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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용 가평군수 법정구속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이원범)는 20일 기획부동산 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진용(53) 가평군수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 군수는 지난 3월 구속기소됐다가 6월 보석으로 풀려난 뒤 군수 직무를 수행해 왔으나 이날 법정구속됨에 따라 다시 직무집행이 정지됐다. 또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군수 직위를 상실하게 된다. 재판부는 “이 군수에게 금품을 줬다는 공여자의 진술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공무원으로서 거액의 금품을 받아 직무집행의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를 훼손했음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고, 군정을 계속 담당하게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판단된다.”면서 양형과 법정구속 이유를 밝혔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김정일의 삶, 통치, 그리고 권력

    김정일의 삶, 통치, 그리고 권력

    17일 사망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사망으로 권력을 승계받은 뒤 17년간 봉건시대를 능가하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김정일 정권이 공식 출범한 것은 1998년으로 그가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뒤부터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한 것은 그가 1974년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이후부터다. 불우했던 유년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양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密營)의 귀틀집에서 김일성과 그의 전처인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북한의 발표와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으로 알려진다.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출생지에 대해서도 북한은 1980년부터 백두산이라고 선전하면서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그 이전에는 김일성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경력 때문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아명도 러시아식으로 ‘유라’로 불렸다. 김 위원장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인 김정숙과 그의 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러나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6·25 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란살이를 가야만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김 위원장의 모성애 결핍을 낳았고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은 후에 후계자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냉혹함을 보이게 했다. 휴전 이후 김 위원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후계자 발돋움 김 위원장은 1967년부터 당의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71년 부부장으로 승진했고 1973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을 거쳐 당 조직 및 선동선전담당비서라는 막강한 지위에 올랐다. 그는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 정권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김일성의 신뢰를 얻은 김 위원장은 생모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 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다음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 때부터 ‘지도자 동지’ ‘당 중앙’이라고 호칭됐으며 1975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후계자 내정을 앞둔 1972년 12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주석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또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동상, 혁명사적지 등 북한 각지에 두 부자와 그 가계를 선전하는 시설물 건설과 외국에서의 주체사상 홍보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부었다. 김 위원장은 당과 군부 등 국정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도록 체제를 정비한 뒤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호칭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변경됐다. 이후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를 모두 마무리했다. 17년 1인 독재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에 전념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가 붕괴해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된 무정부 상태와 같았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고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김정일 시대가 공식 출범했다. 김정일 시대의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이는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으며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했다. 2002년에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성대국론·신(新)사고론·실리주의 등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외교적 행보는 파격적이라고 평가받는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김 위원장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교류를 추진했다. 2000년 6월 13일에는 반세기 만의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6·15 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과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이들 국가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이어갔다. 그러나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 노력은 ‘자위적 억제력을 보유해야만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는 선군정치 논리에 묻혀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드러냈다.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다. 경제적으로는 2009년 11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해 경제적 어려움을 격화시켰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동안에도 김 위원장은 지난해 5월과 8월, 지난 5월 등 1년여 동안 세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황금평과 나진 특구 건설에 뜻을 모았으며 지난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 등에 합의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최고의 기술인 꿈 키우세요”

    산업현장 각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기술명장들이 특성화·마이스터고등학교 후배들에게 기능인에 대한 자긍심과 희망을 심어주는 특강에 나섰다. 경남도교육청은 14일 각 분야 유능한 기술명장 7명이 경남의 특성화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인의 삶에 대한 꿈과 희망, 자긍심을 키워주고 최고의 기술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노력 등을 들려주는 특강을 한다고 밝혔다. 이날 1·2학년 600명을 대상으로 한 김진숙(한울이미용실) 미용명장의 경남산업고 특강을 시작으로 15일에는 김기하(현대위아) 금속재료 명장이 김해건설공고에서, 20일에는 김광식(현대차) 도장명장과 정규영(명장산업설비) 기계명장이 각각 창녕제일고와 경남자동차고에서 자신들이 명장에 이르게 된 노하우와 인생관을 들려준다. 김 미용명장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성장산업인 뷰티산업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스페셜리스트가 될 것을 당부했다. 김 금속재료 명장은 능력이 졸업장보다 더 중요하고 작은 실천이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경험담을 들려줄 예정이다. 김 도장명장과 정 기계명장은 발상의 전환으로 학생들에게 도전정신을 불어넣는 강의를 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 13일에는 해군정비창에 근무하는 설상섭 선박분야 명장과 포스코에 근무하는 박순복 전기강판 분야 명장이 거제공고와 거창 대성일고에서 특강을 했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기로에 선 북한… ’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위원

    [저자와 차 한 잔] ‘기로에 선 북한… ’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위원

    “김정은 체제는 확고하며 안정됐다. 나이와 경험만을 갖고 그의 권력 장악력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9일 “김정은은 2009년부터 당·군·정 엘리트들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됐으며 최고위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광범위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나온 ‘기로에 선 북한, 김정일의 선택’(한울 펴냄)은 “김정은 체제의 구축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반성 속에서 정 위원 등 현대북한연구회 회원 8명이 함께 펴냈다. 8명의 전문가가 북한 경제 변화 등 7가지 주제로 북한의 오늘과 내일을 보려 했다. 정 위원은 ‘김정은 후계 체계의 공식화와 북한 권력 변동’을 첫 장에서 소개했다. →김정은의 권력 승계는 어느 정도까지 이뤄졌고 얼마나 유지될까. -김정은은 최고위 핵심 엘리트인 정치국 위원과 후보 위원 30명을 제외하고는 독자적인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09년 국가안전보위부장을 맡음으로써 북한 엘리트들에 대한 감시 통제권도 갖게 됐다. 김정일은 2009년 1월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운 뒤 군대 지도권을 넘기기 시작했고, 북한군은 ‘김정일과 김정은의 군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2010년 제3차 당 대표자 회의를 계기로 그를 도와 북한을 이끌어 갈 파워 엘리트 그룹을 새로 충원해 북한 체제는 안정적인 체계를 갖췄다. 김정일이 당장 사망하더라도 10여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후계 체제의 특징은. -더 군사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면서도 경제를 중시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실리를 위해서는 급격한 정책 변화도 수용하고 있다. 군사 공격 우려도 커졌다. 남북관계 및 대미 정책이 지그재그식으로 급변할 수 있고 초강경과 실용적인 유화정책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도 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경제를 희생시켜 군수공업·국방을 강화하는 ‘선군·후경(先軍後經) 정책’으로 나타났다. 김정은은 군대와 경제를 동시에 중시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한다.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김정은의 권위가 미치나. -2009년 말 화폐개혁으로 북한 국민들 사이에 ‘애써 모은 돈을 국가가 빼앗아 갔다.’는 피해의식이 퍼져 있다. 당과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 강하다. 이는 새 지도체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후계 체제는 북한에 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전례 없이 나타나고 있다. CNC(컴퓨터 수치제어)라는 영어 이니셜이 2009년부터 노동신문에 등장하더니 2010년 신년 공동사설에도 나왔다. 첨단기술과 실용주의 강조를 비롯해 경제적 자본주의가 진행되고 있다. 경제난 속에 사회주의 평등교육이 무너지고 특권층 자제들이 다니는 특수·영재학교가 번성하고 있다. 영어와 중국어 등 외국어 교육도 강화되고 있다. 스위스에서 4년 반 동안 중·고교 생활을 한 김정은은 ‘자본주의는 악’이란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고 자본주의의 장점을 알고 있어 장기적인 체제 생존을 위해 개방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권력 기관에서 30~40대 엘리트들이 핵심 간부로 부상하고 있고, 젊은 세대가 수혜 계층이 됐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3대혁명소조 운동이 전개된 것과 유사하다. →대중 의존도 심화에 대한 우려도 있다. -자주 외교에서 대중 편승 외교로 바뀌고 있다. 중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중국의 대북 전략도 바뀌었다. 2009년 2차 핵실험 이후에 북한을 바꾸기 위해 개방이 필수적이라고 보면서 경제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전략적인 관점에서 황금평 개발 등에 관여하고 있다.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임실 민선군수는 비리 낙마 전문?

    전북 임실군수 자리가 불명예 중도 퇴진의 대명사로 낙인 찍힐 처지에 몰렸다. 임실의 역대 민선 군수 4명이 모두 법의 심판을 받는 데 실망한 주민들은 “형님, 아우님을 찾으며 비리에 서로 눈감는 지역풍토를 반드시 바꿔야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주지법 제2형사부(부장 김세윤)는 8일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측근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기소된 강완묵 임실군수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8400만원을 선고했다. 강 군수는 지난해 5월 사업자 최모(53)씨로부터 8400여만원을 측근 방모(39)씨를 통해 건네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군수직을 상실하게 된다. 강 군수가 항소심에서 판결을 뒤집지 못하면 임실군은 민선 1∼4기의 군수 4명이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낙마하는 전국 유일의 자치단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앞서 3명(재선 포함)의 군수는 모두 구속됐다. 1995년 민선 1기에 이어 재선된 이형로(75) 전 군수는 2000년 12월 쓰레기매립장 부지 조성업체 선정과 관련, 금품을 받은 의혹이 제기되자 돌연 사직원을 제출했으나 사흘 뒤 검찰에 구속됐다.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이 전 군수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이 전 군수의 사퇴로 실시된 보궐선거와 민선 3기 단체장 선거에 잇따라 당선된 이철규(71) 전 군수도 재임 중 뇌물과 연루돼 구속됐다. 이철규 전 군수는 2001년 10월 군수 관사에서 사무관 승진후보자 3명으로부터 승진 청탁과 함께 9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수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에 추징금 9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철규 전 군수의 중도하차로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된 김진억 전 군수는 2007년 7월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구속되고 말았다. 현직 강 군수마저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자 주민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역대 군수 3명이 줄줄이 구속됐고 이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과 반목으로 지역 이미지는 물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농민운동가 출신인 강 군수가 깨끗한 군정을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던 군민들은 “누가 군수가 되더라도 결국 구속 사태가 되풀이되면서 임실이 마치 군수의 무덤이 된 것 같다.”며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주민 임모씨는 “임실 군민이란 사실이 창피해 고개를 들 수가 없다.”면서 “임실은 오랫동안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사분오열돼 선거를 치르다 보니 주민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행한 고장이 되었다.”고 침통해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씨줄날줄] 버마 vs 미얀마/구본영 논설위원

    한국 축구가 아시아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하던 1970년대 초반. 메르데카배나 박스컵에서 아시아 맹주를 노리던 한국에 버마가 이따금 찬물을 끼얹었다. 이회택·차범근이 최고인 줄 알았던 당시 팬들이라면 몽애몽 등 몽자 돌림 선수가 여럿인 버마에 한국 팀이 속절없이 무너지던 장면을 잊지 못할 게다. 얼마 전 박성화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미얀마 대표팀을 맡았다. 미얀마의 옛 국호가 버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다. 하지만 정작 버마 축구의 중흥 몸부림보다 더 주목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미얀마 군사정부가 개혁·개방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몇 안 남은 독재국 미얀마는 올해 초 테인 세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치범 석방과 노조 인정 등을 단행했다.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 연금도 해제했다. 1989년 수천명의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버마 군사정부는 영국의 식민지 때부터 사용하던 국호를 미얀마로 바꿨다. 식민지 잔재를 없애고 소수 인종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다. 인구의 68%를 점하는 버마족 이외에 대부분 고유 언어를 가진 130여 소수민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주 명분이 없지는 않았고, 유엔도 이를 인정했다. 반면 수치 여사와 민주화 세력은 새 국호를 거부했다. 미국도 군사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지 않겠다며 버마를 고수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개혁·개방 제스처를 취하면서 미묘한 변화 조짐이 보인다. 엊그제 미얀마를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세인 대통령과 공식 회담을 하는 한편 수치 여사와도 ‘사적인 만찬’을 갖는 등 이중 행보를 보였다. ‘미얀마’를 회유하면서 ‘버마’도 달래는 수순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클린턴이 이 과정에서 어떠한 국호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인 대통령과 만나서도 “오바마 대통령과 나는 ‘당신’과 ‘당신의 정부’가 국민을 위해 취한 각종 조치에 고무됐다.”고만 말했다. 이는 군사정부로부터 추가 민주화 조치와 북한과의 대량살상무기 거래 중단 등 확실한 개혁·개방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압박 수순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버마가 한국의 축구 라이벌이었을 때 양국 간 국민소득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40여년 만에 우리와의 경제력 격차는 천양지차로 벌어졌다. 남루한 선군정치의 깃발만 나부끼는 울타리 안에 주민을 가둬두고 있는 북한 지도부는 미얀마 군사정부의 과감한 개방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美국무 56년만에 미얀마 방문] 미얀마? 버마? 美 “어떻게 불러야…”

    ‘미얀마로 부를까, 버마로 부를까.”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미얀마 방문 기간 중 이 나라를 어떤 명칭으로 부를지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일 전했다. 미국은 그동안 ‘버마’라는 명칭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공식 국명은 ‘미얀마’다. 버마는 옛 이름으로 1992년 군부에 의해 미얀마로 개명됐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도 미얀마로 가입돼 있으며 한국을 비롯해 중국, 독일 등이 공식 국명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일부 영어권 국가들은 “국민의 동의 없이 채택된 미얀마라는 국명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옛 이름인 버마 사용을 고집하고 있다. 아웅산 수치 여사 등 미얀마 내 민주 세력도 버마로 부른다. 미국은 클린턴 장관의 파견을 계기로 미얀마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얀마 당국자를 만나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면 얼굴을 붉힐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레 미얀마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면 민주 세력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고민이다. 이 때문에 클린턴 장관은 방문 이틀째인 1일(현지시간) 테인 세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구체적인 국명 대신 ‘당신 정부’나 ‘네피도’(미얀마 수도) 등 에두른 표현을 사용했다. 마크 토너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클린턴 장관이 모든 민감한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나 (미얀마를 버마라고 부른다는) 미국 정책은 변함이 없다.”면서 “국명 변경은 그 나라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이집트 군정 ‘청렴 총리’ 카드로 민심 다독이기

    이집트 군부가 1990년대 후반 총리를 지낸 관료 출신 인사를 새 총리로 내세워 거국 내각을 구성하고 정국 수습을 시도하고 나섰지만 시민들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백만인 집회’를 열고 즉각적인 군정 종식을 거듭 요구했다. 이집트 국영TV는 이집트 과도정부를 이끄는 군 최고위원회가 25일(현지시간) 카말 간주리 전 총리를 새 총리로 공식 임명했으며 간주리 총리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줄 것이라 말했다고 보도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간주리 새 총리는 25일 “총선 전까지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간주리는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경제 자유화 정책을 도입했던 1996~1999년 총리를 역임하며 빈곤율을 개선하고 각종 주요 법안 처리를 주도해 국민에게 호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대다수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청렴하고 강직한 ‘빈자(貧者)의 총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총리에 오르기 전에는 기획예산처 장관과 부총리도 역임했다. 이후 간주리는 정권 내 일부 인사의 반발과 공격으로 총리직에서 축출돼 가택연금을 당했고, 무바라크 정권이 종식되기까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에는 대통령 후보로 간주리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간주리가 무바라크 치하에서 총리를 지낸 경력은 시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 간주리 내각의 행보가 주목을 받는 가운데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25일 카이로 타흐리르(해방) 광장에서 백만인 금요집회를 열어 군부가 즉각 물러나고 모든 권한을 민정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집회에는 무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참석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군 최고위원회는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당초 예정대로 28일 실시한다고 밝혀 일각의 총선 연기설을 일축했다. 한편 수니파 이슬람교도 최고 기구인 알아즈하르 수장인 아흐메드 알타이예브 대(大)이맘도 이집트 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이집트 내각 총사퇴… 反군부 시위 전국 확산

    이집트 수도 카이로 등에서 군정 종식을 촉구하는 시민들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자 급기야 이집트 내각이 21일(현지시간) 총사퇴를 결의했다. 하지만 민주항쟁 이후에도 개혁은 더딘 반면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군 최고위원회의 행태에 불만이 극에 달해 있는 시민들은 22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해 군부에 권력을 즉각 민간에 이양하고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지난 19일 카이로에서 시작된 시위는 알렉산드리아·수에즈 등 이집트 전역으로 확산됐다. 군경이 고무탄까지 동원한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인명피해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집트 보건장관은 시위 나흘째인 22일 성명을 통해 전국 곳곳의 시위로 인한 사망자가 28명으로 집계됐으며 이 가운데 26명이 카이로에서 숨졌다고 밝혔다. BBC에 따르면 부상자도 최소 1750명에 이른다. 무함마드 헤가지 내각 대변인은 이날 “에삼 샤라프 총리 등 내각 각료들이 군 최고위원회에 사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AFP통신은 내각 총사퇴 소식을 접한 군 최고위원회가 유력한 야당 인사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차기 총리로 임명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위 진압과정에서 최루탄과 고무탄은 물론 곤봉으로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실탄 사격 증언까지 나오며 이집트군의 신뢰에 심각한 흠집을 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타흐리르 광장 인근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세 명이 총상을 입은 시위대를 10명이나 봤으며 이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증언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의사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익명을 요구했으며, 정부 관계자들이 자신들에게 총상과 관련한 증거 일체를 부인하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군 최고위원회 소속 사이드 아바스 장군이 21일 직접 타흐리르 광장을 방문해 관련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교과부 등 40개 정부기관 기록관리 ‘최우수’

    교육과학기술부와 국방부 등 40개 정부기관이 기록관리 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240개 공공기관의 기록관리 업무를 국가기록원이 평가한 결과다. 기록원은 1일 이 결과를 국무회의에 보고했다. 최고인 S등급은 교과부, 국방부, 국토해양부, 법무부 등 14개 중앙행정기관, 국군정보사령부, 전주지방환경청 등 7개 특별행정기관, 대전광역시교육청, 전라북도교육청 등 6개 시·도교육청, 대전서부교육지원청, 부산해운대교육지원청 등 8개 교육지원청에서 받았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 중 국가기록원이 지정 고시한 직접 관리기관 중에는 한국조폐공사, 한국철도공사 등 5개 기관이 S등급을 받았다. 반면 중앙행정기관 중 고용노동부, 식약청, 방위사업청, 특허청은 최하인 C등급을 받았다. 기록관리 평가는 2008년 처음 도입됐다. 평가시스템을 활용한 온라인 평가와 현지실사를 거쳐 기관 유형별로 S, A, B, C 등급으로 나눈다. 기록원은 중앙행정기관과 시·도교육청의 경우 전반적으로 기록관리 수준이 우수하지만, 특별지방행정기관과 교육지원청 등은 아직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우수기관에는 다음 달 정부포상을 하고 부진한 기관은 취약분야를 중심으로 실태점검을 할 예정이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주말 영화]

    ●라붐 2(EBS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여름방학을 이용해 시골에서 독일어 공부를 하던 빅(소피 마르소·오른쪽)은 할머니의 권유로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다. 빅은 친구 페네로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의 여권이 뒤바뀐 것을 알게 된다. 여권의 주인은 필립(피에르 코소·왼쪽)이라는 잘생긴 젊은이로 파리로 오던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이다. 페네로프는 필립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필립이 빅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한편 빅과 필립은 록 콘서트에 가서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게 되고, 핸드백을 분실하는 바람에 빅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 빅의 아빠 프랑수아는 걱정하는 마음에 야단을 치려고 하지만 혼날 줄 알면서도 무일푼으로 빗속을 헤매며 집에 돌아오고 싶었다는 얘기에 빅을 다독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립의 아파트로 빅의 첫사랑 마티유가 찾아오고, 빅은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21세의 다른 남자와 만나는 등 두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싹트기 시작한다. ●지. 아이. 제인(OBS 일요일 밤 10시 15분) 군의 성차별 폐지 법안을 이용해 자신의 재선을 노리는 여성 상원의원 드헤이븐은 헤이즌 장관 승진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해군과 비밀 협상을 한다. 남자들도 60%가 탈락한다는 네이비실 특전단 훈련에 여자 대원이 무사히 훈련을 마치면 3년 이내에 군의 모든 남녀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이 훈련에서 일주일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드헤이븐 의원은 이 선전 전략을 이용해서 여성 지지자들의 표를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해군 쪽에서는 여자 대원이 포기하면 특전단 훈련의 여성 참여 금지에 대한 명백한 이유가 생기기 때문에 사실상 이 거래는 양쪽 모두가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헤이븐 의원은 해군정보국의 정보 장교로 근무하는 조단 오닐 중위를 지목한다. ●레터스 투 줄리엣(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불후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이탈리아 베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 작가 지망생 소피는 전 세계 여성들이 비밀스러운 사랑을 고백하는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우연히 50년 전에 쓰여진 러브레터 한 통을 발견한다. 소피는 편지 속 안타까운 사연에 답장을 보낸다. 며칠 후 소피의 눈앞에 편지 속 주인공 클레어와 그녀의 손자 찰리가 기적처럼 나타난다. 클레어는 소피의 편지에 용기를 내어 50년 전 놓쳐버린 첫사랑 찾기에 나선다. 그렇게 할머니의 첫사랑 찾기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손자 찰리, 그리고 그들과 인연이 되어 동행하게 된 소피. 과연 그들의 50년 전 사랑 찾기는 성공할 것인가. 그리고 소피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수 있을까.
  • [서울광장] 서울, 서울, 서울/임태순 논설위원

    [서울광장] 서울, 서울, 서울/임태순 논설위원

    서울은 ‘특별시’이다. 지구상 200여개국 중에서 유일하다. 특별시가 된 것은 1946년이다. 경기도에서 벗어나 독립 지방정부가 되는 것을 규정한 미 군정의 ‘독립·자치시’ 훈령이 ‘특별부제’로 번역된 것이 단초가 됐다. 서울은 이름 그대로 ‘스페셜’하게 발전해 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인구의 4분의1이 사는 곳이 서울이다. 입법, 사법, 행정 등 주요 기관이 몰려 있고 경제력의 40%가량이 집중돼 있다. 서울의 특별한 위치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지만 내일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서울은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뒤에도 항상 전국적인 관심사였다. 서울에 대한 관음증, 서울의 구심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방사람들도 서울시장이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입방아를 찧었다. 서울시장의 위상은 차기 대권주자의 징검다리로 자리매김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성공방정식’을 쓴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서울은 인구 1000만명에 예산 20조원, 본청 공무원만 1만명에 이르고 국방·외교를 제외한 종합행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행정경험을 쌓고 리더십을 검증받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서울광장 조성, 버스전용 중앙차로제 도입, 청계천 완공 등을 통해 실무능력까지 인정받았으니 그가 청와대에 손쉽게 입성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를 지켜보면서 앞으로 서울시정은 대권의 실험장이 될 것이며, 그 실험 대상은 한강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뒤를 이은 오세훈 시장은 전임자의 성공신화를 열심히 벤치마킹했다. 서울은 이리저리 뜯어고쳐져 ‘화장’(化粧)을 했다.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고 서울 시내 건물이 디자인으로 치장되고 한강 르네상스의 불길이 타올랐다. 오 시장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불거진 ‘복지논쟁’을 놓고 국민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았다.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 무상급식 논쟁에 뛰어들어 시민들을 상대로 사상 처음 ‘정책’을 놓고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이제 서울시민들은 정치적 대리전의 후유증으로 ‘보선’을 치르게 됐다. 공교롭게도 기성 정치권으론 안 된다는 ‘변화의 바람’의 시험무대가 된 곳도 서울이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전 대표는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출마 움직임에 대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오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지만, 그로 촉발된 정당 등 기존질서에 대한 불신·불만은 시민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로 단일화됐고, 박 변호사는 민주당·민주노동당 등의 후보와 경선을 거쳐 당당히 야 4당의 통합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됐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야당과 결합한 시민권력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기성권력을 밀어주어야 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있다. 변화를 생각하면 새바람에 기대야 하지만 뭔가 미덥지 못하고 불안하다. 반면 기성 제도권은 경험이 있어 안정감은 있어 보이지만 신선함은 덜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선거 지원에 나서고 돌풍의 진원지가 됐던 안철수 교수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참신한 새로운 피가 서울시정을 잘 이끌면 그 혜택은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겠지만 갈팡질팡할 경우 혼란 등 후폭풍도 감내해야 한다. 한편으론 야당 통합후보가 당선되면 권력 배분을 놓고 다툼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서울시장은 또 양날의 칼이다. 시정을 잘 이끌면 총선,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르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역풍에 휘말리게 된다. 서울은 항상 한국사회 변화의 풍향계가 되고,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대리전을 치러왔다. 경기도민인 나는 흥미롭게, 관심있게 서울시민의 선택을 지켜본다. 지나간 오세훈의 서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나경원의 서울과 박원순의 서울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떠안아온 서울은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도 됐건만 그러지 않는다. 그런 만큼 특별한 서울시민들은 스마트해져야 한다. stslim@seoul.co.kr
  • 솜방망이 처벌에 막가는 기밀유출

    솜방망이 처벌에 막가는 기밀유출

    산업계의 기밀 유출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데도 처벌은 ‘솜방망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가치로 따지기 어려운 첨단 기술이 유출되면 국가경제와 기업의 피해가 막대한 만큼, 양형 기준과 형벌 수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30일 한국산업보안연구학회와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03년부터 올해 6월까지 사법당국에 적발된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84건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 가운데 34%(28건)만 실형을 받는데 그쳤다. ‘징역 1년’을 초과하는 실형을 받은 건수는 전체의 17%에 불과했다. 특히 사법당국이 기술유출사범에 대해 온정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산업기술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기술유출 범죄자에 대해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업비밀보호법’도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그 재산상 이익 액수의 2~10배의 벌금을 물리도록 명시하고 있다. 한국산업보안연구학회는 “법규정이 있지만 이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 산업기술 유출이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지난 22일 서울중앙지법은 회사 기밀을 외국 경쟁사로 빼돌리려 한 혐의(부정경쟁방지및영업비밀보호법 상 영업비밀누설 등)로 기소된 전직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중국인 Z(40·여)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Z가 빼돌린 자료는 A4 용지 300~400장 분량으로서 ‘가전제품 소음방지 기술’ ‘향후 10년간 가전제품 추세분석 및 경영전략’ 등이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7월 군사기밀 2·3급 문서 10여건을 미국으로 유출한 혐의로 기소된 예비역 대령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법원은 1996년 미 해군정보국에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에게 군 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징역 9년, 보호관찰 3년을 선고한 바 있다. 산업보안연구학회는 30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 호텔에서 토론회를 열고 ▲국가지원으로 개발한 핵심기술의 특허출원 의무화 ▲해외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투고에 대한 산업기술유출 방지책 마련 ▲수출 금지된 국가핵심기술을 정부가 수용해 보상 ▲산업기밀의 보안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대책 마련을 제안했다. 토론회에서 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기밀유출 사범에 대한 양형이 다른 범죄에 견줘 가볍기 때문에 갈수록 기술유출의 정도와 범위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닿고 있다.”면서 “범죄 예방효과를 높이기 위한 법적 강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소련, 1963년 한국과 수교검토 왜

    옛 소련이 남한과의 수교·경제 교역 가능성을 검토한 1963년은 러·일 전쟁 패전(1904년)으로 소련이 한반도에서 발을 뺀 지 59년 되던 해다. 전문가들은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거두인 소련이 우리나라와 교류를 꾀하려 한 의도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두고 미·소가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상황)를 평화롭게 해결한 소련은 이듬해 미국 등과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 등 자본주의 진영 국가에 협력의 손길을 뻗었다. 우선 ‘수교·교역 검토’의 배경에는 당시 소련 1인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의 ‘평화공존’ 노선이 깔려있다. 1953년 권좌에 오른 흐루쇼프는 전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1인 독재’를 비판하며 ‘적대세력과의 화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연스레 자본주의 진영과의 수교·교역 확대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남한과의 수교 검토도 이 같은 대외정책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박상철 전남대 교수는 4일 “흐루쇼프의 소련은 미국과의 ‘체제대결’이 아닌 ‘체제경쟁’을 원했다.”라면서 “이 때문에 소련은 핵무기 개발 등에는 힘썼지만 재래식 병력은 줄이려 했고 이를 위해 남한과의 평화협력이 필요했던 듯하다.”고 말했다. 급변하던 동북아 정세도 소련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 이념분쟁을 벌이며 사사건건 충돌했지만, 중국과 북한은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극동 지역에 일종의 ‘안전판’을 만드는 것이 시급했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과 일본은 1960년 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소련은 자신을 타깃으로 한 ‘반공 군사 동맹’으로 봤다. 그래서 남한에도 하나의 지렛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느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련의 수교 움직임에는 당시 남한의 정세 변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63년은 2년 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정’이 남한의 실권을 쥐고 있을 때다. 소련은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대해 친미파인 이승만 전 대통령과 달리 대화가 가능한 인물로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한·소 수교가 실제 이뤄졌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이 급속도로 와해됐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소련이 남한과 수교하고 미국도 북한과 국교를 맺어 교차수교를 했더라면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면서 “우리나라도 동방정책(서독이 추진한 소련 등 동유럽국과의 관계정상화 정책)을 펼친 서독식 평화유지 방식을 따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한·소 수교 논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흐루쇼프가 1964년 실각했고, 1963년 10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반공을 국시로 내걸면서 우리나라와 공산권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한국학 새 분야 발굴… 기반 넓히는 데 온힘”

    “한국학 새 분야 발굴… 기반 넓히는 데 온힘”

    “해외 교육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지난달 미국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4대 소장에 취임한 김선주 교수는 29일 미국에서의 한국학 연구 수준을 질적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국학연구소는 창립 30년 만에 첫 한국인 소장을 배출하게 됐다. ●내년 봄학기부터 한국미술사 강좌 개설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는 1981년 미국은 물론 서구권에 설립된 최초의 한국학 전문 연구기관이다. 이전까지 동아시아연구소에 속해 있다가 독립했다. 창립 이후 한국 연구의 태두로 통하는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 교수가 1993년까지 초대 소장을 맡았다. 이어 카터 에커트(1993∼2004년) 교수와 데이비드 메켄(2004∼2011.7) 교수가 2, 3대 소장을 지냈다. 김 소장은 “하버드대학 내의 다른 단과대학 및 전문대학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한국학 연구와 교육 강화를 위해 힘쓸 생각”이라면서 “기존의 한국학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분야를 발굴하는 것이 임무”라고 밝혔다. 김 소장은 학생들의 관심이 많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에 한국학 교수를 임용할 수 있도록 학교 당국과 접촉 중이라고 말했다. 또 내년 봄학기부터 하버드대학에서 처음으로 한국미술사 강좌가 개설되며, 한국학 연구 분야를 넓혀 나갈 계획이다. 그는 “북한의 위협 등으로 덧씌워진 한국의 부정적 이미지가 최근 한류 바람과 정보기술(IT) 제품의 선전 덕에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부는 문화적 한류를 확실히 체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컨대 하버드대에서 1년에 한 차례 한국 영화 감독을 초대해 상영회를 여는데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이창동 감독의 ‘시’ 등은 표가 일찌감치 매진될 만큼 관심이 뜨거웠다고 한다. ●“취약한 연구소 재정구조가 큰 걸림돌” 하버드대학의 한국학 연구는 1946~48년 미 군정의 문관으로 일했던 와그너 교수가 1958년 처음 한국학 교수로 채용되면서 시작돼 현재는 한국학 교수가 모두 4명으로 늘어났다. 대학으로부터 직접 예산지원을 받지 않고 자체 조달한 예산으로 모든 임직원과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김 소장은 “한국국제교류재단 등 한국 기관들로부터 연구에 필요한 금전적 도움을 받고 있다.”면서도 “일본학이나 중국학 연구소와 달리 재정구조가 취약한 점이 한국학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쉽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노력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글 사진 케임브리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테마로 본 공직사회] (16) 행정용어 순화 어디까지 왔나

    [테마로 본 공직사회] (16) 행정용어 순화 어디까지 왔나

    국어학자들은 우리말 사용의 본보기가 돼야 할 행정용어가 잘못 사용돼 오히려 우리 말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어법에 맞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연석’(경계석), ‘용이하다’(쉽다) 같은 일본식 표현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법령에는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힘든 귀책사유(歸責事由), 분장(分掌) 등과 같은 한자어도 숱하다. 특히 최근에는 ‘바우처’, ‘테마파크’ 등 외래어 사용이 크게 늘고 있으며, ‘중소氣UP’ ‘중랑천愛놀자’ 등과 같이 정체 모를 ‘외계어’까지 등장해 흔하게 쓰이고 있다. 200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국어기본법’에 따라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규정 위반이다. 정부가 행정 용어 순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 ‘행정용어 순화정책’을 변함없이 추진하고 있다. 정부의 ‘행정용어 순화정책’ 변천과정과 향후 과제 등을 진단해 본다. ●광복~1960년대 국·한문 혼용기 1948년 ‘한글전용법’이 제정됐고 민간인을 중심으로 사회 곳곳에서 일본 잔재 털어 내기 운동이 일어났다. 1946년 6월 군정청 편수국에서도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벌였고 1948년에는 국어정화위원회를 통해 선정한 938개의 안을 심의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당시 바뀐 말이 벤토(도시락), 혼다데(책꽂이), 하코(상자), 간스메(통조림), 가리누이(시침바느질), 요비링(초인종), 엔소쿠(소풍) 등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행정용어에서는 국·한문이 혼용되고 일본식 용어까지 버젓이 남아 있었다. 1970~1990년대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행정용어를 순화한 시기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간판·방송용어·축구 중계 해설에서 외국어가 9할”이라면서 국어정화운동을 벌이라고 지시, 같은 해 7월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관광지·고속도로의 외국어 간판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경찰이 서울 중심부인 충무로와 명동 등지에서 외국문자간판 강제 제재 권한을 발동했다. 문교부 국어심의회에 국어순화분과위원회가 설치됐고 1977년에는 국어순화 자료집이 발간됐다. 1979년에는 9년 동안 검토한 끝에 어문규범 개정안이 마련됐다. 황용주 국립국어원 연구사는 “1970년부터 1997년까지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행정용어 순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시기였다.”면서 “용어나 구성 자체가 굉장히 권위적이었던 일본어·한자표현의 행정용어를 바꾸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권위적이었다.”고 평가했다. ●1970~1990년대 정부주도 순화기 정부가 주도한 행정용어 순화운동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1981~1984년 4차례에 걸쳐 ‘행정용어 순화편람’이 발간됐다. 이 편람에서 객담은 ‘가래’로 , ‘누가기록하다’는 ‘보태 적다’로, 박피율은 ‘깐밤’으로, ‘신병인수’는 ‘사람 넘겨받음’으로 순화했다. 1998년부터는 이전처럼 정부가 주도적으로 각 부처나 기관으로 순화대상 용어를 모으는 일은 없어졌다. 2000년에는 총리훈령도 폐지됐다. ‘그간 추진된 성과로 행정용어 순화가 정착됐다.’는 이유에서다. 이 시기 형식적으로는 법제처가 법령을 심사하고,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행정용어 순화 업무를 맡았지만, 행정용어 순화는 대체로 부처마다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2000년~현재 ‘방임기’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대표는 이 시기에 어려운 한자말이나 일본어 잔재는 행정용어 순화정책의 효과로 힘을 잃었지만, 국제교류 확대로 영어 등 외래어가 물밀듯이 들어왔다.”면서 “공무원들이 외국에서 배운 영어를 그대로 써도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정부의 행정용어 순화정책도 추진력을 잃어 외래어 유입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면서 “지금의 행정 언어의 문제는 한자가 아니라, 영어 등 외국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 정부는 정보통신기술(IT)을 접목한 행정용어 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각 부처는 물론 광역자치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결재 프로그램 ‘온나라’에 부적절한 행정용어를 자동으로 전환해 바로잡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인데 이르면 올 연말부터 실제로 활용된다. ●부처 총괄기구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상위 기구에서 행정용어 순화 정책을 맡아, 각 부처 용어 사용에 대한 평가점수 반영 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남영신 대표는 “국민의 국가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소통을 강화하려면, 각 부처의 행정용어 순화를 총괄할 수 있는 기구를 미국 등 선진국처럼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실과 같은 보다 상위기관에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세중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도 “각 부처마다 국어책임관을 두고 자율적으로 행정용어를 순화하도록 했지만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다.”면서 “행정용어 사용에 대해 평가점수를 반영하는 등 실질적인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씨줄날줄] 평안도 날라리/임태순 논설위원

    조선시대 때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지역차별의 설움을 많이 받았던 곳이다. 평안도는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선진국 명(明)나라와 통하는 길목이었지만 그리 대접을 받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속대전과 대전후실록 등에는 평안도를 포함해 함경도, 황해도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도록 해 관직 진출의 길을 제한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은 평안도를 4자성어로 산림맹호(山林猛虎), 즉 ‘산속에 사는 사나운 호랑이’로 품평했다. 용맹스럽다는 세간의 인식에 1800년대 홍경래의 난까지 일어났으니 평안도를 경계하는 풍조는 더욱 심해졌다. 구한말 평안도는 기독교 보급의 메카가 된다. 1890년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다. 신분차별로 기존질서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중국과 가까워 신문명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서북인들은 자연스레 기독교에 빠져든다. 흥사단운동을 일으킨 안창호 선생,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등이 이 시기 평안도 출신 기독교인이다. 평안도는 벽촌에도 서당이 있어 문맹이 없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다. 향학열 높은 평안도 기독교인들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대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1925년 159명의 미국 유학생 중 43%가 평안도 출신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미국에서 신교육으로 무장한 이들이 지배 엘리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 후 미 군정시절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19개의 부·처장 중 9명이, 차관에 해당하는 차장 중 6명이 평안도 사람일 정도로 파워엘리트로 급부상한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최근 신의주를 시찰한 자리에서 현지 주민의 옷차림과 무질서 등을 지적하며 “평안북도가 자본주의의 날라리판이 됐다.”며 개탄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물교류의 관문이자 통로인 신의주가 자본주의 문화 보급의 첨병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이 아무리 폐쇄사회라고 해도 디지털 기기가 하루가 다르게 확산 보급되는 요즘 자본주의 문화의 세례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 ‘압구정 날라리’란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 “어서 와요, 이쁜 그대/ 몇 명이서 놀러왔나요…” 젊은 시절 압구정동 나이트클럽에서 ‘작업’(?)의 추억을 담은 노래라고 하는데, 경쾌한 리듬과 실감나는 가사로 인기라는 것이다. 평양 한복판에서는 ‘소녀시대’ 등 아이돌그룹의 춤 열기가 뜨겁다고 한다. 혹시 신의주에도 압구정 날라리가 10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군사기밀 유출] “대장 출신이… 예비역 방산업체 취업 제한을”

    [군사기밀 유출] “대장 출신이… 예비역 방산업체 취업 제한을”

    3일 군사 기밀 누설 혐의로 김상태 전 공군참모총장이 불구속 기소되자 군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군의 한 관계자는 “창군 이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면서 “국민에게 ‘4성 장군 출신조차 돈 때문에 정보를 팔아먹었다’는 인식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다만 군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피했다. 공식 대응한다는 자체가 군의 고질적인 병폐나 국방획득사업의 전반적인 비리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 우려하는 모습이다.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무기중개상과 무기업자 간에 빚어진 문제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군 안팎에선 “전관들이 방산업계에 재취업해 현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 속에서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일부에선 국방획득사업이 갖는 기밀성이 방산 비리를 남기는 한 원인이라고 거론된다. 방산업체로선 비밀사안인 군의 획득정보를 빨리 뽑아내기 위해 전관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군의 한 관계자는 “방산업체들이 3~5년 주기로 예비역 출신 중역들을 갈아치우는 이면에는 군과의 연줄을 이어 가려는 의도가 있다.”고 귀띔했다. 제한적인 방산 시장 규모가 도리어 무기중개상의 활동 범위를 넓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린다 김 로비 사건이 빌미가 돼 2006년 창설된 방사청조차도 정부 간 거래 방식인 해외군사판매(FMS)와 함께 무기중개상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직접상업판매(DCS) 방식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사청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구매 거래에서 FMS구매는 7000억여원어치였던 것에 비해 DCS구매는 1조 2000억여원어치였다. 방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많은 행정 비용과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는 FMS거래보다 DCS거래로 싼 가격에 원하는 물자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외국 업체의 대행이나 대리점 격인 예비역 출신 무기중개상들이 로비스트로 변질될 때는 비리와 직결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꼬집었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대령급 이상 군인이나 2급 이상 공무원은 직무 관련성이 있는 업종으로의 취업이 제한된다. 정부는 최근 국방부와 방사청의 군수품 관리 및 방위력 개선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소령급 이상까지 취업 제한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방사청에 따르면 최근 2년간 대령급 이상 퇴직자 40명 가운데 11명이 방산업체에 취업했다. 취업 제한 대상이 아닌 중령급 이하 퇴직자들 상당수도 방산업체에 취업한 것으로 전해졌다. 더구나 자본금이나 외형거래액이 적은 무기중개업체로의 취업은 제한을 받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군 관계자는 “전관 출신을 이용해 방산업체로 이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취업 승인 심사과정에서 직무 관련성을 보다 엄격히 따질 필요가 있다.”면서 “사회적으로도 제대 군인에 대한 처우를 제고해 로비스트로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솜방망이 처벌 관행도 도마 위에 올랐다. 2008년 스웨덴 사브그룹에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 관련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기소된 예비역 공군 소장 김모(57)씨는 지난 3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확정받았다. 2009년 록히드마틴사의 한국 대리점 부사장으로 영입돼 공대지 미사일 구매 계획을 빼돌려 기소된 예비역 공군 대령 장모씨 역시 집행유예형을 받고 철창행을 피했다. 1996년 미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다가 강릉 지역 무장공비 침투 사건 관련 정보를 우리 정부에 알려준 혐의로 기소된 로버트 김이 미 연방교도소에서 9년간이나 수감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씨줄날줄] 보도지침/박대출 논설위원

    전두환 정권은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다. 44개 언론사가 문을 닫았다. 정기 간행물은 172종이나 폐간됐다. 5공(共)은 언론기본법도 제정했다. 보도지침이란 걸 만들었다. 홍보조정 지침이 정식 용어다. 매일 언론사에 시달했다. 기준은 세 가지. 가(可), 불가, 절대 불가로 구분했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됐다. 어느 정권이든 언론담당 부서가 있다. 그 역사는 길다. 일제 때는 검열관 제도가 있었다. 검열관은 신문, 출판, 공연 등을 좌지우지했다. 미 군정청은 공보부에서 언론 통제를 맡았다. 건국 후 1948년 공보처가 신설됐다. 이후 12차례 폐지, 신설, 개편을 거듭했다.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의 민주성과 정비례했다. 독재 정권일수록 언론 통제는 더 강력했다. 보도지침은 독재권력의 상징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폐지됐다. 공식적으로는 없는 셈이다. 중국에서 보도지침 논란이 거세다. 당국이 고속철 추돌 사고와 관련해 언론 지침을 내렸다. 일부 언론은 이를 거부했다. 신화통신은 중국 언론의 가이드라인이다. 그 신화통신마저 당국 비판에 가세했다. 중국도 변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가 꿈틀댄다. 대체 언론들이 힘을 키우고 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는 선두주자다. 고속철 관련 글이 2600만개나 실렸다. 아직은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언로(言路)가 뚫렸다. 이젠 힘으로만 막을 수 없다. 북한도 머지않았다. 1933년 3월 12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친구들”(Good evening friends)이라는 인사로 시작했다. 상대는 국민이 아닌 친구였다. 이는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담(Fireside chat)으로 불렸다. 2008년 10월 13일. 이명박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라디오에 인터넷을 추가했다. 그 연설은 70차까지 진행형이다. 이를 놓고 비판론도 나온다. 전파 낭비, 일방적 소통이라는 주장들이다. 최소한 비판의 자유만은 보장된 셈이다. 비판거리를 줄이는 건 권력의 몫이다. 요즘 우리나라 언론은 대통령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이쯤 되면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셈이다. 그런데도 평점은 낮다. 국제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 하우스의 평가는 박하다. 언론 자유국에서 부분 자유국으로 한 단계 강등됐다. 용산참사 때 신(新)보도지침 논란이 일었다. 청와대 행정관이 경찰에 보낸 이메일로 촉발됐다. 청와대 측은 구두 경고로 매듭지었다. 이런 게 점수를 까먹는 요인이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조폭과 북파공작원 출신이 서로 한판 붙으니…

    조폭과 북파공작원 출신이 서로 한판 붙으니…

    애국가와 함께 단정한 태권도복을 입은 한 중년 사내가 입장한다. 다른 선수들보다 10살 이상은 더 많아 보인다. 강한 포스가 느껴진다.애국가에서 갑자기 빠른 비트의 음악으로 바뀌고 사내가 도복을 벗어 던진다. 24일 오후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국내 유일의 프로종합격투기 ‘로드FC 003 EXPLOSION’.대회의 7번째 경기에 출전한 조직폭력배 출신 파이터 이한근(42·정심관 소속)선수와 국군정보사령부 부사관 출신 김종대(31·팀포스)선수가 8각의 케이지 안에서 우뢰와 같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서로를 노려본다. 국군정보사령부는 과거 북파공작원 양성으로 유명했던 육군 첩보부대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의 후신. 조폭과 북파공작원이란 독특한 이력을 지닌 두 선수의 스페셜 매치는 경기 이전부터 화제가 됐다. 프로경기는 두 선수 모두 처음인데 대략 승리는 김 선수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몸놀림이 빠른 김 선수의 펀치가 이어졌다. 이 선수는 갑작스런 공격에 무릎을 꿇는 등 2차례 다운 위기를 맞으며 금세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 간간이 손과 다리를 뻗어 보긴 했지만 육중한 덩치 때문에 경기가 쉬워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일방적인 공격에 당하는 찰나, 두 선수가 서로 카운트펀치를 날렸다. 그 충격에 이 선수가 먼저 쓰러지는 듯 했으나 이내 바로 몸을 곧추세웠다. 반면 지칠 줄 모르던 김 선수는 밑동을 잘라낸 나무마냥 “쿵”하는 소리를 내고 링에 쓰러졌다. 관중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파상공세에 밀리던 이 선수가 관중석의 예상을 깨고,1라운드 1분18초만에 짜릿한 KO승을 쟁취한 것이다. 이 선수는 경기 직후 링 위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데니스강 등이 출전하는 로드FC의 미들급 토너먼트에 도전해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운동 파트너로 동생이 많이 도와줬는데 앞으로도 계속 (나와)함께 한다면 하겠다.”라고 밝혀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게 했다.다음은 선수 대기실 앞에서 서울신문과 단독으로 가진 인터뷰 주요 내용. →오늘 경기 어땠나? 승리의 요인은 뭔가. 힘 좋은 젊은 선수들과 하면서, 난 나이가 많은 노장 선수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뛴다고 생각했다. 참가하는 데 의미를 두려고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 김종대 선수도 열심히 했지만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번 계기로 격투기 종목이 많이 흥행됐으면 좋겠다. →이 순간 지금 누가 가장 생각나는지. 시합 중 세컨드(격투기 경기 중 선수를 돌보는 사람)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실제로 현재 아무런 생각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처음 프로 무대에서 경기를 한 소감은. 다른 좋은 선수들도 많은데 나 같은 선수에게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 노력한 만큼 다 보여주지 못해 아쉽지만, 오늘 KO로 좋은 결과가 나와 좋다. →운동을 왜 시작했고 얼마나 됐나. 주먹만 믿고 의미 없이 방탕하게 살다 후회했다. 체육관을 하면서 의미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면서 달라진 점은. 예전에는 쉽게 포기하고, 비전 없이 막 살았다. 운동을 접한 후 지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정신이 생겼다. 또한 체육관을 차리려는 비전도 생겼다. →조폭 시절 실전과 격투기와 어떻게 다른가. 예전에 막 싸움은 기 싸움이니 안 밀리고, 한·두번 주먹질에 싸움이 끝났다. 하지만 이 운동은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하나 뻗으면 두 개 나오는 식의 공식이 있다. 예전에는 내 기세대로 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강한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세상이 무섭고 내가 움츠려 든다.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이 먹고 운동을 하려다보니 힘도 들고, 특별한 직업도 없으니 경제적 부담도 든다. 게다가 젊은 선수들 감각을 쫓아 가려다보니 힘들다. 동영상을 찾아보고 해야 하는데 부족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정도까지는 시합을 뛸 수 있으면 몸 관리를 잘 해서 나이가 많아 직접 못 뛰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계속 뛰고 싶다. 그 후 환경이 된다면 체육관을 장만하여 보람되게 살고 싶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무런 기술도 없이 벌써 42살이다. 다른 일을 하려는 마음은 있어도 42살에 돈도 없고 무엇을 하겠나? 나 같은 경우 운동을 하고 있으니깐 망정이지 마음이 있어도 못하고 있는 분들 많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고 생각한다. 용기내서 열심히 하길 바란다. 나는 현재 종교가 있다. 하늘에 계신 높은 분 무서워하면서 성실히 살려고 노력중이다.. 취재 성민수PD 촬영 장고봉PD globalsm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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