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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전·기아로 난민 1천8백만 표류(대변환 지구촌 ’91:4)

    「91지구촌」이 겪은 가장 절박한 문제중 하나가 바로 난민 문제이다.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허덕이고 있는 1천8백만여명의 난민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난민문제는 매년 계속되어온 것이지만 91년에는 전쟁과 민족간 갈등으로 어느해 보다 심각한 양상을 빚어냈다.연초에 터진 걸프전으로 수백만 쿠르드족이 눈덮인 산속을 맨발로 헤매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3월에는 지난해말부터 조짐을 보이던 알바니아에서 대탈출사태가 발생,이탈리아등 이웃국가들의 골치를 썩혔다.이와함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조국을 등지고 서구를 찾은 수백만의 동구난민들로 인해 서구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많은 아프리카국들에서도 내전과 기아로부터 탈출하려는 대이동이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난민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도움은 제자리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경우도 있다.지난달 홍콩이 난민촌에 수용된 베트남난민들을 강제송환하기 시작한 것이나 미국이 쿠데타를 피해 탈출해온 아이티난민들을 강제송환키로 결정한 것이 바로 그같은 예다. 한편 캄보디아의 평화협정 체결로 수백만 캄보디아난민들이 다시 조국을 찾을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했다.난민은 크게 내전이나 쿠데타등 정치불안을 피하려는 경우와 기아에서 벗어나려는 경제난민의 두 경우로 나눌수 있는데 난민발생의 근본원인이 해소되지 않는한 재정적 지원만으론 난민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캄보디아난민의 재정착 성패여부는 앞으로 난민문제 해결에 시금석이 될 수 있을것 같다.
  • 「70년 붉은제국」 지도서 사라진다/소 연방 해체되기까지…

    ◎군수산업위주 정책으로 경제파탄 촉발/공화국들의 「독립도미노」에 결국 “두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벨로루스의 3개 공화국이 8일 독립국가공동체를 결성키로 합의하고 국제법의 실체로서 또 지리적 실체로서의 소련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은 중병속에서도 회생을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던 소련에 사망선고를 내린 최후의 일격이라고 할수 있다. 이로써 세계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또 냉전체제의 한 주역으로 현대사의 기록에서 결코 지울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소련은 이제 공중분해를 거쳐 74년에 걸친 목숨을 마치게 됐다.이와 함께 지난 수년간 세계사의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변화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정치생명도 완전히 끝났다고 할수 있다. 15개 공화국(발트 3국의 독립으로 현재는 12개 공화국)에 1백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소련의 탄생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따른 「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소련의 탄생을 가져왔던 그 강압적 힘이 결국은 스스로의 심장에 꽂히는 비수로변하고 만 것이다. 소련이 국가로서의 생명을 잃은 것은 최근 식량폭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서도 알수 있듯이 공산주의 경제체제 실패에 따른 경제파탄과 다민족국가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민족분규의 폭발적 분출을 해결할수 없었던데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결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측됐던 것이다.6년전 54세의 젊은 나이에 소련 공산당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가 신사고를 통한 정치·경제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을 들고 나온 것도 이같은 결과를 예측,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그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그의 생각에 소련국민들은 물론 많은 서방국가들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이전의 소련은 오랫동안 군사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군수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편데다 미국과의 냉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무리한 대외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소련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었다.이는 민생경제의 도탄을 가져와 핵강국 소련으로 하여금 국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자존심마저 버리고 과거의 적대국이었던 서방국가로의 구걸행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또 오랜 세월 민족갈등의 분출을 억눌러 왔던 공산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이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등장으로 완화되면서 각민족간의 유혈분쟁이 점증하더니 결국은 지난해 3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시발로 지난 1일 우크라이나의 독립승인 국민투표에 이르기까지 각공화국들간에 독립선언 도미노현상까지 몰고 왔다. 결국 무리한 힘의 억압으로 빚어진 결과는 이미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돼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개혁반대세력들의 저항과 이에 따른 사회혼란의 조장,어려운 상황속에서 자국의 생존만을 우선시킨 각공화국들의 지역적 이기주의가 이같은 상황악화를 더욱 가속시켰다고 할수 있다.시급한 정치·경제개혁의 필요성엔 다같이 공감하면서도 그 방법론에 대한 의견차를 해소하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공중분해의 길을 선택한 것은 소련으로선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될것으로 보인다. ◎인구 150만… 벨로루스공 수도/「독립국가공동체」 수도 민스크 「독립국가연방」의 수도로 결정된 민스크시는 이들 3개 공화국중 가장 규모가 작은 벨로루스(백러시아)공화국의 수도이자 산업 중심지. 인구 1백50만명으로 러시아공화국 국경으로부터는 2백24㎞,모스크바로부터는 6백90㎞ 거리에 위치해 있다. 스비스로크강을 끼고 있는 민스크시는 1154년 유명한 아랍인여행가인 아부 압둘라 무하메드가 그린 지도에 명기되어 있으며 당시에 이미 대도시로 널리 알려졌다.벨로루스공화국은 50년전 독일군의 침공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민스크시는 당시 대부분이 파괴됐다. 전후 소련정부는 널찍한 시가지와 공원을 갖춘 민스크시를 재건했으며 이로 인해 역사적 특징이 많이 손상됐다.
  • 쿠데타 보다 굶주림이 더 무섭다/소 겨울 공황

    ◎「정글의 법칙」 지배… 공화국간 내전 필연/「전략무기감축」등 국제조약도 물거품/“식량폭동”… 세계가 불안하다 지난 8월 실패로 끝난 소련의 쿠데타만 해도 전세계를 경악속에 몰아넣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쿠데타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무서운 일이 지금 소련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다. 그것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국민들의 식량폭동 조짐이다. 소브차크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장이 최근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면 국민들이 지지를 보낼 것』이라고 경고한 바도 있지만 만일 쿠데타가 지난 8월이 아니라 현시점에서 일어났다면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미국과 함께 양대 초강대국의 위치를 오랫동안 지켜왔던 소련에서 식량폭동이 발생할 경우 실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것이다. 식량폭동이 일어나면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포함,현재의 소련을 이끌고 있는 고위지도부 대부분의 급속한 몰락을 가져올 가능성도 많다. 이렇게 되면 이미 약화될대로 약화된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각공화국들에서도 힘의 공백상태가 발생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공화국간의 이해대립에 따른 마찰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사라지게 될것이다. 이와함께 이미 와해의 길에 들어선 소련연방의 해체가 식량폭동의 발생으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제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소련이란 나라가 완전한 공중분해를 거쳐 여러개의 나라로 뿔뿔히 흩어질 것이다. 또 쿠데타이후 드러나기 시작한 각공화국들의 이기적인 자국우선주의가 극대화해 생존을 위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로 급속히 변모할 가능성도 크다. 이렇게 되면 각공화국들이 서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내세워 공화국간에 대규모 분쟁이 빚어질것으로 우려된다. 이같은 분쟁은 현재 소련사회의 골치거리로 대두되고 있는 민족분규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소련에 큰 재앙을 가져올 것이며 소련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속에 빠져들 것이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START(전략무기감축협상)를 포함하여 소련이 참여하고 있는 각종 국제조약이 어떻게 될것이냐는게 첫번째 관심사이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는 벌써부터 소련의 4개공화국에 분산돼 있는 핵무기에 대한 우려를 제기해 왔다. 그런터에 식량폭동의 발생으로 연방정부 뿐만 아니라 각공화국 정부의 통제력이 상실되면 소련이 체결한 국제조약의 이행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것은 당연하다. 그럴경우 핵무기에 대한 우려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증폭될 것이고 미소간에 형성돼온 신데탕트의 축에도 균열이 생길지 모른다. 소련의 해체로 예상되는 각공화국들간의 대규모 분쟁발생 가능성은 또 소련과 인접해 있는 동구국가에 소련에서의 분쟁에 휩싸일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소련의 혼돈이 국내에 유입될 것이란 안보위협을 제기,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제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는 탈냉전분위기에서 찬물을 끼얹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다. 소련에서의 식량폭동발생은 또 식량생산이 부족한 공화국들에서 대규모의 난민을 발생시킬 우려가 매우 크다. 소련의 공화국들로선 이같은 난민을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은 그대로 국제사회로 떠넘겨질 것이고 이는 국제사회의 큰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소련에서의 식량폭동은 그밖에도 국제농산물 유통구조에 큰 혼란을 초래,세계경제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될것으로 예상된다. 오늘의 소련이 처한 위기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빵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체제유지가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폭동으로 부족한 식량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신연방구성을 위한 진통과 함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소련국민들의 더 큰 인내와 서방국가들의 신속하고 적극적인 원조없이는 현재의 소련식량위기를 타개할 묘책은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왜 이지경에 이르렀나/잇단 흉작에 유통체계마저 엉망/공화국간 지역이기주의도 한 몫 6일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식량폭동조짐은 이미 지난 여름 쿠데타발생 이전부터 예견됐던 것이라는 점에서 그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같은 소련의 식량난은 잇단 흉작으로 인한 곡물생산량 감소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잉여농산물 이전등 공화국간 배분체계 모순과 교통및 운송수단의 불비등 구조적인데 더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소련의 금년도 곡물생산량은 1억7천5백만t으로 지난해 2억3천6백만t에 비해 무려 26% 감소를 비롯,육류21% 유제품15% 설탕27%등 식품생산의 전반적인 감소를 전망했다. 이같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에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연방해체 움직임이 또한 사태악화에 결정적 요인이 됐다.그동안 15개공화국의 연방체로 공화국간의 상호보완적 경제활동을 통해 유지돼온 소련경제는 발트3국의 독립과 최근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또 더욱 강화된 공화국간의 지역이기주의등으로 절름발이 상태를 면할수 없었다.특히 소련 전체곡물생산의 4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공화국의 공화국 농축산물 반출금지와 독립선언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농산물의 유통체계 또한 식량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지난해의 경우 수확량의 4분의 1이상이 곡물시장에 도착하지 못한채 썩어버렸다.도로망의 불비,수송수단의 부족,그리고 저장시설의 미비는 곡물의 원활한 유통을 저해시켜 일부지역에서는 식량이 남아돌아가면서도 일부지역에서는 식량난을 겪게하는등 심각한 분배의 모순을 낳고 있는 것이다. 식량부족의 원인 가운데는 소련사회의 개혁과 개방의 부작용으로 초래된 국민들의 생산성저하와 사재기등 만연된 이기주의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소련 식량사태 악화의 또하나의 원인은 서방국가들의 비협조에 있다.지난 여름 쿠데타 이전 고르바초프대통령은 1백20억달러 상당의 긴급식량원조를 서방측에 요청했으며 서방으로부터 2백억달러의 차관지원을 약속받고 있었다.그러나 쿠데타등 소련내 국내상황의 변화로 원조계획이 지연되거나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다.미국은 국내경제 불황으로 일본은 북방도서와의 연계로 구체적 지원이 늦어지고 있으며 또 독일은 현재계획중인 6백50억마르크 외의 추가지원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다행히 소련은 6억달러의 미보증차관이 금주초 방출됨으로써 6일 1억달러어치의 곡물을 구입하는등 급한불 끄기에 나섰지만 이번 겨울을 원만히 넘기기 위해서는 서방측의 인류애차원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원조가 있어야 할것으로 보인다. ◎“보름뒤면 식량 바닥”… 가축 약탈·차량 습격 속출/어느정도 심각한 상황인가/페테르부르크시 육류 이미 고갈/핵 관리병도 배고픔 못이겨 근무지 이탈 소련의 식량난이 위기상황을 넘어 파탄직전 상태로 치닫고 있다. 「사흘 굶으면 담을 넘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현재 소련에서는 핵무기를 관리하는 병사들이 근무지를 이탈,식량을 구하러 다니고 있고 모스크바주민들은 월동준비를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은 이젠 화제거리가 아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소련의 식료품 품귀현상은 이미 예고된 코스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 정도가 예상을 초월,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달들어 소련 전역의 도시들에서는 육류와 기타 식료품이 크게 부족,카자흐공화국의 나린시의 경우 굶주린 주민들이 집단농장에서 1만6천마리의 양을 훔쳐갔으며 러시아공화국의 크라스노다르시에서도 농가의 소 25마리,말 44마리,송아지 15마리가 도난당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또한 일부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인근 농장을 습격,우유와 버터를 운반하고 있던 차량을 저지시키기도 했다고 언론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는 우랄산맥의 우파시의 경우 배급되지 않는 유일한 식료품은 빵이라고 전하고 그러나 그루지야공화국의 수도 트빌리시시에선 「싸고도 별문제 없이」구입할수 있는 품목은 치즈와 콩 뿐이라고 보도했다.이 신문은 또 육류의 경우 국영상점에서는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협동농민시장에서도 너무 비싸게 거래돼 극동지방의 일부도시에선 육류 대신 해초를 팔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런가하면 상트 페테르부르크시 당국은 최근 육류재고가 완전히 바닥이 났다고 발표,충격을 주고 있다. 연방정부 당국자들은 모든 식량을 통틀어 열흘 내지 보름치밖에 남아있지 않다면서 「진정한 재앙」이 닥쳤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에 와선 이같은 소련의 심각한 식량부족에다 에너지·의약품등의 고갈로 소련인들이 인내의 한계점을 넘어 폭발직전에 놓여 있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연료부족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발이 묶인 승객들이 활주로에 뛰어들어 시위를 벌였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또한 소련 의학아카데미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청소년의 90%가 비타민 결핍증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소련인들은 이미 만성적인 생필품부족에 시달려 왔다. 그만큼 물자부족에 단련된 사람들인 셈이다. 그러나 올 겨울만큼은 그들 인내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사회적 폭발위기」에 직면해 있다. 더욱이 고르바초프대통령 등장이후 개혁정책에 힘입어 「말을 할수있는 자유」까지 만끽하고 있는 소련인들의 외침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로 자연스레 모아지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 세계를 파괴하고도 남을 초군사강대국인 소련의 식량난에 발목이 잡힌채 「쿠데타」보다 더 무서운 「민중폭동의 수렁」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 와해되는 소 연방… 「새 전국시대」 신호인가

    ◎「재편지도」는 어떤 그림/“슬라브족 연대” 모색등 각개약진 양상/고르비 「신연방카드」 이미 물건너간듯 1백여개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제일의 다민족국가인 소련이 연방해체를 향한 마무리 조정국면으로 돌입했다.볼셰비키혁명의 결과로 1922년 12월30일 성립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구성원들이 마침내 「헤쳐모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면서 혼돈 그 자체를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소련연방해체후의 재편모습 향방은 정치 경제 안보분야와 슬라브족연대 소수민족독립등 다섯갈래의 이합집산시도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우선 고르바초프연방대통령이 안간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는 느슨한 형태의 「주권국가연방」은 성사전망이 매우 불투명한 상태다.쿠데타 직후 발트3국이 독립을 인정받아 연방에서 분리독립해나감으로써 12개공화국만 남게된 소련을 정치적인 연방형태로 묶어두려는 신연방조약안은 4일 러시아등 7개공화국 대의원들이 참가한 연방최고회의에서 채택돼 공화국최고회의로 넘겨짐에 따라 아직도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둔 듯하다.그러나 지난 1일 분리독립을 결정한 제2규모의 우크라이나가 신연방조약 불참의사를 확고히 밝히고 있고 옐친러시아대통령도 연방유지를 지지하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빠진 연방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어서 연방유지는 이미 물건너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올3월 국민투표때만 해도 70% 이상이 연방잔류를 지지했던 우크라이나가 불과 9개월만에 90% 이상의 독립찬성으로 돌변한 이유는 쿠데타 이후 옐친의 독선에 따른 러시아패권주의에 대한 우려와 경제적 피해의식 때문이다.상당부분의 연방권한이 옐친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연방에 참여할 경우 돌아오는 것은 압제와 수탈 뿐이며 혼자라면 잘 살수 있을텐데 다른 공화국들 때문에 덩달아 손해보고 있다고 여긴다.그렇다고 원유와 가스등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면서 인근 공화국들과의 협력을 배척할 수 만도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의 길을 걸으면서 경제적으로 경제공동체보다는 약한 공동시장이나 경제동맹 정도의 협력관계를 유지하거나 러시아등 필요한공화국들과만 경제협력을 추구하는 한편 핵무기통제를 포함한 집단안보체제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러시아인에 대한 피해의식과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역시 절감하고 있는 다른 공화국들도 우크라이나와 비슷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우크라이나가 당초 8개공화국이 초안에 합의했던 경제공동체조약에 몰도바와 함께 뒤늦게 참여하고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러시아 벨루스(구백러시아)와 함께 오는 7일 3개거대공화국 정상회담을 열어 슬라브주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것도 이같은 저의를 내포한 다각적인 협력관계 모색의 일환이다. 집단안전보장조약에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한 11개공화국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서방세계의 경제원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핵 및 군비확산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하는 소수민족의 독립연쇄반응에도 불이 붙었다.발트3국외에 10개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고 러시아와 카자흐도 주권을 선언한 가운데 각공화국 산하의 20개 자치공화국중 15개,8개자치주중 4개,10개자치구중4개가 이미 주권선언을 마쳤다.아제르바이잔내 나고르노­카라바흐자치주의 아르메니아인과 몰도바내의 러시아인 집단거주지역등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내전경고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널려있다. 소련의 재편이 마무리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리고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는데도 수십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된다.그와중에 굶주림을 참지못한 소련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과거로의 회귀를 요구할지,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핵재앙까지 초래할지 변수들이 너무 많기때문에 소련의 미래를 예단하기는 아직 이른 상황이다. ◎세계의 관심/핵무기 통제/독자군 창설땐 핵불안 증폭/서방선 “핵­경원 연계” 고수 우크라이나공화국의 독립으로 소연방의 해체가 가속화돼 가고 있는 가운데 연방의 통제를 벗어난 소련의 핵문제가 소련내부 뿐 아니라 서방국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 하고 있다. 소연방내 핵무기가 배치돼 있는 공화국은 4개공화국이다. 모두 2만 7천기의 핵무기중 85%가 집중돼 있는 러시아공화국외에 우크라이나에 1천 4백개의 핵탄두와 전력미사일 1백 76기,벨로루스(구백러시아)에 2천개의 핵탄두와 전략미사일 50기,카자흐에 1천 3백개의 핵탄두와 1백기의 미사일이 배치돼 있다. 핵무기통제와 관련,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외교·국방·핵무기통제권이 포함된 신연방조약의 서명을 통해 연방통제하에 핵무기를 관리하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 대통령도 7일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등 3개공화국대통령이 회동,핵무기폐기와 군축협정 준수를 논의할 예정이다. 더욱이 서방국가들은 핵무기의 확산과 공화국들간의 돌발사태에 대비,대소원조조건으로 연방통제하의 핵무기관리를 주장해 왔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과 유럽공동체(EC)가 우크라이나독립승인을 조기시사한 것이라든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동맹국이 우크라이나공에 대해 핵협정을 지키고 무기통제및 군축협정을 준수할 것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각공화국들은 러시아공의 핵무기장악을 반대하고 있으며 비핵지대화를 선언했던 우크라이나공은 독립과 동시에 핵무기를 핵보유공화국들의 집단관리하에 두자고 주장,고르바초프가 제안한 신연방조약이 소연방최고회의에서 승인됐지만 공화국의 비준절차를 남겨놓고 있어 최종결과는 불투명한 상태다. 또 연방에서 분리·독립하려는 공화국들의 독자군 창설이 군사재편문제에 새로운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독자군 창설을 공식발표한 공화국은 우크라이나공을 비롯,그루지야 몰도비아 벨로루스등 4개공화국이다.최근 소련최고회의와 각 공화국대표들은 군사동맹유지를 위해 집단안전보장 조약초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각 공화국들이 독자군창설을 가속화할 경우 재래식무기감축은 어렵게 되고 자칫 영토문제가 빌미가 되어 내전으로 비화되면 우크라이나공을 비롯,각 공화국들의 핵관리가 제대로 지켜질지 미지수다. 결국 소련의 각 공화국들은 핵통제권과 안보체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달갑지는 않지만 공화국자체의 방위체제를 구축하면서 핵보유공화국들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통제를 일원화시키는 느슨한 형태의 주권국가에 의한 NATO식 군사동맹의 형태를 추구할 것같다.
  • 외언내언

    「옥쌀」「혼합국수」「속도전가루」.우리에겐 낯선 단어들이지만 북한에서는 밥대신 늘 먹어야 하는 없어서는 안될 대체식량들.옥쌀은 옥수수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물을 뿌려 익힌 뒤 성형기로 압축,쌀모양으로 만든 것이고 혼합국수는 나무껍질가루에 옥수수가루와 감자가루를 섞어 만든 국수.속도전가루는 옥수수가루에 약간의 당분을 넣은 것인데 이 가루는 아무곳에서나 물에 타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속도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이런 대체식량들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것이 북한의 실정.그래서 지난해부터 「하루 두끼 먹기」운동이 펼쳐지고 있고 최근에는 「허리띠 졸라매고 밥먹기」라는 희한한 운동까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북한 당국은 언론매체를 통해 『허리띠를 풀고 식사를 하면 위암에 걸릴 위험이 높고 간장에도 해롭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그 기발한 착상(?)은 개그콘테스트의 대상감.그러나 북한주민들의 배고픈 사정을 생각하면 아픈 마음 가눌길 없다.북한의 식량공급제도가 분배제에서 배급제로 바뀐이래 농민들이 농사를 게을리 하고 기후조건도 좋지 않아 6년 내리 흉작이 된탓에 최악의 식량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의 진단이다.◆때문에 배고픈 주민들이 집단으로 식량창고를 부수는등 소규모의 식량폭동이 빈발하고 있다는 것.지난 2월에는 굶주림에 지친 북한주민 일가족 4명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시로 탈출했으나 중국 공안원에 체포되자 집단자살했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려온다.◆식량 뿐만이 아니다.전력난으로 공장 가동률이 50%를 밑돌고 있고 극심한 유류난으로 각급 공장과 기업소의 모든 차량에 대해 금·토·일요일에는 급유를 중단시키는등 북한경제는 지금 파탄상태에 직면해 있다.그런데도 김일성주석은 무기 생산과 핵무기 개발에 진력하고 있다.이런 일에 드는 어머어마한 돈으로 굶주리고 있는 주민들에게 대체식량이라도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 어떨까.숙연한 마음으로 물어보고 싶다.
  • 북한/식량·전력·외화 부족 심각

    ◎쌀 배급도 줄고… 공장 셋중 1곳 문 닫아/달러·엔화 암시장서 공정환율 40배 거래/미 NYT지 보도 【뉴욕 연합】 북한이 최근 식량·전력·외화등의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가 27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이 신문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북경지국장은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북한에 굶주림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믿을 만한 소식들이 있다고 전하고 북한 주민들이 중국·일본·미국등지에서 찾아간 친척들에게 그들이 지금 원하는 건 식량이라고 말한 사실을 예로 들었다. 크리스토프 지국장은 북한의 일부지역에선 밥과 김치만의 식사를 그것도 하루두끼씩만 제공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며 사실상 모든 식량이 배급되고 있는데 고기류는 1년에 너덧차례,달걀은 한달에 두개,쌀은 성인남자 근로자 한사람에 하루 1.5파운드가 배급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북한공장의 약 3분의 1은 문을 닫았고 문을 연 공장들도 그 절반은 전력·원료부족등으로 가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평양서 살고 있는 한 소련인의 전언인데 그는 『평양외곽은 밤이되면 전력공급이 중단돼 암흑과 같다』고 말한 것으로 크리스토프 기자는 보도했다. 외화부족 현상도 심각해 평양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미달러화나 일본의 엔화같은 경화는 공정환율의 40배에 달한다고 말했다고 타임스는 전했다.
  • 후세인 강권통치에 배곯는 이라크/국민 인질삼아 유엔제재 해제 요구

    ◎포성 멎은지 6달 넘도록 종전안 이행 안해/식량구입 조건부 석유수출도 거부 걸프전이 끝난지 6개월이 넘었는데도 이라크 국민들은 전후복구는 커녕 갈수록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더구나 이라크인들의 굶주림은 단순히 전쟁에서 패한 나라가 감수해야 하는 전후의 고통이 아니다. 무모하게 걸프전을 일으켰다가 참패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정권유지를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밀어 붙이고 있는 정략에 의한 것이다. 후세인이 마음만 먹으면 이라크인들의 굶주림은 당장이라도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후세인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카드로 삼기 위해 국민들의 기아를 볼모로 삼아 오히려 이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후세인이 유엔과 합의한 걸프전 종전안을 이행할 경우 이라크는 본격적인 전후복구는 어렵더라도 국민들이 나날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세인은 종전안의 수행이나 종전후 유엔이 이라크에 대해 내린 결정을 그대로 승복하면 결국 자신이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이라크의 경제난이다 국민들의 생활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제협약이나 결정을 위반하기 일쑤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1천8백만 이라크 국민들의 기아를 볼모로 내세워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 유엔이 이라크에 대한 제재조치를 자진 철회하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쿠웨이트를 전격 침략한 대가로 유엔의 경제봉쇄 조치를 15개월째 받고 있는 이라크인들의 생활상은 일부 소수계층을 제외하곤 처참한 상태에 놓여있다. 식량의 대부분을 비롯한 생필품의 태반을 외국에서 수입해 오면서 하루 2백만배럴의 석유를 팔아 수입물품 대금을 결제해왔던 이라크로선 석유의 해외판로를 막는 경제봉쇄 조치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라크 정부는 국민 누구나 해외물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물품 구입원인 석유가 팔리지 않는 마당에 정부가 국민들이 외국물건을 살 돈이 있을 턱이 없다. 후세인이 벌인 이란과의 8년전쟁을 포함,11년동안 전쟁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이라크인들은 걸프전 종전을 맞긴 했지만 돈이 달린 정부가 그동안 석유판매대금으로 지원해오던 기본식품 보조금을 대폭 축소하는 바람에 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식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빵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수도 바그다드 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구걸하는 젊은 어머니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기초의약품이 크게 부족하고 환경이 극도로 나빠져 병사자가 급증한 가운데 강권통치로 극소수에 그쳤던 범죄가 크게 늘어 강도사건만해도 인구 5백만명의 바그다드에서 하룻밤에 30여건씩 발생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후세인은 유엔이 경제봉쇄 해제의 조건으로 내건 종전안 수행에 착수할 생각은 않고 이라크인들의 고난을 구실삼아 경제봉쇄를 무조건 해제해줄 것을 기회있을 때마다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선 종전안이행 입장을 고수하던 유엔도 이라크인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드디어 지난달 20일 이라크에 앞으로 6개월 동안 16억달러 어치의 석유를 외국에 팔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이라크가 석유를 판매하되 판매대금을 전부를 유엔이 관리,후세인이나 이라크정부가 다른 곳에 유용할 수 없도록 조치했고 핵사찰에 협조할 것을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이같이 모욕적인 주권침해를 받느니 보다 차라리 굶겠다』며 이라크인들의 곤궁과 기아를 해결해줄 유엔 허용안을 퇴짜 놓고 말았다.
  • “한국 급진주의 「몰락의 길」 걷고있다”/소 이즈베스티야지 보도

    ◎위험한 존재인식… 「침묵의 대다수」 등돌려/유럽·일 전철밟아 「테러」로 전술전환 가능성 소련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한국의 급진주의가 지난 수년간의 민주화투쟁에 뚜렷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침묵하는 대다수」의 지지를 잃게됨에 따라 끝장의 길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지난 12일과 15일 연재한 「한국급진주의의 임종」이란 장문의 분석기사를 통해 지난 4월26일이래 강경대군 타살 및 일련의 분신자살 사건과 관련,한국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격렬한 대정부투쟁이 연속적으로 발생했으나 이같은 급진주의에 대한 전체국민의 호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때 사회적 진보의 추진력으로 평가되기까지 했던 한국의 급진주의가 이처럼 몰락의 길을 걷게된 것은 일반인들에게 사회적으로 위험한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로인해 궁지에 몰린 급진파들이 유럽과 일본에서 그러했듯이 불원간 테러전술로 방향을 바꿀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다음은 이즈베스티야의 아가포노프 기자가지난 6월10일 서울에서 취재한 기사의 요약이다. ­지난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전경에 의해 난타당해 사망하자 한국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탄압정권」에 의해 유린되는 민주이념을 위한 투쟁에서 9명이 분신자살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쌓이고 맺힌」 울분의 폭발로 가두투쟁에 나선 급진파들에 대한 전체 한국인들의 호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교전통에서 자살이 부모에 대한 배신으로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무엇을 위해 분신자살의 길로 나서고 있으며 이들이 생명을 바쳐 타도하려는 이른바 「독재」의 압력은 어느정도로 심각한 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30여년이상 안팎의 정세로 인해 극단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군사독재라는 강경구조속에 갇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후 빈곤과 독재외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이 나라에는 추상적인 민주주의 대신에 구체적인 경제발전계획이 국민에게 제시되었다. 기아가 이 나라에서 창궐하는 동안 사람들은 누구나 민주주의에대해 탄식하면서도 이를 대중적 의식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고민하지는 않았다. 정치적 전체주의속에서 경제적으로 최대의 성취를 가져오게 되면서 굶주림이 배부름으로 바뀌자 정치적 급진주의가 커다란 난관으로 다가왔다. 학생측은 한국에서 「민족의 양심」이라는 영예로운 「작위」를 가지고 언제나 급진주의 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됐다. 물론 국민들도 민주적 변혁을 요구했으나 이들 요구의 이면에는 「사회적 혁명」이란 갈망보다는 사회를 발전과 번영의 길로 나가도록 하기위한 새로운 정치적 조직을 바라고 있었다. 광주항쟁이후 7년간 급진파들은 민주화의 슬로건아래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 정치의 추진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 기간중 정치단체결성 금지법이 취소되는등 공을 세웠다. 한국재야는 급진주의를 토대로 「점수」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87년 노태우 당시 민정당대표위원이 사회의 민주개혁과 정치적 자유에 기초한 국민화해안을 제시함으로써 급진파의 슬로건을 손안에 틀어쥐고 마침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급진파의 영향력은 구체적행동에 의해 나타나고 있었는데 국가의 정상화가 이들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게 됐다. 좌익 급진주의운동의 대열도 이탈자가 속출,언제나 급진파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던 학생층에서도 붕괴현상이 확연히 드러났다. 오늘날 1만내지 2만2천명 수준으로 위축된 급진파학생들은 한때 사회적 진보의 추진력으로 평가받았으나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비쳐지고 있다. 서울 정치평론가들의 예측에 따르면 급진파들은 불원간 유럽이나 일본에서 그러했듯이 테러전술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겨우 수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내 한국의 최대과제는 지난 87·88년사이에 공감대를 일으킨 허약한 국민화합을 어떻게 유지,발전시키느냐에 있다. 여기서 실패할 경우 급진파들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 방글라 또 폭풍/1백18명 사망/산악지방선 지진

    【다카 로이터 UPI 연합】 지난주 방글라데시를 강타한 태풍으로 최소한 12만5천명이 사망하고 수백만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또다시 폭풍과 홍수가 몰아닥쳐 적어도 1백18명 이상이 사망하고 2천여 명이 부상했다. 시간당 중심속도 1백20㎞의 강풍이 9일 방글라데시 북부 및 동부 6개 지역을 강타,인적 피해와 함께 주택 및 차량이 대파되고 선박들이 전복되는 등 큰 재산피해도 입었다. 한편 11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 국경 부근 산악지방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신문들이 보도했으나 피해여부는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쿠르드족 안전지대」 건립 안팎

    ◎난민촌/제2의 「웨스트뱅크」 가능성/구호·자치 인정해도 「독립」관 거리/장기정착땐 중동분쟁의 새 불씨 우려 걸프전의 희생자 쿠르드 난민들을 위한 안전지대가 설치된다. 미군을 비롯한 영국·프랑스군은 이라크 북부 험준한 산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쿠르드 난민들을 위해 「안전한 천국」(Safe Heaven)의 건설에 나섰다. 쿠르드 난민들을 위한 안전지대는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자코 부근 및 모술 북부의 비교적 평탄하고 도로에서 가까우며 물공급과 배수가 원만한 지형적 조건을 갖춘 곳에 만들어진다. 미국은 6개 정도의 안전지역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곳에는 70여 만 명의 쿠르드 난민들이 수용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전지역 설치공사는 10일 내지 2주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돼 4월말경이면 쿠르드족들이 난민촌에 정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전지대 설치는 미국이 대이라크정책을 전환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미국은 당초 이라크 내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안전지대설치를 강력히 반대해왔었다. 그러나 세계여론의 압력과 쿠르드족 난민들의 상상을 초월한 처절한 참상이 연일 보도되면서 결국 부시 미 대통령은 안전지대 설치를 결정했다. 부시의 결정은 그러나 미국이 「또다른 베트남식 수렁」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당초 안전지대 설치를 반대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부시는 이라크 내전에 개입하게 되면 미군 주둔이 장기화되면서 걸프전의 극적인 승리가 퇘색할 것으로 우려해왔다. 부시의 꿈은 가능하면 빠른 시일내에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백악관안보담당보좌관도 쿠르드 난민들을 위한 안전지대는 제2의 요르단강 서안이 되어 또 다른 국제분쟁요인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는 또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쿠르드족 난민들이 안전지대로 몰려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이들까지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딕 체니 미 국방장관은 미국은 쿠르드족 난민들이 정착하면 그 통제와 운영을 빠른 시일내에 유엔과 기타 국제기구에 넘겨줄 것이라고밝혔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이 난민촌 운영에서 손을 떼기는 사실상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은 쿠르드 난민들의 보호를 위해 이라크정부와의 협조를 모색하고 있다. 이라크는 처음에 안전지대 설치를 내정간섭이라며 강력히 비난했으나 난민구조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라크군 지도자들은 19일 안전지대 설치를 총지휘하는 존 샬리 카시빌리 미군 중장과 회담했으며 이라크정부는 유엔과 난민지원을 위한 협정에 조인했다. 후세인 정권은 쿠르드족 난민과 반군들에 대해 화해제스처를 계속 써왔다. 이라크는 난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고 쿠르드족들에게 자치권 인정과 일정수의 의석을 할애할 것이라고 밝혔다. 쿠르드 반군은 이라크정부의 이 같은 제안을 검토하기 위해 정부군과 휴전에 합의했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러나 쿠르드족 난민문제가 쉽게 해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후세인 정권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쿠르드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악몽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도시 중산층들이 귀향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안전지대에서 영원히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국이나 유엔은 이들의 안전한 귀향길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쿠르드족들은 후세인이 집권하는 한 「안전한 천국」의 문을 나서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때문에 쿠르드족 난민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으며 그들의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 터키·이란 쿠르드 난민 수용/후세인 퇴진뒤 귀국조건 정착 허용

    【이시크베렌(터키)테헤란 AP 로이터 AFP 연합】 터키는 14일 이라크 접경 산악지대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이라크내 쿠르드족의 재정착을 위한 비상작전을 개시,1차로 수천 명을 터키내 난민수용소로 옮기기 시작했으며 이란도 5만명의 쿠르드족 난민은 이란의 성도 콤시에 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터키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쿠르드족 난민의 수가 최고 7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가운데 터키는 이날 미국과 함께 약 2만명의 쿠르드족 난민 재정착을 위한 긴급작전을 시작,해발 2천2백m의 험준한 산악지대인 이시크베렌에 모여든 16만명의 난민 중 일부를 터키 동남부 실로피시로 옮길 예정이다. 터키의 일간 후리예트지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투르구트 외잘 대통령에게 이라크정부가 전복될 경우 난민들이 귀국할 겻임을 보장한 뒤 터키가 이들의 입국을 허용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미군 병력 제1진 1백50명이 이날 실로피시의 부코이 캠프에 도착했는데 이 지역은 평상시 주로 메카로 순례여행을 떠나는 터키인 이슬람교도들을위한 휴식장소로 이번 구호작전에서 주요보급 거점으로 사용된다. 미 국무부는 이날 구호 관계자들의 추산으로는 매일 4백∼1천명의 쿠르드족 난민이 질병과 물부족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관리들은 매일 약 70내지 80대의 헬기를 동원,6백t의 구호품을 공수할 계획이지만 악천후와 험준한 지형 그리고 이 지역의 사회하부구조 취약성 등으로 이 같은 구호 노력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 쿠르드족/현대판 엑소더스 중동의 새 불씨로

    ◎이라크지역 난민 운명 어찌될까/이라크서 쫓기고… 터키선 입국 거부/“최악의 민족 재난” 여론속 미는 방관 3백50여 만 명에 이르는 이라크내 쿠르드족의 반란이 「1개월 천하」로 끝남에 따라 정부군의 보복학살을 피하기 위한 처절한 대탈출이 이뤄지고 있다. 터키와 이란 등 인접국들이 이들의 입국을 꺼려하는 가운데,눈 덮인 산악지대에 피신한 쿠르드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죽어가기 시작하는 참혹한 상황마저 벌어져 국제사회 최대의 인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들 쿠르드족은 지난 88년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할라비야 한 마을에서만 5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필사적으로 군대를 피해 도망치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잠옷 바람의 맨몸으로 집을 떠나 영하의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다. 탈출하는 쿠르드족과 동행한 영국 BBC방송의 톰 크레이버 기자는 3일 터키군 병사들이 터키 쪽으로 몰려오는 쿠르드족의 머리 위로 위협사격을 가해 이들을 통제하려 하고 있으며,『휠체어에탄 채 버려져 있는 다리 없는 남자와 산고로 얼굴이 뒤틀린 채 바위 틈에 몸을 숨기려는 여자,맨발로 눈 속에서 울고 있는 소년,잠옷 바람으로 집을 떠나 추위에 떨고 있는 노파를 보았다』고 말했다. 쿠르드족 대변인 제바리는 2일 밤 현재 20명의 어린이가 혹독한 추위로 숨졌다고 말했다. 최소한 20만명의 쿠르드족이 피난처를 구하고 있는 터키는 이들의 입국을 불허,국경봉쇄 조치를 계속하는 한편 구호대책을 포함해 이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한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했고 25만명 이상의 피난민을 받아들인 이란도 『금세기 사상 최악의 인간재난』이라고 인권에 대한 유엔의 무관심을 비난했으며,프랑스도 쿠르드족 민간인들에 대한 이라크 정부군의 잔인한 행동을 비난하는 유엔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나 미국을 비롯한 주요 강대국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다. 프랑스가 식량·의약품·담요·옷 등 1백50t 상당의 구호품을 터키와 이란 국경을 통해 쿠르드족에 전달할 예정이고 영국이 1천만달러의 긴급구호지원금을 약속했을 뿐이다. 미국은 이라크 내전에 대한 불개입방침을 거듭 재확인하면서 유엔의 공식휴전결의가 승인된 뒤 난민들에 대한 긴급지원을 고려하겠다는 느긋한 태도다. 이라크 영토의 5분의1을 점령하고 있고 이라크에 대해 실질적으로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이 이같이 쿠르드족에 대한 후세인의 무자비한 진압을 묵인한 채 수수방관하고 있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쿠르드족의 독립은 이라크의 분열을 의미하고 터키·이란·시리아·소련 등 인접국들내에 퍼져 있는 쿠르드족의 독립의욕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중동지역의 새로운 질서 정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라크 남부 시아파 반군에 대해서도 미국은 이들의 득세가 결국은 이라크가 이란의 회교혁명 수출을 위한 전진기지화할 것으로 우려했었다. 말하자면 미국은 후세인이 계속 집권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이라크의 레바논화나 시아파 또는 쿠르드족을 집권대체세력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중동 정정불안의 불씨를 키우기는 더더욱 원치 않는다는 얘기다. 현재로서는 후세인을 대체할 마음내키는 상대가 없기 때문에 일단 반란이 진압되고 난 뒤 이라크 군부내에서 후세인을 축출해주기를 기다려보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반란이 장기화될 경우 이라크 정부군 내부의 단결을 공고히 해 오히려 후세인의 입지가 강화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라크가 아직도 패전의 후유증에 시달려 민심이 흉흉한 상태에서 하루빨리 내전이 수습되는 것이 군부내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데 유리한 여건을 제공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내전에 개입하지 않는 표면상의 이유로 내정불간섭 원칙을 내세우고 있으나 이라크국민들로 하여금 후세인 타도투쟁에 나서도록 부추겨놓고 이제와서 무책임하게 수수방관한다는 비난을 의식,뒤늦게 쿠르드 반군 대표들을 워싱턴으로 불러 그들의 견해를 듣는 등 형식적인 여론무마작업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가 화학무기와 스커드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할 것 등을 조건으로 제시하며 유엔 안보리가 3일 채택한 걸프전 정식종전결의안과 전쟁피해 보상 및 경제제재등을 무기로 후세인에 대한 퇴진압력을 가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지난 2월말 이라크의 「항복선언」과 때를 맞춰 거사,한때 북부 쿠르디스탄지역의 95%까지 장악했던 쿠르드족은 과거 71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강대국의 「약속 불이행」으로 독립의 꿈을 묻어둔 채 비참한 운명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게 됐다. 아리안 계통인 쿠르드족은 선사시대부터 쿠르디스탄지역에 거주해오다 16세기초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거쳐 1차대전 종전 후인 1920년 세브르조약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았으나 이행되지 않은 이래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벌여왔다. 독립국가를 갖지 못한 지구상 최대 민족인 쿠르드족은 터키에 1천만명,이란에 5백만명,이라크에 3백50만명,시리아에 60만명,소련에 30만명이 살고 있다.
  • 쿠웨이트 레지스탕스 활약 컸다/위성통해 다국군에 군사정보 제공도

    이라크군 점령기간중 은밀한 정보수집 및 게릴라식 공격활동을 전개했던 쿠웨이트 저항세력 본거지에는 위성송수신용 접시안테나가 발코니에 널린 빨래감 뒤에 교묘히 은닉되어 있었다. 이라크군에 발견됐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고문끝에 처형당했을 이 첨단 송수신 장비들이 바로 이라크군 치하 7개월동안 쿠웨이트 저항세력들에게 총이나 폭발물만큼이나 중요했던 또하나의 무기였다. 쿠웨이트 저항세력 사령부는 쿠웨이트시 교외의 한 가로변에서 여러 공터와 골목길을 지나 비밀출입문과 계단을 헤매는 등 미로같이 복잡한 비밀통로를 거쳐서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라크군 점령기간중 다른 저항세력과 함께 이라크군에 대한 공격활동을 전개하면서 다국적군측에 정보를 전해왔던 파드대령은 『우리는 다국적군측과 매일 팩시를 통해 작전계획과 첩보들을 교환해왔다』고 공개했다. 그러나 쿠웨이트 저항세력들의 가장 큰 공로는 이같은 군사적인 면보다도 이라크군 코밑에서 암시장을 운영해 쿠웨이트인들을 굶어죽지 않도록 도운 일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저항세력 배후에는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조직들이 구성돼 이라크군의 가택수색동향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고 이라크군의 묵인아래 병원과 전력시설 및 급수시설 근무를 자원,시설을 유지시키는 한편 집없는 쿠웨이트인들에 대한 구호활동도 벌였다. 이들에 의해 운영되는 암시장 상점들은 이라크 디나르화로 생필품들을 판매,굶주림에 시달리는 쿠웨이트인들에게 재배급됐으며 주민들에 대한 생계자금 융통을 위해 이라크화가 자루에 담겨 밀반입되기도 했다.
  • “인해전술시대는 갔다”/중국,걸프전 분석/홍콩=우홍제(특파원코너)

    ◎북경·홍콩 언론에 나타난 반응/“모택동식 밀어붙이기는 집단 자살행위”… 첨단무기에 경탄/“패트리어트의 스커드격퇴는 예술”/3백만 해방군의 질향상 필요성 절감 걸프지역에서 미군이 발휘하고 있는 첨단군사기술은 과거 한국전쟁에서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중국의 인민해방군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걸프전쟁에 관해 중국은 미국과 이라크 양측에 자제와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고 공식적으로 중립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면서 중재에 나설 의향을 비추고 있다. 이 전쟁과 관련된 중국측 언론의 보도내용도 정치적 색채가 강한 것은 될 수 있는 한 피하려는 인상이 짙은 것 같다. 그러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국이 보이고 있는 관점은 대단하며 특히 미군의 첨단과학 병기활약에 대해선 우호적이고 감탄섞인 논평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중국측 언론은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느끼는 이해관계와는 별도로 전문적인 군사기술의 관점에서 걸프전쟁을 다루고 있으며 관영 신화사 통신의 경우미군이 유명한 중국 고대의 병법가인 손자의 전술을 연구했다고 보도했다. 또 홍콩의 중국계 신문인 대공보 문회보 등은 미군의 패트리어트미사일을 「애국자 도탄」으로 표기하는 등 찬미성향의 보도를 하고 있다. 중국 군부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해방군보는 해설기사를 통해 『미군의 패트리어트미사일이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을 맞춰 떨어뜨리는 것은 매우 아름답기까지 하며 우수하고 성공적인 미사일대 미사일의 전쟁기술』이라고 말한 것으로 지난 6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지가 밝혔다. 이 기사는 이밖에도 미 F117 A전투기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 등의 우수성과 이를 정확히 다룰줄 아는 미군장교 및 병사들의 높은 교육수준을 칭찬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도 전에 이라크에 「홍기」라는 미사일을 판매한 적이 있으나 중구계 언론이 이 사실에 대해 언급치 않고 있음은 물론이다. 중국측이 특히 군사기술의 시각에서 걸프전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크게 세가지 사실을 꼽고 있다. 첫째 3백만에 이르는 중국인민해방군은 인력규모나 장비 및 정신력에서 이라크군대와 흡사한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이라크가 정규군 1백만,예비군 85만명 등 2백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과 첨단과학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전통적인 재래식 화력에 의존하는 것이나 병사 개개인의 용감성에 프리미엄을 두는 점 등은 중국과 별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중국군은 한국전쟁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해전술로 미군을 곤경에 빠지게 했고 89년 6월의 천안문사태 때에는 시위군중에 의해 봉쇄당한 병력들이 며칠동안의 굶주림에도 끄떡없이 견디어 내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비는 낡고 오래된 것이 많아서 지난 79년 하노이정권의 월남군과 벌인 국경전투에선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현대장비로 무장한 상대방에게 적잖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지적되는 것은 중국군이 아직도 모택동의 전술에만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장교 사병할것 없이 충성을 다해 모의 전술을 익히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만약 2차대전 당시의 미국 조지 패튼이나 독일 롬멜장군에 관한 책을 읽으면 서구식을 흉내낸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적군을 소수단위로 분리시킨 뒤 대규모 아군 병력으로 각개 격파하는 식의 모전술은 과거 40년대에나 성공할 확률이 많았을뿐 오늘날의 전장에서는 집단자살의 결과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들고 있는 것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교육수준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인만큼 대부분의 사병이 농촌 등 벽지에서 징집되고 문맹률도 20%에 이르는 데다 장교들도 첨단과학기술에 관한 기초지식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밖에 중국은 지난해 북경 아시안게임때 금메달을 휩쓸었던 그들의 전통무예 우슈(무술)를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열심히 익히도록 강조하고 있지만 각종 최첨단과학병기로 무장되는 현대전투에서 그같은 몸싸움 기술이 과연 어느정도의 승전효과를 가져올수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게 전문가들의 풀이이다. 따라서 어느나라건 국방력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그동안제3세계 지도자임을 자처하고 군사대국임을 은연중 과시해온 중국이 이번 걸프전쟁을 통해 군사력의 양적 규모 못지 않게 질적 개선이 시급하다는 교훈을 깊이 새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 본지 창간기념일에 초대된 조성수화백의 “자화상”

    ◎“「애환 45년」 딛고 서울신문처럼 거듭 났죠”/“45년 11월22일생” 동갑내기의 「인생역정」/부산 피난시절의 역경 패기로 극복/「총 2백만부 성장」,오늘의 나와 비슷/“정상의 신문답게 사회 발전의 밑거름 되길” 조국이 광복되던 해인 45년 11월22일에 창간된 서울신문은 1만6천4백36일 동안 지령 14169호라는 굵직한 나이테를 새기면서 영향력 있는 장년신문으로 성장했다. 급변하고 소용돌이치던 지난 45년동안 서울신문은 갖은 풍상과 기복속에서 영광과 좌절,시련과 희망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왔다. 서울신문과 같은해 같은달 같은날에 태어난 사람은 현재 전국에 6백27명(남자 3백57명,여자 2백70명). 그들도 서울신문과 똑같은 역사의 궤적속에서 혼란과 전쟁,가난의 아픔을 이겨내고 이제 우리사회의 성실하고 믿음직한 장년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화가 조성수씨(45·서울 강동구 명일2동 240의4·소화미술학원장)는 21일 서울신문을 찾아 온갖 어려움을 딛고 최신시설과 영향력을 자랑하며 국내 정상에 우뚝선 서울신문의 성장에 흐뭇해했다. 서울신문이 해방을 계기로 새로 창간되었듯이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난 조씨는 이듬해인 46년 초 만주 철도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 조석창씨(75)가 귀국하게 되어 서울에서 자라게 됐다. 조씨가 미처 철이 들기도 전인 6살일때 6·25가 일어나 조씨의 누나와 여동생 및 남동생 등 일가족 6명은 피란길에 올라 부산으로 갔다. 아직 서울생활에서 제대로 터전을 닦지 못한 조씨 가족들이 전쟁때문에 피란길에 올라 온갖 곤욕을 치른 것처럼 창간한지 5년이 채 못된 서울신문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서울신문 직원들은 당시 북괴군의 포성이 코앞에서 울리고 있는데도 전쟁발발 3일째인 28일 새벽2시30분까지 무려 12차례나 호외를 발행하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사회부장 이종석씨 등 7명이 납북되었고 유일한 한국의 종군기자였던 한규호씨가 인민군에 납치되어 살해됐다. 또한 인쇄시설 등이 2차례나 파괴·해체당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란살이 속에서 모진 고생을 겪었듯이 조씨 일가족은 처음 영도 남항동의 등대 근처 바닷가에서천막을 치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지내야 했고 조씨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초량동과 부평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날품팔이와 행상을 하며 힘겹게 연명했다. 그러나 서울신문 사원들은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51년 4월3일 서울에 상경,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전선이 밀리기까지 6일부터 24일까지 19일동안 아직도 한국언론사에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진중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조씨는 피란지인 부산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60년 다시 서울로 상경했으나 조그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61년까지 2년동안 온 식구가 굶기를 밥먹듯 하는 가난에 시달렸다. 서울신문도 60년 4·19 학생의거의 와중에서 윤전기와 사옥이 불탄 뒤 극심한 재정난으로 4월26일부터 7월25일까지 휴간할 수 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후유증으로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1주일전부터 12월19일까지 장기간 휴간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서울신문은 60년 7월27일 조·석간제를 실시하고 67년 3월13일부터는 활자를 새로 교체하며 전면적인 지면개혁을 단행했으며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지면을 한글전용으로 제작했다. 또 창간 25주년을 맞던 70년에는 최신고속 자동윤전기 2대를 도입하여 종전의 시간당 5만부 인쇄에서 12만부를 인쇄할 수 있는 최신 시설로 끌어 올렸다. 서울신문이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사세확장에 땀흘릴 무렵 조씨는 그동안의 실의를 떨치고 중동고교에 수석으로 입학,장학금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탈바꿈했다. 서강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조씨는 전공보다는 어릴 때 부터의 꿈이었던 미술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80년 초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5년동안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했다. 서울신문은 그 사이 발전을 거듭하여 80년 12월2일부터 조간신문으로 바뀌고 85년 1월에는 숙원이었던 지상 22층의 새 사옥을 마련,한국언론사상 최초의 컴퓨터로 신문을 발행하는 시스템(CTS)을 갖추었고 같은해 6월22일에는 자매지인 스포츠서울을 창간,더욱 사세를 떨치게 됐다. 서울신문이 제2의 도약을 하던 해인 85년 조씨는 미술공부를 마치고 귀국,명일동에 미술학원을 열고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2년6개월 뒤에는 같은 동네에서 4층 건물을 짓고 새로 이사하여 학원운영과 창작활동을 하며 딸 셋과 부인 등 5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조씨는 『서울신문의 발자취와 나 자신의 행로가 닮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면서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우리 사회를 밝고 살기좋게 만들어가는 횃불이 돼달라』고 기원했다.
  • 미서 「낭비추방」 캠페인 확산(세계의 사회면)

    ◎“남은 음식 극빈자에 보내기” 큰 호응/손님 손대지 않은 깨끗한 것만 모아/레스토랑 등서 수천명에 끼니 제공 「남은 음식을 빈민들에게!」 워싱턴에 본부를 둔 「셰어 아워 스트렝스」(우리들의 힘을 나눠갖자)그룹의 음식낭비 추방캠페인이 요즘 미국 전역에서 호응을 얻어가고 있다. 이 캠페인 덕택에 현재 미국내 40여 도시에서 남은 음식을 재활용하는 프로그램이 시행돼 집없이 떠돌아 다니며 굶주림에 시달리던 수천명의 극빈자들이 이제는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고 음식점으로부터 끼니를 제공받고 있다. 캠페인 내용은 호텔 등의 연회장과 레스토랑 등에서 준비했다가 손님이 손대지 않은채 고스란히 남은 음식물을 수거,극빈자 보호기관을 통해 나눠주자는 것. 그렇다고 해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까지 빈민들에게 보내는 것은 아니다. 마요네즈가 들어간 샐러드나 해산물등 상하기 쉬운 음식은 일체 허용하지 않는 등 나름대로 엄격한 위생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지난 87년 시작된 어틀랜터 음식은행 프로그램은 현재 레스토랑ㆍ연회주선회사ㆍ호텔ㆍ대형카페테리아ㆍ학교ㆍ병원 등 1백50개 음식기탁기관을 확보해놓고 매월 평균 15t의 재고음식을 극빈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이사인 롭 존슨씨는 대형호텔이나 연회주선회사 등 음식기탁자 자신들도 엄청나게 남아도는 음식량에 놀랐을 정도라고 말한다. 버지니아주 중부지역 음식은행은 운영 첫달인 지난 9월에만 7천끼니분인 3.5t의 음식물을 9개구호기관을 통해 분배했다. 음식낭비 추방캠페인 추진본부의 제니퍼 해들리 기획관은 『거주지 빈민구호기관에 공급할 수 있는데도 이 많은 훌륭한 음식을 쓰레기통에 쏟아 붓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면서 『배고픈 사람들이긴해도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찾아먹기 보다는 음식점에서 제공받는게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러한 미덕은 미국이 환경보호 및 자원재활용문제에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시사이며 이는 음식에도 적용된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음식점에서 제공한 남은 음식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키는 사람들로부터 혹시 손해배상이나 청구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미국내 50개주 전역에 걸쳐 선의의 음식기탁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제정돼 있기도 하다.
  • 이스라엘에 주택난/재소유태인 올 10만 유입(세계의 사회면)

    ◎집수요 급증,공급 25%뿐/수만명이 집단텐트촌 신세 못면해 이스라엘 사회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찾아든 형제들로 적지않은 갈등을 겪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소련에서 이주해 온 「소비에트 유대인」은 약 5만여명. 그리고 올해 안에 들어닥칠 인원은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스라엘은 「귀환법」에 따라 유대인은 누구나 이스라엘 도착 즉시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다. 문제는 새로 시민이 된 「소비에트」형제들을 따뜻이 맞아들일 정도로 준비가 안돼 있다는 점. 특히 이들이 당장 거주할 집이 부족한 것이 사회적 마찰을 빚고 있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약8만여채의 주택이 필요하지만 이스라엘정부의 주택공급계획은 2만여채에 불과한 실정. 2만여채만 해도 평소에는 충분한 양이었지만 15만에 달하는 새 「형제」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정부는 이주민 1인당 1만1천달러를 지급하는 이외에는 특별한 이주민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게다가 바로 이 이주비가 집값을 앙등시키고 있어 또 다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집주인들이 집은 없지만 돈은 많은 「소비에트 형제」들을 들이려고 가난한 세입자를 내쫓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는 것. 내쫓긴 세입자들은 70여군데에 텐트촌을 마련해 살면서 주택문제 해결 압력을 넣고 있어 사회적 마찰의 파장은 이래저래 넓게 퍼져 나갈 듯. 한편 「소비에트 형제」들에 가려 주목을 끌고 있지는 못하지만 6년전 에티오피아로부터 구출돼 온 「검은 유대인」들의 사회적응 문제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현안. 팔랴사라고 불리는 이들은 부모형제를 굶주림의 땅에 버려 뒀다는 죄의식과 전통으로부터 단절된데서 오는 사회적 부적응의 문제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에티오피아에 남은 가족들과의 재회뿐이라고 사회심리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 소비도 사회적 규범이다/권태준 서울대 환경대학원교수(세평)

    인류역사상 보통사람들의 소비행태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한 삼사십년밖에 되지 않는다. 「대중소비 시대」니 「풍요로운 사회」니 하는 말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선진국들의 대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한 것이 지난 삼사십년 사이였다. 이런 나라들 가운데 2차대전의 전승국들은 한 십년 정도 앞섰고 독일 일본같은 패전국은 십여년 정도 뒤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대중적 소비의 경험은 이제 겨우 한 세대 남짓하거나 미처 반세기도 안됨을 뜻한다. ○대중적 소비경험 적어 그전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의 인류역사에서는 보통사람들은 노동과 생산의 미덕만을 배워 왔고,소비의 재미는 특별한 계급,즉 귀족 계급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이런 계급을 일은 하지 아니하고 쓰기만 하는 『유한계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대에 백성들의 소비생활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 이상은 백성들의 소관사가 아니었다. 멋이니 맛이니,절제니 풍류니 하는것은 유한 계층의 「멋쟁이」들의 관심사였다. 보통사람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소비의 절제는 절제의 미가 아니고 앞날에 예상되는 굶주림에 대비하도록 하는 생존의 연장책으로서였다. 이래서 우리를 포함한 인류의 소비문화는 문자 그대로 양극화되어 있었다. 한편에는 「먹고 살아가는」 소비생활이 있었을 뿐이었고 다른 한편에는 「쓰고 치장하는」 과시 소비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가 찬란한 문화유적이라고 아끼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유한계급의 한가로운 소비유산이다. 이제 신분계급제가 없어진 마당에선 소비의 수단인 돈의 양만이 소비행태를 좌우하는 잣대가 되었다. 이런 처지에 우리 모두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소비생활에 관해서 배우는 바가 없다. 소비는 될수있는 대로 안하는 것이 미덕이고,생존을 위해서 또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에 그칠 일이라고만 배운다. 이렇게밖에 배우지 못한 터에 조금이라도 남는 돈이 생기면­즉 돈의 억제력이 조금이라고 약해지면­어찌 할 바를모른다. 너나 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견물생심이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의 억제력 이외에 다른 어떤 정신적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소비행태를 통틀어 「충동적 구매」 행태라고들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사회에는 구석구석,하루종일 우리 감각을 자극하는 충동이 만연해 있다. 텔레비전ㆍ신문ㆍ잡지들의 자극적인 광고들,그리고도 모자란듯 그 많은 간판들,하루 한순간도 소비의 충동을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지 않은가. 「과소비」를 탓하는 논설과 그 바로 밑에 화려하게 그려놓은 「최신 패션」광고는 독자와 시청자들을 한층 더 혼란시키고 있을 뿐이다. 「적정소비」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없는 곳에 「과소비」에 대한 경고적 수사가 설득력이 있기 어렵다. 계층간의 「위화감」조성,근로의식의 약화,재생산을 위한 저축의 필요 등의 수사는 모두 소비의 문제에 정면으로 답하고 있지 않다. 고작 소비의 양,또는 시기의 유보를 권하고 있을 뿐이다. 정녕 인간다운 생활에는 보람찬 노동 뿐만 아니고 소비의 재미도 한몫을 해야 할 것이라면 소비의양과 시기보다 그 질이 먼저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야말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자본주의 경제의 「인간화」과정에 있어 으뜸되는 과제이다. ○소비문화 부재가 문제 나라경제의 내일의 「선진화」를 위해 오늘의 소비를 좀 참으라는 논리도 선진적 소비의 질에 대한 기대로서 설득력이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소비문화의 사회학습은 이른바 지도층의 물량적 소비 절제만으로 이끌어질 일이 아니고 그들 생활의 모든 면에서의 문화적 성숙과 도량에 따른다. 이런 문화적 성숙과 도량 없이 누가 과연 남아 도는 돈쓰기 충동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며 누군들 「이웃사촌 땅사는데 배 아프지 않을」사람 있겠는가.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 “말라빠진 감정이 문제로다”/윤남중 새순교회 담임목사(서울시론)

    ◎보리고개ㆍ꿀꿀이죽이 어제 같은데… 「요즘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포악해졌을까?」하고 소위 기성세대들이 모이면 걱정한다. 10대들의 성폭행도 그 도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각종 범죄형태는 더욱 잔혹해지고 있다. 데모를 했다 하면 투석과 화염병 투척 등 파괴와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인상을 보인다. 아무리 자기들의 이해관계가 충족되지 않는다 해서 스승을 감금ㆍ삭발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기학교 총장을 내쫓을 수가 있을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 가정교육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아니면 학교교육이 잘못되었거나 사회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연로하신 분들은 『배가 불러서 그래,사흘을 굶겨 놓으면 자기를 알고 세상을 알게 되어 감히 그런 짓은 엄두도 못낼거야!』라고 탄식한다. 구세대적인 관념일지 모르나 옛날 배곯던 시대엔 감히 오늘날과 같은 행동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우리 민족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홍수가 나고 재난이 났다하면 돈과 쌀과 의류를 언론기관에 기꺼이 보내는 인정있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도 너도 나도 줄을 이어 주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인정이 있는 백성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파괴적인 인성이 정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의 눈을 절대빈곤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지구촌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돌려야 할 때이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Food For the Hungry International지부)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지금 지구촌에서는 1분간에 24명(그중에 18명이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1시간에 1천4백명,하루에 3만5천명,1년에 1천3백만명,그러니까 서울인구 정도가 먹지못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1983년에서 1985년 3년사이에 후진국에서 전체인구의 21%인 5억1천2백만명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다. 현재로는 7억 이상이 굶주리고 있다. 매년 1천8백명에서 2천만명이 배고파 죽어가고 있는데 그중 1천4백만명이 어린아이들이다. 이것은 매일 4만명의 어린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일동안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피해보다 더 많은 셈이다. 이와 같이 빈곤의 가장 잔인한 대가는 어린이들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이다. 소득이 점점 줄어가지만 가족들의 규모는 커져만 가고 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볼때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절대빈곤에 있는 사람의 3분의2가량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루 4만명 굶어죽어 질병과 충분한 영양 및 깨끗한 음료수의 부족으로 만신창이가 되기 때문에 어린이들 가운데 3분의1은 다섯살이 되기도 전에 죽어간다. 살아남은 아이들 가운데 많은 수는 생후 6개월부터 2년 사이의 중요한 시기에 만성적으로 굶주린 결과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고 있다. 1989년도 UNICEF(유엔국제아동구호기금) 보고서에 의하면 한 개발도상국가에서 발전이 주춤해지거나 정체된 결과 지난 12개월 동안 적어도 50만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었다. 이러한 기근지역의 반 이상은 아시아에 분포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숫적인 면에서는 적지만 굶주린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특히 가뭄과 전쟁피해지역은 더 그렇다. 더욱이 이 지역들은 비상식량이나 다른 생필품들이 거의 닿지 못하는 지역들이다. 그래서이 문제로 많은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여 판자촌과 빈민가에 정착한다. 후진국에서는 전체 3분의2가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빈민국의 특징은 빈곤과 비위생과 높은 실업상태인데 가난은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문제는 아니다. 가난이 그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땅에 기어다니는 생물체는 다 잡아먹는다고 한다. 국제기아대책기구 총재 야마모리 데쓰나오 박사가 페루에 갔을때 어느 아기 엄마가 포장용 상자를 잘게 찢어서 끓인물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풀기와 펄프 원료가 국물처럼 보였기 때문에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필자의 제자중 월남인 바우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보트 피플들이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너무 배가 고파 제비뽑기를 해서 노약자를 잡아먹기로 했는데 그 희생자의 딸이 『제발 아버지의 눈만은… 』하고 절규하더란다.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도 한때 굶주렸던 민족이었다. 50대이상 나이의 사람들은 왜정때보리고개와 강제공출후엔 콩깨묵ㆍ소나무껍질ㆍ풀뿌리 등으로 연명했고 해방후와 6ㆍ25전쟁때 꿀꿀이 죽과 미국에서 보내온 구제물자ㆍ시레이션 등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잡지나 TV화면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특히 뼈만 앙상하고 머리통은 크고 눈망울이 툭 튀어나오고 눈꼽이 끼고 온몸은 헐었는데 파리떼가 붙었으나 쫓을 기운조차 없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볼때 우리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전후세대들은 그 참상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때 『이 말라빠진 감정이 바로 문제로다!』라고 탄식한다. 우리들의 냉담ㆍ무관심ㆍ몰인정ㆍ무자비가 생명경시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최근들어 전후세대들이 해외여행을 많이 하는데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 등 대개 잘사는 나라들을 보기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을 느끼지 못하고 온다. 오히려 사치와 과소비 풍조를 도입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동남아나 남미와 아프리카 등 앞에서 말한 가난한 나라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착한 사마리아인 필요 얼마전 일본의 TV대담에서 청소년들을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보다는 동남아나 아프리카 여행을 보내어 해이해진 일본정신을 뜯어 고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바른 자녀교육을 위해서 동정심과 인정을 길러주기 위해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아시아의 기아현장을 구경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이웃이 서로 돕고 사랑하고 협력하는 정신을 자연스럽게 심어 주어야 한다. 불한당에 의해 매맞고 상하고 찢겨 고통당하는 나그네를 보고도 못본체 하고 가버린 레위사람과 제사장보다는 상처를 싸매주고 친절히 돌봐준 착한 사마리아인이 나타나야 할 사회이다. 무엇보다 삭막한 우리 사회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요구된다. 긍휼이란 함께 고통을 경험한다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산상보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방국가에 의해 도움받은 우리가 이제 긍휼을 베풀 때이다. 우리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나라들을 도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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