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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영사관 피습, 이슬람 무장세력의 9·11 기념 테러”

    ‘9·11 테러’ 11주년을 겨냥한 치밀한 소행인가, 알카에다와 연계된 조직적 반미 테러인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리비아 벵가지에서 발생한 이슬람 무장 세력의 미국 영사관 습격 사건을 둘러싸고 미국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슬람을 모욕한 미국 영화에 반발한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는 하지만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 대사 등이 공격을 받아 사망하자 배후 파악에 분주한 모습이다. 미 폭스뉴스 등은 12일 미 정부가 이번 미 영사관 공격이 우발적 폭력 사태가 아니라 9·11 테러 11주년을 겨냥한 이슬람 무장 세력의 계획적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인터뷰에서 “초기 조사 결과 이번 공격이 사전에 계획됐다는 징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미 하원 정보위원장인 마이크 로저스 의원도 “이번 공격은 군대나 특공대 방식으로 군이 개입한 것이며 명확한 목표물을 겨냥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밝혔다. 피트 혹스트라 전 하원 정보위원장은 “우리는 수년간 알카에다와 극단적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9·11 테러 기념일을 ‘축하’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 왔다.”고 알카에다 연계 의혹을 제기한 뒤 “시위대는 미 대사가 있던 벵가지를 겨냥했고 완전 무장을 했다.”며 ‘사전 계획’에 무게를 뒀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미 정부 당국자들도 A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공격은 매우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집단의) 소행으로 판단된다.”며 당국이 이미 테러 가능성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고 밝혔다. 한 고위 관리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사전에 계획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슬람교 모독 영화에 대한 비난 시위를 기회로 이용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영국 BBC는 아마드 지브릴 영국 주재 리비아 부대사의 말을 인용, 이번 공격이 극단주의 단체인 안사르 알샤리아에 의해 행해졌다고 전했다. 리비아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 단체는 여러 차례 테러를 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고졸사원 군복무동안 회사에 지원금”

    고졸 사원이 군 복무를 하는 기간에 정부가 해당 회사에 지원금을 주는 방안이 추진된다. 군 복무 문제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졸 인력의 일자리 찾기를 돕기 위해서다.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은 13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기술인, 대한민국의 희망을 그리다’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내용의 제도 개선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고졸 사원이 군대에 갔다 와서 다시 그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돌아올 때까지 회사에 지원금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또 “배우고 익히기 위한 휴가를 낼 수 있도록 ‘근로자 학습휴가제’도 마련할 계획”이라면서 “평생 직업 시대를 뒷받침하기 위한 취지”라고 말했다. 학습휴가제는 근로자가 재교육 등을 받기 위해 일정 기간 유·무급 휴가를 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편 정부는 이날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외국인력정책위원회를 열고 내년 외국인력 도입 규모를 올해보다 5000명 정도 많은 6만 2000명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열린세상] 국방개혁안 병력수급계획 문제있다/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열린세상] 국방개혁안 병력수급계획 문제있다/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정부는 18대 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한 국방개혁 법안을 재정비해 ‘국방개혁 기본계획 2012~2030’이라는 이름의 국방개혁안을 최근 발표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북한의 핵이나 사이버 도발 등 바뀌고 있는 안보상황에 대비해 기존의 ‘억제’ 전략에서 ‘적극적 억제’로 군사전략을 변환하는 것이다. 이번 개혁안을 보니 새 군사전략에 맞춰 필요한 전력을 보강한다든지 상황에 따라 기존 부대를 확대하거나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등 국방부가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북한이 20만명이나 보유한 특수부대에 대비한 산악여단 창설, 북핵이나 탄도미사일에 대비한 유도탄사령부 전력강화, 정찰위성의 정보를 군사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항공정보단 창설, 북한의 GPS 교란이나 디도스(DDoS) 공격 등 사이버전에 대비해 사이버 방호사령부의 확대, 아덴만 여명작전의 영웅인 UDT 확대, 서북도서 방어를 위한 해병대 전력 강화, 국가의 전략적 카운터펀치인 잠수함사령부 창설 등 바뀌는 안보상황에 대응한 효과적인 부대 재편 계획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바로 상부지휘구조 개편안의 그늘에 가려 이슈화되지 못한 병력문제다. 현재 우리 군의 총 병력은 63만여명이고 이 중 육군 50만명, 해군 4만 1000명, 공군 6만 5000명, 해병대 2만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산율 저하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해 육군 병력은 38만 7000명으로 대폭 줄이고, 해·공군은 동결해 총병력을 52만여명으로 감축하겠다는 안이 병력구조 변화의 핵심이다. 우선 육군병력의 대규모 감축은 위험하다. 병력 감축안은 2006년의 ’국방개혁2020’에서 출발했는데, 당시의 시대 상황은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에서 미군이 첨단전력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첨단무기의 위력에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뀐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토마호크미사일로 핵심 시설을 외과수술하듯이 정밀타격한 후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너무도 쉽게 미군에 함락되고, 이라크를 철권통치하던 후세인이 허무하게 생포되는 것을 보면서 육군 무용론까지 나오던 시기였다. 그러나 첨단 무기의 위력은 거기까지였다. 이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산악으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미군의 희생은 늘었고, 막대한 전비를 쏟아부었으면서도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제거하는 데 실패해 발을 빼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이것을 보고 20만명에 달하는 특수전 병력을 양성하였다. 이 특수전 병력은 유사시 남한으로 잠입해 각종 테러행위도 하겠지만, 한·미연합군이 역습해 북한지역에 들어온다면 탈레반보다 더 가혹하게 괴롭혀 주겠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 병력의 대규모 감축은 유사시 신속한 통일을 이루는 데 막대한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해·공군 인력 정원이 탄력성이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번 계획으로 공군은 항공정보단을 창설하게 되고, 해군은 잠수함사령부와 UDT를 확대개편하게 된다. 특히 해양의 중요성으로 인해 지난 10년간 해군력은 역동적으로 변모했다. 함정이 대형화되면 3000여명의 병력으로 기동전단이 창설되고, 잠수함 9척으로 운용하던 잠수함전단은 18척 체제의 잠수함사령부가 되는데 여기에 1000명 가까운 인력이 더 필요하다. UDT도 300여명, 헬기운용요원도 더 늘려야 한다. 그런데 겨우 4만 1000명으로 못 박힌 병력 상황에서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려면 기존의 부대에서 빼올 수밖에 없다. 이건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형상이다. 첨단전력도 이런 상황이라면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군대가 사상누각이면 그것은 패전이 되고 국가는 비참한 결과를 맞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된다. 출산율 저하로 병력 자원이 줄고 있지만 복무기간 조정이나 대체복무자의 축소 등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육군 병력 감축을 지연시켜야 한다. 또 각 군의 정원을 못 박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인력을 배분, 신설되는 부대가 사상누각이 아닌 든든한 안보 지킴이로 탄생하게끔 국방개혁안을 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의 과거·현재를 말하다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의 과거·현재를 말하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353쪽) 중국 현대 소설가를 대표하는 위화(余華·52)가 에세이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펴냄)를 냈다. 2009년부터 단속적으로 써내려 간 비허구성 글을 모아 2010년 프랑스어판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해외판에 이어 2012년 가을 비로소 한국어판을 냈다. 위화는 인민, 영수(領袖),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라는 10개의 표제 언어를 제시하고 그와 관련한 자신의 50년 인생 경험을 써내려 간 것 같다. 영수란 마오쩌둥과 관련된 최고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산채는 ‘풀뿌리문화가 엘리트 문화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민간이 정부에 던지는 도전장’이란 뜻도 있지만 산채 스타, 산채 유행가, 산채 TV프로그램과 같이 중국 사회의 혼란을 드러내는 가짜, 모조품을 말한다. 홀유는 또 뭔가 싶을 텐데,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뭔가를 덮어씌우는 일로 산채와 마찬가지로 현대 중국인들의 처세법으로 이를 활용해 사회적·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현상이란다. 산채가 모조품과 해적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 주듯 홀유도 속임수와 헛소문에 합리성의 외피를 입혀주는 것이다. 위화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이 “열 개의 단어를 열 쌍의 눈으로 삼아 열 개의 방향에서 중국을 응시하는 책”이라고 했는데, 읽으면 면도날로 피부를 살짝 베이는 듯한 예리한 고통이 묻어난다. 그는 이 책의 후기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문화혁명기를 맞아 홍위병이 됐고,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977년 문화혁명의 끝을 경험한다. 29살이던 1989년 저장성의 작가였던 그는 베이징에서 톈안먼 사건을 경험한다. 중국에서 절대 검색되지 않고, 검열의 단어인 ‘6월 4일’ 아침 그는 침대 열차를 타고 베이징 역에 도착해 총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는 6월 7일 베이징을 떠났다. 그 후 위화는 6월 4일을 ‘5월 35일’로 표현하며 자유롭게 글을 써 왔다. 또한 3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정치지상주의였던 중국과 중국인들이 금권지상주의로 변해 가는 모습을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위화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통과하면서 겪어내는 고통을 한국인 독자들은 망각하고 떠나 보낸 한국의 1970년대를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회고할지도 모르겠다. 현재 중국의 과거와 현재가 20~30년의 격차를 두고 그들보다 앞서가는 한국의 과거·현재의 모습과 똑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실려 있는 ‘인민’ 편에서 위화는 “1989년 봄과 여름에 가두시위를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그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중략)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할 상황이 나타났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 가운데 1989년 톈안먼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위화의 ‘불안에 떨게 할 상황’에 맞장구를 치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인들은 어떻게 탱크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짓밟았던 톈안문 사건을 잊을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질문은 한국의 1980년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위화는 이렇게 지적했다. “30여년 동안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각종 사회갈등과 사회문제가 초고속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낙관적인 정서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국적 상황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히려 위화처럼 중국이 톈안먼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을 불안해하는 작가가 한국에는 있는지 하고 반문하게 한다. 인민 편에서 위화는 1989년 5월 하순 어느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한밤중 기온이 뚝 떨어진 베이징 시내를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다 멀리서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에 그는 몸이 와락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움직이면 군대와 탱크도 막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중략)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문화혁명기 시절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발자크 등 외국작가의 작품이 ‘독초’로 찍혔지만 그 명작들은 몰래몰래 전해져 위화에게도 돌아갔다. 다만, 앞·뒷장이 떨어져 나간 이들 명작은 위화에게 ‘밑도 끝도 없는 작품’이 되고, 덕분에 밑과 끝을 위화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이어 붙이면서 위화라는 작가가 탄생했다는 ‘독서’ 편은 낄낄거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다. 문화혁명기에 읽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읽어야 했던 지겨운 루쉰이 위화의 나이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던” 경험을 다룬 ‘루쉰’ 편은 슬프기도 하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커버스토리-혼외출생 1만명 시대] 다큐멘터리 영화 ‘미쓰마마’ 출연 김현진·최형숙씨와 유쾌한 수다

    [커버스토리-혼외출생 1만명 시대] 다큐멘터리 영화 ‘미쓰마마’ 출연 김현진·최형숙씨와 유쾌한 수다

    “그런 놈들 북한으로 보내 버려야 돼. 정신교육에 그만한 데가 없다니까.” 양육 미혼모들을 다룬 백연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미쓰마마’에 나오는 네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장지영(31)씨가 ‘비정한 아빠’에게 던지는 뒷담화다. 혼외출생 1만명 시대, 무책임한 남자와의 사랑 없는 결혼 대신 아이와 자신의 삶을 선택한 ‘미쓰마마’들을 만났다. 최형숙(41)씨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준서(7)의 엄마다. “미혼이 아니라 모(母)가 중요하다.”는 최씨는 자기소개를 부탁하는 질문에 아들 이름부터 입에 올린다. 이들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낙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엄마를 이상하게 여긴다. TV 속 미혼모들의 삶이 늘 모자이크 뒤에 가려져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엄마라는 게 부끄럽지 않은 최씨는 ‘생얼’을 드러내는 데 인색하지 않다. “어두운 시사프로그램 대신 버라이어티쇼에 나가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출산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최씨는 오랫동안 연애하던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준서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은 헤어진 뒤에야 알았다. 처음엔 낙태를 고민했다. 못할 짓이다 싶어 낳았지만 가족들은 입양을 강요했다. 마지못해 준서를 시설에 보냈다. 밤새 울다 다음 날 아이를 찾으러 다시 시설에 갔다. 갑작스러운 임신이었지만 억지로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씨는 “결혼은 의무가 아니라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몫”이라고 했다. 최씨는 미혼보다는 비혼(非婚·결혼할 의지가 없음)에 가깝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아 생긴 장점도 있다. 최씨에게는 눈치 볼 시댁이 없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집안일을 강요하는 남편도 없다. 최씨는 “월급만 가져다주고 아빠 노릇 다했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다. 혼외출생을 보는 일반적인 인식은 양면성을 띄고 있다. 통계청이 2009년 발표한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에 따르면 혼전임신을 했을 경우 미혼남성(20~44세)의 21.5%, 미혼여성(20~44세)의 16.6%가 ‘반드시 낳아야 한다’고 답했고, 미혼남성 56.6%, 미혼여성 60.7%는 ‘가능하면 낳아야 한다’고 답했다. 젊은 남녀 모두 혼전임신이라도 출산은 필요하다고 여긴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항목에서는 미혼남성의 36.4%, 미혼여성의 36.5%만이 찬성(전적으로 찬성+대체로 찬성)했다. 이미 생긴 아이는 낳는 게 좋지만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출산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인식이 많음을 보여 준다. ●“칙칙한 시사프로 대신 버라이어티쇼 나가고 싶다” 백 감독은 이에 대해 “가부장적 편견과 모순의 집결체가 미혼모에 대한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최씨는 과거 미혼모라는 사실을 수군대는 회사가 싫어, 입사 사흘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네살짜리 딸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김현진(29)씨는 “미혼모라면 무조건 문란하고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장지영(31)씨가 “드라마에 나오는 미혼모는 왜 항상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구제받지? 혼자 애 키우면서 살아가면 안 되나?”라고 불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사회에서 미혼모는 여전히 구제와 손가락질의 대상이다. 또 다른 미혼모 원미현(가명·35)씨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했지만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지운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냉정하게 낙태수술 예약을 잡더라.”고 8년 전 일을 회상했다. 원씨는 두 번이나 병원을 찾았지만 차마 수술대에 오르지 못했고 현재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 친부는 ‘혼인신고를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통보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었다. 원씨는 “당당한 싱글맘으로 살려해도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는 아이를 보며 울 때가 많았다.”고 했다. 이처럼 현실 속의 양육은 오롯이 여성들 몫이다. 통계청이 5년에 한 번씩 발표하는 총가구조사에 따르면 2010년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미혼여성은 16만 6609가구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남성 1만 8118가구에 비해 크게 앞섰다. 미혼여성이 13만 3234가구, 미혼남성이 9218가구였던 2005년 조사보다 ‘싱글대디’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긴 했지만 차이는 압도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인식이 사회규범적 의식과 현실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남성들은 ‘나는 낙태하라고 했는데 네가 좋아서 낳은 거니까 책임지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서 “결혼하지 않더라도 양육비를 지원하게 하는 등 법적 책임을 강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사회적으로 양육의 1차적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는 보이지 않는 규범이 강하다.”면서 “모유 수유 등의 측면에서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혼외출생에 대한 편견은 미혼모 자신에게 그치지 않는다. 미혼모의 부모와 자녀도 똑같은 편견에 시달린다. 김씨는 “부도덕한 미혼모를 만든 부모도 똑같다고 여기는 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씨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최씨의 아버지도 처음에는 “연을 끊자.”고 했다. 경상도 출신인 최씨의 아버지는 다음 날 변기통을 부여잡고 남몰래 펑펑 울었다. 김씨는 “솔직히 엄마는 평생 내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함께해 주는 건 가족”이라고 덧붙였다. 최씨도 “출산을 반대하던 오빠가 지금은 ‘내가 왜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미혼모부터 검색해 보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엄마, 엄마는 왜 거북이처럼 느리게 일해?” 여권이 신장됐다고 하지만 미혼모들이 사회인으로 홀로 서기를 하기란 여전히 벅찬 게 현실이다. 정부는 가족관계법·한부모가족지원법 등에 따라 혼외출생자들을 지원하고는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하면 양육 미혼모의 54.7%는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라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받고 있다. 자녀가 18개월 미만일 경우 월평균 63만원을, 36개월 이상은 32만원을 받는다. 그러나 취업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미혼모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임신, 출산과 관계없이 직장생활을 지속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퇴사 등 불이익을 겪는다. 200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미혼모의 95%가 ‘임신 이후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답했다. 이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미혼모라는 이유로 채용에서의 불이익도 크다고 적었다. 여성가족부는 ‘미혼임산부 및 미혼모에 대한 직장에서의 차별금지’를 추진 중이다. 비양육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청구하는 법안도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최씨는 미혼모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단체인 한국미혼모가족협회에서 대외정책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비슷한 처지의 양육 미혼모들이 함께 만든 사회적 기업 ‘용감한 컵케이크’에서 제빵 일을 돕다 얼마 전 그만뒀다. 최씨는 직장 탓에 집에 늦게 돌아오는 날도 많다. 준서는 그런 엄마를 두고 “왜 안 놀아주느냐.”며 울먹인다. 사회적 지원이 부실한 상황에서 미혼모가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울먹이던 준서는 “엄마는 왜 거북이처럼 느리게 일하냐.”고 묻는다. “빨리 일 끝내고 와서 놀아달라.”며 보채는 것이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김씨는 용감한 컵케이크를 떠나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 아름다운 재단에 창업 지원 자금을 신청했다 지난 4일 탈락의 고배를 마신 김씨는 “혼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감이 좀 떨어지긴 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포기하지는 않는다. 김씨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입을 수 있는 커플룩을 판매하는 의류 매장을 운영할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양육 미혼모뿐만 아니라 사실혼이나 동거관계에 있는 신가족들도 결혼을 기준으로 짜여진 사회 제도 속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사실혼·동거 관계 역시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비롯, 세제혜택과 상속 등 경제적인 부분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신혼부부 특별청약을 실시하는 보금자리주택은 혼인신고를 한 가족에게만 청약자격이 주어진다. 공공임대주택의 경우도 다자녀가구, 3세대 가구 등 대가족에게 우선권을 준다. 사실혼 관계라 해도 연말정산 소득공제에서도 부양가족에 대한 인적공제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편견과 차별로 엄격하게 대하기보다는 생활과 양육에 필요한 지원을 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다양한 가족 형태를 아우를 수 있는 제도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삼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사회연구실장은 “정부나 기성세대들은 ‘그렇게까지 지원해야 하나.’고 되묻는다.”면서 “조장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변화의 산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고 보호할 법·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럽과 북미 선진국은 혼외출생, 이혼, 비혼(非婚) 등 아이를 혼자 키우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을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받아들여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했다. 프랑스는 혼외출생이 절반 이상으로 늘어나자 2006년부터 법적부부의 출산과 혼외출산을 구별하는 규정을 폐지했다. 자녀를 양육하는 자체로 가족수당, 양육수당을 받고 출산·육아휴직 등의 혜택을 차별 없이 받는다. 변화순 팸라이프가정연구소 소장은 “프랑스는 정식부부보다 혼외출생에 대한 지원·혜택이 더 잘돼 있다.”면서 “그래서 결혼보다 동거가 급증하는 부작용이 초래됐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영국은 아동부양비와 양육수당, 교육유지수당 등 다양한 형태의 보조금과 바우처를 제공하고 있다. 미혼모들에게 주택·건강·부모교육·고용훈련 등을 제공하는 슈어스타트(Sure Start)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독일도 최저생계비·부모수당을 지급하며 모성보호법 등에 근거해 10대 미혼모의 교육권까지 철저히 보장하고 있다. 조은지·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문화마당] 정치란 무엇일까/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정치란 무엇일까/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올해는 누가 뭐래도 정치의 해다. 지난봄 19대 총선에 이어 이제 석 달 뒤 겨울이면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그래서인지 신문지상에서나 장삼이사가 모여 나누는 대화에서나 대선 관련 이야기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제 곧 대선 주자들이 결정되면, 대선 관련 정치 문제는 더욱더 이 땅을 달구며 겨울을 당황케 할 것이다. 정치란 무엇일까? 이 질문이 좀 무겁다면, “사랑이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라도 정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급증하는 요즘이다. 귀에 익은 공자님의 답을 먼저 들어보자. 어느 날 정치의 요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분히 갖추면 백성이 신뢰한다.”(논어 ‘안연’ 편)라고 짧게 답했다. 정치의 핵심을 식량·군사·신뢰 세 가지로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셋 가운데 중요한 정도에 따라 굳이 순서를 매겨야 한다면, 신뢰>식량>군사 순으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금으로 바꿔 본다면 신뢰·경제·국방 등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순위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공자와 맹자가 인(仁)과 덕(德)을 강조한 것도 결국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한, 곧 신뢰를 쌓으려는 방법이었다. 그런 신뢰를 형성하면, 굳이 군대를 무리하게 양성하지 않아도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게 유가의 가르침이었다. 나라를 꾸리는 데 군사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군사력(경찰력)을 우선하는 것은 하책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공맹(孔孟)을 줄줄 왼 조선의 양반 유학자들은 공자가 말한 저 세 가지 요체를 잘 실천했을까? 불행히도 그들은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잘한 게 없었다. 오히려 셋 모두 실패했다. 이른바 사림(士林)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16세기 후반에 백성은 내내 굶주렸고, 국방력은 허약해졌고, 조정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다 못해 땅을 파고 지하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양반이 장악한 조선왕조는 농민들에게 언제 한 번 일정한 토지를 분배한 적이 없으며, 노비 인구도 전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사림 양반들은 농장을 확대하고 노비들에게 경작하게 해, 도식(徒食)하며 부를 쌓았다. 양반들은 군대에도 안 가고, 군비를 위한 세금 납부도 거부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고도, 어느 사림에서도 ‘양반도 직접 무기를 들고 복무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백성의 신뢰를 얻기는커녕 불신만 키워갔다. 사림 양반들은 공자가 말한 세 가지를 제대로 수행하려 노력하다가 그만 시세를 잘못 만나 아쉽게 실패한 것이 아니다. 시종일관 자기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키려 몰두했기에 실패했다. 특히 자기들이 섬겨야 할 하늘이 낳은 적자, 곧 백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을 살찌웠다. 그들은 정치의 요체를 모두 저버린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유교 사회가 아니라 민주사회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요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시민 각자가 나름대로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공자의 뒤꿈치 때만도 못한 미미한 무명씨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의 버전으로 정치란 “억울함을 최소화해 주는 것”이라 풀이하고 싶다. 이는 공자가 말한 신뢰와도 상통한다. 사회정의나 공평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민주주의 정신과도 잘 맞는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에서부터 사회·경제 문제나 외교·국방 문제에서 억울한 일을 최소화하고 억울한 이들을 보듬어주려 애쓰는 대통령이요, 그런 정부라면 다수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일은 여반장일 것이다. 요즘 대선의 계절을 맞아 온갖 정치적 미사여구가 난무한다. 그러나 달콤하고도 환상적인 공약에 이리저리 휩쓸리기보다는, 이런 신뢰의 중요성을 굳게 인식하고 뚜벅뚜벅 실천할 인물이 누굴까 공부하고 고민하는 게 이 땅의 정치문화 발전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길이 아닐까?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는 1896년 4월 15일 을미사변 관련 히로시마 재판소 결정서와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한 통의 문서를 보냈다. 그레이트하우스는 “올해 1월 20일에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결정서를 작성했는데, 그 결정서 내용 중 전하의 행동이 많이 언급되었다.”며 “전하와 관련된 내용을 해명하실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아직도 이 문제가 세간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하니 참기 어려운 일이며 한스럽기 그지없다. 작년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잠잠히 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오랫동안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1820~1899)과 명성황후(1851~1895)의 대립구도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1895년 10월 8일(양력) 새벽 1시. 전 군부고문 오카모토는 마포에서 일본 영사관보 호리구치 등을 대동하고 숨가쁘게 달려 흥선대원군의 저택에 도착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그의 아들 이재면과 손자 이준용은 낯설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했다. 오카모토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의관을 갖추고 일본이 의도한 것처럼 경복궁으로 순순히 향했다. 하지만 오카모토의 기록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그날 새벽 1시에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지체했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외교관을 포함한 외국인 대부분은 을미사변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첨예한 대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을미사변 주도와 관련되어 당대 주한 외교관 및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판단이 상호 엇갈렸다. 동일한 자료조차도 흥선대원군의 주도설과 관련되어 모순된 기록의 사례가 많았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프랑스 주교 뮈텔, 주한 미국공사대리 알렌, 주한 영국총영사 힐리어,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은 흥선대원군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인의 경복궁 침입,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으로의 출발 지체, 일본공사관의 문서위조 등 흥선대원군을 배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분리되면서 정치현안에 개입하지도 못했다. 흥선대원군을 배후로 내세운 세력에 대한 혐의가 자연스럽게 일본공사관으로 옮겨졌다. ●명성황후, 고종의 충실한 조언자 명성황후 민씨는 1866년 왕비로 선택되어 운현궁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명성왕후에게는 4남 1녀가 있었지만 1874년에 태어난 왕세자(순종)만이 생존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조언자와 후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종은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며 명성황후의 판단력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명성황후는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명성황후의 행록(行錄)에는 “임오군란 당시 왕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했다.”고 기록돼 있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했으며 “이 무리들을 죽이면 자연히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왕비가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를 보호하였는데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가지 않았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결단력 및 정치적 결집력을 높이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연결된 임오군란 등 혁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후 잠시 상실한 권력을 다시 회복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치밀한 을미사변 조작 기존 일본에서는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기피했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실 정황에 대해서 을미사변과 관련된 인물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등의 기록을 참고했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 당일에 관한 행적을 매우 소략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들의 기록은 철저하게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구도로 부각시켰다. 최근 소설가 쓰노다 후사코는 을미사변 관련 일본 외무대신 무쓰의 의혹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명성황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여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에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사건 초기 주한 일본공사관은 여론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 대원군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대원군을 음모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책임자로 희생시킨다면 을미사변에 관련된 자국의 중요인물을 보호할 수 있고,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이미 미우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을미사변 이후 수습방안 중 사건의 책임자로 대원군을 설정했다. 그래서 스기무라는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4개조의 밀약까지 동의한 것으로 기술했다. ●명성황후를 향한 죽음의 그림자 사건이 발생한 10월 7일 밤 궁궐에서는 민영준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잔칫날 명성황후는 자신의 측근인 민영준의 기용, 훈련대의 해산 등으로 주도권이 다시 왕실로 집중되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그날 밤 그녀는 궁녀들과 함께 궁궐 후원으로 달구경을 나갔다. 대궐 내부에는 정변을 예측하는 여러 징후가 있었다. 1895년 9월 초 백작 이노우에는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왕족이나 혹 다른 조선 사람이 역모를 꾀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에서 군사의 힘으로 왕실을 보호하여 국가의 평안함을 보전한다.”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특히 명성황후는 정변이 발생하면 오히려 대궐이 안전하다는 농상공부협판 정병하의 주장을 믿었다. 왕실의 신뢰를 받아 재정을 도맡았던 정병하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를 보호코자 함인 줄로 아옵나니, 의심하실 바가 없사온즉, 피하여 나가시지 마옵소서.”라며 명성황후의 피신을 막았다. 대궐에서 성대한 잔치가 끝나자 새벽녘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곤령전의 전각문 북쪽의 작은 난간(干)”을 산책했다. 그런데 고종과 왕비는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대궐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속히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그날 왕비는 궁궐 내에서 침입자에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궁궐 밖으로 도피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왕비는 침입자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선택과 침묵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 당일 왜 경복궁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첫째, 1880년대부터 대립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1894년 9월에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삼국간섭 이후 정국을 주도한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흥선대원군은 1895년 4월 ‘이준용 역모사건’ 당시 특별법원의 심리 기간 중 강력하게 항의했고, 5월 이준용이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당하자 교동도까지 방문하려고 시도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기무라는 이러한 손자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애착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스기무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만약 흥선대원군이 4개조 약속 초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준용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고 흥선대원군을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일본 자객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손자 이준용을 위협하자 일정한 타협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과의 결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을미사변 당일 오카모토가 새벽 1시에 찾아왔지만 흥선대원군은 새벽 3시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고심했고, 그 후 침묵을 선택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생의 불행을 겪게 되었더라도 적어도 침묵할 줄 알아야만 한다. 대원군은 최소한 불행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위화도 회군 없었다면 이성계와 고려 왕조는?

    우리가 역사를 얘기할 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부질없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가정을 떠올리면서 은근히 흥미를 돋운다. 하지만, 배울 점이 없지는 않다. 이모저모로 가정해 봐야만 역사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고 앞으로 닥칠 유사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높아질 것이다.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끔 되돌아보는 사람이 미래의 인생을 더 잘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역사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고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한다. 신간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김종성 지음, 지식의숲 펴냄)는 바로 이런 맥락에 의해 쓰인 책이다. 다시 말해 ‘반전’을 키워드로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살펴보고 있다. 반전이 없었다면 벌어졌을 가상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반전’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한국사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반전’을 통해 바뀐 역사와 인물의 이야기에서 기지와 전략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에 발생한 30가지의 사건을 놓고 각각의 사건이 전혀 다른 결론으로 종결됐다면 역사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추리한다. 예를 들어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이켜 왕조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어떻게 됐을까. 또 고려왕조는 어떻게 됐을까. 이러한 점을 추리해나가다 보면 순간의 선택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한다. 퇴계 이황은 공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와 정치 사이의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그런 까닭에 신진세력인 사림파가 구세력인 훈구파를 제거하고 새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중전 자리를 지켰다면 백 년 뒤의 정약용이 18년 유배라는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목 또한 눈길을 끈다. 변절의 대명사로 알려진 신숙주가 사실은 조선 전기의 태평성대를 이룬 인물이라는 것, 수양대군이 아니었어도 단종은 결국 어린 나이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라는 주장 등은 ‘가정’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역사적 진실을 다루고 있다. 남성과 권력자만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비(非)권력자도 역사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례도 보여준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이리저리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유도한다. 1만5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위안부’증거 이렇게 많은데…간교한 日

    ‘위안부’증거 이렇게 많은데…간교한 日

    일본은 전·현직 총리까지 나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나타낸 한·일 간 공식문서가 없다.”며 식민지 시대의 반인권적 범죄행위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공식문서’ 운운하는 일본 정부는 역사적 진실에 두 눈을 가리고 있다. ‘공식문서’만이 증거라면, 일본 역사학자는 물론 한국, 타이완,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위안부 및 위안소 설치와 관련해 쏟아진 증거들은 다 무엇인가. 이들은 일본에 강력한 법적 책임을 촉구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지표들이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육군성 부관이 북지방면군 및 중지주둔군 참모장에 보낸 통첩에는 ‘위안부 모집 관계자 단속에서 군의 위신을 지키고 사회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게끔 인선을 적절히 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40년 9월 19일 일본 육군성 부관이 작성한 ‘군기진작대책’ 에서는 ‘위안 시설은 사기 진작, 군기강 유지, 범죄 및 성병 예방 등에 대한 영향이 크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교육지도 참고자료를 송부했다고 밝혔다. 일본 후생성이 해방 전후 위안부 신상기록을 담아 작성한 ‘유수명부’가 2005년 발견되기도 했다. 1994년 미군이 작성한 증인보고서에는 포로들이 증언한 일본군 위안부 모집·관리 실태가 담겨 있다. 일본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 군대위안부’를 책으로 써 ‘위안부는 없다’던 일본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한, 일본의 여성을 위한 평화기금에서는 ‘정부조사 종군위안부관계자료집성 전 5권’을 펴냈다. 한국 외교부는 1992년 7월 일본 정부의 조사를 근거로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 자료집을 냈고, 네덜란드 정부도 1994년 ‘일본 점령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인 여성에 대한 강제매춘’ 보고서를 발표했다. 쏟아지는 증거들 앞에서 물러설 곳이 없어진 일본은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명의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살아 있는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꽃 같은 청춘을 위안부로 살며 인권을 유린당한 네덜란드 여성 세마랑, 베트남의 랑송, 중국 구리인, 한국의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 등이다. 유엔 보고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국제적인 문제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의 여성폭력특별보고관 보고서가 1996년과 2003년 위안부 문제를 정식 거론한 이후 관련 유엔보고서만 10개나 된다. 유엔총회도 1992년을 시작으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해 왔다. 서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강제성을 나타내는 공식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본정부와 군대가 조직적으로 동원한 반인권적·반도덕적 행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면서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와 전후 배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소영·배경헌기자 symun@seoul.co.kr
  • [위안부 증거 있다] “日, 국제법 위반 면하려 軍·경찰 관여 철저히 숨겼다”

    [위안부 증거 있다] “日, 국제법 위반 면하려 軍·경찰 관여 철저히 숨겼다”

    “강제동원 증거가 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경찰이나 군인이 강제로 끌고 간 적은 없지 않으냐, 국가총동원령 같은 법에 따라 징집하듯 끌고 간 적은 없지 않으냐는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점령지가 아니라 식민지인 겁니다. 점령지라면 군대가 전면에 나서겠지만 식민지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식민지배 체제라는 큰 틀 아래에서 누가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고 위안부를 모집, 이송했느냐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맥락을 다 버린 채 ‘강제로 끌고 간 증거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진실을 찾아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겠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마침내 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 나왔다. 한국은 고노 담화마저 뒤집느냐며 벌집을 쑤신 분위기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 연구자인 윤명숙(50) 박사에게 물었다. 윤 박사는 2000년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일본의 군 위안소제도와 조선인 군위안부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에 관여해 왔고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위안부조사팀장을 맡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일본군 위안부 전문가로 꼽힌다. 윤 박사는 고노 담화 자체도 그리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지만 외교적 수사에 가려 일본 정부나 군이 주동했다는 부분은 모호하게 처리됐다고 본다. 잘못은 주로 민간에서 저질렀고 정부와 관련해서는 일부 불미스러운 사례가 있었다는 식의 언급으로 뭉뚱그려 놨다는 것이다. 윤 박사는 “1991년 일본 국회에서 위안부 관련 질문이 나왔을 때 당시 일본 정부 측 인사들의 답변 역시 총동원령 같은 명백한 법적 근거에 따라 시행된 게 아니니까 민간업자가 데려간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은 공창제를 법률적으로 인정했고 조선은 식민지로서 공창제가 연장된 것이 위안소라는 논리다. 윤 박사는 1938년 2월 23일 내무성 통첩과 3월 4일 육군성 통첩에 주목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선이 확대되면서 위안부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통첩에는 위안부를 모집하되 21세 이상 매춘 경험이 있는 자로 한정하고 매매나 유괴 같은 형태를 엄격히 단속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놓고서는 위안부 모집은 헌병과 경찰이 밀접하게 연관지어 하도록 하고, 민간업자가 징집하도록 하되 경찰의 관여 사실은 되도록 숨기도록 했다. 또 근거자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진행상황 보고 같은 것을 문서가 아니라 전화로 하라는 지침(1938년 11월 8일 내무성 경보국 자료)을 내렸다. 윤 박사는 이를 두고 “1921년에 체결된 ‘부인 및 아동에 매춘을 금지하는 국제조약’ 등 성매매에 관련된 5~6개의 국제법이 있는데 일제도 이를 어기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한 증거”라면서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위안부 모집 과정이 국제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명백한 행정자료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증거”라고 말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성매매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동의한 성인 여성만 합법적인 위안부라는 얘기다. 그렇게 못할 게 뻔한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의 민감성을 그 누구보다 일본이 더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극력 은폐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1942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외무성과 타이완총독부 외사부장이 주고받은 문건이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전선이 더욱 확대되자 타이완총독부에서 위안부들의 여권 문제를 본국에 문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여권 발급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군 증명서를 갖고 군용선을 이용하라.”고 답했다. 정식으로 여권을 발급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조선과 관련해서 이런 문건이 나오지 않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일왕 직할체제여서 위상이 높아 본국에 굳이 질의하지 않아도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데다, 국제법에 따른 문제 소지를 없애기 위해 철저하게 없앴을 것이라는 게 윤 박사의 추정이다. 윤 박사는 “일본의 경우 오히려 위안부 모집 초기에는 일본 내에서 위안부를 모으면서 현 단위로 몇명씩 할당한다는 내용이 문서로 남아 있다.”면서 “그러나 조선에 이런 자료가 없는데 그것 자체가 식민지배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위안부 증거’ 이렇게 많은데…

    ‘위안부 증거’ 이렇게 많은데…

    일본은 전·현직 총리까지 나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나타낸 한·일 간 공식문서가 없다.”며 식민지 시대의 반인권적 범죄행위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공식문서’ 운운하는 일본 정부는 역사적 진실에 두 눈을 가리고 있다. ‘공식문서’만이 증거라면, 일본 역사학자는 물론 한국, 타이완,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위안부 및 위안소 설치와 관련해 쏟아진 증거들은 다 무엇인가. 이들은 일본에 강력한 법적 책임을 촉구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지표들이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육군성 부관이 북지방면군 및 중지주둔군 참모장에 보낸 통첩에는 ‘위안부 모집 관계자 단속에서 군의 위신을 지키고 사회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게끔 인선을 적절히 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40년 9월 19일 일본 육군성 부관이 작성한 ‘군기진작대책’ 에서는 ‘위안 시설은 사기 진작, 군기강 유지, 범죄 및 성병 예방 등에 대한 영향이 크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교육지도 참고자료를 송부했다고 밝혔다. 일본 후생성이 해방 전후 위안부 신상기록을 담아 작성한 ‘유수명부’가 2005년 발견되기도 했다. 1994년 미군이 작성한 증인보고서에는 포로들이 증언한 일본군 위안부 모집·관리 실태가 담겨 있다. 일본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 군대위안부’를 책으로 써 ‘위안부는 없다’던 일본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한, 일본의 여성을 위한 평화기금에서는 ‘정부조사 종군위안부관계자료집성 전 5권’을 펴냈다. 한국 외교부는 1992년 7월 일본 정부의 조사를 근거로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 자료집을 냈고, 네덜란드 정부도 1994년 ‘일본 점령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인 여성에 대한 강제매춘’ 보고서를 발표했다. 쏟아지는 증거들 앞에서 물러설 곳이 없어진 일본은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명의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살아 있는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꽃 같은 청춘을 위안부로 살며 인권을 유린당한 네덜란드 여성 세마랑, 베트남의 랑송, 중국 구리인, 한국의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 등이다. 유엔 보고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국제적인 문제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의 여성폭력특별보고관 보고서가 1996년과 2003년 위안부 문제를 정식 거론한 이후 관련 유엔보고서만 10개나 된다. 유엔총회도 1992년을 시작으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해 왔다. 서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강제성을 나타내는 공식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본정부와 군대가 조직적으로 동원한 반인권적·반도덕적 행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면서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와 전후 배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소영·배경헌기자 symun@seoul.co.kr
  • 곽경택 감독 “장편으로 찍고 싶던 내 졸업작품이니 세트 비용 꾸러 다니면서도 버텼지”

    곽경택 감독 “장편으로 찍고 싶던 내 졸업작품이니 세트 비용 꾸러 다니면서도 버텼지”

    1989년 부산 양정의 53사단 헌병대. 훗날 음악평론가와 영화감독이 된 강헌(50)과 곽경택(46)은 군대 선후임으로 이곳에서 만났다. 현역들에게 구박받는 ‘18방’(18개월 복무 방위)의 동병상련, 문화·예술에 대한 공감대로 둘은 퇴근 후 부산 시장통을 돌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히 의사가 돼야 하는 줄 알고 의대(고신대)에 들어갔지만, 해부학 수업을 듣고 회의를 느꼈던 곽경택은 제대 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CF 연출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해 보는 게 좋겠다.”는 영화운동 조직 ‘장산곶매’ 출신 강헌의 꾐(?)에 진로를 틀었다. 23년이 흘렀다. 중견 감독이 된 곽경택이 10번째 장편 ‘미운 오리 새끼’(30일 개봉)를 내놓았다. 1987년 부산 헌병대에서 ‘빡센’ 군생활을 하는 어리바리한 ‘6방’(6개월 방위) 전낙만의 얘기다. 고문을 당해 실성한 아버지 때문에 낙만은 단기사병으로 입대한다. 이발, 사진,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는 ‘잡병’ 신세. 하지만 기원을 하는 할아버지를 둔 덕에 바둑 실력은 끝내 준다. 헌병대장의 총애를 받지만,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신임 중대장은 방위도 영창 근무를 서라고 지시한다. 현역 고참들도 낙만을 못 괴롭혀 안달이다. 말년을 무사히 버텨 어머니가 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는 낙만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낙만의 모습에는 곽경택과 강헌의 ‘18방’ 경험이 촘촘하게 녹아 있다. “에피소드는 대부분 사실이다. 내가 이발병이고, 헌이 형은 바둑병이었다. 이발을 하다가 실수로 다른 병사의 귓불을 자르고, 그걸 닭 모이로 준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영창 근무를 섰고, 헌이 형은 영창에 끌려갔다. 낙만이 영창에서 만난 ‘행자’ ‘여호와’ 캐릭터 또한 모두 실재 인물이다.” 곽 감독의 작품 대부분은 거친 (부산) 사내들의 우정과 배신, 사랑 이야기다. ‘미운 오리 새끼’는 ‘똥개’(2003)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웃음을 준다. 하지만 제작 과정은 악전고투였다. 순제작비는 20억원 수준. 그나마 감독과 팀장급 스태프들은 개런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쓴 돈은 10억원 남짓이다. 250억원이 투입된 그의 작품 ‘태풍’(2005)과 비교하면 10분의1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의 모든 투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했다. 서울 독산동 철거를 앞둔 군부대의 촬영 허가를 받아 놓은 터라 급해진 곽 감독은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부터 했다. 그는 “나중에 찍으려면 세트 비용만 10억원은 들 텐데 도리가 없었다. 며칠 찍다가 3000만~1억원씩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다니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이 워낙 조금 들어갔기 때문에 크게 안 터져도 되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목표가 100만명 이하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웃었다(손익분기점은 60만명 정도다). 왜 꼭 지금이어야 했을까. “10억원짜리 세트에 시나리오까지 다 된 상황이다. ‘기적의 오디션’(곽 감독이 멘토로 출연한 SBS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만난 혈기왕성한 친구들이 있었다. (뉴욕대 졸업 작품 ‘영창이야기’를) 언젠가 장편으로 만들 거라면 지금이어야만 한다고 자신을 몰아갔다.”고 했다. 출연진 중 낙만 아버지를 연기한 오달수를 빼면 대부분 ‘기적의 오디션’ 출신이다. 주인공 낙만 역의 김준구는 물론 악질 중대장 역의 개그우먼 조혜련 동생 조지환, 행자 역의 문원주, 권하사 역의 박혜선 등은 ‘기적의 오디션’에서 찾아낸 원석이다. 장동건(‘친구’ ‘태풍’)·정우성(‘똥개’)·권상우(‘통증’) 등 충무로의 미남 배우들을 유독 아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기자분이 처지 바꿔 생각해 봐라. 어리바리한 낙만 역을 장동건·권상우가 하겠나. 하하하. 신인 배우만 쓰는 게 부담은 됐지만, 철저하게 캐릭터에 맞춰 이미지 캐스팅을 하고 실수만 줄이면 된다고 봤다.”는 게 곽 감독의 설명이다. 이어 “신인 배우들은 고맙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고맙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조지환을 본 순간 살만 25㎏쯤 찌우면 내 기억 속 중대장과 딱 매치가 되겠더라.”고 했다. 전작 ‘통증’은 곽 감독이 처음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로 연출한 작품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남자(권상우)와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정려원)의 사랑 등 지금껏 그의 작품들에서 크게 벗어나 더욱 주목받았다. 평단은 곽 감독의 변신에 호의적이었는데 흥행(최종 관객 70만명)은 신통치 않았다. “나도 충격받았다. ‘친구’ 이후 쉬지 않고 영화를 찍은 건 크게 까먹지 않거나 본전은 했기 때문인데 100만명을 못 넘길 줄은 몰랐다.” 최근 1200만 관객을 넘어선 ‘도둑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 법했다. ‘친구’는 2001년 820만 관객(공식 통계는 서울 267만명)을 동원했다. 200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가 본격화된 걸 감안하면 요즘 1000만을 훌쩍 웃도는 기록인 셈. ‘친구’를 넘고 싶은 욕심은 없는 걸까. “이제 포기했다. 하하하. 흥행은 영화만 잘 찍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배급 상황, 사회 분위기, 경쟁작과의 함수관계 등이 맞아떨어져야 나온다. 강형철(‘과속스캔들’ ‘써니’)이나 최동훈(‘타짜’ ‘전우치’ ‘도둑들’)은 대단한 감독이다.” 문득 궁금했다. 의사의 길을 외면한 걸 후회한 적은 없을까. 그는 “안철수 박사처럼 졸업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했다면 모르겠는데, 중도에 그만둔 건 부끄럽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아닌가. (미스터리 의학영화) ‘닥터K’ 망하고 나서 잠깐 후회한 것도 같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게이 알려지면 전역해야 하나요”

    “게이 알려지면 전역해야 하나요”

    “군대에서 게이(남성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죠. 전역조치를 당하나요.” 입대를 앞둔 남성들은 누구나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남성 동성애자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성을 강요하는 군대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사회보다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지난 25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청소년수련원. 시민단체인 군 인권센터가 게이 예비입영자들을 위해 이틀간 인권캠프를 마련했다. 2010년에 이어 두 번째 행사로, 입대를 앞둔 남성 동성애자들이 군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 상황에 대비하고 입대 전 그들의 고민을 나누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서울, 대전, 대구 등 전국에서 온 참가자 23명은 사는 곳이나 하는 일은 각각 달랐지만 고민은 같았다. ‘과연 내가 군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수업이 시작되자 고민이 쏟아져 나왔다.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동료를 좋아하게 될까 봐 걱정이다.” 등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질문들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군 생활 중 자신의 성 정체성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알려진다고 한들 누구 하나 도움을 줄 리 없는 데다 따돌림이나 괴롭힘만 심해질 것 같아서다. 실제 지난 2006년 한 동성애자가 부대 내 상담 과정에서 커밍아웃(성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곧 부대 전체에 퍼졌다. 심지어는 “동성애자임을 입증하고 싶으면 동성과 성관계하는 장면을 찍어 오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황당하지만 군의 현실이다. 이날 캠프에는 이미 병역을 마친 5명의 예비역들도 후배들에게 군 생활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함께했다. 올 초에 전역한 A(22)씨는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을 하면서 관심사병으로 분류돼 부적응자 캠프에 참석해야 하는 등 쉽지 않은 군 생활을 했다.”면서 “혼자 참아내기 어려운 일인 만큼 부대 안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다음 달 초 입대를 앞둔 B(20)씨는 “뜻밖에 많은 정보를 얻게 돼 군 생활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면서 “함께 고민을 나눌 친구들을 만난 것도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C(21)씨는 “군대에서도 우리 같은 성 소수자를 동료로 받아 줄 수 있는 교육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군대에서 동성 성행위를 뜻하는 ‘계간’(鷄姦)을 하게 되면 군 형법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된다. 군기문란과 전투력에 부정적인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게 국방부측 설명이다. 글 사진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장석홍 공무원연금公 신임 본부장

    공무원연금공단은 상임이사 겸 고객업무본부장에 장석홍 전 행정안전부 재난안전실장을 27일 자로 임명한다고 24일 밝혔다. 신임 장 본부장은 육군본부 정책실장과 육군대 총장 등을 역임한 뒤 전역해 행안부 재난안전실장으로 행정경험을 쌓았다.
  • [미주통신] 헨리 왕자, 광란의 나체파티 망신살

    군 복무 중인 영국의 헨리 왕자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광란의 나체 파티를 벌이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돼 망신살이 뻗치고 있다고 미국 언론들이 2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 연예 전문 언론 TMZ 웹사이트에 폭로된 이 나체 사진은 헨리 왕자(27)가 자신의 중요부위를 손으로 가린 채 서 있으며 그의 뒤에 또 다른 나체 여성이 보이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는 이 사진 뿐만 아니라 이 여성과의 성관계 장면을 연상시키는 사진 등 라스베이거스 고급 호텔에 투숙한 헨리 왕자가 나체 파티를 즐기는 적나라한 장면들이 공개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헨리 왕자는 현재 영국 군대에 복무 중이나 개인적인 휴가를 얻어 미모의 여성들과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 최고급 호텔에 투숙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영국 왕실은 공식 반응을 내어 놓고 있지는 않으나, 이 같은 사실이 영국 국민에게도 알려지자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다. 일부의 동정론도 있기는 하나, 한 해에만 왕실 경호를 위해 쓰이는 돈이 2천억원이 훨씬 넘는다는 등 비난 여론이 봇물이 터지듯 형성되고 있다. 영국 언론은 헨리 왕자가 영국으로 귀환 즉시 군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점을 이유로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니엘 김 미국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을지연습 軍 “北도발땐 상응표적 응징”

    을지연습 軍 “北도발땐 상응표적 응징”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에 돌입한 군 당국이 북한의 포격 도발에 대한 응징 타격 범위와 수준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군 수뇌부의 잇단 대북 강경 대응 발언과 맞물려 주목된다. 특히 한·미 군 당국은 오는 24일까지로 예정된 1부 연습을 통해 전시 전환 절차를 숙달하고 북한군이 수도권에 포격을 가하는 상황을 가정해 대응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21일 “한·미 연합 대비 태세와 절차를 철저히 훈련하되 적이 도발하면 도발 원점과 지원, 지휘 세력은 물론 상응 표적에 대해서도 강력히 응징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 당국이 제시한 ‘상응 표적’은 도발 원점이 불분명해 1대1 대응 표적이 없을 때 우리 표적과 유사한 적의 표적을 의미한다. 도발 원점이 불분명한 미사일 등의 공격에 대해서는 비슷한 수준의 중요 시설을 공격하겠다는 개념이다. 군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도발했을 때 지금까지는 정전협정 교전규칙에 맞춰 별도의 유엔사 승인 절차가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자위권 차원에서 북한 도발에 즉시 대응할 수 있다.”며 “이는 도발 원점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해 추가 도발 의지를 꺾어 놓겠다는 경고의 의미”라고 밝혔다. 군의 이 같은 방침은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교전할 때는 같은 화기와 같은 수량으로 비례적으로 대응한다는 유엔사 전시 교전수칙을 넘는 것이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 등 군 수뇌부는 그동안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의 교훈을 토대로 적이 공격하면 도발 원점뿐만 아니라 이를 지원하는 세력까지 응징할 것을 주문하며 대응 수위를 높여 왔다. 김 장관은 2010년 12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북한 지역 내 공격 원점까지 자위권 행사 범위라고 강조했다. 올해 3월 연평도 해병부대 방문 시에는 “적 사격량의 10배까지도 대응 사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한편 북한군 판문점대표부는 이날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이 벌이는 합동군사연습은 정전협정에 대한 가장 노골적이며 엄중한 파괴 행위”라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모든 행동은 상상할 수 없는 무자비한 물리적 행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방을 이어 갔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군대 성희롱 심각” 누드로 고발한 스페인 여군

    미모의 여군이 군대 내 성희롱을 고발하며 옷을 벗었다. 절대 미모와 폭로로 주목을 받고 있는 화제의 인물은 스페인의 여군 메리트셀 마르티네스. 과감하게 누드모델로 변신한 그는 “군대에 남녀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입대한 마르티네스는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 육군본부 차량관리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꿈을 이뤘다는 기쁨도 잠깐. 거친 남자들과 함께 근무하는 건 금세 고통이 됐다. 잘 보관했던 속옷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남자숙소에서 발견되는 등 수난이 시작됐다. “자연 가슴이 맞냐? 수술한 것 아니냐?”는 성희롱 농담을 듣는 건 다반사였다. 마르티네스는 “여자라고 희롱을 받고 있다.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직속 상관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군에 대한 성희롱 폭로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마르티네스는 재판까지 받게 됐다. 판결은 24일(현지시간) 나온다. 억울한 심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스페인의 성인잡지 인터뷰에 표지모델로 데뷔했다. 사회의 이목을 끌면서 군대 내 남녀평등이란 완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군대와 실체는 완전히 다르다.”며 “군인이 되면 기본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특히 여자는 더욱 그렇다.”고 군대 내 성차별을 고발했다. 누드사진을 찍은 게 더 큰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에 마르티네스는 “나는 나”라며 “누드를 찍었다고 내게 돌팔매질을 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고 잘라말했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밝고 명랑한 건 유치해서 극사실 애니메이션 만듭니다…‘창’ 감독 연상호

    밝고 명랑한 건 유치해서 극사실 애니메이션 만듭니다…‘창’ 감독 연상호

    학원폭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계급문제를 건드린 19금(禁) 잔혹 스릴러 ‘돼지의 왕’(①)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대 화제작이었다. 1억 5000만원의 저예산에 한 번,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넷팩(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무비콜라주상을 휩쓸었다. 지난 5월 프랑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도 초청받았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 이후 시드니영화제와 뉴욕 아시안필름 페스티벌을 찍고, 지난 9일 몬트리올 판타지아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부문상인 사토시 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첫 장편임을 감안하면 믿기지 않는 성과다. 여권에 출입국 도장 잉크가 마를 사이도 없을 텐데 연상호(34) 감독은 중편 애니메이션 ‘창’(②)을 뚝딱 만들었다. 오는 23·26일 CINDI(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에서 공개되는 ‘창’은 최전방 철책근무를 서는 군부대에서의 구타사건을 다뤘다. 동시에 사이비 종교를 다룬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③)의 대본을 끝냈다. ‘돼지의 왕’을 본 관객이라면 두 작품 모두 연상호답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 할리우드나 일본, 한국 애니메이션 어디에도 없던 소재를 어떤 실사영화보다 사실적인 터치로 표현하는 연 감독을 지난 16일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다짜고짜 일벌레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쉬지 않고 일을 맡아야 회사(스튜디오 다다쇼)가 굴러간다.”며 웃었다. “‘돼지의 왕’을 끝내고서 ‘사이비’까지 몇 달이 남더라. 예전에 내가 글을 쓰고 (‘습지 생태보고서’의) 최규석 작가가 그림을 그려 옴니버스 인권만화책에 실었던 ‘창’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29분짜리 ‘창’은 자전적 이야기다. 군기가 ‘빡센’ 최전방 철책근무 부대에 ‘관심사병’ 홍영수 이병이 들어온다. 어느 날 홍 이병이 잔머리를 굴려 군장을 꾸린 사실이 적발돼 분대 전체가 얼차려를 받는다. 분대장 정철민 병장은 홧김에 구타를 하고, 홍 이병은 자살을 시도한다. 정 병장은 연 감독의 과거다. “제대 한 달 전까지 구보 인솔하고 군가 똑바로 안 부른다고 윽박지르고 그랬다. 그런데 고문관 이등병이 들어오면서 틀어졌다. 아무것도 안 하려던 친구에게 폭력이 가해졌고, 얼마 뒤 이등병은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비로소 내가 틀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 최전방 철책, 구타, 자살시도… 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알리려고 관객은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끼기 마련. 하지만 ‘창’은 반대다. 군대에 다녀온 남성관객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정 병장에게 공감할지도 모른다. 연 감독은 “기존에 인권을 말하는 방식에 불만이 있었다.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가 싫었다. 거대 조직 혹은 시스템 속에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때론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했다. 이어 “보통 인권 영화를 보는 사람은 자신은 착하다고 착각한다. 그런 면을 뒤집어 보고 싶었다. 당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또 관객이 가해자가 되는 기분을 느껴 보게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 사건으로 연 감독은 보름 동안 군 감옥에 갔다.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조직 논리에 파묻힌 내가 선이라고 생각한 게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또 조직에 충성한다고 해서 개인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했다. 군대(‘창’)와 학교(‘돼지의 왕’)란 배경은 다르다. 하지만 계급(혹은 권력)과 폭력, 먹이사슬의 하부구조인 약자끼리의 반목 등 감독의 주제의식은 여전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권선징악이 명확한 구조보다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불분명한 딜레마 상황에 끌렸다.”면서 “밝고 명랑한 애니메이션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하록선장(‘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애꾸눈 선장)의 극장판 ‘아르카디호의 비밀’이나 ‘에어리어88’, ‘아키라’, ‘공각기동대’ 같은 작품을 좋아했다.”며 웃었다. # 박찬욱·봉준호 정도가 아니면 파리 목숨… 아직은 실사보다 애니가 좋아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의 꿈을 키웠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은 뒷전. 2학년 때 “‘야메’(뒷거래)로 (애니메이션 제작용) 프로그램을 익혀 가면서” 옥탑방과 친구 집 차고 등을 전전하며 습작을 했다. 데뷔작인 클레이(점토) 애니메이션 ‘D의 과대망상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막 치료를 끝낸 환자가 보는 창밖 풍경’은 이처럼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만들었다. 졸업 후 1년쯤 월급쟁이 애니메이터로 일하다 2004년 애니메이션 창작집단 스튜디오 다다쇼를 설립했다. ‘돼지의 왕’의 성공으로 9억원짜리 프로젝트가 된 ‘사이비’는 연상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방점을 찍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왕’은 (표현수위가) 센 작품이란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사이비’는 내가 봐도 세다. 잔혹한 진실을 일깨우는 쓰레기 같은 남자와 현실을 호도한 채 점점 나아질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목사가 대립한다. 어떤 쪽에 감정을 이입할지 관객들이 헷갈릴 거다. 심지어 정의가 이기는데 그 결말을 받아들이기 당혹스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약점으로 곧잘 스토리텔링(이야기)의 부재가 꼽힌다. 하지만 연 감독 작품은 실사로 더 어울린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서사가 탄탄하다. 그는 “실사영화를 찍자는 제안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박찬욱·봉준호 감독 정도가 아니면 영화 한 편을 온전히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애니메이션에는 대체할 수 있는 감독이 많지 않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만, 내가 지금 실사영화를 찍는다면 투자·제작자에 휘둘리는 파리 목숨 신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애니메이션이 좋다. 실사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 감독이 꿈꾸는 큰 그림이 궁금했다. “(일본 만화가) 이토 준지의 작품 같은 공포·좀비물 등 장르영화를 하고 싶다. 사회파 감독으로 이미지가 굳을까 걱정이다. 소재를 제한받을 수도 있다. 지금도 내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작품을 한다면 투자·제작자들은 ‘연상호가 변했어? 왜 그런 걸 해’라고 나올 텐데 그건 싫다는 얘기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자율적 군대문화에 연장복무 결심했죠”

    “자율적 군대문화에 연장복무 결심했죠”

    “처음 입대했을 때는 빨리 제대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군대 생활이 자율적인 문화로 바뀌어 연장복무도 할 만합니다.” 이공계 인재의 요람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 병사가 전문하사로 변신해 화제다. 화제의 주인공은 육군 8사단에서 중대 행정업무를 맡은 한재현(23)하사. 육군은 19일 한 하사가 일반병으로 복무한 다음 지난달 14일 전문하사로 임관했다고 밝혔다. 군은 병 복무기간이 단축됨에 따라 숙련병 확보를 위해 병장 전역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8개월까지 부사관으로 연장 복무토록 하는 전문하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KAIST 기계공학과 07학번인 한 하사는 4학년 1학기를 마친 2010년 10월 입대했으나 전역을 두 달 앞둔 지난 5월 전문하사에 지원했다. 그는 내년 1월 13일까지 연장복무를 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경영학 석사(MBA) 유학을 꿈꾸던 한 하사가 군에 더 남기로 결심한 이유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동기생활관 제도 등 달라진 병영문화 때문이다. 한 하사는 “사단에서 지난해 7월부터 입대 동기들끼리 생활관을 쓰도록 해 일과를 마치면 눈치를 봐야 했던 선임병도 없다.”며 “영어와 전공 공부 등을 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좋은 환경”이라고 말했다. 한 하사는 “처음에는 KAIST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주위의 기대가 높았지만 여러 면에서 서툴기만 했다.”며 “이제 군 생활이 할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한때 유학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으나 매달 130여만원씩 받는 월급을 모아 유학 비용을 충당할 계획이다. 그는 “최소 복무기간인 6개월을 마치면 연장 복무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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