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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경찰총수들 어떻게 지내나/내일 경찰창설 50돌 계기로본 근황

    ◎총 48명 배출… 초대 조병옥 국장 등 13명 타계/정계진출 5명 제외,거의 취미생활로 소일/「박종철 고문 사건」의 강문창씨 칩거생활/내무장관 지낸 안응모씨 왕성한 사회활동/「경찰청 세대」 4명은 등산·여행·독서 즐겨 오는 21일은 경찰창설 50주년이 되는 날이다.경찰창설은 지난 45년 미군정청산하 경무국으로 출발한 날을 그 기산점으로 잡고있다.그래서 정부수립보다 3년이나 앞선다.국립경찰은 해방후 좌·우익 갈등과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격랑속에서,그리고 자유당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사회상황아래 「정권과 국민」「법과 인권」사이에서 갈등을 거듭하며 성장해왔다. 국방부장관 다음으로 많은 「식솔」을 거느린 경찰총수 역시 이같은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경무국장·경무부장·치안국장·치안본부장·경찰청장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부침을 계속했다.미군정하의 초대 경무국장 조병옥 박사부터 그동안 총수에 오른 사람은 모두 48명.이 가운데 김태선(3,5대),박영수(22,25대)씨등 2명이 두차례 역임해 현 박일룡 청장이 제50대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 남짓.정권별로는 3공화국때가 평균 1년2개월로 비교적 길었고 자유당시절이 10개월20일로 제일 짧았다.최장수는 33대 김성주씨로 2년11개월동안 재직했고,6·25발발당시의 4대 장석윤씨가 30일로 최단명 경찰총수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들 전직 경찰총수가운데 13명이 운명을 달리했으며 정치에 입문,국회의원이나 지구당위원장이 된 5명을 빼고는 대부분이 일체의 공직및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취미생활로 소일하고 있다.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는 27대 정상천,36대 유흥수,38대 이해구,41대 이영창,43대 조종석씨등 5명이다. 18세때 황해도에서 단신 월남,22세때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한지 꼭 30년만에 37대 경찰총수가 된 안응모씨는 아직도 경찰내에선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안씨는 이후 충남지사,청와대 정무2수석,안기부1차장,내무장관에까지 올랐다.지금도 지난 93년부터 맡은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경찰간부후보생 11기가운데 처음으로 총수에 오른 40대 강민창씨는 재임 1년만에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옷을 벗었고 퇴임 1년후 뒤늦게 박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이 폭로돼 구속됐다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뒤 지금까지 친지방문과 독서등을 하며 칩거생활를 하고 있다.87년6월 「6·10민주항쟁」당시 총수를 맡아 군부의 개입을 적극 저지했던 일화를 남긴 42대 권복경씨도 퇴임후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고 난초가꾸기와 등산·골프 등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한편 내무부산하 치안본부에서 경찰청으로 독립한 지난 91년8월이후 청장을 역임한 김원환·이인섭·김효은·김화남씨 등 4명도 특별히 하는 일없이 등산·여행·독서등을 즐기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무장공비 침투 항의/유엔사 서한 접수거부/북한

    주한 유엔군사령부는 임진강을 통해 우리측으로 침투하려던 북한군 1명이 사살된 것과 관련,이같은 정전협정 위반행위를 강력 항의하는 내용의 서한을 17일 하오 북한측에 전달하려 했으나 북측이 이 서한의 접수를 거부했다고 18일 밝혔다. 유엔사에 따르면 유엔사 군사정전위 비서장 옴즈대령을 비롯한 군정위 특별조사반이 사건발생 당일인 17일 북한군 사살 현장에 대한 조사를 벌인 결과 사체와 무기 및 장비가 북한군의 것이라고 결론짓고 이날 하오 연락장교회의를 통해 유엔사 군정위 수석대표 이석복소장의 명의로 북한 이찬복 중장(소장)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려 했으나 『상부의 지시에 따라 정전협정과 관련한 서한을 받지 못한다』며 북한군 연락장교가 수령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 “북 대남전략 불변… 철통방위를”/김 대통령

    ◎어제 새벽 임진강서 무장침투 북한군 1명 사살 【밴쿠버=이목희 특파원】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중인 김영삼 대통령은 17일 낮(이하 한국시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는 북한의 대남전략에 변화가 없다는 산 증거』라며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할 수 있도록 인내를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숙소인 팬 퍼시픽호텔에서 공로명 외무장관 등 공식수행원들과 비공식 만찬을 한 자리에서 김동진 합참의장으로부터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보고받고 『북한이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등 대남 호전적인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는만큼 우리는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주자 있는 듯 17일 새벽 2시20분쯤 경기도 파주군 임진강 하류 자유의 다리 남쪽 1.5㎞ 지점에서 남측지역으로 침투하려던 무장 북한군 1명이 아군경계병에 의해 사살됐다. 통합방위본부(본부장 김동진 합참의장)는 이날 『임진강 철책초소(GOP)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모사단 소속 정인제 상병과 이종훈 이병 2명이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잠수복차림의 남자 1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하고 『아군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다. 합참 작전참모부 작전차장 정화언 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살 현장에 이들이 신고온(수중 수영용) 오리발 자국이 여러개 나있는 점으로 보아 도주한 북한군이 1∼2명 있을 것으로 보고 대침투 경계태세 「진돗개 하나」를 발령,임진강 주변과 강물속을 수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들은 만조 때 임진강 하류에서 물길을 따라 수중침투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전방 아군병력 및 무기체계 배치현황과 유사시 침투로 확보등을 위한 정찰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주한유엔사령부는 이날 군사정전위 비서장 옴즈대령을 포함,군정위 소속 요원 5명을 현장에 보내 조사에 나섰으며 사체의 신원이 확인되는대로 북한측의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행위를 공식항의할 방침이다. 정차장에 따르면 경계근무 중이던 정상병등은 상오 1시35분쯤 나무가 흔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이를 추적하던중 2시20분께 적의 모습을 발견,수류탄 2발을 투척하고 10여분간 K­2소총 75발을 쏘았다는 것이다.북한군은 전혀 응사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단사령부는 즉각 「위기조치반」을 가동,수색 끝에 상오 7시15분쯤 숨진 북한군 사체 1구와 장비등을 발견했다.
  • 서울신문 발굴 「이사민 보고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

    ◎「박헌영 숙청」 본질 파악 단서 제공/「이사민 부부와 연계」 일부 밝혀/해방후 미 교포사회 친북인사 활동 처음 알려져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쟁점중의 하나다.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이나 연구는 선입견이나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오늘날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믿음만이 존재한다.반면에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이 6·25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으며,이로써 김일성 정권은 더욱 공고화됐다고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 서울신문이 이번에 공개한 「이사민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박헌영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한다.정치적 성격이 강한 역사적 사건일수록 무엇보다 먼저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박헌영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사건의 기원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조선노동당은 1953년1월부터 「문헌토의사업」이라는 것을 전개했다.토의는 문헌에 기초해 당사업을 총화하는 것이었다.그런데 두 차례에 걸친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헌영과 그 주변인물의 과거비리와 문제점이 하나둘 폭로되었다.이 과정에서 전쟁전에 미국의 정보공작선이 여럿 침투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추어냈다. 여기서 무엇보다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이미 간첩혐의로 체포된 이사민·현 앨리스와 이들이 맺은 관계였다.북한당국의 공판기록에는 『박헌영이 이들의 간첩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해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이번에 공개된 「이사민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공판과정에서 쟁점이 된 사안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이사민과 현앨리스가 체코 프라하로 가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구한 사실이 「이사민의 보고서」에는 예고돼 있다. 최근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가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미국 CIA가 박헌영사건으로 체포당한 설정식을 통해 북한의 여러가지 정보를 입수했음을 자료를 통해 새롭게 입증한 바 있다.설정식은 함남 단천 출신으로 미국 마운트유니언대학을 나왔으며 해방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을 지낸 인물이다.46년9월 공산당에 입당해 51년7월 개성휴전회담에서는 인민군대표단 통역을 맡았다.그는 53년8월 이승엽등과 함께 「미제간첩」혐의로 재판받아 사형을 당했다. 이사민·현앨리스의 경우도 이와 같은 부류에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아울러 「이사민의 보고서」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해방후 미국에서 전개된 친북인사의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충격적이다.
  • 동북아 잠함 증강 경쟁/미 자료

    ◎중 84척·북 36척 보유… 불안 확산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아시아는 냉전붕괴 이후 각국의 잠수함 확산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동북아 해역은 북한과 중국의 잠수함 확산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해군정보국이 최근 밝힌 세계 각국의 잠수함 보유현황을 보면 러시아가 1백81척으로 가장 많고 2위는 미국이 97척,3위는 중국이 84척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위는 북한으로 36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단 2척 보유에 불과한 한국과는 엄청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편 같은 동북아의 일본은 15척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위는 독일·프랑스·인도로 18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8위는 16척의 터키,9위는 15척의 일본과 영국,11위는 12척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등 순으로 밝혀졌다.
  • 전시경제와 통화(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7)

    ◎전비 하루 10억∼40억원 지출… 인플레 심각/52년 화폐발행고 1조… 100대1로 화폐개혁 1951년 봄 전선에서는 수 많은 인명이 죽어갔으나 전선은 진지밖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그렇다고 숱한 인명의 희생이 국민들에게 어떤 반대급부적 대가를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후방은 그저 전선이 멀리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뿐 날로 가중되어가는 경제적 궁핍이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당시 경제문제는 전선의 전투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이다. ○부산 빈민도시 전락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에는 1백50만명의 인구가 들끓었다.전쟁전 43만명의 인구를 포용했던 매력있는 도시 부산은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남한의 피란민은 물론 북한을 탈출한 피란민,전쟁고아,전상자들이 삽시간에 부산을 빈민가로 만들어버렸다.전국의 후방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부두에는 태평양에서 꼬리를 물고 입항한 거대한 선박들이 매일 산더미같은 짐을 풀었다.그러나 당장 끼니거리가 없는 피란민들에게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이들을돌볼 겨를을 주지 않았다.한국정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하루 10억원에서 40억원의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입장이었다.이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원화경비를 지출키로 합의한 이른바 대구협정에 따른 것이다.유엔군에게 꾸어주는 대여금 이었지만 이를 흡수할 실물경제의 기반은 계속 허물어졌다.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 돈의 홍수는 결국 한국통화의 지독한 인플레현상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정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전쟁은 벌써 2년째에 접어들어 세입이 전무한 상태였다.그래서 세입은 한국은행에서 꾸어오는 인플레 방식의 한은차입금이 큰 줄기를 이루었다. 한국은행은 1951년 한햇동안 5천5백79억원의 화폐를 발행했다.이 수치는 전년도 화폐발행고 2천2백92억원에 비해 자그마치 3천2백87억원이 늘어난 것이다.그해 51년의 통화량은 전년도 보다 3천9백77억원이 많은 6천4백98억원을 기록했다. ○2년새 6배 치솟아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 조차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수 밖에없었다.해방 당시 도매물가지수를 1백으로 할 때 1951년 초에 이미 5천을 뛰어넘어 52년에는 단숨에 3만을 돌파했다.배고픈 피란민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쌀값은 1946년 1월 기준 1만6백50원에서 1952년말에는 9만원대로 치솟았다. 한국전에 개입한 미군 주축의 유엔군은 한화가 필요했다.그래서 한국정부는 대전에서 철수한 1950년 7월28일 대구협정을 맺었다.한국정부는 유엔군 지출관이 요구하는 액수의 원화를 필요한 장소에서 무제한 공급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이후에 어떻게 갚는다는 조항을 두지않고 일방적으로 공급의무 만을 규정한 이 협정은 오랫동안 말썽을 빚었다.이 협정에 따라 한국은 유엔군에게 원화를 꾸어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한은 20억 북에 뺏겨 그러나 현찰이 없었다.유엔군 대여금 보다 더 급했던 한국군에 공급할 현찰도 부족한 판이었다.한국은행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6월26∼27일까지 20억원을 서울에서 풀었다.그리고나서 피란지로 수송한 돈은 5억원에 불과했다.금고에 그냥 두었던 20억원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남한경제 교란에 악용되었다.이때에 화폐인쇄용 원판을 서울 원효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빠뜨리고 온 실책을 저질렀다.대전에서 이 정보를 수집한 미 대사관은 곧바로 맥아더 사령부에 통보했다.그래서 원효로 일대는 개전 초기 미공군으로부터 엄청난 폭격을 받았다. 한국은행은 궁여지책으로 저액권 지폐에 고액 스탬프를 찍는 작업에 착수했다.10원짜리 지폐에 「당백원」 또는 「당천원」을 새긴 고무도장을 찍었다.이 지폐가 유통되지는 않았다.미 경제협조처(ECA)와 맥아더 사령부의 주선으로 19 50년 7월 하순부터 일본 토쿄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얼굴 도안이 들어있는 새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한국은행 토쿄지점이 발권업무를 맡아 서북항공(NWA) 전세기와 DC4 쌍발수송기로 부산 수영공항에 공수되었다.비행기만으로는 수송능력이 모자라 9·28 수복 이후에는 캐나다 선적의 1만t급 상선 아일랜드사이드호가 8일 간격으로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에게 꾸어준 대여금을 받아내는 일이 시급했다.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상환독촉은 보통이 아니었다.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미국은 원화대여금을 전쟁이 끝난 뒤 그동안의 전비와 상쇄할 전도금으로 해석한 것이다.한·미간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다가 1952년 1월10일 우선 유엔군 휴가비로 나간 한화를 달러로 받았다.처음으로 한국정부 손에 들어온 외화는 1천2백15만5천7백14달러였다. 미국은 그 뒤에도 대여금 상환을 놓고 한국과 줄다리기를 계속했다.미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4월 클레어렌스 마이어를 대통령특사로 한 사절단 12명을 부산에 보냈다.백두진 재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한 한국대표단과 이들의 회담은 5월에 접어들어서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미국은 달러를 되도록 덜 주면서도 지불시기를 늦추고 지불한 돈에 대한 사용처를 명시한다는 입장이었다.이와달리 한국은 많은 액수를 빨리 받아 자유롭게 써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쪽에서 먼저 2천8백만달러를 제시하고 나섰다.이 액수는 지금까지 가져간 돈 가운데 52년 1월∼4월까지 4개월분을 달러로 환산한 것이다.한국대표단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마이어는 이 대통령을 직접 예방하고 5개월분을 제시하고 수락을 간청했다.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장장 40일간의 마라톤 회담이 5월24일 타결되었다.이를 양국 대표가 서명했는데 바로 유명한 마이어협정이다. ○6천대1 환율 적용 마이어협정은 미국의 대여금 상환 말고도 고용 한국인에 대한 노임 및 물자대(월 4백만달러)상환내용 등이 들어있다.여기서는 6천대1의 환율이 적용되었다.이 협정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통화팽창과 투자억제를 골격으로 한 한국정부의 의무조항이다.의무조항은 한국의 통화개혁을 부추켰다. 1952년 여름에 접어들어 화폐발행고는 1조원을 넘어서고 말았다.그해 가을 백두진재무장관이 국무총리 서리 겸임 발령을 받았다.백서리로부터 통화개혁 기초작업 착수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히 조치해보라』는 말로 이를 동의했다.백두진과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를 필두로 김정렴,배수곤 등이 실무팀으로 참여했다.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통화개혁 작업은 11월말 가닥을 잡았다.그 내용은 당시 통용화폐 원을 1백대1로 낮추어 환(원)으로 하고 일정액 이상의 통화를 예금으로 동결시킨다는 것이었다.백두진팀이 쉽게 통화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에스 프린트」라는 사용하지않은 신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것은 미군정이 화폐교환을 위해 1947년 미국에서 인쇄한 화폐였는데 그 도안이 절묘했다.이 미사용 신권지폐는 1천원,1백원,10원권 등이 「원」으로 표기되었지만 「환」으로 호칭한다는 원칙 아래 1953년 2월15일부터 통용되었다. ◎미 대사관 보고서 「조인트 위카」/미,통화개혁후도 원화 평가절하 요구/다스카 사절단 내한… 백두진 총리에/53년 1달러=60환서 18환으로 올려 한국정부가 1953년 2월15일 통화개혁을 단행한 이후에도 미국으로부터 원화의 평가절하 요구를 계속 받아들여 이를 수용했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주한미대사관 무관들의 19 53년 5월15일자 주간보고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에서 드러났다.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한국에서통화개혁이 이루어진 지 약 2개월 이후인 53년4월에 다스카가 이끌고 온 다스카사절단은 백두진 국무총리에게 원화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당시 한국의 공정환율은 1달러당 60환(원)이었는데 다스카의 평가절하 요구액은 1달러당 2백20환이었다.이에 대해 백총리는 1백80∼2백환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스카는 미국의 요구가 수용되어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는 기록이 「조인트 위카」에 나온다.다스카의 예상은 사실상 적중했다.그해 12월 백총리와 우드간에 체결한 한미합동경제위원회협약을 통해 1달러당 60환이었던 환율이 자그마치 3배나 오른 1백80환으로 결정되었다.다스카의 애초 제시한 2백20환 보다는 적지만 원조 공여국인 미국의 요구가 어느정도 관철된 셈이다. 다스카는 방한중에 파악한 한국경제상황을 근거로 「다스카 보고서」를 작성했다.이 보고서에 실린 한국원조 3개년 계획안은 군사원조,구호,재건사업으로 나누어 모두 8억8천3백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담았다.그러면서 한국이 악성 인플레이션과 환율문제를 해결하지않고는 어떠한 시설투자도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입장에서 원조물자의 구성을 소비재 7,시설재 3을 제시했다.
  • 「5·18 특별법」/가을 정국 최대 쟁점 “점화”

    ◎3개 법안 제출로 달아오른 정가/야권공조 모색하며 대여 공세 강화­야/“야 주장은 정치공세… 위헌소지 내포”­여 대학가와 재야에서 제기된 5·18 관련 특별법 제정문제가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으로 본격 부상하고 있다. 국민회의는 22일 「5·18 특별법」 「공소시효에 관한 법」 「특별검사법」 등 3개 법안을 확정,국회에 제출했다.민주당도 이미 마련한 「12·12 군사반란및 5·18 내란사건처리 특례법」 시안을 놓고 이날 각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책토론회를 가졌다.정치적으로 앙숙관계인 만큼이나 선명성 경쟁도 치열하다.하지만 법안의 내용에서는 비슷한 대목이 많아 공동보조를 맞추는 양상이다. 야권의 이같은 파상공세에 대해 민자당은 일단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위헌제청이 헌법재판소에 계류중이므로 그 결과를 보고 대응하겠다는 자세다.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을 다시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위헌의 소지가 있고 독립수사기관인 검찰의 결정에 정치권이 시비를 거는 것도 명분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야당의 요구에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내부방침을 정해둔 상태다.한마디로 야당의 「정치공세」에 불과하다는 시각이다. 자민련은 보수·중도적 색채를 강조하려는 듯 국민회의·민주당의 공동보조 요구에 소극적이다.다만 5·18 관련자들을 기소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국민회의는 이날 3개 법안을 제출하기 앞서 『5·18특별법은 현재의 사태에 대처하는 법이고,특별검사법은 현재와 앞으로의 권력형 부정사건에 대비하는 법이며,공소시효법은 앞으로 다시는 군사반란 등 헌법파괴범죄가 시도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법』이라고 설명했다. 「5·18 특별법」의 골자는 5공이 끝난 88년 2월24일까지 8년간은 5·18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소추권행사가 불가능한 기간으로 판정,이 기간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되도록 하자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는 7년6개월밖에 지나지 않아 처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헌법파괴범죄 등의 공소시효에 관한 법」은 내란 외환 반란 이적죄 등 헌법파괴범죄와 집단학살 등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의 적용을배제하자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앞으로 쿠데타와 같은 헌정문란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논란이 없도록 못을 박자는 의미다. 「특별검사법」은 국회가 본회의 결의로 대통령에게 요구한 권력형 부정사건과 법률이 특별히 정한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대한변호사협회의 추천을 받아 특별검사를 임명토록 규정하고 있다.특별검사는 검찰총장 경찰청장 기타 관련기관에 자료제출과 수사활동의 지원을요청할 수 있으며 파견된 검사와 사법경찰관및 관계공무원 등을 지휘·감독할 수 있도록 했다. 민주당의 「12·12군사반란및 5·18내란사건 처리에 관한 특례법」도 두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특별검사제 도입에 있어서도 국민회의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두사건으로 한정하자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종합하면 국민회의와 민주당의 주장은 5·18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의 길을 확실하게 열어 놓자는 것이다.다만 민주당이 과거사건의 처벌에 무게를 두고 있는 반면 국민회의는 재발방지까지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급입법에 의한 공소시효 적용배제는 위헌이 된다는 일반적인 법해석이 부담이다.야당의 주장에 대해 국민의 「평균정서」가 얼마나 동참해 줄 지도 문제다. 현재로선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이 관건이 되겠지만 야당의 기세로 미루어 정기국회동안 여야 사이에 뜨거운 공방이 전개될 전망이다.국민회의와 민주당 모두 내년 총선을 겨냥,주도권 확보라는 차원에서도 앞으로 국정감사와 대정부질문,상임위활동 등을 통해 이 문제를 한껏 부각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국민회의와 민주당은 법안관철을 위한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민주당은 재야·시민단체 등과 연대,가두토론회와 옥외집회까지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지만 국민회의는 강경한 이미지로 비치지는 것을 경계,장외투쟁은 지양하고 원내에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이다. 결국 진통을 거듭하다 정기국회 말미에 표결로 종결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상위별 국감 대상기관 일정 ◇운영위=대통령비서실 대통령경호실 국회사무처·국회도서관 의정연수원(10월13일) ◇법사위=법제처 헌법재판소(9월25일)서울고법 서울지법 인천지법 수원지법 서울고검 서울지검 인천지검 수원지검(26일)대전고법 대전지법 대전고검 대전지검(28일)광주고법 광주지법 광주고검 광주지점(29일)대구고법 대구지법 대구고검 대구지검(10월5일)부산고법 부산지법 창원지법 부산고검 부산지검 창원지검(6일)대법원(9일)대검찰청(10일)법무부(12일)군사법원 감사원(13일) ◇행정위=행정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9월25일)정무제1장관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27일)정무제2장관실 한국여성개발원(29일)총무처(10월4일)한국행정연구원공무원연금관리공단(6일)비상기획위원회(10일)공정거래위원회(11일) ◇재정경제위=재정경제원(9월25·26·27일)한국은행 은행감독원(28·29일)신용보증기금(30일)한국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10월2일)한국수출입은행 한국주택은행(4일)한국은행 부산지점 부산세관 기술신용보증기금 부산지방국세청 광주지방국세청 광주세관(5일)한국조폐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6일)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9일)통계청 한국소비자보호원 성업공사(10일)한국개발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조세연구원(11일)관세청 조달청(12일)국세청(13일)재정경제원(14일) ◇통일외무위=통일원(9월25일)외무부(26일)주미대사관 주LA총영사관 주과테말라대사관 주파나마대사관(미주반 28일∼10월7일)주일대사관 주중대사관 주베트남대사관(아주반,28일∼10월7일)주프랑스대사관 주헝가리대사관 주러시아대사관 주오스트리아대사관(구주반 28일∼10월7일)외무부(10월9·10일)통일원(11일)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민족통일연구원(12일)국제협력단·국제교류재단(13일) ◇내무위=부산시 제주도 제주지방경찰청(9월25일)경상남도 경남지방경찰청(26일)충청남도 충남지방경찰청(27일)충청북도 충북지방경찰청 대전시(28일)강원도 강원지방경찰청 전라북도 전북지방경찰청(29일)경기도(10월4일)해양경찰청(5일)서울지방경찰청(6일)중앙선관위 도로교통안전협회 국립공원관리공단(9일)서울시(10일)경찰청(11일)내무부(12·13일) ◇국방위=국방부(9월25∼27일,10월11일)합동참모본부(25·26일)국군기무사령부 국군정보사령부(25일)국방조달본부 군인공제회(26일)육군본부 육군복지근무지원단(28일)공군본부(29일)해군본부 해병대사령부(10월4일)국방과학연구소(5일)병무청(6일)육군제2군사령부 (주)풍산(9일)해군작전사령부(주)대우중공업(조선부문)(10일) ◇교육위=교육부(9월25·26일,10월13일)경기도 교육청 인천시교육청(27일)사립학교교원연금관리공단 대한교원공제회 한국대학교육협의회(28일)한국교육개발원 교육방송원 국사편찬위원회(29일)경남교육청(10월4일)부산시교육청(5일)8개 공과대학(경북대 부산대 영남대 전남대 전북대 창원대 충북대 충남대)중점지원사업 대상대학(6일)전남교육청 광주시교육청(9일)대전시교육청 충남교육청(10일)서울시교육청(12일) ◇문화체육공보위=문화체육부(9월25일,10월12일)문화재관리국 예술원사무국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국어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국악원(26일)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영화진흥공사 예술의 전당 공연윤리위원회(27일)한국관광공사 한국마사회(28일)대한체육회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국민생활체육협의회(29일)독립기념관(10월4일)국립광주박물관(5일)KBS제주방송총국 국립제주박물관 한국마사회제주경마장(6일)한국관광공사 제주지사(7일)공보처(10월9·13일)해외공보관 국립영상제작소 정부간행물제작소(9일)한국방송광고공사 한국방송개발원 언론중재위원회 한국자유총연맹(10일)한국방송공사 종합유선방송위원회 방송문화진흥회 방송위원회(11일) ◇농림수산위=농림수산부(9월25일·26일,10월13일)농촌진흥청(27일)산림청 임업협동조합중앙회(28일)수산청(29일)전라북도 전라남도(10월4일)충청남도 경상남도(5일)농수산물유통공사 한국냉장주식회사(6일)농어촌진흥공사 농지개량조합연합회(9일)농업협동조합중앙회(10일)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11일)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12일) ◇통상산업위=통상산업부(9월25일)공업진흥청 석유개발공사(26일)중소기업진흥공단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27일)한국가스공사(28일)대한무역진흥공사 특허청(29일)한국전력공사(10월2일)대한 석탄공사 대한광업진흥공사(4일)포항제철(5일)한국중공업(6∼7일)한국가스안전공사 한국전기안전공사(9일)대한송유관공사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10일)한국종합화학 생산기술연구원(11일)통상산업부(12∼13일) ◇체신과학기술위=정보통신부 한국전기통신공사(9월25일)과학기술원(26일)기상청(27일)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28일)한국기계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소(29일)고리원자력발전소(10월4일)경북체신청 한국통신대구본부(5일)강원체신청 한국통신강원본부(6일)한국통신품질보증단 한국통신사업개발부(9일)한국통신 통신시설사업단 한국통신 건설사업단(10일)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이동통신 한국통신카드 한국PC통신 한국항만전화(11일∼12일)정보통신부(13일)과학기술처 한국전기연구소(14일) ◇환경노동위=부산지방노동청 경남지방노동위원회(9월25일)낙동강환경관리청(26일)대구지방노동청 경북지방노동위원회 성서공단소각장 시찰(27일)원주지방환경관리청 생태계 및 한강수계시찰(28일)서울지방노동청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서울특별시(29일)영산강환경관리청 전주지방환경관리청(10월2일)금강환경관리청 대전지방노동청 충남지방노동위원회 천안기술교육대학시찰(4일)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근로복지공단 중앙노동위원회(5일)인천지방노동청 인천지방노동위원회 한국산업안전공단산재의료관리원 중앙병원시찰(6일)한국자원재생공사 환경관리공단 김포매립장시찰(9일)환경부 국립환경연구원(10일)환경부(11일)노동부(12∼13일) ◇보건복지위=경기여자기술학원 경기도(9월25일)국립의료원 국립서울정신병원(26일)국립보건원 국립보건안전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의료관리연구원(27일)마리아부녀보호지도소시찰 명동보육원시찰 충주호관광선 화재사고현장시찰(28일)꽃동네시찰 루시모자원 대전지방보훈청(29일)인천검역소(10월2일)의료보험관리공단의료보험연합회(4일)국민연금관리공단(5일)한국보훈복지공단 한국보훈병원(6일)재향군인회(9일)국가보훈처 88관광개발(10일)보건복지부 대한적십자사 대한가족계획협회 대한결핵협회 대한나환자관리협회 한국식품위생연구원(11일)보건복지부(12∼13일) ◇건설교통위=부산국토관리청 부산지방철도청 이리국토관리청 전라남도(9월25일)부산해운항만청 부산시 부산교통공단 여천철도청 여수해운항만청(26일)대구시 경기도(27일)서울국토관리청 인천해운항만청 인천시(28일)교통안전공단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29일)국토개발원 교통개발연구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해운산업연구원 대한건설협회 건설공제조합 해외건설협회(30일)대한주택공사(10월4일)한국토지개발공사(5일)한국도로공사(6일)한국수자원공사(7일)한국공항공단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9일)철도청(10일)서울시(11일)해운항만청(12일)건설교통부(13·14일) ◇정보위=국가안전기획부(10월11일)국가안전기획부 및 국가안전기획부법 제3조제1항제5호에 규정된 정보 및 보안업무의 기획조정대상부처 및 기관(12일)
  • 주일 미군범죄(외언내언)

    오키나와는 「일본의 탐라」.본래는 유구 왕국이란 독립국가 였으나 16 09년 현재의 가고시마지방을 지배했던 영주 시마즈(도진)에 의해본토에 병탄됐다.45년부터는 점령미군의 군정치하에 들어갔다가 72년 일본에 다시 귀속된 파란많은 땅이다. 일본에 귀속되긴 했으나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군과 가까이 있다.4만7천여 주일미군의 60%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있는 것이다.미군이 많기때문에 미군범죄의 피해도 오키나와 주민들이 당하게 마련.68년엔 미군의 핵폭격기 B52가 이 섬에 추락했다.다행히 핵폭발은 없었으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다시 한번 핵공포에 떨었다.74년엔 미군이 농부를 살해한 「이에지마」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엔 미군3명이 심부름가던 국민학교 여학생을 납치,집단 성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지난 4일 발생한 이사건이후 오키나와에서는 연일 미군범죄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19일에는 오타 마사히데 지사가 상경,월터 먼데일 주일 미국대사에 항의했다.일본의 자방자치단체장이 미국대사에 항의하는 사태는 전후 처음있는일. 어느 사회나 범죄는 있게 마련이다.미군이라고 범죄자가 없을리 없다.문제는 범죄자에대한 처벌이 공정하냐 하는 것이다.오키나와현 경찰은 지난 7일 미군측에 범인3명의 신병인도를 요청했으나 정중히 거절됐다.미국과 일본간의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미군범죄 초기수사권은 정식 기소때까지 미군당국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에지마 사건」때도 미당국은 범인을 집행유예판결후 귀국시키는 것으로 종결지었다.일본의 여론도 이제 SOFA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불공정한 SOFA내용이 미군범죄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 지난 한햇동안 주한 미군및 군속,그가족들이 저지른 형사범죄가 8백96건에 이른 우리나라와 미국간 SOFA가미­일간 SOFA보다 더 불공정한 협정이란 것은 자타가 다 아는 사실.우리 SOFA도 하루속히 공정하게 개정되어야 할 것임을 말해주는 오키나와사건 아닌가.
  • 월드컵 축구/한국유치 가능성 크다/29일 방한 메넴 아르헨 대통령

    ◎“육류수입 확대·원전 기술협력 증진 희망”/대통령 연임… 인플레 등 경제난 타개 진력 카를로스 사울 메넴 아르헨티나대통령은 명문 국립대인 코르도바대 법대를 졸업,잠깐의 변호사근무를 거친뒤 지난 55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정계에 뛰어든 베테랑 정치인이다.올해 63세. 아르헨티나의 라 리오하주 페론당 청년위원장으로 시작,18년만인 73년 라 리오하주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중앙정치무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에 의해 5년간 투옥된 민주투사이기도 하다.석방된뒤 알폰신 전대통령의 문민정부시절이던 83년 다시 주지사에 당선됐고 이어 89년 6년단임의 대통령에 선출돼 정상에 올랐다. 엄청난 인플레등 알폰신의 경제난을 이어받은 그는 온 힘을 다해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다.임기를 1년남긴 지난해 4년의 임기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작업을 끝낸뒤 올해 5월 실시된 선거에서 일반의 예상을 깨고 재집권에 성공,정치역량을 과시했다. 메넴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아르헨티나측에서 보면 주로 경협증진이 주목적이다.이를 반영하듯 그의 방한에는 아르헨티나 기업인이 50명이나 수행할 예정이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우리와의 무역에서 4억달러 이상의 적자를 봤다.그들은 우리에게 까다로운 육류수입 제한규정을 완화,쇠고기류 수입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한국은 축구강국인 아르헨티나가 우리의 2002년 월드컵 유치노력을 지원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문제와 우리 기업과 원양어선단의 남미 진출,3만5천명에 이르는 교민보호도 협조 요망사항이다. 아르헨티나의 KEDO참여,한·아르헨티나 두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공동추진하는 「빈곤퇴치운동」도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있다. 메넴대통령에 이어 브라질의 카르도소 대통령의 내년초 방한이 추진되고 있다.김대통령도 내년중 남미 순방을 검토하고 있어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남미와 우리와 경제를 비롯,각 분야에서의 협력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한편 메넴대통령은 한국방문에 앞서 현지에서 연합통신과 인터뷰를 가졌다.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정상회담에서 주로 무엇을 논의할 예정인가. ▲양국간 투자와 교역증진등 경협과 원자로개발등 원자력 기술협력문제등을 거론할 예정이다. ­양국의 민주화에 대한 견해는. ▲아르헨티나는 민정이후 군정청산을 하면서 인권상황이 많이 개선됐다.한국 역시 문민정부이후 경제와 개혁,민주화 부문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남북대화와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견해는. ▲오늘 날의 상황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의 최적기라고 생각한다.모든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겠다. ­한국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월드컵 축구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안보리 진출을 적극 지지할 것이다.한국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도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다른 나라와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회개최권이 한국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파키스탄 핵폭탄 보유/중서 기술지원… 83년 개발 완료

    ◎일 교도통신 보도 【도쿄 연합】 미 정보당국은 83년 파키스탄이 몇개의 원자폭탄을 개발했으며 중국이 74년 이후 핵기술자를 파키스탄에 파견해 핵무기 개발을 직접 지원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일본의 교도통신이 24일 보도했다. 교도통신이 미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미육군으로부터 입수한 두가지 기밀문서에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6명이 방사선 사고로 사망한 것 등 내부정보까지 기록돼 있다.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으나 미정보기관의 문서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며 중국의 핵무기 기술 지원이 새 문제가 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75년5월14일자 미육군정보부의 보고서는 74년10월까지 중국이 핵기술자 훈련과 핵개발 기지건설을 위해 12명을 파키스탄에 파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체적 원조 내용은 ▲핵기술자 훈련 ▲핵에너지 기기 제공 ▲핵개발기지 건설이라고 쓰여있다.
  • “한민족 기맥 끊기”… 경복궁에 터잡아/총독부청사 약사

    ◎14년 걸려 1926년 완공… 전각 4백칸 훼손 조선왕조의 정국 경복궁앞에 버티고 선 옛 조선총독부건물은 우리민족의 「정수리에 박힌 말뚝」.일제가 북악에서 종로 남산으로 이어지는 맥을 끊으려는 의도에서 건축했다.작약꽃송이 모양의 명당에 위치한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다.일제는 공사를 위해 건축학자와 사학자들로 구성된 고건축조사단을 파견해 조선의 궁성을 모두 조사한뒤 조선의 궁맥을 끊을 수 있는 최적지로 경복궁을 선택했다. 이 건물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26년10월1일.1911년 초대총독 데라우치(사내)의 지시로 4년간의 설계와 10년간의 공사끝에 완공됐다.기초설계는 독일인 게오르그 라란데가 맡았고 세부설계는 대만총독부를 설계한 노무라(야촌)와 구니에다(국지)가 했다.설계에만 4년이 걸린 것은 영국의 인도총독부나 네덜란드의 보르네오총독부보다 크고 웅장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기 때문이다.공사도 예정보다 2년이나 늦어졌다. 총독부건물의 규모는 대지 4만7천평에 동서로 2백42칸,남북으로 1백42칸.이 공사로 인해 경복궁의 강령전교태전 등 전각 4백여칸이 헐렸다.이는 경복궁 전체면적의 4분의1에 해당하는 것이다. 총독부건물은 「일」자 형태를 띠고 있다.일부 학자들은 『「대」자형인 북악산과 「본」자형인 서울시청건물과 아울러 공중에서 보면 「대일본」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말한다.위치선정과 설계등 모든 점에서 우리 민족사의 기맥을 절단하고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치밀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총독부건물은 10대총독 아베(아부)에 이르기까지 20년간 잔혹한 일제의 사령탑으로서 군림했다. 일제는 총독부건물과 함께 1927년 경복궁내 과거장등을 허물고 총독관저(구 청와대)를 지었다.풍수지리로 보면 총독부자리는 인체의 「입」,그리고 총독관저자리는 「목」에 해당한다.따라서 경복궁을 허물고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음으로써 왕조와 민족의 숨통을 억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광복후 총독부건물은 미군정청사로 사용됐다.과도 입법의회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승만대통령 정부출범이후 정부청사로 사용됐다.제헌국회 개회식,초대대통령 취임식,9·28수복 등 역사적 사건들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졌다.중앙청이라는 이름은 과도 입법의회가 중앙홀을 사용하면서부터 비롯됐다. 이 건물은 6·25때 대파된후 그대로 방치돼 「유령의 집」으로도 불렸다.제대로 복구돼 정부청사로 다시 활용된 것은 5·16후인 지난 62년11월부터. 그러나 건물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아예 폭파하자는 강력한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재정형편이 감당할 수 없었다. 이 건물에 정부기관이 철수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5공때인 지난 86년.정부청사 이전과 총독부건물 철거여론이 거세게 일자 정부는 3년여에 걸쳐 2백77억원의 개조비를 들여 박물관 개관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철거주장은 6공때도 제기됐으나 1천억원에 이르는 철거및 박물관 이전비용 부담때문에 무산됐다. 이같은 우여곡절끝에 50주년 광복절에 비로소 중앙돔 첨탑부터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총독부건물은 약 68년10개월간 서울 한복판에 버티고 서있었던 셈이다. ◎총독부 첨탑 철거 지휘 유원우씨/“준비해온 2개월 긴장의 연속… 무사히 들어내려 다행” 『일제잔재 청산의 상징적인 작업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돔 첨탑 해체를 무사히 끝내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을 2개월전부터 총지휘해온 철거현장 소장 유원우(44)현대건설 건축부장은 15일 아침 첨탑이 들어내려져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 안착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영남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78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유씨는 아랍토후국 유전시설 공사장 근무등 해외근무 2년간을 빼놓곤 줄곧 국내 공사장에서 17년간을 보낸 현장통.건축과장 시절인 지난 86년 경희궁 개보수 공사를 관리하면서 유적지 현장 공사와 인연을 맺게 됐고 지난해 8월 조선왕궁역사박물관 신축공사를 현대건설이 맡으면서 현장 총책임자가 됐다. 『조선왕궁 역사박물관이 완공되는 내년 상반기에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전체에 대한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약 6개월이 소요될 이 작업은 첨탑해체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한 만큼 신중한 준비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첨탑 해체작업이진행되던 지난 2개월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는 유씨는 『최근 다발하는 건축사고는 비양심적인 건설인의 소치』라며 조선왕궁역사박물관 완공과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전철거되는 내년말까지 양심있는 건설인으로 현장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책으로 되새겨보는 광복 50주년/대형서점 「특별코너」를 살펴보면

    ◎항일투쟁사·일제만행 고발 서적 많아/해방후 현대사 다룬 책도 눈여겨 볼만 광복 50주년을 맞은 오늘 관련서적들을 읽으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이 시대를 사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이다.대형서점이 정리한 관련도서 목록을 바탕으로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 주요서적들을 골라 본다. 올해는 한일관계를 다룬 책들이 유난히 많이 쏟아져나왔다.게다가 내용과 형식이 아주 풍부해 특정 사건·인물의 평가에서 양국 역사·문화의 본질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이 연구서·소설·수기·비평 등 갖가지 형태로 선보였다. 올해 나온 관련도서들을 살펴보면 먼저 일제의 국토강점에 대항해 해외에서 벌인 항일독립투쟁을 소개한 것들이 돋보인다.독립유적지 기행을 비롯,독립운동가의 수기와 전기 등을 통해 자칫 세월에 묻힐뻔한 귀중한 증언들을 수록했다.또 일제의 침략정책을 분석한 연구서,친일파의 모습을 까발린 책도 여럿 나와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만행도 집중 조명했다.종군위안부·징병·징용 등의 강제동원,한국인 원폭피해자의참상,관동대지진 때의 집단학살 등의 실상을 폭로하고 일본이 보상해야 할 부분은 하루빨리 해결하도록 촉구했다.이 가운데는 가해자측인 일본인들이 과거를 반성하는 뜻에서 낸 책들과 제3국인이 객관적 시각으로 일제를 비판한 것이 포함돼 있다. 지난해 「일본은 없다」로 촉발된 일본비평서 붐은 올해에도 이어져 한·일 양국의 상대국 비평서가 많이 출간됐다.상대방의 약점만을 들춰내 비난으로 일관한 책들이 여전히 섞여 있지만 역사·문화를 깊이있게 분석한 책들도 여럿 나와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이밖에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지적한 책도 여러권 나왔다. 광복이 「일제 마수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광복은 곧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출발을 뜻하기도 한다.이런 점에서 광복이후 현대사를 다룬 책들도 눈여겨 볼만 하다.미군정 3년의 공과를 평가하거나,해방공간에서 남북의 어느 한켠에 서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통일 노력을 기울인 남북협상파의 궤도를 추적한 연구서들이 돋보인다.
  • 통계로 본 반세기/자동차수 792만대… 1,251배 폭증

    ◎GNP 53년 67달러서 작년 8,483달러로/전화가입자 4만5천명서 1,781만명으로/박사학위자 38,134명… 1만명당 8.6명꼴/1천명당 이혼건수 1.45건… 70년의 3.7배/1인 연담배 구입량 2,172개비… 3배 증가 광복 당시 6천3백37대에 불과했던 자동차의 등록대수가 50년이 지난 95년 6월말에는 7백92만6천대로 무려 1천2백51배가 폭증했다.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의 수도 52년 당시 10명밖에 없었으나,94년 말 기준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까지 합하면 박사 학위자 수는 총 3만8천1백34명이나 된다.인구 1만명당 8.6명 꼴이다. 65년에는 1만원으로 짜장면 2백86그릇을 사 먹을 수 있었으나,지금은 다섯 그릇 밖에 사먹을 수 없다.지난 해 1만원의 화폐가치는 65년 당시 5백26원밖에 안될 정도로 화폐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국민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통계를 내기 시작한 53년 67달러에서 지난 해에는 8천4백83달러로 1백26.6배가 늘어났다.광복 50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의 각 분야가 크게 달라졌음을 알려주는 통계 수치들이다. 통계청은 10일 광복50주년을 기념하는 「통계로 본 한국의 발자취」라는 기획 간행물을 펴냈다.국토와 인구,농림어업,교육,노동,임금,물가,가계 등 13개 부문으로 나눠 광복 반세기 동안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국토 및 인구◁ 남한의 국토 총 면적은 49년 9만3천6백34㎦에서 93년에는 9만9천3백92㎦로 6.2% 늘어났다.간척사업 등 국토개발 사업의 효과다.그러나 농경지의 면적은 국토 총 면적의 21.9%에서 지난 해에는 21.4%로 0.5%포인트가 낮아졌다. 총 인구는 45년 1천6백87만3천명(당시 미군정청 추계자료)에서 지난 7월 1일 현재 4천4백85만1천명으로 2.66배가 늘었다.48년에는 2천만명을,67년에는 3천만명을,84년에는 4천만명을 각각 넘어섰다. 47년 39.3%였던 유년인구(0∼14세)가 지난 해에는 23.2%로 줄어든 반면 65세 이상의 노령층은 3.5%에서 5.5%로 증가했다.유년층에 대한 노년층 인구의 비율인 노령화 지수는 9%에서 24.5%로 크게 높아졌다. 여성의 가임기간(15∼49세) 동안 평균 자녀의 출산 수는 60년 6명에서 93년 1.8명으로 줄었다. ▷농림어업◁ 농가 수는 49년 2백47만4천가구에서 지난 해에는 1백55만8천가구로 37%,농가인구는 1천4백41만6천명에서 5백16만7천명으로 2.8배가 각각 줄었다.총 인구 대비 농가인구 비율은 71.4%에서 11.5%로 크게 낮아졌다. 농가인구 중 50∼59세는 55년 10.6%에서 지난 해에는 18.3%로,60세 이상은 4.7%에서 25.2%로 각각 늘었다.93년의 농가 가구당 연 평균 명목소득은 1천6백92만8천원으로 54년에 비해 1천1백28.5배,가구당 자산총액은 4천5백93.1배가 각각 늘었다. 광복 당시 1백84만8천4백t이었던 쌀 생산량은 지난 해 5백5만9천8백t으로 2.7배가 늘었다.채소 및 과일의 경우 무는 8.2배,배추 16.6배,수박 69.2배,양파 6백1.3배,사과 39.7배가 각각 늘었고,밀감은 60년에 비해 무려 2천8백89.3배나 늘었다. ▷광공업 및 에너지◁ 금의 생산량은 45년 1백97㎏에서 지난 해에는 1만2천3백32㎏으로 62.6배,은은 8백58㎏에서 25만7천4백98㎏으로 3백배가 각각 늘었다.인구 1인당 연간 담배 판매량은 45년 7백34개비에서 지난 해에는 2천1백72개비로 3배가 늘었다.총 발전량도 광복 당시에 비해 2백32.1배가 증가했다. ▷건설·운수·도산매◁ 도로의 총 길이는 47년 2만4천4백43㎞에서 93년에는 6만1천2백95㎞로 2.5배,1㎞당 자동차 대수는 0.5대에서 1백2.4대 꼴로 각각 늘어났다.도로 포장률은 4.3%에서 84.7%로 늘었다.자동차 등록대수 중 승용차의 비율은 45년 20.7%에서 지난 해 69.5%로 늘었고,버스는 광복 당시에 비해 5백3.5배,화물차는 4백51.9배가 가 늘었다. ▷우편·금융·재정 우체국◁ 수는 45년 6백92개에서 93년 3천3백10개로 4.8배,전화 가입자는 4만5천명에서 지난 3월 1천7백81만6천명으로 3백92.1배가 늘었다.이동전화 가입자는 74년에 비해 3천4백29배,무선호출기 가입자는 82년에 비해 1만1천36배나 늘었다. 화폐 발행액은 45년 8백80만원에서 지난 해 15조8백90억원으로 17만1천배나 늘었다.어음 교환액은 45년 5백만원 가량이었으나,94년에는 5천7백81조로 늘었다.45년의 어음 부도율은 장수 기준 0.38%였으나 지난 해에는 0.11%로 낮아졌다. 수출 1위 상품은 55년에는 비식용 원료에서 61년에는 철광석,지난해에는 TV·VTR 등의 전자전기기계 제품으로 바뀌었다.외환 보유액은 50년에 비해 9백58배,외화자산은 67년 대비 1백67배,외화부채는 2백16배가 각각 증가했다. ▷교육 및 보건◁ 국민학교 수는 45년 2천8백34개,학생수는 1백36만6천명,교사 1인당 학생 수는 1백43.6명,학급당 학생 수는 65명 꼴이었다.그러나 지난 해에는 학교 수는 5천9백개로 2.1배,학생 수는 4백9만9천명으로 3배가 늘었고,교사 1인당 학생 수는 29.5명으로 4.9배 가량 줄었다.학급당 학생 수도 37.7명 꼴로 줄었다. 의사 수는 48년 3천5백69명에서 5만4천4백6명으로 늘어나며 의사 1인당 인구 수는 5천6백51명에서 8백24명으로 낮아졌다. ▷공공행정 및 기타◁ 사법고시 응시자 수는 49년 6백35명,합격자 수는 16명,경쟁률은 39대1의 수준이었다.그러나 지난 해에는 1만9천7백36명이 응시,2백90명이 합격했고 경쟁률은 68대1의 수준이었다.행정고시는 49년 5명이 합격했으며,경쟁률은 1백대1로,지난 해(75대1)보다 오히려 높았다.
  • 「푸에블로호」 대북 직거래 항의에 미,한국에 1억달러 군사원조

    ◎일지,미 문서 분석 내막 보도/지휘체계 복잡… 초기대응 실패 【도쿄 연합】 지난 68년 동해상에서 발생한 미해군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은 당시 미군지휘체계의 복잡성 등으로 초기대응에 실패했으며 미정부는 결국 북한이 요구한대로 영해침범에 사죄하는 굴욕적인 문서에 서명했었다고 일언론이 2일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이 미국무성·국립문서보관소 등의 해금문서를 분석,재조명한 푸에블로호사건의 내막에 따르면 당시 미정부는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동기로 한반도에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있던 미국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정부는 이와 함께 북한과 직접교섭을하는 과정에서 당시 베트남전에 병력을 파견한 한국정부가 북한과 직접 접촉하는 데 강력히 항의하자 특사 3명을 한국에 파견,1억달러의 군사원조를 추가로 제공했다. 다음은 이 신문이 해금문서를 토대로 보도한 내용. 『68년1월23일 나포사건 당일 러스크 미국무장관은 주소련 미대사에 훈령을 보내 「그로미코소련외무장관에게 사건의 사실관계를 전하고,북한에 푸에블로호와 승무원 송환,부상자 치료 등을 요청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그러나 그로미코 소련외무장관은 중재를 거부했다. 미정부는 당시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 등 20개도 넘는 대응책을 검토했으며 리버스 하원 군사위원장은 「북한이 석방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핵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항모 엔터프라이스 등을 동해에 배치하기도 했으나 「승무원 송환을 위해서는 외교적 해결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2월1일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직접교섭을 갖자는 북한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북한은 직접교섭에서 스파이활동중의 영해침범을 인정할 것,다시는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보장할 것 등을 명시한 문서를 미측에 전달했다.미정부는 그해 12월23일 북한이 준비한 굴욕적인 문서에 서명했다』
  • 제헌국회의 공과(새로쓰는 한국현대사:29)

    ◎헌법·각종 기본법률 제정… 민주주의 토대구축/일제잔재 청산 미비·농지개혁 실패 등 실정도 1950년 5월 30일 제헌국회는 두번째 정기회기를 마침으로써 2년여만에 막을 내렸다.이 날은 마침 제2대 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한 날이었다.대한민국 출범이후 지금까지 14대의 국회가 구성됐지만 제헌국회의 의미는 각별할 수 밖에 없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비롯한 각종 기본적인 법률의 제정,초대 대통령 선출등 대한민국 탄생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또 일제 잔재 청산등 묵은 시대를 정리하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은 대단하다.물론 새로 도입한 민주주의 제도가 우리 사회에는 생소한 것이어서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고 일제 청산이 미흡한 점 등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고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헌국회 2년을 수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선거에서 의원 1백98명이 선출됐다.회기는 그해 5월 31일 개막해 2백3일동안 계속된 임시회를 비롯,임시회와 정기회를 합쳐 6차례,6백40일동안 문을 열었다.임기 7백30일 가운데 90일을 제외하곤 늘 개회 상태였으니 신생국가의 첫 의회답게 엄청난 열정을 보였던 것이다.실제로 첫 임시회는 정기국회 개회를 이틀 앞둔 48년 12월 18일 폐회,하루만 쉬고 다시 회기에 돌입할 정도였다. 이같은 열의로 제헌국회는 2백34건의 법률안을 통과시켰다.또 2백26건의 청원을 접수해 65.5%인 1백48건을 처리했다.국회 자체의 건의·결의안은 모두 1백45건이나 됐으며 1백1건을 가결했다. 이같은 활동 중에서도 제헌국회가 다룬 주요 의제로는 반민족 친일파의 처벌,미군 철수대응,국가보안법 제정,농지개혁과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꼽을 수 있다.특히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대응은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사활이 걸린 최대 현안이었다.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분단은 곧 전쟁을 불러오리라는 예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더욱이 북한의 군사력이 대한민국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된 상태였다.따라서 주한미군의 존재는 국가안보를 위해 꼭필요했고,만약 미군이 떠난다면 그에 앞서 자체 국방력을 대폭 강화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의 칼자루는 물론 미국 정부가 쥐고 있었던 만큼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미 정부는 1947년 9월 말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정지작업을 했다.하지만 미 국무성과 육군성,그리고 주한 미 군정 사이에는 입장에 따른 견해차가 있었다. 육군성은 『한국에 대해 군사전략적인 이해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합동참모부(JCS)의 분석을 바탕으로 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미 군정도 군정을 지속시킬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상황이 악화됐다는 이유로 철군을 지지했다.국무성도 철군주장에는 동의했다.다만 한국이 공산화하지 않도록 철군에 앞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미정부는 1948년 4월 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NSC 8)」이라는 문서를 채택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했다.이 문서에는 주한미군이 그해 12월 31일까지 철군을 완료하도록 규정돼 있었다.하지만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남북한간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철수는 계속 연기됐다.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미군철수를 반대하지만 일단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더 많은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꿔 미 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했다.이에 미국도 군사고문단을 설치하고 국방경비대를 강화하는 등 철군이후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헌국회 내에서도 미군 철수는 최대의 논쟁점이 되었다.1948년 10월 13일 제87차 본회의에서 의원 46명은 「외군철회 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그들은 『자주국가로서 자율권이 엄연한 이상 외군의 주둔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다음 유엔을 겨냥,『유엔은 총회에서 19 47년 11월 14일 결의한 기록을 회상해』외군철수를 조속히 시행하라고 요구했다.이에 대해 많은 의원들은 「공산당 모략」이라고 흥분했고 양쪽 의원들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국회의장이 경위를 출동시키기 까지 했다. 이어 11월 19일에는 최윤동 의원 등 99명이 『대한민국의 방위태세가 정비될 때까지 미군의남한주둔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미군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이 결의안은 약간의 논란을 거친 뒤 표결에 들어가 재석 1백13명 가운데 찬성 88,반대 3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외군철회 동의안」이 나온 뒤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 속에서 미군철수 주장이 급격히 사그라든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반역자 노릇을 한 친일파를 처벌코자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제헌국회는 48년 9월 친일파를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곧 이어 이를 실행할 기구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반민특위」는 김상덕 의원을 위원장으로 뽑고 중앙과 지방에 사무국을 설치했다.또 친일파를 기소·재판할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도 정하는 등 발빠르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위원회는 넉달동안 3백5명의 친일분자를 검거하는 실적을 올리지만 곧 활동이 벽에 부딪힌다.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이승만 정부가 시국이 불안정한데 사회지도급 인사를 대량검거하면 사회불안을 가중한다며 반대했기 때문이다.게다가 19 49년 6월에는 친일파의 조정을 받은 사회단체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라』며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특위 소속 사법경찰관이 습격을 받는 등 온갖 행패가 자행됐다.국회는 그해 8월 22일 「반민특위 폐지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행정부에 굴복했고 친일파 처리는 흐지부지돼 아직도 역사의 짐으로 남아 있다.제헌국회가 친일파 처리에 좌절한 것은 당시 국회·행정부를 차지한 계층의 본질적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국회는 이밖에도 국가보안법·농지개혁법·지방자치법등을 제정해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개혁 의지를 보였다.『국헌을 위배해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은 48년 11월 19일 통과됐다.이 법에 대한 논의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이 『악용할 소지가 있다』고 반대했고 일부 문구의 수정이 있었지만 투표에서는 찬성 84,반대 3으로 가결됐다.남북이 대치하고 「여순반란사건」등 공산주의 폭동을 여러차례 겪은 그때 상황에서 국가보안법 제정은 어쩔 수 없는선택이었을 것이다. 「농지개혁법」은 49년 6월 21일 제정됐다.헌법 제86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소유의 한도,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는 규정에 따라 하위법으로 마련된 이 법은 유상매수­유상분배를 골자로 했다.농지개혁법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결국 대농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 전문/이 대통령,49년4월11일 미군철수 동의/1년간 강력반대… 미,계획 수차례 연기/무기이양·군사고문단 설치 조건 수락 대한민국 수립직후부터 한국과 미국 양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싸고 협의를 계속했다.한국은 철군을 강력하게 반대한 반면 미국은 한국 안보를 위한 보완책을 제시하며 설득했다. 미 정부는 1948년 4월 2일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정리한 「한국에 관한 미국의 입장 (NSC 8)」을 미군철수의 지침으로 삼고 있었다.그 내용은 49년 3월 31일까지 철군을 끝낸다는 것이었다.그러나 한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미국이 계획한 철수 일자는 점차 늦어졌다. 시한은 5월 10일로 한번 수정됐다가 49년 3월 23일 채택한 「NSC 8­2」에서 그해 6월 30일로 최종 결정됐다.따라서 49년 4월 미국으로선 상당히 초조한 상태였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당시 양국에서 오간 문서 가운데 한국측 입장 변화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전문을 발굴했다.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입수한 이 문서는 주한미군사령부가 49년 4월 12일 미 국무성에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날 미군철수에 마침내 동의했으며 며칠안에 이같은 사실을 국민에게 공개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철군에 앞서 미군이 한국의 육군,해안경비대,경찰에 장비를 이양하며 정식으로 군사고문단을 설치한다는 조건에 합의했음을 밝혔다. 이대통령은 합의에 따라 4월 18일 주한미군 철수를 공표했으며,주한미군 1천5백여명은 49년 6월 27일 인천항을 통해 철수했다.
  •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속의 두거인 재조명

    ◎이승만·김구의 우정과 갈등/황해도출신 한살산… 상해 임정활동 공통점/해방후 우남은 「군정」·백범은 「협상」을 추구 조선왕조 끝시기로부터 오늘날 남북대립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남은 18 75년에,백범은 18 76년에 태어났다.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사실상 동년배지만 백범은 우남을 평생동안 형님으로 모셨다.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우남은 성장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 등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했다.그리고 일찍 기독교 정신문화를 받아 들였다.이와는 달리 토착적 성장의 길을 걸은 백범은 서당 글공부가 교육의 전부였다.또 토착종교 동학에 가담해 왜병과 싸우는 등 민족적 정열을 불살랐다. 두사람은 1919년 3·1운동 직후 시차를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맺는다.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백범은 마지막 주석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우남과 백범은 임정과의 연결에서 질적 차이를 드러냈다.백범은 임정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간판을 해방의 시점까지 지킨데 비해 우남은 미국을 무대로 외교 선전 측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환국해서는 독립정부 수립운동에 앞장 섰다.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소·영·중 4개국 외무장관 합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는 손을 맞잡고 싸웠다.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차츰 노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우남은 강력한 반소·반공론에 입각해 남한의 단선·단정노선을 제기하고 나섰다.이 노선에 반대한 백범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앞세웠다. 1947년에 공식화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남이 주장해온 단선·단정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리하여 미국의 주도아래 국제연합은 19 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건국시키는 일을 서두르게 됐다.남한의 단선·단정은 분단체제의 고착은 물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비판한 백범은 남북협상을 추진했다.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그러나 북한은 곧 세워질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쌓는데 두 애국지도자의 충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5·10총선거에 따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성립됐다. 국회의장에 선출된 우남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5·10총선을 거부했던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였다. 백범의 통일운동은 고귀했으나 외로웠다.결국 1949년 6월26일 육군대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꿈꾸던 그의 숭고한 사상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우남은 건국 초기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특히 1950년6월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을 맞아 미국과 국제연합 지원아래 싸워서 국가를 수호했다.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는 확실히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사사오입개헌과 1960년 3·15부정선거는 그에게 오명을 안겨 주었다.그는 전 국민을 분노시킨 4·19혁명에 의해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종합해 생각해 보건대 백범 두분 모두 우리 배달겨레에게 소중하게 기억된다. 우남은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백범은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잊지 않게 하는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두분은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우남의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는 그의 뛰어난 국제정치 안목을 보여 주고 백범의 「백범일지」는 그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말해 준다.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수지여사/정치 재개 선언/연금해제 하룻만에

    ◎“미야마군정과 대화” 【양곤 AP 연합】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6년간의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아웅산 수지여사는 12일 정치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지여사는 이날 기자들에게 『나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정부 당국은 내가 정치활동을 할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군장성들에게 국가 통합을 위해 대화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온 수지여사는 이날 『협상을 위해 모든 것이 열려 있으며 모든 문제는 호의와 타협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웅산 수지여사는 지난 10일 돌연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11일에는 자택에서 세계 주요 언론과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미얀마 군사정부는 12일까지도 연금 해제사실을 국내에서는 발표하지 않고 있다. 미얀마 군사정부의 이같은 묵살 태도에 대해 이곳 외교관들은 수지여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극소화하려는 것으로 풀이했다.
  • 서울 상장물(외언내언)

    서울시 청사 현관 위쪽으로 8개의 톱니안에 둥근 원이 그려진 마크가 새겨져 있는 걸 볼수 있다.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서울시의 상징 마크이다. 8개의 톱니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북악·인왕·남산·낙산등 8개의 봉우리를,그 안의 원은 서울성곽을 상징한 것이다.1946년 미군정하에서 「서울」이란 명칭이 선포된 뒤 이듬해 시민들의 공모로 채택된 휘장이다.이 휘장만으로 보면 서울의 공간을 도성안으로 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에는 대개 심벌마크와 상징기념물이 정해져 있다.미국 뉴욕의 상징물은 커다란 사과인 「빅 애플」(BigApple)이고 일본의 도쿄도에서는 도민의 새로 철새종류인 붉은부리 갈매기를,도민의 나무로는 은행나무를 지정해 놓고 있다.유럽의 도시들은 깃발을 상징물로 정하고 있는데 파리의 상징은 센강의 배가 그려진 깃발이다. 서울시에서도 서울의 나무와 꽃,새를 지정한지 오래된다.시 나무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공해에도 잘 견뎌 가로수로 많이 쓰이고 있는 수종.천년도 더 사는 강인한 생명력을 서울시의 발전에 접목시킨 것이다. 시꽃은 개나리,새는 길조로 통하는 까치로 정해져 있다.그러나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는 시민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홍보부족으로 아직은 시민들의 생활속에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번에 민선시장 시대의 출범을 계기로 수도 서울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마크·슬로건 등을 새로 제정할 것이라고 한다.서울의 정체성을 살리고 새로운 이미지를 표현하자는 것이 그 취지. 인구 1천만이 넘는 대도시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거기에다 6백년의 역사를 갖는 고도란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가.서울을 사랑스러운 도시로 가꿀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친근한 상징물이 제정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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