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패망 후 10년… ‘진짜 반성’은 없었다, 생존의 시간만 있었다
1945~1955년 패망 후 獨 해부과거사 반성했다는 것은 착각굶주림·죽음의 공포 속 도둑질1963년 이후에 과거 청산 시작
‘밴드 오브 브러더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퓨리’, ‘라이언 일병 구하기’, ‘콜 오브 듀티: WWⅡ’.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게임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은 물론 역사학자나 철학자들도 주목하는 시기이자 이야기 소재다.
연합국과 독일 간 벌어진 전투들에 비해 패망 후 독일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거대한 폐허에서 어떻게 유럽 최고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됐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많은 독일인이 패망 직후 곧바로 과거에 대해 반성했는지 궁금증은 넘쳐난다.‘늑대의 시간’은 1945년 5월 7일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직후부터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1955년까지 10년 동안 독일과 독일인의 마음속을 해부했다. 저자는 1945 ~1955년 생산된 공식 문서는 물론 토마스 만이나 한나 아렌트 같은 유명인의 기록과 신문, 잡지, 영상자료, 일반인들의 일기, 심지어 유행가 가사까지 방대한 자료를 샅샅이 훑어보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우리 앞으로 옮겨왔다.‘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이라는 책의 부제처럼 저자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상식들을 하나하나 깨뜨린다. 전후 독일의 재건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근면성 덕분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착각이다.
패망 직후 독일인들 앞에 놓인 것은 5억㎥에 달하는 폐허 더미와 6000만명에 이르는 사망자, 소련의 붉은 군대 진입과 함께 시작된 조직적 성폭행, 1946~1947년 ‘기아의 겨울’이었다.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을 지나면서 과거를 깊이 반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당시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사람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사람을 순종적인 도구로 길들이는 마약과 같은 나치즘 그리고 히틀러라는 절대 악에 희생된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때부터 수십년간 수백만명의 학살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 청산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이 진행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전쟁 기간에 똘똘 뭉쳐 있던 독일인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완전히 분열됐다. 옛 질서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확립되지 않아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였던 시기, 바로 ‘늑대의 시간’이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독일인들은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 늑대의 시간에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약탈, 암거래, 좀도둑질이었다. 요즘 독일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답할 정도의 고지식함과 정직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저자 역시 “기아의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둑질했다. 모두가 도둑이라면 과연 서로를 도둑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황야의 늑대’ 같은 시기를 거친 독일인들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저자는 현실 자각, 경청, 솔직함이라고 말한다.
잘못하고도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인 양 굴며 옆에서는 ‘맞아, 맞아’라면서 부추기는 것이나 경청 대신 앞뒤가 다른 장광설만 늘어놓는 사람이 넘쳐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