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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군인들 인터넷 통제…미팅사이트·블로그 금지

    “군인들, 인터넷 사용하지 마!” 중국군이 군인들의 인터넷 활동을 대부분 금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 데일리텔레그래프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군은 이달 초부터 인터넷 미팅 사이트와 같은 만남을 비롯해 개인 블로그나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활동들을 금지했다. 외신은 특히 인터넷 미팅 사이트를 차단한 군이 ‘다른 만남의 방법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것을 부각해 “상관이 사랑을 대신 찾아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티베트 국경지역에 있는 군 관계자는 “군인들은 국경에 있는 사람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불순한 의도로 군인들의 개인정보와 외모 등을 이용한다면 군대에 위협이 된다.”고 인터넷 통제 조치에 찬성했다. 해외언론과 인터뷰를 가진 한 지휘관은 “인터넷은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면서 “우리로서는 ‘온라인 지뢰’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온라인은 군인이나 주둔 지역의 정보를 살펴보기가 쉬운 상황”이라며 더 강화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한편 한국군은 일반 병사들의 경우에도 ‘사이버지식정보방’이라는 시설에서 인터넷 이용이 가능하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
  • 美 “천안함공격 국제테러 아니다”

    미국 국무부는 28일(현지시간) 북한의 천안함 공격이 상대방 국가 군대에 대한 공격행위로서 이 사건 자체만으로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차관보는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천안함 침몰 사건은 국제 테러리즘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라며 “그 사실만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북한의 테러지원국 재지정 문제 제기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해온 국무부가 명시적으로 천안함 공격을 테러로 규정할 수 없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크롤리 차관보는 “천안함 침몰은 도발적 행동이지만, 한 국가의 군대에 의해 다른 국가의 군대에 대해 이뤄진 도발”이라며 “그 자체로는 국제적 테러 행위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천안함 침몰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 행위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과 협의를 모색하고 있지만, 북측이 응하지 않고 있다.”면서 “비무장지대에서 정전협정 위반 사안을 협의하는 것은 정전협정상 규정된 절차”라고 말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내고장 인재 산실] 공주사대부고

    [내고장 인재 산실] 공주사대부고

    공주사대부고는 서울 명문고 못지않게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교다. 지방 작은 도시의 학년당 남학생 4개반, 여학생 2개반인 작은 학교지만 졸업생들의 활동상은 눈부시다. 1980년대 초까지는 졸업생 상당수가 사범대학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계각층에 우수 인재들이 포진해 있다. 이 학교의 특징은 사교육이 전혀 없다는 것. 재학생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600여명 가운데 공주에 살고 있는 40여명만 집에서 학교를 다닌다. 류인수 교장은 “학생들이 기숙사에 묵고 있어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지 못하고 그럴 시간도 없다. 전국에서 사교육이 없는 거의 유일한 일반계 고교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방과후 학교와 자율학습으로 채워간다. 방과후 자율학습은 이 학교의 오랜 전통이다. 오후 7시부터 10시30분까지 교실에서 자기주도학습을 한다. 교사들이 과목별로 취약한 학생을 모아 집중 공부시키는 것도 이 시간이다. 교육방송(EBS)을 통해 공부하기도 한다. 밤 11시20분부터 새벽 1시까지는 기숙사 자율학습실에서 공부한다. 황보경휘 교무부장은 “학생들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교무실에 찾아와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면서 “새벽 2~3시까지 공부시키기를 원하는 학부모들도 있지만 정상적인 수업환경을 조성하고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귀띔했다. 학원이나 과외는 없어도 실력은 전국 최고다. 이 학교는 지난해 수능에서 전국 일반계 고교 가운데 평균점수 1위를 기록했다. 사교육 없이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서울대에 12명이 붙었고 고려대 29명, 연세대 20명, 의약계열 30명 등의 합격생을 배출했다. 졸업생의 85%가 수도권 대학에 진학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의 토요문학회, 영자신문만들기 등 동아리활동도 다양하고 활발하다. 극기훈련 차원에서 학년별로 스키캠프, 등산, 수영강습 등도 활발하다. 졸업생들의 활동도 눈부시다. 대전·충남지역 교육계를 꽉 잡고 있다. 김종성 충남교육감, 이상윤 전 한남대 총장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김학원(총동창회장) 전 국회의원, 김상희 민주당 의원도 동문이다. 최근엔 군·경찰 간부를 많이 배출했다. 김근태 전 육군대장, 박종준 경찰청 기획조정관 등이 동문이다. 특히 경찰대학에선 ‘공주사대부고 마피아’로 불릴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전국 최다 경찰대 졸업생을 보유한 학교다. 이준원 공주시장, 나소열 서천군수 등 단체장도 나왔다. 해마다 10명 안팎의 사법·행정고시 및 회계사 시험 합격생을 배출하고 있다. 이 학교는 지난해 자율학교로 지정됐다. 지역에서 뽑던 인재를 전국적으로 선발할 수 있게 돼 전국 명문고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망명설’ 北 축구선수들, 혹독한 군사훈련 받을 것

    ‘망명설’ 北 축구선수들, 혹독한 군사훈련 받을 것

    남아공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북한선수 4명이 귀국 후 가혹한 군사훈련을 받을 것이란 외신보도가 나와 사실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28일(이하 한국시각) “북한축구팀은 불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그들의 나라로 가게 됐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월드컵 실패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북한 선수들의 미래가 무섭고도 불투명하게 됐다.”고 보도했다.이 매체는 영국 주재 한국대사관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적어도 4명의 선수가 군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것이 유력하며 북한 대표팀을 이끈 김정훈 감독은 해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4명의 선수는 김명원(FW.압록강 체육단), 안철혁(FW.리명수 체육단), 김금일(FW.4.25 체육단), 박성혁(DF.소백수 체육단)으로 이들은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잠적설’에 휘말렸던 선수들이다.당시 국제축구연맹(FIFA)이 출전선수 명단에 이들이 경기에 ‘불참’했다고 기록해 논란이 일었고 일부에선 ‘망명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확인 결과 스타트 리스트에 4명의 선수 이름은 인쇄하는 과정에서 잘못돼 불참 선수로 표기된 것일 뿐, 실제 선수들은 경기장에 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소화한 북한 수비수 차정혁(압록강 체육단)은 스위스로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에이전트이자 북한 선수들의 유럽 진출에 대한 이적 대행권을 갖고있는 칼 머설리는 지난 27일 독일 dp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정혁이 스위스 2부 리그인 윌(Wil)에 입단한다.”면서 “윌에서 6개월 뛴 후엔 더 큰 구단으로 보낼 계획도 갖고있다. 이와 관련한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사진 = 다음 서울신문NTN 김민경 인턴기자 cong@seoulntn.com
  • 이태원 지명 유래 說·說·說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효종(1619~1659)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효종 때 배밭이 많은 동네라는 까닭으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고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뜻으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왜란 중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태원은 이방인 공동체 성격이 강한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조선 때부터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일본군 사령부가 머문 뒤 군사지역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가 1882∼1984년 주둔했고, 1910∼1945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한국전쟁 뒤 미군이 이태원 상권을 주도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미군 유흥가로 거듭나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57년 미군의 외박·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겼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 대상 매춘업소가 남산3호 터널 입구부터 이태원 입구까지 해방촌과 삼각지 파출소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가 조성됐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돼 88올림픽 당시 이태원 상가 점포는 1800개에 이를 정도로 쇼핑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올림픽 때 하루 평균 6000명의 외국인이 약 3억달러를 썼다는 연구 논문도 있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男과 男···그들도 사랑입니다

    男과 男···그들도 사랑입니다

    올 상반기 드라마 최고 화제의 커플, 가장 잘 어울리는 ‘남(男)·남(男) 커플’ 1위…. 이들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다양하지만, 의미는 그 이상이다. 안방극장을 강타한 SBS 주말연속극 ‘인생은 아름다워’의 송창의(31)·이상우(30) 커플을 경기 고양 SBS 탄현제작센터에서 만났다. 월드컵 중계로 한 달 가까이 결방됐다가 지난 주말 다시 방송을 재개한 때문인지 두 사람의 얼굴이 유난히 더 반가웠다. ●가슴아린 동성애 연기로 논란 한복판에 드라마(작가 김수현)는 변방에 머물러 있던 동성애 코드를 정면으로 끄집어냈다. 회가 거듭될수록 성적 소수자들의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한다는 호평과 안방극장에서 동성애를 미화한다는 비판이 동시에 충돌했다. 논란의 핵심에 서 있는 송창의와 이상우는 오히려 담담하고 평온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논란을 의식했다기보다 배우 스스로 도전해 볼 만한 연기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연기하는 사람이야 배역에 몰입하면 된다지만 보시는 분들이 불편하게 받아들일까 봐 솔직히 걱정도 됐어요.”(송창의) “저는 역할을 처음 제안받고 전혀 망설이지 않았어요. 상대가 여배우에서 남자배우로 성별만 바뀌었을 뿐, 멜로는 다 똑같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연기를 하다보니 제 생각과 다른 부분도 많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싶었죠. 다행히 창의 형이 여러가지 면에서 많이 이끌어줘요. 이럴 땐 한 살 어린 게 속편해요. 하하”(이상우) ●송창의 “커밍아웃 장면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어” 극중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은 여느 연인과 다름없이 애틋하지만, 자신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커밍아웃(공개 선언)하면서 격랑에 휩싸인다. 특히 20회에서 태섭이 어머니에게 “저요, 동성애자예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게 저예요.”라며 고통스러운 눈물을 쏟아내자 안방극장도 함께 요동쳤다. “커밍아웃하는 장면은 연기자로서도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 대본 연습을 하면서 배우들도 함께 울었는데 그만큼 그 연기를 잘해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동성애자들은 그 상황이 말도 못할 정도의 고통이라고 하더군요. 방송이 나간 뒤에 그분들도 제 연기를 잘 봤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뿌듯했어요. 힘든 역할이지만 짐을 잘 짊어졌다는 생각도 들고요.”(송) “오히려 극 초반에 태섭과 경수가 서로를 간절하게 바라보던 때가 더 연기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요즘은 밝은 장면이 이어지는데 남자끼리 서로 웃고 바라보는 사랑 연기가 쉽지 않거든요. 하지만 남들이 다 웃고 좀 간지럽더라도 우리끼리는 최대한 몰입해서 진지하게 연기하자고 늘 얘기해요.”(이) 군대를 다녀온 시기도 비슷하고 그동안 거쳐온 작품의 색깔도 비슷하다는 두 사람. 하지만 실제 성격은 정반대다. ‘모태 청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극중에서 차분한 연기를 선보이는 송창의는 무척 활발하고 외향적이다. 사랑을 위해 부모자식을 포기할 정도로 과감한 인물을 연기하는 이상우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다. ●이상우 “동성애 코드 편안하게 받아들였으면…” “실제 성격은 장난기도 많고 활발하지만 본의 아니게 ‘모범생 이미지’가 생겼어요. 공황 장애를 앓는 엘리트(드라마 ‘황금신부’)나 억울한 누명을 쓴 동생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검사(‘신의 저울’) 등 사회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인물을 주로 맡았거든요. 이번 작품도 그렇지만 드라마에 사회성이 반영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송) “극중 경수는 참 대단한 사람이죠. 분명히 자신도 속으론 괴로울 텐데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거든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버리고 태섭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뚜렷하기 때문이죠. 아마 저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이) 보수적인 안방극장이 성적 소수자에게 주목했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가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여성팬들의 인기는 잠시 접어둬야 할지 모르지만, 송창의와 이상우가 연기자로서 성숙해지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가족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센’ 역할이지만, 분명 현 시점에서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저도 작품을 하면서 이런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거든요. 동성애 문화를 선도한다기보다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런 드라마가 나올 만큼 우리 사회가 다양해지고 의식도 성숙해졌다고 생각합니다.”(송) ●실제 성격 정반대… 이상우 한때 개그맨 꿈꿔 “국내 주말극에서 동성애가 정식으로 다뤄지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제는 우리도 그럴 만한 시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흐름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연기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어서 좋습니다. 등장인물이 많은 주말극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배들의 연기를 배울 수 있거든요.”(이) 인터뷰를 끝낼 즈음, 이상우가 “고 이주일 선생님을 존경해 중학교 때 개그맨을 꿈꿨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송창의가 “역시 상우는 4차원”이라며 크게 웃었다. 드라마를 통해 든든한 친구를 얻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는 두 사람의 웃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전작권 2015년 12월 환수

    전작권 2015년 12월 환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오는 20 15년 12월1일 우리 군에 넘어온다. 당초 계획(2012년 4월17일) 보다 3년7개월여 늦춰진 것이다. 전작권은 현재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고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개막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는 11월 방한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추가 협의가 마무리되면 내년 초쯤 미 의회에 비준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2007년 6월 협상타결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양국 의회의 비준이 안 돼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전작권 이양과 관련, “현재의 안보환경과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2015년 말까지 이양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수락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군의 준비상황 등을 감안해 2012년 4월17일이었던 전작권 전환 시점을 2015년 12월1일로 늦출 것을 공식 요청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반도에 있어서 전작권을 2015년 후반에 전환하는 합의를 했으며, 이것은 한반도뿐 아니라 기존의 안보상황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새로운 전환시점에 맞춰 실무작업을 진행하도록 양국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 7월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과 10월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후속대책이 마련된다. 전작권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2월 우리 군에 2012년 4월17일 이양하기로 한·미 양국 간 합의했던 것을 다시 연기한 것이다. 평시 작전통제권은 1994년 이미 우리 군으로 넘어왔다.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 등은 전작권은 군사주권과 관련된 문제라며 예정대로 이양돼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전작권 전환 연기는 굳건한 한·미동맹 덕분에 가능했으며, 군사주권을 포기했다는 일각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수석은 전작권 전환이 또 연기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단 이것이 최종적(final)인 것이며, 다음 정부에서 할 일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연기가 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와 관련, “미국을 떠나오기 전 미 무역대표부(USTR)에 한·미 FTA에 대한 실무협의를 지시했다.”면서 “오는 11월 방한할 때 실무작업이 마무리되면 수개월 내에 의회인준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자리 창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 대통령은 회담에서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 조치에 대해 중국이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토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용어 클릭] ●전작권 전시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작전계획이나 작전명령 상에 명시된 특정 임무 또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지휘관에게 위임된 권한을 말한다. 한반도 유사시 한국군과 미군 증원군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일반적으로 자국 군대의 전시 및 평시 작전권은 각 국가가 갖지만, 한국의 경우 6·25전쟁 이후 유엔군사령부를 거쳐 한미연합사령부(ROK-US CFC)에 전작권이 이양됐다. 평상시에는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방어준비태세인 ‘데프콘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가 발령되고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된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한 주목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승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다. 북한군대가 남한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지 않다. 남한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과 합의한 38도선 파기를 소련이 주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공산군에 편입된 이른바 한인 3개사단을 1950년 1월까지 중국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보장받는다.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제기한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는 38선을 지킬 명분과 능력을 미국 스스로 없애고 있다.” “왜 우리가 38선에 얽매여야 하는가.”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 극동방위선 발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는 미국 불개입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김일성 동지의 불쾌감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남행동에 대해 “언제고 만나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이 전문이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문건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남침조건, 전쟁지원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미군개입의 철저한 평가, 중국의 남침승인, 소련의 직접 참전에 대한 기대 포기 및 철저한 전쟁준비이다. 5월 중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승인을 알리면서 마오의 승인을 얻는다. 미군 개입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는 데 합의한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북한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할 시 조약을 발효시킬 것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중국은 소련에 더욱 의존할 것이며 미국은 국력의 손실로 세계적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하게 이동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1950년 1월과 7월사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의 불참은 계획된 것이었다. 미국이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는 1950년 8월 체코 대통령 고트아트에 보낸 비밀전문에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부대 명칭을 중국인민 “지원군”으로 제시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한·만 국경지역에 한정하는 등 중·소동맹조약의 의무가 발동돼 미군과 군사분쟁에 들 수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만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르지만 개전시기를 소련 군사고문단이 주장한 7월서 6월로 앞당긴다. 개전계획도 옹진반도의 진격에 의한 단계적 확전에서 비밀누설 위험 때문에 전 전선 공세계획으로 바꾼다. 중국은 10월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간곡한 파병요청을 받으면서 참전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국원의 반대와 소련 공군력 지원이 불분명해지자 그 결정을 스탈린에 알리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협상사절로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을 재차 거부함을 알리면서 동북지역으로 조속히 퇴각할 것을 지시한다. 10월8일 미군이 북진하고 유엔이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설립을 결정하자 마오쩌둥은 서둘러 파병명령을 내리지만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에 장악될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만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중국군은 사실상 한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노력을 저지시켰다. 6·25전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산블록의 세력확장 기도에 적절한 억제책을 적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6·25는 억제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의 부재 때문에 발발했다. 휴전이후 한·미동맹과 주한 미군의 역할, 남북한 군사력 균형 및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억제의 취약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 억제를 넘어 한반도에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평화통일은 한국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잔 다르크, 사형 죄목은 ‘풍기문란 죄’

    잔 다르크, 사형 죄목은 ‘풍기문란 죄’

    잔 다르크가 풍기문란죄로 처형 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지난 27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는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 잔 다르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1412년 프랑스의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샤를 왕세자를 찾아가 군대를 내어줄 것을 요청했다. 잔 다르크는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를 지휘해 전투에서 매번 큰 승리를 거두었다.하지만 잔 다르크는 1430년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고 종신형을 판결 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다.이후 잔 다르크가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풍기문란 죄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잔 다르크가 살았던 15세기는 종교와 성경이 지배적이었던 시기로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은 ‘신성 모독행위’였다.이에 영국 종교 재판정은 잔 다르크에게 치마를 입을 것을 요구했지만 잔 다르크는 바지를 입어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결국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바지를 입었지만 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한편 이날 방송에는 일본 아키타현에서 전해내려오는 ‘원숭이 술’에 관한 비밀이 밝혀져 관심을 모았다.사진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화면캡처서울신문NTN 서은혜 인턴기자 eune@seoulntn.com
  • “김일병, 포를란을 부탁해”

    “김일병, 포를란을 부탁해”

    군대에서 일병은 가장 바쁜 계급이다. 고참들의 지시에 따라 온갖 궂은일을 다 한다. 또 ‘무개념’ 이등병들에게 군대의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 연일 이어지는 작업과 훈련 속에 전투복에는 하얀 소금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다. 오죽 힘들었으면 대표적인 군가 ‘팔도사나이’조차 “얼싸 좋다 김일병”이라며 일병들에게 힘을 불어넣을 정도다. 남아공에서도 한국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8강 진출을 위해 육군 일병 김정우(광주)가 중책을 맡았다. “포를란을 막아라.” 짧고 간단한 명령이지만, 임무완수는 쉽지 않다. 대표팀에서 볼란치(방향타), 즉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인 김정우는 공격 상황에서 공을 몰고 올라간 이영표(알 힐랄)와 차두리(프라이부르크)의 빈자리를 메운다. 또 수비 상황에서는 상대 키플레이어를 대인마크한다. 최종 수비진 앞에서 상대의 공격을 일차적으로 저지하고, 상대에게 공을 빼앗아 공격진에게 연결하는 공·수전환의 중심에 있는 셈이다. 우루과이는 프랑스와의 A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는 투톱으로 나섰지만, 나머지 두 경기는 에딘손 카바니(팔레르모), 루이스 수아레스(아약스)를 최전방에 놓고 디에고 포를란(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을 쳐진 스트라이커로 놓는 스리톱으로 경기에 나섰다. 포를란이 공격을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 역할까지 담당했던 남아공, 멕시코전에서 우루과이는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때문에 우루과이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은 한국과의 경기에도 포를란을 쳐진 스트라이커로 놓는 스리톱 카드를 들고 나올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수비형 미드필더인 김정우의 역할이 중요하다. 허정무 감독이 굳이 ‘특명’을 내리지 않더라도, 포지션상 김정우는 포를란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정우가 포를란을 제대로 막아낸다면 예상외로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우루과이의 공격이 포를란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성용(셀틱), 조용형(제주), 이정수(가시마) 등의 협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전에서 포를란과 같은 위치에 있던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를 놓치면서 대패하는 쓰린 경험을 했다. 두 번 실수는 있을 수 없다. 김일병의 어깨가 무겁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中 환구시보 “6·25 김일성이 촉발”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가 인터넷 홈페이지인 환구망을 통해 한국전쟁이 김일성에 의해 촉발됐다는 사실을 25일 우회적으로 보도했다. 환구망은 ‘조선전쟁 60년-북한과 한국은 평화로써 전쟁을 없앨 수 있는가’라는 특집 코너를 마련, 6·25 전쟁 전후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환구망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반도 무력통일을 허가해 달라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둘은 동의하지 않았다. 환구망은 “1950년 1월 말, 스탈린이 돌연 마음을 바꿔 김일성의 군사행동 계획에 동의했다.”며 “조선전쟁이 폭발했고, 김일성은 군대에 38선 돌파를 지시했으며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고 서술했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밝히진 않았지만 문맥상 북한의 남침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와 관련, 관영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 역시 전날 6·25 특집기사를 통해 “1950년 6월25일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해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고 남침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해당 기사는 국제선구도보 및 신화통신 홈페이지는 물론 다른 포털사이트상에서도 바로 삭제됐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열린세상] 기로에 선 중국 노사관계/이문형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열린세상] 기로에 선 중국 노사관계/이문형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루이스 전환점(Lewis Turning Point). 요즘 중국 경제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용어 중 하나이다. 농촌의 저렴한 인력 활용이 어려워지면서 임금, 물가가 오르고 성장세는 둔화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일본에서 춘투(春鬪)가 성행하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에서 노사분규가 극심하였듯,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중국도 노사분규로 극심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근로자 연쇄자살과 노사분규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회사가 있다. 폭스콘이다. 세계 500대 기업 중 하나인 타이완 홍하이(鴻海)정밀의 중국 현지법인으로 1988년 중국에 진출한 이래 11개 공장에서 80여만명의 근로자들을 채용하고 있다. 전형적인 EMS(전자위탁생산) 업체로 애플의 아이폰, 델 컴퓨터, 노키아 휴대전화 등을 생산하면서 매출액이 1996년 5억달러에서 2009년에는 640억달러로 급성장하였다. 중국 수출 성공의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데 바로 폭스콘의 선전(深?)공장에서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무려 13차례에 걸쳐 연쇄자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 전역으로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또한 폭스콘이 6월 한 달 동안 인상한 임금 폭은 지난 10년간 인상한 폭과 동일한 수준이며, 올 10월에는 또 다시 거의 두 배 수준의 임금인상을 약속하고 있다. 당연히 폭스콘의 파격적인 임금 인상 조치는 중국 전역에 임금 인상 러시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기까지 폭스콘의 독특한 노무관리 방식도 책임이 크지만 중국 노동환경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타이완계 폭스콘, 일본계 혼다자동차, 한국계 성우하이텍 사례에서 보듯 지금 노사분규가 진행되고 있는 공장들은 대부분 외자기업들로, 고용 여건이나 임금 수준이 중국계 기업들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외자기업들에만 노사분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단순한 인금 문제만이 아닌 외자기업들의 독특한 고용 현실 때문이다. 주로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외자기업들은 소위 농민공들을 대거 고용하고 있다. 폭스콘은 선전의 두 곳 공장에 무려 42만명의 농민공들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 농민공은 모두 회사 내 기숙사에 집단 거주한다. 군대 내무반처럼 수십명이 한 방에서 기거하면서 하루 종일 집단생활을 한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폭스콘은 군대식 관리방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예 신입직원 선발시 군대식 집단 훈련을 통과한 인력만을 채용하기도 한다. 계획경제 하의 배고픈 시절을 겪으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어떠한 잔업도 마다하지 않던 농민공 1세대들과 풍요와 개인주의를 맛본 바링허우(80後)의 농민공 2세대들은 노동관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잔업수당보다는 여가를, 단체 기숙사보다는 혼자만의 공간을 갈구하는 20대들은 하루 15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병영식 내무반 생활에 염증이 나 있다. 따라서 근로조건 전반에 걸친 근본적 개혁 없이는 노사분규를 진정시키기가 구조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중국 정부의 소득분배정책과 노조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신노동계약법도 노사분규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축된 수출 대신 내수를 진작시키기 위해 각급 지방정부들은 경쟁적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있다. 전국의 31개 성·시 중 올해 들어 지금까지 17개 성·시가 최저 임금을 인상했으며, 후난성의 27.8%를 최고치로 전국 평균 인상률은 17%에 달한다. 근로자들의 연쇄자살 사태 등 저임금 바탕의 조립가공형 수출방식이 한계에 달하고 있음을 폭스콘 사태는 말해준다. 폭스콘 사태를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 없는 것도 우리 처지이다. 중국에 진출한 2만여개의 우리 기업들 대부분이 폭스콘과 유사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노무관리의 현대화와 함께 중국 진출 전략과 관리 전반에 걸쳐 철저한 재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의 신노동계약법을 충분히 숙지해 사전에 노사분규를 예방함은 물론 저임에 의존한 성장모델에서 조속히 벗어나야 한다.
  • 북한산성 계곡 식당촌 역사속으로

    북한산성 계곡 식당촌 역사속으로

    300년 역사를 가진 북한산성 계곡의 식당촌인 북한동 마을이 사라지게 될 전망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경기 양주군 북한동 마을에 거주하는 55가구를 올해 말까지 이주시킬 계획이라고 24일 밝혔다. 주민들 가운데 45가구는 2㎞ 떨어진 북한산국립공원 초입에 조성 중인 이주단지로 옮기고 10가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된다. 북한동에는 크고 작은 건물 145동이 있는데 사업비 513억원을 들여 모두 이전시키기로 했다. 이미 이주민들에게 328억원이 지급됐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1983년 국립공원 지정 이전부터 등산객을 상대로 음식점 영업을 해 왔다. 북한동 마을을 이주시키게 된 것은 지역 여건상 정화시설 설치가 어려운 데다 음식점들이 오·폐수를 계곡에 무단 방류해 자연경관을 해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곳은 계곡 입구에서 상가까지 손님을 실어 나르기 위해 승합차를 운행해 먼지·소음·매연 등으로 국립공원의 위상과 걸맞지 않다는 민원이 제기돼 왔다. 수십 년 전부터 철거를 추진해 왔으나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곳은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이 축조될 때 인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자리와 군량과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가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한때 수백가구가 살았지만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무장해제되면서 상당수가 쫓겨났고 1915년 대홍수와 6·25 전쟁을 계기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공단은 마을의 역사성을 고려해 철거대상 시설 중 일부를 탐방객 쉼터와 전망대 등 편의시설과 홍보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신기혁의 스포츠 스토리] 앰부시마케팅, 한국에서 꽃피우다

    [신기혁의 스포츠 스토리] 앰부시마케팅, 한국에서 꽃피우다

    그 유명한 중국의 삼국지를 보면,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도망가던 적장 조조는 화용도라는 곳에 매복해 있던 촉나라 장수 관우에게 잡히게 된다. 또한, 우리 역사의 고구려를 지켜낸 살수대첩에는 살수강가에 매복해 있다가 수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매복 작전이 오늘 날 기업의 마케팅에도 사용되고 있다. 바로 앰부시마케팅이다. 앰부시마케팅(Ambush Marketing, 매복마케팅)이란, 규제를 피해가는 마케팅 기법을 말한다. 주로 스포츠마케팅 시장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특정 스포츠대회의 마케팅 권리가 없는 기업이 대회 중계방송의 TV 광고를 구입하거나 공식스폰서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개별 선수나 팀을 후원하는 등의 교묘한 수법을 동원해 광고/홍보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약간은 전문적인듯한 이 단어가 사실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셀 수 없이 지나쳐갔을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시즌만 되면, 예외 없이 이 앰부시마케팅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월드컵 마케팅 시장은 앰부시마케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앰부시마케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와 유사한 마케팅을 전개했던 사례들이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2002년에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이 개최되면서, 기업들은 월드컵이 주는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월드컵 후원사가 아닌 이상, 월드컵이라는 대회명칭과 앰블렘, 마스코트, 트로피 등 월드컵과 관련된 어떠한 이미지도 사용할 수 없었다.따라서, 후원사가 아닌 기업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월드컵을 활용해서 자사의 기업이미지를 높이고 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상황에서 앰부시마케팅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월드컵 앰부시마케팅이 쉬운 이유는 월드컵 시장이 워낙 크고 국민적 관심도가 높으며 거의 한달 동안 열리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라서 굳이 월드컵이라는 명칭이나 앰블렘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월드컵을 연상시키는 유사 명칭이나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유명 선수를 광고모델로 활용하면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월드컵을 연상해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현재 본선 32강 경기가 진행중인 남아공 월드컵의 경우에도 공식후원사가 아닌 기업들의 광고효과가 공식후원사의 광고효과를 넘어섰다는 기사들이 이미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앰부시마케팅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월드컵 열기를 붐업시키고 시장을 키우는 아이디어가 기발한 마케팅 활동이라고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월드컵이라는 대형 마케팅 호재에 편승하려는 비열한 행위이며, 수백억원의 비용을 지불한 공식후원사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월드컵이 끝나면 FIFA는 의례히 앰부시마케팅을 진행한 기업들 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느라 분주하다. 이처럼, 앰부시마케팅은 법적 테두리 안에서의 적합성과 상도덕적 관점에서의 정당성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진행해야 하는 어려운 점도 가지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월드컵 공식후원사의 마케팅도 진행해봤고, 축구 국가대표팀 후원사로서 월드컵을 활용한 앰부시마케팅을 실행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공식후원 마케팅과 앰부시마케팅의 효과를 단순히 비교하거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앰부시마케팅도 결국 스포츠에 기댄 “스포츠마케팅”이라는 것이다. 스포츠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앰부시마케팅도 있을 수 없다. 공식후원사의 인적·물적 지원을 통해 개최되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 기업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인기 스포츠 스타,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이겨내고 후원사의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아마추어 스포츠 선수들. 이러한 스포츠와 후원사 혹은 지원사의 파트너십이 없다면, 스포츠 시장자체가 형성되지 못할 것이고, 그에 따라서 앰부시마케팅의 기회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단적으로 축구선수 한 명도 후원하지 않고, 작은 축구대회 한번도 지원하지 않는 기업에서 월드컵을 활용하여 마케팅을 전개한다는 것은 스포츠를 후원하고 있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너무하지 않나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스포츠와 함께 윈윈(Win-Win) 하기 위해 가져야 할 앰부시마케팅의 본질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본질은 법적인 규제보다도 더 중요한 스포츠마케팅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앰부시마케팅, 즉 페어플레이 정신이 있는 앰부시마케팅일 것이다. 어떤 스포츠 이벤트를 장려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자한 후원사가 없다면 그 스포츠를 활용할 수 있는 앰부시마케팅의 기회도 없다. 이러한 스포츠와 후원사 사이의 파트너십을 이해할 수 있는 앰부시마케팅이야말로 정말 수준 높은 마케터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식후원사의 스포츠마케팅이 아닌 비(非)후원사의 앰부시마케팅을 무조건 억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앰부시마케팅을 하게 된 계기로 축구 혹은 다른 어떤 스포츠종목에라도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되고, 후원의 손길을 뻗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바램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남아공 월드컵을 활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앰부시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 어떤 기업은 기발한 아이디어였다는 성공의 찬사를 또 어떤 기업은 너무 상업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본다.사진 = 아디다스(위), 나이키(아래) 월드컵 광고 ㈜케이티 신기혁 스포츠에디터
  •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남한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평가받을까.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논하는 장에서 반짝 등장하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언급이 미미하다. 존재감이 없다. 러시아나 중국, 심지어 미국 자료들도 한국전쟁의 주역으로 이승만을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남한 정부와 이승만은 단지 전쟁을 획책한 북한 김일성과의 비교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휴전협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승만의 극렬한 휴전반대가 주요 변수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오간 각종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이라는 이름 석 자의 등장 빈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특히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의 전격적인 석방이 준 충격파는 컸다. 휴전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은 물론 평양이 발칵 뒤집혔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아침에 면도하다 이 소식을 보고받고 얼굴을 벨 정도였다. ●‘미국의 남자’ 이승만 美와 애증 미국은 진퇴양난이었다. 미국 국내의 들끓는 휴전여론과 달리 중국과의 휴전협상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이승만의 휴전반대로 말미암아 담벼락 위를 걷는 아찔한 상태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간행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운 이승만 정부의 자세와 행동이 특별히 어려웠다. 이러한 것들은 회담에 역기능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협상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이 대통령의 조치는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적 입장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휴전협정도 반대했다.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오로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그는 ‘중국군의 완전한 철수, 북한 공산당 해체, 인민군 무장해제’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은 1951년 7월 “유엔군이 한국의 분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장해 달라.”라는 서한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트루먼은 이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협조를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다.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합참보고서는 1952년 초 뉴욕 출신의 저명한 천주교 인사인 스펠만이 한국을 방문, 무초 미 대사와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이 함께한 자리에서 이승만이 “미국의 모든 천주교인이 한국에 휴전이 없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정보를 싣기도 했다. 미국입장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무리한 요구였다. 미국이 한국의 지도자로 선택한 ‘가장 미국적인 한국인’인 이승만은 그를 키워준 미국을 거역하고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지목한 것처럼 이승만도 미국에 의해 선택되고 키워졌다. 이 시기 이승만을 묘사한 미국 측 자료는 온통 노회, 변덕, 아집, 독선 같은 단어로 도배돼 있었다. 전쟁발발 이전 이승만을 접촉한 한국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야비하고, 부패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악평했다. 이승만을 바라보는 미국의 우려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남자’였다. 1905년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선발돼 백악관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해 인연을 맺었다.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중단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랐지만, 그때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으려고 작업 중이었다.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재량권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고 나서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훗날 대통령이 된 윌슨의 제자가 됐다. 윌슨은 이승만을 ‘미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구세주’라고 부추겼다. 이승만은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 국무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이승만과 미국은 애증의 관계였다. 미국 지도부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기독교인인 이승만이 미국식 종교와 정치 기조를 따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마음속에는 미국에 대한 배신과 위선, 불신의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이승만 ‘북진통일’ 정치적 구호 이승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북진통일’은 남한주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았지만 득보다 실이 컸다. 김일성의 남한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구실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스탈린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와 군수물자로 완전무장한 북한 인민군과 비교하면 남한의 군사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발발 당시 한국군은 자신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상태였다. 전쟁 열흘 전인 1950년 6월15일 미 국방부에 보고된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한국군은 가까스로 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장비와 무기 대부분은 쓸모가 없었고, 방어능력도 기껏 보름 정도’라고 기술돼 있다. 실제 인민군이 보유한 소련제 T34전차의 위력 앞에 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구형 바주카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준비한 김일성의 남침에 비해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종결을 향해 달려갔다. 미국 공화당이 1952년 7월 아이젠하워를 대통령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대세는 군사적 종결이 아닌 정치적 종결, 즉 휴전 쪽으로 기울었다. 대통령 후보자 아이젠하워는 같은 해 10월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명성을 걸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명예롭게 종결짓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은 한국전쟁을 끝내는 일에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그는 12월2일 극비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미 행정부 수뇌부는 남한의 정치적 위기는 전적으로 이승만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 같은 위기가 휴전협상뿐만 아니라 38도 상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 실제 이승만은 1952년 국회 간선을 통한 재선이 어렵게 보이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을 꾀했다. 임시수도인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한국군 전투부대를 철수시켜 계엄군으로 사용하려 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나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군대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전쟁을 끝내고 싶은 미국에 이승만은 골칫거리였다. 1953년 미국과 중국의 협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부와의 사이는 또 다른 고비를 향해 뒤틀려 갔다. 이승만은 4월5일 “판문점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관계없이 우리의 목표는 똑같다. 우리의 변함없는 목표는 한국을 남으로부터 압록강까지 통일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유엔군사령부가 중국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킬 것이며 단독으로 싸울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장을 보냈다. ●아이젠하워 한때 李 제거 계획 워싱턴은 이승만을 휴전협상의 훼방꾼이자 위협세력으로 간주했다. 특유의 허세라고 판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조치로까지 몰고 갈 것으로 예측했다. 달래기에 나섰지만 이승만은 클라크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 모든 경제원조를 철수시킬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승만은 6월6일 ‘선(先) 한미방어조약 체결, 후(後) 유엔군과 공산군의 상호철군’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반쪽 휴전이나 평화보다는 싸움을 택한다.”라는 예의 벼랑 끝 외교전을 펼쳤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 대통령은 송환 불원 한국인 포로를 경고 없이 석방할 수 있다.”는 예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워싱턴에 보냈다. 포로경비부대 대부분이 한국군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유엔군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클라크 사령관의 예언대로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 미국 수뇌부는 당시 한국에 임시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극비의 군사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19일 자 미국 국가안보회의 비망록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위험을 없애는 가장 빠르고 유일한 길은 쿠데타”라면서 “이는 확실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군사자문 기구인 합참은 1952년부터 쿠데타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합참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6월27일 벤플리트 장군에게 이 계획을 통보했다. 한국육군과 참모총장은 유엔군사령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밀해제된 미국 합참보고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을 어떤 구실을 붙여 서울로 초대한다.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주요 지지자들을 체포하고, 주요시설을 방호하며 한국육참총장을 통하여 기존 계엄령을 장악한다. 이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종결토록 요구한다. 만일 거부하면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한 채 연금하고, 요망되는 포고령은 협조적인 것으로 예상하는 국무총리가 발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李 재선 이후 美와 화해모드 다행히 워싱턴의 친위 쿠데타계획은 불발됐다. 현실론을 내세운 참모들의 설득으로 강력한 경고수준에서 그쳤다. 한국 국회도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을 승인했다. 계엄령은 해제됐고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화해모드로 전환됐다. 미국은 손을 들었다. 미국은 휴전동의를 얻고, 이승만은 그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보호우산을 제공받는 선에서 양국의 갈등은 마무리됐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의 통일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계속 추구한다. 휴전협정 수락 직후에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한다. 전후 경제원조를 계속한다.”라는 세 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이승만은 극단적인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허물도 컸지만,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주춧돌을 놓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전쟁의 산물인 한·미동맹은 단순한 양자동맹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지역동맹”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를 저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동맹이라는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기자 joo@seoul.co.kr
  • 병사의 불안한 초상·편지·유품… 전쟁 흔적 그대로

    병사의 불안한 초상·편지·유품… 전쟁 흔적 그대로

    “처음에는 새까맣고 다부진 군인들을 떠올리고 초상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특전사에서도 해병대에서도 그런 군인은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 얼굴이 하얗고 단정한 용모의 사병들을 만났죠.”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진작가 10명이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6·25전쟁의 심리적 지도를 그린 ‘경계에서’전을 8월20일까지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연다. 20여년간 인물 사진을 찍으며 아줌마, 소녀 등의 얼굴에서 불안을 포착했던 사진작가 오형근(47)은 24일 “병사의 초상을 통해 얼굴에 스민 불안, 외로움, 고립감을 잡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부가 하얗고 연예인을 능가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병사들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알고 보니 요즘은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자외선 차단제를 지급한단다. 오형근은 결국 파란 하늘, 하얀 벚꽃 아래서 용맹스러운 군견과 함께 병사의 초상을 찍어 흰 얼굴에 담긴 ‘미열 같은 불안감’을 포착했다. 구본창(57)은 특유의 명상적 시선으로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유물인 전투화, 수통, 혁대, 안경, 단도, 포탄, 탄환 등을 찍었다. 무엇보다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1953년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김종섭 하사가 전쟁터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사진이다. 김 하사는 당시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참전했다. 아직도 고운 모습인 101살의 어머니 박외연씨는 곱게 보관한 편지를 내밀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여전히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믿는 어머니의 모습과 죽은 아들이 부친 편지 사진이 나란히 전시된 곳 앞에서는 울컥하는 목울음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주명덕(70), 강운구(69) 등 원로 사진가들은 3만 5000명이 산화한 경북 대구 다부동 등의 전적지와 철책선, 초소 등을 흑백필름 카메라로 찍어 직접 인화했다. 원성원(38), 난다(41) 등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대의 작가들은 디지털 카메라와 포토샵을 이용해 요즘 세대들이 바라보는 전쟁에 대한 시선을 그려냈다. 대북 심리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강원도 양구 가칠봉 수영장에서 1992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가 열렸던 일을 소재로 한 난다의 디지털 합성 사진은 재미있으면서도 ‘낯선 풍경’이다. 어린이날 난다가 촬영을 위해 찾은 전쟁기념관은 마치 대공원 같은 분위기였으며, 시민들은 황토팩을 하고 소파에 앉아 천안함 침몰 뉴스를 시청한다. 전후 세대들의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사진작가들에게 1년간의 준비 기간을 주며 자유롭게 군사 기밀 지역을 촬영할 수 있도록 후원했던 국방부는 연예 병사들을 내세워 전시 홍보에 나섰다.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낮 12시에는 군 복무 중인 영화배우 이준기와 이동욱이 특별 해설자로 나선다. 이메일로 받은 1차 예약은 이미 일본의 한류 팬으로 마감됐다. 6월26일, 8월14일 미술관 4층에서 열리는 6·25 60주년 특별콘서트에는 국군홍보지원단 대원인 가수 김정훈이 함께한다. 미국·영국 순회전도 예정돼 있다. 관람료 1000원. (02)333-0664.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씨줄날줄]병역특례/이춘규 논설위원

    징병제(徵兵制)는 주로 성년 남성들에게 국토를 방위할 병역 의무를 지워 강제하는 제도이다. 군대에 일정기간 복무하도록 법으로 강제한다. 우리나라, 타이완, 독일 등이 징병제 나라다. 우리나라는 복무기간이 24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되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내년까지 4만명의 병력자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국가의 안전과 국민들의 자유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징병제는 공평성이 생명이다.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면 징병제와 국가안보가 위험해진다. 특례가 늘게 되면 국가 운영의 원칙이 흔들리게 된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래서 병역의무를 면제하는 특례제도는 예외적으로, 엄격히 운영되고 있다. 현재 많은 분야에서 병역특례를 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계이다. 산업체 특례도 있다. 바둑, 무용에도 있다. 특례가 늘면 현역 장병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신성한 병역 의무를 징벌로까지 인식하게 된다. 병역특례 논란이 재점화됐다. 축구 남아공월드컵 대표팀 허정무 감독과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 등이 16강 진출 직후부터 병역특례를 거론하면서다. 찬반 양론이 있지만, 누리꾼들은 반대론이 압도적이다. 원칙을 흔드는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이름 없고, 돈 없고, 배경 없는 사회적 약자들만 군대에 가란 말인가.”라는 항변도 들려 온다. 월드컵 태극전사들이 국위를 선양했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했지만 법을 바꾸면서까지 특례를 주라는 훈장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스포츠 병역특례는 1973년 도입됐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3위 이상’이었다가 1984년 엄격해졌다. 1990년 ‘올림픽 3위 이상, 아시안게임 1위’로 더욱 강화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 4강 이후 ‘축구 월드컵 16강, 야구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이상’까지 특례조항이 추가됐지만 2007년 ‘올림픽 3위 이상, 아시안게임 1위’로 원위치됐다. 일본 우파 언론들은 지난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 때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 행진을 이어가자 “한국선수들은 병역면제 혜택 때문에 강하다.”고 빈정댔다. 당시 여자선수들의 선전은 외면해 버렸다. 야구나 축구, 그리고 올초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도 한국선수들의 선전을 병역면제 혜택 덕분으로 폄하했다. 병역특혜 논란 때문에 국민적 영웅들이 국제적 놀림감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북한산성 계곡 식당촌 역사속으로

    북한산성 계곡 식당촌 역사속으로

    300년 역사를 가진 북한산성 계곡의 식당촌인 북한동 마을이 사라지게 될 전망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경기 양주군 북한동 마을에 거주하는 55가구를 올해 말까지 이주시킬 계획이라고 24일 밝혔다. 주민들 가운데 45가구는 2㎞ 떨어진 북한산국립공원 초입에 조성 중인 이주단지로 옮기고 10가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된다. 북한동에는 크고 작은 건물 145동이 있는데 사업비 513억원을 들여 모두 이전시키기로 했다. 이미 이주민들에게 328억원이 지급됐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1983년 국립공원 지정 이전부터 등산객을 상대로 음식점 영업을 해 왔다. 북한동 마을을 이주시키게 된 것은 지역 여건상 정화시설 설치가 어려운 데다 음식점들이 오·폐수를 계곡에 무단 방류해 자연경관을 해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곳은 계곡 입구에서 상가까지 손님을 실어 나르기 위해 승합차를 운행해 먼지·소음·매연 등으로 국립공원의 위상과 걸맞지 않다는 민원이 제기돼 왔다. 수십 년 전부터 철거를 추진해 왔으나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곳은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이 축조될 때 인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자리와 군량과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가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한때 수백가구가 살았지만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무장해제되면서 상당수가 쫓겨났고 1915년 대홍수와 6·25 전쟁을 계기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공단은 마을의 역사성을 고려해 철거대상 시설 중 일부를 탐방객 쉼터와 전망대 등 편의시설과 홍보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슈주, 4집 리패키지 참여...군대 앞둔 강인

    슈주, 4집 리패키지 참여...군대 앞둔 강인

    슈퍼주니어가 4집 리패키지 앨범에 자신들이 직접 만든 자작곡을 수록했다. 오는 28일 발매되는 이번 리패키지 앨범에는 기존 4집 수록곡 11곡은 물론 25일 음악사이트를 통해 선공개되는 후속곡 ‘너 같은 사람 또 없어’, ‘Shake it up’ 리믹스버전을 비롯, 멤버들의 자작곡 ‘진심’, ‘여행’까지 4곡이 더해진 총 15곡을 수록됐다. 리더 이특과 슈퍼주니어-M 멤버 헨리가 함께 작곡한 발라드곡 ‘진심’은 따뜻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따스한 통기타 연주로 팝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한 노래. 이특은 데뷔 첫 자작곡인 만큼 바쁜 스케줄에도 열정적으로 제작과정에 참여해 더욱 완성도를 높였다. 또 멤버 은혁이 작사, 동해가 작곡을 맡은 ‘여행’은 심플하면서도 반복되는 후렴구가 돋보이는 곡으로 군입대를 앞둔 강인도 참여해 눈길을 끈다. 특히 이 곡은 강인이 군입대 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노래인 만큼 음원 수익금 전액 기부될 예정이다. 한편 슈퍼주니어는 25일 방송되는 KBS 2TV ‘뮤직뱅크’ 상반기 결산에 출연해 정규 4집 타이틀곡 ‘미인아’ 굿바이 무대를 선보인다. 사진 = SM엔터테인먼트
  • [한국전쟁 60주년] “개항 이후 조선전쟁의 연장” “마오·스탈린은 휴전 꺼렸다”

    [한국전쟁 60주년] “개항 이후 조선전쟁의 연장” “마오·스탈린은 휴전 꺼렸다”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를 짚어보는 국제학술대회가 23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주최로 이 대학 연세·삼성학술정보관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박명림(연세대), 와다 하루키(일본 도쿄대), 브루스 커밍스(미국 시카고대), 션즈화(중국 화동사범대), 안드레이 란코프(국민대) 등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들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한·일·미·중·러 5개국 입장에서 한국전의 의미를 되짚었다. 첫 발제자 하루키 교수는 한국전쟁을 개항 이후 오래된 ‘조선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청일전쟁 같은 것도 조선전쟁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루키 교수는 “개항 이후 발발한 전쟁은 그 목적이 조선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전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피해자인 조선의 입장도 명확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션 교수는 중국의 참전 결정은 합리적이었으나 1951년 UN의 휴전 제안을 거부한 것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미군을 나약한 군대로 잘못 판단, 휴전을 거부하면서 불필요한 희생만 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출신 란코프 교수는 이에 대해 스탈린의 국제전략 문제를 지적했다.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을 장악하자 미국을 동아시아에 붙잡아두기 위해 한국전쟁을 승인했고, 개전 뒤에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휴전협상 진전 방해해 중국의 국력 소모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전쟁의 역설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이로웠지만 장기적으로 남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개항 이래 한국문제는 계속 불안정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한·미동맹의 틀에 편입되면서 어쨌거나 안정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이라는 문제점도 낳았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문제로 북한을 소련이나 중국의 꼭두각시로만 여기는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오해를 꼽았다. 자신의 수정주의는 미국정부의 오판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얘기다. 지금도 똑같다. 커밍스 교수는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은 유사시 북한에서 핵물질을 찾아 처리하는 훈련을 한다.”면서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하는 이유는 꼭두각시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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