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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첸반군 러 관청 습격/부데노프스키시/시민·경찰등 41명 사살

    【모스크바 AP AFP 로이터 연합】 체첸반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 1백여명이 14일 러시아 남부의 부덴노프스크시를 공격,시민과 경찰 등 최소한 41명을 죽이고 1백60여명의 인질을 잡고 체첸공화국 방면으로 도주했다. 박격포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이들 괴한들이 이날 정오께(현지시간) 2대의 트럭과 2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체첸공화국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인구 10만명 규모의 부덴노프스크로 진입해 시의회,은행,경찰서 등 주요건물을 공격하고 전화선을 끊는 등 주요 관공서들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이와 관련,북부 카프카스지방의 군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며 수도 모스크바의 정부기관 등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올레그 소스코베츠 러시아 제1부총리가 관계기관의 비상대책회의에서 이들 테러분자가 러시아정부의 체첸공화국에 대한 군사개입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 연합】 지난 14일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시의 대형병원을 점거한 체첸분리주의자테러범들이 억류하고 있는 인질의 숫자는 1천여명에 달한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15일 스타브로폴 지방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하룻밤을 테러범들에게 붙잡혀 있는 병원내 인질의 숫자는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 4백여명과 입원중인 환자 5백여명을 포함해 모두 1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러,인질협상 【모스크바 AFP AP 연합】 니콜라이 예고로프 부총리를 비롯한 러시아 고위관리들은 15일 체첸반군으로 보이는 무장괴한들이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붙잡고 있는 60여명의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에서 무장괴한들과 협상에 들어갔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체첸,대러 테러 배경과 전망/거점잃은 반군,민간인 테러로 보복/러 소탕작전에 저항… 최대규모 습격 부데노프스크시 테러사건은 체첸사태 발생이후 체첸공화국 영토 밖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테러라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러시아 정부는 특히 이번 사건이 13일 체첸영토내 저항군 거점에 대한 막바지 소탕작전을 끝낸 바로 이튿날 일어났다는 점에서 크게 당황하고 있다.가장 우려해왔던 최악의 시나리오,즉 러시아영토내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한 체첸저항군들의 무차별 테러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6월초 체첸저항군의 산악거점 사령부가 위치한 베데노지역이 러군 수중에 들어간 뒤 저항군은 그동안 몇개 그룹으로 나뉘어 산발저항을 계속해왔다.지휘체계도 일원화되지 않아 두다예프가 지휘하는 그룹과 체첸군 총사령관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그리고 샤밀 바사예프 사령관이 이끄는 조직 등으로 흩어졌다.이런 상황에서 13일 최후저항거점인 샤토이,노자이­유르트에 대한 러군의 대규모 공격이 감행됐던 것이다. 사건 배후가 아직 분명히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화면 등을 보면 체첸저항군 일파가 저지른 것이 분명한 것같다.이제 체첸군도 러시아군과 정상적인 화력대결을 벌일 단계는 지났다고 판단한 듯하고 이는 두다예프가 여러차례 호언해온 마지막 수단인 민간인에 대한 테러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굴복해 러군이 체첸영토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는 게 이곳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당초 체첸에 무력을 투입해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옐친정부가 민간인 희생을 두려워해 군대를 철수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군사적으로 궁지에 몰린 저항군 일부가 저지른 단발적인 성격이 짙다.따라서 사태의 파장을 보는 시각도 대체로 체첸측에 대해 부정적인 쪽이다.
  • 「북 지원」 기우는 북경(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14)

    ◎중 수뇌 “혁명 완성위해 참전” 당위성 역설/러국위문서보관소 미공개자료 9백50건으로 엮는 시리즈/유소기 “이제 중국이 북조선 도울 차례” 개입 지지/중·소 인천상륙작전 이후 긴밀하게 작전 협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사흘뒤인 50년 9월 18일 주은래는 북경주재 로신소련대사와 소련군사고문단의 코토프,코노프 장군을 불러 한국전 상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크게 당황한 모습의 주는 이들에게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을 신문보도와 평양라디오방송의 보도를 통해서야 알았다고 불평했다. ○주,인천상륙에 당황 로신대사가 같은날 스탈린에게 보고한 이 면담내용에 따르면 주는 북조선동지들과 중국군의 연락이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그는 북조선군의 작전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북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군사관구에서 중국군 대표를 북한에 파견해 현지상황을 파악토록 하겠다는 요청을 보냈는데도 북조선에서 아무 회신이 없다고 불평했다. ○“모충고 무시” 큰 불만 이와 함께 주은래는 지금까지 모택동이 수차례 해준충고와 예견을 북조선 지도부가 모두 무시했다며 큰 불만을 표시했다.심지어 평양주재 중국대사가 작전관련 정보를 받지 못해 제때에 본국에 보고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따라서 중국정부는 인천의 진짜 상황을 모르며 그 때문에 일관성 있는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그는 이와 함께 공식적인 보고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작전관련 주문을 내놓았다.(로신 대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보고전문) 『1.만약 지금 북조선이 서울과 평양지역에 병력 10만명을 보유하고 있다면 충분히 상륙작전으로 들어온 적을 궤멸시킬 수 있다.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주전력을 전선으로부터 북으로 후퇴시킬 필요가 있다.전선에는 적의 진격을 저지할 일부의 병력만 남긴다.미군을 방어지역에서 밀어내 전전선으로 분산시킨 다음 치밀한 작전을 통해 이들을 하나하나 분쇄할 필요가 있다. 2.주공격부대를 창설해 이를 결정적인 전투에 대비,비밀리 유지할 것』 이같은 주문을 한 다음 주은래는 소련정부가 한국전상황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줄 것을 모택동을 대신해로신대사에게 부탁했다.그는 최근 한국전상황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갑자기 중국의 유엔가입문제를 끄집어냈다.미국이 대통령선거를 치르기까지는 중국의 유엔가입을 계속 반대할 것으로 본다며 미국이 입장을 바꾸는 즉시 중국은 유엔에 가입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주는 또한 미·영·불이 소련·중국의 한국전 무력개입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왜냐하면 이들 나라들은 한국에서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주는 이같은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며 중국이 중국남부 주둔 병력 일부를 만주로 이동시키자 미·영정부가 크게 겁을 먹었다고 말했다. 로신 대사는 주가 소련측에 요청한 사항은 즉각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말하고 중·북조선간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중국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9월 20일 스탈린은 로신대사의 이 보고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북조선지도부가 중국동지들에게 조선전쟁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잘못이다.하지만 우리는 김일성이 고의로 그랬을 것으로 생각지 않음.아마도 전선과의 통신불량으로 인한 문제로 생각됨.모스크바도 평양주재 대사로부터 이따금씩 그것도 낡은 정보를 보고받고 있음.모두가 북조선인민군이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임.인민군 사령부와 전선병력사이의 통신이 아주 불량한 수준임.전선의 보고수준이 불량해 제때 분석이 안됨. 거듭 말하거니와 북조선 당·군 모두 미숙함.불과 3개월의 전쟁경험밖에 없는 북조선군이 완벽한 장비를 갖춘 외국군대를 맞아 그정도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는게 오히려 놀라운 일임.제물포(인천)의 패배는 인민군이 이승만뿐 아니라 영·미군을 함께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당한 것임.만약 이승만정권만 상대했다면 조선반도의 반동세력을 오래 전에 일소했을 것임』 ○스탈린,중·소 공조 다짐 스탈린은 이와 함께 다음의 4가지 사항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1.대대·연대가 개별적으로 적과 싸우는 전략은 잘못됐음.이는 전략손실만 자초할뿐임.2.주전선에서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켜 서울 동북부에 강력한 방어선을 새로 만들어야 함.3.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더 힘들어졌음.소련대표단이 유엔에서 중·소의 평화해결방안을 계속 역설하겠음.4.미국은 중국의 유엔가입 거부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임.소련대표단은 국민당대표의 유엔축출을 계속 요구하겠음』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어려워진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작전변경과 함께 중·소의 국제적 공조체제를 재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중국측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국면타개를 위해 어차피 중국측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기 시작했다.로신대사는 스탈린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주은래를 다시 만난뒤 이같은 중국측의 분위기를 9월 21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중국쪽의 참전지지 분위기를 보다 분명히 표시한 사람은 유소기였다.이날 유는 소련아카데미 회원 유딘을 위해 자신이 주최한 만찬에서 한국전 상황을 상세히 분석한 뒤 중국사회 각층의 이같은 참전지지 분위기를 이야기했다.9월 22일 로신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중에서 유소기의 발언중 참전관련 부분만 소개한다. ○일부선 개입에 반대 『노동자,농민,혁명적 지식인들 다수는 중국혁명이 진행되는 오랜기간 동안 북조선이 중국을 도왔다고 믿고 있다.이제 중국이 북조선을 도울 차례라고 말한다.이들 다수는 미제국주의를 증오한다.민주정당 지도자들도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물론 일각에서는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중국이 다시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한다.활발한 정치선전 덕분에 중국군내 장교·사병 다수는 사기가 충천하다.필요하다면 미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겠다는 기세이다.미군의 사기는 크게 높지 않다는 판단이다. 물론 조선전쟁에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다.오랜 전투를 치르다보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많다.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극소수일뿐이다.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미제국주의를 분쇄하기 전에 중국혁명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미국이 북조선을 위협하는한 중국은 북조선 동지들을 도와야 한다고 지도부동지들은 믿고 있다』 중국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한국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 전문보고와 같은 날인 9월 22일 모택동이 유딘을 불러 역시 중국의 참전 필요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로신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9월22일). ○“미,장기전 준비 미비” 『트루먼이 6월말 남조선과 대만에 미군을 보내기로 한 결정은 큰 실책이었다.그 때문에 영국의 입장이 난처해졌다.영국은 한편으로는 남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기 때문에 미군의 대만파병을 지지할 수 없는 입장이다.현재 남조선에서 미군의 군사활동을 보면 그곳에서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돼 있다.그들이 하는 것은 소련·중국의 반응을 떠보고 군사력을 시험하는게 목적인 것 같다.모택동은 미군이 큰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타협할 명분을 찾을지 모른다고 했음.이와 관련,미국이 중국의 유엔가입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모는 보았음.미국이 중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고 대만에 병력을 파병한데 대해 인도·필리핀같은 나라가 반대한 것이 이런 가정을 뒷받침한다고 모는 주장했음』 모는 이와 함께 『적어도 미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유엔가입이 허용될때까지 중국은 아시아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서 공개적으로 투쟁할 명분을 갖고 있다』며 한국전 참전을 시사한것이다.
  • 제헌국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2)

    ◎내각­대통령책임제 공방… 대통령제로 결말/여·순 발란 등 소용돌이속 국가보안법 통과 우리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호칭이 등장한 것은 19 48년 7월 12일이다.국가의 기본골격인 헌법이 이날자로 제정되면서 대한민국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그 헌법은 5·10 선거에 의해 개원한 국회가 제정했는데 초대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과도입법의원 맹활약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되었다.제헌국회는 물론 민주주의 방식의 첫 대의기구다.미군정 아래서 개원되었던 절반의 대의기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염두에 두면 사정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그러나 제헌국회는 과도입법의원의원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예행을 거친 국민들이 확실하게 뽑은 1백98명의 선량들이 참여한 국민의 대의기구였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15명이 국회에 진출,제헌국회개원에 깊숙이 간여했다.그들의 경험이 그만큼 존중되었던 것이다.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경선 상대가 없이 무투표 당선된 신익희의 역할이 컸다.그는 미군정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전면에 나섰다.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운영에 관한 규칙법안이 이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제헌국회는 5월 31일 역사적 개원을 맞았다.제1차 본회의는 당시 최고령자였던 임시의장 이승만의 사회로 열렸다.국회의장단 선거에서 1백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부의장에는 신익희(76표)와 김동원(77표)이 선출되었다.이날 서울 시내에는 경축 꽃전차가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하오2시 제헌국회 개원식이 베풀어졌다. 국회에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다.이 위원회는 먼저 헌법학자 유진오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유진오 전문위원은 내각책임제 및 양원제,3권분립을 중심으로 한 안을 내놓았다.그리고 법전편찬위원회(위원장 김병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비롯,임시정부헌장,과도입법의원 제정의 약헌,구미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기초에 착수했다. 내각책임제안은 곧 바로 이승만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12일 양원제를 단원제로 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이의없이 채택했다.이승만은 마침내 분노하고 말았다.6월15일 기초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내각책임제가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책임제로 번안해줄 것을 요구했다.그러면서 측근을 시켜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계속 밀고나가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은근히 위협해왔다. 그래서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그를 제외시킨 정치문제논의는 무의미할 정도로 당시 정치상황에서 이승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던 것이다.유일한 정당이었던 한민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이로써 6월22일 제17차 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대통령책임제헌법안으로 번안하기에 이른다.이어 6월 23일 제17차 국회본회의에 대통령책임제 헌법안이 상정되어 20일간에 걸쳐 17차례의 토론을 벌였다. ○헌법안 20일간 격론 대통령책임제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한 것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명의의 헌법 전문은 단기 4281년 7월 12일이라고 분명히 적었다.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2일 자정을 약간 넘긴 0시28분에 제3독회를 마쳤다.그렇게 해서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었다.기초과정부터 풍파를 일으킨 제헌국회의 헌법제정은 파란만장한 헌정사의 장래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법은 7월 16일 제31차 본회의에서 제정되었다.17일 공포된 헌법절차에 따라 7월 20일 제37차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8월 3일 제37차 본회의는 이범석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은 가결시켰다.그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선출에 따라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김약수가 부의장이 되었다.이어 8월 5일 제40차 본회의에서 김병로 대법원장 임명 요청을 동의함으로써 정부수립을 위한 기본조치를 매듭지었다. 제헌국회에서 원내 세력판도의 윤곽이 드러난 시기는 의장단 선거를 전후해서다.이승만의 의장피선은 초당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만 2명의 국회부의장 선출에서는 그 색깔이 드러났다.신익희와 김동원의 부의장 피선은 원내세력을 국민회와 한민당이 주도했다는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이 때부터 각 정파 및 무소속의원들은 지연·인연을 따라 독자적 원내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적 이론파였던 성인회를 비롯,동인회,청구회가 연합하여 이른바 소장파 그룹을 만들었다.이 그룹은 한민당·이정회와 정립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이는 10월 13일 긴급동의로 제출한 미군철수 결의안과 한미간의 여러 협정에 극력 반대하는 것등으로 나타났다.특히 미군철수 결의안은 북한 최고 인민위원회가 미·소 정부에 두 나라 군대 철퇴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직후에 나왔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1948년 10월부터는 국군에 침투했던 남로당 세포조직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0월 2일 제주도군 경비1대대의 반란,10월 20일 제40연대의 여수·순천 반란,11월 20일 대구 제60연대 무장반란이 그것이다.엄청난 사상자를 낸 가운데 곧 진압되었지만,그 잔여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유격전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요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농개법 등 획기적 조치 그래서 국회는 11월 21일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준엄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당시 상황에서 국가 보안법 제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에 앞서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1949년 2월 3일에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이들 법률의 내용과 집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혼란과 대립도 뒤따랐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다.국회안에서 소장파 그룹을 형성했던 노일환,김약수,김옥주등 13명의 의원들이 1949년 5월 20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실로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 제헌국회의 얼룩이었다. ◎하버드대 소장 「사찰요람」/「국회 남노당 프락치사건」 북노당도 개입/당시 부의장 김약수 「배후 조종자」 분류/전 북노당 고위간부 “남북 합작” 증언 1949년 5월 20일 제헌국회의원 노일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 경우도 없지않다.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과 증언을 통해 이 사건 배후에는 남조선 노동당(남로당)뿐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북로당)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친연구소에서 입수한 사찰요람에 따르면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김약수는 「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분류했다.이 문서는 그가 1947년 조선공화당을 조직,서기와 선전부장이라는 당직을 맡았던 사실도 들추어냈다.그리고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주한미군 정보처(G­2)의 주간정보보고서는 제헌국회 개원초기 이들이 들어가 있던 무소속구락부를 반우파적 집단으로 평가했다. 이어 주간정보보고서는 무소속구락부가 앞으로 좌익성향 구성원들의 집합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미 군정의 예측은 어느 정도 적중되어 국회활동을 통해 미군철수 결의안을 긴급동의로 제출하는 등 북한의 주장을 동조하고 나섰다.국회 프락치 사건에연루한 이들은 주로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어 모두 3차례에 걸쳐 13명이 붙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만난 전 북로당 고위간부의 증언에서 북로당도 깊이 개입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이 증언에 따르면 북로당원 성시백(김삼룡·이주하와 함께 6·25가 일어난 1950년 6월 27일 서울에서 처형되었음)이 관련되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남로당과 북로당의 공작이 횡적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포섭된 인물은 황윤호(진양출신),김옥주(함양출신),강욱중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 6일만에 「보」서 생환 미 조정사/비상생존낭 절대 역할

    ◎「피격서 탈출까지」 스토리 재구성/무선통신기·나침반등 구비/서바이벌지옥훈련도 큰 도움 추락 6일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스코트 오그래디 미공군대위의 피격에서 구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미백악관및 국방부의 발표와 현지발 외신 등을 묶어 재구성해 본다. 2일 하오 보스니아 비행금지구역을 초계비행중이던 오그래디의 F16C기가 3시쯤 러시아제 SAM6 지대공미사일에 피격,6천m 상공에서 추락했다.추락장소를 세르비아계 통제하의 반자루카 남쪽 40㎞ 지점인 므르콘지치 부근으로 추정할 뿐 같이 비행했던 나토 비행사들은 오그래디의 비상탈출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4일 포겔만 미 공군참모총장이 추락지점 인근에서 비상탈출 조종사의 위치전달 무선신호음으로 여길 수 있는 시그널이 간헐적으로 포착되고 있다고 밝혔다. 삼림지대에 추락한 오그래디는 세르비아계에 붙잡히지 않도록 최대로 몸을 숨기는 한편 구조 헬기가 착륙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며 조금씩 이동했다.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이르러서야 배터리가 한정된 무선신호기를 켰으며 비상식량이 동나자 곤충,풀 그리고 빗물로 연명했다.오그래디는 머리와 귀 부분이 주변의 나뭇잎 색깔과 구별되지 않도록 조종사들의 위장 장갑을 덮어쓴 채 나무아래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세르비아 군인이 바로 옆에서 이잡듯 숲과 언덕을 수색하는 동안 거의 5시간을 「꼼짝않고」 숨을 죽였다. 중위 시절 개미와 메뚜기를 잡아먹으면서 겪어낸 3주일간의 서바이벌 훈련과 추락전투기에 장착된 비상생존낭이 오그래디의 철인적 생존에 절대적 도움을 주었다.한 행낭은 조종석 밑에 부착된 다소 큰 것으로 개인무선통신기(PRC),섬광신호탄,위치전달용 거울,구급상자,나침반,호루라기,권총,고무 구명뗏목,식수,담요 등과 서바이벌 팸플릿이 빼곡이 담겼 있으며 좀더 작은 것은 조종복 조끼에 달려있는데 안면위장용 페인트,지혈기와 함께 그의 구조에 최대의 역할을 한 소형 무선통신기가 들어 있었다. 추락 6일 후인 8일 상오 2시8분 오그래디가 구조항공기를 목격하고 전파신호를 음성신호로 일시 변경할 수 있는 소형 배터리무선기를 통해 보내는 음성과 모르스 신호를 나토군의 한 조종사가 포착했다.2시20분 조기경보기 AWACS의 레이더가 그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고 5시50분 40대의 항공기로 편성된 구조대가 아드리아해상의 키어사지호를 출발했다.일출 46분 후 시각이었다. 6시44분 오그래디는 구조대에게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 노란 연기를 피워올렸다.각 20명의 해병대원을 실은 2대의 CH53 헬기가 착륙했다.해병대원이 뛰어나와 헬기장 주변의 사주경계에 들어가자 권총을 손을 든 오그래디 대위가 45m 밖 숲속에서 달려왔다.즉시 구조대원에 의해 헬기로 옮겨졌고 헬기는 착륙 2분도 못돼 이륙했다.7시7분쯤 2기의 미사일공격과 소총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없었다.15분 보스니아 국경을 넘어 7시40분 키어사지호에 무사히 착륙했다.
  • 노사분규 배후 선동 좌익조직 15명 구속/경찰청

    ◎「남한 프롤레타리아」일당 적발/서울·울산·마창지역 공단침투/「노동학교」개설… 혁명투쟁 교습/사업장 잠입한 조직원 1백여명 추적 경찰청은 9일 서울과 경인,마산·창원,울산지역 등 전국 주요공단의 산업체 노동조합과 학생운동권등에 침투,좌익 지하혁명 조직을 구축해온 이른바 「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 동맹」 총책 김성식(36·한양대 중퇴)·부총책 강진관(29·서울신학대졸)·서울지역위원장 문순덕(29·여·광주여고졸)씨 등 15명을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구성과 이적표현물 제작·배포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지난 93년9월 경기도 가평군 새터의 한 민박집에서 경인지역공단을 중심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지하당의 창당을 위해 지난 87년 조직된 「노동자계급투쟁동맹」의 「비상핵심 맹원대회」를 갖고 이적단체인 「남한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동맹」을 결성,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선전·선동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또 총책 김씨의 지시로 「지하철노조」와 「마·창노련」「현총련」「현대정공노조」「조선노협」「부양노련」 등 전국 주요공단,대규모 노동단체 및 노조의 핵심 간부들과 만나 이른바 「제2노총」의 추진상황과 올해 임금투쟁 현황을 점검하고 노사분규를 배후에서 선동해왔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 11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등 「공산당 선언문」의 내용을 실은 기관지 「인민과 함께,1호」 1만2천5백부를 만들어 같은달 13일 경희대에서 열린 「94전국노동자대회」 행사장과 「경동산업」「영창악기」「진도」「한국중공업」「대림자동차」「지하철노조」등 서울·경인지역과 마·창,울산지역 등 주요공단의 산업체 노동조합에 우송·살포해 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선동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한국통신 노조에 대한 살인적 탄압」이라는 글을 실은 기관지 「인민과 함께,2호」의 필름원판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깃발아래 단결·조직·투쟁하라」「임박한 전투,혁명의 깃발을 사수하라」등 각종 문건 1천여종,디스켓 2백여개,컴퓨터 5대,분쇄기 1대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경찰은 구속된 15명 말고도 서울,인천,마·창지역의조직원 1백여명과 노동단체 및 대규모 사업장에 침투한 나머지 조직원들을 추적하고 있다. 대부분 공원과 중·고교 졸업자인 이들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134등에 합법을 위장한 공개거점인 「노동자정치활동센터」「서울노동자학교」「노동자선동단」등을 조직하고 91년3월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지하당 결성을 목표로 기관지 「진군의 함성」「노동자선동단신문」 등을 제작·배포해 왔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서노협 구로지구 교육부」에 침투해 「노동자정치학교」를 개설한 뒤 「투쟁의 머리끈을 과학으로」라는 기치아래 구로공단과 성수공단 지역 나우정밀·주식회사 태광·갑일전자·아남산업·풍성전기 등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의식화 작업을 벌여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해 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9월부터는 10여명 단위로 「철의 조직」「강철노동자」「빨치산」 등 3개 산악훈련팀을 편성해 4박5일의 일정으로 「선전하라 사회주의,조직하자 노동자군대」등의 구호아래 「지리산 피아골」등 「빨치산 전적지」를 순례하면서 유격훈련과 야간행군,선동훈련등 빨치산식 산악훈련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 클린턴/예산삭감안 거부권 행사/취임후 처음

    ◎“교육비 줄여 선거구 투자 반대”/하원,해외파병 심의폐지안 부결 【워싱턴 AFP 로이터 연합】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7일 공화당이 발의한 1백64억달러 연방지출 삭감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이를 다시 의회에 송부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우 의회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거행된 초·중·고 학교내 마약퇴치운동 행사장에서 『나는 교육비 투자를 삭감한 예산으로 고속도로나 법원청사 건설 등 일부 의원들이 선거구민에 영합하려는 사어버에 투자하려는 결의안에는 양심상 서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뉴트 깅라치 미하원의장은 클린턴 대통령이 『가장 편협한 정치적 이유를 들어 거부권을 행사한 것에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미하원은 7일 지난 73년 월남전 종전 직후 제정된 「전쟁수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이 군대를 해외에 파병할 때 의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보수파 공화당의원들이 제안한 수정법안을 찬성 2백10표,반대 2백17표의 근소한 표차로 부결시켰다. 보스니아사태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지 모른다는 우려와 의회가 군대의 해외파병에 관한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호소가 동시에 나온 가운데 미하원은 대통령의 전쟁수행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로 하여금 해외분쟁 지역에 투입된 미국군대를 귀환시킬 수 있도록 한 현행 「전쟁수권법」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미공화당은 오랫동안 이 법의 폐지를 요구해 왔으나 적어도 40여명의 공화당의원이 폐지에 반대했다.
  • 북 「38선 퇴각」 전후(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1)

    ◎김일성,전황 불리해지자 “소군 파병” 급전/“연합군 북진 저지할 공군력 지원 절실” 호소/소 국방,“서울이남 모든 병력 신속 철수” 명령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가운데 슈티코프 대사는 9월 30일 모스크바 본부에 대사관인원의 철수요청을 하기에 이른다.(N182sh.그로미코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미군기의 공습으로 북조선내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됐음.이런 상황하에서 업무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소련 군사고문단과 대사관 직원 거의 전부를 본국귀환토록 허락해주기 바람』 이에 대해 그로미코외상은 『평양에 불안감을 배가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철수는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지도부는 마침내 소련의 직접개입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준비했다.이 서한은 9월 29일자로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로 작성돼 이튿 날인 9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전달됐으며 슈티코프대사는 이를 같은 날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19 50년 9월 30일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슈티코프의 전문.전문번호 N60 03 08sh) ○박헌영과 공동명의 『스탈린 동지께. 조선노동당을 대신해 우리는 조선해방자이시고 전세계 노동자의 최고지도자이신 당신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신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들에게 끊임없는 동정과 원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서한을 통해 우리는 조선민족이 미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해방전쟁의 전선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인천(제물포)지역에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민군들은 진격하는 적부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그러나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합니다.적의 공군은 약 1천대에 달하는 각종 비행기를 갖추고서 공중을 완전장악해 우리의 저항을 용납치 않습니다.전선에서는 적의 기갑부대들이 전투기 수백대의 엄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작전을 펴 우리 병사와 장비에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있습니다.동시에 적의 폭격기들은 철도,도로,전화·전신망,수송수단등 모든 시설을 자유자재로 파괴하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아군은 정상적인 보급이 안되고 제때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런 어려움은 모든 전선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적이 서울을 완전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이 때문에 남조선 남부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은 북쪽에 있는 적에게 봉쇄당했습니다.남쪽전선에 있는 병력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탄약,무기,식량을 공급받지 못합니다.어떤 부대들은 부대간 통신도 안되고 적에게 포위됐습니다. ○보급로 끊겨 전선 마비 적들은 서울을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을 계속할 것이 분명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이런 불리한 상황이 계속돼 미군침략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습니다.병력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공군력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훈련된 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우리에게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한 작전으로 북조선으로 진격해온다면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적을 막을수 없습니다.따라서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지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시말해 적이 38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소련의 직접 무력원조가 정말 필요합니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국가의 군대내에 국제의용군 부대창설을 지원해 주십시요.그리하여 우리의 투쟁에 무력지원을 해주도록 하십시요.위의 요청에 대해 당신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존경을 표하며.조선노동당중앙위. 김일성·박헌영』 이 서한이 보여주듯이 김일성은 애당초 소련군 파병을 요청했다.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이 여러 구실을 달아 소련군파병을 거부하고 대신 중공군을 보내라고 모택동을 설득한 것이다. ○“6개사단 창설 지시” 한편 소련당국은 9월 27∼30일자로 마트베트 장군이 연이어 보낸 전문에 대한 답신을 9월 30일 평양으로 보냈다.마트베트 장군의 전문은 김일성이 인민군총사령관과 국방상직은 겸직하고 남조선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들고 싶으니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의 보고서였다.소련당국은 이 답신에서 김일성의 군직접통제를 위한 겸직과 남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소련공산당정치국 결정.전문번호 NP78­118).아울러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기타장비는 10월 5∼20일 사이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이 전문은 중국 운전병을 파견해주도록 소련이 중국에 말해달라고 한 부탁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그런 부탁을 중국동지들에게 직접 하는 것은 무방하되 소련을 핑계로 되지는 못하게 하라』고 못박았다. 한편 이 시기에 소련은 전황이 크게 불리해짐에 따라 한반도 전략에 있어 몇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검토하기 시작했다.이 시나리오는 크게 5가지로 나누어진다.ⓛ북조선에 전술적인 충고와 지원을 계속하는 것 ②북조선의 소련대표부 철수 ③북조선공산정권과 북조선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방안 ⑤철수후 반격을 위해 북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방법 ⑥중국이 전쟁에 개입토록 압력을 가하는 것.결국 마지막 ⑦의 방안이 채택되기는 했지만 당시 모스크바와 평양간 오간 전문들은 나머지 네가지 방안 모두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문서들을 근거로 이 방안들을 하나하나 재구성해본다. ⑧전술적 충고. 9월 28일 서울수복과 함께 소련은 서울 이남에 남아있던 인민군을 북으로 철수시키는 문제가 첫째 과제로 떠올랐다.이 전술적 충고에서 소련당정치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가능한한 신속하게 병력을 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군사고문단에 지시했다.50년 10월 2일 불가닌 국방장관은 평양의 마트베트 소련군사고문단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포위된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거듭 귀하에게 강조했음.남쪽에 포위된 인민군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간주할 것.남쪽에 남아있는 병력들,특히 지휘관들에게 그룹이든 개별적으로든 어떤 수를 쓰더라도 북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할 것.전선이 따로 없음.그들은 자기 영토에서 싸우는 것임.인민들도 그들을 지원하고 있음.중화기들도 미련없이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신속히 북으로 철수할 것.야음을 이용하고 적이 아직 점령치 않은 지역을 이용해 철수할 것.어떻게든 포위망을 벗어나 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만은 빼내올 것.이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 ○소 개입사실 탄로 우려 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10월 5일 상황이 긴박하니 대사관직원 및 그 가족,군사고문단등 소련에서 파견된 인원 모두를 본국으로 철수시키자는 긴급전문을 본부에 타전했다.이에 대해 당정치국은 같은 날 답신전문을 채택 이튿 날 이를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냈다.소련대표부를 철수시키라는 내용이었다.(당정치국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N14 05sh) 『①소련 대표부 파견 인원과 고문단들을 귀국시키는 결정은 10월 5일자로 보낸 전문 N18 909에 의해 이미 지시한대로임.②재소한인들의 가족을 귀국시키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사가 결정할 것.③공군기술자 가족과 군사고문단 가족은 조선영토에서 반드시 철수시킬것.④필요한 경우 재소한인을 포함,모든 소련시민은 소련과 중국영토로 철수시킨다는 대사의 제안에 동의함』소련군의 개입사실이 탄로날것을 두려워한 결정이었다. ◎새로 밝혀진 사실/소,국군38선 넘기전 「평양공관 철수」 거론/중국군 개입등 다섯가지 시나리오 검토 먼저 50년 9월30일 슈티코프가 모스크바 본부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인원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는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처음 밝혀진 것이다.10월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미군의 공습 때문이었다.그러나 평양의 불안감을 이유로 그로미코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진 것이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면서 소련이 다섯가지의 한반도전략 시나리오를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번에 밝혀진 많은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일 것이다.즉 여기에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지원의 계속,소련대표부의 철수,북한정권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반격을 위한 북한군 훈련,중국의 개입압력 등의 다섯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이는 앞으로 전체 내용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이번 자료에서 우선은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얻은 셈이다. 9월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소련 국방상 불가닌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가능한한 빨리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 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도 처음 밝혀졌다.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을 데려오기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10월1일 국군이 38선을 넘자 소련은 자국 소련대사관 인원과 군사고문단들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에는 소련 공산당이 최고위 수준에서 직접 개입하고 결정을 내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회의 연재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넘어가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소련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 이상 군사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박명림
  • 호국의 넋 기려…/어제 제40회 현충일 추념식 엄수

    ◎동작동 국립묘지 참배객 줄이어 제40회 현충일인 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현충일 추념식은 이날 상오 10시 이홍구 국무총리·황낙주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 등 3부요인과 전몰군경 유족,시민 등 2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묘지 현충탑 앞뜰에서 국가보훈처주관으로 엄수됐다. 이 총리는 이날 추념사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자유와 번영을 누리며 세계 속의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들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의 성스러운 희생이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라고 호국영령의 애국정신을 기렸다. 한편 이른 새벽부터 손에 꽃을 든 참배객들이 몰리기 시작해 이날 하룻동안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참배객 20여만명이 다녀갔다. 이날 상오 10시30분쯤에는 지난 83년 2월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대위 출신 이웅평 중령(41·공군대학 교관) 등 귀순자 30여명이 국립묘지를 참배,눈길을 끌었다.
  • 인질석방위해 유엔은 힘보일때(해외사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소속 미국비행기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군에 의해 피격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이 새로운 결정을 하는 것은 확고해졌다.세르비아계에 인질로 억류된 프랑스군을 석방시키기 위한 협상은 쓸모없는 짓이다.힘을 보여줘야 한다. 프랑스와 영국은 걸프전에서 썼던 전략을 보스니아에 적용하면서 동맹을 이루려 했다.유엔결의는 계속해서 이런 활동에 적법성을 보장해줄수 있다.그러나 군 결정은 뉴욕의 유엔사무총장에게 올라가지 않고 현지의 사령관에 의해 이뤄진다. 서유럽동맹과 NATO 국방장관의 3일 회담은 첫번째 단계의 하나일 뿐이다.지난달 27일 자크 시라크대통령의 지시는 단호함의 신호였고 지금은 14개국 대표들이 또다른 전략에 따라서 필요한 조치를 연구하고 있다. 긴급한 일은 신속대응군을 구성하는 것이다.영불 양국은 5천여명의 타격군을 소유하고 있으며 타격군은 유엔군 공격에 대한 보복공격임무를 맡을수 있다. 네덜란드도 참여할 듯하고 이런 정예군은 포병,기갑,헬기같은 중무기로 무장할 것이다. 파리회담은 거기에그치지 않을 것이다.보스니아에 파견된 군대의 할당을 재조정해야할 필요가 생길 수밖에 없다.철수를 보호하려면 미국과 독일군의 보강이 있어야 한다.그렇게 되면 사라예보공항의 안전이나 육로교통로 개설같은 유엔군의 활동이 자유로워지게 될것이다. 결국 군사적인 문제들은 외교적으로 해결되게 마련이다.이것은 세르비아계의 지도자 슬로보단 밀로세비크가 보스니아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하자는 프랑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고 반대급부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제재조치를 해제하자는 것이다. 보스니아를 위한 미국이나 세르비아계를 위해 러시아를 중재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전권특사가 나서야 정치적 타협을 이뤄낼수 있다.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은 성공을 하지 않는다.양국은 더이상 사건을 겪는데 만족해하지 않고 있다.
  • 러,「신속대응군」 창설 거부 시사/「지위」 등에 의문점 많아

    ◎인테르팍스 통신/유엔안보리승인때 반대할 듯/유럽주둔 미군 실전훈련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주둔 유엔평화유지군 보호를 위해 파견할 신속대응군 창설을 위한 유엔안보리 계획에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지 모른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5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정부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러시아는 NATO 주도의 신속대응군 파견 제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많은 의문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신속대응군의 지위에 대해 아직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NATO의 결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러시아는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프랑스,독일이 참여하는 NATO의 신속대응군 창설은 유엔안보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본 로이터 연합】 유럽주둔 미군 1천9백명이 4일 보스니아주둔 유엔군의 비상배치상황에 대비하는 10일간의 실전훈련을 개시했다. 유럽주둔 미 제5군은 이날 헬리콥터지원을 포함한 실전사격훈련과 재급유,재무장훈련등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번 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리처드 브리지스 미육군대령은 『우리는 보스니아로부터의 긴급출동명령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리지스 대령은 『우리는 아직 현지 배치명령이나 비상대기명령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보스니아에서의 가능한 비상임무에 대비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보스니아­미국의 전쟁이 아니다(해외사설)

    클린턴 행정부가 보스니아에 미지상군 파병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백악관과 공화당 사이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단결력과 유럽에서의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공방이 전개되고 있다. 전쟁은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그러한 슬로건으로 수행될 수 없다.어제 보스니아 상공에서의 미 F­16기의 피격추락사건이 이를 분명히게 보여주고 있다.보스니아에서의 진짜 문제는 미국이 나토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유럽안보에 대한 미국의 계속된 약속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과연 미국이 지상군을 전투에 개입시킬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보스니아에서 얻을 이익이 충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고 보는게 우리의 견해다. 과거 특별한 상황에서 발칸반도의 문제에 전세계적 중요성을 갖고 투자를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미국은 3년동안 계속되는 보스니아 유혈전쟁에서 인도주의 이상의 이익은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이익이 전세계적인 한 유럽과의 유대는 특별히 강하다. 나토는 미국과 가장 결속력이 있는 동맹국이다.때문에 미군병력이합동군사훈련에 참여하고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약속은 충분히 믿을만한 것이다.그러나 동맹국의 군부대가 나토지역 밖에서 활동할 때 이들 군부대에 대한 자동보호로까지의 확대는 아니다.영국·프랑스,그리고 보스니아내에서 유엔 활동에 참여하는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강화하고 보호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그들 국가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철수할 필요가 있다면 미국은 도와줄 채비를 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미지상군은 보스니아사태와 전혀 무관해야 한다.
  • 미­러 보스니아 파병 놓고 대립/옐친 “미군 도움 안된다” 반대

    ◎영선 「전술전투단」 구성… 독 파병시사/“유엔군석방 국적통핵 세계와 협상”­영 외무 【런던·모스크바·본·콜로라도스프링스·사라예보 외신 종합】 미군의 보스니아 파견을 들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도 1일 군대를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보스니아에 주둔중인 영국군은 전술전투단구성에 착수,본격적인 전투준비테세에 돌입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31일 미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 연설에서 『곤경에 처한 유엔평화유지군 지원을 위해 미 지상군을 보스니아에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미군의 파병은 사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 보스니아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군대파견움직임에 이어 클라우스 킨켈 독일 외무장관도 1일 『유엔병력 재배치를 지원하기 위해 보스니아에 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독일이 보스니아에 지상군을 보낼 경우 2차대전후 처음으로전투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된다. 【사라예보·런던·파리 AP·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1일 또다시 유엔 민정관리 1명을 인질로 잡고 평화유지군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서방권에 대한 도전을 강화하고 있으나 인질 석방문제를 싸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양측을 오가며 직·간접 접촉을 가졌다.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영국기자들과의 회견에서 ICRC가 유엔을 대리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와 『직·간접 접촉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 파병 발언 왜 나왔나/세계 위협용… 결행 미지수/대보스니아 정책 전환 시도… 러 반발 무마 과제 클린턴 미대통령이 31일 보스니아전쟁 개입 가능성을 발표,민족분쟁에 따른 영토확장 전쟁으로 3년여를 끌어온 보스니아내전은 새 국면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보스니아내전 불개입」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침묵을 지켜왔다.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보스니아 사태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같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프랑스,영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계에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을 외면하면 이들 우방들과 군사·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유엔평화유지군을 인간방패로 삼아 나토와 유엔에 일격을 가하고 있는 세르비아계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체면을 크게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린턴의 발표는 평화유지군이 철수하기 전이라도 전략상 필요하다면 미지상군을 투입하겠다는 쪽으로 파병 조건을 완화함으로써 세르비아계에 위협을 줘 행동을 제약시키는 동시에 보스니아 사태를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미지상군이 실제로 보스니아로 파병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국내외의 난관을 넘어야 한다.무엇보다 공화당이 우세한 미 의회와 제2의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 큰 문제다. 오는 96년 대선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클린턴으로서는 단시일내에 끝날 것으로기대하기 어려운 보스니아전쟁에서 명분없이 많은 희생자를 낼 수 있는 파병을 선뜻 단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클린턴의 외교정책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딜레마인 셈이다. 클린턴의 발언이 있은 후 공화당은 예상했던 대로 일제히 클린턴에 대한 비난에 나섰다.공화당원들은 클린턴의 가장 취약한 점,즉 외교정책의 실패를 또 한번 보게 됐다며 비꼬았다.96년 대선의 공화당 후보에 나설 보브 돌 상원 원내총무는 『클린턴의 보스니아 전쟁 개입 정책은 의회와 협의없이 이루어 진 것』이라며 『클린턴 행정부가 이 문제로 의회의 승인을 얻기는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미국의 지상군 투입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옐친은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어떤 나라의 무력사용도 반대한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인질들이 워낙 넓게 산재해 있어 몇백명의 군병력이 투입된다고 해서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전쟁초기의 작전 양상(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9)

    ◎스탈린이 사실상 남침작전 총지휘/침략개시일 승인·김일성에 일일이 작전지시/“미 군사개입 공개항의 하라” 평양에 비밀전문 6월22일에는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암호전문의 해독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이후 일체의 암호전문 해독을 금지한다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하달됐다.그뒤 평양대사관과 본부 외무부간 전문교신은 연말까지 중단됐다.대신 크렘린은 전시통신을 전담하는 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대사관과의 교신을 계속했다.이 교신내용은 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전쟁개시와 함께 스탈린은 사실상 작전의 총지휘권을 행사했다.작전개시일을 승인했고 김일성의 작전명령에 일일이 간섭했다.중국·북한군 사령부에 작전지시를 일일이 내려보내기도 했다.그러나 전쟁초기 이러한 일사불란한 협력관계는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며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50년 7월1일 스탈린은 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의 소련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34681sh). ○“계속 진격해야” 독려 『① 귀하는북조선군당국이 갖고 있는 계획에 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전진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진을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두말할 것없이 계속 진격해야한다.남조선 해방이 앞당겨질수록 개입(미국의 개입을 지칭)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② 미군기들이 북조선 영토를 공습하는데 대해 북조선 지도자들의 반응을 보고하라.이 공습으로 겁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③ 북조선 지도자들이 미군의 공습과 군사개입에 대해 공개항의할 의사는 없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 공개항의를 해야한다. ④ 북조선이 탄약과 기타 군수품들을 공급해달라고 한 요청에 대해 7월10일까지 이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알릴 것』 이튿날인 7월2일 슈티코프대사는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이 북한지도부의 분위기를 전했다.『6월28일 서울을 함락함으로써 북조선지도부의 사기는 매우 높음.그러나 미군기의 공습이 잦아지고 라디오방송을 이용한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악선전이 가열되면서 북조선지도부의 분위기가 다소 악화되고 있음』 일부 지역에서는 최종 승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일부 「해방지역」에서는 사태를 관망하려는 움직임이 주민들 사이에 일고 있다고 이 전문은 보고했다.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박헌영이 미군개입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인식하고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일성은 위기타개를 위해 보병부대,탱크,해군부대의 추가창설 계획을 밝히고 군사총동원령을 발동시킬 계획이라며 슈티코프의 의견을 물었다. 이와함께 김두봉,홍명희는 인민군만으로는 미군과 맞서 싸우기 힘들다며 조심스레 소련의 입장을 타진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같은 입장타진은 김일성의 개인비서 한사람이 소련대사관을 찾아와 전달했다고 전문에서 밝혔다. 7월4일 슈티코프소련대사는 역시 총참모부 8참모부를 통해 스탈린앞으로 7월3일 김일성,박헌영과의 면담결과를 보고했다(전문번호 N405840). 『김일성은 군사작전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고 불평했음.특히 중부전선에서 너무 느리다고 했음.도하작전은 민족보위상이 현장에서 직접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수행이 제대로 안됐다고 지적.김일성은 자기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자탄했음.김일성은 전선과 해방지구 모두 사정이 심각하다고 강조.그는 미군 상륙부대가 북조선의 항구나 공정낙하산부대를 이용해 북조선군 후방에 침투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김은 이같은 가능성에 대비키 위해 많은 양의 추가 무기지원을 요청.2개 사단,12개 해병대대,해양경찰대 수개부대를 무장시킬 양의 무기임.김은 북조선지역의 철도역들이 미군공습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무기들을 만주를 경유,안동­신의주­평양으로 신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김은 북조선이 예비연대와 탱크여단 2개의 창설을 시작했다며 무기와 탱크가 필요하다고 했음.김일성은 한 보좌관에게 이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작전통제 능률을 높일 방안을 물었음.김은 앞으로 미군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며 북조선군의 지휘능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그는 총참모부를 전투병력에 보다 가까이 옮겨가기 위해 작전통제와 지휘조직을 도와줄 소련 군사고문관 1명의 파견을 요청했음』 슈티코프대사는 평양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바실리예프장군과 공동으로 다음사항을 김일성에게 건의한 것으로 이 전문은 밝히고 있다.『① 총사령관 참모총장 군사위원회 총참모장으로 구성되는 군사평의회가 이끄는 2개의 군사그룹을 창설할 것.각 군사그룹은 휘하에 4∼6개의 하급부대를 둘 것.② 전선사령관 총참모장 전선군사평의회가 이끄는 전선사령부를 창설할 것.이 전선사령부는 총참모부 책임하에 구성.③ 민족보위성은 이미 소규모이기 때문에 그대로 존속시킬 것.민보성은 전투병력에(식량,연료,탄약등)모든 필요한 보급품을 공급하는 외에 예비병력,신병 훈련,공화국 북부에 상륙방어부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는다.④ 김일성을 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무기 대량지원 요청 김일성은 슈티코프대사의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두사람은 군병력 조직개편이 전선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합의했다. 슈티코프대사는 마지막으로 『병력편성 분야의 소련군사고문관 2명을 파견해줄 것(1명은 편성사령관 고문관,1명은 포병사령관 고문관).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장군과 전선사령부에 파견된 소련군장교들이 서울로 함께 이동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망함』이라는 것으로 이 전문을 끝냈다. 8월28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격려의 뜻을 담은 전문을 전달했다.그러나 이 전문의 진짜의도는 김일성에게 새로운 작전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전문번호 N75021,소련군총참모부 제8참모부). 『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는 김일성동지와 그의 동료들이 남조선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위대한 투쟁을 벌이는데 찬사를 보낸다.김일성동지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다.소련공산당 중앙위는 조만간 침략자들이 치욕속에 조선반도에서 쫓겨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② 김일성동지는 외세개입자들과 맞서 싸우는 이 전쟁에서 항상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당황해선 안된다.일부에서 진격이 지연되고 국지적인 패배를 겪는다고 낙담해선 안된다.이런 전쟁에선 누구도 계속 승리만 거둘수는 없다.러시아 내전 때는 더 심했고 독일과의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조선인민들이 거둔 성공은 바로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 됐고 제국주의의 멍에를 벗으려는 아시아 해방운동의 기치아래 들게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지금부터 모든 피착취 인민의 군대들은 조선인민들로부터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해야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김일성동지는 조선이 이제 혼자가 아니라 동맹국들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동맹국들이 당신을 도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1919년 영·불·미 외세와의 전쟁당시 러시아는 지금 조선동지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소 군사고문 파견 전문 ③ 김일성동지에게 공군력을 산개시키지 말고 전선에 집중시킬 것을 충고한다.전선에서 공격은 반드시 적진에 결정적인 공습을 가하는 것과 함께 시작돼야한다.인민군 전투기들은 적기로부터 인민군을 방호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해야 한다.필요시 우리가 폭격기,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 8월29일 슈티코프대사로부터 이 편지를 전달받은 김일성은 크게 감동,이튿날 노동당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소집해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식답장을 채택했다.『우리의 경애하는 교사이신 스탈린동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구절로 이어지는 이 답장은 스탈린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감사의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 밝혀진 사실/김일성 “전진속도 느리다” 자책/서울 제한점령설 허구 입증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의 상황을 다룬 이번 9회에는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들어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전쟁의 결정과정보다 전쟁의 전개과정에 훨씬 더 깊숙이 개입,『남조선해방이 앞당겨질수록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는등 사실상 초전부터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동의 전쟁이었음이 이번 문서에서 확인된 것이다. 두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항상 소련의 의사를 문의하고 소련은 그에 상세히 답변하는가 하면,어떤 것은 문의에 앞서 미리 지시하는등 이번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1950년 11월 공군이 개입하기 이전부터 소련이 이 전쟁에얼마나 깊숙이 개입하였는지 확인하게 된다. 세번째는 김일성은 초기에 전진속도가 너무 느린것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자책하고 있음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이는 김일성이 서울까지만 점령하려했다는 제한전쟁설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번째는 김일성이 이미 전쟁 초기부터 미군의 상륙부대나 공정부대가 북한후방으로 침투할 위험이 높다고 인식,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다섯번째는 스탈린·김일성과 같은 고위수준에서의 전쟁수행방식의 공동결정 뿐만 아니라 현지전쟁수행에서도 소련과 북한은 긴밀하게 협의,공동수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끝으로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이 곤경에 처했을때 스탈린은 오히려 『폭격기와 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고까지 말하면서 고무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자료를 통해서 밝혀졌다.
  • 일 국교 교과서 검정과정서 「위안부」 대목 삭제

    【도쿄=강석진 특파원】내년부터 사용될 일본의 국민학교 6학년 사회교과서 일부에 군대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대목이 검정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아사히(조일)신문이 31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5가지 종류의 사회교과서중 한권은 2차대전중 한반도 상황에 관해 『젊은 여성도 정신대 등 이름으로 전쟁터에 보내졌다』고 표현해 위안부 존재를 시사했으나 검정후 『젊은 여성도 공장 등으로 끌려갔다』로 바뀌었다. 또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는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여러가지 목적으로 전쟁터로 끌어갔으며 그 지역 자원도 수탈했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검정후에는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에서 석유 등 자원을 수탈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끌어가 여성과 어린이마저도 협력토록 했다』로 수정됐다는 것이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미군 범죄(임춘웅 칼럼)

    최근 미군범죄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건 유감스러운 일이다.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녀자가 희롱을 당하고 적지않은 시민들이 술취한 미군병사들에 의해 폭행을당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일로 국민감정이 심히 불편한 터에 미군대변인이란 사람이 국방부 기자실에 불쑥 나타나 미군이 오히려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그는 피해를 당했다는 한국인이 치료를 요할만큼 상처를 입었다는 증거가 없고 지하철에서 미군이 성희롱을 한일도 없거니와 미군이 오히려 한국인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항변했다.이 대변인은 더 나아가 『우리는 주한미군이 관련되면 사소한 사건이라도 부정적인 견해로 사건을 확대시키려는 그룹이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그는 또 『이런 불공정하고 악의에 찬 견해에는 참을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참으로 곤혹스러워지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한국의 신문들이 고의적으로 「악의에 찬」 오보를 하고있는지,미군대변인이 사실을 잘못 알고있는지 알 길이 없게 돼버린 상황이다.둘중의 하나는 잘못돼있는데 사실을 가릴 길이 막연하다.한국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를 수사할 방도가 한국에 없는 것이다.이런일은 어느쪽이 진실인지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이런 사소한 일로 한국인의 반미감정을 유발시킬 수도 있고 한국과 미국의 우호관계에 적지않은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이유는 간단하다.「한·미행정협정」때문이다.미군범죄자는 미국측의 요구가 있으면 한국은 언제나 피의자를 미국측에 인도해야 된다.미군은 범죄를 저질러도 미군부대로 피신하면 한국의 수사권이 미치지 못하게 돼있다.공무상 일어난 범죄에는 우리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한·미행정협정」이 그렇게 돼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협정인 「한·미행정협정」이 개정되지 않으면 시정이 안될 성질의 것들이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행정협정상의 규정 이전에 한·미 양국이 나서서 사건의 전말을 공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어느 집단,어느 조직에나 범법자가 있게 마련이다.주한미군도마찬가지일 것이다.4만여명이나 되는 미군에 범죄자가 없을수 없다.통계를 보아도 매년 한국에서 일어나는 미군범죄는 2천여건을 상회하고 있다.대부분이 단순범죄들이다.한국과 미국,국가간의 문제도 아니고 양국간 국가이익이 걸린 문제도 아닌 것이다.그런데 이런 단순범죄들이 「한·미행정협정」으로 해서 국가간의 문제로 확대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이런일들이 행정협정으로 은폐되고 호도되는 것은 사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 뿐이다. 이번 문제만이라도 양국은 합동조사반을 구성해서 사태의 진상을 밝혀야 옳다.그렇지 않으면 한·미간에 국민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될지도 모른다.
  • 「해외미군 경제적 운용」 종합처방/미 국방부 「군개편보고서」 의미

    ◎대우방 「방위비 증액요구」 신호 24일 제시된 미군개편 연구보고서는 냉전 이후 시대의 미국군대를 경제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종합처방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보고서를 낸 「미군역할기능위원회」는 비정부위원회로 전직 합참의장인 콜린 파월,윌리엄 크로를 비롯한 11명의 민간인및 퇴역장성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디까지나 정책자문이나 정책건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앞으로 90일간 이 보고서를 검토한 뒤 국방부의 견해를 의회에 제출할 방침이다. 이번 보고서의 핵심은 ▲비전투지원업무를 과감히 민간에 이양하고 ▲국방부산하 과잉인력을 통폐합하며 ▲약 5만명의 국가방위군을 없애는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육·해·공군,해병대간 전투기능의 통합 문제는 거의 제기하지 않았다.특히 육·해·공군,해병대가 현재와 같이 각기 독자적 공군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대로 인정되었고 해외주둔군의 역할도 계속 강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각군별 합동작전이 있을 때 국방부가 기획단계에서부터 통합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지역군구 사령부에 대해 각종 지원을 강화해줌으로써 「경제군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세계 지도적 위치는 계속 확보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이번 보고서 중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해외주둔 미군사령관의 작전권 강화를 강조한 대목이다. 이를 위해 우방국과의 연합작전을 활성화하고 해당 사령관의 지역적 책임을 제고하며 연합작전 수행을 위한 통합적인 계획의 수립을 촉구하고 있다. 우방국과의 연합작전 활성화및 준비태세의 강조를 「군의 경제적 운용」과 연계해 보면 한국과 같은 미군주둔국에 더 많은 방위비를 요구하는 신호로도 받아들여진다. 또 냉전 이후의 안보환경 변화에 따라 정보전 수행능력 강화,공군작전력 제고,그리고 평화유지활동의 활성화를 강조하는 것도 미국의 국방비 삭감과 연결되고 있다. 이번 보고서는 어디까지나 정책건의서인 만큼 이것이 최종 채택되기까지는 상당한 토론과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 비밀회담(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5)

    ◎스탈린,김에 「3단계 남침계획」 수립지시/스탈린/“「엘리트 공격사단」·추가부대 창설을”/김일성/“모택동 동지도 조선해방 지원약속”/모택동,“김­스탈린 남침합의” 듣고 「조선인 사단 파견」 결정 □3단계 작전계획 ①38선 가까이에 병력집결 ②북에서 먼저 평화안 제의 ③평화안 거부땐 기습공격 김일성이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로 제의한 항목은 다음과 같다(1950년3월23일·슈티코프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 「1.남북조선 통일방안 및 방법(의도는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임) 2.경제문제. ⓐ)북조선 경제개발.개발계획의 방향·기간.2·3·5년? 남조선 개발문제는? ⓑ)북조선 철도의 전기화. ⓒ)소련으로부터 산업장비·자동차 추가수입문제. ⓓ)북조선 농업개발문제. ⓔ)소련전문가 파견. 3.중조관계. ⓐ)모택동과의 회담. ⓑ)중국과의 조약체결문제. ⓒ)중국거주 조선인,조선거주 중국인문제. 4.아시아 공산당·노동당간 협조문제.」 ○소서 특별기 제공 이 전문을 보낸 이튿날 슈티코프대사는 재차 김일성과 만나 스탈린이 김과 박헌영 두 사람을 만나는 데 동의했다고 통보했다.김일성은 출발일을 3월30일로 잡겠다고 말했고 이에 슈티코프는 특별기를 이용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물론 이 특별기는 소련이 제공해야 하는 것이었다.슈티코프대사는 3월24일자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이 특별기는 3월29일 평양에 도착해야 함.비행기가 못올 경우 원산에서 군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간 뒤 그곳에서 특별객차를 단 기차를 이용,모스크바로 가야 함」 이렇게 해서 김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거의 한달을 그곳에 머물렀다.이 기간중 김일성은 세차례 스탈린과 회담했다.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시간·장소별로 별도기록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는다.아마도 보안유지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아예 대화속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하지만 이들의 회담내용은 당시 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이 내용을 종합한 상세한 보고서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귀한 자료이기 때문에 보고서를 전재하기로 한다(1950년3월30∼4월25일.김일성의 소련방문건.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작성). 「스탈린동지는 김일성에게 국제환경과 국내상황이 모두 조선통일에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강조했다.국제적 여건으로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해 승리를 거둔 덕분에 조선에서의 행동개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중국은 이제 국내문제로 인한 시름을 덜었기 때문에 관심과 에너지를 조선지원에 쏟을 수 있게 됐다.중국은 이제 필요하다면 자기군대를 무리없이 조선에다 투입할 수 있다.중국의 승리는 심리적으로도 중요하다.이는 아시아 해방의 기운을 증명했고 대신 아시아 반동세력과 그들의 주인인 미국·서방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미국은 중국에서 물러나 이제 더이상 군사적으로 새 중국당국에 도전치 못한다. 이제 중국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세력에 대한 도전을 더 망설일 것이다.미국에서 오는 정보에 의하면 미국내에도 타국에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유럽에서의 위상이 강화됨으로써 이런 불개입분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이 해방의 찬반을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한다.첫째 미국이 개입할지 여부를 검토하고,둘째 중국지도부가 이를 승인하는 경우에 한해 해방작전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투수단 기계화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치 않을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그것은 북조선 뒤에 소련·중국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미국 스스로 대규모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내용. 김일성=모택동동지는 항상 조선전체를 해방하는 우리의 희망을 지지했습니다.모택동동지는 중국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필요할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조선통일을 이루겠습니다.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스탈린=완벽한 전쟁준비가 필수입니다.무엇보다 군사력의 준비태세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엘리트 공격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창설을 서두르시오.사단의 무기보유를 늘리고 이동·전투수단을 기계화해야 합니다.이와 관련된 귀하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세한 공격계획이 수립돼야 합니다.기본적으로 공격은 3단계로 작성하시오.(1)38도선 가까이 특정지역으로 병력집결.(2)북조선당국이 평화통일에 관해 계속 새로운 제의를 내놓을 것.상대는 분명 이를 거부할 것임.(3)상대가 평화제의를 거부한 뒤 기습공격을 가할 것. 옹진반도를 점령하겠다는 귀하의 계획에 동의합니다.공격을 개시한 측의 의도를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북측의 선제공격과 남측의 대응공격이 있은 뒤 전선을 확대할 기회가 생길 것이오.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개입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소련은 다른 지역,특히 서방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시 한번 모택동과의논할 것을 강조했다.모택동이 아시아문제에 정통하다는 점을 덧붙였다.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보낼지 모르기 때문에 직접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일성은 전쟁승리에 대한 강한 자심감을 내 보이며 스탈린을 안심시키려 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 보고서의 계속. 「김일성은 스탈린동지에게 왜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인지 상세한 분석을 해 보였다.공격은 신속히 수행돼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또한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이 강화돼 대규모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미국은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고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전체 조선국민은 열렬히 새 정부를 지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강조했음.박헌영은 남조선내 빨치산활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음.그는 20만 당원이 그곳에서 대규모폭동을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음」 이 회담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두 사람은 1950년 여름까지 북조선군이 완전한 동원태세를 갖추고 북조선군 총참모부가 소련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구체적인 남침계획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모스크바회담을 계기로 남침계획수립의 주도권은 어느덧 김일성으로부터 스탈린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남침승인과 함께 스탈린은 즉석에서 구체적인 3단계 작전방향까지 김에게 제시했던 것이다.한편으로 스탈린은 모택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한국전쟁을 아시아공산화운동의 일환으로 만들고자 했음이 이 문서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일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모택동과 스탈린 두 사람중 누가 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두 사람은 때론 경쟁적으로,때론 상대측에 일을 떠넘기는 식으로 김일성을 지원했다.우선 중국은 1940년대말부터 김일성의 권력강화와 군사력강화에 지대한 관심을 표시했다.국민당과의 내전중에도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조선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필요하다면 병력지원까지 할 것을 수차례 약속한 바 있다.다만 중국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모택동과 스탈린 두 사람은 남침문제를 주제로 회담도 가졌다.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이 모스크바회담에서 모택동을 제외한 채 무력남침에 합의했다는 보고를 받고 모택동은 매우 섭섭한 반응을 보였다.물론 모택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의사를 재삼 다짐했다. ○방소결과 중 통보 김일성은 49년3월 모스크바를 다녀온 뒤,5월초 인민군 정치보위국장이며 당중앙위원인 김일을 중국으로 보냈다.김일성은 5월14일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김일의 방중결과를 통보했다(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전문.5월15일). 「김일을 중국으로 보냈다.방문목적은 중국공산당중앙위와 교류를 맺고 중국군내 조선인사단(만주출신 조선인으로 구성)에 관해 협의하기 위해서다」 하고 김일성은 설명했다.김일은 4월30일 고강(고강)을 만나 중국공산당 중앙위로 안내됐다.그러나 김일의 진짜방문목적은 조선군 사단을 북한으로 전출시켜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모택동은 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일을 통해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친서를 전달했다.친서에는 조선군 전출문제 외에도 남침문제가 언급돼 있었다.이에 대해 모택동은 『군사행동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답했다.시기적으로 스탈린보다 모택동이 먼저,더 적극적으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지지한 것이다.
  • “러 정부 이양문서의 「공백」메웠다/서울신문의 소 문서 발굴 의미

    ◎스탈린 역할 「부차적 아닌 주도」밝혀줘/「역사원형 찾아내기」두드러진 언론역할 지난해 6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옐친 대통령으로 부터 6·25남침전쟁에 관한 기록 문서들을 받아온 일이 있다.정부는 그것들을 모두 공개했다.우리의 현대사에서 우리 운명에 가장 결정적이며 가장 비극적인 작용을 했던 6·25전쟁의 원인에 대한 왈가왈부의 오래된 논쟁은 그 문서들에 의해 일단락을 지을 수 있었다.남침전쟁의 숨은 설계자로 지목되었던 구소련이 실제로 전쟁의 시작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를 지휘했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넘겨받은 문서가 6·25남침전쟁의 전모를 다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그렇겠지만 캐고 들면 들수록 더 의심나고 더 알고 싶은 대목이 줄줄이 떠오르게 마련인 것이다.특히 그때 러시아가 우리쪽에 넘겨준 문서들은 주로 그들 외무부 관련 문서들로서,그것도 그들이 적당히 골라서 넘겨 준 것이어서 세밀하게 파고들면 들수록 몇갈래의 관련 문서 또는 부속 문서의 열람의필요를 낳게 하는 것들이었다. 뿐만아니라 구소련이란 나라가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사실들은 당중앙위원회나 그 정치국에서 결정·재단되게 마련이어서 6·25전쟁의 본질에 접근하자면 아무래도 당문서의 발굴이 필수였다.소련공산당은 없어졌다해도 주요문서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모스크바의 한구석,구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보관 서고에 그것들은 있다. 뿐만 아니라 6·25란 전쟁에 관한 준비 및 진행상황이 군부 몰래 이루어질 수는 없다.어떤 무기의 어느 만큼의 수량이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어느 수준의 어느 만큼의 실제 병력이 북한군의 배후를 떠받치고 있었는가.또 미군이나 한국군 포로들의 어느 부분이 소련영토로 연행되었는가.6·25남침전쟁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명 또한 필수다.소련의 붉은 군대는 러시아 연방 군대로 바뀌었지만 붉은 군대 시절의 주요 문건들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모스크바의 교외,하루 거리의 조그마한 고을에 있는 군 문서보관 서고에 그것들은 있다. 소련이망하고 러시아로 바뀌자 많은 나라들이 지난 70년간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찾아나섰다.구소련의 외무부 문서,당문서,군부 문서들 속에서 자기 나라와 관련된 부분을 찾기위해 러시아 정부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한 것이다.이에 이르러 옐친은 하나의 꾀를 생각해 냈다.정부의 문서보관소들에 각국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서들을 골라 대통령부 문서보관소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93년중에 이 작업은 끝났다.그래서 오늘날 어느 나라든 소련과 관련된 역사를 복원하자면 크렘린궁의 대통령부 문서보관소와도 교섭을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작년에 옐친이 넘겨준 6·25문서가 기대에 차지 못한다.해서 실망한 일이 있다.그래서 러시아에 대해 당및 군의 문서도 공개하라고 소리 높이 요구한 일이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성질의 일이란 요구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호락호락 받아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다.필요한 쪽이 파고 들어가서 필요한 기록을 발굴해 내야 한다.이웃나라 일본은 5명의 전문가를 모스크바대사관에 상주시켜 필요한 역사의 원형을찾아내는 일을 전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신문이 이일을 맡고 나서 대통령부문서보관소와 당및 군의 문서보관소를 뒤져 벌써 9백50여건,총 3천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6·25관련 문서들을 발굴해냈다.대견스럽고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관점도 바로 섰고 취지도 바로 잡힌 취재였다.문제는 자료의 해석이다.미국측 자료나 우리측 자료및 북한측 자료와 등거리 동일 시야 속에서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미국이 6·25때 북한에서 노획한 방대한 양의 자료는 워싱턴의 공문서보관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신문이 발굴한 자료들은 요즘 지면을 통해 소상히 알려지고 있지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작년의 외무부 문서들이 6·25의 전쟁 책임에서 스탈린의 역할이 부차적이었다는 해석을 낳게 했었는데 비해,이번의 문서들은 그것이 스탈린에게 더큰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물론 연재가 끝나야 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겠으므로 앞으로의 연재에 큰 기대를 걸면서 서울신문의 일대 취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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