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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헨군정때 인권탄압 앞장”/교황청 라기 교육위원장 피소

    ◎당시 교황파견 추기경… 반정세력 고문 주도 【로마 AP 연합】 지난 76∼8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하에서 실종되거나 숨진 희생자들의 어머니들로 구성된 인권단체가 당시 교황의 개인 사절로 파견됐던 피오 라기 추기경이 인권탄압에 앞장섰다면서 20일 이탈리아 법무부에 소송을 제기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라는 아르헨티나 인권단체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첨부한 고소장에서 라기 추기경이 지난 74부터 7년간 로마교황 대사 자격으로 아르헨티나에 머물면서 군정과 긴밀히 협력,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고문·살해·실종 등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라기 추기경은 현재 교황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직위 중 하나인 가톨릭 교육위원장을 맡아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라기 추기경을 살인과 납치 및 고문을 자행한 혐의로 기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고소장은 『피오 라기는 수천명의 젊은이를 숨지게 한 「공산주의에 대한 성전」의 지휘자였다』며 『사제들과 전도사들,노조 지도자들,정치 지도자들 모두가 그가 지시한 심문으로 고통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가톨릭 주교들은 자신들이 「더러운 전쟁」 기간중 국민들이 공포정치에 떨도록 한데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 국사편찬위,48∼87년 역사 「자료 대한민국사」로 정리

    ◎건국이후 현대사 첫 공식 편찬사업/각종 공·사문서­신문자료·회고록·증언 망라/주관 개입막게 원문 수록… 편년체방식 채택 정부출범 반세기만에 정부의 공식문서는 물론 모든 현대사의 사료를 망라하는 역사편찬 사업이 시작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올해부터 오는 2020년까지 1948년 8월 정부출범부터 87년 12월 제5공화국시기까지 40여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자료 대한민국사」 편찬작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68∼74년에 편찬된 「자료 대한민국사」의 작업을 23년만에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기존의 「자료…」는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사료를 정리한 것으로 대한민국정부 출범이전 미군정기만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번 「자료…」는 건국이후 역사에 대한 정부의 첫 공식 편찬사업이라 할 수 있다. 「자료…」에는 건국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와 발전과정을 당시 국내외에서 만들어진 각종 공·사문서와 기록,신문자료,회고록,증언 등이 광범위하게 수집 정리된다.주관적인 입장이 개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된 원자료는 아무런 해석없이 그래로 수록한다. 특히 원자료를 날자별로 수록하는 편년체적인 편찬방식을 채택했다.편년체적 기술방식은 조선실록의 편찬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가장 객관적인 역사기술 방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제·외교·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정부 공식 기록이외에 퇴직한 공직자의 개인소장 기록과 미국 정부 보존자료,흩어진 각 정부부처 및 정보기관의 자료도 가능한 한 최대한 수집할 예정이다. 올해부터 2020년까지 5단계로 나누어 간행할 예정으로 우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8월∼50년6월까지의 사료를 정리해 2000년에 8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우선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국가 공식 행정문서가 1960년 이후에야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60년 이전의 사료편찬은 현재 살아있는 정부 인사의 증언이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미국정부와 주고받았던 각종 서신이 현재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어 열람이 쉽지 않다.또 60년 이후라 할 지라도 정부의 모든 영구·준영구 문서가 정부기록보존소에 제대로 이관되지 않고 각 기관에 산재돼 있는 실정이다. 「자료…」 편찬작업의 실무책임자인 국사편찬위원회 이상근 근현대사실장은 『기초조사결과 문서보존기간에 대한 편의적 분류때문에 중요문서가 폐기되거나 국가정책결정과정에 참여했던 주요 인사들이 그에 관련된 문서를 자의적으로 폐기하거나 빼돌린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앞으로 예상되는 편찬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 미 미얀마제재안 곧 발효/클린턴 승인/군정 인권탄압에 경제봉쇄

    【워싱턴 AP 연합】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미얀마 군사정부의 인권유린에 대한 응징으로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승인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22일 보도했다. 신문은 이번 경제제재조치는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끌고 있는 민주국민연맹(NLD)지지자 5백50여명이 군사정부에 의해 구금되는 등 미얀마의 인권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라면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만간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 육군정책발전세미나 정종문 원장·김봉기 중령 주제발표

    ◎국민의 신뢰가 강한 군인 만든다 육군은 10일 하오 육군회관에서 도일규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관계자 정계·학계·언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21세기 군과 병영생활 발전」이라는 주제로 「97 육군 정책발전 세미나」를 가졌다. 세미나에서는 한국통일전략연구원 정종문 원장이 「국민과 함께 하는 군」,서울대 홍두승 교수가 「직업군인의 삶」,민병돈 전 육사교장이 「하부구조 전투력 향상방안」,현역대대장인 김봉기 중령이 「신세대 병영생활의 정상화」에 관해 주제발표를 했다.다음은 정원장과 김중령의 주제발표 요지이다. ◎정종문 원장/훼손된 자존심·명예 되살려줘야 ▲국민과 함께 하는 군(정종문 한국통일전략연구원 원장)=국민의 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며 강력한 상무정신으로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군을 말한다.강한 국민의 군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절실해진다.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국민이 나서서 도와줄 일이 있다. 첫째 훼손된 군의 자존심과 명예를 되살려줘야 한다. 둘째 군도 가족에 책임을 지는 직업인이며 생활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녀교육과 주택문제,장래에 대한 보장을 해결할 수 있는 성의있는 개선책 마련에 협력해야 한다. 세째 사건·사고에 대한 해당 지휘관 문책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와 기준을 토대로 해야한다.무조건 문책방식은 재검토돼야 한다. 네째 포괄안보나 협력안보같은 신국제주의적 안보이론이 군사중심의 전통적인 안보개념에 혼란을 가져오고 이에 따라 군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신중해야한다. 다섯째 개방화시대에는 군도 홍보와 로비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현실을 무시한 예산당국자들의 군예산 책정과 집행 방법상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고치도록 촉구해야 한다. 군은 특수직업이다.젊은 장교들이 군복을 벗어버리고 싶은 좌절감과 사기저하 현상을 하루빨리 없애주어야 한다.국민은 안보불감증에서 깨어나 강한 국민의 군을 만들어 주어야 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이를 위해 국민은 군과,군은 국민과 가까와져야 한다. ◎김봉기 중령/소부대 의사 결정능력 신장 필요 ▲신세대 병영생활 정상화(김봉기 중령)=신세대 병사들은 군 하부구조전투력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이들은 기성세대의 눈에 여러 부정적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합리적인 성향도 갖고있다.신세대 병사들의 부정적 성향 못지않게 긍정적 성향에 주목해 그들의 성향과 욕구를 이해하고 수용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우리 군도 변화해 나가고 있다. 병영생활의 정신적 측면에서는 무조건적인 복종 강요와 하급제대 및 하급자에 대한 잦은 검열로 인한 조직상의 「관료주의화」 현상과 임무수행상의 「관성화」 현상이 해소될 수 있도록 소부대 단위에서의 자치와 자율의사 결정능력이 신장돼야 한다. 나아가 병력관리면에서 하사관들에게 역할과 임무를 부여해 책임과 권한을 갖고 근무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해 나가야 한다. 동시에 군의 미래를 담당할 주역들인 초급간부들이 자신의 삶의 보람과 미래 비전의 내용들을 군에서 찾을 수 있도록 전반적인 「삶의 질」에대한 향상책이 군 내부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또 이러한 기반위에 현장감있는 교보재의 개발과 혹독한 교육훈련을 정착시켜 나아감은 물론,전투근무지원 분야의 발전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군의 혁신은 일차적으로는 군의 몫이지만 국민의 신뢰와 지원속에서만 가능하다.그 지원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군에 대한 국민의식의 혁명적 변화이다.자식을 군에 보내면 사람이 되어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는 불식되어야 하고 가정교육을 잘 시켜 훌륭하게 키운 자식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군에 보낸다는 의식으로 전환되어야 21세기 일류군대 건설이 가능할 것이다.
  • “중 2010년까지 항모 건조”/미 해군정보국

    ◎동아주군사력 7년내 중 우위 전망 【홍콩 연합】 중국은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고 원유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오는 2010년 이전 완성을 목표로 항공모함을 자체 건조키로 확정했다고 홍콩의 명보가 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 해군정보국(ONI) 보고서를 인용,중국은 항모 자체건조 결정과 함께 최신예 전투기와 첨단무기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어 2005년께가 되면 대만해협의 군사력 균형이 중국의 우위로 바뀔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세력균형 유지를 위해 미7함대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한때 우크라이나로부터 항모를 구입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경제적 부담 등 때문에 실현성이 없다고 판단,항모를 자체 건조로 방침을 바꾸고 역시 자체 생산할 제4세대 전투기 F10을 탑재시킬 계획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또 독자적으로 개발한 F10 다목적 전투기를 오는 2005년에 실전배치하고 2015년부터는 XXJ 전투기 생산에도 돌입할 계획이다.
  • 중 새달 대규모 해상훈련

    【대북 AFP 연합 특약】 중국은 다음달 중국 남동부 해안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연합보가 24일 군정보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신문은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이같은 군사훈련 계획을 마무리지었다면서 훈련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빠른 시일 내에 훈련이 이뤄질 것이며 광동성 북부나 복건성 또는 절강성 남부 가운데 한곳에서 훈련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보는 이어 이 군사훈련이 티베트 분리독립운동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대만방문과 연계돼 이뤄지는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 황 비서 민간시설 체류/케이블TV 보며 소일

    황장엽 북한노동당비서는 한국이나 미국시설이 아닌 필리핀의 한 민간시설에서 군정보당국의 보호아래 많은 시간을 케이블TV을 보면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비서는 또 한국음식 전담요리사와 의사를 대동한채 건강하게 지내며 서울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필리핀군 보안·정보총책임자인 벤자민 리바네스 준장이 밝혔다고 「더 필리핀 스타」지가 23일 보도했다.
  • 황장엽 체류 비 바기오 표정

    ◎은신 추정 대통령별장 정문에 중무장군/“「맨션하우스」로 지프 7대 들어가” 목격/체류중 신변보호 비 군정보국서 전담 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 일행은 마닐라 북쪽 고산 휴양도시인 바기오 시내에 위치한 대통령 전용별장인 맨션하우스,또는 필리핀 육군사관학교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맨션하우스는 수만평 넓이에 숲 중앙에 스페인식 흰건물이 자리한 고풍스런 분위기로 정문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맨션하우스 주변 레오날드 우드로드에 사는 교포 한모씨(29)는 『황비서 일행이 온다는 날인 17일 하오 8시30분쯤 대통령이 올때만 사용하는 7대 대형 검은색 지프가 이곳에 열을 지어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한씨는 또 『대통령이 올때는 종종 안전을 이유로 이 지역에 정전이 발생하는 것은 알려진 일이나 그날은 대통령이 온 것도 아님에도 차량행렬이 시작된 8시30분부터 2시간동안 정전이 있었다』고 전했다.특히 이곳은 평소 대통령이 여름에 자주 집무실·휴양소로 사용하는 곳으로 경비체제가 잘 갖춰져있어 황비서 일행이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지적. ○…그러나 일부에서는 황비서 일행이 이곳 육군사관학교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한 정통한 정보소식통은 『사관학교내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 황비서 일행이 여장을 풀기에 안성맞춤』이라며 『경비,또한 평소에도 잘 갖춰진 데다 유사시에는 생도들을 경호병력으로 사용할수 있다』고 설명. ○…황비서 일행의 필리핀 체류기간중 신변보호는 필리핀 군정보국이 전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군정보국은 우리측 관계기관과 협의,황비서 일행을 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리고 있다.황비서 일행의 신변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은 신변위협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 군정보국은 당초 황비서 일행의 필리핀 입국지점으로 수비크 국제공항과 미공군기지로 사용했던 클라크공항,빌라모 공군기지 등 3가지 방안을 마련.하지만 수비크와 빌라모에 언론의 시선이 집중되자 막판에 클라크로 결정됐다는 후문.한 정보소식통은 장소를 복수로 하는 것은 요인경호의 기본이라며 마지막에 장소를 확정해야만경호정보의 사전누출을 막을수 있다고 설명.
  • 양안회담 곧 재개될듯/대만 여객기 납치범 송환 협의

    【홍콩 연합】 중국과 대만은 10일 대만 국내여객기를 중국으로 납치한 후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 전직 대만 군정보요원의 송환문제와 관련,그동안 중단됐던 양안회담을 조만간 재개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했다. 11일 홍콩 신문들에 따르면 대만 정부대변인인 소기신문국장은 련전부총통의 말을 인용,민중일보기자 류선충(46)의 이번 대만 국내여객기 납치 사건은 양안회담이 조속히 재개돼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대만의 료정호 법무부장은 이번 여객기 납치범인 류선충의 재판관할권은 대만에 있다며 중국에 대해 그를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 김 대통령 각계원로·당 천거 수용/총리발탁 뒷얘기

    ◎지난달 22일 오찬회동 직접 지시/작년 총선때도 불러 전국구 제의 「고건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이 시중의 여론을 종합해 결정한 작품이다.지난달 중순 대국민담화발표와 당정개편의 수순을 그리면서 「총리후보」로 일찌감치 점찍었다는 후문이다. ○…김대통령은 지난달 22일 고건 당시 명지대총장과 오찬회동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오찬일정은 비서실에서 짠게 아니었다.김대통령이 고총리를 청와대로 부를 것을 직접 지시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청와대 면담에서 김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고총리는 가까운 인사들에게 『총리직을 제의받고 고심하고 있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김대통령이 「고건총리」기용 결심을 굳히기까지 각 사회단체 대표와 신한국당 고문들의 천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김대통령은 지난달초부터 각계 원로와 신한국당 주요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시국수습을 위한 여론을 청취했다.이들중 많은 이들은 「탕평인사,지역편중 배제,능력위주 인사」를 요청하며 고건씨를 중용하도록 건의했다.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지난해「4·11총선」을 앞둔 지난해 2월에도 고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전국구를 제의하며 같이 일하자고 제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 총리의 「관운」/37세때 도지사 역임… 최연소 기록/5·17뒤 청와대 정무수석직 사표/서울시장 제임땐 「수서」외압 거부 ○…고총리는 「억세게도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꼽힌다.30대 전남지사,40대 청와대정무수석을 지냈고 교통·농수산·내무장관,국회의원,서울시장,명지대총장까지 거쳐 이제 총리에 올랐다. 「행정의 달인」이라 불리는 실무형 관료인가 하면 대인관계가 원만해 결코 적을 만들지 않는다.또 주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언변에다 보스기질도 그의 장점이다. 고총리는 전북대총장·6대국회의원을 지낸 고형곤씨(92)의 차남으로 부자 2대국회의원·대학총장의 기록도 갖고 있다.부친 고 전 총장은 김대통령의 서울대 철학과 은사이기도 하다. 고총리는 본적은 전북 군산이나 실제로는 38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나 창천국교,경기중·고를 거쳐 5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문리대학생회장을 지냈다.61년 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당시 부친이 야당(민정당)의원이어서인지 내무부에서 1년반이면 받던 계장보직을 3년반만에 받는 등 천대(?)를 받기도 했으나 그 후로는 정말 승승장구했다.75년 37세로 최연소 도지사(전남)가 됐다.5공시절에는 교통·농수산장관,12대민정당의원(군산·옥구),내무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정무수석으로 있던 80년,5·17확대계엄조치를 맞이해 청와대에서는 유일하게 사표를 던졌다.그는 『확대계엄조처로 군정으로 가는 것은 찬성할 수 없었다』고 그때를 말했다.그러나 그는 이후 1년도 안돼 교통장관으로 입각,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88년 4·26총선때는 「황색돌풍」에 밀려 낙선했으나 곧 서울시장으로 재기했다.서울시장때 수서사건에 앞서 외압을 거부하며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아 경질되는 등 강직함을 보였다. 부인 조현숙 여사(59)와 진(36) 휘(35) 위(29) 세 아들을 두고 있으며 테니스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 북 엑서더스 기폭제… 민족사의 대사건/황장엽 망명­전문가 좌담

    ◎군부 입김 강화… 「붉은기 철학」 등 사상통제 수정/김정일에 치명타… 친중 제3권력 등장 가능성 □참석자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 ·유창렬 외교안보연 교수 ·김종일 서울신문 국제전략연 소장 김정일 측근이자 북한의 주체사상 대부인 당비서 황장엽의 예상치못한 망명은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황이 왜 망명했는지,그의 망명이 북한은 물론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북한문제전문가인 김창순 이사장(북한연구소),유석렬 교수(외교안보연구원)와 김종일 소장(본사 국제전략연구소)과의 좌담을 통해 알아본다.〈편집자주〉 ▲김종일 소장=북한의 거물인 황장엽의 망명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북한이 황의 망명에 대해 즉각 「불가능한 일」이고 납치라고 억지를 부리는데서 볼 수 있듯이 북한에 준 충격과 당혹감은 이루말할수 없을 것입니다.그동안 김정일의 각별한 보살핌과 북한에서 특혜를 받아오던 황장엽이 왜 북한을 등지고 한국에로의 망명의 길을 택했는지,먼저 탈북동기부터 짚어볼까요. ○망명 의도 오래된 듯 ▲유석렬 교수=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 방문목적이 실패한 것에서 찾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번에 일본을 방문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주체사상연구소의 초청에 참석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량난과 대일관계의 돌파구를 뚫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북한은 식량지원때문에 황의 방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이게 무산된 것이고 빈손으로 돌아가게된 황은 면목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두번째로 김정일의 통치방식에 황이 동의할 수 없게 된 것도 큰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나가지 말고 개혁과 개방을 해야한다는 것이 황의 생각인데 이는 김정일의 통치스타일및 사상과는 다른 것이죠.또 주체사상의 수령론은 황장엽의 체계적인 이론에 근거한 것입니다만 김정일이 여기에서 일부 필요한 것은 뽑아쓰고 주체사상을 변질시킴으로써 주체사상이 결과적으로 점점 약화되어갔고 황이 중심세력에서 멀어져 간 것도 그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했을 것입니다.세번째로 북한사회에 더이상의 희망이나 전망이 없다는 생각도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암담한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 상당기간 망명을 생각했을 것으로 봅니다. ▲김창순 이사장=그렇습니다.황장엽은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왔을 것으로 보입니다.황은 북한에서 혁명1세대도 아니고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사람이죠.김일성시대에 만들어진 이론가인데 지식인인만큼 통치이념면에서 남다른 고민을 해왔을 것입니다.이념정치가이기 때문에 탈냉전시대를 맞아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세계 어떤 민족주의든간에 세계사방향에서 일탈한 민족주의가 살아남은 일이 없으니까 황장엽은 주체사상이 탈냉전시대에 살아남을수 있겠느냐고 고민했을 것입니다.시대가 바뀌는 등 모든게 변하고 있는데 북한의 이념은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주체사상이란 이념적 토대를 구축했던 그가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느낀 갈등은 대단했을 것입니다.심각한 이념적 갈등을 겪어온 것이 본질적인 탈북동기라고 봅니다. ▲김소장=자세한 망명동기는 그가 한국에 와서 본인의 입을 통해밝힐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두분이 공통적으로 지적하신대로 이념적 면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봅니다.황장엽의 망명이 갖는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김정일식 사상 준비 ▲유교수=첫째 주체사상을 체계화했던 사람이 망명을 했으니까 주체사상이란 이념의 존재이유가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이념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지요.그런데 현재 김정일에게는 주체사상보다 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됐습니다.김일성이 죽은지 3년이 지난 마당에 아버지와 다른,차별화된 이념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정신,붉은사상,붉은기 철학입니다.이런 측면에서 황장엽의 입지를 오히려 약화시키려는 생각을 갖게되었고 실제로 작년에 황장엽을 겨냥,주체사상의 권위와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논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그런만큼 황장엽의 망명은 주체사상보다는 새로운 이념을 끌고가려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봅니다.두번째로 특권지도층에 이념적인 혼란을 가중시키고 갈등을 증폭시켰을 것입니다. ▲김이사장=황장엽의 망명은남북한관계나 우리민족사에서 중대한 사건입니다.유교수께서 이념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만 북한에서 김일성시대에 입은 이데올로기의 옷을 벗는 작업은 90년부터 시작됐습니다.91년 6월 노동신문에 등장한 민족제일주의를 읽어보면 「민족」이란 말이 220번 나옵니다.김정일시대를 맞아 주체사상이란 것도 낡은 것이 돼서 붉은기사상이란 것이 나왔는데 이는 주체사상과는 미묘한 관계에 놓이게 됐지요. ▲김소장=「믿었던 도끼에 찍힌 격」이 된 황장엽의 망명은 김정일과 북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게 분명합니다.어떤 면에 어느정도의 타격을 주게 될까요. ▲유교수=그동안 김일성부자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고 북한에서 특혜를 누려온 황이 망명한 것은 지도층을 동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을 것입니다.그래서 김정일은 앞으로 측근들까지도 충성도를 챙기고 북한 주민들을 더욱 경계하게 될 것입니다. ▲김이사장=현재 북한에서 인텔리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약 1백70여만명이 됩니다.북한체제의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인텔리계층이이념의 대부인 황장엽마저 떠난 것을 보고는 얼마나 충격을 받고 동요를 하겠습니까. ▲김소장=북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말씀이군요. ▲유교수=그렇습니다.권력지도층이 흔들리면 주민들은 오죽하겠습니까.그동안 북한은 주민들의 탈북을 막기위해 안간힘을 써왔는데 이번 황장엽의 망명은 대탈북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격화된 붕괴 조짐 ▲김소장=황장엽의 망명은 북한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게 분명합니다.그 충격이 큰 만큼 황의 망명은 김정일의 공식적인 권력승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당장 16일 김의 55회생일행사가 어떻게 치러질지 궁금합니다. ▲유교수=생일행사야 그런대로 치러지겠지만 과연 승계를 하게 될는지는 두고 보아야할 것 같습니다.당초 계획됐던대로 일이 되어간다면 10월쯤 총비서에 취임하겠지만 총체적인 난국이 심화될 경우는 승계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이사장=승계준비는 하겠지만 「정치적 대공황」이라고 할 정도로 그 파장이 너무 큰 만큼 승계를 못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제2의 황장엽이 나오지 않도록 통제를 강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김소장=이번 황장엽의 망명은 경제붕괴에서 이념파괴로,그리고 앞으로 체제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이를 북한붕괴의 전주곡으로 봐도 되는지요. ▲유교수=일단 김정일정권의 붕괴조짐이 본격화했다고 봅니다.김정일은 인민무력부를 중심으로 한 사실상의 계엄체제로 국가를 끌어가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입니다.권력을 승계하려면 계엄체제를 풀어야 하는데 계엄을 풀 경우 분출할 사회 전반의 일탈이 두려워 계엄을 풀지 못하고 있고 권력승계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황장엽같은 고위층이 망명을 결행한 것은 북한체제가 더이상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같은 민심이반은 결국 김정일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김이사장=당장 북한정권이 붕괴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붕괴한다면 북한정권이 아니라 김정일정권이 무너질 것입니다.그러나 현재처럼 북한을 돌봐주고 있는 중국이 있는 한 북한정권은 살아남을것이고 김정일정권이 무너진다면 친중국성향의 제3의 권력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소장=주체사상의 대부인 황장엽이 망명한 이후 주체사상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유교수=워낙 오랜 세월동안 유지돼왔기 때문에 황장엽의 망명에도 불구하고 당장 없어지진 않을 것으로 봅니다.현재 김정일은 소위 「붉은 기 철학」과 「고난의 행군정신」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로 보아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점차적으로 퇴색시키고 앞서의 두가지 이념을 자신의 새로운 혁명이념으로 수정해 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소장=황장엽의 망명이 향후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유교수=기왕에도 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국면으로 빠질 수밖에 없겠지요.황장엽이 서울로 오게 될 경우 북한은 아마도 이 사실을 왜곡,대남 비난에 더욱 열을 올릴 것입니다.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이 통미봉남 정책을 써온 터여서 더 악화될 것도 없다고 봅니다.하지만 대북 식량지원이나 경제협력같은 것은 당분간 중단될 것으로 봅니다. ○테러 감행 가능성도 ▲김이사장=북한이 황장엽의 망명을 왜곡시킬 것은 자명하고 같은 연장선상에서 남북관계가 더 껄끄러워질 질 것 또한 분명합니다.더 나아가 황장엽의 망명이 북한체제유지를 어렵게 하는 상황으로 발전할 경우 「안되겠다」는 심산에서 DMZ 이남에서 테러를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그러나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특히 북한의 뒤를 봐주고 있는 중국이 있는 한 전면전은 어렵다고 봅니다. ▲김소장=황장엽망명 이후 북한의 대내정책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유교수=주민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사상교육이 실시되고 동시에 제2의 황장엽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의 고삐를 더욱 옥죌 것이 분명합니다.특히 군부로 대변되는 북한 강경파의 대남 적대가 강화될 것이며 더이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협박과 함께 언제든지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준비가 돼있다는 강경발언으로 우리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심복 중심으로 통치 ▲김이사장=군부의 입김이더욱 강화될 것이며 노동당서열에서 황장엽에 앞서는 원로들의 행보가 어려워질 것입니다.그렇잖아도 혁명1세대를 버거워하던 김정일로 하여금 그들을 멀리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준 셈이죠.김정일로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심복들을 중심으로 북한을 꾸려나갈 것으로 봅니다. ▲유교수=사실 김정일은 김일성 세대에 부담을 느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형식적으로 예우는 하되 권력측면에선 거세해 나가고 있는 과정이죠.이에따른 혁명 1세대들의 불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황장엽도 김정일에게서 느끼는 소외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이 이번 망명을 결심하게 한 동기가 됐을 가능성이 많습니다.〈정리=장수근·유은걸 서울신문국제전략연구소 연구위원〉
  • 김송죽 소설 「번개치는 아침」(송화강 5천리:17)

    ◎북만일대 조선족 삶과 투쟁 생생히/비적의 약탈에 맞서 결성한 무장지위대/후일 공산군부대 편입… 국민당군 토벌나서/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반동으로 찍혀/중국 문혁시기 혹독한 핍박·고초겪어 흑룡강성 화천면 성화향 성화촌에 사는 김송죽 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그는 80년대 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한데 이어 90년대 초에는 장편실화 「혈전」을 내놓았다.이미 문명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과 싸운 투쟁의 역사를 그렸다.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했던 당시 국민당에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 밖이었는지 모른다.그런 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 비호를 받았다.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사문동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이화당,국민당 동북 정진군 총지휘 중장 장우신이 별동대를 조종했다.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이(이화당),장(장신우)은 불지르고 살인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공산당이 일찍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그런 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이 무렵 조선족 선각자들이 일어났다.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그러고 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군부대에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한 무장자위대 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 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25일 연안에서 주덕해와 손을 잡았다.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하얼빈이 국민당군 손에서 떨어져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송화강철교,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1946년 9월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는 제3지대 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 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김병념은 광복직후 동북민주연군에 참가했다.제1연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소대에서 3반장 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그해 11월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 병력과 교전이 붙었다.그 전투에서 김병념은 대대참모 김해정 등과 함께 전사했다.그리고 얼마뒤인 11월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사문동은 12월23일 벌리현에서 총살되었다. 김송죽 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할아버지 김석길이 아직 생존해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군부대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수난 태생이었는데,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그리고 1925년 신민부에 들어갔다.1928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파견한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 선생이 스무살 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열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었다.오늘날 흑룡강성 항일열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송죽 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 말고도 역사반혁명분자의 아들,반혁명집단의 두목,반당분자,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부친이 광복전 강제로 끌려가 철도경호대에 있었다는 사실만 들추어 혁명열사가 계급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송죽 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김동철·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연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그 뒤에 동북민주연군 제1연대 제2대대에 편입되었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 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송죽)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 4년을 버티었다.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1965년 탈고하고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에 원고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디요.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리 독립운동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그걸 언젠가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역사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디요.할아버지한테 듣고,어렴풋하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썼던 것이외다.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디요.할아버지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졌습네다』 김송죽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원고를 탈고한지 꼭 18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그에게는 물론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독립운동사를 형상화한 것이다.자그마치 75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 “미군 세계위기 즉각 대응”/코언 국방 취임연설

    ◎군정예­무기현대화 주력 【워싱턴 연합】 윌리엄 코언 신임 국방장관(56)은 24일 백악관에서 취임선서를 갖고 미국의 제20대 국방장관에 공식 취임했다. 코언 국방장관은 이날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선서를 마친 뒤 『앞으로 세계 어느 지역에서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미군이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코언 장관은 『미국은 그러나 「세계경찰」이 될 수 없으며,전세계 주요 사건에 휘말려 포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해 향후 미 군사력의 사용을 평화유지활동보다는 위기대응에 주력할 뜻을 시사했다. 그는 『미국은 그동안 세계최강의 군대를 유지해왔으며,이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면서 앞으로 군 구조개편을 추진,병력수를 줄이면서 무기 현대화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와관련,코언 장관은 『우리는 전쟁 발발시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낼수 있도록 확실한 기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는 첨단무기를 개발하고 구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야 노동법 대안부터 내라(사설)

    노동관계법개정에 따른 노동계의 파업과 여야의 대결상황을 지켜보면서 갖게 되는 의문은 야당의 당론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노동법사태해결의 주체가 정치권이고 정국운영의 동반자가 야당이라면 야당은 노동법의 어떤 내용이 불만이고 무엇이 미흡한지를 분명히 밝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그렇지 않고 무조건 개정된 법의 철회만 주장해서는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할 것이다.정부·여당이 법의 문제점을 보완할 방침을 밝히고 있는 만큼 야당은 당론과 대안부터 제시하여 대화의 전제를 충족시키고 정국타개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오늘의 파업사태를 몰고오기까지 국민회의와 자민련등 야당이 노동법의 본질적 당론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대선을 앞두고 노사 어느쪽에도 인심을 잃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이다.7개월간의 노동개혁위과정을 거쳐 정부가 작년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했을 때는 여론수렴을 위한 처리지연을 주장하다가 통과된 후에는 무효화와 노사·정치권의 단일안주장을 내놓더니 파업사태가 번지자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노동계지도부를 위문방문하여 파업을 부추키는 「갈짓자(지)」행보로 두 마리의 토끼를 좇는데만 몰두하고 있다.경제회생을 위한 파업의 자제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동계의 주장을 정책으로 수렴하는 것도 아닌 이런 불투명한 노선으로는 사태해결의 주도권을 잡기는 커녕 한쪽의 응원군정도로 스스로의 입지만 좁히게 될 것이다.야당은 일체의 대여 접촉을 단절하고 대통령면담만을 고집하고 있지만 대화의 상대로서 최소한의 위상은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대안없이 만나보아야 토론은 되지 않을 것이며 법의 무효화만 얘기해서는 영수회담이 열려도 결실이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이제 야당도 툭하면 어항을 깨려는 투쟁방식을 지양하고 고기를 키워 이익을 늘리는 공존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먼저 확실한 대안을 내고 현안을 국회로 수렴하는 책임의식을 보여야 한다.
  • 낙동강수질 2급수로/2001년까지 2조9,633억 투입

    정부는 30일 하오 지난 9월 강릉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24명의 유해를 판문점에서 유엔사 군정위를 통해 북한으로 되돌려보냈다.북한의 공식사과가 나온지 하루만에 이뤄진 이번 유해인도는 북한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남한에 침투해 사살된 무장공비의 유해로는 분단이후 처음이다.〈관련기사 4면/황성기 기자> 정부는 낙동강의 수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오는 2005년을 목표로 한 기존계획을 2001년까지 앞당겨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내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모두 2조9천6백33억원을 들여 2001년 낙동강 하류 물금취수장의 수질을 3급수에서 2급수로 끌어 올릴 계획이다. 정부와 신한국당은 30일 위천공단 지정 및 낙동강 수질개선과 관련한 당정협의를 갖고 이같은 내용의 「낙동강수질개선 대책」을 최종 확정했다.〈관련기사 6면〉 이 대책에 따르면 정부는 97년도 6천3백29억원을 포함,2000년까지 4년 동안 해마다 7천억∼8천억원씩을 낙동강수질개선사업에 투입하게 된다.
  • 미얀마 연쇄폭탄테러/사찰서… 22명 사상/군정 “반정세력 소행”

    【양곤 AP AFP 연합】 「부처의 이」를 전시중이던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불교사원에서 25일밤 두시간 간격으로 폭탄 두개가 터져 4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했다고 26일 미얀마 국영 언론매체들이 보도했다. 이날 저녁 8시20분께(현지시간)절의 남쪽 계단부근에서 폭탄이 터져 보안요원들이 「부처의 이」가 전시된 「카바 아예」 탑과 마당을 점검하고 있던중 밤 10시35분 화분에 장치돼 있던 또다른 폭탄이 폭발했다. 미얀마정부는 『중국과 미얀마관계를 해치고 국민들 사이에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지극히 사악하고 잔인한 의도를 가진 비열한 파괴분자 일당』이 저지른 짓이라고 공식 비난했다.
  • 김정일교에 빠진 광신도/황성기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북한군은 김정일을 옹호하는 5백만의 총과 폭탄이므로 그 어떠한 핵 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군대다.우리 모두는 사상무장이 완벽해 육폭탄이 되고 생명을 바치기 때문에 남한군대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 휴전선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북한의 대남방송이 아니다.26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된 북한군 전사 정광선(20)이 관계당국의 조사에서 밝힌 생생한 진술이다. 평양에 있는 사회안전부 공병국 소속인 그는 김일성의 유훈통치가 철저히 지배하는 북한의 폐쇄된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었다. 극심한 경제난을 해소하려는 북한의 정책에 따라 정광선이 소속된 5연대 1개분대는 황해남도 기린도로 파견돼 지난 10월부터 「외화벌이」를 위한 해삼채취를 해왔다.선박경계근무를 서다 닻줄이 끊어진줄 모른채 잠을 자다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표류하던 그는 22일 낮 12시15분쯤 해경 경비정이 접근하자 『김정일 장군의 군인이기 때문에 남조선 배에 타지 않겠으며 김정일의 배를 사수하겠다』고 손도끼를 들고 대항했다. 당국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정은 태어날 때부터 주체사상의 세뇌교육을 받은 「전사」다운 언행으로 일관했다.정은 『이남 땅에 왔으니 죽겠다』,『김정일이 없는 북한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오직 김정일의 품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며 조사관이 주는 담배나 빵,우유를 일절 거부했다.심지어는 TV를 틀어주자 신경질적으로 『끄라』고 소리치며 일부러 창밖을 보는 등 자유체제에 물들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그를 조사했던 한 수사관조차 『북한의 사상교육이 소름끼칠 정도로 놀랐다』고 말했다. 정이 송환된 26일 상오 판문점.그는 북측 군인들의 요구에 따라 「위대한 김일성수령 만세」를 3차례나 울먹이며 복창했고 북으로 넘어서자 북한군 군정위 비서장 박임수 대좌가 그에게 김일성배지를 달아주었다. 평범한 북한군 사병일 수 밖에 없는 정광선은 체제위기에 봉착한 북한이 곧 붕괴하리라는 일반적인 관념이 소박한 「희망사항」에 불과함을 입증하는 산 증인이었다.
  • 부안군의회/군수 불신임 의결/회의 방해 직원 1백여명 고발키로

    ◎군정특위조사 불응관련 전북 부안군의회는 23일 제77회 임시회의를 열고 집행부의 특위조사 불응과 관련,강수원군수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군의회는 이날 정원 14명 가운데 12명이 참석,군정사무조사 특별위원회의 증인출석과 자료제출을 거부한 집행부의 책임을 물어 강군수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의결하고 내무부와 감사원에 군행정 감사를 요구키로 했다. 의회는 또 이날 본회의장 출입구를 봉쇄,임시회를 방해한 군청 직원 100여명을 사법당국에 고발키로 했다. 한편 전북도는 공무원들의 의사일정 방해행위를 중시,사실조사에 나섰으며 관련 공무원을 징계키로 했다.
  • “미,북 잠수함 침투 사전파악 가능성”/일 산케이신문 보도

    미 해군은 북한 잠수함이 한국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6∼7개 루트를 파악하고 있으며 앞서 있었던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22일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미해군정보부(ONI)가 최근 발표한 「세계로 확대되는 잠수함 도전」이란 보고서를 인용,북한이 세계 4위의 잠수함대국이라고 전하면서 특히 북한이 러시아제 로미오급과 위스키급 잠수함으로 ▲한·미 양국군기지 파괴및 방해 ▲한국 주요항구 인근의 기뢰 파괴 ▲한국연안에서 함정에 의한 공급로 차단 ▲북한의 주요 항구 안전 확보를 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공익정론 외길 초일류 고급지로(서울신문 51년)

    □45년∼84년 ·항일지 「대한매일신보」 뿌리로 ·54년 소설 「자유부인」장안 선풍 ·56년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85년∼현재 ·CTS 첫 도입 등 언론사에 큰 획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96년 10월 전면가로쓰기 단행 서울신문은 해방공간의 어지러운 상황이 한창 전개되던 1945년 11월22일 태어났다. 서울신문 탄생은 당시 언론계는 물론 정치·사회·문화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하나의 사건이었다.일제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의 인쇄시설과 건물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신문발행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데다 이제야 비로소 민족의 기대와 염원을 담아낼만한 권위있고 책임있는 언론기관이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창간호를 1호가 아닌 제13738호로 시작했다.이는 새 시대를 맞은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을 자임하는 동시에 1904년에서 한일합방까지 지령 1461호를 기록한 대한매일신보와 이후 1945년 11월10일자(13737호)를 끝으로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은 매일신보의 전통을잇는다는 정통성의 표현이었다. 창간 이래 3년 가까운 기간 중립지 노선을 고수해온 서울신문은 그러나 국토가 분단되고 공산화 위협이 거세지자 반공지로 변신한다.직접적인 계기는 1949년 5월3일 공보처가 내린 발행정지 처분이었다.이유는 반정부기사를 많이 싣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후에도 각종 현안이나 이승만정부에 대한 건설적 비판논조는 계속 이어갔으며 미군철수안·여순반란사건·국가보안법 문제 등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균형있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국전 발발은 서울신문에도 큰 시련이었다.기자 1명을 포함한 사원 8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설 일부가 두차례나 파괴·해체당했으며,고단한 부산 피난시절을 감당해야 했다.그러나 서울신문은 멈추지 않았다.51년 4월6일에는 서울수복후 첫 진중신문을 발행,「우리는 돌아왔다」는 사설을 게재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을 감격에 젖게 했다. 6·25전란은 한편으로 서울신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이는 자유당 발족을 전후해 통치기반의 공고화를 꾀했던 이승만정부의 구상에 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도 서울신문은 정치부문에선 친정부적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도 기타 문제에 있어서는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리는 절묘한 균형을 취했다. 한편 50년대초 반공포로 석방·휴전협정 조인·한일회담 결렬 등 역사적 사건들이 쉼없이 전개되는 속에서도 서울신문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사상초유의 인기와 시비를 몰고 왔던 소설 「자유부인」의 연재가 그것이다.54년 1월1일부터 그해 8월6일까지 모두 215회에 걸쳐 연재된 「자유부인」은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6·25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때 전후의 퇴폐적 분위기에 휩쓸려 허영과 향락으로 치닫는 여성을 묘사한 이 소설은 장안에 숱한 화제를 낳으며 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은 서울신문에게 시련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4·19 그날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수난을 당한 반면,곧이어 출범한 제2공화국 하에서 서울신문은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을 다시 표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그러나 새출발의 기쁨도 잠깐,극심한 경영난으로 서울신문은 61년 5월9일부터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5·16 쿠데타는 서울신문에게 재기의 길을 열어주었다.7개월째 발행되지 못하던 서울신문이 집권층의 후원과 재벌들의 호의적 반응으로 그해 12월21일 속간된 것이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비약적인 사세신장을 이루었으나 한편으로는 5·16 군사정부와 뒤이은 제3·제4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길을 걷게 된다.특히 72년 10월 유신으로 빚어진 전환기에서 서울신문은 친정부적 성격을 굳히게 된다.서울신문의 성격상 당시로선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창간 30주년인 75년을 기점으로 사세중흥기를 맞게 된다.고속 오프셋 윤전기의 가동으로 신문발행의 전환기를 마련했고 ▲지령 1만호 기념 만호장학금 신설 ▲의료보험제 도입 ▲급여인상 등 사원복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5공 출범한 81년은 서울신문으로선 새롭게 내실을 다지는 원년이 됐다.대중문화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길이 없던 청소년층을 위해 「TV가이드」를 창간,대중문화를 선도했는가 하면 「예술과 비평」을 선보여 고급문화를 추구하는 독자들을 만족시켰다.바야흐로 종합언론사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국내 최고 종합일간지다운 면모를 다지고자 새 사옥 마련에 나섰다.82년 1월1일 태평로를 떠나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사한 뒤 3년여에 걸친 대역사끝에 새 사옥을 마련한 것. 85년 1월1일 준공된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사옥은 한국언론 제2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전조였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쾌적한 환경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한국언론의 메카」로 자리잡았다.특히 이 시기에 도입된 CTS 제작시설은 신문발행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국내 신문사로는 최초로 CTS를 도입한 서울신문은 다른 신문사들의 부러움을 한껏 즐기며 신문제작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다. 서울신문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사건은 또 있었다.그해 6월23일 「스포츠서울」의 탄생이 그것이다.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보다많은 스포츠 정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창간한 「스포츠서울」은 30분만에 창간호 가판이 완전매진되는 등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면서 지금까지 정상의 스포츠·연예·오락 전문지로 군림하고 있다. 스포츠·연예·오락전문지 「스포츠서울」,시사주간지 「뉴스피플」,대중문화 전문주간지 「TV가이드」,여성월간지 「퀸」등을 자매지로 둔 서울신문은 이제 또한번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증자를 통한 5세대 CTS와 최첨단 윤전기의 도입을 마무리한데 이어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이 1일 접속횟수 1백만을 돌파함으로써 전자신문계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21세기에 진정한 정론지로서 독자들을 찾아갈 서울신문의 밝은 미래는 이미 시작됐다. □약사 1945년 △11.22 서울신문 창간 1946년 △3.1 제1회 「3·1기념 서울·인천간 왕복마라톤 경기대회」개최(77년 32회까지 존속) 1948년 △10.18 시사지 「주간 서울」 창간 1951년 △3.8 전란으로 휴간 △6.9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 복귀 1953년 △8.16 첫 견습기자 공채 실시 △9.1 어린이신문 「주간소년서울」 창간 1954년 △1.1∼8.6 소설 「자유부인」연재 1956년 △10.18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1958년 △10.1 신문사상 처음으로 조석간 발행 1960년 △4.19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 전소 △4.26 휴간 △6.27 속간 1961년 △5.9 경영난으로 휴간 △12.21 속간 1962년 △8.13 석간으로 전환 1966년 △2.9 한국 최초로 1백만원 고료 장편소설 당선작 시상 1968년 △9.22 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 창간 △11.22 전 지면에 걸쳐 한글전용 단행 1975년 △3.30 「주간 스포츠」 창간 △11·2 「주간 소년서울」 폐간 1978년 △10.5 보관자료 마이크로필름화 1981년 △7.18 청소년 주간지 「TV가이드」창간 1982년 △1.1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전 1985년 △1.1 언론사상 처음으로 CTS 도입,태평로 신사옥 입주 △6.23 스포츠 전문지 일간 「스포츠 서울」 창간호 발행 1989년 △9.23∼10.18 파업 1990년 △6.23 여성월간지 「퀸」창간 1991년 △7.31 구로공장 준공 △12.31 「선데이 서울」폐간 1992년 △1.5 자매지 주간 「피플」창간 △7.3 대구인쇄본부 준공 △12.25 「피플」,「뉴스피플」로 제호 변경 1994년 △2.18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본부」발족 1995년 △11.22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1996년 △1.29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국내 첫 동화상 속보체제 시작 △10.1 전면 가로쓰기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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