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군병원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시민단체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살인미수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중도금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권성동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5
  • 미 첫 흑인 대법관/더굿 마셜 사망

    【워싱턴 AP 연합】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원판사를 지낸 더굿 마셜옹이 24일 심장병으로 워싱턴의 베세스다 해군병원에서 사망했다.향년 84세. 1908년 볼티모어에서 출생한 마셜판사는 50년대와 60년대 흑인민권 변호사로 활약했으며 54년에는 흑백분리학교에 대한 위헌판결을 얻어내는등 흑인 권익보호에 앞장 서왔다.
  • 훈련중 팬텀기 추락/조종사 1명 순직

    【거창】 9일 상오 11시40분쯤 경남 거창군 북상면 상공에서 훈련비행중이던 공군모부대 소속 F4D 팬텀기 1대가 기관고장으로 북상면 산수리 덕유산 중턱(해발 6백m)에 추락했다.조종사 김병희소령은 중상을 입고 군병원으로 후송되고 부조종사 김범동중위는 순직했다.
  • 만간요법 개발 등 동의학연구 활발(오늘의 북한)

    ◎“낙후양의 보완”… 약초재배 권장/탈모엔 피부 붉어질때까지 솔잎 자극/설사땐 약쑥·식초 달여 식전에 한술씩 북한은 현대의료기술의 낙후와 기초및 전문치료약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동의학(한의학)을 중점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 80년「인민보건법」을 공포한 후 국가 보건정책차원에서 동의학의 연구와 보급을 추진하면서 전국 곳곳에 재배단지를 조성, 동약의 원료인 약초공급의 원활화를 꾀하고 있다.또 「동약처방집」「동약연구자료집」「조선동약총서」와 같은 동의학 연구 저서를 발간하는 등 동의학의 과학화와 이론체계 수립에도 힘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북한 동의학발전의 견인차 역할은 동의학 육성방침에 따라 지난 58년 「조선의학과학원」산하 「동의학연구소」로 설치된 뒤 87년 독립기구로 승격한 「조선동의과학원」이 맡고 있다. 임상실험실 외과연구실 부인과연구실 민간요법연구실 등을 갖춘 이 과학원은 지난 89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전통의학협동연구센터」로 선정됐으며 지난 90년에는 「전자식 동의진단 치료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조선동의과학원」활동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총 4만6천여건에 이르는 전래 민간요법의 수집·정리사업과 연구다. 북한은 이 민간요법을 각 대학병원과 도·군병원에 설치돼 있는 동의과에서 임상 활용하는 한편 인민들의 의료서비스난 해결을 위해 계속적인 개발과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는 민간요법 가운데 대표적인 몇가지를 소개한다. □감기치료 ▲마늘을 한번에 2∼3g씩 하루 2∼4회 식후에 먹는다.▲파밑부분 60g과 생강10g을 함께 찧어서 끓는 물에 풀어 넣은 후 그 김을 입과 코로 들이마신다. ▲큰 배(이)에 10여군데의 구멍을 뚫고 껍질을 벗긴 마늘을 한쪽씩 넣은 뒤 이를 물에 적신 종이로 잘 싸서 불에 구워 먹는다. ▲언 사과 2개의 즙을 내어 마신다.▲술 한잔에 달걀 한개를 풀어 먹은 후 땀을 낸다.▲코가 막힐 때는 팥죽 한사발에 메밀쌀 70g과 파뿌리 3개를 넣고 1시간 정도 달여 한번에 다 먹은 후 더운 방에서 땀을 내면 좋다.메밀쌀대신 입쌀이나 좁쌀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악성감기로 열이 날때는 물1백㎖정도에 적당량의 간장을 타서 끓이다가 계란 1개를 넣어 먹는다. □탈모증치료 ▲솔잎으로 만든 솔을 이용,수시로 머리카락이 빠진 부분을 피부가 붉어질 때까지 자극한다.▲마늘이나 생강을 찧어 그 즙을 탈모 부위에 자주 바른다.천에 묻혀 문지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콩팥염치료 ▲옥수수 수염을 일정량의 물에 달인후 그 물을 한번에 1백∼1백50㎖씩 하루 세번 먹으면 소변보기가 한결 쉬워진다.▲만성콩팥염일 경우 같은 양의 옥수수 수염과 딸기의 뿌리에 적당량의 물을 넣고 절반 정도로 줄때까지 달인 후 깨끗한 천으로 걸러 한번에 1백㎖씩 하루 3번 식전에 먹는다. □이질·배앓이 ▲배가 차고 설사할 때 약쑥 1백g에 5%식초 5㎖와 물 2백㎖를 넣고 달인 후 하루 세번 식사전에 한숟가락씩 먹는다. ▲1백g씩의 약쑥과 검은 콩을 각각 불에 볶아 빻은 다음 밀가루로 반죽,무게 22g씩의 알약으로 만들어 하루 세번 8∼10알씩 먹는다. ▲임신중인 환자는 생계란이나 삶은 계란 2∼3개를 한번에 먹는다.▲만성적인 이질에는 개뼈를 흰재가 되도록 불에 태워 식전에 5g씩 더운 물 또는 미음에 타서 먹는다.▲파에 소금을 조금 넣어 찧은 것을 약천으로 싸서 따뜻하게 데운 후 배를 찜질한다. □타박상치료 돌이나 몽둥이에 맞아 피부밑에 어혈이 지거나 붓고 아픈 경우엔 감자 생강 솔잎등이 이용된다. ▲생감자를 찧어 환부에 붙이는데 이때 생감자속의 솔라닌성분이 염증을 가라앉히는 작용을 한다.▲생강 1백g에 겨자 10∼15g을 섞어 찧은 다음 환부에 붙이고 헝겊으로 싸맨다. ▲된장을 두툼하게 바르고 싸맨다.다쳐서 벗겨져 피나 체액이 고여 몹시 부어 올랐을 때 바르면 피부 밖으로 스며나온 체액들이 흡수되면서 붓기가 가라앉는다.▲고춧가루와 약한 불에 녹인 바셀린을 1대5의 비율로 섞어 무른 고약이 되게 한다.이 고약을 하루 한번 또는 이틀에 한번 다친 곳에 바른다. □기관지염치료 기관지염증으로 심한 가래 기침 열이 나는 경우 ▲봄·가을에 캔 말린 은시호(대나물)뿌리30g, 도라지1백g, 살구씨30g, 아편껍질열매15g을 함께 빻아 알약으로 만든 후 한번에 4g씩 하루 세번 먹으면 염증이 가라앉고 가래가 줄어든다. ▲도라지 20g과 율무쌀 30g을 물에 달여 하루 3번 마신다.율무쌀이 없을 때는 도라지를 잘게 썰어 물 0.5ℓ에 일주일 동안 담가 뒀다가 짜서 한번에 0.1∼0.2ℓ씩 하루 2∼3번 마신다.
  • 독정부,호네커 처리 고심/망명 16개월만에 러시아서 소환

    ◎장벽탈출자 발포혐의등… 중형 불가피/“동독인상처 건드릴라” 공정재판 강조 에리히 호네커전동독공산당서기장이 소련으로 피신한지 16개월만에 베를린으로 송환돼 감옥에 수감됨으로써 또한차례 공산독재자의 말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8월이면 만 80세가 되는 호네커는 베를린장벽 설계자이며 동구에서 가장 철저한 스탈린주의 신봉자였다는 점에서 통일독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에 대한 사법처리를 해야만 했다. 우선 그에게는 베를린장벽을 넘다 희생된 49명에 대한 발포명령과 권력남용혐의로 90년 12월 기소돼 있는만큼 이에 대한 재판이 올해안에 시작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이미 망해버린 동독지도자에 대한 정치적보복이라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독일정부는 「깨끗하고 공정한 재판」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오는 가을부터 시작돼 올해안에 끝날 것으로 보이는 사법처리에서 호네커는 발포명령뿐만 아니라 집권중 정치적 희생으로 숨진 사람이 3백50명이나 돼 최악의 경우 종신형을 받을수도 있다.그러나 동독체제와 관련,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는데다 얼마전 베를린장벽 탈출자에 대한 사살혐의로 기소된 2명의 동독병사가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만큼 호네커에게도 중형이 내리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상당수 동독인들은 호네커의 억압적통치와 발포명령등으로 그를 경멸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노쇠한 그를 재판정에 세워 득이될 것이 있느냐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호네커가 송환되는 공항에서 『호네커는 절대 뉘우치지 않을 사람이니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둬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보복을 중지하라』는 시위자도 있어 독일인들의 상반된 갈등을 잘 나타냈다. 독일 정부도 호네커를 재판정에 서게 함으로써 동독인들이 안고있는 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됨으로써 야기될 위험성을 우려하고 있으나 일단 법적인 절차를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원칙이다.이때문에 독일정부는 모든 처리를 베를린법원에 일임한다는 자세이고 재판부는 호네커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대표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여론재판이라는 일부비판을 일축했다. 호네커는 심장질환병력이 있으며 90년 기소됐을때도 지병때문에 구속 하룻만에 풀려나 소련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91년 3월 모스크바로 탈출했다.그후 쿠데타사건등으로 소련이 혼란기에 처해 모스크바에 머무를수 있었으나 러시아정부가 들어서 그를 송환하려하자 지난해 12월11일 칠레대사관으로 피신,그의 신병처리를 둘러싸고 독일·러시아·칠레사이에 외교문제가 된 가운데 북한과 칠레로의 망명설이 끊임없이 나돌다가 독일탈출 16개월,칠레대사관 피신 2백32일만에 송환됐다.
  • 목재운반 민간 헬기/나무에 걸려 불시착/부조종사 경상

    【인제】 4일 상오 10시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2리 국립공원 설악산 봉정암 앞 마당에서 통일항공화물주 소속 S­58T 헬기(조종사 장희용)가 봉정암 증축공사용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목재를 매달고 착륙중 목재가 인근 나무에 걸리면서 봉정암 앞마당에 불시착했다. 이 사고로 부조종사 최영태씨가 찰과상을 입어 상오 10시45분쯤 육군 모부대 헬기의 도움을 받아 속초 군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 이번엔 허리수술/병역부정 16명 적발

    ◎입영대상 대학생등 7명 면제받게/87년 병무부정 면직 군병원기사등 7명 영장 【대구=이동구기자】 대구경찰청은 22일 현역입영대상자에게 군복무면제를 받도록 허리디스크수술을 알선해 주고 사례비를 받은 전국군통합병원 X레이기사 백승두씨(45·대구시 수성구 만촌2동 우방금탑아파트 1101호)와 백씨의 부인 박경조씨(41),백씨부부의 소개를 받아 현역입영 대상자에게 허리디스크 수술을 해준 전북 남원 유신경외과 원장 유근오씨(41),대구고려신경외과 원장 홍원배씨(50)등 4명을 병역법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이들에게 사례비를 주고 병역을 면제받은 현역입영대상자 7명과 부모 5명등 12명 가운데 대구 B의대 졸업생 김경호씨(26·경북 영천시 완산동 1082)등 3명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대구 K대 1년생 오모군(24·대구시 동구 신천동 백합맨션)등 3명을 입건하는 한편 오군의 어머니 이무생씨(53)등 6명을 수배했다. 지난 87년 병무부정사건으로 국군통합병원에서 면직된 백씨는 현역판정을 받은 부유층자제들을 물색,이같은 범행을 저질러 왔다.
  • 탤런트 변우민 병역부정/신검서 입영판정… 남의 진단서 내고 연기

    ◎생무릎 연골 절제수술로 아예 면제받아/알선 2명 구속… 달아난 변·의사 수배 【부산=김정한기자】 인기탤런트겸 가수인 변우민씨(27)가 교통사고 환자의 진단서를 위조,군징집연기를 받은뒤 의사와 짜고 생무릎을 연골수술받아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밝혀져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부산지검 수사과는 6일 교통사고 환자진단서를 군병원에 제출,가수 변씨의 군징집을 연기토록 도와준 럭키화재해상보험 북부산 영업소 과장 정유수씨(36)와 김경국씨(37·전 이국일 정형외과 사무장)등 2명을 병역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달아난 변씨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검찰은 또 교통사고환자 박홍교씨(27·부산진구 당감동 127)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입건하는 한편 생무릎을 수술해 병역을 면제시켜준 이국일정형외과원장 이국일씨(37·해운대구 중2동 1521의 44)를 수배했다. 검찰에 따르면 구속된 정씨 등은 징병신체검사에서 3급판정을 받아 입영대상인 변씨로부터 병역면제 부탁을 받고 지난 90년 6월9일 부산진구 개금동 세명정형외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질병으로 입원중인 박씨를 불러내 서구 토성동 3가15 부산방사선과의원(원장 이박정)에서 변씨 이름으로 단층촬영을 실시,「요추간판탈출증」이란 소견서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검찰조사결과 변씨는 이같은 사기극을 숨기기 위해 모월간지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기사를 게재해 병원에 제출한 허위진단서를 교통사고로 인한 자신의 진단서인 것처럼 꾸민 것으로 밝혀졌다.
  • 정신대 만행/「사과」엔 높은 소리… 「배상」엔 미온적

    ◎두 얼굴의 일본사람들/“다끝난 일” 정부·시민 소극자세 일관/일부선 “과거죄악 청산,새 출발 해야” 한일간 비극적 역사의 한부분인 종군위안부(정신대)문제가 서울과 도쿄에서 이슈화되고 있다.그러나 강제연행의 당사자인 일본의 대응은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일본총리는 20일 『종군위안부문제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때 참기 어려운 문제』라고 전제하고 이들에 대한 보상의 필요성을 지적했다.그러나 가토(가등)관방장관은 『한일간 보상의 문제는 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끝났다』며 정부의 보상가능성을 배제했다.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이같은 이중성은 일반 시민들의 여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도쿄의 한 시민단체가 개설한 「종군위안부 110번」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화응답자중에는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제와서 일본의 치부를 폭로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의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은 과거침략에 대한사죄와 보상을 적극 주장한 자,종군위안부문제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굴한 사람도 일본 중앙대의 요시미(길견)교수였다. 요시미교수는 『일본은 패전 50주년이 되는 앞으로 4년간이 과거침략사를 청산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지적하고 사죄와 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는 일본정부가 종군위안부문제에 군의 관여를 인정한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출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에는 이같이 양식있는 목소리가 있다.그들은 일부 교수 변호사 언론인 사회단체 등이다.이들은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사죄와 보상을 주장하고 있다.「종군위안부 110번」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보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일부는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식있는 소수」에 불과하다.그들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없다.정부도 그들의 정당한 주장을 외면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일본정부가 종군위안부문제에 군의 관여를 부인해온 것은 군의 관여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보상문제로 발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은 전종군위안부에 대한 보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일부에서는 민간차원의 보상을 주장하기도 한다.그러나 일본정부의 기본입장은 김학순씨 등이 제소한 배상청구소송에 대한 사법적 판결결과에 따르겠다는 것이다.그러나 그 판결의 결과는 알 수 없으며 또 언제 판결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본정부가 사과를 하면서도 보상에 소극적인 것은 그들의 전형적인 2중적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일본은 말로는 사죄하면서도 행동은 또 다르다.일본에 대한 불신의 벽을 허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2중적 행동때문이다. 일본의 보상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한일간의 외교마찰로 비화될지 모른다.한국정부는 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청구문제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만약 한국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일본정부가 적절한 대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양국간의 관계는 악화될 우려마저 없지않다. 미야자와 총리는 노태우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21세기를 향한 미래지향적인 한일협력관계를 강조했다.그러나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는 진정한 과거청산 없이는 불가능하다.과거없는 미래는 없다. ◎“나는 죄인” 세 일인의 증언/“숨돌릴 틈도없이 「다음」 받으라” 강요/“몸 좋고 가난한 학생 중점선발” 특명 일본의 한 시민단체는 지난 14일부터 3일간 「종군위안부 110번」이라는 프로그램을 개설,당시의 경험담 및 관련정보를 수집했다.종군위안부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아사히(조일)신문은 21일 이 프로그램 내용과 함께 그동안 들어온 2백30건의 제보가운데 3명의 증언을 보도했다.증언내용을 소개한다. 남경주둔 일본군 부대에 소속되었던 나는 3회정도 위안소를 출입했다.위안소에는 고참병사가 차례를 무시하고 새치기하는 것을 막기위해 별도의 감시병이 배치되었다.한사람당 15분이 할당되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을 때는 『빨리 끝내고 나오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위안부들이 허리띠를 채 매지도 못한채 다음 사람을받는 경우도 있었다.위안소출입은 일반병·하사관·장교등 계급에 따라 시간대가 달랐다.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나는 군연금을 받고 있다.전위안부들에게도 어느정도의 보상은 있어야 한다. 당시 19세였던 나는 2차대전 말기 해남도의 해군병원에서 종군 간호부로 일했다.매월 1회정도 종군 위안부들이 3대의 트럭에 실려 성병검사를 받으러 왔다.트럭 1대에는 보통 70여명이 타고 있었는데 일본인·대만인도 있었다.의사가 검진을 했지만 매독증상이 있을 때는 간호부가 선정했다.나보다 한두살 많은 언니들에게 『아프냐』고 물으면 『슬프다』『아이고』라며 눈물을 흘렸다.임신한 사람들도 있었다.나는 지금도 간호부로 계속 일하고 있다.환자중에는 재일 한국인도 있다. 나는 한국에 있는 국민학교교사로 일했었다.6학년 담임이었던 1943년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가능한 한 체격이 좋고 집이 가난한 여학생을 선발하라』는 지시를 받고 8명을 선발했다.그들은 도야마(부산)에 있는 비행기부품공장으로보내진것 같았다.일본에 돌아와서도 당시 선발됐던 어린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4년전 한국을 방문,나에게 배운 제자 몇명을 만날수 있었다.그러나 내가 선발한 8명은 누구하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제자들로부터 『그들은 위안부가 됐다.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행방불명되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 구토뒤 쓰러지자 참석자들 비명/세계 놀라게한 부시 졸도 이모저모

    ◎병원가던 부시 “관심끌고 싶었다” 농담/달러화 한때 급락… 내일부터 정상 업무/일 경찰 취재차단에 수행원들 “놔둬라” 고함 ○…부시 미대통령이 이날 일본총리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건배직후인 하오8시19분쯤 갑자기 식탁밑으로 몸을 숙여 음식물을 토한 뒤 쓰러지자 부인 바바라여사가 비명을 지르는 등 만찬장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엄습. 경호원과 미야자와 일본총리 등의 부축을 받아 창백한 얼굴로 일어선 부시대통령은 박수를 치는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뒤 옆방으로 옮겨져 5분정도 휴식을 취하다 황급히 달려온 의료진의 진료를 받고는 스스로 현관까지 걸어나와 인근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해 대기중인 구급차를 물리치고 리무진승용차에 올라타면서도 『다소 관심을 끌고 싶었을 뿐』『굿나잇』이라고 경호원들에게 농담을 건네는등 여유있는 표정. 부시대통령은 하오8시35분쯤 숙소인 아카사카영빈관에 도착,주치의로부터 위장염이란 진단을 받은뒤 2명의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잠자리에 들면서도 재선을 의식한 듯 『비록 쓰러지기는 했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었다』고 해명. ○…부시대통령이 만찬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만찬은 계속된 가운데 스코크로프트 백악관안보담당보좌관이 부시연설을 대독한 후 바바라여사로부터 메모를 건네받은 미야자와총리가 방금 받은 연락이라며 『부시대통령의 건강상태에 이상이 없다』고 밝히자 참석자들은 우뢰같은 박수로 환영. 이어 등단한 바바라여사는 『오늘 아침 아키히토 일왕 부자와의 테니스복식경기에서 남편이 의외로 졌다』면서 『남편이 쓰러진데는 한조를 이룬 아머코스트주일미대사의 책임이 크다』고 조크. ○…피츠워터백악관대변인은 『대통령이 위장염에 걸렸을 뿐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며 지난해의 심장박동 이상증세와는 무관하다』면서 『내일 하오부터 예정된 일정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강조. ○…졸도 사건 와중에 「대통령」에 관한 언론보도에 대처하는 미국과 일본 관리들의 판이한 형태가 극명하게 대조되기도. 사건이 터지자마자 만찬장에 배치됐던 일본경찰들은 대통령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있는 장면이 기자들에 의해 사진찍히지 못하도록 즉시 흰 식탁커버로 현장을 가리는 한편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무가내로 차단시켰다. 그러나 미국의 백악관관리들은 일본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는 기자들에 동조,경찰들에게 『기자 「일」을 하도록 내버려둬라』고 같이 고함. ○…부시대통령의 졸도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외환시장의 달러화는 급속히 가치가 하락했으나 그의 건강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려지자 곧바로 원래수준을 회복. ◎부시 경선가도에 “제2의 악재”/경제침체 이어 「건강이상」 핸디캡으로/작년에도 입원… 유권자 등돌릴까 우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지난해 5월에 이어 8일 또다시 졸도함에 따라 그의 재선전망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대통령자격요건으로 무엇보다 건강을 중시하는 미국사회의 풍토를 감안할때 그의 건강이상은 올 연말로 다가온 선거에서 크나큰 핸디캡으로 대두딜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시대통령은 지난해초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뒤 역대 미대통령사상 최고인 90%가까운 지지율을 얻어 재선이 확실시됐으나 그후 미국경제의 계속되는 침체와 불경기로 인해 인기도가 40%대로 떨어져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만67세 7개월(1924년6월12일생)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루 11시간씩 휴일없이 집무하는 만능스포츠맨 대통령으로 소문나 있으며 미역대 대통령중 외교적인 해외방문을 가장 많이한 인물이나 지난해 5월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조깅중 심장에 이상을 일으켜 워싱턴근교 베데스다해군병원에 입원,이틀간 치료를 받으면서 건강에 적신호를 밝혔다.당시 병명은 갑상선이상인 심방세동으로 스트레스가 주원인이었다. 부시대통령 주치의인 버튼리박사는 이날 부시대통령의 졸도원인이 『지난해의 심장이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흔한 장염이며 내일 아침이면 평상시 건강을 회복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고 부시 자신도 『쓰러지기는 했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고 거듭 밝혀 재선을 앞둔 부시진영의 안타까움을 드러냈다.미국인 유권자들이 이번 사고를 단순한 해프닝이라기 보다는 건강상의 문제로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 부시,일 총리 만찬중 졸도/어제 하오

    ◎“위장염으로… 곧 회복 영빈관서 휴식”/“건강상태 양호” 【도쿄=이창순특파원】 조지 부시 미대통령이 8일 저녁 미야자와(궁택)일본총리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중 위장염으로 갑자기 쓰러졌다.그러나 곧 일어나 10여분간 휴식을 취한후 영빈관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건강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대통령은 이날 하오 7시부터 시작된 만찬에 참석,식사시간 30분후쯤인 하오 8시19분쯤 갑자기 쓰러졌다.부시대통령은 그러나 곧 일어난후 스스로 걸어나와 대기하고 있던 응급차를 타지 않고 자신의 전용차를 이용,하오 8시35분쯤 영빈관으로 돌아갔다. 부시대통령은 건강이 좋지않아 건배도 술이아닌 물로 했다.부시는 지난해 5월에도 조깅도중 심장에 이상을 일으켜 미해군병원에 이틀간 입원했었다.
  • 대구 60대 할머니 “나도 정신대”

    ◎버마·태국등지서 3년6개월간 일군 위안부로/정신대 대책협,첫 신고 받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일제치하 종군위안부였던 문옥주씨(67·대구시 거주)의 자진신고를 받았다고 6일 발표했다. 협의회가 전하는 증언내용에 따르면 문씨는 19살때 안면이 있는 남자가 『가기만 하면 일자리도 좋고 돈도 잘 번다』는 말에 속아 42년 7월부터 해방후인 46년4월까지 약 3년6개월여동안 「후미하라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을 따라 버마·태국 아유타야등으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일본이 패전할 당시 아유타야에 있던 문씨는 일본군 환자가 급증하자 야전육군병원에서 간호사 조수노릇을 11개월가량 하다가 해방후 귀국,현재 파출부로 일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위안부 시절엔 군표를 대가로 받았으나 간호사 조수로 일할때엔 한푼도 받지 못하는 강제노역이었으며 위안부시절 술취해 칼을 빼들고 행패를 부리는 일본군을 죽였다가 군종재판에 회부되는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폭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전주의 “맹인 변호사” 최덕식씨(이사람)

    ◎맹인 무료변론… 복지증진에 앞장/눈먼이들 「개안」 인도/법무관 재직중 실명… 좌절끝에 재기의 삶/수임료 꼬박 적립,10년간 회관건립이 꿈/해외단체와 결연주선… 매주 경로잔치도 『비록 내눈은 멀었지만 다른 앞못보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되겠습니다』 최덕식씨(37·전주시 완산구 경원동3가 64의6)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맹인변호사이다. 그는 지난 3월16일 군법무관 선배인 임종섭변호사(38)와 함께 변호사사무실을 개설,맹인들이 의뢰한 건에 대해서는 무료변론을 도맡는등 맹인복지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전주시 중앙동4가 전북맹인회 사무실에 나가 경로잔치를 베풀거나 식사를 대접하며 자신이 실명하기 전에 본 아름다운 세상,실명후의 좌절을 극복한 과정등을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삶의 용기를 붇돋워 주려고 애쓴다. 또 국내 맹인단체를 외국단체와 자매결연을 맺어주는 것도 그의 중요한 업무가운데 하나이다. 주위에서는 최변호사를 「전북지역 1천8백여 맹인들의 희망이요,맹인복지증진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그도 2년여전까지는 맹인이 되리라고는 짐작못한「정상인」이었다. 고려대 법대와 대학원을 나와 78년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공군 법무관 으로 근무하던 그는 지난 89년 3월 뇌수종치료를 받다가 항생제의 부작용으로 「스티븐슨스 존슨 신드롬」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서울 국군통합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뇌에 물이 차는 뇌수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머리에 가느다란 관을 박아 물을 빼내는 수술을 받고는 곧 회복되는듯 했으나 10개월후 다시 뇌수종 증세가 나타나 재수술을 받았다. 이당시 열이 높아지자 병원측이 항생제를 대량 투여,온몸에 발진과 함께 「스티븐슨스 존슨 신드롬」증세가 나타났다. 이 병은 눈물이 나오는 모세관이 파괴돼 눈물이 안나오고 시력도 잃게 만든다는 것. 90년 4월에는 눈을 뜰 수도 없는 장님으로 변해있었다. 『하염없이 통곡을 해보았지만 눈물이 나오질 않더군요.눈만 벌겋게 부어오를뿐이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절망속에서 폐인생활을 해야 했다. 벽에 부딪치거나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온몸에 멍이 드는 일이 거듭됐다. 최변호사는 이 당시 『고통없이 죽는 방법만 생각했다』면서 한때는 처자식의 생활보장을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자살하려고도 했다고 기억했다. 90년5월 그에게 한줄기 햇빛과도 같은 기회가 왔다. 미8군 법무관실장인 한국계 김현수씨(39)가 그의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주선한 것이다. 그는 곧바로 도미,텍사스주 미공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최첨단 장비로 각막이식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막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수술은 실패로 끝났다. 절망은 더욱 깊어져 그는 병원에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다. 이때 현지 한인교회 교인들이 찾아와 미국에서는 맹인변호사들이 거리낌없이 활동하고 있다고 그를 격려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마치 전류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에 와닿았다고 최변호사는 밝혔다. 그리고 20여년동안 유지해온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귀국하면 맹인들을 위해 남은 일생을 바치리라』는 각오로 맹인용 흰지팡이 사용법,타자치는 법,점자등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의 신념때문인지 치료에도 성과가 있어 오른쪽 시력을 0.1까지 희복했다. 그는 90년7월 귀국했고 91년1월 국가로부터 1급 원호대상자로 지정되면서 12년간의 군법무관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는 바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수임료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건을 내일처럼 처리한다는 자세로 문을 열었습니다.개업후 3일동안은 사건의뢰가 한건도 없어 내심 걱정하기도 했지요』 그는 희미한 오른쪽 시력에 의지,법률서적·사건서류를 확대복사해서 보면서 일을 처리하고 있다. 희미하게 남은 시력마저 언제 꺼져 버릴지 모르지만 자신의 가족과 도내 1천8백여 맹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게 최변호사의 각오이다. 그는 부인 이정희씨(32),1남2녀의 자녀와 함께 2천5백만원짜리 전세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일찍이 홀로 돼 구멍가게를 하며,외아들만을 바라고 살아온 어머니 최기순씨(58)는 그가 실명하자 아예 전주 모교회에서 기거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실명했다는사실」을 이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활기차게 꾸려나가는 그에게도 안타까움은 남아있다. 꿈속에서나마 어머니,처자식의 얼굴을 완전히 보고 싶어 꿈을 자주 꾸려 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것이다. 그는 현재 매월 들어오는 변호사수임료가운데 일정액을 맹인복지기금으로 내놓고 있다. 그의 장래희망이라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북지방에만 없는 맹인복지회관을 자신의 힘으로 짓는 것이다. 『그나마 변호사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나에게 의무를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는 최변호사는 지금처럼 수임료를 계속 모으면 10년안에 복지회관을 건립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환히 웃었다.
  • 미군 헬기 추락/민가 6채 대파

    【파주】 4일 0시40분쯤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선유6리 칠정마을에서 미보병2사단 소속 UH­6 블랙호크 6인승 헬리콥터(조종사 윌리엄 카펜터 준위)가 추락,폭발했다. 이사고로 이 마을 안영순(56)·강동욱씨(50)집 등 민가 6채가 불에 타 약 8천만원의 재산피해를 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조종사 카펜터 준위 등 승무원 6명은 추락직후 탈출,가벼운 부상만을 입고 군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 춘원 이광수 50년말 병사/북한군에 끌려가다 만포병원서

    ◎소련 망명 인사 밝혀 6·25때 납북돼 정확한 사망경위가 밝혀지지 않았던 한국근대문학의 개척자 춘원 이광수가 50년 12월 초순 평안북도 강계에서 15㎞ 떨어진 만포의 북한 인민군병원에서 지병인 폐결핵과 동상 등이 악화돼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당시 북한 문화성 부상을 지내다 소련으로 망명한 정상진씨(73·재소고려인신문 고려일보 주필)와 당시 북한 외무성 부상이었던 박길용박사(71·소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가 중앙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을 통해 밝힌 것. 이들에 의하면 50년 7월12일 납북되어 평양구교화소 감옥에 갇혔던 춘원은 유엔군의 진격으로 평양을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에 끌려 평양에서 강계로 도보로 가던중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작가 홍명희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만포병원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 벽지 응급환자 군병원서 치료/헬기·구급차량등도 지원키로

    ◎국방부,7월부터 국방부는 오는 7월1일부터 민간병원이 없는 지역의 야전병원이 민간인 응급환자를 진료하고 환자를 신속히 후송하기 위한 헬리콥터와 구급차를 지원하기로 했다. 국방부는 29일 벽제·일동·현리·동해 등 4개 군병원을 민간인 응급의료망으로 지정하고 지역응급의료정보센터와 직통일반전용전화를 가설하는 한편 앰뷸런스 2대씩을 상시 대기토록 했다. 구급차 안에는 환자를 안전하게 후송하기 위한 구급약품과 들것을 비치하고 있으며 출동시에는 구급교육을 받은 군의관과 간호장교·위생병 등이 탑승,응급치료를 제공하게 된다. 헬리콥터를 요청할 경우에는 응급환자나 그 가족이 일반전화 「129」로 응급의료정보센터에 환자발생을 신고하면 응급의료정보센터의 운영요원이 군전용회선으로 군부대에 항공기 지원요청을 하게 된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6·25 전상자 임학준씨의 “인간승리”

    ◎전쟁상흔 딛고 “이웃사랑 반평생”/휠체어 타고 재활촌 건립등 앞장/30대에 대학진학,이젠 중견기업가로/장학회 운영… 불우한 이웃에 거금 “선뜻” 『6·25는 내몸을 불구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나와 같은 불우한 전쟁의 희생자를 도우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남겨준 전체적 장애를 딛고 반평생을 동료 상이용사들을 돕는 데 몸바쳐온 전상1급 국가유공자 임학준씨(60)는 6·25 발발 41주년인 25일 이렇게 말했다. 임씨가 부상을 당한 곳은 적군과 아군간의 접전이 한창이던 50년 9월30일 포항 부근 피악산에서였다. 『지프를 타고 이동하다 적군의 포격을 받고 기절했다 깨어보니 소대원 3명은 이미 숨져 있었고 척추와 팔·다리엔 온통 파편투성이었습니다』 아직도 악몽 같은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임씨는 그때 부산 육군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다 끝내 군문을 나서야 했다. 『불구의 몸으로 세상을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더군요』 한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임씨는 57년 대한상이군경회의 전신인 상이용사회의 업무이사직을 맡으면서 자신과 같은 전쟁희생자를 돕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기도 했다. 처음 손을 댄 것이 상이군인들의 재활용사촌 건립사업. 『제몸 하나 추스리지 못하는 병신(?)이 너무 설친다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미8군 한미재단,군부대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찾아다니며 목재와 불도저 등의 건축장비를 지원받아 64년 관악구 신림동에 32가구,66년 노원구 공릉동에 20가구,67년 강동구 방이동에 30가구의 집을 지었다. 상이용사를 위해 불같이 뛰던 임씨는 32살 때인 63년 건국대 법과에 진학했다. 가난으로 포기해야 했던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내 전미자씨(57)와 조카 윤복씨(47)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임씨를 업고 4년 동안 학교계단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68년 군경회 서울지회장을 끝으로 군경회를 떠난 그는 그 동안 모은 재산으로 고철수입,건설업 등에 뛰어들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 트럭 20여 대로 시작한 화물운송사업이 번창하면서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임씨는 화물운송사업을 기반으로 현재 노원구 중계2동의 한윤교통,화물운송의 일신상운,스포츠용품 수출업체인 선미스포츠 등 3개 회사를 거느린 어엿한 경영자로 발돋움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도 한시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을 잊지 않았다. 72년 일신상운의 이름을 따 「일신장학회」를 설립,지금까지 가정환경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 하는 중·고교생 1천7백67명에게 1억5천여 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 것을 비롯,83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구정면에 고아원을 지어 수도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부인 전씨는 남편에 대해 『사업을 하면서 지나치게 구두쇠 노릇을 해 욕도 많이 먹었다』면서 『그러나 자기보다 어려운 이를 돕는 데는 결코 인색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25일 자신의 땀이 배어 있는 서울 노원구 화랑용사촌에서 옛전우를 만난 임씨는 『6·25와 같은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면서 젊은이들에게보다 높고 멀리 눈을 돌려 나라를 생각하고 조국에 대한 긍지를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 파키스탄 열차 충돌/2백여명 사망

    【카라치 AFP 연합】 파키스탄 남부 신드성 지역의 고트키역에서 8일 새벽 1시30분(한국시간 상오 5시30분)쯤 발생한 열차충돌사고로 2백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야전병원 소식통들이 이날 밝혔다. 사고가 나자 인근 군부대 장병들이 사고현장으로 달려와 부상자들을 파누 아킬 육군병원으로 후송하는 등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한밤중에 발생한 사고여서 구조작업이 지연됐다. 공식소식통들은 이날 사고는 카라치를 떠나 라발핀디로 가던 「테즈감」 특급열차가 문구류 등을 싣고 고트키역에 정차해 있던 화물열차를 들이받아 일어났다면서 현재 사고원인을 조사중에 있으나 일단은 신호착오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사고로 승객열차 12칸이 부서졌으며 카라치 북쪽으로 약 3백70㎞ 떨어진 고트키역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 사망자들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 “고르비 계속 지지”/부시 미 대통령

    【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8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미 메릴랜드주 베데즈다 해군병원에서 불규칙한 심장박동의 원인으로 지적돼 온 갑상선 기능항진증 1차 검사를 받은 뒤 전용 헬기 편으로 백악관으로 돌아와 윌리엄 웹스터 미 CIA 국장의 사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소련 및 중동정책 전반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으며 회견 후에는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리투아니아 대통령 등 소 발트해연안 3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면담을 가졌다.
  • 부시,심장이상… 한때 입원/약물치료로 정상 회복

    ◎백악관대변인/“어제 백악관 복귀… 집무 재개” 【워싱턴 AP 연합】 비정상적인 심장박동으로 지난 4일부터 입원치료를 받아온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6일 상오(워싱턴 시간)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만 이틀 만에 퇴원,백악관 집무실로 되돌아왔다. 말린 피츠워터 백악관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부시 대통령의 심장박동은 5일 밤 정상을 회복했다가 6일 아침 다시 이상을 보였으나 담당의사들은 부시에게 투여된 두 가지 약물의 반응경과가 양호,그의 심장박동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한때 고려했던 전기충격요법의 시술을 실시치 않고 퇴원시키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원을 떠나면서 『문제없다. 다시 돌아가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피츠워터 대변인도 부시 대통령이 활기에 차 있으며 업무 재개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4일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조깅중 심장에 이상을 일으켜 워싱턴 근교 베데스다 해군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아왔는데 백악관측은 그가 6일중 마취상태에서 전기충격치료를 받게 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댄 퀘일 부통령이 임시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미 대통령,병상주변 스케치/미 의료진 “부시 심장병은 스트레스가 주인”/입·퇴원 소식에 외환시장 달러화 등락 거듭 ○…부시 대통령의 입원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장하는 뉴질랜드 외환시장을 비롯한 주요 외환시장에서 폭락세를 보였던 달러화가 부시의 퇴원 후 급반등세를 보이는 등 민감한 반응. 유럽 외환시장에서 6일 상오 한때 1.7315마르크,1백37.95엔으로까지 떨어졌던 달러화 시세는 하오 들어 1.7450마르크,1백38.50엔으로 거의 정상수준을 회복.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1일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린 「국민건강과 스포츠의 달」 행사에 축구공을 차는 등 이제까지 역대 미 대통령들 중 가장 「건강한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해왔는데 이번 입원을 계기로 미 일각에서는 부시의 건강에 대해 근본적인 재검토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이번에 부시의 입원까지 부른 심방세동의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스트레스와 피로가 주요원인으로 꼽히고 있는데 부시의 경우 최근 걸프전쟁으로 높은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 이후 쿠르드족 난민의 비참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부시 대통령에게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한 데다 존 수누누 백악관비서실장의 공용 항공기 무단사용 등 부시로선 달갑지 않은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스트레스와 피로를 가중시킴으로써 결국 심방세동이란 병을 부른 게 아니냐는 지적이 일부에서 제기되는 데 따른 것. ○“퀘일 능력 못 믿어” ○…부시의 건강이 『완전히 정상적』이라는 백악관측의 거듭된 강조에도 불구,부시의 갑작스런 입원으로 대통령 유고시 미국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말린 피츠워터 백악관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이 6일 전기충격요법치료를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럴 경우 댄 퀘일 부통령이 잠시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 헌법 25조에 따르면 대통령이 유고시 미 부통령 하원의장,임시상원의장(평시에는 부통령이 상원의장 겸임),국무장관,재무장관,국방장관,법무장관… 등의 순으로 대통령직을 계승하도록 규정돼 있는데 부시 대통령의 경우 부통령인 댄 퀘일이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인 데다 경험마저 없어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이제까지 오는 9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측 후보로 부시가 다시 나올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고 그럴 경우 댄 퀘일이 다시 부시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 틀림없는데 부시의 건강에 이상이 있을 경우 언제 미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지 모를 부통령에 국민의 신망으로 따질 경우 경량급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퀘일이 나서는 것은 오히려 부시 대통령의 지지기반을 잠식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공화당측에선 우려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 이전의 역대 미 대통령 40명 중 현직에 있는 동안 입원했던 경우는 무수히 많으며 특히 병사한 인물만도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비롯해 4명에 이른다고. 아이젠아워 대통령도 지난 55년 1개월 동안 입원하는 바람에 닉슨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도.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 재직시 암살당한 케이스도 4명.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