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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정부 출범 계기로 알아본 각국 여성정치참여 현황

    ◎노르웨이·스웨덴 여성장관이 35∼45%/미 클린턴정부 내각엔 23% 포진/일본은 국무위원 26명중 1명뿐/전세계 여성수반 2명… 선거통한 자력진출 늘어나야 미국의 클린턴 새 정부가 지난달 출범하면서 어느때보다도 많은 여성 각료및 고위현관들이 탄생,미국여성의 파워가 한층 강력해진 인상을 주고있다.그런가하면 25일 출범하는 우리의 신정부에도 2명의 여성각료가 임명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여성의 권력향유 지수는 세계적으로 어느 수준쯤일까. 세계 대부분의 곳에서 「남녀평등」이란 슬로건은 이제 진부한 상식으로 취급되는 형편이지만 막상 국가정책을 집행하고 입안하는 권력현실에서는 여성의 지분은 평등치의 한참 아래에 머물러있다.여성의 권력지수나 정치력과는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는 세습왕정의 여자 입헌군주를 제외하고 현재 여성이 국가수반인 나라는 단 두 곳뿐이다. 지난 90년 남미의 니카라과 대통령선거에서 여성 야당연합후보로 출마한 비올레타 차모로 여사는 예상을 뒤엎고 승리,산디니스타 좌익정권의 11년통치에종지부를 찍었다.또 내각책임제이지만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는 아일랜드에서 90년 좌파 변호사 출신인 메리 로빈슨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었다.한편 필리핀국민들에 의해 최고통치자로 선출됐던 코라손 아키노대통령은 6년임기를 마치고 지난해 퇴임했다. 내각책임제에서는 다수당의 당수가 국가권력의 실질적인 정점인 수상에 오르는데 유명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여사는 수상권좌에서 물러났으나 아직 두명의 여수상이 건재하고 있다.방글라데시의 암살된 대통령 미망인이었던 베굼 할레다 지아여사는 91년 민주화투쟁를 통해 재도입된 내각책임제 첫수상으로 취임했고 입헌군주제하의 노르웨이 정치여걸 그로 하를렘 브룬틀란트는 90년말 세번째 수상에 올랐다. 대통령책임제의 행정수반인 총리는 권력이 훨씬 못하긴 하나 지난해 장기간 정정이 불안했던 폴란드의 바웬사대통령은 여성인 안나 수쇼카의원을 5번째 총리로 임명했었다.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각료의 절반을 구성한 예는 전무하다.노르웨이와 스웨덴이 45∼35% 비중으로 최고수준일뿐 「여성이 많이 입각했다」는 보도의 실제수치는 20%정도에 지나지 않는다.이번 클린턴 신정부 내각도 지난주에 발표된 공군장관까지 포함,17명중 4명(23%)에 그친다.다만 중추부서중의 하나인 법무장관과 내각바깥의 핵심처인 경제자문위원장이 여성인 점은 특기할만하다. 스웨덴과 캐나다를 비롯한 극히 소수의 나라에서 여성이 외무·재무·국방장관직을 맡은 예가 있을 따름이고 대개 권력의 이미지가 약한 연성 부서가 할당된다.일본은 26명 국무위원중 여성은 단 한명인데 이 사실보다는 여성이 문부성장관에 임명된 점이 당시 화제가 됐다. 여성각료의 정치적 배분보다는 선거를 통한 여성의 자력 의회진출이 여성정치력의 현황을 재는 보다 정확한 잣대라고 할수 있다.미국에서는 지난해말 총선결과 2명이었던 여성 연방상원의원이 6명(1백명중)으로,28명이었던 연방하원의원이 47명(4백35명)으로 다같이 불어났지만 전체비중은 아직도 6%,11%에 그친다.그러나 총의원이 7천4백여명에 달하는 50개 주의회에서는 20%를 차지했는데 81년에는 12% 수준이었다.영국의경우 6백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인 베티 부스로이드의원이 하원의장에 뽑히긴 했으나 정작 여성 하원의원은 6백51명중 1할도 못미치는 60명에 불과하다.그것도 역대 최고치.일본 역시 참의원에서만 13%를 기록할 뿐 중의원 2·3%,지방의회 4%로 여성의 의회진출이 저조하다.한편 남녀평등을 내외적으로 보다 강력히 천명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에서는 전국인민대표의 여성 비중이 21%(6백25명)로 상당해 보이지만 권력 실체인 공산당 중앙위(3백19명)의 여성지분은 단 7.5%로 24명에 그친다.
  • 말련/“술탄특권 줄이자” 개헌 추진(세계의 사회면)

    ◎국왕선출권 악용한 횡포 늘자 제동 나서/8개주 수장의 가족까지 범죄 만연/여론 크게 악화… 개헌안통과 가능성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정부와 의회가 왕족인 술탄에게 주어지고 있는 각종 특권을 줄이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기로 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와 의회가 이처럼 술탄들에 관련된 헌법조항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이들의 못된 버릇을 뜯어고쳐야 된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국왕 이외에 모두 8명의 술탄이 있다.술탄이란 각 주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말레이시아에서는 이들이 5년마다 국왕을 뽑는다. 말레이시아의 현행 헌법은 이들은 물론 가족이 저지른 각종 범죄에 대해 면책과 사면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들이 이같은 헌법조항을 악용’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뻔뻔스럽게 범죄까지 저지르기 일쑤이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부당국과 의회가 헌법을 개정키로 한 것이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이들의 「범죄」내용과 사치스런 생활상등이 매스컴에 자주오르내리면서 국민여론 또한 크게 악화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이처럼 술탄에 대해 「매스」를 가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7월에 있었던 하키경기 결승전. 조흐르주 술탄인 마무드 이스칸다르(60)의 둘째 아들이 경기도중 상대팀 골키퍼를 손과 발길로 걷어찼다가 출전정지를 당하자 화가 난 마무드가 아들이 속한 팀코치를 폭행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술탄들의 면책특권을 없애려고 별러오던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와 각료들은 헌법개정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집권당인 국민전선(NF)이 전체의석의 3분의2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도 지난달 회의를 열고 헌법을 개정키로 결정했다. 최근 말레이시아 법원은 폭행당한 골키퍼에게 3백85달러를 보상해 주겠다는 조흐르주 술탄의 아들 마지드(22)의 제의를 받아들여 사건을 매듭지었다. 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그는 최고 7백70달러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돼 있으나 술탄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누려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말레이시아 술탄들이 저지르고 있는「횡포」는 한두가지가 아니다.지난달 초엔 켈란탄주 술탄인 이스마일 페트라가 84만달러짜리 이탈리아 고급 스포츠 카를 수입하고도 아직까지 관세를 물지않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또 말레이시아의 한 국회의원은 최근 『조흐르주 술탄인 마무드가 지난 72년부터 23건이나 되는 강간’폭행을 저질렀다』고 폭로하기도 했다.마무드는 77년에도 살인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당시 국왕이던 아버지때문에 단 하루도 교도소 생활을 하지않고 풀려났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번 기회에 술탄들에 대한 사면·면책특권말고도 국왕이나 술탄을 비방했을때 국민들에게 「선동죄」를 적용’중벌을 내리도록 하고있는 현행 헌법조항도 손질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헌법개정 움직임에 대해 술탄들은 최근 회의를 열고 『입헌군주제가 깨질 우려가 있다』며 만장일치로 헌법개정에 반대하기로 했다.또 술탄지지자들과 일부 국회의원들도 『사전에 왕족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헌법조항을 들며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말레이시아 정부와 의회의 헌법 개정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정부 의지가 확고한데다 국민여론이 비등하고 의회도 집권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등으로 미루어 헌법개정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많은 편이다.
  • 국왕중재에도 기대반·실망반/수습국면 접어든 태 이모저모

    ◎“개원전 수친다 사임” 권유설도/ADB선 58만불어치 기술원조 승인 ○…TV방송에 비친 수친다 총리와 잠롱 당수의 국왕 알현 모습은 싸움질을 하다 들킨 학생이 선생님앞에 꿇어 앉아 호된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방불. 국왕 앞에 꿇어 앉은 수친다 총리는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입헌군주제하의 상징적인 군주이지만 국민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푸미폰국왕이 올해로 46년째를 맞는 재위기간중 시위사태 해결에 직접 개입한 것은 지난 73년의 민주화 시위 이후 이번이 두번째. 국왕은 20분간의 교시를 통해 『집안싸움을 벌이고 있는 꼴이다.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뿐이다』고 개탄하면서 두 지도자의 합심협력을 신신당부. 한편 주태 한국대사관과 교민회는 이번 방콕의 소요사태에서 피해를 입은 교민은 한명도 없는 것으로 이날 상오 확인됐다고 밝혔다. ○…야간 통금령에도 불구하고 방콕 시내 람캄행 대학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국왕 알현 장면을 방영하는 TV방송을 지켜보다 수친다 총리가 화면에 비치자 일제히 야유와 비난 구호를 퍼부었다. 이들은 푸미폰 국왕의 사태 개입에 기대감을 표시했으나 수친다 총리의 즉각 사임이 이뤄지지 않은데 실망한 듯 환호와 박수의 강도는 미온적인 편이었다. ○…수친다 총리의 사임이 확실시되고 있는 가운데 푸미폰 국왕이 20일밤 수친다총리에게 국회에서 개헌을 하기 전이라도 이번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위해 물러나도록 권유했다는 사실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유혈사태로 10억달러이상의 손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 태국에 58만달러어치의 기술원조를 승인했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원조는 ADB가 관리하는 일본특별기금에서 충당하는 것으로 1백24개 마을에 거주하는 약1백만명의 주민들에게 안전한 물공급을 하기위한 1억달러 상당의 프로젝트준비를 위한 것이다. 현재 42%의 마을만이 상수도 이용이 가능한 상태다. ○…2천여명의 재소자석방등 수습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으나,거리를 지나가던 군용트럭을 향해 시민들이 돌을 던지기도 하고 군용헬리콥터가 상공을 비행하는등 아직까지 시내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또한 25일 있을 예정이던 헌법개정안에 대한 토론은 수친다총리의 요청으로 29일까지 연기됐다고 우크릿 몽골나민 하원의장이 발표했다. 한편 사망자 숫자가 1만2천명이라는 전단들이 거리에 뿌려진 가운데 야당지도자들은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미국 행정부 관리들은 푸미폰 태국 국왕의 사태 개입이 현재의 정치적 위기를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리처드 솔로몬 미국무부 부장관이 20일 밝혔다.
  • “국가위기의 해결사” 태 국왕

    ◎국민신뢰 절대적… 추인 못받은 쿠데타는 실패 푸미폰 태국국왕의 절대적 권위가 그 위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파국으로 치닫던 유혈시위사태에 직접 개입,수친다와 잠롱으로 대표되는 군사정부와 재야세력에 정국수습을 위해 한걸음씩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 태국 국영TV로 중계되고 전세계 TV가 이를 받아 방영한 21일의 국왕의 사태해결 중재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이나라에서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다.국왕이 나타날 때는 땅바닥에 엎드려 그의 발앞에 손수건을 깔고 그것을 가정의 제단에 모셔놓을 정도다. 국왕이 현실정치에 일일이 참견하지는 않지만 태국 정치의 특징인 군·관료·승려등 지배세력간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심판자로서의 역할은 거의 신성불가침이라 할 수 있다.그동안 17차례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이 그의 승낙을 얻기 위해 하나같이 왕궁으로 달려간 점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지난 32년이래 실패한 7번의 쿠데타도 왕의 추인을 받지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번 시위사태의 경우 푸미폰국왕의 후계자들인 왕세자와 공주가 모두 외국방문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이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뿐만아니라 시린돈 공주가 파리에서 위성중계된 TV방송에 출연,그녀의 눈물겨운 자제호소가 수친다총리의 기세를 잠재우는 위력을 발휘했다. 사실 이번 사태 말고도 태국국왕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예는 더러 있었다.지난 73년 반일데모로 시작,반정부운동으로 번진 학생시위가 바로 그것이다.당시 타놈군사정권은 학생시위가 격화되자 무차별 발포로 대항,40여명의 희생자를 낳게 했다.이때에도 푸미폰국왕은 침묵을 지키다 결국 군의 자제를 호소,타놈정권을 전복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76년에도 군부 우파세력이 타마사트대학의 학생시위를 유혈진압,46명이 숨지자 군부에 자제를 촉구,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가의 위기상황을 맞게되면 국왕이 항상 중재자로 나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태국형 입헌군주제가 뿌리내린 것은 32년 절대왕정이 무너질 때 사회 제세력간의 타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푸미폰국왕은 47년5월 즉위했다.불교와 함께 태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현재의 라타나코신 왕조는 19세기말 대대적인 개혁으로 근대화정책을 펴면서 다른 동남아 국가들이 식민지화로 전락한데 반해 태국은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현 왕실이 국민들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일부 식자층에서는 푸미폰국왕은 때로는 민주화 수호세력이 되고 한편으론 걸림돌이 되는 이중적 존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즉 국왕이 지난 81년과 85년의 프렘총리 당시 두차례의 쿠데타를 모두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헌정질서의 수호자가 됐으나 지난해 2월 수친다의 쿠데타를 용인하고 총리취임을 승인,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외면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왕실의 이중성은 근본적으로 국왕은 군사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대신 왕실의 이익을 보장받는 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 영 엘리자베스여왕 즉위 40돌

    ◎52년 26살때 승계… 20세기 최장수 군주로/입헌정치·왕조전통 유지,국민존경 여전 지금으로부터 40년전 두명의 어린아기를 가진 청순한 얼굴의 25세 여성으로 영국왕의 자리에 앉았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6일로 즉위40주년을 맞는다. 엘리자베스여왕이 갑작스런 즉위는 지난 1952년 2월6일 케냐를 방문하던중 부왕인 조지 6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남에 따라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 당시 일부 인사들은 작은 체구,조용한 말씨의 이 여인이 왕실에 던져지는 갖가지 도전을 이겨낼수 있을까 의문을 표시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1천년의 역사를 갖는 영국왕의 자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대영제국을 영연방으로 순탄하게 변화시키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고 최근 홍수처럼 인쇄되어져 나오는 각종 기념문서들은 찬양하고 있다. 올해 66세인 「엘」여왕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지킨 최장수 여왕이다.「엘」여왕은 그동안 제국들과 이데올로기가 붕괴하는 것을 보았으나 국내에서는 세습왕조의 오랜 전통을 지켜오는데성공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세계에서 드물게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에서도 그의 존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비록 여왕이 덕과 검약·절제의 전형이라 할지라도 왕실의 일부 다른 구성원들은 반드시 그같은 미덕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부 왕족의 엄청난 부의 과시는 왕실을 값싼 멜로드라마의 무대로 전락시켰다고 비판자들은 말한다. 점차 왕실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있는 신문들은 걸프전 당시 일부 왕족이 사냥을 즐겼다든지 영국 전체가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스위스의 호화스러운 휴양지에서 스키 휴가를 보냈다든지 하는 등의 왕실 동정을 비판적으로 보도하고있다. 비판의 물결은 여왕 자신에게도 미치고 있다.일부 인사들은 여왕이 단 한푼의 소득세를 내지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국,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으로 알려진 여왕의 개인 재산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그녀의 개인 투자 재산이 5천만 파운드(약 9천만달러)로서 앞서의 추산에 비해 단지 10분의1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여왕은 6일 샌드링엄 별궁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낼 계획이라고 버킹엄궁의 관리들이 전하고있다.또한 영국정부도 이 여왕의 즉위 40주년을 맞아 대규모 공식 축하행사를 개최하거나 깃발을 거리에 내다 걸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군주제 지지파들의 단체인 왕실기념 기금은 금년 내내 여러가지 행사를 준비중이다. 여론조사들은 국민들이 사치스러운 일부 왕족들에 불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에 대해서는 높은 존경심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그루지야 반군,시위대에 발포/수명 부상

    ◎4천 군중 감사후르디아 지지시위/셰바르드나제,대통령출마 시사 【트빌리시 AP 연합】 보름동안 약 6백명의 사상자를 낸 그루지야공화국 내전은 6일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대통령이 인근 아르메니아공화국으로 탈출함으로써 일단락 되긴 했으나 7일 축출된 감사후르디아대통령에 대한 4천여명의 지지시위가 발생,군의 발포로 수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정국이 점차 정상화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이날 시위는 트빌리시 철도역에서 시작,점차 인원이 늘어났으며 군중들은 「즈비아드」를 연호했다. 한편 반군지도자들은 감사후르디아대통령을 국내 송환해 재판에 회부할 것을 다짐하는 한편 국가재건을 위해 공화국민들이 단합해 줄 것을 촉구했다.트빌리시는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으나 극심한 물자난을 겪고 있으며 무장강도들이 횡행하고 있다. 타스통신은 아르메니아가 감사후르디아에게 「정치적 망명」이 아니라 단지 「임시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음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철권통치·경제난에 민심 등돌려/반군수뇌부 “동상이몽”… 불씨 여전(해설) 군사평의회 인사들은 이날 ▲조속한 민정 이양 ▲빠르면 오는 4월 총선 실시 및 ▲감사후르디아 재판 회부 노력 등을 약속했다. 이와 관련,구왕주인 바그라티오니가를 귀국시켜 입헌군주제로 복귀할 가능성도배제할 수 없으며 바그라티오니가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이들은 전했다. 한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구소련외무장관은 이날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새로 구성될 그루지야 정부내에 참여하거나 대통령에 출마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구소련방의 붕괴와중에서 지난 4개월동안 끌어온 그루지야 내전이 반군들의 승리로 일단락 됐다. 이에따라 지난 2주동안 정부청사 지하벙커에 갇힌채 저항해오던 감사후루디아 대통령을 추방하고 전권을 장악한 반정부세력은 이미 구성된 군사평의회와 임시정부를 통해 혼란수습에 나서면서 민주주의와 경제개혁 및 여타공화국과의 협력정책을 추진해나가는 한편 올4월쯤 자유총선도 실시겠다고 밝히고 있다.그루지야는 구소련의 15개공화국중발트3국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독립국가연합에 불참했으나 정권교체를 계기로 뒤늦게나마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감사후르디아가 비참하게 권좌에서 쫓겨난 이유는 집권후 독재자로 돌변했기 때문이다.그는 공산당독재치하에서 공화국독립투쟁에 앞장서왔으며 민족주의 시인으로 숭앙받아 90년10월 처음으로 실시된 다당제총선에서 자유그루지야원탁동맹을 이끌고 압승,최고회의의장에 취임한데 이어 지난해 5월 87%의 압도적지지로 직선대통령에 당선됐었다.그러나 그뒤 감사후루디아는 대통령의 의회해산권과 법률안거부권 계엄선포권을 신설하면서 민주인사를 투옥하고 비판적인 신문들을 폐간시켰으며 시위대와 남오세티아자치주의 분리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유혈진압하는 등 철권통치를 펴와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지난해 8월 구소련의 불발쿠데타 당시에도 명확한 반대의사를 밝히지 않아 반군의 공세를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자초했다.당시 오블렌스키 쿠데타조사위원장은 그가 쿠데타 지지자 명단에 올라있었다고 밝혔다. 스탈린과 셰바르드나제전소련외무장관의 출신지인 그루지야는 인구 5백40만명으로 포도주와 과일을 주로 생산하는 경제적으로 낙후돼있는 소국이다.소연방이 해체된 상황에서 경제자립을 이룩하기가 결코 쉽지않고 남오세티아 독립문제도 남아있기 때문에 내전이 일단락됐다고 해서 그루지야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반정부세력들도 여태까지의 감사후르디아타도 투쟁에는 단결했지만 워낙 여러갈래이기 때문에 앞으로 다시 분열될 가능성도 없지않고 연방해체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있는 셰바르드나제의 복귀에 대해서도 지난 72∼85년 그루지야공산당제1서기 재임시절 쌓았던 나쁜 이미지때문에 찬반양론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 소련 공산당 몰락을 지켜보며/복거일 (특별기고)

    ◎고르비의 역사적 역할은 끝났다/온건개혁으론 「민주혁명시대」 못 이끌어 자신을 몰아내려 했던 정변이 실패한 뒤,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 이념과 공산당에 대한 믿음을 밝힌 대목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1985년 집권했을 때,고르바초프는 도전받지 않는 공산당의 지도 아래 생기를 되찾은 사회주의 이념을 따라서 정치적으로 강력하고,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며,정신적으로 자신감을 가진 소련을 만들 수 있다고 공언했었다.공산당도 사회주의 이념도 파산한 지금,그가 그런 믿음을 아직 지녔다는 사실은 그의 됨됨이와 그가 주도한 개혁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많다.생각해보면,그런 믿음이 그를 소련의 정치적 지도자로 만들었고,그를 몰락시켰다. 혁명은 거의 언제나 체제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그것을 지키려는 시도로 시작된다.그들은 온건한 개혁 조치들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면 혁명을 막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온건한 개혁 조치들은 숨겨진 사회적 힘들을 풀어놓게 마련이다.그래서 한번 시도되면 개혁은 빠르게 혁명으로 바뀐다.그리고 그런 혁명의 불길을 타고 나갈 마음도 능력도 없는 온건 개혁파들은 뒤에 「잊혀진 사람들」로 남게된다. 프랑스 혁명 때의 라파예트가 대표적 예다.혁명 초기 개혁을 주도한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지만,그는 끝까지 입헌군주제를 지키려고 애썼다.그러나 그런 개혁은 이내 혁명을 요구하는 세력들을 불러냈고 그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들은 밀려났다. 고르바초프는 라파예트가 걸은 길과 아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정치와 경제를 온건한 방식으로 개혁하려는 그의 노력은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바라는 세력을 불러냈다.그것이 역사의 무대에서 그가 맡은 배역이었다.이제 그 배역은 끝났고,그는 곧 무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물론 명령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는 일은 아주 힘들고 급진파들의 혁명적 시도가 실패하여 반동의 움직임이 나올 가능성은 크다.그러나 그런 반동이 나오더라도,고르바초프가 할 역할은 클 수 없다.큰 혼란이 반동을 부르면,그런 부름에 응하는 것은 군부 정권일 것이다.라파예트가 다시 나서는 것이 아니라,보나파르트가 나타나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극적 몰락은 소련 제국의 특수한 사정에서 작지 않은 부분이 나왔다.공산주의 체제를 허무는 일은 소련 제국을 그것을 구성한 공화국들로 나누는 과정과 맞물려 있고,되도록 소련 제국을 지키려는 온건파가 각 공화국들을 대표하는 급진파들에게 점점 세력을 앗기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그런 요소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역할은 빠르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금 고르바초프가 맞은 어려운 사정은 1790년대 초의 라파예트가 맞은 어려운 사정과 아주 비슷하다.라파예트는 왕당파로부터는 혁명운동가로 비난받았고 급진파로부터는 체제 옹호자로 비난받았다. 파리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난 뒤,의회가 왕의 권한을 정지시키자 불란서 군대를 이끌던 라파예트는 거의 홀로 군주제를 지키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이 실패한 뒤,그의 군대가 그를 버리고 의회가 그를 범죄자로 규정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국경을 넘었다.지금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세력과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세력으로부터 협공받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몰락이 그의 은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파예트는 보나파르트의 등장과 몰락 뒤에도 꾸준히 활약했다.그러나 옐친으로 대표되는 급진파가 세력을 얻은 뒤에 고르바초프가 할 일들은 역사적으로 별다른 뜻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1792년 뒤의 라파예트의 활동이 역사적으로는 후일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라파예트나 고르바초프처럼 온건한 개혁을 통해 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대개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인정이 많으며 흔히 그 사회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인간적으로 가장 매력있는 사람들이다.그런 사람들이 몰락하여 역사의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서글프다. 돌이켜보면,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꼭 서글픈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누구도 동시에 라파예트와 당통이 될 수 없다.그래서 옐친에게 수모당하는 고르바초프의 모습은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것을,그리고 그의 이름이 역사에 크게 남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정말로 서글픈 것은그런 역할을 맡았으면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다.그들은 곧 잊혀진다.아니 두고두고 비난받는다.소련보다 개혁이 훨씬 쉬웠던 중국을 이끈 등소평의 경우다. 고르바초프 대신 등소평을 정치적 지도자로 가졌다는 사실은 중국의 불행이다.물론 더욱 서글픈 것은 북한이 아직 등소평과 같은 사람도 낳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언제 북한에 등소평이 나타날 것인가,고르바초프는 그만두고라도.
  • 고르비,신당후보로 출마 유력/소 새 연방대통령 선거 전망

    ◎신연방조약 내용따라 위상 크게 변화/“명목상 원수” 확실… 후보난립 없을듯/민주진영 셰바르드나제·보수파선 리슈코프 물망 새로운 소연방대통령의 조기선거는 새 연방조약의 체결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새 연방조약이 어떤 모양으로 체결되느냐에 따라 연방대통령 선거의 양상도 달라질수 있기 때문이다.연방정부의 권한이 축소될수록 연방대통령은 입헌군주제하의 왕과 비슷한 기능만을 수행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그렇게 되면 연방대통령의 선거 자체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수 밖에 없게 된다. 현재 소련의 상황으로 볼때 연방정부의 권한이 점점더 개별 공화국들로 이전될 것이란 점은 거의 확실하다.이같은 전망을 바탕으로 많은 소련문제전문가들은 앞으로 소련의 정치구도에 대해 옐친이 정책안을 제시하고 고르바초프의 추인을 받아 옐친이 이를 집행하는 양상으로 정착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이는 소련정치가 연방대통령과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라는 2중구조하에 펼쳐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연방대통령이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전락할때 연방대통령직이 갖는 매력은 크게 감소할수 밖에 없다.따라서 연방대통령에 출마할 후보의 범위도 상당히 좁혀질수 있을 것이다. 연방대통령에 누가 출마할 것인가를 점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그러나 현재까지의 소련정황을 종합해보면 연방대통령에 출마할만한 인물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할수 있다.이제까지 소련개혁의 상징인물이었던 고르바초프,급격히 부상하는 새 별 옐친,민주개혁진영에서의 후보로서 셰바르드나제등이 연방대통령후보로 거론되고 있다.해체의 길을 걷고 있는 공산당등 보수세력에서 리슈코프 전총리등을 후보로 내세울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만은 없다.그러나 보수진영에서 후보가 나온다 해도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기대할수 없는만큼 이는 논외로 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러시아공부통령은 26일 고르바초프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고 옐친이 고르바초프에 도전,새 연방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데 관심이 없으며 현재 옐친과 고르바초프간의 좋은 관계가 향후 5년간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이는 옐친의 불출마를 시사한 것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사실 옐친으로선 실권도 없는 명목상의 연방대통령에 취임,험난한 소련경제개혁의 앞날에 대한 책임을 지는것보단 강력한 권한을 보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은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 훨씬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고르바초프의 출마가능성에 대해서도 엇갈린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일부 관측통들은 고르바초프가 26일 연설에서 이번 쿠데타에 자신도 책임이 있음을 시인한 점을 들어 고르바초프가 연방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소련개혁의 창시자이고 독재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소련을 오늘의 시민사회로 변모시킨 장본인이다.또 소련이 어떤 급격한 변혁을 겪는다 해도 아직까지는 고르바초프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르바초프도 26일 연설에서 자신이 시작한 개혁을 완결시키겠다는 강력한 희망을 피력한 만큼 공산당을 대신해 새로 창설될 신당의 후보로 고르바초프가 연방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는데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수 있다. 고르바초프가 개혁파와 보수파간에서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개혁을 지연시켰다는 비난과 함께 고르바초프 진영에서 이탈한 민주개혁진영에서 후보를 내세울 가능성도 점칠수 있다.민주개혁진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셰바르드나제 전외무장관을 들수 있다. 민주진영에서 후보가 나오느냐의 여부는 연방대통령 선거일이 언제로 결정되는냐에 따라 달라질수 있을 것이다.이미 공산당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선거까지의 남은 기간동안 이제까지 소련개혁의 상징이었던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할만큼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 옐친과의 원만한 협조관계를 유지할수 있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후보출마를 포기할수도 있다.그럴 경우 고르바초프의 단독출마로 연방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도 매우 크다. 쿠데타로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받은 고르바초프에겐 이번 선거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판가름할 중요한 선거가 될것이다.
  • 요르단 다당제 복귀/국민헌장 채택 계획

    【암만 로이터 연합 특약】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2천명의 국민회의 대의원들은 9일 34년 만에 처음으로 다당제로 복귀하는 내용의 국민헌장을 채택할 예정이다. 현재 중동지역에서는 다당제를 실시하는 국가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요르단정부는 정당법과 언론자유법,39년 만의 첫 다당제 총선을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 등을 마련중에 있다. 그러나 다당제가 실시되더라도 입헌군주제는 계속 유지된다.
  • 태국에 쿠데타/군부,총리구금등 정부전복 발표

    ◎헌법 폐지… 계엄령 선포 【방콕 AP AFP로이터연합】 태국에서 23일 낮 무혈 군사쿠데타가 발생,군부가 정부와 언론시설물 등을 장악한 가운데 군부는 헌법을 폐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차티차이 추나완 현총리와 그의 정부각료들은 군부에 의해 구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군부의 최고사령관인 순토른 콩솜퐁 장군(59)은 이날 방송을 통한 성명을 발표,쿠데타군의 국가평화유지 평의회가 정부를 장악했다고 선언하고 이번 쿠데타는 『태국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육·해·공군과 경찰을 포괄하는 군부가 이날 상오11시30분(한국시간 하오1시30분)부터 권력을 장악했으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표가 있는 후 쿠데타군의 한 대변인은 TV방송을 통해 헌법의 폐지와 의회의 해산,그리고 계엄령 선포 조치를 발표했다. 쿠데타군은 방송에서 순토른 장군을 비롯한 6명의 최고위 군지휘관들이 국가평화유지 평의회의 구성원이라고 전했다. ◎왕정 폐지후 15번째 태국에서 군부는 전통적으로 주요 권력그룹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1932년 군사혁명으로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뀐 이래 모두 15차례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바 있으며 가장 최근의 쿠데타 시도는 지난 85년 실패로 끝난 프렘 틴술라 정권에 대한 쿠데타였다.
  • 막올리는 「평성시대」…술렁이는 도쿄/내일 일왕 즉위식…외교가 부산

    ◎불 총리등 수뇌급 사절 150국서 50명 방일/각국,초호화 외교무대서 “국익찾기” 분주 일본에 있어서 「천황」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전후 일본의 신헌법에 의해 그 지위는 비록 「국가원수」로부터 「상징천황」으로 바뀌었으나 일본 국민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서의 그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 관리들을 비롯한 많은 관계자들은 한국의 매스컴이 언제부터,무슨 이유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해 왔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언론계 인사들도 오는 12일의 일왕 즉위식에 본국에서 몇명의 기자가 지원취재를 오느냐고 묻는다. 일본 신문들은 연일 「평성류­새 스타일의 천황폐하」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특집을 내고 있으며 즉위식에 참석하는 각국 요인들의 명단을 상ㆍ하로 나누어 연재하기도 한다. 지난해 1월7일 사망한 「소화천황」의 뒤를 이은 아키히토(명인) 일왕은 즉위 1년 10개월만인 오는 12일 즉위식을 갖는다. 국가행사로 치러지는 이번 「소쿠이노 레」(즉위□예)는 일본에서 62년만에 거행되는 즉위식이며 신헌법상의 「상징천황」으로서는 처음 갖는 행사이다. 탈상을 기다려 시작되는 일련의 즉위관련 의식 가운데 중심행사는 즉위식 자체인 「정전의 의」,의식을 마친 뒤 왕궁으로부터 아카사카고쇼(적판어소)에 이르는 4.7㎞의 카 퍼레이드인 「축하어열의 의」,12일 밤부터 15일까지 7차례에 걸쳐 거행되는 즉위피로연인 「향연의 의」 등 3가지이다. 즉위식이 거행되는 12일은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소쿠이노 레,세이덴노 기」(랑위예정전□의)는 12일 하오 5시 왕궁의 정전 「마쓰노마」(송□간)에서 일왕이 모습을 나타내면서 시작된다. 넓이 3백70여㎡인 이 방은 신년축하행사ㆍ총리임명식 등 중요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중앙에는 일왕이 앉을 높이 5.9mㆍ무게 약 80t의 「다카미구라」(고어좌)가 설치되고 앞뜰에는 「반자이반」(만세번),「다이깅반」(대금번) 등 색색의 기치 26본이 세워진다. 또 칼 창 활을 비롯한 각종 위의물을 든 궁내청직원 74명이 옛날복장으로 늘어선다. 이 행사에 참석하는 2천5백명의 좌석은중정을 중심으로 마련되며 외국사절들은 정전을 향한 특설석에 앉는다. 이 자리에서 일왕은 「황위」의 상징적인 검과 어새ㆍ국새를 받으며 즉위를 선언하는 「말씀」을 한다. 이에 답해 가이후(해부)총리가 축하인사를 드리고 「즉위를 축하하여 천황폐하 만세」를 3번 선창한다. 이에 맞춰 왕궁에 인접한 「기타노마루」(북□환) 공원에서는 자위대가 21발의 예포를 쏜다. 이 의식은 약 30분만에 끝나며 하오 3시30분부터는 연미복으로 갈아입은 일왕이 왕후ㆍ왕세자와 함께 30여분간 오픈카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때 연도 4.7㎞에는 1만여명의 경찰관이 배치돼 행인을 검문검색하는등 테러경계에 나선다. 이번 국가행사인 즉위식과는 별도로 22일 저녁부터 23일 새벽 사이 왕실행사로 「다이조사이」(대상제)가 거행된다. 이것은 일왕이 즉위 후 처음으로 햇곡식을 천조대신을 비롯한 신들에게 공양하고 자신도 먹음으로써 국가안녕과 오곡풍성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왕실에서느나매년 「니이나메사이」(신상제)가 거행되는데 「다이조사이」는 이것과 취지는 같으나 즉위에 수반하여 1세에 한번만 거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즉위행사와 관련하여 일본정부가 관심을 갖는 것은 도쿄(동경)가 또다시 세계최고의 중심지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즉위행사에는 세계 1백60여개국에서 축하사절이 참석한다. 이 가운데는 50여명의 수뇌급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축하행사를 계기로 도쿄에서 대 일본 또는 제3국 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가이후 총리와 나카야마 타로(중산태랑) 외상은 각각 40∼50건의 회담일정을 잡아놓고 있다. 가이후 총리는 일요일인 11일 18건을 비롯,15일까지 50명의 외국요인들과 회담할 계획이다. 그는 퀘일 미국 부통령,루키아노프 소련 최고회의의장,로카르 프랑스 총리 등과 만나 중동위기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며 한국의 강영훈 총리와는 교섭이 시작된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문제 등에 관해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측의 이해를 구할 방침이다. 그러나 회담시간은 일부인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0분 정도여서 『실질적으로 내용있는 회담은 어려울 것』이라고 외무성 간부들은 말하고 있다. 한편 나카야마 외상도 11일부터 15일까지 40명의 인사들과 만날 계획이다. 특히 나카야마 외상은 14일 아프리카 제국의 대표들을 초청,오찬을 베푼다. 이번 즉위식에 참석하는 주요인사에는 바이츠 제커 독일 대통령,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오학겸 중국 부총리,아키노 필리핀 대통령,데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핫산 요르단 황태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즉위행사를 더욱 뜻깊게 하기 위해 9일 2백50여만명에 대한 복권도 실시했다. 이 가운데 80%는 교통사고를 일으켜 벌금을 납부했던 사람들이지만 선거법 위반자 4천3백명도 은사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천황제」를 단순한 군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회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모크라시와 군주제의 혼합체로 보아야 하다는 것이 오늘날 많은 일본인들의 인식이다.
  • 입헌군주제 도입/네팔,새 헌법 공포

    【카트만두(네팔)AFP 연합 특약】 비렌드라 네팔국왕은 9일 다당제 민주주의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네팔은 사실상의 절대왕정에서 명실상부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게 됐다. 비렌드라 국왕은 이날 왕궁에서 가진 전국TV 라디오연설을 통해 『군주제의 전통은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각료평의회에 헌법제정을 요청한 것은 이러한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다당제 민주주의하에서 국민들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 총리회담의 의의와 전망/전문가 대담

    ◎“남북제안의 「공통분모」 구체화가 과제”/상호체제 부정적 언급 없었던건 큰 의미/북한 진의 정확히 분석… 유연대응 바람직/“평양은 체제유지에 위기감”… 분야별 회담등 통해 변화 유도를 16일부터 1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총리회담에서 분단 45년만에 처음 우리측 고위정부인사인 강영훈 국무총리가 김일성주석과 요담,남북정상회담개최에 대한 전향적인 답변을 김주석으로부터 받아냄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강총리의 김주석 면담의 의미 및 남북정상회담의 실현 가능성,남북총리회담의 전망 등을 전문가의 대담을 통해 알아본다. ▲김창순 이사장=평양 2차 고위급회담은 비록 합의문 채택은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남북 양측이 총리회담이 중단돼선 안된다는 인식아래 제3차 회담을 서울에서 계속키로 합의했다는 사실에서 그 성과와 의미를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측이 남북한간의 교류ㆍ협력을 선행과제로 보는데 비해,북한측은 이를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방안으로 보고 정치ㆍ군사문제부터 먼저 해결할것을 요구하는등 상호 접근방식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정상회담 문제에서는 과거보다 한발짝 구체화된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김일성주석이 총리회담의 성과가 있어야만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한말은 김이 종전부터 늘 해오던 것으로,획기적으로 변했다거나 도약한 것으로 평가해선 안될 것입니다. 그말은 뒤집어보면 정상회담을 위한 모든 선행조건이 충족돼야만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의사로 봐야 합니다. 다만 정상회담에 대해 명확한 부정적인 언급이 없었던 점이 평양회담이 남긴 의미랄까요. 어쨌든 3차 서울회담에서는 좀더 구체화되리라 봅니다. 특히 1ㆍ2차 회담에서 의견의 접근을 보았거나 사실상 일치된 문제에 대해선 3차회담에서 합의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서병철교수=지난번 1차 서울회담은 상호 입장을 개진하는데 회담의 비중이 두어졌고 이번 평양회담은 합의문 채택에는 실패했지만 상호 통일을 향한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양측이 주장한 내용중 상당부분에서 의견을 같이 했다는점이 이번회담의 성공적인 측면이 아닐까요. 그중에서도 거의 합의문채택 문턱에까지 갔던 불가침선언문제의 경우 우리측이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북측이 제기한 내용을 포함시키는 방법으로 접근함에 따라 이제 서명형식만 남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발언에 대해서는 좀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김은 이 문제에 대해 이번처럼 호의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손님을 초대해 놓고 문전박대할 수 없는 사정도 있을 수 있지만 김이 정상회담에 대한 명확한 거부의사가 있었다면 그처럼 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정상회담을 가질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김이사장=이미 1ㆍ2차회담에서 드러난 것처럼 북한은 한국의 유엔단독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총리회담을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엔단독가입 저지 이유야 주지하다시피 북한측이 일관되게 견지해온 「하나의 조선」정책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 정책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리고남북간에 현격한 시각차이를 보이고 있는 팀스피리트훈련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은 이 문제를 회담의제로 꾸준히 제기,내년에라도 회담을 통해 중단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들이 중대한 승리를 거둔다는 방식으로 회담에 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의 요구에 따라 팀스피리트훈련이 중단됐다는 내치용으로 팀스피리트훈련과 총리회담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북한측은 총리회담을 쉽사리 중단시키진 않을 겁니다. 우리의 경우 45년만에 실현된 총리회담을 어떻게든 지속시켜 남북관계를 화해와 교류,협력관계로 전환시켜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처럼 남북총리회담은 상호 필요성에 공통분모를 두고 있기 때문에 3차회담은 2차회담보다 더 희망적이라할 수 있습니다. ▲서교수=앞으로의 회담에 대한 전망에 앞서 회담과정에서 나타난 북한의 태도를 분석해보고 그들의 본심이 무엇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북한이 총리회담에 응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소련의 압력이지만 동서독이 통일되는 상황에서 이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으로 서로 대화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김일성의 체면문제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동구권의 탈공산화과정에서도 조직적으로 체제관리를 해온 루마니아,불가리아 등에서 공산정권이 그대로 지속된다는 측면도 김에게 체제유지에 대한 미련을 심어준 것 같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앞으로의 회담에서 내용면에선 상당한 변화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이사장=북한은 금년 4월 총선에서 기존 대의원의 30% 이상을 교체하는 등 위험요소가 있는 세력들을 권력층에서 배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5월에는 권력구조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권력개편은 어차피 이번 총리회담과도 연관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군요. 또 우리가 소련과 국교수립을 했지만 소련은 아직도 북한에 대해 동지적인 입장에서 충고와 권고를 할 수 있는 처지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북한이 최근 대일ㆍ대미 유화제스처를 취하는등 부드럽게 나온다고 해서 이를 변화된 자세로 보면 오산입니다. 특히우리사회는 북한에 비해 이념면이나 전술ㆍ전략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단련이 돼 있지않기 때문에 북한이 유화전술로 나올 때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90명의 대표단과 기자단을 이끌고간 우리의 총리를 환영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음악회나 축구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단은 인민의 차원에서 환영하지만 남한측 정부대표단을 환영하면 실체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북한의 자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이 어쩌면 총리회담을 성공으로 이끄는 선결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서교수=상호 실체인정문제는 이미 논쟁거리가 못된다고 봅니다. 북한은 지금까지의 정책을 부인하는 결과를 빚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상호체제인정 표시를 못하는 것이지 총리회담을 통한 간접정상회담이 이를 확인시켜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한반도의 상황은 지난 70년 동서독이 정상회담을 가졌을때의 분위기와 유사합니다. 제1차 데탕트에서 동서독 정상회담이 이뤄졌듯이 제2차 데탕트를 맞은 지금 남북정상회담이 실현 안될 이유가 없습니다. 한반도내에서 또다른 6ㆍ25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지만 북한으로부터 전쟁포기에 대한 명백한 담보만 얻어낸다면 우리는 상당부분 양보해도 좋을 겁니다. ▲김이사장=남과 북은 이미 1차회담을 통해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 이라는 3가지의 기본원칙에 대해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양측이 상당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는 남북불가침선언 문제도 몇가지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핫라인설치,대규모 군사연습의 사전통지,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 보장 등의 문제는 사실상 의견접근이 이뤄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한된 범위내에서 이문제도 공동선언까지 유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약간 빗나간 것 같습니다만 이번 회담에서 우리의 강총리가 2가지면에서 잘했다고 봅니다. 첫째가 북한이 내정간섭적인 요구를 계속할 경우 우리도 할말이 있다는 부분입니다. 공산이념에 젖은 쪽과 대화할때는 나름대로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국민의 의사를 확실하게 대변할필요가 있습니다. 또 북한의 언론이 북한측 의도만 일방적으로 보도했다는 지적도 적절했습니다. 양측이 대화를 할때는 양측의 입장이나 주장이 고르게 알려져야 대화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2차회담 첫날 다소 냉랭했던 분위기가 2일째부터 다소 누그러진 것도 우리의 이같은 당당한 태도에 기인한 바 크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우리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될 상대로 보여서는 안됩니다. 선전ㆍ폭로효과를 노리는 북한측에 제동을 걸면서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접근을 유도해나가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서교수=3차회담에서는 역시 그동안의 회담에서 나타난 공통점을 어느 형태로든 명문화시키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특히 경제협력 또는 무역문제는 남북이 상호보완 측면에서 진전될 수 있을 겁니다. 유엔가입문제는 북한측이 3차회담 일정을 유엔총회 폐막시점에 맞추려는 것으로 볼때 올해안에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는 총리회담 뿐 아니라 분야별 회담 등을 통해 북한측의 입장변화를 유도해야 합니다. ▲김이사장=이제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국내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서독이 독일의 통일을 유도해 낸 것처럼 우리도 우리 내부의 약점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가 허약하고 스스로 변변치 못할 때 총리회담에서의 성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북한을 상대로 해서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차원에서 통일의 주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북한측에서 볼때 「서울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인식을 계속 갖게 할때 통일에의 접근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우리 사회가 통일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여건을 꾸준히 조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 북한측은 자신들의 체제를 언필칭 인공국이라고 합니다만 전제군주제와 같은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요컨대 아직도 그들에겐 비정상적인 요소가 많고,그런 만큼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큰 사회ㆍ문화적 교류 및 접근방식을 꺼리고 있습니다. 총리회담에서 갑작스런 대단원이나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때문입니다. ▲서교수=북한이국제적인 환경변화에 따라 대화에 나서고 있다는 점등을 고려해 볼때 우리는 보다 활발한 북방외교의 추진등을 통해 이들 국가가 북한의 개방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이사장=북한은 종주국인 소련의 개방화추구등 주변동맹국의 변화에 상당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소련 고르바초프정권의 개방과 개혁정책추구 이후 자신들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체제유지의 위기도 감수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때 북한측이 95년도까지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주장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총리회담과정 등에서 이와 관련한 북한측의 의도를 분석해보는 작업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 「노대통령 연설집」 일 의사가 자비 출판(특파원수첩)

    ◎정상철영의 파격적 집필 화제/의회서의 연설내용 10가지로 나눠 설명/양국이 교훈으로 삼아야할 점등 적시 이노우에 데츠히데(정상철영)라는 사람은 마취과 의사이다. 야마구치(산구)현 출신으로 올해 38세,부인과 2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지난 78년 히로시마(광도)대학 의학부를 졸업했으며,1년6개월간 미국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대학에 유학하기도 했다. 지금은 기타규슈(북구주) 종합병원에 근무한다. 『저는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한국에 가본 일도 없으며,한국인 친구도 없습니다. 서울에는 한번 가보고 싶으나,원체 틈이 없어서… 』 이같이 말하는 그가 최근 파격적인 일을 해냈다. 「노태우 연설을 읽다」라는 자기 직업과는 전혀 무관한 책을 펴낸 것이다. 1백28페이지에 불과한 소책자이지만,지난 5월25일 노대통령의 일본 국회에서의 연설을 조목조목 나눠 설명하고 일본과 한반도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목을 객관적으로 짚어냈다. 출판도 물론 자비였다. 『연설은 평이한 표현으로 시종했으나 내용은 너무 깊어 많은 일본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고 시작되는 이 책은,그 집필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이 연설을 단지 흘려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 그런 표현을 썼는가,그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노대통령의 표현은 과연 정확한가 등을 상세히 검증해가며 이 연설을 읽어보자고 나는 생각했다』 이 책은 노대통령의 연설 전문을 다음 10가지로 나누고 있다. ▲인사 ▲일본에의 찬사 ▲한국현대사의 개관 ▲민주주의에의 선언 ▲격동하는 세계정세 ▲한반도분단과 통일에의 결의 표명 ▲아시아의 장래 ▲일본과의 실무적 관계 ▲「과거」의 청산과 일본에의 요망,재일한국인문제 ▲양민족 우호를 위한 호소 등이다. 저자 이노우에 의사는 이 연설의 모두에 나오는 『나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국회의 연단에 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는 대목에서부터 찬사를 보낸다. 노대통령은 그만큼 자부와 각오를 갖고 연설을 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헌법상의 「천황」의 규정을 비판한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써,그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바탕을 둔다』는 규정으로서는 누가 국가원수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법률가도 아니며,역사학자도 아니다. 본인의 말을 빌리면 『지난해 가을 세계정세가 격동할 때부터 한반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입장임에도 그는 역사적 고증을 필요로 할 때는 사실을,법률적 뒷받침이 필요할 때는 그 이론을 적절히 찾아 구사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가슴을 펴고 국가원수라고 한 이면에는,한국은 이제 군주제를 폐지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의 군주제를 무너뜨린 것은 1910년 한ㆍ일 합병에 의한 일본이었다. 즉 침략에 의한 군주제의 폐지는 일본이 최후의 가해자이며 한국은 최후의 피해자로 된 것』이라며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책은 일반인이 일반 미디어를 어떻게 소화하려 했는가의 하나의 패턴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대해 그다지 지식은 없으나 흥미가 있어 이제부터 관심을 가져보겠다고 생각하고있는 사람에게 하나의 시작으로서 조금은 뜻이 있는 것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자부하고 있다. 나는 노대통령의 무류성을 강조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좋다고 확실하게 자신의 평가를 주장해 보는 것도 또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연설의 검증을 위해 나는 꽤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 결과에 따른 평가이다. 가령 연설이 입에 발린 것이어서 전문가가 아닌 나만의 흥분이라고 웃음을 사더라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 도쿄(동경)에서 규슈(구주)까지 전화를 걸어 그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노대통령의 국회연설 보습을 TV에서 보았는가. ▲천만에,나는 의사라 바빠서 보지 못했다. 또 볼 생각도 안했다. 노대통령은 군출신이라는 선입관만 갖고 있었다. 연설문은 신문에서 읽은 것이다.
  • “북한 사회주의는 세습적 군주제/김일성 정권 지원중단을”

    ◎소 「신시대」지 주장 【도쿄 연합】 소련은 북한과의 우호관계와 김일성 정권을 지원하는 것을 명확히 구별지어야 한다고 소련 정치주간지 노브에 브레미야(신시대)가 최신호에서 주장했다. 이 주간지는 한소 수교 후의 한반도정책에 관한 논설중에서 북한의 사회주의를 『세습적 군주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고 지지(시사)통신이 5일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노브에 브레미야는 이어 북한은 철의 장막 속의 독재체제로 민중은 극빈생활을 하고 수십만의 정치범이 수용소에 갇혀 있으며 과학도 문화도 예술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성과로 돌려진다고 이들을 신랄히 비판,이제 북한 정권에 대한 경의표명을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신 데탕트」는 어디로 흘러가나/세계 석학 기고

    ◎21세기 국제질서 다극체제로 대변환/미·소,자체문제로 골치… 「세계 경찰역」 포기/곳곳 국지분쟁… 유럽·아랍,「지중해 대립」 가능성/정치적 관심 시들… 종교가 이데올로기화(서울신문 광복 45주년 특집) 우리는 15일 마흔다섯번째 광복절을 맞는다. 해방과 분단의 45주년을 맞는 것이다. 소·동유럽의 개혁으로 세계가 대립과 갈등의 냉전질서를 청산하고 화해와 공존의 새 질서를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맞는 광복절이란 점에서 새롭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광복절이라 할 수 있다. 소련의 민주화개혁과 시장경제 도입,동유럽의 탈소 독립 민주화 그리고 동서독의 통일과 유럽 통합노력의 가속화등으로 조성되고 있는 구질서 붕괴의 과도기적 유동상황속에 지금 태동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 내지는 국제정치체제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냉전의 이념적 대결이 사라진 가운데 터진 아랍 민족주의 갈등의 중동사태는 새 질서 형성의 방향을 시험하고 있는 느낌이다. 21세기를 지향하는 새 질서는 과연 세계의 평화와 안정과 번영을 보다 확고히하고 촉진하는것이 될 것인가. 그 연장선상의 동아시아 질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붕괴되고 있는 구질서의 산물인 한반도 분단의 상황도 이제는 끝날 것인가. 광복 45주년 특집으로 새 국제정치·경제질서의 향방과 한반도 주변 열강의 새 역학관계,그리고 한반도형 통일의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모델등을 내외 학자·전문가들의 시각을 통해 종합진단하고 전망해본다.〈편집자주〉 1990년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동서의 대립은 막을 내렸으며 핵의 위협은 사라졌다. 자유의 바람은 어디서나 느껴지고 있으며 전제정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이 보인다. 또 그동안 제3세계를 괴롭히던 기아문제는 적어도 남부아시아에선 해결됐다. 이같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전망은 그러나 2000년에는 다소 불투명하다. 한 시대의 전환은 물론 어느 정도 평화리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2000년으로의 전환은 지난 45년이후 탄생한 국제질서가 보다 나은 새 세계질서로 새롭게 대체될 것이라는 기대를 약화시켰다. 국제질서의 붕괴,「북­남관계」의 점증되는불평 등에 대한 운명론,갈수록 심화되는 부국의 자기중심주의,게다가 이데올로기 대용으로서의 종교문제 대두 등이 이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국제질서는 기존 강대국들이 더이상 그 무엇이든 책임지려 하지 않음으로써 무너지고 있다. 러시아연방은 소련을 대체했다. 러시아연방은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또한 이란·아프가니스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연방내 이슬람 영역은 기회만 제공되면 자치를 이룰 것이다. ○달러화,기축기능 상실 그루지야·아르메니아·백러시아·우크라이나 등은 폴란드의 야심에 맞서기 위해 혹은 이슬람 제국주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연방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결합체는 아직 정치적으로 취약하다. 연방 공화국들은 끊임없이 다투고 있으며 이로인해 모스크바 중앙정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지경이다. 군주제도의 복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그것은 앞으로 영원히 논의될 중요한 과제이다. 게다가 새 러시아는 이제 막 경제·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업에 착수했다. 이같은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러시아연방은 2000년에 자신들의 문제에 전념할 수밖에 없으며 여타문제에 관해선 신경을 쓸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오랜기간 동안 세계 최대 강국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세기의 전환기를 맞아 미몽에서 서서히 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 이웃 지역에서 발생한 일에 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있다. 2000년에 미국은 세계질서의 개편보다는 더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경제성장의 침체는 냉혹하리 만큼 지속돼 미국인들의 삶의 수준은 일본이나 유럽인들의 수준에 못미칠 것이며 심할 경우 한국이나 대만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게 된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미국의 엄청난 외채문제로 달러화가 국제시장에서 신용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또한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안고 있다. 유럽에서 건너온 미국인들은 2000년에는 대다수 큰 도시에서는 물론 25개주에서 소수인종으로 전락하게 되며 흑인과 스페인계가 대다수 지역을 지배한다. 미국은 또 사회복지를 위해 군비를 삭감,해외주둔기지를 철수시키고 대외적으로 안보는 아무 위협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뒤를 잇지 못한다.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이 했던 역할을 떠맡으려 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할 수도 없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일본의 그런 역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유럽과 북미는 일본을 불신하며 동시에 시기한다. 2000년에 있어 이들이 아시아를 대하는 공식 독트린은 보호주의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적으로 정치적 야심을 꾸미진 않으며 자신들의 가치관과 문화가 모든 국민에게 적합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세기의 전환기를 맞아 일본 경제의 우월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위도상 북부에 위치한 산업화된 부국과 남부에 위치한 미개발 빈국 사이의 균열은 점점 상호 관련이 없어진다. 좁은 땅덩어리에 높은 임금 때문에 일본은 그들의 사업을 해외로 확장,한국 대만 등은 물론 중국·동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해외기업을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계 각국은일본의 기술은 물론 노하우,심지어 경영철학까지도 손쉽게 얻을 수 있어 일본은 곧 추월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추세는 일반화되어 「남부」국가들 사이에서도 분열현상이 나타난다. 라틴아메리카는 연대감을 잃는다. 예를 들어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데 반해 안데스산맥 인근국가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마찬가지로 인도는 기아문제와 인구증가문제를 해결한 반면 아프리카는 구제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름뿐인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부패가 만연,발전을 못하고 있다. 이슬람지역은 회교 정통주의 정권이 지나치게 명령과 평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진정한 발전이 저해당하고 있다. 2000년의 문턱에서 중동지역은 또한 내부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터키,이라크,시리아 등은 종교적 색채가 덜한 정권이 들어서서 현대화를 꾀하는 데 반해 여타 다른 국가들­특히 산유국들­은 세계의 에너지원인 기름을 무기로 지탱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부는 더이상 부가 아니며 그들은 삶의 수준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가중되는 경제혼란을 이슬람 가치의 찬양을 통해 모면하고 있을 뿐이다. ○폴란드,권위주의 회귀 1990년대를 통해 선진국들은 제3세계의 정신적 가치를 받아들였다. 사회분석가들은 미국과 서유럽내의 가난과 부랑자들의 만연이 80년대의 실업위기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타대륙으로부터 이민의 유입과 냉혹한 경쟁으로 인해,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연금에 의존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군중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2000년대 선진국이 직면한 문제는 미개발된 타대륙을 원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따라서 통합유럽의 수도인 브뤼셀에서뿐만 아니라 워싱턴에서도 주요 정치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사태 발전은 지중해지역에 새로운 분쟁을 야기했다. 유럽에서는 주요 국제현안이던 동서대립이 중단됐다. 2000년 유럽의 분쟁은지중해에서 일어나게 되며 이때 유럽은 기술적 이점을 활용하는 데 반해 아랍은 수적 우세와 과격성을 내세우게 된다. 또다른 분쟁지역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이스라엘­아랍분쟁이 계속되는 중동지역이다. 같은 지역의 이라크,시리아,회교정통국가들간의 충돌도 피할 수 없을 듯 보인다. 1990년 발발했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사건은 이러한 전망의 예행연습이었다. 만일 이같은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최신 무기로 무장한 나라가 승리할 것이며 그때 이란은 호메이니 때와는 달리 이슬람국가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중국도 90년대말쯤에는 주요 관심사항으로 부각된다. 공산체제가 와해된 이후 설립된 불안정한 민주정부는 진정한 통치력을 확보하지 못하며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또다시 옛날처럼 분열된다. 해안에 위치한 지역들­특히 상해와 홍콩­은 각광받은 도시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겠지만 내륙도시는 발전이 부진하게 된다. 중국인에게 자유란 희망이 없는 곳을 떠나 새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그같은 희망이 어디서나 나타나지는 않는다. 90년대 10년간 유럽에는 균형이 존재했었다. EC 12개국으로 유럽연방이 이루어졌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도 동참했다. 그러나 유럽의 외교적 활동은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정지된다. 유럽은 이제 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없게 됐다. 2000년에 브뤼셀의 정부는 아무 결정권이 없는 하나의 관료체제가 될 뿐이며 또 이러한 상황은 10년은 더 계속된다. 이 기간은 유럽이 내부적인 정치행태를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게다가 유럽동맹은 소련과 동유럽의 재건을 도와주느라 바쁠 뿐이다. 이 기간동안 유럽은 말뿐이지 진정 세계질서에 관심을 갖지는 못한다. 동독의 서독으로의 경제통합은 불과 4∼5년 만에 이루어졌다. 체코와 헝가리의 사회·경제적 회복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달성됐다. 농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나라들은 공산주의가 남긴 대규모 농장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었고 사유화가 이루어지자 서유럽의 소규모 농장들과 경쟁해서 이겼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손실이었다. 유럽동맹의 농업문제는 전보다 나빠졌다.이제 2000년에는 적은 농업규모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잉여농작물에 대해 계속 보조금이 지급되어야 하나 아니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살던 곳에 머물라고 돈을 주어야 하나. 이러한 문제들은 동유럽국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바웬사대통령의 반독재통치정부이후 폴란드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하지만 바웬사는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원적 민주주의 발달 루마니아에선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 계속 정권이 바뀐다. 불가리아의 상황은 그래도 좀 낫다. 그러나 90년대 정치적인 안정은 이루었으나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유럽은 다시 두개로 나뉘어진다. 그 정도가 완화는 되었으나 여전히 격차가 있는 이 양자 사이에 이민이 계속된다.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는 권위주의체제로의 복귀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 또한 여전하다. 2000년의 새로운 세계에 있어선 또한 인간의 정신자세에 변화가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문제를 영원히 해결해준다는 어떠한 혁명적 이데올로기도 통용되지 못하며 대부분의 사회에 있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비교적 덜 나쁜 정부로 인식된다. 또한 국민들은 정치에 점점 무관심해지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며 동시에 정치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회의론이 증대된다. 공산주의 독재정권의 붕괴는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붕괴에 뒤이은 필연적 결과일 뿐이며 2000년에 마르크스 이론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동시에 학자들과 일반인들은 공히 「혁명은 독재를 낳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또한 혁명은 역사를 후퇴시키며 또다른 문제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불평등은 선동연설이나 기적에 대한 확신 또는 속죄양을 내세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돼 2000년에 혁명을 부르짖는 게릴라그룹은 없어진다. 이데올로기가 내세운 유토피아가 거부되는 현상은 왜 다원적 민주주의가 인본주의 정치의 상징이 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진짜 민주주의를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때 시민이 아니라 놀란 노예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성문화된 권리나 보장이 자유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발견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 2000년 시민들은 정치가를 믿지 않으며 그들의 목적은 단지 선거에 당선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선거에 기권하는 유권자는 늘어나고 이로인해 민주주의에 불만을 갖는 목소리는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다. ○내세·구원문제 눈돌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목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수많은 종교적 정서에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회교도들에게 이슬람적인 신념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인간을 다스리는 것은 신에게 부여된 능력이지 인간에게 부여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념은 세계의 서구화에 직면,이슬람 특유의 정치를 표현하게 된다. 게다가 그것은 이 세계에 침투해 있는 모든 악에 맞서 도덕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2000년대 문턱에서 이같은 태도는 특이한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국가의 정치성을 표현했다. 산업화된 아시아국가에서는 불교가 다시 번성하고 그것은 1천년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제에 맞서 정신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일본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전통적인 신도가 새롭게 번성하게 된다. 정치성에 관한 관심이 종교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이미 90년대 후반에 많은 사회에선 물질적 욕구에서 얻는 상대적 불만족이 다른 기대를 발생시켰다. 그래서 내세와 영원한 구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기독교사회에 있어선 신비주의가 새로운 경향이 됐다. 종교지도자들은 사회정의나 제3세계를 위해서 보다는 개인의 구원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종교분파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신과의 교감이 다시 깊은 관심사항이 된다. 2000년의 세계는 인간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그러한 시대인 것이다. □기에르메 ▲1934년 파리 출생 ▲파리대학 졸 ▲정치학박사(비교정치학) ▲파리정치대학교수(현재) ▷저서◁ 「비교정치론」 「반민주 민중론」 「민주실천의 사회학」 「민주주의의 역설」
  • 쿠웨이트 이라크 어떤 나라인가

    ◎전쟁외채 6백억달러… 1백만의 대군 ▷이라크◁ ▲영토=면적은 43만8천3백㎢로 북부 산악지대와 남부 습지로 구성. 이라크를 둘러싼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남동쪽에서 만나 전장 1백92㎞의 샤트 알 아랍 수로를 형성,걸프만으로 흐르고 있다. 이라크는 터키(북),이란(동),걸프만(동남쪽),사우디아라비아(남),요르단과 시리아(서)에 둘러싸여 있다. ▲군사=지난 79년 사담 후세인대통령 집권후 군사력 증강 추진. 현재 병력수는 1백만명 가량으로 의무병역제. 18세이상 남자 21∼24개월 복무. 육군 95만5천명(민병 48만명 포함),군단 7,기갑사단 7,기계화사단 7,주력전차 5천5백대,해군 5천명,프리깃함 5척,초계정 20척,공군 4만명,미그기 등 5백13대 작전기 보유. ▲인구=1천6백만명중 다수가 시아파 회교도이나 집권세력은 수니파. 그밖에 기독교마을과 북부지방에 3백50만명에 이르는 쿠르드 반군 거주지역이 존재. 공용어는 아랍어로 인구의 81%가 사용. 15%는 쿠르드어 사용. 수도는 바그다드로 4백60만명 거주. ▲경제=석유비축량은 1천억배럴. 80∼88년까지의 대이란전으로 석유수출 격감. 그러나 터키와 사우디 통해 파이프라인을 건설했으며 현재는 하루 3백만배럴 수준으로 회복. 대이란전으로 6백억∼7백억달러의 외채 부담. ▲역사=16세기이래 오스만 터키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1916년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21년 영국의 통제를 받는 왕국이 됨. 58년 7월14일 카셈중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독립. 63년 바트당의 압둘 살람 아레프가 카셈을 암살하고 대통령에 취임,이어 그의 동생 라만 아레프 참모총장이 대통령직 승계. 68년 바트당 온건파의 쿠데타로 바크르장군이 대통령에 취임. 바크르 정부하에서 69년부터 부통령을 지낸 사담 후세인이 79년 평화적 정권교체로 대통령에 취임. ◎석유,하루 백만배럴 생산… 병력 2만명 ▷쿠웨이트◁ ▲영토=1만7천8백19㎢의 영토를 갖고 있는 쿠웨이트는 북쪽과 서쪽으로는 이라크,남쪽과 서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그리고 동쪽은 페르시아만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군사력=병역제도는 2년 의무복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대학생에 대해서는 1년 복무를 인정하고 있다. 89년 현재 1만6천명의 군병력과 2백8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 공군의 경우 2천2백명이 복무하고 있으며 미라주 F1­C전투기 25대,스카이호크공격기 30대,연습기 1대,헬기 40대,수송기 6대를 보유하고 있다. 또 호크 지대공미사일도 갖추고 있다. 해군의 경우 2천1백명이 복무하고 있으며 미사일 적재함정및 해안순찰선을 포함,약 1백척의 선박을 갖고 있다. ▲인구=1백70만 쿠웨이트 인구중 4분의1이 수도 쿠웨이트와 그 인근에 살고 있다. 인구의 절반이상을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랍인이며 팔레스타인인도 30만명이 있다. 대부분의 쿠웨이트인들은 수니파 회교도이지만 인구의 30%가량은 시아파를 믿고 있다. 이란 시아파의 후손들은 약 15만명 정도이다. 알사바 가문이 1756년 아라비아 오지에서 이곳에 이주,정착한 후 쿠웨이트를 계속 통치하고 있다. 인구의 70%이상이 공식어인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10%는 쿠르드어,4%는 이란어를 사용하고 있다.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다. ▲경제=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인 쿠웨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석유이다. 국토의 1%만이 개간돼 있는 쿠웨이트의 지난 88년 개인소득은 1만3천6백80달러이며 89년 상반기(1∼6월) 석유생산량은 하루 1백3만7천배럴이었다. ▲역사=영국이 1899년 이 지역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기 이전에는 몽고인,아랍 칼리프,그리고 터키 오토만제국이 번갈아가며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 지역을 지배해 왔다.〈연합〉
  • 네팔 내각ㆍ의회 해산/국왕,야요구 수용… 다당제 총선길 열어

    ◎과정총리에 바타라이(국민회의 당수대행) 지명/“오늘중 조각…1년안에 총선” 【카트만두 로이터AFP 연합】 비렌드라 네팔국왕은 16일 찬드총리의 해임 및 관선의회 판차야트의 해산 등 야당세력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밝힌지 수시간만에 야당인 국민회의당 당수 가네쉬 만 싱에게 자유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임시정부의 조각을 위촉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당과 좌익전선연합의 지도자들은 2시간반의 비밀회동끝에 국민회의당 당수대행인 크리슈나 프라샤드 바타라이씨를 임시 연립정부수반으로 지명했다. 가네쉬 만 싱당수는 이날 저녁 비렌드라국왕과 2시간동안 왕궁에서 회담을 마친뒤 한 기자회견을 통해 국왕이 자신에게 임시정부의 총리직을 맡아 내각을 구성토록 요청했다고 말하고 자신은 다른 야당들과 논의를 거쳐 국왕의 요청에 대한 수락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싱당수는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을 거절했으나 비렌드라국왕은 싱의 총리직 수락을 끈질기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렌드라국왕은 15일부터 16일 새벽 사이에 진행된 정부와 야당측의 마라톤회담이 결렬된지 수시간만인 16일 상오 국영 라디오방송을 통해 찬드총리의 해임 및 판차야트의 해산외에 30년전 정당활동이 금지된후 다양한 사회계층의 이익을 대변키 위해 설립된 6개 기구의 폐지 등을 발표함으로써 야당측에 극적인 양보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네팔에서는 다당제하의 자유총선이 실시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싱은 내년 4월까지는 새로운 의회구성을 위한 자유총선이 실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비렌드라국왕이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를 지지할 뜻을 비췄다고 말했다. 바타라이 신임총리 지명자는 17일중에 내각을 구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렌드라국왕은 싱당수에게 총리직을 제의했으나 싱은 건강상의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 네팔,입헌군주제 도입 시사/전내각 권력남용 조사위 구성

    ◎국왕,야에 과도정부 참여 요청 【카트만두 AFP 연합】 네팔의 새로운 민주체제하에서 국민들의 요구에 대처하기 위해 비렌드라 국왕의 역할이 변화될 것이라고 파슈파티 라나 신임 네팔 외무장관이 10일 밝혔다. 라나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의 뜻과 변화의 시대에 맞춰 국왕의 역할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국왕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옵서버들은 라나 장관의 발언은 국왕이 입헌군주로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무정당의 판차와트제를 이끌고 있는 국왕의 권력에 대한 견제는 최근 7주동안 네팔 전국을 휩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기간중에 나온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로 시위 군중들은 의회격인 판차와트의 폐지를 요구했었다. 라나 장관은 비렌드라 국왕은 판차와트의 사실상 지도자였으나 그는 더 이상 판차와트에 대한 지도력을 갖기를 원치않고 있다고 밝히고 사임한 마리치 만 싱 슈레스타 전총리,정부가 저지른 권력 남용 부분을 조사할 한 위원회가 정당들의 협조속에 이미 구성돼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비렌드라 네팔국왕은 정치해금된 야당인 네팔의회당에 대해 다당제 민주체제의 수립에 따라 구성될 새 과도 정부에 참여해주도록 요청했다고 네팔의회당의 크리슈나프라사드 바타라이 당수권한 대행이 10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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