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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궁의 절정… 경치를 잠시 빌리다

    고궁의 절정… 경치를 잠시 빌리다

    새봄이 되면 고궁마다 봄맞이 행사를 엽니다. 행사는 대개 금지된 영역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쪽문을 열고, 경복궁 경회루로 오르는 계단의 문도 활짝 엽니다. 이런 행사들의 핵심은 왕의 눈높이에서 궁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고궁들의 화양연화가 시작됐습니다. 다 돌아볼 수는 없더라도, 한 곳쯤은 찾아 물오른 봄 풍경을 만끽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계단식 화단·꽃담… 창덕궁 낙선재의 백미 ‘뒤란’ 낙선재는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이 1847년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석복헌과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가 머물던 수강재도 딸려 있다. 석복헌은 단청이 없다. 소박하고 단아하다. 호리병, 포도 등 다산을 기원하는 문양도 건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맘때 낙선재 구역의 백미는 뒤란이다. 매화가 흐드러진 화계(계단식 화단)와 각종 무늬로 치장한 꽃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뒤란에서 눈여겨볼 것은 괴석이다. 화강암 받침대에 특이하게 생긴 돌을 받쳐 놓았다. 받침대 중 하나엔 소영주(小瀛洲)라고 씌어 있다. 영주는 신선 세계다. 그러니 받침대의 주장은 이 공간이 곧 선경이라는 것일 터다. 뒤란의 위는 야트막한 산자락이다. 낙선재 구역에 딸린 전용 후원이다.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된 영역이다. 바로 이곳에 발을 딛는 것이 특별 관람의 핵심이다. 취운정에서 작은 쪽문을 오르면 곧 한정당이다. 건물 주변엔 담장이 둘러쳐 있다. 이 담장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반드시 까치발을 하고 봐야 한다. 그래야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완벽한 진경산수화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인왕·백악·낙산·남산 한눈에 볼 수 있는 ‘상량정’ 작은 쪽문을 하나 더 지나면 제법 너른 터에 육각형 정자와 긴 창고형 건물이 나온다. 정자는 ‘상량정’이라 적힌 편액을 달고 있다. 한데 편액이 매우 작다. 어른이 배냇저고리를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글씨를 왼쪽부터 쓴 것도 그렇다. 상량정의 옛 이름은 평원루다. 상량정 위로 오르면 인왕과 백악, 낙산, 남산 등 한양을 에워싼 4개의 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 있어 이 모습을 볼 수 없다. 아쉽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열댓 개 정도의 계단만 오르면 천하의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데 말이다. 상량정 옆의 묵직한 건물은 예전 장서각이다. 여기서 무수히 많은 한글소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를 따로 ‘낙선재본’이라 부른다. 상량정 옆 담장에 새겨진 무늬가 인상적이다. 부(富) 자와 수(壽) 자를 형상화한 문양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담장을 지나는 문은 만월문이다. 보름달처럼 둥근 형태다. 문 자체도 예쁘지만, 안에 담기는 풍경은 더 예쁘다. 이제 막 꽃잎을 연 돌배나무와 창덕궁 전각의 기와지붕, 그리고 멀리 백악의 봉긋한 봉우리가 함께 담긴다.●왕이 정사 살피던 ‘인정전’ 내부 관람도 감동 인정전(국보 225호) 내부 관람도 낙선재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인정전은 왕이 정사를 살피던 공간이다. 20분 남짓 왕이 된 기분을 낼 수 있다. 인정전에 들면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길 권한다. 왕뿐 아니라 신하, 내시 등 자리를 바꿀 때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정전은 밖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중층 구조다. 그 압도적인 공간감은 신하의 자리에 서서 볼 때 최대치를 이룬다. 사실 가장 재미없는 것은 왕의 시선이다. 왕이 앉은 자리가 곧 풍경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어좌와 일월오봉병,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금강송 기둥, 천장의 화려한 봉황 조각 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외려 말석의 신하 자리다. 전등, 유리창, 커튼 등 근대적 요소가 가미된 전환기의 궁궐 모습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좋겠다. 궐내각사 특별 관람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관리들의 활동 공간을 복원한 곳이다. 상시 개방되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감동이 한결 깊어진다. ●풍경을 액자처럼 보는 ‘낙양각’… 경복궁 경회루의 백미 경복궁에선 경회루 개방 행사가 준비됐다. 경회루는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어 올린 누각이다. 경회루 2층은 바닥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중앙부가 가장 높고, 가운데 공간이 한 뼘 남짓 낮다. 바깥 공간 역시 또 한 뼘 정도 낮다. 높이가 다른 경계 구역엔 분합문을 달았다. 문을 내리면 폐쇄된 공간이 되고 열면 터진 마루가 된다. 참고할 것 하나. ‘인증샷’ 찍은 뒤 휴대전화를 잘 챙겨야 한다.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마루 틈으로 소지품이 빠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빠진 소지품은 ‘이번 생’에선 찾을 방도가 없다. 아주 먼 훗날 경회루를 중수할 때나 가능하다. 낙양각은 경회루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독특한 문양을 새겨 바깥 풍경이 액자처럼 보이게 했다. 옛사람들은 한옥의 창을 단순히 창으로만 보지 않았다. 풍경을 담는 액자로 봤다. 이처럼 밖의 풍경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차경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소유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길 뿐이다. 이 덕에 붓질 한 번 하지 않고도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수백 장의 풍경화를 내걸 수 있다. 낙양각은 네 방향 모두 절경을 품고 있다. 특히 남쪽 방향이 인상적이다. 근정전과 수정전 등의 전각들이 낙양각을 채운다. 수정전 옆은 잔디밭이다. 잔디밭은 ‘궁궐의 눈물’과 같은 것이다. 오래전 빼곡했던 궐내각사가 사라진 흔적이기 때문이다.●덕수궁 내 유일하게 단청 없는 건물 ‘석어당’ 덕수궁에선 석어당 개방이 봄 행사의 백미다. 석어당은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건물이다. 유일한 2층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원래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뒤 선조가 15년을 지내면서 덕수궁의 모태가 됐다. 병에 걸린 선조를 위해 허준이 분주히 오가고, 선조가 승하하고, 대청마루에 앉은 인목대비가 뜨락에 광해군을 꿇린 채 호되게 꾸짖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석어당 2층에서 굽어보는 살구꽃 핀 풍경이 아름답다. 문을 열면 사방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곧바로 여성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줄곧 무게만 잡던 중년 남성들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걸린다. 글 사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창덕궁 낙선재 특별 개방은 오는 28일까지 매주 목~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진행된다. 창덕궁누리집(www.cdg.go.kr)에서 예약해야 한다. 다만 거의 모든 날짜가 매진이어서 아쉽다. 낙선재는 화계 위 공간만 진입이 제한된다. 후원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낙선재 구역의 화양연화가 이제 막 시작된 만큼 이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게 좋겠다. 인정전 내부 관람은 10월까지 매주 목~토요일 1일 4회( 오전 10시 30분, 11시, 오후 2시, 2시 30분) 운영된다. 당일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신청받는다. 1회 입장 인원은 30명이다. 우천 시엔 취소된다. 궐내각사는 상시 볼 수 있지만 특별 관람 기간엔 전문 해설사가 동행한다. 10월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운영된다. 역시 예약해야 한다. 덕수궁 석어당, 함녕전 개방은 5일까지다. 밖에서는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석어당과 ‘한 세트’인 살구꽃은 지난달 29일쯤 피기 시작했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더니 벌써 절정을 지나 낙화하고 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내부 관람은 화·토요일 오전 9시와 오후 4시에 각각 진행된다. 덕수궁관리소 누리집(www.deoksugung.go.kr)에서 예약해야 한다. 현재 진품으로 전시 중인 일월오봉병은 이달 중 교체된다. 서둘러 봐 두는 게 좋겠다. 경회루(국보 224호) 특별 관람은 10월 말까지 주중 3회(오전 10시, 오후 2시, 4시), 주말 4회(오전 11시 추가) 진행된다. 소요 시간은 30~40분이다. 회당 최대 관람 인원은 70명(`내국인 60명, 외국인 10명)이다. 경복궁 누리집(www.royalpalace.go.kr)에서 예약제로 운영된다. 1인당 최대 4명까지 예약할 수 있다.
  • 중국 첫 우주정거장 2일 오전 8시25분 추락

    중국 첫 우주정거장 2일 오전 8시25분 추락

    중국의 첫 번째 우주정거장인 톈궁(天宮) 1호가 2일 오전 8시 25분쯤 지구로 추락할 예정이라고 중국국가항천국(中國國家航天局)은 밝혔다. 미국 미시간주는 톈궁의 잔해가 떨어질 것에 대비해 비상 대기 근무 중이라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1일 보도했다. 릭 스나이더 미국 미시간주 주지사는 “무게 8.5t에 길이 10.4m로 스쿨버스 정도의 규모인 톈궁은 추락 도중 대기권에서 전소할 전망으로 잔해가 지구에 떨어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31일(현지시간) 말했다. 현재 톈궁의 궤도에 비춰보면 추락지점은 호주에서 미국 일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에서는 미시간 남부를 포함해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펜실베이니아 일대까지가 추락 지점으로 예상된다.톈궁의 잔해는 독성 물질인 하이드라진을 함유하고 있어 우주정거장 잔해로 의심되는 물질을 발견하면 즉각 911(한국 119)로 신고하고, 최소 46m 이상의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하이드라진은 로켓 연료용 유성 액체로 모든 우주정거장 잔해는 위험하다고 미시간 주는 발표했다. 톈궁 1호는 2011년 9월 29일 발사된 중국의 실험용 우주정거장으로 중국 고전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천상의 궁궐(톈궁)에 올라가 소란을 피운 고사에서 이름을 따 왔다. 중국은 2016년 9월 톈궁 2호를 발사했으며 2020년까지는 독자적인 우주정거장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2013년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톈궁 1호에서 활동하는 우주인 3명과 통화하기도 했다. 3명의 우주비행사가 2주 동안 활동할 수 있는 규모의 톈궁은 2012년과 2013년 유인 우주선 선저우와 도킹에 성공했으며 2016년 3월 지구와 교신이 끊겼다. 1979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85t 규모 우주정거장 ‘스카이랩’도 지구로 추락한 사례가 있다. 스카이랩의 잔해는 호주 서남부 해안도시 에스페란스로 떨어졌다. 당시 스카이랩의 추락을 묘사한 기사를 살펴보면 불꽃놀이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폭죽과 함께 1분간 천둥같은 굉음이 울렸고 파편이 떨어질 때마다 집안이 흔들렸다고 되어 있다. 에스페란스는 쓰레기를 투기했다는 이유로 나사에 벌금을 청구했지만, 나사는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 에스페란스 박물관에서는 우주정거장의 잔해를 전시하고 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남편 여읜 고려·조선의 신분 높은 여인들 승려가 되어 ‘죄’를 씻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남편 여읜 고려·조선의 신분 높은 여인들 승려가 되어 ‘죄’를 씻다

    정업원(淨業院)은 불교국가 고려의 국책 비구니 사찰이었다. 왕가(王家)를 비롯해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남편을 여의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정업원의 전통은 이어졌다. 업(業)이란 중생이 지은 선악(善惡)과 그 응보를 가리킨다. 정업원이란 살아생전의 잘못을 깨끗하게 씻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정업원에 몸담은 여인들이 지은 가장 큰 잘못은 아마도 남편을 먼저 저세상에 보낸 죄가 아닐까 싶다.고려시대 정업원이 언제 창건됐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1164년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를 임시수도로 삼았을 때도 정업원을 지정해 비구니들이 모여 살도록 했고, 환도한 이후 다시 정업원을 운영했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하면서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세웠다. ●고려 의종 이전부터 존재… 창건 시기 불명확 국가가 운영하는 정업원이라는 이름의 비구니 사찰이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다양한 이유로 승려가 되어 절에 머무는 전통은 건국 초기부터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국의 세력가와 혼인해 결속력을 높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는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西京)에서도 지역의 유력호족 김행파의 두 딸과 각각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태조가 서경의 부인들을 돌아보지 않자 두 사람은 출가해 비구니가 됐고, 태조가 이런 사실을 알고는 서경에 대서원(大西院)과 소서원(小西院)이라는 비구니 사찰을 세워 두 여인을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들이 태조의 제19비 대서원부인과 제20비 소서원부인이다. 공민왕의 제2비 혜비(惠妃) 이씨는 고려 말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인 계림부원군 이제현과 수춘국부인 박씨의 소생이다. 공민왕의 정비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명문가의 딸을 후비로 들이자는 조정 공론에 따라 간택됐다. 혜비는 공민왕이 시해되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자 조선 태종이 부의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혜화궁주로 불리던 혜비는 당시 조선왕실 정업원의 주지 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정업원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정업원구기비는 한양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이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낙산으로 휘돌아 오르는 길 중간이다. 구기비 보호각은 청룡사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정업원구기비란 정업원 옛 터에 세운 비석이라는 뜻이다. 영조가 단종비 정순왕후를 기리고자 1771년 친필로 ‘정업원구기’ 다섯 글자를 써서 새겼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에서 살해된 뒤 정업원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생을 보낸 것을 넘어 최근에는 정순왕후 스스로 ‘정업원주지 노산군부인 송씨’(淨業院住持 魯山君夫人 宋氏)라고 쓴 문서가 발견됐다. 정순왕후가 아예 정업원으로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임진왜란 때 창덕궁 일대 전소되면서 폐사 조선 초기 정업원은 창덕궁 서북쪽 원서동에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성종실록’에는 ‘정업원은 궁궐의 담장 곁에 있는데 범패(梵唄) 소리가 궁중까지 들리니 진실로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라는 대사헌 박건의 상소가 나온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범패는 불교 의식에 쓰이는 음악이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세 차례 폐지됐다가 설치되기를 반복했다. 세종 시대인 1448년 없어졌다가 호불왕(好佛王)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세조에 의해 1457년 옛 터에 다시 세워졌다. 정업원은 연산군이 1504년 창덕궁 주변을 사냥터로 만들면서 다시 폐지됐다. 중종반정 이후 정업원 건물은 독서당으로 활용됐다. 이후 명종의 어머니로 불교의 부흥을 꾀했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1546년 다시 세워진다. ‘명종실록’에는 “인수궁을 선왕의 후궁을 위하여 수리하도록 하고, 정업원은 인수궁에 소속시켰다가 아울러 수리하여 선왕의 후궁 가운데 연고가 생기는 이를 이주시키도록 하라’는 전교가 보인다. 정업원은 임진왜란 때 창덕궁 일대가 모두 불타면서 폐사됐다. ‘선조실록’에는 “정업원 등의 옛터에 여승이라 불리는 자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고 있다”는 상소에 임금이 “정업원의 일은 비록 옛터에다 초가집을 지어 거처하는 장소로 삼고 있지만…허물고 내쫓기까지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고 답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정업원의 기능이 왜란 이후에도 그런대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러다 1666년(현종 2) 실록에는 “인수(仁壽)와 자수(慈壽)의 두 이원(尼院)을 혁파하여, 자수원 것은 재목과 기와를 성균관에 내려 학사를 수리하는 데 쓰게 하고 인수원 자재는 옮겨다가 질병가를 짓도록 했다. 질병가는 궁인 가운데 질병이 든 자를 거처하게 하는 집”이라는 내용이 있다. 인수원과 자수원이란 선왕 후궁들의 거처였던 인수궁과 자수궁의 부속 사찰을 일컫는 표현일 것이다. 정순왕후가 정업원주지를 맡고 있던 시기는 연산군이 창덕궁 옆 정업원을 철폐한 이후, 명종이 복설(復設)하기 이전이다. 도성 내부에서 쫓겨난 정업원의 비구니들이 도성 바깥 인창방에 다시 절을 세운 것이다. 인창방은 오늘날 흥인지문 밖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에 해당한다.●비구니 사찰 청룡사에 정순왕후 출가설도 정업원구기비를 둘러보고 나면 담장 너머 청룡사와의 관계가 궁금하다. 오늘날 청룡사는 정업원처럼 비구니 사찰이다. 청룡사 측은 정순왕후가 출가한 절로 한때 이름이 정업원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922년 비구니 혜원을 주석하게 했다는 역사도 전한다. 하지만 구기비를 세울 당시 주변에는 정업원도, 청룡사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왕실 부속 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은폐된 공간에서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기를 강요당했던 궁녀들의 존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고, 정업원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사실상 같은 역할을 하는 사찰이 필요했다. 정업원구기비가 세워진 곳은 이런 절을 세울 적지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청룡사는 19세기 이후 은퇴한 궁녀들이 여생을 보내는 사찰로 쓰였고, 역시 낙산 동쪽 기슭으로 구기비 언덕 너머에 있는 보문사도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잘 알려진 것처럼 정순왕후는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난 이후 인창방에 살면서 남편이 귀양 가서 죽은 영월 쪽에 바라다보이는 집 뒤편 돌산에 올라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영조는 정업원구기비를 세우면서 이 봉우리에도 동망봉(東望峰)이라고 친필로 써서 새겼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영조 어필 표석도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동망봉 봉우리는 체육공원이 됐고, 한켠에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새긴 최근의 작은 표석이 하나 보일 뿐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역사 속 행정] 조선판 ‘청와대 비서실’ 승정원

    [역사 속 행정] 조선판 ‘청와대 비서실’ 승정원

    인조에 침 잘못 놓은 의관 처벌두고 사헌부의 사형 건의 일부러 축소 국왕의 목구멍으로 불렸던 승정원 공정성 잃으면 국정 전체에 통증승정원은 조선시대에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한다. 조선조 대부분의 관청이 왕-의정부-육조-일반 관청이라는 계통 속에 포함된 것과 달리 승정원은 국왕 직속이다.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이 대통령 직속인 점과 같다. 한국사에서 국왕 비서기구의 등장은 백제 때 ‘내신좌평’으로 시작되지만 이는 개별 관청이 아니고 특정 관직이다. 고려시대에는 중추원과 은대 등이 설치돼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관장했는데, 후기에 이르러 중추원이 이를 전담했다. 그러나 중추원은 비서 기능 말고도 군사 기능을 함께 관장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 중추원이 담당하던 비서 기능만 분리해 승정원을 두면서 국왕 비서기구로서의 독립성이 확보됐다. 승정원을 지칭하는 별명은 여러 가지가 있다. 승정원을 줄여 정원이라고 하거나 은대 또는 후원, 후설 등의 별칭으로 불렸다. 여기서 ‘후’(喉)는 신체 일부분인 목구멍을 뜻한다. 흥미롭게도 조선시대에는 중요 관직이나 관청을 사람의 몸에 비유해 말하곤 했다. 관원들 가운데 최고위 관원인 대신은 다리와 팔을 의미하는 ‘고굉’으로, 탄핵과 간쟁을 담당하던 대간은 귀와 눈인 ‘이목’으로, 그리고 승정원은 목구멍을 의미하는 ‘후원’으로 불렸다. 신하들이 국왕의 다리와 팔이자, 귀와 눈이요, 목구멍이라는 것이다. 후원 즉, 목구멍은 승정원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한다. 승정원을 목구멍에 비유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승정원의 주요 기능인 왕명 출납과 관계된다. 입을 통해 들어온 모든 음식물이 목구멍을 통해 넘어가므로, 만약 목구멍에 질환이 있다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구멍에 해당되는 승정원에 문제가 있다면 이는 심각한 국정 혼란을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 승정원의 왕명 출납을 단순히 기능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면 오산이다. 오늘날과 같이 삼권분립이 이뤄지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 국왕의 명령은 바로 법이 되므로 왕명 출납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왕명 출납에 오류가 있을 경우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혹은 죽이기도 할 수 있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6월 사헌부와 승정원 사이에 논란이 있었는데, 인조가 승하하기 직전에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 이형익의 처벌에 대한 것이었다. 사망 직전에 이형익이 인조에게 침을 놓았는데 혈을 잘못 짚어 문제가 되자 사헌부에서는 이형익을 ‘안율정죄’(按律定罪)하자고 주장했는데, 다름 아닌 사형에 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정원은 사헌부의 건의와 국왕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안율’이라는 두 글자를 임의로 빼 ‘정죄’라는 표현만 전달했다. 정죄란 꼭 사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효종에 의해 안율정죄로 다시 결정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표현이 바뀌게 된 책임을 지고 해당 승지 정유성이 파직됐다.당시 사헌부에서는 “승정원의 처사로 법을 집행하는 의리가 추락했다”며 신랄하게 공격했다. 국왕의 목구멍인 승정원이 공정성을 잃게 되면 이형익의 사례에서처럼 조정 전체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승정원은 또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이에 대한 왕의 결재 사항을 각 관청에 하달하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관보와 유사한 조보를 발행했다. 또 궁궐문의 열쇠 관리도 관장했다. 조선의 아침은 대궐문이 열리면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궐문은 단순한 출입문 이상의 큰 의미를 갖는데, 그 최종 책임이 승정원에 있었다. ■한국행정연구원 ‘역사 속 행정이야기’ 요약 이근호 연구교수 (명지대)
  • 매화가 수놓은 꽃담…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호사

    경내 관청인 궐내각사 탐방 프로그램도 봄꽃으로 화사하게 단장한 궁궐에서 특별한 봄을 만끽할 기회가 마련된다. 평소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창덕궁 낙선재 후원이 새달까지 한시적으로 개방된다. 문화재청은 전문 해설사와 함께 후원 일대를 돌아보는 특별관람을 오는 29일부터 새달 28일까지 매주 목~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진행한다. 낙선재는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재위 1834∼1849)이 1847년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이듬해 각각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와 순조 정비인 순원 왕후를 위해 세운 석복헌과 수강재도 딸려 있다. 낙선재는 고종 황제의 막내딸 덕혜 옹주를 비롯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별관람에 참가하면 헌종과 경빈 김씨의 일화를 비롯해 낙선재의 건축적 특징, 낙선재 권역에서 1989년까지 살았던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이야기를 해설사로부터 들을 수 있다. 매화가 흐드러진 계단식 화단과 각종 무늬로 치장한 꽃담은 낙선재 후원 관람의 백미다. 더불어 창덕궁 안에 있는 관청인 궐내각사를 둘러보는 프로그램도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운영된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관청이 궁궐 밖에 있었으나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하는 관청은 궁궐 안에 세워졌다.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검서관이 일하던 검서청과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해서 짓던 예문관, 궁중의 약을 만들던 내의원 등이다. 해설사로부터 각 관청의 역할과 기능, 관청에 얽힌 역사적인 이야기를 듣고, 검서청 누마루에 올라 궁궐의 풍광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한성판윤과 서울특별시장

    [노주석의 서울살이] 한성판윤과 서울특별시장

    서울특별시장의 조선시대 관직명은 한성판윤이다. 한성부의 수장이라는 뜻이다. 한성부는 오늘의 서울특별시청이고, 한성은 서울특별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양은 한경·한도·왕도·황도·왕성·황성·도읍·도부·경조·경·경사·경도·경성·경화·수부·수선 같은 숱한 별칭 중 하나다. 1946년 미군정청이 수도의 지명을 경성에서 서울로 바꿀 때까지 이 복잡한 이름이 횡행했다. 미군정이 잘한 일 한 가지를 꼽으라면 서울이라는 도시 이름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서울이라는 순우리말 지명은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 창간호 한글판에서 따왔다. 사상 처음으로 ‘조선 서울’이라는 발행 장소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서울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중앙부처였다. 한성판윤 또한 정2품 경관직(京官職)으로 의정부 좌·우 참찬, 육조 판서와 함께 아홉 대신(九卿) 중 한 명이었다. 한성부의 담당 업무는 호적, 시장, 산, 도로, 하천, 차량, 순찰 등이라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다. 특이하게 도시행정뿐 아니라 전국의 호적 관리를 통해 소송을 담당하는 사법권을 행사했고, 궁궐과 도성을 지키는 치안 업무까지 맡았다. “한성판윤 되기가 영의정 되기보다 어렵다”는 옛말은 한성판윤의 집행 권한과 이해관계가 그만큼 크고 복잡했다는 얘기다. 한성판윤은 왕과 조석으로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논의하는 측근이었다. 뉴욕·런던·파리·모스크바·베이징·도쿄시장과 달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수도 시장의 전통이 여기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서울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고 서울이 곧 국가였다. 서울은 왕의 직할통치 지역이었다. 이처럼 서울의 행과 불행은 중앙이라는 장소의 역사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오는 6월 치러지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3선을 노리는 박원순 시장과 각당 예비 후보들에 관한 기사가 연일 미디어에 오르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는 지방선거의 성패를 좌우하는 하이라이트이자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한 표를 행사할 시민의 반응은 달아오르지 않는 듯하다. 심드렁하다. 내 손으로 시장을 선출한 1995년 이후 지난 23년 동안 조순·고건·이명박·오세훈·박원순 등 5명의 민선 시장을 뽑았지만 누구를 위한 시장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일까. 또 진정한 자치의 길은 아직 멀었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을 배출한 경험이 시장직의 위상을 올렸다기보다 오히려 시장직을 대통령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기는 나쁜 풍조를 고착화시켰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그레고리 핸드슨은 한국 정치권력의 중앙집중화를 “정치권력을 향해 상승 기류를 타고 몰려드는 소용돌이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모두 중앙만 쳐다보니 서울시민을 위한 민생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장은 중앙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울시의회와 구의회는 중앙정당과 지역구 국회의원의 아류, 핫바지에 불과하다. 시민을 위한 시민정치와 생활행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수도 서울의 시장은 관직명만 달라졌을 뿐 시민의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를 향해 한눈팔기에 바쁘다. 세상을 변화시킨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을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서울시민의 온전한 삶을 누리고 싶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전하, 기침(起寢)하셨습니까?…창덕궁(昌德宮)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전하, 기침(起寢)하셨습니까?…창덕궁(昌德宮)

    “임란 전 임금들은 권위적인 경복궁보다 훨씬 인간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창덕궁을 선호하여 창덕궁에 기거하는 일이 많았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조선의 실질적인 법궁(法宮)은 아마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昌德宮)이었다고 하여도 별다른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만큼 임란 이후 왕족들의 각별한 처소로 사랑받은 곳이 바로 창덕궁이었다. 조선의 색깔이 가장 잘 묻어나는 곳,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옛이야기 가득한 한양도성 옛 궁궐, 창덕궁으로 가 보자.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고도 불리운 창덕궁(昌德宮)은 각종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경복궁과는 달리 무언가 허전하면서도 바람길 잘 통하는 여유가 돋보이는 곳이다. 비록 역사의 풍화 속에서 군데군데 이가 빠진 주춧돌 몇 개는 짝이 안 맞더라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집터임에는 분명하다.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생을 마감한 순종황제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를 비롯하여 영왕 이은(李垠), 영왕비 이방자 여사,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인 덕혜옹주가 눈감은 1989년까지 조선 왕실 마지막 삶의 안식처로서 그 역할 단단히 한 곳이 바로 창덕궁이었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창덕궁은 애당초 임금들의 거처로 사용될 운명을 안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태종 5년(1405), 경복궁에 뒤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 창덕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4년, 재위 3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한 뒤 이듬해 정도전의 주도로 경복궁을 세운다. 그러나 조선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에서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제 손으로 이복동생의 목을 베었던 태종으로서는 경복궁의 지세(地勢)는 가히 반갑지는 않았다. 더구나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혼이 남아 있는 경복궁에서의 잠자리는 결코 편할 리 없었으리라. 이에 태종 11년(1411)에는 진선문, 금천교, 돈화문 등 여러 전각이 들어서면서 궁궐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이후 임란이후 광해군 원년(1609)에 인정전이 복구되면서 실제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에서 모든 정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1907년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한 후 내처 황궁으로서의 공식적인 위상도 지니게 된다. 후일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도 등록이 될 만큼 조선 왕실의 대표 처소로 자리매김하여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 창덕궁(昌德宮)에서의 발걸음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흘러가는 맛이 분명 있다. 북악산 응봉 산자락에 포근히 기대어 만든 전각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눈으로라도 느끼게 해준다. 현재 창덕궁(昌德宮)에는 1609년에 재건된 돈화문을 비롯하여, 궐내각사, 금천교, 국보 225호로 지정된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을 비롯하여 왕실의 거주 공간이었던 낙선재 등이 관람객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왕실의 비밀 정원이었던 후원도 방문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부용지, 불로문과 옥류천 등 한양 도성 내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뒤뜰도 만날 수 있다. <창덕궁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너무나 당연하다. 경복궁과 더불어 조선의 실질적인 법궁이었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들과 천천히 봄나들이 삼아 인사동 길을 따라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지하철 :종로3가역(1,3,5호선) 6번출구에서 도보로 10분 / 안국역(3호선)에서 3번출구에서 도보로 5분. 버스 : 7025,109,151,162,171,172,272,601 4. 감탄하는 점은? - 낙선재의 소소한 아름다움. 넓직한 길,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경복궁보다 관람객들이 많지 않은 편. 평일 나들이를 권유. 6. 꼭 봐야할 전각은? - 낙선재, 인정전, 돈화문, 후원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 여유를 가지고 돌아본다면 2시간 남짓. 8. 홈페이지 주소는? - www.cdg.go.kr/default.js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덕수궁, 경복궁, 창경궁, 종묘, 운현궁, 청와대, 조계사, 삼청동 거리, 인사동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창덕궁 나들이의 핵심은 후원 방문이다.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관람 신청을 하기를. 반드시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권유. 주차 시설이 주변에도 찾기 힘들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강변길 옆 소확행

    강변길 옆 소확행

    촉촉한 봄바람이 귀밑머리를 날릴 때면, 우리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집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경기 양평의 강변길은 수도권에 사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지요. 아담하고 예쁜 갤러리와 박물관 등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을 따라 문화의 향기를 솔솔 피우는 갤러리들을 찾아가는 여행은 어떨까요. 요즘 소소한 행복이 화두라지요. 거창한 갤러리는 아니지만 소소한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캐보는 것도 남다른 즐거움일 듯합니다.양평에서 남한강 너머에 있는 강하면 쪽으로 먼저 간다. 이름을 날리는 갤러리가 밀집돼 있다고 해서다. 이 가운데 기흥성 뮤지엄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축소 모형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설립자 기흥성 관장이 50여년간 제작한 모형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기흥성 뮤지엄은 매우 독특하다. 지하에서 우연히 보물 창고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랄까. 난데없는 눈의 호사에 횡재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기흥성 뮤지엄은 한국 전통의 고건축과 근대 건축물의 모형이 전시된 지하 1층 주전시실과 세계 유명 건물 등의 모형이 전시된 2층 기획전시실 등으로 이뤄졌다. 1층은 레스토랑이다. 지하 1층의 문을 열면 황룡사 9층 목탑이 객을 맞는다. 우리나라에 단 한 점 있다는 고증 모형이다. 4m가 넘는 모형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우아한 자태가 무엇보다 압도적이다. 긴가민가하던 눈이 미륵사지 9층 목탑 등 이어서 전시된 모형들을 둘러보고 나면 막사발만큼 커진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토대로 제작됐다는 모형들은 그야말로 디테일이 ‘문화재급’이다. 어찌나 정교한지 그래픽을 보는 듯하다.경복궁 모형도 인상적이다. ‘어마어마한’ 규모가 특히 그렇다.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등 몇몇 이름난 건물 외에도 수많은 전각들이 궁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박물관 큐레이터는 “경복궁 규모가 자그마치 중국 자금성의 5분의3에 달했다”고 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 궁궐이 대륙의 강대국 궁궐에 견줘 조금도 뒤지지 않았던 거다. 현재 남은 경복궁의 몇몇 건물만 보고 자금성과 규모를 비교했던 행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기흥성 뮤지엄 바로 옆은 강하예술공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름만 예술공원일 뿐 다수의 설치미술 작품들이 방치돼 있다. 겨우 목재 덱을 활용해 산책이나 즐기는 정도다. 강변을 끼고 있는데다 주변 풍경도 수려해 관리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꽤 많은 이들이 ‘즐겨찾기’할 듯하다.정크아트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띈다. 특히 강상·강하면의 강변도로 주변에 유난히 많다. 길가에 내놓은 단순 철제 구조물조차 설치미술 작품으로 오인할 지경이다. 마나스아트센터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독특한 조각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실외의 쇼나조각 공원과 실내의 마콘데조각 전시장으로 이뤄져 있다. 쇼나는 짐바브웨 인구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부족의 이름이다. 대를 이어 돌조각 기법을 전승하고 있다. 이들 부족이 만든 돌조각을 쇼나조각이라 부른다. 마콘데는 나무로 만든 조각 작품이다. 모잠비크의 마콘데족이 흑단 등의 목재를 이용해 만든 것을 일컫는다. 둘 모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조각 작품이다. 현장에서 소품 등의 작품 판매도 이뤄진다. 서종면 쪽으로 넘어오면 구하우스가 볼 만하다. 건물 자체가 콘셉트인 곳이다. 독특한 외관의 건물도 인상적이지만 전시 작품들은 한술 더 뜬다. 구하우스는 ‘열린’ 수집가의 집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매매와 동시에 개인의 집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과 달리 예술 작품에 갈증이 난 이들을 위해 집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물론 입장료는 받는다. 1만 5000원이니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한데 둘러보고 나면 ‘본전 생각’은 들지 않는다.건물은 ‘ㄷ’ 자 형태다. 2층 건물로 외벽에 창이 별로 없어 실제 규모보다 작게 느껴지지만 안으로 들면 생각이 확 바뀐다. 대체 이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영화 ‘해리 포터’의 마법 텐트처럼 공간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듯하다. 전시 콘셉트는 ‘리빙 위드 아트’다. ‘집 속 미술관’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거실, 침실은 물론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집 구석구석으로 미술을 끌어들였다. 침실에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가구 디자이너라는 장 프루베의 침대가 놓이고 벽면을 따라 앤디 워홀과 ‘포스트모던 키치의 왕’이라는 제프 쿤스 등의 팝아트 작품이 걸려 있다. 너른 거실 천장에는 프랑스 작가 자비에 베이앙의 설치 미술 작품 ‘모빌’이 매달렸다. 관람객 누구나 ‘스티브 잡스 의자’로 유명한 조지 나카시마의 벤치에 앉아 내 집처럼 편안하게 책을 들춰 볼 수도 있다.각각의 전시물도 인상적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의 ‘더 키홀’(열쇠 구멍)은 꼭 들여다 보는 게 좋겠다. 타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현대인의 관음증을 은근히 꼬집는 작품이다. 이어폰을 끼고 열쇠 구멍에 눈을 대면 야릇한 영상물이 상영된다. 등장인물들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귀에 좀더 신경을 집중하면 열쇠 구멍 너머를 살피는 이, 그러니까 ‘나’의 거친 숨결도 나지막하게 들린다. 스릴러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범인의 숨소리처럼 욕망을 잔뜩 감춘 소리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면 따뜻한 차 한 잔이 기다린다. 관람객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잔아문학박물관은 문학과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만든 조각)가 어우러진 곳이다. 책을 만지기만 해도 절반은 읽은 것이란 게 설립 모토다. 현재 활동을 하고 있는 문인들과 세상을 뜬 유명 문인들의 테라코타, 오래된 책 등이 전시돼 있다. 작은 왕자 등의 이벤트 공간도 마련됐다. 인증샷 찍기 딱 좋다. 대지는 넓어도 박물관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책이 사람들 곁에서 멀어져 가는 시대인데다 커피숍 등 크고 화려한 건물 틈바구니에 끼어 더욱 왜소해 보인다. 봄이 되면 스토리북 만들기, 생활 공예 강연 등의 이벤트도 열린다. 서종타워 카페는 전망이 좋다. 말 그대로 서종면사무소 뒤에 타워처럼 불쑥 솟은 건물이 인상적이다. 갤러리는 지하 1층에 소규모로 마련됐다. 수능리 쪽엔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이 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모티브로 조성됐다. 3층 규모의 황순원 문학관과 소설 속 소년, 소녀의 오후 한때를 재현한 수숫단 오솔길 등의 체험 공간으로 구성됐다. 수능리에선 운 좋게 달집태우기 장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행사다. 문화를 좇다 보면 이렇게 보기 힘든 풍경이 운 좋게 얻어걸리는 법이다. 올해 달집태우기 행사는 지나갔지만 메모해 뒀다가 내년에 꼭 찾길 권한다. 매달 셋째 주말, 문호리 강변에선 리버 마켓이 열린다. 일종의 벼룩시장이다. 유기농 재료를 활용한 음식, 옷, 수공예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판다. 매장에 나온 물품의 종류엔 제한이 없지만 ‘반드시 손으로 만든 것’이라야 한다. 가래떡에 조청을 얹은 ‘가래떡 콘’ 하나 사들고 설렁설렁 장 구경하기 딱 좋다. 글 사진 양평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기흥성 뮤지엄은 매주 화요일 휴관이다. 현재 무료 입장이지만 추후 유료로 전환될 예정이다. 그전까지 부지런히 가서 봐 두길 권한다. 강상·강하면 일대의 갤러리들 가운데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곳들이 꽤 많다. 닥터박 갤러리, 갤러리 와, 갤러리 서종 등은 수리 중이거나 휴관 중이다. 마나스아트센터는 병산리에 있다. 무료로 야외, 실내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맛집:문호리 리버 마켓에서 ‘가래떡 콘’ 등의 주전부리와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옥천면옥(772-9693)은 평양식 냉면집이다. 굵고 쫀득한 면발이 맛있다. 국수리 국수집(772-2433)은 된장 칼국수로 이름난 집이다. 양수추어탕(773-5995)은 진한 남도식 추어탕을 내는 집이다. 두물머리밥상(774-6022)은 유기농 음식점이다. 세미원에 인접해 늘 사람들로 붐빈다.
  • 수입산 소나무 ‘국산 둔갑’ 차단…산림청 ‘DNA 분석기술’ 개발

    수입산 소나무 ‘국산 둔갑’ 차단…산림청 ‘DNA 분석기술’ 개발

    철저한 관리를 통한 생산으로 비싸게 팔리는 국산 특용재 소나무를 판별할 수 있는 DNA 분석기술이 개발됐다. 수입산 ‘짝퉁’ 소나무 유통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7일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소나무류는 100종 이상인데 이 중 소나무와 구주소나무는 생물학적 관련성뿐 아니라 형태와 내부 구조가 유사하다. 국내 수종 감별은 목재 조직과 세포로 확인하는데 두 종은 식별에 어려움이 있다. 산림과학원이 개발해 특허등록한 DNA 분석기술은 소나무와 구주소나무의 고유한 DNA 차이점을 활용해 객관적이고 정확도를 높였다. 소나무는 궁궐·사찰·가옥 등의 주요 건축재로 쓰인다. 원목 가격이 2등급(직경 21㎝·길이 3.6m) 기준 1㎥당 20만원 수준으로 동일 등급의 낙엽송·잣나무와 비교해 1.4배, 삼나무·리기다소나무·참나무보다 2배 정도 비싸다. 더욱이 문화재와 한옥 건축을 위한 직경 45㎝ 이상 특용재는 1㎥당 100만원대, 곧고 길게 뻗은 대경목은 1000만원을 넘는다. 이로 인해 값이 싼 구주소나무가 소나무로 둔갑돼 유통되거나 혼용되는 ‘수종 속임’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 금강송 등은 철저한 관리를 통해 생산되는 반면 구주소나무는 국내에서 생육이 안 돼 100% 유럽과 러시아 등에서 수입되는데 생산 이력 등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씨줄날줄] 초수 행궁/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초수 행궁/서동철 논설위원

    올해는 세종대왕(1397~1450) 즉위 600주년이다.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충북 청주시가 내년 가을까지 초정 행궁을 복원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행궁이란 임금이 머무는 임시 궁궐이다. 오늘날 초정(椒井)의 세종 당시 땅이름은 청주목 초수(椒水)였다. 세종실록에는 ‘물맛이 호초(胡椒)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한다’는 대목이 보인다.세종은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다. 팔다리가 붓고 아픈 각기병과 피부병이 늘 그를 괴롭혔고, 당뇨병에서 비롯된 안질도 심각했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당시 세종은 온천과 광천수의 효과에 적지 않게 의존했다. 세종은 1444년 초수 행궁에 123일에 걸쳐 다녀갔다고 한다. 태조를 비롯한 조선왕조 초기 임금들은 고려의 역대 왕들처럼 황해도 평산 온천을 자주 찾았다. 세종은 1433년 충청도 온수현에 행궁을 짓고 행차를 시작한다. 오늘날의 온양온천이다. 이후 온양은 조선 왕실의 가장 중요한 온천이 됐다. 하지만 임금의 행차는 왕비와 세자를 비롯한 왕실 구성원은 물론 조정 대신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규모가 컸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오가는 길 주변 백성도 행차에 필요한 물품을 대고 노역을 제공해야 했으니 고초는 컸다. 세종이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온천을 찾는 데 집착한 것도 이 때문이다. 1438년 “경기도에서 온천을 찾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고 해당 읍의 칭호를 승격시킬 것”이라고 공표한다.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온천이 있음에도 신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부평부를 부평현으로 강등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데 청주목 행궁에 행차하던 해, 초수가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나온다는 소식에 세종은 또다시 “초수가 충청도에는 다 있는데, 어찌 본도(本道)에만 없겠느냐”면서 “만약 초수를 보고 알리는 사람이 있거든 상을 주기로 하고, 마땅히 도내 각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찾아보게 하라”고 경기도 관찰사를 채근하기도 한다. 초수 행궁은 1448년 불타고 만다. 4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세종은 실화(失火)한 사람을 국문한다는 소식에 “지금 농사일이 바쁘니 속히 놓아 보내라”고 했다. 초수 행궁의 옛 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복원의 근거가 없다는 것은 문제다. 행궁 자리가 어디인지조차 모른다. 정조 때 그려진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를 모범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그림을 보면 왕의 침전과 목욕 시설을 제외한 부속 시설은 모두 초가일 만큼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행궁을 기대해 본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조선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학자이자 조선 최초 문형(文衡·대제학)으로 칭해지는 걸출한 문장가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사람들은 동시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에게 열광할 뿐 왕조가 교체하는 격변기에 전형적인 삶을 살아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 초기 안정적 기반을 다지는 데는 양촌의 역할이 누구보다 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과거에 급제한 까마귀 소년 고려 공민왕 때 얼굴이 유난히 검었던 청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까마귀라고 불렀고, 스스로도 작은 까마귀라는 의미의 ‘소오자’(小烏子)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청년이 18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공민왕이 급제자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갑자기 그 과거를 주관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돌아보며 “아니, 이렇게 젊은 자도 급제시켰는가”라고 노기에 가까운 불평을 했다. 장차 크게 쓰일 그릇이라는 이색의 극찬을 듣고서야 왕은 화를 풀었다고 한다. 그 젊은이가 바로 양촌 권근이었다. 이후 양촌은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왕조의 교체기에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한 차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 양촌은 1389년(창왕) 38세 되던 해에 탄핵을 받은 이숭인(李崇仁)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편당으로 몰려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됐다. 이후 약 1년간 이곳저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유배생활은 많은 제약을 받지만, 경우에 따라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일 수도 있다. 바쁜 세상사에서 벗어나 오로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촌의 저술도 이 시기에 주로 완성됐다. 1390년 7월부터 11월까지 전라도 익산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양촌은 초학자들이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담긴 유학의 기본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림과 설명을 곁들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그 앞부분에 실린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제4도인 ‘대학도’에 그대로 전재하고 있을 정도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1월 홍수로 인해 사면받아 풀려났으나, 그는 다시 충주의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의 주석 작업에 몰두했다. 54세 때인 1405년(태종)에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마지막으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완성했다. 겸손하게 ‘자신의 얕은 견해’라는 의미의 ‘천견’(淺見)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 경전 주석서다. 특히 유학 경전 주석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저술이다. 이런 학문적 업적은 결코 짧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벼슬살이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학문적 성과가 유배라는 일종의 휴식을 계기로 꽃피게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려의 신하, 조선에 몸을 맡기다 양촌은 개국 소식을 듣고도 1년 가까이 양촌에서 은거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양촌의 아버지 권희(權僖)를 통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양촌은 할 수 없이 계룡산에 행차했던 이성계에게 나아갔다. 그곳에서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개국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이성계의 덕을 송축하는 ‘풍요’(風謠)를 짓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국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왕조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실망감이었다. ‘축수록’(逐睡錄)이라는 야사에 “당시 선비들이 평소에 공을 종주(宗主)로 여겼었는데, 그때 이후로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신원에 가장 공이 컸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포은과 비교하며 변절(變節)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런 시각은 조선 후기까지 계승돼 유학에 끼친 큰 공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공자(孔子)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지 못하고 말았다.#황제가 시를 내리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와 조선은 초기부터 기세 싸움이 있었다.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도 그중 하나이다. 표전은 국왕이 황제에게 올리는 일종의 외교 문서다. 평소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이 거슬렸던 명나라 태조는 1396년(조선 태조)에 조선에서 보낸 표전의 표현을 문제 삼아 표문의 작성에 관여한 정도전을 명나라로 들여보내라고 독촉했다. 의도를 눈치 챈 삼봉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자 45세의 양촌이 자원해 명나라로 들어가 대신 용서를 구했다. 그를 가상하게 여긴 황제가 학사들이 모인 문연각(文淵閣)에 머물게 하고 시를 지으라 명했다. 양촌은 모두 24수를 지어 올렸는데 18수는 여정과 조선의 역사, 절경을 읊었다. 6수는 명나라와 태조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감탄한 황제는 그를 ‘수재’로 칭하면서 직접 시 3수를 지어 하사하고 융숭하게 대우했다. 외교 문제도 자연히 잘 해결됐다. 이 당시 양촌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는 훗날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사신 유사길(兪士吉)이 왔을 때 국경에서 양촌의 안부를 물었고 연회에서 양촌이 술을 권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받는 등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나라의 문장을 주관하다 관각(館閣), 즉 예문관과 홍문관은 주로 왕실 의식, 외교 문서 등 국가의 공식적인 제술(製述)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문학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이 배속되는데 그 수장인 대제학은 문형(文衡), 주문(主文)이라 해 국가에서 특별히 우대하였고 문신들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생각했다. 양촌은 조선 최초의 문형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의 국가적인 문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관각체(館閣體)는 권근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정조(正祖)의 평가에서 양촌의 문학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관각체는 수식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서정적인 문장에 비해 다소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 관각체 비중이 높은 양촌의 문장에 대해서도 자연히 비슷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양촌의 문장이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시의 경우는 꾸밈없이 평담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었다. 그의 문학적 진가는 다음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봄날 성남(城南)에서의 즉흥시 봄바람에 어느덧 청명절이 다가오니 / 春風忽已近淸明 가랑비 부슬부슬 늦도록 개질 않네 / 細雨??晩未晴 집 모퉁이 살구꽃은 온통 필 듯한데 / 屋角杏花開欲遍 이슬 머금은 몇 가지가 내게로 기울이네 / 數枝含露向人傾 정도전은 이 시를 보고 “시어가 천지조화를 빼앗았다”고 극찬했다. #수성(守城)의 군주를 보필하다 조선은 삼봉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국가의 각종 시스템은 물론 궁궐의 이름까지도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과언은 아니다. 양촌은 목은 문하에서 삼봉과 동문수학했다. 둘 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고 경세 능력도 출중했다. 서로를 존경하는 것도 같았다. 다만 정치적으로 선택한 길이 달랐다. 이는 두 사람의 기질과도 연관이 있었다. 개혁적인 성향의 삼봉은 창업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고, 보수적인 가문에서 성장한 양촌은 수성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다. 삼봉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고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양촌은 태종을 도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쪽에 더 치중했다. 결과적으로 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까. 누구의 업적이 더 뛰어났던 것일까.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창업 시기에는 삼봉이 곧 양촌이었고, 수성 시기에는 양촌이 곧 삼봉이었기 때문이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 ‘멋’ 올림픽…한옥마을 일출ㆍ설화 품은 월화정 ‘금메달감’

    ‘멋’ 올림픽…한옥마을 일출ㆍ설화 품은 월화정 ‘금메달감’

    #둘째날 평창 대관령면 횡계리에 들어서자 비로소 올림픽 분위기가 풍겼다. 과거 슬럼 같았던 동네 이목구비가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천변 황태덕장 자리에 올림픽 개폐회식장이 들어섰고 상가들은 하나같이 반듯하게 치장됐다. 조직위 차량도 넘쳐났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지자 제법 체증이 생겼다. 개막을 나흘 앞두고도 이런데 대회 기간 차를 갖고 들어가면 옴짝달싹 못할 것 같았다. 황태회관은 이곳에서 가장 큰 식당 중 하나다. 아침부터 황태가스를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단다. 황태구이가 1만 3000원, 황태가스는 1만 8000원이다. 황태가스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한 평창 메뉴 개발 훨씬 전부터 이 집에서 만들어낸 메뉴라고 했다. 처음엔 새로운 맛이네 싶었는데 조금 먹으니 물리고 오히려 늘 먹던 황태구이가 훨씬 우리 입맛에 맞다는 진리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외국인에게 황태의 매력을 맛보게 하기 위한 메뉴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줘야 하나 망설여졌고, 너무 비쌌다. 또 하나 이 가게의 아쉬운 점은 중국과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직원들이 괜히 테이블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자기들끼리 수다 떨거나 손님을 보며 괜히 웃어대는 것이었다.그 뒤 대관령 산신을 만나러 갔다. 옛 대관령휴게소를 통해 선자령 오르는 길로 2㎞ 정도 지나니 굿당이라 깎아내림당하는 대관령국사성황사가 나온다. 신라 때 범일 국사를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 강릉 단오제를 지내는 곳이다. 칼바람이 장난 아닌데 실제로 굿이 진행 중이었다. 누군가의 비원이 어떤 이승의 악업을 풀기 위해 저렇듯 간절할까 궁금해졌다. 선자령 오르며 늘 다니던 길을 이번 평창 대회를 맞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다시 횡계로 돌아와 부추탕수육으로 유명한 진태원에 들렀다. 대기명단에 전화번호를 적어두면 자리가 빌 때쯤 연락하는데 5분 지체되면 다음 팀으로 넘어가니 자동차 등에서 대기하다 얼른 뛰어가야 한다. 대기 명단 적을 때 처량했던 느낌과 달리 안에 들어가니 여유가 넘쳐난다. 혼밥을 드는 이도 있었다. 탕수육은 인터넷에서 봤던 것보다 부추와 양배추 양이 적었다. 그저 이 추운 고장에서 색다름을 즐기는 정도였고 짬뽕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황태덕장도 둘러보니 평창에는 더이상 가볼 데가 없어 오후에 강릉 다녀온 뒤(뒤에 나온다) 다시 평창한우타운으로 넘어왔다. 널찍한 주차장이 단체 손님을 많이 받는 집이란 걸 말해 준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 옆 식당으로 넘어가 구워 먹는 시스템이다. 한우 채끝과 안심은 1등급, 등심은 1등급 투플러스를 한 팩씩 담고 명이나물을 얹었더니 8만원이 조금 안 됐다. 식당은 테이블 간격이 널찍해 가족 단위로 한우를 즐기기에 최적이었다. 종업원들은 친절하고 잘 교육받은 느낌이었다. 자녀 둘을 데리고 온 부부가 판을 다섯 차례나 손수 교체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한 번도 갈지 않고 구워 먹었다. 강릉 일정 마치고 귀경 길에 다시 들러 고기만 사들고 집에 들고올 정도였다면 설명이 되겠는가?#셋째날 강릉 체육기자들 사이에선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로 이득을 보는 건 평창보다 강릉일 것이란 얘기가 많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잊은 옛 도시의 정취와 유적들을 돌아보는 쏠쏠한 재미를 안기기 때문이다. 둘째 날 오후 강릉대도호부관아와 임영관을 찾았다. 관아는 전남 나주목아와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임영관은 지방에 부임한 관리들이 묵고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던 곳인데 젊은이들이 찾는 월화거리나 중앙시장에서도 가까워 둘러볼 만하다. 상당히 큰 규모의 유적이 비교적 잘 보전돼 놀라웠다. 다음날 월화정에서 바라보니 이곳에 이들 관청을 세운 이유가 또렷했다. 대관령 옛길 근처 성산면 보광리의 김주원 묘를 찾았다.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세손으로 왕위계승 회의에 물난리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 왕에 오르지 못했고 나중에 다시 기회를 만났으나 물리쳐 명주(강릉의 옛 지명)군왕으로 봉해졌던 강릉김씨의 시조다. 산 중턱에 있지만 진입로도 잘 닦여 있고 마을버스 종점이기도 했다. 김주원의 무덤은 크고 웅장하지만 입지가 옹색하기 짝이 없다. 아들 헌창과 손자 범문의 반란 실패로 제대로 장례를 치를 여력이 없었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대관령박물관에 들렀다. 수요일 휴관하는 점이 색달랐다. 일인당 1000원인 입장권을 받는데 강릉과 대관령 사는 이들만의 특색 있는 컬렉션을 기대한 이들에겐 실망을 안겨줬다. 홍귀숙이란 분이 평생 모은 유물을 기증해 2003년 세워졌다. 대관령 옛길을 지나가다 망중한을 즐기는 정도의 의미랄까?횡계에서 한우를 먹고 다시 강릉으로 넘어와 오죽한옥마을에서 잠을 청했다. 보급형은 10만원을 받았는데 깔끔한 객실에 무엇보다 따듯한 난방이 만족스러웠다. 주중에 5만원 받는, 사무실 2층 숙소도 괜찮겠다 싶었다. 경내를 산책하다 솔숲 위로 삐죽 솟아나는 일출의 영향으로 한옥이 붉게 물드는 색다른 재미도 만끽할 수 있었다.초당순두부마을이 멀지 않아 늘 가던 할머니순두부집을 찾았다. 앞의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롭게 건물을 올렸는데 웬일인지 순두부를 미지근하게 내와 감동을 덜었다. 월화정에 들렀다. 신라 때 연화부인이 물고기를 길렀는데 그 물고기가 김무월랑(金無月郞)에게 편지를 전해줘 사랑을 이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옛 동해북부선 철길 옆에 있었는데 1961년에 철거된 것을 2004년 강릉김씨 대종회가 명주군왕 김주원의 뜻을 좇아 관리하고 있다. 옛 철교 대신 들어선 인도교(중간에 아래가 훤히 보이는 유리 구간도 있다)를 걸어 중간에 이르니 왼쪽 고루포기산부터 선자령까지, 남대천, 강릉 전경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인도교를 내려가니 월화거리가 쫙 전개되고 성남중앙시장 상인들이 장사 준비에 분주하다. 들은 게 있어 꽈배기하는 곳 어디냐고 물었더니 상인들이 아래 좌판을 가리킨다. 과메기다. 수십 번 꽈배기라고 외쳤으나 그들은 과메기라고 받아친다. 어허 이런.월화거리 오른편 현대식 먹거리 가게들이 공사 막바지에 열중하고 있다. 왜 진즉 하지 않고 그러고 보니 인도교 초입 벤치에 앉은 여인 조각도 야릇하다. 성희롱을 조장하는 것 같다. 여인이 왼쪽을 돌아보는데 곁에 남자가 앉아 고개를 돌리면 그럴듯한 사진이 된다고 만든 것 같았다. 어허 참. 바로방 제과점을 찾았는데 이제 막 기름솥에 불을 붙였다. 오전 9시 40분인데 영업은 10시 30분부터란다. 길 건너편 목욕탕 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앞에 퇴락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올드록 하우스 범핑이란 가게인데 늦은 밤 맥주 홀짝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언제부터 이렇게 커피홀릭이 됐나 싶은 대한민국, 커피문화의 성지로 여겨지는 강릉의 모태 격인 테라로사를 가기 전 반드시 여러분에게 둘러보라고 권할 곳에 갔다. 굴산사지. 신라 때 절터인데 높이 5.3m의 당간지주가 태백산맥을 발아래 두고 버티고 서 있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 깃발을 꽂던 돌기둥인데 이토록 큰 것이 있었나 싶고 강릉 사람들의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 신라 유물은 모두 아담했는데 여기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닮은 듯 웅대하다. 굴산사지는 요즘 감각으로 봐도 정말 컸던 것 같다. 조금 들어가면 옛 절터에 부도가 서 있다. 대관령 국사성황사에 산신이 돼 모셔진 범일 국사 것이라고 한다. 강릉 가면 늘 들르는 테라로사에서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맛본 뒤 바로방 들러 야채빵에 고로케, 도넛을 샀다. 두 팀 앞세우고 샀는데 뒤로 어느새 10명 이상 긴 줄이 서 있다. 꽈배기는 오후 3시쯤 나온다고 해 포기했다. 점심은 강릉의 마지막 식사답게 생선찜으로 채웠다. 이모네생선찜에서 가오리로 많은 생선을 덮어씌운 생선모둠찜을 시켰다. 둘이면 소자도 충분하다는데 사진 때문에 중자를 시켰더니 양이 장난 아니다. 생선에 간을 전혀 안 해 국물에 자기가 원하는 만큼 적셔 먹는다.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가족 나들이로 찾기 좋은 곳이었다.오죽헌 근처 녹색체험센터에서 열리는 강원국제비엔날레 2018-악의 사전을 보러 갔다. 제목도 괴상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성조기 등 선진 8개국(G8)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작품이 손님을 맞는다. 뜨악했으나 한 시간 정도 둘러본 총평은 올림픽 보러 온 김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소감이었다. 특히 난민 배에 올랐다가 헬리콥터에 구조되는 가상현실(VR)이 인상적이었다. 오죽헌에서 개최하는 ‘강릉에서 한국의 미를 읽다’ 전시회는 강릉만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이 뭐 없나 눈을 까뒤집고 찾는 우리를 여전히 실망시켰다. 솔향수목원에서 해가 진 뒤 시작하는 ‘미디어아트쇼 청산별곡’을 보러 갔다. 진입로 안내부터 안전 교육까지 세세하게 관람객 편의를 돕고 추운 날씨에도 마음을 다해 안내 해설을 하는 이들이 감명 깊었다. 한 시간 정도 계곡과 숲을 오르내리며 인공 빛으로 뭔가 스토리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심지어 산 중턱에 인공 달을 만들어 비추기까지 했다. 하지만 차라리 30초라도 불과 빛을 완전히 끄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게 더 좋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나가며 기름값 15만원어치를 써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평창과 정선, 강릉만의 먹거리와 볼거리를 찾으려 했다. 만족스러운 것도 있었고 ‘왜 이렇게밖에’ 싶은 구석도 한둘이 아니었다. 올림픽을 치른다고 확 바뀌지 않을 것이란 새삼스러운 진실도 마주했다. 많은 것이 바뀌고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자면 시설이나 인프라보다 역시 사람이 먼저다. 그걸 2박 3일 동안 절감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고려·조선 ‘왕들의 온천’ 병치료·사냥길에 찾아 세종때 온양 행궁 지어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고려·조선 ‘왕들의 온천’ 병치료·사냥길에 찾아 세종때 온양 행궁 지어

    고려시대 가장 각광받은 온천은 황해도 평주 온천이었다. 온정원(溫井院)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온천이다. 고려는 오늘날의 개성인 송악에 도읍했다. 자연스럽게 역대 임금은 가까운 평주 온천을 자주 찾았다.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의 왕들도 이 온천을 즐긴 것은 다르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바로 그해에도 평주 온천에 갔다. 태조는 이후에도 해마다 평주 온천을 찾았다. 그러다 즉위 5년째를 맞은 1396년에는 ‘충청도 온천’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온양(溫陽) 온천이다. 그런데 온양은 평주보다 멀다. 왕이 도성을 비우는 기간이 늘어나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태조의 온양 온천 행차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간관 이정견(李廷堅) 등이 중지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대간에서 다시 연명(連名)으로 상소하여 그만두기를 청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온천에 가고자 함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인데, 대간에서 애써서 말리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고 마침내 거둥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임금의 건강’이란 모든 것에 앞서는 명분이었다. 이후 태조는 다시 평주 온천으로 간다. 정종도 평주에 갔다. 이번에도 간관들은 극력 말렸다. 정종은 “내가 작은 병이 있어서 목욕하러 가는 것이지, 사냥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사시(四時)의 사냥은 고전(古典)에 있는데, 나는 다만 1년에 한 번 나가는 것뿐”이라며 듣지 않았다.정종이 말한 사시, 즉 네 계절의 사냥이란 ‘봄에는 새끼 배지 않은 짐승을 사냥하고, 여름에는 곡물의 싹을 해치는 조수를 사냥하고, 가을에는 추격하고 물러나는 것을 익히는 사냥을 하고, 겨울에는 땅을 지키듯 영역을 침범하는 짐승을 사냥하니 다 농한기에 일을 익히는 것’이라는 ‘춘추좌전’의 가르침을 말한다. 견강부회도 이런 견강부회가 없다. 실제로 정종이 평주 온천에 머물다 해주로 사냥을 가려고 하자 조정 곳곳에서 반대 상소가 잇따랐다. 하지만 정종은 사냥을 강행한다. 이렇듯 조선 초기 왕의 온천욕이란 신병 치료를 구실로 사냥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아버지 이성계를 닮아 무인(武人) 기질이 있던 태종 이방원은 좀더 노골적이었다. 1413년 태종실록에는 ‘임금이 풍해도로 가다가 광탄에서 머물렀다. 임금이 해주로 거둥하고자 하면서 핑계 삼아 평주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황해도라는 이름은 1417년 풍해도에서 고친 것이다.그런데 풍질과 안질, 피부병에 시달렸던 세종은 온천수의 치료 효과에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세종이 온수현(溫水縣)의 온양 온천에 처음 간 것은 즉위 15년인 1433년이었다. 세종은 효험이 있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후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온천을 찾는 데 공력을 기울인다. 세종실록에는 ‘용비어천가’를 짓는 데도 참여했던 이사맹을 1434년 부평으로 보내 온천을 찾아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438년에는 ‘경기 지방에서 온천을 찾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고 해당 읍의 칭호를 승격시킬 것’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성에서 가까운 온천을 찾는 세종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종은 부평 사람들이 온천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세종은 1438년 10월 4일 ‘번거롭고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춘다면 고을의 명칭을 깎아내려 그 죄를 징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만큼 임금 행차는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는 환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세종은 11월 8일 부평부(府)를 부평현(縣)으로 강등했다. 그만큼 온천이 절실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전국의 온천은 31개에 이르지만 경기도와 전라도에는 없다. 반면 온양현은 1442년 온양군으로 승격한다. 온양에 본격적인 행궁(行宮)을 지은 것은 세종이다. 행궁이란 궁궐 밖에 지은 임금의 거처다. 25칸의 행각은 1433년 정월 완성됐다. 정청(正廳)을 중심으로 동·서 침전과 목욕시설인 상탕자(上湯子)와 차탕자(次湯子)를 두었다. 상탕자는 왕와 가족, 하탕자는 고위 수행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유재란 때 파괴된 온양행궁이 100칸 규모로 복원된 것은 1665년(현종 6년)이다. 이후 숙종과 영조, 정조가 다녀가면서 시설이 조금 더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 때 그려진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종시대에는 퇴락한 전각을 다시 세운 듯 함락당(涵堂) 16칸과 혜파정(惠波亭) 14칸을 신축한다.한말 일본인 자본인 온양온천주식회사는 온양행궁을 차지하고 1904년 일본식 온천여관인 온양관(溫陽館)을 짓는다. 행궁 시설의 상당 부분은 파괴했고, 상당 부분은 재활용했다. 장항선 철도를 부설한 경남철도로 주인이 바뀌어 온양관이 신정관(神井館)이라는 일종의 온천 리조트로 탈바꿈한 것은 1928년이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계기다. 1953년 당시 교통부는 6·25전쟁으로 불탄 신정관 자리에 온양철도호텔을 세웠다. 이것이 1967년 민영화에 따라 온양관광호텔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아산시는 현충사가 있는 이순신 장군의 고장이다. 퇴락하던 온양 온천은 수도권 전철 개통으로 옛 명성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지만, 온양행궁의 역사는 잊혀지고 있다. 옛 행궁 건물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호텔 귀퉁이에 두 개의 석물(石物)이 초라하게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온양행궁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면 온양관광호텔로 가야 한다. 온양온천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호텔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 주차장 너머에 작은 비각이 하나 보인다. 내부의 작은 비석이 신정비(神井碑)다. 세조가 온양에 머물 때 온천 옆에서 냉천을 발견하고 신정이라 이름 붙인 것을 기념해 1476년(성종 7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신정을 상징하는 그 왼쪽의 돌우물은 흙에 묻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호텔 오른쪽에는 영괴대(靈槐臺)가 있다. 사도세자가 1760년 영조를 따라왔을 때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射場)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학문에 집중해 현명한 군주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무술에 더 흥미를 느꼈고, 마음껏 화살을 날리던 온양행궁 시절을 가장 행복하게 회상하곤 했다고 한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불행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려 이곳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단을 쌓아 영괴대라 이름했다. 그 옆에 친필로 ‘영괴대’라 쓴 비석을 세웠다. 아산 지역 사회는 온양행궁을 복원하는 것을 숙원 사업으로 여긴다. 행궁이 옛 모습을 찾으면 문화관광자원으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아직은 발굴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한 호텔 이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호텔 측도 지금처럼 행궁 터를 무심하게 버려두기보다 일정 부분 정비하는 것이 영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이승기, 심은경 주연작 ‘궁합’ 티저 예고편

    이승기, 심은경 주연작 ‘궁합’ 티저 예고편

    영화 ‘궁합’ 티저 예고편이 공개됐다. ‘궁합’은 조선 최고의 역술가 서도윤(이승기)이 혼사를 앞둔 송화옹주(심은경)와 부마후보들 간의 궁합풀이로 조선의 팔자를 바꿀 최고의 합을 찾아가는 역학 코미디다. 공개된 예고편은 “우리는 궁합도 안 보는 네 살 차이잖아요”라는 대사에 이어 ‘연인, 가족, 친구 세상의 모든 인연에는 궁합이 있다’는 카피가 흥미를 유발한다. 이어 조선 최고의 역술가 서도윤(이승기)의 모습과 혼사를 앞두고 부마후보를 확인하기 위해 궁궐을 나서는 송화옹주(심은경)의 출궁기가 눈길을 끈다. 여기에 화려한 말발로 사람을 홀리는 이류 역술가 개시(조복래)가 연인 간의 궁합을 보며 “좋.미.싫.다.사.생.원(좋아한다, 미워한다, 싫어한다, 다신 안 본다, 사랑한다, 생각한다, 원망한다)”을 읊어 웃음을 자아낸다. 극중 부마후보를 확인하기 위해 궐을 나서는 사나운 팔자 ‘송화옹주’ 역은 심은경이, 자신의 팔자도 모르면서 남의 운명을 읽는 조선 최고의 역술가 ‘서도윤’ 역은 이승기가 맡았다. 또 옹주의 혼사를 추진하는 ‘왕’은 김상경이 맡았다. 송화옹주의 남편감, 즉 부마후보로 선발된 세 명의 배우도 눈길을 끈다. 능력 있는 감찰관 ‘윤시경’ 역은 연우진이, 절세 미남 ‘강휘’ 역은 강민혁이, 지극한 효심과 매너를 지닌 ‘남치호’ 역은 최우식이 맡았다.영화 ‘관상’ 제작진의 역학 시리즈 ‘궁합’은 2월 개봉한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대가야 보물창고 된 고령 ‘들썩’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가야사 복원’을 지시한 후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대가야(경북 고령) 지역에서 중요한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고령군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고령군과 대동문화재연구원은 16일 고령 대가야읍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정비 부지에 대한 발굴’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지난해 10월부터 고분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대가야 전성기인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후반 사이에 만들어진 고분 74기와 유물 1000여 점을 찾아냈다”며 “고분이 아닌 인근 땅 밑에서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특히 A구역 2호 석실묘(돌방무덤)에선 금동제 관모(冠帽)와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있는 큰 칼 환두대도(環頭大刀)가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유물과 닮아 활발한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또 고구려 벽화에 주로 보이는 마구(馬具)와 대가야에서 귀족뿐 아니라 무사나 하급 관리도 순장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형식의 순장(殉葬) 무덤도 확인됐다. 이에 따라 고령군과 지역 주민들은 지산동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탄력을 받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이용호 고령군 문화해설사는 “탐방로 등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는 과정에서 대가야 시대의 중요한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된 것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라며 “지역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지산동 고분군은 2013년 12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상태다. 앞서 지난해 6월에는 국내 최초로 대가야시대 궁궐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고령에서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곽용환(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장) 고령군수는 “잇단 유물 출도로 대가야의 격과 위상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재평가받는 소중한 계기?”라면서 “앞으로 대가야 중심의 포괄적?인 가야사 복원 및 정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깎아지른 듯한 두 봉우리가 먼저 중국의 사신을 맞았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깎아지른 듯한 두 봉우리가 먼저 중국의 사신을 맞았네

    ‘아침 밀물을 타고 항해해 군산도에 정박했다. 열두 봉우리의 산이 잇닿아 성과 같이 둥그렇게 둘러 있다. 배 여섯 척이 맞이하는데, 무장한 병사들을 태운 채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했다. 따로 작은 배에 탄 초록색 도포 차림의 관리가 홀(笏)을 바로 잡고 배 안에서 읍(揖)했다.’중국 북송(北宋)의 사절단을 태운 배가 군산도에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한 ‘고려도경’의 한 대목이다. 북송의 휘종은 1123년(인종 1) 로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을 정·부사로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파견한다. 이 외교 사절단에는 북송 당대 서화(書畵) 모두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서긍이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그가 글과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사행(使行) 보고서가 ‘고려도경’으로 잘 알려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모두 40권으로 바닷길은 34~39권에서 다루었다. 서긍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 간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100명 남짓이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었다. 동접반(同接伴)이 편지와 함께 아침상을 보내왔다. 정·부사가 국왕선장(國王先狀)을 보내니 접반이 배를 보내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 만나주기를 청했다’‘국왕선장’이란 사신이 국왕과 만나기 전에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통고문이라고 한다. 동접반은 외교사절단을 맞이하는 총책임자, 접반은 실무책임자다. 당시 동접반은 우리도 잘 아는 인물이었는데, 바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다. 서긍은 고려의 인물을 다룬 제8권에서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라는 직함을 길게 나열하면서 김부식을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다. ‘풍만한 얼굴과 큰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고 묘사하면서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學士)들의 신망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다’고 호평했다.환영행사가 벌어졌을 군산정은 이렇게 설명했다. ‘군산정은 바다에 다가서 있고 뒤에는 봉우리가 둘 있는데, 나란히 우뚝한 봉우리는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밖에는 10칸 남짓한 관아 건물이 있고, 서쪽 작은 산에는 오룡묘(五龍墓)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서긍이 말한 군산도는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한복판의 선유도, ‘두 봉우리’는 선유도의 상징과도 같은 망주봉((望主峰)이다. 당시는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섬을 통틀어 군산도라 불렀던 듯싶다. 고군산군도는 야미도·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방축도·관리도를 비롯한 6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군진영을 두어 군산진(群山鎭)이라 불렀는데, 조선 세종시대 군산진을 육지로 옮기면서 땅이름까지 가져가고 남은 섬들에 옛 ‘古’(고)자를 넣은 새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다.선유도는 서해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서지의 하나다. 마침 지난해 12월 28일 새만금방조제에서 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를 잇는 자동차 도로가 개통됐다. 연결 교량 건설로 과거 배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던 고군산군도의 주요 섬들이 사실상 육지가 된 것이다. 무녀도에서 새로 지은 선유교를 건너면 선유도의 남섬이다. 조금 더 달려 오른쪽으로 좁은 산길을 따라가면 선유도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북쪽을 바라보면 활 모양으로 크게 휘어진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너머로 북섬 초입에 인상적인 모습의 벌거벗은 바위 봉우리 두 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망주봉이다. 망주봉에 가까이 가면 길가에 군산정과 관사, 자복사, 오룡묘, 숭산행궁(?山行宮)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망주봉 일대에서는 2011년 지표조사 이후 발굴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군산대 박물관은 2014년 군산정 터를 확인하고 외교사절 접대에 썼음직한 최상급 청자와 당시 기와를 여럿 수습했다. 학계는 대체적으로 군산정과 관사가 두 봉우리 사이의 남쪽, 자복사와 숭산행궁은 봉우리 동쪽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망주봉 동쪽 기슭에 오룡묘가 남아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서긍이 ‘뱃사람들은 그것에 퍽 엄숙하게 제사를 올린다’고 했던 그대로 오룡묘는 고군산군도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이 해신(海神)에게 제사 지내는 기능을 지금껏 이어 오고 있다. 오룡묘에 오르면 국신사 일행을 태운 배가 정박했을 선유도의 잔잔한 내해(內海)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룡묘 뒤편에 있었을 자복사는 불교국가 고려의 관아 부속 사찰이었다.군산정 앞바다는 서북쪽으로는 선유도의 북섬과 남섬, 남동쪽으로는 무녀도가 에워싸고 있다. 동쪽의 일부만 바다가 열려 있는데 그것도 신시도가 호위하듯 멀리서 가로막고 있다. 서긍이 ‘열두 봉우리의 산이 잇닿아 성과 같이 둥그렇게 둘러 있다’고 묘사한 그대로다. 망주봉 일대 유적을 돌아보고 섬을 나서는 길에 여유가 있다면 선유교 바로 건너 주차장에 잠깐 차를 세우기를 권한다. 선유교에 올라 망주봉을 바라보면 일대가 군사기지로서는 물론 먼바다를 건너온 외교 사절에 환영행사를 베푸는 데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숭산행궁이다. 우리가 아는 행궁(行宮)이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무는 별궁이다. 지역에서는 글자 그대로 고려시대 행궁이 있었을 것으로 믿는 분위기다. 하지만 서긍은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의 별묘라고 한다’고도 했다. 따라서 학계는 숭산행궁이 숭산별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숭산은 개성의 진산인 송악을 가리킨다. ‘임금이 계신 곳을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망주봉의 이름과도 상통한다는 점에서 일리가 없지 않다. 고려와 북송의 외교와 교역은 애초 산둥반도와 대동강 하구를 거쳐 예성강을 잇는 북로(北路)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거란이 중국 북방을 휩쓸자 고려와 북송은 1074년(문종 28) 남쪽의 명주에서 서해를 건너 흑산도~군산도~마도~자연도~예성항을 잇는 남로(南路)를 이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경로에 외교사절 접대에 필요한 시설을 마련하는 작업도 이때부터 본격화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서긍은 흑산도를 지나며 ‘옛날에는 이곳이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도 아직 남아 있다’면서도 ‘그런데 이번 길에는 정박하지 않았다’고 했다. 흑산도 관사 유적은 1987년부터 2000년까지 목포대 팀이 벌인 세 차례 지표조사에서 흔적을 찾았다. 이후 전남문화재연구원이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벌여 건물터를 확인하고 기와와 청자, 희령통보를 비롯한 송나라 화폐도 수습했다. 마도의 환영행사는 안흥정에서 열렸다. 마도라면 최근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침몰선이 다수 발견되어 수중고고학의 보고로 떠오른 태안 앞바다의 섬이다. 안흥정이 세워진 것은 1077년(문종 31)이라고 한다. 자연도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지금의 영종도다. 자연도에도 사신을 접대하는 경원정이 있었다. 우리에게 ‘외교 유적’이란 흔치가 않다. 선유도 연륙교의 개통으로 높아질 망주봉 유적에 대한 관심이 흑산도·마도·영종도 유적의 실체 확인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경기도·전라도 1000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경기도·전라도 1000년/서동철 논설위원

    올해 경기도와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북도는 각각 ‘정명(定名) 1000년’ 기념행사를 여느라 떠들썩하기만 하다. ‘경기 천년의 해’와 ‘전라도 정도(定都) 1000년’으로 이름만 다를 뿐이다. 한마디로 ‘경기도’와 ‘전라도’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 것을 기념하겠다는 뜻이다.경기도는 오는 7월부터 100일 동안 ‘경기 천년’을 기념하는 축제 ‘경기도큐멘타 2018’을 여는 한편 10월 18일을 ‘경기 천년의 날’로 지정하기로 했다. 앞서 광주시와 전남북도는 ‘2018년 전라도 방문의 해’를 선포하고 ‘전라도 대표 관광지 100선을 통한 명품 여행상품 개발’을 비롯한 문화관광 공동 활성화에 합의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경기’(京幾)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 시대 왕도와 주변 지역을 경현(京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관리했던 데서 비롯됐다. 그 시대 ‘경’(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곳’을 뜻하고, ‘기’(畿)는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의 땅’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런 제도를 주변 국가에서 받아들이면서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시 적용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919년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지은 뒤 개주라 불렀다. 성종은 995년 개주를 개성부로 승격시키고 적현(赤縣) 6곳과 기현(畿縣) 7곳을 관할토록 했다. 적현은 송악·개성·덕수·송림·임진현과 정주, 기현은 그 바깥의 장단·임강·토산·마전·적성·파평현과 우봉군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기는 성종의 지방제도를 현종이 1018년 혁파하면서 다시 붙인 이름이다. 개경 외곽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개성현령과 장단현령이 과거의 적·기현을 나누어 관할토록 했다. 오늘날 황해도와 경기 북부 지역을 아울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이 서울에 도읍하면서 경기도의 영역 또한 남쪽으로 수직 이동했다. 일본이 왕이 머물던 교토(京都) 일대를 기나이(畿內), 그 외곽을 긴키(近畿)라고 부르는 것도 다르지 않은 개념이다. 아울러 현종은 전주목과 나주목을 전라도라는 이름으로 통합한다. 이후 고려는 예종 원년(1106)까지 광주(廣州)·충주·청주를 양광도, 경주·진주·상주를 경상도, 해주와 황주를 서해도로 묶고 강원 영서를 교주도로 구획한 5도 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경기도와 전라도의 출범이 같은 시점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내 고향’이나, ‘내 고장’이라는 것도 상당 부분 누군가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설계된 범위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물론 이웃 지역과 이해를 넓히는 기념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경주 동궁 복원/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경주 동궁 복원/서동철 논설위원

    경주의 신라유적 ‘동궁(東宮)과 월지(月地)’의 북동쪽 지역에서는 2007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23곳의 건물터를 비롯해 담장과 배수로, 우물 등 궁궐 시설을 확인했다. 올해는 수세식 화장실 유구도 찾아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쪼그려 앉는 방식의 변기 가운데 구멍을 뚫고 그 아래로는 기울기를 둔 배수로로 배설물이 깨끗하게 흘러나갈 수 있도록 했다.경주의 동궁은 오해도 없지 않았다. 중국에서 동궁이란 세자의 거처를 뜻하는데, 사극에서 자주 봤던 대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같은 뜻으로 썼다. 이 때문에 경주의 동궁 역시 세자의 거처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월성(月城) 및 북궁(北宮)과 함께 신라의 정궁(正宮)으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다. 글자 그대로 신라 왕경(王京)의 동쪽에 자리 잡아 이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매우 정성을 들여 만든 동궁의 화장실도 왕을 위한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월지를 사이에 두고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된 동북쪽의 반대편인 서남쪽에서는 1975~1976년 발굴조사에서 임해전(臨海殿) 터가 확인되기도 했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동궁과 월지의 관계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과 경회루 연못의 관계와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임해전과 경회루의 역할 역시 완전히 똑같다. 그러니 ‘경복궁 연못’이라는 표현도 어색하기만 하다. 월지처럼 뭔가 이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하다. 발굴조사로 동궁의 실체를 확인한 데다 안압지는 조선시대 명칭이어서 2011년 지금처럼 바꾼 것이다. 하지만 발굴이 진척될수록 월지가 동궁의 부속시설이라는 사실 또한 명백해지고 있다. 경복궁을 ‘경복궁과 경회루 연못’으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 ‘동궁과 월지’도 그저 ‘동궁’으로 부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경주시가 내년부터 동궁 복원에 나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정전(正殿)과 왕이 정사를 보던 편전, 침전, 회랑 등을 단계적으로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짓겠다는 건지 궁금하기만 하다. 동궁을 세운 문무왕(626~681) 시대 것을 포함해 신라 궁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월지 주변에는 3채의 누각이 지어졌지만 신라시대 건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번에도 경주시가 하겠다는 작업은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복원’이 아니라 ‘신축’일 수밖에 없다. dcsuh@seoul.co.kr
  • 전라도 일제강점기 지적원도 오늘부터 공개

    일제강점기에 생산된 전라도 지역 지적원도 422만건이 공개된다. 이로써 당시 만들어진 남한 지역 전체 지적원도에 대한 원문이 제공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국민이 많이 찾는 기록물인 지적원도를 포함해 공개기록물 약 447만여건을 26일부터 국가기록원 홈페이지(www.archives.go.kr)에 공개한다. 전라권 지적원도를 비롯해 분배농지상환대장, 국무회의록, 문화재 건축도면 등도 같이 공개된다. 지적원도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것으로 마을마다 토지의 지번·지목·소유자명을 기록하고 있다. 토지대장 분실로 토지소유권을 증빙하기 어려웠던 지역에선 소유권을 증빙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전라도의 지적원도가 공개되면서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남한 지역 전체 지적원도 1470만건에 대한 원문 제공이 가능해졌다. 2014년도에 서울·경기(약 194만건) 지역 원문을 공개한 데 이어 2015년 강원·충청(약 341만건), 2016년 경상(511만건) 등을 제공해왔다. 1970~2000년대 생산된 문화재 관련 도면류 기록물 8071건도 함께 공개된다. 왕릉·궁궐·사찰·서원 등 문화재 복원·보수와 관련된 자료다. 경복궁 근정전의 종단면을 상세히 그려놓은 도면이 눈에 띈다. 주택임대차시행령개정안 등 1949~2000년대까지 외교·산업 등 주요 정책과 관련한 국무회의록 2만 7936건도 제공된다. 1948~1980년대까지 만들어진 분배농지상환대장이나 1980년대 정부행사 등의 모습을 담은 시청각 기록물도 있다. 국가기록원은 디지털화된 공개기록물을 내년에 100만건 정도 추가 제공해 총 2021만건의 기록에 대한 원문 공개 서비스를 운영할 방침이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기농 정세권 선생을 생각함

    [노주석의 서울살이] 기농 정세권 선생을 생각함

    서울 한복판에 송해길이 생겼다. 종로구 육의전 빌딩에서 낙원상가 앞까지 240m이다. 아흔 살 ‘국민 오빠’ 송해를 기리는 길이라고 한다. 송해의 사무실이 있고, 즐겨 다니는 2000원짜리 해장국집이 있다. 지하철 종로3가역 5번 출입구 앞에 그의 흉상도 놓였다. 거부감은 없다. 웃자는 게 코미디고, 웃기자는 게 코미디언 아닌가. 웃으면 그만이다. 좀 찜찜하긴 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길에 붙이고, 동상을 세운 뒤 벌어진 좋지 않은 추억 때문이다. 시비 붙는 사람 없으니 다행이다. 한 사람이 생각났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다. 서울에 한옥을 남긴 분이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그분의 작품이다. 1920~30년대 개량 한옥을 짓고, 한옥지구를 조성한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가이다. ‘궁궐의 도시’ 서울의 사대문 안은 왕과 일족이 사는 40여개의 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농은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는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선생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량과 지역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 북촌과 서촌은 일본식 문화주택으로 덮였을 것이다. 건축가 정기용은 “북촌 한옥은 서울의 존재이며, 장소이고,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도시형 한옥은 서울의 징표가 됐다. 조선은 망하고, 국왕은 폐위됐지만, 분야별 왕이 있었다. ‘백화점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 ‘부동산왕’ 민영휘, ‘문화재왕’ 전형필이 그들이다. 정세권은 ‘건축왕’이었다. 전형필과 정세권 두 분의 선각자가 문화재와 한옥을 지켰다. 기농은 부동산 개발로 번 돈을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썼다. 우리말큰사전 편찬을 도우려고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했고 자금을 댔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겪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지사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31세에 상경, 70대에 낙향, 78세 타계할 때까지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었다. 춘원 이광수는 “그를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는 이례적인 글을 기고했다. 그런 정세권이 잊혔다. 서울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서울의 기와집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전통가옥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서울의 기와 한옥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 1644년 대화재로 사라진 영국 런던을 재건한 크리스토퍼 렌, 1850년대에 프랑스 파리를 오늘의 파리로 만든 E 오스만,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를 부활시킨 고토 신페이처럼 서울의 미래를 만든 사람은 기농 선생이 아닐까. 그런데 왜 정세권의 업적은 기록되지 않고, 정세권 길은 만들지 않으며, 정세권 동상은 세우지 않나.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사람, 정세권 정신을 가진 서울사람을 기리는 정세권의 날과 정세권상은 왜 제정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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