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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식량투명성 문제(사설)

    국제적십자연맹 사무국은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중지방침을 정했으며,내년 1월 이사회를 열어 이를 정식으로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세계 175개국 적십자사로 구성된 국제적십자사연맹 관계자들이 지난 11월 북한을 방문,지원식량 분배상황을 조사한 결과 식량이 주민들에게 분배되지 않고 군사용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국제적십자사연맹의 이번 결정은 그동안 여러차례 제기됐던 국제 구호식량의 군사전용 시비가 다시 재연됐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다만 북한의 식량분배 투명성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강조된다. 그동안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받은 식량이나 구호품을 군사용으로 전용했다는 의혹을 계속 받아 왔다.그리고 지난 3월에는 구호품의 일부를 전용·판매한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문을 세계식량계획(WFP)에 발송하기도 했다. 북한은 지난 3년간 국제사회로부터 지원받은 3억달러 이상의 구호식량을 군사용이나 특권층의 부당이익으로 전용한 것으로 밝혀졌다.북한이국제사회에 식량난을 호소하며 구걸행각을 벌여 지원받은 구호식량이 군사용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더욱이 국제사회가 아사지경의 북한동포들을 위해 지원한 식량의 상당부분을 북한당국이 군대를 키우고 유지하는데 썼다는 것은 순수한 인도주의 정신을 악용한 것이다.결국 국제사회는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군의 전투력을 강화시켜준 꼴이 된 셈이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동포애적 측면에서 북한에 지원한 식량마저 군사용으로 전용됐다면 이는 민족적 배신행위가 아닐 수 없다.물론 북한이 국제 구호식량을 군사용으로 전용하고 있는 배경은 군대를 정권유지의 골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당장 주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군에 대한 우선적 보장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그러나 이는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재촉할 뿐이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인도주의에 입각해 지원한 식량은 굶주리는 주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돼야 한다.만약 이같은 지원식량에 대한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의 추가지원은 물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타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북한이 진정으로 주민들의 배고픔을 덜어줄 생각이라면 국제사회가 인도적으로 지원한 식량만은 전량 주민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 제2건국위 총점검­개혁과제 주요 내용

    ◎의식·생활·제도 개혁 ‘방향키’ 잡았다/대형예산사업·주요정책 결정·평가 시민참여 제도화/100만 일자리 창출·인권 살아있는 나라 만들기 주력 ‘제2의 건국’운동의 핵심과제는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분야별 7대 국정과제다.제2건국위는 이들 과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과제별 작업단(Task Force)을 구성해 본격적인 작업을 진행해왔다. 다음은 제2건국위가 이달 말 실천계획을 최종 확정하기에 앞서 24일 밝힌 7대 분야의 21개 기획과제 추진방향 가운데 눈길을 끄는 내용들이다. ●정부혁신 대형예산사업,주요 정책결정 및 평가에 시민참여를 제도화한다. 공공부문의 경쟁을 확대하고 경영마인드를 높이기 위해 공무원 충원제도와 직급제 개편을 추진한다. ●지역갈등 극복 지역차별금지를 입법화하는 등 차별금지를 제도화한다.지역감정 선동을 처벌하는 입법을 통해 지역감정의 정치적 동원을 억제한다. ●경제살리기(100만 일자리 창출) 주요 업종·분야별로 창업을 촉진하고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규제완화 및 창업 인센티브를 발굴한다.청년 실업자의 해외취업을 지원하고,‘1실험실 1사 창업운동’‘엔젤투자운동’‘코스닥주식 갖기운동’을 전개한다. ●경쟁환경의 조성 영업범위·지역 등과 관련한 경쟁 제한적 인허가제도를 개선한다.공정위의 전문성을 높이고 역할을 강화한다. ●인권국가의 확립 인권법을 제정하고 국민인권위원회를 설치한다.구속수사요건을 엄격히 적용하고,불법감청을 억제한다. ●세계시민 교육과 문화한국 건설 외국인을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증진한다.외국인의 국내투자와 부동산 취득,국제결혼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외국인이 살고 싶은 한국만들기’ 캠페인을 전개한다. ●과학기술과 미디어산업의 진흥·개혁 과학기술 안보체계를 강화한다.방송등 미디어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노사간 협력과 신뢰구축 노사분쟁에 공정한 법 집행으로 대응한다.종업원지주제를 발전적으로 개선하는 등 근로자 참여제도를 확충한다. ●남북간 화해환경의 조성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북한의 실상 알리기’를 통해 이질감을 해소한다.북한의 국제사회 진출 여건을 조성하고 ‘한민족 네트워크 공동체’를 통한 대북 협력을 촉진한다. ◎각 부처 어떤일 하나/차관 총괄 ‘추진반 구성’ 99개 실천과제 제출/행자부­민간 인사교류 확대/노동부­노동시장의 유연화/재경부­불로소득 과세강화 정부 각 부처의 ‘제2의 건국’운동 참여는 정부부터 자기개혁을 선행하는 것이 국민생활과 밀접한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위원회측은 설명한다.각 부처는 현재 차관을 총괄책임관으로 ‘추진반’을 구성하고,이미 99개 실천과제를 제2건국위에 제출해 놓았다.다음은 부처가 추진할 주요 실천과제들이다. ●입법과정에 국민참여확대 입법예고 매체를 다양화하는 등 예고방식을 개선하고,입법의견은 반영결과를 반드시 통보하고,우수한 입법의견을 낸 국민은 포상하는 제도를 신설한다.(법제처) ●공직사회의 경쟁력 강화 정부와 민간부문의 인사교류를 확대하고,고등고시제도를 바꾼다.(기획위·행자부) ●효율성·투명성을 높이는 재정개혁 총괄경상경비 및 효율성배당제도,산출예산제도 및 분산조달제도,복식부기,발생주의회계제도를 도입한다.(기획위) ●조달기능으로 수출·중소기업 지원 중소기업만 참여하는 구매제도를 확대한다.중소건설업체의 입찰규모를 확대하고 공동계약제도를 확충한다.(조달청) ●노동시장 유연화 추진 퇴직금제도와 근로시간,휴가제도의 개선방안을 마련하고,성과급제를 정착시키는 등 임금제도를 개선한다.(노동부) ●수출입 및 외국인 투자에 대한 관세행정 지원 서류없는 관세환급 및 수입통관체제를 구축하고,관세자유지역제도를 도입한다.(관세청) ●공평한 세정 강화 음성·불로소득과 변칙 상속·증여에 대한 과세를 강화한다.봉급생활자와 사업소득자간 세부담의 형평을 도모한다.(재경부) ●식·의약품의 국제화 식품 및 첨가물,기구 및 용기,의료용구의 기준과 규격을 국제화한다.(식의약청) ●실력이 우선되는 사회조성 학습과정과 평가인정기관의 내실화를 통해 학점은행제를 활성화한다.직업능력인정제의 도입을 추진하고,문화·예술 분야의 문하생 학력인증제를 도입한다.(교육부) ●남북기상협력의 내실화 서울·평양 사이 기상전용 통신회선과 한반도 중·북부 해역에서의 실시간 기상관측망을 구축한다.(기상청) ◎지방조직은/자치단체장 자문에 역점둔다 제2건국위의 지방조직은 중앙조직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다.시·도와 시·군·구에는 별도의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동안 참여가 부진했던 영남지역에서도 95% 이상의 자치단체가 지방위원회의 법적근거가 되는 조례제정작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각 시·도청과 시·군·구청은 부단체장을 반장으로 하는 추진반을 이미 구성해 놓은 상태다. 제2건국위측은 또 지방조직이 중앙조직의 계선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2건국위의 한 관계자는 “부정부패추방이 전국 공통의 과제라면 관광도시는 지역실정에 맞게 관광업체와 관청과의 유착을 막는 것이 최대의 과제일 수 있는 만큼 지방조직은 필요한 것”이라면서 “지방위원회는 대통령의 자문기구가 아니라 각각 당적이 다른 자치단체장의 자문기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방위원회가 현 정부의 정치조직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제안 어떤것 있나/“광복절 한라에서 백두까지 인간사슬 만들자”/한달새 436건 접수 ‘2002년 8월15일 광복절에 200만명이 남북한을 잇는 인간사슬을 만들어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연결하는 한민족 평화축제를 열자’‘영아 유기를 막기위해 병원에서 출산과 동시에 출생신고 업무를 자동처리하도록 하자’ 제2의 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에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국민들의 제2건국 아이디어 일부다. 제2건국위는 국민들이 생활현장에서 느끼는 불편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11월부터 각종 아이디어를 받고 있다.지금까지 모두 436건의 제안이 접수됐다. 시민 朴대일씨는 법원 등에서 민원서류를 접수시킬 때,은행처럼 순번표를 활용하자고 제안했다.급행료 등 법원직원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야 국회의원 등 사회저명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가홍보 CF를 만들어 국민사기를 높이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있었다.짓다가 중단된 아파트 등 대형건물의 건물주,공사책임자를 찾아 정부나 지자체가 공사를 재개토록 해 도시미관을 개선하고 범죄예방도 도모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아파트 입구에 제2건국 상징이 있는 신문수거대를 제작,폐지도 수집하고 외화절약 및 제2건국 운동을 홍보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제시됐다. 덕수궁 안에 있는 세종대왕상을 세종로에 옮겨 ‘세종로’라는 거리이름에 맞게 하고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 두면 문무상징의 의미도 높일 수 있다는 제안도 있었다. 제2건국위는 접수된 아이디어를 매달 심사해 위원회에서 처리할지,각 부처에서 처리할지 여부를 결정한다.제안자에게는 2,000원짜리 전화카드가 기념품으로 주어지고 내년 초에는 우수제안자를 뽑아 대통령 표창 등을 줄 계획이다. 제안은 전화 (02)720­0209 또는 팩스 (02)3703­2969를 이용하면 된다.E­메일은 j209@reko.go.kr. ◎정치적 논란은/민·관 서로 견제하며 개혁 ‘채찍질’/‘대통령 자문’본업 명확… 추진력 얻어/활동 성격 둘러싼 정치적 공방 주춤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가 그 활동 목표와 성격을 둘러싼 정치공방 속에서도 하루하루 추진력을 얻어가고 있다.제2건국위는 최근 대통령에 대한 ‘자문기구’라고 성격 규정을 명확히 하면서 운신이 보다 자유스러워진 것 같다.또 대통령이 제2의 건국을 정치개혁과 함께 내년도 2대 국정과제로 손꼽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활동에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제2건국위는 23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21개 개혁과제를 확정하고 내년도 중점과제 및 실천 계획을 의결했다.건국위는 우선 활동의 목표에 의식·생활개혁과 함께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제도 개혁도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건국위 관계자는 “자문기구는 아무런 제약없이 모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어야 제 역할을 한다”면서 “특히 의식과 생활의 개혁이 구체화되려면 제도적 개혁이 반드시 앞서거나 뒤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감사원장 자문기구인 정방지대책위원회도 93년 이후 사회 전 분야의 부패 실태 조사와 개선책 제시는 물론 감사원의 조직 개편 문제까지도 건의해왔다는 것이 건국위측의 설명이다. 제2건국위가 건의할 개혁의 내용을 金대통령이 수용하느냐는 또다른 문제다.그러나 제2건국위는 갖고 있는 역량껏 국정전반의 개혁에 대한 연구와 제안을 하는 것이 자문위로서의 역할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건국위가 발표한 개혁과제에는 그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행정조직 개편,공정거래위원회 역할 조정 등 정부혁신 분야가 그대로 포함돼 있다. 공무원 충원 제도와 직급제 개편,부처·지역간 인사교류 확대,정부 기관 민영화 등의 핵심 사안을 피해나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제2건국위는 또 야당측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李康來 정무수석 등 청와대와 정부 인사의 참여와 지방조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모든 운동에는 중심적인 추진체가 필요하며,제2건국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청와대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제2건국위를 민관(民官)합동기구로 추진하는 것은 ‘중이 제 머리 못깎는’ 우리 사회의 풍토와도 연관돼 있다고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정부가 정부를,민간이 민간을 스스로 개혁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관을 개혁하려면 민의 힘이,민을 개혁하려면 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서로가 견제하면서도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특히 제2건국위가 내년도 개혁과제로 선정한 정부 혁신 과정에는 공무원들의 적지 않은 반발이 예상된다.따라서 일단 내년에는 민간의 힘을 빌어 정부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이 제2건국위 핵심의 복안인 것같다. 물론 앞으로는 제2건국위 기획단장을 민간인으로 임명하거나 민·관 공동단장·부단장제를 도입하는 등 조직개편 문제를 검토해나갈 방침이다. ◎국회통과 법안요지/해외이주 결격사유 완화·알선업 등록제로/청소년 보호범위 확대·유해행위 처벌 강화/지역예비군 대원 거주지 신고의무 없애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과 동의안은 다음과 같다. ●지방세법(개정) 내년 1월부터 비영업용 승용자동차의 등록세율을 채권금액의 3%에서 0.2%로 인하.그외의 자동차에 대해서는 비영업용인 경우 2%에서 0.2%로,영업용인 경우는 1%에서 0.2%로 하향 조정하고 배기량 2000㏄ 초과 비영업용 승용자동차의 자동차세를 ㏄당 220원으로 단일화.1가구 2차량에 대한 취득세·등록세의 중과세제도를 폐지. ●청소년보호법(개정) 청소년보호법에 의한 보호대상을 18세 미만에서 19세 미만으로 확대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청소년에게 신체적 접촉 또는 은밀한 부분의 노출 등 성적 접촉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청소년에게 구걸을 시키는 행위,혼숙을 하게 하는 행위 등 9개 청소년유해행위를 금지하고 처벌규정을 새로 규정. ●해외이주법(개정) 해외이주의 결격사유를 대폭 완화해 금치산자·한정치산자·정신지체인 및 전염질환자 등을 포함한 일반국민이 보다 자유롭게 해외이주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해외이주알선업의 허가제를 등록제로 전환하고 수수료 상한선 폐지.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개정) 원사업자가 발주자로부터 위탁과 관련해 결제받은 현금 비율 이상으로 수급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을 지급토록 의무화하고어음으로 결제하는 경우엔 발주자로부터 원사업자가 교부받은 어음의 결제기간을 초과하는 어음을 교부할 수 없도록 규정. ●국군조직법(개정)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에 대한 지휘·감독권한을 지금까지는 육군참모총장이 행사했으나 그 권한의 일부를 해병대사령관이 행사할 수 있도록 함. ●군인사법(개정) 장관급 장교의 계급정년을 1년 이내의 기간에 한해 각 군별로 단축 또는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영관급 장교는 2년 이내의 기간에 한해 정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함. ●군무원인사법(개정) 3급 이상 군무원과 6급,7급 일반군무원의 정년을 1년씩 단축하고 4급 이하 일반군무원에 대한 정년연장제도를 폐지. ●전자서명법(제정) 공인인증기관이 인증한 전자서명은 법령이 정하는 서명 또는 기명날인으로 봄. ●향토예비군설치법(개정) 향토예비군조직 대상자의 예비군대원 신고제도와 지역예비군대원의 거주지 이동 및 병적사항 변동시 신고의무를 폐지. ●국군포로대우 등에 관한 법(제정) 국방장관은 등록된 포로로서 군인연금법에 의한 퇴역연금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에 대해 억류기간 중의 행적에 따라 등급을 정해 정착금을 지급하도록 함. ●공공차관도입계획에 대한 동의안 중소기업은행과 한국전력,한국가스공사가 일본수출입은행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하는 미화 23억5,000만달러에 대해 정부가 지급 보증. ●공공차관도입계획 변경에 대한 동의안 아시아개발은행 금융부문 프로그램차관 40억달러 중 이미 인출돼 당초 국회동의에 따라 한국산업은행에 전대된 30억달러를 제외하고 향후 인출될 10억달러에 대한 전대차주를 한국산업은행에서 예금보험공사 및 성업공사로 변경. ●1999년도 미국의 수출신용공여(GSM)에 따라 발생하는 국내은행의 대외채무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미국 상품신용공사의 수출신용공여프로그램에 의해 발생하는 15억달러 이내의 대외채무에 대해 국가가 지급을 보증. ●기타 통과법안 ▲전파법 ▲낚시어선업법 ▲항만법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 ▲한국국방연구원법 ▲전산망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 ▲잠업법폐지법안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자본유치촉진법 ▲한국보건의료산업진흥원법 ▲책임운영기관의 설치 운영에 관한 법 ▲정보통신공사업법 ▲정보화촉진기본법 ▲전자서명법 ▲수산물검사법 ▲연안관리법 ▲공유수면 관리법 ▲종자산업법 ▲농수산물품질관리법 ▲외무공무원법 ▲해난심판법 ▲해양개발기본법 ▲선주상호보험조합법 ▲유류오염손해배상보장법 ▲항로표지법 ▲99년 비료계정의 한국은행 차입원리금 상환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99년도 미국의 수출신용공여(GSM)에 따라 발생하는 국내은행의 대외채무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 또 잠수정 침투라니(사설)

    북한의 반잠수정이 또 남해안에 침투하려다 우리 군에 의해 격침됐다. 잠수복차림의 특수공작요원 시신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간첩을 침투시키거나 호송하기위한 간첩선임이 명백하다. 지난 6월 속초 앞바다에서 그물에 걸려 잡혔던 것을 비롯,지난 달 강화 앞바다 침투 기도에 이은 잇단 도발이다. 우리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의해 남북간 교류·협력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은 변함없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바다위로는 금강산 관광선이 오가고 바다밑으로는 간첩선이 내려오는 상황이라 하겠다. 우리 정부의 일관된 대북포용정책으로 그동안 남북간 교류·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금강산관광객을 맞는태도나 교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등 북한에도 많은 변화가 보이고 있다. 올들어 지난 달말까지 경제 종교 문화예술등 각 분야에서 2,600여명이 방북했다. 지난 89년부터 지난 해까지 9년동안의 방북 인원이 모두 2,400여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증가라 할 수 있겠다. 제3국에서 북한주민을 만나는경우나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상봉등도 크게 늘고있다. 얼마전에는 남한의 이산가족이 민간차원에서 북한에 들어가 가족과 만나기도 했다. 금강산관광도 시작된지 한달만에 5,800여명이 금강산을 다녀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북한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金正日 체제출범이후 ‘강성대국’을 부르짖으며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전투력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금창리 핵의혹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문제이후 미국과의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며 연일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전쟁분위기 조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서해에 이어 남해안까지 잠수정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극심한 경제난을 해결하기위해서 외부지원과 협력이 절실한 한편 내부적으로는 체제결속이 필요한 북한의 딱한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을 도발행위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정말 안타깝다. 교류·협력의 확대와 변화만이 북한을 살리는 길이다. 긴장과 불신을 조장하는 도발행위들은 중단해야 한다. 침투하는 경비정을 해안초소에서 재빨리 발견,기민한 입체작전으로 격침한 우리 군이 믿음직스럽다. 잇단 사고로 떨어진 사기를 되찾아 신뢰받는 국민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대북포용정책은 굳건한 안보태세가 뒷받침돼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 의문사 장군의 아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대한광장)

    “장군아들 의문사도 묻어둔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오죽 하겠소”.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장군은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한마디로 피력했다. 예비역 중장,그것도 1997년 12월에 예편한 장군이 자신의 아들 의문사를 밝히는데 그토록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다. 아들이 자살했다는 군의 공식발표에 의문을 품고 아내와 함께 사망한 아들의 소속 전역 부대원을 수십차례 찾아다니며 눈물로 호소한 끝에 겨우 토로하게 된 진실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한국계 미국인 법의학자까지 동원하여 자살이 불가능함을 증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국회국방위산하에 이 사건에 관한 진상파악소위원회까지 구성되게 하였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국방부가 특별조사단을 꾸려 이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겠다는 뜻을 밝히도록 만들었겠는가. ○사인 의혹에도 모두 자살처리 자식을 군에 보낸 뒤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통고받고도 의문투성이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채 죽음같은 세월을 살아온부모들이 2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김두황 이병,한영현 이병,최온순 이병,정성희 일병,이윤성 일병은 지난 80년대 초반 운동권학생에게 프락치활동을 강요한 이른바 ‘녹화사업’의 희생자들이다. 김용권 상병,박상구 하사,정연관 상병,우인수 일병,박종근 이병,박성은 방위병도 바로 군부대내에서 의문사한 사람들이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제대로 두지 못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관계기관을 찾아다니고 같은 운명에 처한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농성하는 것밖에 없었다. 군부대에만 의문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의문사도 적지않다. 1985년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우종원 서울대생,1986년 부산 송도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된 서울대 김성수군,1989년 거문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군,1990년 교통사고 피살체로 발견된 속초 동우전문대 학생회장 김용갑군 등도 의문사 리스트에 올라 있다. 정경석,문용섭,이재호,박창수씨 등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케이스들이다. 이들은 외관상 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자살로 처리되고 말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신치하의 최종길교수 사건,장준하선생 사건등도 여전히 의혹 속에 싸여있다. 이 모든 사건들은 이미 공소시효나 소멸시효가 지나고 말았기 때문에 민사·형사적 배상과 처벌이 모두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인도적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이 엄연한 국제관습법이라고 국제법학자들이 말하고 있건만 우리나라 판·검사들은 이런 이론에는 귀머거리일 뿐이다. 유족들이 바라는 건 단지 진실뿐이다. ○공소시효 지나 처벌 불능 상태 지난 12월10일,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식은 이나라에서도 화려하게 벌어졌다. 대통령은 “인권은 그 어떠한 명분과 구실로도 제약받거나 유보될 수 없는 천부의 권리”임을 힘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이 의문사 진상규명은 아무런 힘도 없는,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인권위원회가 담당하는 것으로 당정이 협의하였다고 한다. 인천에는 ‘인권의 길’이 만들어졌고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리는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의문사의 비밀을 여는 진실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한해가 또 가고 있다.
  • 친일의 군상:17/선우순­선우갑 형제(정직한 역사 되찾기)

    ◎직업밀정­고등계 형사/상해 臨政의 ‘처단대상 1호’/‘인텔리밀정’의 전형/구한말 한때 민족진영서 활동/日 유학후 日帝침략 선전 앞장/附日 대가로 중추원참의 지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한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는 한국 관련 자료가 도처에 산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외무성사료관 등 공공기관을 비롯해 학습원대학의 동양문화센터와 도쿄(東京)·와세다대학의 도서관과 기타 역사적 인물들의 개인기념관에 산재한 자료 등. 여기에는 공문서를 비롯해 일제 당시 실력자들간에 주고받은 문건,편지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한국에서는 전혀 구경할 수 없는 자료들도 상당수 있다. 친일파에 관한 자료 역시 상당수 포함돼 있다. 수 년전 기자는 자료수집차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기자는 ‘사이토(齋藤實)문서’(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재임시절에 수집한 문서)를 검색하다가 3·1만세의거 직후 조선인 밀정이 작성한 정세보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朝鮮ノ最近ト對應策(조선의 최근과 대응책)’. 작성자는 ‘조선평양(朝鮮平壤)’출신의 ‘선우순(鮮于순)’이었다. 총 40쪽 규모의 이 정세보고서는 3·1의거 직후 조선내 각 지역·종교세력간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임시·영구대책을 상세히 언급한 것으로 전적으로 총독부 당국을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밀정 중에서도 ‘먹물’을 먹은 고급밀정의 ‘작품’인 셈이다. 선우순(鮮于순,1891∼1933).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하 몇 안되는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시말해 그는 직업이 ‘친일’이고 그걸로 일생을 먹고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동생도 그와 마찬가지로 친일 밀정노릇을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두 형제가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으니 ‘형제는 용감했다’고나 할까. 선우순은 평양 태생이다. 1930년 당시 그가 중추원참의 시절에는 경성(京城,현 서울)에 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해당주소의 호적을 확인한 결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선독립불능론 강연 그의 인생의 말로는 친일파로 막을 내렸지만 초창기에는 그도 한 때 민족진영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서북학회월보’에 그가 쓴 글이 실려있기도 하고 1931년에 출간된 ‘조선신사록(朝鮮紳士錄)’에는 그가 1907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자로 입사해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다른 자료들에서 크로스체크 된 바는 없지만 크게 의심할만한 내용도 아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계기로 친일파가 되었을까? 그가 친일대열로 전향한 것은 ‘대한매일신보’를 퇴사한 직후 일본인이 평양에서 발행하던 ‘평양신문(平壤新聞)’에 입사한 것이 한 계기가 된 듯하다. 1910년 11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12월 교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대학 기독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대학은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전신인 일본기독전도회사의 의장인 니지마죠(新島襄)가 설립한 학교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조선에 진출하여 종교침략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일본당국과 재벌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얻어 조선에서 대대적인 전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11년 7월 평양에 평양기성(箕城)교회를 세웠다. 선우순은 바로 이 교회를 다니면서 일본인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을 통해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한편 1915년 도지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양기성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일본인들과 함께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면서 조선인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이 단체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해 9월 19일 중추원 회의장에서 개최된 지방유력자 모임에 참석해서는 ‘조선독립 불능론’을 강연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그는 평안남도 지사 시노다(條田治策)의 사주·후원으로 1920년 10월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설,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평안도 일대의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단체로써 평양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기관지로 ‘대동신보(대동신보)’를 창간,사장에 취임하였으며 평양에서는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매체들은 일선융화(日鮮融和)·공존공영(共存共榮)을 내걸고 선전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마음속에 품고있던 식민정책을 그가 나서서 대신 나팔을 불어준 셈이다. ○日帝의 대변자 자임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이들(조선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공통(共通)하고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이므로 내선인(內鮮人,일본인과 한국인)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즈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웅비하는 방법…”(‘조선및 조선민족’)이라며 일제의 충실한 대변자역을 자임하였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1920년 11월 평양부 협의회원(현 시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중추원 참의(주임관대우)에 임명되었는데 1933년까지 13년간 5회 연속 중임하였다. 일개 전도사로 출발해 이 정도 대열에 오른 경우로는 그가 유일하다. 당시 그의 친일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가 조선총독을 면담한 횟수를 보면 짐작이 간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1919년 8월부터 1926년 사이에 그가 사이토 총독을 면담한 횟수는 무려 119회나 된다(姜東鎭,‘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평균해서 22일마다 1회꼴인데 이 수치는 같은 기간에 매국노 宋秉畯이 사이토를 면담한 횟수(58회)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다. 당시 그는 고급관료나 친일귀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중추원 참의 70명 가운데서도 66번째 차순이었지만 밤낮을 가리지않고 총독의 집무실과 관저를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의 친일의 정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의 명성(?)은 상해 임시정부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당시 임정에서는 일본인 고위관료·매국적(賊)·고등밀정·친일부호·총독부관리·독립군 사칭 불량배·모반자 등을 ‘칠가살’(七可殺,처단해야할 일곱 부류의 집단)로 규정,처단대상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매국적’의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그와 함께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였던 閔元植이 일본 도쿄에서 민족청년 梁槿煥에게 처단된 것은 임정의 이같은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생도 악질형사의 표본 선우순의 동생은 선우갑(鮮于甲,생몰미상) 역시 그 형에 못지않은 악질적인 친일분자였다. 그는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유학생 감시역을 하였는데 2·8독립선언 당시 현장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중심인물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체포하게 한 자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후에는 기자직함을 가지고 미국에 파견돼 일본을 선전하였으며 재미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형제가 나란히 일제의 충견(忠犬)으로 활동한 셈이다. 같은 선우(鮮于) 성(姓)을 가진 사람중에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을 한 사례도 있다. 선우혁(鮮于赫)­선우훈(鮮于燻) 형제가 그들로 모두 임정에 관여하였다. 이들 두 형제는 모두 평안도 출신으로 동시대를 살다가 갔다. 민족의 수난기에 어느 형제가 올바른 삶을 살았는지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천년이 가도 퇴색되지 않을 민족사의 한 페이지에 흑(黑)과 백(白)으로. ◎사이토 조선총독 누가 몇번 만났나/밀정­왕족­친일관료順 면담 많아/선우순 7년간 119회로 최다/정보제공 대가로 거액 받아 일제시대에 조선인 중에서 총독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료나 군 수뇌부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더러 위무(慰撫)나 회유 차원에서 총독이 조선인 유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조선인과 자주 면회를 가진 사람은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사이토는 3·1만세 의거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총독에 부임한 이래 1919년 8월부터 1926년말까지 총 839명의 조선인을 만난 것으로 나와있다.(姜東鎭,‘일제의 한국 침략정책사’) 이들 가운데 사이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사 10명을 꼽아보면, 鮮于순(119회),李軫鎬(86회),李堈公(85회),李王(순종,75회),韓相龍(73회),閔興植(59회),宋秉畯(58회),申錫麟(53회),方台榮(51회),朴泳孝(47회) 등이다. 왕족인 이강공이나 이왕(순종)의 경우 총독의 문안인사나 공식행사장에서의 접견 등이 감안된 것이다. 그외 나머지 인사들들은 모두 친일관료(이진호,총독부 학무국장)나 조선귀족(송병준·박영효)·친일자본가(한상룡)등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우순·민흥식·방태영은 ‘직업적 친일분자’에 속한다. 이들은 사회적 직위에 관계없이 총독을 수시로 만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댓가로 기밀비조로 금전을 받곤 했다.
  • 모든 군 의문사 철저규명을(사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소대장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계기로 80년대 이후 군(軍)내에서 일어난 모든 의문사도 재조사키로 한 것은 당연하고 잘한 결정이다. 金중위의 경우뿐만 아니라 그동안 군이 밝힌 사망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유가족들이 많은데다 자식을 군복무중 잃은 유가족에게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려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군은 한창 혈기가 왕성한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특수집단이다. 게다가 개인화기와 폭발물등 위험한 장비들을 가지고 각종 훈련과 작전을 해야하는 군에서 갖가지 사고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애통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죽음의 원인이 석연치 않을때 유가족들의 안타까움과 억울함은 대단할 것이다.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사의 경우 부대 밖에서는 구체적인 사고 내용이나 원인을 알 길이 없다. 군에서 통보해주는 대로 믿을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사고 경위나 사망원인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의 사망사고가 적지않아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이나 재조사를 탄원하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양쪽 가슴과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숨진 병사나 머리의 함몰상으로 과다한 출혈때문에 숨진 하사관을 자살이라고 하는 군의 처리를 믿을 유가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육군 중장출신의 金중위 아버지가 30여년 동안 몸담았던 군을 상대로 그토록 애타게 타살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끝내 외면당했을 정도이니 다른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군에 따르면 매년 각종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400여명에 이르며 이들 대부분이 자살로 처리되고 있다. 자살의 경우 유가족들은 대개 사고 경위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견디기 어려운데 재조사를 진정하거나 탄원하려고 몇년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고생까지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군 의문사에 대한 이번 재조사로 유가족들의 의혹이 명백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군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자식들을 군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사의 조사에는 민간 전문가와 유가족대표를 참여시켜 한점 의혹이 없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기 바란다. 지금처럼 사고조사를 군에게만 맡긴다면 문책이나 복잡해질 뒤처리를 피하기 위해 손쉽게 적당히 처리하는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軍 의문사’ 모두 20여건/사례와 문제점

    ◎유족들 재수사 요구해도 묵살 예사/지금까지 대부분 자살·사고사 처리 자살 타살의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면서 사인에 관한 진실이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죽음인 의문사는 특히 군부대 내에서 많이 발생해왔다. 군의 본질인 구성원간의 수직적 관계가 잘못되어 ‘석연치 않은 죽음’을 싹틔운 토양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재 정권 시기일수록 이 토양은 비옥해져 의문사가 많았다.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등에 따르면 의문사는 총 40여건에 달하며 이중 군부대 의문사가 20여건으로 절반이 된다. 특히 유가협은 군사독재정권인 5공과 6공 초기인 80년부터 88년 사이에 무려 18건의 군 의문사가 있었다고 밝혔다. 국정감사가 부활된 지난 88년 10월 국방부는 이제까지 군대에서 안전사고로 3,723명이,군기사고로 2,670명이 사망했으며 군기사고중 2,254명이 자살,나머지는 폭행으로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유가협이 제기한 군 의문사는 모두 성격결함,환경비관 등의 염세성 자살이거나 사고사인 것으로 처리되었다. 즉군에는 한건의 의문사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군 의문사 관련 가족들은 군부대가 자식들의 죽음을 연락하는 데는 크게 지체하지 않았지만 부대에 도착해도 상황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주기는 커녕 돌연사태에 경황이 없는 틈을 타 화장동의서를 받는 데 급급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유가협이 제기하고 있는 군 의문사는 5공 초기 시국관련 문제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하고 강제순화 교육을 실시한 ‘녹화사업’에서 처음 발생했다. 강제징집된 6명의 학생들이 프락치 역을 강요받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83년말부터 학원가에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5공은 국방장관의 국회보고를 통해 이들의 죽음이 모두 염세성 자살이거나 군기사고라며 의문사 의혹을 부인했다. 84년에 사망한 허원근의 경우 아버지가 앞가슴에서 어깨뼈를 관통하여 갈비뼈가 어깨 등뼈를 뚫고 나왔는데 어떻게 팔을 움직여 다시 총을 잡아 제 2, 제3의 총알을 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부검의로 나온 군의는 “총을 일곱발이나 맞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87년에 사망한 이이동의 경우 아버지가 지문채취와 부검 미실시,사체검안 및 현장검증 등에서의 의문사항을 들며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또 87년 박상구의 의문사에서는 농약을 먹고 병원에서 죽었다는 군부대의 설명과 달리 부대내에서 타살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측 목 부근에 칼 자국이 있어 어머니가 손가락을 넣어보니 끝이 닿지 않았으며 목이 졸린 흔적이 역력했다.
  • 프랑스 액션영화로의 초대/영상자료원 ‘그림자군대’ 등 6편 상영

    프랑스 액션 영화 6편이 14∼19일 예술의 전당 예술자료관 1층의 한국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상영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예술영화로만 각인된 프랑스 영화의 또 다른 일면을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프랑스 대사관과 공동으로 ‘프랑스 액션 영화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밝혔다. 상영작은 ●14일 식초 닭요리,불행의 연속 ●15일 막스와 고철상,라스네르 ●16일 그림자 군대,대청소 ??17일 불행의 연속,식초닭요리 ●18일 라스네르,막스와 고철상 ●19일 대청소,그림자 군대 등이다. 상영시간은 오후 3,6시이고 토요일인 19일만 오후 1시와 3시30분이다.입장료는 1,000원.문의 (02)521­3147
  • 시일야방성대곡 전재(대한매일 秘史:8)

    ◎‘시일야…’ 영문 번역 호외 발행/을사조약 전말도 폭로… 日 침략 서방에 알려/황성·제국신문 정간 횡포/일제 언론 탄압 날로 기승/장지연 구속·신문과정 보도/대한매일 항일 강도 더해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가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1904년 7월20일에 공포된 이 ‘훈령’은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함은 물론 “신문은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하도록”(제2항) 하였다.8월20일에는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의 대표를 불러 검열을 통보하였고,10월9일에는 ‘군정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을 시달하여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했다.바로 이튿날인 10월10일 헌병사령부는 뎨국신문에 무기정간 명령을 내렸다.이는 한국언론사상 처음 내려진 강제 정간이었고,일본군이 한국 신문에 정간을 명령한 첫 탄압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8일에는 한국주둔 사령관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고시군령(告示軍令)’19개항을 공포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집회 결사 신문 잡지 광고 등 언론에 관한 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도록 돼있었다.또한 군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사형 구금 추방 과료(過料) 또는 태형에 처하도록 하는 엄격한 벌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지연은 이와같이 엄중한 일본의 군령을 어기고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을 검열받지 않은 채 아침 일찍 배포한 다음에 일본 순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침 5시가 되자 일본 순시(巡視)와 순사가 신문사로 와서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따라서 이제 그에 대한 후속기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알리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11월21일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찬양했다.같은 날짜에 ‘사장피착(社長被捉)’이라는 기사를 실어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하였다. 22일자에 실린 논설 ‘위재한일관계(危哉韓日關係)’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케 하며 학무를 감축하여 교육이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였다.을사조약의 체결도 황제를 비롯,정부관리들과 국민이 모두 반대하자 일본은 병사를 궁궐에 끌고 들어와서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논평했다.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인구가 2천만인데 2천만이 모두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를 가지고 국민을 모두 도륙할 것인가.이날부터 대한매일은 정간 당한 황성신문에 실렸던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3회에 걸쳐 다시 전재했다. 23일자에는 장지연이 경무청에 구속된 후 일인 경무고문의 심문에 의연히 맞서서 항변한 내용을 게재하였다.일인 경무고문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받지 않고 멋대로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는가.”라고 심문하니 장지연은 “이른바 치안방해는 내가 알 바 아니다.대저 나라가 있은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는 것인데 지금 나라가 없으니 치안을 논할 수 있겠는가.내가 붓을 잡은지 7∼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국가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이에 경무고문이 할 말을 잃었다고 보도했다.(1905.11.23,‘사장항변’) 대한매일은 25일자 논설 ‘황성긍린(皇城矜隣)’에서도 정간 당한 황성신문을 속간시키라고 촉구하였고,26일자에는 장지연은 무죄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했다.법률에 따르면 장지연을 24시간 이내에 평리원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되어있는 데도 이와같이 여러날 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905.11.26,‘시하율법(是何法律)’,또 1906.1.12,‘탄(歎 ),황성구폐(皇城久閉)’에서도 황성신문의 복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11월27일자에 순한문과 영문으로 된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이 호외는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고 이등박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전말도 실었다. 이렇게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사람들과 서방 여러나라에 알렸다.
  • 프로레슬러 출신 미네소타 주지사 벤추라(뉴스 인사이드)

    ◎허위 군경력으로 곤욕/“베트남전 특수공작요원 참전 무공훈장 받았다” 자랑/전 주정부 1등서기관 “새빨간 거짓말쟁이” 공개 비난/군기록은 보급계요원… 반론거리 없어 논란 계속될듯 미국의 ‘11월3일 중간선거’에서 일약 미네소타주지사로 당선,세계의 시선을 모았던 제시 벤추라가 다시한번 지구촌의 관심을 끌고 있다. 프로레슬러 출신인 벤추라는 정치경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 양당의 막강 경쟁자들을 물리쳐 중간선거 최대의 화제가 됐던 인물.당시 CNN등 미국 언론들이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경악할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의 주간지 글로브는 최신호에서 프로레슬러 외에 영화 ‘프레덱터’와 ‘배트맨과 로빈’ 등에도 출연했던 벤추라가 주지사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군대경력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전했다. 중간선거때 벤추라는 자신의 터프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로 혁혁한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떠벌렸다.다른 후보들과 달리 자랑삼을 경력이 없었던 그가 베트남전의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묘사했던 것. 비장의 ‘출세 무기’가 시비거리가 된 것은 최근.미네소타주 정부에서 1등서기관으로 일했던 딕 프란슨(69)이 이같은 그의 군 경력은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이라고 공개 비난하면서 시작됐다.벤추라의 주지사 입성으로 퇴출까지 당하자 프란슨은 아예 벤추라를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네이비실(해군 특수부대) 요원으로 최전방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과장된 것으로 진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벤추라는 “맹세코 당시 전장에 있었으며 매일 600달러의 위험수당도 받았다”고 맞서고 있지만 정작 확실한 반론거리는 내세우지 못해 논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한편 글로브지는 자체 조사를 해본 결과 벤추라는 해군 특수부대에서 기본적인 훈련과정을 마쳤으며 베트남전이 끝나갈 무렵인 72∼73년에는 미군 해군기지가 있는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복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군 기록에 따르면 벤추라는 군수품 수송을 위한 보급계 요원이었지 베트남에 침투할 특수공작 대원은 아니었다는 것.이와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해 받았다는 무공훈장 역시 특수부대의 기본적인 훈련만 수료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었던 ‘졸업메달’ 같은 것이었다고 글로브지는 전했다.
  • 軍 잇단 사고 왜 이러나/수뇌부 상황대처 안이

    ◎신변변화 지나친 관심/잇단 비리로 사기도 저하/신세대 병사 통제대책 없어 ‘작지만 강한 군대’를 목표로 추진해온 千容宅 국방부장관의 국방개혁이 초기단계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미사일 오발사고,군 영내 불발탄 폭발사고,조명탄 캡슐 민가 추락사고 등 사흘 사이에 잇따른 사고가 군의 중심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군의 기강이 총체적으로 느슨해졌다는 것이 일반의 시각이다. 군이 흔들리면 안보에도 구멍이 생긴다. 결국 강력한 안보태세 확립을 전제로 한 대북 햇볕정책도 훼손될 수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군 기강의 해이는 군 수뇌부의 안이한 상황대처에서 비롯됐다는 게 군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일례로 지난 6·7월 동해안에서 잇따라 발생한 북한 잠수함·정의 침투사건과 지난달 서해안 침투 간첩선 나포 실패사건 이후 군 수뇌부는 현지 부대장 등을 문책하는 인사를 단행했지만 정작 국방부나 합참의 고위 책임자들에게는 어떠한 지휘책임도 묻지 않았다. 1·3군사령부 해체,지상군작전사령부 신설 등 대대적인 군 구조개편을 목표로 한 국방개혁안이 지난 8월 발표되면서 군 지휘관들이 신변 변화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게 된 것도 군의 기강이 느슨해진 요인으로 꼽힌다. 햇볕정책에 대한 일부 지휘관들의 인식 부족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햇별정책은 굳건한 국방력을 전제로 한다’는 정부 당국자의 거듭된 공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투 도발에 대한 어쩡쩡한 대응이 일선 장병들의 안보의식을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군 인사에 대한 일부 지휘관들의 불만에다 국정감사나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군내 비리가 대대적으로 드러난 데 따른 일선 지휘관들의 사기 저하도 기강해이에 한 몫을 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군 영내에서 금지된 구타나 기합을 대체할 만한 효과적인 군기 확립방안이 제시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신세대 부대원을 통제하고 지휘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일선 지휘관들의 호소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결국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다잡아 세우는 것만이 또다른 사고를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고 햇볕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토록 보장하는 지름길일 수 밖에 없다. 기강확립의 첫 단추는 사고원인의 철저한 규명 및 책임자 엄중 문책,더불어 군 수뇌부의 엄중한 자기반성과 책임의식 제고에서 찾을 수 있을 것같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테러진압 한치 허점도 없다”/평창서 對테러모의훈련

    ◎인질구출작전 3분만에 상황 끝 2일 오후 2시. 하얀 눈으로 뒤덮인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용평스키장 타워콘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이곳에서 국방부·행정자치부 등과 합동으로 대테러 종합모의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에는 경찰특공대,육군 대테러특공대,119구조대 등 300여명이 참가했다. 훈련은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국제테러분자 7명이 타워콘도 7층에 침입,99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 선수와 임원 7명을 인질로 잡고 동료 석방 등을 요구하며 군경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진행됐다. 인질범들과의 협상은 수포로 돌아가고 대책회의에서는 무력진압이 결정됐다. 곧 진압작전이 개시됐다. 헬기로 옥상에 내린 경찰특공대 50여명이 줄을 타고 내려와 유리를 깬 뒤 건물 안으로 날렵하게 들어갔다. 기관단총을 들고 저항하는 테러범들을 공포탄을 쏘며 진압하고 인질 전원을 무사히 구출했다. 작전에 걸린 시간은 단 3분. 거미처럼 건물위를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는 대원들의 묘기에 관람객 400여명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육군대테러 특공대의 사격시범이 이어졌다. 저격수들은 200m나 떨어진 표적을 정확히 맞혔다. 또 환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스키 및 스노 모빌 사격과 테러범이 탄 버스진압 시범도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 기무사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국군기무사령부는 30일 대국민 정보서비스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군대로 거듭나기 위해 ‘국군기무사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dsc.or.kr)를 개설,1일부터 운영한다고 밝혔다.
  • 해금강 삼일포(시조시인 李根培씨 답사기:4)

    ◎네 신선이 맘껏 즐기던 놀이터/조물주 畵龍點睛으로 생긴듯 ●한발늦은 동해 일출 백두대간은 동해를 옆에 끼고 용틀임을 치다가 마침내 지상에서는 더불어 견줄 수 없는 대자연의 완성품인 금강산을 우뚝 세우더니 그 뿌리를 바다에 심어 해금강을 이루었다.산이 산에 머물지 않고 바다를 거느리려 내려온 것일까,동해 물빛이 해금강을 푸른 치마폭으로 감싸며 크고 작은 산을 하나씩 떠올린다. 해금강은 동해일출이 장관이라는데 우리가 다다른 때는 해가 중천에 떠서 해돋이를 넘겼지만 바다 밑까지 비추는 햇빛에 해만물상(海萬物相)이 물속과 물위에서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하며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큰 바위마다 어김없이 이름을 하나씩 달고 나와서 촛대바위 고양이바위 누룩바위 동자바위 상좌바위 노승바위 사자바위 등등 행여 그런 이름들이 아니면 금강의 반열에서 퇴출당할까 싶은지 얼굴을 내밀고 갖가지 시늉을 한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알 길이 없더니 탁트인 시야의 저쪽 산이 하나 들어놓고 누군가가 ‘통일전망대다!’고 소리친다.나는 몇해 전 통일전망대에서 망원렌즈로 잡아당겨 찍은 해금강 사진을 보고 금강산을 외쳐 부르는 시를 쓴 일이 있다.그렇구나.육안으로도 건너다 보이고 카메라의 눈으로는 바로 앞에 있는 해금강을 그저 노래로만 부르다가 겨우 이제서야 오게 되었고 그것도 뱃길마저 멀리 둘러서 와야 했구나. ●꽃봉오리에 갇힌 이슬 하늘 위에도 산이 있는가하면 산 아래에도 하늘이 있다.삼일포(三日浦)는 본래는 주머니처럼 들어앉은 포구인데 바다를 막아서 호수가 되었고 하늘에서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행(南石行) 안상(安詳) 네 신선이 이 호수에 내려왔다가 너무 아름다워 그만 사흘쯤 지냈다고 하여 이름이 생긴 신선들의 놀이터다.그러나 최남선은 영랑 술랑 등은 신라 화랑의 수장들의 계급이고 보면 네 신선이 아닌 화랑이 낭도들을 데리고 사흘동안 뱃놀이를 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호수 안에는 붉은 글씨로 ‘술랑도남석행(術郞徒南石行)’ 여섯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어 단서암(丹書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지우고 남은 글자가 있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삼일포는 금강산 자락에 하늘 한 자락이 내려와 산의 목마름을 씻어주는 샘물이 되기도 하고 마치 용을 그리고 그 눈을 살리듯이 금강산을 짓고 난 다음 조물주의 붓이 마지막 완성의 필력을 휘두른 것 같다. 둘레 4.5㎞의 호수는 물빛도 물빛이려니와 연꽃바위,조선조의 시인 양사언(楊士彦)이 글공부를 했다는 봉래대,장군대 등이 바위와 소나무로 병풍을 치고 있어 장군대에서 내려다보면 삼일포는 큰 꽃잎 속에 숨어있는 별 같기도 하고 이슬방울 같기도 하다. 장군대를 돌아나오는데 ‘형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최인호였다. 사정이 있어 첫 배를 놓치고 봉래호를 타고 왔단다.그는 첫 산행이고 나는 마지막 날이었다.삼일포에서의 해후라니! 일찍이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그러고보면 최인호와 나는 신라때 여기서 놀다간 화랑쯤이었는지도 모르지.
  • 예비군 신고 안해도 처벌 안 받는다/국방부,내년 7월부터 시행

    내년 7월부터 군 제대후 또는 거주지 이전시 행정기관에 신고하지 않더라도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국방부는 26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 상정,통과되면 준비기간을 거쳐 내년 7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군 제대나 거주이전 등 병적사항이 변경된 후 14일 이내에 읍·면·동장에게 예비군대원 신고를 하도록 규정한 조항이 폐지된다.
  • 사장 배설의 재판:4(대한매일 秘史:4)

    ◎‘日 강압에 못이겨 고종 퇴위’ 호외/裵說 “舊한국군대 해산 당시 참상 목격” 증언 대한매일은 전날에 이어 1907년 7월19일에도 호외를 발행하였다. 「조칙과 대리」라는 제목의 이날자 호외는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에게 양위한다는 조칙(詔勅)을 발표했다는 역사적인 내용이었다. 고종의 조칙은 통한에 사무친 어조였다.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왔으나 자주 환란을 겪으매 “다스리는 것이 뜻과 같지 못하여 혹은 사람을 잘못 써서 소동이 날로 심하고,정사가 많이 어그러져 어려운 근심이 급박하야 백성의 곤란과 나라에 위태한 것이 이때에서 더 심함이 없으니 두려운 마음이 깊은 물을 건너고 옅은 얼음을 밟는 듯 한지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광무신문지법’ 공포 언론탄압 ‘칼날’ 대한매일은 고종의 조칙을 게재한 다음에 이는 고종의 뜻인지 아닌지 일반인민이 주목할 일이라고 의미심장한 촌평을 가했다. 고종의 양위는 일본의 강핍(强逼)과 내각 대신들의 위협에 못이긴 때문임은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고종은 차라리 양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지는 않겠다는 마음에서 이런 결심을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은 비운의 황제 고종은 비록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지라도 끝까지 을사조약에 날인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의 협박에 못이긴 황제의 퇴위,한해 전에 체결되었던 을사조약도 고종은 결코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한매일이 호외라는 긴박하고도 극적인 수단으로 보도하자 국민들의 감정은 더욱 들끓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7월17일자와 18일자 논설을 통해서도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비판했다. 일본이 한국 황실을 강핍하고 대신을 종으로 부리며,백성을 짐승으로 여기는 행동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원통한 마음을 품은 한국인들의 반발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모르며 각국의 공론도 일본의 잔학한 흉계를 더욱 폭로할 것이라고 말했다. 7월20일 하야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낸 뒤에 24일에는 한국의 내정과 사법권을 완전히 탈취한 「한일협약」과 이의 실행에 관한 비밀각서에 강제로 조인했다. 언론탄압을목적으로 ‘광무신문지법’을 제정 공포한 것도 같은 날이었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본 헌병사령부는 강제로 한국 언론에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 신문 인쇄 전에 미리 조판된 대장(臺帳)을 헌병사령부에 가지고 가서 검열을 받은 뒤에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한국 침략에 방해가 되는 기사는 모조리 삭제하도록 강요하였으므로 삭제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른바 「벽돌신문」이 매일같이 발행되고 있었다. 벽돌신문이란 기사가 깎인 자리가 마치 검은 벽돌을 쌓아놓은 것 같다는 뜻에서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도록 하여 언론통제의 근거를 제도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대한매일에 의병들 격문 밀물 사태는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8월1일,마침내 일본은 구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군대를 해산 당한 나라가 어찌 독립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저항하는 구한국 군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자 큰 충돌이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대한매일의 사옥은 대한문 건너편현재의 시청 앞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현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3층 건물에서는 고종의 거처였던 덕수궁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군중과 이를 막는 일본군의 충돌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일본 군인과 순사가 시위군중을 향해 총을 쏘면서 진입을 가로막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배설은 이날 군대해산 당시의 참상도 직접 목격하였다고 재판정에서 증언하였다. 일본군은 서소문 안에 있던 구한국 병영을 급습하였다. 졸지에 공격을 당한 군인들은 도망쳤으나 죽은 사람도 많았다. 배설은 미국 의사 에비슨과 함께 현장에 찾아가서 부상당한 사람을 병원으로 실어보냈는데 한 사람은 총검에 찔린 상처가 18군데나 되었다. 이때 도망한 사람들 가운데는 대부분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의병활동을 보도하는 대한매일의 기사와 논설은 마치 의병대의 창의문(倡義文)처럼 격렬했다. 의병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한매일이라고 일본은 주장했다. 대한매일을 읽은 의병들이 더욱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인 것은 사실이었다. 배설은 의병들이 대한매일에 보낸 격문들을 재판장에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 내용들은 너무도 격렬하여 신문에 그대로 실을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각지에서 들어온 투고의 종류도 다양했다. 이등박문과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보내는 항의문,각 도민들을 향한 격문,주한 각국 영사들에게 보내는 청원서,의병들에 대한 고시(告示),일본 물품의 배척,한국의 고관들을 공격하는 글 등도 많았다. 대한매일은 국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언론인 동시에 항일운동의 총 본산이었던 것이다.
  • 기상청 송월동 65년 마감/새달 15일 새청사로 이전

    기상청이 65년간의 서울 종로구 송월동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달 15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내 옛 공군대학 부지에 마련된 새 청사로 이전한다. 새 청사는 부지 5,540평,연면적 5,573평에 지하 2층,지상 8층으로 송월동 청사의 두배 규모다. 96년 착공돼 250여억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 東티모르 독립 시위/시위대 州의사당 점거/印尼 軍 철수 요구

    【딜리(인도네시아) 외신 종합】 인도네시아의 정정 불안이 동티모르의 독립시위와 인종·종교분규까지 겹쳐 더욱 악화되고 있다. 동티모르에서 23일 시위학생 1,000여명이 인도네시아 군대의 완전 철수와 유엔 평화유지군의 진주를 요구하며 주(州)의사당 건물을 점령했다. 고교생 및 대학생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이날 의사당에 들어가 별다른 충돌없이 의사당건물을 점령한 뒤 이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군대가 자행하고 있는 인권침해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들은 최근 알라스지역에서 수십명이 피살된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 실시도 촉구했다. 한편 인도네시아 경찰은 자카르타 서부 상업지구에서 22일 발생한 인종 충돌로 모두 1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들은 자카르타 시내에서 학생들이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계획하고 있고 혼란한 틈을 타 폭도들의 방화 등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 대한매일 재탄생은 경사/朴維徹 독립기념관 관장(특별기고)

    ◎우국지사 눈과 입 역할 의병활동 유일하게 고무/사회통합·번영·통일先導 국민사랑 받는 신문 되길 서울신문이 한말 민족언론의 정화(精華)‘대한매일신보’의 이름을 이어받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1904년,러일전쟁의 소용돌이가 우리 강토를 휘몰아치던 그때,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언론검열을 뚫고 진실보도와 민족적 정론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경고하고,국민의 애국심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국권회복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앞에 참언론으로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그 신문의 총무로서 실질적인 발행인이었던 양기탁 선생과,주필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박은식 선생이 필자의 처조부와 조부가 되는 까닭에 대한매일의 부활은 그분들의 부활을 보는 것같아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눈 감고 그분들의 환희를 생각해 본다. 그분들의 그토록 비참했던 생애와 희생이 헛됨이 아니었다는 외침을 느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 도발후 우리나라에 ‘한일의정서’를 강요,자국군대를우리 강토에 무단 진주시킬 때였다. 경향 각지에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고,일제는 우리 민간언론을 검열,통제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裵說)을 발행인으로 했으나,실제적인 운영은 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선생 등이 맡았다. 또한 국한문,한글전용,영문의 3종류로 발행한,90년전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을 고려한 ‘민중신문’이었으며 세계를 염두에 둔 ‘국제신문’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의병(義兵)을 ‘의병’이라 하지 못하고 비도(匪徒)나 폭도(暴徒)라고 하도록 강요당하였는데도 대한매일신보만은 이를 ‘의병’으로 당당히 표현하고 그 활동을 고무한 유일한 신문으로 우국지사들에게 눈과 귀와 입의 역할을 다했다. 일제 통감부는 수없는 협박과 회유를 가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참언론의 정신이 찬란히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더불어 서울신문시대를 끝내고 88년간 권력에 짓눌려 그 이름조차 죽어 있었던 대한매일의 부활을 보게됨은 우리 언론사의 경사일 뿐 아니라,우리 정신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벌써 찾았어야 할 자랑스러운 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1998년은 양기탁선생의 해인 듯하다. 선생은 1938년 중국 강소성의 아주 낙후된 외지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필자가 유해를 찾기 위해 그곳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이분이 어떻게 이런 오지에 무슨 인연으로 오셨는가”하는 의아함이었다. 마치 말년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외로운 슬픔을 안고 찾았던 곳으로 느껴졌다. 10년 가까이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매립된 연못 속에서 유해를 찾아 금년 4월초 봉환,옛동지들이 영면하고 계신 동작동 현충원에 모셨다. 또 오늘의 대한매일 재탄생을 맞이하니 비록 저승에 계시지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으시리라 믿는다. 선생께서는 다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 민족적이면서 국제적이고,선도적이면서 민주적이며,어떠한 압력에도 굴함이 없이 ‘사실’과 ‘정론’으로서 사회통합과 번영,민족통일과 세계속의 한국으로의 길을 밝히는 사명을 다하는,국민의 사랑을 받는 신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후손들도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무한한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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