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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 일본의 국기·국가법

    어느 나라나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가지고 있다.국내외 행사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이며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높이는 구심점이다.올림픽 시상식에서 국기가 게양되면서 국가가 울러퍼지는 순간의 감격이 없다면올림픽 금메달의 가치는 아마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일본 중의원이 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와 기미가요(君が代)를 국기와 국가로 정한 ‘국기·국가법’을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켜 주변국들의 우려와경계를 사고 있다.주권 국가가 자기네 국기와 국가를 정하는 일에 다른 나라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공식 인정이 단순한 국기와 국가 제정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가 배어 있다.히노마루를 앞세우고 기미가요를 부르며 일본이 벌였던 침략전쟁의 희생자인 아시아 이웃국가들에는 일본 군국주의가 자행했던 ‘과거사’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특히 최근 일본의 급속한 군사대국화 행보와 궤를 같이하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공식화는 ‘군국일본’의부활을 걱정하게 만든다. ‘천황의 치세는 천대 만대로/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가사로 천황 치세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기미가요는 천황·국가 절대주의를 강조하고 있다.천황은 곧 일본이고 천황폐하와 일본을 위해 일본국민들은 기꺼이 전장에서 몸을 바쳤다.패전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자연히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보아 일본 내에서도 공식행사에서의 게양과 제창을 자제해 왔다.군국 일본이 저지른 침략행위와 인간성 말살에 대한자성과 사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 국기·국가법 법제화는 지난 2월 교육위원회의 국기게양·국가제창 지시와교사들의 반발 사이에서 고민하던 한 고교교장의 자살로 빠르게 추진됐다.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관행적으로 사용돼 왔으나 명확한 규정이 없어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 법제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그러나 전국교원노조인 일교조(日敎組)와 사회단체들은 법제화 강행이 침략전쟁기였던 메이지·쇼와(昭和)시대로의 복귀라며 적극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변 국가들이 경계하고 우려하는 것은 결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법제화가 아니다.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급격한 군사대국화와 우경화(右傾化)다.이웃 나라들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일본의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日열도 총체적 보수화 急流/보수화 움직임들

    일본 열도가 총체적 보수화로 치닫고 있다.곧 탄생할 보수 3당 연립정권,개헌을 다룰 헌법조사회 설치,국기(國旗) 국가(國歌) 법제화 추진 등 보수 우경화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이런 보수화 흐름은 일본내 어떤 세력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형성,21세기 초 일본을 규정짓고 해석하는주요한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일본의 보수화가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지만 최근의 급격한 보수화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내각 때 단초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민 사민 사키가케 연정이 무너지고 98년 여름 총선에서 집권 자민당이 경제실정(失政)으로 참패하면서 ‘헤쳐 모여’가 가속화됐다. 참의원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자민당은 ‘체질’이 비슷한 자유 공명등 야당을 끌어들여 안정적 국회운영을 노렸다.첫 열매가 올 1월 자민 자유연정이었다.늦어도 올 가을전까지는 공명당이 가세한 3당 연립정권이 출범할 것 같다. 새 연정은 중·참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보수연정은 장기적으로는 제1야당 민주당과의 연합까지 상정하는 ‘보수대연합’의 구도를 그리고 있다.보수를 견제할 대칭축으로는 군소야당인 사민 공산당 밖에는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보수화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풀이가 있으나 거품경제 붕괴후 시작된 10년가까운 장기 불황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불황이 보수화를 촉진하고 있는 특이한 경우다. 불안한 미래에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기성 정치,특히 이념정당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게다가 유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속속내놓는 자민당의 인기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의 지지도 추이는 보수화의 일단을 엿볼 수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98년 7월말 출범 당시 바닥세였던 내각 지지율은 보수연정을 추진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20%대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은 최근 50% 전후로 뛰어올랐다. 정치의 이런 보수화는 다른 한면으로는 국가의 통합을 급속히 강화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국회통과 이후 일본 정부는 자위대의운신을 넓히는데 더욱 애쓰고 있다.일장기(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국기 국가 추진,교과서 검정기준강화,개헌론 등은 보수화와 더불어 나타난 움직임이다. 민족주의를 바탕에 깐 국가체제강화는 국수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중국 등 주변국들이 경계하는 점도 바로 이런 대목이다. 20세기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보수화를 고리로 국가체제강화,군사대국화로연결돼 자행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주변국들의 우려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보수화 움직임들 일본의 보수화 움직임과 관련해 올해 눈에 띄는 일들이 유난히 많았다.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가능케한 미·일안보협력지침이 제정됐다.헌법조사회 설치법안이 중의원에서 통과됐고 국기와 국가 법안도 국회 심의가 진행중이다. [헌법조사회 설치]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 현행 ‘평화헌법’을 개정,교전권을 갖도록 한다는게 개헌론의 골자.일본 헌법은 미 군정시절인 46년제정됐다. 자민당은 55년 ‘자주성을 갖춘 헌법개정’을 정강(政綱)으로 채택,개헌논의를 주도해왔다.내년 국회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되면 45년만에 자민당 뜻대로 개헌논의가 공식화되는 셈이다. 초점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9조의 개정.주변국들이 개헌론에 끊임없이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바로 교전권을 가지려는 일본의 속내에 대한의심 때문이다. [국기·국가 법안] 6월11일 일본 정부는 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하는 법안을 각의에서 통과시켰다.일본교원노조등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심볼로 삼으려는 저의가 있다”고 맹반발했다.일장기와 기미가요는과거 군국주의 일본에게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종전직후 미 군정이 일장기 게양을 허가제로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여당인 자민 자유당이 법안에 찬성하고 있고 민주 공명당도 동의하고 있어 심의만 끝나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 문화분야] 극우 사관이 공공연히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대표적이다.지금의 역사책이 미국의 강요로 기술됐다며 ‘새로운 사관’에 서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미 군정하전범재판을‘날조극’이라고 비판한다.96년 결성돼 지난해와 올해 부쩍 회원을 늘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쟁을 미화하고 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는 책자들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이나 4월 지방선거에서 도쿄도지사에 당선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선전포고,NO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경제’ 등은 일본의 우경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황성기기자
  • [현상과 전망 21세기 미술](1)현실로 이어지는 사라예보의

    대한매일은 새로운 미술시리즈 ‘현상과 전망,21세기 미술’을 3일부터 주1회 연재합니다.시리즈는 세계 현대미술의 현상과 흐름,에피소드를 미래지향적인 시각에서 다룰 예정입니다.정준모(큐레이터·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박규형(갤러리 현대 큐레이터)·송미령(한솔문화재단 선임학예연구원)·이원일씨(성곡미술관 수석큐레이터)가 집필합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인류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기 위해 희망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이는 20세기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20세기를 살아내야 했던 우리들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호전적이었던 사람들로 기록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금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피해와 충격을 주었고,이런 탓에 20세기는 폭력의 시대요 야만의 세기라고단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20세기 비극의 역사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비롯되었다.1차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페르디난트의 암살은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던 가브릴로 프린키프에 의해 감행되었다.1차세계대전의 배경에는 당시 민중을 현혹시켰던위정자들의 범슬라브주의라 불리는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라는 원초적 야만이자리하고 있다.이러한 야만성은 1차세계대전에 이어 역사의 이면으로 잠복해 들었다가 보스니아 사라예보 내전으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부상하였고,이어 최근 휴전으로 끝난 유고와의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 사라예보에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전세계 미술인들의 열망이 모여 소담한 결실을 이뤘다.지난달 25일 문을 연 사라예보현대미술관이 바로 그것이다.인류의 과욕에 의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전쟁으로 심신이 지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할 목적으로,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을 만큼 소중한 미술문화유산들을 모아 사라예보에 현대미술관을 연 것이다. 유네스코의 재정적 뒷받침과 미술인들의 여망,소장자와 후원가들의 열의가한데 모여 자리를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이후 1998년까지 이탈리아의 밀라노 스파지오 우마노 현대미술센터와 프라토에 위치한 루이지 페치 현대미술센터,류불리아나의 현대갤러리,사라예보의 오발라 아트센터,베니스 비엔날레,그리고 빈의 루드비히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지며 전시를 기획,참여작가들로부터 작품들을 기증받거나 구입하여 대규모 컬렉션을 이루었다.이것이 모두 옮겨져 사라예보현대미술관으로 개관됐다. 각기 다른 민족과 종교를 가진 전세계 미술인들이 모여 이룬 이 미술관은소장품이 먼저 확보되고 미술관이 개관하는 수순으로 이루어졌다.이것은 금세기 마지막이자 가장 의미있는 현대미술의 보고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이 미술관에 영구소장 전시될 작품들은 이제 그들의 안착지인 불모의 땅 사라예보에 도착하여 문화의 꽃으로,현대미술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를 잡았다.이 미술관의 개관전시는 지난달 25일 시작돼 9월 7일까지 70여일간 이어지며 우리나라 작가로는 이우환·윤영석·김순기·이불·한명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사라예보현대미술관의 개관을 보면서 미술인들의 인류애,사람에 대한 사랑을 만날 수 있고,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어 반갑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 20세기의 우리의 과오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을까.전쟁과 평화,이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다. 정준모(큐레이터,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화제의 책>

    [월스트리트 누구를…] 루디거 돈부시 미국 MIT경제학 교수는 “국제통화기금은 미국이 해외 경제정책을 추진하는데 쓰는 장난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 등을 통해 주식시장이 금융과 기업을 통제하는 미국식주식시장 모델을 아시아와 제3세계,옛 사회주의국가 등에 강권해 왔다. 이러한 ‘세계 금융의 미국화’는 세계 금융시장이 미국 금융시장의 메카인월스트리트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더그 헨우드의 ‘월스트리트 누구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나’는 우리에게도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월스트리트의 메커니즘과 금융논리를 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이주명 옮김,사계절 1만3,000원).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에서 경제전문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미국의 금융자본주의라고 전제하고 주식·채권·파생상품·뮤추얼펀드 등의 금융상품에서부터 증권시장과 기업의 관계,금융과 실물경제,미국정부의 거시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월스트리트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편제국 일본] 일본 아이치대학의 구라하시 마사나오 교수가 펴낸 ‘숨겨온 국가범죄를 파헤친다!-아편제국 일본’은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적 마약범죄를 고발한다.(박강 옮김,지식산업사 1만원). “일본은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아편을 활용했으며 식민지였던 한국·대만·만주 등에서 아편을 통한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다. 일본은 1919년 이후 한반도의 마약재배 면적을 크게 늘리고 교묘한 방법을이용해 아편습관이 없던 조선인들을 중독자로 만들어 갔다”고 지은이는 강조했다. 그는 1932년 일본 내무성 발표는 조선인의 마약중독자가 4,044명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70여만명에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산한다. 19세기 후반부터 70년대까지의 일본 마약정책 흐름을 통시적으로 파헤친 이 책은 국제법상 범죄행위인 일본의 마약 제조·밀매행위는 패전후 진행된 도쿄 전범재판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은폐돼 왔다고 쓰고 있다.
  • 월북작가 함세덕 ‘무의도 기행’ 무대에

    월북 극작가 함세덕의 ‘무의도 기행’이 22일까지 국립 중앙극장 소극장무대에 오른다.그의 작품은 88년 해금조치 이후 간혹 무대에 올랐는데 이번 것은 해방 이후 처음 공연된다.사실주의적 극본에 어울리게 ‘풍자 연극의 대가’ 김석만이 연출을 맡았다.91년 극단 연우무대 대표로 있을 때 ‘동승’을 연출한 바 있어 두번째 만남이다. “가급적 원작의 내용에 충실,토씨나 지문 하나도 그대로 살렸다”면서 “다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함세덕을 잠깐 등장시켜 그의 눈으로 작품을 해설하게 했다”고 말한다. 김석만은 함세덕의 작품에 ‘성장이 멈춘 어린이’가 자주 등장하는데 주목한다.군국주의의 억압에 신음하는 조국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이 터져 일본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의 해주인근의 섬.주인공 천명(이상직)이 찢어질듯한 가난에 눌려 작가(원작엔 트럭기사)의 꿈을 피우지 못하고 고기잡으러 갔다가 죽는다는 애절한 내용이다. 아름다운 우리 말과 당시의 풍속도가 잘 그려져 있다.장민호·백성희 등 출연.가벼움과 광속으로 치닫는 세태에 잠시 쉬고 싶은 곳을 찾는 이들에게 괜찮은 무대가 될듯.(02)2274-1173
  • [대한광장] 밀레니엄 유감

    요사이 시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밀레니엄(millenium)’이다.정부는 ‘새천년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국가 천년대계의 비전을 설계하고,각 지방자치단체도 적지 않은 예산으로 다채로운 행사와 사업을 준비하고있다. 그런데 최근 밀레니엄이 상업성과 결합해 이벤트 중심으로 흐르는 조짐이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관(官)은 비슷비슷한 일회성 행사에 귀한 예산을 중복투자하고,민간에는 ‘밀레니엄 베이비’라는 웃지 못할 기념아(記念兒) 경쟁까지 일어나고 있다.그야말로 1000년이란 문명적 엄숙함은 역설적이게도 1년,아니 순간을 위한 상업성 이벤트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업성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새천년을 맞이하는 철학의 문제이다.1세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1900년 1월1일자 세계 주요신문에는 과학과 문명을 근거로 20세기에 대한 찬미와 낙관적 전망이 줄을 이었다.그리하여 스탠퍼드대학의 조단 총장은 ‘20세기에의 초대’에서 “20세기인(人)은 희망인”이라규정하고 “그는 세계를,세계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일본의 군국주의와 2차세계대전,그리고 긴 냉전이 뒤따랐다.즉 20세기 서양의 현실은 ‘끔찍한 세기’ 또는 ‘극단의 시기’였다. 동양과 아시아의 20세기는 더욱 처참했다.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미국과 베트남 전쟁,중국과 베트남 전쟁,캄푸치아와 베트남 전쟁,이란과 이라크 전쟁,쿠웨이트·미국과 이라크 전쟁,구 소련 중앙아시아 여러나라의 민족분규,최근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 등 많은 전쟁과 수난이줄을 이었다.특히 한반도에는 일본의 한국 병탄과 잔악한 식민통치,미·소에 의한 분단과 한국전쟁,남북의 냉전 등,다른 어떤 곳보다 잔인하였다. IMF사태 전까지만 해도 21세기에 대한 전망은 20세기보다 더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러한 진단은 한편으로는 정보통신혁명 등 생산력의 확장,냉전체제의 해소와 자유주의의 승리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등에 기인한 것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현재가 단지 세기적인 전환이 아니라 그 10배인 밀레니엄이라는 마술 때문이기도 하다. 밀레니엄은 흔히 새 것에 대한 찬미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거느리고 다닌다.그러나 묵은 현실을 갈아 엎지 않는 한 미래는 새 것이 되지 않는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바로 묵은 현실의 과제,즉 1~2년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세기를 넘기면서까지 여전한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새 것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 모태인 현실의 역사적 과제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면,그것은 범죄행위요 사기행각이다. 아마도 21세기 한반도에선 20세기에 당면한 과제들이 여전한 화두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분단과 통일,민주주의의 확대,주변 4강과 한반도 문제 등이여전히 중요한 개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아니 새천년을 여는 21세기 처음10년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역동적으로 표면화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19세기말,그리고 불과 몇년 전,미래에 대한 부박(浮薄)한 기대가 바로 미래에의 몽매를 불러일으켰음을 직시하자. 2세기 전에 태어난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노여워하지 말라’고 노래했다.‘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이기에.그가 노래하고자 한 것은 미래에 대한 부박한 기대가 아니다.아마도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중력(重力)은 없다는 것,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낙관의 신념으로 현실을 개조하자는 것이다.그가 차르(Tsar)를 타도하려는 혁명가 데카브리스트(Dekabrist)였듯이. [都珍淳 창원대 교수·한국사]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국정개혁 보고-金대통령이 공정위서 밝힌 ‘경제개혁론’

    29일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金大中대통령은 재벌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채찍론(論)’등 종전에 비해 명쾌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눈길을 끌었다. ▒사랑의 매는 불가피하다 金대통령은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정부개입의 타당성 논란과 관련,유력 시장경제주의자들의 입을 빌어 정식으로 입장을 피력했다.金대통령은 “울펜손 세계은행 총재와 98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 교수 등이 최근 한국정부의 재벌 구조조정 개입을 정당하다고 평가했다”면서 “시장경제 육성을 위해서는 사랑의 채찍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또 “자유방임경제의 시조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조차 독과점과 불공정행위를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고 소개했다. ▒맹목적인 국산품 애용 시대는 갔다 金대통령은 국제경쟁력이 없는 기업은문을 닫아야 한다고 못박았다.나아가 “지금은 국산품 애용이 애국인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했다.金대통령은 “국산품인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경쟁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면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개혁을 하든지 퇴출당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金대통령은 우리가 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색다른 논거를 제시했다. 그는 “20세기를 돌아볼 때 민주주의는 군국주의 같은 우익독재,공산주의 같은 좌익독재와 싸워 이겼고 시장경제는 우익의 통제경제,좌익의 계획경제 등과 싸워 살아남았다”며 합리적인 대안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정위 토론내용金大中대통령은 공정위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20여분간 보고받은 뒤 30여분간 토론을 벌였다. 金대통령은 먼저 “기업들의 개혁상황을 설명해달라”고 田允喆위원장에게물었다.田위원장은 “지난해 구조조정의 기본 틀이 마련된 이후 기업관행이많이 바뀌고 있다”며 “그러나 6대 이하 그룹은 구조조정이 상당히 진행된반면 5대 그룹은 오히려 경제력집중이 심화된 측면이 있다”고 답했다. 金대통령은 申光湜 KDI 연구위원에게 “5대 그룹으로 경제력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구했다.申위원은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외국인투자를 확대하고 소액주주 집단소송제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金대통령은 이어 “입찰담합이나 하도급비리는 국고의손실을 초래하는데다 부실공사의 근원이 되는 등 국민들을 2중 3중으로 고통받게 한다”고 관심을 표명했다.李漢億 하도급국장은 “대기업들의 우월적지위 남용행위에 대해 적극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21세기는 소비자시대”라고 전제,“소비자의 역할을 확대할만한 정책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에 姜大衡 소비자보호국장은 “12개 소비자보호단체와 정기적 협의를 통해 생생한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라며 “이들을 모니터 요원으로 지명,불공정행위에 대한 감시망으로도 활용할계획”이라고 설명했다. 金相淵 ■금감위 토론내용금감위 국정개혁보고회의는 李憲宰위원장의 보고에 이어 金大中대통령이 실무자들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金대통령은 “부실금융기관 구조조정자금으로 책정된 64조원이 부족하다는얘기가 있다”며 금감위의견해와 대책을 물었다.尹源培 금감위 부위원장은“금융구조조정자금 64조원은 경제여건이 나쁜 상태를 감안,책정한 것으로올들어 경제가 호전돼 64조원으로도 대외신인도를 해치지 않고 금융구조조정을 끝낼 수 있다”고 답변했다.尹부위원장은 부실채권 매입자금으로 책정된32조5,000억원 중 남는 부분을 대한생명과 제일·서울은행의 추가로 발생하는 부실에 충당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金대통령은 이어 “금융기관이 부동산 담보만 믿고 대출해주는 낙후된 금융기법에 의존한 것이 금융부실의 원인”이라며 신용대출 관행을 정착시켜 나가기 위한 방안을 물었다.李晶載 금감원 부원장은 그동안 신용대출이 미진한 요인을 분석했으며,각 은행이 자체개혁을 추진하는 단계에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金대통령은 또 “워크아웃은 기업부실을 빨리 수습해 기업과 은행부실을 동시에 막고자 하는 것인데 경제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 기업들이 이를 회피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金相勳 금감원 부원장은 “주채권은행을 통해 해당기업과 협의하면서 독려하고 있고 신동방그룹 계열 4개사와고려산업이 추가로 워크아웃에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金均美■금융감독위 보고요지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29일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5대 그룹의 자산재평가와 현물출자 등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연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축소하도록 분기별로 이행상황을 철저히 점검하겠다고 강조했다. ▒금융·기업구조조정 경영·금융관행 혁신 등 소프트웨어를 개선하고 신금융지식인을 육성,금융기관 및 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생산성을 높여나간다. 부실 생보사 구조조정에 역점을 두되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수·합병방식 등을 활용하고 대한생명과 같은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생보사에 대한 감독·감시를 강화한다. 금융구조조정 재원 64조원 중 부실채권 매입 재원 12조6,000억원,증자지원재원 8조1,000억원 등 20조7,000억원이 남았지만 공적자금 부족에 대비하고정부출자지분의 회수전략을 세우겠다. 은행들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이행사항을 보다 철저히 점검한다.중소기업에대해 대출금 일괄만기연장 조치를 지양하고 전담역제도를 활성화하며 대출금 출자전환에 힘쓰겠다. ▒금융제도·관행 혁신 금융기관 내부의 의사결정기능과 집행기능을 분리하고 사외이사제를 활성화하겠다.신용정보시스템을 확충하고 합리적인 신용평가모델을 개발한다.어음·수표 담보제공관행 및 연대보증제도를 개선,신용대출관행을 정착시켜 나간다. ▒금융감독기능의 선진화 소비자보호 및 피해구제 기능을 강화하고 금융그룹에 대한 연결감독체계를 구축한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亞 경쟁적 軍費증강 평화 ‘위협’

    냉전 종식 이후 1조달러가 넘던 전세계의 국방비가 8,000억달러 선으로 떨어졌지만 ‘21세기의 주역’임을 자부하는 아시아는 오히려 군사비 지출을늘리고 있다.역내 국가들끼리의 불신과 갈등을 반영하는 불길한 확장이고 증강이다.현재 아시아의 연간 국방비는 2,000억달러.한반도나 화약고 중동을제외하고도 북한 미사일 위협에 놓인 일본,중국과 타이완,인도와 파키스탄등 적대적 관계의 많은 나라들이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을 아낌없이 국방비에할애하고있다.평화와 번영의 다음 세기를 위협하는 이들의 현실을 점검한다. [中-臺灣] 중국과 타이완(臺灣)의 양안(兩岸)관계에 긴장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치열한 군비확장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중국이 크루즈미사일을 장착한 킬로급 공격 잠수함 4척을 러시아에 주문하자,타이완은 미국의 첨단 구축함 구매계획을발표했으며 미국·일본이 추진하는 TMD(전역 미사일방어)체제 참여를 위해동분서주하고 있다. 타이완을 향해 200기의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 중국이 선도한 군비증강에는 그밖에도 러시아로부터 구입한 수호이 27 50대,SS-N-22 대함(對艦) 미사일을 장착한 소브레미니급 구축함,킬로급 공격 잠수함 4척 등도 있다.또 사정거리 5,000㎞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둥펑(東風)31 20기도 생산,배치했다. 미그-29와 미그-30의 중간형 섬-10전투기 합작생산도 러시아와 합의,공군전투력의 2배 증강은 시간문제로 보인다.해군력도 전략목표를 수정하면서까지 크게 강화했다.작전 반경을 연안에서 원양으로 넓혔으며 후속 조치로 오는 2005년까지 함재기 40대를 갖춘 4만∼5만t급 중형 항공모함을 자체 건조하기로 했다. 89년 이후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늘려온 중국의 99년 공식 국방예산은 약 126억달러로 전년보다 12.7%나 늘어난 것이다.하지만 실제총액은 3배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중국 군사력은 현재 병력 280만명,전투기 6,160대,전함수는 1,080척에 이른다. 타이완도 이에 맞서 즉각 미국의 이지스급 첨단 구축함 4척 구매계획을 발표했다.특히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지시로 TMD체제 동참을 천명했다.그러나 중국의 압력으로 참여가 여의치 못할 경우에 대비,독자적 방공망과 조기경보체제 구축도 추진하고 있다.패트리어트 미사일 3개 포대를 창설,타이베이(臺北) 일원에 방공망을 설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향후 3년간 10억달러를 투입해 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인 PAC 3도 사들일예정이다.해병대에 해당하는 육전대를 포함해 37만명의 병력을 보유한 타이완은 전투기 470대,전함은 390척을 거느리고 있다. 金奎煥 khkim@ [印-파키스탄] 지난해 5월 인도가 포크란 사막에 핵 투하를 필두로 세차례 핵실험을 감행하자 2주후에는 파키스탄이 여섯차례 핵실험으로 응수,온 세계 앞에 핵보유선언을 했다. 이들의 핵보유는 양국관계가 일촉즉발 상태이고 서남아 지역이 군비경쟁의파급효과가 큰 곳이여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카슈미르를 둘러싸고 50년 넘게 반목해온 양국은 세차례 전쟁으로 이미 100만명 이상이 희생됐고지금도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의 핵보유가 곧바로 이란,이라크,리비아 등 인근 핵 야심국들로의 확산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현재 핵무기 이외 병력 면에서 인도는 육군 98만명을 비롯 118만명의 대군을 보유하고 있다.파키스탄은 육군 52만명 등 59만명에 달한다. 다행히 양국관계의 폭발성은 최근 양국정상의 버스외교로 새국면을 맞고 있다.10년만에 처음으로 지난달 20일 바지파이 인도총리가 파키스탄 샤리프 총리를 찾아가 만났고 양국 총리는 여러 신뢰구축조치를 비롯,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서명을 약속했다. 그러나 당장 양국의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군부 강경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한달도 못돼 인도에서 중거리 미사일 실험 재개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孫靜淑 jssohn@daehanmail.com [일본] 일본 방위청은 최근 대공,대함 방어 공격 능력을 갖춘 이지스함 1척(1조6천억원 상당)과 공중급유기 1대를 도입키로 하고 2001년부터 시작되는 5개년‘중기 방위력정비 계획’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앞서 일본은 지난해 3월 유사시 경항공모함으로 개조 가능한 8,900t의 다목적 수송함과 초계잠수함,콩고급 이지스함 등 4척을 취역시키고 조기경보기 2대 도입 등 방위력 질적 강화에 큰 힘을 쏟아왔다.76년부터 5년단위로 첨단무기 중심의 고품질 방위력 건설을 추진해온 일본이 지난해부터 부쩍 서두르는 모습이다. 일본 군사력이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든지는 이미 오래.규모면에서는 중국,한국,북한에 비해 열세지만 질적으로는 이미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까지 올려놓았다.육상자위대의 경우 13개 사단에 탱크 1,100대를,해상자위대는 잠수함 16척과 함정 80여척,항공기 110대를,항공자위대는 각종 항공기 600여대를 갖추고 있다. 이미 배치된 이지스함도 16개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으며 사거리100㎞이상의 함대함,함대공 미사일과 대잠능력을 갖추고 있다.일본 디젤 잠수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순항미사일을 발사능력을 갖췄다.게다가 공중조기경보기 (AWACS) E-767은 800㎞내 300개의 피·아군기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일본은 명실공히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다는분석이다. 이같은 일본의 방위력 강화는 지난해 8월말 북한이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타격능력을 입증한데다 미국이 아시아 지역안보에서의 일본역할을 강하게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본은 미국이 추진하는 TMD 연구비로 800만달러를배정했다. 이에 발맞춰 각종 법률도 정비하고 있다.96년 미·일 안보공동선언과 97년미·일 신방위지침에 따라 지난해 4월 ‘주변사태법안’,‘자위대법 개정안’ 등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자민당은 한술 더 떠 최근 미사일 선제공격이 가능한 대응책을 마련,법안 제출을 시도하고 있다.이에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하는 아시아인들이 많다.朴希駿 pnb@
  • [오늘의 눈] 日 ‘國歌’와 교장의 자살-황성기 도쿄 특파원

    일본 정부가 기미가요를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부르도록 의무화한 것은 10년 전인 89년의 일이다. 집권 자민당 보수성향의 의원들이 문부성에 호된 압력을 넣어서였다.이런강제 덕에 기미가요 제창률은 97년 전국 고등학교 평균 80%에 이를 만큼 쑥쑥 올라갔다. 그러나 ‘강제’에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기미가요 부르기를 거부하는 학생과 강제의 논리에 반대하는 교직원들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다. 졸업,입학철만 되면 부르지 않겠다는 쪽과 부르게 하겠다는 행정당국과의실랑이는 봄날의 연례행사처럼 일본 신문 사회면을 조그맣게 장식해왔다. 지난달 28일 히로시마(廣島) 한 고교교장의 자살도 기미가요를 둘러싼 실랑이 와중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다.교육위원회의 강압적 명령과 거부하는 교직원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민하던 58세의 교장. 히로시마에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기미가요를 부르라’는 직무명령이 떨어진 것은 이곳 기미가요 제창률이 18%로 유난히 낮았기 때문이다.2차대전 종전무렵 원폭투하 경험을 갖고 있는 히로시마는 ‘전쟁의 기억’이나 ‘군국주의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다. 천황을 받들고 인간의 평등을 부정하는 기미가요를 부를 수 없다는 교사들입장은 히로시마의 이런 특성에서 찾아진다.교사들의 단호한 입장과 부르게하지 않으면 평교사로 강등시키거나 사표를 받겠다는 교육위의 압력 사이에서 교장은 죽음을 선택했다. ‘천황의 세월이 천대 팔천대에’로 시작되는 기미가요는 일제가 총칼을 앞세워 애국가를 대신하는 ‘국가’(國歌)로 강제했다.거부하면 숱한 고초를치러야 했다.당시 한국인에겐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는 침략의 노래,수탈의 깃발이었던 셈이다. 기미가요 등이 떳떳이 국가,국기(國旗)로 되지 않은 이유도 어두운 역사를지닌 노래와 깃발로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거부감이 남아 있어서다.교장자살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추진키로 한 국가,국기의 법제화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주목된다. marry01@
  • [사설]대북정책 일관성 견지돼야

    金大中대통령은 4일 새해들어 처음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튼튼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한 대북포용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거듭 천명했다.이러한 대북정책의 큰 틀 안에서 정부는 올해 중점적으로 지향할 안보정책의 목표와 기본방향으로 한반도 평화와 안정 증진,남북간 화해·협력 추구,대북정책에 대한 국제적 지지와 공조체제 강화를 제시했다. 정부의 이같은 안보정책 기본방향은 한반도 정세를 새롭게 점검하고 안보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을 제고시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지난해 정부의대북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거듭된 대남 도발로 국민적 우려가 불식되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할때 민·관·군 통합방위태세 확립은 불가피한 선택이라 할수 있겠다.따라서 정부는 안보태세 강화조치와 함께 내실있는 성과를 목표로 일관성있는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정부는 올해 이산가족 문제와 대북 농업개발 지원을 중점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한 252당국간 대화272를 강력 추진키로 했다. 남북이안고 있는 현안을 함께 해결하는 상호주의 성과를 의식한 정책선택으로 평가된다. 북한이 1일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강성대국을 위한 농업혁명의 중요성을 천명한 점을 감안할때 올해 비료와 농약,농업용 비닐,씨감자·옥수수 등의 대북 농업지원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남북당국간 대화가 성사될 가능성이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올해 가장 큰 현안인 북한 금창리 지하 핵 의혹시설 사찰 및 중·장거리 미사일 문제와 관련,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을 강조한 것은 파국을피하기 위한 순리의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정부 대북 포용정책의 기본목표는 남북관계개선,교류확대,한반도 평화유지와 궁극적으로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데 있는 만큼 대북정책의 일관성 견지는 바람직하다.물론 올해 북한 내부의 강경노선과 군국주의 성향이 더욱 강화되는 가운데 한반도 안보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할때 지속적인 대북 포용정책은 상당한 한계와 시련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내부상황이 어렵고 불확실할수록 대북 포용정책은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북한 보수강성세력들의 대남 강경노선을 제어할 수 있는 명분을제공하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지난해 정부가 채찍(stick)을쓰지 않음으로써 북한이 종전에 비해 보다 많이 개방됐다는 교훈에서 대북포용정책의 성과가 입증된 만큼 정부는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 오늘의 눈-日자유당의 위험한 흥정

    정치란 예나 지금이나 또 나라를 불문하고 명분과 실리,막전과 막후 거래의 산물인 것 같다.명분을 놓고 싸우는 무대 뒤를 살펴보면 실리를 빼앗고 뺏 기는 이해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최근 일본의 정치상황도 예외가 아닌 듯 싶다.무대의 주인공은 집권 자민당 과 자유당.중원 참원 통털어 367석을 가진 거대 자민당과 47석의 미니 야당 인 자유당의 연립정권 수립을 둘러싼 지루한 싸움은 관객에겐 잘 보이지 않 는 무대 뒤 흥정을 읽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양당간 최대 걸림돌은 자위대의 유엔군 참여문제다.자유당 오자와 이치로( 小澤一郞)당수는 헌법을 개정하더라도 자위대를 유엔군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자민당 지도부는 ‘평화헌법’의 해석을 바꾸면서까지 자유 당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11월19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와 오자와 당수간 연정합의 이후 자 유당은 줄곧 ‘자위대’문제를 고집해왔다.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연정 합의마저 깰 수 있다고 자민당을 겁주고 있다. 그러나 ‘자위대 파병’이 연정합의를 깰 만큼의 긴급하고도 핵심적인 사항 인가 묻는다면 두 당 모두에게 ‘아니올시다’이다.자유당이 내세우는 ‘자 위대’문제는 흥정용 카드에 가깝다. 연정을 수립하게 되면 내년 봄 치를 통합지방선거 및 총선에 같은 선거구에 서 제각각 후보를 내세울 수 없다.두 당의 후보중 당선 가능성이 높은 쪽으 로 단일화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군소정당인 자유당으로서는 선거구 조정은 사활이 달린 문제다.내년초 있을 개각 때 각료 지분을 더 많이 확보 하려는 것도 자유당이 떠들며 내세우지 못하는 속내다. 한국 중국 등 주변국에 일본 헌법 개정이나 해석변경은 군국주의 부활과 재 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정치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 주변국을 자극해가면서까지 ‘위험한 흥정’을 하는 일본의 정 치판에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marry01@daehanmaeil.com [ marry@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굄돌-체벌과 교권

    아이들과 교사들의 갈등이 심상치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체벌당한 학생이 교사를 고발하고,경찰이 학교에까지 들어와 교사를 신문한다.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나.아이들은 아이들대로,교사들은 교사들대로 할 말 이 많은 것 같다.사안별로 성격이 다르겠지만,전체적인 문제는 교사들이 아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사실인 것같다.‘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고 한탄해 보아야 이미 아무 소용도 없다.권위로 반항을 잠재 울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무책임한 문화환경 때문에 교사들이 이중고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학교 바깥에서 십대는 오히려 귀하신 몸이다.대중문화 매체들은 십대에게 아부하느라 정신이 없다.아이들은 이미 TV편성권을 장악 하고 있다.아이들의 머리는 커질대로 커졌다.그렇게 문화적으로 잔뜩 부풀려 진 정체성을 주입받은 아이들은 자아를 확립하기도 전에 벌써 자기가 무엇이 나 된듯한 착각에 빠진다.그런데 학교에 가면 재미없는 것만 가르친다.게다 가 정해진 틀에 우겨넣어지지 않는다고 밤낮으로 닦달이다.아이들이 선생님 말을 들어먹겠는가. 교육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몰가치하고 천박한 대중문화와 이미 시 대적 가치를 잃어버린 군국주의적 규율문화 사이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진정 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그 러려면,힘차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개혁 주체세력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이미 문제는 의식있는 교사 한사람 한사람이 외롭게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전교조의 축척된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그 런데 극우 성향의‘소신파’국회의원들 때문에 전교조 법안이 상정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마음이 답답하다. 김정란 시인·상지대교수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정부수립직후 판금시집(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5)

    ◎박문서의 ‘소백산’ 첫 수거조처/일·미를 우리민족 행복 파괴자로 상정/농촌·농민들의 고통 유독 돋보이게 노래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부터 50년 6.25까지 발간된 창작시집은 대략 60권 정도다.이중 1951년 관계당국에 의하여 월북자로 분류된 시인의 것이 10여권이고,문학애호가들이 이름쯤은 알 수 있는 시인이 30여명,나머지 20여명은 역사의 망각지대로 묻혀버린 시인들이다.80년대부터 열기가 붙었던 해방전후 시기의 문학사가 아직은 객관적인 검증조차 안된 채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출판사 대표는 투사시인 김상훈 이 무명의 대열속에 박문서(朴文緖)라는 시인이 있다.어쩌면 영원히 묻혀 버릴 수도 있는 이 시인을 주목하는 것은 그의 시집이 정부수립 이후 첫 판금 수거조처된 때문이다.김기림이 시집발간에 부치는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이 서정의 영토를 거창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아름다운 정서는 드디어 그것만으로는 지탱하기가 어려운 때가 왔었다… 자꾸만 가슴에 밀려오는 저 가두의 우렁찬 부르짖음을 어찌하랴? 시는 스스로 전에 없던 흥분을 가지고 이 잡답(雜沓)속에 뛰어들어서 거기 또 새로운 영토를 파헤쳐 갈 밖에 없었다.그러나 나는 옛날 시인은 아닙니다.꿈도 좋지만 그것만 노래할 수는 없습니다.그리해서 시인은 황활한 새시대의 몸부림 속에 스스로를 맡겨버렸던 것이다.이 시집의 주인이 걸어온 길이 또 그러하다’ 48년 11월15일 발간된 이 초라한 시집 ‘소백산’을 펴낸 곳은 백우사(白羽社)였다.바로 투사시인 김상훈(金尙勳)이 대표로 있었던 출판사인데,그 보름전인 10월30일에 김상훈 자신의 시집 ‘가족’을 펴낸 곳이다.판금에 압수조치가 내려진 것은 49년 1월22일로,2월10일 조벽암의 시집 ‘지열(地熱)’이 같은 조치를 받기 갓 스무날 전이다. 28편의 작품이 실린 이 시집은 우선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군국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8·15직후의 미군정을 그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다.시인 박문서는 “그러니 싸움의 즐거움이여/오늘 시인도 그렇다.싸움꾼이래야 한다”(‘윤리’)고 할만큼 치열한 투지를 불태운다.그가 비판대상으로 삼았던 상대는 침략이데올로기로 그는 일본과 미국을 우리 민족 행복의 파괴자로 상정했다.특히 농촌과 농민들의 고통을 유독 돋보이게 노래했던 점은 김상훈과 비슷하다.그러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이 시인은 ‘밤’이란 시를 이렇게 응축시킨다. 빛이 도무지/악마보다 무서워//어둠 속에서 다시/이불을 집어 쓴다.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죄를 지은 수인이냐//정녕 새날이 있어/옳고 그름이 갈라질 때//어느 그림 안에 무릎을 꿇고/나는 울어야 하나 윤동주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이런 시와 대조적인 또 한편의 시를 보자. 피도 살도 뼉다귀 마저/활활 불살워 집어 삼킨 뒤//이제야 하늘 드높이 휘날리는 깃발/깃발이 깃발이 어디냐고 찾던 벗들 (시 ‘깃발’의 첫부분) ○49년 2월 조벽암 ‘지열’도 판금 45년 8월17일부터 이 시집을 발간하던 당시까지 대격변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김기림의 지적처럼 “아름다운 주문을 배우기를 잊지 않았다…”.해방전후의 우리 시단은 관점에 따라선 황무지로도 비춰지겠지만 묻혀있는 시집들을 하나씩 발굴해 나가노라면 ‘소백산’같은 미학적 횡재도 가능하다.이제부터 문학사는 쓰여지지 않았던 작품을 찾아나서는 새 출발선으로 되돌아가는 일인지 모른다.
  • 그해 12월8일을 떠올려 보는 뜻은(박갑천 칼럼)

    1941년 12월8일의 목포 북교국민학교(초등학교) 교정. 눈발이 흩날린 아침이었다. 유난히 땅딸막한 일본인교장이 단상에서 무언가 힘주어 읽고 있었다. 내용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른바 ‘선전(宣戰)의 조서(詔書)’로서 미국과 영국한테 낸 일본제국주의의 도전장이었다. 그뒤로 죽 이어진 전시체제. 전학간 해남에서 국민학생들은 솔뿌리를 캐야 했다. 실제로 썼던 건지는 모르지만 전선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운동장 구석에는 귀신몰골의 솔뿌리가 쌓이고 시커먼 기름을 짜내곤 했다. 운동장은 식량증산이라는 이름아래 깡그리 파헤쳐져 밭으로 되면서 고구마가 심어졌다. 그 사이 어린 마음속에 심어놓은 가미카제(神風) 일본 필승의 신념. 지금도 몇십곡쯤 거뜬히 부를수 있을만큼 각종 군가(軍歌)등 승전의 노래를 가르쳐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놓은것이 그들의 가공할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세월은 흘러 그 당시 소년들은 노년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오늘의 소년들이 문화개방등 자유로워진 교류의 물결속에서 그날과는 달라졌다는 얼굴색의일본과 숨결을 마주하고 있다. 저들의 압제속에 있던때와 달리 대등한 관계 속이라는 상황이긴 해도 핍박받고 자란 세대에게는 피해의식이 앙금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 보수정치인의 경망한 발언에도 지나친 반응을 보이곤 한다. ‘추웠던 운동장’의 기억 때문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런저런 그동안의 행적으로 해서 ‘추웠던 운동장’세대들은 “당신들,그동안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나요”하고 묻고싶어질 때가 많다. 겉이 아니라 속을 헤아려보면서. 사실 ‘사과’한번 어디 속시원히 한일이 있는 그들이던가. 여기서 〈사기〉(서남이열전)에 나오는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말뜻을 생각해보게 된다. 한(漢)나라때 서남지방에 야랑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마을 몇개 합쳐 이루어진 정도의. 한나라 사신이 가자 그나라 왕이 묻는다. “우리나라와 당신 나라와 어느쪽이 더 큰가요”. 우물안 개구리만도 못한 물음이었지만 이 말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저지를 수 있는 허물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교훈이 된다. 정말로 우리는 일본의 속마음을 어느정도 짚어보고 있는 시점일까. 사무라이 영화도 곧 보게 될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그들 문물이 들어오는 것보다 그를 받아들이는 우리쪽 체질이 더 중요한 것. ‘운동장세대’에게는 아직도 한나라 사자와 야랑왕 같은 거리감이 남아있다.
  • 문화비평가 진중권씨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우익인사 비판서 눈길/박정희 추종자에게 풍자와 독설 대한민국 우익 개구리의 배를 해부했더니 썩은 내장들이 드러났다.국수주의,군국주의,전체주의,몽골 인종주의,아류 제국주의,변태적 낭만주의…. 일본에서 들여온 썩은 폐기물이다. 문화비평가 진중권씨가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소설가 이문열,이인화씨,종교인 박홍씨 등 평소 글이나 주장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해온 추종자들에게 풍자와 독설을 퍼부었다.책 제목도 조씨가 박정희에 대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맞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전2권·개마고원 펴냄)라고 지었다. 진씨는 우익인사들의 주장은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 자본주의로 덧칠되지만 실상을 벗겨보면 전체주의에 맥이 닿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이인화의 인간의 길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조갑제의 박정희 철학,개발독재론 등은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일제 군국주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진씨는 이들의 글이나 주장을 인용,우익들을 논박한다.이들의 논리로 이들의논리를 반박하는 이른바 텍스트 해체 전법이다. 이 충무공 정신은 화랑도의 이조적 중흥이다. 박정희의 말이다.이후 전국국민학교 교정에는 구리로 만든 이순신과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이 무더기로 세워졌다.진씨는 이승복 동상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가르치는 파시스트 광신의 상징이라면 이순신은 박정희가 민족의 태양이라고 가르치는 파시스트 국가주의 이념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조선일보가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 퍼붓고 있는 이념공세도 안보 상업주의에 기초한 수구세력의 결집과 김대중 정권의 개혁에 발목을 잡기 위해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며 조선일보와 일부 극우세력의 사상검증 요구는 명백한 ‘위헌’이며 자유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 美 외교력 약화·유럽 좌파지도자 등장/지구촌 多極化시대 돌입

    ◎잇단 정상회담… 견제·협력 외교 전술 선보여/美 중심 中·日 등 각축 ‘一超多强시대’ 지속될듯 【도쿄 黃性淇 특파원·金秀貞 기자】 21세기 다극화(多極化)시대를 향한 강대국들의 외교전략이 본격화되고 있다. ‘다극화’는 냉전체제 붕괴 이후 중국이 부상하면서 대두된 최대의 화두(話頭).최근 미국 외교력 약화와 유럽 좌파 지도자들의 등장으로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이달 내내 이어진 정상회담들과 일련의 외교 신경전은 지구촌이 국익 중심의 다극화 시대로 돌입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30일로 끝나는 중국과 일본의 정상회담은 서로와 미국 독주 견제를 위한 양국의 외교전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장쩌민(江澤民)중국 국가주석은 일본에 오기전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을 만나 21세기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확인했다.97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뒤 지난 6월엔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을 맞아 극진한 대우를 해준 중국이 다극적 국제역학 관계를 목표로 진력하고 있는 ‘견제와 협력’ 전술이다.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에서의 ‘불협화음’에도불구하고 처음으로 우호협력 관계임을 확인했다.중국은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을 비판,미·일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견제했고 일본은 가까워진 미·중 관계를 헤집고 들어선 효과를 봤다. 유럽의 움직임도 적극적이다.현안에 따라 ‘함께 또 따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이탈리아가 독일과 일본의 상임이사국 가입을 보장하는 미국의 안보리 확대개편안을 무산시킨 것처럼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도 협력과 견제는 이어진다 독일은 나토의 핵전략 수정을 주장,미국에 제동을 걸었다.영국의 조지 로버트슨 국방장관도 미국을 방문,일방적 군사행동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전문가들은 미국이 경제력과 국방면에서 초우위를 지속하고 있는 한 미국을 중심으로,러시아·유럽연합·일본·중국이 각축을 벌이는 일초다강(一超多强) 시대가 상당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 장쩌민의 인민복/李慶衡 논설위원(外言內言)

    일본을 방문중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6일 아키히토(明仁) 일황(日皇) 주최 궁중 만찬에서 ‘인민복’차림으로 참석해 일본측을 긴장케 했다.일본측은 중국측 관계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차림’에 대해 조심스럽게 타진했으나 “별 의미가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장주석은 28일 와세다대에서 “일본은 정확한 역사관으로 국민과 청년을 계도해야 하며 군국주의의 사조와 세력이 거듭 대두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했다. 사실 인민복은 1911년 청(淸)왕조를 거부하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을 건국한 중국혁명의 선도자 쑨원(孫文)이 처음 착용한 복장으로 그의 아호를 따 일명 중산복(中山服)이라고도 한다.그후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등샤오핑(鄧小平)등 중국지도자들은 물론 인민들도 즐겨 입었었다.반제국주의,사회주의혁명과 평등의 상징이었던 인민복은 최근 중국의 개방화와 함께 청바지를 선호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서서히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체험한 역사의 증인’이라고 자처한 장주석이 해외여행에서는 잘 입지 않던 인민복을 입은 것은 따지고 보면 와세다대 연설의 예고편이었다.국가지도자의 만찬복식은 이처럼 외교무대에서 무언의 웅변으로 작용한다. 진한 감청색의 인민복 차림으로 일황과 건배를 하는 장주석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우리 생활한복의 국제무대 진출을 생각해본다.세계적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 무슨 한복타령이냐 할지 몰라도 남북화해의 회담이나 모임에서 다함께 한복차림으로 만난다면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남쪽은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강조한 생활한복으로,북쪽은 고구려 냄새가 물씬 나는 복식을 입고 나온다면 그 만남의 절반은 성공할 것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한반도주변 4강이나 제3국인에게도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외교무대의 만찬이나 파티때도 정통한복이나 품위있는 생활한복 차림으로 나선다면 ‘한국의 메시지’를 말(言)이전에 먼저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江澤民,中·日 공동선언 서명 거부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을 방문중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26일 오후 정상회담을 갖고 ‘중·일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중국측은 그러나 공동선언에 서명을 거부해 두 나라 정상의 서명식은 이뤄지지 않았다.과거사 문제와 관련,중국측이 요구한 일본측의 사죄가 선언에 명기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장주석은 회담에서 “역사와 대만 문제는 중일관계의 근간으로 올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두나라 관계의 미래를 열 수 없다”고 말했다.또 미일 안보조약에 대만을 포함시킨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지적하고 “일본이 군사대국주의를 취하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일부에서 이와 정반대의 발언이 나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움직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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