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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G전자 ‘근무기강’ 잡는다

    김쌍수 부회장 취임 이후 ‘혁신’과 ‘독종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LG전자가 최근 근무기강 확립에 나섰다. 9일 LG전자에 따르면 이 회사는 최근 ‘본사 직원 근무기강 확립 모니터링’을 실시하며 직원들의 ‘정신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김 부회장이 본사 직원들을 모아놓고 “독한 자세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문한 직후부터다. 회사는 출근시간 및 점심시간 준수, 근무복장, 흡연구역 이외 장소에서의 흡연, 근무시간 중 빌딩 정문에서의 흡연 및 잡담, 빌딩내 이동 중 취식 등을 집중 ‘단속’하고 있다. 출근시간에는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직원들의 복장을 점검하고 있다. 점퍼차림이나 민소매 셔츠, 청바지, 탱크톱, 미니스커트 등이 ‘불량 복장’이다. 운동화나 끈없는 샌들, 슬리퍼도 사절이다. LG전자는 현재 부장급 이상 및 영업 등 외부활동직을 제외하고는 정장 대신 캐주얼 차림을 허용하고 있다. 창의성과 조직내 활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지나치게 느슨해 보인다는 지적도 있었다. 직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모 부장급 직원은 “자율 복장으로 다소 흐트러졌던 ‘사내 기강’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한 사원은 “암울했던 고등학교나 군대시절이 생각난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 자율 복장에서 정장으로 근무복장을 바꾼 LS산전처럼 LG전자도 ‘넥타이 부대’로 변신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전망이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강기훈 유서대필’ 진상 밝혀질까] ‘3년 옥고’ 강기훈씨 본지인터뷰

    “수십년간 자행돼 온 군사독재정권의 부도덕성을 덮기 위해 운동권 흠집내기를 시도한 사건입니다.”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인 강기훈(43·경기 고양시)씨는 8일, 이같은 주장을 하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지난 1991년,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김기설 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의 분신 자살사건을 포함해 각종 분신 사건이 잇따랐다. 강씨는 “그해 5월 청와대는 당정 고위회담을 거쳐 배후조종세력을 조사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전민련은 검찰이 유서대필 여부를 조사하려고 김씨의 필적을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업무일지를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는 게 강씨의 판단이다. 검찰은 업무일지와 김씨의 유서,1985년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강씨의 자술서 필적 등에 대한 감정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다. 그 결과 국과수는 강씨의 자술서와 김씨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감정을 내렸다. 강씨는 “조사과정에서 전민련 업무일지 작성자가 이동진, 임무영, 김기설씨 3인이 공동 작성한 것으로 진술했다.”면서 “당황한 검찰은 내가 조작해 작성했다고 자백할 것을 다그쳤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5월13일 김씨가 군대 동료 수첩에 20자 안팎으로 쓴 자필 자료를 검찰에서 압수해 갔고, 그 자료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건의 의혹은 증폭됐다. 강씨는 물론 당시 김씨의 상급부대 인사장교로 근무했던 이찬진 변호사는 “검찰은 그 자료를 찢어갔지만 증거자료로 제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군대 동료들 사이에서는 ‘연애편지의 전설’로 불렸다고 한다. 따라서 검찰이 동일필적 여부를 밝혀내려고 했다면 김씨의 부대에서 수많은 필적자료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 변호사는 주장했다. 강씨는 “유서대필 사건은 수사를 담당했던 세력들이 정권 요직에 그대로 남아 변한 게 없다.”고 주장하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사설] 개탄스런 병역기피용 국적포기

    병역의무를 마친 뒤 국적의 포기 여부를 결정토록 한 개정 국적법의 시행을 앞두고 국적포기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제1국민역에 편입되는 만 18세 이전이나, 병역문제를 해결한 후에 국적 포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새 국적법이 시행되면 후자의 경우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 법은 원래 원정출산의 폐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적용 대상자가 원정출산자는 물론이고 외교관·상사주재원·유학생 등의 기존 자녀까지 포함되자 국적 포기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볼썽사나운 점은 국적 포기자들 가운데는 부모의 직업이 외교관과 교수, 연구원 등 사회지도층 인사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병역의 의무를 이행치 않을 경우 국내 경제활동이나 취업시 제약이 많을 텐데도 단지 군대에 가기 싫다는 이유로 국적을 쉽게 버린다고 한다. 특권을 누리는 데는 물불을 안가리면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는 저버리겠다는 행동으로 비춰져 개탄스럽다. 우리 사회에서 혜택을 많이 받고, 교육 수준도 높은 사람들이 국가적 이익을 내몰라라 하는 세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선거 때 후보 아들의 병역문제가 쉽게 이슈화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그만큼 깊다는 방증일 것이다. 명예와 의무를 중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不在)는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중요 직책 임명시 곧잘 드러나는 지도층 가족의 병역·납세문제 등은 국민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몇해 전에는 전문브로커가 낀 중산층의 원정출산까지 기승을 부려 국제적으로 망신을 산 적이 있다. 세계화 시대에 남의 나라 국적 취득을 막을 수는 없겠으나 이를 병역 기피 등 국민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쪽으로 악용해서는 곤란하다.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씨줄날줄] 시에스타/신연숙 수석논설위원

    프랑스와 함께 세계1위 관광국가 자리를 다투는 스페인을 여행할 때 주의사항 1호가 시에스타 체크라는 점은 흥미롭다. 스페인사람들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 시간엔 돈도, 손님(관광객)들에 대한 예의도 안중에 없다는 태도다. 시장이나 가게는 물론 유명한 박물관도 문닫는 곳이 많으니 허탕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전확인을 해야 한다. 한푼이라도 더 벌자고 눈이 벌건 시대에 이 무슨 태평인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시에스타는 게으름이나 끈기부족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연구결과 낮잠은 생물학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처음 과학자들은 오후시간의 졸음 증세는 점심 식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졸음이 올 때는 주의력 상실과 체온저하 증세가 나타났는데 이는 저녁잠의 1단계 증세와 똑같았다. 후속 연구결과 사람 몸의 생체시계는 밤잠을 잔 지 정확히 12시간 시점에 낮잠을 요구한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나 낮잠은 밤잠보다 요구 정도가 약했기 때문에 생략되는 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시에스타는 생체시계에 순응한 것이다.30분정도 짧게 눈을 붙이거나 친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원기를 회복하고 지적·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포르투갈 남부지방에서 시작돼 스페인과 그리스 등 유럽을 거쳐 멕시코·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로 퍼졌다. 이들은 대부분 열대나 아열대기후 국가들이지만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들도 모든 연령대가 평균 1주에 1∼2회 낮잠을 자고,33%는 4회 이상 잔다고 한다. 낮잠의 생래적·보편적 욕구설을 뒷받침하는 얘기다. 우리나라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기후가 아열대 쪽으로 이동해 감에 따라 시에스타가 생길 모양이다. 소방방재청이 폭염종합대책을 수립하면서 일반직장 등에 낮잠시간의 한시적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고교시절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나 한여름 군대의 낮잠 풍경을 생각해 보면 전혀 새로운 제도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속도와 경쟁이 유별난 이 사회에 이런 여유가 제도화된다면 그건 또다른 얘기가 될 것 같다. 물론 ‘폭염재해’ 기간에 국한되겠지만, 모두가 일과를 멈추고 느림에 빠져본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다.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2) 호찌민家 사람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2) 호찌민家 사람들

    1945년, 베트남이 8월혁명을 통해 독립국가를 수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중부 응에안성의 킴리엔 마을로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청년이 찾아간 집은 오딴(O Tan)이라는 할머니의 집이었다. 오딴 할머니의 원래 이름은 응우옌 티 딴(Nguyen Thi Tan).1884년 태어난 그녀는 젊은 시절, 베트남 중·북부를 누비며 활동한 항불 독립운동가였다. 미모에 키가 훤칠했지만 결혼은 안했다. 프랑스 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청춘은 지나가버렸다.1916년에 체포됐을 때는 불에 달군 동세숫대를 타고 앉아야 했다. 엉덩이 살이 타들어갔지만 동지들을 팔아넘기지 않았다.1918년 노역형 9년을 선고받고 꽝응아이성에서 출감했을 때 이미 마흔이 훌쩍 넘었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관숙인(보호관찰대상자) 신세였다. 조국은 독립했지만 지나간 그녀의 청춘은 되돌릴 수 없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엄습하는 견디기 어려운 통증에 시달리던 그녀 앞에 청년이 불쑥 내놓은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낯익은 사진의 주인은 독립정부의 주석 호찌민이었다. “이 얼굴은 틀림없는 응우옌 탓 딴입니다.” 오딴은 그 청년이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엉 툭 오안(Vuong Thuc Oanh), 이 청년 역시 옥살이하다 8월혁명으로 출감한 항불혁명가였다. 그는 자기 동생 딴이 배운 스승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제가 1940년 중국의 광저우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가 세운 베트남혁명청년회의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나도 내 동생일 거라고 생각은 했다. 이 눈매는 세월이 흘렀지만 틀림없는 내 동생이다. 그리고 여기 이 귀를 봐.” 오딴은 사진 속 인물의 귀를 가리켰다. “동생 귀는 한 쪽이 유난히 크지. 그렇지만 함부로 말을 꺼내 나라 일에 바쁜 주석을 욕보이게 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 자신이 서지 않기도 하고. 외국으로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브엉 툭 오안은 오딴의 동생이 고향을 잊지 않았다며 중국에서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이 얘기를 듣고 오딴은 하노이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오딴은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집에서 기르던 오리 두 마리를 광주리에 담아 마을을 출발했다. 동네 사람들은 옷차림이 그게 뭐냐며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누나로서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일 뿐이다. 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호찌민이 10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그 뒤 호찌민에게 그녀는 곧 어머니였다. 또 주변에서 가는 동안에 죽고 말 것이라며 놓고 가라던 오리도 기어코 챙겼다. “가져 갈 만한 이유가 있어서 가지고 가는 것이네.” 미국이나 프랑스 연구자들은 오딴이 닭 두 마리와 달걀 20개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가난한 시골의 누나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리를 챙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만에 하노이에 도착한 오딴은 곧바로 주석관저로 바뀐 옛 프랑스 총독부로 갔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주석에게 동생을 만나러왔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경비원은 오딴을 이상한 눈빛으로 봤다. 경비원이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화가 난 그녀는 경비원을 나무랐다.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총명했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나도 좋은 옷이 있지만 이렇게 가난한 누이를 반겨 맞을 것인지 아닌지 보기 위해서 이렇게 입고 왔다. 당장 연락을 해라. 동생이 나를 맞지 않겠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경비원은 비서실에 연락했다. 곧 비서가 나와 오딴에게 어느 집의 주소를 일러주며 그곳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오딴은 발끈해서 오리가 든 광주리를 들고 일어섰다. 늙었다지만 프랑스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맞서던 결기가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돌아가겠네. 수십년 만에 누나가 왔는데 내일 보자는 말인가.” 비서가 당혹스러워하며 오딴을 붙들었다. “사실은 제가 아까 응우옌 티 딴이라는, 누이란 분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렸을 때 주석께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석께서는 장제스군대에 쌀 1만t을 주는 업무를 처리하고 계신 중입니다.” 당시 베트남에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핑계로 남쪽에는 영국군, 북쪽에는 장제스군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의 행패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뿐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었다. 호찌민은 장제스군을 하루빨리 내보내기 위해 어르고 달래느라 애쓰고 있던 참이었다. 오딴은 비로소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이것이 관리가 백성을 대하는 태도라면 나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나라 일로 그러하다면 내가 기다리겠다.” 오딴은 당 티 마이 교수 집으로 갔다. 당 티 마이교수는 호찌민과 동향으로 베트남의 전쟁영웅 보 응우옌 잡 장군과 함께 교사생활을 했다. 호찌민정부의 초대 교육부장관을 맡고 있기도 했다. 당 티 마이 교수의 집에 간 오딴은 오리를 내놓으며 요리를 부탁했다. “두 마리 오리를 그대로 삶아서 내주세요. 발 4개도 잘라 버리거나 으깨지 말고 꼭 통째로 내놓아야 합니다.” 다음날 아침 호찌민은 당 티 마이 교수 집에 들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딴은 벽을 바라본 채 돌아앉지 않았다. 호찌민은 오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찌어이(누나), 이 순간에 누이는 왜 이렇게 동생에게 화를 내고 계세요?” 그제서야 오딴은 돌아서 일어서 호찌민을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오딴은 호찌민의 뺨과 턱을 쓰다듬으며 안쓰러워했다. “왜 이렇게 늙었니. 어릴 때 그렇게 잘 생겼던 내 동생의 볼이 왜 이렇게 홀쭉하니. 그래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빛나는구나.” 감격적인 상봉 뒤에 아침식탁이 차려졌다. 물론 식탁 가운데에는 오리 두 마리가 놓여졌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오늘 너무 푸짐하게 차렸군요. 그런데 어쩌자고 오리를 이렇게 많이 올렸어요?” 그렇게 묻는 호찌민에게 당 티 마이 교수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리는 제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누이께서 응에안에서부터 가지고 온 것이랍니다.” 그 말을 듣고 호찌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리의 다리를 집어 들었다. “찌어이(누나), 오늘 이렇게 내 잘못이 낱낱이 드러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식탁에 앉았던 당 티 마이 교수의 가족들은 모두 의아한 눈으로 오딴을 쳐다봤다. 한동안 가만히 앉았던 오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오늘 아주 기쁘네. 내 동생이 40여년 동안 세계 각국을 떠돌다 돌아왔는데 우리 집안의 가르침을 잊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얼마나 기쁜가.” 호찌민은 어려서 오리발 때문에 외할머니에게 매맞은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댁 제삿날, 외할머니는 제삿상에 올리고 남은 오리발을 오딴의 남자동생들인 키엠과 호찌민에게 하나씩 주었다. 형인 키엠은 자기의 오리발을 들고 동생을 놀렸다. “내 오리발이 더 크∼다.” 약이 오른 호찌민은 자기 오리발은 내려놓고 형의 오리발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오리발을 마주잡고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동생들을 오딴이 나무랐다. “키엠, 형인 네가 양보해야지.” 그 말에 키엠은 잡아당기던 오리발을 놓았고 호찌민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밥상 위에 있던 할머니의 사기 밥그릇이 깨지고 말았다. 평소에 인자하기 그지없던 외할머니가 회초리를 집어 들었다. “깍자우(손자들아), 잘 들어라. 너희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학교에 다니며 문자를 배워도 남의 것을 탐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커서 탐관오리밖에 될 것이 없다. 그러니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은 어려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종아리를 걷어라.” 누이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호찌민은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옆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호찌민은 틈틈이 당 티 마이 교수 집에 들러 누나와 식사했다. 열흘 정도 머물던 오딴은 호찌민 비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열흘을 지내면서 동생이 식사하고 생활하는 것을 지켜봤다. 주석이면 다른 나라로 치면 대통령이고 왕인데, 비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식사하는 것을 보니 이제 내가 돌아가도 될 것 같다. 마음의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내 동생이 탐관오리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게야.” 당 티 마이 교수가 오딴을 말렸다. “왜 동생을 돌봐주시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세요.” 허리 굽은 시골 노인네는 교육부장관인 교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 동생은 이미 큰 사람이 됐네.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동생을 돌보는 게 아니라 동생의 그늘에 내가 기대는 것이 되네. 우리 조국이 프랑스 식민지가 됐을 때 가족들은 찢겨지고, 심지어 왕도 아프리카로 쫓겨났지 않았나.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되찾았고 나는 여한이 없네. 그리고 나는 권력 가까이에서 행세하는 사람이 아닐세. 내 동생은 여기에서 나라를 돌봐야 할 사람이고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내 집을 돌봐야 할 사람이네.” 당 티 마이 교수는 그래도 한 번 더 오딴을 붙잡았다. “고향에 돌볼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 난 자식이 없지. 그렇지만 내 마을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라네.” 그렇게 킴리엔으로 돌아간 호찌민의 누이는 1954년 7월20일 고향집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다시는 하노이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호찌민이 형 키엠과 누나 오딴을 챙기지 않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사실, 특히 엄마와 같은 누나 오딴의 장례식에 전보 한 장도 보내지 않은 것을 두고 사가들 사이에는 온갖 억측이 많았다. 특히 호찌민을 비정한 전쟁광으로 묘사하려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러나 1945년 8월혁명 직후부터 키엠과 오딴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작가 썬뚱은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오딴이 죽었을 때 호찌민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어요.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한 뒤 제네바협정을 두고 주언라이와 입장을 조율했지요.” 호찌민은 중국에서 돌아와서야 누이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볼펜을 떨어뜨린 채 책상다리를 꽉 움켜쥐고 겨우 몸을 지탱하던 호찌민은 한참 뒤에야 비서에게 조전이라도 보냈는지 물었다. “박(아저씨)이 돌아오면 의견을 여쭈려고 기다렸습니다.” 호찌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고향 킴리엔이 있는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그 영화 어때?]영화 ‘천군’ 제작보고회

    [그 영화 어때?]영화 ‘천군’ 제작보고회

    무과에 떨어져 방황하는 쑥대머리의 이순신 장군을 상상해본 적 있는지? 7월 중순 개봉하는 영화 ‘천군’(제작 싸이더스픽처스)은 성웅이 되기 전의 ‘청년 이순신’을 그린 팬터지 사극이다. 시간을 거슬러 하늘에서 내려온 남북한 군대(天軍)의 도움을 받아 28세의 젊은 이순신이 장군의 면모를 다듬어가는 게 이야기의 주요얼개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남겨둔 영화의 주인공은 박중훈(39). 코믹사극 ‘황산벌’(2003년)에서 웃기는(?) 계백장군을 맡아 ‘대박’을 터뜨렸던 그다. 그런 그가 이번엔 이순신이 되어 스크린으로 돌아온 것이다. 충무공 탄신일인 지난달 28일 서울 목동 현대백화점에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그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20대 젊은 영웅으로 변신한 배우 박중훈과 민준기 감독이 들려준 영화 이야기를 간추렸다. Q.연기하면서 느낀 이순신은 어떤 인물인지. A. (박중훈) “민족의 영웅이며 근사한 장군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역사엔 잘 기록돼 있지 않지만 장군에겐 무과에 낙방해 7년쯤 방황한 시간이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가 영웅이 되는 순간 끝이 난다. 방황하는 젊은 청년 이순신을 그렸다.” Q.어떻게 박중훈을 또다시 장군으로 캐스팅했는지. A. (민준기) “영웅 이순신을 그렸다면 다른 배우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보면 알겠지만 젊은 이순신은 박중훈이란 배우와 딱 맞아떨어진다. 코믹요소는 있지만 극중 이순신은 절대 코미디를 하지 않는다.” Q.왜 이순신인가? A. (민) “IMF때 이순신과 관련한 책을 봤었다.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드문 게 당시 현실이었는데,400년 전 이순신은 그런 점에서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이순신 장군을 그린 영화를 생각했으나, 해전을 제대로 묘사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 망설였다. 그러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신병(神兵)에 관한 기록을 읽고 남북한 군인들이 무과 시험에 낙방한 젊은 이순신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Q.그동안 코미디에 주력해 왔는데, 이순신 역할에 부담은 없었는지. A. (박) “코미디 ‘황산벌’과 역사적 영웅을 그렸다는 건 공통점이다. 그러나 ‘황산벌’이 전쟁터의 충장을 그렸다면, 이번엔 성웅도 한때 방황을 했었다는 이야기다. 희화화를 염려하는 시선은 역사는 엄숙해야 하고 영웅은 장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Q.영웅을 희화화했다는 우려도 있는데. A. (박) “배우 박중훈에게서 코미디를 지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열아홉살 때 대학시험에 떨어진 적이 있다. 무과에 떨어진 이순신과 격이 같진 않겠지만, 그때의 실패 경험을 유추해서 연기했다.” 총제작비 83억원이 투입된 ‘천군’에는 김승우 황정민 공효진 등이 함께 출연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인기작가 3인이 말하는 ‘요즘 사랑’

    인기작가 3인이 말하는 ‘요즘 사랑’

    라디오에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갖가지 사랑 고민이 가득하다.70% 가량이 여자 청취자들로부터 온 사연이다. 연인을 위한 이벤트의 하나로 사연을 보내는 이들은 오히려 남자들이 더 많다. 인스턴트식 사랑이 난무하는 요즘이지만 라디오에는 아직도 순수한 사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라디오 작가들의 생각이다.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김영경 작가,‘친한 친구’의 남효민 작가,‘이소라의 음악도시’의 김재연 작가로부터 라디오 속 사랑을 들어봤다. ●넘쳐나는 짝사랑 라디오에 도착하는 사랑 사연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짝사랑이다.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부터 친구의 애인까지 짝사랑으로 마음 아파하는 이들의 갖가지 사연이 매일 도착한다. 특히 여러 조건을 따지지 않는 10대들은 혼자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유난히 많다고 한다. 김영경(26) 작가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10대들은 앞뒤 안 가리고 일단 마음에 들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다만 공부와 운동을 잘하는 친구보다는 춤 잘 추고 옷 잘 입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세대에 비해 이성에게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어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고, 사귀고 또 헤어진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짝사랑 중에는 단순히 상대방이 좋아해주지 않는 것 외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많다. 남효민(29) 작가는 “한번은 언니의 군대간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고2 여학생이 사연을 보내왔다.”면서 “그냥 생각하기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하겠지만 절절한 마음이 느껴져 다들 가슴 아파했다.”고 전했다. 또래와의 이성 교제가 자연스럽고 활발한 요즘에도 여학생에게 선생님은 영원한 짝사랑 대상이다. 일시적으로 진심 반 장난 반으로 좋아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심각한 경우도 많다. 한 20대 청취자는 학창시절 짝사랑한 선생님을 잊지 못해 그 마음을 사연에 담아 보내기도 했다. 또 학원 선생님과 서로 마음을 확인했지만 사귈 수 없는 현실에 가슴 아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세대별 이별 패턴 짝사랑 못지않게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별의 아픔을 담은 사연이다. 식사도 거르고 잠을 잊은 채 실연의 아픔을 달래면서 위로해줄 사람을 찾는 곳 중 하나가 라디오인 셈이다. 이별의 이유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세대별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10대들은 쉽게 마음을 여는 만큼 쉽게 마음을 닫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애정이 식으면 과감히 이별을 선언한다. 대신 기성세대들처럼 현실적인 조건이나 문제들로 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영경 작가는 “예전의 학생들은 ‘우리 지금은 공부하고 나중에 만나자.’며 헤어지기도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연애가 학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0대 초반은 역시 군대가 가장 큰 사랑의 걸림돌이다. 군복무하는 동안 기다려달라는 남자의 사연, 기다려 주겠다는 여자들의 사연도 많지만 남자의 군입대와 동시에 이별을 맞는 사람들도 많다. 20대 후반의 남녀는 경제적인 문제로 이별을 말한다. 여자가 먼저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고 남자는 학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재연(25) 작가는 “처음엔 사랑으로 서로를 이해하지만 어느새 돈 문제로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면서 “서로 절충점을 찾지 못해 결국 헤어지는 이들이 많다.”고 씁쓸해했다. ●요즘 10대들은 다르다? 기성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의 눈에 10대의 사랑 방식은 낯설고 생소하다. 특히 만나고 헤어짐을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생각한다. 남효민 작가는 “요즘은 온라인 상에서 쪽지로 ‘우리 사귀자.’라는 말 한마디로 만남을 시작한다.”면서 “온라인에서 사귀는 사이로 지내다 단 한번도 만나지 않고 헤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했다. 감정 표현도 직설적이다. 좋아한다는 말은 물론 거절하는 말도 거침없다. 김영경 작가는 “한번은 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스튜디오에 나와 전화로 한 여학생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면서 “그 여학생은 너무나 냉정하게 ‘넌 아니야.’라고 단번에 거절해 놀랐다.”고 전했다. 성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요즘 10대들은 10,20년 전과 다르다. 남자친구와 1박 이상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첫경험의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도 많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작가들의 설명이다. ●여자는 짝사랑에, 남자는 이별에 집착 라디오 방송국에 도착하는 사연을 들여다 보면 사랑에 대한 집착의 형태가 성별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다. 우선 많은 수의 여자들이 짝사랑을 놓지 못하는 경향이 짙다.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사람을 7,8년씩 좋아하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거나 거절당한 상대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김재연 작가는 “본인 입장에서는 힘들고 심각한 문제겠지만 제3자가 볼 때는 집착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반면 남자들은 이미 헤어진 여자에 대해 집착한다. 특히 군입대로 이별한 여자에 대한 얘기는 남자들이 보내는 사연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또 서로 합의하에 헤어졌더라도 ‘그녀가 나를 떠났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김 작가는 “남녀가 헤어지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만 남자들은 그런 부분에 둔감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그래픽 이혜선기자 okong@seoul.co.kr
  • [독자의 소리] 보호관찰소는 ‘수용기관’ 아니다/노청한

    4월27일자 1면 톱 ‘범죄 피해경험이 범죄 부른다’ 기사를 관심을 갖고 읽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최근 펴낸 ‘소년범의 범죄화 과정 및 보호방안 연구’ 보고서를 분석한 특종으로 ‘청소년기의 범죄 피해경험이 경험으로만 머물지 않고 가해를 학습시킴으로써 범죄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는 요지이다. 끊이지 않고 대물림되고 있는 학교폭력이나 군대내 가혹행위 등과 무관하지 않은 유용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사에서는 이 보고서가 “전국 9개 보호관찰소에 수용돼 있는 소년범 1000명을 개별면접 방식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다.”고 밝히고 있다. 시의성 있고 심층 분석한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혼동할 수 있는 ‘옥에 티’가 있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년원은 수용기관이지만 보호관찰소는 수용기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용하고 있는 청소년이 아니라 보호관찰하고 있는 청소년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우리나라에 보호관찰제도가 도입된 지 벌써 16년이다. 전국 35개의 보호관찰소에서 연간 15만명에 이르는 보호관찰,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 대상자에 대한 법 집행업무를 맡고 있는 데도 열독률이 높은 신문사가 형사사법체계의 중심축인 보호관찰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 다른 언론사도 ‘보호관찰’을 ‘보호감찰’로,‘보호관찰관’을 ‘감찰관’으로, 심지어 보호관찰과 각종 명령을 집행하는 업무를 보호관찰 공무원이 아닌 경찰이 맡고 있다고도 했다. 형사사법 절차의 근간에 어긋나는 내용이다. 그때마다 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같은 부정확한 기사로, 전국에서 주·야간 범죄 예방을 위해 진력하는 보호관찰 공무원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걱정된다. 노청한
  • 日 개헌여론 8년새 10%P 상승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의 현행헌법 시행 58주년인 3일 언론들은 “개헌해야 한다는 여론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이 개헌보다는 ‘정권교체’에 집중한다는 입장이어서 일러야 2010년쯤 개헌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2000년 출범한 중·참의원 헌법조사회는 지난달 각각 개헌안 보고서를 마련했다. 아사히신문이 지난달 24·25일 전국 유권자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쟁포기를 담은 헌법 개정 필요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6%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지난 1997년 46%에서 2001년 47%,2004년 53% 등으로 계속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반대로 ‘고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은 33%로 지난해 조사 때의 35%보다 2%포인트 낮아졌다. 반대여론은 97년 39%,2001년 36%로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조사에서는 또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에 대해 ‘자위대는 지금대로 좋지만 헌법을 개정해 존재를 명기해야 한다.’는 대답이 58%였고 12%는 ‘보통의 군대로 해야 한다.’고 답변해 70%가 어떤 형태로든 헌법에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해야 한다는 생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개헌 찬성론이 높아진 것은 정계가 개헌지지 세력인 자민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로 재편되고 자위대의 해외활동이 늘어나는 등 정치상황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언론들은 그러나 당분간 개헌 전망은 낮은 편이라고 내다봤다. 마이니치신문은 “개헌 여론이 늘어나고 있지만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제1야당인 민주당 내에 개헌에 대한 열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민주당이 ‘헌법제언’을 채택했지만 이것은 ‘정권 준비정당’으로서의 방향성을 보여준 것일 뿐”이라고 분석했고, 자민당도 개헌보다 정권유지를 더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어 개헌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라고 덧붙였다. taein@seoul.co.kr
  • 총리실 위원회 대폭 축소

    총리실 위원회 대폭 축소

    지난 1976년 설치된 중앙민방위협의회가 기능상실 등의 이유로 30년 만에 해체되는 등 국무총리실 산하 63개 위원회 가운데 19개가 폐지되거나 직급이 낮아지는 등 정비된다. 국무조정실은 3일 이같은 내용의 총리실 산하 위원회 정비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45개 위원회 가운데 4개가 폐지되고,5개 위원회가 장관급으로 격하된다. 국무조정실장이 위원장인 18개 위원회도 3개가 폐지되고 1개는 위원장 직위가 한 단계 낮아진다. 폐지되는 위원회는 총리 산하 물관리정책조정위와 백제문화권개발자원위 등 7개다. 총리가 위원장인 접경지역정책심의위와 정보통신기반보호위 등 6개 위원회는 위원장이 소관부처 장관이나 차관으로 한 단계 낮춰진다.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와 APEC준비위 등 6개 위원회는 관련사업이 종료되는 대로 자동 폐지된다고 국무조정실은 밝혔다. 이번에 폐지되는 위원회의 경우 설치목적이 달성됐거나 운영실적이 저조하고, 행정여건 변화로 존치 필요성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국무조정실은 설명했다. 실제로 중앙민방위협의회는 1976년 설치된 뒤 평균 5년에 한번꼴로 열려 유명무실한 상황이고, 정보화책임관협의회는 2001년 이후 한번도 개최되지 않았다고 국무조정실은 밝혔다. 한편 참여정부 들어 총리 산하에 신설된 위원회는 주한미군대책위, 일자리만들기위, 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대책위 등 21개에 이른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논술이 술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글쓴이 :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 때와 아홉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자랐다. 열아홉 살 되던 해에는 카잔 대학에 진학했으나 싫증을 느끼고, 고향에 돌아가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부들의 생활 개선에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군대 생활을 하던 1855년에 ‘유년 시대’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작가가 되었고, 이어 ‘소년 시대’‘청년 시대’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유럽에 널리 알렸다. 톨스토이의 삶은 그의 나이 50세를 기점으로 전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의 전반기까지 그는 행복한 결혼 생활과 창작에 몰두하며 ‘안나 카레리나’와 ‘전쟁과 평화’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뒤에 쓴 ‘참회록’에서 이 시기를 오직 제 집안 일과 재산, 작가로서의 성공만을 얻는 데 급급했던 이기주의적 시기였다고 스스로 비판하고 있다.50세가 된 1870년대 후반부터 톨스토이는 세속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좀더 이상적인 그 무엇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생활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물으며 플라톤이나 칸트, 쇼펜하우어, 파스칼과 같은 철학자들의 책을 두루 탐구하던 끝에 결국에는 기독교 사상에 대한 나름의 재해석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았다. 그의 사상은 사랑의 관념에 투철한 원시 기독교 정신으로 되돌아가서 전 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으로서, 근로·채식·금주·금연의 소박한 생활과 악에 대한 무저항 불복종주의를 신조로 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1882년 모스크바 빈민굴을 시찰한 후에는 종교적·윤리적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제도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낸다. 이 책에 실린 11편의 작품은 톨스토이가 오랜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이른바 ‘톨스토이주의’라고 불리는 그 나름의 새로운 기독교 윤리관을 확고하게 세운 뒤인 1880년대 이후에 쓴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사상을 헐벗은 농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전통적인 민담 형식을 띤 글들을 다수 발표하는데, 이 책에 실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든가, 어려서 동화로 많이 읽는 ‘바보 이반’과 같은 이야기들은 그가 쓴 다른 어떤 장편들보다도 톨스토이의 사상을 간명하게 잘 나타내 준다. 이 책은 민담 형식으로 쓰인 톨스토이의 짧은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세 노인’과 같은 작품들은 어떠한 것이 올바른 삶인지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 악에 동일한 악으로 대항하려 하지 말고, 지상의 부귀를 버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라는 그의 가르침이 담긴 이 짧은 글들은 문학의 참된 의의와 가치를 확인하게 해 주는 영롱함을 보여 준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생각해보기 -톨스토이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무엇이라 말하고 있나.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사랑’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다.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기를 들어 써보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을 골라 그 중요성을 써보자. -인간의 삶에서 ‘물질’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두 형제와 금화’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을 돕는 일은 돈이 아니라 오직 일로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보자. ■독서 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 중1∼고3 -관련 교과 고등 사회, 윤리와 사상, 전통윤리, 사회문화, 정치, 경제 -함께 읽어 볼 책 부활(톨스토이),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당신들의 천국(이청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무소유(법정) -기출논제 2000학년도 서강대 정시 논술,1999학년도 이화여대 인문계 정시 논술,1999학년도 서강대 모의 논술,1998학년도 이화여대 정시 논술,1998학년도 서강대 정시 논술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1) ‘통일 베트남’ 의 붉은 별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1) ‘통일 베트남’ 의 붉은 별

    ‘Nho Co Bac Ho’, 이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은 베트남 사람이 아니다. 정확하게 30년 전 1975년 4월30일 사이공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통령궁. 굳게 닫힌 철문을 부수고 탱크 한 대가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다른 두 대의 탱크가 대통령궁 정면의 담장을 밀어제치며 쇄도했다. 탱크 위로 펄럭이는 깃발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황색별이 새겨져 있었다. 곧 이어 대통령궁 앞마당에 게양되어 있던 사이공정권의 깃발이 내려지고 NLF의 깃발이 올라갔다.30년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베트남이 ‘독립’과 ‘통일’을 양손에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남베트남 해방전선의 전사들과 베트남 인민군대의 병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 순간만을 고대하며 신화처럼 싸워온 그들이 마침내 움켜쥔 기적같은 승리였다. “Vietnam Muon Nam(베트남 만세)! HoChiMinh Muon Nam(호찌민 만세)!” 이 환호는 곧 사이공시가지를 메우고 베트남 전역을 진동시켰다. 베트남 만세, 호찌민 만세. 일본과 프랑스, 미국을 차례로 물리치고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한 감격적인 순간, 베트남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바로 호찌민이었다. 호찌민은 베트남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베트남의 남과 북, 전사와 인민을 결속시키는 힘이었다. 승리의 이 기쁜 날 호아저씨 같이 있는 것 같네. 호아저씨 말한 것처럼 휘황한 승리 거두었네. 산천을 되찾기 위한 우리의 30년 투쟁 민주공화국의 30년 항쟁 기어이 성공했네.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호찌민. - Nho co Bac Ho (박호가 있는 것처럼)가사 전문 이 노래를 부르며 베트남인들은 호찌민을 그리워하고 혁명의 승리를 기뻐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든 것이 누구인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이 노래의 임자는 참으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팜 투인.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음악가인 그는 프랑스식민 치하에서 위세를 떨친 세도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팜 꾸인은 프랑스가 세운 식민왕조의 최고위 관직인 상서를 지냈다.1945년 8월 혁명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팜 꾸인은 혁명세력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호찌민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직접 그를 만나겠다는 뜻을 하달했다. 그러나 호찌민의 명령이 도달했을 때는 이미 그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이었다. 아마 호찌민의 명령이 조금 더 빨리 당도했더라면 응오 딘 지엠(사이공정권의 대통령)과 같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혁명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팜 투인은 혁명진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함께 싸웠다. 그리고 혁명세력이 승리를 거둔 날 호찌민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 오늘도 바딘광장에 있는 호찌민의 영묘 앞에는 끝을 찾을 수 없는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베트남에서 모든 것이 변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풍경이 이것이다. 시장경제 제도의 도입을 근간으로 하는 개혁정책이 본격화된 지난 10여년 동안 베트남의 모습은 엄청나게 변했다. 자전거가 물결을 이루고 있던 하노이의 거리는 이제 오토바이의 차지가 되었다. 사이공의 거리는 이미 오토바이를 밀어내며 자동차가 점령하기 시작했다. 시속 20km를 낼 수 없었던 하노이와 사이공을 잇는 1번국도 위에는 트럭과 버스들이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다. 평균 시속 60km,80km를 넘나들며 아찔아찔하게 추월을 감행하는 차량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차량의 속도만 변할 리 없다. 베트남 사회 또한 시속 20km에서 시속 60km,80km의 사회로 급변했다. 베트남인들의 삶과 생각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는 이제 돌이키기 어려운 속도로 베트남의 일상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다. 베트남을 상대로 20여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그 후로 20년 넘게 경제봉쇄를 감행했던 미국의 대사관이 하노이에 복귀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 베트남에 총을 겨누었던 나라들은 미국보다 더 빨리 손을 내밀어 대사관계를 맺었다. 미국의 제 1동맹국으로 32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던 한국은 베트남의 주요 교역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투자규모에서도 한국은 최상위 순서를 다투고 있다. 한국의 TV드라마는 베트남의 안방을 장악하고 한국 연예인들의 동향은 베트남 잡지에서 빠지지 않는 고정 꼭지가 되어 있다. 베트남의 작가들은 한국문학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보트피플’이 되어 조국을 등졌던 미국의 협력자들도 베트남으로 돌아오고 있다. 승전 30주년을 사흘 앞둔 4월27일, 베트남 국영TV는 놀랍게도 사이공 정권의 총리를 지낸 응웬 까우 끼의 인터뷰까지 내보냈다. 그러는 한편으로 베트남의 사회주의적 정책들은 대폭 후퇴했다. 무상으로 제공되던 교육과 의료서비스 비용의 대부분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항미전쟁의 전 기간 동안 중국 러시아와 함께 베트남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북한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40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베트남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기획입국’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북한은 ‘초보적인 의리도 모르는 행위’라고 베트남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종전 30주년을 맞은 베트남은 항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통일을 이룩한 지난날의 영광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바꾸어나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 당과 정부는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여전히 사회주의를 국가성격으로 하고 공산당에 의한 일당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베트남의 모든 것은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는 호찌민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흠모와 존경이다. 베트남의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도 그의 영묘 앞에 사람들을 줄서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도이머이도 호찌민사상에서 비롯 호찌민의 동지로서 남부혁명을 지도했던 쩐 박 당은 베트남의 개혁노선, 도이머이를 일관되게 옹호해온 원로다. 호찌민 노선에 가장 정통한 이론가이기도 한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당과 정부, 어느 쪽의 직책도 맡지 않고 오랫동안 야인으로 살아왔지만 베트남에서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그와 약속을 잡았는데 늦고 말았다. 여성영웅인 따 띠 끼유와의 인터뷰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택시기사가 집을 곧바로 찾지 못했다. 몇 번이나 주소를 되묻는 그에게 메모한 주소를 내밀었다. 우옌 민 호앙거리의 42-65. 다시 차를 돌려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며 번지수를 확인해보지만 찾지 못했다. 기사가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헛수고였다. 쩐 박 당,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기사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쩐 박 당이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자신 있게 창문을 내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쩐 박 당 선생의 집이 어디예요?” 새로 생긴 넓은 골목을 가리켰다. 곁에 두고 한참 동안 헤맨 것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공동주석을 지낸 쩐 박 당은 여전히 남부베트남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1968년부터 1973년까지 사이공당서기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사이공에서 쩐 반 저우와 함께 남부혁명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다. “1945년, 프랑스가 사이공에 돌아왔지요. 그리고 ‘남끼’정부를 세웠어요. 총리, 국회, 군대, 다 갖췄어요. 그런데 없는 것이 단 하나 있었어요. 그 나라에는 국민이 없었지요. 프랑스가 물러간 다음에는 미국이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웠지요,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통령을 수없이 갈아치웠지만 미국은 늘 지고 있었어요. 그들이 패배한 가장 큰 요인은 그들에게는 국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호찌민이 없었지요.” 미국이 가지지 못한 국민을 가진 사람이 호찌민이었다. 쩐 박 당은 호찌민이 단순히 분단된 땅을 통일시킨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인의 모럴과 사상을 통일시킨 사람이 호찌민이었다. 심지어 마을의 분쟁에서도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은 그것이 과연 호찌민의 뜻에 부합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베트남이 앞으로 정치제도를 바꿀 수 있고, 체제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찌민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베트남의 변화하는 현실과 호찌민노선과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쩐 박 당은 이렇게 되물었다. “10년 전부터 베트남에 왔다니까 아시겠죠. 얼마나 많이 변했습니까?” 10년 전의 베트남과 지금의 베트남은 비교하기조차 어렵다. 빠른 속도로 변해온 한국도 베트남의 최근 10년과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10년 전이면 우리가 도이머이에 들어간 지 7년이 지난 다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더 어려웠어요. 해방 후 10년간 우리는 정말 어려웠어요. 쌀은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굶주리며 고구마 따위로 겨우겨우 연명했지요.” “전쟁이 끝났는데도 우린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미국의 경제봉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이 미국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미국을 몰아냈고, 스스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호찌민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그 해석에 입각한 첫 번째 실천이 도이머이였던 거예요.” 호찌민은 일찍이 말했다. 혁명을 하고도 인민이 여전히 가난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을 하고도 여전히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예전에 우리는 ‘평등’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가난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똑같이 나누어야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풍요라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가진 것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비록 맹목적인 평등에 대한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쩐 박 당의 견해는 역편향으로 기우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져보았다. “분배와 생산력의 향상, 현실에서 이 두 가지는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 하나를 먼저 해결하고 다른 것을 해결해야 하는 선후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두 가지의 문제는 언제나 동시에 검토되어야 할 중요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를 실감할 수 없게 명쾌하고 정연하게 논리를 전개하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연 그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은 일본 통치에서 벗어난 지 60년 되었지요? 그 중에서 3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정권 가진 지 60년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30년을 전쟁했습니다. 조선에 비하면 10배의 시간을 전쟁으로 보냈어요. 이 상처에서 벗어나려면 10배의 노력이 필요해요. 호찌민주석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누구나 먹고, 학교 가고, 잘 곳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호찌민 주석이 가려고 했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호 주석의 뜻에서 벗어나곤 했지만 언제나 우리는 호주석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을 제재해왔고, 앞으로도 제재해나갈 겁니다. 지금 우리의 원칙은 간단합니다. 자기의 노동으로 거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베트남을 움직이는 것은 호찌민노선이다. 베트남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호찌민의 지도노선이 지금은 베트남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뒷받침하는 지도노선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호찌민의 어록이 더욱 빈번하게 불려나오게 될 것을 예고하는 쩐 박 당에게 물었다. “호찌민이 베트남을 가두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있나요?” “나와 내 친구들은 호찌민을 성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나와 내 친구들이 원하는 것은 호찌민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모럴로서 말입니다. 그는 정치가로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우리는 호찌민이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게 되지요.”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부고]

    ●동국대 박물관장 장충식씨 동국대 박물관장 장충식(張忠植) 교수가 30일 오전 3시3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64세. 동국대 인도철학과 출신으로 1993년부터 동국대 정교수로 재직해 온 고인은 동국대 인문과학대학장, 한국불교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거쳐 일본 류코쿠대(龍谷大)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을 지냈다.‘고려 화엄판화의 세계’,‘신라석탑연구’,‘한국의 불상’,‘한국금석총목’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유가족으로는 미망인 김영숙 여사와 환욱, 환일 씨 등 2남이 있다. 발인 4일 오전 8시. 빈소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8호실.(02)3410-6918. ●‘위안부’ 신경란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출신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신경란 할머니가 지난달 25일 85세를 일기로 충남 당진 자택에서 타계했다.1일 한국정신대연구소에 따르면 지난달 19,20일 나란히 강순애(78) 할머니와 김영자(83) 할머니가 별세하는 등 올해만 벌써 10명의 위안부 출신 할머니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생존자는 118명이다.192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신 할머니는 만 17세였던 1938년 1월 간호부 모집에 따라나서 중국 항저우로 끌려간 뒤 위안부로 생활했다. ●신해용(금융감독원 부원장보)기용(프라임비뇨기과 원장)씨 부친상 강건진(명성세미트론 대표)장순호(전 숭덕공고 교감)한인식·나철웅·송인보(사업)씨 빙부상 30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3일 오전 10시 (02)590-2352 ●배명우(자영업)명재(경향신문 전국부 차장)명렬(코반무역 대표)명현(여수시청 직원)씨 부친상 1일 전남 여수시 돌산읍 작금마을 자택, 발인 3일 오전 10시 (061)644-2890 ●김광선(경기도의원)씨 상배 1일 일산병원, 발인 3일 오전 8시 (031)908-1599 ●손영종(사업)씨 모친상 조부영(전 국회 부의장)김건호(사업)씨 빙모상 30일 강북삼성병원, 발인 3일 오전 9시 (02)2001-1096 ●김대평(금융감독원 부원장보)평(학원강사)씨 부친상 안익상(성전건축주식회사 대표)씨 빙부상 29일 부산전문장례식장, 발인 3일 오전 9시 (051)312-0604 ●배종민(삼성전기 차장)종운(오픈타이드 부장)지혜(하나생명)씨 부친상 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일 오전 11시 (02)3410-6910 ●유상호(전국시도의회 의장협의회 사무국장)상철(거창고 교사)상삼(건축업)상선(국제과학문화연구소 연구원)씨 모친상 최강목(롯데칠성음료 팀장)씨 빙모상 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일 오전 9시 (02)3410-6911 ●김영전(전 속리산관광호텔 회장)씨 별세 대수(전 매일경제신문 사회부 차장)정수·지수(사업)씨 부친상 전미숙(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씨 시부상 이정원(공군대령)씨 빙부상 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일 오전 8시 (02)3410-6920 ●김대근(세신버팔로 전무이사)원근(그린베이커리 고문)봉근(대우건설 부장)미숙(한강중 교사)씨 부친상 윤양섭(동아일보 사회부 차장)씨 빙부상 1일 부산 영락공원, 발인 4일 오전 9시 (051)508-9000 ●김병득(자영업)병한(엘토스 대표)정희(TBS 보도부 차장)씨 모친상 김진덕(메트라이프생명 부지점장)씨 빙모상 1일 서울 강동구 길동성당, 발인 3일 오전 6시 (02)476-9899
  • [서울광장] 軍의 고객은 국민이다/김경홍 논설위원

    [서울광장] 軍의 고객은 국민이다/김경홍 논설위원

    대다수 국민들은 군에 대한 인식에서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보와 관련해서 군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안보나 국방은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 즉 국가나 군의 책임이라는 투다. 국방의 의무만 해도 그렇다. 남의 자식이 군대에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 자식이 군대에 가는 것은 뭔가 억울하다는 부모들도 많다. 병역을 마친 남자들은 군대시절 얘기만 나오면 온갖 허풍을 보태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전부 기합을 받았다거나 군기가 셌다는 등 고생한 얘기뿐이다. 듣는 사람은 군은 고생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드러난 훈련소 인분사건은 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백번 잘했더라도 한번 잘못으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이치다. 최근 한 장교는 “군인이 죽으면 전부 의문사”라고 말했다. 사인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도 유족들이 수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사회의 자살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 가운데 군에서도 자살 사고자가 연평균 50명에 이른다. 일반이 보기에는 신체건강한 청년이 군대에 갔는데 자살했다면 군당국을 원망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3년 한해에 20∼24세의 일반인 남자의 자살자는 10만명당 15.7명이었다. 같은해 군의 자살자는 43명으로 10만명당 9.8명이다. 군의 자살률이 일반의 자살률보다 훨씬 낮다. 군 관계자는 “군대보다 일반사회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통계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군에서 자살자가 생길 때마다 매도당하는 것을 볼 때 군이 다소간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수치비교만으로는 곤란한 부분도 있다. 군인으로 입대한 청년들은 일단 신체건강했고, 자살 동기에 군대부적응이나 상관이나 동료사병의 가혹행위 등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경이나 여건, 장병들의 심리상태를 잘 관찰한다면 일반사회보다 훨씬 더 자살자를 줄일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달 초 취임한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육군의 변화를 지시했다고 한다. 김 총장은 “군의 고객은 국민”이라는 전제 아래 대국민 감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라고도 했다. 김 총장이 육군의 CEO로서 마케팅 전략을 도입하겠다는 의도다. 김 총장이 육군의 CEO로서 고객중심의 적극적 마케팅에 나서겠다는 변화는 바람직스럽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육군의 개혁과제는 많다. 과학군, 정보화 군으로 변모하자면 조직개편과 인사, 교육시스템 등 전반적인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과제는 군으로서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과제다. 첨단군으로 변모하자면 결국은 병력을 줄이되 첨단장비와 무기체계를 갖추는 길밖에 없다. 병력을 줄이는 것보다는 첨단장비를 갖추는 것이 훨씬 돈이 더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군이 강해지려면 돈이 더 들 수밖에 없고, 돈을 더 얻어내려면 국민들의 군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필수적이다. 국민이 고객이라면 고객감동과 고객만족이 필요한 이유다. 육군 혁신기획단이 고객만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군 부적응 병사들의 휴근명령제나, 복무지역 선택지원제, 장애인의 군무원 채용확대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도입된다면 장병들의 사기나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을 안심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안보나 국방이 군인들의 몫만은 아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안보가 튼튼한 안보다. 국민들이 군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강군은 존재할 수 없다. 군과 국민들이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며 한걸음 더 다가서기를 기대한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 해병대사령관 김명균 중장

    정부는 29일 김명균(해군 소장·해사 27기) 합동참모본부 전비태세검열실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해병대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육군과 해군 및 해병대의 중장급 이하 장성 25명에 대한 진급인사를 단행했다. 지난 3월 합참의장과 육·해군 총장 등 수뇌부 교체에 이어지는 후속 인사다. ●육사 30기 군단장 시대 총 7명의 중장 진급자가 나온 육군의 경우 이영계(육사 30기) 육군 정보작전부장이 수방사령관에, 박종달(육사 29기) 3사관학교장, 방효복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성출 육군 지휘통신참모부장, 김근태(이상 육사 30기) 육군대학 총장, 최용주(3사 4기) 2군사령부 참모장 등 5명은 일선 군단장에 보임됐다. 또 지난 2월 임명된 김영한(육사 29기) 기무사령관도 이번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예년과 달리 한꺼번에 5명의 중장 진급자가 나온 해군의 경우 송영무 해군 기획관리참모부장이 합참 인사군수본부장에, 정관옥 해군 정보작전참모부장이 해군 차장에, 권영준(이상 해사 27기) 국방부 인사국장이 해군사관학교장에 각각 임명됐다. 해사 28기인 박인용 해군 전투발전단장과 서양원 작전사령부 부사령관은 교육사령관과 작전사령관에 보임됐다. ●해병대사령관은 막판까지 혼전 후보간에 막판까지 경합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해병대사령관의 경우 김명균 소장이 올랐다. 또 육군에서는 황영수(육사 32기) 육군본부 전력개발관리단 사업관리처장 등 9명은 소장으로 진급, 일선 사단장 등에 보임됐다. 김영만(육사 30기) 준장 등 3명은 소장 진급과 함께 전문직위에 각각 올랐다. 중장급 장성에 대한 일부 보직 인사도 단행됐다. 합참 차장에는 권안도(육사 27기) 육군 중장이, 합참 작전본부장에는 김태영(육사 29기) 수방사령관이 각각 자리를 옮겼다. 이번 인사에는 국방부가 구상중인 새로운 장성 진급제도 개선 방안이 시범적으로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위원들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부여하되, 철저한 검증도 이뤄졌다고 한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베트남전 종전 30주년] “분노의 30년…위령비 찾는 한국인 이젠 친구”

    ■ 가족잃은 피해자들의 용서 “36년 전 총질을 해대던 그들에게 난 이미 죽었어. 하지만 정말로 눈 감기 전에 당신들이 날 찾아와 줬구먼. 우리 손자가 살아 있다면 딱 당신들 또래일 텐데….” 김현아(38·여)씨는 베트남 할머니 응웬티니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2003년 8월 어느날, 베트남 쾅남성의 시골마을 투이보촌. 마을 어귀에서 위태롭게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응웬티니 할머니는 그의 손을 꼭 감싸쥐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턱을 힘겹게 움직여 짓는 희미한 미소. 한국군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증오와 절망의 세월을 지내온 할머니는 그렇게 원수의 나라와 화해를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85세로 세상을 떴다. 김씨를 비롯한 시민단체 ‘나와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우연히 베트남의 항구 도시 다낭에 갔다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전해듣고 현장을 찾았다. 응웬티니 할머니를 통해 들은 67년 12월21일의 이야기는 참혹했다. 한국군 1개 소대가 닥치는 대로 총을 쏘며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땅굴로 숨은 주민들을 밖으로 끌어내 무차별로 총질을 했다.145명이 죽었다. 응웬티니 할머니는 아들과 딸, 사위를 잃었고 3살배기 손자는 품안에서 두개골이 산산조각났다. 자신도 왼쪽 턱과 혀 반쪽이 날아갔다. 쾅아이성 푹빈촌에서 만난 응웬리(75) 할아버지는 “66년 9월 한국군을 피해 사탕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와 형제, 조카 등 9명이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면서 내내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며 울부짖었다. 같은 마을 레티티엣(64) 할머니는 “갓난 아들을 보여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아들은 뇌손상을 입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끔찍한 기억을 가진 베트남 사람들과 그 말을 믿기 어려웠던 한국인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당혹스러웠다. 마을 어귀부터 서럽게 울면서 따라다니는 할머니도 있었고, 간간이 노려보거나 원망을 토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매월 할머니·할아버지 10명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고, 피해 지역 묘지 조성과 위령비 건립, 베트남 평화 기행, 한-베트남 평화 캠프 등을 통해 ‘속죄’를 구하면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66년 10월 112명이 죽은 쾅아이성 지엔니엔촌 사건의 생존자 팜티메오(85) 할머니도 그랬다. 가족 11명이 죽었고 자신도 가슴에 커다란 총상이 남아 있다. 나직이 말을 이어가다 울음을 터뜨린 할머니는 “내가 우니까 부담스럽지 않으냐.”며 오히려 마주앉은 한국 사람들을 걱정했다. “한국인인 제가 밉지 않으세요.” “그때의 한국 군인들은 증오하지. 하지만 당신들은 그때 겨우 태어난 사람들인걸. 그동안 아무도 묻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니 정말 고마워.” 69년 10월 쾅남 빈영사 사건에서 일가족 8명을 잃은 판반카(72) 할아버지는 “30년간 한국 사람들에게 치를 떨었지만 2002년부터 꾸준히 찾아와 위령탑에 진심으로 참배하는 한국인들을 이제는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벌인 전쟁에 군대를 보내야 했던 한국 역시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다. 그래선지 한 할머니는 2003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소식에 또다시 같은 일을 한다며 걱정해 주기도 했다. 김씨는 “우리가 먼저 화해니 용서니 하는 것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해지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삶에 작으나마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전쟁 피해자인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도 동참하고 있다. 평화 박물관 사업은 200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당시 83세)·김옥주(당시 77세) 할머니가 “더 이상 우리 같은 전쟁 피해자가 없기를 바란다.”며 낸 성금 7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해서 추진됐다. 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이옥선(79) 할머니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나와 우리’ 김정우 사무국장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한국군의 행위를 무조건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라면서 “그래야만 우리도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과거사 감추기에 당당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아직도 베트남전을 반공성전이나 국위선양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인접국 ‘진출’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베트남전을 진실되게 조명하는 노력이 진정한 한·베트남 관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포용의 戰前세대’ 딩반득 교수 “이제는 과거를 닫고 더 나은 미래를 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 2월부터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딩반득(62) 교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베트남 전쟁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한국이나 미국에 대해 크게 나쁜 감정은 없다.”고 말한다. ●베트남 복구위해 평화 택한것 “한국인이 미안하다고 얘기할 때면 저는 늘 괜찮다고 말합니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한국이 싫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평화를 원했고 썩은 시체와 말라버린 초목만 남은 나라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었기에 베트남은 증오를 버리고 평화를 선택했다고 딩 교수는 전했다. 그는 전쟁 당시 하노이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4년간 학생들과 산에서 숨어 지냈지만 도시에 떨어지는 폭탄, 곳곳에서 들려오는 총성 등 전쟁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썩어가는 시체들조차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잠을 설치게 만드는 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게 그에게는 커다란 괴로움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사과는 감정적인 문제”라면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과거에 대한 사과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베트남 투자, 영화, 한류(韓流)로 대표되는 문화적 교류로 양국이 함께 발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엽제 피해 대물림… 꼭 해결돼야 그는 양국의 우정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딩 교수는 “고엽제로 인한 고통은 전후 세대까지 대물림되고 있다.”면서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베트남의 동반자로 인정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냉정한 戰後세대’ 원지통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의료·교육 등 어떤 식으로든 베트남에 한국은 보상을해야 합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베트남 학생 원지통(26)은 한국에 대해 전쟁 세대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는 한국인의 모습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죠. 한국·베트남 우호 관계를 말할 때 흔히 투자를 얘기하지만 그건 한국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베트남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요.” ●“한국 투자가 우리를 위한 선행인가” 원지통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좋아하고 눈물나게 매운 불닭을 즐기며 세련된 차림의 한국사람들에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과거 문제는 별개다. 그는 “윗세대들은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꺼린다.”면서 “증오심을 꺼내 보이면 과거 악몽이 떠올라 자신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우리는 동반자’라는 미명 아래 모든 문제를 덮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달 미국 법원이 고엽제 소송을 기각한 데 대해 “고엽제 문제는 누가 누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는가의 차원이 아니다.”라면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가족이 고통받고 있는 만큼 미국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 나쁜감정은 없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한국군의 잔혹한 이미지까지 바꿀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갖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베트남 사람들이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베트남 사람들은 독도 분쟁과 비슷한 문제로 중국에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역사물 스크린 점령할까

    새달 4일 동서양 역사물이 나란히 간판을 건다.100여년 전 조선시대가 배경인 국산 액션사극 ‘혈의 누’와,12세기 십자군 원정길로 카메라를 옮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서사액션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미스터리 스릴러의 현대적 감각을 버무린 국산 퓨전사극, 장중한 사실액션이 화면을 압도하는 스콧 감독의 신작 사이에서 관객은 어느 쪽 손을 들어줄까. ●혈의 누 사극과 스릴러.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어감의 조합이다. 영화 ‘혈의 누’(감독 김대승, 제작 좋은영화)의 파격은 이뿐만이 아니다. 근대와 현대, 이성과 광기, 과학과 무속, 양반과 상민 등 격변의 시대를 배경삼아 다층적인 충돌구조가 일으키는 스파크가 기존 어느 영화보다 강렬하다. 여기에 작정하고 덤벼든 잔혹한 연쇄 살인장면 묘사는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다. 조선 후기인 1808년, 제지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외딴 섬 동화도. 조정에 바칠 제지를 실은 수송선이 원인 모를 화재로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뭍에서 수사관 원규(차승원) 일행이 파견된다. 그런데 이들이 섬에 도착한 첫 날부터 참혹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범상치 않은 살인 행각을 목도한 마을 주민들은 7년 전 ‘천주쟁이’로 몰려 온가족이 참형을 당한 강객주(천호진)의 원혼이 저주를 내린 것이라며 술렁거린다. 냉철한 이성과 과학수사를 표방하는 원규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인물은 제지소 주인의 아들 인권(박용우).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대립구도일뿐 극이 진행되면서 섬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베일을 벗을수록 원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을 직감하고, 무력감에 시달린다. 그건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남의 목숨까지 거침없이 해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처절한 확인이다. 영화가 내포하는 상징이나 감독이 의도한 다층적인 의미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 ‘혈의 누’는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거나 감성적으로 충분히 설득당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중반 이후 극적 긴장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건 스릴러 장르로서의 이 영화가 지닌 치명적인 결함. 촘촘하게 덫을 놓아 관객의 두뇌게임을 부추기던 영화는 갑자기 클라이맥스에서 원규의 입을 빌려 범인을 드러내는 게으른 방법을 택했다. 중요한 건 누가 범인이냐가 아니라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낸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라는 감독의 설명은 이 지점에서 구차한 변명처럼 들린다. 비주얼한 화면과 끊임없이 뇌를 자극하는 청각적인 효과는 기존에 보아온 여느 사극과 비교해 월등히 낫다. 흥행 코미디배우로 각인된 차승원은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기대 이상의 밀도있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햄릿형 인간’ 원규를 100% 표현하기에는 아직 힘이 달려 보인다. 캐릭터를 충분히 체현하지 못하기는 두호역의 지성도 마찬가지. 다만 인권역의 박용우는 모처럼 제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18세 관람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킹덤 오브 헤븐 ‘글래디에이터’로 아카데미 5개 부문상을 휩쓸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역사에 스케일의 외피를 입히는 주특기를 또 한번 화면에 구현했다. ‘킹덤 오브 헤븐’의 시간적 배경은 십자군 원정대가 활약했던 12세기 초. 스펙터클 서사액션을 다시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은 성지 예루살렘을 놓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세력다툼하는 중세전쟁의 소용돌이 깊숙한 곳으로 앵글을 돌렸다. 결론부터 귀띔하자면,‘글래디에이터’‘트로이’류의 장중한 서사액션을 챙겨보는 관객에겐 기본적 흥미요건을 무리없이 갖춘 영화로 다가갈 듯하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기독교도들이 급속히 세력을 키운 이슬람 군대에 압박당하자 영주 출신의 십자군 노장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가 젊은 대장장이 발리안(올랜도 블룸)을 찾아온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발리안 앞에 갑자기 나타난 고프리는 자신이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함께 성지를 수호하러 떠나자고 제안한다. 이야기 아귀를 맞추려 느닷없이 돌출된 가족사의 비밀에 실소가 터진다. 하지만 이후 착실히 서사액션의 강도를 높여가는 영화의 공력에 그쯤은 눈감아 줄만하다. 고프리 영주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은 발리안이 예루살렘 사수에 나서고, 일관되게 그 영웅담을 쫓아가는 것이 줄거리 얼개. 서사액션물에서 빠질 수 없는 멜로 요소도 물론 끼어있다. 예루살렘의 국왕 볼드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발리안은, 교회 기사단의 우두머리 루지앵과 정략결혼한 국왕의 여동생 시빌라(에바 그린) 공주와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특기는 속도감이다. 시대물(상영시간 2시간17분)은 장황한 서사 때문에 빠른 진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통념을 깨부순다. 사실적인 대규모 전투를 잇달아 펼쳐 놓으면서도 영화의 몸놀림은 대단히 재빠르다.‘글래디에이터’‘반지의 제왕’‘트로이’ 등 서사액션 블록버스터들의 스펙터클을 압축해 놓은 듯한 전투장면들은 그 자체가 톡톡한 감상포인트다. 할리우드의 많은 감독들이 엄두를 못 내고 밀쳐온 시나리오를 선뜻 스크린에 옮긴 감독의 용기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전투의 엄청난 규모 말고 ‘리들리 스콧의 것’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서구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편향된 시각으로 십자군 전쟁을 묘사한 것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 예컨대 당시 이슬람의 대영웅이었던 살라딘(살라흐 앗딘)의 존재는, 주인공 발리안을 영웅으로 띄워올리는 부속장치로 볼품없이 주저앉아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 레골라스로 나와 여성팬들을 사로잡은 빅스타 올랜도 블룸의 또 다른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영화의 소득이다. 강인함과 비애를 함께 지닌 그의 캐릭터는 ‘트로이’의 브래드 피트와 견줄 만하다. 나병으로 죽어가는 가면 속의 볼드윈 국왕은 에드워드 노턴이 연기했다.15세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리민(李敏·81) 여사는 10년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을 지낸 천레이(陳雷·90)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다. 12살에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1942년부터 45년까지 3년여 동안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과 함께 당시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인근 브야츠크 마을의 소련군 야영지에서 88특별여단에 편입됐다. 리 여사는 이 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났다. 리 여사는 후에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다. 리 여사는 하얼빈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 내내 노전사답게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60년이 넘는 과거사임에도 정확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42~45년까지 김일성부부와 활동 리 여사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북한 지도자로 옹립됐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리 여사는 “당시 88여단 내에서 최용건과 김책 등이 김일성보다 상급자였다. 이들은 해방 후 투쟁 방향과 진로를 모색하는 내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해방 후 중국과 북한의 공산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88여단의 소련측 책임자가 ‘조선인 가운데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최용건 등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의 군사적·정치적 능력이 탁월하고 나이도 우리보다 젊다. 그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추대 이유를 설명했다고 회고했다. ●문학적 재능 많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88여단 시절 ‘단결무’라는 가무극을 직접 만들어 조선인 부하들과 함께 공연하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리 여사는 “정열적이고 활달했던 김일성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줬으며 문학적 재능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 여사는 당시 김일성이 직접 작사했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말씀. 아아 귀에 쟁쟁해….”라는 노래인데 당시 조선인 전사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결혼 주례 김일성과의 일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 주례 사건이다. 당시 리 여사는 중국인 천레이와의 연애 사건에 휘말렸다. 천레이는 자아비판과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된 상태였고 조선인 동지들도 리민의 장래를 위해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을 만류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단순한 연애가 아닌 ‘혁명적 동지의 결합’이란 김정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일성이 중국인 지도부를 설득, 전격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1943년 섣달 그믐날 리민 부부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날 최광·김옥순 부부도 백년가약을 맺었다. 리민 부부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는 각별한 관계였다.9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통역없이 이들을 단독 접견했다. ●김정일은 전쟁놀이 즐겼던 골목대장 리 여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을 42년 가을로 기억하고 있다.“42년 가을 강보에 싸인 젖먹이 김정일을 처음 봤다. 이후 45년 8월15일까지 김정일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고 밝혔다. 당시 리 여사는 통신대대에 근무, 상관인 최용건을 자주 만났다. 당시 최용건은 김일성과 같은 막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막사에 가면 가끔 어린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피부가 검은 데다 키가 작고 총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김정일은 아버지의 큰 모자를 쓰고 목총을 갖고 군대놀이를 즐겨했다. 큰 모자 때문에 눈이 가려진 채 뛰어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막사에 손님이 찾아오면 중국말과 한국말로 번갈아 ‘엄마, 아빠’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전해지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파티가 벌어지고 흥에 겨워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평소 바지를 입기 싫어하던 김정일이 이날만은 스스로 바지를 찾아 입고 또래 유치원생들을 이끌고 전선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주위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94년 7월20일 김일성 주석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리민 부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갖다 대는 무례를 범했다.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김 위원장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서였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의 천레이 부부 접견 사진은 이례적으로 노동신문에 공개됐다. 리민 부부는 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만주 항일전사 리민 리 여사의 항일 투쟁은 남한의 역사책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30년대 만주 항일 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조선의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창립했다. 이 부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45년 종전 당시 1000여명 가운데 3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 리민은 중국인 리자오린(李兆麟)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1로군(동만주),2로군(지린성 동부),3로군(북만주)으로 재편된다. 당시 김일성은 1로군 제2방면 6사장(師長·대대장급)으로 일본군에 의해 동북항일연군이 와해되는 시점인 41년 전후로 상급자들이 대부분 사망,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최용건은 2로군, 김책은 3로군 소속이었지만 김일성보다 나이는 물론 직책도 높았다. 1924년 헤이룽장 오동하에서 태어난 리 여사는 부모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압록강을 건너 헤이룽장 삼강평원에 정착했다.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사망했고 천레이는 오빠와 절친한 전우였다. 리 여사는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 부대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유격대원들의 취사 보조원, 간호원 등 비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리 여사는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7∼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완달산 등지에서 큰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3로군은 기병대가 주력인 일본군에 맞서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의 늪지대로 퇴각하는 유격전술을 폈다. 1938년 여름 완달산 전투에서는 300여명의 부대원 가운데 고작 60여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일본군은 군인과 개척단 수천명을 동원, 동서남 3면을 포위하고 고립 전술을 폈다. 서서히 좁혀 오는 포위망 속에서 6일간 물 한 방울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다. 결국 북쪽 절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상당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 리 여사는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가던 전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고 회상했다. 일본군은 30년대 말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앴다. 배고픔과 추위는 그런 대로 참았지만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전우들의 배반이 가장 가슴 아팠다. 리 여사는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그가 속한 3로군은 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갔다. 천레이 부부는 문화대혁명(66∼76년) 당시 반동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실권 장악과 함께 복권됐다. oilman@seoul.co.kr ● 리민 여사는 1924년 중국 헤이룽장성 오동하에서 태어나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1942∼1945년 김일성 주석과 부인 김정숙 등 북한 핵심 인사들과 88특별여단에서 활동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중국인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식 주례를 김일성 주석이 할 정도였다.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반동으로 몰렸다가 복권됐으며, 남편 천은 후에 헤이룽장성 성장을 10년간 지냈고, 리 여사 역시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설훈 전의원 만난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항일 전사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천레이(陳雷·90) 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의 부인이자 정협 부주석을 지낸 리민(李敏·81)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리해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기 위해 찾아온 설훈 전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항일동북연군에서 10년 가까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리 여사는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6·15 공동선언’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 기쁨에 들떠 있었다고 한다. 리 여사는 “2002년 6·15선언 2주년을 맞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도자기’ 2개를 만들어 그 중 하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지만 김대중 선생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동안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은 설 전 의원은 “리민 여사의 통일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남은 여생 동안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고 말했다. 리민 여사가 기증한 통일기원 도자기는 김대중 도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oilman@seoul.co.kr
  • “위안부 문제 ILO에 상정할 것”

    “일본의 전후 피해자들을 돕는 법안을 마련하고 치욕스러운 과거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한·일 과거사 문제와 독도·교과서 왜곡 파문에 공동 대처하는 양국 ‘양심세력’들의 연대가 강화되는 가운데 최근 일본 시민운동가들의 한국 방문이 잦아지고 있다. 일본의 시민운동단체들은 한국인 피해자를 ‘지원’하는 소극적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관련법안의 상정을 위한 입법활동과 과거사 현안의 문제점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적극적’인 운동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25일 방한한 일본 ‘강제동원·기업책임추급재판을 위한 전국네트워크’의 야노 히데키(54·矢野秀喜)사무국장도 이에 앞장서고 있다. 야노 국장은 “한국인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도 대부분 기각당하는 현실을 볼 때 포괄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야노 국장이 속한 단체도 일제하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가 과거 일했던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소송제기를 했을 때 재판정보와 체류비 등을 지원하고 기업에 있는 기록조사 등을 제공하는 ‘지원’중심의 활동을 벌여 왔다. 일본에만 한국인 피해자 소송지원단체가 4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야노 국장은 강제연행된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책은 ‘입법’이라고 판단, 관련법안을 검토하고 발의할 의원을 섭외하고 있다. 야노 국장은 “현재 일본 의회에서 군대위안부 관련법안과 강제연행 피해자 법안 등이 심의중에 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 국제사회에 일본의 치욕스러운 과거사 현안을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야노 국장은 “오는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노동기구(ILO)총회에 군대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기 위해 한국의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해마다 국제노동기구에 내는 지원금이 전체 지원액수의 20%를 넘는 현실을 감안해보면 국제노동기구가 일본 정부의 의도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난제라고 한다. 도쿄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지난 1990년대 군대위안부들의 ‘한 서린’ 증언에 충격을 받고 자국(自國)의 죄를 갚는 길에 뛰어들었다는 야노 국장.“한국 정부도 일본이 자발적인 양심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호소해야 한다.”고 그는 당부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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