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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석비서관들에 「이해력」 밝혀 눈길

    ◎김 대통령,“군생리 누구보다 잘 안다”/“의원시절 절반 국방위원으로 활동”/절묘한 인사에 “비공식채널 보유” 추측도 ○“그건 날 모르는 소리” 김영삼대통령은 군정보를 어떻게 얻고 있고,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근 단행된 전격적인 군수뇌인사의 정교성에 군내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이런 가운데 김대통령이 27일 군에 대한 자신의 높은 이해력을 스스로 공개해 화제다. 김대통령은 이날 수석비서관들과 만난자리에서 『일부에서는 내가 군에대해서 잘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국회의원생활의 절반이상을 국방위원으로 보낸 걸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밝혔다.김대통령은 백선엽장군부터 시작해 6·25참전군인들의 이름을 열거해 보이면서 『군출신들보다 내가 군의 생리를 더 잘안다』고 말했다는 것. ○두 전 대통령 대위때 김대통령이 처음 국방위원이 되었을 때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들은 육군대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와관련,청와대의 한측근은 『김대통령과 두전임대통령의 이런 인연때문에 김대통령은 전임대통령들을 어렵지 않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즉 김대통령은 전임대통령들의 재임시에도 『내가 국방위원이었을 때 겨우 대위였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측근의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3당합당후 노태우 당시대통령과 김영삼대표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격렬히 부닥쳤다.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됐다고 재는 모양인데 웃긴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상대방에 대한 그런 관념이 격렬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동력중의 하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급장교 잦은 접촉 이측근은 『김대통령이 군의 고급장교들과 수십년을 부딪혀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군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또 어디를 잡으면 되는 것인가를 잘안다』고 설명했다.때문에 어떤인사를 하면 군의 단결이 강화되고 군이 좋아하는 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일련의 군인사가 군내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특별한 정보가 있어서라기보다 군에 대한 높은 이해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군내부에서도 지지 일련의 군수뇌인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군을 잘아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해군인사의 경우 청와대의 한고위관계자는 『해군내부에서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세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오랜 국방위원으로서 갖게된 군에 대한 이해력만으로 이런 인사가 가능했을까. 이에대해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들은 군내부에 대해 비공식 정보라인을 갖고 있지않겠느냐고 풀이했다.검찰에 대해 가차없는 숙정을 지시했던 것도 걸러지지 않은 정보의 유입채널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감각·결단력 큰 요인 실제 김대통령은 전임자들이 의존했던 기무사에 대해 큰 역할부여를 하지 않는 것 같다.사령관과의 독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경재청와대대변인은 『높은 이해력과 풍부한 정보탓도 있겠지만,그보다는 타이밍에 대한 감각과 결단력이 군인사의 점수를 높인 결정적 요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 JP 뭔가 작심했나/5·16옹호·지구당위장 사퇴에 추측 무성

    ◎청와대선 전혀 다른 정서의 발언에 당혹감/일부선 “무력한 2인자 탈피 승부수” 풀이도 민자당의 김종필대표가 요즘 심상치않다. 5·18과 12·12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까지 이뤄지며 김영삼정부가 개혁의 고삐를 한껏 당기고있는 이때 김대표는 16일 청와대 정서와 어긋나는 발언을 했다.여기에다 김대표는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지구당위원장자리까지 내놓았다. 김대표는 16일 5·16민족상수상식에서 원고에 없던 역사의 「기승전결론」을 펴며 5·16을 정당화했다.5·16이 오늘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주장아래 박정희대통령(기) 전두환·노태우대통령(승) 김영삼대통령(전) 통일대통령(결)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민주당은 이에대해 김대통령의 개혁정부도 결국 과거 군사정권에서 잉태된 정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김대통령의 해명을 요구했다.김대통령이 아직 역사의 「결」국면에 이르지 못했다는 대목도 미묘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4·19의거를 「혁명」으로 그 의미를 새롭게 투영하고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한김영삼정부의 시각과는 궤를 달리한다.청와대측은 논평을 자제하고 관망자세다.그러나 지난번 황인성총리의 12·12합법화발언에 이어 또다시 김대표의 탐탁지않은 발언이 터져나온 배경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물론 김영삼정부가 5·16에 관해 직접적으로 평가한 발언은 아직 없다. 하지만 4·19혁명으로 등장한 문민정부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5·16에 대한 김대통령의 생각은 미뤄 짐작할수 있다.김대통령은 당선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정권에 정통성이 없다는 점에서 새정부를 2공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라』고 밝힌바 있다.군정인 3·5·6공을 모두 부정하고 싶다는 속마음이 드러난 것에 다름 아니다.야당측도 황총리와 김대표의 잇따른 발언파문을 「수구세력의 집단반발」로 규정하는등 강경공세를 취하고 있다. 김대표는 이처럼 발언파문이 확대일로를 걷자 17일 확대당직자회의에서 『역사진행에 대한 개인적인 사관일 뿐』이라고 해명했다.『현시대가 김대통령중심의 변화와 개혁에 따라 발전적으로 열어가는 시대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설명도덧붙였다. 그러나 그의 해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특히 민주계인사들은 『시대정신을 망각한 언행』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결국 청와대의 생각을 모를리 없는 김대표가 지금 시점에서 왜 그같은 발언을 했느냐로 초점이 모아진다.정가에서는 우선 김대표 발언을 지구당위원장 사퇴와 맞물려 상당한 복선이 깔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이른바 중대결심설 내지는 배수진설이다.한 의원은 김대표가 이날 발언에 앞서 전날 대구에서 5·16의 성격규정을 요구한 보도진의 질문에 「내일와서 보라」고 미리 예고했던 점등을 들어 『JP가 모종의 중대결심을 굳혀가고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김대표가 지금까지 개혁의 삭풍이 불때마다 무저항 또는 순응자세로 일관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뭔가 작심한게 아니겠느냐는 해석이다.특히 김대표가 이달초 지구당위원장직 사퇴의사를 김대통령에게 전달한 것도 자신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려는 일종의 배수진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김대표는 5·16발언을 계기로 과거단절작업의 한계점을제시하고 이를 넘어서면 결연히 행동하겠다는 것을 예고한 것이라는 추측마저 낳고 있다.결국 그가 「무력한 2인자」에서 탈피하려는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봐야한다는 풀이다.이와함께 지금도 개혁정국의 「변방인」에 머물러 있는 다수의 민정·공화계인사들에 대한 적극적인 몸짓으로도 볼수있다는 것이다.세결집을 통한 위상강화를 겨냥했다는 해석이다.이와관련,자신을 기승전결론의 결에 해당하는 인물로 상정한 것 아니냐는 일부시각도 있으나 측근들은 펄쩍 뛰고 있다. 앞서 논의와는 다소 강도가 처지지만 김대표의 심기불편설도 제기된다.김명윤상임고문이 명주·양양지역 공천을 받아 김고문이 결국 당대표를 맡을 것이라는 추측이 당내에 나돌면서 김대표는 심기가 불편해졌고 이에따라 자신과 김고문중 양자택일하라는 무언의 요구가 일련의 발언파문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지구당포기도 같은 맥락이다.불안한 당내 역학구조상 미리 승부수를 띄우지 않고서는 장래가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지구당을 내놓았다는 해석이 설득력있게 들린다.여하튼 김대표는 앞으로 자신의 발언을 어떤 형식으로 조율할지에 따라 정계은퇴냐 아니면 여권내 확실한 입지확보냐의 기로에 설 것으로 관측된다.그리고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않고 있는 청와대측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도 관심거리다.항간에 나도는 김고문으로의 대표교체를 정말 실천에 옮길지도 두고볼 일이다.
  • 대통령표창 전남 강진군청(민원행정 수범기관:16)

    ◎군수실에 「직소민원전화」 운영/야간에도 서류신청 가능… “친절도 95% ”/매주 민원처리평가… 불편예방에 만전 「안녕하십니까 강진군수 백종철입니다.문의사항이 있으시면…」 민원인들이 민원담당자의 불친절행위나 군정에 도움이 될만한 사항등을 시간과 장소에 구애없이 자유롭게 건의할 수 있도록 전국 최초로 군수실과 관사에 설치·운영되고 있는 「직소민원전화」에 녹음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이 테이프에 수록된 내용은 군수가 매주 월·목요일 두차례 주재하는 간부회의에서 담당 실·과장들에게 직접 들려주고 처리결과를 반드시 전화나 서면으로 알려주도록 하고있다. 이처럼 돋보이는 민원일처리로 전남 강진군청은 지난해말 민원쇄신행정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돼 대통령상을 받았다.하루 줄잡아 3백여명의 민원인이 드나드는 민원실의 친절함은 특이하다.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은행창구 파견교육까지 마친 여직원 2명이 몸놀림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자를 입구에서부터 정성껏 부축해주고 눈이 침침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이되어 민원신청서를 대신 접수해 준다. 매주 금요일 하오6시에 열리는 청내 민원담당자 회의에서는 1주일동안의 민원처리 결과에 대한 평가회를 거쳐 우수사례에 대해서는 관내 11개 읍·면에 알려 행동지침으로 활용토록 하는 한편 잘못된 점은 참가자의 종합적인 여론을 수렴해 시행착오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민원실장 박노일씨(55)는 『지난 90년 민원인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민원담당자의 친절도가 70%선 이었으나 지난해에는 95%로 뛰었다』며 『친절도 1백% 달성을 위해 매일 일과시간 10분전 친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군정종식 100일안 마련(지구촌단신)

    【아순시온 AFP 연합】 파라과이 독립 후 처음으로 실시된 민주 선거에서 당선이사실상 확정된 집권 콜로라도당의 환 카를로스 와스모이 후보는 12일 군부 독재의 잔재를 씻기 위한 「1백일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 미 유고 파견 전문인력모집“붐”/사태악화 대비 지원요원 확보 부심

    ◎일간지 마다 구인광고 잇따라/전직 장성 등 「전쟁특수」 누릴듯 『사람구함­좀 위험함­침식제공,90일 이상 근무해야 하며 유고어와 영어를 구사해야 함.나이는 관계없음』 지난달 미육군정보사령부가 시카고의 한 경제일간지에 낸 구인광고다. 최근들어 부쩍 늘고 있는 이같은 광고는 보스니아사태가 악화되면서 2만5천명의 파병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미국방부와 정보관련부처들이 지원스태프를 확보하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다. 정보당국자들에 따르면 현재 각 정보관련당국들이 일촉즉발의 「발칸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지상군에 일반정보를 수집해줄 수 있는 인력을 찾고 있으며 심지어 유럽에서도 시한부로 일할 이같은 인력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한 당국자는 『나이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전직 정보통이면 대환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정보계통에 종사한 퇴역장성,전직 중앙정보국 간부,탐정들은 물론 유고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보스니아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전미국방정보국 사령관을 지낸 데이비드 그라함 예비역소장은 『옛 정보국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비슷한 정보관련기관들이 전직 작전·정보장교들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연방 중앙정보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며 유고지역에서 일할 사람들을 충원중』이라고 전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충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72살인 전중앙정보국의 한 직원은 『올해 초 정보국으로부터 세르비아로 가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밝히고 『그러나 야전근무를 원치 않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말했다. 유고가 전쟁터여서인지 인재확보가 여의치 않자 관계당국은 각종 일간지를 통해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 구함』 『유고어를 할 줄 아는 통역인 1백25명 구함』 『유고에서 미 지상군과 함께 일할 스파이를 구함』 등의 광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의 한 대변인은 『정부가 보스니아 파명을 결정할경우 통역관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그러나 아직까지는 어떤 결정도 내린 바 없다』고 전했다. 그는 『소말리아사태나 걸프전때도 비슷한 광고가 나갔다』면서 『당시는 대부분 학생들이 고용됐으나 이번의 경우 나이는 상관없지만 건강검진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것』이라고 덧붙였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7·끝)

    ◎지령회복의 정당성/서울신문기원은 1904년 7월18일/「항일선봉」·「친일곡필」 모두 인정해야 정직/최고의 역사… 오늘로 28764호인셈/45년 혁신속간땐 지령 계승… 59년 41년간의 족적 삭제 서울신문은 조국광복과 함께 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하여 속간되었다.또한 일제시대 통감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는 한말의 구국지이자 민족대변지이던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해 발행된 신문이다.따라서 서울신문은 그 뿌리를 한말 최대의 구국민족지이던 대한매일신보에 두고있는 셈이다. 서울신문의 뿌리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런던의 크로니클 통신기자였던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과 한말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겸 우국지사 양기탁등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합세해 창간했다. 창간 날짜는 1904년 7월18일이다. ○일 국권위협에 맞서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어 고문정치를 통한 외교 및 내정을 간섭하는등국운이 풍전등화 상태에 놓이던 시기였다.신보는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창간되어 통감부의 기관지로 매수되기까지 일제의 온갖 회유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국권수호운동에 앞장서온 것이다. 신보의 국권수호를 위한 언론구국운동은 동시대 다른 신문과는 현저히 다를만큼 특징적이었다. 창간호부터 항일논조로 일관,갖가지 폭로 고발기사로 사라져 가는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횃불을 당겨온 것이다.일제의 황무지개관권 요구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반도 침략음모를 널리 알린 일이며 황성신문의 정간 및 장지연의 구속사건 대서특필,일제의 날조와 허위를 폭로한 고종의 밀서사진 전재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뿐만이 아니다.민족지들의 방향을 주도하는 일방 친일지와 친일파,매국노와 친일매국단체에 대해서도 준엄하고 통렬한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신보의 언론구국운동은 이러한 비판 및 고발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애국투쟁정신을 고취하는데에도 매우 적극적 이었다.고종량위반대·정미7조약반대의 시위운동고취를 비롯해 장인환,전명운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통감부 고문)처단과 안중근의 이등박문처단을 애국의사의 애국투쟁으로 보도,민족의 분발과 투쟁운동의 치성을 고취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주도 또 백년대계의 교육구국운동이며 의병운동,그리고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까지 나서 선각민족언론으로서의 소임을 적극 전개한 점도 빼놓을수 없다.특히 애국계몽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은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한 거족적 국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보의 언론구국정신을 한눈에 가늠케 하는 것이다. 신보가 이처럼 과감한 구국운동을 전개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의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은때문이다.그러나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등 애국민족투사들의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와 운동을 주도했다는데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국권수호운동을 펼치던 신보는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풀이 꺾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영국총영사 헨리보나르와 통감부의 회유 및 압력을 받아 끝내 통감부에 매각되기에 이른다.국권회복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그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틋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 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대한」의 두자를 잘렸다.결국 「대한」을 빼앗겨버린 「매일신보」는 일제의 의도대로 통감부의 기관지로 변신된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 이 날짜의 사설제목 「동화의 주의」가 상징하듯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이하 매신)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첨병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당초 매신은 총독부 일문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운영되었으며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를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가 위주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고 식민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한편 일제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 것이다. 민족말살을 호도,한국과 일본을 순치의 관계로 묶어서 주장한 민족동화의 논리는 물론 식민통치의 기반구축을 위해 사회환경의 일본식 개량 또한 부추겼다.또 식민경제수탈을 위해 산업의 개량과 일본경제체제로의 예속화,그리고 한국의 자주성 및 전통문화를 단절시키기위한 문화말살에도 앞장섰다.이밖에도 학교와 사회,가정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독립운동 탄압에 가세하는등 식민논리로 일관했다. ○해방조선 대변자임 매신은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를 선전하는등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대변역활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같은 일제옹호논조는 매신이 기구를 확대해 경성일보에서 분리,1938년 4월16일 독립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개제해 출발한(지령은 매신을 계승)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그리고 매신은 지난날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 「서울신문」으로 거듭 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서울신문으로의 개편작업이 본격화하기는 1945년 11월10일 미군정청이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리면서였다. 이날이 바로 치욕의 매신이 종간된 날로서 지령은 제13737호로 돼있다.그뒤 새로운 간부진용이 구성돼 매신의 시설과 사옥은 물론 6백여 사원을 그대로 흡수,「서울신문」제호의 혁신호를 이땅에 선보였다.초대 사장은 지조 높은 선각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인 위창 오세창이었다. 이날이 1945년 11월22일(발행날짜는 11월23일)이었으며 지령은 매신을 그대로 계승해 제13738호로 기록되어 있다.이 발행호수는 서울신문이 매일신(신)보의 발행기록 12276호와 그 이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기록 1461호를 합친 숫자를 기준삼아 지령을 계산한데 따른 것이다.이는 매일신(신)보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한데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이에따라 서울신문은 이 두신문의 종합지령을 승계한 제13738호로 기록하게 된것이다.서울신문이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의 계보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속간된 것이다. 이 지령은 1959년 3월22일까지 그대로 계승,제18214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서울신문은 지금 이 지령을 쓰지않고 있다.59년 3월23일 당시 사장이던 고 손도심이 근대 신문사에 대한 자체적인 사적평가를 진행하고 회사전체의 의견을 종합,그동안 사용해오던 구지령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이에따라 1945년 11월23일자로 된 속간호를 제1호로 기산,이날짜(1959년 3월23일)의 지령을 제4477호로 쓰게됐다 ○속간호 1호로 기산 서울신문은 이로써 저 멀리 대한매일신보로부터 이어온 지령 13737호와 41년의 역사를 스스로 잘라버렸다.그러나 이는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을 그르치는 사실왜곡에 다름 아니었다.근대사에 각기 공과 과의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긴 두 신문과 서울신문의 맥락은 앞에서 보듯 연면히 이어져온 때문이다.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서울신문이 스스로 도려낸 구지령을 되찾아 바로 잡는 것은 역사에 정직하기 위한 길이다.이는 서울신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언론사의 재정립이라는 면에서도 그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따라서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은 1904년 7월18일 제1호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이날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서울신문의 역사는 현존하는 한국의 신문중 가장 오래인 89년이 된다.그리고 잘라버린 지령 13737호를 다시 이으면 오늘 1993년 5월5일자로 제28764호가 되는 것이다
  • “육군선 인사비리 두드러진것 없다”/군 인사비리수사 이모저모

    ◎구속장성들 장군답게 혐의사실 순수히 시인 군인사비리와 관련,국방부와 각군은 조기종결방침을 굳히고 신속수사,신속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으나 파문은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공군과 해군·해병대는 3일 인사비리에 따른 후속인사를 단행,발빠르게 대응하고 있음에도 군내의 불안한 분위기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해군에서는 진급브로커 수사로 새 국면을 맞고 있으며 공군에서는 영관장교들이 인사비리처리를 둘러싸고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육군도 곧 닥칠 인사비리태풍의 강도를 점치느라 거의 일손을 놓고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는등 초긴장 상태에 있다. 이런 와중에 감사원의 율곡사업(군전력증강사업)에 대한 본격실지 감사까지 겹쳐 국방부·합참·각 군은 하루종일 부산했다. ○인사 실효성 미지수 ○…해·공군이 이날 각각 4명과 7명의 장성을 승진 또는 보직이동시킨 것은 후속인사를 통해 지휘공백을 최소화하고 인사비리파문을 빨리 잠재우려는 데 목적이 있는듯. 공군의 경우 3명의 전투비행단장이 이번 사건으로 구속됨으로써영공방어와 관련,군내에서도 심각성이 제기돼 왔으며 조종사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위해 정기인사를 앞당겨 실시했다고. 인사비리파문에서 빨리 벗어나 결속력을 다지려는 배경에서 취해 진 이번 인사의 실효성은 아직 미지수. 해·공군에서는 전직총장 구속에 따른 동요현상이 계속 감지되고 있기 때문. ○…해·공군의 인사배경 이면에는 폭발성을 안고있는 육군 인사비리수사에 앞서 타군의 파문을 먼저 진정시킬 필요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언론서 동요 부추겨” ○…해군이 인사비리와 관련,예하부대의 여론을 들어보기위해 총장직속으로 특별조사반과 여론수집팀을 운영하자 해군의 젊은 장교들은 이를 환영하는 모습. 특히 정일철,전건식두제독이 국방부 검찰부에 추가구속된데 이어 영국유학중이던 이연근제독이 급거 귀국해 조사를 받자 그동안 『진짜 처벌받아야 할 장성들 대신 억울한 선배들만 구속시킨다』며 불만을 토로해온 일부 장교들조차 진급브로커의 실상등 김종호전총장시절 인사비리가 모두 파헤쳐 질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 국방부와 공군은 최근 잇단 「공군 집단움직임」보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언론이 군의 동요를 부추기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 이날자로 대변인직에서 물러난 박재욱대변인은 하오2시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군의 비리와 부정은 당연히 정화되어야하고 이로인한 언론의 질책은 감수한다』면서 『그러나 일부 장교들의 단순한 월례정기모임을 군형법상 중죄에 해당하는 「집단행동」으로 왜국보도하는 등 군의 동요를 촉발시키는 임의성보도는 자제해 달라』고 강도높게 주문하기도. ○…권영해 국방부장관은 휴일인 2일 하오 집무실에서 김도윤기무사령관,박정근국방부 법무관리관,김영덕합동조사단장등 군수사관계자들로부터 수사진척상황을 보고받고 『파문이 확산돼 군의 안정이 저해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며 『수사역량을 총동원,조기종결하라』고 지시. ○…선망의 대상이던 「별」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철창신세를 지게된 현역장성들은 3일 현재 해군 4명,공군 5명 등 모두 9명. 장군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피의자로전락한 이들의 심정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같다』고 한 공군준장의 말로 충분히 짐작되고 있는데 수사의 진전에 따라 몇 사람이 더 이같은 심정을 느끼게 될듯. ○…구속된 장성들은 수사과정에서 대부분 「장군」답게 혐의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으며 일부장성은 수사가 끝난뒤 위관급 검찰관들에게도 『누를 끼쳐 미안하다』고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 수사관은 『장성들 중에는 수사과정에서 「검찰관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점잖게 경어를 써 대답했다』면서 『역시 장군은 장군다웠다』고 전언. ○“형 얼마나 받겠느냐” ○…1일 추가구속된 전건식해군준장(해사20기)의 경우 부인이 평소 작성해 온 가계부에 김종호 전해군총장에게 금품을 제공한 사실이 적혀 있어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는 후문.또 정개철해군정훈감도 인사철을 앞두고 은행에서 거액이 인출된 것으로 계좌추적 과정에서 드러나 증뢰사실이 확인됐다고. 한편 구속된 일부 장성들은 혐의내용을 다 털어놓고는 『형을 얼마나 받겠느냐』『연금은 받을 수 있겠느냐』고 검찰관들에게 묻기도했다는 것. ○“있을수 없는 일” 일축 ○…군인사비리를 수사함에 있어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 사정고위당국자는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그는 부패척결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인사비리 수사를 놓고 수사의 「확대」 또는 「축소」라고 마치 의도적으로 수사를 진행시키고 있는듯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가 않다고 지적하면서 『있으면 있는대로 불거지면 불거지는대로 수사하게 될것』이라고 공평무사한 수사를 강조. 그는 또 육군 인사비리 수사가 본격착수되지 않고 있는점 역시 해·공군과 균형이 맞지않는다는 지적을 염두에 둔듯 『육군의 경우 해·공군같이 특정인이 비리를 직접 고발하거나 두드러 지게 나타나는게 없었다』고 소개.
  • 직인도용 도서추천/전국 초중고에 팔아/전 공군정훈감 구속

    서울지검 조사부 이광형검사는 28일 공군참모총장 직인을 도용,특정과학도서를 공군참모총장 추천도서인 것처럼 꾸며 전국 시·도교육청과 초·중·고등학교에 판매한 전공군정훈감 강국희씨(50·예비역 대령)와 출판업자 권병하씨(58)등 2명을 공문서 위조혐의로 구속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6)

    ◎혁신창간의 주역들/“새 민족신문” 애국지사 총결집/「민족대표 33인」중 오세창 등 3명 참여/편집진인선도 “독립완성” 부합 인물로/이관구주필 주도… 몽양도 “각당 함께 혁신” 축하 8·15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11월22일 우리민족을 대변할 진실된 언론기관으로 재출발하게 된 서울신문은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던 군소신문들과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달랐다. 인쇄시설등 시설면에서의 완벽한 구비는 물론이거니와 1904년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로 창간되어 구한말 격동의 6년간과 또 일제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의 36년간등 모두 42년동안 중단없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왔기 때문에 서울신문이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당시 좌·우익 대립상황 속에서의 위상설정을 비롯,앞으로 서울신문을 이끌고 나갈 경영진과 편집진의 구성문제등은 단순한 일개 신문창간의 차원이 아니라 미군정당국의 향후 언론정책의 방향을 가늠케하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하지중장이주문 미군정청으로부터 매일신보를 새로운 신문으로 창간토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사람은 성재 이관구와 안당 하경덕 이었다.해방 2개월 후인 10월중순쯤 하지중장은 조선일보 정경부장과 조선중앙일보 주필등을 거치며 언론계 중진으로 활약했던 이관구에게 매일신보를 인수,위창 오세창을 사장에 추대하고 새로운 신문을 창간해 줄것을 요청했다.또 한편으로는 당시 하버드대 출신 철학박사로 연전교수로 있던 하경덕을 매일신보의 자산을 인수,관리하는 재산관리인으로 위촉했다. ○김동준 재정담당 대임을 맡은 이들에게 놓여진 선결과제는 신문창간에 필요한 재원확보와 대내외적으로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고 양심적인 인사들로 경영및 편집진을 구성하는 문제였다.이들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돼 나갔다.오세창선생의 서도 제자인 김무삼이 청년실업가 김동준을 이들에게 소개해왔던것.김동준은 광산업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 해방과 건국 과정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때마침 원주의 토지를 매각한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간 자본금을 쾌척할 준비가 돼있었다. 이같이 재원문제가 해결되자 간부진 인선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초대사장에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으로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 추앙받던 오세창선생을 추대하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수 없었다.이어서 역시 33인중의 한분인 권동진과 벽초 홍명희 두사람을 상징적인 고문으로 추대,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 창간의 실질주역이자 미군정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하경덕은 부사장,자본투자자 김동준은 전무에,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갖고 있던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각각 인선됐다.해방직후 「매일신보 자치위」를 결성,6백여사원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며 외부로부터의 매일신보 접수기도를 막아냈던 문화부기자 윤희순은 출판국장겸 상임감사에 선임됐다.이렇게 짜여진 초창기 경영진은 다음과 같다. ▲사장=오세창 ▲고문=권동진 홍명희 ▲부사장=하경덕 ▲전무=김동준▲상무=이원혁 조중환 ▲취체역=김무삼 ▲상임감사역=윤희순 ○편집국에 10개부 당시 81세의고령인 오세창선생은 처음에는 사장취임을 고사했다.그러나 그가 자세를 바꿔 사장취임을 결심하게 된것은 해방후 혼란상을 보이고 있던 언론계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자신의 여생을 진정한 민족 언론기관 수립에 바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그는 서울신문 창간이 순조롭게 진행,자리가 잡히게 되면 물러서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창간 4개월만에 하경덕부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났다. 한편 편집진용은 주필로 선임된 이관구의 주도로 짜여졌다.그는 창간사설에서 「해방후 민주주의적 질서수립과 독립완성」이라고 스스로 설정한 과제에 부합할 인물들을 물색했다.편집국장에는 대산 홍기문을 내정했다. 1903년 충북 괴산에서 벽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대학 문학부와 조도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귀국후 중동학교 교사로 있다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언론계에 입문한 그는 논설위원도 겸임하며 문필을 날렸으며 문자보급 캠페인등 계몽사업에 주력했다.창간 편집진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국장=홍기문 ▲편집부=서강백(부장)허현 ▲정치부=박승원(부장)김영상 ▲경제부=주련(부장) ▲사회부=최금동(부장)고흥상 양형진 이봉구 인주현 여상현 한규호 윤일모 서병곤 오쾌일 유종대 ▲문화부=홍기무(부장) 조경희 노천명 이시우 이석희 ▲체육부=이용일 이유형 ▲특집부=김명수(부장) ▲사진부=조대식(부장)이병은 권태완 ▲교정부=최일준(부장) ▲조사부=한길수(부장) 이들 편집국의 창간진용은 이주필이 창간사설에서 밝힌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않는 공정하고 또 적확한 보도」를 위해 당시 혼란의 극치에 달했던 정치적 사회적 상황하에서 민족언론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취해나갔다.또한 이주필의 「은같은 말은 김같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당시 기자들에게 철저한 기자정신으로의 무장과 발로 뛰어 확인하는 책임정신을 가르친 것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오고 있다. ○벽초3부자 참여 이들 창간진용 가운데 문화부장 홍기무는 편집국장 홍기삼의 친동생으로 벽초3부자가 서울신문 창간에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벽초는 자식 사랑이 남달라 자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버지와 대화할수 있게 했으며 당시의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부자상초(맞담배)를 허용,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자식들의 부친에 대한 효도 또한 지극해 홍기문은 월북한 부친을 따라 월북하기도 했다.벽초는 1948년 4월 과도입법의원 신분으로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남한대표로 참석했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으며 홍기삼은 같은해 11월 조선일보 전무로 있다가 아버지를 찾아 월북했다. 새로운 각오와 불타는 사명감에서 출발된 서울신문을 보는 외부의 기대도 컸다.당시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나는 서울신문이 조선의 한 독립신문으로 호평받을 것을 확신한다』고 축하인사를 보내왔다.또 여운형은 『덕망 높은 신간부를 맞이하여 제호까지 고쳐 명실이 함께 혁신한 자태로 출발한다는 것은 우리 조선의 앞날을 위해 가장 경축할 일』이라고 치하했다.
  • 「하나회 정리」 이은 군정상화 수순/군인사 비리 사정의지·배경

    ◎“뇌물관행이 전투력 손상” 판단/전례없는 대규모 숙청 가능성/인사고과 복수관리 등 제도개선 검토 군인사를 둘러싼 뇌물수수 수사는 육군수뇌부에대한 「통치권차원의 인사」에서 이미 예견됐던 일이라고 할 수있다.군인사비리사정이 김종호전해참총장의 뇌물수수사건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됐다기 보다는 하나회제거에 이은 군정상화를 위한 2단계 작업으로 보여진다. 새 문민정부는 군인대통령시대에 고착화된 군의 부패가 기본적으로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인식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진급등 각종 인사를 둘러싸고 고액의 뇌물이 관행화된 상황에서 고급장교들이 과연 군무에 충실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에서 사정작업이 진행되는 듯한 인상이다.때문에 이작업이 부패장교의 대대적인 숙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않다. SBS에서 김전총장건이 보도된 22일 아침에 이미 청와대 고위당국자들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이들은 『SBS에서 큰 사건이 터질것이다』라고 설명했으며 이 문제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임을 예고했었다.이러한 청와대의 움직임은 군사정이 우발적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기간 계획된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김전총장건은 그가 현직에있을 당시 비리가 적발돼 당시 노태우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당시 노대통령은 어떤 연유에선가 이를 보고받고도 불문에 부쳤다는 후문이다.당시 정부가 정통성부족분을 군의 「정권에대한 충성」에서 상당부문 메우고 있었고 거의 관행화되다시피해 문제삼기가 어려웠을 것이란 점에서 불문의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새정부는 군에 더 이상 정권안보를 의존할 필요가 없고,개혁에 대한 높은 국민적지지가 군에 대해서도 과감한 사정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다.23일현재 최소한 육군과 해군에서 군수사당국에 의한 인사비리 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이같은 광범위한 군사정은 전례가 없는 것이고 그여파도 상당할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군인사를 둘러싼 금품수수가 관행화돼있고,공공연한 비밀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사정결과가 없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현해군고위직 관련 비리조사가 증거를 찾지 못해 일단무혐의 처리된데서도 드러나듯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않는한 사실상 증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따라서 군당국의 조사도 혐의가 있는 사람 모두를 한번쯤 거른다는 일괄사정 형식보다는 제보가 있는 경우로 한정될 것으로 여겨진다. 청와대에는 군인사비리에 대한 제보가 줄을 잇고 있으나 대부분 익명으로 제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정부의 군에대한 사정의지가 이번 김전총장사건으로 확인된 이상 새로운 제보들이 줄을 이을 가능성도 크다는게 사정관계자들의 기대이고 전망이다. 정부는 군의 인사를 둘러싼 비리를 어떤 방식을 쓰더라도 제거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정부가 하나회를 군의 단합을 해치는 종양으로 파악했다면 인사비리는 군의 전투력을 사실상 상실시킨다는 점에서 더 시급히 도려내야할 환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국방부는 최근 2∼3년부터 전군의 진급심사에서 공정성·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3심제를 도입,시행하고 있으나 비리가 개입될 소지가 여전히 많다는 지적에 따라 근원적인 개선책을 강구할 예정이다.특히 진급에서 지휘관 한사람의 인사고과평점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급대상자들의 인사고과를 복수로 관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나카소네와 일 원자력/박군철 서울대교수·핵공학(굄돌)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원자력대국이다.이미 1980년대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완전 자립하였고 이제는 개량형 원전을 개발하고 있다.또 1970년대에 고속증식로와 재처리시설을 갖추었으며 농축시설도 건설하였다.패전직후 미군정의 원자력연구금지와 1950년대 극렬한 반핵운동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에 공업기술의 기초가 튼튼했던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 정치인의 투철한 신념과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바로 나카소네 전수상이다. 그는 해군장교로 근무중 원폭투하를 목격했고 이때부터 원자력에 큰 관심을 갖고 정치권에서 원자력개발을 주도해왔다.그래서 약관의 중의원으로서 미·일 강화조약에 원자력연구 금지조항을 삽입시키지 않도록 했으며 1954년 일본 최초 원자력예산으로 2억5천만엔을 통과시켜 원자력개발 추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그후 통산성 장관으로 전원3법을 제정하여 연구개발 재원을 확보하였다.1980년대에는 수상으로 미·일원자력협정 개정을 추진하여 국제적 제약을극복하였고 이에 따라 재처리및 고속증식로를 개발함으로써 자주적 핵연료주기를 확보하였다. 물론 나카소네 개인의 공적을 치하하고자 함은 추호도 아니지만 그를 통해 어떻게 일본은 이렇게 이른 시일내 기술자립을 이루었고 미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가,그리고 우리의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우선은 기술자립을 위한 꾸준하고 일관된 국가정책이다.그에 비해 우리는 원자력발전소건설에만 급급한 나머지 기술자립에 대한 기본적이고 일관된 국가정책이 미흡하였다.다음은 원자력이용의 투명성과 외교역량이다.일본은 평화이용3원칙(공개·자주·민주)을 제정하여 이를 배경으로 꾸준히 미국을 설득하여 신뢰성을 확보함으로써 자주적 핵연료주기의 안정적 추진을 가능케하였다.이는 우리의 비핵화 선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카소네와 일본의 원자력발전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5)

    ◎광복과 함께 새출발/오욕의 역사 청산… 공공지로 재탄생/「서울신문」으로 제호바꿔 11월22일 창간/지령 13738호… 대한매일신보정통성 계승/사장 오세창·주필 이관영 등 새 진용 포진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은 한국언론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제도적 탄압장치였던 출판법등 언론계 악법이 미군정에 의해 폐기된데 이어 허가제였던 신문 출판물이 등록제로 바뀌어 갖가지 출판물과 신문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간부진 사표 수리 일제치하 36년동안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이하 매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개편작업은 1945년9월8일 한반도 진주후 이남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던 미군정청이 해방전 영업국장이던 이상철 임시관리인으로 임명(10월2일),매신의 간부중 일부를 개편토록하는 조치로부터 시작됐다.매신처리 실무를 위임받은 그는 10월9일 매신중역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한바 있는 사장 이성근과 상무 정인익의 사표를 정식 수리하는 한편 10월25일 신문사의 명칭변경이며 새중역진 선임문제등 주요사항을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신의 자치위원회는 신문사의 처리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자치위원회란 9월23일부터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매신의 운영을 장악,신문을 만들어온 편집국과 공무국등 사원 6백명이 결성한 단체였다.위원장은 문화부기자 윤희순으로 적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했다.자치위는 10월23일자 지면에 「매신은 어디로」라는 성명을 통해 이 신문은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의 소유가 절대로 될수는 없고 공정한 민중의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견해를 피력했다.이는 자치위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보도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할것』을 앞서 선언했던것과 일관된 논리였다. 자치위의 이러한 반응속에 주총은 예정대로 10월25일 개최됐다.주총에서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됐고 부사장은 이상협,전무취체역 김형원,상무 이상철,주필겸 편집국장 이선근등 간부진용이 결정됐다.그러나 자치위의 강력한 반대의사에 부딪혔다. 주총의 결정이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것이 표면적 주장이었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양측의 막후교섭이 시도됐으나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이에따라 개편실무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사퇴하게 됐고 매신은 표류할수밖에 없었다. 매신이 자치위와 개편실무자 사이에 이처럼 표류하고 있을 무렵 매신의 처리문제는 국내 각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언론계 전체의 집중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단순한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차제에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이 신문사를 접수하려는 직·간접의 암중모색이 여러차례 시도된것이다.천도교세력을 뒤에 업은 공진항이 10월초 매신접수를 시도한데 이어 동아와 조선 양지가 매신인수를 한차례씩 꾀한바 있다. ○개편안 싸고 대립 이러한 상황속에 놓이게된 매신에 대해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청은 새로운 갈래의 매신개편작업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인 중재를 결심하게 된다.11월10일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이관구에게 「공정한 언론을 펴는 참다운 신문」을 만들도록 부탁하기에 이른다. 매신에 대한 정간명령은 자치위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그래서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의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채 일단 한발 물러서게 됐다.증폭된 갈등속에 난항을 거듭하던 매신의 개편작업은 이로써 순조롭게 진행하게 됐다. 매신개편의 대권을 위임받은 이관구는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있는 인사들로 경영 편집진용을 구성하는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우선 사장에 위창 오세창을 추대했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3·1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서 그의사회적 덕망과 이미지는 새롭게 선보일 서울신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 홍명희를 상징적인 고문의 위치에 영입함으로써 그 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이관구와 함께 매신개편작업에 참여한 하경덕이 부사장에 내정됐다.그는 저명한 교육자요 사회학자로서의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탄력있는 자유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중후하고 사려깊은 논조를 감당해 나갈 주필에는 이관구가 선임됐다.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받고있는 민족주의자와 좌파계열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참여한바있어 좌우 어느 편에서도 무난히 받아들여질수 있는 인물이었다.특히 해방전 동아와 조선에서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논객으로서의 경력은 금상첨화였다.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각부 데스크에 앉히고 이를 지휘할 편집국장에는 어문학계의 권위자인 홍기문이 내정됐다. 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실업가 김동준이 전무에 내정,안정된 신문운영을 기할수 있는 진용이 구성됐다.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끝에 받아들여 「서울신문」으로 확정했다.제호의 글씨는 서예가이자 취체역인 김무삼이 썼다. 그리고 매신으로부터의 인수재산 확인도 마무리지어졌다. 우선 자치위산하에 있던 사원 6백명의 인원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로 했다.인수받은 재산과 시설은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연건평 1천8백30여평 규모의 4층 콘크리트 건물인 구사옥과 그 부속건물을 비롯,부산등 지방에 산재해 있던 당시 35만3천원 상당의 부동산과 독일제 알버트윤전기 4대등 최우수 인쇄설비 일체,지사 지국의 배급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이 규모는 신문사로서 해방전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개편,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모든 준비작업은 11월21일 하오2시 5층 옥상에서 오세창초대사장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매듭을 지었다.그리고 이튿날인 22일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지면을 이땅에 드러냈다.발행일자는 1945년11월23일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의 열도를 반영하듯 미군정장관 아놀드를 비롯,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국민당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수석총무 송진우등의 인사들이 언론정세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경의와 기대를 보내오는 가운데 혁신된 속간호를 내놓게 된것이다. 『「서울신문」으로 「매신」이 경생』이라는 5단 크기의 컷(1면 중앙)과 함께 속간 첫호의 모습을 선뵌 서울신문의 이날짜 지령은 제13738호로 기록돼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서 서울신문의 계보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험가능성(사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권력세습이 마무리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북한최고인민회의는 9일 김일성이 갖고있는 서열2위의 「조선국방위원회위원장직」에 아들 김정일을 전격 추대했다.북한의 권력세습이 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황전개다.김정일의 북한통치권 사실상 인수라 할수있다.이제 김정일이 계승해야할 김일성의 남은 직책은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직 뿐이다. 국방위원장은 인민군뿐아니라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계통의 군은 물론 노농적위대 청년근위대등을 포함하는 북한무력 전반에대한 군정·군령의 통수권일체를 한손에 쥐는 직책이다.폭력을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삼는 북한으로서는 통치권의 핵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권력이며 그것을 인수했다는 것은 사실상 북한의 통치권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보면서 그것이 남북관계등 한반도정세 전개에 미칠 영향을 우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김정일은 호전적이며 예측불허의 성격인 것으로 알려져있다.이번 핵확산금지조약탈퇴도 그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김일성과는 달리 나이도 젊고 6·25남침실패의 경험도 없다.그런 점에서 그는 국제적인 대북압력이 가중되고 긴장이 고조되면 자위적 조치라는 이름의 강경대응으로 북한주민과 외부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모험에 나설지도 모른다.특히 그는 권력세습에 대한 세계적 주목을 피하기위해 의도적인 긴장을 조성하려들 공산도 크다.우리는 김정일북한의 군사모험주의를 포함하는 일체의 도발가능성에 대해 철저한 경계와 대비를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론 북한도 결국 개방·개혁을 거부할수없는 시대상황을 감안할때 김정일시대 공식개막에 맞춘 대외·대남정책의 혁명적 전환을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그동안 북한의 대외정책상의 무리가 권력세습의 목적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는 시각이다.자신은 물론 측근세력대부분이 정규교육을 받은 혁명2세대의 테크노크랫이란 점을 감안한 희망적 관측이기도하다.그런 가능성도 주목하면서 그것을 유도하기 위한 배려와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보면서 북한정권의 정통성에 다시한번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국민의 동의를 기초로 하지않는 권력의 자의적 승계가 그것도 봉건 왕조식의 「부자세습」이 사회주의혁명의 북한에서 이루어지는 모순을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지금이라도 세계적 웃음거리인 권력세습을 청산하고 자유민주총선을 통한 통치권자의 선택을 실시해야 한다.그것이 진정 북한을 위하는 길이요 남북한의 통일·안보는 물론 공존·공영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요 지름길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 방사능구름 제트기류 타면/극동지역까지 영향/일지

    【도쿄=이창순특파원】 시베리아 비밀군사도시 톰스크­7의 핵폐기물저장탱크 폭발사고로 유출된 방사능을 함유하고 있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북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이 방사능 구름이 제트기류를 탈 경우 일본을 비롯한 극동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도쿄신문이 8일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러시아공군정보를 인용한 독립국가연합(CIS)TV보도에 의하면 방사능구름은 약 3천m 고도를 유지하며 시속 36㎞의 빠른 속도로 북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이 확인됐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육군대장급 내일 인사/중장·소장급도 월내 마무리

    ◎정기인사 4·10월로 앞당겨 권영해국방부장관은 6일 통상 6월과 12월로 돼있는 군정기인사를 앞으로는 4월과 10월로 앞당겨 실시하며 올해의 경우 8일 군사령관·합참1차장등 육군 대장급인사를 단행한뒤 나머지 군단장(중장)·사단장(소장)급 후속인사를 이달말까지 마무리짓겠다고 밝혔다. 권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육군 대장급의 경우 1·2·3군 사령관중 2명과 현재 공석중인 합참1차장이 그 대상이며 8일 열리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 재가를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권장관은 이와함께 『이번 인사는 보직임기가 만료된 지휘관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돼 통상적인 정기인사의 폭을 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고 『군단장과 사단장급의 이동및 승진인사는 이후 이달말까지 순차적으로 단행될 것이지만 육군을 제외한 해·공군등 타군의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사령관 가운데는 91년2월에 임명된 2군사령관 김연각대장(육사17기)과 3군사령관 구창회대장(〃18기)이 물러날 것으로 군관계자들은 관측하고 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노백린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항일구국” 기개 편 한말 마지막 무인/정미년 군대해산뒤 독립운동 투신/미서 비행단 조직 조종사 40명 양성/“말타고 남대문 입성” 한남기고 상해서 숨져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이등박문은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한국측 고관들을 초청,큰 연회를 주최했다. 연회장에는 「을사오적」 이완용 송병준등도 참석해 일제 앞잡이들과 잔을 부딪치며 간신의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연회장의 잔잔한 연주를 깨뜨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참석자들을 긴장시켰다. 『워리! 워리!』 이완용등 역신들 바로 코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들 앞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6척 장신에 기골도 장대한 사나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을사오적 등 능멸 오적들은 물론 이등박문등도 개 꼬리 감추듯 숨을 죽이고,상황 전개에 눈치를 살폈다. 자신들을 「나라를 빼앗고 팔아먹은 개같은 놈들」로 매도하는데도,안절부절 못하는 형국이었다. 「개들」이 모인 연회장은 「개판」이 된 채 끝나고말았다. 일제와 그 주구들의 모임을 이렇게 휘저은 사나이는 음식상에 침을 탁! 뱉은 뒤 뚜벅뚜벅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4월의 독립운동가­이 당찬 사나이는 누구인가. 노백린선생은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시골선비 노병균의 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이 커 성격이 호탕했으나 마음은 침착했다. 부친은 아들 백린이 장차 무인이 될 것으로 예견하며 내심 그럴 바에야 지장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학문연마에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황해 송화서 출생 웅지를 품고 서울에 온 선생은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의 주창에 따라 세워진 대한제국정부 관비생으로 뽑혀 각도 수재 1백2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간다. 도쿄 경응의숙­성성학교를 거친뒤 일육사 1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마친 선생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5세 열혈청년으로 귀국한 선생은 당시 원솔부 회계국총장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육군참위에 임명된 이후 한국무관학교 교관­노일전쟁 참관­육군무관학교장­헌병대장­육군연성학교장등을 거친다. 무인으로서의 기백과 대쪽 같은 성품으로 나라가 쇠퇴하는 과정에서,선생이 앞서 소개한 일화처럼 울분을 터뜨린 것은 이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독립유공자 고 한철수선생 회고담) 을사오조약이 체결된 2년후인 1907년 8월1일 한국군대는 해산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최후의 무인 노백린도 군복을 벗었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신민회 활동 틈새에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가 광무학당을 설립,교사가 되어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에는 김구 최명식 김홍량등과 해서교육총회를 만들어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선각자들의 이같은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목조르기를 시작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선생도 변장을 했다.「황금에 미친 놈」처럼 금광사업에 손을 대는 척도 하고,서울에선 피혁상회·양화점등을 경영하며 등신처럼 굴었다. 『내가 진정한 무인이라면 왜놈들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 선생의 슬픔과 안타까움은차라리 고통이었다.그만은 유독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15년 선생은 미국 망명길을 택한다.이후 8년여동안 미국에서의 활동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투조종사 양성과 항일비행전단의 조직에 전념한 것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조종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엉뚱하기까지 했으나,평소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들자!』고 호언한 선생은 그같은 불가능한 과업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어려운 재정여건 아래서도 5대의 값비싼 연습비행기를 확보하고 40여명의 조종사를 배출시킨 것은,당시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군사상 길이 빛날 일이라 하겠다. 노백린의 말년은 그러나 실의와 좌절로 얼룩져 갔다. 그것은 1919년 4월23일 서울에서 치러진 국민대회와,이어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의 참여에서 비롯됐다. ○동경 공습이 목표 상해임정까지 이어진 한성임정의 법통 속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장본인은 여러 독립지사들과 갈등을 빚은 이승만의 등장이다. 대통령 이승만 임정하에서 군무부총장이라는 각료직을 맡은노백린은 자주 의견충돌을 했다. 그때마다 노백린은 『나는 이승만의 군무총장이 아니고 한성정부의 군무총장이다』는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쟁이 계속되자 선생은 말술을 마시며 『육군정복에 말타고 남대문에 입성하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선생은 상해시내에서 교통사고를 입은뒤 1926년 1월22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지난 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군부개혁 잇단 전격인사/수방·특전사령관 경질배경

    ◎비「하나회」 야전지휘관 출신 발탁/“정치색 배제”­본격 정지작업 예고 2일 상오 단행된 국군의 핵심부대인 수방사 및 특전사의 사령관 경질은 지난달 8일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사령관의 전격 교체와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번 두 사령관의 경질로 「수도권 3총사부대」라 할 수 있는 기무사·수방사·특전사 사령관이 모두 교체됐다. 이는 국군통수권자인 김영삼대통령이 오는 6월 단행할 상반기 군 정기인사의 성격과 관련지어 볼때 시사하는 바가 하나 둘이 아니다. 이른바 「군 개혁 작업의 본격화」「군 정치색의 탈색 가시화」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당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의 경질이 본격적인 군부개편에 앞선 최소한의 대군정지작업이라는 성격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번 두 사령관의 교체는 한걸음 더 나아가 개혁을 위한 대군정지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에 기용된 도일규수방사령관(육사20기)과 장창창특전사령관(◎ 21기)이 「3·8인사조치」때 들어온김동진육참총장 김도윤기무사령관등처럼 비정치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후임 두 사령관은 모두 군에서는 한직으로 여겨지고 있는 한미연합사부참모장과 육본동원참모부에서 전격 발탁된 비「하나회」출신들로 30년간의 군생활동안 순수하게 「야전 생활」만 해왔다.이 때문에 이번 인사를 그동안 군부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해 온 군내 「하나회」인맥배제를 보다 가시화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육사생도시절부터 모범생인 도수방사령관은 서울출신으로 지난해 6월과 12월 중장승진인사에서 까닭없이 누락됐으며 충북 영동출신인 장특전사령관도 우수한 지휘관이나 지금까지 별로 「빛」을 보지 못해왔다. 이에반해 통상 2년인 임기를 9개월여 남기고 보직해임된 안병호전수방사령관(육사20기)는 「하나회」의 핵심인물이며 김형선전특전사령관(〃 19기)는 노태우전대통령의 군인맥이랄 수 있는 「9·9(9사단·9공수단)인맥」으로 통해왔었다. 군 관계자들은 수방사·특전사의 전격 교체는 『김대통령이 강조해 온 「군의 정치적 중립의지」를 다시한번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들은 또 「3·8인사조치」에 이어 이번 인사로 인해 군통수권자의 친위성격이 강했던 수방사·특전사·기무사의 개혁속 군 정치중립작업은 본격화됐다고 해석하면서 6월과 12월의 군정기인사에서도 이같은 기조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군인사가 개편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영삼정부의 과거정부와의 차별화 정책으로 군인맥의 5·6공거세로 실질적인 「병권」을 장악하겠다는 복안으로도 보고 있어 주목된다. 이번 인사의 이면이 무엇이든간에 군 수뇌부는 앞으로도 당분간 군 개혁을 위한 대소의 내부진통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게 일반적이다.
  • “변호사 과다수임료 무효/기준초과액 안줘도된다”/서울민사지법 판결

    과다한 변호사의 지나친 수임료는 자유로운 계약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무효라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민사지법 합의19부(재판장 안성회부장판사)는 1일 소송수행대가로 6억7천5백만원을 약속받은 이일재변호사(64)가 소송의뢰인 최홍영씨(서울 마포구 염리동)등 2명을 상대로 낸 약정금 청구소송에서 『지나치게 높은 성공사례금과 소송수임료는 무효』라며 『최씨는 이변호사에게 5천만원만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변호사에 대한 성공보수금은 승소에 대한 사례의 성격으로 수임계약 경위와 난이도 등에 비추어 지나치게 많다면 신의성실 원칙에 어긋나 무효이다』며 『서울 변호사회의 보수기준에 비추어 성공보수금은 5천만원이 적정하다』고 밝혔다. 이변호사는 군정법령에 의해 국가에 징발당한 시가 20억2천만원 상당의 부동산을 대상으로 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청구소송등 2건의 민사소송을 맡으면서 「승소하면 토지매매가의 3분의1을 받는다」는 계약을 최씨등과 맺었으나 1심재판에서 일부 승소판결에 그친데 불만을 품은 최씨가 성공보수금을 주지않자 소송을 냈었다.
  • 봉건독재자/개혁정치가/대원군 상반된 평가

    ◎사후 1세기… 근대사연간 「…한국현대사」서 쟁점화/비판/대외적 위기 모면위해 쇄국정책/긍정/명 신종 모신 묘 폐쇄 등 자주정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고루하고 완고한 봉건적 폭군·독재자인가,과감한 실천력을 가진 자주적 개혁정치가인가.사후 1세기가 가까운 지금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과 비판이 엇갈리는 이중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즉 대외정책면에서 쇄국책은 제국주의열강의 침략을 물리쳐 자주성을 고취시켰으나 내치면에서는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한국근대사연구소가 최근 펴낸 「쟁점 한국근현대사」창간호에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대한 역사학계의 이같은 상반된 견해를 쟁점화,그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해 내는 새로운 인물연구를 시도했다.홍순창전영남대 사학과교수는 개혁정치가의 시각에서,성대경성균관대 사학과교수의 경우 보수정치가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홍전교수는 「대원군 이하응 그는 개혁정치가였다」에서 격동기였던 한말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주역으로 등장했던 대원군집정의 당위성과 임오군란으로 인해 재집권한 배경,청군으로 납치된뒤의 세론등을 분석한뒤 긍정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우선 대원군집권의 역사적 상황으로 사교로 규정된 천주교의 만연,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왕도정치의 위기,삼정의 문란등 정당성을 논거했다.특히 서원철폐시 명나라 신종을 모신 화양동 만동묘를 폐쇠한 것은 대원군이 종래 중국에 대한 사대정치로부터 자주정치에의 일대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강압적인 개혁정치는 『흔미속에서 갈길을 잃은 한말의 우리 민족을 영도한 지도자상』으로 보았다.또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단순한 쇄국책이 아니라 위정척사론을 사상적 배경으로한 쇄국양이정책으로 한민족의 자존을 위한 반침략적 애국애족사상과 결부돼 결국 한말의 민족정신으로 고양됐다』고 평했다.임오군란이후 대원군의 재등장은 국내정치의 부패를 일소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략적 행동에 단호하게 대처한 내외책 또한 국민에게 용기를 주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한 성공작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반해 성교수는 대원군정권 성립의 역사적 의의는 『봉건지배자 즉 양반관료지주들이 그들의 경제적 신분적 기반인 봉건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독재자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대원군집정후 최초,최대의 과업이 왕조체제를 강화하고 왕권의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일이었음을 그 예로 들었다.그리고 비변사폐지및 의정부기능회복과 삼군부의 부활,종친세력의 대거 중용등도 자신의 지지세력포섭과 장악기도의 맥락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주장이다.또한 임술민란직후 나타난 민중의 변혁에네르기를 새로운 사회건설로 영도할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즉 대원군정권은 『본질적으로 봉건귀족양반의 계급적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쇄국양이정책 또한 대외적 위기에 몰린 대원군정권이 봉건제도수호를 위해 위정척사사상을 끌어 들여 전개한 반역사적 보수정권』으로 규정했다.
  • 황병길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혼춘서 항일투쟁·독립시위 주도/20세때 노령으로 망명… 일 수비대 습격·폭파/대한국민회의 설립 등 일제에 조직적 항거/“수배인물 제1호” 35세 짧은 생애 중국 혼춘지역의 3·1운동지도자 황병길선생은 국민 일반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선생은 1885년4월15일 함북 경원군 양하면에서 출생,20세까지 고향에서 생활했다.1904년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가 급격하게 그 세력을 팽창시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행,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노영 연추지역으로 망명했다. ○함북 경원서 출생 1905년 을사5조약이 맺어지기 전후해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해외로 망명해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생은 혼춘지역 일대에서 1908년 노일전쟁전의 우리나라 간도관이사인 이범윤의 사포대에 참가했으며 안중근·최재형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속해 두만강을 건너 회령·온성·경원지방을 여러차례 공략했다. 특히 경원군 신하산 주둔 일군 수비대를 습격했을 때는 혼자서 14명을 사살하는등 큰 전과를 거두어 「혼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노종환·양재구와 함께 거사계획을 수립,혼춘의 전시민이 자진철시하는 가운데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위군중 5천여명으로 3·1독립선언 축하민중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5천여명이나 되는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가행진을 했는데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질서정연하고 평화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다. 이어 3월30일에는 혼춘현 한덕자에서,4월1일엔 탑도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는등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과시했다. 1919년3월말에는 대한국민회의를 설립했고 그해 9월엔 혼춘거주 여성들로 하여금 혼춘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단지동맹」을 맺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조직들을 활용,군자금 모금과 전상병자의 치료,구제사업등을 전개하는등 총체적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혼춘호랑이” 별명 또한 「급진단」을 영도하면서 노영역에서 무기를 확보하는데 힘써 소총 1백3자루 ,탄환 5천발,군자금 85만6천여루블을 조달하기도 했다. 그뿐아니라 군정사후원회 숭례향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20년에는 군무부장이 되어 국내로 진격,고건원 용당 경흥 일대에서 왜정기관을 폭파하고 왜적을 주살하는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같이 선생의 독립운동이 치열해지자 일제 영사관측은 『모든 반일투쟁이 황병길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며 『그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니 체포에 총력을 집중하라』고 전일경에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일제에 있어 「목의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앞잡이를 총동원,선생의 은신처를 찾아 헤매다가 토문사 북쪽 숲속에 있는 초막을 발견하고 포위망을 압축시켰다. 이날은 억수같은 폭우가 내렸는데 선생은 칠흑같은 어둠을 이용,포위망을 뚫고 어느 농가에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몸은 이미 쇠약해져 급성폐렴까지 얻게 되었다.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같은 급보를 비밀리에 전해 들은 부인 김숙경씨는 70리 길을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나 깊은 산속에서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죽음을 감지한 선생은 유언을 남겼다. ○지난해 유해 봉환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굳세게 싸우시오』 1920년6월1일.선생의 나이 고작 35세였다.너무나 짧은 일생이었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72년.지금도 혼춘지방에서는 선생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으나 국내에는 아는이 드문게 현실이다. 중국과의 수교에 따라 유가족의 희망으로 혼춘 연통립자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는 모국으로 봉환되었고 지난해 12월10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선생에게는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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