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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의날 행사 간소화/계룡대서 기념식… 인원·장비 대폭 줄여

    국군의 날(10월1일)행사가 간소화된다. 국방부는 7일 올 국군의 날 기념행사를 종전의 여의도광장에서 육·해·공 3군본부가 있는 계용대 연병장으로 옮겨 종전의 10분의 1 수준인 2천4백56명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경비도 종전보다 20억원이 준 19억원 정도면 충분하게 됐다. 국방부는 올행사에 육·해·공군의 전투병력과 화력시위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각군 의장대 및 군기단 군악대등 의전행사 병력과 3군·간호사관생도만 참가토록 했다. 장비도 90년 행사에는 항공기·방공·기갑등 5백49대를 동원했으나 이번에는 항공전력위주로 1백4대로 축소하고 초청인사도 5만명에서 8백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상이군경용사·무공수훈자등 「노병」들을 주로 초대하기로 했다.
  • 국가유공자 생활보호대책 절실

    ◎보상금 등 최저생계비에도 미달/경제수준 맞게 연차적 지원 확대 독립유공자·상이군경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금등 생활보호대책이 미흡하다.국력신장과 함께 국가보상정책이 양적인 확대와 질적인 발전을 계속해 왔지만 아직도 개선할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보훈대상자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이 도시근로자 최저생계비에 훨씬 미달할 뿐 아니라 주택지원이나 취업알선·의료보호사업도 취약한 실정이다. 현재 국가유공자는 애국지사 4천명,전상군경 4만9천명,군경유족 7만4천명,무공수훈자 4만명,기타 4·19의거 희생자,재일학도의용군,순직·공상공무원 7천명등 모두 17만4천명. 국가유공자는 지난 61년 8월 처음 대상자가 결정될때만 해도 전공상군경과 유족에 국한시켰으나 그 이후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이 본격화되면서 애국지사,4·19의거희생자,재일학도의용군등이 추가됐다.연금지급대상은 아니지만 공상·순직공무원·무공수훈자등도 국가유공자에 포함됐다.61년 당시 국가유공자는 15만명이었다. 국가유공자와 유족에게는 기본연금과 부가연금,그리고 수당형태의 보상금이 지급된다.이들은 모두 매월 28만2천2백원의 기본연금을 받고 있으며 공헌도와 희생도가 높은 애국지사,중상이자나 고령자에게는 별도의 부가연금이 차등지급되고 있다.생계곤란자에게는 생활조정수당이 지급되고 있어 수준의 적정성여부를 떠나 일견 다양한 형태의 급부가 행해지고 있다고 보인다. 올해의 경우 총 5천3백78억원의 보상금이 책정돼 1인당 평균 37만원이 지급되고 있다.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은 보상금 이외에 의료보호및 주택지원·취업보호를 받는다. 애국지사와 상이군경 공상공무원등 장기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서울·부산·광주등 3개 보훈병원에서 국비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응급 또는 단기진료를 받는 환자로 지정된 전국 26개 병원에서 위탁가료를 받는다.그러나 병원의 병상과 진료시설이 크게 부족해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보훈가족에게 직장을 알선해주고 있는 취업보호사업은 84년부터 시행된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업체규모별로 4∼7%범위에서 의무고용토록 하고 있으나 인식부족등으로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 보훈예산규모는 올해 6천2백54억원으로 정부 예산의 1.6%를 점하고 있다.61년 당시 2%선이던 것이 87년에는 0.8%수준으로 격감하였다가 88년 이후 보상금수준의 개선에 힘입어 91년에 다시 2%선으로 올라선 이래 최근 다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가유공자 및 유족의 평균 연령은 60세를 넘어서는등 전반적인 노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이들은 보상금등 직접적인 지원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높고 노후생활을 위한 복지수요를 요구하는 층이어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보훈처는 이에따라 보상금수준을 우리의 경제수준에 맞는 수준으로 연차적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 보상금 결정방식에 객관적인 지표를 도입,제도화 해나가는 한편 불균형한 대상별·등급간 보상금 수준을 합리적으로 개선할 방침이다. 또 노령대상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지방보훈병원 정양및 휴양시설,시도별 복지회관 고령자 전용아파트등의 복지시설을 신설하거나 늘려나갈 계획이다. 유공자들의 공헌과희생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고 단순히 도와 주어야 할 계층으로 부담스러워 하기 보다는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 오늘 현충일

    제38회 현충일 추념식이 6일 상오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서 황인성국무총리 이만섭국회의장 김덕주대법원장 조규광헌법재판소장등 3부요인과 이병대국가보훈처장 전몰군경유족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된다. 이날 추념식은 상오10시 정각 사이렌소리에 맞춰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에 대한 묵념,3부요인등의 헌화및 분향,황총리의 추념사에 이어 시인 박두진씨의 헌시 「아,현충일」낭송,서문여고 합창단의 「현충의 노래」순으로 진행된다.
  • 독신 보훈대상자 노후 지원/김 대통령 지시

    ◎17만명에 국가유공증서 수여 김영삼대통령은 4일 대학생 폭력시위와 관련,『학생들이 인공기를 내걸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겠다던 약속을 어기면서 폭력시위를 해 국민들을 불안케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국가보위차원에서 법이 법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폭력학생들을 엄히 다스리겠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낮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보훈단체장과 시도별 모범상이군경및 미망인등 국가유공자 53명을 청와대로 초청,전국 17만여명의 유공자들에게 수여되는 대통령 명의의 「국가유공자증서」를 직접 수여하고 오찬을 함께 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김대통령은 『국가유공자의 연금을 97년까지 월 40만원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지난 대선때의 공약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김대통령은 또 『현재 추진되고 있는 대전보훈병원과 지방단위 상이군경복지회관 건립계획이 차질없이 이뤄지도록 하고 6·25때 전상을 입고 후손이 없이 혼자 살고있는 보훈대상자들의 노후대책을 적극 강구토록 하라』고 배석한 이병대보훈처장에게 지시했다.
  • 6월은 호국 보훈의 달/17만명에 유공자증서 수여

    6월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 정부는 문민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이번 호국보훈의 달 행사를 민족정기 선양과 국민의 나라사랑운동으로 승화 발전시킨다는 방침에 따라 대통령명의의 국가유공자증서수여,모범국가유공자포상,보훈병원 입원환자및 무의탁 노령유족위문,보훈가족돕기운동,전국 상이군경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 국가유공자 및 유족들의 명예와 긍지를 높여주기 위해 오는 4일 수여되는 대통령명의의 유공자 증서를 받을 사람은 모두 17만4천8백여명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날 상오 가족 가운데 3인이상 전사한 유족 15명,상이군경 15명,미망인 15명,단체장 8명등 53명을 청와대로 초청,유공자증서를 직접 전달하고 위로할 예정이다. 2일에는 전국상이군경체육대회가 보훈병원에서 열리며 6일 상오10시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국립묘지,전국 각지역 현충탑 등지에서 제38회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고 25일에는 6·25 43주년 기념행사가 각 시도재향군인회 주최로 개최된다.
  • 군경 7백명·헬기까지 동원/주유소 연쇄강도 주범 검거(조약돌)

    ○…경기·강원·충북일대에서 17차례 발생했던 주유소 연쇄강도사건의 주범 경흥현씨(27·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구읍리)가 지난 25일 상오4시30분쯤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일명 투다리고개에서 붙잡혔는데 검거 과정에서 군·경찰 7백여명에 헬기까지 동원돼 대간첩작전을 방불. 훔친 차를 타고 투다리고개를 지나던 범인 경씨는 이날 앞서가던 차량이 빗길에 미끄러지며 길가 배수로에 빠지는 바람에 멈춰 있다가 사고처리를 위해 경찰이 출동하자 놀라 차를 버리고 산으로 도주. 수배차량임을 확인한 경찰이 병력을 동원하고 군부대에 병력과 헬기를 요청해 산속을 이잡듯 뒤진 끝에 22시간만에 부근 공장창고에 숨어있던 범인 경씨를 체포.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명하의사(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대만서 일 육군대장 구니노 암살/“적을 알아야…” 22세때 처자등지고 도일/중국침략 앞둔 일군수뇌에 독검 던져 『나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조국광복을 못본체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황해 송화서 출생 1928년 약관 24세의 나이에 대만에서 일본의 왕족을 쓰러뜨린 조명하의사.조선생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까지 조국광복의 염원을 소리높여 외쳤다. 1905년5월11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이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에 탄압받던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조선생은 1926년3월 신청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선생과 노백린선생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듣고 우국남예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그무렵 아들 혁래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부인 오금전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길에 조선생은 갑자기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채 돌아섰다.처자식을 만나 마음이 흔들릴지도 몰라 자기를 채찍질했던 것이다.그리고 여중구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선생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땅에 상륙했다.대판에서 공장직원·상점원등으로 일하면서 대판상공전문학교 야간부에서 고학하던 조선생은 수학과정에서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모욕적 언사를 수없이 당하면서 조국독립의 염원을 굳혀갔다. 그러나 대판에서는 일본인 수괴를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조선생은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일단 대만으로 향했다. 중국 상해로 직행하는 것은 일경들의 통제와 감시가 철저해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로서 비교적 여행이 자유로운 대만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갈 속셈이었다. ○상해 임정 가던 길 조선생은 1927년11월 대만에 도착,대중시 계광로 52번지에 있는 부귀국이란 찻집에서 매달 10원을 받고 일하면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제하에서 고통을 받고있는 대만 원주민들의 실상을 대하게된다. 일제는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일군의 산동성출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전진기지로서 대만은 주요 위치에 있었다.이때문에 많은 일군 병력이 대만 각지 요소에 배치돼 있었고 이들 대만 주둔 일군을 특별검열하기 위해 검열사가 파견되었다. 조선생은 검열사 구니노 미야가 일본왕가 숭광왕의 장인이며 육군대장으로 군사참의관이라는 사실과 대중에서의 일정을 알아 냈다. 「대중에서 일국왕족인 검열사 구니노 미야를 내손으로 주살하며 우리겨레의 한을 풀리라」­거사결의는 돌보다 굳었다. 오매불망의 의지를 다진 조선생은 대중역에서 지사관사에 이르는 노정과 일박예정인 지사관사 부근의 정황등을 세밀히 정찰했다. 마침내 5월14일 운명의 날이 밝아오자 결연한 마음을 다지며 칼에 극약을 칠한 다음 이를 가슴에 품고 예정장소로 나갔다.도로 양쪽에 물샐틈없이 늘어선 경비군경들. 지사관사에서 구니노 미야를 태운 무개차가 상오 9시55분쯤 사거리지점에서 좌회전하려는 순간 선생은 독칼을 뽑아들고 날쌔게 자동차 뒤쪽에 뛰어올랐다.실로 순식간이었다. 위험을 느낀 운전수는 속력을 냈고 무개차에 동승했던 대소무관장이 구니노 미야의 몸을 감쌌다. 그순간 조선생은 그를 향해 독검을 힘껏 던졌다.그러나 칼은 목을 스쳐 가벼운 상처를 입힌뒤 운전수의 등에 맞앗다. ○중상 구니노 숨져 조선생은 아수라장이 된 그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고 일군경들에게 포박을 당하였다. 그해 7월18일 대만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황족위해와 불경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조선생은 3개월뒤인 10월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할 말이 없는가』라는 형리의 질문에 『아무 할말이 없다.벌써 각오하고있는 바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생이 순국한지 3개월17일뒤인 1929년1월27일 구니노 미야는 독기가 온몸에 퍼져 목숨을 잃었으니 선생의 거사가 성공한 것이다. 선생의 유해는 1931년4월중순쯤 고향인 장천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유택이 마련됐다. 조선생에게는 63년3월1일 건국훈장 독립훈장이 추서됐다.
  • “북한 최고인기 소프라노는 왕선화”(북한 이모저모)

    ◎주택 3만호 휴전 40주전 완공독려 ○노동신문 사설 통해 촉구 ○…평양시내 창광거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최근 대형 붕괴사고가 발생,2백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지난달 30일 현재 평양에 건설중인 3만세대의 살림집 건설을 오는 7월 휴전협정 40주(7·27)까지 완공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은 이날 당기관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평양의 3만세대 주택을 조속히 완공하는 것은 올해 건설분야의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하고 주택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건설자들과 군인들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발휘,공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이어 3만세대 주택건설을 조기 완공하기 위해서는 공사속도를 높이고 맡겨진 과제를 일정대로 차질없이 수행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시멘트·골재 등 자재의 적기공급 ▲인력활용의 극대화 ▲조직체계의 확립 ▲지방의 관련부서 지원강화를 촉구했다. 이 신문은 또 공기단축과 함께 질적인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한장의 벽돌을 쌓고 한평의 미장을 해도 질을 보장하는데 힘을 넣어야 하며 훗날에도 가서도 떳떳이 자랑할 수 있게 든든하고 보기좋게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예술」지 최근호 소개 ○…북한음악계에서 현재 최고의 대우와 인기를 받고 있는 「고음」(소프라노)여가수는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원인 인민배우 왕선화라고 평양서 발행되는 예술잡지 「조선예술」 최근호가 소개했다. 해방전 황해도에서 출생한 왕선화는 서울에서 음악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6·25동란중 북한군경비사령부 협주단에 입단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50년 12월 23일 김일성 참석하에 가진 공연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치하」를 받은 후부터 일취월장한 왕선화는 혁명가극 「피바다」를 비롯해 「밝은 태양아래에서」「밀림아 이야기하라」등 14편의 가극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았으며 62년 「공훈배우」가 된데 이어 68년 11월 26일 평양대극장에서 공연시 김정일의 눈에 들어 가수 겸 「지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음악무용가이야기 「낙원의 노래」등에서 주인공과 방창을 잘 지도했다는 이유로 77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그후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며 예술학 준박사학위까지 받았다고 이 잡지는 전했다. ○LA폭동 피해보상 주장 ○…북한은 지난달 29일 미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 1주년을 맞아 이 사건이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정책」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인동포들에 대한 피해보상 및 보호대책 수립을 촉구했다. 북한은 이날 「처신을 바로하는 것이 좋다」제하의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사건당시 한인동포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인종·민족차별정책 때문』이라고 지적,『동족이 미국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데 대해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다』면서 그같이 주장했다. 북한은 이어 미국이야말로 『세상에서 인종차별·민족차별이 가장 극심한 인권의 불모지』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인권상황을 거론하는 것은 『인권유린자로서의 저들의 추악한 정체를 감추고 인권몽둥이를 휘둘러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해 보려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 북한군부 원로는 누구인가

    ◎오진우/인민군 창건 주역… 20년간 군대부 군림/「빨치산」으로 김일성과 인연… 한때 숙청/최광/60년대 군외교전담한 대표적 강경파/김철만/백학림/김정일체제 구축한 소년유격대 출신 먼저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76·인민군원수).그는 당 정치국상무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겸직하고있는 권력서열 3위의 군부1인자.1917년생으로 함북 무산출생인 그는 만주 간도지방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유격대 활동을 벌인 것으로 돼있다. 해방후 인민군창군에 관여했고 6·25때는 766유격부대장으로 참전했다.전후 군단장 공군참모장을 거쳐 60년대 서열 24위의 노동당중앙위원이 됐다.그는 69년 김일성이 당시 민족보위상이던 김창봉등 10여명의 빨치산파 장성들을 제거할때 앞장서 그공로로 같은해 2월 군총참모장에 올랐다.그후 76년 인민부력부장에 발탁됐고 이때부터 20년 넘게 군대부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 다음은 현 군총참모장 최광(인민군차수).권력서열 8위인 그는 오와 동갑내기로 역시 함북에서 태어났다.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35년경부터 빨치산에 가담한 이래 소련도피시절까지 김일성과 함께 움직였다.인민군창설때 제1사단장에 임명됐으며 일찍이 63년 총참모장에 오르는등 박성철이나 오진우보다 진급이 빨랐으나 69년 군부숙청때 군부내 반당음모를 제때 보고하지않았다는 이유로 탄광노동자로 쫓겨났다. 그러나 최는 이시절 모범적인 행동과 충성심을 과시,10년만인 77년 황남도 인민위원장에 기용됨으로써 권력일선에 복귀했다.그후 80년 당 정치국후보위원에 복귀한 그는 88년 김정일세대의 군부내 선두주자인 오극렬을 제치고 군총참모장에 재기용 됐다. 최와 함께 90년 권력서열 19위의 정치국 후보위원과 국방위원으로 10년여만에 권력무대에 복귀한 김철만역시 이른바 항일유격대출신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항일빨치산 출신인 그는 67년 부참모장에 기용된 이래 군사대표단으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으나 80년이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1918년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보기드문 남한출신으로 3·1운동무렵 만주로 온가족이 이주,만주에서유격활동을 펼치다 46년 뒤늦게 입북해 군사령부의 작전군관으로 군경력을 시작했다.6·25때는 민족보위성 작전참모를 지냈으며 65년 중장으로 제2군단장을 거쳤다. 오진우 최광과 함께 대표적 강경파로 꼽히는 김철만이 90년 재기용되자 당시 혁명1세대들이 여전히 북한통치권력의 핵심실세가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었다. 노동당 중앙위원겸 중앙군사위원이며 인민군차수로 치안과 대민사찰기구인 사회안전부 총수인 백학림(72)역시 이들 3인보다 연배는 다소 낮지만 대표적인 빨치산출신.그는 국방위 위원인 이을설(호위총국장·차수) 주도일(평양방어사령관·차수)당 중앙위군사위원인 이두익(차수)등과 함께 10대중반부터 이른바 소년유격대원으로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항일빨치산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은 6·25때 연대장으로 참전한후 민족보위성 정치안전국장·안전호위처 사령관등 전형적인 정치군인의 길을 밟아 85년 사회안전부장에 발탁돼 김정일체제구축에 앞장서왔다. 이들에 이어 북한군부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총참모장오극렬(인민군대장)을 필두로 김두남당중앙군사위원 김강환중장 최상욱중장 이봉원인민군대장 이하일당군사부장등 혁명2세대.이들은 한결같이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으며 군내 김정일친위그룹을 이루고있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이중 김일성의 옛 전우 오중흡의 아들이라는 오극렬은 김정일의 오른팔로 알려진 대표적인 차세대 선두주자.1931년생인 그는 64년 소장,71년 공군사령관을 거쳐 79년 총참모장과 당 정치국후보위원이 되는 초고속승진을 거듭하면서 군부내 김정일세력구축에 앞장서왔다.
  • 군기강 확립과 지휘관 문책(사설)

    군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특히 북한의 남침위협에 항상 직면해 있는 우리의 안보상황에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그럴수록 오늘의 문민정부,문민시대를 맞은 단계에서는 체질개혁을 통한 군의 건전한 육성 유지가 절실히 요구된다. 강하고 건전한 군대가 되려면 무엇보다 군의 기강확립이 우선돼야 한다.특히 지금과 같은 시대적 변혁기에는 이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것이다.군의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는 안보도 민주화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엊그제 서울 도심에서 발생한 무장탈영병의 총기난동사건과 관련,군당국이 즉각 소속 부대장들에게 지휘책임을 물은 것은 군의 기강확립 차원에서 지극히 당연한 조치라고 본다.이번 일이 흔히 국가사회적 전환기에 있을 수 있는 일실의 사고라 하더라도 국민에게 준 충격과 군 전체의 사기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신한국」 창조를 위한 자체개혁에 이미 착수한바 있다.군구조개선을 비롯해 장병들의 처우개선 및 복무증진등 5대 과제를 내걸고 하나하나 착실히 추진해 오고 있다.김영삼 대통령의 새정부 출범후 각 분야에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과 변화」에 발맞추어 군도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군의 기강이 어딘가 해이해져 있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리가 없다. 더욱이 이번 사고에서 드러난 병사의 신상관리와 총기·탄약관리 체제의 허술함은 또다른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는 최근 군수뇌부가 대폭 교체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일선지휘관이라면 이런 때 일수록 사전에 예방을 철저히 했어야 했다.이번에 사고를 낸 사병은 근무이탈 전력이 있는등 문제사병인데도 그 중요한 병기고 열쇠를 맡겼다고 한다.있을수 없는 일이다. 군과 경찰이 무장탈영병에 대해 신속히 대처하지 못해 무고한 시민이 피해를 당했다는 점에서도 문제는 크다.또 소속부대에선 뒤늦게나마 탈영사실을 알고도 문책이 두려워 상부에 제때 보고하지 않았고 무장탈영병이 군경합동 검문소를 6곳이나 무사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원인을 철저히 가리는 한편 전반적인 점검이 실시돼야 한다.아울러 군의 새 지휘부는 모든 장병과 함께 심기일전,국민의 군대로 거듭 나려는 자기 쇄신에 매진해야 할줄로 안다.
  • 탈영병 서울도심서 총난사/수류탄도 터뜨려

    ◎행인 1명 숨지고 6명 중경상/군과 교전끝 총상입고 잡혀 무장탈영병이 한낮 서울도심 주택가에서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기를 무차별 난사,시민 1명이 숨지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탈영병은 난동 40여분만에 출동한 군저격병이 쏜 총에 얼굴·배 등을 맞아 중상을 입고 붙잡혀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은뒤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19일 상오11시35분쯤 육군15사단(사단장 김현대소장)전차대대소속 임채성일병(20)이 서울 종로구 명륜동1가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앞길에서 행인들에게 총기를 난사,오토바이를 타고가던 고성주씨(51·성북구 동소문동 5의86)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최정석씨(27·동숭화랑직원)등 행인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임일병은 군경이 추격하자 길가던 김순애씨(37·여·성북구 성북동 58의18)를 인질로 잡고 성균관대 쪽으로 2백50여m쯤 달아나면서 가정집 안으로 수류탄 1발을 던지고 행인들에게 마구 총을 난사했다. 임일병은 이어 상오11시50분쯤 명륜동1가 동호목욕탕 옆골목으로 달아나 주차해 있던 봉고차를 타려다 김씨가 반항하자 총을 쏴 중상을 입힌뒤 군경과 10여분간 대치,낮12시4분쯤 저격병의 총을 맞고 붙잡혔다. 임일병은 이에앞서 이날 상오5시30분쯤 K1소총과 실탄 1백30발·수류탄 18개를 갖고 강원도 철원지역에 있는 부대를 탈영,인근 근남면 사곡2리 2반 남현우씨(32)집에 들어가 가족들을 위협,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은뒤 강제로 남씨 소유의 강원6라 3069호 봉고차를 몰게해 서울로 들어왔다. 임일병은 지난해 전북 정읍 T종고를 졸업한뒤 같은해 8월 자원입대,수도기계화사단에서 단기하사 교육을 받던중 근무이탈로 구속돼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현재의 부대에 재배치됐었다.
  • 군경 검문검색 체계에 “구멍”/무장탈영병 난동의 문제점

    ◎4시간만에 서울 잠입… 검문 2번뿐/경찰 뒤늦게 출동… 도주로 차단 실패 19일 발생한 무장탈영병 총기난동사건은 수류탄과 실탄을 가진 탈영병이 겹겹이 설치돼 있는 검문소를 거의 제재를 받지않고 통과,수도 서울까지 들어왔다는 점에서 군경의 검문검색활동에 적지않은 허점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또 자격에 결격사유가 있는 병사를 병기를 담당하는 보급담당요원으로 삼은 것도 군인사및 군병기관리에 문제점이 있음을 노출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전화기의 군기강 해이에서 빚어진 어처구니 없는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임채성일병은 서울로 오기까지 4시간여동안 2번만 검문검색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임일병이 속해있는 군단의 관할지역내에만 검문소가 6개나 있는데다 군단지역외에 서울로 오기까지는 최소한 2∼3개의 검문소를 더 통과해야 하는데도 임일병은 상오7시20분 군부대 이웃과 상오9시30분 광릉검문소등 2곳에서만 검문을 받아 군의 검문검색 위수지역관리 등에 큰 맹점을 드러냈다. 또 임일병이 서울에 잠입한 뒤에도 1시간남짓 서울경찰지휘부가 자리를 비워 경찰지휘계통의 공백상태를 보인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날 서울시내 과·서장등 총경이상 고위경찰간부들은 상오9시30분부터 11시20분까지 서울시청에서 계속된 서울시 대통령업무보고에 참석,모두 자리를 비워 탈영병 임일병이 상오10시34분 동대문 이스턴호텔에 나타났을 때까지도 경찰은 지휘부의 통솔을 받을 수 없었다. 경찰은 뒤늦게 「번개작전」에 나섰으나 임일병이 혜화동까지 진출할 때까지 도주로를 차단하지 못했다. 지난해 태인종고를 졸업한 임일병은 그해 8월 자원입대,수도기계화사단에 배치돼 단기하사 교육을 받던 중 근무이탈로 구속기소돼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강등된 뒤 현부대에 재배치됐다. 또 중학2년때 머리와 장파열로 입원치료를 받은 뒤 성격이상 증세를 보여왔으며 지난해 4월에는 서울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돼 보석으로 풀려난 경력이 있는데도 하사관학교에 아무 문제없이 입대했고 자대에 배치된 뒤에도 탄약을 관리하는 2·4종 병과로 무기고열쇠를 관리해 온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임일병의 일기장에는 『거지가 되더라도 이승보다 저승이 낫다』『육단리­다목리­사창리­춘천(2시간소요)­대전­태인』등의 글이 적혀있어 사전에 탈영준비를 철저히 했던 것으로 나타나 문제사병에 대한 지휘관의 관리도 허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전방부대의 경우 해당 지휘관이 매주·매월마다 문제사병과의 면담 등을 통해 이상유무를 상급지휘관에게 보고해야 하는데도 탈영과 전과경력이 있는 임일병의 경우 전혀 그런 조치가 없던 것으로 밝혀져 이번 사고는 충분한 사전대책 미흡으로 발생한 사고였다고 할 수 있다.
  • 브라질 인디언/야노마미족 멸족 위기

    ◎채금꾼과 충돌,질병도 만연… 2천명 사망 일확천금을 노리는 수많은 채금꾼들이 브라질의 야노마미족 인디언보호구역에 몰려들면서 이 지역의 환경이 심하게 파손되고 있다.게다가 채금꾼들이 퍼뜨리는 질병으로 세계 최대의 석기시대종족인 야노마미족은 종족말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야노마미족 인디언 보호구역에 채금꾼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값비싼 금과 다이아몬드·주석 및 그밖의 광물질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밝혀진 지난 87년 이후.그러다가 브라질과 베네수엘라가 접경한 서북부의 아마존 우림지대의 구획정리작업이 끝난 지난해 6월이래 야노마미족 땅에는 채금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현재 이들의 숫자는 4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채금꾼들이 브라질국내에서도 몰려들고 인접국가로 부터 유입되자 그들과의 무력충돌 또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모두 2만여명의 야노마미족 가운데 약 2천명이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환경주의자들의 채금꾼 퇴치압력을 받아온 브라질정부는 지난 90년 군경합동으로 「밀림해방작전」을 전개했다.그 결과 약 1백50명의 채금꾼들을 체포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추방했다.이와 함께 밀림속에 가설된 10여개의 활주로를 파괴하고 수톤의 채굴장비를 압수했다. 브라질정부는 지난해 지구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직전 9천명의 야노마미족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의 인디애나주보다 큰 9만5천8백30㎦의 땅을 보호구역으로 설정했다.그러나 그뒤 일반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는 사이 중무장한 채금꾼들이 인디언보호구역에 비인디언의 출입을 금지하는 법을 어기고 들어가기 시작,야노마미족 땅에서 금을 캐왔다. 채금꾼들의 침입과 함께 보호구역안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말라리아·인플루엔자·결핵등 새로운 병이 발생한 것이다.현재 브라질에 사는 야노마미족의 80%가 말라리아병에 걸려 있다.이 병으로 지난 한햇동안 1백60명이 사망했다.피부병과 성병도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또 한동안 뜸하던 설사병 역시 다시 돌고 있다.
  • “군·경 구타행위 근절”/김 대통령 지시

    김영삼대통령은 3일 『문민정부시대를 맞아 과거와 같은 구타행위가 군이나 경찰내부에서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면서 『군경에서도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구타행위를 근절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박관용비서실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구타행위로 사상자가 나는등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조치하고 관련기관도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이를 숨기려 하지 말고 즉각 보고한뒤 일처리를 공명정대하게 하라』고 말했다.
  • 군·고위직 돌며 막대한 공직치부/유학성씨 사퇴까지 역정

    ◎공개만 58억원… 땅·건물 등 축소·누락/5공초엔 부정축재자 색출 지휘도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거쳐 군과 공직에서만 44년을 보낸 유학성국회국방위원장(66)이 불명예스러운 의원직사퇴에까지 이른 것은 현재 그가 보유한 재산과 축재과정때문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으면서 또 청렴을 금과옥조로 삼아야할 군과 고위공직·국회의원으로만 평생을 보낸 그가 공개한 재산은 아무리 축소하려고 애썼어도 국민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다. 평생 공직생활로써 벌어들일수 없는 규모였음은 물론,재산취득 과정마저 공직을 이용한 투기의혹이 짙다. 그가 공개한 일가족의 재산은 본인 9억5천여만원,처 4억7천여만원,장남 18억8천여만원,자부 1억4천여만원,차남 17억2천여만원,삼남 6억1천여만원등 총 58억여원이었다. 그러나 공개재산내역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공시지가축소·신고누락·특혜사례·투기의혹등 어느것 하나 일반인이 납득할만한 것이 없다. 강남구 도곡동 대지 2백56평은 공시지가가 52억9천만원인데도 신고는 11억7천만원으로 되었고,양재동 1백5평(공시지가 16억원)도 2억3천만원,대치동 38평(공시지가 9억2천만원)은 1억3천만원,역삼동 99평(공시지가 12억3천만원)은 3억6천만원,대치동 41평(공시지가 9억6천만원)은 4억6천만원,안양시 건물(거래가 56억원)은 8억7천만원,군포시 1백45평(공시지가 5억9천만원)은 1억2천만원으로 각각 축소신고했다. 이중 대치동 2곳과 양재동등 3곳에는 3∼5층 규모의 빌딩이 있으나 아예 건물분은 신고에 누락시켰다. 제주도 한림읍에 있는 임야외 4필지는 지난 88년 장남명의로 매입한 것으로 투기의혹이 짙다. 차남소유로 신고한 안양의 대지 1백80평은 82년 유의원의 처남 안모씨가 안양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체비지를 불하받은 것으로 드러나 특혜의혹을 샀다. 이땅은 이후 91년 아들3명에게 명의를 이전해 지하3층,지상10층의 건물을 지어 현재 사무실로 임대하고 있다. 그는 월남참전·군단장·육군대장등 최고의 군경력,안전기획부장·반공연맹이사장등 최고위공직,3선의원·국회국방위원장등의 최고명예를 누렸다. 그는 3성장군시절 5공출범의 계기가됐던 12·12주도세력으로 가담,군후배인 전두환·노태우두전대통령으로부터 깍듯한 선배대접을 받았다. 79년 전두환합동수사본부측이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12월12일밤 30경비단에 모인 신군부세력의 좌장으로서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7년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정승화씨가 당시 김영삼후보진영에 가담,12·12를 쿠데타로 몰아붙이자 당시 민정당의원이었던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사태의 정당성과 5공의 개혁의지를 강변했던 적도 있다. 그는 5공출범시 안기부장을 맡아 개혁과 사회기강확립의 명분으로 부정축재자를 선정,재산의 사회환원등을 유도한 바 있다.이때 부정축재자로 조사를 받은 정치인으로는 현재 민자당의 김종필대표,최형우사무총장등이 있다. 이번 재산공개때 5억원남짓의 재산을 신고한 최총장은 당시 3천7백만원의 부정축재혐의로 한달 보름간 안기부에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이때 중학교에 다니던 최총장의 자녀들은 TV·신문에 아버지가 부정축재자로 발표돼 친구들이 「아버지가 도둑이냐」는 비난을 하자 한달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민자당의 재산공개파문 수습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총장은 굳이 과거를 들추진 않지만 두사람의 인연은 역사의 아이러니로밖에 볼수 없다. 유의원은 지난 23일,물의의 심각성을 고려해 이미 정계은퇴를 결심했으나 여론에서 조금 빗겨간 26일에 결심을 밝혔다고 말했다. 유의원 자신이 직접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해 거듭 사과한다」고 말했듯이 유의원의 사퇴는 「군인정신」과 「공직윤리」 「권력의 부패불감증」등 왜곡된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유학성씨 사퇴 발표문 (전문) 본인은 이번 재산등록 과정에서 당과 지역구민,그리고 국민들에게 누를 끼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하여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새로운 신한국 건설에 매진할 시점에서 본인의 일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 의원직을 사퇴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지난 총선때 지역구민들과 약속한대로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중에 있었던바,그 약속을 지키고 조금이라도 사회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40여년간 공직생활에 헌신적으로 도와준 가족과 주위의 많은 도움을 주신분들,특히 고향지역 주민들에게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점 거듭 사과드리며 그동안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생계에서 복지까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보상정책(국정탐방)

    ◎18만 보훈가구의 실질생활 보장/무주택 4천가구 올 2백억 지원/유공자·유족 1만명에 직장 알선/병원증설·휴양시설건립 등 노후대책도 펴기로 보훈처는 61년 5·16 직후인 8월5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군사원호청」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됐다. 우리나라의 보훈제도는 국가의 존립과 유지를 위해 공헌하거나 희생한 국가유공자의 △생활안정을 위한 각종 보상지원과 △그들을 위한 예우시책으로 구분된다. 특히 보상지원은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지원하는 제도로서 보훈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처지이지만,창설 당시에는 국가재정이 빈약해 기본연금이 월5백원으로 쌀 한말이 채 되지않았다.그야말로 보훈제는 명목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후 정부는 기본연금 수준향상을 기하기 위해 80년까지는 쌀 반 가마니,85년까지는 한 가마니를 목표로 인상에 노력했다. 쌀을 기준으로 했던 것은,당시까지의 시대상황이 먹고 입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켜 왔기 때문이다. ○「원호청」으로 발족 그러나 85년 「국가유공자 예우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이후에는 보상금을 현실적으로 생계에 도움이 되는 수준으로 인상을 추진,86년부터는 도시근로자 가계비의 40% 수준을 목표로 추진해왔다. 87년 이후 기본연금은 월3만원이었으나,93년 현재는 28만2천원까지 인상되었다.장족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 공헌한 보훈대상자들은 아직 흡족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보훈처의 93년도 세출예산은 6천2백54억원.이중 87%인 5천3백70억원이 보상에 쓰여진다. 국가유공자및 유족은 현재 △애국지사 3천8백53가구 △전몰·전상군경 12만3천2백33가구 △무공·보국수훈자 4만2백48가구 △4·19혁명 희생자 1만2천4백가구등 모두 17만9천7백34가구에 이른다. 이들에 대한 주요 보상내용은 보상금 지급·교육지원·직업보도·의료지원·주택지원·대부지원사업등 크게 여섯가지로 대별된다. 이중 보상금 지급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에 대해 국가가 지급하는 금전적 보답으로,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위한 보훈제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갖고있다. 지급대상 인원은 11만5천여명.1인당 월지급액은 최저 28만여원에서 최고 1백18만여원에 이른다. ○외국보다 나은편 교육지원은 대학까지 각급학교에 재학중인 유공자및 자녀에게 공납금을 면제하고 학자금·장학금을 지급해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는데 쓰여진다. 현재의 취학인원은 4만2천여명.창설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졸업자는 45만5천여명에 이른다. 직업보도는 근로능력이 있는 유공자와 그 가족에게 직장을 알선해 생활안정을 도모케 하는 것으로 현재까지의 취업인원은 7만7천여명이다.올 직업보도계획인원은 1만명. 의료지원은 상이군경·공상공무원에게 보훈병원을 통해 의료시혜를 해주는 것이다. 보훈병원은 현재 서울 부산 광주 대구등 4개소에 있으며 이들의 병상규모는 총1천6여 베드.올해 대전에도 병원 건립을 할 예정으로 부지를 물색중에 있다.보훈병원이 없는 여타 지역들은 일반병원에 위탁가료를 시키고 있다. ○노령화추세 대비 주택지원은 집없는 보훈대상자에게 아파트 특별공급·주택구입자금및 신축자금 지원으로 주거안정을 도모케 하는 것으로 4만1천여가구가 대상이다.보훈처는 올해 4천2백여가구에 2백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대부지원은 근로능력은 있으나 취업이 부적당한 대상자에게 장기저리로 생업자금을 대부해 주거나 각종 금융자금 알선을 지원하는 것이다.대부한도는 1백만원∼1천만원에 연리는 3% 또는 6%에 지나지 않는다.올해 7천8백여가구에 3백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같은 우리나라의 보상제도는 예산상 빈약한 형편이긴 하나,다른 나라에 견주면 좀 나은 편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외국에서는 대부분 지원내용이 보상금지급·상이자 진료에 한정되고 있으나,우리나라는 부수적으로 교육·취업·대부지원등을 병행하여 미흡한 보상금 수준을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일종의 복합지원체제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앞으로 보상금의 인상은 국가재정이 허락하는 한 수준향상을 기하도록 노력하되,최소한 현수준의 실질가치가 하락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 특히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한 중상이자와 무의탁자등에 대한 보상에 역점을 두고,앞으로 점차 「보훈가족」이 노령화되는 추세를 감안해 보훈병원 증설과 휴양시설 건립등 노후복지대책에 보다 중점을 둘 계획이다. 보상금은 국가유공자및 그 유족의 희생에 대한 보은적 성격으로,어느 정도가 적정수준이냐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각각 현재와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었지만,그 당시에도 보상금 지급기준은 들쭉날쭉했다는 기록이 있다.그만큼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조직도 활대 전망 또 정부가 지난 30여년동안 보훈대상자의 생활지원과 병행해 공훈선양등 보훈이념을 확산시켜 왔으나,일반인은 아직도 보훈업무를 6·25이후 대량으로 발생한 전사상자에 대한 사후관리 기능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애로사항의 하나이다. 그리고 「원호」라는 이름 아래 생계지원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보장적 방법을 사용함에 따라,구휼이 목적인 사회정책의 일환으로 인식되는 것도 장애가 되고 있다. 생활지원 측면에서도 보상모델을 확립치 못하고 임시적 욕구 관리에 급급함으로써,경제발전과 보훈대상자의 여건변화에 적합한 능동적 대응력도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따라 정부는 보훈대상자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한편,매년 배출되는 직업군인에 대한 사회정착 지원시책도 펴나갈 방침이다. 이같은 정책추진에 따라 행정대상및 업무량이 대폭 증가하면,이에 발맞춰 보훈처 기능과 조직도 확대 개편될 전망이다. ○편견불식 따라야 또 독립운동사등을 통한 민족정기 선양시책에 있어서는 독립운동과 6·25 관련 유공자의 감소에 대비해 예우의 당위성을 계속 부각시킬 계획이다. 한편 일반국민들의 국가유공자에 대한 인식은 「국가유공자 예우등에 관한 법률」제정과 예우시책 개선으로 많이 개선되었으나,일부에서는 존경보다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계층으로 인식하는 과거 편견이 남아있어 이를 불식시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캐나다등은 보훈업무를 독자적 영역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영국·독일등 유럽국가들은 일반사회보장 부문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의 보상제도 발전에 참고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보훈정책은 국가안보와 사회보장의 한가운데 놓여진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상금인상기준 제도화에 최선”/재정난으로 충분히 지원못해 아쉬워/장귀호 보상지원국장(인터뷰) 보훈처 보상지원국장은 4계절중 봄에만 마음이 가장 넉넉하다. 예산안 편성에서 확정단계에 이르기까지 보훈대상자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저희들로선 18만여 가구에 이르는 국가유공자및 그 유족분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는게 소망입니다.그러나 국가재정이 어려워 수준향상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울산생인 장귀호국장은 투박한 사투리를 쓰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댄다. 보훈처 올 세출예산중 87%나 되는 5천3백여억원을 집행하는 주무국장으로서,그의 고민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난달 직제개편에 따라 보상지원국에 온 이래 일찍 귀가해본 적이 드물다.업무파악을 못해서가 아니다. 경제기획원에 「구걸」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보상예산을 많이따내는 궁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매년말 예산국회 때도 마찬가지다. 정부내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예산확보 때문에 공무원들은 1차로 기획원이 무섭고,2차론 국회가 두려운 것이다. 더욱이 광복회관에 세들어 있는 보훈처는 코앞에 국회의사당이 있어 직원들은 항상 오금이 저린다. 『보훈처가 창설된 이후 30여년동안 보상지원 수준이 많이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지원을 받는 입장에선 아무래도 미흡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죠.그점이 저희 보훈처 직원들의 고민이랄 수 있습니다』 기획원이나 국회가 무섭긴 하지만,보상지원국장이 그보다 더 무서워 하는 사람은 보훈대상자들이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에 공을 남긴 「그 분들」이,보훈처를 향해 『실질적으로 공무원 봉급인상 수준에도 못미치는 지원액을 따내면서 매번 국가재정만 들먹인다』고 힐책하기 때문이다. 지난 75년 제16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줄곧 보훈처에서만 근무해온 장국장은,「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순국선열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런 희생이 우리들과 우리의 자손들에게 숭고한 애국정신의 귀감으로 항구적으로 존중되고,그에 대응하여 유공자와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된다」는 보훈이념을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보상금의 획기적 수준개선은 어렵다고 보여집니다.그래서 저희는 매년 보상금 인상과 관련해 대상자와 예산당국간의 불필요한 행정력과 시간소모등 문제점을 개선키 위해 보상금 인상기준에 관한 사항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입니다』 장국장은 그같은 기준설정은 당연히 물가등 사회지표와 연동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라가 발전할수록 보훈업무 영역도 넓어질 것』이라고 내다본 그는,또다시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1)

    ◎소년시절:22/강반석의 「반일부녀회」 결성설/26년 12월18∼19일 마적단 대약탈/“26일 여성단체 결성” 못믿을 주장/아들 우상화에 어머니까지 “악용”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ㅌ ㄷ」과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한 경험에 토대하여 그의 모친 강반석을 도와 1926년 12월26일 「반일부녀회」를 결성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강반석은 남편 김형직이 죽은 후 「혁명투쟁」의 길로 나가 무송 도처에 야학을 세우고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면서 그들을 혁명화했다는 것이다.그는 이러한 주장을 68년 전기부터 하고 있다. ○야학까지 개설 강변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하여서는 모친도 그냥 두지 많는 위인이다.그는 무송에서 당시 있지도 않았던 「새날소년동맹」을 날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친까지 동원하여 26일에 부녀회를 결성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1주일 전인 18일과 19일에 무송현성은 무려 5백명이나 되는 대련합마적단에 유린당하였다.1920년대는 만주 일대에서 마적이 창궐을 극한 시기였지만 그들의 이무송현성 습격은 그중에서도 최대라 할 수 있는 대겁략이었다. 당시의 마적은 지방 경찰이나 자위단 따위를 무색케 할 정도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하나만 예를 들면 22년경의 부두목 강괴무(천중앙)는 돈화현 사하장의 수림지대에서 4백50명의 부하를 데리고 기관총 4정을 포함한 총기 4백80정,총검 3백개,수류탄 1백개,탄약 13만 5천발을 가지고 있었다.1명당 3백발이나 탄약을 가진 이 마적떼는 대지 5백평이상 되는 곳에 큰 병사를 두채나 지어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적떼는 26년 경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5백명이나 되는 연합마적단이 무송현성의 상점을 3분의1이나 불사르고 재물이란 재물은 몽땅 가져갈 뿐 아니라 퇴각한 후에도 볼모로 잡아간 자의 일가친척들에게 온갖 요구를 다 내놓고 있는 이 때에 강반석은 별스럽게도 「반일부인회」란 공산주의 유사 단체를 결성했다는 것이다. ○명부작성 어불성설 거리에서는 치안을 회복하려고 중국군경이 분주하게 설치고,마적의 방화로 집이 불타서 쫓겨난 사람들이 백두산 북쪽 기슭의 차디찬 칼바람에 떨면서 불탄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판이었다.마적 습격 1주일 후 같으면 사상자를 낸 가족들의 통곡도 그치지 않았을 것이고 남편이나 자식을 납치당한 부인들이 마적에게 넘겨줄 재물을 구하는데 동분서주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 북새판에 유독 강반석만은 어디에서 한가한 여성들을 데려왔는지 부인회를 조직하고는 다음과 같이 한가해도 한참 한가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전기에 의하면 그는 여성의 해방과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자고 해놓은 후 회원명부의 작성에 들어갔다. 「강반석녀사께서는 매 사람의 이름을 물어시었다.그러나 자기 이름을 주저없이 선뜻 부르는 여성이 몇몇 안되었다.그것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긴 해도 여자라는 죄 아닌로 하여 아름다운 이름조차 못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반석 전기는 68년부터 수종류 발간되고 있는데 여기 인용한 것은 80년판이다.전기로서는 갈고 닦아서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우상화되어 있는 책인 셈인데도 반일부인회에 관한 글이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명부작성 작업은 마적떼가 덮치고 간 직후라는 난리북새통을 생각하면 경황에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는다. 당시의 마적 규율 속에는 여자를 겁탈하지 않는다는 1항목이 있었다.그러나 이 규율이 1백% 지켜질리가 만무했고 크고 작은 봉변은 수두룩 하였다.이외에도 부녀자들은 금품을 강탈당하고 혈육이 피살되고 집이 불타고 납치당한 가족들의 안부를 알 수가 없어서 벌벌 떨면서도 마적단에게 온갖 치다꺼리를 다 해야했다.이러한 비참한 처지에 놓인 부인들이 과연 이름같은 것에 신경쓰고 있을 틈이 있겠는가 말이다. ○날짜 조정 엄두못내 따라서 「반일부인회」도 마적떼가 무송을 습격한 당시의 참상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김일성만이 할 수 있는 날조로 밖에 되지 않는다. 필자는 평전에서 나의 논문으로 당시의 마적습격 사실이 북한에 알려지더라도 전기의 허구성으로 하여 김일성이 설정한 반일부인회 결성날짜는 바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을 보니 85년의 필자의 주장대로 그들은 역시 그 날짜를 재조정할 엄두도 못내고 있다. 대신 김일성은 전에 없던 1절을 설정하여 정의부계통의 유명한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이 당시 강반석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그와 독립운동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관린이 반일부인회 결성을 도왔다는 명시적인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이 점으로 보아 그는 80년대 후반에 평양에 돌아와서 잠시동안 김일성의 이용물이 되었지만 「반일부녀회」를 강반석이 결성했다는 그의 주장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①평전 93면 ②「조선의 어머니 강반석여사」 근로단체출판사간 252면 ③평전 98면
  • 국회통과 8개 법안 내용

    국회는 23일 하오 본회의를 열어 정부조직법개정안등 8개법안을 통과시켰다.이날 통과된 법안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생활체육을 육성하고 청소년보호 육성사업을 실효성있게 추진하기 위해 문화부와 체육부를 통합하여 문화체육부를 신설하고 체육청소년담당차관보 1인을 둔다. 국내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산업발전의 기반확충을 위한 업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동력자원부를 상공부와 통합한다.에너지확보문제는 국가의 산업정책과 직결되어 있는 중요한 과제이므로 에너지 확보정책을 효과적이고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상공부를 상공자원부로 한다. ▲국회법개정안=동력자원위원회를 폐지하여 상임위원회 수를 현행 17개에서 16개로 조정한다. 교육체육청소년위 문화공보위 상공위를 각각 교육위 문화체육공보위 상공자원위로 하고 교육위는 교육부·문화체육공보위는 문화체육부및 공보처·상공자원위는 상공자원부소관사항을 각각 다룬다. ▲고엽제(고엽제)후유의증환자 진료등에 관한 법안=월남전에 참전하고 전역된 자로서 고엽제로 인한 질병을 얻은 자및 고엽제로 인해 발생됐다고 의심되는 질병을 얻은 자로서 등록된 자를 적용대상으로 한다.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에 대하여는 국가유공자처우등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의한 전상군경 또는 의료보호대상자로 보아 보상을 행하거나 의료보호를 행하도록 하며 질병에 대한 진료가 끝날때 까지 계속하여 진료를 행하도록 한다.이법의 유효기간은 97년 12월31일까지로 한다. ▲변호사법개정안=변호사단체의 자율정화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현재 법무부가 소장하고 있는 변호사징계권중 변호사법위반사건및 회칙위반사건등 일부를 대한변호사협회에 이관한다. 변호사에 대한 업무정지명령제도의 미비점을 보완,업무정지명령의 사유 절차 기간 불복방법 해제등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고 공증제도의 정비를 위해 현행 간이절차에 의한 민사분쟁사건처리특례법 규정을 변호사법에 흡수하고 아울러 일부 벌칙규정을 신설하여 법조공익기능을 높인다. ▲검찰청법개정안=고등검찰관과 검찰관은 처우의 기준인 호봉체계가 동일하고 법원의 경우 고등법원판사 승진제도가 폐지됐으므로 검사의 직급중 고등검찰관과 검찰관을 검사로 통일하여 법관과의 균형을 유지하고 공무원임용령의 개정에 맞춰 이 법중 기술직공무원의 직급명칭을 변경한다. ▲주택건설촉진법개정안=사위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주택을 공급받거나 받게한자에 대해서도 주택건설촉진법의 벌칙인 2년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이하의 벌금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한다. ▲해운업법개정안=내항여객운송사업의 운임및 요금을 현행 인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하고 내항화물운송사업의 운임을 현행 인가제에서 사업자가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해 해운서비스및 기업경영개선의 여건을 조성토록 한다. 해상화물운송주선업등 해운관련업에 외국인이 투자하는 경우 인가를 받아 제한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던 것을 완전개방한다. ▲도로법개정안=자동차 수의 증가및 산업의 발달로 인해 도로교통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도로의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도로건설과 관련된 행정절차를 간소화한다. 도로시설물의 관리를 강화해 도로의 안전을 도모하는한편 불법행위에 대한 벌칙을 상향조정하는등 도로의 관리·운영에 관한 현행 제도의 일부 미비점을 개선 보완한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9)

    ◎소년시절:20/무송의 「새날소년동맹」/“모임 결성했다” 주장하는 26년 12월/무송지역에 김일성 간적조차 없어/마적단의 잦은 약탈 전기에 언급안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후 길림으로 가기 위한 준비로 모친 강반석이 있는 무송에 돌아 갔고 거기서 26년 12월15일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해 가을쯤부터 사실은 봉천(심양)의 평단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당시 중국 동북의 중학교들에서는 8월24일부터 12월20일까지가 제1학기 전기수업기간이었다.따라서 북한의 주장을 따르면 평단중학교에서도 그는 1학년 1학기 도중에 학업을 버리고 있는 것으로 된다. ○봉천 평단중 재학 그러나 그는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한 일은 전혀 없었다. 26년의 안도·무송지방은 아래에 든 예와 같이 마적의 발호가 극심하였다. 전인의군과 마적 2백명이 무송·안도지방을 약탈하고 돌아다녔다. 함경북도의 경관 11명이 월경하여 안도까지 마적을 추격하였다. 봉길연합토벌대가 무송·화전방면으로부터 마적단을 공격하여 그들을 안도의 수림지대에로 압박하였다. 안도의 십오리지방에서 대두목 왕홍태가 중국군과 교전하여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목 양광이하 1백50명의 마적이 안도현 양강구를 습격했다. 두목 점구주와 마적 80명이 안도현 고동하를 습격했다. 김일성은 이렇게 치안이 억망이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무송·안도지방에서 하필이면 「공산주의」소년조직을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소년동맹」의 결성날짜를 12월15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것이 완전한 날조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틀간 대규모 습격 안도·화전 현계지방에 분산행동중인 마적두목 양광,협해,점구주,상산호,남협등 연합마적단 약 1백50명과 유하,몽강 양현지방에서 행동중인 철뢰,사해,흑용,천순,신호산,양래호,점동 등이 거느리는 약 2백명의 마적단은 12월18일 하오5시쯤 돌연히 무송현성을 습격하여 방화를 했다.그리고 성내 경비군·경은 패퇴하여 보위단·경찰측의 사자 약 40명,관민의 사상자 약70명,가옥소실 약1백채에 달하고 또 경찰서장,학교생도 40명,성내 상인 20명이 납치됐다. 마적단은 19일 하오2시쯤 차마를 징발하여 약탈품을 탑제하고 무송현 서북 몽강현 방면으로 퇴거했다.」 이 기록은 북간도 연길현의 일본 경찰관이 안도현 지사로부터 들은 말이다.여기서는 연합마적단의 합계가 3백50명으로 되고 있지만 후에 정리한 바에 의하면 그 총수는 약 5백명이었다.또 이때 무송현지사는 호위병을 데리고 성외에 도피하였고 성내의 관공서,상가의 3분의1이 소실되었다. 무송현성 인구는 당시 이 지방을 여행한 일본 지리학자 야마다(산전구태낭)에 의하면 호구 7백,인구 2천8백정도였다 한다. 그런데 26년 12월에 5백명이나 되는 대규모 마적단이 7백호정도 밖에 집이 없었던 이 무송현성을 습격하였다.이 습격에 대항해야 할 군경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후는 현성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마적단은 18일 상오 5시부터 현성에 있었을 뿐 아니라 하루 밤을 거기에서 지내고 다음날 하오2시에 모든 약탈품을 수레에 싣고 유유히 퇴각하였다. 이것은 마적의 소굴이었던 당시의 무송·안도지방에서도 미증유의 약탈이었다.곳곳에서 일어난 화재는 이 도읍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마적들이 겁탈과 약탈을 감행하는 와중에서 당하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이 주민들의 폐부를 찔렀다.7백호 중에서 재물이 있는 집을 가령 2백호 정도라고 하면 어느 집이나 2∼3명의 마적들이 총을 들고 밤새도록 털고 털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12월15일에 결성했다는 「새날소년동맹」이야기에는 「결성」된지 불과 3일 후에 있었던 이 참사가 「없었던 것으로」되어있다.이 이야기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마적의 「마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주의 단체의 것이건 공산주의 단체이건 간에 소년단이란 조직이 무송현성에서 결성되었다면 그후 3일만에 터진 마적단의 무송 습격에 대하여 김일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그리고 그러한 소년단이 있었다면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불타다 남은 집을 치우고 주민을 돕고 하다못해 피난가는 사람들의 짐 하나라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의 모든 전기에는 그런 일을 했다는 서술은 단 한 줄도 없다. ○당시 정황과 불일치 따라서 이런 전기들은 거꾸로 김일성이 무송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그는 26년 12월 중순에는 무송지방에는 없었다. 당시 김현직이 사망하여 강반석과 김형권 그리고 김일성의 두 아우 밖에 없었던 무송의 약방도 마적단의 호개의 겁략 대상이었을 것이다.그러나 늙어서 잊어버린 탓인지 김일성은 자기 집이 이때 노략당했다는 것도 회상하지 못하고 있다.그만큼 당시의 무송지방에 대한 그의 기억은 희미한 것이다. ①평전 94면 ②평전 95면 ③만몽도읍전지 참조,평전 95면
  • “실천행정·칼날사정” 자신감의 선택/차기 총리­감사원장 인선 배경

    ◎당정 효율협조·경제 실무경험 반영/총리/공직·사회·경제전반 정화임무 부여/감사원장 김영삼차기대통령이 차기정권의 3대핵심포스트인 국무총리·감사원장·청와대비서실장 인선을 완료함으로써 김차기대통령이 그리는 국정운영구도에 대한 윤곽이 드러났다. 김차기대통령이 22일 국무총리에 황인성 민자당정책위의장을,감사원장에 이회창대법관을 지명한 것은 무엇보다 경제회생과 부정부패척결을 차기정권의 최우선 과제로 꼽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황총리가 이끄는 내각에는 경제회복및 개혁집행을 담당토록하고 이감사원장에게는 공직및 사회·경제전분야에서 개혁추진을 저해하는 부정부패요소를 과감히 척결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황총리내정자는 3공부터 6공에 이르기까지 군과 정계·재계·관계에서 폭넓은 행정실무경험을 쌓아왔다. 특히 육군경리감·교통·농수산장관·아시아나항공회장·민자당정책위의장등 경제실무분야의 화려한 경력은 김차기대통령이 경제회복에 얼마만큼 신경을 쓰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동안 화합형총리·덕망가형총리등 총리인선에 대한 각계의 요구사항도 많았지만 결국 김차기대통령의 선택은 경제실무와 행정효율이라는 실무형총리로 낙찰된 것이다. 황총리지명은 우선 경제회복에 최우선과제를 부여했다는 점 이외에도 김차기대통령은 황총리내정자가 지역구 3선의원이라는 점과 민자당정책위의장으로서 차기정부의 정책공약입안자라는 점,덧붙인다면 호남출신이라는 점을 부수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황총리내정자가 호남출신이라고는 하지만 3공시절부터 정부요직을 지냈다는 점이 화합형 호남총리나,개혁을 내세우는 참신한 기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김차기대통령의 황총리내정배경에는 황총리가 호남지역출신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지역민과 민심의 향배를 읽을 수 있고,또 당출신으로서 개혁추진에 대한 당정협조에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총리내정자가 경제실무행정전문가로서 6공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왔고 김차기대통령이 주장해온 경제재도약을 위한 고통분담에 대해서도 상당히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발탁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감사원장의 지명은 김차기대통령이 부정부패척결을 통한 「윗물맑기 운동」을 실현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불수 있다. 이감사원장내정자는 법조계에서 신념이나 판결에 있어서 타협을 불허하는 강직과 지조의 법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강직한 성품때문에 통치권자와 마찰이 있을수도 있다는 주변의 지적도 물리치고 김차기대통령이 이대법관을 감사원장에 발탁한 것은 김차기대통령 자신도 강조했듯이 「사정기관에 대한 사정」에 있어서는 성역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이감사원장내정자가 그동안 권력과 유착한 판결을 거부해왔고,88년 민화위위원으로서 광주문제에 대한 소신을 강조한점,중앙선관위원장 재직시절 동해재선거의 타락에 경고성의미로 사퇴한점 등이 향후 김차기대통령이 사정의 칼날을 얼마만큼 서슬푸르게 할 것인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일단 김차기대통령은 내각의 총수에 경제실무형에다 지역성과 당정관계를 고려한 인사를 발탁했다.또 감사기관의 총수로는 타협할줄 모르는 강직한 인사를 기용했다.여기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는 지역구 4선의원을 지역구까지 포기토록하며 인선했고 수석비서관들은 격과 관계없이 전원 실무보좌형으로 구성했다. 드러난 차기정부 핵심요직인사로 볼때 김차기대통령은 주변에서 고려대상으로 지적하는 「화합」「지역안배」「새인물」이라는 기준보다는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경제회복과 부정부패척결」을 수행할 것인가에 중점을 둔것이 틀림없다. 물론 개혁사령탑이자 통치권자인 김차기대통령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인사스타일에는 틀림없지만 비효율적인 안배보다는 실천과 성과에 국정운영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수 있다. 차기정권출범 이후 드러날 각료인선에서도 이같은 김차기대통령의 의중으로 미루어 볼때 무엇보다도 외교·경제분야에서는 행정실무형이,사회분야에서는 국민적공감대를 유도할수 있는 정치인출신이 기용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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