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 50m 엿가락처럼 휘어/대참사현장 이모저모
◎응급차 모자라 부상자 발동동
○…사고현장은 한마디로 아비규환 그자체였다.
열차가 급제동하면서 탈선 전복된 탓에 객차의 철제구조물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지거나 조각나있고 그 사이에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끼여 있어 처참한 사고순간을 실감나게 했다.
사고 뒤 경찰과 소방관등 1천여명이 사고수습을 위해 포클레인등 중장비를 이용,부상자 구조와 사체발굴에 나섰으나 중장비의 도착이 늦은데다 철제구조물이 뒤엉켜 있어 작업에 애를 먹었다.
이에앞서 사고가 나자마자 주변을 지나던 차량들이 급히 달려와 부상자와 사체를 이웃 병원으로 옮기기도 했다.
○…황인성국무총리는 이날 하오9시30분쯤 철도청 상황실에 나와 사고에 따른 수습과정을 보고받고 사고대책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
○…탈선된 5,6호 객차는 고철덩이처럼 찌그러져 승객들이 객차틈새에 끼인채 신음하고 있어 아비규환.
5호차 앞부분에 앉아있다 다리를 다쳐 한중병원에 입원중인 김태성씨(39·부산 진구 전포1동 276의36)는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앞쪽으로 밀리면서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사고당시 6호차 중간부분 좌석에 있다가 목적지인 구포역에서 내리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 열차가 전복돼 오른손과 양다리를 다친 최지원씨(24·여·부산시 북구 삼락동 365의1)는 『구포역 도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구내방송이 끝나자마자 열차가 땅밑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고 사고당시를 기억.
최씨는 중상자들이 앰뷸런스가 모자라 피를 흘리면서도 사고현장의 땅바닥에 비가 오는 가운데 장시간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며 사고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군복무중인 아들과 오빠를 면회하고 귀가하던 일가족 3명중 아버지는 숨지고 어머니는 실종되고 여동생은 중상을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백병원에 안치된 안상근씨(53·남구 감만동 511)는 28일 아침 부인 차삼조씨(50),딸 선희양(18)과 함께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끝내고 대구시 소재 육군병원에 배속받은 작은 아들 태호씨(20·경성대 법학과 1년 휴학)를 면회하고 돌아오다 변을 당했는데 부인은 실종되고 딸은 다리골절상을 입고 신라병원에서 가료중.
○…아들과 함께 시어머니 생신에 다녀오려고 사고열차를 탄 아내의 행방을 찾고 있던 박상택씨(38·부산시 북구 덕천2동 주공아파트 105호)는 제중병원등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백병원 영안실에서 아내 권순남씨(32)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가운데 군인이 6명으로 단일직종으로는 가장 많았다.
군관계자들은 『교육중 외박나온 장교들이 많아 사망자가 많은 것 같다』고 설명.
○…황인성국무총리는 이날 하오 이계익교통부장관과 함께 사고현장으로 내려가 사고수습을 지시했다.
□대형열차사고 일지
▲45년 9월 대구역 열차충돌사고=사망73명,부상78명
▲48년 9월 충남 내판역 열차충돌사고=사망 1백명
▲49년 8월 죽령터널탈선사고=사망46명,부상3백1명
▲51년 10월 순천∼여수선열차탈선사고=사망 1백20명
▲54년 1월 오산역열차탈선사고=사망56명,부상78명
▲55년 3월 부산역열차화재사고=사망 42명,부상45명
▲69년 1월 휘경동건널목사고=사망17명,부상 68명
▲69년 1월 천안열차충돌사고=사망 41명,부상 1백3명
▲70년 10월 충남 모산건널목사고=사망 45명,부상32명
▲70년 10월 원주터널사고=사망 14명,부상59명
▲71년10월 남원열차사고=사망20명,부상48명
▲73년8월 영동역유조열차탈선=사망38명,부상12명
▲75년6월 정선건널목사고=사망12명,부상74명
▲76년5월 서울 방학동유조차충돌=사망19명,부상95명
▲77년7월 충북지난역열차추돌=사망18명,부상1백60명
▲77년11월 이이열차폭발사고=사망60명,부상1천여명
▲81년5월 경산열차추돌=사망53명,부상2백44명
▲84년12월 나주열차충돌=14명사망,14명부상
▲85년2월 사북화물열차탈선=13명사망,14명부상
▲87년1월 대구방촌동건널목사고=9명사망,16명부상
▲91년12월 동두천건널목사고=6명사망,8명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