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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 ‘유럽 편입의 꿈’ 이뤄지나

    TEXT 아시아 대륙과의 경계에 위치해 오래전부터 유럽의 일원이 되길 동경해온 ‘영원한 변방’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 협상이 3일(현지시간) 시작됐다. 터키가 지난 1959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처음 가입 신청서를 낸 지 46년 만에 비로소 협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날 룩셈부르크에선 이를 축하하는 행사가 압둘라 굴 터키 외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터키없인 기독교 친교모임에 불과” 여느 국가와 달리 터키의 가입 협상 시작은 그 자체가 상당한 비중과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국민 다수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어 터키의 EU 합류는 유럽의 기독교 문명과 서아시아 이슬람권의 화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레젭 타입 에르도간 터키 총리가 “(EU가) 국제적인 강자가 될지 아니면 기독교 모임으로 전락할지 기로에 서 있다.”면서 터키 없는 EU는 기독교권의 친목 모임에 불과할 것이라고 압박한 것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키프로스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반대하지 않도록 설득해 협상을 측면 지원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EU 가입을 지렛대로 터키의 비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바로잡고 후진적인 산업 구조를 뜯어 고쳐, 결과적으로 이슬람권 전체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매력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5개 회원국 정상들이 터키와의 가입 협상 개시를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남짓 회원국간 이견을 조정하는 작업이 진행될 정도로 터키 가입을 둘러싼 난제들은 산적해 있다.●“걸림돌 많아 2020년에야 가입” 터키 가입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유럽의 식구가 되기엔 너무 가난하고 7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EU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특히 이주 노동자의 대거 유입을 우려,25개 회원국 국민들의 터키 가입 지지율은 35%에 그쳤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EU 헌법 부결에도 터키 가입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오스트리아는 특히 유고 전범 문제 해결을 위한 지렛대로 삼으려고 터키 가입을 극력 반대, 정회원국 대신 ‘특권적 협력자’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EU 외무장관들은 30시간 넘는 설득작업 끝에 오스트리아의 동의를 얻어, 협상 개시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U 관리들은 가입 협상 착수가 결코 가입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정치 개혁부터 인권, 소수민족 보호, 민간의 군 통제 회복, 관세동맹, 농업 및 경쟁정책에 이르기까지 무려 35개가 넘는 개혁 과제를 터키 정부가 이행하는 것을 점검하면서 가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에게해를 마주한 영원한 라이벌 그리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남키프로스 승인을 터키 정부가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점,1차대전때 아르메니아인 100만명의 학살 책임을 회피하려는 터키 국민들의 태도도 걸림돌이다.이에 따라 EU 안팎에선 2020년에야 터키의 가입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統獨 15주년, 빛과 그림자] (상) 베를린 현지 르포

    [統獨 15주년, 빛과 그림자] (상) 베를린 현지 르포

    수도 베를린을 비롯해 독일 전역에서는 지난 3일 크고 작은 통독 15주년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분위기는 지난 1990년 10월3일 당시 총리로서 통일의 주역을 맡았던 헬무트 콜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독일이 분단의 역사에 종말을 고한 첫 해의 행복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옛 동독 지역 주민들 사이에 자괴감과 실망감이 팽배하고 심지어 이전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어느덧 통일 15주년을 맞은 독일을 찾아 통일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봤다. |베를린·포츠담 함혜리특파원|통독 기념일인 3일 베를린 시내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는 거대한 축제가 열렸다. 록밴드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나들이 나온 시민과 관광객들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언제 분단시절이 있었느냐는 듯 축제 분위기에 도취해 있는 젊은이들 사이로 간간이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도 눈에 띈다. 소시지와 감자·버섯 등을 안주 삼아 맥주잔을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흥겹다. ●통일의 두 얼굴 전날 방문했던 베를린 인근 포츠담시의 축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포츠담시는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의 주도로 동독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연방주가 돌아가면서 통독 기념행사를 주관하는데 올해는 마침 브란덴부르크주가 주관했다. 포츠담 시내 중심부의 루스트 가르텐(즐거움의 정원)에서는 ‘미래가 자란다-통일 15주년’이라는 주제로 곳곳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콘서트, 메이크업쇼, 헤어쇼 등 각종 축하행사가 열렸다. 가족·친구들과 어울려 나들이 나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시민들의 표정은 그러나 그다지 밝지 않았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 공연을 감상하고 있던 클로프트 부부에게 지금의 생활이 행복한지 물었다.50세 정도 돼 보이는 클로프트가 오른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보인다. 그저 그렇다는 뜻이다. 통일된 후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은 그는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90년 6.4%였던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2004년 19.5%로 치솟았다. 서독 지역(8.9%)의 두 배 이상이다. 브란덴부르크주의 경우에는 공식적인 실업률이 25%에 달하고 실제 실업률은 이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18살 된 딸 카트린과 축제를 보러 나온 마리아는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좋은 가전제품을 갖추게 된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기도 하지만 과거가 그립기도 하다.”고 말했다. ●멈춰 버린 경제성장 외형상 통일은 독일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틀림없다. 옛 동독 지역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다. 동독 지역의 개인소득은 서독 지역의 83%까지 올라가 1991년에 비해 2배 이상 높아졌다. 주거비용과 공공요금까지 감안하면 87%에 육박한다. 통일은 또 동·서독인 모두에게 ‘반쪽 독일인’이라는 문화적·심리적 콤플렉스를 완전 해소시켰다. 동독 지역의 환경은 개선됐고 인프라도 많이 구축됐다. 법체제도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과 문화재도 복원됐다.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같은 생활수준의 향상은 동독 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일을 해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서독의 동독에 대한 재정이전 덕분이다. 독일 정부는 통일이 이뤄진 1990년 이후 무려 1조 2400억유로(약 1550조원)를 옛 동독 지역에 쏟아부었다.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약 4%에 해당하는 850억유로가 투입된 셈이다. “문제는 투자에 비해 효과가 미미하고,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동독 지역의 성장이 멈췄다는 것”이라고 유력지 디벨트의 우베 뮐러 기자는 분석했다. 통일 직후인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동독 지역은 서독 지역보다 높은 경제성장을 보였다. 동독의 1인당 GDP는 1991년 서독 지역의 42.3%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해 1996년 67.8%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성장을 멈춰 버렸다.2004년의 경우 1인당 GDP는 서독의 67.2%에 해당한다. 동독 지역의 민간경제가 너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독일 전체의 상장기업 가치가 21조유로인데 이 가운데 동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0.1%(14억유로)에 불과하다. 연매출 500만유로 이상인 기업 중 11.2%만이 동독 지역에 소재해 있다. ●인구이동 심화 통독 이후 동독의 인구는 140만명이 줄었다. 이중 60%가 동독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다. 특히 일할 능력을 가진 젊은 층의 이주비율이 높다.IWH연구소에 따르면 1991년 이후 동독 지역의 노동가능인구(15∼65세)가 110만명 줄었다.2004년 동독을 떠난 사람 중 54%가 18∼30세의 청년층이다. 독일 정부는 지금까지 1600억유로를 사회간접자본 확충, 주택건설 등 인프라 구축에 투입했지만 투자효과는 미미하다. 프랑스 경제지 레제코는 “라이프치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늘어선 대부분의 건물이 텅 비어 있는 것만 봐도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건물이 낡아서가 아니다. 대부분 새로 지어지거나 증축된 건물이지만 인구가 줄어들고 일자리도 없어지면서 사람들이 떠나간 탓이다. 동독지역에는 비어 있는 주택만 100만여가구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5년간은 인구이동이 더 두드러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인구 고령화와 낮은 출생률까지 겹쳐 2020년에 인구는 현재보다 11%가 줄어들고, 노동가능인구는 22%가 줄어들 것으로 추산된다. ●과거에 대한 향수 독일 정부는 동독 지원금 부담으로 재정상황이 유럽연합(EU)의 재정 안정화 조약을 위반할 정도로 악화됐다.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었지만 생산성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낮은 경제성장, 높은 사회보장 비용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만들어 버리고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 정부의 동독 경제 통합 노력이 성과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정치적인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일방적인 원조에 ‘중독’된 동독 주민들은 높은 실업률과 경제난을 정치권 탓으로 돌리며 기존 정치권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동독 지역 주민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헤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차기 총리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라고 지적했다. lotus@seoul.co.kr ■ 동독지역 주민 슐츠 “기존 일자리 90%가 사라져 월급 없지만 연금이 더 많아” |베를린 함혜리특파원|“감격의 눈물이 복받쳐 올라 참을 수 없었다. 밤에 친구들을 모두 깨우고 우리 집에 모여 소중한 날 마시려고 지하창고에 간직했던 포도주를 따서 축배를 들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1일 저녁 옛 동독 지역의 알렉산더 광장 한 모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맥주집. 아돌프 슐츠(65)는 통독 당시를 회상하며 다시 한번 눈물을 그렁거렸다. 기자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던 그는 “한국 국민도 빨리 통일의 감격을 맛보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슐츠는 베를린 지역의 일간지 베를리너 자이퉁의 납활자 식자공으로 일했다. ▶독일이 통일된 뒤 피부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일자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동독은 실업이 없었다. 기존의 일터가 90% 이상 사라졌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동독 시절에는 당원이 되고, 당에서 정해 주는 곳에서 일을 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긍정적인 측면의 변화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표현과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여행할 수 없었고 곳곳에 경찰이 있고 당원이 있어서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당에 부정적인 얘기를 하면 곧바로 강등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했다. ▶물가가 많이 올라서 힘들지 않나. -빵이나 맥주 같은 기본 생필품은 예전이 물론 더 쌌다. 하지만 쓸 만한 가전제품이나 고급품의 경우 구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예전에 동독산 자동차 한 대를 사려면 13년을 기다려야 했다. 웬만한 것도 신청하고 나서 6개월을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지금은 그런 문제가 없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예전이 좋았던 것도 많다. 교육 시스템은 나라 전체가 동일했기 때문에 학교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주마다 시스템이 달라졌다. 동독에서는 모든 직장에 보육시설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일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모두 무료였다. 아이들은 무사히 잘 자랐지만 지금은 아이들 키우기가 힘들다. 마약이나 부랑자들로 인한 범죄도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 체제로 돌아가기를 원하나. -결코 아니다. 자유가 있는 지금이 좋다. 생활도 솔직히 많이 좋아졌다. 과거에 노동으로 벌었던 월급보다 지금 받고 있는 연금이 많다. lotus@seoul.co.kr
  • 29일 개봉하는 ‘강력3반’

    29일 개봉하는 ‘강력3반´(감독 손희창, 제작 씨네넷)의 미덕은 대한민국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 영화라는 점에 있다. 범인들과 권총 대결을 벌이고, 차량으로 추격하며 도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존의 할리우드나 홍콩 누아르식 경찰 액션 영화와는 궤를 달리한다. 악에 맞서 싸워 정의를 지키는 영웅담이 아닌 사람 냄새 폴폴 나는 우리네 경찰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다. 똘똘 뭉친 사명감으로 마음만은 인터폴이지만, 현실은 팍팍하기만 한 대한민국 경찰의 초라한 현주소를 초년병 형사 김홍주(김민준)의 시선을 통해 풀어낸다.“범인들이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값비싼 음식 먹고, 날쌘 외제차 타고 도망칠 때, 우리는 좁은 차안에서 빵 먹어가며, 새우잠 자고 느려터진 경찰차로 범인을 뒤쫓는다.”는 그의 대사에 영화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압축돼 있다. 영화는 명쾌한 캐릭터 설정과 열악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사들의 애환에 초점을 맞추며 호기롭게 시작한다.3초만 봐도 범인인지 아닌지 파악 가능한 능력의 신참 김홍주, 강력계 15년 차의 베테랑이지만 지독한 건망증을 지닌 문형사(허준호분), 죽어라 노력하지만 허탕만 치는 재칠(김태욱), 그리고 매일 아내에게 구박만 받는 육반장(장항선). 이들이 모인 강력3반은 매일 ‘고과와의 전쟁’을 벌인다. 잡범이라도 잡아 실적을 채워 수사비 삭감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도 쉽지 않은 일. 어느 날 우연히 잡은 잡범이 거대한 국제 마약조직의 중간거래상인 것을 안 이들.‘대박’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직접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초반의 참신함은 진부함으로 덧칠돼 가는 느낌. 늘어지는 스토리 전개와 다소 과장되고 작위적인 상황 설정도 그 이유지만, 경찰을 지나치게 의식한 듯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불쑥불쑥 등장하는 필요 이상의 ‘형사 고충론’은 ‘과유불급’을 느끼게 한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됐다면 더 많은 공감을 샀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15세 이상 관람가.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이집이 맛있대] 진짜 굴비를 찾아서 광주 치평동 ‘황복’

    [이집이 맛있대] 진짜 굴비를 찾아서 광주 치평동 ‘황복’

    예부터 굴비는 ‘밥도둑’으로 통한다. 짭짤하고 쫄깃한 맛에 취하면 밥그릇이 금세 비워지기 때문이다. 참조기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염장한 뒤 해풍에 말린 영광 법성포 굴비는 수라상에 오른 진상품이었다. 이런 굴비맛을 도심에서도 즐길 수 있다. 광주시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 ‘황복’은 이런 굴비의 참맛을 즐길 수 있는 도심의 굴비정식집이다. 법성포 굴비만을 고집하며, 조리방식이 독특해 아주 짜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이 음식점은 산지에서 들여온 굴비를 7∼10일 동안 숙성시킨다. 이를 쌀뜨물에 2시간가량 담가 짠맛을 어느 정도 없앤다. 이 과정에서 육질도 씹기 알맞게 부드러워진다. 불의 세기도 굴비의 몸체에서 기름이 빠져 나오고 누릿하게 익을 정도로 조절한다. 굴비맛은 원재료가 크게 좌우한다. 이 음식점은 산란을 위해 서해안으로 회유하는 참조기가 음력 3월 중순쯤 영광 칠산 앞바다를 지날 때 잡은 것을 골라 쓴다. 알이 충실하고 황금빛 윤기가 나는 최상품이다. 이 때 잡힌 참조기는 1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염장한 뒤 서해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북서풍)에 건조한다. 이런 굴비만을 사용해 만든 주메뉴는 ‘굴비 정식’이다. 정성스레 마련한 구운 굴비와 참돔·전복·광어 등이 어우러진 회가 추가로 딸려 나온다. 밤·무화과·대추 등을 안에 넣고 쪄낸 단호박, 녹두 빈대떡 등도 곁들여진다. 분말 녹차와 얼음을 띄운 찬물에 밥을 말아서 잘게 찢은 굴비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찬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장국물을 주문하면 된다. 주방장 김상협(42)씨는 “계절별로 굴비 종류를 다양화해 손님의 입맛에 맛게 요리를 내놓을 예정”이라며 “굴비 맛에 반한 단골 손님이 늘고 있다.”고 자랑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청계천 주변 5색 맛지도

    청계천 주변 5색 맛지도

    가슴 설렘 속에 새물맞이를 기다리고 있는 청계천. 가족과 함께 혹은 연인의 손을 잡고 새롭게 태어난 청계천 길을 걸어 보자.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는 맛집도 한번 둘러 보자. 일상의 작은 행복, 삶의 여유란 바로 그런 데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종로와 청계천, 을지로 일원은 예부터 시장통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식당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음식천국을 이룬 곳.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가는 골목에 있다고, 겉모습이 꾀죄죄하다고 선뜻 들어서길 망설인다면 제대로 된 맛을 놓치고 말 것이다. 편견 없는 사람만이 참맛을 즐길 수 있는 법. 청계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십년된 해장국집도 만나고 산뜻하게 단장한 신세대풍 레스토랑과도 마주치게 된다. 주말매거진 We는 ‘청계천시대’를 맞아 한 번 찾아가 먹어 보면 후회하지 않을 ‘맛집 중의 맛집’을 골라 소개한다. 글 김종면 한준규 최여경기자 jmki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We팀이 발로 그린 5색 맛지도 (1) 회·오리가 입안에서 회오리치는 맛 쫄깃한 광어회 한점 꿀꺽·회국수 후루룩 회라고 하면 일단 비싼 음식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청계4가 사거리에서 국민은행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100m쯤 가면 만나게 되는 어시장(2265-2468)은 그런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제주산 광어만을 고집하는 서민풍 맛집이다.2만원짜리 광어 한 마리를 시키면 네 명이 섭섭잖게 먹을 수 있다. 각종 야채와 회, 고추장 등을 넣고 비벼 먹는 회국수(4000원)도 별미. 회를 시키면 매운탕은 기본 서비스로 나온다. 오리 꽥꽥? 오리 냠냠! 오리고기 생각이 나면 배나무골(755-5292)로 가보자.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로 나와 50m 거리. 청계1가가 막 시작되는 지점이다.7000원 하는 오리탕정식부터 오향수육, 훈제 통구이 등 10가지 요리가 나오는 비즈니스 코스(3만 5000원)까지 다양한 구색을 갖추고 있다. 코스요리에 한해 한약재로 만든 ‘불로주’ 한 병이 서비스로 나온다. 빼놓지 마세요 미술관에서 분위기 있게 차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 이마, 맛있는 문어회와 진한 칼국수가 인기인 안동국시, 패밀리 레스토랑의 대명사인 베니건스, 세계 각국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텍사스, 소문난 평양식 냉면집인 을지면옥, 소갈비로 청계천 일대를 주름잡는 조선옥, 돌판에 구워먹는 등심이 맛있는 석산정, 입에서 살살 녹는 불고기와 냉면이 유명한 우래옥 (2) 매운맛 봐라 韓뚝배기 vs 中굴짬뽕 뚝배기 四川대왕: 우렁된장·된장찌개·순두부·김치찌개 사람 많은 종로에도 사람들이 밥집 앞에 줄서 있는 광경은 흔하지 않다. 오전 11시에도, 오후 2시에도 늘 줄을 길게 서 있는 집이 소박한 외관만큼 이름도 단순한 종로 2가 ‘뚝배기집’(2265-5744). 그많은 식당 중 왜 저 집이어야 할까. 이유는 맛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커다란 창문 너머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를 보며 줄을 서면 아주머니가 나와 주문을 받는다. 무엇을 시켜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메뉴도 단순해 우렁된장, 된장찌개, 순두부, 김치찌개 딱 4개다. 차례가 되어 들어선 실내는 아늑하다.30여명 앉을 수 있는 공간에 나무 식탁과 작은 모형 메주를 걸어놓은 황토 벽이 어우러져 시골 초가집 작은 방 같다. 앉자마자 나온 반찬 역시 소박하다. 고추 3개와 찍어 먹을 된장 약간, 열무김치, 배추김치 그리고 어묵무침. 이어 김이 솔솔 나는 흰 쌀밥과 작은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는 우렁된장찌개가 나오고 친절한 소개가 덧붙는다. “열무김치랑 고추장이랑 잘 비비고, 좋아하면 된장찌개 안에 있는 달걀 꺼내 비벼 먹어요. 밥 부족하면 말해, 더 줄게요.” 순두부찌개도 아닌 된장찌개에 달걀은 어색할 듯해도 고소한 맛을 더해 은근히 잘 어울린다. 푹 익혀 먹어도 되고, 반숙일때 밥에 넣어 비벼 먹어도 좋다. 밥에 열무김치 얹고 고추장 듬뿍 넣어 쓱쓱 비빈다. 밥 밑으로 숟가락을 넣어 뒤집으니 숨어 있던 콩나물이 딸려 나온다. 적당하게 비벼졌다 싶을 때 열무김치와 밥을 숟가락 가득 떠 한 입 넣고 씹는다. 아삭아삭한 김치와 매콤한 고추장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호호 불어 떠먹는 찌개가 너무 맛있어 정신없이 밥과 찌개에 번갈아 손이 간다. 먹을수록 구수한 된장의 맛이 새롭게 느껴진다. 뚝배기가 너무 작은 게 아쉬울 정도다. 가격이 3000∼4000원으로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푸짐한 맛까지 선사하는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이상 단골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뚝배기집’은 종로 2가 파고다학원과 YBM시사영어 학원 바로 뒤편. 오전 8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영업한다. 연중무휴. 쫄깃한 면발이 얼큰한 국물 휘감으麵 아~ 짬뽕 세월이 지나고 입맛이 변해도 자장면과 짬뽕은 우리의 ‘영원한 별식’이다. 청계천 주변에는 몇 십년 된 음식점들이 많지만 ‘짬뽕’ 하나로 60년 동안 명성을 유지하는 중국집이 있다. 바로 안동장(2266-3921)이다.2호선 을지로 3가역 사거리에서 을지로 2가쪽으로 200m 가면 만난다. 안동장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화려하진 않지만 뭔가 기품이 넘치는 간판, 단정하고 정리된 듯한 실내 분위기가 일단 마음에 든다. 자리에 앉아 주메뉴인 굴짬뽕과 볶음밥을 주문했다. 이 집에서 내놓는 짬뽕은 이른바 ‘백짬뽕’. 매운맛의 짬뽕을 먹으려면 주문할 때 매운맛이라고 꼭 말해야 한다. 일단 굴짬뽕의 국물을 맛보니 “역시”라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담백하고 진한 맛이 여느 집과는 비교할 수 없다. 면발은 수타면이라 특유의 쫄깃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문하면 바로 면을 뽑아서인지 향긋한 볶음향이 전해진다. 또한 배추, 시금치, 죽순 등 야채와 굴이 듬뿍 들어 있어 국물이 더없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야채를 살짝 데쳐서인지 씹힐 때의 아삭거림이 살아 있어 먹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매운 굴짬뽕 또한 특이하다. 우리가 흔히 먹는 빨갛고 탁한 국물의 짬뽕이 아니다. 맑은 육수에 고춧가루를 풀어 놓은 듯하다. 얼큰하고 시원하다. 볶음밥 또한 달콤한 바비큐향이 가득하고 알알이 씹히는 밥알이 별미다. 중국집의 기본은 뭐니뭐니해도 자장면. 안동장의 자장은 약간은 묽어 부드럽게 비벼지며 양파, 고기 등을 잘게 다진 것이 특징이다. 굴짬뽕은 6500원, 삼선볶음밥은 5800원, 자장면은 3300원이다. 영업시간 오전 11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로 연중무휴. 빼놓지 마세요 설렁탕의 명가인 이남장, 커다란 햄버거가 맛있는 해피버거, 돼지고기로 유명한 황소고집, 청계천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드 쿠디에, 연인이나 가족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아웃백, 깔끔한 한정식으로 젊은이들에도 알려진 한일장 (3) 닭 · 생선 · 곱창은 골목에 산다 칼국수 뚝‘닭´ 먹고 생선구이 뜯고 청계천에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먹거리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소박한 인심 속에 출출한 배를 채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우리 이웃의 정겨운 삶의 풍경까지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먹거리 골목으로 들어가 보자. 닭칼국수와 생선구이로 유명한 골목은 나래교와 버들다리 중간에서 종로 5가쪽으로 가다 보면 시장 중간에 있다. 크고 작은 닭칼국수 가게들이 저마다 원조라는 커다란 간판을 걸고 성업 중이다. 이곳 닭칼국수는 닭을 넣은 육수에 간이 칼칼하게 밴 김치를 넣고 끓여 국물이 특히 감칠맛이 난다. 부들부들하게 익은 닭의 하얀 살점을 떼어 고추장, 간장, 겨자를 적당히 섞은 소스에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일미다. 닭고기를 건져 먹고 떡이나 국수를 넣어 먹고 마지막으로 밥을 볶아 먹는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2∼3인분인 닭한마리에 1만 3000원, 국수사리 2000원, 밥과 떡사리는 1000원이다. 가격은 어느 가게나 똑같다. 닭칼국수골목 건너편에는 생선구이를 하는 집들이 한데 몰려 있다. 백열등 밑에서 뽀얀 연기를 내며 지글지글 구워지는 생선을 보면 식욕이 절로 돋는다. 굴비, 꽁치, 삼치, 자반 등 4가지 생선을 먹을 수 있다. 값은 5000원.6∼7가지 밑반찬과 순두부가 딸려 나온다. 어린 시절 연탄불에 구워 먹던 맛이 그리운 사람들은 한번 찾아 볼 만하다. 땡긴다 매콤하게 달달볶은 곱창 곱창을 좋아한다면 청계천 8가 중앙시장 입구의 곱창골목이 안성맞춤. 황학동 벼룩시장이 끝나는 쪽에 있다. 가게 입구에 있는 커다란 불판에 곱창, 대창, 막창을 넣고 볶다가 갖은 양념과 깨잎, 당근 등 야채를 한 움큼 집어 넣으면 완성. 쫄깃쫄깃한 맛이 그만이다. 연인과 소주 한잔을 하며 색다른 추억을 만들기에 제격이다. 야채곱창 7000원, 구이곱창 8000원. 청계5가 광장시장내 먹자골목은 어릴 적 어머니가 사주던 국수 맛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추억의 장소가 될 만한 곳. 시장 한 가운데 펼쳐진 난장에 먹음직스러운 만두, 순대, 국수, 나물 등이 가득하다. 가격도 정말 싸다.5가지 나물과 열무김치를 넣은 보리밥은 3000원이며, 그 자리에서 밀가루 반죽을 썰어 끓여주는 칼국수는 3500원. 또 멸치 장국에 막 삶은 국수를 말아 주고 2000원을 받는다. 빼놓지 마세요 다들 원조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한다. 닭칼국수가 예술인 진옥화할매원조닭한마리, 쫄깃한 돼지고기와 보쌈김치가 맛있는 원할머니보쌈이 잘 알려진 곳. (4) 어름어름 찾아가면 허름해도 맛짱 해장국의 지존 여러 속 풀어왔다 해장국 하면 사람들은 으레 청진동 거리를 떠올린다. 본격적인 해장국집이 생긴 것이 1945년 광복 직후, 김씨 성을 가진 노인이 지금의 청진동 청진옥 자리에 영화옥을 세운 게 처음이라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청진동 전통 해장국의 맛과 질을 넘어서는 진정한 ‘해장국 명가’가 청계천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청계천 8가와 9가 사이 한국도자기 건물 바로 건너편에 있는 대중옥. 반세기의 역사를 말해주듯 겉모습은 허름하기 짝이 없다. 마치 사진작가 김기찬씨의 골목길 풍경첩에 나오는 70년대 서울 변두리 풍경 같다.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정든 고향을 찾은 듯 편안한 느낌을 준다. 꽤 널찍한 세 개의 방을 포함해 100평은 족히 된다. 비록 몇 대밖에 댈 수 없지만 주차장도 갖추고 있다. 중요한 건 물론 음식이다. 해장국에 관한 한 대중옥(2293-2322) 은 ‘지존(至尊)’이라 할 만하다. 이곳 선지 해장국은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내장을 넣고 곤 전통방식의 해장국과는 사뭇 다르다. 대중옥 해장국엔 고기가 없다. 콩나물도 없고 무도 없고 파도 없다.24시간 푹 곤 사골과 잡뼈 국물에 우거지와 ‘찰선지’만을 넣고 끌인다. 그런 만큼 맛이 담백하고 시원하다. 해장국 끓이는 데 쓰는 된장은 직접 담근 것. 말하자면 ‘웰빙 해장국’인 셈이다. 대중옥 해장국 맛의 비결은 단연 찰선지에 있다.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대중옥 사장 이백만(59)씨의 말.“찰선지만을 쓰는 해장국집은 아마 우리 집밖에 없을 겁니다. 찰선지란 물을 섞지 않고 원피만 받아 막걸리로 발효시킨 선지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일반 ‘물선지’보다 5배나 비싸지만 찰선지는 그 맛이 훨씬 고소하고 쫄깃쫄깃하고 차집니다.” 해장국은 뜨거운 맛에 먹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곳 선지 해장국은 식어도 제 맛을 잃지 않는다. 비릿하거나 텁텁하지 않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대중옥의 주메뉴는 해장국이지만 조연격인 요리들 또한 이에 못지않다. 서울에서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송치(암소 뱃속에 든 새끼)전골, 우설(牛舌) 생구이, 겹간, 머리고기 수육, 갈비찜 등도 모두 ‘한 맛’한다. 대중옥의 또 다른 미덕은 음식 값이 싸다는 점. 선지 해장국은 4000원, 머리고기 수육은 1만 2000원, 우설 생구이는 300g에 1만 5000원, 송치전골은 2만 5000원, 갈비찜은 3만원(4인분)이다.“음식점은 만만해야지 으리으리하기만 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맛까지 떨어진다.”는 게 주인장 이씨의 소신이다. “더이상 돈욕심은 없다.”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단골로 찾아 주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 가수 현인, 영화배우 장동휘, 코미디언 양훈씨 등이 이름난 옛 단골손님. 코미디언 김한국씨, 농구선수 출신 한기범씨 등도 즐겨 찾는 편이다. 천연 옹기에 들어앉아 톡 쏠 날만 기다리는 홍어 서울 시내에는 홍어로 유명한 식당이 꽤 여럿 있다. 하지만 ‘청계천권’에서 제대로 된 홍어 맛을 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청계 8가와 9가 사이 전철 1호선 신설동역 9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는 홍어횟집(2234-1644)은 40년 가까이 홍어 하나로 승부해온 홍어요리 전문점이다. 삼합, 찜, 탕, 무침 등 홍어에 관한 모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이 곳의 홍어는 시장에서 삭힌 것을 사 온 ‘인스턴트’가 아니다. 주인이 직접 옹기에 짚을 깔고 삭혀 만든 것이다. 홍어무침에 생도라지를 까 넣어 비린 맛을 없앤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 그러나 이 집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수십개의 천연 옹기에 홍어가 저장돼 있다는 점이다.‘숨쉬는 그릇’에 담겨 있는 만큼 신선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홍어삼합과 찜, 탕은 각각 6만원, 홍어무침은 4만원(중짜 기준). 빼놓지 마세요 청계천의 야경이 아름다운 렌페, 홍어의 탁 쏘는 맛이 일품인 홍어찜이 그만인 홍어집, 만두와 찐빵만 20 여년 팔고 있는 국일분식 (5)허름한 식당이 진국이다 싼 쇼핑 아낀 돈으로 고급 식사를… 쇼핑을 끝내고 차분히 앉아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두산타워’와 재개장 준비가 한창인 ‘청대문’(현 프레야타운)이 제격이다. 두산타워 10층 이현(02-3398-0650)에서는 고급스러운 한식과 중식을 맛볼 수 있다. 사천탕면, 크릴새우볶음면 등 면류와 찌개류가 9000원선으로 비싼 편이지만 손님을 접대하거나, 회식 장소로 딱이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오후 3∼5시에는 차만 마실 수 있다. 모든 메뉴에 후식이 포함된다. 넓게 펼쳐진 맛 백화점 청대문 11층 식당가에도 추천할 만한 맛집이 제법 많다. 매콤한 낙지볶음이 일품인 해남낙지(02-2278-4162)에서는 매일 아침 전남 목포에서 가져오는 싱싱한 낙지를 내놓는다. 산낙지철판구이 1만 5000원, 불낙철판구이는 9000원. 얼큰한 연포탕(1만 5000원)은 뒷맛이 개운해 해장용으로 그만이다. 별실이 있어 회식을 하기에도 좋다. 유명한 명동교자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명동교자(02-2269-3865∼6)도 여기에 있다. 푸짐한 칼국수와 손으로 빚은 만두가 추천 메뉴. 가격은 대부분 4000원선이다. 이밖에 전라도 음식 맛을 느낄 수 있는 목포식당(02-2264-4409·청대문 11층), 과음으로 쓰린 속을 풀어 주는 해장국이 일품인 대화정(02-2267-8484)도 추천할 만하다.
  • [생활의 지혜] 굴을 깨끗이 씻으려면

    흔히 소금을 뿌려서 굴을 주물러 씻지만 무를 조금 갈아서 굴을 담가 두면 더 하얗고 잡냄새도 없어진다.
  • [서울戀街] (4) 인사동 거리

    [서울戀街] (4) 인사동 거리

    제아무리 길눈이 밝아도 인사동에서는 누군가에게 소개받은 맛집이나 술집을 한번에 찾아가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이 골목인가 싶으면 엉뚱한 가게들이 나오고, 저골목으로 가면 막혀 있고…. 인사동 거리는 600m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로 작은 골목들이 실핏줄처럼 비집고 뻗어 있어 총 길이가 20㎞는 족히 된다. 목적지를 찾지 못해도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다. 골목 중간중간 아담하고 소박한 가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다. 어린 시절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했던 기분으로 인사동을 샅샅이 뒤져보자. ■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요” 인사동의 명물 가게들은 작은 미술관 같다. 채 열 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 주인 겸 작가인 ‘시민 예술가’들이 만든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쇼핑 센터에서 구하기 어려운 기발한 창작품을 만나고 싶으면 이곳에 가보자. 아이 쇼핑만으로도 즐겁다. ●창작품 집합소, 쌈지길 최근 인사동의 최고 명물로 자리잡은 ‘쌈지길(www.ssamziegil.co.kr)’.1층부터 4층까지 이어지는 비탈길을 따라 창작 공예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자기·옷·가구·장신구 등 공예품의 모든 것을 구경할 수 있다. 유머가 있는 생활소품을 트럭에 실어 놓고 파는 ‘닭똥집’, 고양이가 있는 금속공예 장신구를 다루는 ‘성냥갑’, 전문 작가들의 작품집인 ‘손내옹기’,‘박종훈점’,‘이도공방’, 배재대학교 목칠공예과 사람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배재대조옻칠’ 등 50여개가 넘는 가게들이 모두 갤러리와 진배없다. 지하 1층 ‘황진사진관’에서는 손님의 생생한 표정을 찍어 흑백 사진으로 현상해준다. 중간 중간 잔디무늬 의자가 마련돼 쉴 수 있고,2층 ‘세이지 그린티’와 4층 ‘하늘정원’에서 녹차 음료나 생과일 주스를 마시며 한 숨 돌릴 수 있다. ●직접만든 탈과 금속공예품 파는 곳 쌈지길에서 안국역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오른편에 공예가 정성암씨가 만드는 탈 전문 판매점 ‘탈방’이 나온다. 하회탈, 본산대탈을 10∼20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만원을 넘지 않는 탈 모양 열쇠고리 등 기념품도 판매한다.734-9289. 해 모양 간판이 돋보이는 ‘제3공간’에는 금속을 이용해 만든 형형 색색 생활 소품이 가득 걸려있다. 한 개쯤 사놓으면 볼 때마다 웃음지을 것 같은 아기자기한 시계, 촛대, 옷걸이,CD꽂이를 찾을 수 있다.737-8928. ●작품 한복 사거나 구경하려면 쌈지길 맞은 편에는 연예인, 외국 대사 부인 등이 자주 찾기로 유명한 고급 한복점 ‘꼬세르(737-6587)’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과 수도약국을 맞은 편 ‘파랑돌(720-6001)’에서는 수십∼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한복을 판다. 일상 한복으로 입기엔 가격대가 높지만 생활 한복집이나 혼수용 한복가게에서 보기 힘든 특이하고 세련된 작품 한복을 볼 수 있다. ●고미술품 쉽게 사기 옛날 사람들이 만든 고미술품을 찾는다면 수도약국에서 탑골공원 쪽으로 나가는 길을 가야 한다. 골목 구석구석에 크고 작은 ‘골동품 가게’들이 있다.‘고도사(735-5815)’와 ‘동예헌(730-5550)’ 등 규모가 큰 곳에서 철마다 테마별 전시회를 이용하면 해석하기 힘든 고미술품을 쉽게 감상하고 살 수 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우리 먹을거리 즐기기 전통의 거리인 인사동 개량 한옥엔 먹을거리터들이 많다. 삐걱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마당의 나무와 꽃이 반겨준다. 비라도 내리면 풀잎마다 맺히는 물방울이 처마의 운치와도 잘 어우러진다. 높은 서까래가 뿜어내는 한옥의 고즈넉함은 음식 맛에 정겨움을 더한다. 한국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점·찻집·술집 등을 소개한다. 민가다헌 명성황후 조카인 민익두 대감의 집을 개조해 만든 퓨전 음식점.1930년대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화장실과 목욕탕을 실내에 배치한 개량 한옥으로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 15호로 지정됐다. 한옥의 서까래 아래에서 구한말 서양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아풍의 의자에 앉아 프랑스 화가 로트렉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다. 허브비빔밥 1만 5000원. 저녁세트 5만원 안팎.733-2966. 사과나무 인도 향신료를 사용해 만든 카레의 일종인 ‘달’(dal)을 닭가슴살과 밥에 비벼 먹을 수 있게 만든 치킨달밥(5000원)이 유명하다. 저녁에는 닭가슴살에 치즈를 얹어 구운 ‘닭치즈 바비큐’나 간장에 떡볶이를 절인 ‘궁중떡볶이’ 등의 퓨전안주(1만 5000원선)와 시원한 생맥주를 마셔도 좋다.1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도 있다.722-5051. 전통다원(경인미술관 내) 전통차를 마시면서 전시도 감상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다. 저택의 안채를 이용한 전통찻집으로 대청마루, 안방, 건넌방 등을 모두 터서 찻집으로 만들었다. 한옥의 넓은 마당에 앉아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8가지 한약재를 10시간 동안 다려 만든 한방 쌍화차는 6000원. 간식으로 먹기 좋은 모듬떡은 4000원.730-6305. 리틀 인디아 한국 전통의 거리에서 이국적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곳. 입구부터 장식된 인도풍 공예품들은 주인이 직접 인도에서 사온 것들이다. 직접 발효시킨 인도식 요구르트인 ‘라씨(1만∼1만 2000원)’도 빼놓을 수 없다. 사모사(인도 만두·8000원), 닭고기커리(1만 1000원)도 대표 메뉴다.730-5528. 아빠 어렸을 적에 자갈이 깔린 철로를 지나 문을 열면 어두운 실내에 옛물건들이 많다. 교복, 가방, 구식 흑백 텔레비전 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뉴판도 70년대 ‘바른생활’국민학교 교과서로 만들어 옛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야생초를 채취해 100일 동안 발효시켜 만든 것으로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산야차는 5000원.733-3126. 명상 아루이 황토와 백자갈이 깔린 마당에서는 맨발로 걸어볼 수 있다. 차를 먹으면 주인의 안내에 따라 그림명상·돌명상·선(仙)체조 등 명상을 즐길 수 있다. 손발이 찬 여성들을 위한 행복우린차, 흡연자를 위한 해맑은차, 식중독·숙취에 좋은 하늘잎차는 각각 1만원.722-6653. 신일 주머니 가벼운 데이트족들을 위한 전통 남도 음식 전문점이다. 보쌈, 재래 된장찌개, 참조기, 밑반찬 6가지, 계란찜, 수육, 굴, 홍어무침, 전, 나물이 어우러져 한상으로 나오는 신일정식은 1만 2000원으로 근처 한정식집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다.739-5548. 사원(732-3002)은 마당에 장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궁중식을 기본으로 10가지 이상의 반찬이 나온다. 사원정식은 1만원·간장게장정식은 2만원. 산촌(735-0312)은 사찰음식 전문점이다. 은은한 불경소리를 들으며 산중요리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점심정식은 1만 7000원·저녁정식은 3만원. 사천(734-5798)의 불고기 정식(1만 9000원)은 양념이 독특하다. 김유영 김기용기자 carilips@seoul.co.kr ■ 특이한 곳 찾아보기 아름다운 차 박물관 한국 중국 스리랑카 영국 등 세계 각국 110여가지의 차와 차문화를 엿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는 가야부터 조선까지의 찻잔·토기뿐만 아니라 티베트·중국의 다기류가 전시됐다. 또 젊은 작가들이 구워내는 도자기를 전시·판매하기도 한다. 대금·소금 등 국악공연도 격주로 열린다. 한옥 마당에서 차를 팔기도 한다. 명전, 우전, 세작, 황산모봉, 황차, 로즈힙, 아쌈, 실론 등 400여종의 차를 ‘티스토리’라는 브랜드로 판매한다. 관람료는 없다.735-6678(www.tmuseum.co.kr). 북스(VOOK’S·갤러리카페)VOOKS는 ‘VISUAL+BOOK+SHOP’의 합성어다. 입구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이 수천마디의 말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구호답게 그림책들이 30여평의 가게벽면에 빼곡하게 꽂혀 있다. 미술 사진 디자인 건축 등 직수입 서적이 1만여권으로 비주얼 서적으로는 시내 대형서점보다도 많다. 가격대가 수만원에 달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볼 수 있다. 독서를 하거나 세미나를 열기에도 좋다.5000원의 문화비를 내면 허브티·라테·커피 등을 보면서 책을 앉아서 볼 수 있다.737-3283(www.gallery.co.kr). 미술관 관람 인사동은 예술의 거리답게 학고재, 인사아트센터, 노암갤러리, 갤러리 타블로 등 많은 화랑들이 몰려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도 많아 들어갈 때 기죽기 쉽지만 관람료는 대부분 무료이기 때문에 그냥 가서 감상하면 된다. 사진 촬영이나 음식 반입은 금지다. 마음 내키면 인사아트센터(736-1020) 앞에서 순회버스를 타고 평창동까지 나갈 수 있다.1000원만 내면 하루종일 이용할 수 있으며 버스는 국립민속박물관, 환기미술관, 영인문학관, 이응노미술관, 김종영미술관, 가나아트센터 순으로 운행한다. 나이프갤러리 성보갤러리 골목 지하 1층에 자리잡은 이곳에 들어가면 ‘세상에 칼 종류가 이렇게 많았어?’라고 감탄할 만하다.4000여개의 번뜩거리는 칼날이 광채를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뛰어난 검법을 자랑하는 거합도(居合道) 한정욱 사범이 모은 칼들이며 판매도 한다.735-4430(www.knifegallery.co.kr) 빛나리 앤틱샵 손목시계, 회중시계, 탁상시계 등 종류별·시대별로 값을 측정하기조차 어려운 다양한 시계들이 사방에서 똑딱거린다.720-6413(www.bitnali.com). 김유영 서재희기자 carilips@seoul.co.kr
  •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제주도 비경속 숨은 과학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제주도 비경속 숨은 과학

    제주도에는 과거에 화산활동을 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368개의 오름,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용암동굴, 용암이 식어 굳어지면서 공기가 빠져나간 흔적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검정색의 현무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제주공항에서 서귀포로 이어지는 서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가면 한림읍 협재리에 한림공원이 있다. 하와이의 나무를 연상시키는 워싱토니아 야자와 카나리아 야자수가 있는 길은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식물원, 연못, 수석관, 새가 있는 정원, 협재굴, 쌍룡굴, 민속마을, 분재원 등으로 이뤄진 한림공원은 여느 공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한림공원에는 볼거리가 많지만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곳은 협재굴과 쌍룡굴이다. 제주도의 천연동굴은 대부분 용암이 흐르다 급격히 냉각될 때 그 표면과 내부의 온도 차이로 만들어진 용암동굴이다. 세계 최대의 용암동굴인 만장굴과는 다른 의미를 이곳에서 찾아보자. 용암동굴은 용암이 흐르면서 형성되기 때문에 수평방향으로 동굴의 통로가 발달하며, 용암이 식어서 굳어진 까만색의 석순·종유석·석주 등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림공원내 협재굴은 천장 틈 사이로 석회수가 스며들면서 용암동굴에서는 생성될 수 없는 가느다란 종유석이 자란다. 종유석에서 굳지 못한 석회수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조금씩 굳어져 석순도 만들어지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00년에 1㎝씩 자라며 용암동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굴이 있는 한림공원 가까이에는 바다가 있다. 바닷물이 지하수의 형태로 흐르다가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모래가 동굴 위에 쌓여서 마치 석회암 동굴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진 종유석과 석순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협재굴과 이어진 쌍룡굴은 동굴의 형태가 두 마리 용이 빠져 나온 모양을 하고 있어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쌍룡굴은 협재굴처럼 검은색의 용암동굴이 석회수 때문에 황금빛 석회동굴로 변해가는 신비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석회수가 스며들어 굳어진 모습이 폭포수처럼 보이는 것이며, 검은색의 용암석이 떨어지는 석회수로 덮어지면서 마치 황금산맥처럼 보인다. 이처럼 용암동굴과 석회동굴이 복합된 2차원 동굴은 세계에서 이곳뿐이며 천연기념물 제236호로 지정돼 있다. 약 250만년 전 한라산 화산폭발로 형성된 이 천연동굴은 당시 뜨거운 용암이 흐르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전복 껍질을 비롯한 패류화석이 발견됨에 따라 동굴 형성 당시에는 이 지역은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지난 1986년 한·일 합동 동굴조사에서 이 지역은 협재·쌍룡동굴 외에도 황금굴, 소천굴 등 20여개의 동굴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형성되어 그 길이가 무려 1만 7000m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 시스템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제주도의 숨은 비경 두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제주 여행의 중심지인 중문에 위치한 지삿개이다. 육각형의 까만색 바위기둥들이 해변을 빼곡히 메우고 파란 바닷물이 까만 바위와 부딪쳐 만들어내는 포말들이 신비롭다. 이곳에 숨은 과학은 무엇일까. 이곳은 중문 관광단지 동쪽으로 가까이 있는 대포동 해안가 주상절리로 유명하다.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나타나는 기둥 모양으로 수직으로 바위에 규칙적인 문양으로 갈라진 것을 말한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고온의 용암이 섭씨 900도 정도에서 급속하게 냉각되다가 표면에서 아래쪽으로 갈라지면서 수축이 일어나 사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을 이루게 된 것이다. 때문에 제주의 지질학적인 형성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어 관광 외에도 문화적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마광수의 섹스토리] (15) Foot Fetish

    [마광수의 섹스토리] (15) Foot Fetish

    벽을 보도록. 발 노예야, 내 발을 숭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때까지 구석에 가서 서 있어라!” ‘발 페티시(Foot Fetish)’ 클럽의 여주인 ‘지나’는 빨간 코트를 벗으면서 남자에게 명령한다. 지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남자는 여인이 걸친 무거운 비단 천, 숨겨진 긴 발톱, 하이힐의 은근한 힘을 연상한다. 다시 지나가 그에게 말한다. “너는 내 발을 숭배할 자격이 없다. 안 그런가? 나의 불쌍한 노예야.”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이한 마조히즘의 쾌감에 잠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예, 그렇습니다. 저의 여왕님. 저는 여왕님의 발을 숭배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자는 벌써 널찍한 방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며 즐거운 공포에 젖어있다. “야, 발의 노예야. 너는 이제부터 착하게 굴어야 한다. 내 친구들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도록 해라.” 남자는 그저 그렇게 생긴 보통 사람이다. 보통 키에 보통 체중, 고급 미용실에서 만진 듯한 산뜻한 헤어스타일, 투명색 매니큐어를 칠해 말끔하게 다듬어진 손톱, 나이는 마흔 서너살쯤…. 남자는 사타구니에 꽉 끼는 검은 가죽 팬티를 입은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다. 코트를 벗어젖힌 지나는 아름다운 살결의 여성이다. 검은 색 니트 캣슈트(손목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몸에 꽉 끼는 여성용 운동복)가 탄력있는 몸매를 매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나는 허벅지까지 오는 윤기 나는 비닐 부츠를 신고 있고, 귀에는 무거운 은제(銀製) 귀고리를 달고 있다. 코트를 의자 위에 던져놓은 지나는 핸드백에서 스웨이드 채찍을 하나 꺼낸다. 그리고 채찍으로 노예의 뭉툭한 고환 부근을 때리면서 계속 욕설을 퍼붓는다. “발 노예야, 이번 주일엔 어땠지? 내가 시킨 걸 다 했나?”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예는 아주 공손한 음색으로 겸손히 묻는다. “내가 너에게 선물로 준 나의 하이힐에 너의 페니스를 비비면서 매일마다 마스터베이션을 했냐 이 말이야.” “예, 그렇게 했습니다. 여왕마마께서 시키신 일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너는 내 말을 잘 듣는 노예냐?” 이렇게 말하면서 지나는 남자의 어깨를 채찍으로 내려친다. 남자는 아픔으로 몸을 떤다. “자,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할 테냐?” 이렇게 말하면서 지나는 남자의 등을 세게 채찍질한다. 그러고서 다시 덧붙인다. “발 노예, 네가 얼마나 착하게 굴었는지에 대해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예, 여왕님,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럴만한 가치조차 없지요.” 지나는 남자한테서 몇발자국 떨어져나와 발을 벌리고 선다. 그리고 양손을 허리에 얹는다. 실내는 조용하다. 차량들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닫아둔 상태이다. 공기를 가르는 채찍소리와 지나의 목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강력하면서도 교양이 있고, 그리고 명령하는 투의 지나의 목소리 이외에는……. 지나는 다시 웅크리고 있는 남자에게 명령한다. “돌아서서 나한테로 기어와라.” 말씨이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지나를 향해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와 그녀의 발 바로 앞에서 멈춘다. 바로 눈 앞에 부츠를 신은 지나의 오른쪽 발이 있지만, 남자는 수줍어 어쩔 줄을 모른다. 지나의 발 끝이 남자의 뺨에 닿는다. 남자의 페니스가 발기한다. “핥아라.” 지나는 발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남자에게 말한다. 남자는 지나의 반짝거리는 비닐 부츠에 혀를 댄다. 그리고 혀로 신발을 광택나게 닦기라도 하듯이 길고 넓게 부츠를 핥는다. ‘발 페티시스트(Foot Fetishist)’의 유형에는 세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발 숭배하기이다. 그들은 여자가 신발을 신은 채든 벗은 채든 발을 핥고 발에 키스하는 데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그 다음은 짓밟기.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남자의 몸뚱어리 위를 걸어다니거나 짓밟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세번째는 ‘거녀(巨女) 콤플렉스’ 실연하기. 거녀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남성은 숫자가 좀 적다. 그들은 상대방 여성이 거인(巨人)이고 자신을 난쟁이라고 생각하며 상대가 자기를 밟아죽이는 상황을 연기하고 싶어한다. 남자는 지나의 부츠를 오랜 시간동안 핥고 빨다가 드디어 자기의 몸뚱어리를 짓밟아 달라고 애원한다. 지나는 엎드린 남자의 등 위에 서서 사정없이 뾰족한 굽으로 짓밟는다. 그때 남자의 페니스에서 정액이 분수처럼 솟구쳐 나온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지나는 부츠를 벗고서 맨발을 드러낸다. 그런 다음 남자에게 명령한다. “이제 내 발의 냄새를 맡아라!” 그리고 이어서 덧붙인다. “발에 코를 대고서 진짜로 냄새를 맡는 거다.”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고, 지나는 의자에 앉아 있다. 남자는 지나의 발에 입술을 갖다댄다. 지나의 발냄새를 깊숙이, 그리고 허겁지겁 들이마시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이젠 발을 문질러라.” 지나가 말한다. 지나의 발은 갸름하고 발가락이 길다. 다소 짧은 새끼발가락을 빼고 나머지 발가락들은 엄지발가락만큼 길며 발톱들에는 빨간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지나의 발을 문지르는 동안 남자는 가끔씩 신음소리를 낸다. 얼굴에는 성적 흥분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지나는 남자에게 문지르는 것은 이젠 됐다고 말하면서, 엄지발가락 하나를 부드럽게 남자의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남자는 숨죽여 흐느낀다. 남자는 계속해서 열심히 여자의 발가락을 빤다. 남자는 헐떡거리면서 숨을 몰아 쉬며 신음한다. “난 잠깐 쉬고 싶다.” 지나는 남자의 입에서 발을 빼며 말한다. 남자의 얼굴에서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드러난다. 그리고 뜨거운 갈망의 표정도 드러난다. 시간이 잠시 흐른 뒤, 지나는 남자의 음낭 주변을 그물스타킹으로 묶는다. 그리고 남자가 지나의 부츠를 공손하게 신기고 있는 동안 그의 귓전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남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다. 지나는 빨간색 코트를 입는다. 남자가 지나에게 두툼한 돈을 지갑에서 꺼내어 준다. 정중한 자세로……. 남자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 집에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남자의 아내는 남편이 발 페티시스트라는 것을 모른다. 오랫동안 정상체위의 섹스만 해왔기 때문이다. 남자는 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 물론 아까 음낭에 매고 온 스타킹을 풀어 자신의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보관한 뒤의 일이다. 남자는 아내와 인터코스를 하면서 아까 가졌던 지나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페니스가 차츰 발기되어 온다. 남자의 아내는 펠라티오조차 하기를 거부하는 ‘숙녀’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삽입성교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자는 머릿속으로 지나의 긴 뾰족 부츠와 발 냄새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그러자 점점 더 또렷하게 그녀의 발 모양과 냄새가 머릿속에 떠올라온다. 그의 페니스가 드디어 아내의 질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아까 지나가 자신을 엎드려놓고 발로 밟아줬던 기억을 쥐어짜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기억은 잠시뿐, 그의 페니스는 서서히 오그라들고 만다. 그의 아내가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는 삽입성교를 포기하고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댄다. 그러고는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문다. 아내가 남편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한다. “여보, 우리 큰 병원의 섹스클리닉에라도 가봐요. 당신의 성기능이 아무래도 이상해요.” 남자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까 봤던 지나의 긴 비닐 부츠와 송곳 같은 굽이 오르락거린다. “내일은 돈을 더 줘 봐야지…. 그러면 더 오랫동안 나를 밟아줄지도 몰라….” 그는 이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긴 한숨을 몰아쉰다. 아내는 남편의 심정을 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녀도 답답한지 담배를 한 대 피워문다. 마광수는1951년 경기 수원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 ▲저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장편소설 ‘권태´ ‘즐거운 사라´ ‘불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사랑의 슬픔´
  • 무명의 독도바위 이름 생긴다

    ‘큰가재 바위, 삼형제굴 바위, 한반도 바위…’ 독도의 주요 부속도서 및 형상(形象)에 대해 고유한 명칭이 부여된다. 울릉군은 각종 지도표기 및 사진설명 등에서 제각각 표기되는 독도의 부속도서 등에 대한 명칭을 표준화하기로 했다고 29일 밝혔다. 울릉군은 이에 따라 30일 독도 관련 기관 및 단체,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 주요 부속도서 및 형상 지명 제정 공청회를 연다. 대상은 독도 동도(東島)선착장 입구의 숫돌바위 등 13개 부속도서와 서도(西島) 남단 코끼리바위 등 9개 형상이다. 울릉군은 이날 공청회 의견수렴을 통해 최종안을 만든 뒤 경북도지명위원회와 중앙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0월 말까지 지명을 확정하는 절차를 거칠 방침이다. 이에 앞서 정부는 지난달 28일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 회의실에서 울릉군 및 독도 관련 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 부속도서 등 지명에 대한 1차 의견조정을 마쳤다. 독도 부속도서 명칭의 경우 산1번지는 가재가 출현한 장소라고 해서 큰가재바위, 산10번지는 현지 어민의 구전 명칭으로 지네바위, 산25번지는 3개의 동굴이 있다고 해서 삼형제굴바위, 산73번지는 의용수비대원들이 미역채취를 많이 했다고 미역바위 등으로 각각 이름이 붙여졌다. 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씨줄날줄] 둔황석굴/신연숙 논설실장

    한국이 자랑하는 경주 석굴암 같은 사원이 한 곳에 무려 492개가 모여 있다면? 관훈클럽 주최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세미나 중 중국의 둔황(敦煌)석굴을 방문하면서 짐짓 들었던 걱정은 중국문화의 방대한 규모에 한국인으로서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우였다.2400개나 된다는 둔황석굴의 불상들은 나무(혹은 바위)뼈대에 갈대잎과 흙, 아교 등을 붙여 조성한 것이다. 이에 반해 석굴암은 순(純) 화강암이 재료다. 단단한 돌을 흙 주무르듯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불상과 부조를 빚어낸 문화로는 석굴암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둔황석굴 관람의 큰 성과였다. 그렇다고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둔황석굴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366년 북양(北凉)시대 때 조성되기 시작하여 불교문화의 전성기인 당(唐)을 거쳐 원(元)대에 이르기까지 석굴의 조성연대는 10조대,1000여년에 걸친다. 같은 굴에도 개축상황에 따라 여러 시기의 양식이 동시에 나타나 유적들은 그 자체가 ‘불교문화 백과사전’이다. 그뿐이 아니다. 불상과 벽화의 화려한 채색과 필치는 미술적 가치도 뛰어나다. 불교적 소재의 회화는 물론 악기 연주나 춤, 풍속·산수화, 천장 장식 등은 현대회화를 무색케 하는 대담성과 생생함을 갖췄다.1000개의 부처상을 그려 넣은 천불상은 루오의 ‘예수상’을 방불케 했다. 어떤 그림은 이중섭의 아이들 그림이나 마티스의 ‘댄스’와 구도가 흡사해 작가들이 생전에 사진으로라도 둔황미술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다. 그러나 무엇보다 둔황석굴의 가치는 고대의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어 문명교류사와 세계민속사를 살필 수 있다는 데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다는 17굴, 깃털 달린 관(鳥羽冠)을 쓴 삼국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237굴등 에서는 한국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이나 비천상, 미륵반가사유상의 원류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도 따지고 보면 서역으로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때, 문화란 고여 있는 게 아니라 흐르며 발전한다는 것을 실감케 되는 곳이 이곳이다. 둔황석굴은 우리에게 열린 세계인의 자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신연숙 논설실장 yshin@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충북 괴산 도명산

    [조용섭의 산으路] 충북 괴산 도명산

    속리산 문장대에서 동북진하며 눌재∼청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마루금 북쪽 저 멀리, 흰 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바위봉우리와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산줄기가 있다. 그 봉우리 중의 하나가 충북 괴산의 도명산(643m)이고, 이 산자락들이 품고있는 계곡이 바로 화양계곡이다. 양계곡은 우암 송시열 선생(조선 인조∼숙종)이 말년에 은거하며 지낸 곳으로, 화양구곡이란 선생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때 이 계곡의 아름다운 곳곳에 이름을 짓고 그리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쟁의 중심에서 생의 부침을 거듭하던 선생이 자연세계와 가까이하며 만난 또 다른 세상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선생에게는 잘 알려진 우암(尤庵)이라는 호(號)외에 화양동주(華陽洞主)라는 이름도 사용하였으니 이 곳에 대한 선생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산길은 화양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절경지대를 편안하게 감상하고, 화양구곡의 제8곡인 학소대 앞 다리를 건너 정상에 오른 뒤, 첨성대 아래 화양3교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았다. 주차장에서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을 지나 수중보 옆의 다리를 지나면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운영담, 구곡 중 가장 아름답다는 금사담과 암서재를 차례로 지난다.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 또한 금싸라기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바위 위에 지어진 암서재는 우암 선생의 서재였다고 한다. 상가지구를 벗어나 만나는 화양3교 앞 이정표 있는 곳이 나중에 하산할 지점이다. 뒤쪽 산자락 높은 곳에 첨성대가 보인다. 계속 계곡 옆의 너른 길을 따라 능운대, 와룡암을 지나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학소대 앞 다리를 건너면 산길이 시작된다. 계곡에 서있는 학소대의 모습이 아름답다. 주차장에서 40분 소요. 산길은 아주 잘 나있고 이정표도 잘 들어서 있다. 한동안 편안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학소대 다리를 지나 약 1시간쯤 진행하면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경사도 비교적 급하게 이어진다. 거대한 바위 옆을 올라 철다리를 만나면 비로소 동남방향으로 시계가 트인다. 철다리에서 15분 남짓 계단길이 있는 오르막길을 진행하면 낙양사 절터와 마애불상을 만난다. 절터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비교적 너른 굴이 있다. 이 곳은 예로부터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한다. 마애불 바위지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내 5개의 큰 바위가 어우러진 도명산 정상이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시원하고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하산길은 진행방향 오른쪽 철계단으로 이어진다. 바위지대로 길이 나있지만 철계단과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어 진행에 어려움은 없다. 정상을 내려서면 이내 바위사이의 구멍을 지나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짧은 사면을 내려서고, 오른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하산하는 도중 오른쪽 군데군데 조망하기 좋은 곳이 나온다. 산자락 사이 길게 드리워진 화양동계곡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계곡 상류 뒤쪽(東),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대야산이다. 목재 난간이 나타나는 지점의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는 길은 능운대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그대로 직진해서 숲길을 진행하면 화양3교 앞 너른 길에 이르고 산행을 마친다. 정상에서 1시간30분 소요. 중부고속도로 증평IC∼증평∼청천 방향 592번지방도 백봉 37번 국도 합류∼청천∼화양동 매표소 청주에서 이용하는 것이 편리. 서울터미널(반포)∼청주(1일 35회). 청주∼청천 직행버스(1일 13회), 청주∼화양동 직행버스(1일 26회), 청천∼화양동 시내버스(1일 7회) 화양계곡 주변으로 상가시설이 잘 형성되어 있다.(참고 http:///goesan.chungbuk.kr)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분소(043-832-4347)
  • 인삼…삼삼한 축제를 찾아서

    인삼…삼삼한 축제를 찾아서

    도시생활에 지친 몸을 다스리고 싶다면 인삼 향기 그윽한 충남 금산으로 떠나보자. 국내 최대의 인삼장을 둘러보고, 각종 인삼요리를 맛보고, 인삼캐기 체험에 인삼찜질까지 즐기다 보면 도심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다. 또 시골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멋진 개인 박물관과 레스토랑은 여행의 색다른 멋을 제공한다. 특히 금산에서는 다음달 2일부터 11일까지 지구촌 건강축제인 ‘제25회 금산축제’가 열려 관광객 맞이에 한창이다. 가을에 더 아름다운 금산에서 다가오는 가을을 맞아보자. 서울을 떠난 지 2시간. 금산 인터체인지(IC)를 빠져나와 금산 읍내에 들어서자 차창밖으로 쌉싸름한 인삼과 약초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읍내 한가운데 있는 금산인삼약초거리에 들어서자 한약방에 들어선 듯 인삼과 약초의 냄새가 강렬하다. 매월 끝자리가 2·7일마다 열리는 ‘금산 5일장’이 한창이었다.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가 이 곳을 거쳐간다는 인삼장은 이른 아침부터 직접 재배한 인삼과 약초를 팔러 나온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시장안에는 수삼센터와 인삼종합 쇼핑센터 등 대형 유통센터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시골장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직접 재배한 약초를 가지고 나온 노점상들의 모습에서 아직도 재래시장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소규모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노상에서 직접 재배한 약초 등을 내놓고 팔고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인삼은 1채(750g) 단위로 거래되는데 믿을 수 있는 인삼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1채가 3∼4뿌리로 가장 큰 ‘왕왕대’가 6만∼7만원, 크기가 가장 작은 삼계(50∼60뿌리) 1채가 2만 2000원에 거래되는 등 크기에 따라 다양한 인삼을 구입할 수 있다. 또 묘삼, 건삼, 홍삼, 태극삼, 미삼 등 모든 종류의 인삼을 구입할 수 있다. 금산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인삼 좋고 인심 좋은 인삼 찜질·캐기 시장통에 있는 인삼 찜질방인 ‘금산웰빙 24시 불가마사우나’(041-754-0020)는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명소. 인삼탕에 몸을 씻고 인삼 찜질을 즐기면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긴다. 요금은 찜질을 포함,7000원이다. 시장 상인을 대상으로 40년째 장사를 해온다는 서울식당(041-751-0607)은 시장통 밥집의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식당이다. 이 식당은 5일장이 열리는 날과 전날만 문을 여는데 4000원짜리 백반을 시키면 꽁치와 청국장 등 맛깔스러운 토종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어 읍내를 벗어나면 곳곳에서 검은 천막을 드리운 인삼밭을 만난다. 병풍처럼 둘러싼 짙푸른 녹음 사이로 펼쳐진 인삼밭은 한폭의 풍경화다. 읍내에서 개삼로를 따라 10분쯤 달리면 금산에서 인삼을 처음 재배한 개삼터다. 도로사이로 난 좁은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데 금산에서 인삼을 키우게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1500년전 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병든 모친의 쾌유를 위해 진악산 관음굴에서 기도하던 중 ‘빨간 열매 3개 달린 풀이 있으니 그 뿌리를 달여 드리면 완쾌하리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모친의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금산 여행의 즐거움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쏠쏠한 재밋거리가 있다. 남일면 신정리에 있는 홍도인삼마을(www.hongdofarm.co.kr)이 대표적인 곳으로 인삼캐기와 인삼술담그기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인삼캐기 체험은 인근 5년근 인삼밭에서 이뤄지는데 흙밭에 들어가 인삼 향기를 맡으며 갈고리 모양의 호미로 직접 인삼을 캘 수 있다. 인삼의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인삼 뿌리와 10㎝이상 떨어뜨려 널찍하게 캐야 하며, 심어진 순서대로 차례로 캐야 한다.1뿌리를 캐는데 5000원이며, 수확한 인삼은 그냥 가져가거나 마을에 돌아가 인삼술(3만원)을 담가 가져가면 된다. 문의는 도원농원(041-752-6861). 이날 어머니와 함께 인삼캐기 체험을 온 김은주(12·금산초 5년)양은 “어려서부터 인삼밭은 많이 봐왔지만 직접 캐보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우리 지역의 소중한 특산물인 인삼을 새롭게 느껴보는 계기가 됐다.”고 즐거워했다. ● 적벽강 따라 가을은 찾아오고 늦더위를 식히려면 부리면 방우리의 적벽강이 좋다. 층암절벽으로 이뤄진 산아래로 금강이 흐른다고 해서 적벽강으로 불린다. 적벽은 바위산이 붉은 색이란 데서 유래된 것으로 30m가 넘는 장엄한 절벽에는 강물 아래에 굴이 뚫어져 있어 운치를 돋운다. 가을에는 적벽이 불붙는 듯한 단풍이 강물에 얼비쳐 절경을 이룬다. 적벽 아래 흐르는 금강은 마치 호수같이 잔잔하며 감촉이 매끄러운 자갈과 모래사장이 길게 깔려 있어 맨발로 걸으면 좋다. 오염의 때가 묻지 않은 이 곳에는 쉬리와 어름치, 꺽정이 등 1급수에서만 사는 희귀어종들도 손쉽게 만날 수 있으며, 다슬기가 지천으로 깔려 다슬기를 잡으며 동심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적벽강 인근의 종가집(041-752-0229)에서는 금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둥글게 둘러 담은 ‘도리뱅뱅이’를 맛보면 좋다. 이름만 들어도 재미있는 도리뱅뱅이는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으며 아삭하고 담백한 맛을 낸 민물고기 튀김이다.1접시에 1만원. 또 인삼이 들어간 어죽도 일품이다. 금산에서 진안방향으로 10㎞정도 달리면 호젓한 사찰인 보석사를 만난다. 운치가 있다. 얼마전 영화배우 한석규가 찍은 CF 덕분에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일주문에서 마주하는 200m의 전나무길이 장관이다. 보석사 앞에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100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담고 버티고 서있다. 이밖에 한국의 100대 명산인 서대산과 대둔산 천태산 등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이렇게 멋진 곳이 숨어있었나 금산에는 태영박물관과 레스토랑 말메종이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남이면 하금리 태영박물관(041-754-7942)은 서울에서 은행 지점장을 지낸 이기복(60)씨와 부인 임태영(55)씨가 평생을 모아두었던 향토 토기와 옹기, 민속품 등 120여종을 전시한 개인박물관이다. 대단한 보물을 전시한 박물관은 아니지만 주인 내외의 손때 묻은 옹기들과 토기, 야생화가 가지런히 정리된 아담하고 예쁜 박물관이다. 입장료 1000원. 특히 별채로 지어진 초가집 2채를 민박집으로 대여하는데 옛날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황토방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온돌방이다.10∼20명이 머무를 수 있는 이곳은 하룻밤에 10만원이다. 퓨전 음식점 말메종(041-754-4442)은 마치 한적한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복수면 구례리 산길을 따라 차로 10분쯤 올라가면 숲 마지막에 그림같이 멋진 집이 나타난다. 모르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전직 잡지사 기자였던 박현숙씨가 만든 레스토랑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과 함께 지냈던 성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 레스토랑은 야외 바비큐를 즐길 수 있다. 음식은 돼지 훈제 바비큐와 목살, 인삼튀김 등이 나오는 푸짐한 한정식이 1인 2만 5000원. 디저트로 나오는 과일이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이 집에는 3개의 객실이 있는데 주인이 직접 꾸민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 여행 메모 금산인삼축제집행위원회(041-750-2391)는 9월2∼11일 금산엑스포광장에서 제25회 금산인삼축제를 개최한다. 디스관광정보연구원(02-3453-5380)은 축제기간 중 매일 오전 8시 서울 강남역에서 출발하는 ‘금산웰빙여행’ 패키지 상품을 내놨다. 경비의 40%를 금산군에서 지원,1인 3만 8000원이다. 승용차로는 대전·통영간고속도로 금산IC에서 나가면 금산 읍내가 나온다. 금산군 문화공보관광과(041-750-2392).
  • [건강 칼럼] 그와 그녀의 갱년기

    여성은 50세를 전후해 난소의 기능이 퇴화, 여성호르몬이 갑자기 줄면서 갱년기 증상을 겪는다. 술 마신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안면홍조, 주책없이 흐르는 땀과 뱃살, 소변이 새는 요실금에다 골다공증까지 생긴다. 또 성장호르몬도 주는데, 성장호르몬은 청소년들이 자라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성인에게는 노화방지의 원천이다. 즉, 성장호르몬이 부족하면, 피부의 노화와 함께 탈모, 근육량 감소, 성적 욕망의 감소, 골다공증과 뱃살이 는다. 이는 남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이 35세를 넘어서면 성장호르몬이 매년 8∼10%가량 꾸준히 줄기 때문이다. 남성의 상징이랄 수 있는 남성호르몬은 여성처럼 갑자기 줄지는 않지만 스트레스, 흡연, 음주의 영향으로 빨리 줄 경우에는 여성 갱년기처럼 발기부전, 정력 감퇴·피로감 등을 느끼게 된다. 재밌는 것은 이런 과정을 잘 모르는 남성들이 “아, 내 정력도 예전같지 않구나!”하는 생각에 강장제다, 정력제다 하면서 이상한 식품에 집착하게 된다. 여성도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 호르몬이 줄면서 맛을 느끼는 감각이 둔화되고, 침샘의 기능까지 떨어져 침 분비량이 줄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식을 만들 때 자신도 모르게 짜고 맵게 조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미네랄인 아연 부족과도 관계가 있다. 아연이 부족하면 남녀 모두에게서 성욕과 정력 감퇴를 초래하는데, 이 때 좋은 식품은 굴, 전복, 미역, 파래 등이다. 한꺼번에 먹는 것보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먹어야 한다. 그래도 증상이 개선되지 않으면 수은 중독일 수 있으므로 검사를 해봐야 한다. 여성호르몬이 부족한 갱년기에는 이소플라본 성분이 풍부한 콩이나 콩으로 만든 식품이 좋다. 석류도 좋은데 석류는 씨에 관련 성분이 훨씬 많다. 성장호르몬이 부족하다면 수육, 삶은 계란, 토마토, 바나나, 등 푸른 생선, 견과류와 운동이 필수적이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면 몇 달간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거나 성장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을 사용해 치료할 수도 있다. 이승남 강남베스트클리닉원장
  • 손님 멋대로 흐느적거리십쇼

    손님 멋대로 흐느적거리십쇼

      뉴요크에 기발한 아이디어 살롱, 놀다 싫증나면 전류의 자극을 즐겨 「뉴요크」시「맨해턴」의「브룹」가 429번지엔 기발한「살롱」이 생겨 화제. 일명『「맥루한」식 기생「하우스」』로 불리는『세레브럼』이란 이「살롱」은 엄격한 회원제로 되어 있다. 회원은 우선 429번지「빌딩」앞에서 비밀히 장치된「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바로 앞 검은 유리문이 열리면서『어서 오십시오. 여기는「세레브럼」입니다』하는 안내자의 말이 들린다. 다음 신발을 벗고 흡사 사제의 것 같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살롱」안에 들어간다. 「살롱」안엔 흰 옷을 입은 남녀들이 제멋대로 누워있다. 어떤 노인은「요가」하는 자세로, 어느 쌍쌍은 부드러운 애무를, 또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처녀는 맨발의「발레」를- 말하자면 제멋대로 굴어도 딴 사람에게 피해만 입히지 않으면 되는 것. 장내엔「모차르트」에서부터 전자음악까지 음악도 제멋대로. 이것도 싫으면 약한 전류를 몸에 통하게 하여 그 짜릿한 자극을 즐기기도. 하여튼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듯 풀어지는 해방감을 준다는 것이『세레브럼』경영자측의 말. 그렇다고『세레브럼』이 음란한 곳이라고 알았다간 큰 일.「키스」나 가벼운 애무 정도는 용납되어도 그 이상의 짓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입장료는 평일엔 1「달러」, 요일이면 1시간에 1「달러」, 그리고 1주일로 계약하면 7「달러」가 먹힌다. 항상 초조와 긴장감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겐 이『세레브럼』이 하나의 도피처이자「에덴」인 듯, 몰려드는 인파로 경영자측은 즐거운 비명. [ 선데이서울 68년 12/22 제1권 제14호 ]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5) 초의스님과 동다송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5) 초의스님과 동다송

    입추(立秋)가 지나니 저녁과 아침 바람끝이 제법 차다. 세상의 번잡한 세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은 자기자리를 내주기 싫어 천둥번개를 치며 몸부림을 친다. 일지암(一枝庵)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초의 스님의 숨결이 실려 있는 일지암의 작은 차밭에는 벌써 가을준비로 수런거리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우주의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거대한 진리를 우리는 찰나지간에 느낄 뿐만 아니라 긴 인생의 전환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잔의 차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초의 스님이 말씀하셨던 동다(東茶) 즉 우리 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큰절인 해남 대흥사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새벽숲길 수련회’를 실시한다. 평상시 수련회 일정에 일지암을 찾아서 차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도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회 마지막 날인 일요일 아침 일찍 수련생들이 자우 홍련사 툇마루에 앉았다. 차 한잔을 공손히 손에 들고 맑은 얼굴을 한 수련생들은 차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우리차는 맛과 약효 둘다 겸비” 간단한 강의가 끝나자 한 수련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스님 우리 차가 좋습니까, 중국 차가 좋습니까. 요즘 턱없는 소문이 떠도는 푸얼차는 도대체 어떤 차입니까.” 차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받고 있음에도 ‘아직도 우리의 차 문화는 대중들에게 너무도 멀리 있구나.’하는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먼저 푸얼차에 대해 답을 했다.“푸얼차는 중국인들조차 야만인들과 유목민들이나 먹었던 흑차, 흔히 오랑캐 차로 부르기도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보내준 몽정차와 육안차를 직접 마셨던 초의 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육안차는 맛, 몽정차는 약효가 있다는데, 우리 차는 그 두 가지를 다 겸했다고 옛 사람들은 높이 평했다.”고 우리 차를 극찬했다. 필자 역시 우리차는 색(色), 향(香), 미(美), 기(氣) 측면에서, 또한 요즘 현대인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웰빙 측면에서 이 세상 그 어느 차보다 ‘좋은 차’라고 먼저 못 박고 싶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마시고 있는 포도주의 예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매우 귀하고 맛있는 포도주’에 대해 그냥 오래되면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좋은 포도주는 기온의 변화가 심하고 가뭄과 추운 겨울 등 자연의 악조건 속에서 힘들게 자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가 당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지금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의 보졸레누보가 대표적인 경우다. 인기없는 포도 중 하나였던 보졸레누보는 자갈밭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했다. 척박한 땅이란 악조건 속에서 보졸레누보 포도나무는 땅속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포도로 재탄생한 것이다. 차 나무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의 변화가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차나무의 잎이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그런 점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는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 군산과 목포의 위도에 해당하는 산둥성등 몇군데를 제외하곤 우리나라 제주도 이남지역에 해당할 정도의 따뜻한 아열대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토심(土心)이 매우 부족해 찻잎의 맛과 질이 떨어진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시즈오카 등 몇몇 지방을 제외하곤 온도의 차가 매우 적어 좋은 찻잎을 수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 찻잎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어느 나라보다 토심이 좋다는 것이다. 차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려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좋은 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당연히 우리의 차는 맛과 영양 그리고 약리적인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차가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우리차의 성전인 ‘동다송´은 일지암에서 초의 스님이 순조의 부마이자 사대부 차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해거도인 홍현주로부터 차를 알고 싶다는 간절한 물음을 받고 이에 대한 답으로 52세(1837년)때 편찬됐다. 홍현주는 우리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추사 김정희 정약용 등과 깊은 교류를 가졌던 초의 스님은 당시 순조의 ‘부마’로 ‘실세’였던 홍현주 등 유가의 뛰어난 선비들과 한양을 왕래하며 학문과 차담을 나누었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 ‘동다송´은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 차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차나무를 직접 심고 따본 경험을 바탕으로 덖고 건조시키는 조다법을 이용, 우리차의 공(功)과 덕(德)을 찬양하고 있다. 초의 스님은 ‘동다송´에서 중국 다서(茶書)에 있는 각종 고사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주석을 달고 있어 육우의 ‘다경´에 필적하는 우리나라의 ‘다경´으로도 손색없을 정도의 노작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현존하는 ‘동다송´은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의 다예관에 소장된 필사본인 ‘다예관본(茶藝館本)´, 석오 윤치영의 필사본인 ‘석오본(石梧本)´, 갑술중추 경앙등초라고 쓰여 있는 ‘경암본(鏡菴本)´, 송광사 보정 스님이 필사한 ‘다송자본(茶松子本)´ 등 크게 4가지본이 있다. ‘동다송´을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의순(艸衣意恂)선사가 40세(1825년)때 터를 닦고 입적 때까지 주석했던 일지암은 지금 한국 차의 성지로 5.5평의 초당,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자우홍련사,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다. 그러나 앞마당에 펼쳐진 몇백평 규모의 야생차밭을 필두로, 서해바다의 낙조를 볼 수 있는 먼 풍광은 유천(乳川)의 물맛과 함께 차의 성지로서 군계일학이다.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일지암은 우리 현대 차문화사의 명실상부한 중흥조다.1979년 복원된 일지암은 한국의 차인들을 한곳에 결집(結集)시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과 차 문화를 현대인들의 품속으로 되돌려 놓은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지암의 이름은 장자(莊子) 남화경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뱁새는 일생동안 한곳에 작은 깃을 틀고 잔다.”는 구절과 한산시(寒山詩)의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는 구절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초의 스님은 일지암에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윤연 홍석주 등과 다도를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동다송´ ‘다신전´을 지었다. 일지암의 흔적은 일지암시집(一枝庵詩集)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장춘동은 해남 남방 20리 두륜산 일맥, 용과 호랑이 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산맥은 십구요, 계곡은 구곡이다. 대흥사의 남방이요, 북암에서 볼 때는 서쪽이요, 남암에서 볼 때는 북쪽, 이곳에 초당을 지었으니 이름이 일지암이다. 삼간 초당에는 초의 스님과 동자 한 사람, 법상(法床)에는 금으로 도금된 부처 일좌(一座), 아침저녁의 목탁소리 샘물과 수목이 의지하고 죽림의 바람소리는 가야금소리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石澗)에서 나오는 물은 죽관으로 받아 차를 끓인다. 남은 물이 고인 곳에 연못을 만들어 연못 위에는 나뭇가지를 얽어 포도넝쿨을 틀어 올리고 정원주변은 수석으로 갖추었다.” ●일지암 복원은 차문화사의 중요한 사건 그러나 초의 스님 열반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의 일지암은 1979년 후대의 차인들의 노력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1976년 여름 해인사 율원에 박태영 화백의 주선으로 박동선씨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필자와 도범 스님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와 도범 스님 등 방문자 일행은 토우 김종희 선생댁을 방문, 한국 차문화의 복원과 일지암 복원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렇게 시작된 일지암 복원은 김봉호 박동선 김미희 박종한 김종희 안광석 조자룡씨 등 수백명의 차인 결성으로 이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지암터 확인이었다.‘대둔사지´ ‘몽하편병서´ 문헌을 확인하고 대흥사 주지를 역임했던 응송(당시 90세) 스님 을 지게에 업고 다니던 1977년 2월 하순 오늘의 복원터를 확증할 수 있었다. 당시 에밀레 박물관장이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구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자룡씨가 새롭게 복원되는 일지암의 설계를 맡았다. 조자룡씨는 한국의 전형적인 다실을 찾기 위해 전국 각처를 답사했다. 결국 한국전통 초당형식을 갖춘 일지암 초당은 5.5평의 정사각형 초가형태로, 법당 겸 요사채는 15.5평의 기와집으로 일지암복원위원회가 결정한 후 1979년 2월 완공했다. 일지암의 복원은 한국현대 선차(禪茶)문화의 복원으로 연결됐다. 그때부터 초의 스님 ‘동다송´ ‘다신전´ 등 차 관련사업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을 추모하는 초의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차 문화의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지암복원은 초의 스님이 생존했던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한국현대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한국차의 중흥조인 초의 스님의 자(子)는 중부(中孚)이며 호는 초의,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우사(芋社), 자우(紫芋), 병발(甁鉢) 등 여러 가지가 있다.15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벽봉 민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초의 스님은 월출산에서 해가 지고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연담 유일선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며 ‘초의’라는 호를 얻었다.‘초의’는 고려말 야운선사의 ‘자경문´ 가운데 있는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송라와 풀옷으로 몸뚱이를 가린다.”는 구절에서 유래됐다는 설과,‘중국사략´ 가운데 “굴을 파서 즐겨 살며 나무를 얽어매어 집을 삼고 나무 열매 먹고 풀옷을 입는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초의선사는 요즘 현대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영국에서 활약 중인 박지성처럼 어느 포지션에서도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실력있는 멀티플레이어’였던 것이다. 먼저 스님으로서 수행의 최고봉인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해 대흥사 13대강맥을 이었다. 초의 스님은 또한 탁월한 금어(金魚:불화를 최고의 경지에서 그리는 스님)이자 선필(禪筆)가였다.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익혔으며 , 탱화를 잘 그려 당나라 최고의 탱화장이였던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와 겨룰 정도로 예서체에 뛰어난 경지를 보였다고 한다. 불교전통음악인 범패, 원예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만드는 법 등에도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는 바로 남종화와 초의 스님의 인연이다. 초의 스님이 50세 되던 해인 1835년 봄 진도에서 남종화의 시조(始祖)가 된 소치 허유(小痴 許維)가 찾아온 것이다. 소치는 일지암에 3년을 머물며 초의 스님의 화법과 시학·불경과 차를 배웠다. 초의는 소치의 자질을 알아보고 추사와 인연을 맺어준다. 오늘날 한국화단의 큰 산맥인 남종화가의 탄생이 바로 초의 스님과의 인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소치는 먼 훗날 초의 스님의 인품을 묻는 헌종에게 “세인이 모두 고승이라 하옵는데 그분은 내외전(內外典)에 달통했으며 승속간에 많은 인사와 교유하고 있다.”고 밝히는 연유가 된다. 또한 그의 자서전인 ‘몽연록´을 통해 초의 스님과 추사의 인연에 대해 “두 스승은 꿈속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초의선사가 최고의 멀티플레이어였다는 것은 당시 조선후기 유교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와 거리를 사상적으로 좁혔다는 점이다.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연천 홍석주 등과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유·불·선에 대한 담론을 이뤄냈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성취해낸 것이다. ●43세때 번역서 ‘다신전´ 편찬 초의 스님의 또 하나의 노작(勞作)은 바로 ‘다신전(茶神傳)´이다.1828년 그의 나이 43세 때 지리산 칠불선원에 머물며 초록(抄錄)해낸 ‘다신전´은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한 부분인 ‘채다론’(採茶論)을 번역한 것이다.‘다신전´은 차의 신에 관한 기록으로 찻잎을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꾸며놓았다. 초의선사는 “전에는 승가에 조주풍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 다도를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 초록해낸 것”이라며 ‘다신전´ 편찬의미를 밝히고 있다. 초의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시(詩), 서(書), 화(畵), 차(茶) 4절(絶)이라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초의 스님은 당대 최고의 ‘신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의 스님은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땅끝 대흥사 일지암이란 오지에 머물면서도 요동치듯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변화를 실천하는 실천가였다. 당대의 신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당대 중생들 삶의 ‘개화’(開化)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초의 스님에게 음풍농월의 수단이 아닌, 전통을 이어가고 새로운 현실의 삶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 같은 것이었다. 초의 스님이 살던 시대는 참으로 척박했다.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경제는 민중들을 빈곤한 삶으로 몰아댔고, 낡은 시대의 유물들은 쌓여진 지식의 보고들을 갉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심세력들의 당쟁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이리저리 내몰린 조선후기의 초의 스님 시대와 오늘 우리시대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할 혜안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의 곱디 고운 삶을 현실속에서 아름답게 보듬어 안고 함께 걸어갈 우리시대의 신 지식인이 그리운 때다 (일지암 암주)
  • [사설] ‘도요토미 운하’라니, 넋 나간 문화재청

    문화재청이 경남 통영의 해저터널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통영태합굴(統營太閤堀) 해저도로’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문화재청의 역사인식에 우리는 그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으로 왜적을 크게 섬멸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린 곳이다. 그런 이곳에 ‘태합(太閤)’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태합이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신하들에게 자신을 부를 때 쓰도록 만든 극존칭이다.‘살아도 죽어도 따라야 하는 지엄한 권력자’를 뜻한다. 일본 역사에서조차 태합으로 불린 이는 도요토미가 유일하며, 따라서 태합은 곧 도요토미를 일컫는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로 등록할 때는 명칭의 시원(始源)을 따르도록 규정돼 있고, 오랜 기간 이 해저도로가 주민들 사이에서 태합굴로 불려져 왔던 점을 반영했던 것”이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통영시와 통영사연구회 등의 주장은 다르다.“광복 이후 지금까지 ‘통영운하로’‘통영해저터널’로 불러 왔고, 관광자료나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돼 있으며 ‘태합굴’이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하면서 붙인 명칭일 뿐”이라며 “오는 11일까지가 등록예고기간인 만큼 통영시 등으로부터 제기된 시정요구를 충분히 감안해 다음달 문화재위원회 심의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문화재청 사람들의 몰이해다. 문화재 등록 때마다 국민 모두가 감수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운하’가 통영에?

    문화재청이 더위를 먹었을까. 아니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악화된 국민감정을 외면하는 것일까. 경남 통영의 해저터널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하면서 명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경칭을 붙여 말썽이다. 9일 경남 통영시에 따르면 문화재청이 지난달 12일자로 경남도내 근대문화유산 24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면서 통영해저터널을 ‘통영태합굴(太閤堀)해저도로’로 명시, 통영시와 지역의 역사학계가 반발하고 있다. 터널 이름에 붙여진 태합(太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칭(敬稱)이다. 또 굴(堀)도 일본에서는 ‘땅을 파서 만든 수로’ 즉 운하(運河)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 결국 태합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운하’로 해석된다는 지적이다. 통영해저터널은 일제에 의해 지난 1927년 착공돼 32년 완공된 동양최초의 바다 밑 터널로 당동과 미륵도를 잇는다. 운하의 양쪽 바다를 막고 바닥을 파서 길이 461m, 너비 5m, 높이 3.5m의 콘크리트 터널을 축조한 후 물을 통하게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의해 수많은 왜군이 수장당한 곳이어서 일제가 바다를 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통영사연구회는 해저터널의 명칭을 정정해 달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최근 문화재청에 보냈으며, 통영시와 통영문화원도 지난 5일 명칭변경을 고려해 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등록 문화재의 이름은 첫 명칭을 사용토록 돼있는 규정을 지키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해명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최종 심의때 충분히 반영하겠다.”고 말했다.통영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사에 관한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기억은 그런 것이다. 대사는 절간에 몸을 매어두고 있었지만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고관)에 이르렀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무엇보다도 도술에 능했다. 그는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승(神僧)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기억이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기억은 무척이나 선택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특히 민중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돼 온 기억은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숨쉬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모르는 것, 못 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했다. 서산대사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서산대사비결’이란 책자를 낳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민중은 신라 고승 원효가 지었다는 ‘원효비결’이란 예언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원효비결’은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와 달리 ‘서산대사비결’은 조선 후기에 출현해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로 불리는가? 그는 오랫동안 관서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씨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대사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崇仁長老)란 고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결백이 입증돼 국왕의 특명으로 석방된다. 평소 대사는 즐겨 시문을 지었다. 옥사 사건 때 조정 대신들은 그 글들을 세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서산대사의 글이 단아한데다 그 대부분이 국왕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국왕 선조 역시 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로 시를 써주었다. 아울러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점을 주어 대사의 마음을 위로했다(실록, 선수 23년4월1일 임신).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국운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서산대사를 깊이 신뢰하게 된 국왕은 대사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연락해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조직한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여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덕분에 국왕은 서울로 환도한다. 서산대사는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승군의 지휘를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정을 왜군 진영에 보내 정전회담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승군은 전쟁터에서 직접적인 공적을 별로 쌓지 못했다 한다.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는 승려들인 만큼 접전(接戰)엔 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군은 성실해서 요새의 경비에 뛰어났다.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축성하는 데도 그만이었다. 승군의 이런 장점은 널리 인정을 받게 돼,“각 도가 모두 승군에 의지하였다”(선수 25년7월1일 무오). 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다.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선조26년7월19일 신미)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가 궁궐출입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먼 거리를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대사에게 말을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허락했다고 봐야 옳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그 기회에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대사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삼아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려 했고, 이를 위해 몇 권의 책자를 저술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종의 입장에서 모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은 선종과 교종을 비교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참선수도에 필요한 주문을 모아 ‘운수단’(雲水壇)을 짓기도 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중흥되지는 못했다. 대사는 결국 금강산에서 입적했는데, 자신의 의발(衣鉢 승려의 유품)을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은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의 은덕을 추모했다. 뒷날 정조는 표충사라는 현판을 사액했다(정조12년7월5일 을축). 대사가 오래 주석했던 묘향산(妙香山)에도 수충사(酬忠祠)라는 사당이 봉헌됐다(정조 18년3월16일 계묘). 정리하면, 서산대사는 고대부터 이어진 호국불교의 전통을 따른 고승이었다. ●서산대사는 만능의 도사 국가가 편찬한 역사기록은 믿을 만한가? 역사상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기록되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책에 기록될 사실은 어차피 선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이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다. 심지어는 왜곡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산대사가 호국불교의 화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그걸 확인하는 방편으로 조선시대 민중이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민중의 견해는 민간설화로 남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화에서 보이는 서산대사의 모습은 도술의 대가였다. 물론 대사가 정말 도술에 능했을 리는 없다. 다만 민중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대사의 모습에서 참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사는 그런 영웅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마음대로 도술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도술 이야기는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 많다. 한 번은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부적(符籍) 하나를 건네줬다고 한다. 이 부적 덕택으로 사명당은 일본의 왕성에 있던 병풍에 적힌 시구를 모두 알아 맞힌다. 일본인들은 사명당을 무쇠 방에 집어넣고 불을 때 태워 죽이려 했지만 사명당은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게 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이 오게 된 것도 서산대사 덕분이라 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중국의 큰 부자에게 살아 움직이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 값으로 수표 한 장을 받았는데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중에 그 집 딸이 큰 부잣집에 시집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한다.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돼 온 이여송이 생떼를 부리자 이를 무마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소상강 반죽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렸는데 대사가 개입해 백마의 간과 백두산의 대나무로 대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주성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된 것도 실은 서산대사의 지도로 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명당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산대사의 부적 때문에 공을 세웠다곤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조선에 이여송을 파견한 것, 이여송이 방자하게 굴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산대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논개의 죽음을 서산대사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시합 민중은 영웅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당의 도술 시합도 창안해 냈다. 사제관계였던 두 명의 고승이 도술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점쳤던 것이다. 어느 날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법당문이 열리며 서산대사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대사에게 말싸움을 건다. 사명당은 마침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대사에게 묻는다. “지금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한다.“내 한 쪽 발이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밖에 나가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겠느냐,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애초 나오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문은 왜 열며, 벌써 한 발은 왜 밖으로 딛으셨겠습니까?” “맞다. 네가 손에 쥔 참새도 마찬가지다. 불승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 얼핏 막상막하로 뵈지만 서산대사의 판정승이다. 사명당은 고작해야 발의 동작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일시적인 몸동작이 아닌 승려 본연의 자세를 논했기 때문이다. 사명당은 등에 졌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그 안엔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다. 사명당은 잠시 그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자 바늘이 먹음직한 국수로 변한다. 사명당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서산대사에게도 함께 먹기를 청한다. 두 사람은 맛있게 바늘국수를 먹는다. 잠시 후 서산대사의 입에선 바늘이 줄줄 흘러나온다. 사명당은 얼른 패배를 인정하기가 싫다. 이 번엔 백 개의 계란을 꺼내어 땅바닥에서부터 한 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신기에 가깝다. 서산대사는 그 모양을 보고 빙긋 웃더니 계란을 공중에서부터 거꾸로 쌓아 내려온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사명당은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태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인다. 금방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친다. 밧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동안 쏟아져 내린다. 서산대사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소낙비를 멎게 한다. 뿐만 아니라 땅바닥을 적신 빗방울까지 몽땅 하늘로 거둬 버린다. 사명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 그 순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조선시대 민중은 스승과 제자의 서열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당도 서산대사 못지않게 뛰어난 고승이었건만 민중의 공론은 명백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예언가 서산대사의 비결(訣) 절세의 영웅 서산대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여인이 광주리에 달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팔팔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본 대사는 광주리 안의 달걀이 64개임을 대번에 알아 맞혔다.“팔팔(八八)” 걸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민중이 지어낸 익살이다. 그러나 장난끼어린 익살 속에도 서산대사의 투시력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숨어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는 한두 가지 예언을 남겼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 유품(遺品)을 해남 대흥사에 두게 했다. 제자들은 왜 하필 그렇게 멀고 구석진 곳이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곳이 “천년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아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불교의 법통이 돌아갈 곳”이라 말했다. 과연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게 되자 이 절은 크게 융성했다. 이 절엔 서산대사의 금란가,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 초의대사(草衣大師)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가 되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찾게 되었다. 만일 서산대사 같은 분이 살아 계신다면 앞일을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산대사비결’이란 신종 예언서가 탄생했다. 실상 서산대사와는 무관한 예언서였다. 생전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대사의 이름을 빌려 그 왕실의 패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의 이름을 빌린 이 예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1. 조선 말년에 당목 넷이 지나면 지혜 있는 선비는 반드시 떠나갈 것이다.2. 만일 성스러운 해를 만나면 천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하리라.3.10년 동안 들에서 밥을 먹으니 집 생각하는 마음이 무궁하고, 천리에 곡식을 운반하니 편안하고 한가할 날이 기약이 없다.4. 코가 검은 장군이 여진에서 나와서 오얏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을 벤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는 실상 오얏나무를 베는 도끼다. 첫째는 난을 피해 길지로 숨을 시기를 예언한 것이고, 둘째는 진인이 이끄는 천척의 배가 쳐들어올 시기를 말한 것이다. 셋째는 혼란기에 벌어질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본 것, 넷째는 이씨 왕조(‘오얏나무’)를 뒤엎을 세력이 북쪽에서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런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감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넷째 번은 좀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살핀 대로 ‘토정비결’에선 요동에서 곽 장군이 나와 진인왕을 돕는다고 했다.‘서산대사비결’에선 바로 그 곽 장군을 ‘코가 검은 장군’으로 바꿔 썼다. 게다가 그 곽 장군이 진인왕을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 편을 드는 척하다 결국 왕조를 뒤엎어 버린다고 예언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이 자꾸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곧 조선왕조는 망한다. 그 다음엔 진인왕이 새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왕조교체의 과도기엔 오래 혼란이 지속된다. 그 때 사람들은 길지로 피란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정감록’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의 술사들은 민중이 기억하는 역사상의 대 예언가들의 이름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조(浮彫) 수법이었다. 때론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정감록’에 담긴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보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언은 미래를 겨냥한 것이고 따라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점괘는 늘 달리 풀이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이 늘 필요했다. 엄밀한 의미로 ‘서산대사비결’은 ‘정감록’의 개정판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섬, 파島에 실려온 그리움…

    섬, 파島에 실려온 그리움…

    새벽바람을 타고 북녘의 장산곶에서 수탉의 홰치는 소리가 꿈결인 양 들리는 곳. 자욱한 안개사이로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 솟아있는 기암괴석.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파란 바다뿐인 서해의 마지막 섬 백령도. 그 옛날 황포돛배에 몸을 싣고 울렁울렁 흔들리기를 보름해야 닿을 수 있던 섬, 백령도는 아직도 그때의 순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고한 자태의 두무진 바위들, 파도와 자갈이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는 콩돌해변 등 때묻지 않은 자연과 까나리, 해삼, 멍게 등 맛있는 해산물이 가득한 백령도를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백령도로 떠나자. 글 사진 백령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인천항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30분이나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섬 백령도. 태곳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천하제일의 절경 백령도 여행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두무진(頭武津).‘투구를 쓴 장군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이곳 기암들은 짙푸른 바다에서 70여m까지 하늘로 치솟아 올라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백령도 북서쪽 2㎞정도 절경을 이루고 있는 두무진을 제대로 보려면 유람선을 이용한 해상관광이 적격이다. 두무진 포구에서 유람선에 올랐다.‘쿵짝∼쿵짜짝’ ‘뽕짝’의 가요소리 드높게 배는 두무진 포구를 출발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큰공을 세운 이대기가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칭찬했던 선대암을 기점으로 두무진의 진면목이 눈에 들어온다. 줄줄이 이어져 있는 크고 작은 바위에 잠시 넋을 잃는다. 파란 바다를 따라 찬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바위들의 위엄. 우리나라에서 최고라 해도 과찬이 아닐 듯싶다. 또 바위마다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 세찬 파도와 바람에 시달려 할머니의 주름진 손처럼 깊은 골이 패어있는 모습에 또 한번 탄성이 나온다. 선대암을 지나 장군바위, 물개바위, 말바위, 대감바위, 남근바위, 병풍바위, 쌍굴바위, 촛대바위 등 갖가지 사연을 지닌 바위들의 형상이 다양하다. 자세히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삼라만상의 모습들이 그 안에 있다. 세파에 지쳐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 고통과 슬픔에 몸부림치는 우리의 얼굴이 그곳에 있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의 시달림을 받으면서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질긴 그들의 삶이 우리와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주름진 얼굴 사이에도 생명이 살고 있었다. 까만 가마우지와 하얀 괭이갈매기. 가끔씩 나타나는 물범 또한 위로가 되었으리라. 어느덧 배는 다시 항구로 들어간다. 전세계 어디에도 이런 바위들의 모임은 없을 것이다. 두무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있는 효녀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몸을 던진 인당수가 바로 여기다. 심청이 몸을 던졌다가 연꽃으로 환생했다는 전설 속의 연봉바위는 그 옛날 중국으로 가던 상선들이나 사신들이 처음으로 기착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유람은 40분 정도 걸린다. 어른 8000원. 문의 (032)836-1448. ●비행기가 착륙하는 모래사장 백령도의 관문인 용기포부두에 내리면 왼쪽으로 모래사장이 시원스레 펼쳐져있다. 천연기념물 391호인 사곶해수욕장은 길이 3.7㎞로 언뜻 보면 일반 해수욕장과 다를 바 없는데 석영이 부서져 형성된 모래바닥이 아스팔트만큼이나 단단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비행기가 오르내려 천연비행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10여년전 백사장 뒤로 담장을 설치하면서 펄이 생기기 시작해 명성이 퇴색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세계적인 명소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아프다. ●파도와 콩돌의 절묘한 하모니 백령도의 숨겨놓은 자랑은 콩돌해안. 천연기념물 392호인 이곳은 오군포 포구에서 1㎞에 걸쳐 형성돼 있다. 콩돌을 가지고 나오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는 문구가 그 귀중함을 알려준다. 먼저 ‘크르르 좌르르’ 파도가 칠 때마다 구르는 콩돌소리가 여느 해수욕장에선 좀체 들어보지 못한 노래다. 콩돌 또한 다른 지방의 것과는 다르다. 흰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색깔들이다. 또 크기도 계란만한 것에서 콩알만한 것까지 다양하다. 자연이 빚어낸 색채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파도가 거칠어 수영을 즐기기는 어렵지만, 피서철에는 찜질을 즐기고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심청의 자취를 찾아 심청이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 심청이 환생했다는 연봉바위, 연꽃이 밀려왔다는 연화리. 곳곳에서 심청의 효심을 볼 수 있다. 심청전의 무대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심청각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심청전과 관련된 판소리, 영화, 고서, 음반 등을 볼 수 있고 날씨가 좋으면 장산곶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이밖에도 초기 기독교 역사가 정리되어있는 중화동교회, 사곶과 회동 사이 820m를 이어 막아 형성된 인공호수인 백령호앞에 하늘거리는 수풀더미도 볼 만하다. ●사곶냉면, 꼭 먹어보세요 백령도의 해산물은 자연산이다. 육지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양식을 구해오기가 오히려 더 힘들단다. 백령도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은 까나리액젓으로 국물을 내는 사곶냉면(032-836-0559)이다. 추천 메뉴는 반냉면. 물냉면 육수를 반쯤 넣고 비빔냉면 다대기를 올린 것으로 맛이 그만이다. 면발 또한 즉석에서 뽑아 아주 부드럽다. 또 짠 김치와 굴, 홍합 등을 만두 속에 넣어 빚은 짠지떡은 두메칼국수(836-0245)가 오리지널. 어른 손바닥만한 만두는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란 말을 실감케한다. ●더욱 가까워진 백령도 3000t급 만다린호가 운항해 날씨의 영향을 덜 받는다. 온바다의 데모크라시5호와 진도해운의 백령아일랜드호가 하루 한차례 인천연안부두에서 출발한다. 기존 선박은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에 도착한다. 소요 시간은 4시간 가량. 만다린호는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백령도까지 직항해 운항시간은 비슷하다.8월15일까지는 10% 할증된 성수기 요금을 받는다. 만다린호 일반실 5만 6500원, 일등실 6만 2000원, 데모크라시5호·백령아일랜드호 4만 7900원. 문의는 온바다(032-884-8700), 진도해운(888-9600). 전화나 인터넷으로 배편을 예약해야 한다. ●어디서 자나 백령도에는 아직 호텔급 숙소가 없다. 옹진모텔(836-8001), 이화장모텔(836-5101) 등 10여개의 장급 여관이 있다. 마을마다 3∼8실 규모의 민박을 겸하는 집들도 많다. 백령면사무소(836-1771). ●현금지참 필수 백령도는 섬이 크기 때문에 걸어서 여행하기는 무척 어렵다. 또 택시비가 비싸 택시를 이용하기보다는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저렴하고 편리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 민박집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섬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섬에는 신용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주말에는 현금인출기로 서비스를 받을 수 없으므로 현금을 충분히 가지고 가는 것이 낭패를 면할 수 있는 길이다. 까나리여행사(888-1911), 서해여행사(83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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