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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시론] 21세기 韓·日관계의 새 모델

    패전 54주년을 맞아 최근 일본 의회가 국가 ‘기미가요’와 국기 ‘히노마루’를 법으로 제정하였다.그리고 세계가 일본을 다시 알자는 쪽으로 기울고있다. 일본이 보수로 우경화하는 추세를 지켜보는 한국의 시각은 우려와 희망이반반이다.국수주의적 내셔널리즘에 발동이 걸려 군국주의 일본으로 회귀하는 것이 걱정된다.한편 부강한 일본이 이웃에 도움이 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국가로 커가는 것을 보고 싶은 희망도 있다.그러나 최근의 흐름은희망보다는 우려의 쪽으로 일본이 가고 있어 보인다. 세계사의 흐름을 보수와 진보로 해석하는 한 역사학자의 우화가 있다.“배부른 오리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고 쉬며,배고픈 오리는 왼쪽으로 고개를틀고 쉰다”는 것이다.이 말은 부강한 나라는 우경화하고 빈곤한 나라는 좌경화한다는 의미를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이제 패전 반백년이 지나 재기한 일본이 우경화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고 있다.지나간 얘기지만 일본은 20세기초 근대화되면서 부강한 국력을 군국주의에 쏟아부어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갔다.나라가부강해지면 우경화한다는 역사적 진리에 순응하면서 오늘의 한·일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쇼와(昭和)시대의 일본이 부강해지면서 한·일관계는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식민지 역사로 이어졌다.이제 21세기를 면전에 두고 일본이 다시 부강해지면서 최소한 향후 반백년을 내다보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그러나 보수화하는 일본과 협력하면서 대망의 ‘태평양시대’를 공동으로 개발해야 하는 한국의 선택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아직도 진정으로 함께 생각하는 공동의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일관계를 두가지 모델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첫째,미국과 멕시코간의 갈등모델이 있다.둘째,미국과 캐나다간의 협력모델도 있다.결론부터말하면,한·일관계는 미국-캐나다 모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이 있다.이는 ‘만족한 파트너’관계가 되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의 한·일관계는 미국-멕시코 모델에 가깝다.이는‘어정쩡한 파트너’관계를 의미한다.오늘의미국-멕시코 관계는 다분히 과거지향적이며 민족감정의 갈등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된 역사적 골이깊다.멕시코는 150년 전부터 미국의 지배하에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는가 하면,정치·경제 및 문화적으로 부강한 미국의 속박속에 살아왔다.그러면서도미국의 경제적 보호와 정치적 협력이 없으면 멕시코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빠지는 구조적 종속관계를 면치 못하고 있다.미국인은 멕시코인을 업신여기며,멕시코인은 미국인을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는 미래지향적이며 ‘북아메리카시대’가 ‘우리들의시대’라는 공동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이들이 만든 공동체는 이웃의 단계를 지나 하나로 통합된 생활권을 공유한 연방체제에 가깝다.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는 정치적 통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기능적 통합이 이루어져 양국간에는 이미 전통적 의미의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 규모나 기타 종합적인 국력면에서 캐나다는 미국을 따르지 못한다.그렇다고 미국은 캐나다를 무시하지 않는다.캐나다도 막강한 미국을 가진 자의 오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미국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캐나다가 형제처럼 따라붙는다.미국의 배려와 캐나다의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가 동시에 더욱 솔직할 필요가 있다.한·일 양국은 인종,언어,문화 등 여러 면에서 하나의 뿌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좁은 속과 한국의 퉁명스러운 반발심리 때문에 미국-캐나다 모델로 가지 못하고 있다.말로는 21세기가 한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우리들의 아·태시대’라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의 우경화가 이미 정해진 일본인의 선택이라면 한국의 선택은 오른쪽으로 고개 돌린 오리의 머릿속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金裕南 단국대교수 한국정치학회장]
  • [사설] 조국 품에 안기는 김희로씨

    일본인 조직폭력배(야쿠자) 2명을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돼 31년간 일본 교도소에서 복역해 온 재일동포 김희로(金嬉老)씨가 오는 9월7일 가석방돼 귀국하리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그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면소식이전해지다가 무산된 바도 있어 조심스럽긴 하지만 10년동안 그의 석방운동을벌여 온 박삼중(朴三中)스님에게 일본 법무성이 최근 통보했다니 이번에는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일본 조직폭력배가 김씨의 가석방에 반발해 그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니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김씨의 출소를 반기는 것은 동포애를 바탕으로 한 인도주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상처 투성이의 그의 삶이 재일교포 인권문제와 맞닿아 있고불행한 한·일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사람을 죽이고 인질극은 벌인 것은잘못이지만 그 범행동기가 일본인들의 극심한 민족차별이었다는 점에서 그역시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재일동포사회는 물론 국내에서그의 석방운동이 계속 벌어졌고 지난해 가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때도 실무차원에서 적극 논의됐으며 결국 결실을 이룬 셈이다. 무기수라도 25년간 복역하면 대체로 석방된다는 일본에서 최장기복역수 기록을 세운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도 금할 수 없다.살아 생전 출소한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 해주고 싶다며 애타게 기다리다가 지난해 이 세상을 뜬어머니의 유해를 안고 그는 귀국한다.그 어머니는 “조센징,더러운 돼지새끼”라는 일본인의 욕설에 격분해 살인을 저지르고 인질극을 벌이는 아들에게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차라리 “자결하라”고 말했던 강골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종교’로 여겼던 김씨는 귀국후 불우한 노인들과 정신대할머니들을 돕고 일본에서 자신이 뼈저리게 겪은 ‘이지메’ 체험을 살려 청소년 선도작업을 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살 계획이라고 한다.그가 조국의품속에 편안하게 안겨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도와주어야 할것이다.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그가 우리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않을 터이다. 일본 정부는 물론 우리 정부도 이 시점에서 김씨의 사건이왜 일어났는지,왜 이제야 그의 가석방이 이루어졌는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한다.김씨의 비극을 잉태한 재일동포 사회는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수행을 위한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형성됐다.그럼에도 지금 일본에서는 다시 우경화(右傾化)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우리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인권이 더이상 위협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다시는 힘없는 조국 때문에 동포들의 삶이 찢겨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야 할 것이다.
  • 「獨수도 베를린 이전」새달1일 첫 閣議“21세기 출발”

    오는 9월1일 독일의 새로운 21세기,이른바 ‘베를린 공화국’시대가 시작된다.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민주주의헌법의 태동,히틀러의 나치즘과 독재,1·2차 세계대전을 통한 군국주의,그리고 동·서독 분단으로 대표되는 냉전 등세계 현대사의 영욕(榮辱)을 응축한 도시 베를린.지난 89년 베를린 장벽이무너진 뒤 시작된 ‘베를린 천도(遷都)’라는 세기적인 대역사가 종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게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23일 베를린 집무에 들어가는데 이어 다음달 1일 베를린 첫 내각회의를 주재한다. 독일 의회도 6일 제국의회(Reichstag)의사당에서 전체회의를 개최,바야흐로 통일독일의 수도이자유럽의 중심지로서의 베를린 재탄생을 공표한다. “과거를 보려면 로마로,미래를 보려면 베를린으로 오라” 베를린 시 홍보국장 볼커 하세메르시는 10년의 대역사 끝에 거듭나는 베를린을 이렇게 자랑했다.91년 베를린 수도 이전을 결정한 뒤 독일 정부가 베를린에 쏟아부은 비용은 200억 마르크(약 12조 2,000억원).옛 동독지역의 떼를 벗기고 미래의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베를린은 그야말로 거대한 공사장이었으며 아직까지 크레인 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다.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까지에는 향후 수년이 더 걸릴 것이란 전망이다. 정부 16개 부처 가운데 수도이전을 총괄한 교통부가 지난 6월말 50여년 본시대를 마감하고 베를린으로 이사한데 이어 10개 부처도 거의 이사를 끝냈다.150여개 외국 공관,언론기관 각종 이익단체도 이사에 여념이 없다. 본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인구는 수만명이다.일부 부처가 본에 남아 과도형태를 유지하긴 하지만 6,000명의 정부 관료와 그 식솔,그리고 국회의원 669명,보좌진 3,400여명 등이 베를린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에 근거지를 둔 많은 기업들과 21세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베를린으로 속속 향하고 있다. 지난 5월 선출된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은 이미 베를린의 새 대통령관저에머물고 있으며 슈뢰더 총리는 오는 2001년 새 총리관저가 완성될 때까지 옛동독 호네커 전 총리 관사에 임시로 기거한다. 베를린은 세계 유명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로젠조 피아노,노먼 포스터 경 등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새 베를린 건설에 참여했다. 가장 상징적인 건물은 베를린 장벽 서쪽에 위치한 제국의회 건물. 1894년 바이마르 민주 헌법이 탄생한 곳이자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한 곳이며 45년 연합군에 대한 독일 패전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제국의회 건물을새단장한 주인공은 건축 거장,노먼 포스트 경. 민주주의와 투명성을 상징한 유리 돔,그대로 보존해놓은 과거 전쟁의 흔적들은 벌써부터 관광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거장 로젠조 피아노가 지휘한 포츠담 광장엔 8억달러 규모의 소니 복합단지,다임러 벤츠 본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러나 새 베를린은 유럽 전통양식을 고수하라는 건축규제 탓에 구태와 혁신이 어정쩡하게 얽혀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천도의 의미 베를린 천도는 통일 독일의 숙원사업이자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후 지속돼온 통일과정의 마무리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독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특별하다.비록 한때나치와 냉전시대의 무대로 독일 역사중 치욕의 한부분이 됐지만 독일과 독일인에게 베를린은 ‘영원한 수도’ 그 자체이다. 1871년 독일이 첫 통일된때부터 2차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수도였으며 그이전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베를린은 늘 독일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이번 ‘베를린 천도’에 독일 전체의 기대가 큰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일부 유럽국가에서 독일이 베를린 천도로 다시 권위주의,패권주의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도 이같은 분위기에 영향받고 있다. 특히 최근 독일의 영향력 확대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몇몇 국가들에서는 베를린 천도를 곧 ‘동진정책’의 하나로 보면서 우려를 숨기지 않고 있다. 한편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는 얼마전 본시대를 마감하는 의회연설에서 “독일은 신장된 국력을 함부로 과시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우리는 새로운 수도 베를린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지 새로운 공화국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혀 베를린 천도를 바라보는 주변국들의 미묘한 입장을 배려했다. 이경옥기자 ok@ - 베를린한인회 교포중심 될듯 베를린 남정호특파원 주독 한국 대사관및 교민사회도 베를린 시대를 맞는 채비에 한창이다. 지난 6월 시내 중심가인 티어가르텐 남쪽 독일철도보험회사의 7층 건물중 4,5층(500평 규모)을 임대,막바지 사무실 개조작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 대사관은 독일 연방정부 및 의회 이전에 맞춰 오는 9월 1일부터 베를린 청사에서 업무를 공식 개시한다.베를린 주재 총영사관은 대사관 이전과 함께 폐쇄되고 본에는 영사업무 등을 관장하는 대사관 분관이 설치될 예정이다. 이기주(李祺周)대사는 “베를린 천도 이후 독일의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위상과 외교 정책의 변화가 예상되는 만큼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독일 주재 문화홍보원도 베를린으로 확장 이전한다.교민사회의경우도 활동의 중심이 프랑크푸르트 등 중부 독일권 한인회에서 베를린 한인회(교민 3,000여명)로 옮겨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조선학도병 日人으로 둔갑 ‘충격’

    일제말 학도병으로 끌려가 특공대원으로 출전, 전사한 조선 청년의 위패와사진이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신사내 기념관인 유취관(遊就館)에 일본인으로 둔갑돼 일본인 전몰자들과 함께 버젓이 전시돼있어 충격을 던지고 있다. 최근 나고시 후타라노스케(名越二荒之助) 전 다카지호(高千穗)상과대 교수가 야스쿠니신사의 사보(社報)인 ‘정국(靖國)’(99년 7월호)에 기고한 글에따르면, 이 조선청년은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로 본명은 탁경현(卓庚鉉)으로 밝혀졌다.탁씨는 1920년 경남 사천 태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약학전문학교 재학중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간 것으로 나와있다.탁씨는 비행훈련을 마친 후 특공대원으로 선발돼 제51진무대(振武隊)에 배치됐는데 일제패망 직전인 1945년 5월 가고시마(鹿兒島) 인근 지랑(知覽)을 출발,오키나와전에 참전했다가 5월28일 현지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출격 당시 계급은 소위였으나 전사후 대위로 2계급 특진했다. 조선인 가운데 소위 가미가제(神風)로 불리는 특공대로 차출된사람은 모두15명. 이 가운데 학병 출신은 탁씨를 포함해 4명으로 이들은 모두 전사했다. 한편 전사후 그의 위패는 지랑지방에서 봉안해오다가 일본 당국의 전사자명단 파악작업이 끝난 후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져 합사됐다.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모두 2만1,181위(位)의 조선인 희생자 위패가 봉안돼 있다. 학병 출신자들의 모임인 1·20동지회의 정기영(鄭琪永·79)부회장은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조선 청년의 사진이 일제 군국주의 전쟁의 전몰자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전시돼 있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말했다. 탁씨의 사촌형 탁남현(卓南鉉·80·전 부산 초량중학교 교장)씨는 “동생이미혼으로 사망해 동생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면서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이유로 보상금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동생 사진을 일본인들과 함께 걸어놓은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日 패전 54년 잿더미서 열강으로-주변국 시각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주변국의 시각은 ‘우려’그 자체다.일본 정부가 일장기(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정하는 법안을 최종 통과시킨 9일 아시아 국가에서 터져나온 거부반응은 이를 잘 설명한다.아시아 지식인들과 사회단체 등 민간부문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인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법제화를 바라보는 한결같은 시각은 ‘동북아및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것.2차대전을 거치면서 심각한 피해를 겪은 주변국 국민정서의 현주소다. 태국 탐마사트 대학 정치학자 수라차이 시리크라이 교수는 “일본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매우현명하지 못한 조치가 될 것”이라면서 “동북아 문제의 근원은 역사적 사실의 부인및 왜곡을 시도하는 일본 그 자체다”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의 수 지량 교수는 일본이 점차위협적인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조짐의 하나라고 말하고 이번 국기·국가법 통과는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이후,초강대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보수·우익 세력의 목소리가 더 큰 세력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한편 홍콩 민주당의 청 인퉁 대변인은 일본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날에 국기·국가법을 통과시킨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면서 “군국주의 부활 조짐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정치학과의 호 카이 렁 교수는 “일본인들은 독일인들과는 달리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다”면서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마닐라에 소재한 위안부 진상규명단체 릴라-필리피나의 마리벨 발란삭 대변인은“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침략의 상징이며 우리는 또다른 세대의 위안부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도쿄 대재판’ ‘일본문화사’등 실체 밝힌 책 출간 봇물

    “일본은 왜 망언을 되풀이할까” “일장기는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천황은 어떤 존재일까”. 일본의 역사와 정신을 다룬 각종 책들이 8·15를 즈음해 봇물을 이루고 있다.이들 서적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앞두고 한일간의 상호이해를 높이자는 뜻에서 발간되고 있다. 망언이 거듭되는 배경은 중국인 황허이(黃鶴逸)가 쓴 ‘도쿄 대재판’(백은영 옮김,예담출판사)은 2차대전 직후 일본 전범에 관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일본이 여전히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이 책은 모두 4,019명의 증인이 출석하고 4,336부의 증거문서가 제출된 극동국제군사법원,즉 2차대전 전범처리를 위해 열린 도쿄재판의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아울러 재판 이후 전범들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지배층으로 재부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장기와 기미가요의 뿌리는 홍윤기 외국어대 교수는 ‘일본문화사’(서문당)에서 기미가요의 원형으로 서기 912년경 완성된 20권짜리 시가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실린 와카를 꼽는다.‘와카’란 우리의 향가나 시조에 해당되는 일본 고유의 시가.다이고천황(재위 897∼930) 칙령으로 편찬된이 시집은 와카 1,111수를 모아놓은 것으로,343번째 노래가 바로 현재의 기미가요 원형이라는 것.홍 교수는 “기미가요의 어머니격인 이 노래는 고려가요인 ‘정석가’와 너무 비슷하다”면서 “1880년대 노래 첫머리가 일부 바뀌어 지금의 기미가요가 됐다”고 말한다. 일장기는 에도(江戶)막부 때인 1811년 이후 일본 국기로 공식 사용됐다.이전 일본 무장들이 지휘용 부채 등에 집어넣던 그림이었는데 메이지(明治)시대때 국기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천황은 누구인가 이규배 탐라대 교수는 ‘누가 일본의 얼굴을 보았는가’(푸른역사)에서 “‘조선왕조실록’ 없이 조선을 이해하지 못하듯 천황을 빼놓고는 일본을 바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천황은 1192년경 처음 등장해 1868년 700년만에 절대군주로서위치를 굳혔다.현재 3부 요인을 임명하는 등 절차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이 교수는 “천황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면서 “천황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일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이밖에 일본 곳곳에남아있는 한국역사의 흔적을 모은 김정동 목원대 교수의 ‘일본을 걷는다·2’(한양출판),비교문화연구가 김명학이 일본 여고생에게 특유한 행태인 원조교제 등을 살펴본 ‘나,일본여고생’(이채)등의 책도 잇달아 출간돼 독자를기다리고 있다. 박재범기자 jaebum@
  • 日 패전 54년 잿더미서 열강으로-군국주의 꿈틀

    일본이 2차대전에 패전한 지 15일로 54년이 흘렀다.패전국 일본은 한국전과냉전,미국의 후원이라는 국제정세를 등에 업고 경제재건에 나서 지난 반세기 유례없는 눈부신 부흥과 성장을 이룩했다.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달성,강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이제 21세기의 정치대국,군사대국을 향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최근 급속한 일본의 보수우경화가 군국주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며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이다.패전후 일본의 발자취와 새 세기 일본을 전망해본다. 1945년 8월15일 종전(終戰),9월2일 미 해군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조인식을 할 때만 해도 일본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군에 무장해제령이 내려지고교전권을 부인하는 ‘평화헌법’이 제정되면서 일본은 영구히 무기를 태평양에 버리는줄 알았다. 그러나 50년 발발한 한국전은 일본 재건과 재무장에 결정적 계기를 부여했다.전쟁 특수로 부흥의 실마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자위대 발족의 물꼬를터줬다. 점령 초기 일본의 재군비를 엄격히 제한했던 연합국사령부(GHQ)는 고심 끝에 일본 방위를 위한 국가경찰예비대 창설을 허가한다.이 예비대가 54년 방위청 발족과 육·해·공 자위대 출범으로 이어졌다. 냉전으로 극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미국은 서방의 보루로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수호하기 위해 적이던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손을 잡는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 일본은 평화헌법의 ‘해석개헌’을 수차례 실시했다. 교전권을 부인한 헌법 9조에 대해 정부해석을 달리함으로써 일본은 총도 쏘고 해외파병도 가능해졌다.92년 유엔의 PKO(평화유지활동) 파병을 시작했고90년대 들어선 세계 정상급의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다. 군사비 지출도 경제력에 걸맞게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다.지난해 4조9,200억엔(49조원)으로 방위청 발족직후인 55년 1,349억엔과 비교하면 36배 늘었다. 공중급유기 도입,첩보위성 개발,전역미사일방위망(TMD) 구상 등 21세기형 군비증강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얼마전 핵 연료수송으로 부각된 일본의 핵 문제는 21세기 주목할 대목이다.비핵 3원칙을 채택한 일본이 핵무장할 공산은적다.하지만 미국이 핵 우산을 걷으면 일본은 3주일 안에 60개의 핵 폭탄을만들수 있는 플루토늄과 기술력을 갖고 있는 핵 예비국으로서 주변국은 경계한다. 일본이 지향하는 국가상은 명실상부한 정치·군사·경제대국이다.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몰락하고 범보수세력들이 약진함으로써 국가 진로를 둘러싼오랜 논쟁은 ‘강한 일본’으로 상징되는 대 일본주의의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일본의 정치대국 지향을 대표하는 움직임으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를 꼽을 수 있다.막대한 유엔 분담금 기여를 명분으로 60년대부터 진출을 시도해온 일본은 상임이사국이 됨으로써 세계 질서에 미국 소련 중국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향력을 갖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동북아에서는 중국과의 지역패권 다툼이 보다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이는 북한이 최대변수가 되는 한반도 상황과 맞물려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촉발할 수 있는 동인이 될 전망이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외언내언]‘8월의 친일인물’

    친일파 청산문제를 줄기차게 추진해오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박봉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8월의 친일인물’로 선정,발표했다.연구소 쪽은 인터넷홈페이지에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는데,박 전대통령이 42년 당시 일본의 괴뢰국이던 만주국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를 거쳐 45년 8·15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군 중위로 복무한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70년 여름 필자는 인도네시아에 취재를 갔다가 가루다항공 국내선에서 인도네시아 육군 소령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수하르토의 쿠데타로 축출돼 보고르궁(宮)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던 수카르노가 얼마전에 사망했던지라,수카르노의 정치적 공과(功過)가 화제에 올랐다.소령은 수카르노가 친공(親共)노선에 기울었고 국제정치적 명성을 얻는 데 집중한 나머지 인도네시아를 가난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그러면서도 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수카르노의 독립투쟁 관련 업적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소령은 지나가는 말처럼 필자에게 물었다.“그런데,박대통령은 ‘패트리엇 헌터’였다면서요?” ‘패트리엇 헌터’라니?‘애국자 사냥꾼’이라면 ‘독립군 토벌대’란 뜻이 아닌가?나는 그가 항일 독립투쟁 시기 박대통령의 관동군 경력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그때 나는 ‘한국의 신문사 기자’이자 ‘예비역 공군중위’라고 나 자신을 소개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96년 여름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가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옌지(延吉)로 향하던 관광버스 안에서의 일이다.버스가 지린성(吉林省)안투(安圖)를 지나던 때 조선족 관광안내원이 말했다.“이곳이 바로 일본 관동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관동군 장교로 조선독립군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필자를 비롯해서 한국인 관광객들은 대꾸할 말을 잃고 서로 얼굴을 돌아볼 뿐이었다. 8월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국치일(國恥日)과 국권을 회복한 광복절이 함께 들어있는 달이다.친일파 청산문제는 역사의 이름으로 엄정하게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그것은 역사의 기둥을 올곧게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우리는 오늘날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군국주의’경향에 대해서도 경계와 대책을 게을리해서는 결코 안된다./장윤환 논설고문
  • 대하소설 작가 정동주씨 새장편‘콰이강의 다리’

    티베트에서 태국을 가로질러 흐르는 ‘악마의 강’ 콰이강.풍토병의 소굴인그 강 위에 놓인 ‘지옥의 다리’ 콰이강의 다리.콰이강의 다리 하면 먼저떠오르는 것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영국의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만든 전쟁영화 ‘콰이강의 다리’다.이국정취를 자극하는 콰이강의 풍경과 포로들의 행진에 맞춰 울리는 경쾌한 휘파람 소리.그 선율은‘콰이강의 다리’를 한편의 뮤지컬영화로도 기억하게 한다.그러나 ‘콰이강의 다리’는 그저 뮤지컬 전쟁영화일 뿐,콰이강의 다리의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지는 않는다.‘백정’‘단야’‘민적’등 선굵은 대하소설을 선보여온작가 정동주씨(52)가 펴낸 장편소설 ‘콰이강의 다리’(한길사)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우리 역사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슬픈 이야기,곧 일제시대 군속으로 끌려갔다 일본인 신분의 전범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당한 조선인들의 비극을 다룬다.태평양전쟁 당시 콰이강에서는 싱가포르 전선과 자바전선에서붙잡힌 연합군 포로 18만여명 등약 50만명이 강을 가로지르는 철도 건설에참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이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 참여한일본군 가운데는 한국인들이 적지않았다.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일본군은 한반도 전역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5,000명의 군속요원을 징발해 부산 노구치(野口)부대에 입대시킨 뒤 두달간의 교육을 거쳐 남양군사령부가 있는 태국으로 보냈다.군속요원들은 각 부대에 배치됐고,이들 가운데 영어에능통한 300여명은 콰이강을 가로지르는 철도 건설공사에 투입돼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이들은 조선인이지만 창씨개명을 해 연합군 포로의 눈에는 모두일본군으로 비쳐졌다.이 때문에 이들은 종전후 일본군 전범으로 체포돼 24명이 사형,27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두 번의국제재판을 받은 끝에 일본으로 송환됐지만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전락했다.일본과 한국 양국 모두 이들을 철저히 외면한 탓이다.이들의비극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소설은 전범으로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은 24명의 한국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 김덕기씨(본명 홍종묵)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현대사에서 증발해버린 콰이강의 비극을 추적한다.김씨는 도큐야마 마츠오라는 이름으로 1942년 군속요원(통역)으로 징발돼 콰이강 다리 공사에 투입된 인물.김덕기가군속요원으로 징발된 시점을 시작으로 콰이강 다리건설,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 과정,일본 형무소 수감생활,국적을 찾기 위한 소송과정 등이 펼쳐진다.작가는 지난 92년부터 이 소설을 구상,8년만에 완성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이 영국인의 시각에서 콰이강의 비극을 다뤘다면,정씨는한국인의 시각으로 역사속에 매몰된 사실들을 밝혀낸다.소설 ‘콰이강의 다리’가 잊혀진 한국인들에 대한 복권청구서로 읽혀졌으면 한다는 게 작가의말.작가는 콰이강의 다리를 “일본의 그릇된 근대화의 상징적 건축물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바벨탑”으로 규정한다. 김종면기자 jmkim@
  • 학생운동, 국제연대 탈바꿈

    새로운 천년(millenium)을 맞아 학생운동이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학생운동이 추구해 온 통일운동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국제적 연대를 통해 학생들의 다양한 관심과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9일 서울대에서는 ‘새로운 전국적 학생회 연대기구’ 등 6개 학생운동단체로 구성된 ‘평화 21’ 추진위원회(위원장 朴慶烈 서울대 총학생회장) 주관으로 ‘동아시아 평화·인권연대를 향한 평화 21(Peace 21)’ 행사가 열렸다.행사는 11일까지 계속된다. 행사의 목적은 아시아 민간운동단체들의 연결망인 ‘아시아 평화네트워크(가칭)’ 건설의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다.아시아 평화네트워크에서는 여성,인권,북한의 기아,군사 대치 상황의 해소 등을 주요한 의제로삼게 된다. ‘동아시아,평화 인권 연대의 새 천년으로’라는 주제로 영화제,평화 심포지엄,음악공연,전쟁·기아체험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집행위원장 이수현(李秀賢·서울대 영어교육4)씨는 “평화적 남북통일은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민간운동단체(NGO)들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10일부터는 재일교포 학생들의 모임인 재일한국학생동맹(한학동) 학생대표5명이 ‘평화 21’ 행사에 참여한다.한학동을 통해 일본의 재무장 및 군국주의화에 반대하는 민간단체들과 교류하는 등 평화네트워크를 형성하겠다는 계획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렴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서울대 학생회는 여학생들의 요구를 수용,지난 6월부터 ‘성폭력에 관한 학칙’ 제정 운동을 벌여 본부로부터 학칙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몇년 전부터는 서울 지역의 총학생회에서 추석 때마다 전세 버스를 대여,학생들이 편안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고향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이 밖에 학생들의 최대관심사인 취업을 돕기 위해 ‘외국어 특강’등도 저렴한 비용에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한 학생들의 시각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평화 21’ 행사에 참여한 한 학생은 “넓은 시각으로 한반도의 상황 및 통일문제를 보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목표가 너무추상적이라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한·일관계 문제점 솔직하게 분석

    현역 일본 외교관이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비교적 솔직하면서도 날카로운시각으로 분석한 책을 냈다. 미치가미 히사시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일등서기관이 쓴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일본을 모르는 일본인’이라는 책은 “왜 한국인은 상대가 일본이 되면객관적인 견해를 갖지 못하고 사고 정지에 빠지는가”라고 묻고 있다.(황소연 옮김,무한 8,500원) 그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지난 50년 이상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의선입견이 강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밝혔다. 미치가미 일등서기관은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일본과한국은 모두 높은 곳에서 상대방을 내려다 보는 경향이 있다.이러다가는 대화도 토론도 이뤄지지 않는다.자기는 결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의 분석에는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한·일관계와 미·일관계를 분석한 내용이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그는 “일본이 약할 때는 일본의 미국비판이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일본의 국력이 커진 후에는 미국의 반발이 커졌다.한·일 관계에서도 과거의 비논리적이며 당치도 않은 비판은 일본 귀에까지 전해지지 않았다.그런데 한국의 힘이 강해진 지금은 일본을 비판하는 화살이 되돌아 온다는 것을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의 분석은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미·일 전쟁으로 인한 일본인의 반미감정과 일본의 잔인한 한국 식민지 통치로 인한 한국의 반일감정에는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더욱이 미국은 일본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보상했지만 일본의 사죄에는 진실성이 부족하다. 무한 출판사에서는 한·일관계를 다룬 또 다른 책 ‘한국인이 모르는 일본,일본인이 모르는 한국’도 출간했다.(8,000원) 이승영 동국대 교수와 김승일 미래동아시아 연구소장이 쓴 이 책은 일본문화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및 저력의 실체를 탐구한다. 지은이들은 한국과 일본은 현실을 무시한 맹목적인 우월감을 없애고 서로의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올바른 한·일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창순기자
  • [외언내언] 일본의 국기·국가법

    어느 나라나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가지고 있다.국내외 행사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이며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높이는 구심점이다.올림픽 시상식에서 국기가 게양되면서 국가가 울러퍼지는 순간의 감격이 없다면올림픽 금메달의 가치는 아마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일본 중의원이 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와 기미가요(君が代)를 국기와 국가로 정한 ‘국기·국가법’을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켜 주변국들의 우려와경계를 사고 있다.주권 국가가 자기네 국기와 국가를 정하는 일에 다른 나라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공식 인정이 단순한 국기와 국가 제정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가 배어 있다.히노마루를 앞세우고 기미가요를 부르며 일본이 벌였던 침략전쟁의 희생자인 아시아 이웃국가들에는 일본 군국주의가 자행했던 ‘과거사’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특히 최근 일본의 급속한 군사대국화 행보와 궤를 같이하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공식화는 ‘군국일본’의부활을 걱정하게 만든다. ‘천황의 치세는 천대 만대로/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가사로 천황 치세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기미가요는 천황·국가 절대주의를 강조하고 있다.천황은 곧 일본이고 천황폐하와 일본을 위해 일본국민들은 기꺼이 전장에서 몸을 바쳤다.패전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자연히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보아 일본 내에서도 공식행사에서의 게양과 제창을 자제해 왔다.군국 일본이 저지른 침략행위와 인간성 말살에 대한자성과 사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 국기·국가법 법제화는 지난 2월 교육위원회의 국기게양·국가제창 지시와교사들의 반발 사이에서 고민하던 한 고교교장의 자살로 빠르게 추진됐다.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관행적으로 사용돼 왔으나 명확한 규정이 없어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 법제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그러나 전국교원노조인 일교조(日敎組)와 사회단체들은 법제화 강행이 침략전쟁기였던 메이지·쇼와(昭和)시대로의 복귀라며 적극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변 국가들이 경계하고 우려하는 것은 결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법제화가 아니다.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급격한 군사대국화와 우경화(右傾化)다.이웃 나라들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일본의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日열도 총체적 보수화 急流/보수화 움직임들

    일본 열도가 총체적 보수화로 치닫고 있다.곧 탄생할 보수 3당 연립정권,개헌을 다룰 헌법조사회 설치,국기(國旗) 국가(國歌) 법제화 추진 등 보수 우경화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이런 보수화 흐름은 일본내 어떤 세력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형성,21세기 초 일본을 규정짓고 해석하는주요한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일본의 보수화가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지만 최근의 급격한 보수화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내각 때 단초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민 사민 사키가케 연정이 무너지고 98년 여름 총선에서 집권 자민당이 경제실정(失政)으로 참패하면서 ‘헤쳐 모여’가 가속화됐다. 참의원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자민당은 ‘체질’이 비슷한 자유 공명등 야당을 끌어들여 안정적 국회운영을 노렸다.첫 열매가 올 1월 자민 자유연정이었다.늦어도 올 가을전까지는 공명당이 가세한 3당 연립정권이 출범할 것 같다. 새 연정은 중·참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보수연정은 장기적으로는 제1야당 민주당과의 연합까지 상정하는 ‘보수대연합’의 구도를 그리고 있다.보수를 견제할 대칭축으로는 군소야당인 사민 공산당 밖에는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보수화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풀이가 있으나 거품경제 붕괴후 시작된 10년가까운 장기 불황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불황이 보수화를 촉진하고 있는 특이한 경우다. 불안한 미래에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기성 정치,특히 이념정당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게다가 유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속속내놓는 자민당의 인기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의 지지도 추이는 보수화의 일단을 엿볼 수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98년 7월말 출범 당시 바닥세였던 내각 지지율은 보수연정을 추진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20%대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은 최근 50% 전후로 뛰어올랐다. 정치의 이런 보수화는 다른 한면으로는 국가의 통합을 급속히 강화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국회통과 이후 일본 정부는 자위대의운신을 넓히는데 더욱 애쓰고 있다.일장기(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국기 국가 추진,교과서 검정기준강화,개헌론 등은 보수화와 더불어 나타난 움직임이다. 민족주의를 바탕에 깐 국가체제강화는 국수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중국 등 주변국들이 경계하는 점도 바로 이런 대목이다. 20세기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보수화를 고리로 국가체제강화,군사대국화로연결돼 자행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주변국들의 우려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보수화 움직임들 일본의 보수화 움직임과 관련해 올해 눈에 띄는 일들이 유난히 많았다.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가능케한 미·일안보협력지침이 제정됐다.헌법조사회 설치법안이 중의원에서 통과됐고 국기와 국가 법안도 국회 심의가 진행중이다. [헌법조사회 설치]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 현행 ‘평화헌법’을 개정,교전권을 갖도록 한다는게 개헌론의 골자.일본 헌법은 미 군정시절인 46년제정됐다. 자민당은 55년 ‘자주성을 갖춘 헌법개정’을 정강(政綱)으로 채택,개헌논의를 주도해왔다.내년 국회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되면 45년만에 자민당 뜻대로 개헌논의가 공식화되는 셈이다. 초점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9조의 개정.주변국들이 개헌론에 끊임없이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바로 교전권을 가지려는 일본의 속내에 대한의심 때문이다. [국기·국가 법안] 6월11일 일본 정부는 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하는 법안을 각의에서 통과시켰다.일본교원노조등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심볼로 삼으려는 저의가 있다”고 맹반발했다.일장기와 기미가요는과거 군국주의 일본에게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종전직후 미 군정이 일장기 게양을 허가제로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여당인 자민 자유당이 법안에 찬성하고 있고 민주 공명당도 동의하고 있어 심의만 끝나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 문화분야] 극우 사관이 공공연히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대표적이다.지금의 역사책이 미국의 강요로 기술됐다며 ‘새로운 사관’에 서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미 군정하전범재판을‘날조극’이라고 비판한다.96년 결성돼 지난해와 올해 부쩍 회원을 늘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쟁을 미화하고 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는 책자들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이나 4월 지방선거에서 도쿄도지사에 당선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선전포고,NO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경제’ 등은 일본의 우경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황성기기자
  • [현상과 전망 21세기 미술](1)현실로 이어지는 사라예보의

    대한매일은 새로운 미술시리즈 ‘현상과 전망,21세기 미술’을 3일부터 주1회 연재합니다.시리즈는 세계 현대미술의 현상과 흐름,에피소드를 미래지향적인 시각에서 다룰 예정입니다.정준모(큐레이터·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박규형(갤러리 현대 큐레이터)·송미령(한솔문화재단 선임학예연구원)·이원일씨(성곡미술관 수석큐레이터)가 집필합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인류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기 위해 희망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이는 20세기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20세기를 살아내야 했던 우리들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호전적이었던 사람들로 기록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금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피해와 충격을 주었고,이런 탓에 20세기는 폭력의 시대요 야만의 세기라고단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20세기 비극의 역사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비롯되었다.1차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페르디난트의 암살은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던 가브릴로 프린키프에 의해 감행되었다.1차세계대전의 배경에는 당시 민중을 현혹시켰던위정자들의 범슬라브주의라 불리는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라는 원초적 야만이자리하고 있다.이러한 야만성은 1차세계대전에 이어 역사의 이면으로 잠복해 들었다가 보스니아 사라예보 내전으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부상하였고,이어 최근 휴전으로 끝난 유고와의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 사라예보에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전세계 미술인들의 열망이 모여 소담한 결실을 이뤘다.지난달 25일 문을 연 사라예보현대미술관이 바로 그것이다.인류의 과욕에 의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전쟁으로 심신이 지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할 목적으로,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을 만큼 소중한 미술문화유산들을 모아 사라예보에 현대미술관을 연 것이다. 유네스코의 재정적 뒷받침과 미술인들의 여망,소장자와 후원가들의 열의가한데 모여 자리를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이후 1998년까지 이탈리아의 밀라노 스파지오 우마노 현대미술센터와 프라토에 위치한 루이지 페치 현대미술센터,류불리아나의 현대갤러리,사라예보의 오발라 아트센터,베니스 비엔날레,그리고 빈의 루드비히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지며 전시를 기획,참여작가들로부터 작품들을 기증받거나 구입하여 대규모 컬렉션을 이루었다.이것이 모두 옮겨져 사라예보현대미술관으로 개관됐다. 각기 다른 민족과 종교를 가진 전세계 미술인들이 모여 이룬 이 미술관은소장품이 먼저 확보되고 미술관이 개관하는 수순으로 이루어졌다.이것은 금세기 마지막이자 가장 의미있는 현대미술의 보고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이 미술관에 영구소장 전시될 작품들은 이제 그들의 안착지인 불모의 땅 사라예보에 도착하여 문화의 꽃으로,현대미술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를 잡았다.이 미술관의 개관전시는 지난달 25일 시작돼 9월 7일까지 70여일간 이어지며 우리나라 작가로는 이우환·윤영석·김순기·이불·한명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사라예보현대미술관의 개관을 보면서 미술인들의 인류애,사람에 대한 사랑을 만날 수 있고,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어 반갑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 20세기의 우리의 과오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을까.전쟁과 평화,이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다. 정준모(큐레이터,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화제의 책>

    [월스트리트 누구를…] 루디거 돈부시 미국 MIT경제학 교수는 “국제통화기금은 미국이 해외 경제정책을 추진하는데 쓰는 장난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 등을 통해 주식시장이 금융과 기업을 통제하는 미국식주식시장 모델을 아시아와 제3세계,옛 사회주의국가 등에 강권해 왔다. 이러한 ‘세계 금융의 미국화’는 세계 금융시장이 미국 금융시장의 메카인월스트리트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더그 헨우드의 ‘월스트리트 누구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나’는 우리에게도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월스트리트의 메커니즘과 금융논리를 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이주명 옮김,사계절 1만3,000원).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에서 경제전문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미국의 금융자본주의라고 전제하고 주식·채권·파생상품·뮤추얼펀드 등의 금융상품에서부터 증권시장과 기업의 관계,금융과 실물경제,미국정부의 거시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월스트리트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편제국 일본] 일본 아이치대학의 구라하시 마사나오 교수가 펴낸 ‘숨겨온 국가범죄를 파헤친다!-아편제국 일본’은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적 마약범죄를 고발한다.(박강 옮김,지식산업사 1만원). “일본은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아편을 활용했으며 식민지였던 한국·대만·만주 등에서 아편을 통한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다. 일본은 1919년 이후 한반도의 마약재배 면적을 크게 늘리고 교묘한 방법을이용해 아편습관이 없던 조선인들을 중독자로 만들어 갔다”고 지은이는 강조했다. 그는 1932년 일본 내무성 발표는 조선인의 마약중독자가 4,044명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70여만명에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산한다. 19세기 후반부터 70년대까지의 일본 마약정책 흐름을 통시적으로 파헤친 이 책은 국제법상 범죄행위인 일본의 마약 제조·밀매행위는 패전후 진행된 도쿄 전범재판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은폐돼 왔다고 쓰고 있다.
  • 월북작가 함세덕 ‘무의도 기행’ 무대에

    월북 극작가 함세덕의 ‘무의도 기행’이 22일까지 국립 중앙극장 소극장무대에 오른다.그의 작품은 88년 해금조치 이후 간혹 무대에 올랐는데 이번 것은 해방 이후 처음 공연된다.사실주의적 극본에 어울리게 ‘풍자 연극의 대가’ 김석만이 연출을 맡았다.91년 극단 연우무대 대표로 있을 때 ‘동승’을 연출한 바 있어 두번째 만남이다. “가급적 원작의 내용에 충실,토씨나 지문 하나도 그대로 살렸다”면서 “다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함세덕을 잠깐 등장시켜 그의 눈으로 작품을 해설하게 했다”고 말한다. 김석만은 함세덕의 작품에 ‘성장이 멈춘 어린이’가 자주 등장하는데 주목한다.군국주의의 억압에 신음하는 조국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이 터져 일본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의 해주인근의 섬.주인공 천명(이상직)이 찢어질듯한 가난에 눌려 작가(원작엔 트럭기사)의 꿈을 피우지 못하고 고기잡으러 갔다가 죽는다는 애절한 내용이다. 아름다운 우리 말과 당시의 풍속도가 잘 그려져 있다.장민호·백성희 등 출연.가벼움과 광속으로 치닫는 세태에 잠시 쉬고 싶은 곳을 찾는 이들에게 괜찮은 무대가 될듯.(02)2274-1173
  • [대한광장] 밀레니엄 유감

    요사이 시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밀레니엄(millenium)’이다.정부는 ‘새천년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국가 천년대계의 비전을 설계하고,각 지방자치단체도 적지 않은 예산으로 다채로운 행사와 사업을 준비하고있다. 그런데 최근 밀레니엄이 상업성과 결합해 이벤트 중심으로 흐르는 조짐이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관(官)은 비슷비슷한 일회성 행사에 귀한 예산을 중복투자하고,민간에는 ‘밀레니엄 베이비’라는 웃지 못할 기념아(記念兒) 경쟁까지 일어나고 있다.그야말로 1000년이란 문명적 엄숙함은 역설적이게도 1년,아니 순간을 위한 상업성 이벤트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업성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새천년을 맞이하는 철학의 문제이다.1세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1900년 1월1일자 세계 주요신문에는 과학과 문명을 근거로 20세기에 대한 찬미와 낙관적 전망이 줄을 이었다.그리하여 스탠퍼드대학의 조단 총장은 ‘20세기에의 초대’에서 “20세기인(人)은 희망인”이라규정하고 “그는 세계를,세계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일본의 군국주의와 2차세계대전,그리고 긴 냉전이 뒤따랐다.즉 20세기 서양의 현실은 ‘끔찍한 세기’ 또는 ‘극단의 시기’였다. 동양과 아시아의 20세기는 더욱 처참했다.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미국과 베트남 전쟁,중국과 베트남 전쟁,캄푸치아와 베트남 전쟁,이란과 이라크 전쟁,쿠웨이트·미국과 이라크 전쟁,구 소련 중앙아시아 여러나라의 민족분규,최근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 등 많은 전쟁과 수난이줄을 이었다.특히 한반도에는 일본의 한국 병탄과 잔악한 식민통치,미·소에 의한 분단과 한국전쟁,남북의 냉전 등,다른 어떤 곳보다 잔인하였다. IMF사태 전까지만 해도 21세기에 대한 전망은 20세기보다 더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러한 진단은 한편으로는 정보통신혁명 등 생산력의 확장,냉전체제의 해소와 자유주의의 승리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등에 기인한 것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현재가 단지 세기적인 전환이 아니라 그 10배인 밀레니엄이라는 마술 때문이기도 하다. 밀레니엄은 흔히 새 것에 대한 찬미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거느리고 다닌다.그러나 묵은 현실을 갈아 엎지 않는 한 미래는 새 것이 되지 않는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바로 묵은 현실의 과제,즉 1~2년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세기를 넘기면서까지 여전한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새 것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 모태인 현실의 역사적 과제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면,그것은 범죄행위요 사기행각이다. 아마도 21세기 한반도에선 20세기에 당면한 과제들이 여전한 화두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분단과 통일,민주주의의 확대,주변 4강과 한반도 문제 등이여전히 중요한 개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아니 새천년을 여는 21세기 처음10년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역동적으로 표면화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19세기말,그리고 불과 몇년 전,미래에 대한 부박(浮薄)한 기대가 바로 미래에의 몽매를 불러일으켰음을 직시하자. 2세기 전에 태어난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노여워하지 말라’고 노래했다.‘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이기에.그가 노래하고자 한 것은 미래에 대한 부박한 기대가 아니다.아마도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중력(重力)은 없다는 것,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낙관의 신념으로 현실을 개조하자는 것이다.그가 차르(Tsar)를 타도하려는 혁명가 데카브리스트(Dekabrist)였듯이. [都珍淳 창원대 교수·한국사]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국정개혁 보고-金대통령이 공정위서 밝힌 ‘경제개혁론’

    29일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金大中대통령은 재벌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채찍론(論)’등 종전에 비해 명쾌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눈길을 끌었다. ▒사랑의 매는 불가피하다 金대통령은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정부개입의 타당성 논란과 관련,유력 시장경제주의자들의 입을 빌어 정식으로 입장을 피력했다.金대통령은 “울펜손 세계은행 총재와 98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 교수 등이 최근 한국정부의 재벌 구조조정 개입을 정당하다고 평가했다”면서 “시장경제 육성을 위해서는 사랑의 채찍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또 “자유방임경제의 시조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조차 독과점과 불공정행위를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고 소개했다. ▒맹목적인 국산품 애용 시대는 갔다 金대통령은 국제경쟁력이 없는 기업은문을 닫아야 한다고 못박았다.나아가 “지금은 국산품 애용이 애국인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했다.金대통령은 “국산품인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경쟁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면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개혁을 하든지 퇴출당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金대통령은 우리가 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색다른 논거를 제시했다. 그는 “20세기를 돌아볼 때 민주주의는 군국주의 같은 우익독재,공산주의 같은 좌익독재와 싸워 이겼고 시장경제는 우익의 통제경제,좌익의 계획경제 등과 싸워 살아남았다”며 합리적인 대안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정위 토론내용金大中대통령은 공정위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20여분간 보고받은 뒤 30여분간 토론을 벌였다. 金대통령은 먼저 “기업들의 개혁상황을 설명해달라”고 田允喆위원장에게물었다.田위원장은 “지난해 구조조정의 기본 틀이 마련된 이후 기업관행이많이 바뀌고 있다”며 “그러나 6대 이하 그룹은 구조조정이 상당히 진행된반면 5대 그룹은 오히려 경제력집중이 심화된 측면이 있다”고 답했다. 金대통령은 申光湜 KDI 연구위원에게 “5대 그룹으로 경제력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구했다.申위원은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외국인투자를 확대하고 소액주주 집단소송제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金대통령은 이어 “입찰담합이나 하도급비리는 국고의손실을 초래하는데다 부실공사의 근원이 되는 등 국민들을 2중 3중으로 고통받게 한다”고 관심을 표명했다.李漢億 하도급국장은 “대기업들의 우월적지위 남용행위에 대해 적극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21세기는 소비자시대”라고 전제,“소비자의 역할을 확대할만한 정책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에 姜大衡 소비자보호국장은 “12개 소비자보호단체와 정기적 협의를 통해 생생한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라며 “이들을 모니터 요원으로 지명,불공정행위에 대한 감시망으로도 활용할계획”이라고 설명했다. 金相淵 ■금감위 토론내용금감위 국정개혁보고회의는 李憲宰위원장의 보고에 이어 金大中대통령이 실무자들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金대통령은 “부실금융기관 구조조정자금으로 책정된 64조원이 부족하다는얘기가 있다”며 금감위의견해와 대책을 물었다.尹源培 금감위 부위원장은“금융구조조정자금 64조원은 경제여건이 나쁜 상태를 감안,책정한 것으로올들어 경제가 호전돼 64조원으로도 대외신인도를 해치지 않고 금융구조조정을 끝낼 수 있다”고 답변했다.尹부위원장은 부실채권 매입자금으로 책정된32조5,000억원 중 남는 부분을 대한생명과 제일·서울은행의 추가로 발생하는 부실에 충당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金대통령은 이어 “금융기관이 부동산 담보만 믿고 대출해주는 낙후된 금융기법에 의존한 것이 금융부실의 원인”이라며 신용대출 관행을 정착시켜 나가기 위한 방안을 물었다.李晶載 금감원 부원장은 그동안 신용대출이 미진한 요인을 분석했으며,각 은행이 자체개혁을 추진하는 단계에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金대통령은 또 “워크아웃은 기업부실을 빨리 수습해 기업과 은행부실을 동시에 막고자 하는 것인데 경제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 기업들이 이를 회피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金相勳 금감원 부원장은 “주채권은행을 통해 해당기업과 협의하면서 독려하고 있고 신동방그룹 계열 4개사와고려산업이 추가로 워크아웃에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金均美■금융감독위 보고요지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29일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5대 그룹의 자산재평가와 현물출자 등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연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축소하도록 분기별로 이행상황을 철저히 점검하겠다고 강조했다. ▒금융·기업구조조정 경영·금융관행 혁신 등 소프트웨어를 개선하고 신금융지식인을 육성,금융기관 및 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생산성을 높여나간다. 부실 생보사 구조조정에 역점을 두되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수·합병방식 등을 활용하고 대한생명과 같은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생보사에 대한 감독·감시를 강화한다. 금융구조조정 재원 64조원 중 부실채권 매입 재원 12조6,000억원,증자지원재원 8조1,000억원 등 20조7,000억원이 남았지만 공적자금 부족에 대비하고정부출자지분의 회수전략을 세우겠다. 은행들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이행사항을 보다 철저히 점검한다.중소기업에대해 대출금 일괄만기연장 조치를 지양하고 전담역제도를 활성화하며 대출금 출자전환에 힘쓰겠다. ▒금융제도·관행 혁신 금융기관 내부의 의사결정기능과 집행기능을 분리하고 사외이사제를 활성화하겠다.신용정보시스템을 확충하고 합리적인 신용평가모델을 개발한다.어음·수표 담보제공관행 및 연대보증제도를 개선,신용대출관행을 정착시켜 나간다. ▒금융감독기능의 선진화 소비자보호 및 피해구제 기능을 강화하고 금융그룹에 대한 연결감독체계를 구축한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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