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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親日의 군상:7­2/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현실 비관… ‘대세 순응주의’ 빠져 민족 외면/日·中·美 유학한 대표적 선각자의 한사람/105인사건 연루뒤 ‘친일전향’ 조건 출옥/日 귀족원 의원까지 역임… 끝내 반성 안해 좌옹(佐翁) 尹致昊(1865∼1945년·창씨명 伊東致昊)는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그는 조선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중국·미국에서 유학한,당시로선 드문 식견가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그의 친일 행적보다도 친일 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尹致昊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 尹雄烈(1840∼1911년)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본관은 해평(海平).부친은 무관이었지만 일찍 개화에 눈뜬 사람으로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尹致昊의 첫 유학지는 일본.1881년 일본의 신문물 견학차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파견된 것이 계기였다.그는 조사(朝士) 魚允中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는데 당시 나이는 17세로 일행 62명 중 막내였다.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귀국치 않고 兪吉濬 등과 함께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다. ○신사유람단 따라 日 시찰 그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로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였다.그는 여기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이 시절 金玉均 등 국내 개화파 인사는 물론 일본인 개화파 인사,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년간의 일본생활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 슬프다.조선의 현상이여,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진작(振作)하려 하지 않는가”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은 이러했다. 1883년 5월 그는 초대 주한 미국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과 공문서 번역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하지만 개화파 인사들의 급진적 개혁론에는 찬동치 않는 입장이었다.그러나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갑신정변 실패 후 공모자로 몰려 상하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885년 상하이로 간 그는 현지 미국 총영사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였다.이 학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미션 스쿨로 그는 여기서 3년반 동안 수학했다.그러나 원치 않았던 상하이생활 초창기 그는 한동안 술과 여자로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그의 방탕한 생활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막을 내렸다.상하이에서 3년반을 보낸 후 그는 청나라를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으로 비유했다.반면 일본은 그에게 ‘동양의 한 도원(桃 園)’이었다. 미국 유학은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그가 강대국 미국·러시아를 제치고 친일로 나선 데는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러일전쟁 무렵 그는 ‘황인종단합론’을 들고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대륙침략자들이 주창한 ‘아시아주의’‘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족패배주의에 빠져 尹致昊가 친일로 나선 것은 ‘105인사건’(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 계기다.한일병합 2년 뒤인 1912년 일제는 식민통치의 걸림돌인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었다.그는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13일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출감했다.출감 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선동화(日鮮同化)’를 부르짖었다.“…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민족의 동화(同化)에 대한 계획에는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볼 생각이다”(‘매일신보’,1915년 3월14일) 그가 변절한 직접적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그러나 그 내면에는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개화기의 尹致昊 연구’의 저자 柳永烈(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충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변신한 尹致昊의 친일 행보를 따라가보자. 1919년 ‘3·1만세의거’ 직전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그리고는 의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경성일보’,1919년 3월7일)라며 약자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순종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제가 선전하던 ‘조선독립불능론’‘투쟁무용론(無用論)’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친일논리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1920년대 들어 그는 일제의 ‘문화정치’ 선전과 청년층의 반일 동향을 억제하는 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의 회장을 맡는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선전에 주력했다.당시 그는 민족개량·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는 일제 통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타협적 민족운동이었다. ○학병 참가 전국 순회 강연 그의 친일은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7일)을 계기로 강도를 더해갔다.총독부 주최 시국강연반의 연사로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합당한 조치’라며 환영하였다.또 그해 7월 ‘황국신민화’의 실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상무이사로 선정돼 창립총회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때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징병제에 이어 1943년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조선 학도들에게도내지(內地·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런 길이 열렸다’(‘매일신보’,1943년 11월18일)며 학도들의 출진을 촉구하였다.이같은 공로로 45년 2월 그는 일본 귀족원의원에 선출돼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일본 귀족’ 반열에 올랐다. “…(일제하)조선인은 좋든지 싫든지 일본인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그가 한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사망(1945년 12월16일) 2개월 전 그가 남긴 글의 한 구절이다.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 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만 것이다. ◎尹致昊 일기/60년간 쓴 일기 시대상 상세히 담아/사생활도 솔직히 기록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는 한말의 선각자 尹致昊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60여년간에 걸쳐 기록한 개인적 메모.초창기 일기는 한문·국문으로,1889년 12월 이후부터는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청국·미국 등 해외유학 시기의 ‘일기’에는 당시 그 나라의 발전상과 시국 상황,그리고 그곳에 체류중이던 한국인들의 동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국내 체류기인 1883∼84년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이 목격한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활동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특히 일제 강점기 그가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의 입장과 국내 지식인들의 동향 등도 담고 있다. 이‘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특히 尹致昊 인물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한 사람의 ‘일기’치고는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자신의 행적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했다. ◎‘尹致昊 일기’에 나타난 親日 어록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오,축복받은 일본이여!동양의 파라다이스여!세계의 정원이여!”(1893년 11월1일)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의 게양을 반대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1919년 10월1일) “일본은 동양에 있어서 백인 지배의 마력(魔力)을 깬 데 대하여 모든 황인종의 영원한 감사를 받을 만하다” (1941년 12월26일) “우리는 조선의 청년을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에 받아들인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3년 5월12일)
  • 親日의 군상:7­1/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저항 포기… 親日로 명맥 이은 세도가 집안/고관대작 다수 배출… 화려한 가문 자랑/중시조 雄烈 ‘한일병합’후 男爵 받아/尹 전 대통령 숙부·사촌중 변절자 많아 우리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세도가 집안의 하나로 尹致暎 전 공화당의장서리(96년 작고) 가문을 들 수 있다.尹潽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집권당 의장서리,장관,서울대 총장 등 장·차관급 이상만 13명에 학자·의사가 60여명이나 나왔다. 尹씨 가문은 한말 尹雄烈에 의해 중흥된 후 자손도 번성하여 400여명에 이른다.尹雄烈의 아버지 取東은 늘그막에 웅달산에서 기도를 하고 첫 아들을 얻었대서 이름을 雄烈이라 지었다.15년 뒤 태어난 동생은 ‘영웅(英雄)’이라는 말에 맞추기 위해 英烈이라 지었다. 雄烈은 致昊·致旺·致昌 3형제를,동생 英烈은 致旿·致昭·치성·致昞·致明·致暎 등 6형제를 두었다. 열(烈),치(致)에 이어 다음 항렬은 선(善),구(求),영(榮) 순이다.선(善)자 항렬의 유명인사는 致昊의 아들 永善·璋善,致旿의 아들 日善·明善·昇善,致昭의 아들 潽善·源善,致明의 아들裕善 등이다.구(求)자 항렬에서는 日善의 아들 錫求·鐸求,潽善의 아들 商求·同求 등이 있다.번성한 자손과 함께 이 집안에서 배출한 유명인사들의 면면을 한번 훑어보자. 중시조격인 雄烈은 1856년 무과에 급제,한말 군부대신을 지냈다.동생 英烈은 연안부사·삼남토포사·육군참장(參將,현 준장에 해당)을 지냈다.雄烈의 장남 致昊는 학부(學部)·외부협판(協辦,현 차관)을,2남 致旺은 초대 육군의무감(육군소장 예편)·대한의학협회장을,3남 致昌은 초대 주영공사와 주터키대사를 지냈다. 英烈의 아들 중 장남 致旿와 차남 致昭는 대한제국 시절 각각 학무국장과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3남 致성은 일본육사(11기)졸업 후 군부 군무국 교육과장을,4남 致昞은 육군 보병 정위(正尉,현 대위에 해당)로 예편하였다.막내 致暎은 해방 후 초대 내무장관과 서울시장, 3공에서 공화당 의장서리를 지냈다. ○부귀영화에 장수까지 致旿의 장남 日善은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致昭의 장남 潽善은 서울시장·대통령을,3남 源善은 민선 경기도지사를 지냈다.致明의 아들裕善은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보사부 의정국장·국립의료원장을 지냈다.3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永善과 재미 원로 피아니스트 琦善은 모두 致昊의 아들들이다. 또 日善의 차남 鐸求는 원자력병원장을 역임한 후 동생 鍾求와 함께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보통 집안에서는 한명 나오기도 힘든 큰 벼슬아치가 이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속출하였다.그리고 장수(長壽)집안으로도 유명하다.중시조(中始祖)격인 雄烈(72세),英烈(86세)형제와 致昊(81세),致旺(88세)이 70,80세를 넘겼고 永善(92세),日善(91세),潽善(93세) 등은 망백(望百·91세) 이상 장수했다.부귀영화에 장수까지 겸했으니 한 가문으로서야 더 바랄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 집안의 역사가 이렇게 화려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친일’은 이 집안 중흥의 1등공신 雄烈(1840∼1911)로부터 시작된다.1856년(철종 7년) 무과에 급제,1861년 충청 감영의 중군(中軍)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그는 1880년 별군관으로 朴永孝·金玉均 등과 함께 수신사 金弘集을 따라 일본을 다녀온 후 이듬해 일본식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1882년 별기군과의 차별대우를 참다못한 구식군대가 반란(소위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그는 시위대에 쫓겨 원산을 거쳐 나가사키(長崎)로 줄행랑을 쳤다.도중에 원산에서 주민들에게 발각됐으나 한 일본인 승려의 도움으로 피신했다고 한다.도쿄 체류중 그는 ‘조야신문(朝野新聞)’(1882년 9월2일)과의 인터뷰에서 구식군대의 반란은 조선 내 수구파들이 세력을 잡기 위한 ‘폭거’라고 주장했다. 갑신정변 무렵 귀국한 그는 개화당 정권에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1886년 능주(綾州)로 귀양갔다.그후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다시 집권하자 경무사·군부대신을 지내다가 1896년 소위 ‘춘생문(春生門)사건’에 가담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일제말기에 지조 꺾어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서 궁내부 특진관·군부대신을 지낸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은사금 2만5,000원과 남작(男爵)작위를 받았다.그의 작위는 장남 致昊가 습작(襲爵)하였다.致昊는 1913년 ‘105인사건’의 확정판결로 실작(失爵)되었으나 이는 ‘충순(忠順)치 않은 행위’(‘조선귀족령’ 제7조),즉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박탈당한 다른 사람(남작을 거절하고 순국한 金奭鎭 등)들과는 구분된다. 雄烈·英烈 두 형제 중 친일 경력자는 동생인 英烈의 집안에 많다.英烈의 장남 致旿는 한말 중추원 참서관(9품)·학부(學部,현 교육부)학무국장을 역임했는데 한일병합 후 중추원 부찬의·찬의(1910∼15년)를 지냈다.차남 致昭 역시 한말 중추원 의관을 거쳐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1924∼27년,주임관 대우)를 지냈다.특히 致昭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14일 당시 쌀 120가마 값에 해당하는 2,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내고 같은해 9월9일 결성된 ‘애국경기도호(號)’ 군용기 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지냈다. 3남 致성은 일본육사를 마치고 구한말 정부에서 육군기병 부령(副領,현중령에 해당)으로 예편한 후 한일병합 후에는 실업계로 진출,분원자기 취체역(중역)·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특별위원을 역임했다.막내 致暎은 미국 유학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歐美)위원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그러나 그 역시 일제 말기에 가서는 지조를 꺾은 것으로 보인다. 친일 잡지에 그의 이름으로 된 글이 실려 있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1941년 9월7일)했다.또 그해 12월20일에는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美英)타도 대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그는 회고록 ‘윤치영의 20세기’에서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 명의의 글은 이름을 도용당한 것이라며 “일제 전시하여서 명예훼손 소송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그의 건국포장 서훈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밖에 致旿의 아들 중에도 친일 경력자가 더러 있다.교토제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 지낸 장남 日善은 일제가 주최한 ‘미영타도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한 적이 있다.또 도쿄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차남 明善은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정부에서 총무청 통계과장·국무성 사무관·간도성(間島省) 차장을 지냈다.4남 昇善은 관동군사령부에서 대위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 가문과 사돈 맺은 아이러니/尹致昌 결혼 당시 심한 반발로 한때 감금되기도 자손이 많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안은 친일 가문은 물론 독립운동가 가문과도 더러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雄烈의 3남 致昌은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孫貞道 목사의 장녀 孫眞實과 결혼했다.초대 해군참모총장·국방장관을 지낸 孫元一 제독, 재미 원로의사 孫元泰(84세) 박사,YMCA 회장을 지낸 여성계의 원로 孫仁實(81) 등은 모두 眞實의 동생들이다.독립운동가 진영은 이들의 결혼을 거세게 반대하며 한때 致昌을 감금하기도 했었다. 致昊의 차남 光善(6·25때 납북)은 독립협회의 창건자이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을 지낸 南宮檍의 딸 南宮慈卿과 결혼,4남3녀를 두었다.致昊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집안 딸 중에는 독립운동가 당사자와 결혼한 사람도 있다.致旺의 장녀 善姬는 2차대전 때 OSS 대원으로 활동한 張錫潤(95) 전 내무장관과 결혼하였다.이밖에 致昭의 차남 浣善의 부인 李順貞은 한말 탁지부 대신 李容稙의 딸이자 ‘을사조약’후 자결,순국한 충정공 趙秉世 선생의 외손녀다.
  • 지구촌 구석구석 24시간 ‘그물 감시’/美 첩보체계

    미국은 북한의 발사체에 대해 미사일이 아니라 소형 인공위성이라는 결론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10여일이 걸렸다. 우주에 수백개의 위성을 띄워놓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24시간 한치의 오차없이 지켜보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의 첩보체계. 미국은 북한의 발사체에 대한 정체식별과 관련,인공위성의 기능을 거의 못하는 ‘장난감’ 수준이라 식별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했었다. 북한은 미국의 첩보 수준을 놀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로켓발사 장면을 공개했던 터다.북한의 이번 로켓발사를 계기로 골프공 크기 물체의 움직임도 식별하고 내막을 정확히 분석해낼 수 있다는 미국의 첩보능력이 세인들의 궁금증을 부풀리고 있다.정보제국 미국의 첩보 능력을 점검해본다. ◎첩보 위성/DSP­전세계 모든 미사일기지 동향 분석/NGSP­자동신호장치 부착물건 찾아내/DSCS­해외주둔 미군과 본토 연락 담당/DMSP­저궤도 돌며 각종 기상정보 제공 미국의 첩보위성은 수백개에 이르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이 가운데 우주항공사령부가 지휘하는 8종의 60개 위성이 군사목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지상 위치 파악을 비롯,대륙간 탄도미사일 추적,군사통신정보 연락,항공기운항정보 제공,기상 측정 등 군 활동에 핵심적인 정보분석이 주기능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위성은 방위지원위성(DSP).이른바 총괄위성이다.2만2.000마일(3만5,200㎞) 상공의 지구궤도를 돌면서 전세계 미사일기지를 감시,같은 시간대의 정보를 제공한다.이 위성에 부착된 열추적 센서는 추진발사체의 열을 감지해 발사 위치,비행속도,궤적에 의한 목표지점 구성 등을 분석한다. 또 다른 위성 NGSP는 계속해서 일정신호를 발사,방위지원 위성의 정보를 수신해 지구상 위치 파악,시간 측정,항해 방향 측정 등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지상의 모든 미군 기지나 병력에 갖가지 정보를 전달해준다. 개별 병력도 이동식 장비를 이용,위성을 통해 교신을 할 수 있다.자동신호감지장치를 단 물건이라면 어디에 있든지 찾아낸다.오차는 거의없다. 미국 육군의 통신을 담당하는 DSCS.미국 본토와 전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그리고 백악관을 비롯한 정부기관과의연락은 맡고 있다.걸프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실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성이랄 수 있다.10개가 지상 2만2,300마일(3만5,600㎞) 상공을 돌고 있다. 저궤도위성인 DMSP는 지난 20년 동안 미군에 각종 기상정보와 함께 지구상 곳곳의 사진을 찍어 자세한 분석데이터를 제공해온 첩보위성의 원조.상공 450마일(720㎞)에 위치해 있다.각종 폭풍 등에 관한 기상정보는 민간에게도 제공한다. 이밖에도 우주항공사령부와 NATO군이 함께 운용하고 있는 위성으로는 NATO Ⅲ·Ⅳ 그리고 Milstar가 있다.모두 육·해·공군간의 통신을 담당한다.해군이 통신위성으로 FSCS를 독자적으로 띄워 놓았다.23개의 채널이 있고 12개는 핵 관련 시설끼리의 전용회선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주항공사령부/스타워즈 대비 차세대 방위망 본산/85년 설립… 91년 걸프전때 성가 발휘 미국 우주항공사령부(USSC)는 이른바 스타워즈를 대비한 차세대 방위망의 본산이다.지난 85년 설립됐다.현재 사령관은 리차드 메이어 공군대장. 우주항공사령부는 91년 걸프전에서 성가를 톡톡히 발휘했다.▲군사목적 위성의 발사 및 운용 ▲전세계 주둔한 미군의 정보,통신,기상,항공정보 등은 물론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경보체계를 운용하는게 주임무다.북미 방공사령부(NORAD)와 긴밀한 업무협조를 하고있다. 우주방공사령부 산하에는 육·해·공군의 방공·레이다 망을 관장하는 군조직이 총망라돼 있다.단일조직이라기보다는 미국의 하늘을 방어하고 나아가 세계의 하늘을 외계로부터 막는 다기능 복합유기체 성격이 강하다. 통합방어망을 비롯 육·해·공군우주사령본부,육군우주미사일방어본부,합동 전투센터 등 모두 18개 조직체가 우주사령부를 구성하면서 이곳의 지시를 받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사령부의 본부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샤이엔 산의 암반밑 지하벙커.산밑을 파서 만든 요새로 핵무기에도 거뜬히 견딘다.. 비록 지하 깊숙히 위치하고 있지만 총 10층 높이의 건물구조로 최신식 인텔리전트 빌딩 형태다.이안에서 1,100명의 전문인력들이 24시간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관장하는 위성만 ▲지상위치 측정시스템(GPSS)위성 24개 ▲방위위성통신시스템(DSCS)위성 10개 ▲방어용 기상측정 위성프로그램(DMSP)위성 2개 ▲항해위치 시스템(NGPS)위성 24개 등 모두 60개다. ◎첩보위성 장비/‘미다스 프로그램’이 대표적/야전지휘본부∼본토기지 효과적 연결 미국 첩보위성은 위성 자체 성능보다는 탑재된 첨단장비가 위력적이다. 다른 위성들과는 장착 장비에서 서너 차원 높다. 대표적인 장착 장비가 미다스(MIDAS)프로그램 운용장비.손에 닿는 무엇이든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왕 ‘미다스’ 처럼 신통하다는 뜻이다.위성에 장착되는 통신 장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술의 집합체로 DSCS의 핵심 장비다. 이 장비는 전장에 위치한 개별 병력은 물론 야전지휘소나 지휘본부 혹은 후방의 사령부,나아가 본토의 각종 기지 등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있다. 핵심기술은 각종 신호나 전파를 모두 받아들여 이를 분류해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는 것.광통신을 이용한 통신이나 전파를 이용한 통신 등 군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주파수대의 엄청난 통신 수요를 엉키지 않게처리해준다. 통신의 핵심이 미다스라면 화상정보쪽에는 퀵버드 멀티스펙트럴 기술이 있다.위성에서 각종 전파나 적외선,광학렌즈 등을 이용,지상 사진을 찍은 뒤 놀라운 해상도로 전달한다. 파랑·초록·빨강·적외선 등의 색을 이용해 찍는 사진은 최소 가로·세로 22㎞까지 촬영되는데 확대하면 골프공이 보일 정도의 놀라운 해상도를 나타낸다. ◎정보오판 사례/98년 5월 인 핵실험­강행 6시간전 위성사진 받고 판독 못해/98년 8월 수단 공습­제약공장 화학무기공장으로 잘못 판단 우주 궤도를 떠다니는 60여개의 미국 첩보위성이 뽑아낸 정보의 최종 귀착지는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중앙정보부(CIA)본부.최첨단 위성이 보내는 ‘따끈따끈’하고 치밀한 자료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CIA는 최근 치명적인 오판으로 잇따라 국제적 망신을 샀다. 지난 5월11일 인도의 핵실험,8월7일 케냐·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탄 테러.세계 최강의 정보력을 자랑해온 CIA가 ‘정보 부재’및 ‘정보 오판’으로 낭패본 대표적 사례들이다.지난달 20일 미국은 케냐 대사관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화학무기공장에 폭격을 가했다.알고 보니 제약공장.CIA가 잘못 판단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정보부의 한 관리는 익명을 전제로 오판을 시인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인도 라자스탄주 포크란 핵실험 기지에서의 핵실험도 첩보위성이 실험 6시간 전 정확한 사진을 보냈지만 정보요원들이 제대로 판독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첩보위성 성능의 완벽함을 인적자원의 부실이 흠을 낸 것. 어쨌든 이 실수로 국내 여론의 집중 화살을 받았고 조지 테넷 국장은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인공위성 사진판독 요원 충원 등 개혁조치를 취한 3달 뒤 수단에서의 실수로 CIA는 또 비난의 도마위에 올라야 했다. 2차대전 중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미국이 사전 정보입수를 위해 47년 7월 설립한 CIA가 냉전종식 후 정치·안보보다는 경제정보에 치중하면서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하나의 진실/서해성 소설가(굄돌)

    밤길을 나섰다가 혹 도깨비를 만나거든 겁먹지 말고 딴지부터 걸고 보라며 모친은 어린 자식들 뱃심을 키워주곤 했다. 단단하면 그게 개다리인즉 다른 다리를 야무지게 걸고 밀어뜨리면 반드시 넘어지는데,때를 놓치지 말고 ‘어부다’라고 외쳐야 도깨비가 다시 붙지 않는다 했다. 또 도깨비와 가까이 지내면서 얼굴이 차츰 도깨비를 닮아가는 사내 이야기는 당신에게 맹자왈쯤되는 교우론이었다. 숭(흉)한 것과 친하게 지내다보면 사람이 숭해져분다,잉. 2차대전 막바지,소련군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해서 맨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유대인들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예기치 않게도 그날밤 석방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아우슈비츠로 돌아왔다. 오랜 수용생활이 빚어낸 비극적 증세였다. 이태 전,잉카의 마지막 황제 이름을 딴 게릴라 조직 투팍 아마루가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 침투한 일은 두 가지 점에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약속이나 한 듯 게릴라들은 끝내 단 한 사람의 인질도 해치지 않았다. 인질들 또한 잡혀 있는 동안은 물론풀려난 뒤에까지 투팍 아마루의 뜻을 지지했던 거다. 게릴라들의 뜻과 행동이 옳고그름을 떠나서,장시간을 같이 보내다보면 갇힌 자들이 가둔 자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심리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독재와 싸워오면서 좋잖은 증세들이 적잖이 내면화되고 말았다. 개발이나 발전구호 속에 길들여지고 더러 닮기도 했다. 갇힌 의식에서 종내 벗어나지 못하거나 노예근성에서 깨어나지 못한 부분도 있을지 모른다. 아직 쫓겨가지 않은 도깨비들이 이를 교묘히 파고들어 하는 선동일터이지만,얼핏 복잡하고 진척 없어 보이는 민주주의보다는 차라리 ‘건강한 독재’를 원하는 듯한 항간의 불온한 발상과 구체제를 찬미하는 억지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고백이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주술일 뿐이다. 역사에 반하는 이 파렴치를 잠재워야만 비로소 ‘어부다’라고 외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이란­아프간 일촉 즉발/탈레반 외교관 등 47명 억류

    ◎이란군 7만 동원 무력 시위 【테헤란(이란)·사르에코탈(아프가니스탄) 외신 종합】 이란이 지난 주부터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서 탱크와 전투기 등 각종 화기와 7만여명의 군대를 동원,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이란은 아프간 집권 탈레반 세력이 지난달 8일 이란의 지원을 받는 북부의 반군 거점인 마자르 샤리프를 점령,외교관 등 이란인 47명을 인질로 잡아 억류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두 나라 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한다. 선제 공격을 해야 하는 이란이 국제사회에서 개방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마당에 무력 침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탈레반은 반군세력이 7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북쪽의 풀 에 수피안 인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양측간에 로켓과 탱크 전투기를 동원한 전투가 수시간 동안 계속됐다고 밝혔다.
  • 혁명원로 대거 퇴역 ‘세대교체’/北 서열 변화

    ◎홍성남·최태복 등 김정일인맥 급부상/군부실세 조명록 인민무력부장 유력 이번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80대 고령의 혁명원로들이 대거 한직으로 물러섰다.부주석 李種玉 朴成哲 金英柱가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데다 2∼4위였던 주석단 서열도 4∼6위로 밀려나 사실상 은퇴한 셈이다. 대신 金正日은 자신의 인맥으로 분류돼오던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대표적인 예가 洪成南(74) 내각총리.김일성종합대와 체코 프라하 공대출신의 테크노크라트인 洪총리는 권력구조의 부침이 심했던 7·80년대에도 정무원 부총리와 국가계획위원장에 수차례 임명될만큼 업무추진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발탁된 崔泰福(68)도 70년대 초 金正日의 후계자부상 과정에서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앞장서면서 김정일 인맥의 일원이 됐다. 대외적인 국가수반 역할을 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기용된 金永南(70)은 우리에게 외교부장으로 친숙한 인물로 외교관 외길을 걸어온 비동맹외교의 대가다.94년 북미핵협상 대표였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에게 뒤처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번에 주석단 서열 2위를 차지,金正日 시대의 실세로 떠올랐음을 증명했다. 온건 개방파 延亨默(67)자강도 책임비서도 김정일의 신임을 얻고 있어 당인사에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또 桂應泰(73),金基南(72),金國泰(74),金容淳(64)등 당 비서 4인방과 金正日의 매제인 張成澤(52)도 앞으로의 행로가 관심거리인 실세집단이다. 군부에 신경을 써온 金正日의 인사행태는 이번에도 어김없었다.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앉은 趙明祿(68)군 총정치국장은 군내인맥의 대표격.러시아 공군대학에 유학한 공군출신으로 해방전 어린 金正日을 업고 다닐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인민무력부장으로도 유력시된다.
  • 전경과 휴대폰/임수경 통일운동가(굄돌)

    거리를 지나다 보면 아직도 ‘닭장차’라고 불리는 전투경찰 버스를 자주 볼 수 있다. 고생하는 전경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게 시내에 상주해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앞을 지나던 나는,매우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군인의 신분인 전경이 버스 의자에 걸터앉아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휴대폰이 대중화했다지만 언제부터 군대에서 근무시간에 개인의 휴대통신이 자유롭게 허가되었고,도대체 무슨 돈으로 구입하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며칠전 고참들의 구타로 국립경찰병원에 입원한 한 전경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아직도 군대에 폭력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는 현재의 근무지에 배치된 뒤 자신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고참들이 ‘소대비’라는 명목으로 졸병들의 월급을 거두어간다는 것이었다. 그 돈을 모으면 상당액이 될 것인데 바로 이 돈으로 고참들은 휴대폰을 사고,반지를 해서 끼고 다닌다는 주장이었다. 멀쩡한 아들을 군대에 보냈더니 매맞고 입원까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게다가 몇푼 안되는 월급마저 고참들 손에 빼앗기고 수시로 괴롭힘을 당한다면 세상의 어떤 부모가 마음 놓고 귀한 아들을 군대에 보낼 것인가. 단지 군대에 며칠 앞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구타와 괴롭힘이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남의 돈을 제돈인양 빼앗아 개인 용도로 흥청망청 쓰는 일이 경찰서 내에서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의 중립성과 신뢰도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은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젊은이들에게 세상의 희망과 노력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다. 하긴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는’사람은 별로 없고,도리어 고액과외니 뇌물수수가 만연한 오늘날에 어느 누가 이들을 탓할 것인가.
  • 정재국 명인 피리정악 연주회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인 가산 정재국 명인(59·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이 8일 하오 7시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피리정악 연주회’를 연다. 이번 공연에서는 ‘대취타’‘피리독주’‘자진한잎’‘표정만방지곡’‘ 보허자’등을 들려준다.무령지곡(武寧之曲)으로도 불리는 대취타는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진문(陣門)개폐 또는 통신사의 행렬때 취타대 등이 연주하던 행악(行樂)을 일컫는 말.또 피리독주로는 ‘평조회상’중 ‘상령산’을 풀어 연주한다.‘자진한잎’은 가곡에서 노래말을 빼고 악기,특히 관악으로만 연주하는 곡들을 지칭하는 용어.향피리 즉 사관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사관풍류’라고도 한다.정씨는 피리음악의 일인자로 정악피리에 특히 능하다.(02)580­3333
  • 민주열사 열전:4/金相眞 서울농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할복 자결… 反 유신의 魂으로 부활/학생운동사 목숨 던진 첫 인물/꺼져가던 투쟁의 불씨 되살려/암울한 시대 희망의 새싹 틔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합법을 가장한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75년 4월11일 상오 11시. 서울대농대 4학년 金相眞은 수원에 있는 농대 캠퍼스에서 그렇게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격정의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차분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는 비장함에 묻혀 이내 사그라졌다. 선언문 낭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이 보잘것 없는 생명,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는 말이 나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그는 품속에서 과도를 빼 치켜들었다. 그리고 하복부를 깊게 찔러 위로 그어올렸다. 그는 친구들에게 들려 택시까지 가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1·2차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중이던 12일 상오 8시55분 그는 앰뷸런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죽어가며 “애국가 불러주오”金相眞 열사는 민주화투쟁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최초의 인물이다.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죽음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했고,그 파장까지도 충분히 예측했던 것 같다. 75년 2월 朴正熙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내세워 강경으로 선회했다. 정부가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는 등 유신체제가 오히려 폭악화되자 그는 어떤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미온적인 동료·후배들의 자세도 그를 피할 수 없는 ‘결단’으로 밀어댔다. 그는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고 4월9일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8명이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사형당했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과도를 구입했다. 인혁당사건은 10년 뒤인 95년 모방송사가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법사상 ‘가장 치욕스런 판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상진기념사업회 安鍾健 회장(50·방송대 교수)은 “相眞이는 복학후 되도록 시위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74년말부터 급격히 암울해지는 시대상황에 매우 당혹스러워했고,무언가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회고했다. 安회장은 金相眞 열사와 고등학교 및 대학 같은 과 동기다. 그는 또 “相眞이가 할복 전날 밤 자신을 찾아와 칼을 보여주며 가족과 애인 걱정을 했다”고 전한다. “相眞형은 항상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어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때다’‘내가 해야할 것 같다’고 결의를 나타내기도 했구요”후배 鄭鉉敦씨(축산·74학번)의 회고다. ○시위 확산에 긴급조치 9호 선포 朴正熙 정권은 金相眞의 죽음이 반유신의 상징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숨을 거둔 지 15시간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게 했으며,서울대 농대를 사실상 폐쇄했다. 각 대학에도 휴교·휴강 조치를 내려 4월 중순까지 25개 대학이 전면 휴강에 들어갔으며,시위 주동자의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5월13일 체제에 관한 어떤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5월 22일 관악 캠퍼스에서 기어이 ‘金相眞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긴급조치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22사건’이다. 朴炯圭 목사는 95년 金相眞 20주기 행사때 “모든 사람들이 좌절할 때 꺼져가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긴 이가 金相眞 열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튼 민주화와 정의의 물길을 우리가 제대로 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반문했다. 당시 5·22사건으로 수배됐던 金槿泰 의원(국민회의)은 “金相眞형과 그 사건은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진정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폭압아래 똑같은 나이(27살)에 옥사한 尹東柱의 ‘서시’는 그의 이상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金相眞 열사는 尹東柱의 ‘서시’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승화됐고 밝은 미래의 희망으로 존재할 것이다. ◎어머니 朴載娟 여사의 통곡/“정부에 의한 명예회복 평생소원” “에미로서 자식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겪다 가게 했어요…” 金相眞 열사의 어머니 朴載娟 여사(80)가 아직도 못내 아쉬워하는 점이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데모에 끼겠느냐’며 항상 어머니를 안심시키던 아들. 그가 죽자 슬픔과 원망이 뼈에 사무쳤지만 朴여사는 차차 목숨을 던져야 했던 아들의 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相眞이는 유난히 정이 많고 심지가 깊었어요. 친구를 무던히도 좋아했지요. 친구들을 몰고와 내가 음식상을 내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95년 20주기 행사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벽제 묘소로 가져가 100여명의 아들선·후배 동료들을 먹였다. 朴여사는 아들이 죽자 병원에서 “제발 화장하지 말고 묘를 쓰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포항에 있던 맏아들을 불러올려 억지로 설득해 화장을 강행했다고. 그녀는 “화장터로 쫓아가 ‘우리가 뿌릴 터이니 유골단지를 달라’고 해 중앙청 옆 법륜사에 감췄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후에 金相眞 열사는 벽제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朴여사는 현재 서울 갈현동 자그마한 한옥에 혼자 산다. 신경통과 위경련을 앓고 있지만 심하지는 않은 듯했다. 고려컨테이너 부사장인 맏아들 상운씨와 대한투신 원주지점장으로 있는 둘째아들 상근씨 등 8남매가 모두 건실하게 살고 있어 흐뭇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들이 공식적으로 정부에 의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죽기 전에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후배 鄭赫基씨의 맺힌 恨/“긴 겨울 몰아낸 ‘민주햇살’ 빛 봐야” 김상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鄭赫基씨(42·산야농산 대표)는 “相眞이 형이 죽은 이후 학생들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재야나 지식인들이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金相眞 할복사건이 유신독재정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시대적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朴正熙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해 정권 말기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죠.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국민의 항거를 막기 힘들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 당시 축산과 새내기였던 그는 金相眞 열사가 할복하는 순간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뒤에 있던 선배들은 그가 칼을 빼드는 순간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덮쳤지요. 그러나 정작 저는 ‘단순히 각오를 다지기 위해 빼들었겠지’했어요. 그런데 막상 할복하고 쓰러지자 정신이 멍하고 아찔했습니다” 그는 “그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鄭씨는 지난 95년 기념사업회가 출간한 金相眞 열사 평전 “긴겨울 얼음뚫고’의 정리작업을 맡았었다. 3년이나 걸린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대한 빚갚음의 의미도 있지만 相眞이 형의 진실이 진정한 역사로 기록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가 후퇴하고 권력이 부패하면 언제라도 제2,제3의 金相眞이 나올수 있다”는 鄭씨. 그는 “全·盧 시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며 “지금의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金相眞 열사 연보 ▲1949년 金東壽·朴載娟씨의 3남6녀중 여섯째로 서울에서 출생 ▲1962년 혜화국민학교 졸업 ▲1965년 보성중학교 졸업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서울대농대 축산학과 입학 ▲1971년 군입대.경기 포천의 공병대에서 근무 ▲1974년 2학기 복학 ▲1975년 4월11일 서울대 수원농대 교정에서 유신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낭독하고 할복 자결 ▲1975년 4월12일 상오 8시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
  • 인턴공무원제 찬반논쟁 가열

    ◎찬성­공직사회 경험축적 등에 긍정효과/반대­대졸자에 한정한건 기회균등 위배 ‘인턴 공무원’제도에 대한 찬반논쟁이 뜨겁다.인터넷 행정자치부 홈페이지의 ‘열린마당’엔 연일 찬반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金大中 대통령이 “대졸자 1만명을 인턴으로 채용하라”고 지시하고,행자부에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찬성하는 쪽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사회가 요구하는 직무능력과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활용가치가 높다는 논리다.반대 논리도 만만찮다. 인턴 채용은 결국 기존 공무원의 감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대졸자만 혜택을 주고 고졸자는 제외하는 것도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항변이다. 찬성론을 편 김성렬씨는 “이 제도는 공직을 준비하는 많은 수험생들에게 공직의 장단점을 알게 하고 바른 공직관을 갖게 하는 데 보탬이 된다”고 주장했다.이같은 장점이 있음에도 대졸자에 한한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열린마당’에서는 찬성론이 반대론의 기세에 밀리는형국이다.주로 현직 공무원들의 대화마당이라는 점도 작용한 듯하다. ‘나익명’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린 사람은 “대졸자 1만명 채용계획은 지금의 공무원 감축계획과는 모순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어차피 국민의 혈세로 임금을 지원하고 고급인력의 취업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벤처기업에 대졸 인턴을 지원하는 것이 경제난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옹진맨’이라고 밝힌 사람은 “실업고교를 졸업하거나 사정상 대학에 못간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면서 “기왕 제도를 도입하려면 고졸자들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인천서’라는 게시자는 “비애를 느끼지 않으려면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서 결혼을 한 뒤에라도,여자는 결혼하고 애를 낳더라도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꼬집었다. 특히 강명희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취업 불안 등에 대한)대학생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공무원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반대”라며 이 제도의 실시 배경을 의심하기도 했다.
  • 1·3軍 해체… 지상작전司 창설/내년부터 연차적 시행/국방부

    ◎2차관·3실·1차관보·18개국으로 국방부내 차관급을 본부장으로 하는 ‘획득본부’(본부장 차관급)가 신설되는 등 군내 유사·중복 기구 및 기관의 통·폐합이 본격 추진된다. 국방부는 25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방개혁추진계획’을 확정,관계법령을 개정해 내년 말부터 연차적으로 시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상부구조인 국방부내 무기·조달·방산분야를 통합관리하는 획득본부를 신설하고 획득절차도 대폭 간소화하기로 했다.기존 획득개발국은 획득본부산하로,정책보좌관은 국방정책실장으로 각각 직제가 바뀌었다. 이에 따라 기존 1차관,2실·1차관보,19개국·관,72개과·담당관으로 돼 있던 국방부 직제는 2차관,3실1차관보,18개국·관,70개과·담당관으로 개편됐다. 하부구조로는 육군의 1.3군사령부가 해체되고 지상작전사령부가 창설된다. 또 2군사령부를 후방사령부로 개편하고 예하 두개 군단사령부를 해체,향토사단 중심으로 작전체제를 강화한다. 1·3군이 통합되고 2군의 두개 군단이 해체되면 병력(사병) 1만2,000여명, 연간 예산 4,000억여원이 절약되며 육군대장 1명,군단장 2명,소장 3명,준장 19명,영관장교 565명 등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함께 전시 동원전력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육·해·공군 수송자산을 통합관리하는 국군수송사령부를 창설하키로 했다.
  • ‘군대위안부’ 처벌지침 내년 마련/유엔인권소위

    ◎맥두걸보고서 국제기구 배포 제 50차 유엔 인권소위는 22일 “전시에 행해진 성폭력행위를 비롯해 강간 및 성적 노예행위는 비난받고 처벌해야 한다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견해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의문은 군대위안소를 ‘강간센터(rape center)’로 표현할 만큼 일제의 군대위안부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던 맥두걸 최종보고서의 내용에 비하면 우리에게 실망스런 면도 없지 않다. 맥두걸 보고서가 제출된 직후 인권소위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일본이 맥두걸 보고서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아무리 민간전문가로 구성돼 정부의 입김을 최소화했다는 인권소위이지만 일본정부의 이같은 반발과 다각도 로비공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96년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져왔던 군대위안부 문제를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는 점으로도 이번 인권소위는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학술대회 기조연설

    ◎동티모르 독립투쟁 아세안도 책임 다해야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가 제주4·3항쟁 50주년을 맞아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다. 한국위원회 대표 姜萬吉 고려대교수를 비롯 국내외 250여명의 학자와 법조인,예술인들이 참여한 이번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독립운동과 관련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21일 기조연설을 했다. 그의 ‘동티모르의 민족자결을 위한 투쟁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인권’이란 제목의 연설을 요약한다. ○민주주의·법치추구는 순리 세계의 국가들은 점차 경쟁적이며 상호의존적이 되어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 이익이 단지 무역상의 우월함과 양적인 소득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는 없다. 어떤 나라든 다른 나라와 윤리,원칙에 충실하고 독립과 정직을 존중하고 우방국 간의 의견차이를 인정할 때 그 나라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는 바로 신중한 외교정책의 룰이 존재해야 되고 그것은 기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인권과 법치를 향한 움직임은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이다. 고문이 성행하는 아시아의 국가에서도 유례없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추구하는 전체 아시아 지역에 큰 의미를 지닌다. 수십년간 독재정권을 견뎌낸 한국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무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용감하게 서울과 광주에서 군대에 대항하여 값진 승리를 거뒀다. ○미얀마 강력한 제재를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인권이 침해되는 지역이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티모르도 그중의 하나다. 동티모르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아세안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아세안이 책임을 다한다면 많은 고통과 비참한 생명의 손실이 방지되고 국제적인 비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도 인권침해가 심하다. 그러한 미얀마 상황에 대해 유엔은 비난 결의안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 이상의 확고한 조치가 필요하다.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를 속인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종차별 정권에게 유엔총회에서 의석을 주지않은 것처럼 유엔 회원국 자격을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우리는 기본적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는 집단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공산세계에 대항한 서구의 개념이라고 들어왔다. 옛 소련이 이끈 동부와 중부유럽은 이데올로기에 인권을 주입시켜 유엔인권단체에서 탈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주의 붕괴 후에 이런 논리는 전제주의와 군사독재가 남아있는 특정 아시아국가로 전용됐다. ○인권침해 비난 당연 인권침해는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든 반드시 비난받아야 한다. 비정부기구(NGOs)및 남과 북의 민주정부는 세계에서 인권 최하위국들(쿠바,인도네시아,이란,이라크,수단,자이레)에 의해 결성된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확고한 인권수호의 의지를 나타내야 한다. 인권에 대한 논쟁은 선진국과 후진국사이의 갈등의 요소가 돼선 안된다. 그보다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와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몇몇 공산정권 사이에 이상과 원칙사이의 투쟁이 돼야 한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법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국가와 NGOs의 전략적 동맹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다.
  • 親日의 군상:2/국립묘지에 묻힌 日帝경력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성지’에 일제고관·황군장교까지/‘과거’ 검증 안된채 안장… 끝없는 논란/백강 선생 “나는 국립묘지 싫다” 유언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묻지말고 생사를 같이한 임정요인들이 누워있는 효창원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93년 1월 타계한 마지막 임정요인 백강 趙擎韓 선생의 유언이다. 백강 선생은 왜 남들이 다 묻히기를 원하는 국립묘지 안장을 굳이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국립묘지에 누워있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립묘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신 민족의 성지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사 중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한 인사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논란이 있어왔다. 국립묘지 내에서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역은 국가유공자묘역,애국지사묘역,장군묘역 등 세 곳.국가유공자묘역에는 제1묘역의 白樂濬·陳懿鍾·白斗鎭·嚴敏永·黃鍾律·李殷相·李瑄根 등 7명,제2묘역의 趙鎭滿 등 모두 8명이 묻혀 있다. 문교장관과 참의원 의장을 지낸 白樂濬은 1942년 4월 창간된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陳懿鍾은 경성제대를 나와 일본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청에서 농무과장을 지냈다. 白斗鎭 전 국무총리는 도쿄제대 상대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했다. 3공때 장관을 지낸 嚴敏永과 黃鍾律은 모두 일본 규슈(九州)제대 출신으로 嚴씨는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하여 군수를,黃씨는 만주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후 만주국 재정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신문 ‘만선(滿鮮)일보’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문교장관,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李瑄根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協和會) 간부를 지낸 기록이 있다. 3·4대 대법원장을 지낸 趙鎭滿은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해주지법 판사와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이들이 해방후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일제 당시의 행적을 무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애국지사묘역은 일제하 항일투쟁 공로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추서포함)받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친일의 ‘흠’이 있는 인물은 근처에도 가서는 안되는 ‘성역(聖域)’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친일단체 등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金鴻亮(77년 독립장),崔昌植(83년 독립장),李鍾郁(77년 독립장),尹益善(62년 독립장),李甲成(62년 대통령장) 등이 그들이다. 친일파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 林鍾國씨의 조사결과에 따르면,金鴻亮은 황해도 도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고,崔昌植은 그의 아내 金元慶(63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 교민단체인 계림회에 소속돼 친일활동을 한 의혹을 받고 있다. 승려로서 3·1운동에 가담했던 李鍾郁은 국민총력연맹 위원으로 불교계 친일에 가담한 일이 있으며 尹益善은 경성부(현 서울시) 원서정(苑西町) 총대(總代·지금의 동장에 해당)와 경성부 북부정회 총대회 간사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해방 후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李甲成은 상하이에서 이와모토(岩本正一)라는 창씨명으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임정 서무국장 林義鐸,유관순 열사의 오빠 柳愚錫씨 등의 증언)이 그의 생전에도 끊이지 않았었다. 장군묘역에는 1,2,3묘역 모두에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누워 있다. 제2묘역의 육군중장 李應俊,제3묘역의 육군중장 李鍾贊과 육군대장 출신으로 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군 ‘창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李應俊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당시 일본군 대좌(대령)였다.한국군 재임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참장군’으로 불리는 李鍾贊 역시 일본 육사출신(49기)으로 일본군 공병소좌(소령)로 남방전선에서 해방을 맞았다.3공 당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으로 朴正熙 전 대통령(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국가원수묘역 안장)과 같이 만주군에서 장교를 지냈다.지난 2월 대전국립묘지(장군묘역)로 이장한金昌龍(사후 중장 추서) 전 특무부대장은 만주 관동군 헌병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장군묘역에 있는 사람들은 건국후 창군과 6·25및 그 이후의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황군(皇軍)’의 장교를 지낸 인물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선열들/일제 항거 애국열사 등 1,341위 모셔/임정묘역엔 박단식·양기탁 선생도 국립묘지내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은 애국지사묘역(대전분소 포함)과 임정묘역 두 곳이다.이곳에는 한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순국선열을 비롯해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이 안장돼 있다. 98년 8월 현재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총 1,341위(대전분소 1,136위 포함),임정묘역에는 최근에 유해를 봉환한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 16위의 애국선열이 안장돼 있다.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애국지사들을 활동분야별로 보면,申乭石·李仁榮 등 의병장,李鍾一·洪秉箕 등 3·1운동 관련자,의거 당시 64세의 나이로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 의사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金相玉 열사등 의열투쟁가,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순국한 朱基徹 목사,외국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상을 전세계에 공개한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 박사,여류독립운동가 南慈賢 여사,‘독립신문’을 창간한 徐載弼 박사 등 항일 독립운동계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다. 93년에 조성된 임정요인묘역은 임정관계자중 국무위원급 이상의 요인들을 별도로 모신 묘역. 이곳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朴殷植 선생을 비롯해 국무령을 지낸 李相龍·洪震·梁起鐸 선생과 임시정부 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장을 지낸 金仁全 선생·孫貞道 목사,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盧伯麟 선생,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을 지낸 申圭植 선생,국무원 통위부 총장 金東三 선생,그리고 임정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趙擎韓(94년 3월 애국지사묘역에서 이장함) 등이 안장돼있다.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金九 선생과 尹奉吉·李奉昌 의사 등은 효창원묘역에,임정 내무총장을 지낸 申翼熙 선생 등은 수유리 묘소에 안장돼 있다.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가 만원이어서 최근에 작고한 애국지사는 대전 분소에 안장되고 있다. 柳寬順 열사와 같이 후손이 없는 무후(無後)선열들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봉안해 놓고 있다.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 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인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 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 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은경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 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북아일랜드 차량 폭탄테러/28명 사망·200여명 부상

    ◎신·구교 평화협정 위기 봉착/79년 이후 최악의 참사/IRA 탈퇴 조직 소행 추정 【오마·런던 AP AFP 연합】 북아일랜드 오마시 중심가에서 15일 하오(현지시간)차량 폭탄테러가 발생,28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부상했다. 오마시는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서쪽 100㎞에 자리한 신·구교도 공동거주 지역.영국군의 벨파스트 주둔 29주년 기념일에 맞춰 있은 이날의 폭탄테러는 79년 18명이 사망한 아일랜드공화군(IRA) 폭탄테러 이후 최악의 참사다.이로써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체결된지 4개월만에 위기를 맞게 됐다. 경찰은 테러에 앞서 벨파스트의 BBC방송국으로 ‘법원청사 밖에 폭탄이 설치됐다’는 경고전화가 걸어오자 주민들을 긴급 대피시켰다.그러나 차량폭탄 폭파로 저질러진 테러는 경고 전화 후 40분만에 주민들이 대피한 대형 슈퍼마켓 앞에서 터져 사상자가 많았다. 사고 현장은 희생자들의 시체와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부상자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으며 주변거리도 폭발 당시 깨진 유리조각과 쓰레기더미 등 파편으로 뒤덮였다. 이번 사건을자신의 소행으로 주장하는 단체나 개인은 아직 없다. 경찰은 아일랜드공화군에서 탈퇴한 조직 중 무장을 갖추고 맹렬한 활동을 벌여온 ‘리얼(진정한)IRA’를 꼽고 있다.휴전에 반대하며 아일랜드공화군에서 탈퇴했고 지난 1일에는 벨파스트 남서부 밴브리지에서 차량폭탄 테러를 감행,35명의 부상자를 냈었다.지도자는 지난해 IRA를 탈퇴한 폭탄제조 책임자로 알려졌다. 이와함께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과 ‘영원한 IRA’도 용의 선상에 올라있다. ◎북아일랜드 분쟁 약사 ▲1600년∼1700년:스코틀랜드 등에서 신교도들 대대적인 이주. 북부지방에 대거 정착하며 분쟁의 불씨가 됨 ▲1801년:영국,아일랜드 합병 ▲1905년:신페인당 창설 ▲1919년:반정부 무장투쟁단체 아일랜드공화군(IRA) 창설되며 독립투쟁 가열 ▲1972년:영국,북아일랜드에 군대파견하며 직접통치.폭력사태로 470명 사망 ▲1995년:영국과 아일랜드 정부,북아일랜드 평화안 발표 ▲1996년 6월:신페인당 불참하에 다자간 평화회담 시작 ▲1998년 4월: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체결.북아일랜드의 고도의 자치권 부여와 영국령 존속을 영국과 아일랜드,북아일랜드의 신·구교 각 파벌이 합의 ▲1998년 6월:북아일랜드 총선 얼스터통일당(UUP),신페인당 등 평화를 지지하는 정당들 승리 ▲1998년 7월:신교도들의 가두행진 둘러싸고 신·구교 갈등.어린이 3명 소이탄 공격으로 사망. ▲1998년 8월1일:‘리얼(진정한)IRA’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남서부 밴브리지에서 차량 폭탄 테러 감행,35명 부상.
  • 그해 8월15일/潘永煥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기고)

    ◎“탄피 만든다” 숟가락까지 압수/우리말 썼다며 툭하면 체벌/주린배로 모내기 노력봉사/열살 소년에도 광복은 자유 그해,1945년 8월15일은 유난히도 더웠다.샛강에서 미역을 감으며 실컷 놀다가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설핏하게 기운 때쯤,어른들의 흥분된 목소리에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해방이라니…’ 해방의 참뜻을 이해하기에는 열살이란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 철부지의 눈에도 일본인은 미움의 대상이었다.공출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들이닥쳐 헛간을 뒤지고 북데기 쌓아놓은 곳을 대나무칼로 찔러대던 자들.탄피를 만들어야 한다며 제사때면 사용하던 놋그릇·놋대야·촛대와 숟가락까지도 거두어 간 자들이 아닌가. 2학년때부터 노력봉사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이곳 저곳 끌고 다니면서 모내기 일을 강제했던 그들이 아닌가.허리는 끊어져라 아픈데 못줄은 순식간에 넘어오고 뒤돌아보는 논둑은 아득히 멀기만 하여 주먹밥 하나로 때운 뱃속은 쪼르륵 소리가 나곤했다. 선배들 틈에 끼어 부지런히 모를 심지만 아차하는 순간,내 할당구역에 빈곳이 생기고 만다.허둥지둥하는 내 앞에 ‘텀벙’ 소리를 내며 흙덩이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얼굴 가득히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반 담임선생인 ‘나리타’란 여선생님이 화려한 양산을 받쳐들고 논둑에 서 있었다.빨리 심으라는 경고였다. 모심기 말고도 30리나 떨어진 산에 가서 송진 붙은 관솔을 따오던 일,몸에 호박씨 두개를 주고 가을에 늙은 호박 두 덩이씩 가져오게 한 일,노는 시간에 우리말을 썼다 해서 벌을 세우던 일,조선인은 위생관념이 없고 더럽다고 조회때마다 되풀이하던 일인 교장 ‘시라이시’… 쌓였던 악감정이 열살짜리 소년을 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했다.이웃에 서도(西島)라 불리던 일본인 지주가 살고 있었다.으리으리한 정원에 커다란 기왓집을 요철로 된 함석 울타리가 마치 국경처럼 위세있게 둘러싸고 있었다.그 울타리에다 빨간색 연필로 이렇게 써 갈겼다. ‘다이닛퐁 데이코쿠 와루이 야쓰’. ‘대일본제국 나쁜 자식’이란 일본말이다.대일본제국은 일본을 통칭하던 말이었다.나는 일본의 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말로 공부를 했다.강도 높은 군국주의 교육도 결국 평범한 한 조선 소년을 일본 소년으로 바꿔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분의 열기가 마을에서 수증기처럼 번져나가고 있을 때,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로 달려갔다.뚜렷한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고 뭔가 희한하고 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학교 뒤편 우물가에는 교무실 중앙벽면 감실에 신주처럼 모셔져 있던 석고상이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다.박살이 난 일본의 군신(軍神)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장의 흉상,누가 내동댕이쳤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덩달아 하얀 석고 조각을 밟아 뭉갰다. 해방과 함께 내 이름을 되찾았다.요네다 아오마쓰(米田靑末)라는 이름 때문에 내게는 늘 ‘연예대장’이란 불명예의 별명이 따라다녔다.그 별명이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해방이 내게 가져다 준 실질적 선물인 셈이었다. 이렇게 말과 글과 함께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은지도 어언 53년,우리는 과연 일본에 빼앗겼던 것을 모두 되찾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 강간 센터/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권위원회에 13일 제출된 맥두걸 보고서는 일제(日帝)의 군위안부 동원문제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할 만하다. ‘전시 조직적 강간,성적 노예 및 이와 유사한 행위에 대한 최종보고서’란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일제의 군대위안소를 ‘강간센터(rape center)’라고 규정했다.기왕의 관련보고서나 언론보도의 영어 표현이 ‘매춘집(brothel)’이었던 것에 비하면 일제 군위안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한 명료한 용어선택이다. 보고서는 또 일본정부는 법적 책임을 지고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며 국제적으로 끝까지 책임자를 체포,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했다.“유엔은 군대위안소 문제와 관련해 책임있는 모든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 기소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일본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체계를 정비하고,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패널을 설치해야 하며,일본정부는 1년에 두차례 유엔 사무총장에게 구제조치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직접 나설 것을 권고했다.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으로 문제를 얼버무리려 하고 있는 일본 여성기금의 부적절성도 지적했다. 일본은 이 보고서의 정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지난 96년 유엔차원에서 처음으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와 유엔인권위의 결의안을 유야무야 넘겼던 것처럼 이번에도 적당히 피해가려 해서는 안된다.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국가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맥두걸 보고서의 권고를 따라야 한다. 최근 나카가와 쇼이치 일본 농수산부 장관의 위안부 관련 망언과 이를 둘러싼 일본 보수언론의 태도를 보면 일본의 성실한 자세를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따라서 유엔은 맥두걸 보고서를 원안 그대로 채택하고 군위안부문제 해결에 적극 개입해야 할 것이다.지난 96년 일본의 강력한 로비에 밀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유엔인권위의 위안부 관련 결의문이 부속문서 형식으로 채택됐을때 일본이 ‘승리자’인양 하고 있다고 제네바 발(發) 외신이 보도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당시 일본 외무성은 결의문에 ‘만족’을 표시했고 일본의 일부 언론은 “유의한다”는 표현을 들어 “사실상 불채택”이라고 해석했다.이번에도 그와 같은 결과를 빚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쟁중 성적노예 범죄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제임을 유엔과 국제사회는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끔찍한 집단강간이 자행된 알제리 내전과 동티모르사태는 일제의 군위안부 문제가 철저하게 청산돼야 하는 이유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 日 위안소 운영 조직적 전쟁범죄/유엔인권위소위 보고서

    ◎日 정부·방치한 고위인사 법적 책임져야 2차대전 당시 일본 정부의 군대위안소 설치문제가 2년만에 다시 유엔 차원에서 다뤄지게 됐다. 외교통상부는 13일 군대위안부 문제가 포함된 ‘전시 조직적 강간,성적 노예 및 이와 유사한 행위에 관한 게이 맥두걸 특별보고관의 최종보고서’가 이날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인권소위)에 제출됐다고 밝혔다. 유엔에서 군대위안부 문제가 논의된 것은 96년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의 보고서에 따라 인권위에서 결의문을 채택한 이후 이번이 두번째다. 미국의 여류 인권변호사 맥두걸의 이번 보고서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비해 강도 높게,또 포괄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 맥두걸은 일본의 군대위안부 동원 행위를 명백한 강간으로 규정,‘위안소(Comfort Station)’라는 명칭을 ‘강간센터(Rape Center)’로 바꿨다.이와 함께 군대위안부 동원에 대해 인도에 반한 범죄라고만 지적한 쿠마라스와미와는 달리 맥두걸은 노예제 및 노예거래,전쟁범죄로서의 강간이란 죄목을 추가했다.또 이런 범죄는 국제관습법상 보편적 관할권을 가지므로 일본이 아닌 다른 국가도 재판권을 가지며 시효도 없다고 밝혔다.그리고 정부와 범죄를 저지른 개인,이를 방치한 고위인사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보고서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개입을 권고한 부분이다.다시 말해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 일본 정부와 함께 국제패널을 설치,피해자 확인과 배상수준 결정 등 군대위안부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라는 것이다. 유엔인권소위는 맥두걸 보고서에 대한 토론을 거쳐 빠르면 다음주 초 결의문을 채택할 예정이다.하지만 맥두걸의 강력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인권소위 결의문의 수위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 金 대통령 경기 북부 수해지역 방문

    ◎“피해 다시 없게 防災체계 재점검”/이재민 불편없도록 만전을/질병막게 쓰레기 신속 처리/피해복구 民·官·軍 하나돼야 金大中 대통령은 12일 의정부시청과 안골·송추지역 등 경기 북부 수해지역을 방문,집중 호우에 따른 피해상황을 보고받고 이재민 구호 및 피해 복구대책에 만전을 기할 것을 관계기관에 지시했다. 또 이번 폭우피해를 계기로 정부의 재난대비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만큼 철저한 재점검을 실시,피해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金대통령은 특히 안골수해현장의 경민여상에 마련된 이재민수용소를 방문, 이재민 구호대책 지원을 위해 제2차 추경예산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이재민들의 실상을 파악,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복구를 하라”고 관계부처에 지시했다. 아울러 폭우로 아까운 생명이 희생된데 대해 유가족과 피해자,수재민들을 위로하고 앞으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모든 위험 가능성에 대비하도록 강조했다. 또 金대통령은 ○사령부를 방문해서는 군장병들이 희생된데 대해 위로의 뜻을 표시 “국민이 고통을 겪고 환란 속에 있을 때 국민을 돕는 것이 진정한 민주국가 군대의 자세”라고 치하했다. 이어 “우리 군이 군내부의 피해를 제쳐놓고 민간인 피해복구에 먼저 나선것은 바림직한 일”이라고 평가하고 “불행한 가운데서도 민·군이 하나라 되도록 앞으로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金대통령의 수해지역 방문에는 金重權 비서실장과 安周燮 경호실장, 李康來 정무·康奉均 경제·林東源 외교안보·曺圭香 사회복지·朴智元 공보수석 등이 수행했다.]
  • 삶을 위한 종교/知詵 스님·백양사 주지(서울광장)

    “정치인이 되지 말라,종교인이 되지 말라,교육자가 되지 말라,법률가가 되지 말라,의사가 되지 말라,언론인이 되지 말라.” 어렸을 때 존경하는 분에게 들은 말씀이다.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이 여섯가지 직업에 대하여 함부로 택하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 여섯가지 직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한 생각 잘못 판단으로 사회와 민족역사에 끼친 악영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특히 인명(권)을 살상하고,사회전반에 결쳐서 좌절과 회의,엄청난 분열과 갈등구조를 형성하여 증오와 적개심을 갖는데 일조하였기 때문이다. ○사찰훼손 年 수백억 피해 최근 불교계 각 사암에는 비상이 걸렸다.과거에 없었던 야경꾼을 채용하거나 심지어는 개를 키우는 사찰(전통적으로 사찰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음)도 늘어나고 있다.그것은 근래에 와서 갑자기 사찰 방화 및 성상 훼손,마애불상과 벽화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 긋기 등의 공격적인 불교침탈 행위로 인하여 전통과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들이 훼손 및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같은 사건이 해마다 급증하여 일년이면 수 백억의 물질·정신적 피해를 주고 있다. 내 부모를 잘 모시면 남의 부모도 잘 모시고 내 형제간에 우애 잘하고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도 인간관계가 원만한 것이다.내 종교가 소중하고 진리로 섬기는 것처럼 남의 종교도 소중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여러 종교가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이다.이 세상에 종교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자.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내가 대도시의 어느 절에 있을 때 일이다.어느날 예쁜유치원 아이들이 절로 몰려오길래 반갑게 맞이하다가 어떤 아이가 법당을 가르키며 “저기 마귀가 있대”하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한 적이 있다. ○통일보다 힘든 종교화합 생각해보면 과거 이승만 정권이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식을 한 이래 지금 일부 구청장이 그와 같이 취임식을 갖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어 왔다.YS정권이 청와대 불상을 옮기고 온갖 사건이 줄줄이 생기자 부랴부랴 원상 복원했다거나 한국 국민 정서에 반하는,즉 대통령들의 청와대 예배보기에서부터 해병대사령관이 예수의 군대를 만들겠다며 서울역 앞에 현역군인들을 집단으로 모이게 하여 간첩은 잡지 아니하고 선교활동을 하게 하는 행위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종교편향 행위들… 각설하고. 종교가 인간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이 지구상에 모든 이데올로기가 종식될 수 있어도 종교이데올로기는 인류역사에 끝까지 남아 있을 것같다.그래서 종교화합은 통일보다 어렵고 동서화해보다 더욱 어려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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