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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죄 없이 떠난 전두환, 재산 환원하라”…5·18 단체 빈소 시위

    “사죄 없이 떠난 전두환, 재산 환원하라”…5·18 단체 빈소 시위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서울지부 등 5·18 관련 단체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신촌세브란스병원 인근에서 사죄 없이 떠난 전씨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서울지회, 5·18 구속부상자회 서울지부, 5·18 서울기념사업회, 삼청교육대 피해자 전국연합 등 11개 단체는 2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장례식장까지 10여분 동안 행진했다. 참가자 20여 명은 ‘광주는 폭도, 삼청은 깡패. 억울해서 못 살겠다’, ‘사기정치 80년 쿠데타범 추모관 철거하라’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보수단체 회원으로 보이는 한 여성과 언쟁 잠시 있었지만,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은 장례식장 앞에 도착해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라도 전두환 유족은 5공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불의한 재산을 피해자와 대한민국에 환원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피해자들에게 일말의 사죄도 하지 않은 채 반성 없이 잘못 주어진 사면의 열매만 누리던 전두환은 학살자로서 지옥의 심판이 기다리는 저승으로 떠났다”며 “이제라도 국민을 탄압해 얻은 불의한 대가는 피해자와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씨는 1997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죄 유죄 판결로 추징금이 확정되자, 314억원만 납부한 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완납을 미뤘다. 2013년 본격 환수가 시작된 뒤 검찰은 지난해까지 추징금 1235억원을 집행했다. 올해는 가족 명의의 임야 공매 낙찰가 10억여원 등 모두 14억원을 추가 환수했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23일 기준 전체 추징금 2205억원 중 1249억원(57%)을 집행했고 미납 추징금은 956억원(43%) 남아 있다”고 밝혔다.이들은 5공 인사들에 대해서도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 활동을 통해 허화평, 허삼수, 장세동, 이희성, 정호용 등 신군부의 실세들이 하나같이 대저택에서 수십년간 부와 권력을 누려온 것을 새삼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또 “유족은 지금이라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재헌에게 배워 5공 피해자들과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기를 촉구한다“며 ”역사 앞에 사죄할 마지막 기회를 저버린다면 국회에 당장 ‘전두환 등 신군부 부정축재 환수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외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 법은 20대 국회 당시 천정배 전 의원이 발의했으나 회기 종결로 자동 폐기된 바 있다. 5·18 단체들은 오는 27일 전씨 발인 때까지 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 5·18 하반신 마비 피해자와 가해자인 전두환의 같은 날 생 마감

    5·18 하반신 마비 피해자와 가해자인 전두환의 같은 날 생 마감

    5·18 가해자로 지목되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5·18 당시 총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된 피해자가 공교롭게 같은 날 숨진 채 발견됐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천수를 누린 가해자와 총상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피해자 이모(68)씨의 삶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분노가 터져나오고 있다. 24일 전남 강진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4시쯤 강진군 한 저수지에서 이모(68)씨가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지난 22일 이씨가 전북 익산 자택에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됐다는 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소방대원들과 함께 이씨의 고향 마을을 수색 중이었다. 이씨가 남긴 유서에는 “요즘 통증이 더 심해지고 있다. 5·18에 대한 원한, 서운함을 모두 잊고 가겠다”는 내용이 쓰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4시간마다 진통제 주사를 맞았으며 가족들도 이씨가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육군 사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출가해 조계종 한 사찰의 승려로 생활하다가 1980년 5·18을 맞았다. 그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앞두고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는 시민들의 시위와 환자 이송에 동참했다. 그는 1988년 국회 광주 특위 청문회와 1995년 검찰 조사, 2019년 5월 13일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혐의 1심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헬기 사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여학생을 구조해 적십자병원으로 이송했다고 증언했다. 적십자봉사단에 입단한 그는 부상자를 실어나르고,의약품과 혈액을 모으는 활동을 하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동구 구시청 사거리에서 잠복 중이던 군인이 연발로 쏜 총에 허리를 맞았다. 인근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았지만 총탄 파편이 몸속에 그대로 남아 평생을 하반신 불구로 살아야 했다. 1996년 파편 제거 수술을 받긴 했으나 진통제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씨는 신군부가 왜곡한 5·18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고 조비오 신부와 함께 계엄군의 헬기 사격 목격담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타고 있던 적십자 봉사단 차량을 향해 헬기가 따라오며 집중적으로 사격했다”며 “일행 중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젊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 활동과는 별개로 그의 개인적인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탓에 욕창에 걸리는 건 다반사였고,경제 활동을 하지 못해 늘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떻게든 후유증을 치료해보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해보기도 했지만,그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이씨는 지난 22일 “나의 이 각오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바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고향인 강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5·18 기념재단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5·18 자살의 계보학’에 따르면 후유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은 1980년대 25명,1990년대 4명,2000년대 13명으로 조사됐다. 이씨의 시신이 발견된 23일 전씨도 자신의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숨졌다. 당초 반란수괴 및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였던 전씨는 수감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평안한 삶을 살았다. 수사를 통해 전씨가 불법 비자금 9500여억원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추징금 2205억원을 내야 할 처지였지만 전씨는 ‘배 째라’는 식이었다.여전히 956억원은 환수되지 않았다. 전씨는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신군부 세력과 호화 식사를 하거나 골프를 치러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5·18 단체 관계자는 “41년이 지났지만,여전히 피해자는 고통받고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며 “두 사람을 생각하면 세상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된 것 같다”고 한탄했다.
  • 영화 ‘왕십리 김종분’ 주인공 만나…성동, 주민 삶 속으로 더 다가간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 주인공 만나…성동, 주민 삶 속으로 더 다가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성동구 주민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정원오 성동구청장)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영화관. 정원오 구청장이 무대 위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주인공인 김종분씨에게 꽃다발을 건네자 박수가 쏟아졌다. 객석은 성동구청 직원 160여명으로 가득 찼다. ‘왕십리 김종분’은 왕십리 터줏대감으로 행당시장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김씨의 일상을 그린 영화다. 김씨를 비롯해 근처에서 꽃집, 야채가게 등을 하는 노명연·장석래·임정화씨 등 이른바 ‘왕십리 시스터스’의 모습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 냈다. 김씨는 ‘열사’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강경대 열사의 죽음 뒤 이어진 1991년 5월 ‘열사 정국’ 당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희생된 학생운동가 김귀정 열사의 모친이다. 그해 봄에만 10여명의 ‘청춘’이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스러져 갔다. 이 영화는 김씨의 이야기이자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 열사에 대한 추모이자 기록이다. 앞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 진출하기도 했다. 김씨는 무대인사에서 “왕십리에서 56년을 살았다. 성동구에서 많이 도와준 덕분에 지금까지 장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구청 직원들에게 익숙한 행당시장이나 왕십리광장이 배경으로 나온다. 방역수칙을 준수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단체 관람은 구의 ‘직원 친절마인드 향상 교육’의 하나로 마련됐다. 구는 친절한 구정 실현을 목표로 구민들의 행정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구는 올해까지 4년 연속 민원서비스 종합평가 전국 최우수기관에 선정됐다. 지난 10월에는 행정안전부 주최로 매년 지방자치단체 3곳을 선정하는 제13회 다산목민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이날 영화를 관람한 기획예산과의 한 직원은 “그동안 김종분 어머님께서 일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왕십리 김종분’을 통해 어머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참척의 고통을 겪었음에도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에 긍정의 힘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단체 관람을 함께한 정 구청장은 “‘왕십리 김종분’은 다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우리 성동구 주민의 일상과 삶을 그려 낸 영화”라며 “앞으로도 우리가 먼저 구민 여러분의 삶 속에 한발 더 다가간다는 마음을 갖고, 행정에 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고백’ 통한 5·18 진상 규명 어려워졌다

    ‘고백’ 통한 5·18 진상 규명 어려워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씨가 사망하면서 사건 당시 최고권력자의 ‘고백’을 통한 국가 폭력의 실체를 밝히기는 어려워졌으며 결국 진상 규명은 관련 위원회 및 학계의 조사·연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건이 일어난 지 41년이 지났지만 5·18 관련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에 대한 상처 치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동안 국회 특별위원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 국방부 위원회 조사 등을 거쳤지만 사건의 진상은 완전히 규명되지 못했다. 어떤 조사에서도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명령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헬기 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전씨와 신군부 관계자들은 줄곧 발포명령을 부정해 왔다. 1997년 확정된 5·18 재판에서 전씨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5명은 1980년 5월 27일 벌어진 ‘상무충정작전’(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생존해 있는 당시 핵심 관계자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앞으로의 진상 규명은 5·18진상 규명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위원회는 지난해 5월 5·18 40주년을 맞아 실무진 구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돌입했다. 위원회는 5·18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책임자 규명, 당시 사망사건, 민간인학살, 행방불명자 규모 및 소재 등을 조사하고 있다. 광주시가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는 82명으로 이 중 6명은 2001년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의 무명열사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됐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 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위원회는 이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하고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광주는 폭동” “전 재산 29만원” 분노만 키운 정치군인의 퇴장

    “광주는 폭동” “전 재산 29만원” 분노만 키운 정치군인의 퇴장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중에 육군사관학교 입학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개헌까지 하며 11·12대 대통령 연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조비오 신부 사자 명예훼손 등 1심 유죄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쿠데타 주역, 민주화 탄압, 현대사 퇴행… “공과 언급할 가치 없어”

    쿠데타 주역, 민주화 탄압, 현대사 퇴행… “공과 언급할 가치 없어”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달러화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로 과외를 금지시키는 한편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를 도입했다. 공교육을 정상화시켰다는 평가와 과외를 음성화시켰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 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 진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12·12 쿠데타(1979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유혈 진압에 관여한 전직 대통령(최규하·전두환·노태우)들이 마지막까지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씨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이 더욱 요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씨는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기 때문에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이후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에 넘겨진 전씨는 1심에서 유죄를 받은 후 항소해 오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둔 상황이었다. 5·18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와 발포 명령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게 협조하기는커녕 끝까지 재판으로 ‘진실’을 다투다 사망하면서 당시 상황은 미궁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전씨보다 한 달 앞서 별세한 ‘동지’ 노 전 대통령(제13대)은 12·12 쿠데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지원했다. 그는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왜곡했다. 아들 재헌씨가 최근 광주를 잇달아 찾아 사죄했지만, 노씨는 5·18 당시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비롯해 5·18의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2006년 10월 침묵을 지킨 채 사망한 최 전 대통령(제10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건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권한대행을 포함해 10개월 정도 국가원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역사적인 순간에 최고 결정권자였던 만큼 당시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12·12 쿠데타에서 신군부의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 연행을 사후 재가한 과정, 5·18 당시 광주 시민에 대한 발포가 대통령의 최종 결정인지 신군부의 독자적 행동인지 등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 ‘쿠데타 동료’ 노태우와 휴전선 인근에 나란히 묻히나

    ‘쿠데타 동료’ 노태우와 휴전선 인근에 나란히 묻히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12·12쿠데타 동료이자 정치적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불과 28일 만이다. 60여년간 운명을 함께한 두 사람의 인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 셈이다. 지난달 26일 노씨의 부고를 들은 전씨는 침묵 속에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당시 건강 문제로 빈소를 찾지 못했고 부인 이순자씨가 대신 조문했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둘은 휴전선 가까운 곳에 나란히 누울 것으로 보인다. 전씨는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고 유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씨는 현재 경기 파주시 검단사에 임시 안치돼 있으며, 유족이 파주 국유림을 묘역 부지로 요청한 상태다. 실과 바늘 같았던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졌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나왔고, 한 살 어린 노씨는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경북고를 졸업했다. 1952년 육사 제11기 동기생으로 만난 뒤 군부 내 전씨의 커리어를 노씨가 그대로 따랐다. 결국 대통령직까지 노씨는 전씨의 뒤를 이었다. 5공화국 기간 노씨는 2인자이자 ‘차기 권력’이었지만,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렸다. 결국 전씨는 노씨를 후계자로 낙점했고 후임 대통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노씨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권력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군부 등 현직에 남아 있던 전씨의 측근들을 숙청함으로써 상왕 노릇을 하려던 전씨에게 일격을 가했다. 또 여소야대 국면에서 전씨의 처벌을 요구하는 야당에 밀려 전씨를 내쳤고, 결국 전씨는 부인 이씨와 백담사에서 769일간 ‘귀양 생활’을 했다. 하지만 노씨 퇴임 후 집권한 김영삼 정권이 둘을 사법 심판대에 세우면서 다시 동병상련의 처지가 됐다. 법정에 나란히 선 둘이 손을 잡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노씨의 병세가 악화된 2014년은 두 사람이 만난 마지막 해로 기억된다. 당시 노씨의 자택을 방문한 전씨는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라고 했고, 노씨는 알아본다는 의미로 눈을 깜빡인 것으로 알려졌다.
  • 사죄없이 떠난 현대사의 오점

    사죄없이 떠난 현대사의 오점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전씨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전씨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씨까지 모두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전씨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일말의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전씨는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져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으며, 시신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전씨는 지난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11기)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지원했고, 10·26 사태가 발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간선제 투표로 11, 12대 대통령에 올라 7년여간 독재 통치를 했다. 전씨는 내란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전씨는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약속했던 재산 헌납도 지키지 않았다. 추징금 2205억원 중 미납한 금액은 956억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는 고인의 명복을 빌었지만,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조문이나 조화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선후보 모두 빈소를 찾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전씨는 명백하게 확인된 것처럼 내란 학살 사건의 주범이다. 최하 수백 명의 사람을 살상했고 중대 범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처음엔 “전직 대통령이시니까 조문을 가야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가 2시간 뒤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전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27일 오전 8시.
  • 노태우 떠나고 한 달 안 돼 따라간 전두환

    노태우 떠나고 한 달 안 돼 따라간 전두환

    전두환, ‘60년 지기’ 노태우와 떠날 때까지 운명 함께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12·12쿠데타 동료이자 정치적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불과 28일 만이다. 60여년간 운명을 함께한 두 사람의 인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 셈이다. 지난달 26일 노씨의 부고를 들은 전씨는 침묵 속에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당시 건강 문제로 빈소를 찾지 못했고 부인 이순자씨가 대신 조문했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둘은 휴전선 가까운 곳에 나란히 누울 것으로 보인다. 전씨는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고 유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씨는 현재 경기 파주시 검단사에 임시 안치돼 있으며, 유족이 파주 국유림을 묘역 부지로 요청한 상태다. 실과 바늘 같았던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졌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나왔고, 한 살 어린 노씨는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경북고를 졸업했다. 1952년 육사 제11기 동기생으로 다시 만난 뒤 군부 내 전씨의 커리어를 노씨가 그대로 따랐다. 결국 대통령직까지 노씨는 전씨의 뒤를 이었다. 5공화국 기간 노씨는 2인자이자 ‘차기 권력’이었지만,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렸다. 결국 전씨는 노씨를 후계자로 낙점했고 후임 대통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노씨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권력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군부 등 현직에 남아 있던 전씨의 측근들을 숙청함으로써 상왕 노릇을 하려던 전씨에게 일격을 가했다. 또 여소야대 국면에서 전씨의 처벌을 요구하는 야당에 밀려 전씨를 내쳤고, 결국 전씨는 부인 이씨와 백담사에서 769일간 ‘귀양 생활’을 했다. 하지만 노씨 퇴임 후 집권한 김영삼 정권이 둘을 사법 심판대에 세우면서 다시 동병상련의 처지가 됐다. 법정에 나란히 선 둘이 손을 잡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노씨의 병세가 악화된 2014년은 두 사람이 만난 마지막 해로 기억된다. 당시 노씨의 자택을 방문한 전씨는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 했고, 노씨는 알아본다는 의미로 눈을 깜빡인 것으로 알려졌다.
  •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 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와 달러 가치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수백여 명을 죽였고, 과오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정치적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두고 정치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이란 것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적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 시대에 발현됐을 뿐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재판 중에 사망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12·12 쿠데타(1979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유혈 진압에 관여한 전직 대통령(최규하·전두환·노태우)들이 마지막까지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씨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이 더욱 요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씨는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기 때문에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이후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에 넘겨진 전씨는 1심에서 유죄를 받은 후 항소해 오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둔 상황이었다. 5·18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와 발포 명령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게 협조하기는커녕 끝까지 재판으로 ‘진실’을 다투다 사망하면서 당시 상황은 미궁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전씨보다 한 달 앞서 별세한 ‘동지’ 노 전 대통령(제13대)은 12·12 쿠데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지원했다. 그는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왜곡했다. 아들 재헌씨가 최근 광주를 잇달아 찾아 사죄했지만, 노씨는 5·18 당시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비롯해 5·18의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2006년 10월 침묵을 지킨 채 사망한 최 전 대통령(제10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건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권한대행을 포함해 10개월 정도 국가원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역사적인 순간에 최고 결정권자였던 만큼 당시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12·12 쿠데타에서 신군부의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 연행을 사후 재가한 과정, 5·18 당시 광주 시민에 대한 발포가 대통령의 최종 결정인지 신군부의 독자적 행동인지 등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 전두환 전대통령 사망-5·18 유혈진압 사죄없이 떠났다

    전두환 전대통령 사망-5·18 유혈진압 사죄없이 떠났다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전씨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전씨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씨까지 모두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전씨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일말의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전씨는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져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으며, 시신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전씨는 지난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11기)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지원했고, 10·26 사태가 발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간선제 투표로 11, 12대 대통령에 올라 7년여간 독재 통치를 했다. 전씨는 내란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전씨는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약속했던 재산 헌납도 지키지 않았다. 추징금 2205억원 중 미납한 금액은 956억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는 고인의 명복을 빌었지만,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조문이나 조화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선후보 모두 빈소를 찾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전씨는 명백하게 확인된 것처럼 내란 학살 사건의 주범이다. 최하 수백 명의 사람을 살상했고 중대 범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처음엔 “전직 대통령이시니까 조문을 가야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가 2시간 뒤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전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27일 오전 8시.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광주에 무지개 떴다” 전두환 사망한 날 목격담·사진 속출

    “광주에 무지개 떴다” 전두환 사망한 날 목격담·사진 속출

    23일 광주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 무지개가 목격됐다. 이날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광주에 무지개가 떴다’는 목격담과 사진이 다수 올라왔다.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는 오전 11시 48분쯤 ‘전두환 떠나자 광주에…’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이 올라왔는데, 글쓴이는 “오늘 방금 찍었다”라고 전했다. 트위터에도 광주시청 위로 커다랗게 드리워진 무지개 사진이 공유됐다. 이날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무지개 사진은 광주 외에도 전남 나주, 경남 김해 등에서도 속속 올라왔다. 공교롭게도 이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해 무지개와 이를 연관 짓는 이들이 많았다.작곡가 김형석은 트위터에 광주에서 촬영된 무지개 사진을 공유하며 “광주에 무지개가 떴다네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하다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분들을 애도합니다”라고 썼다. 김형석은 전씨의 사망 소식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란 것도 있다”라고 평가했다.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0분쯤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오전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으며,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전씨는 최근 알츠하이머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등의 지병을 앓았다.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던 전씨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장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열망을 짓밟았고,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기에 이르렀다.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1987년 민주항쟁에 밀려 퇴임 뒤 백담사로 쫓겨나듯 물러나 칩거했다. 이때 재산 헌납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때인 1995년 구속기소돼 1996년 내란·내란목적살인죄·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수감됐다. 2년 만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지만 전직 대통령 예우 등은 박탈됐다. 대법원에서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지만 그는 전 재산이 ‘29만원’에 불과하다며 버텼고, 정부와 검찰의 추징금 환수 노력에도 끝내 완납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군사 쿠데타와 집권 기간 동안의 민주화 운동 탄압, 무엇보다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해 단 한번도 진정성 있게 사과하지 않았다.
  • 입 닫고 가버린 전두환 전 대통령…5·18 진상규명은 어떻게

    입 닫고 가버린 전두환 전 대통령…5·18 진상규명은 어떻게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씨가 사망하면서 사건 당시 최고권력자의 ‘고백’을 통한 국가 폭력의 실체를 밝히기는 어려워졌으며 결국 진상 규명은 관련 위원회 및 학계의 조사·연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건이 일어난 지 41년이 지났지만 5·18 관련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에 대한 상처 치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동안 국회 특별위원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 국방부 위원회 조사 등을 거쳤지만 사건의 진상은 완전히 규명되지 못했다. 어떤 조사에서도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명령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헬기 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전씨와 신군부 관계자들은 줄곧 발포명령을 부정해왔다. 1997년 확정된 5·18 재판에서 전씨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5명은 1980년 5월 27일 벌어진 ‘상무충정작전(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생존해 있는 당시 핵심 관계자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앞으로의 진상 규명은 5·18진상 규명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위원회는 지난해 5월 5·18 40주년을 맞아 실무진 구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돌입했다. 위원회는 5·18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책임자 규명, 당시 사망사건, 민간인학살, 행방불명자 규모 및 소재 등을 조사하고 있다. 광주시가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는 82명으로 이 중 6명은 2001년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의 무명열사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됐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 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위원회는 이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하고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5·18조사위 “사죄 기회 있었지만 변명 일관…희생자 고통 가중”

    5·18조사위 “사죄 기회 있었지만 변명 일관…희생자 고통 가중”

    “진상규명 지속할 것…신군부 핵심인물들 더 늦기 전에 진실 고백해야”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규명위)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국민에게 사죄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이날 “전두환 씨는 지난 41년간 피해자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기회가 있었으나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했다”면서 “이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고통을 가중시켜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전씨를 포함한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의 핵심 인물들에게 출석요구서를 발송했고, 전두환 씨는 지병을 이유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면서 “그의 사망에도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에 따라 진상규명을 위한 엄정한 조사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진상규명위는 “신군부 핵심 인물들은 더 늦기 전에 국민과 역사 앞에 진실을 고백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은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같은 해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997년 대법원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유혈진압과 관련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죄 등 으로 무기징역 판결이 확정됐다.
  • 광주 시민들 “전두환 편안한 죽음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자 부끄러움”

    광주 시민들 “전두환 편안한 죽음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자 부끄러움”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소식에 광주 시민들과 광주 5·18 단체들은 “법적·역사적 책임을 묻지 못했다”며 원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5·18 기념재단과 5월 3개 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전씨가 죽더라도 5·18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씨는 자신이 5·18과 무관하다며 구차한 변명과 책임 회피로 일관해 왔다”며 “계속되는 거짓말과 왜곡으로 국민과 사법부를 기망하고 반성과 사죄는 커녕 5·18 영령들을 모독하고 폄훼하며 역겨운 삶을 살았다”고 지적했다.또 “죽음으로 진실을 묻을 수는 없다”며 “우리는 오월 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만고의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조진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도 “살아 생전 본인이 저지른 죄를 사죄받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스스로가 걷어찼다”며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은 만큼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조규연 5·18 구속부상자회장은 “5·18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전씨가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나 원통하다”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반성하는 마음도 생기게 된다는데 그런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이라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도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전씨를 비난했다. 송선태 위원장은 “지난 41년간 피해자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기회가 있었으나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고통을 가중 시켜왔다”며 “전 씨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엄정한 조사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고 강조했다. 신군부 핵심인물들은 더 늦기 전에 국민과 역사 앞에 진실을 고백해야한다고 촉구했다. 광주지역 24개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성명서를 내고 “5·18을 능멸하고 죽은 학살자 전두환의 국가장과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광주는 학살자 전두환의 편안한 죽음에 분노한다”며 “자신의 권력과 이권을 위해 시민들을 학살하고, 반대자들을 감옥에 가뒀던 독재자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의 불행이고 부끄러움이다”고 했다. 이 단체는 “민주적 헌정질서 파괴자의 국가장과 국립묘지 안장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면서 “독재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5·18정신을 대한민국 헌법정신으로 담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정치권은 하루 빨리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을 합의하고, 여전히 왜곡과 폄훼가 끊이지 않는 5·18의 진실 규명을 위해 나서라”고 요구했다. 지역 주민들도 역사에 죄를 짓고서도 한마디 반성 없이 떠난 모습에 아쉬움과 분노심이 든다는 표정들이다. 시민들은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항쟁의 책임자를 밝혀내는 일은 영영 물거품이 된게 아닌가라는 허탈감을 보였다. 박모(52)씨는 “역사에 큰 죄를 짓고 간 사람이 아무런 처벌 없이 90살 동안 살다가 간 사실에 분노만 치민다”고 했다. 이모(61)씨는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재판도 시일이 지연되면서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며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 법률적으로 5·18 당사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죄에 대해 확정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채 마무리 돼 아쉽다”고 말했다.
  •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5공 실세들의 현재 상황에도 관심이 쏠린다.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씨 등 ‘쓰리(3) 허’ 등이 그 대상이다. 허화평 씨는 ‘5공 설계자’로 불렸다. 허 씨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신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속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12·12 군사반란 획책에 가담했다. 허씨는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청와대 정무1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며 최측근 거리에서 전씨를 보좌했다. 그러나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당시 전씨의 친인척 공직 사퇴를 건의하면서 전씨와 멀어졌다. 그해 말 청와대를 떠났다. 허씨는 노태우 정권 출범과 함께 국내 복귀한 뒤로 1992년 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며 정치 행보를 이어갔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며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관련자에 대한 사법 처리를 추진하면서 구속됐다. 15대 총선에서 ‘옥중 당선’됐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고, 16·17대 총선에서 연달아 낙선하며 정치권과 멀어졌다.허씨는 지난달 26일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하자 유족 측 장례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에서 취재진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이 5·18 유족에 사과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그 부분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5·18 사격 지시’와 관련된 질문에는 “그건 저한테 물어보지 말라.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때 비서실장을 했기 때문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허삼수 씨는 육사 동기인 허화평 씨와 함께 하나회에 가입한 ‘단짝’이자 12·12군사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었다. 당시 대령이던 허 씨는 12·12군사반란 직후 80여 명의 수사본부 병력과 함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씨 집권 이후 허 씨는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돼 실권을 휘두르며 실세로 자리매김했으나 허씨와 함께 눈 밖에 난 뒤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국내로 복귀한 허씨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부산 동구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허씨의 패배였다. 설욕을 노리던 허씨는 이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무현 후보와 재대결을 펼친 끝에 당선됐다. 15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 뒤 구속됐다. 이후 더는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았다. 허씨는 이후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당시에 유족 측 장례위원에 포함됐지만, 그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자 출신인 허문도 씨는 1980년 신군부로부터 발탁돼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문화공보부 차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등 요직을 지냈다.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고, 청와대 정무비서관이던 1981년 5·18민주화운동 1주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국풍 81’을 일으키기도 했다.허삼수·허화평 씨와 달리 전두환 정권에서 끝까지 남았던 허문도 씨는 1989년 5공 비리 관련 국회 청문회에서 언론 통폐합은 잘한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1996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1998년 경남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민련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장을 스스로 반납하고 불출마했다. 허문도 씨는 2016년 76세로 별세했다. ‘쓰리 허’ 외에 실세로는 ‘5공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있다. 장 씨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12·12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지내며 ‘전두환 후계자’로까지 거론된 인물이다.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물러났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전씨와 관련해 끝까지 입을 닫았다. 이후 5공 비리에 연루된 혐의 등으로 수 차례 옥살이를 했다.2002년 16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사퇴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해 정치 무대에 서지 못했다. 장씨는 이후 전씨의 연희동 자택을 꾸준히 찾으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근에는 전씨와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특별한 직함이나 대외활동 없이 지내고 있다.
  • 5·18 진상규명 ‘첩첩산중’...남은 가족들 반성 없어

    5·18 진상규명 ‘첩첩산중’...남은 가족들 반성 없어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을 계기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전 전 대통령을 제외한 남은 가족들도 반성이나 사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와 12·12 및 5·18 사건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및 특별조사위원회 등을 거쳤지만 진상규명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상처 치유는 현재진행형인 상황이다. 1980년 5월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명령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헬기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위권 발동을 내세우며 발포명령자를 부정해왔고, 1995∼1997년 이어진 검찰수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기소하지 못했다. 전두환 등 피고인 5명은 5월 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인 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우선 1980년 5월 20일 오후 10시 30분 광주역에서 계엄군의 첫 발포,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께 옛 전남도청 앞에서의 첫 집단 발포의 명령자가 누구였는지는 광주학살의 책임 소재를 가릴 핵심이다. 생사도 확인되지 못한 행방불명자를 재조사하고, 이들의 암매장 장소를 찾는 한편 유해 발굴과 수습에 대한 조사도 중요하다. 광주시가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는 82명으로, 이 가운데 6명은 2001년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의 무명열사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됐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 대비해 군 보안사와 국방부 등 관계 기관들이 구성한 4·11 연구위원회의 진실왜곡과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도 과제다. 결국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무소속 최경환 의원 대표 발의)에 따라 구성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얼마나 진실규명의 성과를 낼지가 관건이다. 지난해 5월 5·18 40주년에 맞춰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실무진 구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돌입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는 실정이다. 한편, 전두환 씨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발포 명령을 정당화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광주 시민사회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5·18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목소리도 높다.이 가운데 전 전 대통령의 유족인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 등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역사적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해 비난을 샀다. 부인 이씨는 지난 2017년 3월 출간한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12·12, 5·17, 5·18에 대한 편집증적 오해와 정략적인 역사 왜곡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전율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씨는 5·18에 대해서는 ”당시 수사책임자인 동시에 정보책임자였던 그분은 결코 발포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발포 책임을 부인했다. 12·12에 대해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7월 말 광주사태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남편에게 후임이 되어줄 것을 권유했다“며 정권 찬탈이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전씨의 5·18 관련 언급에 대해서도 ”국회 청문회 등에서 사과한 것은 5·18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이씨는 전 전 대통령이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죄 재판을 받으러 광주를 오갈 때에도 동행하면서 사과 요구 등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도 사과 요구에 답하지 않았다. 유가족은 전 전 대통령이 미납한 추징금과 관련해서도 끝까지 뻔뻔한 태도를 고수했다. 지난 2013년 검찰이 미납 추징금 관련 비자금 수사를 벌이자 장남 재국씨는 일가족 명의의 입장문을 내고 미납 추징금을 자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정부가 추징금 환수를 위해 연희동 자택을 공매에 넘기자 이에 반발, 소송전을 벌였다. 결국 대법원에서 자택 중 본채에 대해서는 공매에 넘길 수 없다는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장남 재국씨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나 국정감사에 불려 나와 사과하기도 했다. 차남 재용씨는 양도소득세 포탈 등의 혐의로 처벌받으면서 부과된 40억원의 벌금을 내지 않고 ’황제 노역‘을 하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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