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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미군철수」 팽팽한 찬반공방/미 캐토연구소 「한미동맹」 세미나

    ◎경제력 북보다 우위… 자위능력 보유 철군론/군사균형 감안,2천년까진 어려워 반대론/“군사력 감축을 남북관계의 지렛대로 이용 바람직” 미국의 민간정책연구단체인 캐토연구소가 한국전 발발 40주년에 즈음하여 21일 워싱턴에서 한미 양국의 학자 및 관계자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 동맹관계­변화의 시기」라는 주제로 가진 세미나에서 캐토연구소측의 주제발표자인 테드 카펜더(대외정책연구부장)와 둑 반도우(수석연구원) 등은 주한미군의 전면철수와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일방적인 폐기를 주장,열띤 찬반논쟁을 촉발시켰다. 카펜더와 반도우는 『미국의 위험부담을 정당화시킬 만큼 한국은 미국에게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전면철군과 방위조약 폐기를 제기했다. 셀리그 헤리슨(카네기국제평화재단 수석연구원)은 『주한미군이 남한에선 민주화를 방해하고 북한에선 군부중심의 강경파를 강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군사전략상으로도 이제미국은 소련을 겨냥한 군대를 한국에 둘 필요가 없다』고 부연했다. 서대숙교수(하와이대)는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는 바꿔야한다』고 말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하고 남북한에 공평한 정책을 채택해야할 최선의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윌리엄 테일러(국제전략문제연구센터부소장)는 『한반도의 군사균형이 언젠가는 한국우위로 바뀌겠지만 문제는 그같은 분수령이 2000년 이전엔 올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고 진단하고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의 군사력 조정에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임스 그레거(버클리대교수)도 『현재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위험한 환경을 미국이 적절히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성급한 철군론에 제동을 걸었다. 김창수(한국국방문제연구소 연구원)는 『한반도평화정착과 통일촉진을 위해선 남북한군축이 집선무』라고 강조하면서도 『주한미군감축의 규모와 시기설정은 마지막 단계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철군 신중론을 폈다. 오찬 연사로 초빙된 티모시 워드상원의원(민주ㆍ콜로라도주)은 『90년대에 한반도에서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감축을 지렛대로 삼아 남북관계 개선정책을 공동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의했다. 한편 데릴 플렁크(헤리티지재단객원연구원)는 한소 수교시기에 대해 『소련이 북한의 영공ㆍ영해를 이용하는 군사적 고려를 중시하고 있는 만큼 몇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분석하고 『북한이 서울과의 긴장완화에 의욕을 보이는 시기가 도래해야만 한소수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주요논문 요지다. ◇둑 반도우=미국은 의미가 퇴색해 가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철수를 개시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력ㆍ인구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북한을 크게 앞서고 있으며 군사력 면에서도 한국의 우위도달은 시간문제다. 소련및 동구와의 관계개선,중국과의 접근 등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더욱 확립돼 가고 있는데 비해 북한의 고립화는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젊은 세대간에는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으며 한미간의 무역마찰은 친미적 성향의 기업인들과 중산층마저도 미국에 불만을 갖게끔 만들고 있다. 기존의 한미관계는 균형을 잃고 있으며 따라서 한미 군사동맹관계도 더이상 존재이유가 없다. 미국의 자동개입이 보장돼 있는 한 한국은 방위책임의 확대를 원치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방위는 한국인 스스로가 떠맡아야 한다. 북한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아니다. 한국이 미군을 필요로 하던 과거의 상황은 변화됐으며 이제 한반도의 분쟁은 완전히 한국화 돼야 한다. ◇테드 카펜더=한국의 안보는 흔히 미국의 안보이해관계에 대단히 「결정적」인 것으로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묵은 냉전식 사고의 산물이다. 미국에 대한 안보공약의 비용과 위험부담을 정당화시킬 만큼 한국은 경제적으로 전략적으로 미국에게 중요하지가 않다. 한국이 미국의 중요한 무역상대국이라지만 최악의 경우 전체교역이 갑자기 끊어진다해도 미국의 거대한 5조달러 경제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며 한국을 중요한 전략적 자신의 하나로 간주케 한 전진배치의 냉전 독트린개념도 중요성을 크게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군사충돌은 남북한간의 지역분쟁이지 세계적인 전략에 영향을 주는 분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받아들여져서도 안된다. 따라서 부시행정부는 주변적 이해관계를 결정적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되며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시키고 한국이 원하든 원치않든,남북한간에 긴장이 있든 없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동결시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윌리엄 테일러=공산주의의 황혼,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새 사고에 영향받아 한반도가 군사력 삭감의 인기있는 한 표적이 되고 있으나 이는 기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한국군은 지난 40년 전보다는 훨씬 강해졌지만 북한은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비해 여전히 군사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 한반도의 군사균형이 언젠가는 한국우위로 바뀌겠지만 문제는 그같은 분수령이 2000년 이전에는 올 것 같지는 않다는 데 있다. 그 사이에 북한은 그들 맹방의 도움없이도 한국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 거의 모든 정보기관들의 분석평가다.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 군사력조정에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감축이 꼭 불가피할 경우 한국정부와 협의,북한 및 소련측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 감축을 보장받는 선에서 감축이 이뤄지도록 해야한다. 억지력을 멀리서 유지하려는 전략조정은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뿐이다. ◇제임스 그리거=소련은 태평양지역에 관한한 그들의 공격력을 전혀 감소시키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지역 군사력을 종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평양함대를 증강시키고 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볼 때 동북아에 있어서 소련군사력은 미국과 지역국가들의 이익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남을 것이다. 아울러 북한도 장차 모스크바정권의 장래가 어떻게 변하든 지속적인 군사력 증강및 독자적 행동으로 한반도의 불안정상태를 증가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해공군에 대해 기항권을 제공함으로써 동남아에 대한 우려까지 초래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그리고 설사 워싱턴이 국제관계에 과격한 변화를 감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군에 대한 대폭 감축이 있을 경우 재단의 위험성은 순식간에 커질 수 있다.
  • 북한 고위관리 지낸 재소동포의 「6ㆍ25증언」

    ◎“김일성,6ㆍ25새벽 내각 소집… 남침비준 강요”/4월초 군관학교간부 전선에 미리 배치/전쟁 한달전 강동학원서 통치요원 육성/폐쇄적인 북한체제는 「수용소적 사회주의」로 불러야 한때 북한의 권력 핵심에서 활약하다가 소련으로 망명했던 재소교포 18명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6ㆍ25전쟁 전후 북한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50년대말부터 60년대초까지 김일성 1인지배체제에 반발,소련으로 망명했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대부분이 70을 넘긴 고령인 이들은 22일 MBC시사토론에 참석,북한정권의 성립과 6ㆍ25전쟁의 발발 그리고 김일성 1인통치체제의 구축과정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날 토론에 나온 사람은 강상호(80ㆍ전 북한 내무성차관) 장학봉(71ㆍ전 북한 군관학교부교장) 박병률(82ㆍ전 북한 강동정치학원원장) 송진파(76ㆍ전 북한 문화성국장) 정상진(73ㆍ전 북한 문화성차관)등 5명이다. ­6ㆍ25당시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하기전까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박병률=47년 12월부터 50년 6월25일까지 남로당원 양성기관이었던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훈련시킨 제자는 3천명에 이르는데 지리산 빨치산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제주도 폭동주역인 김달삼도 포함돼 있다. ▲강상호=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6ㆍ25당시 내무성 차관이었는데 북한의 내무성은 경찰권 탐정권등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는 여러명의 차관중 당정치교양사업ㆍ문화사업을 맡았으며 김일성을 도와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했다. 당시 내무성장관은 현사법상인 방학세였다. ○「김정권」수립에 참여 ▲정상진=6ㆍ25직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했다. 해방전에는 소련에 있었으며 45년 3월에서 8월까지 소련해병대원으로 5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련의 대일전쟁에도 참여했다. ▲장학봉=군관학교부교장으로 군장교양성교육사업을 맡았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상좌(우리의 준장)계급장을 달고 전투에 참가했다. 1988년까지 남한의 소식을 거의 듣지 못했는데 포항제철,울산자동차공장 등을 둘러보니,경제ㆍ문화적으로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조국임을 실감,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콘크리트장벽 없어 ▲송진파=북한의 문화성국장,잡지 「새조선」의 주필을 맡았고 망명후에는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주필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휴전선도 돌아보았을텐데 콘크리트장벽을 보았는가. ▲정상진=북한에서 선전하는 콘크리트장벽은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데 대전차장벽은 있었으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장벽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베를린장벽과 같은 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 장벽」이 문제이다. 몇년전만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몰랐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해 정세를 바로 알게됐다. ­올해는 6ㆍ25발발 40주년이 된다. 6ㆍ25에 대한 연구도 많고 주장도 엇갈리는데 당시 내각에 참여한 사람으로 진상을 말해 달라. ▲강상호=그때 나는 병으로 평양중앙병원에 입원해있었으며 6월25일은 퇴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중앙당비서가 그날 새벽전화를 걸어와 퇴원즉시 내각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있었다. 내각회의에는 국가보위상인 최용건만 빠지고 전원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금부터 2∼3시간전 38선 전역에서 남조선괴뢰군이 북침을 해왔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 즉시 반격을 명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사항은 내각의 비준이 있어야 하니 이를 비준해 달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이 제안은 토론없이 1백%찬성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곧 원산행차에 올라 강원도당회의를 열고 전쟁에 대비한 과업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서울이 해방됐다는 소식과 함께 3ㆍ8선이 남의 강원도를 책임지라는 지시가 있어 춘천으로 출발했다. 이때 나는 북침이 아닌 남침이라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그 이유는 첫째 3ㆍ8선을 넘어 산굽이를 돌면서 국군포대를 관찰해보니 국군의 포와 포탄이 흩어져 있었는데 탄피는 몇개 없었다. 북침을 했다면 숱한 사격의 흔적이,공격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 전선지대의 이북 농촌에는 파괴된 집도 없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서 김을 매고 부녀자들은 길거리를 오가고 있었는데 국군의 포격이 있었다면 그럴수 있겠는가. 셋째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북침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사단도 남겨놓지 않고 군대를 철수했으며 딘소장이 포로가 될 정도로 전쟁초반에 패퇴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병률=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는 구체적 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지만 감지할 수는 있었다.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들이 전쟁발발 1개월전부터 강동학원장인 내게 보내져 집중 훈련을 받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몇시간전에 서울 함락후 서울시 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았던 이승엽이 『자기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서 강동학원을 떠났다. ○스탈린이 전쟁 묵인 ▲장학봉=당시 군관학교에는 인민군지도자 25명의 그룹반이 있었는데 50년 4월에 이미 이 그룹반이 해산돼 소속원들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다. 50년 8월까지 북한의 신문 라디오 등 모든 선전기관은 남조선이 북침을 했고,북한이 이에 반격을 가했다는 선전을 거듭했고 나 또한 전선에 나가지않아 이를 그대로 믿었었다. 8월초 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정의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나오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됐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50년이전에 스탈린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남조선해방과 전조선의 자유를 위해 남침을 호소했으나 스탈린은 남조선침입의 대가로 미국이 참전하면 다음은 소련이 이에 대응해야 하는데 준비가 안됐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후 6ㆍ25발발 5∼6일을 앞두고 김일성은 이 문제를 다시 스탈린에게 제기,스탈린은 「좋다 나쁘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묵인했다. 이와 관련,흐루시초프는 내가 스탈린의 입장이었더라도 작은 나라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해 어떠한 승인도 지시도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전쟁이틀후 열린 유엔안보이사회에서 소련대표가 유엔군의 참전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퇴장한 것은 내막을 뻔히 아는 스탈린의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정권 수립때의 실정은 어떠했는가. ▲강상호=김일성일파가 만주에서 유격활동중 일본군의 토벌강화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이 소련측에 이들의 보호를 제의했다. 김일성부대는 소련정찰여단으로 편입돼 아무르강유역의 비밀지역에 있었고 해방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원산으로 귀국했다. 나는 소련 제25군 정치부 지도원이어서 김일성을 해방전에는 본 적 없었는데 해방후 소련군 상위(대위)로 귀국한 김일성을 본적이 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이 많은데(일동 웃음) 지금 북한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진=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오면서부터 정권에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개인숭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전당대회에서 스탈린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 북한 노동당대표로 참석한 최용건이 돌아와 귀국보고를 했을 때 김일성은 우리 당에는 과거 박헌영이란 개인숭배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숭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뒤 연안파 윤공흠 이필규 등이 반김일성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들은 곧 숙청됐다. 이후 김일성은 「이단」숙청을 결심,대대적인숙청작업에 나섰고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6ㆍ25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군고위간부ㆍ당간부 등이 모두 숙청당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반당분자로 몰렸고 이것이 우리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다. ▲박병률=김일성은 북한체제를 「주체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북한체제를 「수용소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남측서 통일 주도를 ­북한에 있을때 남로당출신들을 많이 만났을텐데…. ▲정상진=당시 나는 문화성차관 및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이어서 홍명희 이태준 김남천 임화 최승희 등 많은 남쪽예술인들과 알고 지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작곡가 김순남선생은 전쟁전 박헌영외상 취임 축하파티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이것이 죄가 됐다. 김순남선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되느냐」라고 탄식하면서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분은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된 채 숙청되고 말았다. ­마직막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장학봉=화해의 물결은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 ▲강상호=오늘날에는 무력으로 누구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이 세계적 여론을 일으켜 북한측에 평화통일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남북통일을 하루라도 지연시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이며 우리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소,“통독직후 외국군 50% 감축”제의/셰바르드나제

    ◎주둔군 3년내 완전철수도/통일독일군은 방어수준으로 제한 【동베를린 로이터 연합】 소련은 22일 통독이 실현되면 독일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2차대전 4대 전승국 군대를 3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되 당장에 전체병력의 50%를 감축토록 하자고 전격 제의했다. 소련은 이와 함께 이날 열린 동ㆍ서독과 미ㆍ영ㆍ불ㆍ소 등 4대 전승국의 이른바 「2+4」회담의 비공개회의에서 통독절차와 연계돼 있는 국제적 현안들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책을 담은 전반적인 협정초안을 제시,「2+4」회담을 조기 매듭지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은 이날 동베를린에서 비공개로 열린 미ㆍ영ㆍ불 및 동ㆍ서독 외무장관들과의 회담에서 4대 전승국들이 통독실현후 3년간의 과도기를 둬 이 기간동안 『우선 전체병력의 50%를 감축하고 이어 병력규모를 명목상 필요한 수준으로 축소하든지,아니면 전면 철군토록 하자』고 제의했다. 셰바르드나제장관은 3년간의 과도기중에 통일독일의 군대는 『특별이 제한된 수준으로』감축돼야 하며공격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도록 군의 체제를 재편토록 할 것도 아울러 제의했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아태 외국군 철수 촉구/평양 국제군축회의

    【도쿄 AFP 연합】 평양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지역 군축 및 협력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은 이 지역내 모든 외국기지의 철거와 외국군대의 철수를 촉구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북경에서 수신된 중앙통신은 이 국제회의가 이틀간의 회담을 마치고 폐막됐다고 전하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24개국 39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이 국제회의에서 아ㆍ태지역의 현상황을 비롯한 경제ㆍ과학ㆍ기술 및 문화분야에서의 각국간 협력에 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중앙통신은 이 국제회의에서 결정된 최종결의안을 인용,인도양이 평화구역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세계가 요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ㆍ프랑스ㆍ영국 등이 인도양에 관한 유엔 특별위원회에서 탈퇴한 것에 대해 개탄했다고 보도하면서 이 국제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은 인도양 평화구역에 관한 회담이 더이상 지체됨이 없이 유엔의 주최하에 개최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 방한 빔머 서독 국방차관(인터뷰)

    ◎“통독은 경제성공ㆍ인권향상의 결실”/「나토가입」논란이 통일 장애물될 수 없어 빌리 빔머 서독 국방차관이 방한중이다. 집권 기민당 소속 연방의회 의원이기도 한 그는 동구의 정치적 변화가 동북아시아,특히 한국에 미칠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내한했다고 15일 밝혔다. 빔머차관을 만나 독일통일과 관련된 문제들을 들어본다. ­동독은 17만,서독은 48만명이나 되는 막대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동서독이 통일되면 양국 군대도 통합돼야 할텐데 서독정부의 구체적인 계획은. ▲우선 군통합 타임 스케줄은 통일관련협상의 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통일독일은 하나의 군령체계를 갖춘 하나의 군대를 보유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통일독일의 군대는 문민통제,나토와의 협력관계 유지는 물론이고 특정 정치세력이 아닌 사회전체에 충성하는 군대가 될 것이다. ­군통합으로 많은 인원이 실직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높은것 같은데. ▲동서독이 통일되고 유럽군축이 잘 진행되면 통합군의 규모는 결국 8만∼9만명 수준이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이미 감축에 대비한 준비도 이뤄지고 있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 서독정부는 6년동안 20%를 감축키로 지난해에 결정,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다. 지난 3년간 민간부문에서 상당수의 고위장교를 흡수했다. 동독군도 노령화된 고위장교의 경우 사회보장을 제공하면서 은퇴시키고 젊은 장교는 통합군과 민간부문으로 흡수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동서독군은 서로 다른 운영체계를 갖고 있어서 통합에 따른 어려움도 많지 않겠는가. ▲지난해 동독 국방차관과 고위장교들이 서독군을 둘러 본 적이 있다. 양국 군지도자들은 긴밀한 회합도 가졌다. 동독 군지도자들은 이후 서독군 운영체계를 잘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교류와 회합을 통한 상호이해속에서 원만한 운영체계가 마련될 것이다. ­소련은 통일독일이 나토에만 가입하는데 대해 반대하고 있다. 소련이 계속 반대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통일을 향한 모든 스케줄이 잘 진행되고 있다. 특히 통일에는 사회ㆍ경제통합이중요한데,이미 상당히 진행됐고 오는 7월1일에는 통화통합까지 이뤄진다. 소련의 반대는 통일에 큰 저해요인이 아니다.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강화시켜 궁극적으로는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해체하자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제안도 고려할만하지 않은가. ▲물론 CSCE를 강화시켜 유럽의 안정을 도모하는데는 찬성한다. 그러나 유럽에는 미국과 캐나다가 참여하는 나토를 비롯,EC,G7(서방선진 7개국 회의)과 헬싱키협정이 마련한 무대등 4개의 국제조직이 있다. 유럽의 안정을 지켜온 이 4개 조직이 효과적으로 운영ㆍ유지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독일은 4개 조직에 계속 참여할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헬싱키협정에는 각국이 스스로 국제조직에 가담할 자율권을 보장하고 있다. 통일독일도 나토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 ­한국인들은 독일 통일에 크게 고무되고 있다. 독일 통일이 이처럼 빨리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은. ▲독일의 통일이 이뤄지게 된 배경을 4가지 지적하고 싶다. 첫째,서구국가들은 「사회적 형평」과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자져왔다. 이것이 동구의 변화에 자극을 주었다. 둘째,서독은 경제발전에 노력했고 성공했다. EC는 오는 92년 통합된다. 서독의 경제적 성공이 동구의 신사고에 영향을 끼쳤으며 EC통합은 동구국가에 소외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주었다. 셋째,미국ㆍ캐나다ㆍ서구의 협력관계가 공고해 소련의 개입이 불가능했다. 넷째,문민통제를 받는 군사력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면서 유럽의 안정을 유지시켜 왔다.〈강석진기자〉
  • 중국학자가 밝힌 「중국의 6ㆍ25참전 배경」

    ◎김일성,남침2개월전 북경에 통보/모택동,유엔군 38선 넘자 심한 불안감/중국,미 무력위협 견제위해 참전 선언/소의 공군ㆍ물자지원 조건으로 병력 파견 6ㆍ25발발 40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중국의 시각에서 조명한 논문이 중국학자에 의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주최로 14일부터 이틀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한국전쟁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국제전략연구소의 적지해연구원이 발표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대한 재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새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국민당정부를 후원하는 미국으로부터의 무력개입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6월20일 5천1백만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주은래 책임아래 1천4백만명을 감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50년4월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환도중 밀사를북경에 파견,모택동에게 군사적인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했으나 군사계획과 그밖의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전에 개입할 의도는 없었고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속한 한국계 중국군을 보내는 것만으로 평양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트루먼이 6월27일 중국본토와 대만사이에 제7함대를 배치하자 미국이 국민당을 구하기 위해 중국내전에 다시 참가하기로 결정할 것으로 믿었다. 이에 따라 7월10일 「미국의 대만 및 한국침략에 대한 중국인민위원회」가 북경에 설치됐고 모택동은 등후아장군으로부터 급속한 남진,보급선 확대,후방의 공백상태등 한국전의 상황을 보고받고 김일성에게 「남진속도를 늦추고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하라」는 충고를 했다. 9월초 북동부지역 사령관인 가오강은 한국전 상황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통일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으며 김일성의 군사행동은 처참하게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에 모택동은 9월9일 동부군사지구 제10군에게 철도에근접하게 병력을 배치,압록강에 대한 병력보강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10월2일 주은래는 당시 인도대사인 파니카를 통해 만약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뒤 영국외상 포리스트 버빈은 네루를 통해 유엔군이 만약 38도선을 넘어야 할 경우에는 압록강 40마일 앞에서 멈추겠다고 중국지도자들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인도를 통해 전달한 자신의 약속을 두차례나 어겼으므로 중국지도자들은 미국의 맹서는 사기술이라고 믿게됐다. 1천㎞에 이르는 압록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언제 적이 침입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50년 10월1일 김일성은 불리한 전황을 알리면서 인민의용군의 즉각 투입을 요청하는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북동부지역 사령관 가오강과 임표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국경제력의 열세와 군사력의 열세,후방의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정치국특별확대회의에서 ▲한국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취약한 고리이며 ▲전면적인 핵전은 불가능하며 ▲한반도지형은 미군의 기계화부대와 화력운용에 불리하다는 결론에 따라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됐다. 만약 중국이 전쟁을 회피한다는 것은 국민당에 대한 해방전쟁이 몇년 더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0월2일 정치국 특별회의에서 모택동은 소련이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원조한다는 조건으로 병력파견을 승인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전황이 김일성에게 크게 불리해지자 스탈린은 딜레마에 빠지게 됐으며 이러한 딜레마의 탈출구로서 지상은 중국군이,공중은 소련공군이 기꺼이 맡기로 합의했다. 결국 10월13일 모택동은 김일성이 중국으로 후퇴하기 전에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압록강을 건너 진격키로 결정했다. 소련은 합의대로 50년말 공군 2개사단(2백대전투기)을 파견,압록강철교와 1백㎞에 이르는 의용군 보급로를 엄호했으며 중국군복을 착용한 이들 소련군조종사는 생포되더라도중국계러시아 소수민족이라고 속였다. 한국전에 투입된 2백30여만명의 중국인민의용군은 당시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야전군의 66%,전포병사단의 60%,전기갑사단의 1백%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모택동이 중국과 미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거나 모택동이 본토를 석권했을 당시 트루먼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면 스탈린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모택동의 결정을 제지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에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지난 30년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트루먼행정부가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중국의 참전이라는 비극은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소,6ㆍ25 북침설 또 일축/모스크바방송 보도

    【내외】 북한은 6ㆍ25 기습남침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지원을 받았으며 또한 소련과 공동으로 정치ㆍ군사적인 정책을 수립했었다고 10일 모스크바방송이 보도했다. 모스크바방송은 소련 유수의 정치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아 최근호에 게재된 역사학자 보리스 슬라벤스키의 논문을 또다시 인용,이같은 북한과 소련의 남침준비는 49년 중국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은 장개석 군대가 중국 공산당에 패배를 당한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방송에 따르면 보리스 슬라벤스키는 「자칫하면 세계의 파국에 밀어 넣을 뻔했던 조선전쟁」제하의 이 논문에서 6ㆍ25동란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냐 하는 문제에 언급,『북침을 면밀히 준비했다는 남조선측이 개전 3일만에 서울을 내놓고 퇴각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 중국,언론사에 군파견/「천안문」 동조자 심사 강화

    ◎사회과학원등 공공기관에도 【도쿄 연합】 중국 공산당은 조직개편과 감독강화등을 이유로 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고급지 광명일보를 비롯하여 공산주의 청년당,사회과학원 등에 인민해방군 소속 현역군인을 지도간부로 보낼 방침이라고 아사히(조일)신문이 중국 소식통의 말을 빌어 10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아사히는 이들 기관이 지난해 민주화운동 당시 많은 동조자를 내 천안문 사건이후 일부 간부가 교체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고 말하면서 공산당 조직부는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심사진행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재발을 막기위해 군인을 파견,군대내의 정치위원 역할을 맡기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작년 천안문 사태 이후 민주화운동 참가에의 책임을 물어 인민일보의 사장과 편집장,광명일보의 편집자등 최고간부들이 사임했고 공산청년단과 사회과학원은 책임자 교체설이 한때 나돌았다.
  • 소 키르기스 민족분규 격화/경찰 발포… 장갑차ㆍ군 헬기 등 투입

    ◎사흘새 40명 사망… 폭동 수도로 번져 【모스크바 로이터 AP 연합】 소련 중앙아시아 지역의 키르기스 공화국에서 지난 3일간 계속된 민족분규로 약 40명의 사망자와 2백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소연방 최고회의 의장 아나톨리 루키야노프가 6일 밝혔다. 루키야노프는 이날 연방최고회의에서 이같이 말하고 오쉬지역에서는 아직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들간에 무력충돌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는데 토지소유권을 둘러싸고 지난 4일 오쉬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로 5일 이 지역에 비상사태와 통금이 선포되고 군대가 소요진압을 위해 투입되었다. 그는 또 군대와 경찰 등 당국에 의해 어려운 소요진압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국방부는 투르크멘 공화국에서 증원군을 파견했다고 밝히고 이번 사태로 지금까지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21명의 군인등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오쉬의 경찰간부는 모스크바와의 전화를 통해 5일 문을 닫았던 이 지역의 상점과 공장들이 6일 대부분 영업을 재개했다고 전했는데 현재 인구 21만명의 오쉬시에는 장갑차들이 시가를 순찰하고 있으며 군헬기가 상공을 날며 경계비행을 실시중이다.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특약】 사흘째 계속된 유혈종족폭동으로 40여명의 사망자를 낸 소련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공화국 사태는 6일 시위가 수도인 프룬제에까지 번져 경찰이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발포,강제해산시켰다.
  • 한ㆍ소 정상회담 이후 「동북아 역학」진단(전문가 좌담)

    ◎“한반도 긴장완화의 「지렛대」본격 작동”/크렘린,「두개의 코리아」사실상 인정한 셈/중국도 장기적으로 북한개방 유도할 듯/평양,대소의존 높아 「단절」어려울 듯/미군철수 겨냥… 전략차원서 대미접근 가능성/한ㆍ소발전은 서울ㆍ북경 개선의 촉매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간의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통해 수교원칙이 합의됨에 따라 양국관계는 급격히 개선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정세도 큰 변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특히 한소정상회담을 격렬히 비난해온 북한이 이같은 사태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갈지,과연 북한도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해 갈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으며 북한­중국­소련의 북방3각관계가 어떻게 변모해갈지도 궁금하다. 이같은 문제들을 풀어보기 위해 신승권(한양대ㆍ소련정치) 박두복(외교안보연구원ㆍ중국정치) 윤병익교수(통일연수원ㆍ북한정치)의 좌담을 마련했다. □참석자 신승권교수 박두복교수 윤병익교수 ▲신승권교수=한소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관계의 급진전과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한국과의 수교원칙에 합의한 소련측의 결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금년 3월 이전까지는 북한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한미군사동맹 관계를 인정하면서 한반도에서의 1코리아(1Korea) 정책을 고수한다는 것이 소련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소간의 정치ㆍ경제ㆍ문화교류를 발전시킬 뿐 아니라 북한으로 하여금 대남관계를 개선토록 하고 개방과 개혁의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는 2코리아(2Korea) 정책을 펴나갈 것이다. 한국과 관계개선은 하되 국교정상화까지는 가지 않겠다고 북한측에 다짐했던 소련이 금년들어 학자와 언론인 등을 통해 김일성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근본적인 정책변화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박두복교수=한소관계의 발전은 장기적으로 한중관계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중소분쟁 완화이후 한소ㆍ한중관계는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상승적인 작용을 해왔다.우리 정부의 북방정책도 이런 대전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체제유지에 한계성 ▲윤병익교수=북한도 소련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입장을 표시할 수는 있지만 구조적으로 군사ㆍ경제면에서 대소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소련의 정책을 인정 내지 묵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북한과 소련관계가 단절되면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무기공급이나 수리도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고 한소수교와 국제화해 및 한반도 정세변화 상황을 나름대로 대남정책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2코리아 정책으로 입장을 바꾼다면 북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조선정권과 대한민국자체를 부인하는 등의 대남전략 기본속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한반도의 평화정착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등의 군사문제 타개책을 내세울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군축과 신뢰회복,외국군의 단계적 철수를 들고 나온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여러면에서 체제유지에 한계가 있다. ▲박교수=중국은 대북한관계에 있어서 소련보다는 많은 제한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련은 분단극복과제를 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정책을 펴나가는데 있어서 자유롭고 고르바초프 등 지도자들이 2차대전 당시 징집연령에 이르지 않았던 혁명 3세대로 실용주의적 가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군사ㆍ경제적으로 북한에 대해 확고한 제재수단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은 대만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중국」 (1 China)정책을 고수하기 때문에 한반도정책에 있어서도 행동반경이 좁고 등소평을 비롯한 실세지도층이 혁명 1세대들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한국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2코리아 정책을 받아들이는 꼴이 돼 1차이나원칙과 배치되는 모순을 자초하게 된다. 우리의 북방정책방향도 중국보다 행동반경이 넓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함으로써 한중 관계발전의 자극요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신교수=소련은 정치개혁면에서는 중국에 앞서 있지만 경제개혁면에서는 훨씬 뒤져있다. 중국은 실용주의 경제노선에 착수한지 오래고 소련은 이제서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소간의 경제발전 경쟁과 협력이 이뤄져 북한에 개혁개방압력을 가하면 북한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73년이란 가장 오래된 공산주의국가 소련에서 경제가 엉망이 됐고 동구권이 붕괴한 것을 보고도 북한이 계속 통제경제를 추진하는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선택놓고 고심예상 ▲윤교수=올가을 북경 아시안게임에 노대통령이 방문하는등 중국과 접촉할 경우 한중 관계개선을 통해 중국의 1코리아정책에 중대한 변화합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도 결국 남북한 평화공존모델로 갈 수 밖에 없는데 1코리아정책에서 2코리아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 정책선택의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 ▲박교수=천안문사태와 동구민주개혁이후 중국의 정치상황은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다. 이같은 급진적 변화가 중국공산당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정책결정과정에서 이데올로기요인이 부각되고 현실주의적 목소리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체제에 대한 인식도 이데올로기 요인에포함된다. 그러나 이는 외적변화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하다. 중국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의 체제변화와 개혁을 유도하는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한소관계가 한중관계발전으로 직결되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리한 영향을 미치리라 본다. 중국사람들을 만나보면 한중관계는 한소관계진전보다 반발짝 늦게 따라간다고 얘기한다. ▲신교수=중국과 소련이 라이벌입장이긴 하지만 고르바초프 등장이후 한반도긴장완화와 군축문제에 있어서 한소관계가 정상화돼야 한중관계도 이를 구실삼아 북한의 비판을 받지않고 부드럽게 정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견해를 같이 할 것이다. 중소관계도 냉각관계를 뛰어넘어 뭔가 진전을 봐야할 것이며 작년 중소정상회담에서 뭔가 합의를 보지 않았겠는가. ▲윤교수=중국은 천안문사태이전까지는 정경분리원칙에 입각,2코리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위에서나마 한국과 상당한 경제접근이 있었다. 그러나 천안문사태 이후 상황이 달라져 북한과 밀착되는 징후를 보였다. 그에 비해 소련은 86년 블라디보스토크선언을 통해 아시아국의 일원임을 자처한 이래 88올림픽직전 글라스노야르스크선언에서 남북한을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는 등 사실상 2코리아정책으로 가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소련매스컴이 김일성을 소련군대위출신으로 소규모 빨치산을 이끈데 지나지 않으며 6ㆍ25가 남침전쟁이라고 폭로한 것은 김일성위상격하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소국교수립상태까지 가면 평화공존은 「2개의 조선」을 조작하려는 책동이라는 입장의 북한의 1코리아정책은 수정될 수 밖에 없고 이같은 기본논리의 와해는 북한체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박교수=북한의 1코리아정책은 유한성을 띤 시간문제다. 1코리아정책은 국제사회의 대결논리시대의 산물로서 이제 국제적인 데탕트의 물결이 한반도에까지 투영되는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남북교류가 불가피하고 서로 정치실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진실성을 갖고 군축문제에 임해야 하며 1코리아 정책으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대남강경노선을 평화공존노선으로 전환하기 위해 체제변화가 불가피하다. 북한이 단기적으로는 어렵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은 동구의 변혁이 김일성체제를 위협,오히려 더욱 경직화되고 이념을 강조하겠지만 이는 외부자극에 대한 조건반사일 뿐이다. 김일성이 거의 80세가 다된 만큼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시키는 과정에서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정치ㆍ경제개방을 촉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교수=김일성 사망이후 획기적인 계기가 있을 수 있고 김정일집권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경제개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관할 수 있다. 북한이 석유ㆍ원자력 등 자원면에서 소련에 의존하고 있고 전력ㆍ식량난 등 경제사정이 워낙 어렵다. 소련은 지난 84년 체르넨코서기장시절 김일성의 소련방문 당시 원자력발전소 설치를 약속했지만 체르노빌 사건이후 소극적으로 변해 북한의 원자력발전소 건립자체를 주저하고 있다. ○소련ㆍ북한 갈등 예상 ▲박교수=소련이 탈스탈린화 하는데 북한이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소련과 북한간의 갈등으로 나타나겠지만 북한의 경제ㆍ군사 구조상 지탱하는데 한계가 있다. 중국도 소련보다 먼저 탈스탈린화에 나섰기 때문에 중소가 동시에 변혁을 추진하고 이 변혁이 상호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도 천안문사태 이전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다. 중국이 현재는 위축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동안의 개방정책으로 인한 빈부계층과 지역갈등의 해결을 통한 국민일치감 회복을 위해서는 경제합리화보다 정치개혁이 더 쉬운 방법이다. 중국이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개혁과 개방정책으로 회귀하지 못한다면 한소관계발전은 오히려 중국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교수=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중국에서 배운 것이다. 만일 페레스트로이카가 없었다면 중소분쟁이 심화됐을 것이나 양국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중소관계도 진전될 것이다. 박교수는 중국이 사회혼란 극복문제때문에 잠정적으로 위축돼 있다고 했는데 소련은 개혁과 개방을 중단할 수 없는 단계에와있다. ▲박교수=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중국의 개혁ㆍ개방정책이 2단계로 접어든다면 중소 관계발전은 북한체제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압력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교수=현재 소련만이 북한에 개방압력을 가해도 시간문제인데 중국까지 압력에 가세한다면 북한은 그야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중국과 소련처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부개혁 서둘러야 ▲윤교수=모든 문제는 결국 북한의 변화가능성문제로 귀착된다. 대외개방정책면에서 북한은 중국처럼 대외개방경제를 추진하되 주체사상논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조총련계기업을 받아들이는 등 변명을 추진하려할 것이다. 김일성이 지난 84년 소련과 동구를 돌아보고 이들의 경제발전상에 쇼크를 받은뒤 중국을 본받아 합영법을 실시했으나 서방자본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다. 중국이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시장경제를 부분 도입한데 반해 북한은 시장경제도입을 꺼리기 때문에 국내경제개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국은 대내적개방의 바탕위에서 대외개방을 추진,조화를 이룰 수 있으나 북한은 국내변화는 도외시한 채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라는 식의 교조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박교수=유물변증론에서 봐도 외적요인은 내적요인과 연관지어서만 움직일 뿐이다. 북한에서도 국가최우선 목표를 계급투쟁에서 생산력발전으로 전환시키는 내적변화가 있어야 진정한 군축과 평화공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사상과 현대화개념이 대립됐었으나 모사망후 현대화론 노선화가 이뤄졌다. 북한에도 김일성사망후 주체사상수정을 통해 78년이후의 중국이 치른 과정이 있어야 한다. ▲윤교수=현재로서는 북한의 대외경제개혁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개혁은 물론 정치개혁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원민주체제가 일반적 추세인데도 북한은 김부자세습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1당독재체제의 변형인 주체사상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대내개혁이 안되기 때문에 대남정책의 변혁도 어려운 것이다.최근까지 몇차례 남북대화를 했지만 북한의 남조선해방인민민주주의 통일전선전략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기 때문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신교수=소련이 지금까지는 북한에 대한 개방압력을 주저해 왔다. 북한이 내부개혁을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중국과 함께 설득하는 색다른 방법을 들고 나올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철두철미한 통제사회라 해도 차우셰스쿠정권처럼 밑으로 부터 붕괴되지 않으려면 정권유지차원에서라도 지금같은 스탈린체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이 김일성사망후 차기정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겠지만 소련이 루마니아처럼 북한에도 개입할지는 알 수 없다. 소련이 전세계 천연가스생산량의 40%,석유 20%,목재 40% 등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미일학자들이 고르바초프가 곧 쓰러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유는 공산주의가 망해가고 있다는 얘기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85년에 비해 요즘은 모든 물건이 비싸며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일을 잘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의욕고취요인이 없기 때문에 서방세계에서 1시간이면 할 일을 3∼4시간 동안 하고 시설마저 낙후돼 있어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프로레타리아 룸펜기질이 몸에 배 있는 것이다. 소련도 그런 상황인데 석유한방울 안나는 북한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폐쇄경제」날로 악화 ▲윤교수=북한은 주체적방식에 의해 자립적 사회주의민족경제를 건설한다는 목표아래 물질대신 정신적인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있다. 요즘은 잘 안되니까 물질인센티브를 병행하고 있지만. 북한이 자립경제를 한다고 나서는데 대해 소련의 타스통신은 북한기간산업 70여개가 소련에 의해 건설됐고 기술자도 소련에서 배워간 것 아니냐고 폭로하기도 했다. 북한경제의 특징은 군인력을 포함한 노동력동원을 통한 경제건설이다. 경제가 어려운데도 정치선전목적을 위한 전시효과를 노려 1백5층짜리 유경호텔까지 짓고 경영능력이 없어 싱가포르인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 북한에서 4년간 농업지도를 하다 얼마전 일본으로 돌아온 조총련계농업전문가에 따르면 심각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의 발상으로 경사도45도까지의 산을 소위 다락밭으로 만들어 옥수수를 심도록 했는데 산을 전부 깎고나니 여름에 홍수가 지고 산사태가 나 논에까지 토사가 쌓이는 바람에 대부분의 논까지 버렸다고 한다. 세계농업기술 수준에서 인정받지 못할 비과학적인 방법을 주체적발상이란 미명아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비능률성에다 주체적발상까지 겹쳐 북한경제의 한계를 앞당기고 있는 셈이다. ▲박교수=한소관계 발전이 북한을 고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리더십의 특성상 중국과 북한이 관계를 강화할 수 밖에 없으며 고립화 방향이 아닐 경우 북한이 미일등 서방과 관계개선하는 방향으로 진전돼 한소관계 발전이 한중관계,나아가서는 남북한관계에 유리한 여건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윤교수=한소수교때문에 북한이 미일과 접근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고 북한이 미군유해송환등 화해제스처를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북한의 목표는 미국과 수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북한ㆍ미국간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대남전략차원에서의 대미접근일 뿐이다. 한소수교원칙합의를 계기로 대남전략에 변화를 보인다면 한국정부를 승인하고 대화하며 동서독식 평화공존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통일을 원하는 대내외적 갈망분위기를 활용,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전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인 전망이고 장기적으로는 여러가지 변화요인에 의해 압박을 받게돼 결국 우리의 정책노선에 응해올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된다.
  • 소군,모병제 도입 검토/야조프국방/올 국방비도 8% 감축

    【모스크바 UPI 연합】 소련군은 지난 수백년간 이어온 징병제의 전통을 깨고 모병제를 시험적으로 실시,지원병에 기초한 군대 운용의 가능성을 실험할 것이라고 드미트리 야조프 소련 국방장관이 3일 밝혔다. 야조프 국방장관은 이날 소련군 기관지 「적성」에 게재된 기사를 통해 동ㆍ서간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5백만에 달하는 군사력을 보유한다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가를 놓고 수개월의 논의를 거친 끝에 이같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야조프 장관은 이 기사에서 『중요한 사실은 육군과 해군을 숫적으로 감축하더라도 이들의 질적인 전투 능력이 악화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조프 장관의 이같은 발표는 현행 징병제 군대체제 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혹독한 기합과 만행으로 많은 신병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반군운동가들의 비난과 소련신문과 잡지들에 게재된 소련군의 폭력성에 대한 2년여에 걸친 비판이 계속된 뒤 나온 것이다. 야조프 장관은 향후 수년에 걸쳐 시행될 이같은 모병제 실험이 소련의 국방비지출 축소계획에 따른 전면적인 군제도 개혁안의 일환이라고 밝히고 소련의 금년도 국방예산은 작년의 1천2백30억달러 (7백73억루블)에서 8.2%가 감소한 1천1백30억달러(7백3억루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소 공군대표단 방북

    【도쿄 AFP 연합】 소련 공군대표단 일행이 4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의 관영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도쿄에서 수신된 중앙통신은 이날 평양에 도착한 소련대표단일행이 조선인민군 홍성렬중장과 보리스 모로조프 평양주재 소련대리대사의 영접을 받았다고 전하면서 소련대표단 단장은 소공군 제1부참모총장이며 참모장인 발렌틴 판킨장군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소련 공군대표단일행의 이번 방북은 관계정상화를 논의하기 위한 전례없는 한소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가운데 이뤄진 것으로 북한 외교부는 이와 관련,한소정상회담은 한반도분단을 영구화할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 외언내언

    백여만의 군중이 모여있었다. 민주화개혁을 요구하는 구호가 천지를 진동했으나 그들은 맨주먹이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으며 철야농성 시위가 벌어질 참이었다. 밤 10시 요란한 굉음의 탱크 수십대를 앞세운 수만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아비규환의 유혈참사가 벌어졌다. 무차별 총격에 탱크와 장갑차가 군중을 향해 돌진했다. ◆4일로 꼭 1주년이 되는 중국의 천안문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국당국의 공식발표도 사망 1백20여명에 부상자 1만여명이라고 밝힐 정도로 큰 희생자를 내었다. 소련을 능가하는 기세였던 중국의 개혁은 중단되었으며 철저한 탄압의 1년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처형과 투옥이 계속되었으며 그다음에는 교육과 회유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4천8백만 공산당원 가운데 중앙기관과 대학등의 4백만당원을 대상으로 하는 공산주의사상 재검토가 실시되고 있다. 천안문사건당시 자신이 행한 행동이나 사건자체에 대한 비판을 3천자에 달하는 자아비판서로 작성 제출케해서 그것을 기초로 공산당원 자격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민일반에 대한 감시와 밀고제도가 강화되어 사람들은 다시 침묵의 시대로 복귀하고 있는 형편. ◆지금 중국에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만큼이나 빈번히 강조되는 말이 「웬딩」(안정)이란 사실은 오늘의 중국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그동안의 위협과 회유로 표면상 북경의 표정은 평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부글부글」끓고 있다는 것. 북경대학등 20여개 대학이 모여있는 북경의 대학가에는 벌써부터 「피는 피로 갚고 뼈는 뼈로 갚자」 「천안문에 흘린 피의 댓가로 아시안게임 분쇄하자」는 격렬한 대자보들이 나붙는등 살벌한 분위기. ◆북경 일원은 초비상의 경계태세에 있다고 한다. 4일은 무사히 넘겨도 오는 9월의 아시안게임이 큰 고비라는 것. 중국 당국자들도 지금쯤은 「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교훈을 체득하고 있을 것이다.
  • 북경,초비상 상태/오늘 「6ㆍ4 천안문사태」 1돌

    ◎곳곳 무장경관… 검문검색 삼엄/대학가 군 진주… 휴가장병 귀대령 【북경=우홍제특파원】 북경당국은 천안문 유혈사태 1주년을 이틀앞둔 2일부터 천안문광장을 봉쇄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일부대학에 군대를 진주시키는 한편 군에 보안경계령을 내려 휴가를 취소하고 군당국이 승인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식통들은 인민해방군 정치부 부주임 우영파중장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천안문사태 1주년 기간동안 모든 인민해방군들의 휴가를 취소하고 현재 휴가중인 군인들에 대해서도 귀대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정부청사등 주요건물들 주위는 경계가 눈에 띄게 강화되고 있으며 한 주요 국영신문사 구내에서 몇달만에 처음으로 소총을 둔 군인들이 순찰하는 모습이 목격됐다고 목격자들은 말했다. 서방 외교 소식통들은 국영 방송국 건물내 송신소에도 무장 군인들이 포진돼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 6ㆍ4천안문 유혈사태 1주년을 앞두고 중국에서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층들에대한 검거선풍이 불고 있다. 천안문사태 D­2일째인 2일 북경 시내에는 곳곳에 기관단총을 든 군인들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군트럭은 탈취에 대비해 일체 시내주행을 금하고 있다. 특히 2일밤에는 토란팅 공원에서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층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각국 대사관들이 밀접해 있는 일탄로에서는 경비중이던 군인들이 공포탄을 쏘아대 한때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기도 했다. 한편 수백명의 북경대학생들이 3일 저녁 중국당국의 민주화시위 유혈진압 1주년을 맞아 캠퍼스에서 빈병과 벽돌을 던지는 가장 강한시위를 벌였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이날의 시위는 북경의 중심부에서 수천명의 무장경찰들이 엄중한 순찰활동을 펴고 있는 가운데 일어났으며 학생들은 그들의 기숙사 창문으로부터 수십개의 빈병을 던졌다. ◎시민들,침통한 표정 ○…「6ㆍ4 천안문사건」 1주년을 맞는 북경 시가지의 모습은 겉보기에 평온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나 시민들은 한결같이 굳은 표정으로 처절했던 1년전의 오늘을 되새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1년전 민주화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3일의 천안문광장은 섬뜩하게 느껴질정도의 적막감에 싸여 있었고 광장주변 인도 가로수 그늘에선 수백명의 시민들이 지난달 31일 이후 통행이 금지된 광장 안쪽을 말없이 뚫어지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팔보산 묘지 “금족령” ○…북경 서쪽 교외에 있는 팔보산 공동묘지 주변에도 무장경찰 군인들이 보초를 서며 당국허가증이 없는 성묘객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타계한 중국지도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특별묘역과 일반 공동묘지가 나란히 있는 이곳에는 지난해 시위때의 사망자도 함께 묻혀 있어 천안문광장에 이어 당국이 크게 신경을 쏟고 있다.
  • 천안문광장 폐쇄/중국,「6ㆍ4사태」한돌 맞아

    【북경=우홍제특파원】 중국당국은 최근 북경주민들에게 「선동적 행위」를 자제할 것과 천안문사태 1주년이 되는 6월4일 천안문광장에 근접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소식통들이 밝혔다. 중국당국은 지난해 봄 학생들이 주도했던 민주화시위를 군대를 동원,유혈진압한 천안문 사태 1주년이 다가옴에 따라 수일 전부터 각종 공작부대 및 노동자ㆍ학생들의 회의에서 이같은 요구사항들을 반복 주입하고 있다고 이 소식통들은 밝혔다.
  • 야전지휘관 출신,전면에 부상/육군 수뇌부 후속인사의 전망

    ◎정 합참의장 「합동군」지휘 가능성/전력증강 추진등은 변화 없을듯 제28대 육군참모총장에 이진삼육군대장(육사15기ㆍ충남 부여)이 임명됨으로써 군사령관ㆍ참모차장ㆍ군단장급 등 육군 수뇌부에 대한 후속인사가 빠르면 다음주초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1군사령관의 후임에는 이문석육군참모차장(육사17기ㆍ서울)의 기용이 확실해 17기 군사령관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이며 육군참모차장에는 전방지역의 군단장을 지낸 16기,17기 출신의 고참중장들이나 재경부대의 군요직을 맡고 있는 조모중장(18기ㆍ충남),구모중장(18기ㆍ경남)등이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이번 육군 수뇌부의 경질로 육군은 노태우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를 맞아 순수한 야전지휘관 출신들로 수뇌부의 면모를 새롭게 하게 됐다. 88년 6월11일에 제27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던 이종구대장이 오는 10월1일 창설되는 합동군제인 합참의장에 취임하지 않고 예편함으로써 현 정호근합참의장(갑종5기ㆍ경기)이 합동군을 지휘하는 국군최고의 지휘관에 취임할가능성이 높아졌다. 37년간의 군생활을 끝내고 전역할 이종구참모총장은 재임기간중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평화시 가장 큰 군작전이라는 각 군본부 이전완료,서부와 동부전선에 강력한 기갑ㆍ보병사단의 창설 등 전력증강사업을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모차장으로 함께 일하던 이진삼대장에게 육군의 지휘권을 넘겨주게 됐다. 평소 「 정병육성」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이진삼대장은 군사령관 재직시인 지난 2월 동부전선의 북한 제4땅굴을 발견하는 등 순수한 야전군 출신의 지휘관으로 고위층의 신망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고위장성들은 이종구참모총장이 육참총장 임기만료와 함께 합참의장에 취임해서 합동군을 지휘할것으로 예상했었다. 이종구총장의 전역으로 육군의 총수가 80년대의 이희성,황영시,정호용,박희도대장 등 경상도출신의 지휘관에서 10여년만에 충청도로 바뀌게되었다. 그러나 참모총장이 바뀐다고해서 육군이 목표로 하고있는 대북전력우세전략ㆍ전력증강사업ㆍ군현대화계획 등의주요정책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이종구총장은 평소 『군은 잘 싸워야 하며 교사는 잘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은 잘 배워야한다』고 군의 전문성을 강조해온데다 이진삼총장도 『백전백승의 용장이 전쟁에는 필수적이며 지장ㆍ덕장 운운하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일 뿐』이라고 밝힘으로써 전ㆍ후임총장의 군운용원칙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1일 합참의장에게 군령권이 주어지는 합동군제가 창설되면 현직 육군본부가 행사하고 있는 작전권이 합참으로 넘어가 참모총장의 권한은 다소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이달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육군준장급 이상 고위장성들의 후속인사에는 이진삼총장의 지휘구상과 함께 올 가을에 출범할 군구조개편에 대비한 정지작업의 성격도 강하게 반영될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외언내언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서울에서 「소련주간」 행사가 개막되던 날 북한이 소련 타스통신 평양주재기자를 추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알렉산더 셰빈 기자는 한달전부터 김일성이 지배하는 폐쇄적인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본사에 송고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추구하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그라스노스트(공개)정책에 따라 모스크바는 지금 활짝 열려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중앙정부의 권력과 폐쇄적 위세를 상징하던 크렘린궁에 공보실이 신설되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소련의 언론하면 프라우다(진리ㆍ당기관지),이즈베스티야(소식ㆍ정부기관지),관영 모스크바방송,그리고 단 하나의 거대한 타스통신이 대표적으로 연상된다. ◆타스는 소련의 공식통신이다. 거짓이든 사실이든 소련을 알려면 일단 타스통신을 「믿어야」한다. 그것 없이 소련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평양주재 타스통신기자의 추방은 모스크바와 평양을 잇는 여려 계선의 하나를 절단한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은 지금 북한과 소련이 겪고 있는 불편한관계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북한과 소련,소련과 북한은 요즘 40년의 동맹관계에도 불구하고 서로 심기가 편치 않다. ◆올 연초부터 소련 언론매체들은 소ㆍ북한간 과거사를 밝혀내고 묻혀있던 사실들을 폭로해 왔다. 김일성의 해방전 정체는 소군대위였으며 6ㆍ25는 남침전쟁이었다는 내용도 그랬고 평양은 넓고 깨끗하지만 숨막힐 듯한 체제적 분위기가 전부라는 기사내용도 그것이다. 화가 난 평양당국의 반발하는 몸짓도 예삿일이 아니었고 그에따른 소련의 경고와 압력도 가중됐다. ◆소련은 얼마전까지 북한의 모스크바주재 대사로 부임한 손성필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지 않았었다. 그 50여일 동안 모스크바와 평양간에는 사실상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련으로서는 북한이 그 종주국인 소련의 세계전략인 페레스트로이카에 따르지 않는데 대한 경고와 응징이었을 것이다. 「타스추방」이후의 「사태」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현안별로 본 양국의 입장(워싱턴 미소정상회담:2)

    ◎“통일독일 나토잔류” 여부 논란 예상/핵미사일감축 등 「군축」엔 의견접근/카슈미르분쟁 가장 시급한 지역문제로 부상/「발트해」 파고로 무역협정체결 난망 소련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부시 미대통령과의 두번째 정상회담을 위해 30일 워싱턴에 도착하면 미국여론이 데탕트의 지속을 열망하고 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소련의 발트 제국 독립봉쇄 정책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독일 통일을 비롯하여 소련의 개혁ㆍ군축ㆍ동구 상황 등과 관련한 관심사들이 나흘간의 정상회담을 지배할 것이 확실하다. 외견상 하이라이트는 핵 미사일 감축협정과 화학무기 감축협정의 승인이 될 것이나 깊숙한 논의는 유럽문제에서 주고 받을 것이다. 부시와 고르바초프는 다같이 통독을 방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를 원치 않지만 장래 유럽의 안보문제에 대해 큰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소련은 통일된 독일이 서방군사동맹인 나토에 합류해야 한다는 미측 주장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부시는 단독 대좌의 기회를 이용해 소련 국내와 동구에서의 고르바초프의 정치ㆍ경제개혁 의지를 측정하고 미국이 줄 수 있는 도움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문제에 대한 미국의 불만은 20년만에 처음인 미소무역협정의 체결을 지연시킬지 모른다. 이번 미소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에 대한 워싱턴과 소련의 시각 및 입장을 정리해 보면­. ▲독일통일=부시행정부는 통일된 독일의 나토 귀속을 추구하는 헬무트 콜 서독총리 주도의 보수연합이 오는 12월 서독 총선에서 승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콜 총리로 하여금 독일통일을 이끌어 가게 하자는 것이 미국정책이다. 미국은 나토의 변신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통일독일이 나토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소련은 독일의 나토잔류는 유럽안보균형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현재의 나토ㆍ바르샤바체제를 해체하고 범유럽적인 새 안보체구상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 소련의 기본입장이다. 소련은 이를 위해 과도기간 동안 통일독일의 두기구 동시가입을 지지하고 있다. ▲유럽안보=포괄적인 재래식무기 감축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필요하다는 것이 워싱턴의 새로운 정치적 컨센서스다. 소련은 화학무기폐기협정을 비롯,이번 정상회담에서 군축문제에 관한 큰 합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전략무기 통제=부시 행정부는 1단계 START(전략무기감축조약) 협상을 매듯짓고 2단계로의 진전을 원하고 있다. 미의회는 이 조약체결을 강력히 지지하는 분위기다. 1단계 START 안은 양국의 장거리 핵 군사력의 3분의1을 감축하고 실전배치 핵탄두를 6천개로 제한하자는 것이다. 최근 제임스 베이커 미국무장관은 모스크바 방문에서 협정체결의 걸림돌을 제거한 타협안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소련개혁=소련개혁의 지속문제는 두 정상의 관심사에서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부시 행정부는 소련의 개혁성공을 지지하는 입장이며 개혁추진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동정적이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제임스 베이커 미국무장관은 소련의 내분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내분이 발생할 경우 미국은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베이커의 주요정책지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난과 민족문제 등 내부긴장요인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입지는 확고하다는 것이 소련의 주장이다. 소련 국내정세의 불안정 문제가 정상회담의 성공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리투아니아=리투아니아 분리독립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빌나와 모스크바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리투아니아문제가 소련을 불안하게 하거나 데탕트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리투아니아문제는 국내문제라는 것이 소련의 일관된 입장이다. 따라서 미소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이슈화하는 것 자체를 피하자는 것이 소련의 바람이다. ▲동구=미소가 대체로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지난해 몰타회담에서 부시는 동구에서 소련의 희생대가로 미국이 이익을 취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워싱턴에서는 동구에 대한 경제원조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치열하다. 부시는 동구원조보다 예산적자 해결에 주력하라는 충고를 유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미소무역=소련의 발트3국 독립봉쇄조치 때문에 미국이 소련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는 무역협정의 체결 전망은 지금 어둡게 보인다. 미의회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가 발트 제국과 타협하지 않는한 최혜국 대우 부여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소련은 미국이 발트3국의 독립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소련내 분리운동을 자극,소련 국내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미국측을 설득,몇개 분야에서 경제협력협정 체결을 성사시키겠다는 것이 소련의 입장이다. ▲지역문제=이번에 논의될 가장 긴급한 지역문제는 카슈미르 문제를 둘러싼 인도­파키스탄 분쟁이 될 것이다. 5월초 미국은 인도ㆍ파키스탄에 대해 미소가 공동으로 자제를 호소하자고 제의했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아마 인도의 반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시는 양국에 특사를 파견,양국의 자제와 분쟁지역에서의 군대 철수를 호소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은 연 40억달러에 달하는 소련의 대쿠바 원조에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북한이 핵안전협정 체결의무를이행하도록 북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소련에 촉구할 것이다.
  • 「한일 신시대」 전개의 전제조건 특별기고/이기탁 연세대교수ㆍ정치학

    ◎일본은 아시아의 의구심 떨쳐라/「통석」의 기교론 새질서 개편의 주역 될 수 없어 한일관계는 아시아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패전 후 처음으로 일본은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를 점하려는 전환점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장기적인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아시아정책과 일본의 역할을 가늠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빼앗겼던」 아시아에서 미국이 다시 후퇴를 하게되는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우기 시작하려는 힘의 논리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이번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은 어떤 의미와 윤곽 속에서는 「도쿄외교」이지 「서울외교」의 성격은 없는 것이다. 유럽이 독일을 중심하여 돌기 시작한다면 아시아가 일본을 중심하여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일본의 새로운 야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연합헌장에는 아직도 엄연히 「적국조항」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중부유럽,즉 「독일의 재등장」은 일본에 깊은 영향과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독일이 고르바초프와 대결하고 타협하여 승부에 이겼다면 이제 일본이 고르바초프를 극동에서 맞이할 준비를 하면 된다. 여기에 일본외교의 전후 대전환점을 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일본외교는 전후 「소련의 위협」을 전제하여 미국과의 동맹을 통하여 「안보무임」을 실천할 수 있었고 오늘날 또 하나의 명치 이래의 일본의 이상인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제 고르바초프를 극동으로 끌어내 「소련의 위협」과 타협할 수 있다면 일본의 전후는 끝나는 것이다. 이는 퇴조하는 미국의 공백을 메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과 상쇄되는 일본외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외교의 대아시아정책의 시발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대통령의 연설에 「우뢰와 같은 박수」라는 일본의 특징과 성격에서 보듯이 우리는 처음부터 일본외교의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가 있다. 이번 방문은 확실히 한일간 외교문제의 의미는 있다. 또한 한일간의 우호관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한미동맹과 함께 앞으로도 필수적인 우리외교의 기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 일본의 노대통령 초청 외교는 단순한 한일간의 외교만의 차원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일본의 대아시아외교의 시발의 일환이라고 깊이 관측해야 한다고 본다. 유럽에서의 대변화 즉 「독일의 통일」과 유럽이 다시 독일을 중심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다는 세계적인 차원의 「새로운 질서」에 일본이 참여하고 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려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독일문제」와 아시아에서의 「일본문제」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특히 우리입장에서는 명심해야 한다. 일본문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대외정책의 하나이다. 다른 아시아국가와 달리 일본에 직접 「식민지」의 노예가 되었었고 또한 앞으로 복잡한 통일을 지향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잡아야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는 깊은 영향을 받게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속의 전후 독일에는 철저한 「비 나치화」정책(Entnazifizierung)으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나치의 범죄가 나타날 때에는 형법의 시효는 없다. 과거에 죄가 없는 독일학생들이 유럽학생들과 모였을 때에독일제국군대의 구호인 「아인 츠바이」(하나 둘) 구호가 농담으로라도 나오면 불쌍하게도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에 반하여 오늘의 일본은 전후 동경재판소의 전범(Class A)으로 구분되어 스가보형무소에 수감됐던 하토야마,기시,이케다,사토가 차례로 출감하여 총리에 올라서서 만든 일본인 것이다. 이점에서 오늘의 아시아에서는 독일문제와는 판이하게 「일본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시아에서는 대륙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일본문제」가 가려져 있었으나 이제 「일본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또 일본이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문제」는 경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아시아에서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국가들은 이제 아시아의 이데올로기문제가 걷히면서 등장하려 하는 일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정면으로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외교는 냉전 하에서는 도리어 「한미동맹」으로 한국전쟁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균형」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남북한 모두가 일본이라는 파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진실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외교의 대아시아외교의 첫 시발이며 관문인 「조선반도문제」를 어떻게 시발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의 외교가 아니라 일본의 대내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통석」이라는 일본의 「오도리」춤에서 보는 섬세하면서도 기만적으로 보이는 언어의 기교에서 보듯이 기교로만 끝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아시아의 장에 떳떳한 역할을 갖고 나서려 할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국민의 「가치체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경험없이 전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메워 이를 경영하느라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나마 미국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가치체계」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아시아를 부분적으로나마 지배하였고 또 우리는 이를 위해서 헌신하여 온 것이다. 반면 일본이 과연 미국과 같은 가치체계를 갖고서 이제 아시아에 접근하려 하고 있는지 한국과 아시아 모두가 깊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나 아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국민이 역사를 반추하고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한가지 다시 독일문제와 비교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행여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게르만의 멘탤러티를 일본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이며 아시아의 관찰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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