들을 만날 때가 올 것이다. 제석사 암막새와 수막새를 채색분석하여 결합시키면 연꽃 양쪽으로 암막새의 영기문이 발산하는 형국이다 ②-2.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같은 시대의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암막새를 만들지 않았다. 본격적인 암막새를 세계에서 백제가 처음으로 창안했다는 논문을 필자가 쓴 이래, 지금은 ‘익산 왕궁리 전시관’에 가면 10년 만에 설명 카드에 백제라고 고쳐 쓰고는 있지만 ‘인동당초문’이란 용어는 그대로니 조형해석이 불가능하다. 백제가 암막새를 처음으로 창안했다는 것은 미술사학에서 큰 사건이다. 그런데 단지 용의 얼굴이라고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용의 속성으로 기와의 많은 진실을 밝힌 것은 기와 연구사의 전환점을 이루어 기와공예를 미술사학의 다른 장르만큼 승격시켰다고 생각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암막새와 수막새가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어 기와 예술의 절정기에 다다랐는데, 중국에서는 기와 예술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현재 기와 연구자가 3000명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 와당에서는 수막새에 연꽃이나 정면 용 얼굴을 새기면서, ‘암막새에는 좌우대칭의 영기문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용과 연꽃 본질 같아… 용의 조형적 확산 시작 통일신라 때의 공주 주미사(舟尾寺) 출토 기와는 뚜렷이 그런 원칙을 보여 주고 있어서, 수막새의 용이나 연꽃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가서 영기문이 중앙에서 서로 만나도록 했다 ③ ④. 그러니 우리나라는 암막새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안했으며, 이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에 온갖 아름다운 조형으로 창작하되 영기문 전개 원리를 정확히 파악하여 만들었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을 백제의 장인들과 통일신라의 장인들은 해냈는가! 그러면 용의 입에서 나오는 연이은 제1영기싹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리고 용 대신 연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용과 연꽃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며 바야흐로 용의 조형적 확산이 시작되고 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도철의 발원지를 찾아내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도철의 발원지를 찾아내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우리가 익히 아는 중국 요순(堯舜)시대 이후 하상주(夏商周)시대의 청동기에 표현된 짐승 얼굴이 용 얼굴이어야 하는 까닭이 있다. 그 근원을 찾으려면 신화시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상징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왕이 정치를 하는 궁궐 정전(正殿) 안에 용 표현이 왜 그리도 많은지 의문을 가져 보아야 한다. 삼황오제는 최고의 신들이었으며, 그 가운데 ‘황룡(黃龍)의 몸을 한 신(神)인 헌원(軒轅)’은, 중앙의 황제(黃帝)의 명령을 전달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해서 특히 주목해야 한다. 왜냐 하면 훗날 천하의 통치자인 황제는 황룡을 상징하므로 자연히 최고신인 황제의 이미지와 겹치기 때문에 ‘황제와 왕과 용’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상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매우 중요한 대목이어서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하지만 요약만 해 두고 몇 가지만 다음에 언급한다.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이 서술한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화세계의 황제는 백성들에게 동(銅)을 모아서 큰 솥(鼎)을 만들게 했는데, 솥이 다 만들어지자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맞이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전통은 그대로 내려와 한고조, 즉 유방은 그의 어머니가 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그 황제도 솥을 만들었는데 역시 용이 맞이하러 오자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한무제도 보배로운 솥(寶鼎)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황제와 용과 청동 솥’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연유로 훗날 중국이나 한국의 궁궐에 온통 용 조각이나 그림이 가득하며, 왕을 용과 동일시하여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 왕이 입던 옷을 곤룡포(袞龍袍)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나라의 청동기에 새긴 얼굴은 막연한 수면(獸面·짐승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이어야 한다. 이렇게 얼굴을 정면으로 표현하면 중국학자들은 무조건 수면이나 도철(??)이라 하고,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도 무조건 도철이나 귀면(鬼面) 혹은 도깨비라고 부른다. 모두가 옆으로 길게 그려야 비로소 용이라 알아본다. 그러므로 이상의 역사적 상황과 영기문을 알고 나면, 금방 정면 얼굴이 용의 얼굴로 보일 것이다. 상대 말기의 청동기 솥을 살펴보자. ① 세 점째 분석하여 보니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뿔의 출현이다. 뿔은 용의 얼굴에서 강력하게 발산하는 제1영기싹 영기문이지 기록에서처럼 사슴뿔이 아니다. 커다란 눈(보주)이 있고, 눈 위에 눈썹(제1영기싹)이 있으며 귀(2개의 제1영기싹), 코(2개의 제1영기싹)도 있고 입 같은 부분도 보인다. 용의 얼굴에서 이목구비를 찾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나 분명할 때는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가끔 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짧은 몸 부분이 있어서 붉은 색조로 칠했는데 꼬리가 있고 발톱이 네 개 있는 다리 하나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굵은 면 영기문에 다시 가는 선 영기문을 부여한 셈이어서 더욱 강력한 영기문을 이루고 있다. 굵은 위아래 중심선은 청동기 주조할 때 내외 틀을 고정시키기 위한 필요한 이음매다. 이 조형만 보아도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표현한 것이지 분할묘사(Split Representation)가 아니다. 또 다른 서주시대(西周時代:BC 11세기~BC 771년)의 청동 솥을 보자. ② 매우 추상적인 조형으로 흥미 있는 구성을 하여 마치 서예의 예서체 맛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각각 좌우에 용 얼굴과 몸의 측면 모습을 두었으며, 정면에서 보면 정면 얼굴의 효과가 있는 말 그대로 분할묘사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중국학자는 비로소 처음으로 용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도철문이란 용어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그 진원지가 어디에 있는지 오랫동안 추적하여 보았다. 여불위(呂不韋:?~BC 235)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정치가로 장양왕 때 승상이 되었고 진시황 때는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그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3000여명의 문객의 학식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여씨춘추’ 선식람(先識覽) 제4에 도철이란 용어가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나온다. 선식(先識)이란 미리 알아서 위기에 대비한다는 뜻이다. 그 문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현자를 무시하여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하나라의 걸왕이나 상나라의 주왕 등은 탐욕이 심하여 곧 망했다는 예들을 들면서 나온 말이 도철이다. ‘주나라의 청동정에는 도철을 새겨 넣었는데 머리는 있으나 몸은 없고 사람을 잡아먹는데 아직 삼키지 못한 형상이었다. 남에게 위해를 가하면 피해가 자신의 몸에 미치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선한 행위에는 보상이 따르나, 선하지 않은 행위에는 자신에게 피해가 따른다.’ 문맥상으로는 걸왕이나 주왕 같은 폭군을 도철에 비유한 것 같다. 즉, 탐욕스러워 사람을 먹기는 먹었으나 삼키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정치적으로 선행을 하지 않은 폭군들을 경고하는 문맥에서 갑자기 도철이 등장한 것이다. ‘여씨춘추’에 처음으로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이란 기록이 있자, 그 이후로 청동기의 얼굴 모두를 도철로 인식하게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인간의 어리석음이 끝이 없다. 한국의 번역자가 주(註)에 언급한 것을 보기로 하자. ‘도철은 털이 많고 머리에 돼지를 얹었으며 남의 곡식을 빼앗거나 탐욕스러운 인물로 문헌에 나온다. 청동기에는 본편에 묘사된 도철상과 일치하는 문양이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어서 본편의 설명이 정확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청동기 문양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어서 이 구절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씨춘추’와 청동기의 문양, 후대의 주를 비교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오류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전체 문맥은 보지 않고 ‘재물과 음식에 탐욕스러운 도철’에 관한 한 단어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천하 통치자인 황제가 천제(天帝)에게 제사할 때 쓰는, 가장 고귀한 음식을 담은 성스러운 예기에 흉측한 도철을 조각한단 말인가! 이처럼 여불위가 한마디 쓰니 그 이후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주석을 달아 새로운 오류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리며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최초로 의문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귀면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다. 동양문화는 귀면과 도철에서 해방되어야 비로소 올바른 동양문화를 정립할 수 있다. 왜 그런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엄청난 문제들이 풀려질 것이다. 세계문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귀면, 도철, 그로테스크, 수면, 도깨비 등이다. 이 모두가 용이거나 용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오류가 용으로 인식하게 되면 세계문화 해석에 큰 변화, 아니 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중국 하나라와 상나라의 청동 예기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중국 하나라와 상나라의 청동 예기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우리나라에는 고려청자를 만들면서 중국 고대의 청동 예기(禮器)를 모방한 작품이 많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쓰던 금속제 예기에도 관련된 작품이 많으며 분청사기와 백자에도 많다. 그러므로 중국의 초기 청동기부터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황제나 왕, 청동기와 용, 이 세 가지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깊이 연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공자가 없다. 하(夏)나라는 기록상의 중국 고대 왕조(BC 2070년 ~ BC 1600년)로 중국 최초의 왕조이다. 하 왕조를 허구로 여기는 시각이 있지만 갑골문과 최근 이리두(二里頭) 유적 등의 발견에 따라 지금은 대체로(商)나라를 건국한 집단과 문화적 연관성을 지닌다고 보고 있다. 필자도 영기화생론으로 그 관련성을 찾아볼 것이다. 그러면 먼저 하남성 이리두(二里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초기의 청동기(①)를 살펴보자. 높이 19㎝의 고졸(古拙)한 솜씨를 보이는 작은 솥이다. 하나라 말기의 청동기로 중국학자는 ‘운문정’(雲文鼎)이라 부른다. 중국학자의 말처럼 단지 구름무늬라면 절대적 권력을 상징하는 예기에 왜 이것을 새겼을까? ‘알 수 없는 무늬’를 가는 선으로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중심에 보주 모양의 둥근 모양이 있고 보주에서 양쪽으로 제2영기싹 영기문이 길게 뻗어나가되 보주를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보주를 위아래로 감싸고 있다. BC 1500년경에 만들어진 예기,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스러운 그릇에 새겨진 영기문이다! 게다가 중간에서 작은 영기싹(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있지 않는가. 더욱 간략화하면 ②의 위에 그린 것이 되는데, 우주의 대생명력의 대순환을 이렇게 일찍부터 표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청동기에 처음으로 새겼음직한 최초의 영기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만감에 휩싸인다. 필자가 제1, 제2, 제3영기싹이라는 영기문의 최소 단위 세 가지를 찾아내고 이들은 보주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해 낸 것이 10년 전이다. 무수히 많은 조형을 보고 찾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 벽화를 연구하다가 직감적으로 찾아내어 확신을 가졌던 원리가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채색분석하면서 진리임을 점점 확신하게 되어 감개가 무량할 뿐만 아니라 숙연해진다. 만물생성의 근원이 새겨져 있으니 신성한 예기에 어울리지 않는가. 하 왕조 다음의 상 왕조(BC 1600년 경~BC 1046년) 역시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취급되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최후로 이전한 도읍이 은(殷 · 현재의 하남 안양(河南 安?) 부근)으로, 20세기 초 농민이 우연한 기회에 얻은 거북이 등과 짐승 뼈를 약재로 팔려고 하던 중, 한 학자가 그 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발견했다. 상(商)의 문자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 뒤 갑골문자가 발견된 소둔촌(小屯村)이 바로 상(商)의 도성 유적인 은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28년 최초 발굴 이래 이곳에서는 16만여 점의 갑골문과, 우수한 제련기술로 만들어진 수많은 제례용(祭禮用) 청동기가 수천 점 출토되어서 상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상황에 대한 대체적 이해가 가능하였다. 청동기는 예기로서의 지위를 가진 동시에 국가의 군주나 대신 등의 절대적 권력의 상징으로서 이용되었다. 상 시대에 들어오면 초기에 처음으로 얼굴의 정면을 표현하는 조형이 나타나는데 ‘수면문편족정’(獸面文扁足鼎)이라 부른다(③). 역시 높이 14㎝의 작은 솥이다. 편족이란 납작한 다리를 말한다. 중국학자들은 이렇게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모두 수면(獸面)이라 부른다. 막연히 짐승얼굴이란 명칭은 얼마나 무책임한 용어인가. 상해박물관 소장 청동기 전집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아래의 연이은 보주들은 무시하여 탁본하지 않았다. 이들 보주들을 필자가 그려 넣었는데 바로 이 보주들이야 말로 얼굴이 용 얼굴 정면을 표현한 것이라는 증거로, 용의 입에서 나온 무량한 보주들이다(④). 짐승얼굴이라 하면, 상 나라의 초기 청동기에 용이 처음으로 출현하기 시작한다는 진실도 모르게 되니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앞서 그 이전 하나라 말기의 보주와 보주를 위아래로 둘러싸며 순환하는 제2영기싹이 더 놀라운 조형으로 서로 연관성이 있다. 무릇 초기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조형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처음부터 완벽하다. 그런 조형에 잇대어 나타난 상나라의 용의 정면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하나라 말기에 보이는 보주와 제2영기싹들의 조합과 다르지 않다. 상나라 초기의 용의 얼굴은 두 개의 보주와 갖가지로 변형된 제2영기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조형을 선으로 간략화시켜 보니, 눈은 물론 코가 보이지 않는가. 학자들은 용을 정면으로 본 용의 얼굴만 있으며 몸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채색분석해 보면 몸 역시 다양하게 변형시킨 제2영기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용을 항상 옆으로 본 긴 모양을 뇌리에 입력해 두었으므로 좌우의 조형을 측면으로 보아 옆에서 본 용이 서로 마주 본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용은 정면으로 우리를 향해 보고 있는 것이며, 몸은 좌우로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어쩌면 용의 얼굴에서 좌우로 뻗어나가는 영기문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인류학’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예술에 있어서의 도상 표현의 분할성(Split Representation in the Art of Asia and America)을 언급하면서, 아메리카 북서안의 예술과 고대 중국의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유사성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두 개의 좌우대칭 측면상으로 하나의 정면상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했는데 올바른 파악이 아니다. ‘Split Representation’은 분할묘사(分割描寫)를 말하는데 그릇된 시각파악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몸이 없는 용이라고 말하길래, 용을 정면으로 표현할 때 단축법(短縮法 · 사물을 정면에서 보아 표현하는 방법)으로 표현하면 얼굴만 보이고 몸은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해왔지만, 상 나라 때에는 용의 정면 얼굴을 두고 양쪽으로 몸을 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러면 상 나라의 청동기에서는 용을 왜 정면상으로 표현했던 것일까? 측면상으로 표현하면 용의 얼굴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어서 굳이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을 택한 것이다. 신성한 청동기에 최고신(最高神)을 측면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여래처럼 신이란 항상 정면으로 표현해야 하며 그래야 압도적일 수 있다. 몸은 양쪽으로 표현하면 된다. 분할묘사가 아니다. 만일 황제가 천제(天帝)에게 제사 지낼 때 쓰던 예기라면, 그 표면에 범상치 않은 조형을 새겼으리라. 또 하나의 상나라 초기 수면문작(獸面文爵 · 술 바치는 잔)도 마찬가지다(⑤, ⑥). 얼굴은 신석기 이래 표현되어 온 용 얼굴 이외에는 다른 명칭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용이어야 하는가?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경복궁 내 부엌 ‘소주방’(燒廚房)이 4년여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음달 궁중문화축전 기간에 맞춰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소주방은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만들어진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고종 2년(1865)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문화재청은 2011년 9월부터 소주방 권역 건물 17동의 복원 작업을 진행해 왔다. 앞서 궁궐 건물터 발굴조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고적도보, 왕궁사 등 고문헌 고증도 거쳤다. 경복궁 소주방은 대전의 동쪽이면서 동궁 북쪽의 넓은 공간에 위치했다. 소주방은 외소주방, 내소주방, 생물방 등 3개 건물로 구성됐다. 세 건물은 모두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졌고, 가운데에 마당을 뒀다. 외소주방은 잔치음식을, 내소주방은 임금이 매일 드시는 일상식을, 생물방은 떡과 과자 등 후식류를 담당했다고 한다. 3개 건물은 모두 부엌과 방, 곳간, 대청을 두고 있다. 부엌은 건물마다 2개 또는 3개가 있는데, 내부 공간이 방 서너 칸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않다. 반면 대청 공간은 건물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게 배치돼 있다. 침전이나 집무실에는 ‘퇴선간(退膳間)’이라는, 상을 차리고 물리는 공간이 붙어 있다. 한편 한류 드라마 ‘대장금’의 일터를 실제로 보는 ‘소주방, 백년의 문을 열다’ 개관식은 2일 오후 2시에 시작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복궁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보니…대박

    경복궁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보니…대박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경복궁 내 부엌 ‘소주방’(燒廚房)이 4년여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음달 궁중문화축전 기간에 맞춰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소주방은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만들어진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고종 2년(1865)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문화재청은 2011년 9월부터 소주방 권역 건물 17동의 복원 작업을 진행해 왔다. 앞서 궁궐 건물터 발굴조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고적도보, 왕궁사 등 고문헌 고증도 거쳤다. 경복궁 소주방은 대전의 동쪽이면서 동궁 북쪽의 넓은 공간에 위치했다. 소주방은 외소주방, 내소주방, 생물방 등 3개 건물로 구성됐다. 세 건물은 모두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졌고, 가운데에 마당을 뒀다. 외소주방은 잔치음식을, 내소주방은 임금이 매일 드시는 일상식을, 생물방은 떡과 과자 등 후식류를 담당했다고 한다. 3개 건물은 모두 부엌과 방, 곳간, 대청을 두고 있다. 부엌은 건물마다 2개 또는 3개가 있는데, 내부 공간이 방 서너 칸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않다. 반면 대청 공간은 건물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게 배치돼 있다. 침전이나 집무실에는 ‘퇴선간(退膳間)’이라는, 상을 차리고 물리는 공간이 붙어 있다. 한편 한류 드라마 ‘대장금’의 일터를 실제로 보는 ‘소주방, 백년의 문을 열다’ 개관식은 2일 오후 2시에 시작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잠든 ‘영원’ 첫 개방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잠든 ‘영원’ 첫 개방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가 묻힌 영원(英園·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경역 내)이 일반에 최초로 개방된다. 영친왕이 사망한 지 45년 만이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영원을 제향일인 새달 10일부터 시범 개방한다고 28일 밝혔다. 영친왕(1897~1970)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1세 때인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그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다. 일본 왕족이었던 마사코(이방자·1901~1989)와 정략결혼을 하고 일본에서 생활하다 56년 만인 1963년 귀국, 병환에 시달리다 1970년 사망해 영원에 묻혔다. 문화재청은 “비운의 황태자로도 불리는 영친왕이 잠든 영원을 개방하는 것은 일제에 의해 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영친왕의 굴곡진 생애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친왕의 둘째 아들 이구가 묻힌 영원 왼편의 회인원(懷仁園)도 시범 개방된다. 영원과 회인원은 오는 10월 31일까지 시범 개방을 거쳐 내년 1월부터 전면 개방된다. 관람료는 무료. 영원 개방을 기념해 부대 행사도 열린다. 홍유릉 내 유릉(裕陵·순종과 그의 두 비인 순명효황후와 순정효황후가 묻힌 능) 재실에서는 30일부터 새달 24일까지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대한제국을 다시 기억하다’를 주제로 사진전이 개최된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다양한 사진 자료가 전시된다. 문화재청은 국민들의 문화유산 접근성과 향유권을 높이기 위해 궁궐과 왕릉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지난해엔 덕수궁 석조전을 복원해 대한제국역사관을 개관하고 비공개 능이었던 사릉(思陵)과 강릉(康陵)을 개방했다. 올해는 궁중 부엌이자 드라마 대장금의 주 무대였던 경복궁 소주방의 복원을 마치고 새달 2일 개방한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정명공주, 궐 떠나 새로운 전개 시작 ‘기대감↑’

    정명공주, 궐 떠나 새로운 전개 시작 ‘기대감↑’

    정명공주, 궐 떠나 새로운 전개 시작 ‘기대감↑’ ‘정명공주’ ‘화정’의 정명공주의 새로운 삶이 예고돼 시청자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MBC ‘화정’에서는 정명공주가 궁궐을 떠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화정’에서 인목대비(신은정)는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끌려갔다. 인목대비가 역모의 누명을 쓴 것은 “지금의 성상은 왕좌의 주인이 아니다. 격암의 말이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정체불명의 서찰 때문이었다. 인목대비를 수사하게 된 이이첨(정웅인)은 “격암 남사고의 예언.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냐. 영창대군이 왕좌를 얻을 것이라는 이 예언서를 어디에서 얻은 거냐”고 물었다. 예언이 격암의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인목대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 인목대비가 정명공주를 임신했을 당시 격암이 자신에게 “뱃속의 아이를 잘 지키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결국 정명공주에게 궐을 떠나 멀리 도망가자고 제의했다. 정명공주는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궐을 떠났다. 그러나 최상궁(김소이)과 함께 궐을 나선 정명공주에게 위기가 닥쳤다. 김개시(김여진)가 격암 남사고의 주인이 정명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주를 받은 이이첨의 추격에 한계를 느낀 최상궁은 정명공주를 홀로 배에 태웠다. 그동안 광해군(차승원)에게 애틋한 여동생으로의 모습을 보여온 정명공주는 이제 신분을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명공주, 궐 떠나 새로운 전개 시작 ‘기대감UP’

    정명공주, 궐 떠나 새로운 전개 시작 ‘기대감UP’

    정명공주, 궐 떠나 새로운 전개 시작 ‘기대감UP’ ‘정명공주’ ‘화정’의 정명공주의 새로운 삶이 예고돼 시청자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MBC ‘화정’에서는 정명공주가 궁궐을 떠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화정’에서 인목대비(신은정)는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끌려갔다. 인목대비가 역모의 누명을 쓴 것은 “지금의 성상은 왕좌의 주인이 아니다. 격암의 말이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정체불명의 서찰 때문이었다. 인목대비를 수사하게 된 이이첨(정웅인)은 “격암 남사고의 예언.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냐. 영창대군이 왕좌를 얻을 것이라는 이 예언서를 어디에서 얻은 거냐”고 물었다. 예언이 격암의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인목대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 인목대비가 정명공주를 임신했을 당시 격암이 자신에게 “뱃속의 아이를 잘 지키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결국 정명공주에게 궐을 떠나 멀리 도망가자고 제의했다. 정명공주는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궐을 떠났다. 그러나 최상궁(김소이)과 함께 궐을 나선 정명공주에게 위기가 닥쳤다. 김개시(김여진)가 격암 남사고의 주인이 정명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주를 받은 이이첨의 추격에 한계를 느낀 최상궁은 정명공주를 홀로 배에 태웠다. 그동안 광해군(차승원)에게 애틋한 여동생으로의 모습을 보여온 정명공주는 이제 신분을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명공주, 신분 숨기고 새로운 삶 시작 ‘본격 전개’

    정명공주, 신분 숨기고 새로운 삶 시작 ‘본격 전개’

    정명공주, 신분 숨기고 새로운 삶 시작 ‘본격 전개’ ‘정명공주’ ‘화정’의 정명공주의 새로운 삶이 예고돼 시청자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MBC ‘화정’에서는 정명공주가 궁궐을 떠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화정’에서 인목대비(신은정)는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끌려갔다. 인목대비가 역모의 누명을 쓴 것은 “지금의 성상은 왕좌의 주인이 아니다. 격암의 말이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정체불명의 서찰 때문이었다. 인목대비를 수사하게 된 이이첨(정웅인)은 “격암 남사고의 예언.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냐. 영창대군이 왕좌를 얻을 것이라는 이 예언서를 어디에서 얻은 거냐”고 물었다. 예언이 격암의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인목대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 인목대비가 정명공주를 임신했을 당시 격암이 자신에게 “뱃속의 아이를 잘 지키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결국 정명공주에게 궐을 떠나 멀리 도망가자고 제의했다. 정명공주는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궐을 떠났다. 그러나 최상궁(김소이)과 함께 궐을 나선 정명공주에게 위기가 닥쳤다. 김개시(김여진)가 격암 남사고의 주인이 정명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주를 받은 이이첨의 추격에 한계를 느낀 최상궁은 정명공주를 홀로 배에 태웠다. 그동안 광해군(차승원)에게 애틋한 여동생으로의 모습을 보여온 정명공주는 이제 신분을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철화백자 ‘바보 용’ 항아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철화백자 ‘바보 용’ 항아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조선시대 철화백자 항아리와 청화백자 항아리 가운데는 중앙에서 파견된 화원(畵員)이 관요(官窯)에서 18세기에 그렸음 직한 당당한 모습의 용이나 봉황이 정교하게 그려진 작품이 있다.(⑤) 밑부분에 대좌에 해당하는 높은 굽이 있어서 더욱 우뚝한 모습의 청화백자는 궁궐에서 의례용으로 쓰기도 했던 항아리였을 것이다. 그런 항아리들에는 거의 반드시 용 두 분이나 봉황 두 분이 서로 앞서가서 표면을 회전한다. 그것은 큰 접시에 두 용이나 두 봉황을 회전시키는 그림과 맥락이 같다. 그저 권위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릇 모든 도자기는 대우주의 생명력이 응축된 만병(滿甁)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용과 봉황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동시에 우주의 대생명력의 순환을 상징함도 알았다. 도자기 연구에서 최근 처음으로 시도하는 ‘만병론’(滿甁論)을 ‘월간 민화’에 연재하고 있다. 그런 권위적인 항아리를 보다가 19세기와 20세기 지방요(地方窯)에서 만든 둥근 항아리를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지방요에서 만든 항아리는 둥근 것이 많은데, 특히 용은 아마추어가 그린 듯한 ‘지지리도 못 그린 예’가 많다.(③, ④) 사람들은 그런 산만한 용 그림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다. 그리고 익살스럽다고 흔히 말하며, 그리다 만 미완성이라고 심지어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완전한 용이 탄생하기 직전, 역동적인 혼돈의 세계다. 못 그려서가 아니고 의도적이다. 어떤 용은 얼굴이 길쭉하고 눈은 있는 듯 없는 듯, 바보 같은 민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인데 특히 철화백자 항아리에 많다. 웃을 일이 아니어서 그런 마음을 멈추고 엄숙한 기분이 된다. 호림박물관 소장 철화백자 ‘용 영기화생문 항아리’에는 앞뒤가 같아서 양측에 몸은 있는데 앞뒤에는 얼굴이 없고 얼굴 대신에 구름 모양만이 있는 것도 있다.(⑥) 측면을 보면 몸이 있는데 용이 네 분인지 두 분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이 항아리는 형태도 좌우대칭으로 양감이 있고 흰색도 깨끗하고 그림 솜씨도 조심스럽지만 자유분방한 맛이 없어 관요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철화백자 항아리에서 용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우스꽝스러운 지방요 작품을 봤다.(①, ②) 어린이가 사람 모습을 그린 듯한 솜씨의 용의 모습, 얼굴과 다리와 꼬리도 없이 그저 길게 용의 몸만 있는 모습, 얼굴에 두 눈알만 있고 몸은 작달막한 모습 등 차마 웃지도 못할 조형에 절망감이 들기도 했다. 익살스러운 표현을 넘어선다. 그런데 문득 ‘아! 용이 영기화생하는 광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웃음이 사라지고 역시 엄숙해진다. 용이나 봉황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산재해 있는데, 구름이 아니고 모두 제1영기싹으로 이뤄진 영기문이어서 용의 영기화생이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없고 그 자리에 영기문만 있는 것은 지금 ‘펑’ 하고 응축된 영기가 폭발하며 금방이라도 용의 얼굴이 나타날 듯하다. 그리고 미완성의 그림 같은 것은 장차 완성된 형태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 있으니 얼마나 고차원의 경이로운 조형인가. 그리고 어이없는 파격적인 작품의 그림들은 ‘용은 아주 작아질 수도 있고 아주 커질 수도 있으며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는 중국의 가장 오랜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주석을 그대로 따른 조형들이다. 특히 철화백자에서 보이는 바보 같은 용은 용의 영기화생 광경을 보여 주는 높은 차원의 그림이다. 화원의 용 그림보다 훨씬 더 용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되 자유분방하게 그리지 않았는가. 용은 누구도 본 적이 없다. 본질을 그리면 이렇게 되는가. 그러면 왜 하필이면 지방요에서 만들어진 백자에만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역동적인 용의 영기화생의 광경이 그려졌을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민족혼은 민중의 마음속에 왜곡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일까. 19세기와 20세기에 민중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수천년간 축적된 조형 의지가 폭발하는 중대한 현상을 모든 장르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자기를 토산공물로 진상(進上)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요의 건물은 그 비용과 작업감독은 지방관아에서 담당했으며, 중앙의 사옹원(司甕院)에서 파견되는 봉사(奉事)에 의해 관리됐다. ‘육전조례’에 따르면 정규적인 진상 사기가 주로 왕실에서 쓰는 일반 용기와 봉상시(奉常寺)의 제기 및 내의원(內醫院)의 제약용, 외국 사신의 접대에 필요한 사기로도 공급됐다. 15세기 후반에는 관어용(官御用) 사기를 위해 경기도 광주 일대에 관영 사기제조장으로 사옹원의 분원을 설치해 주로 백자 등을 제작했는데, 광주 분원은 1884년 민영화될 때까지 관요로서 제작 활동을 계속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대장금’ 일터 실제로 본다 ‘경복궁 소주방 개방’ 경복궁 내 부엌 ‘소주방’(燒廚房)이 4년여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음달 궁중문화축전 기간에 맞춰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소주방은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만들어진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고종 2년(1865)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문화재청은 2011년 9월부터 소주방 권역 건물 17동의 복원 작업을 진행해 왔다. 앞서 궁궐 건물터 발굴조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고적도보, 왕궁사 등 고문헌 고증도 거쳤다. 경복궁 소주방은 대전의 동쪽이면서 동궁 북쪽의 넓은 공간에 위치했다. 소주방은 외소주방, 내소주방, 생물방 등 3개 건물로 구성됐다. 세 건물은 모두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졌고, 가운데에 마당을 뒀다. 외소주방은 잔치음식을, 내소주방은 임금이 매일 드시는 일상식을, 생물방은 떡과 과자 등 후식류를 담당했다고 한다. 3개 건물은 모두 부엌과 방, 곳간, 대청을 두고 있다. 부엌은 건물마다 2개 또는 3개가 있는데, 내부 공간이 방 서너 칸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않다. 반면 대청 공간은 건물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게 배치돼 있다. 침전이나 집무실에는 ‘퇴선간(退膳間)’이라는, 상을 차리고 물리는 공간이 붙어 있다. 한편 한류 드라마 ‘대장금’의 일터를 실제로 보는 ‘소주방, 백년의 문을 열다’ 개관식은 2일 오후 2시에 시작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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