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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 밀레니엄의 전개] 이어령·日가와카쓰 교수 특별대담(1)

    새 천년이 열렸다.대한매일은 새 천년의 벽두 이어령(李御寧) 새천년준비위원회위원장과 가와카쓰 헤이타(川勝平太)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교수의 특별대담을 통해 새 천년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와 21세기 세계의 문명흐름을 짚어본다.아울러 새 천년의 중핵이 될 한국 중국 일본의 관계도 전망해본다. ◆이어령위원장 새 천년을 맞으면서 한국과 일본은 매우 가깝고도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실감합니다.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근대화 서구화에 앞장섰고 또 민감했던 일본이지만 막상 시간의식에 있어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라 할 수 있는 서기(西紀)보다는 헤이세이(平成)란 연호를 더 많이 씁니다. 지식인들의 활동무대라 할 수 있는 서적의 발행 연도표시만 보아도 거의 헤이세이로 표시돼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문화관광부의 21세기 카운트다운 표지는 지금 제로를 가리키고 있는데 도쿄 신주쿠(新宿)의 표지판은 아직도 365일이 남아 있는 것으로 표시돼있습니다.물리적 시차는 없는데 문화적 시차는 이만큼 큽니다. 20세기초 서구에서는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0으로 하느냐 1로 하느냐의 논쟁이 있었고 영국의 1901년 주장에 맞서 독일의 빌헬름2세는 일방적으로 1900년을 20세기로 선언하고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하지만 현제 세계에서는 거의 모두가 21세기의 시작을 0을 기점으로 해 2000년에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일본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이른바 ‘일본특수론’ 혹은 요즘 새뮤얼 헌팅턴 등이 제기하고 있는 ‘일본 독자문명론’과도 상통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와카쓰 헤이타교수 기독교적 발상인 밀레니엄 같은 말은 ‘천대’(千代),‘천세’(千歲)처럼 일본에도 있습니다.천년전 유럽은 십자군 원정,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이슬람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천년전 일본도 중국 대륙문화를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500년전 유럽은 이슬람적 아시아로부터 자립을,일본은 중국적 아시아로부터 자립을 시작했습니다.그리고 200년전 마침내 유럽과 일본은 함께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는 ‘탈(脫)아시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지난 100년 유럽과 일본은 영향을 받았던 아시아 지역에 영향을 주는 위치가 됐습니다.문명의 역전(逆轉)이라 할만한 현상입니다. 저는 지난 천년 역사의 역동성을 보면서 동아시아는 독자적인 문명의 힘이 움직이고 있는 공간이라고 봅니다.현재,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은 잔뜩 긴장을 품고 있고,일본과 중국도 역시 그렇습니다.한반도는 그 중간에서 중·일 관계를 좌우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한국의 역할이 한층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위원장 밀레니엄이 기독교적 발상인 것은 사실입니다.그런데도 일본은 헤이세이가 아니라 바로 그 서기로 모든 컴퓨터를 움직이고 있습니다.그래서 일본도 예외없이 컴퓨터 인식오류인 Y2K 문제에 봉착했던게 아닙니까.새 천년의 과제에 있어서도 일본의 이같은 이중구조적 시차로 인해 아시아에도 많은 변수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때도 일본은 아시아가 치르는 홍역을 직접 앓지 않았습니다.그런면에서도 일본은 일찍이 탈아시아의 길을 걸었습니다.하지만일본은 경제적으로 독립해 중화(中華)의 질서에서 벗어나는데는 성공했고,문명의 축을 서구로 옮기고 나서 요즘은 다시 탈서구의 길에 나서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아시아에도 유럽에도 속할 수 없는 허공에 뜨게 됐습니다.여기에서 일본특수론 일본 독자문명론이 힘을 얻게 되는데 세계는 유럽연합(EU)의 경우에서 보듯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세계화)은 ‘신 지역주의’ 이른바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즉 Global+Localization)으로 향하고 있습니다.이른바 지역적 문화적 동질성에 토대를 둔 세계의새로운 지도가 그려지고 있는 겁니다. 일본은 아시아 속에서도 독특한 존재로 인식하는 일본 특수론에만 매달려있을 것이 아니라 대륙에서 바다로 문명사관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가와카쓰 교수 20세기 후반 최고의 역사가인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텔은 명저 ‘지중해’에서 이질적인 인종,민족,종교,문화 등이 공생하는 지중해 세계를 하나의 문명공간이라고 정리했습니다.그것은 역사를 보는 눈을 ‘육지사관’에서 ‘해양사관’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내용입니다. 유럽의 지중해에 해당하는 것은 중국해(서해)입니다.지중해가 기독교의 영향이 짙은 서(西)지중해와 이슬람교 영향권의 동(東)지중해로 나뉘어져 있듯,중국해도 한국 중국 일본이 중심이 되는 동중국해와 동남아시아의 색채가짙은 남중국해로 나뉘어져 있습니다.일본에선 아시아라고 하면 으레 한국이나 중국 인도 등 ‘대륙아시아’를 떠올립니다. 저는 ‘해양 아시아’란 개념을 제창하고 있습니다.해양 아시아는 크게,현인도양권,환중국해,양자의 중간에 위치한 다도해의 동남아시아 3개로 나눌수 있습니다.역사를 육지가 아닌 해양 아시아로부터 살펴본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보니 ‘근대는 아시아의 바다로부터 탄생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위원장 우리에게 밀레니엄이란 천년 단위로 사물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간의식일 것입니다.현재 공간의식만이 기형적으로 팽창한 것이 바로 세계화라는 현상입니다.그래서 나는 그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천년화(Millenniumization)를 사용해왔습니다.천년화의 신개념으로 보면 동아시아의문명-문화의 특성이 보입니다. 세계에서 대륙과 반도와 섬의 세가지 지리문화적 조건을 절묘하게 갖춘 곳은 동아시아의 중국-한국-일본 밖에 없습니다.일본의 근대문명 생성도 이 지리문화적 관계를 떼놓고서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대륙이 반도를 건너뛰어 섬으로 향할때 몽골의 침략같은 것이 생겨나고 섬이 반도를 무시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할때 임진왜란이나 만주사변과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반도가 무력해지면 동아시아는 문명의 축을 잃고 조화가분열로,융합이 고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분단된 한반도를 보면 남한은 섬과 같고 북한은 대륙의 일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천년의 역사에서 20세기란 바로 동아시아에서 반도가 사라진 백년이라고 정의할 수 있고 21세기는 바로 이 반도성의 회복으로 새로운 동아시아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와카쓰 교수 중국은 ‘대륙중국’과 ‘해양중국’으로 나누면 잘 보입니다.대륙중국은 베이징(北京) 중심의 정치의 얼굴을 갖는 중국이고 해양중국은 상하이(上海) 중심의 경제의 얼굴을 한 중국입니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 7∼10세기에는 대륙중국의 정치 시스템이었지만 그 이후 일본에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푸젠성(福建省)으로 대표되는 해양중국과의 교류였습니다. 지금은 타이완(臺灣)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일본은 섬나라이고 해상의 길을 거쳐 외국과 접촉해왔습니다.과거 천년동안,해양중국과 교류를 깊게해온것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이유때문일 것입니다. 한반도는 글자대로 절반이 섬입니다.반쪽의 북한은 대륙 중국에 가까운 만큼 정치의 얼굴이 농후하고 나머지 절반에 위치한 한국은 바다에 열려져 있어 개방적이면서 해양일본과의 교류는 옛날부터 깊이가 있었습니다. ◆이위원장 동아시아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21세기에는 어떻게 기능할지 자못 궁금합니다.일본은 군사력으로 아시아를 통합하려는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려다 실패했고 전후에는 경제력으로 아시아에 다시 군림했지만 IMF등으로 역시 후퇴 조짐을 보입니다.이제는 문화카드 하나가 남았는데 아시아의 권역화가 가능할지모르겠습니다. ◆가와카쓰 교수 해양세계라고 하는 동질성에 착안해서 ‘바다에 사는 아시아’ 연합을 구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냉전후,다수의 소국(小國)이 자립하고 있습니다.옛 소련에서도 발트 3국을 비롯해 10개 이상의 공화국이 생겨났습니다.유엔 가맹국도 21세기에는 200개국을 넘을 것입니다. 오호츠크해,동해,중국해로부터 동남아시아의 바다를 거쳐 호주의 산고해,타스만해에 이르기까지 크고작은 섬이 모여있습니다.해양연합은 넓게는 서태평양까지 포함해 서태평양 해양연합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한국 일본 타이완이 중핵이 된 ‘바다에 사는 아시아’ 연합은 3자가 단결해서 협력하면 실현가능합니다. ◆이위원장 그렇습니다.바로 그러한 해양연합의 새로운 문명권을 만들어가는 천년의 꿈같은 것이 있어야 아시아의 문명패러다임 나아가서는 새롭게 균형을 갖춘 세계지도가 그려질 수 있습니다. 세계지도를 보면 러시아 대륙 등 북반구가 위에 있고 남반구가 밑으로 그려져 있습니다.지구본이든 평면지도이든 북이 위에 있습니다.이것은 대륙,특히 문명한 나라가 북반구에 몰려 있기 때문에 생겨난 세계의 이미지입니다.지구는 둥글고 우주 속에 떠있으니 남북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구의를 거꾸로 놓아도 지도를 거꾸로 걸어도 됩니다.그런데 교수님의 ‘열도 문명론’이 가능하려면 그와 같은 고립된 작은 점들을 이어가는 융합의 문명론이 필요합니다.한국은 대륙과 섬을 이어온 반도로서 한쪽은 대륙을,한쪽은 바다의 섬문화를 동시에 포용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영어나 일본말에서는 서랍을 ‘드로어(Drawer)’,‘히키다시’라고 하여 빼내는 기능하나만을 나타내지만 한국말로는 빼고 닫는 양면성을 포함한 ‘빼닫이’라고 하는데서 보듯이 말입니다. 21세기는 서로 다른 종(種)이 섞이는 융합의 힘과 반도적 성격을 지닌 중개(Intermediation)의 힘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그러므로 섬과 섬이 이어지는 열도 문명의 실현은 대륙도 해양도 아닌 그 중개항의 문명을 지향하는데서새로운 역사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온 파워 폴리틱스는 경제력 군사력을 앞세운 것이지만 앞으로의 힘은 통합력입니다.통합력이란 바로 중화(中和)하고 융합하는문화의 힘으로 한국의 토착신앙에서는 그것을 상생(相生)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일본이 무사도의 파워 폴리틱스로 전국 시대와 같이 전쟁을 하고 있을 때한국은 임란후 병마를 충효로 바꾸는 주자학(朱子學)을 일본에 가르쳐 에도(江戶) 300년의 평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파워 폴리틱스를 대신하는 모럴 폴리틱스(도덕정치)의 신질서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20세기 군국주의를 지향한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가 모두 파워 폴리틱스에서 모럴 폴리틱스의 통합력으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21세기에는 이 반도적 문화의 의미가 더욱 증대해 갈 것입니다.
  • 정신대할머니 금세기 마지막 수요집회

    “스물 두 살에 끌려갔어.그때는 참 고왔지.일본 정부는 우리가 죽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그들이 사죄하기 전까지는 죽어서도 수요 시위에 참여할거야. ” 29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옆 공원에서 열린 금세기 마지막 ‘수요 시위’에 참석한 박옥년할머니(82)는 “1933년 일본군 위안부로 전북 무주에서 남태평양 라바울 섬으로 끌려갔었다”며 울먹였다. 수요 시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광화문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다. 92년 1월 8일 첫 시위에 돌입,29일로 391회째를 맞았다.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 애도를 표하는 뜻에서 한 차례 취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주도거르지 않았다. 정대협 관계자들은 “단일 사안으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장기 시위”라고 주장한다.참가 인원은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씩,연인원 1만7,000명 이상이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새 천년을 3일 앞둔 이날 시위에 참석한 할머니들은 절망과 희망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가장 큰 절망은 올해도 평생의 한을 풀지 못했다는 점이다.위안부 피해자대표 이용수할머니(73)는 “올해 48명의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갈수록 쇠약해지는 우리가 새해에도 시위를 벌여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걱정했다. 정대협은 할머니들이 노쇠해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수요 시위가 위안부 할머니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는 점에 안도한다.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는 일본인도 있기 때문이다. 29일 집회에도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온 11명의 교사가 참석했다.중학교 교사인 쓰즈키씨(47·여)는 “일본 정부는 부끄러운 과거인 위안부 문제를 제쳐놓고 군국주의의 부활만을 꿈꾸고 있다”고 비난했다. 초등학교 교사 기하라씨(43·여)도 “일본 교과서에는 위안부 문제가 겨우3∼4줄로 요약돼 있다”면서 “일본에 돌아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다. 정대협 양미강(梁美康)총무는 “청소년들도 수요 시위에 많이 참석하고 있다”면서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도 위안부 문제 제기나 일본에 대한 보상 요구는 계속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창구기자 window2@
  • 張俊河선생 정신계승 심포지엄 발제·토론 요지

    사단법인 장준하(張俊河)기념사업회는 8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분단민족의 좌표와 평화통일의 길’이란 주제로 장준하선생 정신계승 심포지엄을 가졌다.1부에선 한국현대사의 재조명,2부에선 민족사의 새 지평(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을 소주제로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졌다.참석자들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민족적 대안과 장준하선생의 항일독립·민주화·통일운동에 대한 역할및 선구적 의의에 대해 논의했다.다음은 주제 발표와 토론의 주요 내용. ■ 장준하와 박정희 비교연구(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집권 18년 동안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은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라이벌을 꼽는다면 장준하(張俊河) 선생(이하 호칭생략)이 가장먼저 떠오른다. 일제 시대건 60,70년대 건 박정희의 반민족성과 친일성을 부각하는데도,박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알리는데 장준하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을 할 때나 OSS 특별훈련을 받을 때나 해방후 김구주석 등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고 환국할 때나 ‘돌베개’를 광야에서 베고 자는 심정으로 임했다.장은 60년대 두번 투옥,옥중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유신체제에 대항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최고형인 15년형을 받았다.출소후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이후 박정희의 독재와 부패에대항하여 싸운 민주주의의 심볼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반면 박정희는 오로지 일본 군인으로 입신하기 위한 일념으로 국민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고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최우등생으로 만주황제 부의(傅儀)로부터 금시계를,1942년 일본육사에 입학해 3등으로 졸업하여 육군대신상을 받았다.그후 다카키(高木正雄)란 이름으로 만주군에 배치,해방까지 항일부대와 싸웠던 인물이다.1979년 10·26 당시 일본의 한 외교관은 ‘국가와정보’라는 책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썼다.그의 정서적 고향은 죽을 때까지 일본제국의 군인정신 또는 군국주의였다는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 냉전문화 극복과 평화통일의 길(조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남북간 군사적 대립구조를평화구조로 전환시키고 남북한 공존과 협력을 제도화하는 길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에 있다.냉전구조의 해체는 체제·제도·정책·관행 및 의식을 탈냉전의 세계사적 조류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다. 남북한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은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상존하는 한 언제든지무산될 위험속에 있다. 냉전의식·냉전문화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통일후 남북한 사회통합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또 우리 사회내의 진보와 보수간의 입장 차이를 좁혀가는 국민화합의 과정이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물론 북한을 공존·협력의 동반자로 삼는 과정에서 많은 이견의 분출을 피하긴 어렵다. 통일문제와 관련,‘하나의 민족,두개의 국가’라는 두 정치체제가 병존을이루는 아일랜드의 예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이점에서 통일은 남북아일랜드처럼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바람직하다. 정치적 통합을 완전히 달성한 법적·제도적 통일로 여기기 보다는 사실상의 통일상태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20세기동안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의충돌속에서 언제나 민족이익이 제약되는 상황이 초래됐다.21세기의 과제는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이 하나되는 길에서찾아야 할 것이다.냉전문화의 극복은 그 중심에 있다. ■ 해방후 한국민족주의 성격과 의의(임지현 한양대교수) 운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과 북은 다같이 의장된 형태의 민족주의이다’라는 지적은 쉽게 이해된다.서로가 표방하는 체제 이념이나 정책의 대치선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사실상 권력담론으로서 민족주의적 코드를 공유하고있다. 새마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 모두 주민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겨 생산성을향상시키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한국적’ 또는 ‘우리 식’이라는 수식을 벗기면 10월유신과 주체사상이 동일한 권력축을 위해 짜여있는 것이다. 즉 분단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이 통일을 위한 동원에서 체제강화를 위한 동원으로 변화한 것이다.통일은 이제 수사로만 남게 되었다.민족주체성 확립이란 슬로건 아래의 국민교육헌장 반포,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통한 국민의례 강화, 국학연구에대한 장려와 민족전통에 대한 강조, 국정교과서를 통한 국사교육 지배 등 가파르게 전진해온 남의 유기체적 민족주의는 10월유신으로 절정에 달했다. 북에서도 민족전통이 곧 혁명전통으로 대치됐고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는 사대의와 교조주의로 비판받고 민족전통에 입각한 ‘우리식’ 사회주의가전면으로 등장했다.지도자에 대한 정과 존경이 북에서는 혁명적 동지애로 표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남의 국가경쟁력 강화론이나 북의 강성대국론은 다시금 국가권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전유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여진다. ■ 한국의 주요 갈등양상과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제(이강로 전주대교수) 한국사회는 80년대 중반이후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면서 이를 풀어왔지만 지금도 여러갈등이 해결되지 않은채 진행되고 있다.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90년대 중반이후 이전에 비해 안정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여전히 제도적 절차에는 합의하지 못했다.정당이나 정치 지도력도 아직 민주주의의 공고화나 안정적 운영에 적합한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내각제 개헌이냐,대통령제 고수냐’는 헌정주의의 제도화도 미발달·불안정 상태다.노동과자본의 관계·정치 지도력의 행사문제 등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과제자의 기준이다. 민주주의 미래는 안정된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한다.지역갈등은 민주주의의안정을 위협한다.지역갈등은 정치세력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도침투,사회생활의 주요 준거가 되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한국정치에선 힘의논리가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더 민주적인제도와 과정을 통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추세다. 신성불가침이던 권력의 영역들이 하나씩 노출되면서 국민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아직 한국사회에선 갈등을 처리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로 만들어진 제도적장치는 미약하다.그러나 많은 갈등 양상에도 불구,불안정하지만 민주주의를다지는 요인들이 늘고 있다. * 張俊河선생 정신계승 토론 이모저모 ‘장준하와 박정희연구’주제발표에서 토론자로 나선 서강대 박호성교수(정치학)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민족주의는 통치술·통치전략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면서 “민족주의가 국민의 민주주의적 토대로서 기능하지 않도록억누르면서 국민동원의 수단으로 교묘히 이용했다”고 말했다. 또 “박정희 전대통령은 통치전략적인 차원에서 과거지향적인 복고적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밝혔다.이에반해 21세기의 민족주의는 통일·화해·형제애를 촉구하고 지향하는 민족주의이며 국가사회·민족내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겸허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매일의 김삼웅(金三雄) 주필은 해방후 한국민주주의 성격등과 관련,“구한말·일제시대 등 어려웠던 시대의 양심적 선각자들이 지향했던 ‘한반도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조명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장준하,백범 등이 추구했던 ‘한국형 민족주의’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주문했다. 김 주필은 “평화적인 정권교체이후 많은 사회문화운동단체 등 자발적인 비정부기구(NGO)들이 생겨나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도권력에 종속됐던 과거에서 벗어나 시민단체들에의해 자유롭게 이뤄지며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성공회대의 김동춘 교수는 “장준하와 박정희를 같은 지평에서 평가하기 어렵다”면서 “박정희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직업군인으로서 현실적인 길을걸었다면 장준하는 도덕적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경남대 심지연(정치학)교수는 “장준하가 젊은이 사이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면서 “그가 추구했던 이념과 이상,그리고 생애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심 교수는 역사의 평가에 있어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인 접근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고 특히 젊은세대가 역사적인 삶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교훈을 주기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정리 이석우 오일만기자 swlee@
  • [대한광장] 노근리와 보상

    진주만에 대한 일본의 기습공격에 따른 미·일전쟁이 발발한 뒤 2개월여 재미 일본인 사회를 주시하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19일 미 본토 서해안 일대의 일본계 이민들의 수용소행을 명령했다.일본 이민들은 피땀흘려 일구어놓은 가옥 재산을 버리고 수용소에 들어가야 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리고 50여년 후 청문회를 거치고 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았다. 일본계 이민의 수용소행은 재미 한인정치가 한길수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기 때문에 나도 한길수에 관한 논문에서 이 문제를 조금 다룬 일이 있었다.미국 정부의 보상은 만시지탄이 없지는 않았지만 썩 잘한 것이었다.그런데보상을 받은 사람 중에 매우 머쓱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수용소로 들어가 자치에 맡겨진 일본인들은 미국파와 모국파로 갈라지고 유혈 살인사건까지 발전하기 일쑤였다.모국파들은 몰래 들여간 라디오를 들으면서 일본의 승리와 패전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곤 하였다.또 목창과 빗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군사교련에 열중하였다.자기들끼리 지역감정으로 서로 다투었는데 북쪽에 수용된 사람은 남쪽을 ‘카리니가’(캘리포니아에서 온시컴한 흑노)라고 욕했고 또‘티비리리’(폐병앓이처럼 흰 놈들)로 욕을 먹기도 했다.어떤 의미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축소판이었다.전쟁 개시 전의 모든 일본어 신문들,특히 하와이의‘닛푸지지’나 LA의‘라후신포’는 일본 국내의 군국주의 옹호 신문논조와 다를 바가 없었고 재미 한인 독립운동을야유하고 경멸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청문회는 아무 지적도 없이 일본 이민들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춘 느낌이 있다.한국의 ‘노근리학살사건’ 사후책에서도 그렇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즉 사건발생 이후 일부 유가족 성원의 언행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갔었다 해도 피해자 등록을 막는다든가 차별하지 말고 모두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공무원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너무 분격하여 적을 지원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고 이를 사찰당국이 알고 있다고 가정해 노파심으로 말하는 것이다.보상 추진은 노근리에만 국한하지 말고영동군 일대로 확대하여야 될 것으로 믿는다. 당시 북쪽 신문에 보도된 노근리를 포함한 영동지방의 학살 희생자수는 8월10일자에 영동 일대의 2,000여명과 19일자 노근리 400여명으로 되어 있지만노근리 굴다리에 국한하면 희생자수는 100명 안팎이고,당시 영동군에서 더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즉 대전 해방과 영동 공격을 지휘한 제1군단의 김재욱 군사위원과 최종학 정치(문화)위원의 이름으로 8월2일 이 사건을 휘하 부대에 시달한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문서는 노근리를 의미하는 철도 밑 굴다리에서 미군이 양민 100명 가량 학살했고 또다른 굴다리에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선포했다.죽은 어머니의 가슴에 매달린 아기도 보았고 시체 밑에서 3∼4일 동안 숨을 죽이고있다가 살아난 양민 10명 중 몇몇은 도착한 인민군에게 복수해줄 것을 애원했다고 적었다.또 8월8일자의 명령 시달에는 (영동의) 미군이 인민군의 식량조달을 방해할 목적으로 민간인들을 강제 피란시키고 식량을 운반시키고 있으며 빈집에 남긴 식량과 된장,간장,일대 우물 개천 등에 독극물을 살포했다고 했다.특히 7월30일 황간에서 하천의 물을 마신 제3연대 군인이 피해를 받았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강제 피란행은 생존자의 증언과도 부합된다. 한·미조사단은 당연히 당시의 인민군 주장도 샅샅이 조사하여야 될 것이다.증언 채집에 있어서도 세심한 객관적인 사실을 채취해줄 것을 당부한다.가능하면 북한의 영동작전 관련자들을 초청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자기들도 저지르고 영상물에까지 담은 학살사건이 한 두가지가 아닌,즉자기 선전에만 급급하지 않고 건설적인 자료를 제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의 조사 시작에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싶다.그리고 한국의 조사활동도 뼈 있는 기개와 어른다운 공평성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해줄 것으로믿는다.언론도 달아오른 쟁개비처럼 한때의 보도로 끝내지 말고 인내성 있게꾸준히,그리고 신중하게 보도해주기를 기대한다. [方善柱 한림대 객원교수 재미사학자]
  • NGO 이모저모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99 서울 NGO대회는 13일,30개의 분과토의가 일제히 시작됨으로써 토론의 열기로 달아올랐다.이날 오후 6시 30분까지 계속된 140여개의 분과토의는 지난 2일동안 전체회의와 주제별 종합회의등에서 논의되었던 평화와 안보,양성평등,인간존중과 인권,윤리와 가치 등 10개 주제에 대한 세부적 토론으로 진행됐다. ■이날 분과토의는 특히 ‘양성평등’과 관련된 다양한 토론이 이뤄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한국미디어 여성연합에서 주최한 ‘여성관련 보도 선정성에 문제있다’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본 군국주의와 정신대문제’,한국여성의 전화연합이 주관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등 여성의 인권과 관련된 토론회장마다 많은 관객들이 몰려 열띤 토론이 이뤄졌다. ■112개의 NGO홍보관이 설치된 펜싱경기장은 전세계 NGO들의 활동을 보러온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특히 입구에 설치된 ‘로버트 김 구명운동’을 위한 홍보부스는 13일 하루에만 500여명이 찾아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했다.이날 경기장 한켠 상설무대에서는 전통무용과 고전음악연주 등 문화행사가 열렸으며,특히 몽골의 전통무용과 한국의 판소리 공연등은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김미경기자]
  • [義烈 독립투쟁] (6)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30분쯤 상하이(上海) 홍구(虹口)공원(현 노신공원)에서는 일본군이 상하이사변의 승전기념식을 겸해 일본국왕의 생일잔치,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이날 한국의 의혈청년 윤봉길(尹奉吉)이 그 단상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침공의 우두머리인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원흉들을 쓰러뜨렸다. 당시 현장에서 러시아 여행객이 찍은 비디오를 보면,사열대와 함께 엎어지고 쓰러지는 원흉들의 모습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와 세계 제국주의가 함께무너지는 장쾌함을 보였다.윤의사가 세계로부터 정의의 삶을 대변한 ‘의사'로 불리고 있는 것는 바로 이 때문이다.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상하이를 주목했는데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언론일수록 제국주의를 맹타한 윤의사를 높이치켜세웠고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들먹였다.국내외 동포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특히 ‘상하이의거’를 주도한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그리고 한인애국단 단장 백범 김구(金九)를 주목하기 시작했다.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도 그러한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왜냐하면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파리강화회의의 안정기조라고 하는 신제국주의적 질서에 온 세계가 눌려 독립운동도 외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 신질서를 깨야 할 필요가 있었다.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만들고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때마침 뉴욕 월가(街)의 증권파동을 계기로 경제공황이 몰아쳐 왔고,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공하더니 다시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하이의 한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것을 파리강화체제를 무너뜨리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만들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에 대한 반격작전을 세웠다.이봉창(李奉昌)의사로 하여금 일제의 심장인 도쿄 궁성을,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의사로 하여금 만주침략의 아성인 관동군사령부를 공격토록 한데 이어 윤의사로 하여금 상하이 침공의 선봉을 꺾어놓는다는 소위 ‘삼면작전’을 세웠다.이같은 작전을 구상한 사람은 백범이었는데윤의사의 ‘상하이 의거’ 성공으로 전세계를 진동시켰다. 윤의사는 원래 농민운동을 통해 고향의 부흥을 꾀하던 진보적 계몽주의자였다.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야학당과 청년회·체육회·부흥원을 조직하였으며 ‘농민독본’도 저술했다.그러나 경제공황까지 덮친 식민지 하에서 농민운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윤의사는 마침내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는 뜻을 세워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중국 대륙으로 향했다.그것이 1930년 윤의사가 23세 때의 일이다. 처음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윤의사는 이듬해5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때마침 상하이에서 상하이사변이 일어나 일본군과중국군이 싸우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어머님께 보낸 편지에서 “민족과 민족이 부닥치는 소리가 꽝꽝합니다”라고 표현했다. 그 꽝꽝하는,민족과민족이 부닥치는 소리를 들으며 윤의사는 의사가 되기 위해 꿈을 키웠다. 청년 윤봉길은 백범 김구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자신의 생명을불태워 정의를 현양하는 꿈을 실현코자 했다. 윤의사는 ‘성인군자는 살아서영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는‘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1932년 4월29일 아침 윤의사는 일본식 도시락과 물통,일본 국기를 들고 홍구공원을 향해 떠났다.도시락과 물통이 바로 폭탄이었다.이 폭탄은 당시 중국군 장교로 상하이 병공창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명 王雄·전광복회장)이 만든 것이었다. 의거 당일 아침 윤의사는 백범과 살아서는 ‘마지막 식사’를 같이했다.그리고 윤의사는 자신의 시계와 백범의 시계를 바꾸어 찼다.자신의 시계는 6원짜리였고 백범의 것은 2원짜리였다.“선생님,나는 한시간밖에는 시계가 필요치 않습니다”라며.죽음을 앞에 둔 청년이 보여준 태연한 여유를 보면서 백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렇게 떠나간 윤의사에게 시계는 아니나 다를까한 시간밖에 필요치 않았다.11시반쯤 홍구공원의 폭음과 함께 그 시계도 멈추고 말았다. 윤의사의 의거로 침체됐던 독립운동이 생기를 찾고 활기를 띠게됐다.또 국내외 동포가 다시 임시정부로 마음을 모으게 됐고 국제적으로도 한국독립을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중일전쟁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중국대륙 곳곳으로 이동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나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8·15광복때까지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윤의사의 의거로 국내외 동포들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고 중국정부를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의사는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19일 가네자와(金澤)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일제는 윤의사의 시신을 길거리에 묻어 행인들이 밟고 다니게 했는데 이같은 야만성은 일본제국주의밖에는 없다.해방후 윤의사의 유해는 백범의 지시로 이봉창·백정기(白貞基)의사등과 함께 봉환,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尹의사의 사회개혁 활동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초창기 야학·문맹퇴치운동 등에 헌신한 개혁주의 성향의 농촌운동가였다.윤의사가 20세 되던 해인 1927년에 출간한 ‘농민독본(農民讀本)’은 윤의사의 계몽사상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권은 유실되고 현재 제2·3권만 전해오고 있다. 제2권은 ‘계몽편’으로 편지 쓰는 법,인사법 등 생활교양과 조선지도,백두산 등에 대한 소개 등 일반상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현재 8과까지만 보존돼있다. ‘농민의 앞길’이란 제목의 제3권은 농촌개혁 방향과 농민의 당면과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앞부분에는 ‘소리의 갈래’등 한글맞춤법도 소개돼 있다. 총 25과로 구성된 제3권은 현재 7과까지만 보존돼 있다. 제2권이 기초학습자료라면 제3권은 일종의 사상독본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윤의사로부터 야학지도를 받은 예산군 덕산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농민독본’을 암송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은 윤의사 평전에서 “매헌은 한낱 시골의 야학당교사가 아니라 이미 이 무렵부터 사회개혁과 이상국가 건설을 꿈꾼 선각자적 지식인이었다”고 평했다. 정운현기자 jwh59@kdaily·com *윤봉길의사 직계후손들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윤의사 의거 당시 장남 종(淙)씨는 세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둘째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하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67·서울 동작구 상도동 거주)씨.김씨는 딸 여섯에 끝으로 아들 하나를 두어 겨우 윤의사의 대를 이었다.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29)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현재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 재직중인데 97년에 결혼,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정운현기자]
  • [대한시론] 日국왕 訪韓前 풀어야 할 일

    지난 9월 2일 김종필 총리는 한·일 총리회담에서 아키히토 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하면서,“2002년 월드컵 이전에 방한이 이뤄지면 한·일관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내년이나 2001년의 방한을 거듭 요청했다.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한 한국정부의 자세가 국민의 미묘한 대일 정서까지 고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먼 시각에서 볼 때 일말의 전진적인 점을 엿볼 수있다. 그러나 김 총리가 지난번 방일에 이어 이번에도 공식석상에서 일본어 실력을 과시한 것이라든가 국민의 대일 정서에 앞질러 ‘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하는 정부의 자세는 아무래도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개인적으로는일본이 과거 저지른 문제의 해결 없이 방한하는 것은 반대한다. 한국정부의 거듭된 일본국왕 방한요청에 대한 오부치 총리의 답변은 ‘환경 조성에 양쪽이 노력해 나가자’는 것이었다.‘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뜻’을밝힌 것이지만,뒤집어보면 한국이 분위기를 잘 조성해 더 간절히 요청하면방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도 볼 수 있다.대답의 이면에는 일본국왕의방한이 그동안 잠재우고 있던 한국인의 대일 정서를 자극해 예측할 수 없는결과를 돌출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점도 숨겨져 있다고 본다. 오부치 총리의 대답은 한국민의 내면에 흐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대일 정서를 한국정부보다 더욱 면밀하게 간파한 것이지만,환경 조성은 오히려 일본측이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무엇이 일본정부로 하여금 ‘일왕방한’ 요청에 ‘환경 조성’을 이유로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하게 하는가.또 그 소리냐고 역정을 낼지 모르지만,한마디로 그것은 일본이 청산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과거사의 문제이다.한·일관계에서 아킬레스건처럼 중요한 대목마다 소리없이 나타나 양국 관계의 진전을 괴롭히고 있는 망령같은 존재가과거사이다.일본은 잊어버리기를 원하지만,한국인은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아직 그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일본국왕’의 방한이 바로 그런 과거사의 고리를 끊는 ‘환경 조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한국민은 한국정부만큼 그의 방한을 환영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언제 이뤄질는지 알 수 없는 방한에 앞서,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사의 앙금을 걷어내려는 일본국왕의 노력과 결단이 기대된다. 불행했던 과거사 청산문제를 다시 건드리는 것은,그같은 잘못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촉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한·일간 과거사청산문제는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고 현재의 문제이며,한·일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북한과 일본,중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한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다. 세계는 지금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지역간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동북아시아지역만 분단과 냉전체제,일본 군국주의의 미청산으로 지난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한·일간 과거 청산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관계,나아가 세계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일본국왕은 그의 증조부 이래로 왜곡된 한·일관계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만큼 방한에 앞서 과거 군국주의 침략행위에 대한 명백하고 솔직한 사죄가 있어야 한다.이것은 한국에 대한 표명일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것이며,일본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더 높이는 계기도 된다. 일본이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이제 일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동학혁명 이래 부당한 군대 파견으로 동학군과 의병·독립운동자 수십만을 사살하였고,불법적으로 행한 한국 강점에 수많은 문화재의 강탈과 수탈통치,일제말기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의 강제연행과 사할린 동포,강제연행자들이 저축해놓은 저축금의 미반환 문제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지금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377차까지 행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보여주듯이,일본정부가 관여를 부정하고 있는 약 10만∼20만의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는 유엔 소위에서까지 결의된 것이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한국인들은 제사 때마다 일제에 의해 무참히돌아간 조상의 죽음에 동참하며 일본에 대한 다짐을 새롭게 한다. 한국인의 이런 고통의 한가운데 아직도 ‘일본국왕’이 자리하고 있다.과거사에 대한 앙금을 걷어내려는 가시적인 조치가 취해진다면,일본국왕은 한국의 국립묘지에서 일본 국민들을 대표하여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향불을 피우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일본국왕의 방한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그때 한국민도 마음으로부터 일본국왕을 환영할 것이다. [李萬烈 숙명여대교수·한국사]
  • 인간존재 의미 되묻는 日 희곡 ‘친구들’

    일본의 대표적 극작가 아베 고보의 ‘친구들(友達)’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지난 93년 예순아홉의 나이로 타계한 아베 고보는 생전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될만큼 탁월한 소설가이자,연극집단 ‘아베 고보 스튜디오’를 거점으로 독자적인 연극활동을 편 극작가로도 이름높다. 이번 무대는 국립극단이 올 한해 의욕적으로 기획한 ‘한·중·일 동양3국연극 재조명시리즈’의 하나로,‘아Q정전’(중국)‘무의도기행’(한국)에 이은 마지막 작품.일본 신극협의회,베세토 일본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선정된‘친구들’은 67년 발표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브로드웨이,유럽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각광받는 일본의 대표 희곡이다. 국내에서는 70년대초 영역본을 중역해 간이극장에서 잠깐 공연된 적이 있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겨 정식 무대에 올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국립극단이 일본 작품을 공연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의미가 더욱 새롭다. ‘친구들’은 실제 일어나지는 않지만 ‘있을 법’한 얘기를 통해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블랙코미디.어느날 밤 결혼을 앞둔 독신 샐러리맨 아파트에 아홉명의 낯선 일가족이 들이닥치면서 극이 시작된다.이들은 공동체의식과 휴머니즘이란 ‘선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침입’을 정당화하는가 하면,‘친구’라는 미명하에 집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한다. 폭력을 쓰지않는대신 ‘미소’와 ‘딴소리’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경찰도 별 도리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혹은 공동체의식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우스꽝스런 현실에 대한 신랄한 조롱인 셈이다.연출을 맡은 임영웅씨는“웃으면서 보지만,보고나면 소름끼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극중 공동체의식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임씨는 “공동체의식은 군국주의,제국주의의 광기와도 연결된다”며 “일본 우익이 한반도 침략을 ‘내선일체’‘대동아공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립극단 단원으로 지난해 TV드라마 ‘홍길동’에 캐스팅된 이후 ‘흐린날에쓴 편지’‘토마토’등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김석훈이 주연을 맡았다.“대사가 많은데다 주로 고성을 질러야 돼 체력소모가 많다”는 그는갑자기 스타가 된 이후 점점 본래 모습을 잃고 있는 듯한 요즘의 자신과 극중 주인공간에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예진흥원장인 차범석씨가 원작에 충실한 번역을 했으며,‘명성황후’에서진가를 발휘한 박동우(무대미술)최보경(무대의상)이 스태프로 참여한다.15∼24일 국립극장 소극장.(02)2274-1151∼8. 이순녀기자 coral@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대한시론] 21세기 韓·日관계의 새 모델

    패전 54주년을 맞아 최근 일본 의회가 국가 ‘기미가요’와 국기 ‘히노마루’를 법으로 제정하였다.그리고 세계가 일본을 다시 알자는 쪽으로 기울고있다. 일본이 보수로 우경화하는 추세를 지켜보는 한국의 시각은 우려와 희망이반반이다.국수주의적 내셔널리즘에 발동이 걸려 군국주의 일본으로 회귀하는 것이 걱정된다.한편 부강한 일본이 이웃에 도움이 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국가로 커가는 것을 보고 싶은 희망도 있다.그러나 최근의 흐름은희망보다는 우려의 쪽으로 일본이 가고 있어 보인다. 세계사의 흐름을 보수와 진보로 해석하는 한 역사학자의 우화가 있다.“배부른 오리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고 쉬며,배고픈 오리는 왼쪽으로 고개를틀고 쉰다”는 것이다.이 말은 부강한 나라는 우경화하고 빈곤한 나라는 좌경화한다는 의미를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이제 패전 반백년이 지나 재기한 일본이 우경화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고 있다.지나간 얘기지만 일본은 20세기초 근대화되면서 부강한 국력을 군국주의에 쏟아부어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갔다.나라가부강해지면 우경화한다는 역사적 진리에 순응하면서 오늘의 한·일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쇼와(昭和)시대의 일본이 부강해지면서 한·일관계는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식민지 역사로 이어졌다.이제 21세기를 면전에 두고 일본이 다시 부강해지면서 최소한 향후 반백년을 내다보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그러나 보수화하는 일본과 협력하면서 대망의 ‘태평양시대’를 공동으로 개발해야 하는 한국의 선택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아직도 진정으로 함께 생각하는 공동의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일관계를 두가지 모델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첫째,미국과 멕시코간의 갈등모델이 있다.둘째,미국과 캐나다간의 협력모델도 있다.결론부터말하면,한·일관계는 미국-캐나다 모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이 있다.이는 ‘만족한 파트너’관계가 되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의 한·일관계는 미국-멕시코 모델에 가깝다.이는‘어정쩡한 파트너’관계를 의미한다.오늘의미국-멕시코 관계는 다분히 과거지향적이며 민족감정의 갈등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된 역사적 골이깊다.멕시코는 150년 전부터 미국의 지배하에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는가 하면,정치·경제 및 문화적으로 부강한 미국의 속박속에 살아왔다.그러면서도미국의 경제적 보호와 정치적 협력이 없으면 멕시코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빠지는 구조적 종속관계를 면치 못하고 있다.미국인은 멕시코인을 업신여기며,멕시코인은 미국인을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는 미래지향적이며 ‘북아메리카시대’가 ‘우리들의시대’라는 공동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이들이 만든 공동체는 이웃의 단계를 지나 하나로 통합된 생활권을 공유한 연방체제에 가깝다.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는 정치적 통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기능적 통합이 이루어져 양국간에는 이미 전통적 의미의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 규모나 기타 종합적인 국력면에서 캐나다는 미국을 따르지 못한다.그렇다고 미국은 캐나다를 무시하지 않는다.캐나다도 막강한 미국을 가진 자의 오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미국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캐나다가 형제처럼 따라붙는다.미국의 배려와 캐나다의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가 동시에 더욱 솔직할 필요가 있다.한·일 양국은 인종,언어,문화 등 여러 면에서 하나의 뿌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좁은 속과 한국의 퉁명스러운 반발심리 때문에 미국-캐나다 모델로 가지 못하고 있다.말로는 21세기가 한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우리들의 아·태시대’라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의 우경화가 이미 정해진 일본인의 선택이라면 한국의 선택은 오른쪽으로 고개 돌린 오리의 머릿속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金裕南 단국대교수 한국정치학회장]
  • [사설] 조국 품에 안기는 김희로씨

    일본인 조직폭력배(야쿠자) 2명을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돼 31년간 일본 교도소에서 복역해 온 재일동포 김희로(金嬉老)씨가 오는 9월7일 가석방돼 귀국하리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그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면소식이전해지다가 무산된 바도 있어 조심스럽긴 하지만 10년동안 그의 석방운동을벌여 온 박삼중(朴三中)스님에게 일본 법무성이 최근 통보했다니 이번에는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일본 조직폭력배가 김씨의 가석방에 반발해 그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니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김씨의 출소를 반기는 것은 동포애를 바탕으로 한 인도주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상처 투성이의 그의 삶이 재일교포 인권문제와 맞닿아 있고불행한 한·일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사람을 죽이고 인질극은 벌인 것은잘못이지만 그 범행동기가 일본인들의 극심한 민족차별이었다는 점에서 그역시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재일동포사회는 물론 국내에서그의 석방운동이 계속 벌어졌고 지난해 가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때도 실무차원에서 적극 논의됐으며 결국 결실을 이룬 셈이다. 무기수라도 25년간 복역하면 대체로 석방된다는 일본에서 최장기복역수 기록을 세운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도 금할 수 없다.살아 생전 출소한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 해주고 싶다며 애타게 기다리다가 지난해 이 세상을 뜬어머니의 유해를 안고 그는 귀국한다.그 어머니는 “조센징,더러운 돼지새끼”라는 일본인의 욕설에 격분해 살인을 저지르고 인질극을 벌이는 아들에게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차라리 “자결하라”고 말했던 강골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종교’로 여겼던 김씨는 귀국후 불우한 노인들과 정신대할머니들을 돕고 일본에서 자신이 뼈저리게 겪은 ‘이지메’ 체험을 살려 청소년 선도작업을 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살 계획이라고 한다.그가 조국의품속에 편안하게 안겨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도와주어야 할것이다.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그가 우리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않을 터이다. 일본 정부는 물론 우리 정부도 이 시점에서 김씨의 사건이왜 일어났는지,왜 이제야 그의 가석방이 이루어졌는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한다.김씨의 비극을 잉태한 재일동포 사회는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수행을 위한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형성됐다.그럼에도 지금 일본에서는 다시 우경화(右傾化)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우리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인권이 더이상 위협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다시는 힘없는 조국 때문에 동포들의 삶이 찢겨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야 할 것이다.
  • 「獨수도 베를린 이전」새달1일 첫 閣議“21세기 출발”

    오는 9월1일 독일의 새로운 21세기,이른바 ‘베를린 공화국’시대가 시작된다.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민주주의헌법의 태동,히틀러의 나치즘과 독재,1·2차 세계대전을 통한 군국주의,그리고 동·서독 분단으로 대표되는 냉전 등세계 현대사의 영욕(榮辱)을 응축한 도시 베를린.지난 89년 베를린 장벽이무너진 뒤 시작된 ‘베를린 천도(遷都)’라는 세기적인 대역사가 종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게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23일 베를린 집무에 들어가는데 이어 다음달 1일 베를린 첫 내각회의를 주재한다. 독일 의회도 6일 제국의회(Reichstag)의사당에서 전체회의를 개최,바야흐로 통일독일의 수도이자유럽의 중심지로서의 베를린 재탄생을 공표한다. “과거를 보려면 로마로,미래를 보려면 베를린으로 오라” 베를린 시 홍보국장 볼커 하세메르시는 10년의 대역사 끝에 거듭나는 베를린을 이렇게 자랑했다.91년 베를린 수도 이전을 결정한 뒤 독일 정부가 베를린에 쏟아부은 비용은 200억 마르크(약 12조 2,000억원).옛 동독지역의 떼를 벗기고 미래의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베를린은 그야말로 거대한 공사장이었으며 아직까지 크레인 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다.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까지에는 향후 수년이 더 걸릴 것이란 전망이다. 정부 16개 부처 가운데 수도이전을 총괄한 교통부가 지난 6월말 50여년 본시대를 마감하고 베를린으로 이사한데 이어 10개 부처도 거의 이사를 끝냈다.150여개 외국 공관,언론기관 각종 이익단체도 이사에 여념이 없다. 본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인구는 수만명이다.일부 부처가 본에 남아 과도형태를 유지하긴 하지만 6,000명의 정부 관료와 그 식솔,그리고 국회의원 669명,보좌진 3,400여명 등이 베를린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에 근거지를 둔 많은 기업들과 21세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베를린으로 속속 향하고 있다. 지난 5월 선출된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은 이미 베를린의 새 대통령관저에머물고 있으며 슈뢰더 총리는 오는 2001년 새 총리관저가 완성될 때까지 옛동독 호네커 전 총리 관사에 임시로 기거한다. 베를린은 세계 유명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로젠조 피아노,노먼 포스터 경 등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새 베를린 건설에 참여했다. 가장 상징적인 건물은 베를린 장벽 서쪽에 위치한 제국의회 건물. 1894년 바이마르 민주 헌법이 탄생한 곳이자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한 곳이며 45년 연합군에 대한 독일 패전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제국의회 건물을새단장한 주인공은 건축 거장,노먼 포스트 경. 민주주의와 투명성을 상징한 유리 돔,그대로 보존해놓은 과거 전쟁의 흔적들은 벌써부터 관광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거장 로젠조 피아노가 지휘한 포츠담 광장엔 8억달러 규모의 소니 복합단지,다임러 벤츠 본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러나 새 베를린은 유럽 전통양식을 고수하라는 건축규제 탓에 구태와 혁신이 어정쩡하게 얽혀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천도의 의미 베를린 천도는 통일 독일의 숙원사업이자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후 지속돼온 통일과정의 마무리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독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특별하다.비록 한때나치와 냉전시대의 무대로 독일 역사중 치욕의 한부분이 됐지만 독일과 독일인에게 베를린은 ‘영원한 수도’ 그 자체이다. 1871년 독일이 첫 통일된때부터 2차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수도였으며 그이전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베를린은 늘 독일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이번 ‘베를린 천도’에 독일 전체의 기대가 큰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일부 유럽국가에서 독일이 베를린 천도로 다시 권위주의,패권주의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도 이같은 분위기에 영향받고 있다. 특히 최근 독일의 영향력 확대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몇몇 국가들에서는 베를린 천도를 곧 ‘동진정책’의 하나로 보면서 우려를 숨기지 않고 있다. 한편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는 얼마전 본시대를 마감하는 의회연설에서 “독일은 신장된 국력을 함부로 과시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우리는 새로운 수도 베를린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지 새로운 공화국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혀 베를린 천도를 바라보는 주변국들의 미묘한 입장을 배려했다. 이경옥기자 ok@ - 베를린한인회 교포중심 될듯 베를린 남정호특파원 주독 한국 대사관및 교민사회도 베를린 시대를 맞는 채비에 한창이다. 지난 6월 시내 중심가인 티어가르텐 남쪽 독일철도보험회사의 7층 건물중 4,5층(500평 규모)을 임대,막바지 사무실 개조작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 대사관은 독일 연방정부 및 의회 이전에 맞춰 오는 9월 1일부터 베를린 청사에서 업무를 공식 개시한다.베를린 주재 총영사관은 대사관 이전과 함께 폐쇄되고 본에는 영사업무 등을 관장하는 대사관 분관이 설치될 예정이다. 이기주(李祺周)대사는 “베를린 천도 이후 독일의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위상과 외교 정책의 변화가 예상되는 만큼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독일 주재 문화홍보원도 베를린으로 확장 이전한다.교민사회의경우도 활동의 중심이 프랑크푸르트 등 중부 독일권 한인회에서 베를린 한인회(교민 3,000여명)로 옮겨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조선학도병 日人으로 둔갑 ‘충격’

    일제말 학도병으로 끌려가 특공대원으로 출전, 전사한 조선 청년의 위패와사진이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신사내 기념관인 유취관(遊就館)에 일본인으로 둔갑돼 일본인 전몰자들과 함께 버젓이 전시돼있어 충격을 던지고 있다. 최근 나고시 후타라노스케(名越二荒之助) 전 다카지호(高千穗)상과대 교수가 야스쿠니신사의 사보(社報)인 ‘정국(靖國)’(99년 7월호)에 기고한 글에따르면, 이 조선청년은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로 본명은 탁경현(卓庚鉉)으로 밝혀졌다.탁씨는 1920년 경남 사천 태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약학전문학교 재학중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간 것으로 나와있다.탁씨는 비행훈련을 마친 후 특공대원으로 선발돼 제51진무대(振武隊)에 배치됐는데 일제패망 직전인 1945년 5월 가고시마(鹿兒島) 인근 지랑(知覽)을 출발,오키나와전에 참전했다가 5월28일 현지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출격 당시 계급은 소위였으나 전사후 대위로 2계급 특진했다. 조선인 가운데 소위 가미가제(神風)로 불리는 특공대로 차출된사람은 모두15명. 이 가운데 학병 출신은 탁씨를 포함해 4명으로 이들은 모두 전사했다. 한편 전사후 그의 위패는 지랑지방에서 봉안해오다가 일본 당국의 전사자명단 파악작업이 끝난 후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져 합사됐다.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모두 2만1,181위(位)의 조선인 희생자 위패가 봉안돼 있다. 학병 출신자들의 모임인 1·20동지회의 정기영(鄭琪永·79)부회장은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조선 청년의 사진이 일제 군국주의 전쟁의 전몰자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전시돼 있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말했다. 탁씨의 사촌형 탁남현(卓南鉉·80·전 부산 초량중학교 교장)씨는 “동생이미혼으로 사망해 동생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면서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이유로 보상금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동생 사진을 일본인들과 함께 걸어놓은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日 패전 54년 잿더미서 열강으로-주변국 시각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주변국의 시각은 ‘우려’그 자체다.일본 정부가 일장기(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정하는 법안을 최종 통과시킨 9일 아시아 국가에서 터져나온 거부반응은 이를 잘 설명한다.아시아 지식인들과 사회단체 등 민간부문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인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법제화를 바라보는 한결같은 시각은 ‘동북아및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것.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각한 피해를 겪은 주변국 국민정서의 현주소다. 태국 탐마사트 대학 정치학자 수라차이 시리크라이 교수는 “일본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매우현명하지 못한 조치가 될 것”이라면서 “동북아 문제의 근원은 역사적 사실의 부인및 왜곡을 시도하는 일본 그 자체다”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의 수 지량 교수는 일본이 점차위협적인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조짐의 하나라고 말하고 이번 국기·국가법 통과는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이후,초강대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보수·우익 세력의 목소리가 더 큰 세력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한편 홍콩 민주당의 청 인퉁 대변인은 일본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날에 국기·국가법을 통과시킨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면서 “군국주의 부활 조짐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정치학과의 호 카이 렁 교수는 “일본인들은 독일인들과는 달리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다”면서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마닐라에 소재한 위안부 진상규명단체 릴라-필리피나의 마리벨 발란삭 대변인은“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침략의 상징이며 우리는 또다른 세대의 위안부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도쿄 대재판’ ‘일본문화사’등 실체 밝힌 책 출간 봇물

    “일본은 왜 망언을 되풀이할까” “일장기는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천황은 어떤 존재일까”. 일본의 역사와 정신을 다룬 각종 책들이 8·15를 즈음해 봇물을 이루고 있다.이들 서적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앞두고 한일간의 상호이해를 높이자는 뜻에서 발간되고 있다. 망언이 거듭되는 배경은 중국인 황허이(黃鶴逸)가 쓴 ‘도쿄 대재판’(백은영 옮김,예담출판사)은 2차대전 직후 일본 전범에 관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일본이 여전히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이 책은 모두 4,019명의 증인이 출석하고 4,336부의 증거문서가 제출된 극동국제군사법원,즉 2차대전 전범처리를 위해 열린 도쿄재판의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아울러 재판 이후 전범들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지배층으로 재부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장기와 기미가요의 뿌리는 홍윤기 외국어대 교수는 ‘일본문화사’(서문당)에서 기미가요의 원형으로 서기 912년경 완성된 20권짜리 시가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실린 와카를 꼽는다.‘와카’란 우리의 향가나 시조에 해당되는 일본 고유의 시가.다이고천황(재위 897∼930) 칙령으로 편찬된이 시집은 와카 1,111수를 모아놓은 것으로,343번째 노래가 바로 현재의 기미가요 원형이라는 것.홍 교수는 “기미가요의 어머니격인 이 노래는 고려가요인 ‘정석가’와 너무 비슷하다”면서 “1880년대 노래 첫머리가 일부 바뀌어 지금의 기미가요가 됐다”고 말한다. 일장기는 에도(江戶)막부 때인 1811년 이후 일본 국기로 공식 사용됐다.이전 일본 무장들이 지휘용 부채 등에 집어넣던 그림이었는데 메이지(明治)시대때 국기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천황은 누구인가 이규배 탐라대 교수는 ‘누가 일본의 얼굴을 보았는가’(푸른역사)에서 “‘조선왕조실록’ 없이 조선을 이해하지 못하듯 천황을 빼놓고는 일본을 바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천황은 1192년경 처음 등장해 1868년 700년만에 절대군주로서위치를 굳혔다.현재 3부 요인을 임명하는 등 절차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이 교수는 “천황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면서 “천황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일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이밖에 일본 곳곳에남아있는 한국역사의 흔적을 모은 김정동 목원대 교수의 ‘일본을 걷는다·2’(한양출판),비교문화연구가 김명학이 일본 여고생에게 특유한 행태인 원조교제 등을 살펴본 ‘나,일본여고생’(이채)등의 책도 잇달아 출간돼 독자를기다리고 있다. 박재범기자 jaebum@
  • 日 패전 54년 잿더미서 열강으로-군국주의 꿈틀

    일본이 2차대전에 패전한 지 15일로 54년이 흘렀다.패전국 일본은 한국전과냉전,미국의 후원이라는 국제정세를 등에 업고 경제재건에 나서 지난 반세기 유례없는 눈부신 부흥과 성장을 이룩했다.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달성,강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이제 21세기의 정치대국,군사대국을 향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최근 급속한 일본의 보수우경화가 군국주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며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이다.패전후 일본의 발자취와 새 세기 일본을 전망해본다. 1945년 8월15일 종전(終戰),9월2일 미 해군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조인식을 할 때만 해도 일본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군에 무장해제령이 내려지고교전권을 부인하는 ‘평화헌법’이 제정되면서 일본은 영구히 무기를 태평양에 버리는줄 알았다. 그러나 50년 발발한 한국전은 일본 재건과 재무장에 결정적 계기를 부여했다.전쟁 특수로 부흥의 실마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자위대 발족의 물꼬를터줬다. 점령 초기 일본의 재군비를 엄격히 제한했던 연합국사령부(GHQ)는 고심 끝에 일본 방위를 위한 국가경찰예비대 창설을 허가한다.이 예비대가 54년 방위청 발족과 육·해·공 자위대 출범으로 이어졌다. 냉전으로 극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미국은 서방의 보루로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수호하기 위해 적이던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손을 잡는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 일본은 평화헌법의 ‘해석개헌’을 수차례 실시했다. 교전권을 부인한 헌법 9조에 대해 정부해석을 달리함으로써 일본은 총도 쏘고 해외파병도 가능해졌다.92년 유엔의 PKO(평화유지활동) 파병을 시작했고90년대 들어선 세계 정상급의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다. 군사비 지출도 경제력에 걸맞게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다.지난해 4조9,200억엔(49조원)으로 방위청 발족직후인 55년 1,349억엔과 비교하면 36배 늘었다. 공중급유기 도입,첩보위성 개발,전역미사일방위망(TMD) 구상 등 21세기형 군비증강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얼마전 핵 연료수송으로 부각된 일본의 핵 문제는 21세기 주목할 대목이다.비핵 3원칙을 채택한 일본이 핵무장할 공산은적다.하지만 미국이 핵 우산을 걷으면 일본은 3주일 안에 60개의 핵 폭탄을만들수 있는 플루토늄과 기술력을 갖고 있는 핵 예비국으로서 주변국은 경계한다. 일본이 지향하는 국가상은 명실상부한 정치·군사·경제대국이다.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몰락하고 범보수세력들이 약진함으로써 국가 진로를 둘러싼오랜 논쟁은 ‘강한 일본’으로 상징되는 대 일본주의의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일본의 정치대국 지향을 대표하는 움직임으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를 꼽을 수 있다.막대한 유엔 분담금 기여를 명분으로 60년대부터 진출을 시도해온 일본은 상임이사국이 됨으로써 세계 질서에 미국 소련 중국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향력을 갖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동북아에서는 중국과의 지역패권 다툼이 보다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이는 북한이 최대변수가 되는 한반도 상황과 맞물려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촉발할 수 있는 동인이 될 전망이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외언내언]‘8월의 친일인물’

    친일파 청산문제를 줄기차게 추진해오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박봉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8월의 친일인물’로 선정,발표했다.연구소 쪽은 인터넷홈페이지에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는데,박 전대통령이 42년 당시 일본의 괴뢰국이던 만주국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를 거쳐 45년 8·15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군 중위로 복무한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70년 여름 필자는 인도네시아에 취재를 갔다가 가루다항공 국내선에서 인도네시아 육군 소령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수하르토의 쿠데타로 축출돼 보고르궁(宮)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던 수카르노가 얼마전에 사망했던지라,수카르노의 정치적 공과(功過)가 화제에 올랐다.소령은 수카르노가 친공(親共)노선에 기울었고 국제정치적 명성을 얻는 데 집중한 나머지 인도네시아를 가난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그러면서도 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수카르노의 독립투쟁 관련 업적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소령은 지나가는 말처럼 필자에게 물었다.“그런데,박대통령은 ‘패트리엇 헌터’였다면서요?” ‘패트리엇 헌터’라니?‘애국자 사냥꾼’이라면 ‘독립군 토벌대’란 뜻이 아닌가?나는 그가 항일 독립투쟁 시기 박대통령의 관동군 경력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그때 나는 ‘한국의 신문사 기자’이자 ‘예비역 공군중위’라고 나 자신을 소개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96년 여름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가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옌지(延吉)로 향하던 관광버스 안에서의 일이다.버스가 지린성(吉林省)안투(安圖)를 지나던 때 조선족 관광안내원이 말했다.“이곳이 바로 일본 관동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관동군 장교로 조선독립군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필자를 비롯해서 한국인 관광객들은 대꾸할 말을 잃고 서로 얼굴을 돌아볼 뿐이었다. 8월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국치일(國恥日)과 국권을 회복한 광복절이 함께 들어있는 달이다.친일파 청산문제는 역사의 이름으로 엄정하게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그것은 역사의 기둥을 올곧게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우리는 오늘날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군국주의’경향에 대해서도 경계와 대책을 게을리해서는 결코 안된다./장윤환 논설고문
  • 대하소설 작가 정동주씨 새장편‘콰이강의 다리’

    티베트에서 태국을 가로질러 흐르는 ‘악마의 강’ 콰이강.풍토병의 소굴인그 강 위에 놓인 ‘지옥의 다리’ 콰이강의 다리.콰이강의 다리 하면 먼저떠오르는 것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영국의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만든 전쟁영화 ‘콰이강의 다리’다.이국정취를 자극하는 콰이강의 풍경과 포로들의 행진에 맞춰 울리는 경쾌한 휘파람 소리.그 선율은‘콰이강의 다리’를 한편의 뮤지컬영화로도 기억하게 한다.그러나 ‘콰이강의 다리’는 그저 뮤지컬 전쟁영화일 뿐,콰이강의 다리의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지는 않는다.‘백정’‘단야’‘민적’등 선굵은 대하소설을 선보여온작가 정동주씨(52)가 펴낸 장편소설 ‘콰이강의 다리’(한길사)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우리 역사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슬픈 이야기,곧 일제시대 군속으로 끌려갔다 일본인 신분의 전범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당한 조선인들의 비극을 다룬다.태평양전쟁 당시 콰이강에서는 싱가포르 전선과 자바전선에서붙잡힌 연합군 포로 18만여명 등약 50만명이 강을 가로지르는 철도 건설에참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이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 참여한일본군 가운데는 한국인들이 적지않았다.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일본군은 한반도 전역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5,000명의 군속요원을 징발해 부산 노구치(野口)부대에 입대시킨 뒤 두달간의 교육을 거쳐 남양군사령부가 있는 태국으로 보냈다.군속요원들은 각 부대에 배치됐고,이들 가운데 영어에능통한 300여명은 콰이강을 가로지르는 철도 건설공사에 투입돼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이들은 조선인이지만 창씨개명을 해 연합군 포로의 눈에는 모두일본군으로 비쳐졌다.이 때문에 이들은 종전후 일본군 전범으로 체포돼 24명이 사형,27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두 번의국제재판을 받은 끝에 일본으로 송환됐지만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전락했다.일본과 한국 양국 모두 이들을 철저히 외면한 탓이다.이들의비극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소설은 전범으로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은 24명의 한국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 김덕기씨(본명 홍종묵)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현대사에서 증발해버린 콰이강의 비극을 추적한다.김씨는 도큐야마 마츠오라는 이름으로 1942년 군속요원(통역)으로 징발돼 콰이강 다리 공사에 투입된 인물.김덕기가군속요원으로 징발된 시점을 시작으로 콰이강 다리건설,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 과정,일본 형무소 수감생활,국적을 찾기 위한 소송과정 등이 펼쳐진다.작가는 지난 92년부터 이 소설을 구상,8년만에 완성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이 영국인의 시각에서 콰이강의 비극을 다뤘다면,정씨는한국인의 시각으로 역사속에 매몰된 사실들을 밝혀낸다.소설 ‘콰이강의 다리’가 잊혀진 한국인들에 대한 복권청구서로 읽혀졌으면 한다는 게 작가의말.작가는 콰이강의 다리를 “일본의 그릇된 근대화의 상징적 건축물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바벨탑”으로 규정한다. 김종면기자 jmkim@
  • 학생운동, 국제연대 탈바꿈

    새로운 천년(millenium)을 맞아 학생운동이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학생운동이 추구해 온 통일운동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국제적 연대를 통해 학생들의 다양한 관심과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9일 서울대에서는 ‘새로운 전국적 학생회 연대기구’ 등 6개 학생운동단체로 구성된 ‘평화 21’ 추진위원회(위원장 朴慶烈 서울대 총학생회장) 주관으로 ‘동아시아 평화·인권연대를 향한 평화 21(Peace 21)’ 행사가 열렸다.행사는 11일까지 계속된다. 행사의 목적은 아시아 민간운동단체들의 연결망인 ‘아시아 평화네트워크(가칭)’ 건설의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다.아시아 평화네트워크에서는 여성,인권,북한의 기아,군사 대치 상황의 해소 등을 주요한 의제로삼게 된다. ‘동아시아,평화 인권 연대의 새 천년으로’라는 주제로 영화제,평화 심포지엄,음악공연,전쟁·기아체험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집행위원장 이수현(李秀賢·서울대 영어교육4)씨는 “평화적 남북통일은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민간운동단체(NGO)들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10일부터는 재일교포 학생들의 모임인 재일한국학생동맹(한학동) 학생대표5명이 ‘평화 21’ 행사에 참여한다.한학동을 통해 일본의 재무장 및 군국주의화에 반대하는 민간단체들과 교류하는 등 평화네트워크를 형성하겠다는 계획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렴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서울대 학생회는 여학생들의 요구를 수용,지난 6월부터 ‘성폭력에 관한 학칙’ 제정 운동을 벌여 본부로부터 학칙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몇년 전부터는 서울 지역의 총학생회에서 추석 때마다 전세 버스를 대여,학생들이 편안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고향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이 밖에 학생들의 최대관심사인 취업을 돕기 위해 ‘외국어 특강’등도 저렴한 비용에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한 학생들의 시각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평화 21’ 행사에 참여한 한 학생은 “넓은 시각으로 한반도의 상황 및 통일문제를 보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목표가 너무추상적이라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한·일관계 문제점 솔직하게 분석

    현역 일본 외교관이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비교적 솔직하면서도 날카로운시각으로 분석한 책을 냈다. 미치가미 히사시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일등서기관이 쓴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일본을 모르는 일본인’이라는 책은 “왜 한국인은 상대가 일본이 되면객관적인 견해를 갖지 못하고 사고 정지에 빠지는가”라고 묻고 있다.(황소연 옮김,무한 8,500원) 그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지난 50년 이상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의선입견이 강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밝혔다. 미치가미 일등서기관은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일본과한국은 모두 높은 곳에서 상대방을 내려다 보는 경향이 있다.이러다가는 대화도 토론도 이뤄지지 않는다.자기는 결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의 분석에는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한·일관계와 미·일관계를 분석한 내용이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그는 “일본이 약할 때는 일본의 미국비판이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일본의 국력이 커진 후에는 미국의 반발이 커졌다.한·일 관계에서도 과거의 비논리적이며 당치도 않은 비판은 일본 귀에까지 전해지지 않았다.그런데 한국의 힘이 강해진 지금은 일본을 비판하는 화살이 되돌아 온다는 것을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의 분석은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미·일 전쟁으로 인한 일본인의 반미감정과 일본의 잔인한 한국 식민지 통치로 인한 한국의 반일감정에는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더욱이 미국은 일본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보상했지만 일본의 사죄에는 진실성이 부족하다. 무한 출판사에서는 한·일관계를 다룬 또 다른 책 ‘한국인이 모르는 일본,일본인이 모르는 한국’도 출간했다.(8,000원) 이승영 동국대 교수와 김승일 미래동아시아 연구소장이 쓴 이 책은 일본문화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및 저력의 실체를 탐구한다. 지은이들은 한국과 일본은 현실을 무시한 맹목적인 우월감을 없애고 서로의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올바른 한·일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창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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