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군국주의
    2025-12-19
    검색기록 지우기
  • 롤스로이스
    2025-12-19
    검색기록 지우기
  • 치매안심센터
    2025-12-19
    검색기록 지우기
  • 명절증후군
    2025-12-19
    검색기록 지우기
  • 마지막날
    2025-12-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56
  •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유해 묻힌 감옥일대 개발바람에 파헤쳐져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유해 묻힌 감옥일대 개발바람에 파헤쳐져

    │다롄 박홍환특파원│100년 전 ‘그날’도 이렇게 발해만의 바닷바람은 매섭게 살을 엘 정도로 세게 불어제쳤을까?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은 3월의 막바지에도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다. 마지막까지 안 의사는 ‘고국의 봄’을 그리워하며 찬바람이 뼈를 에는 이국 땅의 감옥에서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사형집행 직전 그는 이렇게 소원했다. “내가 죽거든 뼈를 하얼빈의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조국 땅으로 옮겨다오.” ☞ [사진] 안중근 의사, 그 분은 가셨지만… 안 의사 압송 길을 따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밤 기차를 타고 창춘(長春), 선양(瀋陽), 다롄을 거쳐 24일 오전 도착한 뤼순의 옛 일본군 감옥은 일본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항일 교육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4m 높이의 담장이 700여m에 걸쳐 둘러쳐져 있는 수감시설 면적은 약 2만 6000㎡. 러·일전쟁 승리로 감옥을 포함, 뤼순 전체를 획득한 일본은 패망할 때까지 이곳을 주요 반일 정치범 수용시설로 활용했다. 안 의사와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무수하게 많은 항일 열사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 의사의 묘지가 항일운동의 성지로 활용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일제는 유해를 유족하게 인도하길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담장 밖은 상당히 개발돼 있었다. 2008년 3~4월, 29일간 한국 단독으로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던 곳은 이미 수십층짜리 고층 아파트 여러 동이 들어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로 옆 뤼순감옥 정북 방향 야산도 개발을 위해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만약 이곳에 유해가 있었다 해도 이미 훼손됐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이다. 담장 바로 뒤에는 항만 하역시설에 쓰이는 철골 구조물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섰고, 잇대어 있는 공터에는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는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일용직 노동자)들의 임시숙소가 세워졌다. 공장 직원 등은 안 의사 유해에 대해 무신경하게 “처음 듣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우리 측 일부 인사들이 뤼순감옥 동쪽 500여m 지점을 유해 매장 장소로 지목하고 있지만 이곳에도 이미 저층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 유해를 찾기는 어려워보였다. 우리 정부가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한 한·중·일 3국 간 협력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현실적 여건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해야 그나마 발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측 사정에 밝은 한 현지 인사는 “이미 1960~70년대에 중국과 북한이 여러차례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찾지 못했다.”며 “중국 측은 오래 전에 (유해 발굴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 발굴을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지는 꼴사나운 광경도 펼쳐지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조차 어느 쪽의 유해 관련 정보도 믿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안 의사 추모를 위해 뤼순감옥을 찾은 한 인사는 “이런 모습을 안 의사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100주기를 계기로 안 의사의 정신을 우리 가슴에 묻는 것으로 유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는 낯선 이국 땅에서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글 사진 stinger@seoul.co.kr
  • [열린세상]두 날개로 날아라/오영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열린세상]두 날개로 날아라/오영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도요타 리콜사태가 터진 뒤, 일본 내 반응은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미시장이 회복세를 보이는 시점에 리콜사태가 터진 만큼 자국 자동차업계의 실적에 영향을 끼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둘째, 그간 북미 고급차 시장에 주력해 온 상황에서 강력한 원가절감이 요구되는 신흥개도국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한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셋째, 사태발생 이후 리콜-경영진 사죄-후속조치 발표 등 일련의 수순을 따랐음에도 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도요타 때리기’가 통상문제로 번질까 우려하고 있다. 넷째, 기존 제품에 IT·바이오 등이 부가된 융·복합 제품이 발달하는 가운데 혼을 담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한 우물만 판다는 ‘모노즈쿠리’ 정신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일리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비록 도요타 사태로 다시 불거지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문제가 편향된 글로벌 감각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공세적 글로벌 감각의 문제점이 노출됐는데도 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동북아 국가 중 가장 발전이 더뎠지만 외국문물의 적극적인 수용과 러·일, 청·일전 승리와 조선 강점 등의 수순을 밟으며 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개항 초기 나라의 독립을 걱정하던 순수성이 침략적 군국주의로 변질되면서 패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첫 번째 성찰의 기회였다. 패전국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미국의 원조와 한국전·베트남전은 일본경제에 특수를 안겨주면서 신속한 회복을 도왔고, 급기야 유럽을 제치고 미국과 2강 구도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세계적으로 스시가 최고급 음식으로 대접받자 일본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인 ‘팍스 자포니카’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일본의 공세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유럽이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화 강세에 합의하면서 일본은 다시 위기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성찰의 기회였다.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좋은 상품을 만들기만 하면 판로는 확보되고, 따라서 번영은 계속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적절한 속도의 환율조정을 게을리하다가 갑자기 ‘엔고’를 맞은 일본은 다시 좁은 시야에 갇히고 말았다. 시장개방 같은 보편적인 방법보다 금리인하로 대처했고, 이로 인해 자산에 거품이 일자 금융개혁이 아니라 돈을 풀어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려고 했다.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고, 세 번째 성찰의 기회였다. 그래도 일본 제조업은 여전히 세계 최고였지만, 이번에는 ‘최고의 품질이면 비싸도 괜찮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선진국 소비가 약화되는 시점에 한국이 중간 가격대의 고품질 제품으로 신흥시장에서 성과를 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에야말로 구태의연한 관행의 타파와 전방위적 혁신을 통해 편향된 글로벌 감각을 바로잡아야 했지만, 처방은 원가절감이었고 결국 도요타 사태를 맞았다. 네 번째 성찰의 기회가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일본은 20세기 초 부국강병의 길을 걸으면서 이웃국가와 공존·공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미국경제가 하락세로 접어든 1970~1980년대에는 세계 최고를 지향하면서 상호주의를 망각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서는 종합산업이라는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외부 환경의 변화를 놓치고 말았다. 일본사회와 일본기업, 나아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기세를 올릴수록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잘나가던 기업이나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는 거의 언제나 혼자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세적·일방적 글로벌 감각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그간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외향적 글로벌 감각이 커갈수록 국제사회가 믿고 따르는 규범·가치관·제도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그 기업과 사회는 안팎으로 균형 잡힌 글로벌 감각을 두 날개 삼아 다양한 행위자가 공동으로 엮어가는 네트워크적·소통적 세상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 [특파원 칼럼] 안중근 순국 100주기를 맞으며/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안중근 순국 100주기를 맞으며/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일주일 뒤인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는 일주일만에 뤼순 감옥으로 압송돼 144일 동안 수감돼 있다가 ‘동양평화’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죽거든 뼈를 하얼빈 공원의 한쪽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던 그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주지 못한 못난 후손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이국 땅에서 구천을 헤매고 있을 안 의사 혼령은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비록 사형집행으로 완성은 못 했지만 그의 구상이 오롯이 담긴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체 구성,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이 핵심이다. 공교롭게도 100년이 지난 지금 한·중·일 3국 간 비슷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3국 정상회의가 정례화됐고,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논의가 시작됐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회의체와 유사한 ‘동아시아 공동체’ 어젠다도 이미 제안된 상태다. 안 의사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는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베이징에서 업무를 본 뒤 도쿄의 저녁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됐다. 3국 간 관계는 지난 100년 이래 최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민감한 현안들이 적지 않다. 한·일 및 한·중 간의 역사인식 문제, 한·일 및 중·일 간의 영토 문제, 청산되지 않은 전후 보상 문제…. 서로에 대한 작은 배려에도 인색한 것이 지금의 3국 관계이다. 지난해 안 의사 거사 100주년 취재를 위해 하얼빈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한·중 공동세미나가 열렸지만 정작 주인공인 안 의사의 이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중대사는 약식으로 열린 기념식 행사에도 참석조차 못 했다. 안 의사가 ‘동아시아 공동의 적’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역 제1플랫폼에는 암호 같은 세모와 네모 표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뤼순의 여행책자에는 안 의사가 수감됐던 뤼순감옥에 대해 “1909년 10월26일, 조선의 애국지사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일본 군국주의 두목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같은 해 11월1일 뤼순감옥에 투옥됐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중국인들 조차 ‘아시아 제일의 의협’으로 안 의사를 칭송했다. 순국 100주년을 맞아 민간단체와 국회의원들이 하얼빈과 뤼순 현지를 찾아 추모식을 거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조차 발굴하지 못했으니 현지에서 추모식을 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남북 민간단체 공동 추모식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를 추모하겠다는데 어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처지도 아니다. 게다가 안 의사는 중국인들에게도 뚜렷하게 각인된 항일투쟁열사 아닌가.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은 당시 일본의 관할하에 있었던 곳이다. 중국의 수많은 항일투쟁열사가 안 의사와 마찬가지로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일본은 관동군 사령부를 뤼순에 설치한 뒤 중국 침략을 자행했다. 중국으로서도 근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땅이다. 그런 점에서 안 의사 순국 100주기가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안 의사가 브라우닝 권총으로 날려 버리려 했던 침략과 반목의 역사를 100년 만에 끝장내고, 동북아 평화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안 의사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희망이기도 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안 의사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까. “나의 전쟁이 헛되지 않았구나.” 대국적인 차원에서 오는 26일 현지에서 열릴 추모식에 대한 중국 측의 배려와 참여를 기대해 본다. stinger@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야스쿠니의 어제와 오늘

    [한·일 100년 대기획] 야스쿠니의 어제와 오늘

    │도쿄 박홍기특파원│야스쿠니(靖國)신사의 겨울은 비교적 한산했다. 지난달 30일 주말임에도 관광객들이나 젊은 남녀, 나이가 든 시민들이 이따금 참배할 뿐, 여느 신사나 다름없었다. 신사의 초입에 진을 치던 노점상도 없었다. 계절 탓도 있지만 야스쿠니는 예전과 같지 않다. 버팀목이었던 자민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하토야마 정권에서는 ‘야스쿠니신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스쿠니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내전에서 숨진 병사들의 제사를 위해 세워진 신사로 전국 8만여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쇼콘샤(招魂社)로 불리다가 1879년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엔 전몰자의 추모 및 호국신사로 자리매김했다. 일왕이 직접 참배, 군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절대적인 역할을 맡았다. 패전 뒤 야스쿠니는 연합군총사령부의 강요에 따라 추모시설 대신 종교시설로 전환했다. 하지만 추모 기능은 유지됐다. 야스쿠니는 메이지유신 이후 군인·군속 등 전몰자 246만여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한국인도 2만여명에 달한다. 야스쿠니가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도조 히테키를 비롯,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하면서부터다. “전범재판은 승자의 일방적인 재판이다. 합사에 문제가 없다.”는 게 야스쿠니 측의 입장이다. 야스쿠니 본전 옆에는 침략전쟁을 미화·찬미하는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이 자리잡고 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은 A급 전범 합사 후 “깊은 화근을 남기게 될 것”이라며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재임시절 8·15 종전일에 노골적으로 야스쿠니를 찾았다. 고이즈미 이후 총리들은 한국·중국 등의 반발을 의식, 참배를 자제했다. 야스쿠니의 존재 의미는 지난해 9월16일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출범과 동시에 축소됐다. 하토야마 총리는 ‘8·30 중의원선거’ 전부터 “나와 각료들은 야스쿠니를 참배할 생각이 없다.”고 공언했다. 또 야스쿠니를 대체할 국립추모시설의 건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실제 하토야마 정권의 각료들은 단 한명도 지난해 10월 야스쿠니 추계대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의 위기감은 전몰자 유족모임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다. 후쿠오카현 유족연합회는 최근 야스쿠니 측에 합사된 A급 전범 14명의 분사 방안을 제안했을 정도다. 다만 야당으로 전락한 자민당의 야스쿠니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자민당은 지난달 24일 “보수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면서 올해 ‘행동강령’에 야스쿠니 참배를 명문화했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6) 일왕과 군국주의

    [한·일 100년 대기획] (6) 일왕과 군국주의

    한·일 병탄 100년을 맞은 올해 양국간의 최대 관심사는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여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양국 간의 우호적인 발전을 위해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초청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일본 정치권도 한국 내 여건이 충분히 조성됐다고 판단되면 일왕의 방한을 신중히 고려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일왕의 역할과 방한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흑선을 몰고와 개국을 요구한 뒤로 일본은 구미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식민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부국강병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쳐 한국을 병탄하고 중국을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탱해준 게 바로 근대 일왕제의 이데올로기였다. ●일왕은 군국주의 지탱해준 이데올로기 메이지 정부가 1877년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을 상대로 일본에 유리한 조일수호조약을 강제로 맺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민족주의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일왕과 관계없던 일반 국민은 제2차세계대전에 패할 때까지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열광적으로 숭배했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은 군부의 주도로 일왕 중심의 ‘황국사관’과 일왕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를 강조했다. 초대 ‘진무 천황’이 즉위한 이래 124대 ‘천황’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왕위가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왕실이 단절된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논리를 내세워 국민을 선동했다. 일왕이 통치하는 일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광신적인 국수주의로 질주했다. 일왕의 절대적인 권력은 1889년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확립되고 이로써 일왕은 정치대권과 군사대권, 제사대권을 일신에 독점하는 현인신(現人神)이 되었다. 헌법은 외견상으로는 입헌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왕주권과 신성불가침을 법적으로 명시했다.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일왕이나 일왕제에 대한 비판은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에 따라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패전 후 미국의 지시에 의해 일왕의 지위를 ‘상징’으로 규정한 것은 일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과 일왕 신격화에 의한 국민통합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후 일본은 일관되게 일왕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일왕제를 국민통합의 한가운데에 놓으려 노력해 오고 있는 중이다. 전쟁 이후에도 일왕 및 일왕제에 대한 비판이나 불경스러운 언행은 종종 우익의 공격대상이 됐다. 대부분의 우익은 일왕제라는 일본의 ‘국체’ 자체를 절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왕제라는 시스템의 전통 속에서 국민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요소를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일왕제가 표면적으로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심으로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위기에 직면하면 할수록 일왕제의 전통적인 요소를 이용해 국민통합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위기때마다 일왕제에 기대 실제로 일부 정치인은 일왕을 활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총리는 일왕을 거론하며 중의원 선거에 활용했다. 1992년 아키히토 일왕의 중국 방문은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던 중국과의 관계개선과 중국 시장 공략의 일환으로 성사됐다. 최근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이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방일시 관례를 깨고 일왕의 면담을 긴급히 추진한 것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왕의 한국 방문은 또 다른 논란을 확대시킬 공산이 커 보인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방한이 추진되고 있지만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일왕제가 일본 사회속에 불가결한 시스템으로 존속하는 한 근대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 전공 교수는 “일왕의 방한을 통해 양국 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면서 “일왕의 중국 방문 이후에도 중·일이 과거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반성 없는 일왕방한 과거사 면죄부 우려”

    [한·일 100년 대기획] “반성 없는 일왕방한 과거사 면죄부 우려”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는 “일왕의 방한은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서 “방한을 계기로 향후 양국 관계에 있어 카드(협상 우선권)를 일본에 넘겨줄 수도 있다.”며 경계했다. →역대 한·일 관계에서 일왕의 역할이 어떠했나. -해당 시기에 따라 일왕의 정치적 역할이 달랐다. 메이지 일왕은 조선 병합에 관여했고, 다이쇼 일왕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와 일왕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군국주의를 선동했다. →일왕의 시대적 역할이 달랐지만 총체적으로 일본을 군국주의로 내몬 것은 일왕제에 대한 폐해 때문이지 않나. -일왕은 군부를 명령할 권한이 있었다. 내각이 있었지만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등 군 통수권자를 일왕이 실제로 지휘했다. 중국과의 전쟁은 군부가 일왕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결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왕은 전쟁 상황에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중 모든 보고가 일왕에 보고됐다는 점에서 일왕이 태평양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평가가 진실에 가깝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일왕과 군부중에서 누가 더 크나. -군부가 일왕을 앞세우고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일본 재벌의 책임은 없나. -일본 재벌은 우익의 속성을 지녔고, 일왕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한 또 다른 세력으로 평가받을 만 하다.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없고, 아무런 대가없이 일왕이 방한하는 게 실익이 없다는 차원에서 반대한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지난해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친일파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특히 기존에 독립유공자로 분류됐던 장지연 등 20여명의 이름이 이 사전에 올랐지만, 국가보훈처가 이에 대한 입장표명을 보류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보훈처 관계자는 19일 “친일인명사전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공적 자료 등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보훈처는 보훈대상 후보의 공적 사항만을 검토하는 곳이어서 친일행위를 평가할 권한이 없다.”고 말해,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강점기역사 체계적 극복 실패 친일파 처벌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친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한 광복 이후 우리 역사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36년간의 암흑기를 체계적으로 극복해내는 데 실패했다. 일제는 한·일병탄 후 한국인의 동화를 표방하며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내지(일본)인과 반도인을 차별하면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국민적 일체감을 강조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률이 급등하면서 동화도 가속화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인 출신 교사, 보통문관시험을 거친 하급행정관료·경찰의 비율도 급격하게 올라갔다. 지원병·징병 형태로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만도 20만명이었다. 참전을 독려해 친일파로 지목된 춘원 이광수도 “조선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행위였다.”라고 했다. 이런 현실은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인적 청산에 장애가 됐다.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반민족행위자 등을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개념화했지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더구나 친일청산 문제는 미군정 지배와 근대화 시대를 거치며 경제성장에 떠밀려 제대로 된 논의나 통합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간간이 학계를 중심으로 친일청산 문제가 거론됐지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시작된 인적청산 과정은 “역사학적 영역에 속한 부분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반대 논리에 부닥쳤다. 최근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문제도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광복 직후 객관적 사실에 따라 어떤 수준까지를 친일로 할 것인지 하는 잣대를 마련하지 못한 한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면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엄격한 잣대가 민족을 둘로 갈라놓을 수 있다.”고 했다. ●“인적청산 정치논리로 재단 안돼” 친일청산의 한계는 정권마다 출렁인 한·일 관계에도 원인이 있다. 제헌국회는 1948년 10월 친일파 처벌에 대한 의지를 최초의 특별검사로 불리는 반민특위 조직으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사회 주류층을 형성해온 친일파를 흡수한 이승만 정권이 그들을 처벌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민특위는 출범 1년만에 공소시효 단축과 특위 폐지의 외압에 시달렸다.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김구 선생 암살 등으로 특위는 사실상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대상 7000여건 중 221건만 기소하고 12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지만, 그나마도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5·16을 통해 장기집권에 돌입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인 반일 감정을 토대로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이끌어내며, 한·일병탄의 무효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조약 문구로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미국의 지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지목된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다. 군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정권 역시 과거사 청산에는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각각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지만 과거사 청산, 한·일 관계 개선보다는 경제 개발 자금 조달 창구인 일본을 압박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방일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에게서 각각 “진심으로 유감”, “통석의 염(念)”이라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한·일 미래지향적 신뢰구축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한·일 간 최대 이슈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에게서 처음으로 식민지배 인정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받아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열었다. 시민 중심의 과거사 청산 운동에 불을 댕겼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군사정권을 거치며 정치·경제 논리에 파묻혔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논쟁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54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내각의 전향적인 과거사 인식 전향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문제가 보·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또다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양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과거사에 결부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사이가 되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진실을 왜곡한 채 이뤄지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양국 모두 대내외적으로 진실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 김정은기자 cool@seoul.co.kr
  • [월드 뉴스라인] 日극우단체 또 조선학교에 난동

    지난달 4일 교토에 위치한 조선제1초급(초등)학교에서 행패를 부렸던 일본의 극우단체들이 지난 14일 또다시 학교 앞에서 난동을 벌였다. 17일 시민단체인 ‘조선학교를 지지하는 모임’에 따르면 극우단체인 ‘재일(在日)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 소속 회원 50여명이 14일 오후 2시쯤 조선제1초급학교 앞에서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들고 학교 주변을 돌며 확성기로 “조센진(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은 돌아가라.” “조선학교를 부숴버리자.” 등의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 “조센진들은 밤길을 조심하라.” 등의 협박도 했다. 때문에 학교 측은 정상적인 수업을 실시하지 못했다.
  • 베토벤 교향곡 ‘합창’ 세밑 한국·일본서만 왜 인기일까

    베토벤 교향곡 ‘합창’ 세밑 한국·일본서만 왜 인기일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등 내로라하는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제야(除夜) 무대에 이 곡을 올린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정작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과 미국의 송년무대에서는 이 곡이 빈번하게 연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만 ‘합창’이 자주 울려퍼진다는데 그 이유는 뭘까. 28일 음악계에 따르면 이런 이유를 독일 나치즘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대학 음악과 교수는 “나치는 자국민(게르만 혈통) 우월주의와 전체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독일 출신 작곡가 베토벤의 ‘합창’을 대중 선동(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애용했다.”면서 “이 때문에 일부 유럽의 오케스트라들은 연주를 꺼린다.”고 설명했다. 독일의 영향을 받은 일본 군국주의자들도 국민 일체감 조성을 위해 ‘합창’을 애용했다. 예컨대 징집 명령을 받은 학생들에게 이 곡을 들려주는 식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최근 “일본인이 지금도 합창 교향곡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은 군국주의 부산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전후(戰後) 일본 경제의 추락 속에서 일본 오케스트라들은 ‘눈물겨운 생존전략’으로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소속 교향악단은 새해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민간 오케스트라들은 이듬해 살림밑천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합창’을 연말 ‘대목’에 경쟁적으로 올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관례로 굳어졌다는 분석이다. AFP통신에 따르면 ‘합창’은 해마다 12월25일부터 31일까지 일본에서 하루 평균 다섯 번 이상 연주된다. 즉, 우리나라가 클래식 음악을 미국과 유럽이 아닌, 일본에서 받아들인 만큼 일본의 이런 관례를 그대로 이어받은 측면이 짙다는 지적이다. 연유야 어떻든 세밑 연주곡으로서의 ‘합창’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은 “곡의 4악장 ‘환희의 송가’에는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베토벤이 (곡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인류애”라면서 “연말에 모두가 함께 되새기기에 좋은 주제”라고 강조했다. 극적 피날레(종결부분)도 연말 축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설명이다. 민 교수도 “합창 교향곡이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악용된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지엽적인 부분”이라며 섣부른 배척을 경계했다. 이어 “합창은 위대한 작곡가(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이라며 “이런 상징성이 한 해의 마지막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연말에 들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30일 ‘합창’을 연주하는 서울시향 측은 “합창이 워낙 대곡이라 지휘자나 단원들이 한 해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선호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한·일 모두 야스쿠니 극복해야 근대성 확보”

    “한·일 모두 야스쿠니 극복해야 근대성 확보”

    광복절을 즈음해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인 홍성담(54)씨가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연작을 서울 견지동의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 평화공간에서 선보인다. 2004년 학고재 전시 이후 5년 만에 서울에서 여는 개인전이다. 작은 공간이 3개로 나뉘어진 전시장에 들어서면 각각의 그림보다도 가장 먼저 화려한 보라색과 분홍색의 향연이 눈에 들어온다. ●“야스쿠니 한꺼풀 벗기면 일왕 나와” 홍씨는 14일 기자들과 만나 “보라색과 분홍색 점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그린 것”이라며 “벚꽃이 일본에서 다산성과 생명력을 뜻하던 명치유신 이전의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등 일본 문학에서 벚꽃은 주로 ‘죽음의 미학’으로 표현되지만, 이것은 1800년대 후반 일왕제의 강화와 군군주의의 탄생에 낭만주의 문학이 결합돼 나타난 집단 히스테리적 현상이라고 홍씨는 지적한다. 그는 왜 야스쿠니를 비판하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 홍씨는 “일본 친구들을 만나면 뭔가 억압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져보니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이라면, 일본에서는 일왕이었다. 그런데 야스쿠니를 한꺼풀 벗기면 나오는 것이 일왕이기 때문에, 일왕제도를 비판할 수 없는 일본인들은 야스쿠니를 비판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왕제도에 대한 비판이 막혀 있다면,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도 없다는 게 홍씨의 생각이다. 그렇게 야스쿠니 신사 연작은 2006년부터 시작됐다. 야스쿠니 신사에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전사자들의 얼굴 위로 위안부로 끌려가야 했던 꽃다운 한국인 소녀들의 모습들을 겹친 그림, 야스쿠니 신사가 지닌 역사적 문제의 핵심에는 일왕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천황과 히로시마 원폭’이라는 그림도 그렸다. 핵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배경 속에 히로히토가 이른바 일본의 ‘3종의 신기’인 청동거울과 칠지도, 굽은 옥을 들고 있는 그림이다. 물론 3종의 신기는 장난감 거울과 문방구 칼, 도자기 파편으로 바꿔놓았다. 홍씨는 “8월15일 패망하자 일왕은 일본 국민들에게 ‘3종의 신기를 지켜야 국체가 보장된다.’고 했다는데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도 아니고, 국민의 희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풍자하기 위해 그렸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그림이 2007년 일본 도쿄에서 전시됐을 때 그의 친구들(좌익 또는 시민운동가) 대부분은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을 ‘우익’이라고 칭했던 노부부도 홍씨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태평양 전쟁때 울어야 할 것을 지금 와서 울게 됐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인 내면에도 야스쿠니 신사 존재” 홍씨는 “우리는 일본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지만, 알게 모르게 한국인 내면에도 야스쿠니 신사가 존재한다.”면서 “일본 국민은 물론 우리 국민도 이것을 극복해야만 진정한 근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야스쿠니의 미망(迷妄)’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순회전은 도쿄를 거쳐 지난해 제주에서 열렸으며, 오는 31일까지 서울 전시 후 오키나와와 타이베이, 독일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글ㆍ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막대한 사료 분석해 청일전쟁 세밀하게 묘사

    ‘구한말 러시아 외교관의 눈으로 본 청일전쟁’(제노네 볼피첼리 지음, 유영분 옮김, 살림 펴냄)은 동양사와 동북아 외교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주요 참고문헌으로 자주 인용되는 책이다. 그러나 번역서로 출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국에서 최근 영인본이 재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청일전쟁의 주무대였던 우리나라에서는 번역 출판이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일본과 중국의 방대한 사료를 분석, 전쟁이 끝난 지 1년 만에 이토록 상세한 전쟁사를 발간할 수 있었다는 점은 지금처럼 정보 공유가 쉽지 않았던 100여년 전 일임을 감안할 때 매우 놀랍다. 동양 문화와 역사에 대해 상당 수준의 지식을 자랑하며 일본과 중국의 사료와 출판물, 외교 문서 등 수집 가능한 막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단히 체계적으로 전쟁의 전말을 상술하고 있다. 저자는 고조선 성립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한·중·일 삼국의 역사적 관계를 개괄하면서 청일전쟁이 중국과 일본의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종주권을 둘러싼 수천 년에 걸친 뿌리 깊은 역사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연상시키는 웅변조의 어투로 전쟁의 주요 장면마다 간략한 논평과 분석을 곁들였다. 당시 극동 지방에 거주하였거나 여행 중이던 서양인의 인식 틀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번역을 하면서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전쟁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점에 있다. 번역하면서 참고했던 그 어느 서적보다 집중적으로, 상세하고 밀도 있게 청일전쟁을 기술하고 있다. 전쟁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벌거벗은 채 원시적 공포와 잔인함, 분노와 대면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마치 오래된 무성 영화를 관람하듯 전장의 긴장과 공포, 흥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 전쟁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꼼꼼하게 양국의 전략과 전술, 부대 전개 방식, 군대 편제, 무기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초기 전쟁 무대인 한반도 주요 요충지에 대한 지리적 정보 외에도 김옥균 암살과 고승호 침몰, 상하이 조계지 일본인 학살 등 몇몇 사건에 대한 상술을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다시 관심권에 떠오르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일반 대중의 관심으로부터는 차츰 멀어져 갔던 만주 지역의 자세한 지리적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흥미롭다.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지는 10년 후 발발한 러일전쟁의 접전지이자 과거 만주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고구려의 주요 요새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 사료를 주로 참고한 까닭에 일본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언급들이 있으나 이 또한 당시 일본의 정보력이 그만큼 앞섰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편향이 책 자체의 가치를 심하게 훼손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한 편향조차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의 ‘한국관련 서양고서 국역출판사업’ 2007년도 지원도서로 선정돼 이번에 출판됐다. 유영분 역사서 전문번역가
  • 60년만에 나치 극복… 애국심 되찾는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독일인들이 스스로 애국심을 되찾기 시작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구스타프 하이네만 전 서독 대통령은 1969년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 못한다. 내 아내를 사랑할 뿐이다.”라는 말로 개인과 국가의 단절을 토로했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더이상 국기를 내걸고 국가를 부르는 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무공 훈장을 돌려주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군국주의를 배격하고 반전으로 급격히 선회한 독일에선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던 얘기다. 뒤셀도르프 정체성 재단이 내놓은 최근 ‘독일의 정체성’ 연구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8년전보다 두 배 더 조국을 “매우 자랑스럽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73%의 응답자가 자신이 독일인인 것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답했다. 자신감 회복은 유난히 목소리가 도드라진 최근의 외교정책에서도 배어 나온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위시한 독일정부는 자국의 자동차산업을 비호하고 금융위기에 대해 강한 목소리를 내며 적극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유럽연합(EU)에 대한 참여도 활발하다. 최근 독일 서점가나 TV채널에서도 이런 현상이 또렷이 감지된다. 프러시아 왕국, 중세 등 자국의 다양한 시대를 굽어보는 역사책들이 대거 출판되고, TV에선 수시간씩 히틀러 통치 시절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전파를 타고 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일제 징용자 미불임금 4조원 받을길 없나

    일제 징용자 미불임금 4조원 받을길 없나

    내년은 대한제국이 군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식민지배 하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들은 해방 후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게 많다. 강제징용자의 미불임금 문제도 그 중 하나다. 19일 오후 10시에 방송하는 KBS 1TV 시사기획 쌈 ‘공탁금 2억엔의 비밀’편은 한일합병 100년을 앞두고 일제하 강제징용과 미불임금 문제를 집중 취재해 밝힌다. 취재진은 일본 국립 공문서관에 보관된 강제징용자들의 미불임금 자료를 지역별, 탄광별로 우선 확인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4만명 징용자들에게 퇴직금, 후생연금, 예금 등을 지불하지 않은 채 아직 보관하고 있다. 2008년 7월 기준으로 그 잔고가 2억여엔, 시세를 적용해 따져보면 현재 우리 돈으로 4조원에 이르는 돈이다.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정부는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일본에 받는 대신 개인들의 모든 대일 청구권을 포기했다. 이에 강제징용 피해자들도 미불임금을 받을 수 없게 됐고, 일본 정부 역시 지금까지 피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05년에 들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강제징용자 지원에 나섰다. 작년까지 접수된 피해 사례가 22만건, 그 중 보상 지원은 1만여건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미불임금을 일본에서 돌려받은 경우는 없다. 역사적 사실 공개를 꺼리는 일본이 관련자료를 넘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있었던 일본 상대 미불금 반환 소송도 대부분 기각됐다. 취재진은 실제 관련 소송을 진행했던 징용피해자를 만나 사연을 들어 보고,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끌려갔던 일본 노동현장의 흔적도 따라가 본다. 또 정부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본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아직도 日제삿밥 먹는 아버지…”

    “아직도 日제삿밥 먹는 아버지…”

    “억울하게 일제의 제삿밥을 먹고 계신 아버지 넋의 한을 언제나 풀어드릴 수 있을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인 이희자(66)씨는 지난 24일 일본 도쿄 지방법원 원고석에서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태평양전쟁 한국 유족 252명을 대표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합사취하, 유골반환, 손해배상청구’ 상고심 최후 진술을 한 자리에서였다. 할머니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최후의 호소였다.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분위기의 싸늘한 항소심에서 기댈 건 ‘인륜’밖에 없었다. “아버지 자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는 게 제 인생에 남은 과제고 소원입니다. 바로 제 아버지 이름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빼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강제징용된 뒤 생사여부도 끊어진 아버지를 찾아 헤맨 지 올해로 20년째. 이씨는 1997년에야 중국 광시성 유장(柳江)현 전투 중 사망한 아버지 이사현씨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장돼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2002년 소송을 시작했지만 2006년 5월 재판부는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240여만명의 일본인 이외에 2만 1000여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은 유족들에게 사망통지를 하거나 위패 봉안 사실을 알린 적이 없다. 생존자 중 엉뚱하게 합사돼 있는 이들 숫자는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합사는 합당한 의무였다고 주장한다. 이씨가 그동안 합사 철폐를 위해 현해탄을 오간 횟수만 90여차례. 3·1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지만 애끓는 심정은 여전하다. 그는 “금전적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협정때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외면하지만 유족들 입장에선 절대로 끝난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생사여부도 알려주지 않아 피해자들이 일일이 관련 기록을 찾아 발로 뛰었어요. 진상규명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한국정부에서도 모른다고 했고…제사도 한번 제대로 못 차려 드렸는데 후손들에게 어떻게 끝난 일입니까.” 이씨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그는 2001년 8월14일 아버지 이름을 위패에서 빼달라는 요청서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던 날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일본인들이 “더러운 조센징, 들어오지도 말라. 꼴도 보기 싫으니 물러가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이씨는 그때 더욱 맘을 굳혔다.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 등 일본 군국주의의 혼이 모셔진 곳입니다. 일제 피해자인 아버지 넋을 그런 곳에서 쉬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사측이 전몰자들의 개별명부(제신명부)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삭제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이씨는 단호하다. “신사 안에 있는 위패(영새부)에 새겨진 아버지 이름이 완전히 지워지는 날까지 싸움을 계속할 겁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전여옥 폭행사태 진짜 테러맞나 휴가 내놓고 ‘출근하시는’ 우리 부장님은 7억에 살수있는 세계의 집 TV 없이도 vs TV가 없으면 미친 금값, 팔땐 왜 이리 쌀까
  • [정윤수의 종횡무진] 하루키가 달리는 이유

    ‘인간실격’으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지독한 자기 환멸과 근원적인 절망감 때문에 자살했을 때, 동시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이를 경멸하면서 말했다. “그런 성격 결함의 절반쯤은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로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말한 미시마 유키오 역시 자살을 했다. 그런데 그 사유는 다자이 오사무와 다르다. 다자이 오사무가 내면에 대한 불안의식과 일본 사회의 과잉된 우경화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면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파시즘 부활을 외치며 할복 자살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작은 ‘금각사’. 이 소설은 유일무이한 미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불을 지르고 만다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뒤 미시마 유키오는 보디빌딩으로 제 육체를 단련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세계,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힘과 미와 열정이 충일된 세계. 그것을 동경한 미시마 유키오는 현실 속에서 이를 충족하기 위해 군국주의 부활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마침내 할복자살했다. 육체에 대한 과도한 몰입, 스포츠에 대한 지나친 열병, 강한 힘에 대한 한없는 동경. 이러한 것이 때로는 치명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미시마 유키오는 보여준 것이다. 스포츠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대단히 유연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역설적으로 가르쳐 준 것이다. 스포츠는 힘 자랑이 아니며 남에게 으스대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완벽하고 강한 힘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여리고 시들고 병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의무다. 건강한 스포츠 정신이란 이처럼 상반된 것에 대하여 균형 있는 시각을 갖는 것이다. 또 한 명의 일본 소설가가 있다.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는 널리 알려진 마라토너이다. 마라톤 풀코스를 25회나 완주하고 100㎞ 울트라마라톤에도 성공한 작가다. 소설가하면 골방에서 담배나 연신 피워대야 어울릴 법한데 하루키는 지금도 매일 같이 달리는 작가다. 전업 작가가 된 32살 때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하루 두 갑 이상 담배를 핀 체인스모커였으나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어 버렸다. 그는 매일 달린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3시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나머지 1시간은 달리기 위해 빼놓았다. 그는 예술이란 몸 안에 든 독을 빼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독을 빼내기 위해서 소설가는 건강해야 하는데 랭보, 다자이 오사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같은 소설가는 그 독에 물려 죽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최근 발간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 펴냄)에 보면 하루키는 언젠가 죽고 나면 묘비명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고 써주길 바란다고 했다. 한번은 어느 친구가 “신체 장애가 있고 스포츠를 못하는 사람도 좀 생각하라.”고 지적을 했다. 하루키는 이에 대해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무신경하게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1998년 6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마라톤 15km 코스에 동반자로 참가한 적이 있다. 어느 시각장애인과 끈 하나로 연결를 마주 잡고 달린 것이다. 그 ‘행복한 경험’을 마친 후 하루키는 썼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애가 신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체를 진정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이 겨울, 땀 흘리며 스포츠에 몰두하고 있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새해 덕담이다. 스포츠 평론가 prague@naver.com
  • 스탈린·히틀러, 같은 듯 다른 ‘20세기 쌍둥이 독재자’

    스탈린·히틀러, 같은 듯 다른 ‘20세기 쌍둥이 독재자’

    1941년 6월22일 독일은 180만 병력을 투입해 소련을 기습공격했다.독일군은 2개월 이내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키예프,레닌그라드,모스크바로 진격했다.하지만 막강한 소련군에 막혀 전쟁은 4년이나 지속됐고,상황은 역전되어 1945년 4월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했다.히틀러의 최대 적수는 미·영 연합군을 이끈 처칠이나 루스벨트가 아니라 동시대 최악의 독재자로 쌍벽을 이룬 스탈린이었던 것이다. 히틀러(1889~1945)와 스탈린(1879~1953).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두 사람이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했더라면 어땠을까.아마도 세계의 운명은 한층 비참하고 끔찍했을 것이다.실제 스탈린과 히틀러도 이런 생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스탈린은 “독일인과 함께했다면 우리는 무적이었을 것”이라고 했고,히틀러는 “양측에서 냉철한 현실주의의 정신을 지녔다면 영구적으로 동맹할 수 있는 상황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고 술회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왜 스탈린과 정면대결을 벌였을까.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조행복 옮김,교양인 펴냄)은 두 체제의 성립 배경과 작동 방식,이데올로기적 지향의 닮은 점과 차이점을 다면적으로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 같은 물음에 해답을 제시한다. 두 독재 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발판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패전 후 러시아는 차르 제국에서 공산주의 공화국으로,독일은 권위주의적 제국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폭력과 경제 위기가 촉발됐다.공통으로 발생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소련에서는 부르주아를 파멸시켜 혁명에 유리하게 작용했고,독일에서는 파산한 예금주들의 분노가 히틀러식 민족주의의 등장에 기여했다.공산주의 소련과 1914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국제 사회로부터 천민 취급을 받았으며,고립감 때문에 한층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갔다.이것이 결국 독재 체제를 출현시켰다. 국가 운영에서도 비슷했다.대중의 지지를 구하고 유지한 방식,국가의 억압을 확립하고 법률 제도를 파괴한 방식,문화의 전유와 착취,대중적 군국주의의 표현과 총력전 수행에서 그렇다. 하지만 두 체제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스탈린은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건설을 공언했지만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했다.히틀러는 볼셰비즘을 서구 문명의 생존을 위협하는 주적(主敵)으로 보았다.반면 스탈린은 히틀러의 독일을 가장 위험한 제국주의 국가로 믿었다.독재자의 DNA를 공유했던 두 사람 사이에는 이처럼 한쪽을 파멸시켜야 한쪽이 살아남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1990년대 이후에 발굴된 수많은 통계와 연구논문들,독재 체제를 살았던 실존 인물들의 증언과 기록 등 방대한 자료 분석을 근거로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그 중에서도 두 독재자가 어떻게 그토록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는지를 분석한 대목은 흥미롭다. 지은이는 독재자와 국민의 관계가 복잡하고 양면적이었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했다고 지적한다.국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폭력,경제적 궁핍의 시절을 보냈다.위기에서 구해 줄 영웅을 갈구했고,두 지도자는 이들의 심리적 불안정과 지도자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독재 체제가 대중의 갈채와 참여,무제한의 권력에 대한 매혹이 길러낸 대중주의적 독재체제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위기는 진정한 영웅을 만들기도 하지만 최악의 독재자를 탄생시키기도 한다는 역사적 사실은 총체적 경제난국으로 전 세계가 신음하는 이때,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교훈이 아닐까.4만 5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 24일 밤 해킹 파문

    ‘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 24일 밤 해킹 파문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가 사이버 공격에 함락됐다. 산케이신문 등 일본 언론은 “지난 24일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 홈페이지(www.yasukuni.or.jp)가 누군가에 의해 해킹 당했다.”고 보도했다. 야스쿠니 신사 공식 홈페이지의 해킹 소식은 24일 밤 11시 경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메인 페이지에 커다란 중국 국기와 함께 ‘Hacked By 小饭, Beach, RichMan, s4t4n’, ‘2008년 12월 24일’이란 글이 화면에 나타났다. 신사 측은 “홈페이지가 해킹 당했다는 제보 전화를 받고 메인 페이지의 글이 바꿔치기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25일 오후 1시 현재까지도 홈페이지는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다. 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는 과거에도 해외에서 사이버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현지 언론은 일시적으로 중국국기가 표시된 점과 해커의 아이디 중 하나가 ‘小饭’이란 점으로 미루어 중국인의 소행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진=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문설주 기자 spirit0104@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우주를 꿈꾸다] (하) 아시아 강자 꿈꾸는 일본

    [우주를 꿈꾸다] (하) 아시아 강자 꿈꾸는 일본

    │쓰쿠바 류지영특파원│“지금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것이 일본이 자랑하는 H-2A 로켓 모형입니다.교토에서 이곳까지 신칸센을 타고 오는 데 2시간30분이나 걸리셨죠? 하지만 이 로켓을 타면 도쿄에서 교토까지 2분 정도면 갈 수 있어요.이 로켓이 얼마나 빠른지 잘 아시겠죠? 도쿄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이바라기현 쓰쿠바 시.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우주센터는 이미 이곳의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이날 교토에서 찾아온 관람객들도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자국의 로켓 기술에 자신들이 스스로 놀라는 눈치다. JAXA는 지난 2003년 일본 우주 개발 정책을 담당하는 우주과학연구소,항공우주기술연구소,우주개발사업단 등을 통합해 만들어졌다.JAXA의 쓰쿠바 우주센터는 현재 일본 우주개발을 책임지는 곳이자 연간 10만여명의 관광객이 찾는 과학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8명의 우주인 보유한 우주강국 전시관 한쪽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우주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자국의 우주개발 현황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끊임없이 방영되고 있다.바로 1992년 미 우주왕복선 스페이스셔틀에 탑승했던 일본 최초의 우주인 모리 마모루다. 일본 우주개발 역사는 올해 첫 우주인을 배출한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다.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태풍 속에서도 일본은 지난달 자신들의 8번째 우주인 야마자키 나오코(37)의 탄생을 기념했다.여섯 살 난 딸을 둔 가정주부이자 일본의 두 번째 여성 우주인인 그는 2010년 2월11일 발사 예정인 미 우주왕복선 애틀랜티스호에 탑승하게 된다. 예정대로라면 일본은 2013년 착륙선을 달에 보내 달 표면 물질을 가져오고 2025년에는 달에 유인기지를 건설해 자원도 탐사할 예정이다.미국의 아폴로 11호 이후 최대의 달 탐사 계획이다. 이 모든 것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세계 2위의 경제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 우주개발의 역사는 로켓의 역사 쓰쿠바 우주센터에 놓여 있는 길이 50m의 H-2A 로켓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우주산업의 역사는 ‘로켓 발사체’의 발전사로 봐도 무방하다. 1954년 맥아더 사령부가 로켓연구를 허가한 뒤로 일본은 꾸준히 로켓을 개발해 왔다.현재 유럽연합(EU),러시아로 양분돼 있는 로켓 발사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2011년 발사 예정인 우리나라의 다목적 실용위성 3호의 발사체 또한 H-2A 로켓 추진체를 만드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우선협상 대상자다. 일본 최초의 로켓은 1955년 도쿄대 생산기술 연구소에서 제작된 ‘연필로켓’이다.지름 1.8㎝,길이 23㎝,무게 175g의 소규모로 총 29기가 만들어져 고도 1㎞를 비행했다. 이후 1965년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와 로켓 연구팀,도쿄대학 항공연구소가 통합된 ‘우주항공연구소’가 발족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1975년 최신형 소형 과학관측 로켓인 ‘S-310’을 발사하고,1980년에는 ‘S-520’ 과학 관측로켓도 개발했다.1981년에는 항공우주연구소가 문부성의 독립적인 우주과학연구소(ISAS)로 재발족됐다. 지난 1994년 정지궤도 발사체인 H-2 발사체 발사 성공을 계기로 일본은 현재까지 1500여기의 발사체를 생산했다.현재는 H-2로켓을 계량한 H-2A 로켓이 주 기종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 2001년 8월 이후 지금까지 92.9%의 발사 성공률을 보이고 있다.반세기 동안 지속된 로켓 개발 노력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것이다. ●로켓·위성기술 세계최고 수준 그렇다고 일본의 우주기술이 로켓 한 분야에만 국한돼 있는 것은 아니다.위성 기술 역시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다. 실례로 지난해 10월 JAXA가 쏘아올린 달 탐사위성 ‘가구야’는 달 남극 부근 새클턴 분화구의 지표를 관측해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를 담아 왔다.그 결과 가구야가 관측한 지역에는 얼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미국 과학지 ‘사이언스’에 발표,달의 물 존재여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이러한 성과는 다중목표·입체촬영 고속기동 자세제어 기술 등 첨단 위성 기술이 바탕이 된 덕분이다. 일본은 세계 네 번째로 1972년 첫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렸지만 2003년 상업용 인공위성 발사에 실패하면서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위기 타개를 위해 320억엔(약 4800억원)을 투입해 본격적인 달 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이것이 바로 ‘셀레네’다. 가구야는 셀레네 프로젝트의 첫 탐사 위성이다.이미 일본은 미국,러시아,영국 등과 함께 자체 로켓 발사능력 및 위성개발 능력을 보유한 최고 기술수준국가(A그룹)로 분류된다. 현재 일본은 우주관련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우주이용을 평화목적에 한정하고 있는 우주기본법을 “인류의 활동영역과 지적 영역의 확대,미래의 신기술·새로운 산업 창출 등에 크게 공헌하는 것”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우주개발을 명분 삼아 군국주의를 부활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superryu@seoul.co.kr
  • [신경림의 누항 나들이] 10년 공든 탑이 허물어져서야

    [신경림의 누항 나들이] 10년 공든 탑이 허물어져서야

    “남 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 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등의 내용을 담은 10·4 선언을 발표한 것이 불과 1년 전이다.마침내 개성 관광과 남북 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깝다.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나는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이 남쪽 당국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국에 이르는 길을 지혜롭게 피할 길은 정말 없었을까.하긴 새정권이 들어서면서 처음부터 좀 아슬아슬했다.책임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앉을 사람들 거의가 지난 10년간의 남북협력을 퍼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헛공사로 치부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앞으로도 대화와 협력은 하되 주는 것만큼 받아내야 한다는 말은 딴은 틀린 말만은 아닐 터이다.왜 주기만 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느냐는 핀잔도 터무니없는 트집은 아니다.문제는 그 뉘앙스에 있다.아무리 가난한 이웃이라도,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주제에 말하면 들을 것이지 무슨 잔말이냐는 투의 막말을 견뎌낼 인내심은 갖기 어려우리라.가진 것이 없을수록 자존심이 그 삶의 버팀목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이런 가운데서 3월달 북쪽은 남북 경협 사무소에서 남측 직원을 추방한다는 분풀이를 했고,그것이 금강산에서 비무장 관광객을 쏘아 숨지게 하는 참사로 변형되어 나타났다.물론 이 불상사만 놓고 보면 북한이 책임을 져야 하며 사과하는 것이 마땅했다.하지만 우리도 그들에게 변명할 빌미를 만들어 주면서 금강산 관광 중단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막았어야 했다.이때는 당연히 지난 10년간 남북협력을 이끌어 온 인력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남쪽은 쌀도 비료도 없는 그들이 끝내는 굽히고 들어올 것이라는 오만한 낙관 속에서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남 북 협력에서 우리는 퍼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인식부터가 문제다.정말 얻은 것이 없는가.햇볕 정책 10년 동안에 수백 만 명이 금강산을 다녀오고 평양을 방문하고 개성을 오갔다.그러면서 북한의 실상을 보았고,주체사회의 허구를 간파했다.그러고도 사회주의로의 통일을 고집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거나 멍텅구리다.남북 협력 비용의 몇 배를 들여서도 불가능한 의식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이산가족의 만남도 작은 성과로 보아서는 안 된다.개성공단으로 대표되는 남북의 경협은 꺼져가는 우리 경제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이다. 남북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걱정이다.서로 왕래도 대화도 없는 옛날의 냉전시대로 되돌아간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그래도 개성공단을 남겨 놓은 것은 북한이 한 가닥 소통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암시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우리도 이 마지막 길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우선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6·15와 10·4 선언은 양쪽 정상의 약속인 만큼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10년간 남북 협력에서 활동한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또한 주기는 주되 준 만큼 받아낸다느니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이 우리의 목표라느니 하는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소리는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북한이 크게 신경질을 내는 전단지 살포는 당장 끝내는 것이 당연하다. ‘민족치매’란 말은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가 러일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후기에서,러일전쟁 후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민족을 가리켜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대서 한 말이다.남북 소통이 완전히 막히면서 드디어 다시 준냉전체제로 돌아간다면,개념은 다르지만 우리야말로 꼼짝없이 우리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민족치매’에 걸린 민족이 되고 만다. 그래도 개성공단을 남겨 놓은 것은 북한이 한 가닥 소통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암시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우리도 이 마지막 길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 신경림
  • 아소 ‘극우본색’

    |도쿄 박홍기특파원|전통적인 극우 성향의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대동아전쟁’을 꺼내 들었다. 취임한 지 7일만이다. 이르면 다음달 초순에 치러질 중의원 선거를 겨냥, 전통적인 보수·우익 세력의 결속을 의식한 계산된 발언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아소 총리는 지금껏 창씨개명, 위안부,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과 관련, 숱한 망언을 쏟아냈지만 대동아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처음이다. 아소 총리는 30일 오후 총리실에서 일본의 과거 전쟁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일·청, 일·러(전쟁)와 이른바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과는 조금 종류가 다르다.”고 말했다. 또 “메이지 헌법 이래 약 120년, 일본의 역사로서 자랑할 만한 역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역사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대동아전쟁 자체가 일본이 2차대전 때 군국주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건 용어라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아시아가 대동 단결해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한다.’고 주장했다. 2차대전 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총사령부(GHQ) 측은 공문서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금지했다.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도 ‘태평양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용될 뿐이다. 이종원 릿쿄대 교수는 “아소 총리의 발언이 돌출적이라고 봐 넘길 수만은 없을 것 같다.”면서 “외무상 시절, 역사적 발언에 대해서는 조심해 왔던 그”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대동아전쟁을 언급함으로써 우파적 색채를 분명히 드러내려는 속셈 같다. 이게 끝이 아닐 수 있다.”고도 했다. 아소 총리는 외무상 시절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를 의식,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자제하며 실용적 외교를 펴왔던 터다. 일본의 한 외교 소식통도 “정권 유지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서 경기부양책으로 국민을 달래는 동시에 극우적 발언으로 보수·우파의 결속을 노리는 전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구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도 야스쿠니신사의 참배를 강행, 보수·우파들의 이탈을 막았던 정치 수단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아소 총리는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인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2차대전을 당시 어른들은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고 논란의 확산을 경계했다. 아소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어렸을 때부터 많은 영향을 끼친 일본 보수정치의 뿌리인 외조부 요시다 전 총리를 꼽고 있다. 아소 총리는 지난 25일 자신을 ‘호전적 국수주의’라고 비판한 미국 뉴욕타임스(NYT)에는 “국수주의자인지 아닌지 간에 내가 애국자라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hkpark@seoul.co.kr ■아소 총리의 주요 망언 ▲2003년 5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 일본은 한글 보급에 공헌했다.”(도쿄대 축제) ▲2005년 10월-“우리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미국의 알링턴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다.”(영국 옥스퍼드대 강연) ▲2006년 8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 “중국이 중단을 말하면 말할 수록 가지 않을 수 없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 더 피우고 싶은 이치다.”(자민당 총재 선거 유세) ▲2007년 3월 “(일본의 요르단계곡 개발과 관련) 일본인은 신용이 있다. 푸른 눈에 금발이었다면 아마 안됐을 것이다.”(나가사키 강연)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