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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대통령 오늘 취임] 박근혜, 25일 0시 자택서 軍 대비태세 보고받아

    청와대는 대통령직 이양에 따른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24일 오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복귀한 서울 논현동 사저에 국가지휘통신망을 임시 개설했다. 이어 대통령 권한이 실제 이양된 25일 0시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삼성동 자택에 군 통신망이 개통됐다. 군의 비상보고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승조 합참의장은 25일 0시 정각에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박 대통령에게 자택으로 군사 대비태세를 유선 보고했다. 이는 신임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 자격으로 받는 사실상 첫 보고다. 이 시각을 기해 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법적인 권한과 역할을 인수받고, 군정권과 군령권을 포괄하는 군 통수권을 비롯해 통치권을 정식으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안광찬 국가위기관리실장은 이날 0시를 기해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내정자에게 ‘지하벙커’로 불리는 상황실 등 안보상황을 넘겨줬다. 김성수 기자 sskim@seoul.co.kr
  • 檢, 전교조 교사 주축 이적단체 첫 기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주축이 된 이적단체가 공안당국에 처음 적발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 이정회)는 21일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출신인 박모(52·여)씨 등 전교조 소속 교사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현직 교사인 박씨 등은 2008년 1월 경북 영주 청소년수련원에서 북한 대남혁명론 및 사회주의 교육철학을 추종하는 ‘변혁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교육운동 전국준비위원회’(새시대교육운동)를 결성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때부터 2009년 5월까지 예비교사 및 전국 공무원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내용의 강의를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하는 등 이적행위에 동조한 혐의도 적용됐다. 18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이 단체는 서울 등 전국 13개 지역대표와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매월 5000∼2만원의 회비를 받아온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교육현장에서 주체사상·선군정치 등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전파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한 미군 철수나 국보법 폐지 등의 내용을 담아 교육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2005년 이 단체가 주최한 ‘어린이 민족통일 대행진단’에 참가한 한 초등학생이 인터넷 언론기자에게 ‘미군이 나쁘다는 것을 배웠다. 미군을 쏴 죽이자는 노래는 나의 마음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비공개·비합법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 전교조 등 합법단체의 활동으로 위장하는 전술을 채택, 전교조 집행부를 장악하려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전교조 차원의 교육 교류 명목으로 여러 차례 방북해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선군정치는 정의의 보검’이라는 내용이 담긴 북한 간부의 연설문 등을 입수해 배포하기도 했다. 전교조 측은 “교사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이적단체로 몰아가는 조작·기획 수사”라고 반발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朴당선인 25일 0시 통치권 인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25일 0시부터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으로서의 법적인 권한과 역할을 인수한다. 박 당선인은 25일 오전 11시쯤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하지만, 새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이날 0시부터 시작된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임기 개시일을 2월 25일로 규정하고 있고, 2003년 개정된 공직선거법에는 ‘대통령의 임기는 전임 대통령 임기만료일의 다음 날 0시부터 개시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박 당선인은 이 시간부터 대통령으로서 군정권과 군령권을 포괄하는 군 통수권을 비롯해 대통령의 통치권을 정식으로 행사하게 된다. 비상사태에 대비해 대통령과 군을 직통으로 연결할 수 있는 비상연락체제를 포함해 국가지휘통신망도 즉각 가동된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전날인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로 복귀함에 따라 우려되는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저에 국가지휘통신망을 설치하기로 했다. 또 24일 밤 12시까지는 청와대에 안광찬 국가위기관리실장과 천영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비상대기시키고, 25일 0시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지하벙커’로 불리는 상황실 등 안보상황을 넘겨줄 계획이다. 청와대 경호실도 24일 밤 12시 직전 새 대통령의 신변과 사저에 대한 경호권을 정식 인수해 국가원수 경호에 돌입한다. 한편 군 당국은 대통령 취임식을 전후해 위급상황 발생 시 즉각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합동참모본부의 초기대응반과 위기조치반을 가동하고, 전군에 경계강화를 지시하는 등 완벽한 대비태세를 유지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수 기자 sskim@seoul.co.kr
  • [DB를 열다] 혼돈의 1963년 재야 4인

    [DB를 열다] 혼돈의 1963년 재야 4인

    1961년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구(舊)정치인들을 ‘병균’에 비유하며 “박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듬해 3월 박정희는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도록 하고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구정치인 4300여명의 정치활동을 가로막았다. 박정희는 민정 이양을 약속했으나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다. 사진은 이런 정국 상황 속에서 1963년 1월 3일 회동한 김병로, 이인, 윤보선, 전진한 등 재야인사 4인의 모습이다. 김씨는 초대 대법원장, 이씨는 초대 법무부장관, 윤씨는 제4대 대통령, 전씨는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김종필은 나흘 뒤인 1월 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임하고 공화당 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공화당에서 내분이 일자 3월 16일 박정희는 민정 이양 계획을 백지화하고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이른바 ‘3·16 군정 연장 선언’을 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박정희는 윤보선, 허정 등과 영수회담을 열었다. 윤보선은 그 자리에서 “석탄만으로 만든 구공탄보다 석탄에 진흙, 톱밥 등 잡물을 섞어서 만든 구공탄의 화력이 월등히 세다”며 정치 규제를 즉각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대 의사를 확인하고서야 이 선언을 철회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1월의 오키나와, 눈 시린 쪽빛 풍경화

    1월의 오키나와, 눈 시린 쪽빛 풍경화

    노인들은 여전히 일본인이길 거부한다. 대신 이곳 사람임을 뜻하는 ‘우치난추’라는 말로 정체성을 세운다. 450년간 독립 왕국이었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또 30년 가까이 미 군정을 겪은 뒤 다시 일본에 반환된 곳. 원주민들과 무관한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20만명이 죽은 서글픈 역사가 서려 있다. 그러나 비극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희석되고 있다. 우치난추뿐 아니라 한국인 위안부와 징용자들의 슬픈 넋까지 에메랄드 바다 빛에 가려진 땅 ‘아시아의 하와이’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는 1976년 일본의 한 현(縣)으로 편입됐지만 거리상으로는 한국이나 중국에 더 가깝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10분이면 겨울철 평균 최저기온이 섭씨 17.2도인 아열대 해양성 기후의 섬으로 피한(避寒)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한겨울에도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어 북방의 관광객들은 가벼운 차림에 카디건이나 바람막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도 오리털 파카를 입는다. 오키나와의 관문인 나하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키 작은 소철나무와 파인애플을 닮은 아당나무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미 군정에서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의 농업이 환금성 높은 사탕수수 경작으로 치우치면서 식량까지 바닥나자 현지인들은 ‘보릿고개’를 겪게 됐다. 그때 우치난추들의 배를 채워 준 것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아당 열매와 3일간 물에 담가 독을 뺀 뒤 삶은 소철나무 잎이었다. 독을 빼는 3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먹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하공항이 있는 나하섬은 오키나와의 본섬으로 제주도의 4분의3 크기다. 여기에 슈리성, 추라우미 수족관, 오키나와 월드, 국제거리 등 주요 관광지가 밀집해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절경을 품은 나하섬 주변의 크고 작은 섬 160개(유인도 40여개)를 모두 합하면 제주도의 1.5배에 이른다. 그중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과 투명한 코발트 블루 물빛을 자랑한다. 특히 도카시키 섬 내 ‘아하렌 비치’는 세계적인 수준의 투명도를 갖고 있다. 배를 타면 수심 20m 아래까지도 훤히 보인다. 인근의 ‘도카시쿠 비치’도 투명한 물빛과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로 유명하다.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 해양스포츠의 메카다. 아하렌 비치와 도카시쿠 비치 모두 해변 가까이에 산호초가 넓게 자라고 있다. 산호초 사이로는 색색의 물고기들이 오가며 전 세계 스노클러들을 유혹하고 있다. 도카시키 섬 곳곳엔 전흔(戰痕)도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본섬에 상륙하려는 미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도카시키 섬을 포함한 게라마제도에 함선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군이 대규모 선단으로 게라마제도를 공격했고,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주민들과 함께 도카시키 섬 최북단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일본군은 민간인들에게 명예로운 자살을 종용한다. 이날의 아픈 기억은 도카시키 섬 북부 ‘집단자결지’에 새겨져 있다. 본섬에서 오키나와의 독특한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과거 류쿠왕국의 고도(古都) 슈리성이다.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리성은 1429년 쇼하시(尙巴志) 왕이 오키나와 본토를 통일하고 류쿠왕국을 세운 이후 450년간 역대 왕이 머물렀던 곳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대부분 파괴됐지만 성곽과 전각을 복원해 1992년 슈리성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중국과 류쿠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양식은 일본 본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1975년 세워진 추라우미수족관도 오키나와 관광에서 건너뛸 수 없는 곳이다. 7500t의 수압을 기둥 하나 없이 견뎌내는 세계 최대 수준의 수족관이 자랑이다. 대형 고래상어와 쥐가오리, 특이한 모양의 산호, 열대어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오키짱극장에서는 돌고래 쇼를 감상할 수도 있다. 오키나와의 해양성 기후는 남다른 야생미가 물씬 풍기는 자연풍경을 소성해 냈다. 이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포레스트 어드벤처’(www.forest-adventure.jp)는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다. 안전장치를 건 채 와이어를 타고 그물 다리를 건너 숲속을 탐험한다. 울창한 고사리 나무 숲을 걸으며 힐링을 하는 방법도 있다. 북부 ‘얌바루 이코이노 모리’ 휴양림에서는 ‘히카게헤고’라는 원시 고사리 나무 3000그루와 각종 식물을 감상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상처가 더 궁금하다면 평화기념공원을 찾아보자.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한국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다. 대한민국 각지에서 가져온 돌을 위령탑 앞에 쌓아 뒀다. 탑 앞에 선 비석은 충청도에서 가져온 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를 쓴 것이다. 한국, 한국인의 흔적도 여기저기 숨어 있다. 미야코지마에는 조선시대 홍길동 후손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슈리성 한켠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모셔둔’ 장경각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이곳까지 유입됐다는 얘기도 전한다. 국제거리와 마키시 공설시장에 가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뭘 즐기고 먹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본토 일본인과 묘하게 외모가 다른 우치난추들의 생김생김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도 재미다. 글 사진 오키나와(일본)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여행수첩 →진에어가 저비용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지난달 24일 인천~오키나와 정기편을 취항했다. 좀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오키나와를 다녀올 수 있게 됐다. 주 7회 운항하며 매일 오전 10시 35분 인천을 출발한다. 홈페이지(www.jinair.com) 참조. 1600-6200. →자유여행이라면 렌터카를 빌리는 게 편하다. 12시간 기준 5000엔 수준. 오키나와 중심부는 나하공항에서 슈리성까지 설치된 모노레일로 돌아볼 수 있다. →쇼핑은 오모로마치에 있는 DFS갤러리아 오키나와점과 대형 아웃렛몰인 아시비나가 유명하다. 특산물은 자색고구마로 만든 ‘베니이모타르트’다. →전통요리는 오이과의 채소 ‘고야’를 두부, 계란과 함께 볶은 ‘고야찬푸르’다. 해초의 일종인 ‘모즈쿠’도 일본 전역에서 소비될 정도로 유명하다. ‘오키나와 소바’는 강한 양념에 익숙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다. 오키나와 전통주인 아와모리와 오키나와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오리온 맥주, 오키나와 사탕수수 흑설탕을 이용한 도넛 ‘사타안다기’ 등도 맛있다. 일본 요리 뷔페인 ‘다이콘노 하나’ 등에 가면 다양한 오키나와 요리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 박근혜 정부 겨냥 대화회복 촉구 메시지

    박근혜 정부 겨냥 대화회복 촉구 메시지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일 육성으로 발표한 신년사는 대체로 경제 강국 건설을 강조하고 남북관계의 변화를 위한 박근혜 차기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기대하고 관망하겠다는 뜻으로 평가된다. 특히 김 제1위원장의 이례적인 육성 신년사는 할아버지 김일성의 방식을 모방해 그와 유사한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권력 공고화를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통일부는 북한의 신년사가 전체적으로 기존의 원론적 입장을 재표명한 가운데 경제 강국 건설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주체, 당 중심의 단결, 사회주의 고수 등 기존 주장을 되풀이해 김정은 체제의 안정과 체제 결속을 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차기 정부 구성을 앞두고 대화 회복 메시지와 경제 개선 가능성 차원에서 김 제1위원장의 신년사를 주목했다. 북한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발표한 공동 사설에서도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강조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올해 신년사의 주제는 대외적으로 관망과 공세적 대응, 대내적으로는 개선과 혁신”이라고 평가했다. 장 선임연구원은 “남과 북의 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고 6·15와 10·4 남북공동선언 이행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박 당선인 측에 정책 전환을 촉구하고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것”이라면서 “현 정부와 차별화된 정책 전환이 없으면 핵억지력을 강화하면서 한·미 양국에 단호하게 나가겠다는 공세적 의지”라고 분석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6·15와 10·4 공동선언을 존중하고 이행한다면 박 당선인의 새 정부와는 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라면서 “핵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박 당선인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이 보이지 않는 등 톤 자체가 강경하지 않아 한·미 양국에 대화 제스처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지난해 신년 공동 사설에서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나 올해에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 침략과 전쟁 책동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는 정도로 그쳤고 대외 관계에서도 우호적인 나라들과 친선 협조 관계를 확대 발전시킬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김 제1위원장은 신년사에서 경제 부문을 가장 많이 언급했다. 특히 경제 관리 방법의 끊임없는 개선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지난해부터 시범 실시하고 있는 이른바 ‘6·28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확대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그는 주요 경제 과제로 농업과 경공업을 강조하고 석탄과 금속의 혁신을 통한 국가 경제 활성화를 제시하기도 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경제 지도, 관리 개선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이나 방식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공동 사설과 비교할 때 올 신년사에서 ‘인민 생활’에 대한 언급이 늘고 ‘선군’에 대한 언급이 줄어든 점도 특징이다. 지난해 14회 언급했던 ‘선군’이 올해는 6회에 그쳤고 ‘인민 생활’은 3회에서 6회로 늘어 선군정치의 퇴조와 경제 개선 의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음성군수가 폭행 사무관 비호”

    이필용 충북 음성군수가 부하 직원들을 폭행한 사무관을 감싸고 돌아 직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음성군지부는 6일 군청 현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폭력을 일삼는 사무관 A(56)씨가 군수의 도움으로 강등 처분에서 풀려나 사무관 직급을 유지하게 됐다.”면서 “이 군수는 즉각 사과하고 폭력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하라.”고 촉구했다. 전공노에 따르면 A 사무관은 지난해 6월 사무실에서 부하직원의 뺨을 때려 정직 1개월을 받았다. 민원인에게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는데, 폭행당한 직원은 해당 업무 담당자가 없어 업무를 대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A 사무관은 올해 1월에는 술 마시자는 것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부하직원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가 충북도 인사위원회에서 6급으로 강등 처분됐다. 그러자 A 사무관은 지난 7월 청주지법에 강등 처분 취소와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이 군수는 지난 9월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10월에는 최후 변론도 포기했다. 결국 A 사무관은 지난달 22일 재판에서 승소했고, 이 군수는 지난 4일 항소포기서까지 제출했다. 전공노 관계자는 “이 군수는 A 사무관이 30여년 군청에서 근무하며 군정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데 직원들의 고통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A 사무관에게 부당하게 시달려 신입 직원 2명이 사표를 냈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동료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군수는 즉각 항소를 해야 한다.”면서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천막시위와 군수 퇴진운동까지 벌일 계획”이라고 경고했다. 전공노 음성군지부 홈페이지에는 ‘자신이 징계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줏대없는 군수는 사퇴하라.’, ‘(A 사무관이) 우리 부서로 올까 겁난다.’는 등 직원들의 비판 글이 잇따르고 있다. 음성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2010년 3월 울산 중구 동동 613 일원에 문을 열었다. 최현배 선생은 1894년 울산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를 창립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드는 등 우리말 보급과 교육에 힘썼다. 해방 뒤에도 미 군정청에서 교과서 행정을 맡고 한글학회 이사장과 연세대 부총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주요 저서로 ‘우리말본’, ‘한글갈’ 등을 남겼다. 울산 중구는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 옆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은 외솔의 업적과 유품, 저서 등으로 채워진 전시관과 영상실, 한글교실 등으로 조성됐다. 1층 기념관에는 1만여점에 달하는 유물 및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전시 자료는 선생의 저서와 한글 관련 서적 1만여점, 타자기·지팡이·옷·초상화 등 유품 30여점 등이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다목적 강당 등에서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한편 문화해설사를 기용해 관람객들에게 외솔의 업적 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외솔 동상 제막식도 열렸다. 동상(높이 2.5m·청동)은 유족의 뜻에 따라 60대의 외솔 선생이 한복을 입고 오른손에 안경, 왼손에 책을 든 모습으로 제작됐다. 중구 관계자는 “한글을 목숨으로 여긴 외솔 선생의 철학과 업적을 전 세계에 알릴 예정”이라며 “특히 외솔 선생의 한글 사랑, 겨레 사랑, 나라 사랑을 되새기는 학술 세미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30회에는 전주 권삼득로를 소개합니다.
  • [위기의 검찰] ② 권한 오·남용 어떻게 막나

    대한민국 검찰은 수사권, 기소권, 형 집행권과 같은 형사 사법체계에서 중요한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영국 등 다른 나라와 달리 검찰이 모든 사법 행정권한을 갖고 있다 보니 이로 인한 부작용이 끊이질 않고 있다. 특정 정치세력에 우호적인 수사를 하는 ‘정치 검찰’, 약 10억원을 긁어모은 김광준(51) 부장검사 사건과 과거 스폰서 검사처럼 ‘부패 검찰’ 문제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런 문제가 사회문제로 확대되면 자체 감찰, 특임수사 등으로 검찰권 행사에 제한을 가하려는 여론의 비판을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검찰이 어떠한 기관의 견제도 받지 않고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은 미군정 시절 영미법 체계를 도입해 수사기관(경찰)과 기소기관(검찰)을 이원화했기 때문에 검찰의 권력은 대단치 않았다. 이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법 파트너로 경찰을 선택하면서 경찰이 검찰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반공이 중시되면서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대공수사관, 국군보안사령부와 같은 정보기관이 득세했다. 당시 검찰은 이 기관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민주화 이후 정보기관들이 가졌던 기능과 권한이 검찰에 쏠리기 시작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사권을 폐지하면서 검찰만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 됐다. 이어 영장청구권까지 독식하게 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검찰이 탄생했다. 현재 검찰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증거를 수집하고 범인을 확보하기 위한 수사권, 범죄 혐의에 대해 처벌해 달라고 재판을 청구하는 기소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 범죄자를 가려내고 재판에 넘길 때까지 전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형 집행권도 갖고 있다. 게다가 검사만이 기소권을 가질 수 있는 기소독점주의, 내사 단계의 사건을 자체적으로 종결시킬 수 있는 내사종결권까지 더해져 누구의 통제와 견제도 받지 않는 막강 권력을 가지고 있다. 권한의 오남용은 곧 무리한 수사와 기소 혹은 봐주기 수사로 나타났다. 정권의 입맛에 맞춘 MBC PD수첩 제작진 기소,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배임 사건, 미네르바 박대성씨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들은 법원에서 모두 무죄가 확정됐다. 대표적인 봐주기 수사로는 관련자 전원을 불기소 처분한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의혹 수사와 청와대 핵심까지 밝혀내지 못한 채 종결한 민간인 불법사찰 수사가 있다. 현재 검찰이 가진 권한을 다른 기관으로 분산하고 외부 기관에서 견제하지 않는다면 검찰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와 함께 검찰 개혁은 검찰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검찰 조직이 더 이상의 자정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신뢰를 잃었다는 의미다. 우선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과 수사권을 분산하고 견제해야 한다. 경찰에 수사권을 일임하고 검찰은 기소권만 가지게 되는 검·경 수사권 조정, 검찰이 가진 기소권한을 국민이 일정 부분 맡아 결정하는 기소배심제와 함께 경찰이 직접 영장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검찰시민위원회를 통한 기소배심제를 도입해 실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를 통해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과를 도출해 기소권을 통제해야 한다.”면서 “이와 함께 수사권을 경찰에 나눠 주는 방법으로 검찰이 가진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상설특검제, 대검 중앙수사부 폐지 등으로 형사사법체계에서 사건이 검찰에 집중되는 현상을 막고,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공수처) 신설로 검찰 내부 비리를 척결하는 등 검찰 조직을 견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판사 출신인 김기홍 변호사는 “영국 검찰은 수사권이 없고, 독일은 검사의 자의적인 기소를 방지하기 위해 기소 법정주의를 택하고 있다.”면서 “한국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함께 가진 만큼 이를 분산하면서 공수처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견제 기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한만 분산시켜서는 개혁이라고 보기 힘들다. 검찰을 통제할 독립된 외부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인기기자 ikik@seoul.co.kr
  • 김정은 친위체제 구축… 군부 길들이기

    김정은 친위체제 구축… 군부 길들이기

    북한이 군정권을 총괄, 집행하는 인민무력부장을 김정각 차수에서 대남 강경파인 김격식 대장으로 교체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최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위 체제 구축을 위한 ‘군부 길들이기’가 강도를 더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역설적으로 북한군 내부의 불안정성과 동요가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북한은 지난 7월 리영호를 총참모장에서 해임한 이후 후임인 현영철을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하고 부총참모장이던 최부일도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해 작전국장으로 이동시키는 등 대대적인 계급, 직위 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김정각의 교체에 따라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에서 운구차를 호위했던 8명 중 군부 4인방은 1년도 안 돼 모두 실각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났다. 리영호와 김정각뿐 아니라 김영춘 당시 인민무력부장이 당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우동측 당시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은 올해 4월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김정일 시대 군부 대표 인물들이 물러난 자리를 최룡해 총정치국장, 김격식 인민무력부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현영철 군 총참모장 등이 채운 셈이다. 군 관계자는 29일 “김격식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논문을 쓰는 등 충성도를 보여주는 데 능한 인물”이라면서 “야전에서의 능력도 검증된 만큼 최근 김정은의 신임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김정일 시대에 득세한 장성들이 계속 권력의 부침을 겪는 동향으로 봤을 때 장성택과 최룡해 등의 입김에 따라 군부 길들이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이는 역설적으로 현재 김 제1위원장이 군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불안정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군부의 동요와 더불어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김 제1위원장은 지난 23일부터 전국의 공안·사법기관 간부회의를 소집해 “소요를 도발하거나 속에 칼을 품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은 짓뭉개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편 강경파인 김격식이 복귀함에 따라 북한의 대남 도발 우려도 제기됐으나 전문가들은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류 교수는 “인민무력부장은 군수, 재정 등 군정권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야전에서 군사 작전을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軍 전투태세 검열’ 부대 만든다

    우리 군의 전투준비 태세를 검열하는 국방부 직할부대가 내년 초 창설될 예정이다. 국방부는 18일 합동참모본부와 육·해·공군, 해병대 및 국방부 직할부대의 전투준비태세를 종합적으로 검열하는 국방전비태세검열단을 창설, 내년 1월 1일부터 가동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군 당국의 방침은 합참 소속인 전비태세검열실을 국방부로 이관한 것이다. 군 당국에 따르면 합참 전비태세검열실은 작전 등 군령부문은 감찰할 수 있지만 군수 등 군정부문의 감찰에는 제한이 있기에 국방장관 직속으로 전비태세검열단을 창설키로 했다는 것이다. 군 관계자는 “이원화돼 있는 군사에 관한 검열체계를 일원화해 종합적이고 효율적인 전투준비태세 검열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합참의 전비태세검열실은 합참에 대한 감찰 업무만 수행하는 감찰실로 바뀐다. 국방부와 합참은 지난달 10일과 지난 12일 국방전비태세검열단령 제정안과 합참 직제 일부개정령안을 각각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국방장관이 군정과 군령을 모두 아우르는 감찰조직을 갖게 돼 지나치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서천 “고준위 핵폐기장 후보지 철회하라”

    교육과학기술부가 고준위 핵폐기물처리시설 후보지의 한 곳으로 충남 서천군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군과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자치단체가 앞장서 이 문제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서천군이 처음이다. 서천군과 주민들은 8일 군청에서 “주민 의견 수렴 없이 비인면을 후보지로 넣은 것에 분노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사과와 해명을 촉구했다. 이어 “서천은 세계 최고의 생태도시를 군정 목표로 삼고 있다. 핵폐기물처리시설은 이런 지역정서와 전혀 맞지 않는다.”며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교과부는 이와 관련, 연구용역을 실시했고 연구결과 서천과 함께 전북 부안군, 부산 기장군, 강원 양양군 등 4곳이 후보지로 제안됐다. 이런 사실은 지난달 8일 국감에서 밝혀졌다. 서천군은 이틀 뒤 교과부에 사실 여부를 묻는 공문을 보냈고, 교과부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군은 “연구보고서에 후보지로 올라 있다.”고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고준위 핵폐기물은 핵연료를 사용하면서 나오는 것으로 방사능 소멸기간이 10만~20만년에 달해 세계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저준위는 원자력발전소 운전원이나 보수요원이 사용했던 장갑, 덧신, 가운 등으로 방사능 소멸기간이 200~300년이다. 이는 경주에 건설돼 2010년 말부터 운영 중이다. 국내 핵폐기물처리장은 1989년 영덕, 90년 안면도, 91년 영일, 94년 양산·울진, 95년 굴업도, 2003년 부안 등이 후보지로 선정됐으나 주민 반대로 무산됐다. 나소열 서천군수는 “주민 참여가 없는 사용 후 핵폐기물 관리정책은 모두 실패했다.”고 말했다. 서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靑 정보분석비서관 서용석씨 내정

    이명박 대통령은 31일 청와대 정보분석비서관에 서용석(54·준장) 국군정보사령부 제1정보여단장을 내정했다. 서 내정자는 육사 37기로 합참 정보운영처장, 정보사 참모장, 2작전사 정보처장 등을 역임했다.
  • [씨줄날줄] 북한 ‘생눈길 정신’/육철수 논설위원

    북한의 달력은 오늘이 ‘주체 101년 10월 22일’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초 신년 사설을 통해 “올해 주체 101(2012)년은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강성부흥 구상이 빛나는 결실을 맺는 해이며 김일성 조선의 새로운 100년대가 시작되는 장엄한 대진군의 해”라면서 “새로운 주체 100년대의 진군은 백두에서 시작된 혁명적 진군의 계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백두의 혁명정신’은 김일성이 북한 통치를 위해 처음으로 내세운 국시(國是)이자 북한 세습정권에 대를 이어 내려오는 시대정신이다. 북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두의 혁명정신’은 ‘백두산 위인들의 위대한 혁명사상이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을 끝까지 이어 갈 담대한 배짱이며 공격 방식’이다. 김일성 집권기의 ‘천리마 정신’과 김정일 때 ‘속도전의 혁명정신’이나 ‘고난의 행군정신’ 등은 모두 ‘백두의 혁명정신’이 바탕이다. 최근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생눈길을 헤치는 정신으로 창조하며 승리해 나가자’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생눈길’이란 말은 ‘아무도 밟지 않아 눈이 녹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길’이란 뜻이다. 북한의 신문·방송은 이 말을 ‘극복해야 할 난관’ 또는 ‘전인미답의 길’이란 의미로 가끔 사용해 왔다. 노동신문은 ‘생눈길 정신’에 대해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시대정신이며 혁명의 최후 승리를 향해 과감히 돌진해 나가는 낙관적이며 창조적인 공격정신’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이게 김정은 체제의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노동당과 군대, 주민에게 ‘일심단결하여 수령결사옹위를 위해 충성하고 자아희생의 고결한 인생관’을 가져 달라는 주문도 했다. 북한은 신년 사설에서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 따라 새로운 주체 100년대의 강성부흥을 위한 장엄한 진군길에 들어서고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제2의 고난의 행군이나 다를 바 없는 ‘생눈길 정신’으로 새 시대를 열었으니 북한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하다. 불행하게도 북한 지도자들은 어려운 식량 사정과 분수에 맞지 않는 핵개발이 자신들을 생눈길로 몰아넣고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배가 고파 국경을 넘는 주민이 하루에도 숱할 터인데, 그들에게 아무리 충즉진명(忠則盡命)을 요구한들 귀담아듣기나 할까.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남해 火電유치 무산…‘두 쪽 민심’ 후유증

    경남 남해군이 추진한 석탄화력발전소 유치 계획이 주민투표에서 부결돼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찬반으로 갈려 대립했던 주민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후유증 해소가 숙제로 남았다. 남해군은 18일 화력발전소 유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전날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유효 투표자 2만 2250명의 51.1%인 1만 1380명이 석탄화력발전소 유치 동의서 제출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찬성은 1만 870표(48.9%)였다. 19세 이상 총유권자 4만 2055명 가운데 2만 2367명이 투표에 참가해 투표율이 비교적 높은 53.2%를 기록했다. 석탄화력발전소 유치를 둘러싼 주민들의 높은 관심과 팽팽한 찬반 의견이 투표에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남해군은 투표 결과 유치 반대가 50% 넘음에 따라 석탄화력발전소 유치 사업을 전면 백지화했다. 정현태 남해군수는 ‘군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에서 “앞으로 석탄화력발전소 유치와 관련해 어떤 제안이 들어오더라도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남해군이 주민투표까지 실시하며 힘을 쏟았던 석탄화력발전소 유치가 무산됨에 따라 군정 동력 저하와 찬반 주민 간 갈등 및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주민들은 화력발전소 유치위원회와 건설 저지 대책위원회 등을 구성해 대규모 집회를 열며 대립해 왔고 이 과정에서 주민투표법 위반을 이유로 공무원이 수사기관에 고발되는 등 찬성과 반대 양측의 갈등이 깊어졌다. 개표 직후 찬반 양측 모두 결과에 승복하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미 갈등의 골이 깊어져 있어 민관과 지역단체 등의 적극적인 화합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원일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은 “투표를 통해 주민들의 뜻을 알게 된 만큼 주민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하정현 대책위 공동위원장도 “찬반투표 운동 과정에서 갈등이 심했지만 주민투표를 계기로 군민이 화합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정 군수는 “이번 주민투표에 따른 질책과 꾸중은 투표 실시를 직권으로 결정한 군수가 모두 다 받겠다.”면서 “주민투표가 남해 발전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주민투표에 따른 앙금은 모두 털고 남해 발전을 위해 화합하자.”고 군민들에게 호소했다. 정 군수는 “석탄화력발전소 유치를 계획했던 서면 중현지구에는 환경적 가치를 지키면서 군민이 동의할 수 있는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며 화력발전소 유치에 찬성했던 주민들을 달랬다. 남해군은 지난해 7월 한국동서발전㈜이 중현리 일대에 8조 6000억원을 들여 4000㎿ 규모의 화력발전소를 포함한 남해에너지파크 건설을 제안하자 타당성 용역조사를 하는 등 유치를 추진해 왔다. 남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이 맞고,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이 올바른 용어다. 을미사변이 아니라 ‘명성황후 암살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임경석(54)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막 출간돼 따끈따끈한 ‘한국근대외교사전’(사람의무늬 펴냄)을 펴들고 지난 15일 교수회관 4층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줘야 제대로 된 꽃(역사)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임 교수는 “다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외교사전이 발간돼서 다행”이라며 “한국사는 한국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시선으로 외교사건을 정리해야지, 한·일역사를 일본학계의 시선으로 정리해서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876~1910년 한국 근대외교史 정보 ‘한눈에’ 임 교수는 “‘한국근대외교사전’은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한국 외교의 역사에 등장한 사건, 조약, 인물, 조직에 대한 정보를 담은 감히 ‘국내 최초의 외교사전’이라 자부할 수 있다.”면서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각각 전공한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 외교사학자, 법학자 등 28명의 학자가 모여 239개 항목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와 그의 후배이자 역사학자인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항준 서울여대 사학과 강사가 대표 편·저자이고, 주요 저자로 연갑수 서울대 교수, 조재곤·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 주진오 상명대 교수, 한철호 동국대 교수, 홍준화 고려대 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사전에 참고문헌과 책임 저자를 명시해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였다. 한국근대외교사전은 원래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예산과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지원을 받아 3년 만인 2010년 결과물을 내놓았다. 당시에는 한중연의 ‘한국민속문화대백과’에 수록돼 있었다. 임 교수는 “여기에 2년 동안 수정·보완하고 20여개를 추가해 239개 항목으로 확대해 별도의 책으로 펴냈다.”고 말했다. ●가나다순 항목… 연구·실무자에게 최고의 길잡이 한국근대외교사전의 강점은 무엇인가.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나 역사와 외교관련 실무자들이 관련 항목을 가나다순으로 쉽게 찾아가며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특히 한국 관련 근대사에 영향을 미친 외국인을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 예를 들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러시아 외교관이었던 포타포프가 있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상황에서도 러시아 정부와 임시정부 사이에서 외교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많은 도움을 줬다. 우리 독립운동에서 러시아가 많이 배제됐는데,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는 일본에 복수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유지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러시아 연해주에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권업회’나 권업회 산하의 항일무장단체였던 ‘대한광복군정부’ 등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근대외교史, 한국인의 시선으로 서술해야”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을사늑약이라 쓴 역사교과서를 을사조약으로 고치라고 요구했던 것과 관련해 그는 “국사편찬위의 사고방식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상당히 다르다.”며 “각국의 외교사는 국익의 충돌 속에서 존재하고 특히 한국의 근대 외교사는 외세 피침의 역사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독자적인 시선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더 나아가 임 교수는 “국사편찬위가 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다가 우경화됐다.”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이 조약과 같은 합법적인 외양을 띠고 있지만 이것은 형식논리”라며 “최근 ‘유럽식 근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 외교사가 강대국 위주로 서술돼 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강대국의 편견이 가득한 시선을 배제한 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단순히 외교사를 정리한 책이 아닌 만큼 오늘날 한국의 외교적 생존전략을 파악하고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자랑 못 할 주민賞

    자랑 못 할 주민賞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발전 등에 공로가 큰 주민과 출향인들에게 시상하는 ‘자랑스러운 시·군·구민상’을 남발하고 있다. 시상 분야와 인원 등 규모도 들쭉날쭉해 상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민선 단체장의 홍보용 생색내기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천, 추천인 42명중 21명 수상 경북 김천시는 오는 15일 시민의 날 행사 때 ‘2012년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21명에게 주기로 했다고 3일 밝혔다. 수상자는 21개 전체 읍·면·동사무소에서 2명씩 추천받아 읍·면·동별로 1명씩 선정했다는 것. 결국 읍·면·동별로 1명씩 ‘공평하게’ 배분한 격이 됐다. 지난해 현재 인구 13만 6000명인 김천시의 이 같은 시민상 규모는 도내 23개 시·군 가운데 최대 규모다. 인구 52만 2000명인 포항시의 자랑스러운 시민상 수상자 10명보다 2배가 넘는다. 인구 규모가 비슷한 안동시민상 수상자 5명에 비해 무려 4배 이상이다. 시는 1999년부터 매년 읍·면·동별 1명씩에게 시민상을 주고 있다. 지난해까지 모두 270여명에게 시민상을 줬다. 상주시도 시민의 날인 12일 시민상을 3명에게 준다. 시는 당초 학술교육, 문화체육, 사회복지, 산업건설 등 4개 분야 1명씩 모두 4명을 시상하려고 했으나 산업건설 분야 후보자가 없어 1명이 줄었다. 시의 인구는 10만 4000명이다. 시는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17년 동안 주민 41명에게 시민상을 시상했다. 의성군도 9일 군민의 날 때 자랑스러운 군민상을 시상키로 하고, 최근 7개 분야(지역개발·봉사·효행·문화예술·체육·농업·애향 등)에 걸쳐 수상자 13명을 뽑았다. 이는 지난해 6개 분야 9명보다 4명이나 늘었다. 인구 1만 9000명에 불과한 영양군도 12일 군민의 날 행사 때 6개 부문에 1명씩 모두 6명에게 군민상을 시상한다. 영양군은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1년간 해마다 군민상을 1~4명씩 주다 소송에 휩싸인 군수가 몸을 사리는 바람에 갑자기 7년간 시상이 중단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천군도 16일 군민의 날 기념식에서 주민 등 4명에게 군민상을 준다. 영농, 사회봉사, 효행, 문화·체육 4개 부문. 군은 1986년 문화, 체육 부문 등 2개 부문 군민상 시상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103명에게 군민상을 줬다. ●의성, 작년보다 수상자 4명 늘려 시·군 관계자들은 “시·군정 발전과 주민의 복리증진에 기여하고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봉사한 분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역 인사들은 “지자체들이 연례행사로 치르는 자랑스러운 시·군민 시상제가 각양각색이어서 혼란스럽다. 특히 상당수 지자체는 나눠먹기식 또는 자결 미달 인사들에게까지 상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아 상당한 부작용이 일고 있다.”면서 “스스로 상의 품격과 권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시상 규모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법륜 “5·16은 헌법정신에 없다”

    법륜 “5·16은 헌법정신에 없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멘토로 알려진 법륜 스님은 18일(현지시간) “5·16 쿠데타는 헌법 정신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을 방문 중인 법륜 스님은 이날 워싱턴의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SAIS) 한·미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신앙, 신념 등을 넘어 헌법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대통령 등 공직자가 되려면 헌법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5·16은 헌법 정신에 없고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유신을 했다’고 말하는 것도 비상식적”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에 3·1 정신과 상하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자는 부분은 있어도 5·16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과 관련해선 김정은 체제가 기본적으로 두 갈래 정책 방향을 잡은 듯하다고 분석했다. 정치·안보 면에서 선군정치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개혁·개방’ 용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개선’ 조치를 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농업정책을 예로 들어 국영농장을 집단농장화하고 관리권을 농장에 주며 농장은 다시 ‘분조’에 독립성을 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10여명이던 분조도 3~4명으로 세분화해 개인농은 아니지만 가족 단위 영농으로 생산물의 30%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사적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개인 처분권’을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北, 인민위한 軍 강조 軍 자원 배분 줄이나

    북한이 경제 부문에서 비대해진 군의 역할을 줄이고 군사문제를 우선과제로 내세운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의 ‘선군정치’가 당 중심의 체제로 정상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부친의 유훈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선군정치를 고수하고 있지만 최근 ‘인민을 위한 군대’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13일 ‘확장되는 인민의 유원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유원지에 넘치는 낭만과 희열은 지난 4월 15일 최고영도자의 열병식 연설을 통해 내외에 선포된 ‘새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광경”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김정은 원수님께서는 군사기술적 우세는 더는 제국주의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며 적들이 원자탄으로 조선을 위협공갈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확언했다.”며 “정치군사 강국의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하여 나라의 귀중한 자금을 인민의 웃음과 기쁨을 위해 돌려 쓰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이 김정일의 유훈인 선군정치를 완전히 폐기할 수 없지만 군이 외화벌이 등 경제사업에 직접 간여하는 부분을 줄이고 인민 생활 개선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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