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군정
    2026-06-19
    검색기록 지우기
  • 옥수
    2026-06-19
    검색기록 지우기
  • 고사
    2026-06-19
    검색기록 지우기
  • 식음료
    2026-06-19
    검색기록 지우기
  • 오픈
    2026-06-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022
  • [이슈 Q&A] 계속되는 태국시위 원인과 전망

    태국의 방콕에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탁신 지지(붉은 셔츠)파와 반대(노란 셔츠)파 간의 갈등으로 태국 정국은 바람 잘 날이 없다. 태국 정치를 전공한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부터 갈등의 근원과 전망을 들어봤다. 박 교수는 “불만스럽더라도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가 사라져 버리면서 정치적 ‘게임의 규칙’이 실종돼 버린 것이 오늘의 사태를 불렀다.”고 진단했다. Q: 이번 시위의 근원은 무엇인가. A: 노란 셔츠의 원죄. 2006년 9월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실각했다. 군정이 새 헌법을 발효하고 나서 치른 총선에서 탁신 세력인 ‘국민의 힘’(PPP)이 승리했지만 ‘노란 셔츠’가 정부 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저항을 벌였다. 내각이 붕괴했고 ‘국민의 힘’은 대법원 판결로 무너졌다. 반탁신 세력이 반정부시위를 통해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지난해에는 ‘붉은 셔츠’가 아세안+3 회의장에 난입해 회의를 무산시켰다. 결국 ‘게임의 규칙’이 없어지면서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Q: 탁신을 지지하는 세력은 누구. A: 농민과 도시빈민. 탁신은 후기로 갈수록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쏠렸지만 집권 초기엔 케인스주의 정책을 상당히 폈다. 특히 무슬림이 다수인 남부를 제외한 농촌에 대해서는 농가채무 탕감, 저소득층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일관되게 재정확장 정책을 유지했다. 그 전엔 누구도 농촌과 빈민에 신경쓰지 않았다. 주요 수혜자인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은 지금도 강력한 탁신 지지세력으로 남아 있다. 그들이 조기 총선을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승리를 자신하기 때문이다. Q: 탁신을 반대하는 주요 세력은. A: 도시중산층. 탁신 정권이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등 독선적이었던 건 분명하다. 도시 중산층 사이에선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농촌 좋은 일만 시킨다는 불만도 커졌다. 부패문제에 대한 거부감도 강했다. 지금도 농민들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2006년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일부에선 ‘좋은 쿠데타’라는 식으로 필요악인 양 본질을 호도해 버리기도 했다. Q: 쿠데타가 재발할 가능성은. A: 예측 불허. 현 집권당인 민주당은 온건보수 성향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정통 야당이다. 쿠데타는 누구에게도 플러스가 아니다. 하지만 태국 전문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2006년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다. 총선을 통해 친 탁신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을 경우 ‘노란 셔츠’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변수다. Q: 태국 정치불안이 주는 교훈은. A: 선거결과 인정해야.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제도적 민주화가 발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2006년 쿠데타 이후 불만이 있더라도 결과에 승복하는 정치문화가 깨져 버렸다. 쿠데타는 물리적 힘에 기대서라도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위험한 발상을 심어 줬다. 대화와 토론이 사라지고 선거 결과로 들어선 합법정부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크다. 힘과 힘이 맞붙는 끊임없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김정일 평양밖 군중대회 이례적 참석

    김정일 평양밖 군중대회 이례적 참석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6일 경제 분야 군중대회에 참석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현대화 공사를 끝내고 16년 만에 재가동에 들어간 함경남도 2·8 비날론 연합 기업소 준공 경축 함흥시 군중대회에 참석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에도 두 차례 2·8 비날론연합기업소를 방문했다. 특히 당시 방북 중이던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함흥으로 불러 면담을 가질 정도로 2·8 비날론기업소 재가동에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북한에서는 해마다 정치적 이슈와 관련, 대규모 군중대회가 열린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참석한 것은 2000년 10월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50주년 기념 군중대회 단 한 차례뿐이었다. 때문에 평양이 아닌 지역에서 개최된 경제분야 군중대회에 참석한 김 위원장의 행보는 이례적이다. 조선중앙방송과 조선중앙TV 등 북한 매체들은 이날 오후 10만여명의 함흥시민들이 참석한 군중대회 모습을 녹화 중계로 상세히 보도했다. 행사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일 내각총리,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 등 북한의 고위 간부들도 대거 참석했다. 선군정치를 표방해온 김 위원장의 이 같은 행보는 무엇 때문일까.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7일 “김 위원장이 진눈깨비가 날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평양이 아닌 함흥에서 2·8 비날론연합기업소 준공 경축 군중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은 지난해 말 단행된 화폐개혁 이후 시장 폐쇄 조치 등으로 민심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주민 경제 생활 향상에 주력하는 모습을 연출, 화폐개혁 이후 악화된 민심을 다독이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천리포수목원 1년간 16만명 찾아

    천리포수목원 1년간 16만명 찾아

    미국인이 한국에 귀화해 조성한 국내 최초의 민간수목원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천리포수목원이 일반 개방 1년 만에 입장객 16만명을 넘어섰다. 24일 천리포수목원에 따르면 지난해 3월1일 수목원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뒤 현재까지 모두 16만 1000여명의 입장객이 찾았다. 일반 개방 전인 2008년 1만 3700여명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이 수목원은 1970년 개장된 뒤 40년 가까이 회원에게만 개방됐었다. 수목원 측은 본원 주변에 한해 일반 개방한 뒤 숙박시설을 갖추는 등 관람객 편의시설을 늘리고 있다. 요즘은 겨울에 피는 꽃인 설강화 6만여 그루를 심고, 본원 주변 탐방로 정비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수목원은 고 민병갈(미국명 칼 페리스 밀러·1921~2002)씨가 만들었다. 미 군정 때인 1945년 통역관으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고 제대 후인 47년 되돌아와 전국을 뒤지다 천리포해수욕장 인근인 이곳에 정착했다. 산림청은 2005년 고 민병갈씨를 ‘숲의 명예전당’ 헌정 대상자로 선정했다. 그의 묘도 수목원 안에 있다. 국제수목학회는 2000년 아시아 최초로 이곳을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했다. 62만㎡의 부지에 국내외 60여개국에서 들여온 1만 5000여종의 나무와 꽃이 자라고 있다. 1997년 세계목련학회가 열릴 정도로 목련만 400종에 이른다. ‘귀신 쫓는 나무’로 알려진 호랑가시나무 등 희귀 식물이 많아 일찌감치 ‘나무와 꽃의 보고(寶庫)’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수목원 관계자는 “요즘은 날씨가 풀리면서 주말에만 평균 500여명이 찾아와 봄을 알리는 복수초와 풍년화를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월드 뉴스라인] 니제르군정 “새헌법·헌정복귀”

    서아프리카 니제르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정 지도부가 새로운 헌법 도입과 헌정 복귀를 약속했다고 서부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 모하메드 이븐 참바스 의장이 21일(현지시간) 밝혔다. 그는 AFP 통신에 “군정 지도부가 우리에게 필요한 보장을 했으며 이는 민간단체와 정당들의 참여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 통일학교 교사 항소심도 유죄

    부산지법 형사합의3부(부장 홍성주)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내용을 교재로 만들어 사용한 혐의로 기소된 전교조 부산지부 소속 교사에 대한 항소심에서 한모(47) 피고인 등 교사 3명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양모(33) 피고인에게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각각 선고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통일학교 교재가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의 선군정치를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등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일성을 노골적으로 찬양한 부분은 삭제했고, 특정 교사를 상대로 한 자료였던 점 등을 고려해 원심보다 형을 낮춘다.”고 덧붙였다.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모두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한씨 등은 2005년 10월 18일부터 11월 1일까지 매주 화요일 전교조 부산지부 강당에서 사회와 도덕, 역사과목 교사 등 30여 명을 대상으로 통일학교를 운영하면서 북한의 역사책인 ‘현대조선력사’의 내용을 발췌해 만든 교재로 김일성 중심의 항일투쟁사 등을 교육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일제 식민통치 도구들 美군정 그대로 대물림

    비록 비자주적 독립이었지만, 이후 건국과 정부 수립만이라도 우리 힘으로 이뤄냈다면 훗날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해방 이후 진행된 미 군정 3년은 이후 수십년 동안 한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 군정은 일제가 효과적인 식민통치 도구로 삼았던 법과 제도 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또한 친일관료, 일본군·만주군 출신, 경찰 조직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이들이 고스란히 재등용되며 미 군정의 그늘 아래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게 됐다. 언어생활, 법령, 교육, 학계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일본의 잔재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게 된 배경이다. 미 군정은 1945년 9월7일 선포됐고,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이르는 2년 11개월 동안 실시됐다. 미 군정청은 우선 전국적 치안권의 확립을 위하여 9월14일 군정 장관의 성명으로 일인 경찰관을 포함한 이전의 일제 경찰관을 그대로 존속시켜 치안유지의 책임을 맡겼다. 그때까지 자생적으로 치안 임무 등을 부분적으로 수행하던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 등은 경찰권 행사가 금지됐다. 그 근거는 조선 백성들이 독립의 보증수표로만 믿었던 포츠담 회담이었다. 1945년 7월26일 포츠담회담의 밀약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설정,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독립의 보장이 아니라 민족 분단의 첫 단추였다.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나온 미·소의 남북 신탁통치 결의 역시 분단을 부채질하는 촉매가 됐다. 반면 건국준비위원회는 우파와 좌파 합작의 형태를 띠며 자체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의구심을 자극하며 미 군정에 의해 부정됐다. 또한 환국을 서두르던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 역시 미 군정에 의해 입국이 지연됐고, 나중에야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하도록 허용됐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이렇게 미국에 의해 부정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일본 패망과 한국전쟁

    [한·일 100년 대기획] 일본 패망과 한국전쟁

    2005년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정부 관료와 기업 경영자 등 100명을 상대로 전후 60년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응답자들은 전후 일본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제사건 가운데 한국전쟁을 다섯 번째로 올려놨다. 전후 일본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는 요시다 시게루(1878~1967) 전 일본 총리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이 내린 선물”이라면서 “이제 일본은 살았다. 하늘이 일본을 돕는다.”고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외손자인 아소 다로 전 총리도 총무성장관 시절 영국 옥스퍼드 강연에서 “운좋게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을 급속도로 진전시켰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닷지 불황서 도요타 구출하기도 혹자는 일본 사람들의 근면성이 전후 경제 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평화헌법으로 인해 방위비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 발전에 주력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공산권에 대항하고 물자 부족시대에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빚은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겠지만 어찌됐든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 부활에 기폭제가 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후 주택과 산업시설의 상당부분이 파괴됐다. 일본이 세계 전쟁에 명함을 내민 것이 무기와 군수 물자를 지원할 수 있었던 재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판단한 미 군정 사령부는 재벌을 해체하기도 했다. 미 군정 방침이 일본 응징에서 일본 경제 자립으로 방향을 틀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미국의 자금 원조를 받은 일본은 1947년 즈음부터 경제 회복에 시동을 걸었다. 특히 석탄, 전력, 해운 분야 등에 자본이 대량 공급됐다. 그런데 국채(복구채)가 크게 늘어난 탓에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됐다. 1949년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디트로이트 은행장 조지프 닷지가 일본을 찾아 인플레이션 잡기에 나선다. 닷지는 긴축 재정을 펼쳤다. 부흥금융공사의 융자가 멈추고 채권 발행이 중지되자 인플레이션이 해소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해 도산과 실업이 잇따른다. 이른바 ‘닷지 불황’이었다. 1949년 6월 국철 분야에서 약 10만명, 전기·전철 분야에서 약 2만명이 해고됐다. 도시바 등 민간 기업에서도 대량 해고가 이어졌다. 1950년 3월 이케다 하야토 재무상은 군소업자들이 도산하고 자살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이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日경제학자 “마셜 플랜 효과에 필적” 미군의 거점 기지 격이었던 일본에서는 엄청난 수요가 발생했다. 미군은 한국전쟁을 위한 마대·석탄·트럭·포탄 등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사다 썼다. 트럭이나 전차·함정의 수리, 기지 건설 및 정비 작업 등도 일본에 발주했다. 당시 도요타는 트럭·탱크로리·덤프 트럭·지프 등을 4679대나 주문 받아 공장 폐쇄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세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이 일본에서 쓴 돈은 최대 30억달러로 추산된다. 이로써 산업 전반에 신규 투자가 가능해진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고도 성장을 거듭하게 됐다. 일본 경제학자 요네자와 요시에의 분석에 따르면 1951년 12%였던 일본 경제 성장률은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9.4% 또는 4.9%로 뚝 떨어진다. 1950년 6월23일 90.59엔이었던 닛케이 평균 주가가 1953년 7월 휴전 즈음 386.13엔으로 3년 동안 4배 이상 뛴 점도 한국전쟁의 일본 경제 기여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 경제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자신의 저서 ‘전후 일본사 1945~2005’에서 “1949년부터 이어진 닷지 불황에 신음하던 일본 경제에 한국전쟁은 단비와 같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정치경제학자 찰머스 존슨도 “일본에 있어 한국전쟁은 마셜 플랜에 필적하는 효과를 지녔다.”고 분석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분단 떠안은 광복… 날선 이념대립이 전쟁 불러

    조국의 해방은 절실했고, 침략적 제국주의는 대를 이었다. 이념으로 재편된 국제 정세는 조국을 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었다. 제국 간의 다툼과 이해관계의 공존 속에서 한민족의 평화에 대한 갈망은 깊어만 갈 뿐 아니라 요원하기까지 했다. 1945년 8월15일 오전 종로 거리 등 서울 곳곳에는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국민들은 반드시 들어라.’라는 내용의 방이 붙었다. 그리고 낮 12시. 라디오 앞에 모여든 흰 옷 입은 백성들은 지직거리는 기계음 속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 즉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느릿하고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훗날 시인 서정주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처럼 “못 가도 100년은 가리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그렇게 패망했다. 8월6일과 9일 사흘 간격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두 발은 수십만명의 일본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일본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했다. ‘각의’, ‘황족회의’, ‘어전회의’ 등을 거친 끝에 일왕은 직접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14일 밤 11시40분 항복선언 발표를 녹음했다. ●질곡의 씨앗이 된 비(非) 자주적 독립 광복(光復)이었다. 식민의 설움을 겪던 백성들은 라디오 방송을 들은 8월15일 그날은 감격을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일제히 광장으로, 거리로,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독립에 ‘스스로’ ‘자주’가 빠져 있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결정으로 광복군특공대가 1년 남짓 동안 준비해왔던 국내 진공작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자력이 아닌 상태로 일본의 항복이 나왔다는 점에서 독립은 ‘비자주적’인 측면이 강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훈련하다가 일본의 항복선언을 듣고 무산된 계획에 오히려 땅을 치며 통곡한 특공대원들의 모습은 한반도에 드리워진 또 다른 불안한 미래를 상징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이번 전쟁에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적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손에 맡겨지게 됐다. 오로지 평화와 독립만을 간절히 바랐던 한반도의 백성들은 순진했고, 침략의 이해관계와 앙상한 이념의 대립을 앞세운 제국주의에게 약소국 백성들의 순수한 열정은 안중에 없었다. 갇힌 독립투사들의 석방, 강제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청년들의 귀환, 임시정부가 아닌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의 수립 등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분단(分斷)이라는 업보만 덤으로 떠안겨졌다. 강대국들의 협상 결과 아프리카 대륙의 여느 나라들처럼 한반도에도 뜬금없는 38선이 직선으로 그어졌고, 그해 9월 남쪽에는 미 군정이, 북쪽에는 8월 말 소련의 군정이 들어섰다. 1948년 8월 비록 단독 정부였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모양과 주체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식민의 시간은 연장됐다. ●남북으로 갈라져 연장된 식민통치 국제연합(UN)은 공식적으로 남북 총선거를 결의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이 거부하면서 UN은 2월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다시 결의했다. 김구·김규식 등 단독 선거, 단독 정부를 반대한 정치인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UN 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북쪽에도 남북 요인회담을 제안했다. 그 결과 그해 4월19일 김구와 김규식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지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방북을 감행하고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요인 15인회담, 이른바 ‘4김’(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회담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며 이러한 안간힘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날 선 이념의 대립으로 민족이 서로 적대하는 속에서 한국 전쟁의 발발은 필연이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민족종교, 항일독립운동 구심점

    19세기 후반 이 땅에는 대종교·동학·천도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들이 발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력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1915년 10월 종교 통제안을 공포, 민족성을 일깨우는 민족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결과였다. 당시 민족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을 떠나 민족을 지탱한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을 전후한 4년은 민족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정기에 속한다. 대종교의 경우 1대 교주 나철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를 조직,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청 3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를 부조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했다. 이어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 이완용·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신도 및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만주 동삼성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해 북로군정서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신 대토벌작전을 전개, 대종교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919년에는 천도교가 주축이 돼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특별 성미’로 교인 1명당 3~10원씩 모두 30만원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조달했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명에 불과했던 1920년에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릴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 요인들을 포섭해 천도교를 분열시켰다. 또한 혁신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종교로서의 권위를 잃도록 했다. 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는 1920년대 무장조직 ‘야단’을 조직,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합병해 북간도 지역의 반일무장투쟁단체들의 연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림교도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청림교를 ‘가장 극심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44년 청림교 사건을 조작, 120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50~60명을 살해했다. 일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결국 청림교는 소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지난해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친일파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특히 기존에 독립유공자로 분류됐던 장지연 등 20여명의 이름이 이 사전에 올랐지만, 국가보훈처가 이에 대한 입장표명을 보류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보훈처 관계자는 19일 “친일인명사전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공적 자료 등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보훈처는 보훈대상 후보의 공적 사항만을 검토하는 곳이어서 친일행위를 평가할 권한이 없다.”고 말해,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강점기역사 체계적 극복 실패 친일파 처벌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친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한 광복 이후 우리 역사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36년간의 암흑기를 체계적으로 극복해내는 데 실패했다. 일제는 한·일병탄 후 한국인의 동화를 표방하며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내지(일본)인과 반도인을 차별하면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국민적 일체감을 강조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률이 급등하면서 동화도 가속화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인 출신 교사, 보통문관시험을 거친 하급행정관료·경찰의 비율도 급격하게 올라갔다. 지원병·징병 형태로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만도 20만명이었다. 참전을 독려해 친일파로 지목된 춘원 이광수도 “조선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행위였다.”라고 했다. 이런 현실은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인적 청산에 장애가 됐다.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반민족행위자 등을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개념화했지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더구나 친일청산 문제는 미군정 지배와 근대화 시대를 거치며 경제성장에 떠밀려 제대로 된 논의나 통합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간간이 학계를 중심으로 친일청산 문제가 거론됐지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시작된 인적청산 과정은 “역사학적 영역에 속한 부분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반대 논리에 부닥쳤다. 최근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문제도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광복 직후 객관적 사실에 따라 어떤 수준까지를 친일로 할 것인지 하는 잣대를 마련하지 못한 한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면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엄격한 잣대가 민족을 둘로 갈라놓을 수 있다.”고 했다. ●“인적청산 정치논리로 재단 안돼” 친일청산의 한계는 정권마다 출렁인 한·일 관계에도 원인이 있다. 제헌국회는 1948년 10월 친일파 처벌에 대한 의지를 최초의 특별검사로 불리는 반민특위 조직으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사회 주류층을 형성해온 친일파를 흡수한 이승만 정권이 그들을 처벌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민특위는 출범 1년만에 공소시효 단축과 특위 폐지의 외압에 시달렸다.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김구 선생 암살 등으로 특위는 사실상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대상 7000여건 중 221건만 기소하고 12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지만, 그나마도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5·16을 통해 장기집권에 돌입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인 반일 감정을 토대로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이끌어내며, 한·일병탄의 무효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조약 문구로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미국의 지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지목된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다. 군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정권 역시 과거사 청산에는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각각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지만 과거사 청산, 한·일 관계 개선보다는 경제 개발 자금 조달 창구인 일본을 압박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방일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에게서 각각 “진심으로 유감”, “통석의 염(念)”이라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한·일 미래지향적 신뢰구축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한·일 간 최대 이슈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에게서 처음으로 식민지배 인정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받아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열었다. 시민 중심의 과거사 청산 운동에 불을 댕겼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군사정권을 거치며 정치·경제 논리에 파묻혔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논쟁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54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내각의 전향적인 과거사 인식 전향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문제가 보·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또다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양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과거사에 결부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사이가 되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진실을 왜곡한 채 이뤄지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양국 모두 대내외적으로 진실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 김정은기자 cool@seoul.co.kr
  • [씨줄날줄]역이민/함혜리 논설위원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 남자 56명과 여자 21명, 어린아이 27명 등 104명을 태운 증기선 갤릭호가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했다. 3주 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하와이 오하우섬의 호놀룰루. 우리나라 첫 해외 이민의 역사다. 하와이 이주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일본이 한국 정부에 이민중지 압력을 행사하면서 중단되지만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는 식민지 시대에도 계속됐다. 1947년 미군정청 외무처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인은 191만 7500명으로 집계됐다. 해외이주가 보다 나은 교육기회와 일자리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각광받으면서 이민자는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늘었다. 외교통상부 집계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재외동포 수는 전세계 176개국 682만 2606명에 이른다. 주목할 점은 재외동포 수가 지난해에 전년 대비 3.15%(22만 2110명)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역이민자가 이민자 수를 넘어선 결과다. 지난해 외교통상부에 영주귀국을 신고한 역이민자는 전년보다 14.3% 늘어난 4301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는 참고용 숫자일 뿐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다고 봐야 한다. 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고 국내에 거주하거나 양쪽을 오가며 사는 사람, 가족이 외국과 한국에 나눠져 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역이민자들 중에는 1970∼1980년대 이민을 떠났던 이민 1세대들이 노후를 고국에서 보내려고 유턴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 다음은 경제적인 이유가 대부분이다. 한국은 국력 신장으로 기회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기회의 땅’이 되고 있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국내에서 일자리를 얻어 귀국하는 이민 2세대들이 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역이민자들 중에는 다시 이민을 떠나는 역역이민자들도 상당수라고 한다. 주거비용도 비싸고 교육비도 비싸다. 자녀들은 한국 교육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정불화를 겪는 가정도 많다. 사회 물정을 잘 몰라 돈을 날리거나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이민의 60 ~70%가 이런저런 이유로 역역이민을 선택한다. 주요 이민대상국의 이민요건 강화와 우리 경제 수준의 지속적인 향상으로 이민 감소와 역이민 증가세는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외국생활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춘 역이민자들을 사회발전 동력으로 이끌 수 있는 방안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한은 창립60주년 새 CI 공개

    한은 창립60주년 새 CI 공개

    한국은행이 창립 60년 만에 새 디자인으로 문패를 바꿔단다. 한은은 4일 오전 시무식을 통해 새 기관 이미지(CI)를 선포한다. 기존 CI는 정부수립 이전 미 군정 때 조선은행이 쓰던 것을 1950년 한은 설립과 동시에 승계한 것으로 권위적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새 CI는 원과 결 무늬로 이뤄진 태극을 바탕으로 청렴한 느낌을 주는 하늘색과 전문성을 강조하는 청색을 사용했다. 한은은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선진기관으로서 위상과 비전을 강조하기 위해 새 CI를 제정했다.”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군정발전 유공자 표창

    박영언 경북 군위군수 22일 군청 에서 군정발전에 공이 큰 이장 등 유공자들에게 표창장을 줬다.
  • 청원군, 군정 참여하면 상품권

    청원군, 군정 참여하면 상품권

    한 자치단체가 행정에 참여하는 지역주민에게 상품권을 주기로 했다. 충북 청원군은 군민들이 적극적으로 군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도내에서 처음으로 내년부터 ‘주민참여 포인트제’를 운영한다고 21일 밝혔다. 이 제도는 주민들이 군정의 정책수립, 시행, 평가 등에 참여할 경우 포인트를 주고, 누적 포인트에 따라 문화상품권을 지급하는 것이다. 누적 포인트 30점부터 1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을, 40점은 2만원, 50점은 3만원상당의 문화상품권을 받는다. 포인트 제한은 없다. 부여되는 포인트는 군정참여 정도에 따라 4등급으로 나뉜다. 우선 군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한 생활민원이 공익성이 있을 경우 3점이 부여되고, 군이 실시한 각종 설문조사에 참여하거나 명예감시원으로 활동하며 환경오염을 신고했을 경우 또 군이 주최한 공청회, 설명회, 세미나 등에 참여했을 때 각각 5점이 주어진다. 군정발전을 위해 정책을 제안하면 10점, 제안한 정책이 우수제안으로 선정되면 최고점인 20점을 받는다. 군은 정책 참여는 아니지만 봉사활동 등으로 군수표창장을 받은 주민들에게도 최고인 20점을 주기로 했다. 포인트제는 매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1년 단위로 운영되며 포인트는 이월되지 않는다. 군은 현재 관련 조례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군정 참여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신뢰성 확보를 위해 1500만원을 들여 포인트 관리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군 관계자는 “그동안의 주민 참여방식은 다소 소극적인 형태였으나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많은 주민이 능동적으로 군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면서 “군정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음해나 비방성 내용은 포인트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청원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줌인 아시아] 방글라데시, 인도 환심사기

    방글라데시가 인도를 상대로 적극적인 ‘구애’에 나섰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역동적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인도와 보다 밀접한 협력을 통해 경제 발전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가 분석했다. 지리적으로 인도에 완전히 포위된 방글라데시는 인도와 그리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다. 인도 정부는 반군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며 방글라데시를 경원해 왔다. 이 때문에 방글라데시가 유치한 외국 자본 순위에서 인도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고, 최대 교역국 자리도 중국에 넘겨줬다. 최근 들어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와 집권 아와이연맹은 인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걸림돌 제거에 나섰다. 방글라데시에서 ‘암약’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도 북동부 아삼주의 분리·독립단체 ‘아솜해방연합전선’(ULFA)의 지도자들을 체포, 넘겨준 데 이어 이달 들어서는 아라빈다 라즈크호와 ULFA의장도 송환해 인도의 ‘환심’을 샀다. ULFA는 파키스탄을 대신해 20년간 인도의 아삼주를 무대로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반군 활동을 벌여 1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또 지난해 11월 뭄바이 테러의 배후로 알려진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무장테러단체 ‘라스카르 에 타이바’의 대원들을 소탕하는 데 정보를 제공하는 등 총력전을 펼쳐 ‘앙금’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하시나 총리는 내년 1월 뉴델리를 국빈 방문할 예정이다. 하시나 총리는 만모한 싱 인도 총리와 회담을 갖고 ▲대테러단체 소탕을 위한 보안협력 양해각서 체결 ▲인도 전력 구매 ▲국경 4100㎞를 가로지르는 수송로 연결 문제 등을 집중 논의, 양국간 신뢰감을 높여 경제통합을 가속화할 방침이다. 파루치 솝한 방글라데시 기업연구소 소장은 “인도와 경제적 통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방글라데시의 경제성장률을 6~8% 끌어올리는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국방부 알뜨르비행장 소유권 제주도 이양

    제주 해군기지(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과 관련된 정부의 지원내용이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하 제주특별법)에 명문화된다. 제주도는 지난 4일 오후 권태신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국방부 차관, 제주도 및 총리실 제주지원위원회 사무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차관회의에서 국방부 소유로 돼 있는 ‘알뜨르 비행장’ 부지의 소유권을 제주도에 넘기고, 지역발전계획 지원근거 규정을 제주특별법에 반영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구체적인 법률안에 대해서는 총리실에서 마련해 제주특별자치도 지원위원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제주도의회는 그동안 해군기지 건설에 따른 알뜨르 비행장 터를 무상으로 넘기고, 공군탐색구조부대의 설치는 도민 합의와 도의회와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 추진할 것을 주문했었다. 알뜨르 비행장은 국토 최남단 섬 마라도로 가는 길목인 서귀포시 대정읍 송악산의 서북쪽 일대 204만 7000㎡의 평야지대로, 일제 당시에 구축된 군사시설인 격납고, 지하벙커, 진지동굴 등이 있다. 이 토지는 대정읍 일대 주민들이 농경지나 목초지 등으로 사용해 왔으나 1930년대 후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토지를 강제징발해 비행장을 조성했다. 일제가 패전한 이후 미군정을 거쳐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이 발발 직후인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육군 제1훈련소의 훈련장으로도 사용돼 왔다. 지금은 군사시설 기능이 상실한 상태로, 주민들이 임대받아 감자나 마늘 등의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국회 등서 군정현안 협조 당부

    임각수 충북 괴산군수 5일 국회, 국토해양부, 행정안전부를 잇따라 방문해 군정의 주요 현안을 설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 협조를 당부했다.
  • 아프리카 진출 ‘中 두 얼굴’

    ‘라이베리아부터 에티오피아까지’ 중국이 만다린어(중국 표준어)로 아프리카 대륙을 점령하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는 1843년 미국 해방 노예들이 정착하면서 영어공용권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자본력과 무료 중국어 수업으로 아프리카에 ‘21세기식 새 제국’을 세우고 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가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날 오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의 한 체육관에서도 중국인 리펑 교사가 만다린어를 배울 현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대사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수업이다. 지난달 수업시간에는 482㎞ 떨어진 기니 수도 코나크리에서 군정 지도자 무사 다디스 카마라가 자신의 대선 출마에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해 150여명이 숨지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도 중국어 수업 학생들은 중국어 성조(聲調·4성)와 씨름하고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날 대규모 학살은 즉각 국제사회의 공분을 자아냈다. 아프리카연합(A U)은 다음 주중 기니에 대한 경제제재를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난 13일 기니정부가 중국이 자국의 천연자원과 인프라건설 등에 올해 70억달러(약 8조 15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히면서 검은 대륙을 아연하게 했다. 한쪽에선 선한 얼굴로 무료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한쪽으론 천연자원을 탐식하는 중국의 진짜 얼굴이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내정불간섭 외교정책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인권탄압을 일삼아온 수단, 짐바브웨, 에티오피아 등의 독재정권과도 기꺼이 손잡는 중국의 실리주의 자원외교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다. 이에 대해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제문제연구소(SAIIA)의 모니카 타쿠르 박사는 최근 아프리카에서의 중국의 역할을 ‘굶주린 용의 망령’이라고 일컬으면서 “중국이 구원인지 재앙인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 분명치 않다.”고 우려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테마 스토리 서울] (16) 등록문화재 11호 서울시의회

    [테마 스토리 서울] (16) 등록문화재 11호 서울시의회

    “이곳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시의회 건물의 역사를 듣고 깜짝 놀라곤 합니다.” 서울시의회 시설과 송정미 주임은 담담하게 건물의 생애를 풀어놨다. 1935년 옛 경성부 공연장인 ‘부민관(府民館)’으로 탄생해 광복 후 미군정 방송국,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 시의회 등 차례로 옷을 갈아입고 살아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부민관은 당시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00만원을 기부해 지어졌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따지면 100억~150억원. ●35년 부민관으로 건립 식민문화 홍보 공연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은 대부분 이곳에서 열렸다. 일제 식민문화의 홍보 창구로 사용되면서 친일파 예술인들이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사는 이곳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사사오입 개헌과 국가보안법 파동, 군사쿠데타에 따른 의사당 폐쇄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까지 모두 이곳에서 이뤄졌다. 특히 1966년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투척한 사건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이곳은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이사하면서 서울시에 회수돼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활용돼 오다 1991년부터 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시대 부민관은 단성사, 경성의대병원, 화신백화점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한 건축물이다.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11호이기도 하다. 문민정부 때 헐린 조선총독부와 해체수순을 밟는 옛 서울시청사와 달리 일제시대를 증언할 마지막 증인으로 남을 전망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선출한 곳 시의회 건물은 고희(古稀)를 넘겨 2015년 80세인 산수(傘壽)를 맞는다. 전형적인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100년은 거뜬히 버틸 모양새다. 정문 모서리의 63척(약 19m) 높이의 탑은 당시 경성 전역이 내려다보인 도심의 랜드마크였다. 송 주임은 “가공하지 않은 천연자갈과 모래, 전통 철근과 시멘트로 지어져 20~40년 주기로 재건축하는 요즘 건물보다 훨씬 단단하다.”며 “탑 위에는 일제시대 만들어진 국기 게양대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했다. ●매년 7억 정도 유지보수비 소요 건물에는 비밀도 많이 숨어 있다. 시의회 건물은 애초 대지 4912㎡, 연건평 5676㎡로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지어졌지만 개·보수를 거치며 조금 작아졌다. 1968년 태평로 확장공사 때 시의회 건물이 축소되며 정문을 동향에서 남향으로 바꿔놓았다. 송 주임은 “1800석 규모의 대강당은 시의회 대회의실로 바뀌었지만 잦은 내부공사로 현재 400석 규모의 중강당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전했다. 매년 7억원 정도의 유지보수비가 소요되는 건물은 앞으로 친환경·주민친화형 건물로 꾸준히 변화될 예정이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中 “원자재 얻는다면 도덕성쯤이야…”

    中 “원자재 얻는다면 도덕성쯤이야…”

    중국이 서아프리카의 최빈국 기니에 70억달러(약 8조 2000억원) 상당을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12일 보도했다.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의 ‘불량’ 정권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이 다시 제기될 전망이다. 중국은 현재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단, 리비아 등과 석유 거래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아프리카가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지만 유럽과 미국은 아프리카에 미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며 중국을 두둔했다. ●中CIF·기니정부, 개발회사 설립 모하메드 시암 기니 광업장관은 중국인터내셔널펀드(CIF)가 사회간접자본, 광물개발, 석유 탐사를 위해 수십억달러를 투자하는 협상이 연말쯤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시암 장관은 “앞으로 5년에 걸쳐 70억달러 이상이 쓰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홍콩에 소재한 CIF는 앙골라의 국영석유회사 손앙골과 중국의 국영석유회사 시노펙의 연결고리로 활동 중이며 앙골라 정부에 수십억달러 차관을 제공했다. 투자는 CIF가 75%, 기니 정부가 25% 지분을 갖는 기니개발회사를 만든 뒤 이 회사가 각종 개발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중국 정부에 자원개발권을 이양한 앙골라, 콩고 등이 자원 개발에 따른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반면 아프리카연합은 17일 기니에 대한 제재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지난달 말 기니의 군정 지도자 무사 카마라의 대선 불출마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반정부 시위대에 정부군이 발포, 150명 이상이 숨진 것에 따른 조치다. 카마라는 20년간 독재를 했던 랑사나 콩트가 지난해 숨지자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인권단체와 유엔기구들은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中자본 기니군사정권 좌우할 듯 기니의 2008년 국내총생산(GDP)은 45억달러로 추정된다. CIF가 투자할 70억달러는 1년치 GDP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군사정권의 생명줄이 될 전망이다. 야당 지도자인 시디아 투레 전 총리는 “어떻게 그렇게 큰돈이 기니 경제에 투입될 수 있다고 보느냐.”며 협상 진행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중국의 투자를 둘러싼 군벌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부 노조는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기니는 알루미늄의 원재료인 보크사이트의 세계 최대 매장국이다.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철광석의 매장량도 풍부해 독재자들이 서방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건재할 수 있던 동력이 됐다. 최근에는 상업적으로 채산성이 있는 석유의 매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