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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영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1920년대 만주항일투쟁 주도/청산리대첩뒤 10개 독립단체 통합/대한독립군단 창설… 초대 참모장 역임 무장독립단체의 통합체인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을 역임한 백우 이장령선생은 1881년 5월20일 충남 천원군 목천면 서리에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했으나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군해산령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해외에서의 조국광복투쟁을 결심하고 1907년 11월20일 중국 동북지방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1905년 을사조약후 최초의 국외망명자가 된 것이다. ○충남 천안서 출생 선생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삼원보에 정착한 이회영형제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선생은 이씨형제와 신흥강습소를 창설하고 교관이 돼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헌신한다.1920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학교가 폐교될 때 까지 2천1백여명의 독립군이 배출된 데는 선생의 공이 컸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신규식·김헌·김성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군정부(일명 대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임명됐다.대한군정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북로군정서로 개칭된다. 북로군정서 소속 군은 북간도지방의 군사주력부대로서 군인을 모집,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여 임전태세를 확립하는 한편 곳곳에 정보연락기관을 설치했으며 근거지는 왕청현 십리평 일대의 30여리에 걸친 심림지대였다. 북로군정서 군은 소련령의 블라디보스토크등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입,무장하고 전투훈련을 계속했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계획하고 중국에 은근한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중일 양국은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영토내에 독립군 대부대가 무장하고 일본에 항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당국에서 독립군을 보호하는 결과이므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일본의 내정간섭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싸울 능력이 없었던 중국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독립군에게는 산중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북로군정서 군은 좀 더 실력이 증강될 때 까지는 일본군과의 정면전쟁은 피할 생각이었다.그러나 1920년 9월20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이동준비를 서두르던 중 예기지 않았던 훈춘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조종을 받은 마적 4백여명이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일본영사관을 일부러 습격하고 일경간부 가족 부녀자 9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일본은 이 자작극을 구실삼아 중국당국의 양해도 받지 않고 연대병력을 전격적으로 출동시켜 한국인 부락을 모조리 습격했다.일본군은 북로군정서 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협공작전을 폈으나 북로군정서 군이 이를 인지,서로군정서와 합류하고 백두산지역에 새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안도현으로의 이동을 개시한다.그러나 일군의 집요한 작전으로 일전을 불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25㎞에 달하는 긴 터널과 같은 계곡으로 좌우에는 울창한 삼림지대로 겨우 인마통행만이 가능할 정도였다. ○1천2백명 사살 북로군정서 군은 1제대장 김좌진장군과 2제대장 이범석장군의 지휘로 요충지에 군사를 매복시키는등 전투준비를 완료했다.1920년 10월20일 상오 9시 안천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지형정찰도 하지 않고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에 들어서자 독립군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패퇴시켰다.일본군 본대까지 달려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포진하고 있는 독립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20일부터 25일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투가 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이다.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1천2백여명이 사살됐으나 독립군은 불과 1백여명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 군의 주도아래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정의군정사등 10개 독립군단체는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된다.선생은 이 단체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됐는데 병력은 3천5백명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후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고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소련영토로 이동,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있던 공산계열인 소련군과「동상이몽」식이었으나 한동안 손을 잡는다.속뜻이 달라 소련군과 갈등관계를 유지하던 독립군은 소련과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협상을 벌이던 일본이 『소련영토에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상 적절치 못하다』는 근질긴 항의때문에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통고받는다. 1921년 6월28일 소련군은 통보를 무시한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독립군은 이 싸움에서 3백여명이 전사하고 2백50여명이 행방불명이 되는등 큰 피해를 입었다.흑하사변으로 불리는 이 참변후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했다. ○건국훈장 추서 대한독립군단 재편으로 1924년 3월 대한독립군정서군이 조직되자 선생은 다시 적극 참여했으며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열어 독립단체가 통합되려 할 때 윤각과 함께 참가,회의의 주비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신민부를 조직했고 신민부의 참의원으로 선임됐다. 일제의 압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더욱 가혹해졌으며 선생이 있던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활동의 폭도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평생조국광복을 위해 같이 싸웠던 김좌진이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하면서 독립운동무대를 상해로 옮기려던 선생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피살되는 불운을 맞게 된다.선생의 나이 51세였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이진삼씨엔 2년구형/정보사민간테러관련

    서울지검 공안1부 천성관검사는 6일 군정보사 민간인 테러사건과 관련,구속·기소된 전 정보사령관 이진삼피고인(56·전체육청소년부장관)에게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죄를 적용,징역 2년을 구형했다. 서울형사지법 조병현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논고문을 통해 『피고인은 폭행에 관한 사전보고나 지시 등 혐의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있으나 전정보사 3처장 한진구씨(52·수배중)의 군검찰부에서의 진술과 당시 지휘체계등으로 미뤄 개입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이번 사건은 과거 군사정권 아래서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테러 사건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비난받아 마땅하고 특히 피고인은 당시 정보사령관으로 엄벌해야 하지만,사건이 발생한 지 7년이 지났고 피해자인 양순직의원의 피해정도가 경미한 점 등을 참작,이같이 구형한다』고 말했다.
  • 이제 법제도 관행 의식의 개혁으로(사설)

    순수 문민출신 김영삼대통령의 새 정부가 닻을 올린지 오늘로 꼭 반년이 된다.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결단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기간이다.변화와 개혁의 틀을 마련한 뜻깊은 기간이기도 하다.『십년이 지난것 같다』는 대통령의 말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체감되는 변화는 혁명적이라고 할만하다.입장과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큰 줄기로 볼때 변화와 개혁의 활주로를 달려 세계속의 선진국 건설을 향해 이육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같은」 개혁 6개월 우리는 개혁6개월의 이 시점에서 앞으로 계속적이고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 변화의 역사적 의미를 따져보고 차분히 개혁을 지속시켜 나갈 새로운 각오를 모두가 다져야 한다고 믿는다. 김대통령은 취임초 권위주의 잔재의 표본같은 이른바 안가를 헐었다.그 자리에는 시민공원이 세워졌다.그리고 일제식민잔재의 상징인 구총독부건물도 헐고 새로운 중앙박물관을 짓도록 했다.이들 사례는 낡은 형식과 내용을 깨고 새로운 틀과 내용을 채워넣자는 개혁방향의 표상이다.잘못된 헌정사와 민주사를 청산하는 것은 올바른 미래역사를 건설하는 바탕이 된다. 군을 비롯한 인사개혁과 부정부패척결을 위한 사정 그리고 정경유착의 단절선언 역시 같은 맥락이다.「군정종식」은 이미 완료되었다.그토록 어렵게만 보였던 한 세대간의 권위주의시대를 청산하는 일이 불과 반년만에 이루어지고 선진국수준의 깨끗한 문민정치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과거같으면 수차의 정치불안과 헌정위기를 겪었을 청산과정이 안정속에서 이루어졌음은 선진적 정치가 정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6개월전만 해도 과연 민간인출신 대통령이 문민화의 시대적 과제를 감당할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그리고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 정치비용의 조달을 위해서도 개혁을 제대로 할것인가 하는 불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이런 불신과 우려는 옛날 일이 되고 있다. ○깨끗한 정치 투명한 사회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한 대통령의 말은 정치적으로 그냥 해본 말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중단없는 개혁이라는 다짐도 마찬가지다.김대통령에 관한한,도대체 옛날 상식이 통하지가 않는 것이다.재산공개가 그랬고 금융실명제의 전격실시에 이르러서는 대통령의 개혁의지에 모두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역사상 리더십에 밀려서 마지못해 하는 개혁은 실패하고 진정으로 원해서 이끌어가는 개혁은 성공한 예가 많다.그런 점에서 문민정부의 개혁6개월은 적어도 비전과 신념을 가진 대통령과 절대다수의 국민지지가 결합함으로써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된 기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지금까지의 개혁은 대통령이 혼자 하는 인치였다고 한다.대통령의 과단성과 파격성에 의한 전격적 추진방식 때문이라는 분석이다.개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의 필요도 있었다.이제 대통령의 개혁의지와 노선은 분명해졌다.법과 제도의 개혁,모든 관행과 의식과 생활의 개혁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대통령의 강력한 단독드라이브에 모두가 동참해야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금융실명제의 실시가 그것을 말해준다.그것은 깨끗한 정치,정의롭고 투명한 선진경제사회를 만드는 공정한 틀이며 의식과 관행 그리고 제도개혁의 총체적 시험대다.그러나 실명제에 대한 80%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의 불안감도 없지 않다.개혁으로 피해를 보는 방해세력이 개발하는 교묘한 역선전 논리 때문일 수도 있다.개혁의 총론적 명분에는 찬성하면서도 각론의 이해관계에는 저항하는 모순된 심리때문인지도 모른다.대통령이 너무나 앞서가기 때문에 따라잡기 어려워서일 수도 있다. ○미래지향 신바람의 동참 우리가 보기에 적어도 대통령을 지지해온 중산층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대통령의 개혁은 과감하고 획기적인 내용이지만 안정희구세력의 뜻을 모아 상식과 합리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다.한마디로 안정속의 개혁이다.그러므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안정희구세력이 개혁의 중추로 나서야 한다.그들의 미래지향의 창의와 동참은 신바람나는 개혁풍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자면 대통령의 개혁의지와 중산층을 연결시키는 선도세력이 맡은바 역할을 다해주어야 한다.진실로 과감한 발상전환이 있어야 한다.국회와행정부의 정치인,공직자들이 국민이 생활속에서 개혁의 결실을 피부로 느끼고 향유케하는 개혁정책을 개발해야 한다.과거 권위주의시대의 행정편의 위주로 돼있던 법과 제도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국민편익위주의 제도개혁으로 가야 한다.장기적인 안목에서 행정개혁·교육개혁 등 개혁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 기업인과 언론인 지식인등 이 사회의 지도층이 소리에서 과감히 벗어나고 개혁에 따르는 사소한 불편함쯤은 감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계화 개방화 인간화의 길이 개혁이다.통일과 선진의 새로운 세기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않았다.미래지향 개혁의 당위성이 바로 거기서 찾아진다고 할것이다.
  • 조국 광복에 몸바친 삶 2제

    ◎“나운규기념회 운영 어려움… 지원 기대”/공적증명위해 노력… “훈장추서돼 기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인 고 나운규선생의 아들 봉한씨(60·영화감독·동작구 상도1동 388의2)는 12일 『영화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워온 선친의 뜻이 이제야 빛을 보게돼 자식된 도리를 조금이나마 한 것같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나씨는 그동안 정부문서보관소 및 국회도서관등을 오가며 관련자료를 찾던중 경찰청에서 보안법위반죄등의 죄명으로 된 형량자료를 찾아내 이를 근거로 지난 92년 3월에 서훈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나씨는 선친과 함께 활동했던 윤봉춘선생도 독립운동공로를 인정받게돼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나씨는 『선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 4년전 발족된 「춘사 기념사업회」가 재원부족으로 매년말 실시하는 「춘사 예술상」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번 추서를 계기고 뜻있는 분들의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친의 대를 이어 대전 엑스포 정부관에서 상영하는 「전통의 뿌리에서 미래의 열매를」이라는 4분짜리 멀티비전 영상물과 독립기념관 원형극장에서 상영하는 「내사랑 금수강산」이라는 20분짜리 홍보영화도 만든 나씨는 오는 15일 선친의 훈장을 들고 망우리 묘역에 참배할 예정이다. ◎동래고 재학중 항일시위,8개월 옥고/“사회 그늘진곳서 봉사로 여생 보낼것” 『오로지 민족정기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으로 젊은 한몸을 던졌을 뿐인데…』 광복 48주년을 맞아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훈장추서를 받게된 정두렬씨(71)는 뒤늦은 공적인정에 못내 쑥스러워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40년 11월 부산에서 학생시위를 벌이다 1년여의 옥고를 치른다. 부산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시절이었다.부산 대신동의 공설운동장에서 벌인 제2회「전력증강국방대회」에서 일본심판관의 편파성과 대회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벌인 가두시위에 참여한데 이어 일본인 심판장이었던 내대염치 일본육군대좌의 관사를 부순 혐의로 다음날 체포돼 1심 2심을 거쳐 8개월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정씨는『부산학생시위는 할말을 못하고 살던 암흑시대에 민족의 정기를 일깨우려는 몸부림이었다』고 50여년전 그날을 회상했다. 출감후 일제의 감시와 생활고에 못이겨 중국 심양으로 건너갔다 해방되던 해 7월 귀국한 정씨는 미군 군정청 비서실등에서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전쟁고아를 돌보는 사회사업을 10년 넘게 참여한 경험등을 토대로 그늘진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 일 잔재 없애 민족자존심 찾기/옛 조선총독관저 철거의미와 약사

    ◎옛총독부청사 헐기와 같은 맥락/미나미총독 건립… 아베까지 사용 김영삼대통령이 일제의 조선총독부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철거토록 한데 이어 총독관저였던 청와대 구본관도 헐도록 지시한 것은 민족자존심을 되찾는다는 결단으로 평가되고있다.즉 민족정기를 살리고 민족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며 이제 우리도 그만한 국가역량을 가졌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한을 풀자는 감정적차원이 아닌 미래를 향한 정신적 기둥을 새로이 정립하자는 의미이다. 행여 의식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식민지잔재를 차제에 털어버리고 국제화시대에 발맞춰 이를테면 일본식관행·식민지시대의 잔영을 하루빨리 청산하자는 것이 결단의 배경으로 보인다. 물론 청와대 구본관은 지난 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초대대통령(48·8∼60·4)부터 윤보선(60·8∼62·3),박정희(63·12∼79·10),최규하(80·3∼80·8),전두환(80·8∼88·2),노태우전대통령(88·2∼90·10)까지 역대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던 오래된 건물이다. 그러나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기로 한만큼 그 건물의 부속건물이자 총독이 살았던 건물도 철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데 따른 결정이다. 특히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비가 샐정도로 상당히 낡은데다 현재 식당과 의무실을 제외하고는 빈건물로 철거비용도 많이 들지않아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일제때인 37년 10월 미나미 지로(남차낭)총독이 짓기 시작하여 39년 7월 완공되어 미나미총독을 비롯하여 고이소 구니아카(소기국소),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총독이 해방되기 전까지 살았다. 해방 직후 아베총독이 건물내부를 불태웠으나 미군정청의 하지중장이 수리해 사용했다. 48년 정부수립후 이건물은 경무대로 불리면서 이대통령이 기거했고 4·19이후 청와대로 불리며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겸 관저로 사용됐다. 노대통령 때인 90년 10월에 새관저가 완공되고 91년 7월에 새본관이 완공됨으로써 구본관건물은 사실상 그역할을 마감했다. 풍수지리학자 중에는 일제가 우리민족의 기를 누르기 위해 머리격인 북한산 인수봉에는 철주를 박았고,입 부분인 근정전과 광화문사이에는 총독부청사를,목 부분에 총독관저를,심장격인 현서울시청자리에 경성부건물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 「일」자형의 조선총독부건물과 총독관저가 헐리고 나면 서울에는 「본」자형의 현서울시청건물및 동경역사를 본떠 만든 서울역사,조선은행으로 사용했던 현한국은행이 일제의 잔재로 남게된다.
  • 환국 임정선열 5위 어제까지 15만 참배

    박은식 선생등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는 참배 마지막날인 9일에도 4만여명의 조문객이 다녀가 일반인들에게 참배가 허용된 지난6일 이후 모두 15만여명의 각계인사및 일반시민들이 조문·분향을 했다. 영현봉안관에는 이날 상오 현승종 전총리,윤동윤 체신부장관,송종의 서울지검장,김효은 경찰청장등을 비롯한 각계인사외에 국군정보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등 단체참배객들과 가족단위의 일반 참배객들로 붐볐다.
  • 총독부청사 3∼4년내 사라진다/김 대통령의 “조속해체” 지시이후

    ◎“유물로 보존”·“완전철거” 논쟁 종지부/“새정부 어려운 결단”… 학계 크게 환영 김영삼대통령이 9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옛 총독부건물을 가능한한 조속히 해체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했던「국립중앙박물관 이전­총독부건물 철거」계획이 급진전하게 됐다.특히 김대통령의 지시 중에는 총독부건물을「해체」하라는 것과 국립중앙박물관을「건립」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이 문제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동안 학계를 비롯,관련단체 등에서는 총독부건물을 경복궁 경내에서 철거해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이론이 없었지만 철거후 자리를 옮겨「역사적 유물」로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는「완전해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 왔기 때문이다.더욱이 김대통령이 지난 4월 문화체육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이전·복원」을 지시한 뒤로는 건물 자체는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왔다.그러나 이번 지시로 해체가 최종결정돼 1916년 이후 한국 정치사의 중심지에 자리잡았던 옛 총독부건물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또 김대통령이『5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합당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는 문제를 정부가 적극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한 만큼 중앙박물관도 전쟁기념관등 기존의 건물로 옮겨가기 보다는 새로 짓는 방향으로 결정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총독부건물 철거문제는 지난 89년부터 거론돼 왔으며 새정부 출범후 활발하게 추진됐다.그러나 당초 중앙박물관 이전장소로 예정됐던 용산 미8군기지를 경기도 지역으로 옮기려던 계획이 지난 6월초 무산되면서「박물관 이전­총독부건물 철거」일정이 벽에 부딪쳤다.이후 용산에 짓고 있는 전쟁기념관을 중앙박물관으로 전용하는 방안이 한때 민자당 쪽에서 나왔으나 정부측에 의해 부인됐다. 이처럼 총독부건물 철거여부가 불투명해지자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회장 조항래)등 9개 역사연구단체는 지난달 9일 공동성명을 내『민족의 정통성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는 옛 총독부건물은 하루빨리 철거하고 경복궁이 복원되어야 하며,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도 마땅히 빨리 이전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성명서 발표에 참여한 단체는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어서 이 문제에 관한 학계의 의견은 명확하게,또 일치되게 표출된 셈이다. 이번의 「해체지시」가 발표되자 학계는 이를 전폭 지지하고 있으며 이와함께 시일이 더 걸리더라도 독립된 국립중앙박물관을 짓기를 바라고 있다.이현희 성신여대교수는『자유당정권이나 역대 군사정권들이 하지 못한 일을 문민정부가 어렵게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한편 중앙박물관 이전부지 선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문화체육부는 이번 결정을 계기로 기존 계획을 재검토하는등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문화체육부는 새 박물관 부지로 꼽았던 ▲용산의 서울시가족공원▲서울 중구 필동 수방사자리등 4∼5곳가운데 서울시가족공원을 확정했다. 총독부건물은 지난 16년 일제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세웠으며 해방후에는 군정청,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됐다.5·16이후 대통령은 쓰지 않고 중앙부처가 들어선 중앙청으로사용되다가 중앙박물관 용도로 결정돼 83년 5월 중앙청은 철수했다.그뒤 3년간의 수리기간을 거쳐 86년 8월 중앙박물관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남자현여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 선정/항일단체 결속 앞장선 「독립군의 어머니」/서로군정서가입,일제관리 독살 기도/투옥·부상동지들 정성껏 보살피기도/임종땐 평생 모은돈 「독립축하금」으로 희사 「독립군의 어머니」로 통했던 남자현여사는 1873년 12월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씨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났다.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김씨 김영주에게 시집을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을 결심하고 의병활동에 나섰으나 곧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여사 나이 46세에 일어난 1919년 3·1운동은 여사에게 남편의 원수 갚기를 결심하도록 만든다.항일 구국하는길만이 원한을 갚는 길임을 깨닫고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정착하게 된다.여사는 우선 그 곳에서 활동하는 비밀무장단체 서로군정서에 가입,군인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북만주일대의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한다.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는 조선총독을 독살하기 위해 동료 한 명과 함께 국내에 잠입,거사를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지로 되돌아 가야 했다.마침 인근 길림주민회장인 이규동과 편강렬·양기탁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믿아다니며 통합을 독려,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1927년 봄 상해 임시정부 요인인 안창호선생이 길림 조양문 밖에서 나석주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독립운동단체 간부·지방유지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안선생등 3백명을 무차별 체포했다. 여사는 안선생뿐아니라 투옥중인 애국지사들이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를 정성껏 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여사의 망명지 요녕성뿐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자 안선생과 함께 보석으로 풀려난 독립운동단체 핵심간부인 김동삼은 할 수 없이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의 한 애국지사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체포된다.아무도 김동삼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면회를 허가받고 연락책 역할을 거뜬히 해낸다.여사는 김동삼의 지시내용과 정보사항을 동지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빼돌릴 계획도 세웠으나 시간이 촉박한 바람에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그러나 여사의 슬기롭고 대담무쌍한 기질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계획이었던 것이다.여성다움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는 항상 고향의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위로·격려했다. 여사는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쪽 약손가락 두마디를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뒤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간악한 일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하기 위함이었다.여사의 항일정신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성해졌고 남편의 복수심은 꺼질 줄 몰랐다. 여사는 1933년 초 동료들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1일에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부도 노부요시(무등신의)를 독살하기로 하고 그해 2월29일 거지로 변장,폭탄·권총 1정과 탄환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장춘(당시는 신경)으로 가던 중 일영사관 형사에게 발각돼 붙잡히게 된다.일본군에게 전사당한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영어의 몸이 된다.여사는 잔악한 일경들의 고문을 6개월이나 버텨냈다. 여자의 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이겨냈다. 여사는 그해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옥중에서 15일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인다.악독한 일경들도 여사의 강인한 저항에 두 손을 들고 여사를 석방했다.그러나 여사는 6개월에 걸친 옥중생활로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여사는 즉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치료를 받고 하얼빈에 있는 여관에서 가료를 받았으나 옥중에서의 고문 후유증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1933년 8월22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사는 임종을 맞을때까지도 항일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유복자인 아들을 앞에 앉히고는 보따리를 풀어 중국화폐 2백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희사하라』고 당부했다.여사는 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독립운동은 정신으로 이루어 진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유족들은 여사의 뜻대로 1946년 3월1일 조국광복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독립축하금으로 여사가 남긴 돈을 김구·이승만선생에게 전달한다. 정부는 여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아웅산 수지 석방 촉구(지구촌단신)

    【워싱턴 AFP 연합】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20일 미얀마 군정 지도자들에 대해 민주화 운동 지도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를 조건 없이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 개혁 3대목표 제시/이기택대표

    민주당 이기택대표는 21일 힐튼호텔에서 열린 도산아카데미초청 강연회에서 「개혁의 표류는 좌시할 수 없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당면한 개혁의 3대목표로 21세기의 준비,군정청산을 통한 국정쇄신,분단극복과 통일시대의 대비를 제시했다.
  • 「12·12」주역들 법정에 서게 될까/집단고소로 새 국면 맞아

    ◎공소시효 1년여 앞두고 형사절차/순수법률문제로 접근어려워 처리관심 12·12사건 당시 신군부의 반대편에 섰던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을 비롯,이 사건 핵심 관련자 34명을 19일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공소시효(15년)를 1년여 남겨두고 이 사건 피해자들이 형사고발함에 따라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에앞서 김영삼대통령은 이 사건에 관련됐던 이필섭전합참의장등 현직 장성을 최근 해임하는 선에서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강조했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들이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공소시효를 바로 앞두고 소를 제기한 것도 달라진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왜냐하면 지난 6공 당시만해도 노전대통령이 직접 당사자였기 때문에 현실여건이 이를 따라주지 않았다는 견해다. 검찰은 이에 따라 고소인조사와 함께 피고소인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직 대통령들까지 조사해야 하는 부담을 걸머지게 돼 상당히 난처한입장에 처하게 됐다. 정전총장등은 고소장에서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들 반란 행위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준엄한 법적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상기시키고 『그들에 의해 지배되던 강권 통치시대가 마감되고 이들에 대한 공정한 사법적 조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새 시대가 왔다고 판단해 법적책임을 묻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소장을 제출한 피해자들은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 없이는 이 사건의 진상이나 실체를 밝힐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는 그 연후에 가능하다며 톤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정전총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새정부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검찰도 엄정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사건을 순수하게 법률적인 문제로 접근하기는 어려운데다 특히 2명의 전직대통령이 관련돼있다는 점에서 검찰이 어떻게 다룰지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피고소인·고소인 명단◁ 「12·12」 관련 피고소인과 고소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당시 계급 및 직책). 피고소인 △전두환(소장·보안사령관) △노태우(소장·9사단장) △유학성(중장·국방부 군수차관보) △차규헌(중장·수도군단장) △황영시(중장·1군단장) △박희도(준장·1공수여단장) △최세창(준장·3공수여단장) △장기오(준장·5공수여단장) △백운택(준장·71방위사단장) △박준병(소장·20사단장) △장세동(대령·수경사 30단장) △김진영(대령·수경사 33단장) △허삼수(대령·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중령·보안사 대공처장)△허화평(대령·보안사 비서실장) △정도영(준장·보안사 보안처장) △김정용(대령·특전사 보안부대장) △우경윤(대령·육군 범죄수사단장) △성환옥(대령·육군본부 헌병감실) △최석립(중령·33헌병대장) △이종민(중령·육군헌병대장) △조홍(대령·수경사 헌병대장) △신윤희(중령·수경사 헌병단부단장) △정동호(준장·청와대 경호실장직무대리) △고명승(대령·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 △박희모(소장·30사단장) △이상규(준장·2기갑여단장) △송응섭(대령·30사단 90연대장) △서수렬(중령·1공수여단 제2대대장) △박덕화(중령·1공수여단 5대대장) △박종규(중령·3공수여단 5대대장) △신우식(대령·특전사 작전참모) △구창회(대령·9사단 참모장) △이필섭(대령·9사단 29연대장) ▷고소인◁ △정승화(대장·계엄사령관) △이건영(중장·3군사령관) △윤흥정(중장·전투병과교육사령관) △이재전(중장·청와대 경호실차장) △문홍구(중장·합동참모본부장) △신현수(중장·국방부 특검단장) △전성각(중장·제3군단장) △최영식(중장·제2군단장)△정형택(중장·육본 예비군참모부장) △최명재(중장·군수참모차장) △안종훈(중장·육본 군수참모부장) △황의철(소장·육본 정보참모부장) △김한용(소장·육군대학총장) △신정수(소장·육본 민사군정감) △안철원(소장·육본 전술공사 통제단장) △한국섭(준장·전육본경리감) △하소곤(소장·육본 작전참모부장) △장태완(소장·수경사령관) △김계일(소장·국방통신정보부대 부부대장) △김종찬(소장·38사단장) △윤흥기(준장·9공수여단장) △김진기(준장·육본 헌병감)
  • 정보전쟁/대기업,전직수사관까지 채용

    「정보는 돈이다」­새 정부가 들어선 뒤 재벌그룹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경영 마인드다.로비가 통하던 과거와 달리 자율경쟁을 중시하는 새 정부에서는 정보만이 기업의 경영지표가 된다는 생각이다. ○음해성 소문 조작 최근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정보팀을 강화하면서 치열한 정보다툼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2∼3명이던 정보팀을 20명안팎으로 늘리는가 하면 계열사마다 별도의 정보원을 새로 두기도 한다.정보를 공유하는 전산망도 구축하고 있다. 일부 그룹은 안기부·기무사·경찰 출신의 정보수집전문가를 채용했다는 소문도 있다.정보를 얻기 위해 건당 수십만원씩의 돈을 쓰는 것도 예사다.경쟁사에 대한 음해성 소문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경우도 있다. 과열인 셈이다.전경련이 회원사들에게 자제를 당부했고,안기부도 정보팀장들에게 헛정보의 선별을 강조했다.단순한 수집차원에서 벗어나 분석·평가를 거쳐 기업의 경영지침을 제시하는 회사까지 있다.올들어 눈에 띄게 정보활동을 강화하는 그룹은 삼성·럭키금성·기아·선경·한일 등. ○별명은 「크렘린」 삼성은 정보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는 이건희회장의 지시에 따라 비서실 홍보팀에 「경영개발팀」을 구성했다.「크렘린」으로 불리는 이 팀은 신상파악이 비밀로 돼 있는 과장급이상 15명으로 짜여져 있다.전자·물산·생명 등 주요계열사까지 합하면 50여명은 족히 넘는다는 추측이다. 정계·재계·국제,군·경 모든 정보를 총망라하며 비용에 제한을 두지 않고 수집능력에 따라 성과급도 준다.과거 국가의 정보분야에서 일하던 직원을 영입해 정계정보가 빠르다는 평이 나돌고 있다.고급정보 1건에 50만원이상도 주저하지 않지만,시중의 소문은 확인만 하는 정도다. ○고급 1건 50만원 럭키금성그룹은 경제연구소에서 맡던 정보업무를 구자경회장 직속의 경영정보팀으로 옮겼다.인원도 5명에서 계열사를 포함해 25명으로 늘렸으며 분야도 삼성처럼 정치·사회분야로 넓혔다.정보의 전산화·전사화를 기치로 전임직원이 공유하는 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5,6공때 정부의 그늘 속에서 안주하던 선경도 경영기획실에 5명으로 된 PR팀을 구성,정보수집에 나서고 있다.주로 정계 및 회장관련 정보를 수집하는데 아직 분석·평가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게 정설. 삼성의 자동차생산과 관련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기아도 정보팀을 강화했다.군정보원 출신을 맞아들였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재계의 동향과 자동차산업에 대한 정부의 방향에 초점을 두고 있다. ○분석능력 탁월 10여년 전부터 정보업무를 중시해온 한일의 경우 인원은 그대로이나 정보의 수집보다 분석·평가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분석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이다. 대우(기조실 홍보팀)·쌍용(종합조정실 경영기획2과)·코오롱(경영관리1팀) 등은 자료수집에만 그치는 수준이다.현대는 업계정상급 위상에 비해서는 정보에 아예 무심한 상태다.
  • 47개 군정법률 개폐 추진/민주,개정안 마련 정기국회 제출

    민주당 정책위(의장 김병오의원)는 15일 5·16,유신,5·17등 3대헌정유린사태로 양산된 군정법률 1천4백67개 가운데 우선적으로 민주제도의 확립에 필요한 47개 법률의 개폐를 추진키로 했다. 군정법률은 5·16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처리한 1천8개,유신체제 비상국무회의에서 만든 2백70개,5공 출범이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처리한 1백89개등이다. 1차 개폐대상으로 정한 47개 법률은 안기부법등 정치관계 18개,한국은행법등 경제관계 16개,노동조합법등 사회문화관계 13개등이다. 김의장은 『군정법률중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등 독소조항을 포함한 법률이 적지않다』면서 『이같은 법률들을 전면 재검토해 9월 정기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군정보기관이 주도한“정치공작극”/드러나는「정치인테러」수사 중간점검

    ◎열쇠 쥔 박씨 도미… 물증확보가 과제/이진삼씨 부인… 배후규명도 난제로 5공후반 정보사의 정치인 테러사건은 정보사와 보안사(현 기무사)등 2대 군정보기관이 「합작」한 정치공작극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충격적이다.보안사가 「머리」역할을,정보사가 「수족」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건은 이진삼당시 정보사령관의 지시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군검찰에서 2회에 걸쳐 참고인 조사를 받은 한진구 당시정보사3처장의 진술에 따른 것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신빙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한씨는 군검찰에서 『당시 이진삼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준장을 만나보라는 지시를 받고 박준장으로부터 테러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한씨의 진술에 대해 군검찰의 조사를 받은 이씨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고 있으며 박씨는 한씨가 조사받기 전인 지난 10일 미국으로 출국해버려 대질신문은 하지 못하고 있다.이 때문에 이번 사건은 자칫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정치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미국으로 「도주」한 박씨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박씨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는 한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히기는 어렵게 되었다. 군검찰이 현재까지 밝혀낸 부분은 행동대원 총책으로 활동했던 이상범중령(구속)에게 한씨가 범행을 지시했다는 사실일뿐 「정치적 연결고리」등의 배후세력은 전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따라 이번 사건과 관련된 한씨등 민간인 수사를 맡을 서울지검의 수사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군검찰은 특히 박씨가 한씨의 소환조사가 이루어 지기 불과 4시간 전에 미국으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출국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한씨가 소환되기 전에 「입맞춤」을 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연루된 보안사 조직이 노출될 수도 있다고 판단,도피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당시 보안사의 정보처장직은 대민관련은 물론 각종 정치정보를 역이용,「공작정치」를 자행해 왔다는 비판을 받았던 자리다.박씨는 이 때문에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이종구전국방장관등 「상부선」에 미칠 정치적 파장을 우려,피신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적으로 과거 군사정권의 산물인 공작정치의 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이 점에서 검찰 수사결과에 따라서는 정치적 의혹이 더욱 증폭되면서 파문을 일으킬 조짐이다.
  • 이진삼 전정보사령관 「군테러단」조사 촉구/민주

    민주당의 박지원대변인은 12일 군정보기관의 정치테러 사건과 관련한 논평을 발표,『정부가 현재 남성대 골프장사장으로 당시 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한진구씨와 함께 상당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당시 정보사 사령관인 이진삼전체육부장관에 대해 수사를 하지 않고 있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 시노하라기자 재소환/수뢰여부 등 조사키로

    서울지검공안1부는 8일 국군정보본부소속 해군소령 고영철씨(40·구속)로부터 군사기밀을 몰래 수집해온 혐의로 불구속 송치된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 시노하라 마사토씨(39)를 9일 상오10시 다시 불러 조사키로 했다. 검찰은 시노하라씨를 상대로 전일본무관등 제3자에게 이미 밝혀진 자료말고 또다른 군사기밀을 넘겨줬는지 여부와 군사기밀을 전해받는 과정에서 금품을 받았는지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 “클린턴은 「YS 성공」주목해야”/미 「유에스 뉴스」지 지적

    ◎「군정 32년」 극복,가장 민주적인 아주국 견인 클린턴 미대통령은 오는 10일 방한때 김영삼대통령의 성공사례를 주목해야만 할 것이라고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가 최신호에서 지적했다. 이 시사주간지는 「한국이 달려가고 있는 방향의 변화」라는 특집기사에서 한국은 두차례의 유혈 군사쿠데타,30여년 이상의 군부지원 정권,인권침해와 관련한 오명을 극복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로 급속히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잡지는 클린턴대통령보다 불과 1% 적은 42%의 지지율로 당선된 김대통령이 취임 1백일의 한 여론조사에서 88·4%의 지지율을 나타내 한국 정치사상 가장 인기있는 지도자로 부상했다고 지적하면서 『클린턴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김대통령은 한때 원칙을 항상 고수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평판이 있었지만 취임이래 정치적 상징주의의 대가이자 용감하고 과감한 지도자임을 입증했다』고 말했다.다음은 특집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에서는 교통위반으로 적발됐을 때 면허증 뒤에 1만원짜리 지폐를 함께 끼워 교통순경에게 주면 소환장 대신 간단한 훈시로 때울 수 있었던 것이 다반사였다.뇌물을 노리는 것은 교통순경만이 아니다.일부 세관원,소방수,관리,기자,교사 등도 이른바 촌지를 받곤했다.그러나 김영삼대통령은 지난 2월 취임이래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김대통령의 반부패운동은 이미 1천명의 고위관리,교육자,사업가,정치인,군인들을 숙정하거나 징계하는 결과를 낳았다.새로운 공직자 윤리법은 7천명의 의원및 고위공직자들이 재산을 공개토록 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국내의 지지를 확보하거나 반정부인사들을 억압하기 위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활용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그 자신의 정통성이나 국민지지를 자신하고 있는 김대통령은 과거 성역시돼온 군부에까지 반부패운동을 추진,일부 고위장성까지 파면조치했다. 김대통령의 메시지는 한국이 이미 국민에게 숨길 것이 없는 대통령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대통령은 한국의 경제기적에 다시 불을 붙이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한국은 91년까지 10년동안 연평균 10%의 성장을 기록했으나 지난해는 4.7%로 내려왔고 현재는 3% 전후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지난 88년 1백41억달러에 달했던 경상수지흑자는 지난해 46억달러의 적자로 반전했다. 경제력이 소수의 재벌들에 집중된데다 과도한 규제위주의 경제도 문제이다.쌀개방문제 역시 주요 현안의 하나이다.경제문제가 궤도에 오른다 할지라도 김대통령은 정치적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집권 민자당의 소수파 출신이며 민자당의원중 상당수는 기득권상실 때문에 개혁에 냉담하다.그러나 한국에서 비관론자는 소수이다.클린턴대통령은 미국에서 같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 기무사,이 모대령 조사

    국방부는 5일 정보사가 5공 후반 특정 정치인에 대한 테러를 했다는 일부 보도와 관련,진상규명조사에 착수했다. 권령해 국방부장관은 이날 국군기무사에 이번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을 규명,의혹이 없도록 하라고 긴급 지시했다. 국방부는 이번 사건에 군정보기관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자칫 정치적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는 방침에 따라 관련자들의 소환조사에 나섰다. 기무사는 이와관련,현재 이번 사건에 깊숙이 개입된 것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보사 예하부대 이모중령(44)의 신병을 확보,범행가담 여부등을 조사하고 있다. 기무사는 수사에서 당시 정보사에서의 정치테러단 운영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테러단 구성지시자 및 관련자들의 가담정도에 따라 모두 사법처리키로 했다.
  • “군사기밀보호 허술” 입증한셈/「시노하라 사건」 왜 일어났나

    ◎형식적 관리 틈타 고 소령 3년간 빼내/진급 청탁위해 유출… 기강해이도 문제 현역소령의 군사기밀유출사건은 국가안위에 직결된 군정보관리체제에 구멍이 뚫려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고영철해군소령이(국방정보본부 주변국과)지난 89년 12월부터 거의 3년동안 군사기밀을 빼내왔으나 적발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의 군정보관리가 형식적으로 진행돼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방부의 군사보안업무시행규칙에 따르면 군사기밀은 내용의 중요성과 가치의 정도에 의해 군사1급,2급,3급비밀로 구분된다. 1급비밀은 누설될 경우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전쟁을 유발하며 군사방위계획·군사정보활동 및 필수불가결한 과학과 기술의 개발을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이며,2급과 3급은 각각 군사방위에 막대한 지장 또는 해로운 결과초래가 우려되는 것이다.3급비밀은 다소 시간이 경과된 경우가 많다. 고소령이 유출한 「공군항공기전력배치」「육군사단 배치현황」「남북평화공존시 전력대비와 통일후 전략 및 전력대비연구」「전환기군사대비태세계획」등은 모두 2급비밀이다. 군사기밀은 해당등급의 비밀취급인가를 받은 사람만 공식 취급할 수 있게 돼있으나 내부관련자끼리는 현실적으로 이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고소령외에도 다른 군사연구기관 관련자들에게서도 군사기밀을 입수한 것으로 밝혀져 구체적인 유출경위에 대한 보강수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은 기본적으로 군기강해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없지않다.고소령은 우리나라 군고위관계자를 많이 알고있는 듯한 시노하라기자에게 진급을 청탁하기위해 군사기밀을 빼내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영관급 장교로서의 기본율을 저버린 행동이어서 동기가 석연치 않다. 군정보관련 인사관리에도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낸 이번 사건은 군의 정보관리체제가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육곡감사」 급진전 배경/기무사 「존안자료」가 결정적 역할

    ◎70년대 중반부터 방산정보 수집/관련자들의 주석대화까지 기록 「율곡사업」의 비리를 추적하는 감사원의 발길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감사원이 국군기무사로부터 넘겨받은 「존안자료」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율곡감사가 눈에 띠게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 공교롭게도 지난 1일 기무사로부터 율곡관계자에 대한 존안자료를 넘겨받은 직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번 감사에 결정적인 전기는 아무래도 기무사로부터 방산관련자료를 넘겨받은 사실이며 그 자료속의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감사원은 자료요청,거부 논란등 한바탕 소동을 벌인 끝에 지난 1일 기무사로부터 율곡사업 관련자료를 넘겨받았다. 자료를 건네받은 감사원 관계자들은 기무사 자료가 『단순히 율곡사업 관련자들의 동향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그러나 기무사 사정을 잘 아는 군관계자들은 이 「동향」자료의 수준이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방대하고 세밀한 정보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기무사의 존안자료에는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시며 무슨 얘기를 했다는 정도로 자세한 기록이 담겨져 있다』며 『주량·여자관계까지도 일일이 파악돼 있을 정도라 율곡사업과 관련,누가 방산업체나 무기중개상으로부터 돈을 받은 기록도 물론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밝혔다. 기무사가 방산관련 자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 당시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군정보기관이 대민정보수집까지 담당할 필요가 없다』는 건의서를 박정희대통령에게 올려 재가를 받은뒤 한때 보안사의 대민정보기구인 정보처가 없어지게 됐다는 것. 이에따라 보안사는 정보처를 폐지하는 대신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율곡사업분야로 눈을 돌려 방산처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대민분야를 담당하던 정보수집역량이 방산업체에 집중되면서 기무사는 율곡사업 추진과정등과 관련,군인사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보안사령관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자신에대한 자료일 정도. 그러나 기무사는 새로운 사령관이 부임할 때는 이미 진짜 기록은 비밀창고에 밀어넣고 사령관이 보고 놀라지 않을 정도의 임시자료를 만들어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주목이 되는 부분은 감사원이 율곡사업관련자료를 권령해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기무사로부터 직접 넘겨받았다는 점. 기무사가 국방부장관을 통해 자료를 넘겨줬을 경우 아무래도 한번 걸러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군관계자들의 얘기다. 그러나 이 자료가 기무사령관으로부터 율곡사업 감사반장인 정민주심의실장에게 그대로 넘어가 전직은 물론 현직 국방부 고위관계자에 대한 자세한 동향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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