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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主事의 두얼굴(민원공무원 비리 실태:1­2)

    ◎작년 비리공무원 절반이 6·7급/대부분 박봉… 행정업무 수행엔 핵심/지역토호세력화 경향… 최근 파워 위축 200억원대의 재산을 형성한 전직 서울시 6급 주사(主事)와 박봉 속에서도 성실히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주사들.이런 모습이 주사들을 ‘두개의 얼굴’로 비치게 한다. 주사는 중앙부처에 2만1,000여명,지방에 3만9,000여명으로 모두 6만여명. 중하위 공직자의 핵심이다.하지만 그들의 실제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吳錫弘 교수는 “간부직에 비해 중하위직 공무원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라며 “이에 대한 연구를 서둘러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중하위직 공직자 사정을 계기로 주사는 누구이고,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은 어떤지 등을 알아본다. ◇행정의 전문가=주사가 소속 기관의 행정 전문가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그들은 7급 주사보나 9급 서기보로 공직을 시작해 한부처에서 10∼20년씩 근무한 베테랑이기 때문이다.나이로는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으로 의욕적으로 일할 나이이다. 서울시 S구청의 한 국장(서기관)은 “사무관인 과장이 기안 및 인력관리업무를 하는데 주사의 도움은 결정적”이라고 말했다. 중앙부처의 주사는 대부분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다.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대졸이었거나 고졸로 시작했더라도 야간대학이나 방송통신대학은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국무총리실의 S주사는 성취동기가 높은 편에 속한다.지난 70년대 말 9급으로 공직에 들어와 K대에 진학했다.학사장교로 군대를 마쳐 그는 고시출신들이나 갖는 예비역 중위의 군경력도 갖고 있다. 하지만 감사원이 지난해 징계 또는 문책을 요구한 비리공무원은 모두 851명.이 가운데 5급 이상 고급공무원이 318명이고 8·9급이 92명인데 비해 6·7급은 420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감사원의 당국자는 대부분의 공무원 비리가 6·7급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까닭을 “권한은 많고 책임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부처 업무를 꿰뚫고 있는 전문성이 비리 소지를 안고 있다는 얘기다.즉 비리공직자들은 법 규정을 가능한 좁게 해석하고민원인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가 돌아가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 구청 사무관은 “민선 자치단체장 시대를 맞아 직원들이 한 곳에 장기간 근무하면서 지역 토호세력으로 자리잡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金正吉 행정자치부 장관이 저서 ‘공무원은 상전이 아니다’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한 직업으로 지목한 구청 계장이 바로 주사들이다. ◇사라지는 주사파워=‘내무부의 주사가 시골에 내려가면 도지사가 도의 경계까지 마중 나왔다’ ‘중앙부처의 주사가 밤중에 도청에 전화를 걸어 자료 제출을 요구하면 도청 국장이 밤새 야간열차 타고 올라와 아침이면 어김없이 책상에 올려다 놓았다’­옛 내무부(지금의 행정자치부) 출신 관리들이 시절좋았던 때를 회상하면서 들려주는,약간은 과장섞인 얘기들이다. 주사들이 행정을 좌지우지했던 이른바 ‘주사행정’ 시절이다.중앙부처의 한 국장급 공무원은 “70년대초 공무원생활 초기에 국장들이 과장들을 꾸지람하면서 ‘주사에게 일을 맡기지 말고 직접 하라’고 주문했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시도 교육청을 관할했던 교육부는 옛 내무부와 함께 ‘주사행정’을 펼쳤던 대표적인 중앙부처로 꼽힌다.과천청사의 부처로는 현업부서가 있는 보건복지부,환경부,노동부 등이었다.주사행정은 역시 지방자치단체로 내려갈수록 위력적이었다. 계장을 맡고 있는 시·군·구의 주사들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3∼4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업무분장권을 행사했다.직원들의 서류에 결재를 하고 결재서류를 들고 구청장이나 시장,군수와 직접 얼굴을 마주했다.하지만 주사행정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과천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40대 후반의 사무관은 “공무원 공채가 적던 옛날에는 주사 중심의 행정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특히 올해 일선 구청의 계장 자리가 없어져 주사의 파워는 더욱 위축됐다. 공직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국대과(大局大課)를 지향한 정부가 올들어 계장직을 없애고 담당제도로 바꾼 것이다.바꿔말하면 업무분장권도 사라지고 계원의 한 명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중앙 부처에서는 주사가 점차 줄어들어이제 ‘귀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국무총리실과 외교통상부같은 곳은 7∼9급은 찾아볼 수 없고 하급직원이라고는 6급 주사가 있다. 행정자치부는 정책부서에 걸맞게 중앙부처 하위 직원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지난 96년에 중하위직 공무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공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6급 이하의 정원을 12%(826명)감축하는 대신 5급 사무관을 257명 늘렸다.국세청이 34명으로 가장 많이 감축됐고 철도청 31명,조달청 25명,내무부 및 검찰청 20명,국방부 19명 등의 순이다. 하지만 주사가 여전히 ‘힘’을 쓰는 곳도 남아있다.세무소의 출장소,농산물 검사소의 출장소,세관감시소 같은 곳의 관리 책임자는 주사이다.정부 세종로청사 우체국장 자리도 주사이고 전국에 이런 자리는 2,000여곳이 된다. 업무량과 비중을 감안하면 주사가 맡아도 되는 자리라는 게 행정자치부의 설명이다. ◎호칭 멋대로/“주사로 부르지 마세요”/“어감 안좋다” 불만… ‘선생’으로 불려/기초지자체선 7∼9급이 “주사”로 통칭 ‘주사로 부르지마세요’ 6급 주사들의 ‘이상한’ 주문이다.그들은 주사로 불리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지방자치단체에서 중앙부처에 일을 보러 갔던 金모 서기관(42)은 6급 직원을 주사라고 불렀다가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당사자가 드러내놓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주사는 ‘선생’으로 통한다.서울 세종로청사의 한 사무실에서 상급자가 주사를 부를 때는 이름 석자 뒤에 ‘선생’이나 ‘씨’라는 호칭을 붙여준다.동료들끼리는 ‘씨’라는 호칭보다 ‘선생’을 선호한다.주사를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직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종로청사뿐 아니라 과천청사를 비롯한 중앙부처에서도 마찬가지이다.만약 민원인이나 외부인이 관청에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서 6급 공무원에게 ‘X주사님’이라고 경칭을 쓰더라도 그들은 그리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X주사님’이라고 부르면 공직사회와 거의 접촉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 주사들은 ‘주사’라는 호칭이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싫어한다.주사는 이제 하급 공무원의대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지방의 기초자치단체에서는 7∼9급 직원들을 모두 주사로 부른다.경기도의 한 군청 직원(9급)은 “7급 주사보,8급 서기,9급 서기보는 모두 주사로 불리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부처의 한 과장(서기관)은 “주사는 사람을 비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며 “하위 직원을 일컫는 표현이고 때로는 부정부패의 주범이라는 인식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서울 강서구청 J모 계장(주사)도 “주사라는 호칭은 어감도 좋지 않고 경직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불만스럽다”고 말했다. 계장직을 맡고 있는 기초자치단체의 주사는 ‘계장’ 호칭에 만족하고 ‘주사’라는 호칭을 하급 직원에게 물려준 셈이다.광역시에서는 ‘선생’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대신 이름 석자 뒤에 ‘씨’를 붙인다. 이런 탓에 주사들이 계장으로 불릴 수 있는 기초자치단체 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긴 것은 최근 일이다.행정자치부의 河모 사무관은 “주사들이 일선 시·군을 선호하고 있다”며 “중앙부처 근무자가 지방자치단체에 할애요청을 하는 경우가 적지않다”고 말했다. 할애 요청은 상대방 행정기관에 자신을 받아줄 용의가 있는지를 묻는 신청이다.河사무관은 앞으로 호칭 좋고 권한도 더 많은 시·군으로 옮아가려고 할애 요청을 하는 주사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환도 많다/비리터질때마다 ‘부패집단’ 매도 우려/급여 적어 생활 빠듯… 사회적 인정 원해 박봉에도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묵묵히 일하는 주사들은 동료들의 비리사건이 밝혀질 때마다 안타깝다.마치 주사 전체가 비리집단으로 매도당할까 걱정스럽다. 자식들 보기가 민망스럽고 친구들과의 모임도 두렵다.K구청의 한 주사는 “솔직히 동창회에 나가 친한 친구들 만나는 일도 걱정”이라고 말했다.그는 “환경미화원이 대학생 아들과 바카스 한 병을 마실 수 있는 사회적인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불만은 월급.지난 74년부터 공직에 들어와 24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한 주사(49)의 지난달 월급은 기본급 110만원.각종 수당을 합해 170만원.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살기가 빠듯하고 일반기업체에 다니는 친구들에 비하면 형편 없이 적다고 불평한다.그는 월급이 올라야 사회적인 평가도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50살 안팎의 나이든 주사들은 때때로 고시나 7급시험을 거친 ‘새파란’ 사무관이 윗사람으로 와서 반말을 쓸 때면 서글퍼진다고 한다.
  • 탈북자 대책/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주민 3명이 또다시 한국에 귀순해왔다.13일 북한군 중좌출신 심신복씨가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경유,망명한 뒤를 이어 14일에는 북한군 남자 장교 1명과 여자 하사관 1명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함께 귀순했다. 49년 이후 탈북자는 이번 3명을 포함,모두 926명이며 90년 이후 현재까지 319명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지금까지 탈북자의 90% 이상은 ‘자유와 빵’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에는 지난 50년동안 북한 정치사에서 권력의 핵심역할을 담당했던 고위 엘리트계층까지 잇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고 있어 북한정권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주체사상의 철옹성 속에서 일사불란하게만 여겨졌던 북한체제에서 사상적 일탈현상과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 군대가 총만 쏘지 않는다면 6개월 이내에 북한주민의 4분의 1이 탈출할 수 밖에 없다는 보고서 내용은 북한체제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못하다는 점에서 북한에 주는 타격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북한 주민들의극심한 생활고와 열악한 인권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앞으로 주민들의 탈북현상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탈북자 문제는 정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더욱이 현재 탈북자 가운데 234명이 직업이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밝혀져 이들에 대한 생활안정 대책이 시급하다. 탈북자의 절반 이상이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한 갈등 속에서 범법자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속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보호대책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분단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찾아온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민국에서 인간적 행복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가 탈북자들에 대한 정착금 지원을 2배로 상향조정하는 것을 비롯한 ‘북한이탈주민보호법’시행령을 연내 개정키로 한 것은 시의 적절한 대책으로 평가된다.탈북자 대책은 정착금 지원이라는 일회성 지원방법보다는 이들이 한국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직업훈련이나 사회적응훈련 같은 항구적인 생활안정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탈북자를 위한 정부의 효율적 대책과 함께 국민적 관심,특히 그들이 한국인으로 살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大韓每日申報/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민족운동사와 언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우선 한국언론사의 측면에서 이 신문은 몇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1904년 7월18일 창간돼 1910년 5월21일 일본 통감부에 팔리기까지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 민족지였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총 6면에 4개면은 영문,2개 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으나 이듬해 8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분리했고 1907년 5월에는 한글전용 신문을 새로 발간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한꺼번에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발행부수도 당시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부수를 합한 것의 2배가 넘는 1만부를 기록했다. 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항일 구국의 선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조약의 강제체결,高宗의 헤이그 밀사 파견과 퇴위,구한국 군대해산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것은 물론 고정란을 두고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기사와 사설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당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음을 증언했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성격은 발행인 裴說(Ernest Thomas Bethell)이 영국인이어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일본측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도 기인하지만 신문발간에 참여했던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 우리 선각자들의 역할이 컸다. 裴說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梁起鐸은 전무·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의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항일논조를 주도했다.부친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관여했던 그는 한학의 바탕에 양학문을 접목하고 동학당과도 관련을 맺었던 우국지사였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으로 활동했고 일제 강점이후 서간도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한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던 朴殷植은 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신교육 구국,사회관습 개혁,대동사상등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섰고 나중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역사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했다.또 朴殷植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丹齋 申采浩는 민중계몽을 위한 사설과 함께 ‘독사신론’등 역사관계 논문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그의 대표적 저서 ‘조선상고사’의 주체적 민족주의 사관은 이때 싹텄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태어나는 서울신문의 일원으로서 민족과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섰던 선배들의 꿋꿋한 기상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민다.
  • 新구국운동 중심돼라/鄭晋錫 한국外大 교수·언론사(특별기고)

    ◎민족紙 ‘대한매일’ 재탄생에 부쳐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던 한말 구국의 필봉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던 민족언론의 본산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영국인 사장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과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모였던 이 신문은 민족진영의 마지막 보루였다.일본 헌병사령부는 러일전쟁 후 민족언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대한매일에는 검열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비통한 소식을 들은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검열을 받지 않고 황성신문에 게재한 다음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목놓아 울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고 신문은 정간당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대한매일은 바로 문제가 된 황성신문의 논설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진상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헤이그에 갔던 이준 열사가 이국 땅에서 한을 품고 분사한 소식과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고종의 비극,구한국 군대의 해산 등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했던 신문이 대한매일이었다.용기 있는 기사,피끓는 논설,시간을 다투어 발행한 호외 등을 보고 국민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직필정론’의 표본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매일이었다.통감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대한매일의 직필정론이 의병들을 더욱 격동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오죽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의 기사 한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겠는가.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것도 대한매일이었다.전국의 성금이 대한매일로 쏟아져 들어왔다.나라의 빚을 갚자는 뜨거운 정성을 담아 유생과 상류 지도층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탁했다. 대한매일은 국한문판,한글판,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3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이었다.일본은 대한매일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공보비서이자 영어신문 편집자인 즈모토(頭本元貞)를 불러다가 서울프레스를 직접 발행해 보았으나 대한매일을 당할 재간은 없었다.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협박하고 회유하면서 신문의 배포를 방해하는 수법도 써 보았다.그러나 국민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발행되는 신문의 붓을 꺾을 수는 없었다.수년간에 걸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공작으로 마침내 배설은 3주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통감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였다.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일제의 강점 후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과 대한매일에 근무했던 애국지사들을 또다시 투옥하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빛나는 전통 계승을 대한매일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태풍권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다.나라가 망하니 민족언론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한일합방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대한매일은 다시 살아났다.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여! 민족언론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라.신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라.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2(공직 탐험)

    ◎보직순환 빈번… ‘생활인’ 점슈 F학점/사령부 참모·연대장·참모장 거치며 장군 ‘수습’/평균 전속 15회·이사 12회·가족과 별거 60% 육군의 경우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는 비율은 20대 1이다.예를 들어 중령 2000명 중 100명 정도만 대령을 다는 것이다.그 100명을 또 육사출신,ROTC,3군사관학교,간부후보 등 출신별로 ‘몫’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 10월 초 발표된 올해 대령진급 확정자는 모두 150여명.육사 34기 중 일부가 올해 대령 ‘막차’를 탔다.이번에도 누락된 사람은 특수병과를 제외하고는 일단 대령꿈을 접어야 한다.후배인 35기 선두 주자들이 이번 진급자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이다.이렇게 스타의 꿈을 안고 육사에 들어갔다가 대령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수가 한해 졸업생의 절반이다. 일단 대령을 달고 나면 받는 보직이나 대우가 중령 때와는 질적으로 달라진다.일반 기업으로 치면 상무와 전무의 차이다.통상 대령으로서의 첫번째 보직은 군사령부,군단급의 참모.야전이 아닐 경우 육군대학 같은 교육기관의 처장자리 등이 이 참모보직에 해당된다.참모의 임기는 1년이다.1년을 못채우고 도중하차하면 ‘토막보직’이라 한다.장성 진급시 결격요인이 될 수 있다.자리를 바꾸며 2년여 참모를 하고 나면 연대장으로 나간다.후방의 동원연대장을 맡기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전방 전투연대장을 하는 게 경력관리에 훨씬 도움이 된다.물론 그런 만큼 경쟁도 치열하다.연대장 임기는 18개월에 서 24개월 사이로 돼있지만 최근에는 보통 18개월 정도 한다. 연대장을 큰 과오없이 마치면 그 연대가 배속된 사단이나 다른 사단의 참모장을 한다.참모장을 무사히 마치고 ‘근무성적’ ‘출신성분’ ‘연줄’등이 모두 괜찮을 경우 육본 등 정책사령부의 과장으로 진출해 2∼3년 근무하며 장성진급의 기회를 기다린다.이상은 물론 동기생들 중 선두 주자들이 거치는 엘리트 코스다.보병으로서 별을 달려면 반드시 거치는 필수코스 중 하나인 셈이다.그렇지 못한 고달픈 우회로도 물론 허다한 게 또한 군대이다. 사단급의 참모장도 경력관리면에서의 유불리를 떠나 장군 수습을 받는 기간이라고 할 만큼 모든경험을 두루 섭렵하는 필수보직이다.인사,정보,작전,군수 등 6∼8명의 중령급 참모를 거느리고 사단의 운영,살림살이를 맡아 처리하기 때문이다.때문에 참모장은 대기업의 전무 역할과 흡사하다.사단장­부사단장­참모장의 관계는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부통령­국무총리에 비유되기도 한다. 부사단장은 준장 혹은 고참 대령이 맡기도 하지만 통상 참모장 만큼 ‘장래가 창창한’ 대령이 가는 자리는 아니다.대령 부사단장의 경우 참모장보다 4∼5년 선배 대령이 하게되는데 반드시는 아니지만 전역하는 경우가 많다.이와 관련,장교들은 “부(副)자가 붙는 보직은 별볼일 없다”고 말한다.선임 지휘관을 중요시하는 군대 속성상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렇듯 빈번한 보직 순환 탓에 ‘생활인’으로서 대령의 점수는 한마디로 제로에 가깝다.국방부 자료에서 그대로 나타난다.평균 전속횟수 14.9회,평균 이사횟수 12.4회,자녀 전학횟수(초등∼중·고교) 12.4회,가족과 별거비율 60%.실제 대령 개개인이 털어놓는 가정 생활의 불편함과 초라함은 듣는 사람이 숙연해질 정도다.
  • 민주열사 열전:11/‘녹화사업’ 의문사:상(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제순화·프락치 강요에 ‘비극적 저항’/정 烈士 시위현장서 곧바로 징집… 의문의 죽음/5공 군당국 부모에 ‘이의제기 포기’ 각서 간청 광주학살 등 폭력을 자행한 5공화국의 全斗煥정권은 80년대 초 국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면서 독재정권의 기반을 다졌다.공포의 경찰국가 같은 상황이었지만 대학의 ‘반독재 반군사정권’ 시위와 함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5공 정권은 대학 시위를 막기 위한 특별조치를 강구하기에 이른다.그중 하나가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綠化)사업’이다. ○대학생 477명 강제징집 녹화사업은 강제징집된 대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밝혔으나 그 과정에서 여섯명의 의문사(死)가 나왔다.본래 군대갈 나이가 됐더라도 대학에 다니고 있으면 퇴학·휴학 등의 학적변동이 없는 한 신체검사와 입영이 연기된다.아울러 신검과 입영은 각각 20일,30일 전에 통지서와 영장이 송달된 뒤에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그러나 5공정권은 81년 11월부터 시위저지책의 하나로 학생들을 강제징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버젓이 대학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됐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와 구타와 함께 조사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곧바로 군부대로 끌고 갔다.병역법상의 사전통지 조항을 정면으로 무시했고 대학생 입영의 필수요건인 학적변동도 대부분 사후에 이뤄졌다. 6공이 들어선 88년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5공정권은 83년 말까지 2년 동안 이같은 강제징집으로 447명의 대학생을 억지로 군대에 보냈다.자진 휴학 등 정상적으로 학적이 변동되어 입대하는 경우와는 다른 이 ‘특수 학적변동’ 입대자들 가운데는 정상적인 신검을 받았을 경우 입대할 수 없는 신체상 결격사유나 가정환경의 학생들이 상당수 포함됐다.연령 미달자도 있었고 소아마비로 신체가 불편한 사람과 3대독자도 끌려갔다. ○장애자·3대 독자도 끌어가 강제징집은 강제징집으로 끝나지 않았다.당시 군 보안사령부가 입안한 ‘녹화사업’이 기다리고 있었다.‘녹화사업은 병역법에 의거,학원소요 관련 학사징계로 83년 11월까지 입대조치된 자 447명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에서 밝혔다.문제학생들의 급격한 입대 증가 추세로 좌경의식의 군내 유입이 우려돼 보안사에서 이 ‘녹화사업’ 계획을 수립,많은 의식화 오염자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갖게 했다고 이때 국방부는 덧붙였다. 그러나 강제징집되어 군에서 녹화사업에 동원된 학생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그들은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빼내고 이를 탄압하기 위해 보안사가 펼친 강제순화 및 관제프락치 공작활동이라고 주장해 왔다.녹화사업은 정신적인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 작성으로 시작된다.의식 상태를 면밀히 심사하고 체제를 긍정하도록 하는 의식 개조작업이 뒤따른다.소속 군부대 및 서울 보안사 분실에서 행해진 운동권학생들의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은 보름에서 두달간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녹화사업은 그러나 ‘순화됐다’는 맹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순화’된 학생에게 이를 입증할 관제프락치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대개 휴가 형식으로 사회에 내보낸 뒤 대학 선후배 등을 만나 활동상황,특이 동향의 정보를 수집,보안대에 보고하도록 강요한다.갑자기 군에 끌려온 학생들은 이같은 녹화사업으로 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84년 초 강제징집된 6명의 대학생이 보안사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학원가에 돌았고 곧 정치·사회문제화됐다.84년 6월 당시 尹誠敏 국방장관은 국회에 나와 ‘학적 변경과 관련한 입대자 중 81년이후 군에서 사망한 인원은 자살 4명(정성희 이윤성 김두황 한영현),군기사고 1명(최온순) 등 5명이며 자진휴학 지원입대해 자살한 1명(한희철)을 포함하면 모두 6명’이라고 밝혔다. ○선후배 활동상황 보고 강요 尹관은 이같은 인명 손실은 학원사태 관련 군입영자에 대한 차별대우로 야기된 결과가 아니라고 강조했다.물론 ‘강제징집’ ‘녹화사업’이란 말도 쓰지 않았다. 녹화사업이 82년 9월부터 84년 11월까지 265명에 실시됐다고 밝힌 88년 국감 때도 국방부는 의문사에 대해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다만 녹화사업이 정치문제화함에 따라 84년도에 녹화사업 업무를 중단하고 보안사 전담부서를 폐지했다고 밝혔다.관련 자료도 3년 보존기간이 지나 폐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단체와 가족이 제기하는 녹화사업 의문사는 심증만 있을 뿐 진상을 알기가 극히 난망한 실정이다.여섯명의 의문사 중 ‘강제징집 사망1호’인 정성희씨의 경우를 먼저 살펴본다.(나머지 5명은 다음 회에서 보도할 예정이다) 81년 연세대 영독불문학 계열에 입학했던 정성희는 대학생활 8개월 만인 11월25일 교내시위 현장에서 20여명의 교우와 함께 연행됐다.이중 15명이 강제징집당했다.연행 3일 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군에 강제로 입대한 그는 82년 6월8일 첫 휴가를 나와 친구,가족들에게 보안대의 감시 등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다.귀대한 지 달포 후인 7월23일 아침 갑자기 사망통보가와 가족이 전방으로 달려가자 이날 새벽 0시10분 철책근무 중 목에 M16소총 4발을 발사해 자살했다는 설명이었다. ○사망현장 답사요구 묵살 군당국은사고현장이 민간인 통제구역의 최전방이므로 현지답사가 불가능하다며 간단한 도면설명과 함께 자살임을 믿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부모로부터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그리고 사망사인에 이의없고 이후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사체를 처리했다.유서는 없고 ‘백양로를 한번 더 걸어보고 싶다.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등 8줄 정도의 낙서만 보여주었다고 한다. 84년 국방부가 국회에 보고한 사망원인에 따르면 입대해 평소 사회제도에 불만을 토로했으며 사고 당일 전방교육 실습차 입소한 대학생 1명과 복초근무를 하면서 “순수한 철학도의 소원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는 것이다.88년 국감자료는 보안사 정훈교육 이전 사망자로 염세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정성희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정성희와 다른 5명의 의문사는 민주화를 열망했던 학생들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극적 저항이었다. □정성희 열사 연보 ▲1962년 인천 출생 ▲81년 부평고 졸업 연세대 영독불계열 입학 ▲81년 11월25일 학생시위로 연행 ▲81년 11월28일 강제징집 ▲82년 7월23일 사망 ◎당시 고려대생 양창욱씨 ‘녹화사업’ 회고/1주일간 심한 구타뒤 ‘감옥’‘군입대’ 택일 강요/보안대 조사땐 ‘감쪽같이 죽을수도’ 공포 엄습 현재 부천에서 ‘어린이 과학실험교실’을 내고 있는 양창욱(38)씨는 고려대 4학년 때인 83년 3월 문과대 시위주동자로서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다.다음은 그의 녹화사업 회고. 경찰서에서 1주일간 심하게 두들겨맞은 뒤인 3월7일 갑자기 부모를 불러오더니 ‘감옥에 보내겠느냐,군대에 보내겠느냐’며 양자택일을 강요했다.부모들이 군입대 각서에 서명한 직후 춘천 보충대로 가서 요식적인 신검을 치렀다.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서류작성에 불과했다. 동해에 있는 훈련단에 보내져 6주 훈련에 들어갔다.보름 만에 부친상을 당해 휴가를 나왔는데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슬픔도 슬픔이지만 해방감에 당황할 정도였다. 3개월쯤 지난 뒤인 6월 초 배치된 철책 초소에서 강릉 사단사령부 보안부대로 소환됐다.하룻밤을 묵으면서 행정고시 출신이라는 모 중위로부터 친구,학내 동향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다.구타는 없었다.얼마 후 같이 강제징집된 친구 김두황의 죽음을 우연히 전해들었다. 10월 사단 보안대의 그 중위와 함께 서울 세운상가 뒤 아파트로 이동,녹화사업을 받았다.아파트 안은 오직 책상 하나와 백열등뿐이었고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조사가 진행됐다.1주일간 이곳에 혼자 갇혀 있으면서 16절지 300장에 달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다.옆 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구타나 고문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순화교육이 끝났다는 표시로 태극기 아래서 사진을 찍더니 8일간의 휴가를 주면서 학교,서클과 관련해 몇몇 정보를 얻어 아파트로 다시 라는 프락치 임무가 주어졌다.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보 몇개를 가지고 갔더니 미진하다며 3일간의 추가 ‘프락치 휴가’를 주었다. 사흘 후 다시 가자 정보를 더 물어오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있었던 일을 일절 입밖에 내지 않겠으며 이후 보안사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이같은 조사는 제대할 때까지 두번 다시 없었으나 사단의 중위가 3개월마다 직접 부대에 와 점검했다.
  • 金容雲 한양대 명예교수(국난극복의 지혜를 듣는다)

    ◎부패 청산 신바람운동 일으키자/한국인의 역사에 좌절이란 없어/구성원 각자 자각땐 민족정기 바로 설것 고사리의 작은 잎 하나에도 전체와 똑같은 구조가 있다.복잡성 이론은 이와 같은 ‘부분이 전체구조와 같은,즉 프랙탈(fractal)현상’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최근 우리사회에는 안기부의 북풍공작,국세청의 정치자금 모금,권력의 부정융자압력…등 섬뜩한 사건들이 있었다.이들은 공통적으로 깡패사회나 다름없는 힘의 논리로 국가기관의 사유화를 시도했으며,이는 도저히 국민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대역행위이다.이같은 악(惡)의 프랙탈 구도는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 한국병이며 재벌,대학에서부터 말단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팽배해 있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IMF고 국난이고 간에 남의 일인듯 ‘어디 잘 좀 해보시오’라는 냉소주의에 빠질 때,관리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되며 일부 기득권층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다. 카오스이론은 다윈의 고전적 적자생존의 진화론을 부정하는 창발(創發)의 개념을 내세운다.일본 어느 섬의 원숭이 무리는 모래나 흙이 묻은 고구마로 사육되었으나 6년이 지난 어느날 그중 한 마리가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먹기 시작했다.그것을 본 또 다른 한 마리가 그 짓을 하게 되고 그 수가 차츰 늘어 일정한 수에 달하자 그 섬 안의 원숭이는 물론 다른 지역의 그것을 보지 못한 원숭이들까지도 모두 고구마를 씻어먹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비단 원숭이 뿐만이 아니다.영국에서는 어느 한 마리의 새가 매일 아침 배달되는 우유통의 뚜껑을 쪼아서 마시기 시작하자 그것을 모방한 새가 늘어갔으며,그 무리가 일정한 수에 도달하자 갑자기 영국에 있는 그 종의 새 모두가 그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복잡성의 과학은 한 종의 집단에서 진보적인 행동을 취하는 구성원이 일정한 수에 도달하여 전체가 그 행동을 하게 될 때를 새로운 성격의 창발(emergence)이라고 한다.진화는 생존경쟁이 아닌,집단의 일부에 새로운 지혜가 싹틈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합’이 아니다.일부 구성원의 행동이 전체의 성질을 바꾸기도 한다.99마리가 행동할 때까지 전혀 무관심했던 나머지 전부가 100마리째의 행동 때문에 새로워지는 것이다.서울의 거리를 날아다니던 나비한 마리의 날갯짓이 며칠 후 뉴욕에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나비효과)는 사실이 실감되는 오늘이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으로 경제질서가 유지되는 일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설명하는데,몇 사람의 경제적 행동이 전체적인 질서를 유지케 하는 일이 창발됨을 의미하고 있다.민족원형의 형성도 같은 이치이다.한국인은 유별나게 기(氣)가 많으며 위기를 곧잘 신바람으로 극복해왔다.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의병 또는 금모으기 운동을 경험했고,오늘날에도 냉소주의자에 맞서 건전한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을 괴롭힌 것은 왜군보다도 공을 시샘하는 고관이었으며 또한 원균의 군대는 이순신 군대의 분전을 보고도 외면하였다.그러나 결국에는 의병 등의 활약으로 왜적을 물리쳤다.일제 36년,그리고 독재정권 36년을 겪고 우리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단순한 정권차원의 일이 아닌,그간의 악의 프랙탈 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 양심의 부활을 상징한다.암세포처럼 만연한 한국병은 오직 건전한 시민정신으로 치유될 것이다.너 아닌 나 하나의 자각이 민족정기를 창발시킬수 있는 것이다.
  • 金 대통령 訪日 결산­성과와 전망

    ◎21세기 韓·日 파트너십 새장 열었다/‘감정의 20세기 매듭’ 큰 진전/日 올바른 역사관 정립 시급 金大中 대통령의 이번 방일 성과를 보는 한·일 두나라의 시각은 매우 긍정적이다.金대통령을 수행했던 崔相龍 고려대교수도 “한달전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라며 “한일간 새로운 장을 여는데 충분한 여건을 갖췄다”고 전했다. 그렇다고해서 곧바로 ‘21세기 한일 파트너십’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무엇보다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두나라 국민의 공감대와 확고한 실천의지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金대통령이 10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일본정부의 책임있는 사람외에 다른 사람들의 한국관련 언급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은 것도 이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국민감정에 따라 춤춰온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군대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어떻게 정리되어가느냐가 관건이다.金대통령도 “위안부 문제는 결코 잊지않고 있다”고 말했다.적절한 향후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다.진정한 매듭은 양국 후손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으로,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고치는 일이다.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도 “결국 최종 해결점은 이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번 일본 방문은 남북관계,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반도 주변 4강외교의 하나로 봐야한다.金대통령의 지난 6월 미국 방문에 이어 앞으로 예정된 중국과 러시아와 더불어 한 축을 이루고 있다.따라서 일본의 6자회담 및 한·일 자유무역지대 설치 제의에서 보듯이 한반도 주변 4강의 인식의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도 과제이다.金대통령이 귀국 기자회견을 통해 자유무역지대 설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일본의 유엔에서 역할 증대 등 아시아와 세계 속에서의 한·일간 협력도 이 틀 속에서 조화를 찾아야 가능하다. 한일관계는 이러한 테두리 속에서 ‘감정의 20세기’를 매듭짓고 ‘이성의 21세기’를 맞아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일성과는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비켜간 쟁점들 후속협상에 관심/金 대통령 訪日­미해결 과제

    ◎독도 영유권­우리측 실효적 지배따라 먼저 거론 안해/교포 참정권­시기상조 판단속 정상간 문제제기 수확/교과서 개정­“과거사 문제 완결”… 양국공동연구 이견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양국 현안을 대부분 들춰내서 점검했지만 결론을 유보한 쟁점도 몇개는 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그 대표 사례. 우리 정부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먼저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거론 자체가 국제적으로는 영유권 분쟁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기 때문. 일본은 독도 영유권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경계선에 대해서도 우리는 울릉도와 오키섬의 중간선을,일본은 독도와 울릉도의 중간선을 내세우고 있다. 독도를 자국 EEZ에 포함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재일교포의 지방참정권은 우리 정부가 시기상조라는 판단 아래 애초부터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국가원수간에 이 문제가 제기됐다는 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는 평가. 하지만 재일교포들은 일본 헌법상 불가능한 국정참정권은 어렵다고 치더라도납세의무를 지고 있고,역사적 특수성도 있는 만큼 지방참정권은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 일본 최고재판소도 지난 95년 “정주(定住)외국인에 대한 선거권 부여는 위헌이 아니며 입법정책상 문제”라고 판시했고 일본 지방의회의 40.3%인 1,332곳이 정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 결의를 채택한 상태다.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지난 93년 물질적 보상은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최근 피해자들에게 정부 지원금을 지급했다. 정부는 일본이 민간기구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통한 위로금 지급을 중단하고 일본정부 차원의 책임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지난 65년 국교정상화 때 청구권 문제는 이미 종결됐다면서 민간차원의 지원 의사만을 밝히고 있다. 역사교과서 개정도 “역사교육이 중요하다”는 정도로 희미하게 표현됐다. 우리 정부는 교과서 개정을 과거사 사과의 완결로 보고 먼저 해석이 다른 역사적 쟁점에 대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 반면 일본은 교과서 개정을 위한 분위기가 성숙되지 않았으며 역사 공동연구 이전에 먼저 정부자료의 공개 여부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일간 남은 현안 ▲독도영유권 ­우리입장:실효적 지배중. 먼저 거론하지 않는다는 방침 ­일본입장:영유권 분쟁지역,국제사법재판소에서 논의 ▲EEZ 협정 ­우리입장:울릉도·오키섬 중간선이 경계 ­일본입장:울릉도·독도 중간선이 경계 ▲재일교포 지방참정권 ­우리입장:재일교포·2·3세에 부여해야 ­일본입장:주권적 사항,법률적 검토 거쳐야 ▲역사교과서 개정 ­우리입장:과거사 사과의 완결판,역사적 쟁점에 대한 공동연구가 첫 단계 ­일본입장:일본내 분위기 미성숙,진상연구를 위한 자료공개가 선결돼야 ▲군대 위안부 ­우리입장: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표명 요구,민간차원 배상 거부 ­일본입장:65년 청구권 문제 종결,민간기금서 위로금 지급
  • ‘사죄’ 단어 공식문서에 명기/진일보된 과거사 사과

    ◎일 망언 예방효과 기대/교과서 개정돼야 완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담긴 과거사 사과 표현은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의 담화에서 ‘아시아 제국’을 ‘한국민’으로 바꾼 것이다.공동선언에 쓰인 ‘오와비’란 일본어도 무라야마와 하시모토 총리의 과거사 사과 때는 ‘사과’와 ‘사죄’로 병행 해석돼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사죄로만 명기한 것도 진일보한 점이다. 그러나 일본어 사용 강요와 창씨개명,군대위안부 문제를 적시했던 지난 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의 발언과 비교할 때는 다소 구체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특히 과거사 사과가 말이 아닌 공식문서에 담겼다는 점만은 큰 진전이란 평가다.그동안 여러차례 일황과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가 있었지만 보수우익 각료와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그 의미가 희석돼왔다.이제 공식문서화된 만큼 최소한 일본 정부차원의 망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양국이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선언적 행위보다도 일본의 성실한 자세가 관건이다.과거사 사과는 역사교과서의 개정으로 완수된 다는게 우리의 입장.이번 공동선언에도 젊은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언급됐지만 양국의 입장은 아직 다르다.우리는 역사교과서 개정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일본은 아직 교과서 개정에 큰 관심이 없다.얼마전 ‘한·일 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설치 때도 일본측이 강력히 주장해 ‘촉진’이란 용어를 넣어야만 했다.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예비작업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해야 하느냐”는 일본의 비아냥도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진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종료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과거사 사과 발언 ▲히로히토 일황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84.9.6 전두환 대통령 방일 만찬사 ▲아키히토 일황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痛惜의 念을 금할수 없다. ­90.5.24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만찬사 ▲미야자와 총리 ­과거 한시기 귀국국민들께서 일본의 행위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셨던 사실을 상기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잊지않도록 해야할 것이며 저는 총리로서 다시한번 귀국국민께 반성과 사과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92.1.16 방한 만찬답사 ▲호소카와 총리 ­과거 우리의 식민지 지배시절엔 한반도의 여러분들은, 예를 들어 모국어의 기회를 빼앗기고 타국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창씨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이 강제되고, 군대위안부,노동자의 강제연행 등 각종 문제가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한데 대해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을 깊이 반성하며 이번기회에 다시한번 陳謝드리는 바이다. ­93.11.16 경주 정상회담 ▲무라야마 총리 ­일본은 멀지않은 과거의 한시기에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에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역사의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한번 통렬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95.8.10 전후 50주년 특별담화 ▲오부치 총리 ­일본이 과거 한 시기에 한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의해 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인식,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 ­98.10.8 김대중 대통령 방일 공동선언
  • 터키­시리아 戰雲 고조/터키 총리 최후 통첩

    【앙카라·암만 AFP 연합】 터키는 6일 시리아에 전쟁위기를 피하려면 쿠르드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냄으로써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메수트 일마즈 총리는 이날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터키와 시리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앙카라에 도착하기 직전 열린 조국당 회의에서 “우리는 시리아에 쿠르드노동자당(PKK)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면서 “말은 들을 만큼 들었으니 이제는 (시리아의)행동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터키 남부에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PKK의 지도자 압달라 오칼란을 인도해줄 것을 시리아에 촉구했다. 터키는 시리아가 수도인 다마스쿠스나 자국 군대가 장악하고 있는 레바논 지역인 베카계곡에서 PKK가 활동하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시리아는 이를 거듭 부인해 왔다.
  • 中國 공공기관 개혁(외국의 공무원들은)

    ◎기구 축소 선풍… 인원 50% 줄여/40개部委를 29개로/재취업교육도 활발/국영기업 책임경영/정부 간섭은 최소하 중국에서 불고 있는 개혁이라는 선풍의 진원지는 공무원 사회다.중앙정부는 지난 3월 확정된 개혁방안에 따라 40개 부위(部委·우리의 부처에 해당)를 29개로 줄였고,통폐합된 기관도 8월 말까지 50% 정도의 정원을 감축했다. 9월 중순부터는 연구 및 학술기관의 인원감축이 시작됐다. 이번 개혁의 특징으로는 △기업에 대한 행정적 간섭의 완화 △처(處)급 이하 조직의 대대적인 감축 △주변조직의 획기적인 사업기구화 혹은 경제실체화 △국영기업의 경영책임 강화 및 대폭 감원 △군대의 기업활동 금지 등을 들 수 있다.한마디로 ‘부문왕국(部門王國)’이라 불리던 과거의 행태를 조직과 제도면에서 혁신하고,거시통제는 강화하되 미시통제는 대폭 완화하여 기업활동을 돕자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잉여인력 처리방식에 있다.지금까지는 잉여인력이 생기면 지방으로 재배치하거나 행정권한과 공무원 신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사업기구나경제실체를 만든 뒤,일정기간이 지나면 원래기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잉여인력은 3년 동안 공무원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되 취업을 위한 교육을 시키거나 일단 사업기구나 경제실체에 속하면 원래기관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했다. 내가 만나본 중국의 잉여 공무원은 두 부류다.먼저 대학에서 외국어 학습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재정무역대학의 경영학 석사과정에서 수학하는 국·과장급들이 있다.이들은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고,3년 동안 기본급을 보장받으면서 진로를 개척하고 있는 셈인데 자신의 처지를 그다지 낙담하고 있지 않았다.발전하는 중국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담보한다고 믿고 있고,심지어는 도약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듯 했다. 그러나 기술이나 학식이 없는 근로자형 잉여 공무원들은 한달에 300위안(우리나라 4만5,000원 정도에 해당)정도의 최저 생활비만 받고 각자 알아서 앞길을 찾아가야 한다. 물론 아직은 인원감축에 따른 후유증이 그다지 크지 않다.많은 기관들이 인원을 그대로 감싸안고 사업기구나 경제실체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난해부터 국영기업의 도산과 인원감축이 잇따르고 있어 중국사회 전체가 긴장상태에 있는 만큼 심적 동요는 매우 큰 편이다.따라서 중국 정부는 올해 초부터 재취업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고,그것을 기관장 평가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거시적으로 정부 생산성에 있어서 중국은 몇몇 부문에서 우리보다 우위에 있다.△안정적인 정치체제와 개혁개방 통치이념 △장기발전 전략에 따른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정책추진 △전문성을 갖춘 의사결정 주체 △외교·통상 등 대외관계 부서에 공무원을 장기배치하는 데 따른 해외 핵심정보의 확보 △대규모 시장을 가능케하는 지속적인 외국 자본유치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외연적 요소에 더하여 공무원 사회가 안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은 중국 국민을 위하여 매우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중국 공무원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지를 평가하는 것은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직 시기상조일 것이다.그렇지만 최소한 전화응대,일처리태도 등에서 종전과 다른 점을 감지할 수 있었다.어떻든 이것이 중국 공무원 사회가 변화하려는 징조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 金 대통령 국군의 날 연설문

    ◎“과학軍 육성 미래위협 대처”/정예군으로 거듭 나려는 국방개혁 노력 높이 평가 온 국민의 축복 속에 맞이한 ‘건군 50주년’을 경축하며,국군장병 여러분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애국선열과 전몰장병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군은 1948년 창군 당시 소총 하나 만들지 못했던 여건 속에서도 조국수호의 의지 하나만으로 6·25전쟁의 국가위기를 극복하는데 이바지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전차와 전투기,그리고 함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무기들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도처에서 세계평화유지군(PKO) 활동에까지 참여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세계적 강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지난 50년간 군이 이룩한 이러한 공헌을 나는 매우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정부수립 50년과 창군 반세기를 맞은 올해,‘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게 된 것은 우리 군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50년간 군이 흘린 피와 땀을 바탕으로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하는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오늘날 상호협력과 공동의 이익추구라는 국제사회의 새로운 조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안보환경은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북한은 계속되는 침투사건에서 보듯이 무력적화통일이라는 대남전략을 변함없이 고수하면서,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방지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외면한채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립과 긴장을 계속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줄 강력한 안보능력의 확립은 절대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자주적 국방태세를 강화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동맹국가와의 안보협력에 주력하여 북한의 침략기도를 좌절시켜야 하겠습니다. 당면한 경제적 국난을 극복하는 일도 안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경제는 튼튼한 안보가 뒷받침될 때만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국가방위를 책임진 군의 최고통수권자로서 우리 군의 국가방위능력을 더 한층 강화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불행히 침략이 있을 때에도 초전에 이를 분쇄하는 만반의 자세를 갖출 것입니다. 나는 국민의 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데 우리 군과 함께 신명을 다바쳐 나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점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만전의 안보태세를 위한 몇가지 방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튼튼한 안보를 위해서 민과 군이 하나가 되어 총력안보태세를 갖추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과 군이 하나가 되어 조국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그런 자랑스러운 사례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대전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으로서 국가안보에 관한 한,민과 군이 다를 수 없는 시대입니다. 조국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군의 단결과 협력을 더 한층 견고히 해야 합니다. 둘째는 명실상부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군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적으로 엄정한 중립을 지켜야 하고,모든 연고를 떠난 공정한 인사를 통해 화합과 단결을 이룩해야 합니다. 엄격한 신상필벌로 군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하며,장병의 복지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는 군의 중립과 공정한 인사,신상필벌과 복지향상을 통하여 우리 국군을 세계 최정예의 강군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피력하는 바입니다. 셋째는 우리 국군은 첨단과학기술의 시대에 걸맞은,앞서가는 군으로서 정보·과학군이 되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미래의 전쟁은 바로 정보전쟁,과학전쟁,기술전쟁이 될 것입니다. 미래의 안보위협에 적극 대처하고,국방운영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높여가기 위해서는 과학화되고 정보화된 국방력을 구축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넷째는 확고한 ‘한·미연합방위체제’를 바탕으로 주변국들과의 안보협력을 더한층 강화해나가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동북아지역,나아가 세계의 평화와도 직결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한·미연합방위체제를 강화하고 일본과의 협조도 추진하면서,중국·러시아와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간의진정한 관계개선도 확고한 안보태세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지금 ‘국민의 정부’는 지난 50년간 지속되어온 남북한 대결의 시대로부터,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그리고 협력의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북한의 무력도발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동시에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배제하고,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 실현하겠다’는 대북정책의 3대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대북정책은 지금 전세계가 이를 지지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에 큰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3대 원칙이 명시한 ‘정경분리의 원칙’에 따라 우선 남북간의 경제교류와 협력,그리고 문화 등 가능한 모든 교류를 꾸준히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얼마전 북한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북 당국자간의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성실히 이행되기를 희망합니다.우리는 지금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재도약을 이룩하기 위한 ‘제2의 건국’을 목표로 삼아,온 국민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국민의 저력으로 국운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제2의 건국’운동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국정철학을 기초로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를 지향하는 국가혁신작업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우리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방분야의 개혁 또한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군도 21세기의 안보환경에 부응하여 더 한층 강력한 군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제2의 창군’ 정신으로 과감한 자기 개혁을 달성해야 합니다. 나는 국방개혁 추진을 통해 선진 정예강군으로,정보·과학군으로,그리고 경제군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우리 군의 노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오늘 나는 늠름한 국군장병 여러분의 사기충천한 모습을 통해 끝없이 뻗어나갈 조국의 미래를 바라보면서,나의 한없는 믿음과 사랑을 다시한번 여러분에게 보내는 바입니다.
  • 국군의 날 행사 스케치/“4년만에 보는 위용” 박수갈채

    제 50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1일 오전 10시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기념식이 열린데 이어 오후 3시부터 광화문 등 서울 도심에서 시가행진이 4년만에 펼쳐졌다. 장병들은 이날 행사에서 ‘조국과 함께,국민과 함께’하는 강한 군대의 위용을 한껏 과시,시민들로부터 뜨거운 찬사와 격려를 받았다. ○…기념행사는 식전행사 및 기념식,호국의 불 점화,민군 행진,분열 등의 순으로 2시간여동안 화려하고 웅장하게 진행됐다. 기념식에 이어 C­130,CN­235 등 수송기 8대에 나눠탄 특전사요원 242명이 2,000피트 상공에서 집단강하,적진 침투장면을 연출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1만피트 상공에서 여성대원 2명을 포함한 특전사요원 86명이 CH­47헬기에서 뛰어내려 창공에서 오색 연막을 내뿜으며 4,500피트 상공까지 맨몸으로 떨어지다 낙하산을 펼치는 공중묘기를 연출했다. ○…시가행진은 헌병 사이카를 선두로 국군지휘부 군악대 도보부대 등 1만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남대문∼시청∼광화문∼서대문로터리 사이 1.2㎞구간에서 1시간여동안 계속됐다. 행진에서는 전국 16개 시·도행진,학생과 어린이를 포함한 각계 각층의 ‘시민행진’과 사물놀이패를 앞세운 ‘한마음 대행진’이 동시에 펼쳐졌다. 대형건물 옥상에서는 색종이가 뿌려졌고 일부 학생들은 군 장병들에게 꽃다발을 걸어주기도 했다. ○…남대문∼광화문∼동대문사이 4㎞구간에서 열린 기계화부대의 행진에서는 155㎜ 자주포를 비롯,포병화력의 핵심인 신형 다연장로켓포(MLRS),장거리지대지 유도탄(ATACMS) 등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하늘에서는 대한항공 제트여객기 2대가 30여분에 걸쳐 오색연기를 내뿜으며 1,500피트의 저고도로 선회비행,축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다시는 전쟁없게 하겠다”/金 대통령 건군 50돌 기념식 치사

    金大中 대통령은 1일 “나는 국가보위를 책임진 군의 최고통수권자로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침략이 있을 때는 초전에 분쇄하는 만반의 태세를 갖출 것”이라면서 “군은 21세기 안보환경에 부응해 더 한층 강력한 군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제2의 창군정신으로 과감한 장기개혁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50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우리는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한·미연합방위체제를 강화하고,일본과의 협조도 추진하면서 중국·러시아와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金대통령은 이를 위해 ▲민과 군이 하나되는 총력안보 ▲정치적 중립,공정한 인사,신상필벌,장병 복지 등 명실상부하게 강력한 군대 ▲정보·과학군 구축 등을 제시했다. 이어 “지금 국민의 정부는 남북한 대결의 시대로부터 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그리고 협력의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한다”고 강조한 뒤 “북한의 새 지도부 등장을 계기로 북한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아울러 “국군 여러분은 국민과 하나가 돼 이제야말로 ‘국민의 군대’로 더 한층 높이 승화하기를 온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金대통령은 이날 연설에 앞서 육군 1사단 등 9개 부대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 물에 빠진 여중생 3명 수색중/소방관 3명 급류 휩쓸려 순직

    ◎대구 금호강서 이국희·김기범·김현철씨/“잘다녀온다더니 웬 날벼락” 가족들 오열 ‘하늘도 무심하시지…’ 남부지방을 휩쓴 태풍으로 많은 인명·재산피해가 난 가운데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던 119 구조대원 3명이 급류에 휘말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1일 오후 4시30분쯤 어둠이 서서히 깔려 가던 대구시 북구 검단동 제3아양교 근처 금호강.지난달 30일 실종된 대구 동부여중 2학년 金정희양(15)등 여중생 3명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이던 대구 동부소방서 소속 李國熙 소방장(44) 등 구조대원 4명을 태운 보트가 갑자기 급류에 휘말려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미처 구조 손길이 미치지도 못 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고 직후 긴급 출동한 헬기에 의해 구조된 李소방장과 金起範(26)·金晛哲 소방사(28)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그만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함께 보트에 타고 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裵孝奉 소방교(28)는 “하류로 이동하면서 수색작업을 벌이던 중 갑자기 보트가 물막이 보에서 2m 아래로 떨어지면서 급류에 휩쓸렸다”고 사고 순간을 전했다. 사고를 당한 대원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사정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경력의 베테랑인 李소방장은 어머니가 7년 지성끝에 얻은 외아들.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젊은 부하직원들을 이끌고 직접 수색작업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李소방장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조부모와 어머님을 극진히 모신 효자였는데…”라고 말하는 동료대원들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96년 12월 육군대위로 제대한 뒤 지난해 구조대원으로 합류한 金晛哲 소방사는 부인과 6살박이 아들과 함께 100만원짜리 전셋방에 살면서 내년 봄 결혼식을 올린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지난 96년 10월 공수부대 중사로 제대하고 소방대원으로 투신한 金起範 소방사 역시 내년 봄 5년간 사귀어 온 학교동창 애인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시신이 안치된 대구 파티마병원 영안실에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가족들이 넋을 잃고 있었다.金起範 소방사의 어머니 李희순씨(52)는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태풍이 귀한 아들을 빼앗아 갔다”며 울부짖었다.
  • 건군 50돌… ‘국민의 군대’ 되기까지

    ◎세계속의 ‘자주强軍’ 급성장/48년 경비대로 출발… 정치개입 오점/평시작전권 환수­장비첨단화에 박차/PKO활동 등 국제평화 수호 큰 기여 1일로 건군 50주년을 맞은 우리 군의 발자취에는 반세기의 나이테 만큼이나 두터운 영욕의 역사가 담겨 있다. 군은 한국전쟁과 월남파병 등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성장,병력 수로만 따지면 중국 러시아 미국 인도 북한에 이어 세계 6위인 69만명의 거대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군은 그러나 5·16군사혁명과 12·12,5·18사태를 통해 30여년간 이 나라를 통치해온 ‘독재군부’의 온상이라는 오점도 남겼다. ▷국군 50년 역사◁ 우리 군은 48년 9월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고 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육·해·공군 3군체제를 갖추며 출발했다. 창군 당시 육군은 국방경비대 660명,해군은 100t급 증기선 1척,공군은 수류탄과 폭탄을 손으로 투하했던 경비행기 20대 등 초라한 규모였다. 1945∼1950년까지 건군기를 거친 군은 창군 2년만인 50년 6·25전쟁에서북한의 기습남침에 맞서 백척간두에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하는 시련기를 맞았다. 유엔군의 6·25 참전으로 작전지휘권을 넘기는 수모도 감내해야 했다. 국군은 53년 휴전과 함께 52년 발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군사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4·19와 5·16의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꾸준히 체계를 정비해 65년 이후 월남전에 참전하는 등 용맹성을 내외에 떨쳤다. 70년대들어 朴正熙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정책을 주창하면서 미국 의존도의 군사력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북 억제력 및 자위전력 증강계획에 따라 율곡사업이 착수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93년 소말리아에 공병대를 파병한 이후 앙골라와 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야 등에서 유엔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했고 94년에는 한미연합사로부터 평시작전권을 환수받아 ‘세계속의 국군’으로 성장하게 됐다. ▷향후 위상 및 과제◁ 건군 50주년을 맞는 군은 북한의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과 통일 한국군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육군은 기존 재래전력 외에 북한의 미사일공격에 대비한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는가 하면 전술 지대지미사일(ATACMS)과 227㎜ 대구경다연장 무기체계(MLRS)를 도입중에 있다. 해군은 KDX­Ⅰ(구축함사업)에 이어 KDX­Ⅱ사업과 잠수함 건조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공군은 KF­16전투기를 비롯해 공대공·공대지 미사일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 건군 50년을 기린다(사설)

    오늘은 국군의 날이다. 예년처럼 단순한 국군의 날이 아니라 건군 50주년과 함께하는 날이라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 군은 지금까지 대남 적화야욕의 기본노선에 변함이 없는 북한집단을 상대로 일초 일각을 다투며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그리고 국익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사명과 역할을 다해왔다. 건군 50주년의 슬로건대로 ‘조국과 함께,국민과 함께’해온 우리 군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건군 50년을 돌아볼 때 우리 군은 무엇보다 이 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지렛대 역할을 했다. 군이 튼튼하게 나라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다원화사회라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냈으며,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정치이벤트를 창출하면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우리 군에게는 영광의 길이 있었던 반면 오욕의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부끄러운 역사를 들추기에는 갈 길이 멀다. 우리 군의 가장 큰 현안인 21세기를 지향하는 개혁과 장비 현대화,조직의 효율적 운영,정신전력(精神戰力) 강화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98국방백서’를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북한은 가공할만한 무기와 병력을 보유하고,이들의 대부분을 전방기지에 전진 배치하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북한 외무성 부상 최수헌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제2의 한국전쟁 발발 위험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한의 무력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때, 우리는 하루속히 첨단 과학장비를 갖추어 철저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를 지향하는 미래 강군으로서의 선결요건이다. 햇볕정책이나 금강산 관광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강군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에 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군의 특성상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동안 개선하지 못한 낡은 제도와 관행을 과감히 뜯어고치고,장병의 정신전력을 강화하는 프로그램 개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 군대는 조국의 방패로서만이 아니라 그동안 사회나 학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지 못했던 교육을 맡는 또 다른 교육기관 몫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방과 경제는 나라의 두 축이다. 경제가 살얼음판을 딛고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어렵사리 넘어가고 있는 이때,군 역시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군대로서의 몫을 다해야 한다. 마른 걸레를 또 쥐어짜듯 주변에 절약요인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국방예산 삭감이라는 나라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시대도 바뀐만큼 국민의 정부와 함께 민주군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 내부에 권위적이며 비효율적인 행정체계나 제도가 있다면 과감히 고쳐나가기를 거듭 바란다.
  • 국민 안보의식에 감명/金鎭渲 비상기획위원장(기고)

    ◎을지훈련을 마치고 올해 을지훈련을 하면서 우리 국민의 높은 안보의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충북의 柳光文 계장은 모친상중임에도 불구하고 3일장만 치르고 참가했는가 하면 부여군은 명예퇴직을 신청한 공무원들이 자청해 상황실 야간비상근무를 하기도 했다. 실제훈련 과정에서는 괴나리봇짐과 소를 끌고 피난민 훈련에 참가한 주민도 있었고 방학중인 학생들이 훈련장을 참관,안보교육을 받기도 했다. 상황실에는 자원봉사와 지원품이 답지했다. 金大中 대통령도 을지훈련 회의보고에서 ‘天下雖平 忘戰必爲(천하가 비록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해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훈련 결과 많은 발전사항과 검토사항을 발견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에 수도권의 주민들이 어떠한 마음자세를 갖느냐가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한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민·관·군이 한덩어리가 돼 독일군에게 대항,6개월간 도시를 사수하고 독일군 약 30만명을 괴멸시킴으로써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도시는 겨우 70만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도시였다. 우리의 전쟁여건에서 문제의 핵심은 수도권 주민들이 대규모 혼란을 일으키느냐,전쟁의 주체로서 정부와 군대를 믿고 이곳에서 같이 싸우느냐에 달려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국군과 연합사의 능력으로 서울을 지킬 수 있다는 신뢰를 갖는 것이다. ○수도권 주민자세 중요 우리의 지금 상황은 6·25때 북한군이 남침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 국력,군사력,주변국의 여건 등이 그때와는 정반대로 봐도 된다. 또 피난 가는 것은 모두의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수도권에 사는 주민들은 자신이 전쟁의 주체라는 의식을 갖고 전투를 지원해야 한다. 서울의 콘크리트건물은 피난가다가 포탄을 얻어맞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한 연구에 의하면 서울의 자동차 중 20%가 일시에 움직이면 서울 북방에서 한강다리를 건너는 데 48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 말은 피난을 가다가 길거리에서 포를 맞아 희생된다는 이야기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수도권의 주민이 쌀,양초,손전등,비상연료 등의 생활필수품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마다 방독면을 준비해야 한다. 전쟁시에 생활필수품이 없거나 방독면이 없으면 불안은 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혼란과 마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화학전의 위협이 없는 스위스도 집집마다 한개 이상 방독면을 보유하고 있으며 스웨덴은 국민 100%가 방독면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2,500∼5,000t의 화학탄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민의 3%만 방독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 과연 납득이 가는 일인가. 방독면은 한개에 약 1만7,000원이고 시나 도의 민방위과에 물어보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 ○북한은 예측불허 집단 북한은 아주 불합리한 집단이다. 그리고 어떠한 일을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시오노 나나미는 “합리적인 사람이 범하는 실수는 상대방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북을 주시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가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기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안보에 대하여 철저히 대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북한이 또다시 침략한다면 우리는 정의회복을 위해 저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각오를 한번쯤 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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