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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인 받기 성공 노하우는 화장실 길목 지키기”

    수십년 동안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사인을 빠짐없이 받아온 국내 최고의 ‘사인맨’이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감독에서 고르바초프와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사인은 전부 받은 신현식(61·경기 여주)씨. 16세때부터 40여년 동안 유명인 1000여명으로부터 사인을 받은 그의 집에는 유력 정치인에서부터 스포츠 스타와 인기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의 사인과 사진이 빼곡하다. ●클린턴 사인 받으려 4일동안 추격전“처음 사인을 받은 건 16세때였어요. 동네 교회에 미국인 선교사가 와서 설교를 했는데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어찌 재미나게 잘 하던지…. 종이와 몽당연필을 갖고 가서 내밀었더니 성경책에다 사인을 해 그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만년필과 같이 주시더라고요.” 생애 첫 사인을 받고 감동을 느낀 신씨는 이후 유명인들과의 만남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사인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윤보선 대통령에게서도 사인을 받았는데 대통령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말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사인 마니아가 된 신씨는 사인을 받기 위해서라면 바다도 건너고 몇 시간, 며칠의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았다.“히딩크 사인만 6번을 받았어요. 경주에서 경기가 있었을 때는 그의 차를 1시간이나 쫓아가 결국 사인을 받아냈죠. 그는 경기에서 이겼을 때와 졌을 때 사인이 달라요. 이겼을 때는 글씨 끝이 위로 올라가고 졌을 때는 내려가죠.” 2000년에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사인을 받기 위해 한국에서 워싱턴으로 또 다시 뉴욕으로 이동하며 4일간의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영부인이었던 힐러리의 사인만을 받는데 만족해야 했다.3년 후에는 방한한 클린턴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사인을 받아냈다.‘사인맨’에게는 철통 경호와 발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서도 당당히 사인을 받아내는 성공률 100%의 노하우가 있다.“눈치도 동작도 빨라야 돼요.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이 포착되면 펜과 종이를 상대방의 턱 밑으로 바짝 들이대는 거죠. 멀찌감치 떨어져서 해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해줘요.” “유명인들도 사람인지라 화장실은 꼭 가거든요. 이럴 때 화장실 부근에 가서 딱 지키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다 오게 돼 있어요. 일 보고 나올 때 자연스럽게 가서 사인해 달라고 하면 백발백중이죠.” 일정 체크는 기본이다. 매일 아침 5시면 라디오와 TV 뉴스를 꼭 듣고 신문에서는 인물 코너를 눈여겨 본다. 그리고 사인받고 싶은 사람의 일정을 달력에다 꼼꼼히 표시한다. ●영국 여왕 사인 못 받은 건 못내 아쉬워그러나 그에게도 받지 못한 사인이 있고, 사인과 결별한 시간도 있었다. 몇 년 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내한했을 때인데, 경호가 어찌나 심한지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인을 끊은 적도 있다.“군대를 갔다 왔는데 어머니가 집안 청소를 하시면서 그동안 받아 놓은 사인들을 거의 다 버린 거예요. 하도 속이 상해서 7∼8년은 사인을 받으러 다니지 않았죠.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니까 사인을 받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여주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20&30] 결혼 빠르거나 늦거나

    [20&30] 결혼 빠르거나 늦거나

    최근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20대 초반 여성 연예인들이 잇따라 결혼해 화제가 되고 있다. 한가인, 이요원, 홍은희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장신영·한채영까지 ‘어린 아줌마’ 대열에 합세했다.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던 현 결혼적령기를 거스르는 이들을 20&30세대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일반적인 결혼 적령기보다 앞당겨 결혼하는 ‘조혼’과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만혼’에 대한 20&30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 봤다. 강국진 류지영기자 betulo@seoul.co.kr ■ ‘조혼’ 이래서 좋다 ●“일찍 결혼하면 노후가 편안해” 다음달이면 결혼 10주년을 맞는 경찰관 권모(37)씨는 지금도 결혼에 대해 후회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좀 더 일찍 결혼하지 못한 아쉬움이 그것이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의 아내와 ‘캠퍼스 커플’이 된 권씨는 군복무와 시험준비 끝에 경찰이 돼 1997년 결혼할 때까지 3년이나 자신을 기다려준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남자 나이 25살 정도에 결혼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고시나 박사 학위 등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대학생들은 졸업 뒤 ‘월급쟁이’로 살게 되잖아요. 어차피 요즘 세태로 보면 50세 이전에 생업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데 50세 전후로 자식들 결혼시키고 사랑하는 아내와 마음 편히 여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경제적·정서적으로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요?일찍 결혼한다는 것은 아내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안정된 기반이 사회적 성공 앞당겨” 결혼 7년차인 회사원 이모(34)씨는 “결혼을 일찍 하는 것이 7대3 정도의 비율로 장점이 많다.”고 말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이씨는 “외환위기 직후 결혼해 국가경제가 어려웠지만 맞벌이를 해서 그런지 우리 부부는 오히려 풍요로웠다.”고 회상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총각 시절 겪는 여러 가지 방황들을 겪지 않았다.”면서 “결혼은 나에게 안정된 기반 위에서 오직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줬다.”고 만족해했다. “일찍 결혼한 덕분인지 전 이미 외모부터 말투까지 명실상부한 ‘아저씨’가 됐지만요. 그래도 세월의 연륜으로 여기며 만족하고 있어요. 아직도 총각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직도 그들이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나는 자식들 밥 굶기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한푼이라도 아껴가며 살아가는데 결혼 안 한 친구들이 문화 생활이나 데이트, 해외 여행 얘기만 들먹이는 걸 듣다 보면 솔직히 괴리감이 들죠.” ●“조건 구애없는 순수한 사랑 가능해” 방송국 PD 김모(31)씨는 조혼 예찬론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취직 뒤 곧바로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입장이다. 평생 순수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어서라고. 그 역시 취직하자마자 대학 때부터 만났던 여자친구와 결혼해 5살배기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남녀 모두 어느 정도 ‘때’가 묻게 마련이잖아요. 결혼 상대방이 집을 마련해 올 수는 있는지, 월급은 충분한지, 학벌은 좋은지 등등을 따지다 보면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아직 ‘세상물정’ 모를 때 결혼하면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히 상대방을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늘 아내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고 싸워도 곧바로 화해할 수 있어요. 살다 보면 반드시 인생의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인데 조건을 보고 결혼했다면 힘든 시기에 그런 조건이 없어졌을 경우 결혼생활이 어떨까요? 이런 의미에서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인생의 ‘축복’이라고 봅니다.” ■ ‘만혼’ 이래서 좋다 ●준비 안 된 결혼은 오히려 버거워 회사원 장모(36)씨는 큰 아들이 11살인 ‘조혼남’이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늦게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20대 초반부터 책임과 희생을 짊어지며 살아온 게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준비된 대통령’이 필요하듯 남편과 아빠 또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게 장씨의 지론이다. “결혼을 언제 했는지도 가물 가물하네요.24살에 했으니까 남자치곤 상당히 빨리 했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을 돌볼 여자가 필요했거든요.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너무 일찍 한 것은 아닌가 아쉬울 때는 있어요. 당장 아이 교육비만 해도 30대 중반인 제 월급으로는 버거운 게 사실이거든요. 최근 결혼해 아직도 신혼생활의 달콤함에 젖어 살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교육비·집값 등 경제적 부담으로 고민하고 있는 제 처지가 딱하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아이를 일찍 키워 놓으면 노후가 편하다고들 하지만 남들 40대에 고민해야 할 문제를 10년이나 앞서 매달리다 보니 ‘조로(早老)’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결혼 뒤 후회 말고 많이 만나 보시길 아직 미혼인 회사원 송모(36)씨는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온 뒤 직장생활을 3∼4년 정도 한 30대 초반이 결혼 적령기”라면서 “결혼이란 서로 다른 경험을 해 온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인 만큼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는 수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몇 년 전 결혼까지 생각하던 여성이 있었지만 당시 완벽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어 헤어졌다는 송씨는 “좀 더 노력해 1∼2년 안에 준비된 결혼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방탕한 생활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고요. 결혼 전 가급적 많은 상대방을 만나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수능시험을 보는데도 모의고사를 많이 보면 그만큼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잖아요. 하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혼은 두말할 나위가 없죠. 그렇다고 결혼 전 만나는 사람을 ‘연습용’으로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요. 만날 때마다 늘 ‘나’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최선을 다하되 시행착오를 줄여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만나다 보면 진짜 내 ‘짝’이라 느끼는 사람을 만나게 돼도 실수없이 잘 해 나갈 수 있겠죠.” ●결혼은 인생의 무덤…가급적 천천히 동시통역사를 준비중인 최모(27·여)씨는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를 무대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싶은 그에게 결혼은 꿈을 구속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최씨는 30대 중반은 돼야 결혼을 생각해 보겠다는 입장이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물에 손 한번 안 담그게 다 해주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아요.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손에 물이 묻냐 안 묻냐가 아니라 남편이 자신의 꿈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주느냐 하는 것이죠. 주위에 결혼을 위해 자신의 꿈을 버리는 여성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들도 아내가 애 낳고 키우다 제 풀에 꺾여 꿈을 포기하길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아요. 결혼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전 하고 싶은 일들을 어느 정도 이룬 뒤 생각해 볼래요.”
  • [20&30] 결혼 빠르거나 늦거나

    [20&30] 결혼 빠르거나 늦거나

    최근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20대 초반 여성 연예인들의 잇따라 결혼해 화제가 되고 있다. 한가인, 이요원, 홍은희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장신영·한채영까지 ‘어린 아줌마’ 대열에 합세했다.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던 현 결혼적령기를 거스르는 이들을 20&30세대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일반적인 결혼 적령기보다 앞당겨 결혼하는 ‘조혼’과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만혼’에 대한 20&30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 봤다. 강국진 류지영기자 betulo@seoul.co.kr ■ ‘조혼’ 이래서 좋다 ●일찍 결혼하면 노후가 편안해 다음달이면 결혼 10주년을 맞는 경찰관 권모(37)씨는 지금도 결혼에 대해 후회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좀 더 일찍 결혼하지 못한 아쉬움이 그것이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의 아내와 ‘캠퍼스 커플’이 된 권씨는 제대하고 3년간 시험준비 끝에 경찰이 돼 1997년 결혼했다. “남자 나이 25살 정도에 결혼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고시나 박사 학위 등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대학생들은 졸업 뒤 ‘월급쟁이’로 살게 되잖아요. 어차피 요즘 세태로 보면 50세 이전에 생업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데 50세 전후로 자식들 결혼시키고 사랑하는 아내와 마음 편히 여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경제적·정서적으로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요? 일찍 결혼한다는 것은 아내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안정된 기반이 사회적 성공 앞당겨 결혼 7년차인 회사원 이모(34)씨는 “결혼을 일찍 하는 것이 7대 3 정도의 비율로 장점이 많다.”고 말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이씨는 “외환위기 직후 결혼해 국가경제가 어려웠지만 맞벌이를 해서 그런지 우리 부부는 오히려 풍요로웠다.”고 회상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총각 시절 겪는 여러가지 방황들을 겪지 않았다.”면서 “결혼은 나에게 안정된 기반 위에서 오직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줬다.”고 만족해했다. “일찍 결혼한 덕분인지 전 이미 외모부터 말투까지 명실상부한 ‘아저씨’가 됐지만요. 그래도 세월의 연륜으로 여기며 만족하고 있어요. 아직도 총각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직도 그들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나는 자식들 밥 굶기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한푼이라도 아껴가며 살아가는데 결혼 안 한 친구들이 ‘유럽식 자본주의’니 뭐니를 들먹이며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 복지를 확충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솔직히 괴리감이 들죠.” ●조건 구애없는 순수한 사랑 가능해 방송국 PD 김모(31)씨는 조혼 예찬론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취직뒤 곧바로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입장이다. 평생 순수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어서라고. 그 역시 취직하자마자 대학 때부터 만났던 여자친구와 결혼해 5살배기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남녀 모두 어느 정도 ‘때’가 묻게 마련이잖아요. 결혼 상대방이 집을 마련해 올 수는 있는지, 월급은 충분한지, 학벌은 좋은지 등등을 따지다 보면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아직 ‘세상물정’ 모를 때 결혼하면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히 상대방을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늘 아내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고 싸워도 곧바로 화해할 수 있어요. 살다 보면 반드시 인생의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인데 조건을 보고 결혼했다면 힘든 시기에 그런 조건이 없어졌을 경우 결혼생활이 어떨까요?이런 의미에서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인생이 ‘축복’이라고 봅니다.” ■ ‘만혼’ 이래서 좋다 ●준비 안 된 결혼은 오히려 버거워 회사원 장모(36)씨는 큰 아들이 11살인 ‘조혼남’이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늦게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20대 초반부터 책임과 희생을 짊어지며 살아온 게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준비된 대통령’이 필요하듯 남편과 아빠 또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게 장씨의 지론이다. “결혼을 언제 했는지도 가물 가물하네요.24살에 했으니까 남자치곤 상당히 빨리 했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을 돌볼 여자가 필요했거든요.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너무 일찍 한 것은 아닌가 아쉬울 때는 있어요. 당장 아이 교육비만 해도 30대 중반인 제 월급으로는 버거운 게 사실이거든요. 최근 결혼해 아직도 신혼생활의 달콤함에 젖어 살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교육비·집값 등 경제적 부담으로 고민하고 있는 제 처지가 딱하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아이를 일찍 키워 놓으면 노후가 편하다고들 하지만 남들 40대에 고민해야 할 문제를 10년이나 앞서 매달리다 보니 ‘조로(早老)’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결혼 뒤 후회 말고 많이 만나 보시길 아직 미혼인 회사원 송모(36)씨는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온 뒤 직장생활을 3∼4년 정도 한 30대 초반이 결혼 적령기”라면서 “결혼이란 서로 다른 경험을 해 온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인 만큼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는 수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몇 년 전 결혼까지 생각하던 여성이 있었지만 당시 완벽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어 헤어졌다는 송씨는 “좀 더 노력해 1∼2년 안에 준비된 결혼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방탕한 생활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고요. 결혼 전 가급적 많은 상대방을 만나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수능시험을 보는데도 모의고사를 많이 보면 그만큼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잖아요. 하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혼은 두말할 나위가 없죠. 그렇다고 결혼 전 만나는 사람을 ‘연습용’으로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요. 만날 때마다 늘 ‘나’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최선을 다하되 시행착오를 줄여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만나다 보면 진짜 내 ‘짝’이라 느끼는 사람을 만나게 돼도 실수없이 잘 해 나갈 수 있겠죠.” ●결혼은 인생의 무덤…가급적 천천히 동시통역사를 준비중인 최모(27·여)씨는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를 무대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싶은 그에게 결혼은 꿈을 구속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최씨는 30대 중반은 돼야 결혼을 생각해 보겠다는 입장이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물에 손 한번 안 담그게 다 해주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아요.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손에 물이 묻냐 안 묻냐가 아니라 남편이 자신의 꿈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주느냐 하는 것이죠. 주위에 결혼을 위해 자신의 꿈을 버리는 여성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들도 아내가 애 낳고 키우다 제 풀에 꺾여 꿈을 포기하길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아요. 결혼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전 하고 싶은 일들을 어느 정도 이룬 뒤 생각해 볼래요.”
  • 내년부터 국방대 군사학 박사과정 신설

    국방부 산하 교육기관인 국방대학교에 내년부터 군사학 박사 학위과정이 신설된다.14일 국방부에 따르면 3년 과정인 박사학위 과정에는 대위 이상 군인과 5급 이상 공무원, 국방관련 기관 종사자 등이 입학할 수 있으며 정원은 15명 안팎이다. 지금까지 국내 교육기관 가운데 군사학 박사학위 과정을 개설한 곳은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뿐이었다. 해외에서는 미국 해군대학원과 러시아 군사대학원, 영국 킹스컬리지 등이 군사학 박사과정을 운영하고 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깔깔깔]

    ●숙제 화가 난 선생님께서 숙제 검사를 하고 있었다. “숙제 안 해온 사람 자진신고해.” 그러자 똘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이 녀석, 왜 숙제를 안 했어?” “어제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못 했어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선생님이 말했다. “아, 엄마 간호해 드리느라고 못 했구나.” “아니요. 엄마가 편찮으시기 전에는 늘 엄마가 해주셨거든요.”●못 말리는 삼수생 한 삼수생이 군대가는 친구 송별회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심야버스를 타고 귀가하면서 그는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 삼수생은 제일 두툼한 책을 꺼내 들고 책상에 앉았다. 잠시 뒤 어머니가 들어 왔다. “얘, 너 뭐하니?” “공부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술 먹었으면 얼른 자. 전화번호부 거꾸로 들지 말고….”
  • [씨줄날줄] 광폭정치/함혜리 논설위원

    북한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리더십과 통치방식을 ‘광폭(廣幅)정치’‘인덕(仁德)정치’‘선군(先軍)정치’로 요약해 선전하고 있다.‘모든 일을 대담하고 통이 크게 벌여 나간다.’는 광폭정치가 그의 과감한 스케일을 선전하기 위한 표현이라면, 인민들에게 어질고 후한 사랑의 정치를 편다는 인덕정치는 김 위원장의 다정다감함을 선전하기 위한 표현이다. 광폭정치와 인덕정치는 고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그대로 세습한 김 위원장의 통치자로서 위상을 강화하고 지도역량을 강화한 것이었다.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운다는 선군정치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통치스타일과 관련해 대외적으로 가장 부각된 것은 광폭정치다. 고위급 장성들에게 혁명기념일에 벤츠 승용차를 선물했다든가, 신상옥 감독을 납치한 뒤 영화제작에 쓰라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거나 하는 식의 일화들이 전해진다. 대외적으로 베일에 가려 있던 김 위원장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등 외국 요인들과의 면담을 통해 시원시원하고 결단력을 갖춘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문제는 대담하고 통이 큰 정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효율성과 합리성이 결여된다는 점이다. 평양의 흉물로 전락한 류경호텔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 위원장은 ‘동양 최고를 지향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을 김일성 주석 80회 생일에 헌정한다며 105층짜리 류경호텔을 착공했지만 용도도 불확실한 이 호텔 건설에 4억달러나 쏟아붓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을 자초했다.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시에는 피랍된 일본인의 유골반환을 전격적으로 약속했다가 엉뚱한 사람의 뼛조각을 보내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오는 28∼30일의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 위원장이 광폭정치를 선보일지가 관심사다.‘핵포기 선언’같은 메가톤급은 아니더라도 장성급회담에서 해결 못한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해결 등을 기대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실현가능한 통 큰 카드를 내놓도록 하는 것은 카운터파트인 노무현 대통령의 몫인 것 같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문학 위기는 현장감 외면 탓”

    “문학 위기는 현장감 외면 탓”

    한국문학평화포럼이 새달 법인화된다. 애초 법인화 목표 시한은 지난해 상반기였다. 1년이 늦어졌다. 포럼의 모태인 민족문학작가회의와의 관계설정을 놓고 고심한 것도 이유가 됐다.2004년 10월, 포럼은‘임진강 문학축전’으로 첫발을 뗐다.‘상생·평화·공존’을 화두로 세웠다. 한국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현장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서울 중심의 문화적 섹트주의를 극복하자고 외쳤다. 문학의 사회적 책무도 강조했다.3년여 동안 30여 차례의 문학축전을 꾸렸다. 한국의 상처난 땅을 샅샅이 밟았다.11일과 12일엔 전북 고창 전봉준 생가터에서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을 위무했다. 두 달 뒤면 창립 3주년이다.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중앙대 교수)회장을 만나 그간의 성과를 되짚어봤다. 그는 1대 고은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을 맡고 있다. ●법인화 왜 1년 늦어졌나 포럼의 법인화가 늦어진 데는 새로운 단체 결성에 대한 작가회의측의 우려 섞인 시선도 작용했다. 작가회의 명칭에서 ‘민족’을 떼는 데 반대한 포럼측 문인들의 목소리조차 일각에선 ‘독립을 위한 수순’으로 해석했다. 임 회장은 “적극적으로 지지할 줄 알았던 작가회의 문인들로부터 포럼 초기 뜻밖의 오해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라면서 “지금은 그런 오해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회의 회원들의 현실인식이 안이해지는 것이 아쉬워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작가회의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면서 “작가회의를 쪼갤 목적이었다면 포럼은 애초에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법인화 추진은 참여도와 신뢰도 강화를 통해 포럼 문제의식의 확대심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포럼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 제고다. 문학과 사회를 갈라놓은 유미주의적 경계선을 넘으며,1970∼80년대 민족문학운동은 사회개혁의 주체로 우뚝 섰다. 굳이 찾지 않아도 시대는 늘 문인들 옆에서 고민을 강제했다. 지금은 다르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찾지 않으면 시대는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민주화’나 ‘경제성장’이란 화려한 겉옷 속에 ‘비민주적 잔재’와 ‘경제적 양극화’를 꽁꽁 숨겼다. ●문화예술운동 단체로 자리잡아 포럼은 시대와 대면하는 ‘제2의 민족문학운동’이라 할 만하다. 포럼이 찍어온 문학축전의 발자국은 참여 문인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잘 보여준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찢긴 매향리를 어루만졌고, 우토로 강제철거를 반대했다. 논에 모를 심으며 한·미 FTA 타결 후 농업을 근심했고,‘나눔의집’을 찾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을 맞잡았다.“문인들이 가본 적 없는 소외지역을 최우선으로 하되, 오늘날 한국사회의 예리한 쟁점을 드러내는 지역을 위주로 찾아갔다.”고 임 회장은 설명했다. 포럼은 이제 한국 사회의 가장 활발한 문화예술운동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서사의 빈곤은 현장과의 유리서 기인 임 회장은 “B학점은 되는 것 같다.”며 포럼의 성적을 매겼다.“현장 반응도 매우 뜨거웠다.”고 전했다. 그러나 “포럼이 아무리 용을 써도 문단의 흐름을 바꿀 순 없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문단의 ‘안타까운 흐름’은 포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포럼이 결성된 2004년은 과거 민족문학진영의 대가들마저 현실문제에서 발을 빼는 분기점이었다고 임 회장은 회고했다.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면서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자만심으로 문인들이 너무 성급하게 긴장감을 잃었어요. 과연 그런가요? 한국과 무관한 전쟁에 군대가 파병됐고, 민중의 삶은 더 극악해졌습니다.” 임 회장은 올 2월 ‘기초예술연대’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한국 작가들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잃었다.”는 날선 비판으로 문단을 달군 바 있다. 장편소설 하나 써낼 능력 없는 서사의 빈곤은 현장과 유리된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10월엔 카자흐스탄서 포럼 “문학의 가장 큰 위기는 대중들이 문학을 외면한다는 겁니다. 현장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드라마보다 현실감이 없습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닌데 독자들이 읽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가 “각 대학의 문예창작학과가 한국 문학을 망쳤다.”는 논쟁적 언사를 던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시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단견은 인문학 교육 없는 문창과가 원인”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포럼이 외연 확대를 꾀하는 것도 현장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서다. 향후 문인들만의 행사를 지양하고 문학축전 현지 자치단체와 관련 연구자, 타 장르 예술인 등이 함께 참여토록 할 방침이다. 올 10월, 포럼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카자흐스탄을 찾는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별난 일 별난 사람들] (2) 쿠쿠홈시스 김성민 과장

    [별난 일 별난 사람들] (2) 쿠쿠홈시스 김성민 과장

    “그동안 밥 지은 쌀이 200t(20㎏들이 1만부대)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네요.”국내 전기밥솥 시장 1위 쿠쿠홈시스의 김성민(37) 과장은 ‘밥 짓는 남자’로 통한다. 팔거나 먹기 위한 밥짓기가 아니다. 새로 나올 밥솥제품에 대한 성능검증과 시판 중인 제품의 성능개선을 위한 치열한 연구개발 과정이다. 밥알 표면에 얼마나 윤기가 흐르는지, 상층-중층-하층이 고르게 익는지, 씹었을 때 얼마나 찰기가 느껴지고 구수한 맛이 나는지 등이 점검포인트다. ●하루 평균 350인분 밥 지어 경남 양산시 교동의 본사 연구실에서 혀와 눈과 코로 밥맛과 씨름해 온 지 햇수로 15년. 직원 4명과 주방에서 쌀을 씻는 것으로 그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모델별로 30여개의 밥솥에서 하루 평균 350인분의 밥이 지어진다.20㎏들이 쌀 부대 2개 반이 들어간다. “6인용,10인용,35인용 등 여러 규격의 제품에서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밥을 지어 봅니다. 이를테면 10인용 밥솥에서 최대량으로 지은 밥의 맛과 1인분 쌀만 넣어 지은 밥의 맛이 어떻게 차이가 나나 비교하는 거죠. 물이 많은 밥, 물이 적은 밥도 만들어 봅니다. 백미, 현미, 잡곡 등 다양한 곡류에 따라 누룽지, 숭늉까지 시험하지요. 전압을 정격보다 높이거나 낮춰보기도 하고요.” 이제는 쌀과 물을 맞추는 순간 어떤 밥맛이 나올지 혀끝과 코끝에 그려질 정도다. 수시로 밥을 먹다 보면 점심이나 저녁 식사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실험용 밥을 많이 먹지는 않는다. 숟가락으로 밥의 상층부와 중간부, 하층부를 한두 숟갈씩 떠 먹어보고 눈으로 윤기와 색깔 등을 점검하는 걸로 끝이다. 실제로 김 과장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갖고 있다. ●신제품 밥솥 한개당 평균 쌀 1.5t 소요 김 과장으로부터 ‘퇴짜’ 판정을 받아 개발실로 되돌아간 밥솥이 부지기수다. 신제품 밥솥 하나를 테스트하는 데 평균 1.5t의 쌀이 소요된다. 원래 밥에 조예가 있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군대에서 취사병을 했느냐.”는 물음도 숱하게 받지만 이 또한 아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1993년 입사해 처음 맡았던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을 ‘밥통’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요즘 밥솥·밥통은 인공 퍼지 기능을 지닌 컴퓨터 제품이지요. 그래서 제 일은 밥을 짓는다기보다 취사 로봇을 가동시키고 그 로봇의 성능을 살펴본다고 하는 편이 적합하지요.” 돌솥 압력밥솥을 만들 때에는 전국의 유명 돌솥집을 두루 돌며 주방을 견학하기도 했다. 쌀은 농협에서 나온 중급품을 쓴다. 너무 좋거나 나쁜 걸 쓰면 보편성에서 문제가 생긴다. 맛을 보고 난 밥은 전량 인근 가축농가에 제공한다. 회사에서 밥 짓고 맛 보는 데 이골이 나서인지 집에서 청소는 해도 부엌일은 절대 사절이란다. 아내도 남편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고 한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전재산 북한 돕기에 헌납할래요”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전재산 북한 돕기에 헌납할래요”

    대성그룹 창업주인 고 김수근 회장의 딸 김성주(51) 성주그룹 회장이 “전 재산을 북한을 돕는 데 헌납하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13일 오후 11시에 방송될 비즈니스앤TV의 ‘조동성이 만난 글로벌 CEO’에서 “정직하게 번 돈의 10%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면서 “매년 40∼50개국의 NGO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 주요사업은 늘 북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우리나라가 북한을 끌어안아야 할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지향점은 전 재산을 북한을 위해 헌납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김 회장은 이미 유언장까지 써두었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또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군대훈련을 통해 여성이 자신의 감성을 조절할 수 있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파키스탄 “비상사태 선포 없다”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를 쥔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64) 대통령이 9일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장기 집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무샤라프 대통령이 언제든 국가 비상사태 선포라는 초강수를 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어 파키스탄 정국은 폭풍전야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날 AP,AFP 등 외신들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기로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모하마드 알리 두라니 파키스탄 정보장관은 AFP통신에 “무샤라프 대통령은 일부 정당 등이 제안한 국가 비상사태 선포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결정은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적 요망에 따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AP통신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9일 새벽 무샤라프 대통령과 17분간 전화통화를 했다고 보도했다. 통화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이 무샤라프 달래기에 나서 막판에 그의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애초 무샤라프 대통령은 집권연장을 위해 비상사태 선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19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는 2002년 대통령 간선 개헌으로 의회투표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했다.5년 임기인 대통령 재출마를 위해서는 군 총사령관직을 내놓아야 하지만 그는 군 통수권에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야당인 인민당(PPP)과 ‘9월 대통령 간접선거-11월 전 총선안’을 놓고 타협했지만 야당이 군 신분 이탈을 강력히 요구, 이 거래가 무산되려 하자 비상사태 선포를 적극 검토하고 나섰다. 최근 무샤라프 대통령과 군부에 대한 민심은 급속히 이반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의 지지축인 군부세력이 사회 각 부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군수 업체들이 시멘트 공장, 부동산 사업 등 사회 곳곳에 침투하면서 국민의 반감도 커지고 있다. 군대 내 내부거래 규모는 수십억 달러에 이른다. 정부 부패는 일상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 치안 부재 상황도 국민의 불신임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춘규 이재연 기자 taein@seoul.co.kr
  • 李 “군대동원 발언 왜곡은 선거법 위반” 朴 “李측서 구전홍보단 운영 금품 살포”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측의 치열한 난타전이 9일에는 ‘허위사실 유포’와 ‘불법 구전홍보단’을 둘러싸고 당 선관위와 중앙선관위 고발로 이어졌다. 박 후보측은 이 후보측의 ‘국정원 직원 내통설’을 다시 들고 나왔고, 이 후보 관련 검찰 수사 발표가 늦어지는 것도 문제삼았다. 이 후보측 박형준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전날 박 후보가 연설회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추진 과정에서 이 후보가 반대한 것을 겨냥해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은 분도 계셨다.”고 말한 데 대해 반격했다. 그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지어내 이 후보를 공격한 것은 선거법상 금지된 허위사실 유포행위”라며 당 선관위에 조치를 취해 달라고 촉구했다. 당시 행정복합도시 반대자들에게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으라는 얘기냐.”고 반어법적으로 표현했는데, 박 후보가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처럼 말했다는 설명이다. 장광근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박 후보측에서 이 후보 캠프를 ‘범죄집단’ 등으로 표현한데 대해서도 “정말 해도 너무 하지만, 참고 또 참겠다.”고 일축했다. 박 후보측 이정현 대변인은 이 후보측이 불법 구전홍보단을 운영하면서 1억 5600만원의 금품을 제공해 온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자들을 당 선관위에 고발했다. 이 대변인은 “이 후보 캠프 대외협력위원회가 지난달 9일부터 40일 동안 연구원, 강사 등 65명으로 구전홍보단을 구성, 불법으로 이 후보를 홍보해 왔다.”며 이 후보 캠프 내부문건을 증거 자료로 공개했다. 이들은 전국 13개 팀을 구성해 택시를 타거나 미용실·이발소 등을 돌며 이 후보를 홍보하고, 박 후보 관련 최태민 의혹 등을 퍼뜨리는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다.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은 “이 후보가 도곡동 땅과 다스, 양평 별장의 실제주인이라고 검찰이 파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검찰은 중간수사 결과를 늦추는 이유를 밝혀라.”라고 촉구했다. 홍 위원장은 또 이 후보측의 ‘국정원 직원 내통설’과 관련,“직위 해제된 직원 박광씨의 윗선인 국정원 고위간부가 정치인 중 누구와 접촉했는지 국정원은 조사 결과 이미 알고 있다.”며 진상 공개를 촉구했다. 서울중앙지검 최재경 특수 1부장은 “정치권에서는 별의별 소문이 돌고 있지만 아직 확인할 게 남아 있다.”면서 “사안마다 수사가 끝나는 대로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구전홍보단 문건과 관련, 이 후보측 박형준 대변인은 “실무자가 만들었다 폐기한 문건으로 대외협력위원장인 정의화 의원은 물론 정종복 본부장, 김대식 단장에게 보고된 적도 없고, 실행도 안 됐다.”고 주장했다.홍희경 김지훈기자 saloo@seoul.co.kr
  • 李 “행복도시 명품 만들겠다” 朴 “행복도시 내가 지켜냈다”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의 ‘필패론’과 ‘필승론’ 공방은 8일 대전 충무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전·충남지역 합동 유세에서도 이어졌다. 박 후보 다음으로 연단에 오른 이 후보는 “우리 박 후보, 그 부드럽던 모습 어디가고 이렇게 독해졌습니까. 걱정이 많다.”며 박 후보의 공세를 누그러뜨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 후보는 “6개월 동안 헐 뜯어도 이명박 지지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며 자신이 ‘필승 후보’임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나에게)‘병역비리 있다.’‘어머니가 배다른 형제다.’는 말이 있다. 증명하려고 눈물을 머금고 DNA 검사 받았다.”며 “거짓말이라는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수많은 의혹을 제기 했지만 단 한번도 사실로 나타난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후보는 “행정복합도시를 명품도시로 만들겠다.”며 “서울시장때는 반대했지만 시작한 것은 제대로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후보는 이어 “전 세계가 이명박을 인정한다.2005년 권위있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 세계인물 대상 받았다. 미국 뉴스 위크지는 미래 지도자로 저를 꼽았다.”며 능력있는 지도자 이미지를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박 후보는 지난해 5·31지방선거에서 피습 직후 대전을 찾아 유세한 것을 언급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60초를 대전에서 보냈다. 실밥도 뽑지 못하고 얼굴에 난 상처때문에 딱 60초만 말했다.”며 “내 인생 55년 중 그 60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대전과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당 대표시절 행정복합도시를 처리한 것을 들며 지지를 호소했다. 박 후보는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고 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지켜냈다. 그렇게 어렵게 통과시킨 행복도시 내가 이뤄내겠다.”며 “다기능 자족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날도 그는 단골메뉴인 ‘이명박 필패론’을 들고 나왔다. 박 후보는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후보를 택하겠습니까. 바위덩이가 날아와도 끄덕없는 박근혜를 선택하겠습니까.”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군소주자인 원희룡·홍준표 후보는 정부의 정상회담 발표 배경에 경계를 표시했다. 원 후보는 “정상회담은 8월 28일 그리고 30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후 후속 총리 회담, 장관 회담 등 후속 이벤트들이 12월 대통령 선거일까지 쏟아질 것이다.”며 “그 의도는 한나라당을 통일 반대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수는 통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 후보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정상회담 아니면 안된다.”면서 “남북한이 합작해 한나라당 집권 막겠다는 게 정상회담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대전 홍희경 김지훈기자 saloo@seoul.co.kr
  • [홍순영 칼럼] 평화공존과 통일

    1.남북한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통일되지 아니한다. 공산주의·일인평생독재의 나라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나라는 그 이념과 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1950년에 공산주의하의 통일을 위하여 남한을 침공한 것이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르면 서로 다른 나라이다. 남북한은 서로 다른 나라로서 통일을 노래하였지만 적대관계 속에서 휴전선을 가운데 둔 냉전상태에 있어왔다. 6·25전쟁 이후 남북한은 수없이 많은 도발, 침투, 경쟁을 겪었으며 1991년 유엔 회원국이 되어 공존의 외형을 갖추고 국제규범의 준수를 약속한바 있다. 남한의 역대정부는 끊임없이 남북평화공존 규범을 향하여 노력하여 왔다. 박정희 정부하의 이후락 평양 방문, 노태우 정부에서의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김영삼 정부때의 방북합의와 김일성 사망, 김대중 정부의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 등의 사례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중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 간 평화공존의 거의 완벽한 규범으로 남아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남북 간의 접촉과 교류를 촉진하는 데 기여하였다. 2. 남북한 사이에 이뤄진 평화공존 규범의 내용을 성실히 실천한다는 내적 결심이 있었으면 남북 간에는 이미 상당한 교류와 협력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시장을 개방하고 나라를 개방할 용의도,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통일과 민족을 외침으로써 나라의 개방과 개혁을 늦추고 공산주의 주체사상을 오히려 남측에 전파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 근저에는 개방이 가져올 자유와 풍요의 바람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고민이 있다. 공존의 규범에 따라 남북한이 상호방문, 교역과 투자를 자유로이 한다는 경지에 이르면, 즉 남북 간에 경제공동체가 형성되면 남북은 정치적 통일을 크게 외칠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공존과 통일의 차이요, 간격이다. 퍼준다고 북한이 나라를 속히 개방하고 공존의 규범을 더욱 정직하게 지켜갈 것인가, 이 논쟁이 남한사회를 민족·통일주의자와 자유·공존주의자의 두 진영으로 나누어가고 있음을 본다. 북한은 핵개발을 공언하고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공존보다는 핵공갈을 통한 남한제압을 추구하고 있다. 남한은 북한의 이러한 공존거부 신호에 당연히 긴장·경계하고 있다. 3. 시대의 흐름은 인간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시장경제의 힘찬 동력 쪽에 있다. 공산주의 소련이 해체되었고 중국이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화의 길에 서있다.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북한은 그들의 핵무기를 폐기하게 되고 결국은 시장경제와 자유화의 길에 서게 될 것이다. 북한정권 내부에서 군사제일주의로부터 경제제일주의로 방향을 바꾸는 연착륙 개혁이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정권교체의 혁명적 과정을 거쳐 시장경제·자유화의 길로 갈 것인지를 예측하기 어렵다. 남북한은 남북경제공동체의 오랜 기간을 가진 후에 통일한국을 향한 협의를 하게 될 것이다. 통일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반 위에 서있을 것이다. 통일한국은 핵무기를 소유하지 아니하고 재래식 무기만으로 무장된 중간규모의 군대를 가질 것이다. 통일한국은 7000만의 인구와 두배로 커진 시장을 가지고 동부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크게 기여하는 중간국가가 될 것이다. 그동안에 남한은 안으로는 남북의 경제발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메우고 북한 주민들에게 시장경제의 원칙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엄숙한 과제를 가지고 있다.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열강을 향하여 통일한국의 위상을 선포하고 지지·지원을 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관하여 우리는 지금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통일한국을 내다보고 거기에 투자하여야 한다. 전 외교부·통일부 장관
  • 후진타오식 군 장악 ‘한발 한발’

    |베이징 이지운특파원|1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창군 80주년을 맞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군 장악 여부가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집권 2기의 시작인 17대 당대회를 앞둔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이다.●홍콩지 “당근·채찍정책 병행”서방에서는 지난 1월 중국군이 미사일로 위성을 격추하고 잠수함이 미국 키티호크호에 접근하는 등 후 주석의 방침과 어긋나는 듯한 일들이 발생하자 후 주석의 군 장악력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 왔다. 하지만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인민해방군 80주년 특집기사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군대를 이미 장악했다고 분석했다.‘문민 지도자’인 후진타오는 그만의 방식으로 당근과 채찍 정책을 병행, 군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패문제가 불거진 사령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사례는 중국에서 이례적이다. 신문은 350억위안(4조 5000억원)을 투입해 군 월급을 인상하며 현대화·과학화를 강조, 젊고 교육수준이 높은 장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군복이 아닌 인민복을 입고 군대를 사열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군의 복종 의식도 높여가고 있다. 이와 함께 후 주석은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 31일 전후세대 소장급 장성을 주력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대거 발령했다고 홍콩의 명보(明報)가 보도했다. 지도부의 평균 연령을 낮추는 연경화(年輕化) 정책을 통해 자기 사람을 심고 있다고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인사로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베이징군구 사령관이었다가 이듬해 해임됐던 저우이빙(周衣氷) 중장의 아들 저우샤오촨(周小川·51) 베이징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이 윈난(雲南)성 제14집단군 군장으로 이동했다. 또 싱웨이(邢偉) 총참모부 군사훈련 및 병종부 부부장을 베이징 담당 제38집단군 참모장으로, 류레이(劉雷) 난장(南疆)군구 정치부 주임을 산시(陝西)의 21집단군 정치위원으로 발령하는 등 모두 6명의 소장파 장성이 야전군 지휘부로 옮겼다. ●전후세대 소장급 대거 사령관 발령후 주석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승계받은 지 3년째이지만, 비관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많은 이들은 군부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세력이 견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32명의 상장 가운데 후 주석이 군사위 주석직에 오른 이후 모두 15명이 상장으로 승진했으나 절반이 넘는 17명이 장쩌민 시절 승진자라는 얘기다. 장쩌민은 임기 중 류화칭(劉華淸), 장전(張震) 등 원로 장성을 군사위 부주석으로 내세워 군을 장악해 나갔다. 후진타오도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에게 대임을 맡겼으나 이들은 장쩌민 계열이다.jj@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호기롭게 내세웠던 표방은 물거품이 되었다. 흔들리고 있는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우선 땅에 떨어진 인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추된 권위, 동요하는 민심 인조는 서울로 돌아온 직후 무신 김응창(金應昌)과 임박(任)을 처형했다. 당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이괄이 입성했을 때 각각 좌우변 순장(巡將)이 되어 이괄을 경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무신만이 아니었다. 문신들 가운데도 이괄의 난을 맞아 심각하게 동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이안눌(李安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괄의 난 당시 공조참의 김덕함(金德)과 함께 가도( 島)에 파견되어 있었다. 김덕함이 모문룡에게 원군을 청해다가 이괄을 토벌하자고 했을 때 이안눌은 동의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인조가 저자도(楮子島)로 피난 가고 이괄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이안눌은 거침없이 인조에 대해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자전(慈殿-인목대비를 지칭)을 모셨다면 또한 우리 임금의 아들일 것이다.’,‘저자도에서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등등 인조는 이미 끝났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안눌은 그 밖에도 ‘반정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공신들의 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동요했던 것은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현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할 기미를 보이자 도성 문을 닫아걸어 반란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이괄이 입성했을 때 도성 백성 대부분이 이괄에게 붙었기 때문에 법으로 논하면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은 백성들의 ‘불충(不忠)’을 불문에 부치자고 했다. 그는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는 조정에 문제가 있어도 백성들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때에는 한 가지 잘못만 있어도 원망이 일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당시를,‘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자고 했다. 정경세(鄭經世)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반정 직후부터 조정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민심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된 지 한달 여가 지난 1624년 3월 중순,“장차 큰 변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퍼지는 와중에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밤에 여염을 돌아다니며 피란하라고 소리치며 선동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조정이 민심 수습을 위해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지만 이괄 치하에서 부역(附逆)했던 사람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좀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정권 안보´에 올인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우선 인조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1624년 3월, 비변사(備邊司)는 ‘숙위(宿衛)하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며 외방의 출신들 가운데 재주 있고 용맹한 자들을 뽑아 경호 병력의 숫자를 늘리자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반정공신 네 사람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의 숫자를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그것은 당시의 민심과는 거리가 먼 조처였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군관의 수를 늘리면 정권의 안보가 확보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민심은 달랐다.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료를 국고에서 지급 받음에도 불구하고 군관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사병(私兵)이었다. 언필칭 ‘인조 호위’를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공신들의 집안 일을 건사하는 집사였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도 공신 집안을 호위하고 재물을 운반하는 등 사사로이 부려졌다. 실제로 반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대가를 호위했던 군관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또 군관을 거느리고 있던 신경진은, 나아가서 적을 막으라는 인조의 명령도 무시했다. 이제 그런 군관의 숫자를 더 늘리자고 하는 판이었다. 이괄의 반란으로 혼쭐이 난 인조는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더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명령을 어긴 신경진을 불문에 부치고, 군관의 수를 늘리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반정공신들의 권세는 더 높아졌고, 이런 저런 비리가 터져 나왔다. 자연히 ‘광해군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겠다.’는 구호는 힘을 잃어 갔다. 정권이 바뀌면 무언가 과거와는 확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조정권도 광해군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재생청(裁省廳)이란 기구를 설치하고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을 계기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정권 안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조정권의 실세였던 김류와 이귀가 박승종 부자의 저택을 불하(拂下)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정공신들의 탐욕스러운 처신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냉소가 번져갔다.1625년(인조3) 6월, 도성에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嗟爾勳臣) 잘난 척하지 말라(毋庸自誇) 그들의 집에 살고(爰處其室)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乃占其田)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又行其事) 너희들과 그들이(爾與其人)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顧何異哉) ●반란의 대외적 여파 이괄의 반란은 나라 밖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반란군이 도성을 압박해오자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모문룡은 조선의 보고를 접한 뒤, 유격(游擊) 왕보(王輔)에게 선사포(宣沙浦)에서 군사를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왕보는 자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진격한다.’고 큰소리쳤다. 조정은 다급한 마음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당시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였던 윤의립(尹毅立)은 신중했다. 그는 모문룡의 군대가 육지로 나온 이후의 상황을 우려했다. 왕보의 말대로 1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올 경우, 그들에게 군량을 지급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윤의립은 왕보를 만나 ‘이 적은 얼마 안 가서 주벌될 것이니 천병(天兵)을 역적 토벌에 끌어들여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며 원병 요청을 취소했다. 결과적으로 윤의립의 판단은 정확했다. 반란이 곧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문룡의 병력이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 대한 접대와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을 것은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섬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후금을 군사적으로 자극하여 또 다른 사단이 발생했을 것이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반란 종식 이후 모문룡과 그의 군대가 보여주었던 행태를 보면 윤의립의 ‘결단‘이 얼마나 빛나는 ‘혜안’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반란의 여파는 후금에도 미쳤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투항했던 것이다. 한윤은, 당시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姜弘立)을 만나 “강씨 일족이 다 죽었다.”고 무고했다. 강홍립은 격앙되었다.‘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정보도 후금 측으로 건네졌다. 한윤의 투항은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괄의 반란을 계기로 조선은 명과 후금의 대결 구도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위안부 日정부에 의한 강제 성노예”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위안부문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성노예 사건이다.” 미국 하원은 30일(현지시간) 일본 정부가 과거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시인, 사과하고 역사적 책임도 지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미 하원은 이날 본회의에서 민주당의 마이클 혼다 의원이 발의하고 전체 의원 435명 가운데 168명이 공동서명한 ‘위안부 결의안(H.R.121)’을 표결없이 통과시켰다. 미 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 정부 주장의 부당성을 일본의 최대우방인 미국 의회가 공식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정치적 의미와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이날 하원 본회의의 위안부 결의안 표결에 앞서 토론이 이뤄졌으나 반대 토론자 없이 지지 토론만 이뤄졌다.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은 첫 발언을 통해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들은 모두 시인돼야 한다.”면서 “세계는 일본 정부의 전면적인 책임을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채택된 결의안은 위안부 문제를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결의안은 또 최근 발행된 일본의 교과서들이 위안부 비극과 다른 일본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의안은 이어 일본 정부에 대해 ▲일본 군대가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알려진 성의 노예로 만든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로 공식 인정·사과하고 역사적 책임을 질 것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주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할 것 ▲현세대와 미래세대를 대상으로 이에 대해 교육을 시킬 것 등을 요구했다. 결의안은 또 일본 정부의 위안부 시인 및 사과 방법과 관련, 일본 총리가 공식 성명을 통해 발표할 것을 권고했다. dawn@seoul.co.kr
  • [시론] 日정부,정의와 양심으로 국제사회에 응답해야/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시론] 日정부,정의와 양심으로 국제사회에 응답해야/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미국 하원은 30일 위안부를 일본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 매춘제도이자 잔학성과 규모면에서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범죄로 규정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일본정부가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젊은 여성들에게 ‘성노예’를 강요한 사실에 대한 공식 인정과 사과 및 역사적 책임을 수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반인륜적 전쟁 범죄로 인권을 유린당한 위안부 여성들에게 강요된 침묵의 삶이 국제적인 인권문제로 부각되는 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경과한 시점이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미 하원 결의안이 통과되기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NGO와 시민단체, 순수 자원봉사자들에 의한 풀뿌리운동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시민단체에 의한 수요집회는 1992년 1월8일 이래 771회를 맞는 동안 진상규명,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 및 배상을 촉구해 왔다. 또한 거대 로비회사를 고용하여 미국 정부와 의회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해 온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미 한인교포사회는 지속적으로 미국 의회를 설득하고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위안부 결의안의 통과를 견인해낸 것이다. 일본내의 양심적인 시민사회단체와 학자들의 노력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일본군 위안부문제 행동네트워크’는 “일본의 국책으로 창설된 위안부 제도를 통한 반인권적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직접 사죄할 것”을 촉구했다. 위안부 문제 전문가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위안부에 대한 책임 주체인 일본정부가 법적 배상 및 보상에 나설 것을 주창해 왔다. 니시노 루미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관장은 고노담화를 계승한다면서도 피해자 증언의 증거력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임을 질타해 왔다. 또한 하야시 히로후미 간토학원대 교수는 일본인 납북자는 문서가 없어도 인정하면서 군위안부는 도쿄재판 자료가 있는데도 부인하는 것은 이중잣대라며 비판해 왔다. 그러나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의안이 지난 6월26일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채택된 이후 일본정부와 일부 우익 인사들이 보인 태도는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 의회의 다수 결의안 가운데 하나일 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토 료조 주미 일본 대사는 위안부 결의안 통과가 미·일관계에 중대하고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의 국회의원 13명과 보수적 지식인 200여명은 주일 미국 대사관 앞 항의 시위에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상업적 매춘 여성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안부 결의안의 미 하원 통과로 일본정부의 거듭된 변명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으며, 역사의 진실은 로비로 왜곡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일본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통해 역사화해를 도모함으로써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국제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국제사회의 권고에 따라 현재와 미래세대에게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한 교육을 이행하기를 촉구한다. 결의안 통과를 계기로 위안부 여성들의 존엄성과 명예가 조속히 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일본정부는 인류보편적 정의와 양심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요청에 응답해야 할 때이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위안부 결의안 채택 의미] 결의안 요지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 기간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제국군에 대한 성적 서비스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공식 위임했으며,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매춘 제도인 위안부는 집단 강간과 강제유산, 수치, 그리고 신체 절단과 사망 및 궁극적인 자살을 초래한 성적 폭행 등 잔학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없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학교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새로운 교과서들은 위안부 비극과 다른 2차 대전 중 일본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공공 및 민간 관계자들은 최근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정부의 진지한 사과를 담은 지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위안부 관련 담화를 희석하거나 철회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정부는 1921년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금지협약에 서명하고 2000년 무력분쟁이 여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여성, 평화, 안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결의 1325호도 지지한 바 있다. 하원은 인간의 안전과 인권, 민주적 가치, 법의 통치 및 안보리 결의 1325호에 대한 지지 등 일본의 노력을 치하한다. 다음은 미 하원의 공통된 의견이다. (1)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국가들과 태평양 제도를 식민지화하거나 전시에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알려진 성의 노예로 만든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로 공식 인정하면서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2) 일본 총리가 공식 성명을 통해 사과를 한다면 종전에 발표한 성명의 진실성과 수준에 대해 되풀이되는 의혹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3) 일본 정부는 일본군들이 위안부를 성의 노예로 삼고 인신매매를 한 사실이 결코 없다는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도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4)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가 제시한 위안부 권고를 따라 현 세대와 미래세대를 대상으로 끔찍한 범죄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
  • [아프간 피랍자 추가 피살] 교황청·탈레반 대변인 ‘설전’

    한국인 인질들의 억류와 일부 살해를 둘러싸고 교황청과 탈레반이 상대방을 거세게 비난하고 나섰다. 교황청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ANS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전세계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에 수없이 애도를 보여왔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교황의 29일 지적은 무고한 인질을 납치,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폭력행위에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이러한 행위는 증오와 죽음의 가공스러운 악순환을 심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베네딕토 16세는 지난 29일 로마 남부의 교황 휴양지 카스텔 간돌포에서 주일 미사를 통해 “납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이러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이 악행을 단념하고 인질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도록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왜 그(교황)는 외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가.”라면서 “아프간을 침략한 외국 군대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폭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마디는 또 “아프간 내 미군 기지에 아프간 여성들이 구금돼 있다.”고 주장한 뒤 “왜 교황은 바그람과 칸다하르 수용소에 구금돼 있는 아프간 여성들의 운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아마디가 주장한 대로 아프간 여성들이 미군 등 다국적군에 의해 구금된 게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군항도시 진해 술렁

    해군 작전사령부의 부산 이전으로 군항도시인 경남 진해가 향후 도시발전 방안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진해시는 최근 해작사 이전을 계기로 해양물류 중심도시로 도약한다는 구상안을 밝혔다. 하지만 지역경제 위축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30일 진해시에 따르면 진해시는 해작사 이전에 따른 도시발전 방안으로 해군 교육사령부 개발 및 해양물류, 관광전문대학 유치 추진 계획을 제시했다. 해작사가 빠져나간 자리에 교육사를 옮기고, 그 자리를 950억원의 사업비로 개발한다는 것. 교육사 부지 31만㎡와 인접한 주거지역을 편입,33만여㎡를 택지로 개해 장병들의 관사와 아파트·콘도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군인공제회와 함께 국유재산법에 의한 기부양여사업으로 추진된다. 이와 함께 충무동 부사관교육대(구 해군대학)에 2010년까지 200억원을 투입,‘진해대학(가칭)’을 유치, 해양물류·관광 전문대학으로 키울 계획이다. 이 대학에는 해군학부와 항만물류·조선·관광무역학부 등 모두 4개 학부 13개과가 개설되며, 정원은 1560명이다. 부사관교육대는 10만여㎡의 부지에 연 면적 1만 5900여㎡의 건물이 들어서 있어 리모델링하면 대학 캠퍼스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이재복 진해시장은 “해작사 이전은 대양해군을 지향하는 국가의 국방정책이므로 되돌릴 수 없다.”면서 “시는 이를 해양물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기 위해 다각적인 방안을 찾고 있으며, 일부는 이미 실행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군부대가 밀집된 서부지역 주민들의 우려감은 더 크다. 중앙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58)씨는 “장병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부대가 이전한다니 살길이 막막하다.”며 “시가 교육사를 개발한다고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해군작전사령부는 지난 18일 부대 배치계획에 따라 오는 12월까지 부산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진해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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