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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론] 그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김용호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

    외박과 휴가제도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 다음으론 박탈감의 치유다. 우선 명령사회이기 때문에 당연시되는 반말부터 고쳐야 된다. 아까운 목숨들이 안타깝게도 스러져갔다. 아무리 바빠도 군대 간다고 인사오는 학생들에겐 술 한 잔 따라주며 더 건강한 몸으로 만나자곤 하지만 마음 한 편에 이런저런 걱정이 든다. 좀 여성스러운 학생이면 혹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내성적인 학생이 잘 견뎌낼까, 게다가 행동이 느린 학생이면 더더욱 염려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확실히 기성세대와는 다르다. 우선 바쁘다. 건성건성 공부했다간 진학도, 취직도 여의치 않은 경쟁속에 커온 그들이다. 학점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과목마다 조모임, 발표 준비 등에 매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알바(아르바이트)로 용돈은 자기가 벌어 쓴다. 그러다 보니 웬만큼 친해지지 않고선 술 한 잔 사달라며 찾아오는 넉살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빠서인지 통화 끝나고 어른이 끊기 전에 먼저 끊어버리지 않는 젊은이를 찾는 건 더더욱 힘들어졌다. 이번 총기사건의 책임 소재와 잘잘못은 군 당국의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사건에 내재하는 원인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사건이 또 일어날 수 있다. 먼저 군 입대는 바쁜 일상과의 단절로 인한 박탈감을 가져온다. 분초를 쪼개 쓰던 바쁘신 몸을 송두리째 바쳐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가장 견디기 힘든 대목이다. 게다가 군대를 안 가는 친구들이나 여자동기들이 먼저 졸업해 직장에서 선배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조바심마저 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획일화된 군 생활에 적응하기란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라크에 더 많이 파병해야 한다, 북한핵 문제가 터지면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사람 중에 더러 자신들은 군대를 빠진 이들이 있다는 사실, 이유야 어쨌든 군 복무 때문에 국적을 포기하는 행렬, 군대 갈 나이에는 외국 나가 있다가 유창한 영어를 앞세워 귀국한 뒤 우리 사회의 리더로 자리매김한 인사들. 그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개혁적’으로 얘기해 보자. 우선 외박과 휴가제도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 군복무의 가장 큰 애로인 얽매임을 풀어주자는 얘기다. 요즘엔 철원에서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KTX에 몸을 실으면 늦어도 5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인생의 황금기를 국가에 헌납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KTX 몇 량 정도 못 내준대서야 동북아 균형자 국가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비현실적이라고 푸념하기보다 복무기간 단축을 동결해서라도 한 달에 2박3일정도 숨쉴 공간을 줘야 한다. 다음으론 박탈감의 치유다. 우선 명령사회이기 때문에 당연시되는 반말부터 고쳐야 된다. 사회는 군대보다 더 엄격한 명령사회다. 상사의 눈에 벗어나면 2년 남짓의 군 생활이 꼬이는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꼬일 수 있다. 하지만 반말을 처음부터 하지는 않는다. 지내다 보면 트고 지내게 되고 자연스레 나이와 직급이 조화되어 나름대로의 질서가 자리잡게 된다. 존댓말로 부드럽게 말해도 추상같은 명령이 되는가 하면 상말을 섞더라도 들을 필요가 없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우리 군에도 이런 프로페셔널리즘을 도입할 때가 됐다. 이번 사건에서도 보듯 일병과 상병이 전부 22세이다. 사회라면 처음부터 반말은 엄두도 못 낼 사이다. 또 한 가지 고쳐져야 하는 게 있다. 여성에게도 군복무와 같은 기간만큼 공익근무를 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줘야 한다.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입사시 가산점을 받지 못한다거나 국민의 의무가 자동 면제되는 것이 개운치 않다는 여학생들이 적지 않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인력 부족을 이유로 들 만큼 공무원들의 일손이 달린다면 우수한 여성 인력을 공익근무요원으로 활용하여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공익근무요원의 양적 증대로 인한 예산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비현실성을 지적하기보다는 기회와 의무의 균등이라는 원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김용호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
  • 기수 1000기 돌파 해병전우회

    기수 1000기 돌파 해병전우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전국의 시·군·면을 가면 어디서나 해병전우회 사무실을 볼 수 있다. 컨테이너로 된 어설픈 건물이지만 타 군 출신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전우애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이어지고 있다. 무슨 비결이 있기에 젊은 날 잠시 군문에서 맺은 인연이 ‘사회’에서까지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일까. 해병 기수 1000기 돌파를 맞아 해병 출신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신화’를 파헤쳐 본다. ●전국 231개 지부… 봉사단체로 맹활약 서울에 있는 해병전우회중앙회 산하에는 16개 광역 시·도별로 연합회가 형성돼 있으며 각 시·군·구에는 231개의 해병전우회 지부가 자생적으로 생겨나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도 60개의 지부가 있다. 해병 전역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들 전우회 및 직장·학교 등 그룹별로 구성돼 있는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친목단체는 물론 사회봉사단체로서도 존재 이유를 밝힌다. 지부별로 야간 방범순찰은 기본이고 응급구조대·기동봉사대·환경봉사대 등을 편성해 활동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기능의 편차를 보여 바다가 인접한 곳에서는 해양사고 인명구조를, 산악지역에서는 등반사고 구조 등에 주력한다. 이들은 군대에서 익힌 강도 높은 훈련과 정신력을 바탕으로 전문가 못지않은 활동을 펴고 있다. 야간순찰 시에도 해병대 출신은 범법자에게 경찰 못지않은 위압감을 주기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다. 이들이 공식활동을 할 때의 복장은 해병의 상징인 빨간 명찰과 팔각모, 얼룩 무늬의 위장복 등 현역과 별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해병 출신들은 아직도 군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곱지 않은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군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 회원들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불가사의한 단결력 전우회의 일이라면 자다 일어나서라도 달려가는 것이 이들의 생리다. 너무 단합이 잘 돼 호남향우회, 고려대동문회와 더불어 잘 뭉치는 3대 집단으로 회자된다. 여느 친목회들이 상부상조를 통해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는 데 비해, 해병전우회는 이익이나 반대급부에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돌쇠형’에 가깝다. 군대 시절부터 익히고, 제대해서도 선배들로부터 듣고 배운 것이 이런 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요즘과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 아직도 이런 구시대형(?) 결합이 가능할까. ●지옥훈련 속 고도의 동질감 형성 우선 해병의 단일화된 기수체계를 들 수 있다. 훈련소별로 기수가 다른 육군과 달리 해병대는 하나의 훈련소에서 배출된 단일기수여서 일체감이 형성된다. 생면부지의 해병 출신이라도 만나자마자 기수부터 확인하고, 긴 말이 필요없이 금방 선·후배 사이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해병전우회에서 활동하는 사람 가운데 최고참은 80∼85기(대략 65∼70세), 아래로는 900기(25∼27세) 밑으로까지 내려가나 기수가 ‘나이의 골’을 메운다. 이채로운 것은 기수체계가 다른 장교나 하사관 출신도 전우회에서는 입대연도에 따라 사병 기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전관예우를 못 받는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어차피 ‘해병은 하나’임을 강조하는 마당이기에 이런 사정은 중시되지 않는다. 해병을 뭉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전통에서 오는 자부심이다. 해병이 6·25전쟁이나 월남전 등에서 만들어낸 신화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전통은 해병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작용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짬밥’ 출신이든 기술병 출신이든 누구나 ‘귀신 잡은 해병’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해병 출신들의 유난스럽기까지 한 단결력에 대해 ‘논리가 필요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훈련받을 때부터 ‘해병은 하나다.’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해병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형제처럼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정기인(64·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엄청난 기합과 지옥훈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엘리트 의식을 가지며,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타 집단이 이해할 수 없는 고도의 동질감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권 및 정치와는 거리 멀어 특이한 점은 해병전우회가 사회단체로서의 적지 않은 영향력에 비해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마다 전우회가 만들어진 지 수십년이 넘었지만 이권에 개입하는 등 불미스러운 일로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다. 해병 출신들이 다소 ‘폼’을 잡는 경향이 있음을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이다. 권오현(權五顯·50) 김포해병전우회장은 “해병 출신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뚜렷한 데다, 해병의 명예를 실추했을 때 매장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전우회 간부직함 등을 무기삼아 지방의원 등 정치권에 진출하는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예 내부 정관으로 회원들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전우회도 많으며, 선거 때는 중앙회 차원에서 선거 개입을 금지하는 지침을 내려보낸다. 또한 단체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우회 사무실 운영비를 다른 곳의 특별한 지원없이 대체로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 수도권지역 한 해병전우회는 수년 전 회원들이 야간순찰 도중 술집에서 술을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상자들을 징계했다. 이 단체 간부는 “말썽의 싹을 자르기 위한 차원”이라며 “해병대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명예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이 거름이 돼 해병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져 한때 ‘개병대’로 불리며 취직과 결혼조차 잘 안되던 것은 이미 전설이 된 지 오래고, 지금은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가고 싶은 군대’로 꼽히는 등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노병은 사라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성금(李成金·64) 해병전우회 서울연합회장은 오전 9시면 출근, 연합회 일을 보는가 하면 저녁이면 전우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등 바쁘기만 하다. 이 회장은 “죽는 날까지 전우회 일을 하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해병 출신이 강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인은. -해병이 수행하는 상륙작전 등은 뭉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임무적 특성에다 단결을 중시하는 해병의 전통이 오늘의 해병정신을 만들었다. ▶요즘 주안점을 두는 활동은. -지난 4월부터 주말이면 연합회 회원 60여명이 한강시민공원에서 야간순찰을 돌고 있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좋다. 또 다음달 4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서울 여의도부터 춘천까지 한강청결 캠페인을 벌이는 등 환경정화 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군에서 대형 총기사고가 발생했는데. -군기가 빠질수록 사고가 많이 생긴다. 해병전우회에서는 60세를 넘겨도 선후배 관계가 분명하다. 요즘은 내 자식만을 위하는 가정교육부터 잘못된 것 같다. ▶향후 활동 방안은. -육·해·공군 가운데 유일하게 해병대만 전용회관이 없어 불편을 겪고 있는데 전우들과 힘을 합해 건립하도록 노력하겠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 [서울광장] 대통령을 휴일엔 잊자/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통령을 휴일엔 잊자/육철수 논설위원

    남의 자서전을 즐겨 읽는 편이다.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이든 유명인사든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얘기를 자기가 직접 쓰면 과장이나 미화보다는 양심상 진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한 인생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인간적 매력에 취하기도 하며, 그의 역경 극복 과정을 통해 용기를 얻곤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백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를 접한 것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2002년 12월 말이다. 당시 정부 부처의 국장급 간부들의 방에는 으레 이 책이 한권씩 있었다. 아마도 새 대통령이 어떤 인품인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기자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대통령이 되기 8년 전에 쓴 책이니 우선 신뢰도가 높을 것 같아 단숨에 일독했다. 노 대통령은 글실력과 표현력이 대단해서 첫 장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변호사 시절 수임료 문제로 어떤 아주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얘기, 중학생 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글짓기에서 백지를 냈다가 선생님에게 된통 혼난 일, 가난했던 시절 임업장에서 묘목을 훔친 사연, 초선 의원 시절 YS(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촌지를 받으며 좋아하던 모습, 어느 대기업으로부터 광고출연을 퇴짜 맞은 일….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같이 ‘가슴깊이 숨겨두었던’ 얘기들이다. 너무 적나라하게 쏟아내 철철 넘쳐 흐르는 인간미에 그만 홀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청문회 스타로만 알았고, 국회의원 몇번 떨어져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고집센 정치인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인간적인 면을 뒤늦게 알아 후회(?)도 들었다. 요즘도 대통령에게 불만스럽거나 미워질 때는 이 책을 뒤적인다. 비판의 강도를 낮추거나 수위를 조절하는 데 효과가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대가 컸던 탓일까. 대통령에 취임한 뒤 초장부터 기대에서 빗나갔고,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는 일이 잦았다. 같은 말과 행동을 변호사·국회의원으로서 하면 ‘인간적 풍모’로 여겨지겠지만 대통령으로서는 ‘지도자적 자질’로 변질되는 게 못내 딱하기도 했다. 집권 3년차를 맞는 동안 단 한 컷의 사진이 대통령의 인간미에 근접했는데, 언젠가 청와대 구내식당에서 식판에 흘린 콩나물을 주워 먹는 모습이다. 막중한 국정에 짓눌려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한 탓이겠지만,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달리 생각해보면 대통령을 ‘감옥’에 가둔 채 들여다보는 국민의 눈이 너무 많아 경직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직설적이고, 진솔하며, 감성적인 인간 ‘노무현의 장점’이 혹시 ‘대통령의 단점’으로 고착되어 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금 나라는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다. 대통령이 “이러다가 내가 나라 망치는 것 아닌가.” 우려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전방 총기난사 사고 전날에는 군수뇌부와 골프치면서 격려했다고 항간에서 수군대는 모양인데, 점쟁이도 아니고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이 터질 줄 알았겠는가. 일이 잘되려면 척척 받쳐줘야 하는데 지지리 운이 없다고나 할까. 마침 공무원들은 다음달부터 주5일 근무에 들어간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참에 하나 제안하고 싶다. 평일엔 분(分) 단위로 빡빡한 일정에 묶이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고독한 결정을 내릴 때가 많은 대통령을 토·일요일엔 좀 풀어주자. 나라는 어차피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돼 있으니까 대통령에게서 휴일만은 신경을 끄자는 얘기다. 푹 쉬다가 시간나면 지인들과 운동을 해도 삐딱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가끔 각본없이 ‘강남아줌마’를 만나 부동산 얘기도 들어보고, 시장에 들러 현장 경제와 서민의 삶도 가벼운 마음으로 알아보게 하자는 거다. 대통령이 여유를 되찾아 국정에 자신감이 붙는다면 예전의 순수했던 인간미도 살아날 것이고, 그게 나라 좋고 국민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ycs@seoul.co.kr
  • “이등병아닌 이등별” “인격모독은 못참아”

    경기도 연천군 내무반 총기난사 사건으로 신세대 병영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재점검이 요구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자유분방함과 개인주의를 좇는 신세대 군인들을 엄격한 기강(紀綱)이 생명인 병영문화에 제대로 접목하는 데 실패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해결방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쪽에서는 병영문화가 아직도 너무 거칠다고 걱정하고, 다른 쪽에서는 신세대 군인들을 너무 풀어주는 게 기강해이와 각종 사고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한다.●“선임병이 무심코 던진 돌, 후임병에게는 큰 상처” 오는 8월 입대하는 고인옥(23·성균관대 3년)씨는 “선임병이 엄하고 부드럽고를 떠나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게 가장 힘들 것 같다.”면서 “제대한 선배들이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욕을 먹다 보면 여자친구의 변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게 된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입대를 사흘 앞둔 신창민(20·건국대 1년)씨는 “직접적인 폭행이나 얼차려는 많이 없어졌지만 자존심을 긁거나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폭력은 오히려 심해졌다고 들었다.”면서 “신세대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들 하지만, 군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임병의 사소한 돌멩이질이 후임병에게 커다란 바윗돌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군기잡으면 상부에 이르고 전출” 하지만 군 문화가 신세대들의 개인주의를 너무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원도 강릉에서 복무하다가 지난해 4월 제대한 서성진(24)씨는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공동체의식은 약해지는 느낌”이라면서 “조금만 엄하게 군기를 잡으면 바로 상부에 이르고 다른 곳으로 옮겨버려 선임병끼리는 이등병을 ‘이등별’로 불렀다.”고 혀를 찼다.국방부의 ‘병영생활 행동강령’이 역효과를 냈다는 의견도 있었다. 행동강령은 ▲분대장을 제외한 병 상호간에는 명령·지시·간섭을 금지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구타·가혹행위를 금지한다 ▲폭언·욕설·인격모독 등 일체의 언어폭력을 금지한다 ▲언어적·신체적 성희롱·성추행·성폭행 등을 금지한다 등 4개 항으로 돼 있다. 2003년 6월까지 연천군 전방관측소(GOP)에서 소총수로 있었던 장경준(24)씨는 “후임병을 존중하는 만큼 선임병에 대한 예의도 지켜야 하는데, 국방부 지침이 너무 후임병 위주로만 돼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 같다.”면서 “선임병에게 경례도 하지 않는 후임병을 보면 ‘나는 선임병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켰는데 너무한다.’는 생각에 안 좋은 감정이 쌓이게 마련”이라고 했다.●“군대 장벽 낮추기 위한 정책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젊은이들이 입대하면서 겪는 문화충격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인 고려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대부분 독자(獨子)로 큰 신세대들에게 정제되지 못한 감정을 하급자나 약자에게 폭발시키는 군 문화는 견디기 힘든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서 “함께 근무하는 장병과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 친밀감을 높이거나, 장병들이 일상적으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상담센터를 마련하는 등 군대의 장벽을 낮추기 위한 정책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방대 김오현 교수는 “군대도 신세대 군인들에 맞춰가야겠지만 군인들 역시 군대의 기준과 원칙을 따르는 균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면서 “선임병들에게는 후임병을 부하처럼 마음대로 부리면 안된다는 교육을, 후임병들에게는 자신도 나중에 조직의 리더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인성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유지혜 김준석기자 wisepen@seoul.co.kr
  • [軍 총기난사 ‘충격’] GP는 어떤곳

    19일 새벽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GP(Guard Post)는 비무장지대(DMZ)의 남방한계선에서 군사분계선(MDL) 사이에 설치된 최전방 전초(前哨) 또는 감시초소다. GP는 남방한계선과 MDL 사이의 보통 2㎞ 정도의 비무장지대 지역을 가리키는 GOP(General Out Post·일반전초)와 대비되는 것으로 휴전선 부근에서 북한 초소들의 동태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어 최전방 관측소로도 불린다.30명 내외의 1개 소대병력이 2∼3개월씩 교대하며 경계근무를 선다. 주요 임무는 24시간 북한군 동태 감시와 적침투 및 매복의 조기 발견 등이다. GP는 북한 GP와의 거리가 서부전선의 경우 수백m에 불과, 소총의 유효사거리내에 위치해 있고 초소 주변의 지뢰 매설로 사고 위험이 높아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1개 초소 근무는 약 2시간이며 초소에는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복수 인원이 근무를 선다. 병사들은 근무 교대 후 상황병이나 불침번의 안내에 따라 소지했던 수류탄과 실탄을 상황실에 반납하고 빈 소총만 갖고 내무반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실탄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어 자살이나 살인, 안전 사고 등의 위험이 늘 따르는 곳이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4㎞지역의 비무장지대는 군대 주둔이나 무기 배치,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돼 있다. 그러나 남·북한 모두 적의 침투나 동태 감시 등을 위해 이 지역에 GP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양측은 다만 중화기를 배치 또는 무장하지 않고 소총 등 개인화기만 휴대한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사설] 총기난사·철책선 군 수뇌부 책임져야

    군대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잇따라 터져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어제 새벽 최전방 GP에서 총기난동 사고가 일어나 장병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며칠전에는 북한군 병사가 철책선을 뚫고 내려와 비무장지대에서 나흘이나 배회하도록 까맣게 몰랐다. 최근들어서만도 해군이 특수작전용 보트를 분실하지 않나, 술 취한 어부가 해상경계망을 뚫고 월북하지 않나, 철책선을 끊고 월북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나, 이거야말로 군의 총체적 기강해이요 경계 실패가 아니고 무언가. 총기난동사건이 터진 GP는 북한군과 불과 수백m 떨어진 최전방 감시·경계초소다. 이곳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자칫 잘못하면 안보와 직결된다는 중요성 때문에 철저한 신원조회와 훈련을 거쳐 선발된다. 총기 등 무기의 관리는 기본이며, 병사들의 인성과 사기(士氣)·심기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배려해야 하는 등 한치의 빈틈없이 부대를 운영해야 하는 곳이다. 사고를 저지른 병사가 선임병들로부터 몇달째 언어폭력에 시달려 왔다는데, 지휘관들은 뭘하고 있었는지 답답하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지난 1월 ‘인분사건’에 이어 대국민 사과와 함께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사고는 장관의 사과 한 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동안 군내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해당 지휘관들에게만 그 책임을 묻고 군 수뇌부는 아무 책임도 없는 양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고는 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한계에 이르게 했다. 그런 점에서 사건 수습 후 군 수뇌부는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며 재발방지 효과도 높일 수 있다. 군은 각종 총기·군기문란 사고가 터질 때마다 원인근절과 재발방지를 약속해 왔지만 예하부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국민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려면 이번을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기강과 인권, 경계실태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과 함께 재발방지책을 단단히 실행해야 할 것이다.
  • [軍 총기난사 ‘충격’] 김일병 싸이홈피 기분엔 “슬픔”

    경기 부천의 한 연립주택 5층에 살고 있는 김모(22) 일병의 부모는 이날 낮 12시쯤 기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해도 총기사고 소식을 알지 못한 듯 과연 그게 사실이냐고 여러번 되물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김 일병 부모는 아들이 지난 4월 휴가를 나왔을 때 군생활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 보자 “군대생활이 다 그런 것 아니냐. 잘 지낸다.”고 말해 “별탈없이 잘 적응하는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부모는 또 “조금 내성적인 측면이 있지만 아들은 전체적으로 성격이 온순하고 착실한 편”이라면서 “가깝게 지내는 여자친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도 “학교 다닐 때 별달리 사고를 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김 일병의 가족들은 인근 중학교에서 서무로 근무하는 아버지(53), 전자부품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47), 직장에 다니는 누나(25)가 있다. 김 일병은 초등학교 3학년때 강원도 삼척에서 부천으로 이사와 부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Y전문대학 1학년에 다니다 지난해 12월 군에 입대했다. 김 일병의 싸이 홈피에는 주소와 함께 “편지마니마니해줘∼ㅋ”라고 적혀 있어 군생활을 하는 평범한 병사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기분에는 ‘슬픔’이라고 적혀있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싸이 홈피에는 지금까지 10만명 가까운 네티즌들이 방문해 비난에서 동정론까지 많은 글을 남겼다. ●김일병 친구 홈피에도 비난 글 네티즌 김혜정씨는 “남들 다 하는 국방의 의무 왜 당신은 적응못하고 꼭 그런 일을 저질러야 했는지 정말 이해가 안된다.”면서 “당신이 죽인 8명의 고인들과 2명의 부상자들도 모두 당신과 같은 일 겪으면서 올라온 것일 뿐”이라는 글을 올렸다. 한편 일부 네티즌들은 김 일병의 친구들의 미니홈피까지 찾아가 비난과 악의성 글을 남겼다. 김 일병의 친구인 K씨의 미니홈피는 이날 하루 동안 7500여명의 네티즌이 방문했다. 일부 네티즌은 “친구 참 잘 두셨습니다.”,“살인마 친구 때문에 고생많겠군요.”와 같은 비난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부천 김학준·서울 이효연기자 kimhj@seoul.co.kr
  • ‘이라크철군안’ 美하원 제출

    이라크의 치안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즉각 철군을 지지하는 여론이 50%에 육박하는 가운데 미 공화·민주 하원의원들이 이라크 주둔 미군을 철수하자는 초당적 결의안을 제출했다. 월터 존스(노스캐롤라이나) 공화당 의원과 닐 에버크롬비(하와이) 민주당 의원은 16일(현지시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올 연말까지 철군 계획을 발표하고 2006년 10월1일부터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미 하원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에는 민주당 의원 다수와 공화당 의원 6명이 지지 서명을 했다. 공동 발의자인 존스 의원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제거했고, 이라크에 민주주의 기회를 부여했으며 이라크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 목표를 달성했는데 “더 이상 어떤 목표가 있어야 하는가.”라며 추궁했다. 양당 합동 철군안으로는 처음 제출된 이 결의안이 통과되려면 하원 전체회의의 승인을 얻어야 하나 공화당 지도부가 철군 일정 설정에 반대하고 있어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백악관과 국방부는 이 결의안에 대해 즉각 거부 의사를 밝혔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철군 일정을 정하는 것은 이라크 무장세력에 그릇된 메시지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임스 콘웨이 미 합참 작전본부장도 철군 시한 설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편 최근 발표된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지지 여론은 떨어진 반면 철군 여론은 높아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이번 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군의 즉각 철수를 지지하는 여론은 46%로 지난 2월의 42%보다 4%포인트 높아졌다.AP와 갤럽 공동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인 10명 중 6명이 부분 또는 전면 철군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주말화제] “두아들 한국국적 포기안해… 군대 보낼것”

    [주말화제] “두아들 한국국적 포기안해… 군대 보낼것”

    암참(AMCHAM·주한미국상공회의소)을 떠난 지금도 암참 회장으로 더 익숙한 제프리 존스 ‘미래의 동반자’ 재단 이사장이 두 아들의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기로 해 화제다. 국내 고위층 자제의 국적 포기가 잇따르고 있는 시점에 나온 얘기여서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존스 이사장은 17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주관으로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경영조찬세미나에서 어린 두 아들의 한국 국적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달 미국 출장길에 올랐을 때 아내로부터 이중국적 상태인 두 아들의 한국국적 포기 여부를 상의하는 전화를 받았다.”며 “하룻밤 동안 생각한 끝에 한국 국적을 유지키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어 “30여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돈도 벌고 혜택도 받았는데 군대 문제 때문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면서 “병역이 나쁜 경험도 아닌데 가야 되면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털어놓았다.“(두 아들이)나중에 파병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농담까지 곁들였다. 존스 이사장은 몇년전 파티장에서 컴퓨터학원 여강사를 만나 결혼했다. 한국인 부인 이인숙씨다. 현재 4살,2살된 아들을 두고 있다. 한국이름은 재민·재희. 물론 아이들이 아직 어린 탓에, 그의 이같은 결심이 끝까지 변치 않을지는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국적 유지의 변은 울림이 크다. 존스 이사장의 국적은 미국. 공식 강연석상에서 서슴없이 한국을 “우리나라”로 표현하면서도 귀화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객관적 위치에서 한국 입장을 미국에 전달하고 설득하려면 미국국적을 갖고 있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한국땅을 처음 밟은 것은 미국 유타주 브리검영 법대를 다니던 1971년.2년간의 종교 봉사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변호사 자격증을 딴 뒤 80년 김&장 법률사무소의 국제변호사로 한국에 되돌아왔다.98년부터 2002년까지 암참 회장을 지냈으며 2003년 4월에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나는 한국이 두렵다’라는 제목의 책도 썼다. 한국에서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쓴소리도 마다 않는 존스 이사장은 이날도 “부자를 질시하는 풍토를 빨리 버려야 한다.”고 따끔하게 꼬집었다. 자신이 잘 아는 한국사람 중 한 명은 반(反) 부자 정서를 피해 고국땅이 아닌 하와이에 1000만달러짜리 고급주택을 마련했다며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황장석기자의 아시아 창] ‘대선 조작 의혹’ 아로요 축출 가능성 낮은 이유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남편과 아들이 불법 복권업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겼다는 폭로에 이어 지난 대선 당시 선거 관리에게 부정행위를 지시하는 내용의 도청 테이프가 공개된 데 따른 것이다. 야당측은 특히 도청 테이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로요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반발이 거세지고 있지만 현지 언론과 외신 등은 전임자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쫓겨난 것과 달리 아로요의 경우 축출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분석한다. 가톨릭교회와 대기업, 군대 등 권력의 ‘이너서클(핵심부)’이 에스트라다에게 했던 것과 달리 아로요에게는 쉽게 등을 돌리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은 배우 경력의 빈민가 출신 에스트라다를 빼곤 모두 상류층 자손이었다. 아로요 역시 1960년대 필리핀을 이끈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의 딸이며 미국 조지타운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 뇌물수수 혐의 하나만으로 에스트라다를 내쫓은 기득권층은 (에스트라다)취임 때부터 에스트라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다. 아로요의 스캔들에 대해 이렇다 할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계급적 동질성’을 느낀다는 점과 서로 비슷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 때문으로 분석된다. 아로요를 대체할 인물도 마땅치 않은 현실론도 배어 있는 것 같다. 필리핀대학 사회학과 월든 벨로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아로요는 취임 이후 성장 위주 발전정책을 추진했을 뿐 기득권층의 반발을 의식해 분배 문제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일부 의원들이 테이프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필리핀 상·하원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하원은 아로요에게 별다른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있으며 상원은 테이프 내용에 대한 ‘예, 아니오’의 답변이 아닌 단순한 ‘코멘트’ 수준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surono@seoul.co.kr
  • “공단운영 복지시설 관료주의 팽배”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충렬(48) 감사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최근 보훈 복지 정책의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 ‘보훈 복지 정책의 혁신 비전(학민사 간)’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공단이 운영중인 각 복지시설의 경우 관료주의가 팽배해 복지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또 공단 역시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린 데다, 보훈처와의 관계 역시 유기적이지 못해 책임경영을 위축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자체 분석했다. 특히 한국의 보훈제도가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참전유공자→독립유공자→민주화 유공자’ 순으로 확대된 것은 군사정권 시절 친일파들이 권력 중추에 포진, 독립유공자들을 홀대한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이 감사는 공단의 혁신과제로 공단 경영의 책임자인 이사장에게 임원진의 임면권을 부여하고 임원 중간평가를 실시해 자율과 책임경영의 풍토를 조성하고 팽팽한 긴장감과 혁신의 분위기를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감사제도를 대안을 제시하는 ‘시스템 감사’, 경영 혁신을 보조하는 ‘도우미 감사’로 바꿔야 한다며 발상의 전환을 강조했다. 이 감사는 17일 국가유공자 26만여명의 평균 연령은 65세로 초고령 집단임에도 이들을 위한 노후 복지 제도는 낯뜨거울 정도라고 지적한 뒤 사회의 관심을 일깨워야겠다는 소명감에 자기고백성 책을 출간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감사는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했으며, 전국노동조합협의회(현 민주노총) 조직부장과 대통령 자문기구인 노사정위원회 책임전문위원, 노무현 대통령후보 정책특보 등을 지냈다.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사설] 유홍준 문화재청장 너무 튄다

    평양 6·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난 14일 북측이 마련한 만찬회 석상에서 북한영화 주제가를 부른 사실이 공개됐다.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기려 남북간 화합을 다지자고 만난 자리에서 북한 인기가요를 불러 흥을 돋우겠다는 데 시비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노래가 과연 우리쪽 인사가 부르기에 적합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유 청장이 부른 노래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주제가로, 이 영화는 6·25전쟁 중 북한 첩보원들의 활약상을 강조한 시리즈물이라고 한다. 전쟁에는 적이 있기 마련이고 6·25에서 북한 인민군의 적은 국군 및 미군을 비롯한 유엔참전국 군대이다. 따라서 국군 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랑하는 북한영화의 주제가를 ‘적국’ 출신 정부대표단의 한 사람이 부른 것이다. 이 얼마나 해괴한 짓인가. 그렇다고 우리는 유 청장의 노래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민족의 문화유산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앞장서 온 그는 북한 방문이 거의 불가능하던 1990년대 말 한달동안 북한을 돌며 문화유산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날도 만찬 테이블에 동석한 북측 인사들과 당시 체험을 이야기하던 끝에 영화 주제가를 떠올렸고, 그들의 권유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지 유 청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북이 화합·공조해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은 남·북 모두에 주어진 민족의 과제이다. 그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번번이 북쪽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크게 나무랄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일에는 금도가 있는 법이다. 많은 이들에게 6·25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일부 인사들의 분별력 없는 행동이 남북관계를 저해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당부한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정감록’ 때문에 민중이 울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이용해 자기 한 몸의 안락과 치부(致富)를 꾀하는 못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감록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배층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다.‘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삼은 것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당수 민중이 정감록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기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백백교(白白敎)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일제시대 백백교 사건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대표적인 사례다.1937년 백백교 간부 150여명이 집단살인사건으로 검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 결과 핵심 간부 18명이 최소한 신도 314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도 129명이나 되는 교인을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백백교는 교단 이름부터 ‘정감록’을 빌렸다. 정감록에 보면 말세에 사람이 다 죽은 뒤 “사람의 종자를 양백(兩白)에서 구한다.”고 했다.‘양백’은 곧 백백(白白)으로 풀이된다. 백백교에서는 이 구절을 끌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오직 백백교도뿐이라고 내세웠다. 또 한 가지. 정감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라도운봉두류산(全羅道雲峰頭流山) 성인출어함양림중(聖人出於咸陽林中)”이란 대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전라도 운봉에 두류산 즉, 지리산이요, 성인은 함양 땅 수풀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백백교에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앞부분은 “전(全)씨가 도(道)를 열(라)고 운(運)을 만(逢)난다.”고 보았다. 뒷부분은 성인이 출현하기로 예정된 ‘함양림’이란 장소를 백백교가 창시된 함(咸)경도 운림(林)면 마양(陽)리로 풀이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정말 기발한 해석이었다.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춘향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백교 식의 정감록 해석을 환영했다. 그들은 도리어 기상천외한 해석에서 비결의 힘과 매력을 발견했다. 그만큼 순리대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백백’이란 “한 가지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만들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구호를 요약한 것이기도 했다.‘흰 것’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바위가 희어진다.”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흰 바위란 전통적으로 미륵을 상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가지 흰 것”은 정씨 진인이 출현할 시기이자 미륵부처나 다름없는 백백교의 교주를 가리켰다. 요컨대, 새 종교 백백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선동적 믿음이 구호에 담겨 있었다. 백백교의 남자 신도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을 줄곧 외워댔다. 그러면 무병장수하고 말세에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세에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고 했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본래 기독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본고장 서양은 불로 망한다고 보았다. 동쪽은 서쪽의 반대라 물에 약하다고 풀이했다. 중요한 점은 백백교를 믿는 사람만이 무사히 살아 남는다는 주장이었다. 교단 측은 신도들에게 일단 한국의 53개 성지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 말세의 심판이 닥치면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라 했다. 금강산엔 ‘피수궁’(물의 재난을 피하는 궁궐)이 있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백백교의 교주 대원님이 하강해 신도들을 이상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백백교의 이상향은 동해의 섬이었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 3000리나 되는 영주란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엔 봉황과 기린이 살고 불로초도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백백교 신도는 누구나 그리로 인도된다. 그러나 만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려보고 싶은 이라면 계룡산으로 안내된다. 백백교의 수장인 대원님이 새 세상의 왕이 되어 교단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신도들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다. 교단에 재산을 많이 헌납한 사람은 당연히 큰 벼슬을 받게 된다. 이런 감언이설로 백백교 지도층은 세상 삶에 지친 민중을 유혹했다. 백백교를 세운 이는 가난한 농부 전정운(全廷雲)이었다. 본래 동학교도였던 그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서 백도교(白道敎)란 간판을 걸었다. 얼마 뒤 그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교명을 백백교로 바꿨다. 그는 1904년 6월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한국을 휩쓸어 말세가 된다면서 이상향에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백백교에 입교하라고 선동했다. 물론 전정운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럼에도,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는 등 세상은 무척 어수선해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백백교의 거짓 예언을 뿌리치지 못했다. 교주 전정운이 늙어 죽자 아들 전해룡이 뒤를 이었다. 전해룡은 1923년 경기도 가평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교당을 지었다.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그는 평소 단식을 잘했다.20일 동안 단식한 뒤에도 평소와 같은 기력을 과시해 신도들 사이에 신비감을 조장했다.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허다한 고등 사기수법의 하나였다. 전해룡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아직 미혼인 여성이 있으면 성적 노예로 삼아 착취했다. 유부녀라 해도 용모가 아름다우면 마음껏 유린했다. 전해룡은 변태성욕자가 분명해 자기의 정사(情事) 장면을 숱한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했다. 그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도가 있으면 이상향에 보낸다며 산으로 끌고 가 남몰래 살해했다.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벽력사(霹靂使)라는 명칭으로 부를 만큼 백백교 지도층은 집단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살인극은 무려 14년간 지속됐다. 만일 교주 전해룡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교단을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경우는 물론 간부나 첩이라도 태도가 변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살해되었다. 또한 신도들은 재산을 전액 헌금하게 돼 있었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 엄청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백백교는 무사했다. 교단 간부들이 해마다 거액을 상납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은 눈을 감아준 것이었다. 그러다 1937년 우연한 일로 백백교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된다. 백백교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컸다. 소설가 박태원은 ‘금은탑(金銀塔)’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설화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기 한국의 민중은 정치에 실의하고 생활에 궁핍했다. 근대 한국 민중의 불안한 사회심리를 이용해 우후죽순 격으로 뻗어난 것이 바로 백백교 따위의 악질적인 사이비 종교단체였다.1930년 6월 현재 정체불명의 그런 사이비 단체가 55개, 신도 수는 10여만명을 헤아렸다(동아일보 1930년 6월16일자 사설).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암울한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이었다. ●정감록을 이용한 재물 뺏기 ‘정감록’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식민지 시기 사회 전반에 꽤 널리 퍼진 병리현상이었다.1930년께 김창하라는 사람은 ‘천병만마’(千兵萬馬·무수한 군대)를 격퇴할 해인(海印)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판매하다가 검거됐다. 비슷한 무렵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에 살던 경호창과 최성기는 태백산 기슭의 벽촌을 돌아다니면서 곧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보천교도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입교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입교 시에는 소정의 돈을 납입하게 돼 있었다. 경호창 등은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중앙일보 1932년 3월16일자). 이런 일은 식민지 사회에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많았다.1826년(순조 26) 충청도 청주에서 정상채라는 사람이 붙들려 처벌을 받았다. 그는 여러 고장을 들락거리며 나이와 이름을 멋대로 속였다고 했다. 도술을 부린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환묘문(幻妙門)’과 같은 도술 책을 친구에게 주어 타인의 물건을 빼앗게 했다. 마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하며 진짜 난리는 얼마 뒤에 일어난다며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면서 정상채는 진인이 이미 섬에 와 있다고 황당한 말을 꾸미는 한편 진인의 당에 가입하려면 이름을 직접 서명하라고 사람들을 졸라댔다.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에 군복을 지어 입힌다며 군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을 그가 착복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채의 동료 박형서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주된 죄목은 남의 재물을 속여서 빼앗고 ‘흉언(凶言)’ 즉 거짓 소문과 예언을 지어내 인심을 소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전쟁이 박두했다는 둥, 해도(海島)에 진인이 있다는 둥 거짓 예언을 퍼뜨리며 자기가 살길을 아노라 했다(실록·순조 26년 10월27일 을해). 비슷한 예는 정말 많았다. 박형서나 정상채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은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변호인들은 왕조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면서 ‘범인들’이야말로 실은 ‘혁명아’였다고 강변하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군자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소비한 사람들이 과연 혁명아일지 의문이다. 그들이 말한 진인은 결국 환상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금품을 건네준 사람들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홍경래의 난 그런데 어떤 경우엔 도무지 이것이 ‘혹세무민’인지, 사기행각인지 또는 진정한 의미로 민중의 투쟁이었는지를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결코 백백교와 동렬에 놓일 성질은 아니지만 경계 짓기의 어려움을 확인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을 예로 들어 보겠다. 결코 홍경래 난을 매도하려는 뜻은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한다. 홍경래 난은 1811년(순조 11) 12월18일 시작됐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을 받고 곧 정주성에 갇혀 버렸다. 정주성 싸움은 이듬해 4월19일까지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결국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간 싸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란군 측은 여러 차례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엔 정감록이 예언한 정진인(鄭眞人)도 언급됐다. 서북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세도정권의 가렴주구는 악행이라는 등 그 시대 서북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정감록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이 어린 국왕과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을 건질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성인은 나서부터 비범하신데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라 직접 손을 대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다.” 정감록이 예언한 새 왕조의 창건자가 이미 홍경래의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로써 반란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문을 짓게 한 홍경래 자신은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능통해 전국을 유람했다고도 전한다. 홍경래 일당은 정감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정감록과 해도 진인에 대해 더욱더 이야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 난은 무려 10년 동안 사전에 준비됐다고 했다. 조직적인 반란이었던 셈이다. 풍수 전문가 홍경래를 비롯해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유랑지식인 또는 몰락 양반들이 반란군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이희저의 가산 다복동의 사저를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각지의 부자들과 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산에 광산을 열어 빈농과 유이민 등을 모아 훗날 군사로 동원했다. 이 당시는 청나라와 국경무역이 활발했을 때라 평안도 출신 가운데는 이희저의 경우처럼 대상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에 맞춰 평안도엔 유기(鍮器) 등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광산 개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홍경래 일파는 이런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이 기회에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홍경래를 지지한 계층은 민중이라기보다는 평안도 각지의 부호들이었다. 좌수와 별감을 비롯한 향임(鄕任·행정보조집단)과 별장(別將)과 천총 등 무임(武任·군사 및 치안담당자)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홍경래를 후원했다. 민중의 지지는 정주성을 지킬 때 엿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유랑지식인이었던 홍경래나 자칭 제갈공명이라 불렀던 우군칙은 반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부터 갖은 방법으로 부자인 이희저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저는 반란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책임지게 됐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평안도 유지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 난은 일부 유랑지식인과 상층부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 등은 서북지방의 숙원이던 지역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그 점에 있어 해당지역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평안도의 부호들이 반군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점으로 보아 실상은 평안도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반란이었다. 실제로도 격문을 분석해 보면 소농과 빈농 등 하층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만일 이 점을 확대 해석한다면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배층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 등이 자주 거론한 ‘정진인의 출현’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홍경래 난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혹세무민’이었다. 왕조의 입장은 그렇다 해도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한때 홍경래 일파를 적극 지지했던 평안도의 부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사물은 하나지만 해석은 구구하다.’라 했던 어느 역사가의 주장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홍경래의 난은 복잡했다 해두자. 어쨌거나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때로 정감록은 민중에게 고난과 아픔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이 점을 인식한 듯 근세의 종교지도자 소태산은 이렇게 말했다.“근래의 인심을 보면 사술(邪術)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니라. 그러나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이러한 무리는 발 붙일 곳을 얻지 못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김우중 前회장 佛국적으로 18년간 전경련회장등 활동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1987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18년간 법률상 프랑스인 신분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토지매입 등 민사상의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형사처벌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1987년 4월 2일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2003년 1월에는 프랑스 사회보장번호까지 발급받았다. 김 전 회장은 검찰에서 “동구권 시장개척에 나섰으나 미수교국이라는 어려움이 있어 불가피하게 이들 국가와 국교가 수립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국적법에는 외국 국적을 자진 취득한 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다고 돼 있어 김 전 회장은 1987년 이미 한국 국적을 상실한 것이다. 김 전 회장측은 “두 아들은 군대까지 다녀왔을 만큼 외국 국적 취득 때 한국 국적이 상실된다는 사실을 본인은 물론 담당 변호사조차 몰랐으며 한국 국적이 없어지는 사실을 알았다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변호인들과 협의해 국적회복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국적법상 프랑스인이 된 뒤에도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대한축구협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은 2003년 3월 김 전 회장이 1987년 부인 정희자씨와 두 아들과 함께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고 보도해 김 전 회장의 가족들도 한국 국적을 상실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프랑스 인터폴은 그에 앞서 2002년 12월 우리나라 경찰청에 “김씨가 1987년 4월 2일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고 통보해왔는데도 검찰이나 법무부 등에 이런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다음 번엔 독도 경비 서보고 싶다”

    “전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여러분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국방의 의무는 곧 축복입니다.” 지난 2002년 4월 창군 이래 처음으로 장애인으로서 정식 군번을 달고 군에 입대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박세호(36)씨가 15일 육군 제22보병사단에서 안보강연회를 개최, 장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날 오전 아내 이상미(41)씨와 함께 강연회장에 도착한 박씨는 부대 교회에서 1시간여에 걸쳐 지난 2002년 장애인으로서 군에 입대하게 된 동기 등에 대해 설명하고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장병들에게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박씨는 “여러분이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은 빽이 없어서도, 돈이 없어서도, 미국 시민권이 없어서도 아니며 오직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온것 아니냐.”며 “얼굴 표정도 제대로 지을 수 없고 팔다리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나같은 장애인들은 갈래야 갈 수 없는 군대를 온, 여러분들은 축복받은 분들”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병역을 회피하기 위한 갖가지 일들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워 지난 2002년 단 하루만이라도 군에 입대하고 싶다는 편지를 국방부장관과 병무청장에게 보냈으며 이같은 희망이 받아들여져 군에 입대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씨는 “편지에서는 단 하루만이라도 군 생활을 하고 싶다는 표현을 했지만 실제로는 체력이 다할 때까지 군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정말로 1박2일 훈련으로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역하게 돼 무척 안타까웠다.”며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군대에 가고 싶고 특히 독도 경비를 한번 서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아울러 최근 발효된 국적법과 관련해 잇따랐던 국적포기 신청이 병역회피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진 데 대해 “한마디로 화가 나 미칠 지경”이라고 가슴을 쳤다. 한편 지난 2002년 4월30일 서부전선 전진부대에 입대했던 박씨는 1박2일 간의 신병훈련과 철책경계,GOP견학 등을 마친 5월1일 02-명예00001번이라는 명예군번을 부여받고 이등병 제대를 했으며 이후 군부대 등지에서 30여 차례에 걸친 안보강연회를 개최했다.고성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세금해결등 청탁몰렸다”

    “매주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고 있고 총리는 내게 선배님이라고 예우한다네.” 부산에서 소금장수로, 서울에서는 청와대 실장으로 이중생활을 해온 60대가 붙잡혔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12일 공식 직제에도 없는 ‘청와대 별관팀장’이라며 1100여만원을 뜯어낸 손모(62)씨를 사기 등 혐의로 구속했다. 손씨의 이중생활은 우연찮은 계기로 시작됐다.2003년 4월 한의원 원장인 옛 군대동기 김모(62)씨를 40년만에 만난 자리에서 “청와대 일을 봐주고 있다.”고 꺼낸 한 마디가 발단이 됐다. 소금장수를 한다고 말하기 어려워 둘러댄 말을 김씨가 “손씨가 출세했다.”며 주변에 자랑하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중후한 외모의 노신사 풍채에다 명문 법대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가짜 이력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손씨는 “대통령의 간곡한 만류로 청와대 비선조직을 이끌며 사회 비리를 조사해 매주 보고하고 있다.”고 흘렸고 박모(64·여)씨로부터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까지 제공받았다. 힘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자 청탁도 몰렸다. 손씨는 지난해 12월 한 목사로부터 “아는 사람이 절도 혐의로 붙잡혔는데 도와달라.”는 말에 200만원을 받았다. 세금 해결을 빌미로 다단계 판매업체인 J사 간부 김모씨로부터는 200만원짜리 양복과 150만원짜리 코트 등 518만원어치의 물건을 받았다. 손씨는 김씨 앞에서 청와대 비서실장과 전화통화를 하는 것처럼 자작극을 벌였다. 또 개인빚 200만원을 대신 갚도록 했고 부하 직원들의 설 보너스 명목으로 300만원을 챙겼다. 손씨의 이중생활은 지난달 청와대 게시판에 익명의 제보가 올라가면서 꼬리가 잡혔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경찰에 와서도 ‘그분이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다.’며 좀처럼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여담여담] 軍과거사위 조사관 ‘간첩혐의자’ 배제 논란/구혜영 정치부 기자

    최근 국방부 과거사위가 민간조사관을 선임할 때 ‘간첩혐의’가 있는 사람은 인선에서 제외키로 했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 국민과 군이 조사결과를 불신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 군 과거사위의 설명이다. 기자는 이번 논란을 지켜보면서 1993년 자매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4년의 옥고를 치렀던 김삼석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사건이 떠올랐다. 간첩혐의자가 국가기관의 조사관으로 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전력시비’논란이었다. 김 조사관은 의문사위에 채용될 당시 국가공무원법 33조에 따라 형을 선고받은 지 5년이 넘었기 때문에 결격사유가 없다는 인정을 받았다. 자매간첩단 사건은 1994년 10월 독일에서 안기부가 프락치 사건이었음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사건에 간여했던 안기부 직원들의 동영상도 공개됐다.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고스란히 투영된 사건이었다. 지난해 7월 불거졌던 인선논란이 1년만에 또다시 재연될 조짐이 보이는 것에 기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국가기관이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 나서면서 이를 조사할 사람을 채용할 때는 진상규명을 철저히 할 수 있는 사람을 우선 선발해야 한다. 물론 간첩 혐의자가 조사관으로 선임되면 공정성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국가기관에서 파견한 또 다른 조사관이 있기 때문에 법이 정하는 테두리에서 업무 진행이 가능하다. 만약 부여된 임무를 개인적인 한풀이를 위해 이용했다면 비판받아야 하지만 과거 전력만을 문제삼아 미리부터 몸을 사리는 건 과거사 진상규명 의지를 의심케 한다. 백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조사관 채용시 이적단체 가입구성 및 고무찬양을 규정한 국가보안법 7조의 적용을 받는 것은 제외한다는 내용은 밝혔어야 한다. 보수세력들까지도 삭제를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군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낱낱이 밝히고 진정한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는 길에 이번 조사관 선임 논란이 색깔논쟁이라는 과거의 악습으로 퇴색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구혜영 정치부 기자 koohy@seoul.co.kr
  • 7억원 어치 황금의 배를 몰고 온 사나이

    7억원 어치 황금의 배를 몰고 온 사나이

    자유를 보상 받은 방진호(方震昊)「총좌(總佐)」의 현주소는 전쟁이 한창 막바지에 이른 1950년 10월 14일 새벽 - 인천 앞바다에는 자욱한 아내를 헤치면서 북괴기가 펄럭이는 50「톤」급 발동선 한 척이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갑판 위에는 괴뢰군 총좌(대령급) 한 사람을 둘러싸고 20명의 북괴장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대한민국 만세」를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남하한 조그마한 발동선. 그러나 이 발동선에는 시가 7억원 상당의 금괴 1「톤」반이 실려 있는 황금의 배였다. 18년 전 영웅, 오늘은 왕초(王草) 거부(巨富)의 꿈 대신「평애원장(平愛院長)」 괴뢰군 방진호 총좌. 부하장교 20명과 황금덩어리를 싣고 자유를 찾았던 이 영웅은 자기와 자기 부하가 자유를 찾은 대신 황금은 몽땅 대한민국 정부에 바쳤다. 그러나 정부는 이 영웅의 값진 행위에 보답하기 위해 1억 3천만환(현화 1천 3백만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1억 3천만환의 거액을 쥐고 거부의 꿈을 지닌 채 한때 군에서 문관으로 있다가 53년 가을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난 날의 영웅 방진호 총좌는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오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新場)리 경부선철도 연변에 30채의 집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는 평애원. 고아원겸 양로원인 이곳에서 넝마주이 왕초라는 별명을 가진 50대의 허수룩한 한 사나이가 조용히 과거를 되씹으며 살아가고 있다. 평애원 원장인 이 사나이 - 이 사람이 바로 황금의 배와 부하장교 20명을 데리고 자유를 찾았던 지난 날의 영웅 방진호씨(49)이다. 1억 3천만환의 보상금 태풍 사라호로 일장춘몽 한때 거부의 꿈을 지니고 전남 목포 근해에서 간석지를 막아 염전을 만들었지만 예기치 않았던 「사라」호 태풍으로 방대한 염전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채 알거지가 되어버린 방씨. 그 후 이곳에서 넝마주이들을 모아 스스로 넝마주이 왕초로 전락(?)해버린 이 사나이의 기구한 운명은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의 연속이다.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인 방씨는 해방 전 만주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측량학원을 수료한 뒤 집안현(輯安縣)의 건설국 기사로 취직, 기구한 운명의 첫발을 내디뎠다.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방씨는 그곳 요릿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요릿집 종업원「요리명」이라는 중국 사나이와 친히 사귀기 시작했다. 타향에서의 고독도 풀 겸「요리명」과 술자리도 같이하여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가 아닌 서로의 심금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국땅에서 해방을 맞은 방씨에게는「요리명」을 사귄 덕분으로 하루 아침에 큼직한 감투가 굴러들어왔다. 며칠 전까지 요릿집 종업원 행세를 하던 중국 공산당의 거물「요리명」이 집안현 수석(首席)의 자리에 있으면서 방씨를 집안현 평양변사처장(平壤辯事處長:영사)으로 임명한 것이다. 벼락감투를 뒤집어 쓴 방씨는 46년 2월 평양에 부임했다가 그 해 11월에는 소위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직에 관여, 평양철도경비사령부 총책 유경수(柳慶洙)중장(김일성의 매부)의 부책(副責)으로 중용되었다. 그 후 괴뢰정권의 내무성 정치보위부 직속기관인 진남포(鎭南浦)제련소 총책으로 영전한 방씨는 6·25 동란을 이 자리에서 맞았다. 원래부터 투철한 공산주의 사상자가 아닌 방씨는 차차 자유에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 기회만 있으면 남하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뜻이 같은 부하장교 20명을 포섭한 방씨는 이왕이면 당시 진남포제련소에 보관되어 있던 백금 3「톤」, 금 1「톤」반, 수은 70「톤」까지 같이 싣고 자유를 찾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50년 10월 한창 패주에 정신 없던 괴뢰정권은 방총좌에게 진남포제련소의 금과 수은을 만주 여순(旅順)으로 운반하라는 긴급지시문을 띄웠다. 이 지시문을 받은 방총좌는 때가 왔다고 느꼈다. 3개월 전부터 탈출 모의를 진행해오던 부하 20명과 비밀회의를 거듭한 끝에 D「데이」를 10월 10일 밤 11시로 정했다. 10월 10일 밤 11시. 칠흑같이 어두운 진남포 부두에는 50「톤」급 발동선 2척이「엔진」소리마저 죽여가며 조용히 와 닿았다. 북괴 경비병 10여 명의 엄중한 감시 아래 한 척에는 황금 1「톤」반이 실려지고는 또 한 척에는 백금 3「톤」과 수은 70「톤」이 실려졌다. 방총좌와 부하장교 20명은 황금이 실린 앞배에 탔다. 배 두 척이 진남포항을 벗어나 망망한 서해에 들어서서 한 시간쯤. 선수를 중공방면으로 막 돌리려는 찰나. 방총좌는 선장의 뒷머리에 권총을 갖다 대고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명령했다. 『선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이 때 경비병 10여명이 반항, 조그마한 발동선에선 교전이 벌어졌다. 20분만에 싸움은 방총좌의 승리로 끝나고 10여명의 경비병은 서해에 수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총격 소리를 들은 북괴경비정 한 척이 추격, 또다시 해상총격전이 벌어졌다. 간신히 경비정의 추격을 벗어나 연평도 앞바다에 도달했을 때 수은과 백금을 실었던 뒷배가 총탄에 구멍이 뚫려 애쓴 보람도 없이 바다 깊숙이 수장되어 버렸다. 진남포를 떠난 지 나흘 만에 방총좌는 수은과 백금은 바다에 수장되었지만 부하장교 20명과 황금 1「톤」반을 이끌고 무사히 목마르게 그리던 자유를 찾은 것이다. 53년 봄 1억 3천만환의 거액을 쥔 북괴총좌가 아닌 민간인 방진호씨는 거부의 꿈을 안은 채 전남 목포 근해에서 간석지를 막아 염전을 만들었지만 4년간의 피땀나는 노력도「사라」호 태풍으로 일장춘몽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수장(水葬)한 백금 3톤 수은 70톤 꼭 찾고 말겠다는 게 소원 돈하고는 인연이 없는 방씨. 이때부터 인생을 덤으로 생각한 방씨는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 57년 가을 무작정 찾아온 것이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 일명「쑥고개」라는 미(美)기지촌 주변이었다. 방씨는 우선 손수 흙벽돌을 찍어 경부선 철도연변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걸인 20명을 수용했다. 1개월이 지난 뒤 평애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리고 식구도 1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11년이 지난 오늘날 평애원은 30채의 집이 들어섰고 식구도 372명으로 불어났으며, 평택과 방성(彭城) 두 곳에는 분원도 마련됐다. 그 동안 이곳을 거쳐간 원생 중에는 현역 육군대위가 있는가 하면 수백만원을 치부한 어엿한 실업가도 10여명이나 된다는 것. 원장으로 보다는 넝마주이 왕초로 더 알려진 방씨. 방씨의 유일한 소원은 자유를 찾아 남하하던 당시 연평도 앞바다에 아깝게 수장되어버린 백금 3「톤」을 꼭 찾고 말겠다는 것이다. <수원 = 한의교(韓義敎)씨> [ 선데이서울 68년 10/13 제1권 제4호 ]
  • 볼리비아 시위대, 외국社 유전 7곳 점거

    볼리비아의 혼란이 가중되면서 내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카를로스 메사 대통령의 사임 뒤에도 반정부 시위대는 경제 개혁은 물론 원주민·농민 등 소외계층의 정치참여 확대를 요구하며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시위대는 8일(현지시간) 에너지 산업의 전면 국유화를 요구하며 유전지대인 동부 산타크루스 지역에 진출해 있는 영국석유(BP) 및 스페인 회사 렙솔의 유전 7곳을 강제 점거, 가동을 중단시켰다. 현재 정국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의회는 반정부 시위 때문에 수도 라파스에서 640㎞ 떨어진 수크레로 이동, 메사 대통령의 사직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긴급회의를 열기로 했다. 앞서 메사 대통령은 7일 밤 TV방송을 통해 “사회불안이 지속되면 내전에 빠질 수 있다.”면서 “즉시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 일정에 돌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위 주도 세력들도 조기 대선을 요구하고 있다. 또 누가 대통령직을 승계할지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시위대는 승계 1순위인 오르만도 바카 디에스 상원의장과 2순위인 마리오 코시오 하원의장은 즉각 사임하고,3순위인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대법원장이 과도수반을 맡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볼리비아 법은 3순위가 과도 수반이 되면 5개월 안에 대선을 실시해야 하지만 1,2순위가 수반이 되면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2007년 8월까지)를 채울 수 있도록 돼 있다. 바카 디에스는 산타크루스의 지주 출신으로 볼리비아의 3대 보수정당 가운데 민족혁명운동당(MNR), 좌파혁명운동당(MIR)의 지지를 받고 있다. 원주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에보 모랄레스 사회주의운동당(MAS) 총재는 “바카 디에스는 ‘독재 마피아’의 일원이며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면 시민불복종 운동을 펼치겠다.”면서 “국민 다수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모랄레스 총재가 집권할 경우 남미에서 7번째 좌파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바카 디에스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또 강경파 원주민을 대표하는 게릴라 출신 지도자 펠리페 키스페는 현 집권층 축출을 위한 내전을 벌일 것을 촉구하고 나서 정국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부산교구 안토니오 신부 ‘명예 고위성직자’에 임명

    천주교 부산교구 하 안토니오(83·본명 안톤 트라우넬) 신부가 최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명예 고위성직자(몬시뇰)에 임명됐다고 부산교구가 8일 밝혔다. 1922년 독일 베르팅겐에서 태어난 하 몬시뇰은 1958년 7월 부산교구에서 사목을 시작해 1986년 티없으신마리아성심수녀회를 설립했으며, 현재 파티마의세계사도직(푸른군대) 한국본부를 이끌고 있다.‘명예 고위성직자’는 기존 몬시뇰인 ‘교황의 명예 전속 사제’보다 한 단계 더 영예로운 몬시뇰이다. 부산교구는 2003년 3월 이홍기 몬시뇰의 탄생 이후 두 번째 몬시뇰을 배출했으며, 이로써 한국교회에서 전체 몬시뇰은 21명으로 늘어났다. 하 몬시뇰의 서임미사는 7월5일 오전 10시 부산교구 주교좌 남천성당에서 교구장 정명조 주교의 주례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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