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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1]

    미남(美男), 미성(美聲)의 가수 손인호씨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비 내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 같은 우리의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년 간 정상에 서 있는 동안에도 방송 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 무대에서조차 거의 볼 수 없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그는 가수로서 150여곡의 노래들을 발표했지만 영화 녹음기사로는 무려 2000여편 이상을 작업했다.‘돌아오지 않는 해병’ 그리고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 이로 인해 대종상 녹음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손인호씨가 가수로서 받은 상은 단 한차례도 없다. 보릿고개 시절,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이었던 때, 그 두 무대를 동시에 장악한 인물로 ‘소리의 마술사’라고까지 불리던 손인호씨는 속칭 ‘38 따라지’다. 본명 손효찬(孫孝燦).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해 창성보통학교 6학년 때, 수풍댐 건설로 인해 마을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 모두 만주 창춘(長春)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광복 후 신의주로 옮긴 손인호씨는 평양에서 열렸던 이북 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에 참가,‘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는 권유를 받고 이남 행을 결심, 광복 이듬해인 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온다.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 몸에 뿌려진 것은 DDT, 즉 살충제였다. 나이가 어려 곧바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그는 당시 서울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사람은 1주일 동안 굶어도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 참가자 300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전쟁터를 누볐다. 제대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한 그는 ‘대한뉘우∼스(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아울러 영화 녹음기사로도 활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 이 인연으로 그는 노래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나는 울었네’와 ‘숨쉬는 거리’다. 휴전 이듬해인 54년도의 일이다. 그의 노래 중 56년에 발표한 ‘비 나리는 호남선’과 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유당 시절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이 유세 도중 호남선 열차 내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발생했기에 충격에 빠진 국민들은 마치 추도곡처럼 ‘비 나리는 호남선’을 애창했다. 때를 같이 해 온갖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신익희 선생의 미망인이 직접 이 노래를 작사해 만든 노래라는 것.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 이 소문으로 인해 노래를 부른 주인공 손인호씨를 비롯해 작사가 손로원, 작곡가 박춘석씨도 줄줄이 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담당 수사관이 대뜸 ‘이 노래를 취입할 때 어떤 감정으로 불렀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가수는 감정을 가지고 노래를 해야지, 감정 없이 노래 부르면 그건 가수가 아니죠.’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수사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야.” 손인호씨의 회고다. 사실 이 곡은 바빠서 일년 이상 차일피일 취입을 미뤄왔던 곡으로 취입 도중 반주가 틀렸음에도 별로 히트되지 않을 곡이라고 판단,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긴 곡이었다. 노래 역시 단 한번 만에 OK사인이 났다.(계속) sachilo@empal.com
  • [주말탐방] 육군 제3군견훈련소

    [주말탐방] 육군 제3군견훈련소

    “컹컹∼” 저런, 놀라시는군요. 이렇다니까요. 저는 반가워서 경례를 올린 건데…. 그렇다고 명색이 군견인 제가 “멍멍”하고 애교를 떨 순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유서깊은 육군 제3 군견훈련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더군다나 올해는 병술년, 개해가 아닙니까. 아까 부대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까 우리가 사방에 뿌려놓은 ‘거시기’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시더군요. 하지만 그런 표정은 우리한테 큰 실례가 된다는 점을 정중히 알려드립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 즉 견명(犬名)은 ‘베르’입니다. 태어날 때 저를 받아준 군무원(7급) 아저씨가 지어주셨습니다.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동료 중에는 ‘백두산’이란 이름도 있고,‘쾀보’같은 외국식 견명도 있습니다. 견명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군견기록부에 정식으로 오르는 엄숙한 이름입니다. 제 견종은 셰퍼드, 성별은 수컷, 견번(군번)은 ‘3-2617’입니다. 이제 막 정식 군견으로 임명된 팔팔한 신참입니다. 독일이 고향인 제 엄마와 아빠는 혈통이 좋은 명견이라는 이유로 몇년 전 한국의 국방부로 각각 팔려 왔고, 이곳 3군견훈련소에서 만나 4대(代) 조상까지 거슬러 서로 근친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은 후 저를 낳았습니다. 지난 2004년 9월 한여름 땡볕 아래서 만삭을 견뎌낸 엄마는 임신 68일 만에 다른 형제 5두(頭·군견의 수는 ‘마리’가 아니라 ‘두’로 표시합니다)와 함께 저를 낳았습니다. 엄마는 저를 낳기 전에도 2년여 동안 1년에 2∼3차례씩 모두 23두의 새끼를 낳은 베테랑(?) 산모입니다. 우리 엄마같은 개를 종모견(種母犬), 아빠같은 개를 종견(種犬)’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일생 동안 새끼만 낳는 번식견입니다. 이곳에만 종견이 8두, 종모견이 15두가 있습니다. 역시 유능한 군견을 낳는 종모견을 가장 쳐주는데, 이곳의 ‘아비스’란 종모견은 시가로 1500만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엄마와 새끼들이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기간은 45일간 뿐입니다. 이 기간 동안 엄마는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군견병들은 곁에서 각종 영양제로 보육을 돕습니다. 운명의 45일째가 가까워졌을 때 저는 어린 마음에도 이별을 직감했습니다. 제 잇몸에서 이빨이 돋아나면서 엄마 젖에서 자꾸만 피가 났거든요. 엄마는 아프다는 기색 하나없이 고스란히 젖을 내맡겼지만, 예정된 생이별을 피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날 출산실에서 끌려나가는 엄마에게 저는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매달렸습니다. 엄마도 네 다리를 쭉 펴서 최대한 버티는 모습이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출산실 문이 닫혔고 울다 지친 저는 바닥에 엎드려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그런데 10분쯤 흘렀을까 밖에서 “우우우∼”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분명 엄마였습니다. 저는 “멍멍”하면서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하지만 이내 엄마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습니다. 나중에 군견병 형들이 말하는 걸 들으니, 숙소까지 끌려갔던 엄마가 군견병이 문을 여느라 잠깐 줄을 놓은 틈을 타 출산실까지 달려왔다는 겁니다. 그후로 저는 유아견 사동으로 옮겨져 키워졌습니다. 생후 9개월이 흘러 제법 어른 티가 났을 때 저는 군견 적격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가로 25m, 세로 5m의 모래밭으로 된 칸막이 시험장에서 30분간 군견으로서의 적격 심사를 받는 것입니다. 시험장 허공의 줄에 매달린 공이 도르래에 의해 움직일 때 그것을 쉴 새 없이 따라붙어야 합니다. 중도에 딴 짓을 하거나 힘들다고 포기하면 가차없이 실격입니다. 군견으로서의 집중력과 체력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개는 전체의 25%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탈락견은 즉각 안락사 조치되거나, 수의과 대학에 임상실험용으로 기증되고, 운이 좋으면 군견이 아닌 경비 보조견으로 활용됩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30분’은 생과 사를 가르는 운명의 시간인 셈이지요. 탈락견을 사회로 배출하지 않는 것은 군견이 시중에 나돌면서 나타나는 각종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군견의 생로병사는 이렇듯 비정하면서도 까다롭게 관리됩니다. 한 마디로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군견은 사회의 일반 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군견 관리조항에는 ‘군견 막사 주위에 잡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군견과 일반견이 교배하면 지휘관을 문책한다.’는 항목이 있을 정도입니다. 먹는 것도 과자류와 잔반은 일절 금지되며 전용 사료만 제공됩니다. 테스트를 통과한 군견들은 10개월 가량의 훈련을 거쳐 정식 군견으로 임명됩니다. 이 기간 동안 적성과 능력에 따라 수색, 추적, 경계, 탐지 등 4가지 주특기 가운데 하나를 부여받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가장 유능한 개가 추적견으로 선발됩니다. 바람에 실려오는 적의 냄새를 맡고 쏜살같이 달려가 근처에 숨어있는 적을 찾아내는 게 수색견입니다. 화려해 보이지요. 반면에 추적견은 이미 달아난 적의 발자국 냄새를 따라 코를 땅에 박고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얼핏 청승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임무는 수색에 비해 훨씬 어렵습니다. 사람보다 1만배 이상 예민한 후각뿐 아니라 장시간 한 가지 냄새만을 쫓는 고도의 집중력을 겸비해야하거든요. 생후 19개월이 된 군견은 각 야전부대에 배속되거나 저같이 이곳 제3군견훈련소에 배속돼 각종 작전에 파견나가는 업무를 하게 됩니다. 흔히 군견이라고 하면 사냥개나 투견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이 있는데, 군견의 제1 덕목은 ‘발견’이라는 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군견은 호들갑 떨며 짖지도, 함부로 물지도 않습니다. 그저 신속히 쫓고 적을 발견했을 때엔 한두번 짖은 뒤 엄중히 노려봄으로써 상대를 제압합니다. 어떤 분들은 군견이 호사를 누리는 것으로 아는데, 오해입니다. 국내산 사료로 아침과 저녁 하루 2끼를 먹는데,1두당 하루 식비가 1400원 정도입니다. 목욕도 야외에서 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는 잘 씻지 못합니다. 관리비용이 1두당 연간 100여만원가량이 든다고 합니다. 다만 병원시설은 종합병원급입니다. 수술실은 물론 1억 5000만원짜리 초음파 진단기도 갖춰져 있습니다. 국토방위만이 삶의 목표인 우리는 결혼이 금지돼 있습니다. 발정기가 되면 격리조치됩니다. 우리한테 애인이 있다면, 군견병 형들입니다. 군견 1두당 1명씩 전담 군견병이 있어 제대할 때까지 우리를 보살펴줍니다. 먹여주고 씻겨주고 똥까지 군말없이 치워주니 가족이나 다름없지요. 힘이 장사인 우리들 훈련시키느라 군견병 형들 정말 고생 많이 합니다. 우리는 8살이 되면 군견에서 전역해 안락사 처리됩니다. 시신은 화장되기 때문에 묘지도 없습니다. 공비를 잡는 등 혁혁한 무공을 세운 군견한테만 예외적으로 묘지가 ‘수여’됩니다.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요?인간들은 꼭 무슨 반대급부가 있어야 사는 낙을 느끼나요?온갖 유혹에 기웃거리느라 분주한 인간들로서는, 백가지 천가지의 유혹을 뿌리치고 한가지 목표물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소박한 쾌감을 짐작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우리 군견들은 반대급부라는 말을 모릅니다. 만일 저한테 ‘병역특례’같은 걸 제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날카로운 송곳니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조건을 붙이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포상을 요구하는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 아닙니다. 군견으로서 저의 임무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 자체로서 숭고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아름다운 임무를 위해 일평생 멸사봉공(滅私奉公)하다가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군견의 길’입니다. 저는 군견으로 났지만 군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다음 생에서는 축생(畜生)이 아닌 인간으로 윤회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작별의 경례 올립니다. 이젠 놀라지 않으시겠죠? “컹컹, 컹컹컹∼”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군견의 종류 현재 육군 제3군견훈련소에서 수용하고 있는 군견 120여두 가운데 70%가 독일산 ‘셰퍼드’이고, 나머지 30% 정도가 벨기에산 ‘마리노이즈’다. 그동안 군견은 암·수 구분없이 ‘울프 그레이’라 불리는 흑갈색 털에 굵은 몸통을 가진 셰퍼드가 전형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누런 털에 머리가 작고 몸매가 날렵한 마리노이즈가 늘어나는 추세다. 마리노이즈는 후각이 셰퍼드 못지 않게 예민한 데다 주력은 셰퍼드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100m 달리기에서 셰퍼드를 먼저 출발시킨 뒤 마리노이즈를 출발시켜도 금세 따라잡을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 셰퍼드는 추적견, 마리노이즈는 수색견 등으로 주특기가 분화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제3군견훈련소는 지난해 말 영국산 ‘레브라도 리트리버’ 8마리를 들여왔는데, 이 개는 주로 폭발물 탐지견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한편, 우리나라 대표 견종인 진돗개는 한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강해 군견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군견병이 전역하거나 바뀌는 경우 통제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진돗개는 사람보다는 짐승에 호기심이 많아 수색이나 추적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군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클릭하면 주민번호 ‘줄줄’

    클릭하면 주민번호 ‘줄줄’

    국가인권위원회의 주민등록번호 사용실태 용역보고서는 13자리 숫자에 담긴 ‘제2의 생체정보’를 너무나 자주, 기계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 잘못 유출됐을 때에는 개인에 치명적인 손해가 갈 수 있지만 행정기관이나 기업에서는 별 쓸모도 없이 각종 서식에서 의무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일고 있는 주민번호 유통 및 활용 시스템의 개선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인권위는 지난달 9일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통해 무분별한 주민번호 수집에 대한 개선책 마련을 발표했다. ●경찰·산림청 등 주민번호 요구비율 90%대 이번 조사에서는 행정기관들이 대표적으로 주민번호 기입을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기관별로 해양경찰청(95.6%), 산림청(92.0%), 농촌진흥청(91.9%), 경찰청(91.7%), 과학기술부(90.0%) 등 대민접촉이 많은 기관이 주민번호 요구 비율이 높았다. 같은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19.6%), 조달청(37.0%), 관세청(37.9%) 등은 낮았다. 세무금융 68.5%, 학교 33.5%, 회사 24.0%였다. 과도한 주민번호 수집은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기관 데이터베이스 파일을 분석한 결과 교육청 및 각급학교 82.0%, 중앙정부 81.7%, 지방정부 81.2%, 정부투자기관 등 79.0% 등 전체 기관의 80.4%가 주민번호를 수집해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터넷에서 수만명 주민번호 노출 또 정보통신부와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이 약 2만 4000개 사업자 중 2005년 6월 말까지 점검이 완료된 1만 8000여곳을 점검한 결과,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1만 2628개 사업자의 30.1%인 3805개가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번호 외에 이메일, 유·무선 전화, 주소 등 대체로 6∼10개의 개인정보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정작 이들의 상당수가 주민번호 수집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민번호를 수집하고 있는 사업자들의 48%가 주민번호가 불필요하다고 했다. 이 중 56.0%는 “주민번호 없이도 고객관리에 문제 없다.”고 이유를 들었다. 이는 관행적으로 수집해온 주민등록 번호가 고객관리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업자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업자들의 주민번호 관리실태도 허술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교수팀이 인터넷 사이트 6000여개를 검색한 결과 2만 2882명의 주민번호가 바로 노출되는 것이 확인됐다. ●스웨덴·캐나다등은 엄격히 제한 하지만 주민번호와 관련된 49개 법률,228개 시행령,554개 규칙 중 어디에도 개인정보 보호 규정은 없다. 우리와 비슷한 국민식별번호제도를 가진 스웨덴에서는 법이 정하는 목적과 기관 외에는 본인의 동의 없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캐나다는 15개 행정업무에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문제 발생 때 책임소재까지 규정하고 있다. 연구팀은 대안으로 주민번호가 아닌 ▲운전면허번호 ▲여권번호 ▲사원번호 ▲납세변호 ▲의료보험번호 ▲군번 등 식별자를 해당 분야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금융·세제 등 특수분야 외에는 주민번호 수집을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할 것도 제안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연말 술자리 ‘간’ 챙기는 센스

    광고는 타이밍이다. 이런 원칙이 가장 잘 활용되는 때가 바로 요즘이다. 연말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송년회 등 각종 모임이 끊이질 않는다. 샐러리맨들은 늘 알코올에 젖어 있다. 이에 맞춰 숙취 해소와 피로 회복에 좋은 드링크 등의 광고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롯데칠성의 모닝세븐 드링크의 인쇄광고가 재미있다. 평면적인 특성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왼쪽에는 재치 발랄한 개그맨 김재동이 양복을 입고 철모를 쓰고 등장했다. 양손으로 모닝세븐을 총처럼 들고 뭔가를 겨냥하며 공격적인 자세로 서 있다. 오른쪽에 헤드라인 같은 메시지.‘오늘 전투의 최대 고비는 22시부터 01시 사이 무사귀환을 부탁한다.’ 오른쪽 밑으로는 모닝세븐 옆의 군번줄 인식표에 ‘저녁 7시, 회식 전에 챙겨두면 야간전투 준비완료!’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어 광고 하단으로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전해진다. ‘회식 전에도! 회식 후에도! 두 번 챙기는 비즈니스 드링크! 비즈니스 약속있으십니까? 내일 아침이 걱정되시죠? 6가지 성분이 함유되어 회사의 부담을 덜어드리는 비즈니스 드링크, 모닝세븐-이제 당신의 아침은 언제나 굿모닝입니다! 모닝세븐.’ 술모임을 전투에 빗대 건강을 챙기라는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고 재치있는 김재동을 등장시켜 친근감있게 풀어내고 있다.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압권은 인쇄광고 매체의 평면적 특성을 극복했다는 것. 헤드라인 곳곳에 총알 구멍을 만들어 입체성을 살렸다. 대웅제약의 우루사 인쇄광고. 경쾌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매는 손창민,‘간이 관리되어야 아침이 바뀝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간(肝)이 아침을 좌우한다!’가 메인 카피다. 작은 글씨지만 잠꾸러기 샐러리맨을 향한 일침.‘아침을 보면 그 남자의 미래가 보입니다.’우루사에는 우루소데옥시콜린산(UDCA)이 들어있음을 강조했다. 이 성분은 인체에서 유익한 작용을 하는 담즙산의 한 종류로 간을 건강하게 유지, 보호,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며 인체에 존재하는 성분이므로 축적 등에 대한 우려가 없음을 강조했다. 유한양행의 삐콤씨도 요즘 부쩍 눈에 자주 띄어 타이밍 광고에 편승했다.‘두 배로 열심히 일하는 당신을 위해, 공부하는 아이를 위해, 하루 두 알 삐콤씨를 바칩니다!’아버지와 아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노트북을 켠 채 신문을 들고 전화하는 정신없이 바쁜 아버지 모델 사진 앞에 ‘누구보다 아침 일찍 출근해 열심히 일하는 당신을 위해!’. 그 옆에는 스탠드를 밝히고 책을 쌓아둔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 모델.‘누구보다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 아이를 위해!’ 아침·저녁 하루 두 알을 강조하고 있다.‘삐콤씨에 함유된 비타민B군과 비타민C는 수용성 비타민으로서 체내에 축적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술독에 빠진 연말이라도 광고처럼 모두 건강하기를 기대한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방패’뒤의 눈물-전의경 인권 실태] 전국 3만 8000여명… 전경, 군번순 차출

    [‘방패’뒤의 눈물-전의경 인권 실태] 전국 3만 8000여명… 전경, 군번순 차출

    현재 전투경찰(전경)과 의무경찰(의경)은 전국적으로 각각 59개 중대 1만 1000여명,190개 중대 2만 7000여명이 있다. 전경의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간첩작전 강화를 위해 발족됐으나 이들은 군복무를 마친 직업 경찰관이었다. 이후 70년 전투경찰대 설치법이 제정돼 미필자에게 군복무 대신 전경복무를 하도록 했다.83년부터는 지금처럼 일반 군부대에서 군번 순으로 차출해 왔다. 이런 선발 방법에 대해 91년 헌법소원이 제기됐지만 각하돼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의경은 82년부터 선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매달 지방경찰청 단위로 지원자를 받고 있다. 전경은 크게 제주도나 울릉도에서 근무하는 해양경비단, 시설 보호 업무를 맡는 국가중요시설보호단,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타격대로 나눠진다. 의무경찰의 경우 크게 일선 경찰서·지구대 등 업무를 담당하는 방범순찰대와 시위 진압을 담당하는 기동대로 구분된다. 계급은 일반 군부대와 마찬가지로 4개로 나눠진다. 다만 이경-일경-상경-수경으로 불리며 복무 기간은 일반 현역병과 같은 24개월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군대서도 ‘기록’은 중요”

    “진정한 통일의 첫걸음은 휴전선 일대를 공원화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연간 6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되며 이는 곧 통일기금으로도 사용되지 않겠습니까.” 최갑석(76) 예비역 소장. 이등병으로 군에 입대, 보기 드물게 장성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최근 이같은 파란곡절의 군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장군이 된 이등병’을 발간,2일 오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그는 이와 관련,“우리나라의 군대는 여전히 기록문화가 약하다.6·25전쟁 당시에는 더욱 그랬다.”면서 후배들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더러는 교훈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번 출판기념회를 갖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전쟁세대로서 ‘휴전선의 평화공원화’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는 취지도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47년 2월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 이등병 군번 ‘1200599’를 받았다. 이후 창군 시절,6·25와 베트남전쟁 등에 참전하며 다섯가지의 병과와 38개부대 전속,50여개 보직을 거쳤다.83년 10월 예편.김문기자 km@seoul.co.kr
  • [세상에 이런일이] 軍소리한다 했더니…

    국군 기무사령부에 근무하는 간부라고 속인 후 “복무기간을 단축해주겠다.”는 거짓말로 금품을 가로챈 20대 중국집 배달원이 경찰에 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충남 연기군 한 중국음식점에서 배달을 하는 이모(20)씨는 지난 4월21일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 중인 A(23)씨에게 “큰 돈을 주지 않아도 복무기간 정도는 단축받을 수 있다.”며 접근했다. 이후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65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결과 이씨는 지난 2월말 연기군 서면의 한 군인아파트에 침입해 기무부대 손모(29) 중사의 전투복과 군번표 등을 훔친 뒤 기무부대원 행세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는 다른 군입대예정자와 군인 등 3명을 상대로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충남 조치원경찰서는 사기 혐의로 이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총기난사 현장엔 뻥뚫린 침상·곳곳 핏자국

    총기난사 현장엔 뻥뚫린 침상·곳곳 핏자국

    군 당국이 최근 총기 난사사건이 발생한 중부전선인 경기도 연천군 530GP(경계초소)를 21일 언론에 전격 공개했다. 군 당국의 조사 결과 발표에도 의혹 제기가 계속되자 이례적으로 언론 공개를 결정한 것. 이날 공개된 GP 내무실은 사건 발생 3일이 지났는데도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10여 평 남짓한 내무실 바닥과 침상 곳곳에는 수류탄과 소총에 난사당한 피해 장병들의 피가 그대로 말라 붙어 있었다. 또 사망자들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수사팀이 뿌려 놓은 흰색 스프레이만 남아 있었다. 특히 김모 일병의 수류탄 투척으로 처참하게 희생된 박의원 상병이 잠을 자던 침상은 구멍이 뻥 뚫려 있고, 매트리스와 모포는 피범벅이 돼 있었다. 수류탄이 폭발한 지점의 천장의 형광등은 박살나 있었고, 천장과 벽체 곳곳에는 검은 조각들이 곳곳에 달라붙어 있어 수류탄 폭발의 위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군 수사 관계자는 “김 일병이 던진 수류탄이 박 상병 바로 옆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폭발 충격의 50∼60%를 박 상병이 흡수한 셈이 됐다.”면서 수류탄 피해가 예상보다 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내무실 입구 바닥에서는 이번 사고로 숨진 차유철 상병의 군번줄이 발견돼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또 내무실 맞은편 취사장에는 김 일병에게 확인 사살까지 당한 취사병 조모 상병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과 총탄 자국이 함께 눈에 띄었다. 바로 옆 체력단련장에서는 전역을 불과 10여일 앞두고 부하의 총에 숨을 거둔 GP장 김종명 중위가 흘린 피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부대의 경우 계속적인 GP 근무가 어렵다는 군 당국의 판단에 따라 사고 직후 전원 철수했으며, 현재는 후속부대가 근무하고 있는 상태다. 연천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피해규모 논란 KG14 세열수류탄은 폭발 피해규모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수류탄은 지난 80년대부터 보급된 KG14 세열수류탄이다. 무게는 260g가량. 검은 회색 정구공 크기에 폭약과 뇌관,1000여개의 초미니 쇠구슬로 구성돼 있다. 안전핀을 뽑아 던지면 3∼4초 뒤에 터져 쇠구슬이 흩어지면서 인명을 살상한다. 쇠구슬은 10∼15m 거리에서 1㎜두께의 철판을 뚫을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4m 내에서는 1㎡당 8.6개의 쇠구슬이 날라가 흩어진다. 선 자세에서는 5.9개, 누운 자세에서는 3개의 쇠구슬이 사람을 강타할 수 있다. 쇠구슬이 지상에서 45도 각도로 퍼지기 때문이다. 육군 관계자는 “수류탄 파편이 45도 각도로 위쪽으로 튀기 때문에 누워 있던 병사들이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용기있는 멋진男 돼 온다더니… ”

    “용기있는 멋진男 돼 온다더니… ”

    19일 새벽 내무반 총기 난사로 아까운 목숨을 앗긴 희생자들의 ‘싸이월드’(www.cyworld.com) 미니홈피에 네티즌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건강했던 생전 모습을 찍은 사진과 여느 군인처럼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어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적셨다. 4만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다녀간 박의원 상병 미니홈피에는 제대일을 알리는 ‘2006.05.10’이라는 숫자와 군번줄 사진이 등록돼 있다. 올 4월 휴가 때 친누나와 함께 군복을 입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공개해 보는 사람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박 상병의 지인들과 네티즌 1500여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 친구 태경식씨는 “인터넷 뉴스로 확인해 봤는데…네 이름이 있더라.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다니….”라며 애통해했다. “편지 많이 써줘요. 나 전화, 면회 안 되잖아요.”라는 글을 남겨둔 이건욱 상병 미니홈피도 이날 밤까지 1만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방문했다. 이 상병은 지난달 7일 자신의 미니홈피에다 “이제 살빼기 돌입!3개월간 노력해서 멋진 몸매 만들어 오겠음∼ 빠잇!”라며 평생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겼다. 이 상병의 친구 김민희씨는 “건욱아!이제 네 마지막 모습 보려고 친구들이랑 의정부 가련다. 많이 안 울려고 노력 중인데 어떻게 될진 모르겠구나.”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태련 상병의 미니홈피에도 “용기있는 멋진 남자가 돼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날 밤까지 6000명이 넘는 네티즌이 방문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김종명 중위와 조정웅, 김인창, 차유철 상병도 사고가 나기 전 미니홈피에 자신들의 소속 부대를 밝히고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올려 놓았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서로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방문해 방명록에 글을 남기거나 휴가 나간 전우의 안부를 묻는 등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것으로 보여 네티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이날 사건소식을 접한 부모들은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재발방지 대책과 군내폭력 근절을 촉구했다. 강원도 양구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는 아들을 둔 이모(50)씨는 “숨진 김종명 중위처럼 아들도 학군단 출신이어서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아들이 오늘 외박을 나왔다 들어갔는데 부대에 가서 몸조심하고 부대원 관리에 각별히 신경쓰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다음 번엔 독도 경비 서보고 싶다”

    “전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여러분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국방의 의무는 곧 축복입니다.” 지난 2002년 4월 창군 이래 처음으로 장애인으로서 정식 군번을 달고 군에 입대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박세호(36)씨가 15일 육군 제22보병사단에서 안보강연회를 개최, 장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날 오전 아내 이상미(41)씨와 함께 강연회장에 도착한 박씨는 부대 교회에서 1시간여에 걸쳐 지난 2002년 장애인으로서 군에 입대하게 된 동기 등에 대해 설명하고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장병들에게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박씨는 “여러분이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은 빽이 없어서도, 돈이 없어서도, 미국 시민권이 없어서도 아니며 오직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온것 아니냐.”며 “얼굴 표정도 제대로 지을 수 없고 팔다리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나같은 장애인들은 갈래야 갈 수 없는 군대를 온, 여러분들은 축복받은 분들”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병역을 회피하기 위한 갖가지 일들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워 지난 2002년 단 하루만이라도 군에 입대하고 싶다는 편지를 국방부장관과 병무청장에게 보냈으며 이같은 희망이 받아들여져 군에 입대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씨는 “편지에서는 단 하루만이라도 군 생활을 하고 싶다는 표현을 했지만 실제로는 체력이 다할 때까지 군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정말로 1박2일 훈련으로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역하게 돼 무척 안타까웠다.”며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군대에 가고 싶고 특히 독도 경비를 한번 서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아울러 최근 발효된 국적법과 관련해 잇따랐던 국적포기 신청이 병역회피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진 데 대해 “한마디로 화가 나 미칠 지경”이라고 가슴을 쳤다. 한편 지난 2002년 4월30일 서부전선 전진부대에 입대했던 박씨는 1박2일 간의 신병훈련과 철책경계,GOP견학 등을 마친 5월1일 02-명예00001번이라는 명예군번을 부여받고 이등병 제대를 했으며 이후 군부대 등지에서 30여 차례에 걸친 안보강연회를 개최했다.고성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목소리의 마술사’가 있다. 반세기 동안 격동의 현대사를 ‘목소리’ 하나로 관통했다. 질곡의 50년 세월속에 가느다란 성대의 떨림으로 감동과 추억의 파노라마를 무수히 연출했다. 타고난 ‘천(千)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가슴을 쥐락펴락했다. 암울했던 1960∼70년대, 라디오의 ‘연속방송극’과 ‘추억의 영화’ 등 무려 1000여편에 출연했다. 엄앵란 문희 남정임 정윤희 등 내로라하는 당대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도맡아 ‘얼굴없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 주변에서 이꼴저꼴 다 보면서 연설과 다큐멘터리 대역(代役) 등을 해 흥미진진한 야화도 간직하고 있다. ●‘여자의용군 예술대’ 자원입대 고은정(70)씨.1954년 12월 KBS 성우 공채 1기로 출발,50년 ‘목소리 인생’을 걸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12월과 올 4월 단막극을 직접 쓰고 출연까지 했다. 최근에는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모호텔 정원에서 만났다. 먼저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다름 아닌 6·25에 참전했던 것.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0년 11월 어느날. 수도여중 3학년 재학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고은정은 친구들과 모여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대열에 합류하는데 우리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며칠 뒤 고은정은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훈련막사는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 자리). 때마침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가칭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됐다. 고은정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외출허가가 떨어졌다. 이때 가족들이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어떻게 외출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귀대했다. 그런데 동료 3분의1가량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어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별도의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당도했다.(관련자료에 따르면 50년 9월 여군교육대가 부산에서 결성됐으며, 군부대와 병원 등의 위문을 위해 군악 및 예술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번 0995862 육군 제대 부산에 도착한 예술대원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 이브때 고은정은 면회 온 목사의 도움으로 십수권의 책을 장만할 수 있었다. 워낙 책을 좋아한 데다 병원위문을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숙소 앞에 ‘소공녀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그러던 51년 2월 부대에서 휴가를 다녀오란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지난번 도움을 받은 목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때마침 목사는 제주도의 피란민들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은정도 목사와 함께 떠났다. 도착했더니 돌아올 여객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목사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복귀를 하지 못했다. 고은정은 관계요로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전한 뒤 그해 2월 제주 오현중에 설치된 피란민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 고씨는 “얼마전 육군에 확인해 보니 군번도 있고 제대처리돼 있었다.”면서 당시 입대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눈다고 귀띔했다. # 에피소드 1. 74년 8월14일이었다.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 더빙을 하느라 밤을 새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고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로 초청했다. 고씨는 의사 동생과 함께 갔다. 육 여사는 진작 보고 싶었다며 “조국을 위해 고생이 많은데 부탁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고씨는 “서울신문에 다니던 오빠가 필화사건으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고씨는 육 여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단골로 등장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얼마만큼 잤을까.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아이들이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TV 전원이 꺼졌다.8·15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영부인 피격사건’이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육 여사 다큐멘터리에 더욱 많이 출연하게 됐다. 박근혜씨가 영부인 역할을 맡을 때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박씨는 “아버지는 고 선생의 목소리가 엄마하고 똑같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뒤 연말마다 청와대에서 금시계를 보내왔다. ●대통령 부인들과 자주 만나 # 에피소드 2. 5·16 직후였다. 동아방송에서 ‘천일야화’라는 대담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김종필(JP)씨를 초청했다. 시간이 됐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찾아나섰다. 점퍼차람의 한 사람이 방송실 입구에서 “나를 찾는 겁니까.”하고 말했다. 인사를 하자 JP는 “고 선생은 골라쓰는 단어가 아주 달라요.”라고 했다. 인연이 돼 나중에는 JP자택에서 부인과 자주 만나게 됐다. “80년대 초반 민정당 창당대회 때 권정달씨의 부탁으로 봉두완씨와 사회를 같이 보게 됐지요. 이때부터 본의 아니게 정치 언저리에 맴돌게 된 것 같아요. 여성계 대표라는 명분으로 종종 청와대에서 이순자·김옥숙 여사와 식사도 했지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마침 우리 아들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87년 대선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노태우 후보측에서 63빌딩에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이종찬씨도 함께 있었다. 노 후보는 목이 꽉 잠겨 있었다. 노씨는 “고 선생, 어떻게 하면 목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종찬씨는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고씨는 “소염제를 먹고 당분간 필담으로 대화할 것”을 주문한 뒤 연설 때 5만,10만 관중을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자신 앞에 있는 마이크를 상대로 감동을 시킬 것을 권했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오히려 장점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어 노 후보가 여성정책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자 “이제와서 새로운 정책을 내놓은들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선거 때까지 애처가라는 소문만 잔뜩 퍼뜨릴 것”을 주문했다. 전직 대통령의 목소리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설득력은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현대적 감각에는 뒤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0분 동안 113개의 언어가 틀릴 정도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돼 ‘우리나라에선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고씨는 “스피치는 공인의 덕목 가운데 매우 중요한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 출강에 여전히 방송활동 고씨는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고흥숙.‘흥’자 돌림이다. 막내동생이 한나라당 국회의원 고흥길(성남시 분당갑)씨. 오빠 고흥욱(72)씨는 청와대 출입을 오래한 기자출신으로 현재 LA에 산다. 얼마전 국제전화를 걸어와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는데 무슨 일이냐.”고 뜬금없이 물어 “아냐, 길은정이 죽은 것을 보고 그러겠지.”하고 대답했단다. 어머니는 5남매를 남겨놓고 30대 나이에 요절했다. 새 장가를 든 아버지도 54년 교통사고로 일찍 명을 달리했다. 새어머니는 5남매를 친자식 이상으로 키웠다. 현재 94세로 분당 아들집에서 산다. 고씨 자신은 59년에 결혼, 이듬해부터 연년생으로 자식 넷을 낳았다. 함께 지내는 둘째딸(44)을 제외하곤 다들 결혼했다. 고씨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해 고비를 맞았지만 요즘은 서울예대 장로신학대 출강과 극동방송에서 매일 10분짜리 방송 등을 하며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족사를 쓰고 있어요. 여름방학 때는 밀린 대본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일생을 담은 모노드라마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 1936년 서울 출생 ▲ 51년 제주 피란민학교에서 수도여자중학 졸업 ▲ 54년 수도여고 졸업, 숙명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KBS 성우공채 1기 ▲ 56년 최초 연속방송극 ‘청실홍실’ 성우 ▲ 58년 연속방송극 ‘산너머 바다건너’에서 상하이 여자 ‘미라’역을 맡아 주목받음. ▲ 이후 ‘장희빈’‘고운정 미운정’‘왕비열전’‘대동강은 알고 있다.’‘불꽃의 소리’‘113수사본부’등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1000여편 출연. ▲ 77년 드라마 ‘대니할머니’당선으로 방송작가 데뷔. ▲ 97년 고은정언어예술원 개원 ▲ 98년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 2000년 방송위원회 위원,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 방송극본 가을에 온 손님, 불모의 수령, 저녁노을, 사랑의 계절, 두고온 언니에게 등. ■ 소설작품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등. ■ 상훈 국민훈장동백장(2000년)
  • 전시대비 학생 단번까지 부여

    정부가 1985년 폐지한 일선 고등학교의 학도호국단 조직을 전시에 대비한 ‘서류상 조직’으로 여전히 편성해 온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예상된다. 교육부는 지난 3월 ‘전시 학도호국단 운영계획’이라는 제목의 대외비 문건을 일선 고등학교에 내려보냈다. 문건에는 각 고교를 전시 학생동원조직인 호국단으로 편성하고 학교장 등 교직원은 대대급 이상 지휘관, 일반 학생은 소대급 이하의 지휘관과 소총수 등을 맡도록 했다. 학생들에게는 군번과 같은 학도호국단 단번이 부여돼 있으며 전쟁 위협상황인 ‘충무 2종’ 사태 발생시 전시조직으로 전환토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전시 좌경생 지도’라는 명목으로 좌경학생과 교사를 파악해 특별관리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어 사상검증 논란까지 일 것으로 보인다. 남학생들은 긴급 복구사업과 학교장 동의 아래 경계원 활동 등에 동원토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교육부는 이에 대해 “1985년 이후 지금까지 서류상으로 존재해 온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전시에만 적용될 뿐”이라고 해명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깔깔깔]

    ●복학생의 실수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예비역 병장이 된 나! 학교에 복학하러 갔다. 예비군 훈련 때문인지 복학 원서에 이것저것 적는 게 너무 많았다. 궁시렁대면서 열심히 작성하고 직원 아가씨에게 건네자 그 아가씨 금방 보더니 한마디 한다. “군번 말고 학번 쓰세요.” *복학하면 열심히 공부할 거라 다짐했다. 강의실 교수님 바로 앞자리는 항상 나의 차지. 초롱초롱 빛나는 나의 눈! 교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필기하기에 여념이 없다. 교수님도 눈여겨 보셨는지 갑자기 날 지명한다. “자네!” 난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벼엉장! ○! ○! ○!” 순간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고 그 순간부터 여자후배들은 날 ‘병장 오빠’라 부른다.
  • [데스크시각] 이름없는 항일 여성운동가/허남주 주말매거진 we팀장

    사회활동에 열심이고 목소리도 꽤나 큰 한 열혈 여성이 자신의 ‘이중성’을 고백해왔다. 몇해 전, 위인전 읽던 아들 아이가 “여자도 위인이 될 수 있어요?”라고 깜짝 놀란 듯 묻더란다. 생활 속의 양성평등을 하기에 딱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 마디 교육적인 이야기를 하자 아이는 오히려 “그래도 여자위인은 별로 없잖아요?”라고 반격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였으니 진정 위대한 인물이었다면 역사 속에 묻혔겠느냐는 상황논리의 부당함까지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의 자부심과 우월감만은 끝내 포기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내가 사회생활하는 것을 늘 가족들에게 미안해했던 것 같아요. 여성의 권리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일하는 여성=드센 여자’라는 남성중심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약한 여자’를 택했던 것은 아닐까….” 쉽게 할 수 없는,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얘기임이 틀림없는 그녀의 이런 ‘자기반성’에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을까. 붉은 표지의 60권짜리 위인전집 중 여성위인이라고는 신사임당, 유관순, 퀴리부인, 헬렌 켈러, 잔 다르크가 전부라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유관순 ‘누나’와 퀴리 ‘부인’이란 호칭도 마뜩지 않았다.17살 독립운동가에겐 ‘누나’란 칭호가 더 친근할 수도 있고,‘부인’이 결혼한 여성에 대한 서양식 호칭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열사’로 격상됐지만 여전히 ‘유관순 누나’로 기억되는 ‘드문’ 여성위인에 대한 기억은 열등감을 동반한 채 남아있다. 그런데 얼마전 이런 열등감을 희석시키는 기회가 생겼다.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여성전사들에 대해 ‘한국여성항일운동사 연구’(박용옥 저)라는 묵직한 한 권의 책을 통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역사의 숨결 속에 살아있는 지난 시대의 여성들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났다. 유관순 열사와 ‘임시정부의 어머니’ 정정화선생 외 최초의 조선여자의용군을 조직한 박차정과 여성광복군 여군 군번 1번 신정숙 등 여성들의 활동을 알게 됐다. 야학과 계몽 등 의식개혁뿐만 아니라 항일무력투쟁에 직접 참가했다가 전사한 열사로 김정옥·최희숙·김영희·허성숙·임정옥·배성춘·이경희·안순복·안순화·이계순·남신대 등의 기록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당시 기록중 하나인 ‘연변인민의 항일투쟁’에 의하면 항일무력투쟁으로 희생된 열사의 숫자가 총 1134명으로 그중 여성열사가 138명,11%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또 1933년 연변지역 한 통계는 유격대원 420명 중 여성대원이 69명으로 전체 16%를 차지했다.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들의 숫자는 역사의 물결에 그냥 씻겨져버리기엔 많은 숫자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왜 이들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항일투쟁에 남녀구분이 있을 리 없다는 전제가 있음에도 이들의 희생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신분 격차가 분명하던 시절, 교육의 기회도 갖지 못했던 여성들의 깨어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의 주변인으로 취급된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을 갖고 있을 정도라면 이들의 역할은 기록이상의 것이라 여겨진다.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한 이름없는 여성들의 활동이 더 많이 알려지고, 가치를 인정받길 바란다. 한국여성이 근대의식을 갖게 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항일민족운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여성들의 의식과 현실사이의 괴리감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허남주 주말매거진 we팀장 hhj@seoul.co.kr
  • [씨줄날줄] 白骨兵團 /손성진 논설위원

    ‘적진 800리의 혈투’에는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의 6·25 참전 실화가 담겨있다.이 책을 엮은 전인식씨는 작전참모로 참전했으며 종전후 전우회장을 맡아 백골병단의 명예를 찾기 위해 애써왔다.부대가 창설된 것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1951년 1월초 1·4후퇴 무렵이었다.대원들은 대구에서 단 3주간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중사∼대위의 계급이 주어졌지만 정식 군번은 없었다. 그해 1월30일 인민군 복장에 2주일분의 미숫가루와 고추장만 갖고 혹한의 영월 전선에 투입된 대원들은 대관령 너머 적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였다.폭설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대원들이 백골병단이란 이름으로 재정비된 것은 1951년 2월20일 강원도 명주 퇴곡리에서였다.사령관은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당시 채명신 중령이었다.대원들은 2월28일 인민군 군관 등 3명을 생포하고 1급 기밀문서를 노획하는 첫 전과를 올렸다.이 정보는 인민군 제69여단을 격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3월10일부터 이들은 강원도 인제에 진출,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필례마을을 정찰하던 대원들은 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의 은거지를 찾아내 길을 포함해 군관 13명을 체포했다.그러나 인제 군량밭과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이어 벌인 전투에서 100명 넘는 전우를 잃었다. 최대의 비극은 인제 단목령에서 일어났다.고개로 행군하다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많은 대원들이 총탄에 맞아 숨졌고 단목령으로 뿔뿔이 피신한 대원들은 영하 30도의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이곳에서만 120명이 희생됐다.악전고투 끝에 1951년 4월2일 강릉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647명중 283명밖에 되지 않았다.그러나 돌아온 이들에게는 무공훈장은 고사하고 보급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전씨 등 생존대원들이 동분서주한 끝에 1990년에야 전적비를 강원도 인제 용대리에 세울 수 있었지만 공식적인 보상은 얻어내지 못했다. 백골병단이 해체된 지 53년만에 국방부가 대원들에게 병적을 주고 1000여만원씩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다고 한다.늦게나마 그들의 공을 인정함으로써 아직도 유해를 확인하지 못한 대원 303명을 비롯한 영령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6·25 첫 유격대 ‘백골병단’ 53년만에 계급·군번 인정

    한국 최초의 유격부대로 6·25전쟁때 큰 전공을 세운 ‘백골병단’ 대원들이 전쟁때 임시로 부여받은 계급과 군번을 53년 만에 인정받게 됐다. 30일 국방부에 따르면 백골병단 대원들에게 병적을 부여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최근 ‘6·25전쟁 중 적 후방지역 작전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복무 인정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을 제정,입법예고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특수작전 공로자에 대해 전쟁때 국방장관으로부터 임시로 부여받은 계급과 군번이 인정된다.병적도 육군에서 관리하고 보상금과 공로금도 지급된다. 백골병단은 육군본부가 대구로 옮겨간 1951년 1월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군을 분산시키며 아군의 반격시에는 정규군의 작전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된 11,12,13연대를 통합한 부대로,부대 창설 당시 병력 규모는 800여명이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윤영엽 前대사 영화보고 53년만에 동생유해 찾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나서 53년 만에 무공훈장과 6·25때 전사한 동생 묘소를 찾을 수 있었지요.” 윤영엽(73) 전 뉴질랜드대사는 요즘 그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무겁고 긴 회한에 빠져 있다.그는 지난달 중순 육사 12기 동기생들과 영화 ‘태극기‘를 관람했다.그뒤 윤씨의 사연을 잘 아는 동기생 한 사람이 윤씨의 군번(0233879)과 동생 윤영록의 군번(0233878)을 혹시나 하고 육군본부에 조회했다.그랬더니 6·25때 추서된 윤씨의 무공훈장이 육군본부에 보관돼 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의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전해 듣고 반신반의하던 윤씨는 육군본부 부관감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야 실감이 났다.무공훈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6·25때 산산조각났다는 동생의 유해가 현충원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었다.윤씨는 그날 밤새도록 엉엉 울었다. 윤씨의 사연은 이러했다.1950년 12월4일.평양고보 2학년에 재학중인 윤씨에게 모친은 “유엔군이 곧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하니 동생 영록이를 데리고 빨리 월남하거라.꼭 한달째 되는 날 다시 만나자.”고 등을 떠밀었다.윤씨는 한살 아래인 동생과 서둘러 피란 대열에 합류했다.수색을 거쳐 서울 중부경찰서 주변까지 내려왔다. 살길이 막막한 윤씨 형제는 신문팔이에 나섰다.그러던 어느날 낯선 사람한테서 “서대문 배화여고에 가면 하루 세 끼는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가보니 정말 식사를 제공했다.대신 200명 안팎의 다른 젊은이들과 제식훈련 같은 것을 해야 했다.일주일 후 이들은 배화여고에서 신설동 서울사대부고로 옮겨졌고 군복과 군화를 지급받았다. 그달 말 형제는 인천에서 해군 함정(LST)에 실려 부산의 육군제2훈련소로 갔다.이때부터 둘은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잠을 잘 때에나 집합할 때에도 꼭 붙어다녔다.하루는 부대에서 주소·성명을 써내라고 했다.동생 영록이가 불안한 듯 “형,우리가 형제인 줄 알면 분리시킬 텐데 어쩌지?”라고 말했다.당시 형제끼리는 같은 부대에 근무시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결국 동생은 성을 바꿔 ‘김영록’으로 써냈다.이후 윤씨는 분대장으로 동생은 분대원으로 10여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생사를 같이한다. “금화지구 사창리전투 때였지요.소대장이 연대본부에 근무시킬 분대원을 한명 차출하라고 하기에 동생을 얼른 추천했습니다.연대본부는 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한달쯤 지난 51년 6월 ‘천불산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윤씨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중공군의 82㎜ 박격포탄에 맞아 연대본부 부대원 20명이 몰살했다는 것이다.동생의 유해를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당했다고 했다.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복수밖에 없었습니다.전장을 미친 듯이 누비며 마구 총을 쏘아댔지요. 이번 주말에는 동생묘 앞에 훈장을 놓고 맘껏 울어 볼랍니다.” 일흔을 넘긴 노병의 눈시울은 금세 젖어들었다. 김문기자 km@˝
  • “국군포로 아버지유골 고향에 묻어주세요”

    “국군포로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땅에 묻어주세요.” 국군포로인 아버지의 유골을 갖고 중국 옌지에 숨어있다는 탈북자 백영숙(여·48)씨가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를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다.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도 청와대 민원실에 접수했다.최 대표는 9일 기자들과 만나 “지난 97년 사망한 영숙씨의 아버지 백종규(당시 69세)씨 자료를 2002년 말부터 국방부와 국정원에 제시했는데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가 영숙씨와 백씨의 유골이 한국땅에 오도록 해줄 것을 촉구했다. 최대표에 따르면 영숙씨는 2001년 4월 아들·딸과 탈북했으며 뒤늦게 탈북에 합류한 남편과의 갈등 등으로 수차례 입·탈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가 탈출한 2002년 3월에는 고향인 함북 온성으로 가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4월 재탈북했고,그해 6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가 지난해 4월 세번째 탈북에 성공했다.다시 허베이성 인신 매매단에 끌려갔다가 현재 탈북지원단체인 두리하나 선교원의 도움 속에 은신해 있다고 한다. 영숙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잊지 못하던 고향은 ‘경북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라며 아버지 백씨의 증명사진을 최 대표를 통해 보내왔다.지난 98년 탈북한 국군포로 장모(78)씨는 백씨의 증명사진을 본 뒤 “함북 온성군 상하리에서 같이 살았던 국군포로 백씨가 틀림없으며 그의 딸 영숙씨와도 잘 아는 사이”라고 증언했다.또 대전 현충원에 위패가 있는 군번 ‘1504895번’의 ‘일병 백종규’의 주소와도 일치한다. 최 대표는 “일병 ‘백종규’씨의 동생 백청장(61·인천 거주)씨와 유골의 유전자를 감식하면 금방 결과가 나올 것”이라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김수정기자 연합 crystal@˝
  • ‘직무유기’ 국방부/ 탈북 국군포로 명단확인 소홀

    최근 탈북 국군포로 전용일(72)씨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돼 북송 위기에 놓인 것은 국방부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국방부 권영준(해군 소장) 인사복지국장은 21일 기자회견을 갖고 “주중 베이징 대사관 무관부로부터 전씨의 국군 포로 여부 확인 요청을 받고 500명의 포로 명단을 확인했으나 명단에 없어 이를 무관부에 통보했다.”면서 “전사자 명단 등을 확인하지 않아 발생한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국방부 책임이며,당시 업무 처리에 관여했던 담당자들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중 베이징 대사관 무관부는 지난 9월 24일 국방부에 전씨의 인적사항 등과 함께 생존 국군포로 명단에 전씨가 포함돼 있는 지를 요청하는 문서를 보내왔고,국방부는 이틀 뒤인 26일 그러한 인물이 없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후 외교부가 지난 18일 국방부로 재차 문의하자 국방부는 전사자 명단 확인을 통해 전씨의 신원을 확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는 “당시 대사관 무관부는 전씨의 이름과 출신지,입대일,소속부대,포로가 된 날짜와 지역,친척 명단을 보내왔으나 군번을 보내지 않아 확인이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외교부·국방부 책임 공방

    정상기 외교통상부 아·태 국장은 20일 “전씨가 국군포로 출신임을 확인한 이상 중국측에 전씨의 신변안전보장과 한국 귀국을 요구했다.”면서 “그러나 현재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정 국장은 국군포로 확인 작업이 늦어진 것에 대해 “전씨의 대리인이 지난 9월 말 주중 한국 대사관 무관부 직원을 만났고 10월에는 관계 부처 직원을 각각 만났지만 전씨의 군번과 주민등록번호가 확실치 않아 확인작업이 늦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이어 “국방부가 늑장대응을 해서 체포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우리도 국방부측에 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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