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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3김청산의 허구와 모순

    ‘옥석구분’이란 숙어가 있다.“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난을 만난다”는 뜻이지만 원래는 ‘화염곤강(火炎崑岡) 옥석구분(玉石俱焚)’즉 ‘불이 곤륜산에 붙으면 옥과 돌이 다함께 타고 만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에서 유래한다. 비슷한 내용으로 ‘숙맥불변(菽麥不辨)’이란 숙어도 있다. 사전은 ‘콩인지 보리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물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라 정리한다.누구라도 옥과 돌을 함께 태우거나콩과 보리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라면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니다. 최근 일부 언론인과 교수들이 ‘3김시대’또는 ‘후3김시대’ 운운하면서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을 한묶음으로 하여 ‘청산론’을 펴는 것은 논리성도 합리성도 없는 옥석구분·숙맥불변과 비슷한언사라 하겠다.‘지식’에 종사하는 이들이 옥석구분·숙맥불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무슨 ‘색안경’을 쓰고 보기 때문일까. 3김시대나 3김청산이란 말은 전두환정권 이래 군사독재의 이데올로그들이정권안보 차원에서 창안하고 써먹은 용어다.당시 그들에게 3김의 존재는 정권의 위협세력이었고 때문에 말살의 대상이었다.5,6공 정권에서 ‘3김’이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장기집권과 함께 ‘만수무강’을 누렸을지 모른다.때문에 그들은 틈만 나면 ‘3김’을 매도하고 퇴진론을 전개했다. 여기에 동원된 언론인과 교수들이 이데올로그가 되고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군사정권에 부역하다가 지금 또다시 3김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역사의 역설을 느낀다.‘3김’만 장수한 것이 아니라 그들도 장수하기는마찬가지다. 3김이든 누구든 비판은 국민의 자유다.문제는 논리성이고 분별력이다.필부라도 곤륜산의 옥과 돌을 구별하고 필녀라도 콩과 보리는 분별할 줄 안다.그런데 3김을 한 묶음으로 하여 청산론을 편다는 것은 필부필녀의 논리성도 갖지 못한 정치공세가 아닐까.정치공세는 야당만으로도 충분하다. 먼저 3김 청산론자들의 유형을 살펴보자. 1)2김 또는 3김이 반군정 투쟁을 벌일 때,군정에 참여했거나 이에 부역해온언론인,교수들. 2)지난 대선때 DJP연합을 반대하며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식자들. 3)전통적인 반 DJ인물들(3김청산의 이면에는 DJ를 겨냥하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왜냐하면 다른 2김은 잃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4)시세편승의 기회주의자들. 5)순수한 언론인,교수들. 다음에는 논리적·윤리적 허구와 모순점을 찾아보자. 1)50년 만의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은 DJP와 퇴임한 YS를동렬에 세우는 허구. 2)국가부도 위기를 불러온 지도자와 환난을 극복한 지도력을 외면하는 모순. 3)일괄된 민주화투쟁으로 집권한 사람과 3당통합을 통해 군정세력의 힘으로집권한 사람의 차별성 부재. 4)지역주의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는 인물과 지역화합에 노력하는 인물의 역할 외면. 5)3김시대가 20∼30년이란 착각과 인식의 오류. 3김 청산론을 펴는 언론인과 교수들중에는 20∼30년씩 요직에 앉아서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도 않는 사람이 적지않다.자신의 결심으로 가능한일도 하지 않으면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과 공동정권에서 임명한 국무총리,이미 퇴임한 ‘전직’을한데 묶어 청산론을 제기하는 것은 논리적·윤리적·법적으로 모순이다. 그것도 전력이 결코 순수하지 못한 이들의 경우 ‘색안경’에는‘부도덕성’과 ‘정치성’의 의도가 함축된다. ‘3김’이 문제가 아니라 ‘3김식의 행태’가 문제라는 인식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동류항’이 될 수 없는 명제를전제로‘행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배율(背律)이고 모순이기 때문이다. 언론인과 교수들의 비평활동이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평자(評者)가 먼저 도덕적·정치적으로 순수해야 한다.또 논리성과 합리성을 전제로사물을 비판해야 한다. 3김씨가 성이 같고 나이가 비슷하고 정치적 연조(年條)가 유사하다 하여 3인을 뭉뚱그려 ‘3김청산’ 운운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모순투성이다.그것도 ‘숙맥’을 분간 못하는 필녀가 아닌 언론인,교수들이 그렇게말하는 것은 지성의 모독이다.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반민특위 해체이후 친일파

    일제 패망과 함께 햇볕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어야 할 친일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은 해방후 ‘역사의 매듭’을 짓는 상징적 통과의례마저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 친일파에 대한 개념과 현실이 이처럼 유리되고 결국 착종되는 현상이 개인차원에 그치지 않고 집단무의식으로까지 번져 우리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이중적 태도와 감정,의식과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경향마저 있다. 해방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가 중도에 와해된 것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또다른 요인으로는 미군정의 방해공작을 들 수 있다.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안을 놓고 찬탁·반탁으로 나뉜 것이 결국 좌우대립으로 굳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탁치에 반대하는 친일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복권돼 도덕적 명분을 획득하였다.상대적으로 임정세력은 통일전선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반민특위 해체의 뿌리가 된셈이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재등용한 명분 가운데 하나는 건국초기 전문지식을갖춘 ‘인재부족’이었다.여기에 미·소간의 냉전으로 한국이 반공의 최일선 국가가 되자 ‘반공이데올로기’가 추가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국가가 위기를 맞자 친일파들이 본격적으로 경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주어지게 된 것이다.친일세력은 한국전쟁과 ‘반공’이념을 고리로 다시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독점적 지위는 이후 계속됐다. 군부와 경찰분야에서 친일파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이 때문이다.국방장관·육참총장은 일본군 출신이 아니면 결격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일본군 출신 일색이다.경찰의 경우 미군정 당시 간부 가운데 80% 이상이일제경찰 출신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친일세력이 미국의 정책을 등에 업고 지배세력으로 재부상한 배경에는 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정치·경제·문화적 토대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그리고 이는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도 청산은 커녕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 영·호남 주민 새달부터 문중간 교류 추진

    영·호남지역 주민들이 조상의 뿌리를 찾는 ‘뿌리를 찾아서’ 교류사업이오는 9월부터 추진된다. 전북도는 5일 동서화합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영·호남지역 주민들이 문중간 교류를 하는 뿌리찾기 교류를 오는 9월부터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도가 최근 시·군별로 마을 전체 가구수의 집성비율이 40% 이상인 마을을대상으로 교류 희망조사를 한 결과 57개 마을 40개 성씨가 영남지역과 교류를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는 이에 따라 오는 9월 1차로 경남지역에 본관을 둔 창원 황씨,진주 강씨,김해 김씨,밀양 박씨,의령 남씨,함안 조씨,창녕 성씨,합천 이씨 등 8개 성씨를 문중당 40명씩 선정해 시범교류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들은 양도 문중교류 전체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상견례를 겸한 리셉션 등을 갖고 성씨별로 해당 시·군청에서 시·군정 현황 청취,방문기념 선물교환행사를 하며 우의를 다지게 된다. 특히 문중의 밤 행사,문중 알리기,가계도 설명,문중간 얼굴익히기 등 각종이벤트를 개최해 동서화합을 다지고 시조묘와 사당 참배,관광지 합동 관광등으로 한뿌리임을 인식시킬 예정이다. 숙식은 개인별 숙식세대를 지정해 1인 1가구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도록 함으로써 문중간 교류의 내실을 다지기로 했다. 내년에는 경북지역과 교류를 희망하는 28개 마을 22개 성씨별로 자율적인교류를 추진하도록 할 계획이어서 참여 문중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경북지역 교류 성씨는 경주 이씨,경주 김씨,고령 신씨,의성 김씨,안동 권씨,안동 김씨,성주 이씨,달성 서씨 등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실종·사망 北派공작원 7,726명”

    6·25전쟁 이후 북한에 침투했다가 억류되거나 실종·사망한 북파공작원(일명 HID,AIU)의 수가 7,726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7일 발간된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은 군정보 관계자의 말을 인용,지난50년부터 72년 7·4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한에 공작원을 침투시켜 대북첩보 수집과 비밀공작을 해왔다고 보도했다.또 이들 공작원 중 7,726명이 북한에서 활동중 체포되거나 실종·사망했으나 민간인 신분이라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실종된 북파공작원이 수천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은 있었으나 정확한 숫자가 제시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국방부 관계자는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북한 출신 민간인들을 극비리에 북한에 보내 정보원으로 활용했으나 전체 공작원 및 사망·실종자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한편 국방부는 북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되거나 실종·사망된 특수부대 요원들의 명예회복과 유족에 대해 보상하는 방안을 최근 국가보훈처에 공식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이에 대해 보훈처는 현행 법률로는 보상이 어렵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인철기자 ickim@
  • 울산시·기초단체 ‘불협화음’

    인사 및 각종 시책을 놓고 울산시와 기초단체간의 마찰이 심화되고 있다. 26일 울산시와 구·군에 따르면 화학공단 추가 조성과 전보인사 등 광역단체의 각종 행정과 시책을 놓고 기초단체와의 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시와 구·군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심완구(沈完求) 시장은 지난달 국정개혁 보고회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울주군 청량면 일대에 330만㎡ 규모의 제2화학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보고했으나 해당 지역인 울주군의 박진구(朴進球) 군수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박 군수는 최근 기자회견을 자청,“울산이 공해도시라는 오명을 받고 있는데 또다시 화학단지를 조성하려는 의도를 모르겠다”며 “임기중에는 절대조성할 수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지난 1월에는 시장이 시 본청과 구·군간 전보 인사발령을 단행하자 5개 기초단체장들이 전면 거부방침을 밝혀 연초부터 힘겨루기가 표면화 됐다가 “모든 인사를 협의,결정하겠다”고 시장이 약속해 가까스로 무마됐다. 또 지난 5월에는 시가 행정에 경영기법을 도입한다는목적아래 행정수행 능력이 우수한 기초단체에 더 많은 사업비를 지원하는 ‘구·군정에 대한 종합평가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각 기초단체가 “평가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광역시가 기초단체에 대해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라고 반발해 시가 아직까지 이 제도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도 울주군 서생면 원전유치를 놓고 시와 군의 의견조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군청이나 경찰청,세무서 등 각급 기관의 이전 및 신설부지를 놓고 도·시와 구·군의 의견이 달라 알력을 빚고 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
  • [대한매일 95년]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초대 편집인 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 취임.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 무효를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 공개. ■1907년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1907년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1907년 10월 배설,영사 재판정에서 6개월 근신처분 받음.1908년 6월에도반일 보도로 3주간 금고형,6개월 근신처분 받음. ■1908년 5월 말 기준 부수 1만3,400부. ■1908년 7월12일 일제 통감부,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 ■1909년 5월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대한매일신보사 탈취.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1910년 8월30일 경성일보에 흡수시켜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제호 바꿈(지령은 대한매일신보 계승). ■1938년 4월29일 경성일보에서 분리,매일신보(每日新報)로 제호 바꿔 발행(지령은 每日申報 계승). ■1945년 11월10일 미군정에 의해 정간. ■1945년 11월23일 서울신문으로 제호 바꿔 발행(지령은 每日新報 계승).사장에 오세창 취임. ■1959년 3월23일 옛 지령을 버리고 서울신문 첫 호를 1호로 기산,지령 변경. ■1998년 11월11일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의 애국정신을 되살려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꿔 재창간(지령은 대한매일신보 당시의 지령인 1,651호와서울신문 지령 16,852호를 합산한 18,508호로 출발). ■1998년 11월11일 편집권 독립을 위한 노사공동선언문 발표.
  • 日열도 총체적 보수화 急流/보수화 움직임들

    일본 열도가 총체적 보수화로 치닫고 있다.곧 탄생할 보수 3당 연립정권,개헌을 다룰 헌법조사회 설치,국기(國旗) 국가(國歌) 법제화 추진 등 보수 우경화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이런 보수화 흐름은 일본내 어떤 세력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형성,21세기 초 일본을 규정짓고 해석하는주요한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일본의 보수화가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지만 최근의 급격한 보수화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내각 때 단초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민 사민 사키가케 연정이 무너지고 98년 여름 총선에서 집권 자민당이 경제실정(失政)으로 참패하면서 ‘헤쳐 모여’가 가속화됐다. 참의원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자민당은 ‘체질’이 비슷한 자유 공명등 야당을 끌어들여 안정적 국회운영을 노렸다.첫 열매가 올 1월 자민 자유연정이었다.늦어도 올 가을전까지는 공명당이 가세한 3당 연립정권이 출범할 것 같다. 새 연정은 중·참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보수연정은 장기적으로는 제1야당 민주당과의 연합까지 상정하는 ‘보수대연합’의 구도를 그리고 있다.보수를 견제할 대칭축으로는 군소야당인 사민 공산당 밖에는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보수화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풀이가 있으나 거품경제 붕괴후 시작된 10년가까운 장기 불황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불황이 보수화를 촉진하고 있는 특이한 경우다. 불안한 미래에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기성 정치,특히 이념정당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게다가 유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속속내놓는 자민당의 인기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의 지지도 추이는 보수화의 일단을 엿볼 수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98년 7월말 출범 당시 바닥세였던 내각 지지율은 보수연정을 추진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20%대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은 최근 50% 전후로 뛰어올랐다. 정치의 이런 보수화는 다른 한면으로는 국가의 통합을 급속히 강화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국회통과 이후 일본 정부는 자위대의운신을 넓히는데 더욱 애쓰고 있다.일장기(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국기 국가 추진,교과서 검정기준강화,개헌론 등은 보수화와 더불어 나타난 움직임이다. 민족주의를 바탕에 깐 국가체제강화는 국수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중국 등 주변국들이 경계하는 점도 바로 이런 대목이다. 20세기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보수화를 고리로 국가체제강화,군사대국화로연결돼 자행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주변국들의 우려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보수화 움직임들 일본의 보수화 움직임과 관련해 올해 눈에 띄는 일들이 유난히 많았다.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가능케한 미·일안보협력지침이 제정됐다.헌법조사회 설치법안이 중의원에서 통과됐고 국기와 국가 법안도 국회 심의가 진행중이다. [헌법조사회 설치]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 현행 ‘평화헌법’을 개정,교전권을 갖도록 한다는게 개헌론의 골자.일본 헌법은 미 군정시절인 46년제정됐다. 자민당은 55년 ‘자주성을 갖춘 헌법개정’을 정강(政綱)으로 채택,개헌논의를 주도해왔다.내년 국회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되면 45년만에 자민당 뜻대로 개헌논의가 공식화되는 셈이다. 초점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9조의 개정.주변국들이 개헌론에 끊임없이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바로 교전권을 가지려는 일본의 속내에 대한의심 때문이다. [국기·국가 법안] 6월11일 일본 정부는 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하는 법안을 각의에서 통과시켰다.일본교원노조등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심볼로 삼으려는 저의가 있다”고 맹반발했다.일장기와 기미가요는과거 군국주의 일본에게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종전직후 미 군정이 일장기 게양을 허가제로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여당인 자민 자유당이 법안에 찬성하고 있고 민주 공명당도 동의하고 있어 심의만 끝나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 문화분야] 극우 사관이 공공연히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대표적이다.지금의 역사책이 미국의 강요로 기술됐다며 ‘새로운 사관’에 서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미 군정하전범재판을‘날조극’이라고 비판한다.96년 결성돼 지난해와 올해 부쩍 회원을 늘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쟁을 미화하고 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는 책자들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이나 4월 지방선거에서 도쿄도지사에 당선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선전포고,NO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경제’ 등은 일본의 우경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황성기기자
  • [대한매일 발간 白凡 金九 全集](上) 주요내용

    백범 서거5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사가 출간한 ‘백범김구전집’은 백범의일생과 임정의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한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본지는 ‘전집’의 주요내용과 편찬과정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를 상·하 두 차례에 걸쳐특집으로 소개한다. ‘백범김구전집’은 일제하에는 조국광복을,해방후에는 자주·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처음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우선 큰 의의가 있다.‘전집’은 선생이 활동했던 구한말·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해방정국 당시의 관련자료를 포괄적으로수록하였는데 일부 판독이 어려운 자료는 현대문으로 풀거나 일문(日文) 판결자료 등은 국역,부기함으로써 자료의 활용가치를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전12권으로 구성된 ‘전집’은 크게 ‘백범일지’등 선생의 저작물에 대한평가와 동학·의병운동,임시정부 활동,해방후 건국·통일운동,서거후 진상규명·추모 관련자료와 친필휘호·사진 등 총 5부로 나눌 수 있다. ■제1부(1·2권)는 ‘백범일지’와 ‘도왜실기(屠倭實記) 등 선생의 친필저작을 해독,직해본으로 부기하였다.‘백범일지’는 선생이 1926년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후 살아서 환국할 수 없다고 판단,두 아들(仁·信)에게 집안내력과 자신의 이력을 유서격으로 쓴 것으로 상해시절에 쓴 ‘상권’,1941년 중경에서 쓴 ‘하권’,그리고 환국후 서울에서 쓴 ‘하권의 계속분’ 등 3부작으로 구성돼 있다.‘백범일지’는 해방후 춘원 이광수가 내용중 일부를 윤문하여 1947년 국사원에서 초간본을 출간했는데 이승만정권 시절 한때 금서로 취급받기도 했다.‘전집’에는 이본·판본에 대한 해제·평가도 곁들이고 있다. ■제2부(3권)는 선생의 일생중에서 잘 알려지지않은 청년기를 다룬 부분으로 선생이 17세때 과거에 낙방한 후 동학에 입문,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내용과 청일전쟁 후 반일운동의 본거지였던 청나라의 요동(遼東)지역을 원정한사실을 당시 자료로 복원하였다.또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원수를갚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소위 ‘치하포사건’을 규장각 자료와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청년백범’이 질풍노도기를 거쳐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해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밖에 안악·신민회사건 관련 내용은 판결문을 번역,부기하였다. ■제3부(4·5·6·7권)는 백범과 임시정부 관련자료의 집대성이다.4권은 임정의 상해(上海)시기(1919.4∼1932.4)와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의 이동시기(1932.5∼1938.11)등 임정의 20년 역사를 임시정부 일반·한인애국단·정당·군관학교 등 네 분야의 자료로 재구성한 것이다.총325건.5권은 임정이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해방때까지 활동한 기록을 엮은 것으로 당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한국광복군 통수권자 등을 맡아 임정과 광복군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자료 속에는 중경시절 선생 명의로 신문·잡지 등에 발표한 글과 선생의 영문 전기(傳記)도 2건 포함돼 있다.총175건.6권자료는 한독당과 광복군 관련자료를 특화하여 편찬한 것으로 광복군 창설과 관련,중국측과의 교섭자료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총168건.제7권은선생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의 지원·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중국측 인사와 주고받은 공함(公函)·간찰들로 이 가운데는 임정 승인문제를 둘러싼 중국내부의 공함들도 포함돼 있다.총318건. ■제4부는 환국후 백범의 건국·통일운동 관련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국내자료(8권)와 미국측 자료(9권)로 나뉘어져 있다.국내자료는 당시의 신문자료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1945.9.3) 등 선생 명의의 성명서·연설문·담화문 등을 망라했다.미국자료는 당시 임정세력과 국내정치권에 대한 미군정과정보기관의 보고서·메모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분석한 것이다. ■제5부는 선생의 서거후 암살 진상규명 관련자료(12권)와 추모록(10권),그리고 선생의 친필휘호·사진(11권)등을 엮은 것이다.친필휘호 가운데는 이번 ‘전집’간행을 계기로 경향각지에서 수집된,‘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등 선생의 대표적 휘호 200여 점이 수록됐으며,암살진상규명 부분에서는 서거 이후 최근까지의 관련자료가 망라됐다.부록으로는 선생의 연보·연구논저목록을 수록했다. ‘전집’에 수록된 자료는 그동안 국내·외에 산재한 백범·독립운동 관련자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상당수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국내자료는 백범기념사업회와 유족이 소장중인 자료를 비롯해 독립기념관·국사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규장각·정부기록보존소·국립중앙도서관 등 관련기관과 개인소장 자료를 모은 것으로 1925년 전후 나석주(羅錫疇)의사가선생에게 보낸 편지 7통 등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해외자료 가운데 대만자료는 총통부 당안관·중국국민당 당사위원회·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국사관 등에서 입수한 것으로 상당수가 최초공개 자료다. 미국자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하버드대 옌칭연구소·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등에서 입수한 것으로 광복군의 OSS 관련문서·사진,해방공간의 자료 등이 보완되었다.일본 외무성사료관에서는 윤봉길·이봉창 등 한인애국단 관련자료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고대 노동문제연‘한국노동운동사’대토론회

    근대 이후 100여년간 한국노동운동의 탄생과 그 전개과정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학술모임이 개최됐다.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소장 이진규)는 지난 12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한국노동운동사’ 대토론회를 열고 근대이행기 이후 최근까지의 노동자들의 존재형태와 각 시기별 노동운동의 특성에 관한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졌다.제1부∼6부까지는 근대이행기·일제강점기·미군정기·이승만정권기·경제개발기·민주화 전환기 등 각 시기별 노동운동 관련 주제발표를,마지막 7부는 종합토론순으로 진행됐다.근대적 의미의 노동자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근대이행기의노동운동’이라는 주제발표에서 “개항 이후 신분제 해체와 식산흥업정책의진행으로 임금노동자가 처음 생겨났다”며 “조선 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은제국주의 침략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개항장이나 철도 건설현장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시달렸다.그 결과 노동자들의 반발이 계속됐으며 1919년 3·1의거를계기로 노동자들의 파업은 절정을 이루었다.20년대 들어서는 전국적인 노동자조직을 결성,민족해방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일제하 노동운동은 국제노동운동의 영향과 식민지적 특수성이 어우러져 조직화·이념화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투쟁노선을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김경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1920년대의 노동운동은 임금·근로조건 개선등이 주류였으나 산별노조의 등장과 함께 30년대 후반 이후 전시체제하에서는 비합법·혁명적 노조운동으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미군정기 3년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신생국 대한민국의 노동정책·노동운동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반면 정부수립 이후의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선명하다.송종래 고려대 교수는 “건국초기의 노동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부속물로 이용된 점도 있지만 민주적 노동운동의 질서가 태동하고 4·19혁명과 더불어 민주적 노동운동이 개화한 시기”라고 주장했다.4·19 이후 교원·은행원·신문기자 등 지식인 노조의 등장을예로 들고 있다.경제개발기(1961∼1987)의 노동운동은 경제성장정책의 ‘이면사’라고 할수 있다.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서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한 이면에는저임금·노동기본권 봉쇄 등 일관된 노동통제가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87년이후 민주화 전환기의 노동운동은 사회전반의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조직과 활동,운동노선,정치세력화 측면에서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다.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이 시기 노동운동은 다른 민중·사회운동의 발전을촉진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 조봉암 탄생 100돌 사상·업적 책으로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공산주의운동가로,해방후에는 ‘진보정치의 상징’으로 치열한 삶을 살다간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올해는 바로 그가 탄생한지 100돌이 되는 해이자 이승만 정권하에서 ‘간첩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40년이 되는 해다.이념의 혼돈 속에서 시작된 20세기가 막을 내리는 가운데 이념과 권력의 희생자였던 그의 사상·업적·일생을집대성한 ‘죽산 조봉암전집’이 7월초 세명서관에서 발간된다. 지난 3월 그의 40주기를 맞아 개최된 학술토론회에 이어 그의 명예회복·재평가와 관련한 두번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후 40년만에 출간되는 ‘죽산 조봉암전집’은 전6권으로 구성돼 있다.‘전집’에는 국내외에서 입수한 문헌·신문자료와 그동안의 연구성과,그리고 진보당 관계자들의 회고담 등 죽산과 진보당 관련 자료가 망라돼 있다. 제1권은 죽산의 개인문집으로 생전에 죽산이 직접 쓴 글 모음집이며,제2·3권은 일제시대∼미군정기 죽산의 항일·공산주의 운동과 해방공간에서의 좌우합작운동 관련자료들(당시 신문자료와 미국서 발굴·입수한 미군정 정보보고서 등)을 포함하고 있다.제4권은 죽산이 ‘진보정치’의 슬로건을 내걸고56년 혁신계를 규합,창당한 진보당 관련자료의 집대성이다.4권에는 특히 1956년 11월10일 진보당 창당식 행사의 녹취록을 풀어서 실었는데 전문공개는이번이 처음이다. 제5권은 ‘진보당사건’ 관련자료만 따로 모은 것이며 마지막 제6권은 생존하고 있는 진보당 관계자들의 회고와 학계의 죽산에 대한 평가·재조명 등연구성과를 모은 것이다. 이번 ‘전집’은 진보당 당원출신 한 인사와 한 소장학자와의 ‘아름다운만남’이 싹을 틔운 결과다.편집위원장 정태영(鄭太榮·68·건국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씨는 당시 동양통신 기자 신분으로 진보당에 입당,활동한것이 문제가 돼 58년 ‘진보당사건’ 재판 때 피고석에 섰던 인물이며 편집간사 오유석(吳有錫·36·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연구원)씨는 현대사 전공 소장학자다.오씨가 진보당사건 관련 논문을 쓰면서 정씨를 인터뷰한 것이인연이 돼 두 사람은 ‘전집’을 출간키로뜻을 모았다. 당시 진보당원으로 활동한 주인공이자 이미 ‘조봉암과 진보당’을 출간한바 있는 정씨는 증언과 자료수집을 맡고,전문연구자인 오씨는 편집과 해설등 편찬실무를 맡았다.출간경비는 외부지원 없이 전적으로 정씨가 사재를 털어 부담했다.편집진은 국내외의 죽산 관련 자료를 뒤진지 1년만에 7월초 ‘옥동자’ 출산을 앞두고 있다.정씨는 “죽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항상 주도적으로 활동해온 인물이었으나 그동안 관련학계의 연구가 부족했다”며 “‘전집’출간을 계기로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과 인물연구에 자극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7월 3일 출판기념회를 겸해 죽산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학술발표회도 가질 예정이다.12만원(전6권),(02)702-3862정운현기자 jwh59@
  • 국가정보원 1·2차장-기획조정실장 교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4일 국가정보원 1·2차장과 기획조정실장을 모두교체,해외담당인 1차장에 권진호(權鎭鎬)국제문제조사연구소장,국내담당인 2차장에 엄익준(嚴翼駿)전안기부3차장을 임명했다. 김대통령은 또 기획조정실장에는 최규백(崔奎伯)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을 승진,발령했다고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이 발표했다. 박대변인은 “이번 인사는 전문성과 국정원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정원은 다음주초 본부 1,2급과 지부장 등 고위 간부직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최 신임 기획조정실장 약력 ▲광주·57 ▲국립체신학교·건국대 행정대학원졸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양승현기자 yangbak@- 權鎭鎬1차장 프로필 차분한 학자 스타일로 “어떤 경우에도 부하 군기를잡는 일이 없다”는 게 주위의 평.수준급의 영어와 불어 실력을 갖춘 정보통.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과는 육사 후배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 부인 이화용(李和鎔·57)씨와 2남2녀. ▲충남 금산·58 ▲용산고·육사 19기 ▲32사단장 ▲국군정보사령관 ▲중장 예편(95년) ▲세종연구소 연구원 겸 육사 교환교수- 嚴翼駿2차장 프로필 66년 중앙정보부에 첫발을 내디딘후 대공분야를 섭렵한 정통 정보맨.90년대초 남북고위급회담 상황실장으로 활약,치밀한 판단력을 인정받았다.94년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에 전념하느라 딸 결혼식에 불참한 일화도 있다. 98년초 조직개편 바람에 휘말려 면직됐었다.부인 임미자(林美子·57)씨와 1남1녀.▲전북 전주·56 ▲고려대 정외과 ▲안기부장 제3특보 ▲안기부3차장
  • ‘白凡 金九’ 독립·자유 일깨운 겨레의 큰스승

    이 달은 ‘백범 김구의 달’이라고 할 수 있다.일생을 조국광복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혼신을 바쳐온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한지 이 달로 꼭 50주년이 된다. 백범기념사업회는 최근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박사로부터 백범의 미공개 사진 7점을 입수,31일 첫 공개했다.이 사진은 백범이 환국직후의 모습과설산 장덕수 장례식 참석 모습,미군정 관계자와 함께 한 모습,그리고 48년남북협상 참석후 귀환하는 모습 등을 담은 것이다. 이 사진은 모두 미군정 관계자가 공식용으로 찍은 것이어서 촬영 일자,사진 설명이 정확히 기록된 점이 특징인데 모두 방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것이다. 한편 본사는 선생의 서거 50년을 맞아 ‘백범김구전집’을 편찬,출간한다. 총12권 규모의 ‘전집’은 백범 관련자료는 물론 우리 독립운동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방대한 분량이다.또 백범기념사업회는 50주기를 맞아 역사적인 ‘백범기념관’ 건립의 첫삽을 뜰 예정이다.
  • 나이지리아 민간정부 출범…오바산조 대통령 취임

    아부자(나이지리아) AFPAP연합 아프리카의 인구대국 나이지리아의 올루세군 오바산조 민선 대통령 당선자(62·사진)가 29일 취임,15년 이상 계속돼온 군부통치를 마감하고 민간 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오바산조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 12개월전 만해도 누구도 군사정권 퇴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예상하지 못했다”며 “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지난 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이지리아는 66년 첫번째 쿠데타가 발생한 이래 군정이 계속돼 왔으며 민정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 [특별기고]‘민추협’15년의 불행

    1980년대 ‘암흑기’를 살면서 민주주의를 생각해본 사람이면 ‘민추협’으로 더 잘알려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억할 것이다.한줄기 빛이자 희망이었고 우리들 자존심의 회복이었다. 민주주의가 질식상태에 빠져 있던 전두환정권의 폭정 아래서 ‘5·18 광주민중항쟁’ 4주년이 되는 날 출범했으니 지금으로부터 15년전 일이다. 지금에 와서 불행이란 말을 붙여 15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건 아픈 부분을들춰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세력을 위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다. 민추협을 결성한 목적은 민주세력이 대동단결해 ‘군정’을 종식시키자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민추협의 정치권내 세력은 이른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양대 인맥으로 이뤄졌으며 민주세력의 단결이란 곧 이 양대 인맥의 단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주효해 1987년 6월투쟁이 일어났으며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해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그 결과 직선제로 노태우 군부정권이 성립됐다.민추협의 첫번째 불행이었다고하겠다. 1988년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고 이 때문에 노태우정권은 같은 군부정권이면서 ‘5공청산’이란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전두환 전대통령을 백담사로 귀양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추협 세력 중 상도동계가 12·12 신군부세력인 전두환·노태우 중심 정당,5·16 구군부세력인 김종필 중심 정당과 합쳐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노태우 군부정권 아래서 여당이 됐으니 민추협의 두번째 불행이었다. 그후 민추협의 상도동계는 우여곡절 끝에 정권을 잡은 뒤 문민정부를 자칭했다.그러나 군부정권을 뒤엎거나 선거로 맞서서 이긴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타협에 의해서 성립된 문민정권이었다. 김영삼 문민정권 5년간의 정치적 업적 여부는 그만두고라도 민추협 세력이이제 상도동계의 여당과 동교동계의 야당으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됐으니 세번째 불행이었다고 하겠다. 1997년 대통령선거 결과 상도동계의 문민정부에 이어 어렵사리 동교동계의‘국민의 정부’가 성립됐다.선거에 이겨서 성립되기는 했으나 단독으로 이기진 못하고 5·16구군부 핵심세력이 이끄는 충청도 세력과 연합함으로써성립할 수 있었다. 투쟁대상이었던 군사정권 세력과 상도동계같이 합당을 했건 동교동계처럼연합을 했건 민추협은 두번씩이나 정권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한 정치적 저력을 가진 단체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추협 동교동계 중심 국민의 정부가 성립한 지 1년이 되는 지금 5·16 구군부세력은 정권 핵심부에 건재한 채 다시 내각책임제를 하자며 국민의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 정부는 5·16 군사쿠데타 정권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12·12 군사반란후 5·18 광주항쟁을 피로써 탄압해 정권을 잡았던 신군부세력은 국민의 정부가 묵인 내지는 원조한다는 풍문 속에서 정치 현역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민추협 발족 15주년을 기념하는 날 상도동계의 김영삼 전대통령은 민주세력의 재단결을 말하기는 고사하고 동교동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를 4·19전 이승만정권과 같은 독재정권이라고 비판했다.민추협의 네번째불행이라 하고도 남을 것이다. 민추협이 걸어온 길은 흔히 권력 획득만이 최고 목적이라는 ‘정치판’에서는 예사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보면 크게 비판받아야 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 신임 국정원장등 장관급·청와대 수석·차관급 프로필

    ◇ 千容宅 국가정보원장 정책·전략,군사교리 등 국방 전분야에 걸쳐 해박한 식견을 가진,자타가 공인하는 안보통. 93년 중장으로 전역한뒤 비상기획위원장을 거쳐 국민회의 전국구의원으로 15대 국회에 진출했다.국방위원 시절에는 율곡비리 폭로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지난 대선 과정에서 ‘북풍’을 잠재우는 등 안보분야에서 김대중(金大中)후보의 핵심참모로 활약했다.그 공로로 국민의 정부 초대 국방장관에 발탁됐으나 잠수정 침투,미사일 오발사건 등 한때 어려움도 겪었다. 부인 김아미(金雅美·55)씨와 3녀. ◇ 朴舜用 검찰총장 빠른 판단력과 친화력으로 사시 8회 출신 가운데 일찌감치 ‘총장감’으로꼽혀 왔다.법무부 교정국장 시절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 수감 업무를 무난히 처리했고 대검 중수부장때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무리없이 처리해 신임을 얻었다.지난 2월 검사 항명파동때에는 밤늦도록 평검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불만을 추슬러 신망을 얻었다.김태정(金泰政) 법무장관과는 총장-중수부장,총장-서울지검장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환상의 콤비’라는 평을 들었다.취미는 테니스.부인 김혜정(金惠貞·52)씨와 2남. ◇ 安炳禹 중소기업 특별위원회 위원장 경제기획원 예산정책과장과 예산총괄과장,예산심의관을 거치는 등 자타가공인하는 예산전문가.국민의 정부 출범후 초대 예산청장을 맡아 IMF사태 극복을 위한 본예산 편성을 무난히 처리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부하직원들에게 좀처럼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부인 유인숙(柳寅淑·49)씨와 1남1녀. ◇ 李起浩 경제수석비서관 깔끔한 외모에 정연한 논리와 빈틈없는 일처리로 사무관 시절부터 윗사람의 신망이 두텁다.지난 김영삼(金泳三)정부에 이어 현 정부에서도 노동장관 자리를 지켜 화제가 됐다.IMF체제 하에서 노사정위원회의 필요성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해 관철시키는 등 실업대책과 노사관계를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부인 양인순(梁仁順·47)씨와 1남1녀. ◇ 黃源卓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육사 18기 대표화랑 출신으로 합리적이고 온화하지만 업무 추진력도 만만치 않다는 평.91년 한국군 장성으로는 처음으로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측 수석대표에 임명됐으나 북한이 인정하지 않아 군정위가 열리지 않는 등 파동을겪기도 했다.12·12 당시 정승화(鄭昇和)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을 지냈다는 이유로 5·6공때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부인 음성원(陰聖媛·54)씨와 1남1녀◇ 朴晙瑩 공보수석비서관 언론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해직기자 출신의 언론인.지난 80년 5·18 이후 언론검열에 항의해 강제 해직됐으나 87년 민주화바람에 중앙일보에 복직,뉴욕특파원 등을 지냈다. 신사풍으로 부드러우나 논리적인 원칙주의자.뉴욕특파원 시절 박지원(朴智元)문화부장관과 친분을 쌓았다.취미는 속기바둑이며,골프가 싱글수준이다. 부인 최수복씨(崔秀福·49)와 3녀. ◇ 嚴洛鎔 재정경제부차관 신임 엄차관은 행정고시 8회로 30년 경력의 정통 재무관료.금융,관세,경제협력국 업무를 거쳐 국장때 세제실로 옮겼다.2차관보 재직때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을 담당했다.성격이 온화하고 차분하며 일처리가 합리적이다.부인홍영신(洪榮信·46)씨와 1남1녀. ▲51·서울 ▲경기고 서울법대 ▲재무부 세제심의관,국세심판소장,2차관보◇ 梁榮植 통일부차관 제주 출신으로 72년 이래 통일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통일전문가. 역대 정권의 통일정책을 비교한 통일정책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여러권의 저서도 낸 학구파.TV 대담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등 개방적인 성격이라는 평.부인 권영례(權寧禮·53)씨와 1남1녀.▲58·제주 ▲통일부대변인 ▲통일정책실장 ▲통일연구원장◇ 朴庸玉 국방부차관 75년 하와이대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은 ‘국제신사형’ 정책전문가.92년 남북고위급회담때 남북군사분과위원장으로서 ‘불가침 부속합의서’와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탄생시켰으며,북한 핵문제가 절정에 달한 94년에는 주미 국방무관으로 대미협상을 주도했다.부인 유승애(劉承愛·52)씨와 3녀. ▲57·평남 평원 ▲경기고 육사21기 ▲국방부 정책기획차장,군비통제관,정책실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金興來 행자부차관 작은 체구임에도 추진력이 강하면서 부하들로부터 사랑받는 행자부의 맏형.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옛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지방행정 전문가다.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의 진도 군내초등학교 1년 후배.부인 위영자(魏英子·57)씨와 1남2녀. ▲58·전남 진도 ▲목포해양고 단국대법대 행시 10회 ▲목포시장 ▲재정국장 ▲지방행정연수원장 ▲기획관리실장◇ 羅承布 소청심사위원회위원장 행정고시 10회로 전남도 내무국 지방과에서 시작한 정통 내무관료.온화한성품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만 업무에 관한한 치밀하고 추진력이 탁월하다는 평.옛 내무부 주요 부서와 시장,군수 등을 두루 거치면서 폭넓은 행정경험을 쌓아 ‘행정 9단’으로 불린다.▲57·전남 함평 ▲한양대 행정대학원▲전남 여수,목포시장.내무부 공보관,지역경제및 지방재정국장,전남 행정부지사. ◇ 李元雨 교육부차관 온화한 성품으로 강단이 있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법무부 보도직(5급)으로 출발해 77년 문교부 편수과로 옮겼다.서울시 부교육감을 역임해 일선 교단의 사정에 밝다.술자리에도 자주 어울리는 등 소탈한 성격으로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단국대 국악과 교수인 부인 서원숙(徐元淑)씨와 1남1녀. ▲57·충북 청주 ▲서울대 사대 ▲교육부 교육기획정책관 ▲서울시부교육감 ▲청와대 교육비서관◇ 趙健鎬 과학기술부차관 상공부와 재무부,총리실,청와대를 두루 거친 경제관료.일처리가 꼼꼼하지만 성격은 활달하고 솔직하다.대학시절 조정선수로 활약한 경험 때문에 조정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으며 연극,영화 등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재무부 공보관 시절에는 ‘명대변인’으로 꼽혔다.박찬혜(朴贊蕙·49)씨와 2녀. ▲55·경기 김포 ▲서울대 법대 ▲재무부 국제금융국장 ▲청와대 기획조정관◇ 金順珪 문화관광부차관 행시 출신으로 문화 분야에서만 28년 동안 근무해 온 문화부 터줏대감.정책기획력이 뛰어나고 합리적이다.그러나 고집이 세다 할 정도로 소신도 있고뚝심도 있다는 평이다.‘일본이 앞서고 있다’는 영문번역서를 낼 정도로 학구적.취미는 등산이며 자주 실력발휘를 하지 않지만 주량도 상당한 편이다. 노모를 모시고 살며 부인 김혜성씨와 1남2녀.▲52세▲경북 의성▲경기고▲국민대 무역학과▲행시 10회(71년)▲문화부 공보관▲문화부 청소년정책실장
  • [제2공화국과 張勉](25)-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上)

    1950년 6월24일 오후9시쯤(이하 현지시각)워싱턴의 장면(張勉)주미대사는 모처럼 토요일 밤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주미대사로서 매일 저녁 칵테일파티니,디너파티니 두세 군데를 쫓아다니며 바쁘게 외교활동을 벌이다 이날은 오랜만에 관저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AP통신의 해리스기자였다.해리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데 아느냐”고 물었다.장면은 “흔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이어 UP통신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해 장면은 미 국무부로 급히 연락하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밤10시30분쯤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밀고내려오니,장대사가 빨리 행동해 주어야겠소”라고 말했다.전화를 넘겨받은 임병직(林炳稷)외무장관은 “당신 한사람의역량에 국가 운명이 달렸소”라고 목이 메어 우는 소리를 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갓 세운 조국,대한민국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진 순간이었다. 장면은 곧바로 미 국무부로 달려가 딘 러스크 극동담당차관보 등을 만났다. 장면과 러스크는 한국사태를 25일 열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로 하고 이를 휴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알렸다. 일단 관저로 돌아온 장면은 부랴부랴 짐을 꾸린 뒤 바로 비행장으로 나가 군용기 편으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 갔다.오후2시 개막한 안보리에서 장면은 연설 기회를 얻었다.“유엔 승인을 얻은 대한민국은 북괴군의 불법공격을 받고 있다.이 공격은 인도(人道)와 민심을 거슬리는 죄악이자 국제평화·안보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라면서 지원을 호소했다. 안보리는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9대0으로 통과시켰다.결의한내용은 ▲북한군은 전쟁을 중지하고 38이북으로 철수할 것 ▲유엔한국위원단이 이를 감시할 것 ▲유엔회원국은 북한에 일체의 원조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는 이처럼 6·25발발 50여시간만에 이루어졌다. 안보리 결의가 나온 다음날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너무도 황급해서 국가원수에 대한 예모도 차릴 겨를이 없이”(회고록에서의 표현)장면은트루먼에게 “6개월전 요청한 무기원조를 왜 해주지 않았느냐,이제 우리나라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렸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마구 항변했다. 이 자리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트루먼은 27일 낮 해·공군을 한국에 파병한다고 발표했다.이날 유엔 안보리도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한국의 안전보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라고 권고하는’결의문을 추가로 채택했다.30일에는 미국이 육군을 출동시켰다. 6·25가 발발하자마자 유엔 안보리 결의,미국의 파병을 이끌어낸 이 며칠은한국이 적화(赤化)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나날이었다.그 결실은 장면의 초인적인 노력 덕에 맺어졌다고 할 수 있다.장면은 훗날 “본국으로부터의 지시나 의논할 사람이 없어 고군분투하며 우방 제국(諸國)의 대표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했다”면서 당시를 “한 시간이 일년만큼이나 귀중했다”고 회고했다. 장면정부를 ‘실패’라고 규정하고 장면 개인을‘무능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건국 초기에 두가지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한다.하나는 6·25직후 미국 및 유엔의 군사적 지원을 즉각 이끌어낸 점이고,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법 정부’임을 유엔에서 승인받은 일이다. 장면은 48월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서울 종로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당선함으로써 정치의 장(場)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정부 출범 며칠뒤 장면은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에 참가하는 한국대표단의 수석으로임명받았다.그와 함께 대표단으로 참가한 이들은 조병옥(趙炳玉)정일형(鄭一亨)장기영(張基永)김활란(金活蘭)모윤숙(毛允淑)전규홍(全奎弘)김우평(金佑枰)김준구(金俊九)등이었다. 한국의 법통(法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막중한 회의에,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장면이 수석대표로 임명된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특히 조병옥을 앞섰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조병옥은 독립운동 경력이 화려한데다 한민당 창당에 한몫 했으며 미군정 때는 경찰총수인 경무부장을 지냈다.더욱이 대통령 이승만에게서 미 유학시절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반면 장면은 주요 경력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입법의원 정도였다.이승만과도 해방공간에서야 처음 만난 사이다. 그런데도 당시 ‘국가 승인’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이승만이 장면을 수석대표로 선택한 것은 그만큼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한 장면은 바티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그해 12월12일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의 유일·합법정부임’을 승인받는다.장면은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한국승인 문제를 위해 천주교인을 만나러 다녔고”(장기영의 회고담),그토록 과로한 탓에 쓰러져 입원한다.이때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맞아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바람에 생을 마칠 때까지 간질환으로 고생하게 된다. ‘유엔의 한국 승인’에 성공한 장면은 대통령 특사로서 바티칸에 가 교황을 알현했다.귀국길에 미국에 들른 그는 그곳에서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짐은 이미 집으로 부친 뒤였다. 장면은 다음날부터 각국 대사를 찾아다니며 대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먼저 공부했다.한편으로는 사무실과 사람을 구하는 등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갔다.1년반 동안 노력한 끝에 주미대사관이 궤도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 6·25가 터졌고,장면은 그에게 부여된 국가적 과제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해 11월 이승만은 장면을 제2대 국무총리로 지명했고 국회는 23일 이를 인준했다.그러나 장면은,유엔이 51년 2월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것까지를 지켜본 뒤에야 귀국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용원기자ywyi@
  • 경찰 ‘수사권 독립’ 요구史

    ‘경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는 정부 수립 이전 경찰제도의 도입 단계에서부터 논쟁거리였다.이후 지금까지도 검찰과 경찰은 물론 정치권의 논쟁으로이어져 왔다. 최초의 논쟁은 지난 45년 해방후 미군정 때.당시 미군정 당국은 미국식으로 경찰에는 수사권,검찰에는 소추권을 분담시키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검찰 출신 법률가들의 반대로 무산됐다.이후 정부 수립후 발족한 국가 경찰은 독립적인 수사권을 갖지 못했다. 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에도 국회에서 경찰에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논의됐으나 검찰 출신 정치인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4·19 직후 허정(許政) 과도정부에서는 경찰개혁심의회가 구성돼 일본 방식인 경찰에 1차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역시 검찰측의 반대로관철되지 못했다. 5·16 직후 5차 헌법개정 때에는 ‘체포,구속,압수,수색,검증영장 청구권을 검사에게 준다’는 형사소송법 조항을 헌법에 명시,경찰 수사권 독립에 대한 주장을 원천봉쇄했다. 80년 이후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에는 경찰의 힘이상대적으로 커졌으나경찰은 수사권 독립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 90년대 들어서는 경찰 중립 문제와 이에 따르는 수사권 독립 문제가 정치권의 쟁점으로 다시 떠올랐다.특히 지난 96년 총선에서 국민회의측은 ‘경찰수사의 독자성 확보’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97년 대선을 앞두고는 민생 범죄만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까지 만들었으나 국회에상정되지는 못하고 사장됐다. 이지운기자 jj@
  • 시책발굴 ‘연구 동아리’ 결성

    제주도 북제주군 하위직 공무원들이 행정시책 연구 동아리를 만들기로 해관심을 끌고 있다. 북제주군(군수 申喆宙)은 오는 6월부터 6급이하 직원들만으로 새로운 시책을 발굴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동아리 연구 모임을 갖기로 했다고 6일 밝혔다. 연구 대상은 일반행정·민원행정·1차산업·환경·건설 등 5개 분야다.주 2회이상 근무시간 이후 통합행정자료실에 모여 분야별로 시책 개발을 위한 저마다의 주장을 펴게 된다. 비단 업무와 관련된 시책이나 제도 개선사항 뿐만 아니라 인터넷 등 정보활용 매체를 통해 발췌한 전국 및 세계의 우수시책들도 서로 연구하고 발표한다. 5급이상은 자문역할을 맡는다.연구결과는 월요연찬회나 군정조정위원회때발표한다.채택된 우수 시책들은 행정에 반영된다.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제주지역 자치단체들, 카페 같은 민원실 구축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그림과 꽃이 있고,상냥한 도우미가 있는 카페보다 아늑한 민원실. 4일 제주도내 자치단체에 따르면 제주시는 최근 시청 민원실을 증축해 민원인 대기장소를 30평으로 늘리고 앞면 벽 모두를 특수유리로 처리,바깥을 볼수 있도록 하는 등 휴식공간으로도 손색 없도록 꾸며놓았다.정수기와 TV,어린이 놀이기구 등도 장만해 놓았고 항공권과 승차권 등을 파는 종합 서비스코너까지 만들었다. 서귀포시는 동양화·서양화·서예·사진·도자기 등 문화예술 작품들을 1개월 단위로 교체하고 계절마다 꽃화분을 갈아주는 등 일년 내내 그림과 글과꽃이 있는 민원실이 되도록 하고 있다.냉·온 겸용 음료수대와 각종 음료자판기를 마련,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여러가지 놀이기구를 갖춘 어린이 놀이방도 만들어 놓았다. 북제주군은 도·군정 정보 검색용 컴퓨터와 이동전화 충전기 등을 비치해행정정보를 쉽게 알수 있게 하고 어느 모델의 전화라도 충전이 가능하도록서비스하고 있다. 남제주군은 민원실 한켠에는 ‘자기건강 진단실’을 만들어 도우미들의 협조로 혈압과 혈당,체중 등을 잴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한국 근-현대사 정리 앞장 선 방선주-양기백박사 서훈 추진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문헌발굴과 정리에 평생을 바쳐온 재미 사학자방선주(方善柱·65)박사와 미 의회도서관 동양부 부장을 지낸 양기백(梁基伯·78)박사에게 정부의 서훈을 추진하는 운동이 관련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일고 있다. 건국대 신복룡(정치학과)교수는 “방박사는 한동안 금기사항으로 있던 현대사분야의 자료발굴로 현대사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분이며,양박사는 미국내에서 한국관련 자료수집의 최대공로자”라며 “근.현대사 전공자를 중심으로 두 분이 한국관련 사료발굴·정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정부의서훈을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움직임은 4월초 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인천대 총장) 발족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이 단체는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제정을 계기로 공공기록물의 효율적인 수집·관리·보존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현재 연구원측은 신교수 등과 공동으로 방·양 두 박사에 대한 공적 조서등 구비서류 준비를 마치는 대로 과당국에 서훈 신청을 할 계획이다. 49년 미국 정부의 주선으로 도미한 양박사는 6·25전쟁으로 귀국치 못하고이듬해 8월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방박사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등 미국 내 한국관련 자료발굴의 ‘1등공로자’로 꼽힌다.그동안 방박사는 한국근·현대사 자료 100만 점 이상을발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미국군정·한국전쟁 관련 자료는 이 분야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방박사가 발굴한 자료중일부는 방박사가 객원교수로 있는 한림대 등에서 자료집으로 출간됐다.최근임정80주년기념 학술대회 참가차 귀국했던 방박사는 백범암살 관련 미공개자료를 입수,본사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제공한 바 있다.두 사람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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