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굶주림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청년 자립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우선 처리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전기차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30대 구속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300
  • 미의 군축요구 계기로 본 북 군사비 분석

    ◎군사비 5%만 줄여도 식량난 해결/3억달러 전용 190만t 구입가능/비축 군량 절반 풀어도 기근면해 북한당국은 미국이 지난 15일 식량난 타개책으로 군비감축을 촉구하고 나오자 찔끔했을 것이다.수많은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자조·자구노력은 하지않고 외국에 도움의 손길만 요청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기 때문이다.군축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나온 미국측의 논리는 한마디로 「식량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해 체제가 무너질 위기에 놓여있는데 1백만 군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이 이번에 북한에 촉구한 군축은 탈냉전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막대한 예산을 들여 군사력을 계속 증강해온 북한이 남북한 상호감군과 불가침협정체결 등을 통해 군비를 줄여나간다면 얼마든지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우선 간단히 계산해서 군사비를 5%만 줄이더라도 이 자금으로 부족한 곡물을 수입하면 북한 주민전체가 1년간 굶주리지 않고 지낼수 있게 된다.북한의 군사예산이 얼마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있으나 96년말 현재 60억달러를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지난해 11월 통일원이 내놓은 남북한 경제사회 비교 자료에 따르면 지난 94년의 북한 군사비는 국민총생산(GNP)의 27.2%인 57억6천만달러였다.북한은 남한의 GNP에 대한 군사비 비중이 3% 수준인데 반해 무려 그 9배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전차 3천8백대,야포 1만1천문,전투함 4백30척,잠수함 35척,전투기 8백40대의 전력에 1백5만5천명의 병력으로 이뤄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이 군사비를 5% 줄일 경우 여기서 전용 가능한 재원은 3억달러에 이른다.지난 19일 현재 국제곡물시세에 의해 이 자금으로 구입가능한 곡물량을 곡종별로 보면 ▲쌀의 경우 미국산 72만t,태국산은 95만t ▲옥수수 2백36만t ▲밀 1백77만t이다.쌀과 잡곡을 3대7의 비율로 섞어먹든가 쌀과 밀가루를 3대7의 비율로 먹는다면 1백90만t까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식량이 어느정도 부족하느냐는 것이다.북한은 외국의 원조를 더 많이 얻어내기 위해 부족량을 부풀리고 있지만 관계당국은2백만t 수준일 것으로 보고 있다.지난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3자설명회 후속회의에서 북한측은 올해말까지 2백50만t의 식량이 필요하다면서 1백만t은 자체조달이 가능하나 나머지 1백50만t은 국제사회로 부터 원조를 받아야한다고 말해 식량부족량이 1백50만t 안팎임을 시사했다.그렇다면 군사비를 줄여 마련되는 자금만으로도 식량난 해결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북한 군이 비축하고 있는 군량미를 절반만이라도 풀면 추수기까지는 북한 주민들이 견뎌나갈수 있을 것으로 우리 군당국은 보고 있다.현재 관계당국이 추정하고 있는 비축 군량비는 약 1백만t.지난해 12월 김정일이 군량미도 바닥이 났다고한 것은 곡물모으기를 독려한 것일뿐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최악의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은 현재 먹는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다.외부로부터의 침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부요인에 의한 붕괴인 것이다.북한 지도부는 북한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주적으로 삼고 있는 남한이 아니라 식량난이라는 점을명심해 더 늦기전에 군비삭감과 군량비 전용으로 북한주민들의 굶주림을 막는 자조·자구노력부터 해야 할 것이다.
  • 식량지원 북 주민이 알게하자/김주영 작가(서울광장)

    북한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그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익히 알고 있었다.몇년전 소설쓰기의 답사를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나 중류의 국경선 일대를 수차에 걸쳐 다녀본 적이 있었다.그 답사 경험에 의하면 북한은 95년과 96년의 치명적이었던 수해이전 92년이나 93년경부터 식량부족 사태가 심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중국의 집안과 북한의 만포가 마주보고 있는 압록강 한가운데는 조그만 섬이 하나있다.그 섬은 북한의 영토인데,배를 타고 그 섬을 관찰해 보았을때는 섬 전체가 옥수수밭이었다.그런데 수확기였던 그때 옥수수밭에는 수확할 옥수수가 보이지 않았다.식량부족을 겪고있던 그들은 옥수수대에서 옥수수 싹이 나오는대로 꺾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수확기에는 수확할 옥수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집안에 살고있는 중국인들의 말이었으니까 그건 확실하고 또 그런 정상이 94년 이전의 일이기도 하였다.그것은 북한이 식량부족사태를 맞게된 것이 2년에 걸친 수해의 타격뿐만 아니라,그들의 농업정책에 구조적 함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여름이 되면 양쪽 강안에 많은 주민들이 나와서 목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있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는데,가까이 다가가서 보노라면 북한주민들의 헐벗은 모습이란 가슴이 찡할 정도다.그리고 담배 피는 사람조차 볼수 없다.중국인들이 탄 배가 다가가면 손짓으로 담배를 달라는 아이들의 요구를 흔히 보게된다.그리고 그것이 거절당했을때 보여주었던 아이들의 전투적인 행위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굶주린 모습 가슴 아파 이유야 어쨌든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에 우리들은 너나 할것없이 가슴아파하고 있고,그들의 굶주림을 덜게 만들 방법들을 찾고 있다.굶주린다는 일차적인 문제와 마주치게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비겁하게 된다.그런데 그것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또한 안쓰럽기 짝이 없다. 민간단체와 종교단체들이 모금운동을 벌여 그들에게 식량을 원조하자는 열기가 확산되고 있다.그러한 과정에서 남한의 곡식을 사서 보내자는 여론도 있고,혹은 연변의 옥수수를 사서 손쉬운 경로로 보내자는 주장도 있고,또는 종교인들이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그 곡식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혹은 그들의 군량미를 푼다면 주민들의 아사사태를 막을 수도 있다는 진단결과도 있다.이러한 여러 갈래의 주장과 진단들이 저마다 어떤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식량원조에 딜레마가 존재한다.그리고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북한 당국이 보여주는 여러 측면의 부정적인 요소들 때문에 발벗고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하고 있을 수도 없는 곤경에 처해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몇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고 생각된다.첫번째 일로는 남한의 곡식을 구입하여 선박편으로 실어보내든 연변의 옥수수를 대량 구입하여 보내든 그 방법에 구애받지는 않더라도 그 곡식을 받아야할 북한 주민들이 그것이 남한의 주민들이 보낸 곡식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생색을 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주장에는 생색 이상의 무엇이 있다.그러나 북한 당국은 그것을 막아오고 있다. ○원조창구 단일화해야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제지하고 있다.그런데 북한 당국의 그런 단호한 태도에는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선 국민들은 굶어죽어도 좋다는 배타적인 논리에서 나온 살의가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북한은 이 시점까지 배급이라는 식량운영제도를 가지고 그들의 국민들을 통솔하고 다스려왔다.그렇기 때문에 구호식량 문제,특히 남한에서 왔다는 식량을 국민들이 알았을때 보여줄 불신과 괴리감을 북한 당국은 두려워하는 것이다.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대로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우리들이 갖고 있는 순수성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식량을 원조하려는 사회단체 혹은 종교단체들이 중구난방식의 주장이 난무해서는 우리들에게 정서적 혼란을 야기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통일된 주장의 유지가 필요하다.
  • 북한 어린이(외언내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사과같이 붉은 볼.그리고 해맑은 웃음.사진속의 어린이들은 귀엽고 건강했다.촌스럽지만 깨끗이 갈무리한 옷과 그 천진한 표정은 60년대 우리 시골 아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지난 96년 9월 유니세프의 태국·말레이시아 지역사무소 안토니 휴엣 북한국장이 북한을 방문하고 서울에 들러 언론인 초청 간담회에서 공개한 북한 어린이 사진이었다.그해 여름 북한을 할퀸 수해지역을 돌아 보았다는 휴엣 국장은 북한 어린이들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그 사진은 기자들을 어리둥절 하게 만들었고 휴엣 국장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기묘한 정경이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처럼 참혹한 외관을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북한 어린이들의 영양실조는 심각하다.발육과 지능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다.한국인 특유의 희생정신 때문에 부모들은 굶으면서도 아이들은 굶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강가에서 몸을 씻는 어른들이 갈비뼈만 앙상할 정도로 마른것을 많이 보았다.북한 어린이들이 건강해 보이는 것은 사진의 한계다…』 휴엣 국장이 다녀간지 채 1년도 안됐는데 「참혹한」 북한 어린이 사진이 연일 신문과 방송에 나오고 있다.파리가 달라 붙는데도 무표정한 아프리카 어린이의 비참한 모습에 거의 육박한 사진이다. 이번에 북한을 다녀 온 미국 USA 투데이의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북한의 기아상태는 다른 나라들의 그것보다 난해하고 미묘하다.북한은 자존심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식량지원을 구걸하는 대신 고통분담 차원에서 배급량을 줄여왔다』 북한 어린이 사진들은 한보사태로 답답해진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한다.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자존심」을 세운 어리석은 북한 정권에게 분노가 치민다.
  • 대북 쌀지원은 질서있게(사설)

    정부가 31일 민간차원의 대북지원 품목에서 그동안 제외해온 쌀을 지원대상에 포함시키고 경제단체들의 지원활동도 허용하는 등 대북지원 유화조치를 발표했다.이로써 95년15만t의 쌀을 북한에 보낸이래 사실상 중단했던 대북 식량지원이 쌀을 포함해 다시 본격화하게 됐다. 정부차원의 본격적인 지원은 아니라고해도 우리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다는 것은 당연하다.그런점에서 우리는 정부의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북한을 돕는 일이 과연 잘된 일인가 일말의 의문이 남는것도 사실이다.첫째는 우리의 식량지원을 북한당국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북한의 배고픈 동포들에게 곧바로 돌아갈 것인가하는 염려 때문이다. 95년 쌀을 싣고 북한에 갔던 배에서 태극기가 끌어내려졌던 사건을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따라서 이번에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나 군량미로 전용될 가능성 같은 것을 차단하는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더구나 이번 쌀지원은 우리가 넉넉해서 주는 것도 아니다.우리도 금년에 7만5천t의 쌀을 수입해야 하는 형편이다. 또 지원이 경쟁적으로 되거나 중구난방식이 돼서도 안되겠다.그런점을 고려해 정부가 창구를 적십자사로 일원화 하기로 했고 개별기업이 지원에 나설 경우도 경제단체를 통해서 하도록 했다.그러나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창구도 있고 다른 혼란이 아주 없으란 법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것은 어디까지나 인도적 차원의 것이다.그러나 정부는 정책적 고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작게는 북한의 대남 비방중지같은 것도 얻어내야 할 것이고 정부차원의 본격적인 지원에 앞서서는 남북당국간 접촉창구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더 나아가서는 이런 지원이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 “북 2년간 10만명 아사”/WP지

    ◎식량난 심각… 사망자 장례식 못치르게 북한에서는 지난 2년간 식량난과 기아로 인해 약1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9일 미 정보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포스트지는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한 피해가 의외로 심각해 북한 당국은 굶주림으로 사망한 주민들의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또 미국 첩보위성이 야간에 찍은 사진을 분석한 결과 지난 86년 1월에는 북한내 대부분의 도시들에 불이 켜져 있었으나 작년 1월에는 평양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빛을 볼 수 없었다면서 전력공급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인 것 같다고 말했다.
  • 김구와 황장엽(김호준 정치평론)

    1948년4월19일 김구는 역사적인 남북협상의 장도에 올랐다. 이날 경교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군중들이 모여 그의 북행길을 막았다. 『못가십니다. 가시면 공산당 놈들에게 붙들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생명이 위험합니다』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김구의 신변안전이 염려돼 평양행 중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탈 자동차가 떠나지 못하도록 땅에 드러누운 청년도 있었다. 『여러분! 38선이 굳어지면 민족의 앞날이 불행합니다. 내 나이 일흔셋이니 살만큼 살았소.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할 것이 없소. 어서 길을 열어 민족의 운명을 타개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경교장 베란다에서 군중 해산을 호소하는 김구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48년초 한반도는 미소의 치열한 각축속에 남북분단의 고착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구의 북행은 남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고 남북총선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협상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협상상대인 김일성 김두봉 등 북의 공산주의자들도 남의 이승만과 마찬가지로이미 단독정부 구성을 추진중이어서 김구의 북행은 실패로 끝나고 16일만에 서울로 귀환한다. 김구는 북행 두달전에 발표한 저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에서 피를 토하듯 통일조국의 건설을 위해 신명을 바칠 각오를 밝힌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는 그의 절규 속에는 확실히 한국민족주의의 고귀한 이상이 담겨 있다. ○통일정부 수립위해 북행 그로부터 꼭 29년후 북한 주체사상의 설계사 황장엽이 남행을 결행했다. 그는 자신의 망명동기에 대해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북을 떠나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올해 74세의 황장엽은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쓴 자술서에서 『나의 여생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술회했다. 김구의 북행과 황장엽의 남행은 동기면에서많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그 유사성은 「민족」 「통일」 「여생」의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황장엽의 경우 민족진영의 거두 김구처럼 대표성도 없고 그를 기다리는 협상테이블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망명동기를 거창하게 『민족문제 협의』라고 밝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망명은 현실도피라기 보다 민족문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망명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평범한 진리에 다시 눈을 뜨고 북한동포의 아픔을 우리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각성을 가져야 한다. 북한주민의 굶주림에는 관심이 없이 시위만 벌이는 남한사회에 대해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힐난했다. 그의 이 원망(?)은 따지고 보면 민족주의와 동의어인 동포애의 갈구다. 황장엽을 김구에 비교하는 것에 불쾌감을 나타낼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붙어 호의호식하던 어용학자를 감히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에 평생을 바친 큰 지도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다니 가당치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망명이 김구가 생전에 그토록 목말라했던 민족주의, 남북의 대결정책에 짓눌려서 꺼져만가는 그 민족주의의 불꽃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전기가 될 수 있다면 저 세상의 김구도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민족주의 불꽃 다시 지피자 김일성·김정일체제의 사상적 기저를 제공해온 북한 제1의 이론가 황장엽은 자신의 망명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행된 것이라고 토로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고민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협의코자 하는 민족문제의 타개책은 무엇인지 우리는 진지하게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황장엽은 한반도에 두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남북간의 국가연합이 북한이 갖고 있는 통일정책의 기본이며 통일의 최종단계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이번 망명전에 작성했다는 이른바 「귀순결심 서신」에서는 남한을 주체로 한 통일론을 강력히 시사했다. 우리는 그의 통일론이 왜 바뀌었는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또 진정한 통일의 길이 무엇인지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해야 한다. 그의 망명을 우발적 사건으로 넘겨서는 안된다. 북을 자극하거나 정치적 목적에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통일문제를 민족적 토대에서 새롭게 접근하고 해결하는 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구는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또 공산주의자도 껍질을 벗기면 같은 피를 가진 한 민족임을 일깨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황장엽의 망명이 김구의 바다같은 민족주의를 오늘에 다시 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논설위원실장〉
  • 엉뚱한 사람들의 세상/문용린 서울대교수·교육심리학(시론)

    세상이 너무 부산스럽다.온 나라가 뒤숭숭하고,흔들리는 배위에서 멀미를 하듯이 어지럽고 짜증스러우며 화가 난다. 작년 연말 이래 연이어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하나같이 모두 멀미를 부추겨 왔다.안기부법과 노동관련법개정의 절차상의 미숙함도 문제였지만,노와 사간에 당연히 있어야 할 국제규범성의 균형성을 심각하게 헤아리지 못한 여권의 단견과 이 법안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않고,대권과 연계시켜서 여권 흠집내기의 기회로만 활용해온 야권의 욕심이 더 큰 문제였다. ○정치권 정치적 효과만 노려 안기부법과 노동법의 개정안이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립인 것은 물론 아니다.이 두 법안은 시각에 따라 찬성과 반대의 논거를 각각 제나름대로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이 문제는 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서 보다는 이 법안이 갖는 장단점과 예견되는 효과 및 부작용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판단을 토대로 열띤 토론과 대화가 있어야 했고,국회가 이런 토론과 대화를 국민들에게 보여주었어야 했다.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국민들의 정확한 판단을 유도하고,범국민적 컨센서스를 형성하도록 국회가 여야간에 노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어디 그랬는가? 국민들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찬성과 반대를 미리 당론으로 정해 놓고,한쪽은 통과쪽으로 밀어 붙였고,다른 한쪽은 무조건 반대로 밀어 붙이지 않았는가? 그래서 국회에서 여야는 토론 한 번 못했고,법안들은 통과된 것처럼 간주되었으며,이제 야당에서 그 통과가 변칙이라고 고함치고 있다. 두 개정법안이 가져올 실제적인 영향력에 국민들은 관심이 크지만,국회는 엉뚱하게 이 법안의 처리로 얻게될 정치적 효과에 더 큰 관심이 있어 보였고,또 그렇게 행동해 왔다.국민이 바라는 일에 보다는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그곳에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두 개정법안을 둘러싼 논의가 2월의 임시국회로 넘어가 한달간의 여유가 생기자 그 새를 못참고 한보사태가 발생했다.국회내에서 국민이 바라는 일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가 더욱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엉뚱한 사람들이 어디 그들만인가? 한보라는 기업을 에워싸고,엉뚱한사람들의 행진이 볼만했다.은행장들이 은행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일에 몰두했고,기업을 해야할 사람들이 기업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 대출받아서,엉뚱한 일에 써 버리고 말았다.엉뚱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만,그 일 때문에 기회를 잃고 손해보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이른바 기회비용의 상실이 엄청나게 크다는 점이다. 엉뚱한 일의 극치는 정작 북경에서 벌어졌다.김정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꽃구입으로 북경의 꽃시장이 동이 났다는 외신보도를 읽으면서,엉뚱한 사람이 북쪽에도 엄청나다는 생각이 든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사건으로 남쪽의 우리는 지금 얼마나 긴장해 있는가? 김정일의 친척이었던 이한영씨의 피습사건으로 우리는 지금 남북긴장의 클라이막스를 얼마나 실감나게 느끼고 있는가? 북한 주민의 반 이상이 굶주림에 고통받는 상황에서,주체사상의 한계를 목도하게 되자 망명을 결심했다는 황장엽 비서의 비장감 어린 결행을 보는 우리에게 있어서,북경 꽃시장의 매진 이야기는 엉뚱한 일 중의 엉뚱한 일로 보인다. ○북한 김정일 생일잔치 법석 남과 북에서 엉뚱한 사람들의 행진이 이젠 그쳐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엉뚱한 사람중의 하나라는 자각이 필요한데,그렇게 되기가 어렵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외국에서 보기엔 한국인 모두가 엉뚱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북쪽 주민을 동포라고 부르면서,그들 중의 반이상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사치성 소비재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남쪽 사람들을 어찌 엉뚱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을까?
  • 예방외교/케빈 M 캐힐(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조기경보」 통한 지구촌 분쟁 줄이기/정치·안보·인도주의 등 평화유지 요소 제시 냉전체제가 끝난 지금도 지구상에는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폭력밑에서 시달리고 있다.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막는 「예방외교」의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다.지난 5년동안만도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생활이 피폐해졌다.예방외교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은 코피 아난 신임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외교전문가들이 지구상의 전쟁폭력을 막기 위해 내놓은 나름대로의 해법을 묶은 책이다.보스니아·소말리아·르완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예방의학적 차원에서 접근해 미래에 유사한 분쟁을 막으려는 것이 출판목적.진료의 한 방법으로 예방의학이 존재하듯이 국제사회에서도 예방외교가 당연히 있어야 하며 이에 대한 관심이 제고돼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예방의학적 차원 접근 아난 사무총장은 『예방이란 차원에서 볼 때 의학과 정치는 비슷한 점이 있다.초기 진료를 거부하는 질병이 있는가 하면 병세가 아주 심각해질 때까지 진료를 거부하는 환자도 있다.이처럼 분쟁의 경우도 불필요하게 키워지는 양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아난의 이같은 지적은 향후 5년동안 유엔을 이끌어 갈 수장이 분쟁을 보는 시각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그는 평화유지에는 인도주의적·정치적·안보적 진료라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냉전이후 지난 5년동안의 분쟁사례에서 인도주의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사태만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 일반적 지적이다.아난 사무총장도 『단순한 인도주의적 반응은 위험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고 시인하고 있다.그는 소말리아 사태만 보아도 식량부족과 자연적 재난보다는 식량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것을 막는 군인들 때문에 더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인도주의만으론 위험 인도주의라는 말은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더욱 복잡한 정치적·군사적 행동을 피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돼왔다.「메데신스 산스 프론티에레스」라는 국제구호기구의 책임자를 역임했던 알레인 데스텍스헤씨는 「인도주의 허식」을 비꼬면서 원조는 정치적인 행동이 따르지 않는 구실로 작용하며 재앙만을 불러온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군개입 문서화 주장 이 책을 엮은 케빈 M 캐힐(Kevin M Cahill)씨는 「국제건강협력센터」회장이며 뉴욕의과대학교수.그는 전세계 지역사회에 만연하는 무질서를 생각할 때 의학적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적고 있다.책에는 사이러스 밴스 전 미국 국무장관,매랙 굴딩 전 유엔 정치담당 사무차장,데비드 오웬 전 영국 외무장관,모하메드 베드자오우이 국제사법재판소장,살림 아메드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장의 국제분쟁 해결법이 실려있다. 오웬 전 영국 외무장관은 나아가 르완다와 보스니아사태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이 보다 구속력을 갖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면서 소말리아사태만해도 유엔에 대한 비난을 더이상 방지하기 위해 군사적 면에서의 미국의 완전한 개입을 문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난 사무총장은 『평화는 강요될 수도 실행될 수도 없는 것』이라면서 『평화는 전쟁 당사자간의 진정한 평화에 대한 욕망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러면서 그는 『더이상의 사태확산을 막기 위해 때로는 분쟁의 최고 시점에서의 즉각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개진하고 있다. 「조기경보」 역시 분쟁확산방지의 좋은 방안으로 제시됐다.보스니아·소말리아·캄보디아같은 지역분쟁에서 조기경보가 있었다면 분쟁을 사전에 방지할 조치가 뒤따랐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특히 조기경보가 보다 다급한 현안에 의해 무시되거나 뒷전으로 밀리지 않도록 하는 국제적 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방외교」·「평화유지」·「전후 평화건설」외에 「예방배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견해도 포함돼 있다.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경계선을 따라 배치된 수백명의 미군들이 발칸반도전쟁의 확산을 막고 있는 한 예라는 것이다. ○대중의 평화의지 강조 아난 사무총장은 책속에서 『전세계적 무법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프랭크린 D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검역도 이미 유일한 선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개발한 새로운 기구와 접근방법이 생명을 잃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앞으로 5년동안 국제적 분쟁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업적이 판가름날 아난 사무총장은 『일반대중의 강하고 지속적인 평화지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원제는 Preventive Diplomacy,베이식 북스(Basic Books)사 출간.370페이지 25달러.
  • 김정일 생일잔치 강행/「정일봉」 전야행사 불꽃놀이 “휘황”

    ◎곳곳서 충성맹세 결의… 오늘 절정 【서울 AFP 연합】 북한은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에도 불구,신격화된 지도자 김정일의 55회 생일잔치를 15일 강행했다. 위대한 새 지도자에 대한 찬양이 점차 고조되면서 과거 김정일의 존경받는 스승이었던 황장엽(73) 비서의 이름은 북한의 언론매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수반은 축하화환을,리비아와 이란은 축하전문을 보냈으며 밤새 벌어진 군의 생일 전야행사로 김정일의 전설적인 출생지 「정일봉」이 불꽃놀이로 뒤덮였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날이 밝을 무렵 색색의 불꽃놀이가 정일봉을 다시 수놓았으며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하자」는 슬로건과 플래카드를 단 형형색색의 낙하산이 투하됐다고 중앙통신은 전했다. 관리와 군중들은 폭죽을 터뜨리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결의대회를 가졌으며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장군의 눈보라」라는 생일축시를 전면을 할애해 실었다고 이 통신은 덧붙였다. 한국내 전문가들은 몇달간에 걸친 대대적인 준비끝에 김정일의 공식 생일인 16일 절정을 이루게 될 이번 생일잔치형식은 김정일시대의 시작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지난 몇달동안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 갑자기 줄었음을 지적했다. 중앙통신과 북한 라디오방송들의 아첨섞인 찬양의 목소리는 북한 군요원들이 자동차에 탑승해 황장엽이 망명을 신청한 북경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 진입을 시도하고 중국이 영사부 주변에 무장경비병을 배치하는 북경의 절망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북한이 2천2백만 주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문제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지난 3년간 서방국들에 식량원조를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평양은 황장엽에 대해서는 불길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노사상가의 민족화해 염원/황장엽 망명­자필 석명서에 담긴 뜻

    ◎사회주의 건설 이상 좌절·북 체제 실패 시인/굶주림에 무관심한 남 시위·북 권력에 경종 13일 공개된 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의 「자필 석명서」는 우선 민족화해를 위한 민족주의적인 노사상가의 면모가 돋보인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망명요청 동기에서부터 『우리민족을 불행으로(부터)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고 말했다.또 『나는 어느 편에 서서 한몫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가능하면 남과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등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남한사회와 북한체제의 양쪽 모두의 문제점을 지적,남북한 대결정책만을 추구하고 있는 북한권력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남한사회에 대해서도 깨우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내비쳤다. 뿐만아니라 그는 민족적인 차원에서 북한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남한의 고통분담 노력의 미흡함,특히 일부 운동권의 시위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민족의 적지 않은 부분이 굶주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시위만 벌이고 있는사람들의 생각도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을 「정치에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북한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실현하려했던 자신의 꿈과 이상이 좌절됐음을 시인하는 것으로 보이며 확대해석하면 북한사회주의 체제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권력승계 지연 등으로 인한 북한체제의위기설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를 공개 비난하지는 않았고 북한의 조기붕괴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일부 북한전문가들은 자필석명서에 나타난 황비서의 심경은 48년 당시 남한측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북한을 방문했던 김구 선생의 모습이나 지난 90년 북한을 방북했던 문익환 목사를 연상시키게 한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 마지막 남은 여생을 민족통일사업에 받치겠다는 「순수한 열정」과 「조국애」로 조정역할을 자임해 「남행」을 감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 해인사(음식문화 이렇게 바꾼다)

    ◎발우공양… 식사후 물따라 마셔 쓰레기 없애/식사인원 미리 철저히 파악… 음식량 조절에 신경/자장 등 기름기 많은 음식은 뷔페식 자율 배식도 절에서는 절대로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식사를 마친 스님들의 바리때(나무로 만든 그릇)에는 쌀 한 톨,콩나물 대가리 하나 없다.아침에 먹다 남은 음식은 점심에,점심에 먹다 남은 음식은 저녁에 국이나 찌개로 만들어 먹는다.철저한 「재활용」이다.어쩌다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들이 음식물쓰레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이것도 며칠을 모아야 잔반통 하나를 채울까 말까 할 정도다.경남 합천 해인사의 사례를 소개한다. 지난달 31일 낮 해인사 본사 오른쪽 대적광전 옆에 있는 수행도량인 정수당의 반지하 식당.한 구석에서 스님 몇 명이 사시공양(점심식사)을 하고 있다.스님 대부분이 외출을 한 터라 스님 모두가 큰 방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발우공양을 하지 않고 회사의 구내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식판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다.식당 한 쪽 배식대에는 밥과 국,그리고 반찬을 가득 담은 큰 그릇들이 놓여 있다.이른바 뷔페식이다. 스님들은 각자 먹을 만큼 식판에 담아 먹는다.식사시간에 절에 남아 있는 스님들이 얼마 되지 않거나 식사 후 기름기 때문에 그릇이 잘 닦아지지 않는 짜장 또는 카레를 만들어 먹을때는 발우공양을 하지 않고 이처럼 자율배식을 한다고 한다.『이제는 절도 현대식이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에서는 10명 남짓한 행자스님들이 밥을 푸고 또 보살간에서 만들어 날라온 두부 등 반찬을 먹기 좋게 썰고 있다.보살간은 보살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해인사에는 70세가 지난 쌍둥이 보살을 비롯해 10여명의 보살이 있다.보살들은 주방 출입을 하지 않고 보살간에서 반찬만 만든다. 공양간이라 불리는 주방에서는 밥만 짓고 국과 찌개는 갱두간에서 만들어 가져 온다.일종의 분업이다. 하지만 식사인원을 정확하게 예상해 음식을 만들어 식사 뒤 남는 음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주방 입구에 있는 잔반통은 음식물쓰레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주방에서 일하는 이름을 밝히기를 극구 꺼리는 한 행자스님은 『절에서 무슨음식물쓰레기가 나온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 왔느냐』면서 취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인사의 스님은 모두 160여명.모두 비구다.여기에 객승과 처사(절에서 일하는 직원),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를 합쳐 식사를 하는 인원은 한 끼당 220여명선.하루에 한 가마를 조금 웃도는 쌀이 든다.일반인 같으면 200명이 넘는 인원이 먹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지만 스님들은 식사량이 적기 때문에 한 가마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절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주현 스님의 설명이다.밥에 콩이나 팥 등 잡곡을 섞으면 쌀의 양이 더 줄어든다.신도들이 찾아올 때는 공양을 더 준비하지만 몇 명이 찾아오는지 미리 원주 스님을 통해 공양간·보살간·갱두간에 각각 통보되기 때문에 음식이 거의 남지 않는다. 신도들이 먹다 남긴 음식은 남에게 내놓을수 없기 때문에 잔반통으로 들어간다.그래서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러 올때 음식량 조절에 더욱 신경을 쓴다.하지만 신도들이 남기는 음식물쓰레기도 채소를 다듬다가 나오는 것을 합쳐 4∼5일이 지나야 잔반통 하나가 찰 만큼 매우 적다.음식물쓰레기는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밭의 거름으로 쓴다. 사실 절의 식사문화를 보면 음식물쓰레기가 생길 여지가 전혀 없다.최근 들어 자율배식이 때때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절의 전통적인 식사법은 발우공양이다.발우공양을 할 때는 밥·국·반찬·물을 각각 담는 4개의 바리때를 쓴다.먼저 물을 밥그릇에 담았다가 밥그릇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국그릇으로 옮긴다.국그릇의 물은 다시 그보다 크기가 작은 반찬그릇으로 옮겨지고 반찬그릇의 물은 마지막으로 바리때 가운데 가장 작은 물그릇으로 옮겨진다.그러면 행자 스님들이 밥·국·반찬·물을 나누어 준다.식사를 할 때는 밥풀 하나 남기지 않는다.다 먹고 난 뒤 밥풀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물을 따라 다시 먹는다.식사를 끝낸 뒤에는 식사 전과 반대의 순서로 물을 옮겨 손으로 바리때를 씻는다.그런 다음 물을 퇴수통에 비우고 바리때를 바루보로 닦아 선반에 올려놓으면 공양이 비로소 끝난다. 퇴수통의 물은 늘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아귀(배는산처럼 크지만 입은 바늘구멍만 해 음식을 먹을수 없는 귀신)을 위한 것이다. 불가에서 음식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개울물에 떠내려간 콩나물 대가리 하나를 찾아 계곡을 헤맸다는 한 고승의 일화다.옛날 한 젊은 스님이 깊은 산 속의 암자에 큰 스님이 기거한다는 말을 듣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콩나물 대가리 하나가 떠내려왔다.이를 본 젊은 스님이 『이렇게 음식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무슨 큰 스님인가』라고 실망해 있는데 큰 스님이 내려와 『내 콩나물 대가리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그러자 젊은 스님은 잠시 전의 의심을 뉘우치고 큰 스님에게 무릎을 꿇어 가르침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해인사 원주 주현 스님/“음식의 근본 깨달으면 버릴수 없어…” 『음식을 생명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쌀 한 톨도 버리지 못할 겁니다』 해인사 원주(절의 살림을 총괄하는 스님) 주현 스님은 『한 끼의 음식은 수많은 생명이 죽어서 비로소 내게 온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주현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밭에 농약을 치고 김을 매면 숱한 벌레가 죽는다.그런 수많은 생명의 희생이 있어야 비로소 음식을 먹을 수 있으므로 음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현 스님은 또 『쌀 미자의 글자 모양대로 음식이 상에 올라오기까지에는 88번이나 손이 간다』며 『이러한 수고와 희생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밥을 먹을 자격이 있나 없나를 따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은 백지 한 장에서 구름과 비와 나무를 본다』면서 『구름은 비를 만들고 비는 종이의 재료가 되는 나무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를 음식에 빗대면 음식의 재료가 되는 쌀과 채소 등이 만들어지기 까지에는 물과 햇빛을 비롯해 수많은 요소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수많은 요소의 결합과 무려 88번이나 되는 수고를 거쳐 비로소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음식을 남겨 쓰레기통으로 보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현 스님은 『책으로 만들면 6천791권에 달하는 팔만대장경을 바로 외우고 또 거꾸로 외워도 근본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면서 음식의 근본을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는다면 음식물쓰레기가 남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애국미 헌납운동」에 주민 반발

    ◎식량재분배 목적… 농업근로자에 촉구 북한이 이른바 「애국미」헌납이란 미명 아래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애국미헌납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지난해 11월11일자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식량을 국가에 바친 한 농민을 「90년대의 참된 애국자」로 선전하면서 각지 농업근로자가 이를 따라 배울 것을 촉구하면서부터였다.지난 13일엔 김정일이 애국미를 헌납한 협동농장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이를 일반화할 것을 요구하며 부추겼다. 북한이 이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식량재분배」차원에서 식량사정이 다소 나은 협동농장 등에서 식량을 거두어 배급사정이 좋지 않은 지역에 나누어주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북한은 전에도 「전쟁비축미」 「절약미」 「통일미」 등의 명목으로 주민에 대한 배급미에서 공제해왔다.〈내외〉
  • 서예가 조수호(이세기의 인물탐구:120)

    ◎석고문을 법첩으로 독창적 행장구축/“글씨보다 인품”… 흐트러짐 없는 자세 일관/“개인전은 최상의 기량때 일생 한번” 고집 동강의 글씨는 패기와 강유를 겸하고 그의 난죽은 칼날 같고 풋솜 같고 세찬듯 부드럽다. 음악에 음조가 있듯이 명필에는 선조가 숨어 있다.옛대가의 서체를 두루 완수한 동강의 행초는 「천변만화를 구사하는 경지」에서 일생일작을 놓고 냉엄한 생사의 소명을 수행하는 시기다. 그는 서단에서는 여러 모로 남다른 존재다. 첫째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다.동양화가 아닌 서양화를 전공한 것은 서구적인 미학의 특성과 이질감을 접목하여 동양예술을 심도 있게 탐색,창조하자는 의도에서다.둘째는 미대재학중 「사군자」성적이 「100점」 만점을 기록한 일화가 있고 25세인 49년 제1회 국전 특선이후 57년부터 연 4회특선,아직 30대초반에 국전추천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만만치 않은 기세로 서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서양학과 전공 이색경력 또 서예를 보는 눈과 이론에 정연하여 강물처럼 쏟아내는 명강의로 유명하다.84년,중국정부주최로 열린 「안진경 서거 1천2백주년 기념 국제서법학술대회」에서 그가 강의한 「안진경의 위치와 중국서법에 끼친 영향」은 중국서단의 거봉인 요몽각·우우임을 감동시켰고 그 내용이 중국 문화일보에 전면게재된 바 있다.이에 앞서 「예술의 파죽지세」로 지칭되는 그의 대작 「난죽도」를 대북의 역사박물관과 중국서화회겸 중국서법학회 이사장이던 마수화와 황군벽이 구입하여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강의 예술관은 「글씨에 앞서 고매한 인품을 먼저 형성시켜야 한다」는 자세가 굳건하다.문자의 의상에서 창출되는 서예술은 글씨의 점과 획,장법도 중요하지만 「부단한 노력과 수련을 통해 진실을 발견해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는 지론이다.그런 맥락에서 그는 「누에가 실을 토할 때」의 「여잠토사」와 「송곳으로 모래를 그린다」는 「추획사」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언제나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심신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붓을 잡는다. 그가 좋아하는 법첩은 전예해행초가 모두 들어 있는 「석고문)」을 최고로 꼽고 있다.「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는 천가지 비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글씨를 이룰 수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와 안진경·구양순을 임서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형태에 중점을 두는 「형임)」과 운필과 필세를 체득하는 「의임」,마음속으로 외워서 쓰는 「배임」의 과정을 섭렵한 끝에 자신의 체질에 맞는 정묘하고 유심한 행초의 세계에 접근하게 되었다. ○정연한 논리의 달변가 그는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웃의 부탁을 받아 「입춘대길」을 쓰기 시작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통사회의 엄격한 집안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묵향에 젖어들게 되었고 대구사범 심상과에서 현재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의 부친인 우당 김용하 선생에게 서예와 교육심리학을 배웠다.그때 스승이 추천해준 왕희지의 「난정서」와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은 서법수업에서 일생의 지침서가 되었다. 평소의 성격은 괴팍하며 불의가 싫은 나머지 이에 저항하는 기질이과격한 편이다.가식과 겉치례를 경멸하고 현실과 의기투합한 속물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친구의 범위도 산정 서세옥이나 오정 김진해에 한하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스승인 월전(장우성)을 극진히 모신다.지금도 청년같이 건강하여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정의감은 「원문 한줄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국전이나 서예전에서 입·특선하는 기미가 보이면 추호의 용서없이 몰아붙인다. 『나에게 순탄하고 행복한 역정을 지내왔다고 하지만 나나름대로 고통과 인내,탄압과 분노,좌절과 희망으로 점철된 청춘기를 보냈다』고 그는 돌아본다.『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일제시대에는 사상이 불온한 반일교사로 지목되어 왜경의 감시에 시달리다 징병으로 끌려간 적이 있고 6·25때는 굶주림과 뼈저린 외로움을 겪었으며 죽음을 넘긴 여러 번의 체험 탓인지 어떤 일도 함부로 포기하는 일이 없어졌고 침식을 거르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하면서 자신의 운명에 책임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고 국제서법학술대회에 참여하면서도 75년 문예진흥원이 주관한 국전초대작가상 수상기념전에 응한 것 외에 서울에서는 정식으로 개인전을 연 적이 없다.이에 대해 동강은 『자연의 사계가 다르고 해마다 피는 꽃의 자태와 빛깔이 다르듯이 나만의 빛과 나만의 자태와 나만의 향기가 절로 우러나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새롭고 신묘한 기운」이 현현할때 일생 단 1회 개인전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힌다.다만 그 시기는 예정된 것은 아니지만 첫특선이 50주년이 되는 99년에 지금까지의 화업과 서업을 한자리에 펼쳐 스스로를 돌아보고 검토하고 반성하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다. 90년 서울교대 정년퇴임후 종로3가 세운상가에 있는 서실에 나와 그는 아침부터 난과 죽의 은은한 향기를 눈부신 백지에 뿜는다.일생을 걸고 한판 승부를 건 듯한 그의 서체는 세상을 질타하는 듯한 필획과 결구를 표출하여 「한획보다는 한폭에 흐르는 탐신의 미학이 구축된」 독창적 풍모다. 가족은 「글씨를 사랑하여 나를 따르던 묘령의 착한 소녀가 어느새 백발로 변한 아내」와 장남의 가족과 함께 종로구 구기동에서 살고 있다.아호는 달 밝은 밤이면 강이나 산으로 밤새도록 헤매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월명」을 지어 가졌으나 고향이 낙동강부근이라는 데 착안하여 소전(손재형)이 「동강」을 내려주었다. ○퇴임후 종로에 서실 내 사람과 글씨가 함께 무르익는 「인서구로」를 지나 「마음속에 이미 대를 그리고 있는 흉중성죽」을 성취한 동강은 「묵과 획이 서로 화목하고 운치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심오한 유현의 세계를 유유자적으로 누리는 시기다. 그러나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예술가는 선택된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과 「예술가는 자기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태워나가는데서 희열을 느낀다」는 진언은 바로 자신을 향한 심혼의 혈서일지도 모른다. □연보 ▲1924년 경북 선산 출생 ▲45년 대구사범 심상과 졸업 ▲47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 입학, 전국대학생미전 「고궁」특선 ▲49년 제1회 국전 서예부문 「어부사」특선 ▲57·58·59·60년 국전 서예부문 연속4회 특선 ▲51년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졸업, 김용진·손재형·김용준·장우성사사 ▲62년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 ▲68∼90년 서울교육대학 교수 ▲74년 국전초대작가상 수상 ▲75년 초대작가상수상 세계일주기념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77∼83년 제1·2·3회 아시아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76년 한중교류전(대북역사박물관) ▲78∼81년 문교부 1종도서 중학교서예교과서 개발위원장 ▲81년 중화민국 중화학술원서 명예철학박사,중국정부초청 서화개인전 ▲83년 제1∼3회 아시아 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84년 중화민국정부주최 「안진경서거 1천2백주년기념」국제서법학술대회 한국대표,대구매일신문사 특별초대전 ▲85년 문교부 중·고교미술교육과정 심의위원 ▲86년 중화민국 서법학회명예이사,부산일보 초대개인전 ▲91∼현재 한국국제서법연맹 회장 ▲94년 대북국제서법연토회 한국대표 ▲95년 광복50주년기념 95 서울국제서예전 대회장(예술의 전당) ▲96년 대구국제서예전 대회장(대구 문화예술관) 〈저서〉 「근례비편해열」(80년) 「동강 조수호서화집」(81년) 문교부검인정교과서 「고교서예」편찬 〈수상〉 경북문화상(60년) 국민훈장목단장(90년)
  • 해광군과 여금주양(송정숙 칼럼)

    어떤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그 아이들이 희망임을 확인하게 해준 것이 해광군이다.극도의 굶주림과,부모와 「위대한 지도자의 품」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깊이 천착한 그의 탈북일기는 놀랍고 영특한 기록이다. 그 일기를 통해서는 그의 어린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정든 고향』과 『정다운 동무들』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습이 보인다.어떤 것은 우리에게서는 진작에 풍화해버려 잊혀진 것들도 있다.그 진솔한 본모습을 북에서 온 어린 소년의 일기에서 읽을수 있다는 일이 신기하다. ○북한 소년의 일기 “진솔” 해광군에 앞서 역시 일가족 탈북의 일원인 여만철씨의 딸 금주양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최근의 일이다.『따뜻한 남쪽』에 와서 몇해를 보냈고 남쪽의 대학생이 된 그가 그동안 「적응」하며 겪은 것들이다. 처음 남쪽의 친구들은 자신을 경계하듯 접근하지 않았다.나중에 안 일인데 남쪽 친구들은 그가 무서웠노라고 했다.『왜서 내가 무서웠는지….오히려 내가 무서웠음 무서웠지…』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라고 했다.남쪽 친구들이 마음을 열어 서로 어울리게 되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무슨 노래가 좋은가』 묻길래 「설운도씨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어쩌면 그런 노인네 노래를 좋아할수 있는가』고 막 웃는 통에 무안했었다는 것이다. 그 노래를 좋아한 것은 북쪽에서부터였고 북쪽의 친구들과 함께 그노래를 좋아했던 시절을 그는 추억으로 지니고 있다.그 추억이 그들의 「남쪽선택」의 기쁨이기도 했고 그때문에도 남쪽의 삶이 행복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정작 남쪽에서는 그것이 놀림감이 된 것은 그를 쓸쓸하게 했던 것 같다. 금주양의 초등학생 남동생이야기도 있다.공부가 끝난 하학시간에 체조를 잘하는 남동생은 철봉에 매달려 여러가지 장끼를 남쪽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남쪽친구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그런데 어쩌다 동생은 철봉에서 떨어지고 말았다.그러자 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친구들은 모두가 모른척하고 가버렸다.동생은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북에서 같으면 들쳐업고 병원엘 가든가 어찌라도 했지 그렇게 혼자 팽개치고 가버리지는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이 그와 그 가족들이 느낀 슬픈 결론이었다. 여러번 종용한 끝에 얻어낸 남쪽친구들에 대한 금주양의 비판은,학생들의 씀씀이가 많이 헤퍼보이고 허영스런데가 있는 것 같고 삭막한 느낌을 주며 『진실된 면』이 좀 모자란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남쪽을 선택한 「아버지」의 결단에 대해서 『지금이니까 할수 있는 말』은 남쪽을 선택한 일은 잘한 일인것같다는 것이다.그러고나서 그는 좀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북쪽에서 보낸 모든 세월은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곤한다』는 것이었다.조그만 목소리로 『고향이랑 친구랑 좋은 사람도 많고 보고싶기도 한데…』 잦아들듯이 덧붙인 뒷부분의 말은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해광군의 일기에서 수도없이 되풀이되는 것도 『두고 온 동무들』이다.남쪽에서 「새동무들」을 사귀면 잊혀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순수한 영혼에 드리운 「그리움」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북에다 두고온 「지난날」을 『배고프고 괴로운 하찮은기억』쯤으로 여기는 남쪽의 무신경과 만난다면 그들은 얼마나 쓸쓸하고 노여울 것인가.『친애하는 지도자의 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국가 목표라는게 국민에게 『하얀 이팝에 고깃국』 정도인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 수준인가를 알게되는 일은 금방 가능하다. ○탈북동포 따뜻이 대해야 그러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됨의 정신자원은 그것과 별개다.그들에게 그렇게 간직할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남쪽사람들도 알아야 할 것이다.그런 뜻에서는 탈북동포들의 남쪽적응만이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아니다.남쪽이 그들을 받기 위해서 적응해야 할 일도 너무 많다.미리부터 대비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다.〈본사고문〉
  • 김일성·김정일 별장(흔들리는 동토 북한:4)

    ◎“명승지마다 호화별장” 주민원성/곰·사슴 등 사육… 김 부자 방문때 사냥감으로/삼엄한 경계속 기쁨조 동원 잦은 파티도 압록강 수풍댐 부근 해발 540m 홍곡령 부근 호반.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자리잡은 「창성특각」은 김일성이 즐겨찾던 여름별장이었다. 김경호씨의 셋째사위 박수철씨(40)는 지난 74년9월부터 85년8월 상사계급으로 제대할 때까지 창성특각의 경비병으로 근무했다.자연히 김일성을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볼 기회도 많았다. 태고의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이 별장은 지난 55년 지어졌다.압록강과 두만강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북한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게다가 주변에는 다래·머루를 비롯한 진귀한 산나물들이 많이 나 천혜의 휴양지로 꼽힌다.깊은 산골이라 철도·도로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일반인들은 별장이 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만 알고 있을 정도다. 창성특각은 야산지대 별장과 고산지대 별장 등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건물은 원시시대의 정취를 돋우기 위해 통나무집이나 귀틀집 등으로지어졌다.마당에는 곰 멧돼지 오리 꿩 등을 사육,김일성일행이 찾을 때면 인근에 풀어놓고 사냥감으로 썼다. 건물 내부에는 오락실 도서실 식당 연회장 응접실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춰 모든 것을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또 김일성의 손자·손녀들을 위해 장난감이나 모형을 만들수 있는 공작실과 금이나 은 등 광물을 캐낸 상태 그대로 보존한 교육용 광물표본실도 마련해놓았다. 김일성은 매년 5∼7월에 어김없이 이곳을 찾아 40여일간 머물렀다.김일성은 책임부관,휴양소장 등 극소수의 인원만을 대동하고 산림욕을 하거나 호수에서 보트를 타며 휴가를 즐겼다.손자·손녀들과 공작실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광물표본실 등을 가지고 다니며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또 긴 머리를 한 반라의 여성을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박씨는 『아가씨들을 「책임 간호원」이라고 불러 당시에는 그대로 믿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기쁨조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 직원은 모두 사상적으로 확실히 검증받은 노동당원으로만 구성돼있다.휴양소장을 비롯한 전원이 호위총국 소속 군인들이다.관리인 요리사 잡부 등 운영요원은 40명이다. 경비병은 평시에는 130명이지만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방문하면 500∼600명으로 늘어나 삼엄한 경계를 펼친다.전원 실탄을 지녀 간혹 오발사고가 나기도 한다. 박씨처럼 김일성·김정일을 근접경호하는 요원은 극빈 가정 출신중에서만 뽑는다.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줌으로써 김일성부자를 어버이로 믿도록 철저히 세뇌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박씨는 또 『최근 들어 김정일의 별장이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 압록강과 두만강변에 여러채 지어지고 있다』고 전했다.굶주림에 시달리는 중국접경지역 주민들의 원성이 일대에 자자하다고 한다.특히 두만강과 압록강의 발원지 부근에 지은 운풍호 별장은 초호화판으로 치장되고 있다. 이밖에 평남 안주시 연풍리에는 「연풍각」이라는 별장이 있다.김일성 별장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여러 곳의 낚시터와 함게 김부자 전용 사냥터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방목 사육장에서는 꿩 노루사슴 등을 키운다. 단풍이 고운 묘향산 별장은 김일성이 가장 애용했던 곳으로 묘향산에서도 가장 경관이 수려한 호랑령에 있다.자모산별장은 「장수별장」으로 불린다.김정일은 김일성 생존시에도 이곳을 자주 이용했으며 기쁨조를 동원한 파티를 열곤 했다. 삼지연별장은 김일성이 7∼8월에 즐겨찾던 곳으로 양강도 삼지연군 포태노동자구에 있다.
  • 두 가족 탈출경로

    ◎김씨,남한방송 듣고 “자유세계 품으로” 꿈 착실히 키워/지난해 3월 자식들엔 숨긴채 국경부근 장모댁 이동/24일 새벽녘 도강성공→조선족 보호 받으려 은신생활 22일 귀순한 북한주민 두가족 가운데 김영진씨(50)가족은 지난해 3월 북한을 탈출,중국에 머무르면서 10월에는 둘째아들 해광군(13)이 일가족의 북한 탈출기를 담은 일기를 MBC에 보내 방송됐던 것으로 밝혀졌다.유송일씨(46)가족과는 중국에서 만나 행동을 같이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MBC에 보도된 해광군의 일기를 토대로 김씨 가족의 탈출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김씨 일가족이 고향인 평남 문덕군을 떠나 부인 김찬옥씨(46)의 어머니가 사는 함북 무산군으로 향한 것은 지난 96년 3월19일이었다.김씨는 남한의 방송을 들어오면서 자유세계의 꿈을 키워왔다.식량난으로 집까지 팔아치운 처지에 드디어 탈북키로 하고 국경 부근에 있는 장모의 집으로 떠났다.아내의 양해는 얻어냈지만 해룡(16),해광(13) 두 아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두 아들은 외할머니가 있는 무산에 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김씨 가족은 아이들이 배고파 우는 소리등으로 아수라장인 기차안에서 꼬박 이틀동안 부대꼈다.해광군은 기차안에서 굶주림에 시달린 한 청년이 기차에 누워있다 숨을 거두자 충격을 받았다.사람 죽는 것을 처음 봤다. 3월 21일 무산역에 도착한 김씨 가족을 장모는 반갑지 않은 기색으로 맞이했다.배는 곯지 않겠지 하는 기대감에 찾아갔지만 외가의 사정도 별로 다를바 없었다.해광군은 잠결에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로 끼니를 때우는데 너희들까지 왔으니 걱정거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실망감 밖에 들지 않았다. 김씨는 탈출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국경까지 왔지만 정작 국경에서 결심이 서지 않았다.그러나 배고픔에 울먹이는 아들들을 생각하곤 마음을 다잡아먹었다.김씨는 두 아들에게 『이제 살길은 남조선으로 가는 것 뿐』이라며 『그래야 너희들도 공부를 할 수 있고 배불리 먹을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해광군은 아버지가 나라를 배반하자고 국경 부근으로 우리를 데리고온 나쁜 사람으로 생각됐다.해룡군도 아버지의 설득에 맞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지도자 김정일 선생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어머니 김찬옥씨도 아들들을 설득했다.두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따르기로 했다. 김씨 가족은 23일 밤 10시부터 두만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두만강기슭에 가까이 접근했다.상오 2시까지 은밀히 정찰을 하면서 보초병과 조명 등의 움직임을 살폈다.조각달도 지고 캄캄한 야밤이었다.살아도 두 아들을 먼저 살리겠다며 김씨는 두 아들을 흰포대로 위장해 포복으로 강을 건넜다.도강에 성공,중국땅을 밟은 것은 24일 새벽 3시30분이었다. 중국국경 부근에 사는 조선족 부부가 경계심을 표하는 김씨 가족을 환대했다.해광군에게 중국땅은 먹을 것도 많고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학교에 다니는 등 놀라움 투성이었다.더욱이 남조선이 아주 잘 살고 자유가 있으며 자기의 희망을 마음껏 꽃피울 수있는 지상낙원이라는 것을 듣고 더욱 놀랐다.한국으로 빨리 가서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 조국통일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다는 것이 해광군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 김영진씨 둘째아들 해광군의 탈북기­우리가족 로정의 일기 전문:Ⅱ

    ◎“남행이 살길” 언제나 북서 알까요/외할머니 찾아가니 “끼니 걱정 돋우려 왔구나”/“쥐약 먹고 죽겠다”던 이모님 살고나 계신지 ◇1996년 3월 29일 금요일 (맑음) 이날도 역시 갈데가 없어 사정하여 이집에서 하루 더 묶게 되었다. ◇1996년 3월 30일 토요일 (약간흐림) 이날도 한국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잠자리와 거처할 집이 없어서 기차역전에서 하룻밤 지내었다. ◇1996년 3월 31일 일요일 (맑음)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또다시 한국사람을 찾으러 나섰다.또 어느덧 날이 저물어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어느 과수원 초막에서 하루 잠을 잤다. ◇1996년 4월 1일 월요일 (맑음) 오늘도 백산호텔에 한국사람이 많이 온다기에 백산호텔 앞에서 3시간 가량 있다가 수사 경찰이 다니기 때문에 위험해서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 일행은 걷고 또걸어 하오3시가 되어도 점심도 먹지 못한채 우리는 흥안향 흥안촌에 들어섰다. 우리 일행은 초두부집에 들어섰다.초두부집에서는 각종음식을 다하였다.우리는 밤과 초두부를 청하여 편안하게 식사를 나누고 식당에서 나와 한동안 밖에서 가족끼리 토론하였다.시간은 어느덧 흘러 저녁이 되었다.저녁이 되어서 어머니는 잠자리를 찾느라 서둘렀다.초두부집 주인이 퍽 마음이 후하여 우리를 보고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면서 초두부집 아주머니가 들어와 여기서 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초두부집 아주머니가 우리를 따뜻이 대해주면서 마음속으로 동정하는 것을 보았을때 마치 고향의 이모 생각이 그리워지며 친이모와 같은 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1996년 4월 2일 화요일 (흐림) 하루밤 푹 자고 난 우리 일행은 또다시 기약없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이때 초두부집 주인장이 들어와 북조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시며 친척에 어디에 있는가.(없다).돈은 얼마나 있는가(15원 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12월에 북조선에 갔다왔다고 하면서 실정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온가족이 목숨을 내걸고 외국땅에 아이들까지 왔는가 하면서 우리를 크게 고무하고 동정하였다. 이때 우리 가족은 근심어린 심정으로 있으니 식당주인이 우리 심정을 알고 절대 시름놓고 살라고 목숨을 내걸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니 살아야 한다고 하며 이제부터는 근심을 말라고 다시한번 위로의 힘을 주었다.그러면서 살아갈 방도를 같이 찾아보자고 하였다.이때 나의 마음은 북한에 있는 나의 할머니도 몇년 있다 만나는 손자를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데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집 주인이 우리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여기고 몹시 가슴아파 하는가.진정으로 친혈육으로 맞이하여 주는가? 왜 북한에서는 친혈육도 모르게 되는가? 또한 기차간에서 숨지고 있는 그 청년보고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주려고 하지 않는가.이 두 현실도 무엇때문에 너무도 판이하게 차이 나는가? ◇1996년 4월 3일 수요일 (약간흐림) 우리 가족은 이틀동안 북조선에서 맛보지 못한 음식들을 먹으면서 북한실정 나의 다정한 동무들이 지금 굶주려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것이 눈앞에서 선히 떠올랐다. ◇1996년 4월 4일 목요일 맑음 나는 아침밥을 푸짐히 먹고나서 또 북한 생각뿐이었다.우리 떠나올때 옆에살던 이모네 집에서 요즘 어떻게 하루하루 살고 있는지? 너무 먹을것이 없어 온가족이 쥐약을 먹고 죽자고 하는 것을 물을 먹고 살어라도 죽어서는 안된다고 고무하여 주고 떠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된다. ◇1996년 4월 5일 금요일 (맑음) 초두부집 주인을 만난때로부터 벌써 5일이 지났다.오늘도 역시 우리 가족은 하는것 없이 대접을 잘 받았다. 먹지 못했다가 잘 먹어서인지 설사를 만나 약까지 쓰면서 대접을 받았다. ◇1996년 4월 6일 토요일 (갬) 나는 설사치료로 하여 밥을 먹지 않았다.먹고싶은 고깃국과 이밥을 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집에 누워 치료를 받았다.누워서 북한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이 잘먹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또 생각해 보았다. ◇1996년 4월 7일 일요일 (맑음) 주인님은 오늘은 일요일인데 시내에 구경을 가자고 하시었다.나는 너무좋아 어쩔바를 몰라 기쁨을 감출수 없었다. 연길시 백화상점 시장거리 모든것은 눈이 모자라 못볼 정도였다.가계에는 전기용 가마며,전자계산기 등 수없이 많은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북조선에서는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살수 없는데 여기에는 정말 없는 것이라는건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다. 나는 북조선에서 텔레비전을 볼때마다 세계에서 제일 잘살고 살기좋은 나라는 북조선이라고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와 내눈으로 직접 보니까 현실과 너무나도 차이가 엄청나게 있었다. 식당주인이 말하기를 남조선은 중국보다 훨씬 더 경제가 발전하고 공업이 발전하여 세계 아세아의 4번째에 손꼽힌다고 하기에 나는 실지 그렇다면 한국에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1996년 4월 8일 월요일(약간흐림)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 나도 모르게 어제 일요일 하루 시내구경을 갔던 생각이 떠오르던 나머지 자꾸자꾸 떠오른 것이 아버지께서 떠나오실때 북조선과 남조선을 러무도차이가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일행은 꼭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으로 가 희망으로 나래를 떨치고 싶다. ◇1996년 4월 9일 화요일 맑음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은 무조건한국으로 갈 욕망이라고 말하니 주인님께서는 한국으로 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고 하면서 천천히 방도를 구해보자고 하시었다. 정말로 한국으로 가기 힘들단 말인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말인가? ◇1996년 4월 10일 수요일 (비) 이날은 비가오니 우리 5식구만 집에있게되었다. 창밖의 비가 내리니 쓸쓸한 기분으로 우리 가정이 걸어온 노정에 대해 더듬어보게 되었다.내가 떠나올때 정다운 동무들과 이별할때 우리는 식량구하러 함북도 무산군으로 간다고 하며 헤어지던 일이 오늘도 나의 눈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나는 중국에 와서 고마운 분을 만나 생일을 매일같이 맞다시피 하는데 북조선의 나의 동무,○○ ○○ 지금 먹을 것을 제대로 먹고 학교에 다니는지 아 그립구나. ◇1996년 4월 11일 목요일 (맑음) 유달리 날씨는 화창하고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이 해도 나만이 비치는듯 싶었다.나는 해를 보며 해는 하나이지만 무엇때문에 북조선어린이들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려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용사로운 품인가? ◇1996년 4월 12일 금요일 (맑음) 이날은 우리형님이 강가로 놀러나가자고 하여 우리3형제는 강가로 향했다. 강가로 나가는 우리의 마음을 기뻤다. 강가의 나무들도 우리를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우리 3형제는 강변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이때 형님이 민들레꽃 한송이를 뜯으며 북한에서는 이 민들레꽃이 피기도전에 다 뜯어먹는다고 하였다.나는 형님의 말을 들을때마다 북조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1996년 4월 13일 토요일 (흐림) 아버지 어머니는 오늘도 한국사람을 만나러 시내갔다가 끝내 한국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996년 4월 14일 일요일 (맑음) 집주인은 우리들 거처를 찾자고 안도현으로 갔다고 하였다.우리는 한국을 못가고 안도현으로 가면 장차문제는 어떻게 되겠는가고 생각하였다.몹시 근심속에 하루를 보냈다. ◇1996년 4월 15일 월요일 (맑음) 이날은 내가 이국땅 중국에 왔지만 북조선 생각이 간절하다.왜냐하면 이날은 어버이 수령님께서 탄생하신 날이라북조선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이날은 어린이들이 소망이 풀리는 날이다.왜냐하면 1년동안 먹어보지못한 사탕,과자를 먹어보기 때문이다. 나의 동무들에게도 차례가 가겠지. 동무들아.오늘은 너희들도 기쁘겠구나. 내눈에 선하다. 금철이 성국이 너희들은 지금 사탕과자를 먹으며 좋아하는 것이 눈에 삼삼하다. ◇1996년 4월 16일 (흐림) 오늘 아침은 북경으로 간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기뻐하시었다. 처음 우리아버지께서는 한국 대사관으로 가보자고 주인께 말하니 주인께서는 대사관 가보나마나 한국가기 힘든데 이왕 목숨을 내걸고 온바에야 한번 대사관에 가는 것이 옳은것 같다고 하시면서 가기로 결정했다. ◇1996년 4월 17일 수요일 (갬) 식당집 아주머니께서는 북경으로 갈때 차안에서 먹을 도중식사도 준비하느라고 바삐 다니시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한국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돈 500원을 동무네 집에서 꾸어주면서 이번에 북경에 가면 말도 모르니 찾아가기 힘들다고 하며 자기 아들과 같이 가라고 하시었다.이날저녁 아버지,어머니께서 북경으로 떠나시었다.
  • 세뇌된 소년의 탈북고뇌(사설)

    어린 형제를 포함한 북한의 두 가족이 자유를 찾고 굶주림을 면하려 두만강과 서해 두 차례의 사선을 넘어 자유와 풍요의 땅에 안겼다. 북한주민의 여러가지 참혹한 사정을 우리는 김경호씨 일가 등 여러 귀순자와 외국인방북자의 증언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번에 온 14세 소년 김해광군의 지난해 3월 탈북당시 일기는 보다 애처럽고 실감 있게 북의 상황을 전해준다.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6년생에 해당할 그의 일기는 아울러 그 또래 북한 청소년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어 우상숭배식 체제교육·세뇌교육의 무서움을 실감케 해준다. 북한의 중산층에 속하는 해광군 일가도 굶주림을 면할 길이 없었다.해광군은 42명인 한 학급 학생 절반이 배고픔 때문에 결석하는 참담한 현실을 겪고 또 열차간에서 굶주린 청년이 주위의 외면속에 아사하는 끔찍스론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지경임에도 해광군은 일기에서 「나라를 배반하고 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일)를 떠나자」는 아버지의 말에 본능적으로 반발하고 있다.친애하는 지도자의 품을 떠나 어찌 살겠는가고.인간의 가장 기초적 욕구인 먹는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못하는 북한정권이 지금 어떤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씨 일가처럼 공개처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러시아로 탈출,북한측 체포조와 중국 공안요원의 눈길을 피해가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탈북자가 2천명은 될 것이란 추계다.이중 700명가량은 남으로의 귀순을 원하나 외교적 마찰가능성 등으로 실현이 어려운 실정이다.중국·북한측 접경지대경비는 갈수록 삼엄해지고 있다. 자유의 땅을 밟고 안도하는 이들의 모습에 남아 있는 탈북자의 참상이 겹쳐 보인다.체제붕괴우려로 국경을 봉쇄,주민을 굶어 죽게 한다면 이는 범죄행위다.그런 정권이 존립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 김영진씨 둘째아들 해광군의 탈북기/우리가족 로정의 일기 전문:Ⅰ

    ◎“탈북=지도자 배신” 생각들어 갈등/농촌일손 가들랴 폐품 모으랴… 공부시간 몇이나/기차안서 굶주려 사람 보고 “누구때문” 울분 22일 귀순한 김영진씨 일가의 탈북기록인 김씨의 둘째아들 해광군의 「우리가족 로정의 일기」는 우리 맞춤법에 틀리거나 낯선 북한용어도 있지만 생생한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살려 게재했습니다. 나는 애어린 14살 아이이지만 살길을 찾아떠나가는 노정을 기록하여 어느때에 이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며 북조선 나의 동무들이 이 글을 볼 수 있을까 손꼽아 기다리며 한자 두자 일기로 적고저 한다.내가 살던 고향 집 앞에는 들판,뒷산 옆에는 4월,5월이 되면 과수나무들이 흰색옷을 입는듯 만발한 꽃으로 봄을 알리는 배나무들이 지켜섰습니다. 아름다운 내고향과 정다운 동무들을 버리고 나는 왜 떠나야 했는지,…. 그것는 배고픔에 못이겨서인지 아니면 북조선의 무상교육 무상배려가 좋은데 내가 일년에 공부하는 시간이 도대체 몇날,몇시간이 되었던가. 북조선에서는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배우는 시간보다 농촌자원에 동원했고 폐철모우기 폐유리모우기 폐고무 폐동 등등,모우기를 하루도 그칠날이 없으니 그런것이 어디에 있으량 하는수없이 나의 동무들은 선생님의 성화에 못이겨 공장,농장 주민의 것을 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것이 도리어 나라에 좋은일 한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도적질을 배워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우리 학급 인원은 42명이다. 거기서 학교에 오는 동무들은 하루에 절반밖게 못온다.절반숫자의 동무들은 왜 학교에 오지 못하였던가? 그것은 참기어려운 배고픔때문이다. 나는 정말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어디로 가야 배움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1996년3월18일 월요일 날씨 맑음 이날은 정든고향,정다운 동무들과 이별하고 3월19일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향하였다. 기차에 오른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지?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집을 떠나 다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침침컴컴한 기차에 올라서니 사람들이 밀고당기고 힘내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넘어질듯 하였다. ◇1996년3월20일 수요일 이날도 기차안에서 무대기였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사람들이 서로 붐비면서 자기보따리를 찾는 사람,아이들이 배고파 우는소리,여성들이 신경질적으로 아우성치는 소리에 기차간은 그야말로 난장판 수라장이었다. 더욱이 내가 목격한 것은 굶주림에 시달려 숨을 방금 지울듯한 한 청년이 기차한막판에 누워 있었다. 그누구도 그사람을 동정과 위안해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끝내 그사람은 굶주림에 못이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처참한 참상을 보고 울분을 금할수 없었다.나는 처음으로 어린 나이에 내눈으로 직접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학교에서 공산주의 도덕교양을 받을때 웃사람을 존경하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며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교양을 받은 나로서 아직도 그참상은 나의 눈앞에 생생이 나마있다. 어째서 이 비참한 참상,한 인간의 운명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는가? 아직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과연 누구탓이며 누구 때문인가? ◇1996년 3월21일 목요일 지루함을 느끼면서 타고온 기차는어느덧 끝내 목적지 무산읍에 도착하였다. 이날은 마을이 서글퍼서 인지 하늘 그름을 뭉게뭉게 나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목적지인 외할머니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는 없었고 누나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무산에서는 외할머니네 생활처지는 내고향의 생활처지와 다름이 없었다. 피곤한 나머지 나는 할머니가 들어서 오시는줄도 모르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1996년 3월22일 금요일 날씨(맑음) 아침 새벽에 나는 잠결에 할머니와 어머니 간에 말씀하는것을 들으니 먹을것이 없어 풀뿌리로 끼니를 채우며 겨우 장사를 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너희들이 또왔으니 반가움대신 근심이 된다고 걱정하는것이 였다.나는 비롯 나어린 마음이지만 또다시 마음속 충격을 받았다. ◇1996년 3월23일 토요일 맑음 아침에 깨여나 보니 벌써 할머니는 장사를 나가고 없었다.나의 아버지니와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무슨 토론을 하고있었다.그때나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앞으로 우리들의 살길을 찾는 심정에서 모데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아버지어머니한테 묻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말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을 강냉이 뿌리로 만든 국수로 대충끼니를 하고 우리 온가족은 두만강 구멍을 나갔다. 두만강 기슭을 따라 얼마쯤 내려가니 유달리 화려한 집이 두만강 건너에 있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집은 남조선 사람들이 와서 지은집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때에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여 남조선 사람이 자기 나라도 아닌 중국땅에 와서 훌륭한 집을 지을수 있는가고 생각하여 나는 이사실을 알고 싶었지만 부모님한테 선듯 묻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께서 하는 말씀이 이제는 더는 북조선에서 살길이 막막하여 더는 살수없으니 너희들이 보다시피 할머니에 집도 생활이 구차하며 하루하루끼니를 이어가는 형편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아버지에게 정확한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살길은 다만 남조선에 가야만이 너희들은 공부도 마음대로 할수있고 마음놓고 배불리 먹을수도 있고 희망의 날개를 펼칠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였다. 이때 나는 아버지가 나라를 배반하고 친애하는 지도자품을 떠나자고 여기로 데리고 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때 나는 나의 아버지이지만은 나쁜 사람이 아닌가고 생각되어 내 생각대로 절대로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품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올리었다. 이때 나의 형님 누나는 이구동성으로 나의 말을 찬성하였다.우리 행동을 보신 아버지께서는 먼 남쪽하늘만 쳐다보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였다. 침묵을 지키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중 어머니께서는 그러면 너희들은 어디로 갔으면 좋겠는가? 우리는 집도없고 재산도 다 팔고 할머니를 크게 믿고 왔댔는데 보다시피 할머니네 집 신세역시 구차하여 먹을것이 없어 하루살이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우리까지 어떻게 같이 있겠는가고 하였다. 어머니 말을 듣고 우리 형님은 우리를 데리고 한쪽에 가서 말을 좀 하자고 하였다. 나의 형님은 우리보고 너희 생각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이때 나와 누나는 한결같이 우리는 절대로 지도자동지품을 떠날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 형제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침묵을 깨뜨리면서 하는 말씀이 너희들은 지도자 동지품이 좋다고 하지만 우리 온집안을 거처하여 먹여 살릴수가 없을 뿐만아니라 아버지는 이제는 고향으로 갈래야 갈수가 없는 몸이라고 말하였다.내가 왜서인가고 물으니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몇년전부터 남조선 방송을 들으면서 남조선은 자유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었다. 또한 15명을 조직하여 북조선정치는 불모순 정치며 남조선정치는 자유정치라는 것을 선전하던중에 아버지는 노출되어 갈 수 없는 문제라고 알기싶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형님은 잘돼도 우리아버지 못돼도 우리아버지인데 아버지 뜻을 따르자고 말하였다. 나는 이때 생각이 많았다. 하나는 나의 아버지이고 하나는 조국의 품이었다. 이 갈림길에서 나의 심정은 아버지와 이별하고 싶지 않고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현실은 하나의 길만 선택하여야 했다.하지만 현실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본 선차적 문제로 생각할때 아버지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 상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께서는 명령하다싶이 요구성을 높여 무조건 남조선으로 가야만이 삶의 길이라는 것을 결심하면서 너희들은 꼭 부모들의 의향대로 움직이라고 강박하는 것이었다.아버지께서 결심하신 그날 저녁 밤10시부터 중국도강준비에 들어갔다. 음력 2월6일이라 조각달은 지고 두만강 기슭옆에 캄캄한 밤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 기슭에 가깝게 접근하였다.은밀히 접근하여 새벽2시까지 정찰하면서 보호병 움직임,조명등,불바침의 시간적으로 하산하여 아버지께서 명령을 내리시었다.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는 부모님들은 우리를 꼭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백포로 우리를 위장시켜 한치 한치 두만강을 도강하기 시작했다. 끝내 새벽 3시30분에 성공하여 중국땅을 밟게 되었다. ◇1996년 3월 24일 일요일(맑음) 이날은 유달리 날씨도 쨍쨍하게 맑은 날씨였고 하늘도 우리를 도와주는듯 기분이 상쾌하게 날씨가 맑았다. 새벽4시에 중국 조과향에도착하여 산에 오르기 위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해 50도가량인 벼랑급한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자니 급한 벼랑에서 아차 한발 실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아슬아슬한 벼락산이었다.이때에 어린 여자의 몸으로 산을 오르는 나의 누나는 기진맥진하여 겨우 형님의 도움을 받으며 산등성이에 올라 섰을때 새벽 6시30분이 되었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아침식사 준비에 굴뚝에서 연기들이 뭉게뭉게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때 나의 정든 고향 생각을 하며 다시한번 강건너 북조선을 바라보았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사람들이 볼수없는 산에 좀더 들어가 불을 피우고 아침식사를 하자고 하는 말에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또다시 우리 일행은 지친 발길을 돌리며 눈이 무릎까지 오는 북쪽 산으로 향했다. 1시간쯤 눈길을 걸어 나무가 우거진 깊은산에 불을 피울장소를 찾았다. 우리들은 불을 피우고 젖은옷을 말리며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 물이 없어 눈을 녹이며 물을 만들어 먹었다.식사를 끝낸후 피곤에 몰려 나도 모르게 잠에 떨어져 꿈나라로 갔다. 꿈속에서 나의 동무들이 나를 보고 나라를 배반한 변절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꿈을 꾸고 있을때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는 바람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때 나무하러온 조선족 중국부부가 올라오고 있었다.그들이 하는 말이 북조선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물어볼때 우리 온가족은 어쩔바를 몰라 몹시 당황하였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자기는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북조선 생활정황을 잘알고 있으니 우리를 동정하여 말하면서 자기 집으로 내려가자고 하였다.우리는 중국집에 들어섰을때 나는 아주 놀라며 이집은 중국에서 제일 부유한 부자 집이 아닌가고 생각하였다. 집에 들어서니 한눈에 안겨오는 것이 냉동기 텔레비전 재봉기 등 가정품들이 일제히 꾸려져 있었다. 나는 이집 주인님이 여기에서는 이밖에 고깃국을 정상적으로 먹는다고 할때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이때 어머니께서는 이것이 사실인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다시 물어보시었다. 주인은 웃으며 중국은 개방이후 발전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보다시피 좋다고,집집마다 생활형편이 모두가 이정도는 된다고 하면서 우리집은 보통 생활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중국땅을 처음 밟았을때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 부부가 나에게 준 첫인상은 정말로 내가 상상도 하지못한 인상이었으며 자연적으로 중국과 조선을 대비해 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중국땅에 처음와서 만난 사람은 담배농사를 지으며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을 때어 온실관리를 하고 있는 집이다. 밤11시가 되도록 주인님의 말을 들으니 정국정황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집주인은 우리에게 중국 낡은 옷이지만 조선옷과 바꾸어 입혀주면서 화룡현까지 갈 차비를 주어 우리일행은 버스를 타고 화룡까지 수월히 오게 되었다. ◇1996년 3월 25일 월요일 (맑음) 화룡시에 들어서니 북조선에서 볼수없는 휘황하고 유명한 시장거리,사람마다 웃음이 가득찬 거리,생기발랄하고 환희가 넘치는 얼굴들.그모든 모습들.없는것없이 차려놓은 시장과 과일류,복장류,당가루류 등등 없는 것없이 그득히 차려놓는 시장거리 그야말로 영화의 한장면을 펼쳐 놓은듯 하였다. ◇1996년 3월26일 화요일 (흐림) 우리일행은 노비가 떨어지며 화룡시에서부터는 도보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상오 9시30분부터 걷기 시작한것이 어찌 피곤하고 힘들던지 저녁 10시에 서성명함에 도착하였다.한밤중에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오니 잠자리가 근심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한집에 들어가 길가는 손님이니 하룻밤 쉬고 가자고 애원하고 사정하였다.첫집에서는 안되고 열집만에 애원하던중 11번째 집에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밥도 주고 잠도 잘수 있게 되었다. ◇1996년 3월27일 수요일 우리일행은 도보로 걸어서 연길시내에 도착하였다. 연길시내에 들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한국사람만 만나면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 한국사람을 찾았다.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하려고 공동전화 하는 곳에 가니 한아주머니가 우리를 보고 북조선에서 오지 않았는가 하며 자초지종을 물으며 반갑게 대하는 것이었다.그는 북한에 오빠가 있다고 하며 북한실정을 물어 우리는 북한생활 형편을 말하며 우리는 망명자가 아니라,중국에 친척방문왔다고하였다. 박아주머니는 우리는 북조선돈 3천원을 가지고 중국돈도 바꾸어주어 90원을 생활에 보탰다. ◇1996년 3월 28일 목요일 연길시 장백공사 리화의 김래삼아저씨네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이집은 채소농사를 하며 살아가는 집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대해주면서 하는말이 어째서 온 가정이 한창 공부시킬 나이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먼길을 떠나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흑룡강 오상현에서 빚에 시달려 빚재촉에 못견디어 살수없어 연변에 친척을 찾아온다고 말하였다. 살수없이 연변에 친척 찾아 온다고 말하였다. (이말은 로라를 처음 만났던 부부가 이렇게 알려 주었다)
  • 불가리아 “오늘 총파업”/정권퇴진시위 전국 확산

    【소피아 AFP 연합】 불가리아 사회당 정권의 퇴진과 조기총선 실시를 요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가 12일 연사흘째 계속되고 있으며 노조가 선언한 총파업이 지지를 확대해 가고 있다. 수도 소피아 도심에서는 3만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이날 사회당에 경제난에 책임을 지고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야당을 지원키 위한 시위를 벌이며 『살인자,빨갱이』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불가리아 라디오는 이날 중부의 가브로보시,북부의 루제시 및 스비코프시,남서부의 사모코프시 등 4개 도시에서 주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에 항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의사당 주변에서는 11일 1만명의 시위자가 경찰과 충돌,25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었다. 한편 부두노동자,광부,택시기사들은 노조들이 정부에 대한 압력을 강화키 위해 13일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총파업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